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90)
검은 머리 영국 의사-490화(490/505)
490화 일본 [3]
나는 백작님에게 이외에도 통할 만한 예절을 가르쳐 주었다.
백작도 귀족인데 뭔 놈의 예절을 가르쳐 줘야 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중세 유럽의 귀족들과 우리가 알고 있는 동양의 귀족, 즉 양반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얘네들은 야만인들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매도하는 거같이 들리겠지만, 실제로 중세 때 파티 그림을 보잖아?
이게 왕실이지 어느 도적 떼의 산채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험악하게 논다.
그중에서도 영국은 아예 바이킹의 후예가 된 지 오래다 보니…….
“왜 말을 하다 말고 그렇게 보나?”
“아, 아닙니다. 백작님의 풍채가 갑자기 눈에 들어와서.”
“이 사람…… 싱겁긴.”
오히려 그래서 그런가 19세기쯤 되면 상당히 기틀이 잡혀 있긴 하다.
무엇보다 영국 애들이 프랑스를 미워하지만, 또 미워하는 만큼 동경하기도 하거든?
본토의 예의범절이 많이 스며들어 왔다는 얘기다.
애초에 영국의 정복왕 윌리엄 1세부터가 노르망디, 즉 프랑스 출신이지 않나.
괜히 영어 단어 중에 프랑스 말이랑 비슷한 게 많은 게 아니란 거다.
그런 주제에 프랑스를 그렇게 미워하다니…….
이게 섬나라 특인가 싶을 때가 있다.
아, 물론 그렇다고 빠게뜨 놈들이 더 낫다는 건 결코 아니다.
“이게 이들이 마시는 차입니다.”
“아…… 들었네. 동양에서는 차를 그냥 마신다고 하더구만.”
“네, 녹차라고 합니다. 물이 녹색이니까요.”
“으음…… 아무래도 홍차보다는 좀 향이 부족하구만그래.”
정정한다.
영국도 도긴개긴이다.
상식적으로…….
무언가 음식을 먹을 땐 제일 중요한 게 원래 그 음식을 먹던 사람들의 취향이지 않나?
뒤늦게 차 마시게 된 주제에 원래 먹던 사람들의 방식을 매도하는 건 대체…….
‘아니지. 이게 앵글로·색슨의 매력이지.’
이것이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사고방식이다.
자기네 말고는 모두 열등하니 싹 다 가르치거나 지배해야 하는 족속들로 보고 있다.
내가 뭐 이들을 매도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거다.
“그래도 여기서는 이걸 드셔야 합니다. 한번 드셔 보시죠.”
“으음…….”
“형님도요.”
“나는 런던에서도 커피를 먹지 차는 좀…….”
“아 드셔 보시라니까. 형님은 여자 꼬시겠다면서요. 차 마시는 예의, 즉 다도를 모르는 사람은 인기가 없습니다.”
내 말에 바닥에 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던 백작님과 리스턴이 녹차를 후룩 들이켰다.
아, 말을 미처 못했는데 우리 백작님도 리스턴 따라 여러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는 편이다.
백작 주제에 그래도 되냐고 한다면 백작이니까 그래야 한다고 답할 사람이다.
자신의 우수한 씨앗을 여기저기 퍼뜨리는 것이야말로 귀족으로서의 책무라고 굳게 믿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말을 하기엔 정작 씨가 귀한 집안 출신이라는 게 좀 우습긴 한데…….
나이가 젊으니 뭐 나도 이해해 주기로 했다.
‘7대 백작님이…… 대미언 경하고 어울리다가 가 버리셨다고 했지?’
노인네들이 더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그거 자양 강장제 아니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왜 자꾸 코카인을…….
어? 그거보다 훨씬 좋은 홍삼과 태평탕이 있는데 굳이 그걸 빨아서 가냐는 말이다.
물론 그가 그렇게 간 이후로 ‘역시 병신이 옳았구나’ 하면서 홍삼과 태평탕이 더 팔리고 있다는 후문이 있긴 하다.
“밍숭맹숭하구만.”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무튼, 두 무식한 놈들은 녹차를 홀랑 마시곤 이따위 평을 내리고 있었다.
너는 그럼 녹차 맛을 아냐고 할 수도 있는데, 놀랍게도! 어느 정도 아는 편이라고 자부한다.
내가 레지던트 때 주치의를 맡았던 스님 덕이다.
비탈길에서 엎어지는 바람에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나셨는데, 고맙다고 절 후원에서 키우는 차나무에서 차를 따다가 외래 오실 때마다 주시곤 했더랬다.
마침 교수님도 차정뱅이 수준이어서 그때마다 나도 같이 온도에 시간까지 맞춰서 마실 수 있었는데, 처음엔 ‘참 좋습니다!’ 하면서 아부나 떨 생각이었지만 그러다 보니 맛을 배우게 되었더랬다.
‘나쁘지 않은 찬데, 이 정도면.’
그런 내 입맛에도 방금 시장에서 사 온 차 맛은 썩 괜찮은 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주로 먹던 방식이 아닌 말차다 보니 텁텁한 느낌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쓴맛보다는 향긋한 맛이 훨씬 잘 나는 걸로 미루어 볼 때 어쩌면 썩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상당히 좋은 수준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양이니 뭐니 하면서 사기 칠 줄 알았는데 그러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거기서 사기 칠 수 있으면 그놈은 인정하긴 해야 한다.
-재밌는 칼을 차고 있군요?
원래 높은 사람들은 허례허식을 중시하는 법이다.
특히 동양이 그런 거 같은데,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보니 아직 협상 주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2주나 남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시모다라는, 여기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 아닌 게 어디냐 싶다.
알고 보니 이 미친놈들이 협상 전 스케줄을 석 달로 잡아 놨었더라고.
아무튼, 그 2주간의 일정을 한 단어로 축약하면 관광이 된다.
오늘은 말하자면 시장 관광이었다.
당연하게도 귀빈 대우를 해 주었는데, 사무라이 몇 명에 통역관까지 해서 함께 시장을 다닐 수 있었다는 얘기다.
-아, 이 칼 말인가.
그중 하나가 리스턴의 덩치와 기묘해 보이는 칼 형태에 호기심 또는 호승심을 느꼈는지 질문을 던졌고, 그럴 때 딱히 자제하지 않는 편인 리스턴은 그대로 칼을 뽑아 보여 주었다.
이전 같았으면 사람의 피와 살, 지방 등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겠지만 지금은 깨끗이 잘 닦여 있을 뿐만 아니라 기름도 먹여서 매끄러운 칼날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허…… 훌륭한 칼이로군요.
칼 만지는 놈이라 그런가, 한눈에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걸 알아본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훌륭한 칼이다 보니 리스턴도 좀 신이 났더랬다.
아, 훌륭한 걸 어떻게 아냐고?
리스턴이 휘두르는 힘을 견디지 못한 칼은 이미 부러졌다는 걸 유념하면 된다.
즉 살아남은 칼은 훌륭한 칼이란 얘기란 말이다.
-하지만…… 흠. 이거 죽이기 위한 칼은 아니군요?
리스턴은 사무라이의 말에 상당히 놀랬다.
다들 도살자의 칼로 알 뿐이었는데, 대뜸 이런 말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야 뭐…….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시기에 조선이나 청만 혼란스러웠던 것은 아니지 않나.
일본도 장난 아니었다.
특히 몇 해 전 있었던 모리슨호 사건도 있고 대기근도 있고 해서 민심이 흉흉할 거다, 이 말이다.
-어떻게 쓰는 칼입니까?
사람 죽이는 데 특화된 검술을 쓰고 있을 것이 분명한 사무라이의 말에 리스턴은 ‘흠’ 하고는 잠시 양해를 구한 후, 시장 초입에 심겨 있던 나무를 토막 냈다.
그냥 자른 게 아니라 한 방에 동강을 낸 후, 잠시 떠 있게 된 나무를 삽시간에 토막을 쳤다, 이 말이었다.
말 그대로 신기였기 때문에 사무라이들은 그 길로 무릎을 꿇었다.
가르침을 내려달라 하면서였는데, 아쉽게도 그건 좀 어려워 보였다.
리스턴이 행한 저 이적에 있어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힘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사무라이들의 그 빈약한 체격으로는…… 글쎄,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차, 차요? 네네. 여기. 여깄습니다.
하여간, 그렇게 큼지막한 나무를 벤 무뢰한들에게 감히 사기를 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나?
“그래, 또 뭐가 있나?”
“일단 그렇게 앉으면 안 됩니다.”
“의자를 줘야 제대로 앉지……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말차를 흡입한 백작님이 질문을 던져 왔다.
딱 무뢰배로 보일 만한 자세로 앉은 채였다.
해서 제대로 알려 주기로 했다.
“이것이 조선의 양반들이 앉는 방법입니다.”
“으아…….”
“이렇게 평소에도 단련하는 것인가……!”
일단 양반다리부터였는데 쉽지 않아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 의자에 앉아 버릇한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이렇게 앉나?
그나마 리스턴은 동양의 단련, 수련의 개념을 습득한 지 오래다 보니 힘들수록 좋아하는 경향이 생겼지만, 백작님은 본인이 생각할 때 합리적이지 않은 고통에 대해서는 무용하다고 여기는 편이었다.
“이건 일본인들이 앉는 방식이죠.”
“으음…… 이게 좀 더 쉬운가?”
“이것도 오래 앉으면 안 될 거 같은데. 게다가…… 너무 굴욕적이지 않나?”
무릎 꿇는 건 그에 비해 신체적으로는 더 수월한 일이었다.
하지만 리스턴의 말대로 오래 꿇고 있으면 당연히 관절에 무리가 가기 마련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말마따나 굴욕적인 자세이기도 했다.
“대체 왜 이렇게 앉는 건가?”
“그 이유는 저도 잘 모릅니다만…… 다들 이렇게 앉습니다.”
“거참…… 쉽지 않구만그래.”
“적당한 회담이면 따로 자리를 만들 수 있을 텐데, 이건 뭐…… 쇼군과 만나야 하는 자리니 쉽지 않을 겁니다.”
“쇼군이 왕이지?”
“그게…… 엄밀히 말하면 왕은 아닙니다.”
나는 둘의 자세를 다시 풀어 주고는 말을 이었다.
일본의 독특한 통치 체계에 대해 알려 주고자 함이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
나도 그렇게까지 잘 아는 게 아니라서 그랬다.
그냥 덴노, 즉 일본의 천황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그저 형식상의 존재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취급하기에는 반발이 너무 클 수 있어서 바지 사장으로 두고 실제로는 쇼군이 다스린다고 말을 해 준 게 거의 다다.
왜 그렇게 되었냐는 질문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 너무 무례한 질문인 거 같아서 씹었다.
“그렇군…… 역시 자네랑 오길 잘했구만.”
“역시 병신이야. 대단해.”
그거 씹었다고 병신이라고 하는 건가 싶어서 잠시 고민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딱히 근거가 있어서 아닌 거 같다고 한 건 아니고, 그냥 뭐…….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무튼, 짤막한 강의 시간이 끝나자 곧 자유 시간이었다.
자유라고 해 봐야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 밖으로는 사무라이들이 진을 치고 있는 데다가, 저녁도 같이 먹어야 할 사람이 있다 보니 새장 속의 자유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조심을 하는 거지? 청도 이러진 않았다고 들었는데.”
백작님의 말에 나는 ‘그러다가 아편 전쟁 터져서 나라가 개박살 나는 꼴을 봐서 이러는 게 아닐까요’라는 말을 간신히 참았다.
게다가 나는 이 시기에 일어난 사건을 대강 알고 있기도 했다.
조선도 그렇지만 일본도 이때 반복되는 대기근에 개고생을 하지 않았나.
메이지 유신이라는 게 사회 근간을 뒤흔드는 혁명인데 그런 게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유념하자.
이 시기 일본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아마…… 대기근 때문에 도성 밖의 민심이 아주 좋지 못할 겁니다.”
“아…… 대기근? 딱히 먹을 게 없어 보이진 않았는데?”
“여긴 수도고, 그중에서도 중심가 아닙니까. 하지만 밖은 장난이 아닐 겁니다.”
“허…… 그건 또 어찌 알았나?”
말해 놓고 알았다.
대기근은 관습 같은 게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라는 걸.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한다……?’라는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이내 마음이 평안해졌다.
‘구라 치면 되지 뭐…….’
한두 번 치는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마음이 불편해질 것도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