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91)
검은 머리 영국 의사-491화(491/505)
491화 대기근 [1]
사실 이 시기에 기근이 만연하다는 건…….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다.
딱히 여기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렇다.
내가 알기로 아일랜드 대기근도 얼마 남지 않았다.
‘뭐…… 대기근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뿐이지, 평년이라고 해서 딱히 장사가 잘되던 것도 아니긴 하지.’
주말농장 같은 거 해 봤는가?
서울시에 돈 얼마 내면 땅 몇 평 빌려주고 거기다가 심는 시스템인데…….
보통은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도 해 봤다.
우리 과장님 때문이다.
‘가족 같은 의국을 꾸려 가 보자!’라고 할 때까지는 뭐 다들 그런갑다 했다.
원래 신임 과장이 되면 가족 같은 의국이건 족같은 의국이건 해 보고 싶어 하거든.
‘남들처럼 그냥 등산이나 한번 가지…….’
그러나 우리 과장님은 남들과는 다른 의국을 꿈꾸었고, 그 결과 의국 차원에서 가족 농장 체험을 신청했다.
작은 농장을 부여받았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당시 과장님은 상대적으로 젊었고 또 과장이 되었다는 생각에 조증이라도 왔는지 진짜 인원수에 맞게 받았다.
제대로 가서 농사를 지은 건 처음 2번뿐이다.
나머지는 1년 차, 2년 차들이 당직 서듯 가서 개같이 일했다.
초반의 개와 후반의 개가 의미가 좀 다르긴 했다.
초반엔 충직한 개처럼 했고, 후반엔 개같은 인간에 들어가는 개처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확 시즌이 되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확물을 건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 날씨가 유독 농사에 적합해서도 아니고, 우리의 기술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땅이 좋아서도 아니고 화학 비료 덕분이다.
“어찌 알았나?”
내게 되묻는 백작님을 보면서, 나는 이 시기에 화학 비료 대신 쓰고 있는 비료를 떠올렸다.
가장 얻기 쉬운 퇴비를 쓰는데, 당연하게도 인분이다.
영국도 그렇지만 동양에서도 아직은 가장 싸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원이 인간이거든.
문제는 인분에는 그렇게 많은 영양분이 있지 못하다는 거다.
뭐…… 정말 정말 잘 먹고 사는 사람의 인분이라면 조금 낫겠지만 피죽도 못 먹는 사람이 싸는 똥에 뭐가 있겠어?
“백작님. 제 친구 조지프를 아십니까?”
아무튼, 나는 본격적으로 ‘구라’를 시전했다.
평소에도 머리가 잘 도는 편이라 자부하는데 이상하게 구라만 치려고 하면 갑자기 더 잘 도는 느낌이다.
물론 나도 조지프 얘기를 왜 꺼냈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상태다.
허나 나는 이제 나에 대한 신뢰가 대단해진 상태다.
말 그대로 세 치 혀 하나로 여기까지 왔는데 안 그런 것도 이상한 일 아냐?
“아…… 잘 모르네.”
“네, 아직 모르실 겁니다. 그래도 안과 쪽으로 제법 훌륭한 의사니 기억은 해 주시죠. 아무튼, 그 친구 아버지가 업턴에서 와인 양조 사업을 제법 크게 하십니다.”
“아, 아아. 그럼 아네. 우리도 가끔 파티용으로 거기서 살 때가 있어.”
“네, 그러실 거 같았습니다.”
좀 슬픈 일이지만 영국에서 영국산 음식은 딱히 좋은 취급을 못 받는다.
특히 와인은 이럴 거면 맥주나 만들지 뭐 하러 아까운 포도를 낭비하냐는 말을 종종 듣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프랑스산 와인에 비하면 이게 와인인가 싶을 만큼 맛대가리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색과 향은 그럭저럭 와인 같아 보였기 때문에, 또 맛이 없는 만큼 싸기도 했기 때문에 파티와 같이 대량으로 소비되는 경우엔 영국산을 썼다.
“그분이 아일랜드와도 사업을 하는데요.”
“아일랜드……? 그런 깡촌 놈들이 와인을 마신단 말인가?”
“뭐…… 시골에서도 돈푼깨나 만지는 놈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영국 흉내를 내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렇기야 하겠구만.”
“네, 여기보다 거의 5배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종종 가시는 편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갔다 오실 때마다 아일랜드에 대해 말씀을 해 주시는데 말입니다.”
“개판이겠지.”
언젠가 한번 말했던 거 같은데, 영국은 세계에서 가장 공평한 차별주의자들의 나라라 할 수 있다.
진짜 자기 말고는 다 차별하거든.
아일랜드면 바로 옆 동네고 사실 영국 본토랑 한 몸으로 산 지도 꽤 되었는데 이렇게 숨 쉬듯 차별을 해 댄다.
영국이 브렉시트 할 때 아일랜드가 ‘우린 안 할 건데?’ 하고 개꿀 빨면서 영국 비웃는 게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 다 이러한 업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의 아일랜드가 진짜로 개판이라는 데 있다.
물론 원인 제공은 영국이 했다.
“네, 개판입니다. 원래 사람 살 만한 땅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 같지 않은 놈들이 살지.”
와…….
우리 백작님.
누가 들으면 안 될 거 같은 말을 이렇게 당당히 한다.
“그렇긴 하죠. 하하.”
뭐, 21세기 기준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여기선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된다.
리스턴도 동조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감자만 캐 먹고 사는데…… 요새 감자 작황이 이게 불안하다고 합니다.”
“그래?”
“네. 역병이 돈다고 하던데요?”
“천벌이로구만. 아일랜드 놈들.”
이 시기 역병이란, 그 대상이 사람이 되었건 감자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끔찍한 거다.
21세기에도 대응하기가 만만찮은 건데 19세기에는 오죽하겠나?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죽어 나갈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세상 쉽게 살아온 백작이라 한들 그걸 모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뭐……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으니까 그 지랄을 치겠지?’
백작 개인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실제로 영국은 근미래에 닥쳐올 아일랜드 대기근에서 어마어마한 트롤 짓을 하지 않던가.
단순히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수준이 아니다.
구호를 막았다.
그것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지금 아일랜드에 닥친 재앙은 천벌이라는 말을 하면서였다.
그 때문에 기껏해야 500만에서 600만 명 살던 땅에서 100만 이상이 굶어 죽고, 100만에서 200만의 아일랜드 인들이 그들의 고향을 등졌으니 말 그대로 나라 하나를 절단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그게 아일랜드만의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으음?”
“여기도 그렇습니다. 아까 시장에서 감자를 보니…… 역병의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허어…… 식물의 병도 알아보는가?”
“제 별명이 뭡니까.”
“병신이지. 허. 그렇구만. 과연 병신이야.”
사실 일본은 감자가 주식이 아니다.
다들 알다시피 쌀이 주식이다.
물론 홋카이도와 같이 날씨가 험한 곳이나 도호쿠처럼 에도와 같은 혼슈지만 북일본에 속하는 곳에서는 감자를 주로 심긴 할 거다.
21세기에도 홋카이도 가면 감자를 특산물로 생산해 여러 종류의 감자를 팔고 그걸 즉석에서 튀겨 주는데 그게 엄청 맛있다고 하더라고.
‘알 게 뭐야. 이 무식한 놈들이 뭘 알겠나?’
에도는 쌀이 주식이다.
지금도 미래에도 과거에도 그렇다.
사실 쌀이 자랄 수 있는 기후인데 다른 걸 기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단백질만 좀 보충해 주면 완전식품인 데다가 지력 소모도 거의 없다시피 해서 계속해서 키울 수 있다.
단백질?
다들 알다시피 동북아는 콩의 원산지다.
괜히 한중일이 모두 두부에 간장 먹는 게 아니라는 거다.
“안정되지 못한 상황일 테니…… 더 조심을 할 겁니다. 그런 모습이 들키면 위험하단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렇다, 이 말이지?”
아무튼, 나는 내 말실수를 유려한 구라로 덮었다.
해서 만족하고 있으려는데 백작의 눈치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영국인’의 눈을 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분명 좋지 못한 일을 꾸미고 있을 터였다.
“알다시피…… 청은 덩어리가 너무 커서 우리 혼자 먹기가 어렵네. 알고 있지?”
“네, 승냥이 같은 프랑스 놈들이 벌써 한 입 했던데요?”
“네덜란드도 그렇다고 하고…….”
“뭐…… 그렇네. 아무리 대영제국이라 한들 청의 본토로 쳐들어가는 건 절대 무리야.”
백작님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불현듯 어둠의 독립군 무타구치 렌야가 떠올랐다.
자기네 말고는 다 무시하는 19세기 영국인조차 이렇게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무시하고 쳐들어갔다가 싹 다 말아먹은 일본군의 명장…….
다시 생각해도 감사하다.
아무튼, 나는 계속해서 경청했다.
백작님 정도 되는 사람이 말할 때는 아무리 나나 리스턴이라 해도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긴 어떤가?”
“여기요……? 여긴 딱히 빼먹을 게 없을 거 같은데……?”
“아니, 아닐세. 은이 꽤 난다고 알고 있어. 청에 파견되어 있던 친구에게 들었지.”
“아하, 은.”
이제 알았다.
일본에서 은이 꽤 난다는 걸.
알고 보니 상당한 꿀땅이었다는 얘기였다.
“무엇보다 청에 비하면 작은 나라 아닌가?”
“작죠. 청이 워낙 크니까요.”
“여기 상황이 정말 크게 어렵다면…… 청보다 훨씬 상호에게 도움이 되는 조약을 맺을 수 있지 않겠나.”
“으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이렇게 친다.
상호?
지금까지 영국이 전 세계 돌아다니면서 맺은 조약 중에 과연 ‘상호’라는 말을 써도 떳떳할 만한 조약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식민지 중에서는 미국이랑 맺은 조약 정도나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뭐…… 원래 떳떳하지 못할 때 오히려 더 저런 단어를 쓰는 법 아닌가.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에 무슨 민주가 있고 인민이 있나.
그냥 노예만 있을 뿐이지.
“티에피영. 자네는 생김새가 이들과 비슷하게 생겼지.”
“아, 그렇죠. 아무래도…….”
“녹아들기에 유리하지 않겠나?”
“네?”
“염탐을 좀 해 보게. 이들이 못 가게 하는 곳에 가 보는 걸세.”
“저 혼자서요?”
내 말에 백작은 ‘그게 뭐 어때서?’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내 악명을 떠올려 보면 또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하다.
저 거칠다는 영국 해군들조차 내 앞에서는 다들 순한 양이 되곤 하지 않나.
아니, 윌리엄 4세도 내 앞에서는 말 잘 듣는 아이가 된다.
하지만…….
난 주술사가 아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사람 하나일 뿐이다, 이 말이다.
“제가 같이 가죠.”
“자네는 너무 눈에 띄는데? 일단 생긴 게 그렇잖아.”
“모자 중에 얼굴 가려지는 게 있던데요?”
“아…… 하긴 그렇긴 하던데. 그래도 너무…… 크잖아.”
“평이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으면, 저는 호위 무사처럼 보일 겁니다. 실제로도 호위를 하고요.”
“으음…… 어차피 자네 둘이 협상 자체에는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진 않을 거긴 하지.”
사실 우리 둘은 놀러 온 거라 이런 임무도 안 맡아도 된다.
하지만 19세기 영국은 21세기 대한민국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애국주의가 판을 치는 나라다.
아무리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산업화가 일어났다고 한들 중세 시절의 기사도가 여전히 남아 이들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게 하게. 엑스트라로 하는 일이니 무리는 하지 말고, 혹여라도 자네 둘이 다치기라도 하면 폐하를 볼 낯이 없어.”
“네, 그러죠.”
“좋습니다.”
나는 그렇게 백작님을 떠나자마자 리스턴에게 물었다.
대체 왜 이걸 엎지 않고 같이 나가자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어 나갔는지에 대해서였다.
그러자 리스턴은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여기 있다간 자네가 말한 접대부?”
“기생이요.”
“아, 그래. 기생만 만날 거 아닌가. 난 자연스러운 만남이 좋다네.”
“아…….”
이 새끼…….
날 호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자 만나려고…….
동기는 불순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은 없을 거 같았다.
‘굶어 죽어 가는 사람 보고도 성욕이 동하면 그게 사람이냐?’
애초에 여기에 로맨스는 없을 거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