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89)
검은 머리 영국 의사-489화(489/505)
489화 일본 [2]
메이지 유신이 언제인지 아는가?
나는 놀랍게도 거의 정확히 알고 있다.
1868년에 시작된다.
의대 다니느라 의학만 공부한 무식한 놈이 어떻게 아냐고?
사실 아편 전쟁과 같이 더 굵직한 역사라 볼 수 있는 것도 정확히 언제 발생했는지 모르는 주제에 이걸 안다고 선언한다는 게 이상한 일이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바람X 검신>을 봤지.’
만화책에서 봤다.
미친놈인가 싶겠지만, 의외로 만화책이나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생각보다 많지 않나.
그리고 그런 지식은 신기하게 잘 잊혀지지도 않는다.
다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난 그렇더라고.
‘지금이 한참 전이란 거야. 그 말은…… 지금 협정 대상은 곧 나가리가 된다는 뜻이겠지?’
물론 지식이 얕긴 하다.
만화책 보고 안 건데 오죽하겠냐.
심지어 <바람X 검신>은 배경이 메이지 유신 자체가 아니라 한참 지난 후의 이야기다.
아, 씹덕처럼 혼자 떠들었네.
대강 설명하자면 발도재라는 최강의 검객이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고 새 시대를 살아가면서 여전히 남아 있는 부조리를 검술 하나로 해결하는 내용이다.
썩 재밌으니 안 봤으면…… 부럽네.
‘안 본 눈 삽니다’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티에피영 경.”
“아, 네.”
“저 앞이 에도입니다.”
“에도라.”
도쿄가 눈앞에 있다는 얘기다.
한국이 워낙 일본과 가까운 데다가 나 학생 때 배낭여행이 유행이어서, 도쿄는 한번 가 본 기억이 있다.
대부분은 유럽으로 갔는데 나같이 돈이 없거나 혹은 부모님의 방침이 돈을 안 대 주는 쪽인 경우에는 일본으로 가기도 했다.
생각보다 일본이 남북으로 길기도 하거니와 그때만 해도 일본 여행이 지금처럼 엄청 활성화되어 있던 땐 아니다 보니 나름대로 배낭여행의 맛도 있었더랬다.
‘당연한 소리지만…… 엄청 다르구만.’
하여간, 내가 봤던 도쿄랑은 아예 다른 형태의 에도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래도 나름 고층 빌딩들이 즐비했고 오다이바같이 이쁜 신도시도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그냥 뭐…….
목조 건물만 죽 있는 거 같다.
애매하게 말하는 건 제대로 보이는게 없어서 그렇다.
“원래는 이쪽으로 가면 안 된다고 했었는데…… 그냥 왔습니다.”
“시모다? 거기로 들어오라고 했었다고 했죠?”
“네. 티에피영 경이 아니었으면 엄청 돌아올 뻔했습니다. 저희는 에도라는 곳이 항구인지도 몰랐어요.”
“놈들이 말을 안 했으니 당연한 일이죠. 상식적으로 남의 나라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아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말했죠? 조선에서는 일본을 왜놈이라 부릅니다. 믿기 어려운 해적 놈들이란 뜻이죠.”
“든든합니다. 정말이지, 티에피영 경 같은 분이 대영제국에 계신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엄밀히 말해 에도는 현재 일본의 수도다.
아니, 나중에도 수도인데…….
생판 남인 놈들을 곧장 수도로 끌어들이는 건 미친 짓이긴 하다.
그러니 멀리 떨어져 있는 시모다인지 나발인지 하는 곳으로 오게 한 건데…….
‘왜 굳이 그래야 하지?’
영국 애들은 생각보다 유약한 모습을 보였더랬다.
여기저기 식민지를 경영하다 보니 마음이 약해진 건지 아니면 나름대로 노하우가 생긴 건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일본에 대한 이해도가 좀 떨어지는 거 같다.
일본은 강하게 나가야 된다.
게다가 지금의 막부는 개판일 것이 분명하거든.
그게 아니었으면 반란이 성공했을 리가 없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시간이 꽤 흐르고 난 다음이겠지만…….
지금처럼 외국 놈들이 수도로 쳐들어오듯 와서 개항을 요구하는 꼴을 보면 반란군들의 민심이 동하지 않겠어?
뭐 이런저런 계산하에 우리는 곧장 에도로 돌진하고 있었다.
‘뭣보다 우리가 제일 센데 왜 양보를…… 해야 하는 거지?’
더군다나 대영제국 해군은 세계 최강이잖아.
그냥 입으로만 떠드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특히 이곳…….
동아시아 해양에서는 감히 덤빌 수 있는 해군은 없다고 봐야 한다.
한때 인류의 주인을 참칭했던 청나라 해군이 그토록 비참하게 박살 났다는 걸 일본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돌연 마음을 바꿔 공격을 해 온다 해도 걱정은 없다.
리스턴이 있잖아.
발도재니 뭐니 해도 리스턴을 이길 수 있을 거 같진 않다.
‘최악의 경우엔 니혼진 데스 해야지 뭐.’
게다가 난 한국인이다.
생긴 걸로는 구분이 안 간다, 이 말이다.
대강 몸 숨겨서 있다가 나중에 대영제국 형님이 복수하러 왔을 때 다시 가면 되지 뭐.
뿌우우우.
그런 못된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배가 에도항에 거의 다다랐다.
근처에 있던 작은 배들을 헤치면서였다.
당연하게도 우리 배 하나만 온 게 아니라 군함 세척과 함께 온 것이었기 때문에 항구는 곧 꽉 차 버렸다.
에도에서는 이런 구경이 처음인지 아니면 그냥 할 게 별로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항구엔 상당히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저기 옷 벗고 있는 사람들은 노예인가?”
그중에는 훈도시만 입고 있는 이들도 꽤 있었다.
리스턴이 그런 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뭐…….
이건 무례한 서양인이라고 매도하기엔 좀 무리가 있단 생각이 든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보고 있으면 당연히 노예가 떠오르지 않겠나?
대영제국에는 적어도 노예는 없다 보니 우월감도 있긴 할 거다.
“아, 아뇨. 저건 훈도시라고 이들의 전통 옷 중의 하나입니다.”
“저게…… 전통 옷이라고?”
“제가 그랬잖아요. 아무래도 조선이나 청과는 많이 다른 풍습이 있는 곳입니다.”
“거참…… 황당하구만. 근데 혹시…….”
“여자들은 훈도시만 차진 않을 거 같네요.”
“그건 아쉽네.”
리스턴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싶나 싶을 수도 있을 텐데, 리스턴은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다.
‘미친놈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바로 본 거다.
미친놈이다.
그러나 뭐라 할 수는 없다.
19세기는 미친놈들이 아니면 꾸려 나갈 수 없는 시대라서 그렇다.
“자네도 눈에 불을 켜고 잘 찾아보게.”
“전 일본인이 아닌데요.”
“아, 그렇지. 근데 생긴 건 비슷하게 생겼는데……?”
“말이나 풍습은 완전히 달라요. 조선은 일단 저런 거 안 입습니다.”
“다 비슷한 거 아닌가……?”
“영국하고 프랑스랑 똑같은 나라 아닌가? 하는 거랑 같다고 보면 됩니다. 엄청난 결례예요.”
“허.”
리스턴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찰스 대위와 우리 일행의 지도자인 엘긴 백작님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확실히 뭔가 알아듣게 설명을 하려면 비유를 해 주어야 하는 거 같다.
셋은 내게 사과하고는 역시 나와 함께 온 것이 잘한 일이라 떠들면서 하선 준비를 했다.
그사이 숙련된 영국 해군과 선원들은 선장과 항해사들의 명을 제대로 이행했다.
배를 딱 항구에 붙였다, 이 말이었다.
뭐…….
우리가 타고 온 배가 거대하다고 해 봐야 19세기 기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큰 배에 속하는 범선인데 이걸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확실히 대영제국이 괜히 세계 최강이 아니란 얘긴데, 우리 배뿐만 아니라 다른 군함들도 착착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배가 탈취될 수도 있고…… 꼭 그건 아니더라도 해코지하러 올 놈들이 있을 수 있다, 이건가?”
백작은 그 모습을 역시나 흐뭇하게 웃으면서 바라보다가 이내 내게 물었다.
내가 떠날 때부터 했던 조언 때문이었다.
사실 이 조언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는 게 사실이다.
내가 뭐 이 시기 일본에 대해 전문가는 아니잖아?
하지만 내가 본 만화를 잘 떠올려 보면…….
아니, 그게 꼭 아니라 해도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나 기득권층은 당연하게도 양이를 그리 반기지 않았다.
조선의 기득권층은 양반이고 붓을 무기 삼아 쓰는 이들인 데 반해 일본의 기득권층은 칼 쓰는 사무라이들이다.
수틀리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칼을 휘두를 거란 얘기다.
“네, 배는 애초에 성채 형태를 하고 있으니, 굳게 지키는 데 병력이 많이 필요하진 않을 겁니다. 애초에 막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우릴 공격하려고 들진 않을 거고요.”
“그거야 당연하겠지. 하지만 병력을 할애해야 한다는 건 여러 가지로 부담인데…… 알다시피 병사들은 많이 지쳐 있다네.”
“이 근처에서 쉬도록 하고 교대를 하도록 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 배를 몰고 떠날 수 있는 놈들이야 설마 없겠지만, 불이라도 지르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곤란할 뿐인가. 큰일 나는 거지.”
백작은 끄응 하더니, 결국엔 병사를 남기기로 했다.
이게 누구에게서 나온 말인지 대강 아는 이들 중 일부가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눈 마주치는 순간 바로 바닥만 보게 되는 놈들뿐인데.
결국, 세상은 강자존이다.
21세기가 되면 조금 나아지겠지만 아직은 19세기다.
“가시죠.”
나중에 뭐라도 사 주면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주요 인사들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당연히 군인들이 먼저 내렸기 때문에 내리자마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일은 없었다.
“엄청 작구만, 사람들이. 다 자네 말대로구만.”
“그렇네요. 작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작은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백작도 사실 그렇게 키가 큰 편은 아니다.
160이 될락 말락 한 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앞에 서니 훨씬 크게 느껴질 정도로 이들의 키가 작았다.
하긴 뭐…….
평균 키가 150대였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애초에 먹을 수 있는 게 극히 제한되어 있는 시대 아닌가.
사실 동아시아는 19세기뿐 아니라 20세기 초까지도 그랬다고 보면 된다.
‘이런 걸로 신뢰도가 올라가는구만.’
나는 백작의 표정을 보면서 후후 웃었다.
역시 회귀가 사기다.
그래도 상태창 하나 던져 주면 좋겠는데…….
“안녕하십니까.”
그렇게 있으려니, 일본인과 외국인 몇몇이 다가왔다.
외국인이 있을 거란 생각은 하긴 했더랬다.
드라마에서 본 기억이 있거든.
사실 상식적으로만 봐도 있을 법한 일이다.
‘애초에 조총도 외국에서 들여온 물건인데…… 그럼 벌써 400년은 된 거 아니야? 외국 놈들 한둘쯤 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렇다곤 해도 유창한 영어를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했었다.
우리 대영제국은 딱히 여기랑 뭘 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백작님도 놀랬는지 잠깐 멈춰 서 있다가 이내 노련한 정치가답게 껄껄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타향에서 고국의 언어를 들으니 기분이 묘하군요.”
허나 상대 일본인은 악수를 받는 대신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내가 없었다면 이 새끼가 우리를 무시하나 싶었을 백작은 일단 화를 내거나 실망하는 대신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후후 웃으며 답을 해 주었다.
“이들은 신체 접촉을 꺼리는 편입니다. 악수보다는 이렇게 머리를 숙이는 인사가 일반적이죠.”
“허어, 그렇구만.”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봤다.
고맙습니다, 이원복 작가님.
역시 한산 이씨가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