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93)
검은 머리 영국 의사-493화(493/505)
493화 대기근 [3]
탕.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오는 놈이 하나쯤은 있어서, 나도 모르게 총을 쏘고 말았다.
참고로 군의관은 대위기 때문에 권총 사격도 한다.
나야 뭐 공군 군의관이었다 보니 진짜 딱 1년에 한 번만 하긴 했다.
-어…… 대위님. 지금 쏘고 계십니까?
잘 쏜 것도 아니다.
내 생각에는 내 K5가 좀 후졌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을 거 같은데, 소총은 만발인데 권총은 0발이라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싶어서 하는 소리다.
아무튼, 사격 통제관이 과녁에 단 한발도 안 들어가는 내 사격을 보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컥.”
나는 실전파였나 보다.
딱 한 발 쐈는데 상대가 단말마의 비명만 남기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실 다리를 노렸는데 희한하게 눈썹 사이에 구멍이 난 채 쓰러졌다.
‘신이 있구만 역시…….’
나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게 사무라이 놈들에게는 뭔가 영험해 보였던 모양이다.
하긴 방금 전까지 주술사 흉내 내던 놈이 갑자기 뛰어오던 놈을 한방에 작살내고 하늘을 보고 있으면 나 같아도 뭐가 있구나 싶을 거 같긴 하다.
몇몇이 칼을 호다닥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물론 완전히 나 때문인 건 당연히 아니다.
“쯧. 죽었으려나?”
내 옆에 서 있는 이 덩치 큰 괴수.
리스턴은 벌써 5명의 팔과 다리를 벤 상태였다.
베었다는 게 남들처럼 가죽이나 베어서 피를 냈다 뭐 이런 수준이 아니라는 게 대단했다.
모두 절단됐다.
뼈도 잘려 나갔다는 얘기다.
그중 하나는 뼈는 안 잘렸는데, 그게 더 보기 끔찍했다.
뭐라고 해야 되나 저걸.
피라냐 떼에 던져진 불쌍한 포유류라고 하면 딱 적절할 거 같다.
찰박.
찰박.
덕분에 칼 던지고 무릎 꿇는 데 나는 소리가 이랬다.
이미 우리 주변으로 상당한 깊이의 피 웅덩이가 형성된 탓이었다.
“자네 의외로 총을 잘 쏘는구만? 저번에도 그러더니.”
“아…… 사실 소총은 잘 쏘는 게 맞는데 이건 주술이에요.”
“이제야 제 입으로 실토를 하는군그래.”
“뭐…… 그걸로밖엔 설명이 안 되어서요.”
평소에도 못 하던 걸 갑자기 실전에서 한다?
심지어 내 총은 K5에 비하면 총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19세기 리볼버인데?
내가 이거 사 보고 느낀 게 괜히 권총을 자살용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는 거였다.
한 점을 노리고 쏴 봐야 총알은 무조건 랜덤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내 실력 때문이라는 말을 하기엔…….
파는 놈도 그렇게 말했다.
코앞에서 말고는 쏘지 말라고.
실제로 나처럼 쌍권총을 드는 것보다는 작은 검과 같이 병용하는 것이 훨씬 유리할 거란 말도 했던 거 같다.
이제야 기억이 나네.
“음.”
해서 나는 우리 앞에 무릎 꿇은 놈들 중 한 놈이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칼을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묵직했는데, 피가 묻어 있어서 좀 찝찝했다.
그렇다고 내 옷으로 닦기는 뭐하잖아.
“일로 와 봐.”
“어어.”
그래서 이왕에 무릎 꿇으면서 이미 피로 더럽혀진 놈의 옷에 닦으려 했는데,
“어어.”
“크읏…….”
놈이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칼이 잠깐 놈의 가슴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지가 찔러 놓고 뭘 그렇게 수동태로 말하냐고 할 수도 있는데, 정말이라 그렇다.
내가 찌른 게 아니라 칼이 들어갔다 나왔다.
물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 왜 이렇게 사람이 잔인한가. 항복한 사람을 찌르다니.”
“아니…… 나는 그냥 칼을 닦으려고 한 건데.”
“사람 살로? 조선에서는 그러나?”
“아니, 그게 아니라 옷으로 닦으려고 했죠.”
“근데 왜 푹 찔러. 심지어 심장 쪽이잖아. 어떻게 살아 있는 건가, 이 사람은.”
“살짝 들어갔다 나온 거니까요.”
불우한 사건을 당한 사무라이는 이제 무릎을 꿇는 것도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게 고작이다, 이 말이었다.
‘일단 피는 닦을까.’
그나마 등 쪽은 피가 안 묻어서 칼을 닦았다.
그랬더니 리스턴이 나를 무슨 귀신 보듯 했다.
“자네…….”
“왜요?”
“아니, 아닐세.”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을 뿐인데 이런 반응이라니.
역시나 19세기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뭐라고 해야 하나.
계몽이 더 필요하다, 이 말이다.
아직도 중세 시절 미개한 감성주의에 머물러 있어.
“괜찮으…… 아니.”
그때 한 무리의 사무라이가 또 당도했다.
리스턴은 그 즉시 아니, 사실은 좀 전부터 칼을 다시 겨누고 있었는데 그중에 아는 얼굴이 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칼을 거두었다.
상당히 유창한 영어 실력을 뽐내던 통역사가 있었다는 얘기다.
무리를 그가 이끌고 있던 건 아니었고, 따로 대장이 있어 보였지만 아무튼.
“이게…….”
“허어…….”
“이 무슨…….”
여기 왔을 때부터 느낀 건데 일어가 21세기나 19세기나 크게 변한 게 없는 거 같다.
내 일어 회화 실력이라고 해 봐야 배낭 여행할 때 익힌 게 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단어도 많고 또 말 순서도 비슷하고 해서 대강 알아들을 수 있다.
“정말 구라파 제일 검이라더니…….”
“이 정도면 여기서도…….”
“그럴 거 같군그래.”
“주술사의 힘도 있겠죠. 이게 말이 됩니까?”
물론 지금의 대화는 절반 이상 내 상상이다.
대강 돌아가는 분위기나 표정이나 말투를 보면서 파악한 내용이다, 이 말이다.
뭐 사실과 크게 다를 거 같진 않다.
그리고 사실이 아니면 뭐 어쩔 건가.
방법 있어?
“괜찮으십니까?”
나머지 인원이 상황을 파악하고 또 무릎 꿇은 놈들을 포박하는 사이 대장으로 보이는 사무라이와 통역사가 다가와 물었다.
리스턴이 먼저 답했다.
“다친 곳은 없네. 그보다, 이 친구 수술이 필요할 거 같은데.”
“네? 수술이요?”
“그래, 살리긴 해야지.”
“아니…….”
상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일 터였다.
지가 푹 찔러 놓고는 수술은 뭔 놈의 수술이란 말인가.
아무도 안 죽였다면 또 모를 일이겠는데, 리스턴이 팔다리 절단한 친구들은 이미 삼도천을 건넜거나 지금 막 건너고 있다.
하지만 나는 리스턴의 지기이므로 그의 뜻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위대함을 보여 주고자 함이죠?’
‘무슨 소린가…… 의사가 사람 살리는 건 당연한 일인 것을.’
‘그런 거치고는 다 죽였잖아요. 형님 실력이면 칼등으로 쳐도 됐을 거 같은데.’
‘아.’
약간 혼선이 있긴 했는데 아무튼, 내 지지까지 받게 된 리스턴은 이내 수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대로 된 수술을 하게 된 건 아니긴 했다.
막말로 우리 죽이겠답시고 날뛰던 놈이 뭐 이쁘다고 그렇게 하나.
게다가 지금 당장 뭔가 안 하면 죽을 거 같아 옮기는 것도 무리였다.
해서 나는 등에 메고 있던 간이 왕진 가방을 풀었고, 리스턴은 통역사에게 등불을 비추게 했다.
그렇게 피 웅덩이 속에서 수술이 진행되었다.
촤아악.
일단 찌른 부위에 난 절개면을 더 넓혔다.
그러자 이미 팔을 뒤로한 채 묶여 있던 놈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럴 만도 했다.
원래 뭣도 모르는 놈들이 볼 때 수술은 정교한 살해였으니.
특히 가슴 수술이나 배 수술은 21세기인들이 봐도 그렇게 보일 거다.
“이거 살 수 있나?”
“모르죠, 뭐. 해 보는 거지.”
“집도하면서 그런 말 해도 되나?”
“어차피 우리 죽이려던 놈인데 살리려고 드는 게 이상한 일 아닐까요? 물론 살리면 좋기야 하겠지만.”
하여간 우리는 절개 틈을 확 넓혔다.
리스턴은 그 절개 틈을 벌리고,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다친 부위를 확인했다.
그나마 다행인 게 칼이 진짜 조금만 들어갔다 나왔는지 심장에 난 상처가 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피가 살짝 솟구치긴 했지만 이미 숱한 심장 수술로 단련된 우리에겐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었다.
“형님.”
“오케이.”
상처 난 부위를 확인한 나는 리스턴과 손을 바꿨다.
내가 상처를 손가락으로 막고 리스턴에게 봉합을 맡겼다는 얘기다.
리스턴의 실력이야 뭐 알아주는 거 아닌가.
괜히 내가 형님 보고 천재네 뭐네 하는 게 아니다.
MBTI 별로 안 좋아하긴 하는데, 나는 극T라 사실에 기반한 말만 하거든.
지이익.
리스턴은 내가 손가락으로 막고 있는 구멍 주변으로 해서 동그랗게 주머니 형태로 봉합을 이어 나갔다.
“이제 됐네.”
그리곤 완성이 되자마자 내게 신호를 보냈고, 내가 손을 당기는 속도에 맞추어서 봉합사를 당겨서 꿰맸다.
그러자 심장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이 멈추었다.
“아니…….”
“저건…….”
아마 마법처럼 보일 터였다.
유명한 말 중에 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나.
물론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해진 과학이 많아 신비로워 보일 만한 광경이 많이 줄었겠지만…….
이 시기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가슴 한편에 신비가 살아 숨 쉬고 있다.
“후…….”
“뭐…… 하나?”
“기왕 사람 살리는 거 주술로 보이면 아무래도 더 유리하죠. 형님도 눈 감아요.”
“아니…….”
“어허. 머리 재배치해?”
“으읏.”
해서 나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뭐라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늘도 바라보고 환자도 바라보고 괜히 침도 바닥에 뱉고 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 뭘 믿는지 몰라서 여러 가지를 했다.
“아, 아멘.”
그러자 통역사가 돌연 아멘을 외치면서 성호를 그었다.
“?”
잠시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막부 측 놈들 중에서도, 무릎 꿇고 있는 놈들 중에서 몇몇이 아멘을 외쳤다.
‘일본…… 기독교 아예 없는 나라 아니야?’
21세기 일본은 그런데 여긴 아닌가?
뭔지 모르겠다.
아무튼, 통하는 느낌이었다.
꼭 아멘을 외치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나머지도 경악에 찬 얼굴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평, 더하면 환자 죽을 거 같은데.’
‘오케이.’
이쯤 했으면 됐다 싶어서 나는 리스턴과 함께 상처를 완전히 닫았다.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매끄러웠을 거 같겠지만, 슬슬 환자가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마취를 안 했네.’
‘앨프리드를 데려올 걸 그랬군그래.’
의식 잃은 김에 수술했는데, 조금만 더 늦었으면 가슴 열린 채로 일어나는 광경을 볼 뻔했다.
주술사로 명성을 쌓는 데는 그게 더 나을 거 같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도 좀 괴롭게 되지 않겠나.
해서 우리는 서둘러 봉합을 마쳤다.
그사이 의식이 점점 깬 환자는, 그러니까 사무라이는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결국, 봉합은 나 혼자 하고 리스턴은 그런 환자를 제압하고 있어야만 했다.
“허어…….”
“죽었었는데…….”
“이럴 수가.”
그런 모습도 영험해 보이는 듯했다.
잘된 일이다.
뭐가 되었건 이렇게 되면 우리 일을 하기에 유리해질 테니.
‘정작 뭔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게 함정이긴 한데…….’
그래, 염탐.
그것도 쉬워질 거다.
감히 어?
죽은 사람도 살리는 주술사가 구경 좀 하자는데 허락 안 하고 배기겠어?
심지어 옆에 있는 놈은 십수 명의 검사가 뛰어드는 와중에도 무려 5명을 절단 내면서 동시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괴물이다.
‘그래, 뭐…… 잘된 일인가?’
나는 피 웅덩이 속에서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