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87)
검은 머리 영국 의사-487화(487/505)
487화 자유 [2]
어명은 허무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우리가 충의를 모르는 천하의 불상놈들이라서는 아니었다.
이미 우리 왕께서 우리의 정당한 치료에 대해 쓸데없이 불만을 토로했던 적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그랬다.
아니…….
상식적으로 진료나 검사가 불편하지, 그럼 편하겠나?
21세기 병원에만 가도 어? 코나 귀에 내시경 찔러 넣고 석션 하고 하면 불편하잖아.
“이, 이것들!”
당하는 입장에서는 21세기에 아직도 이 지랄들을 하고 있나 싶겠지만…….
놀랍게도 어마어마하게 개선된 게 그거다.
일단 그렇게 얇은데 조직 안에서 부러지지 않을 거란 강한 확신을 주는 쇠기둥을 만들어 내는 거부터가 도전이던 시절이 있단 말이다.
심지어 거기에 불도 달렸는데 카메라까지 있어?
솔직히 기적이었다, 그건.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 이렇게 절절하게 실감이 날 줄은 몰랐다.
“아, 좀 가만히 계셔 봐요.”
“쇳덩이가 있는데 어떻게……!”
“엄살은…… 주무실 거라니까요?”
“내, 내가 소문도 안 듣고 사는 줄 아는가? 자네가 경찰서 앞에서 산 채로 고문했다는 거 다 들어서 알아!”
“아, 그 결과로 완성된 겁니다, 이게. 그리고 제가 폐하를 대체 왜 해칩니까?”
“으아아아!”
할 말이 없으니까 소리 지르는 꼴 좀 봐라.
왕한테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진짜 개같이 추하다.
근위병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딱히 가까이 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근위대장은 명색이 대장이니 오기는 와 있었다.
“경고 주신 것처럼 저항이 심하시네요.”
딱히 왕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기 위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염장 지르나 싶을 거다.
실제로 왕께서는 대장을 노려보고 있다.
그래 봐야 별 소용은 없다.
리스턴이 예의 바르게 그러나 확실히 제압하고 있으니까.
대체 예의 바른 제압이 뭔가 싶을 텐데…….
이게 느낌이라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으아아!”
끼리릭.
하여간, 왕께서 입을 벌린 틈을 타서 앨프리드가 가스 밸브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가스가 하릴없이 새어 나와 폐하의 호흡기 내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건 영국 국왕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이라 해도 잘 수밖에 없다.
사람인 이상 버티면 안 되거든.
게다가 국왕께서는 수면 마취에 당하는 게, 아니 임하는 게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으으…….”
슈우우.
“음, 으음.”
저번처럼 끼무룩 잠이 드셨다.
근이완제까지 쓰는 본격적인 마취는 아니었기 때문에 호흡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터였다.
물론 무턱대고 내깔겨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뭐가 되었건 왕이니까.
‘뭐…… 지금 죽어도 호상이긴 해?’
빅토리아 여왕이 더 잘 다스릴 거 같은 느낌도 있다.
아니, 반드시 그렇긴 할 거다.
애초에 유럽의 할머니니 뭐니 하는 얘기가 괜히 나왔겠나.
오래 살았고, 애도 많이 낳은 데다가 19세기 유럽 분위기상 여기저기 다른 왕국으로 가서 왕족이 되었으니 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윌리엄 4세는 여기 와서 처음 들어 본 데 반해 빅토리아 여왕은 빅토리아 시대를 연 장본인 아닌가.
‘아니, 그래도…….’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이거 지금 국왕 조금이라도 더 살려 보려고 하는 짓 아닌가.
검진하면서 호상이니 뭐니 하고 있다니…….
나도 참…….
19세기 영향을 너무 세게 받은 거 같다.
“잘 봐! 호흡 놓치지 말라고!”
“네? 아…… 네.”
미안한 마음에 만만한 앨프리드에게 성을 냈다.
그러곤 아까부터 왕께서 쇳덩이라고 매도했던…….
그래, 쇳덩이지.
그걸 들어다가 국왕의 목구멍에 넣었다.
일부러 아침 먹기 전에 왔기 때문에 기껏해야 물이나 들어 있을 터였다.
사실 하인들에게 미리 말을 해 놨기 때문에 별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이 시기 왕족이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인간들이지.’
귀한 신분이라고 하면 무조건 좋은 줄로만 알겠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아, 뭐…… 19세기 노동자보다야 훨씬 낫긴 하겠지만 21세기 기준으로 보면 안 좋은 면도 있다는 얘기다.
뭐랄까…….
너무 좀 오냐오냐하는 게 지나치다 보니 속박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나마 동양의 전제 군주들보다는 사정이 낫기는 한 거 같지만 윌리엄 4세 보면 여기도 만만치 않다.
지이익.
식도를 따라 쇳덩이를 넣었지만 역시나 마주치는 음식물은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몰라도 윌리엄 4세는 부엌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양반 아닌가.
쭉쭉 밀어 넣었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 속도를 내는 것 같겠지만, 19세기 광원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아무리 가스등을 들고 죽어라 비춘다고 한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후…….”
그나마 식도만 지나면 위다.
그리고 위는 내가 일부러 찢으려고 굴지만 않으면 대개 괜찮다.
19세기인의 위는 21세기인의 위보다 훨씬 질기고 단단해서 더 그렇다.
아무래도 먹는 음식이 훨씬 질기다 보니 단련이 되는 모양이다.
“불.”
“네.”
네 지시에 따라 콜린이 불을 조금 조정했다.
그런다고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거나 하진 않았다.
아까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그게 어디냐 싶은 상황이었다.
정말…….
수십 센티의 좁다란 관을 통해 불을 비추고 위의 점막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을 넘어서 곤욕이거든.
‘어차피 조기 위암은 못 잡는다…….’
큰 거만 걸려라, 이런 거다.
이럴 거면 검진을 무턱대고 할 것이 아니라 속이 쓰리거나 하는 사람만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데…….
암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은 게 문제다.
속이 암 때문에 쓰리잖아?
그럼 21세기에도 살리기 어렵다.
조기 위암과 말기, 그 어딘가에 있는 상태에서라도 발견을 해야 뭐라도 해 볼 수 있다, 이 말이다.
“휴…….”
다행히 왕의 위는 대강 깨끗해 보였다.
뭐 100%라고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설령 조기 위암이 있다고 한들 지금 나이가 72세라는 걸 감안하면 다른 이유로 돌아가실 가능성이 훨씬 커 보인다.
해서 나는 나름 만족한 얼굴로 기둥을 제거했다.
그러자 앨프리드가 가스 밸브를 잠그고 왕을 깨우기 시작했다.
“으…… 으으…….”
아마 목이 아프긴 할 터였다.
조심한다고 하긴 했는데…….
솔직히 쇳덩이를 꽂았는데 안 아프겠어?
뭐 위나 식도는 감각이 약하니 그렇다고 쳐도 목구멍의 입구는 아플 거다.
“뭔…… 뭔 짓을.”
“검진한 겁니다, 검진. 속이 아주 깨끗하세요.”
“속이……?”
아프면 대개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약간 아닌 경우도 있긴 했지만.
특히 어르신들은 아파야 뭔가 했다고 여기는 편이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화신 서양인들은, 그중에서도 왕은 평소에 아파 볼 일이 없지 않겠나.
화가 잔뜩 난다, 이 말이다.
‘뭐…… 방법이 없는 게 아니지.’
그럴 땐 이 통증을 감당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납득시켜 주면 된다.
“네, 방금 쭉 봤습니다.”
“네, 몸속을?”
“네. 다 봤죠.”
듣다 보면 뭐지 싶을 거다.
내가 본 건 식도와 위뿐이니까.
21세기인은 절대 속일 수가 없다.
애초에 저 쇳덩이가 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해부학적인 구조를 대강이나마 알고 있는데, 이런 구라는 절대 치면 안 된다.
하지만 19세기인은 충분히 속일 수 있다.
“허어…… 내 안을 다 봤다고?”
“제가 누굽니까.”
“피영시인이지…….”
“네, 깨끗합니다. 건강하십니다, 폐하는.”
무엇보다 최소 1년은 못 볼 사람 앞에서는 무슨 말이든지 해도 된다.
어차피 조기 검진이니 뭐니 하는 것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는 시대 아닌가.
한 6개월 뒤에 돌아가셔도, ‘아…… 김태평이 있었다면 살렸을 텐데!’ 하면서 안타까워나 할 거다.
그것도 그렇게 오래는 안 할 공산이 크다.
이미 후계 구도 단단하고 본인도 장수한 편인데 뭘.
“그…… 하하. 역시 티에피영이구만.”
아까까지만 해도 뭐 쇳덩이네 뭐네 하더니 건강하다고 하니까 좋아하고 있다.
여한이 없다고 했던 거 생각하면 약간 심술이 날 정도지만…….
원래 사람은 다 이렇다.
‘당신 건강하고 문제없네, 당분간 병 걸릴 염려 없겠어!’라는 말을 나처럼 권위 있고 유명한 의사가 하는데 기분 나쁠 놈이 어디 있겠나 상식적으로.
특히나 언제 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나이가 든 노인이라면 기쁨은 배가 되기 마련이다.
-하하하! 우리 아들이 효자네.
-우리 아들밖에 없지!
그렇게 뜨거운 효자 취급을 하던 우리 부모님도 내게 건강함 표식을 받자마자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하. 과찬의 말씀입니다.”
“그래, 그래. 내 자네 가는 길에 불편함 없도록 배려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니 걱정 말게나.”
왕의 덕담에 나는 그저 웃었다.
이 정도야 뭐, 먼 길 떠나는 충신에게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지 않겠나.
헌데 왕의 기분이 내 예상보다 더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팔뚝을 걷어붙이더니만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교회 좀 다녀본 친구라면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이것이 그 유명한 안수 기도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것은 왕의 기도라는 점이다.
“축복하겠네.”
“앗. 영광입니다.”
나는 즉시 무릎을 꿇었다.
지금이야 좀 빛이 바랜 감이 있지만…….
18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결핵에 걸리면 왕의 기도 한번 받아 보려고 사람들이 줄을 그렇게 섰다고 들었다.
왕은 신께서 세운 권위자이고 그에게는 당연히 신의 대리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그런 부류는 아니지만 괜히 여기서 신념 앞세우면서 좋은 그림 망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다.
“리스턴, 자네도.”
“네, 폐하.”
해서 얌전히 기도를 받았다.
리스턴도 얼떨결에 받게 되었다.
형님이야 아직 골수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런 주제에 항해를 앞두고 부적도 사고 하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왕의 축복까지 받은 채 밖으로 나왔다.
원래도 그럴 만한 무엄한 놈은 없었겠지만, 이제야말로 절대로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다.
이 시기 기도란 실제로 예언의 힘을 갖기 때문이다.
왕이 축복을 해 주었는데 여행에서 날 힘들게 해?
그럼 그놈은 사탄이다.
주님의 행사를 방해한 거니까.
“후후후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리스턴도 그런지 덩달아 껄껄 웃었다.
제자들은 그런 우리를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 * *
“후후후후.”
멀어져 가는 김태평과 리스턴을 보며 윌리엄 4세도 웃었다.
드디어…….
자유라서 그랬다.
“시종장!”
“네, 폐하.”
“저것들 출항하면 바로 소불알부터 맞겠네. 원장 불러.”
“네, 폐하. 헌데…….”
“헌데는 무슨 헌데. 이번에는 저주를 안 걸었잖아! 그러라고 기도도 한 거야.”
“아하, 역시 심모원려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막살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