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94)
검은 머리 영국 의사-494화(494/505)
494화 대기근 [4]
“저…… 그…… 티에피연느 사마.”
그러고 있으려니 통역사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마침 나도 몸을 일으키려고 하던 참이었기 때문에 일어섰다.
“히, 히익.”
그와 동시에 통역사뿐만 아니라 다른 사무라이, 심지어 막부 측 사무라이 대장으로 보이는 녀석까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뭐…….
기대했던 바이긴 하다.
주술로 심장 찔린 사람을 살린 사람이니 두렵기도 하지 않겠나.
만족감에 후후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왜 불렀죠?”
“그, 그게!”
통역사는 무척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는 조금 의아했다.
내가 뭐…….
일본사에 대해 정식으로 공부한 적이 있는 건 아니긴 하다.
하지만 대학교 때 남아수독오거서라는 말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의 만화책을 읽은 바 있는데, 아무래도 대부분이 일본 만화책이다 보니 그중엔 일본 사극물들도 제법 있었다.
‘그런 거 보면 이 시기 일본 놈들은 거의 뭐…… 간지에 머리가 제압된 상태던데……?’
애초에 할복이라는 게 제정신으로 시도할 만한 짓은 아니지 않나.
세상 그 어떤 문화에서도 자기가 자기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는 관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아닐 거다.
19세기 런던을 보기 전의 나라면 단언했겠지만 세상엔 상상을 뛰어넘는 현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지금은 마음이 많이 열렸다.
그래, 할복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도 어디선가 한두 명쯤은 또 하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이 말이다.
‘근데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쫄았지?’
물론 나와 리스턴이 상당한 무용을 보이긴 했다.
아까 내가 쏜 놈은 다시 봐도 기가 막힐 정도로 양 눈썹 사이 한가운데 총알이 박혀 있다.
리스턴 쪽이야 뭐 말할 것도 없다.
지금 이 찰박거리는 피 웅덩이를 만든 게 리스턴 아닌가.
하지만…….
만화에서 나오던 사무라이들은 이보다 더했다.
비천X검류는 한 방에 세 명을 죽여 버린다고…….
“왜 불렀냐고.”
“아, 아아.”
아무튼, 왜 불렀는지 묻는데 자꾸만 답을 못하고 있으니 답답했다.
그런 내 심기를 읽었는지 사무라이 대장이 통역사의 머리를 후려치곤 일본 말로 뭐라고 했다.
그중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던 말은 바카야로 정도였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이 바보야’ 정도가 되시겠다.
참…… 빈약한 욕이다.
우리네 민족 같았으면 지금은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심한 욕을 퍼부었을 거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일어나셔서 제가 그만.”
다행히 그 한 방에 고장 났던 통역사가 고쳐진 모양이었다.
“그…… 일단 죄송합니다. 저희가 지켜 드려야 하는 일인데 이게 지금 참.”
“아…… 네. 사실 저희가 막부 손님인데 이렇게 습격을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
내 말에 통역사는 다시 삐걱대기 시작했다.
사실 방금의 사과는 예의상 한 말일 텐데 내가 곧이곧대로 들이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인들은 이런 식의 대화를 잘 안 하잖아?
사실 대한민국 사람들도 전체적으로 보면 직설적이지 않은 편인데 일본에서는 직설적이라 생각할 정도니 뭐 말 다 한 셈이다.
이놈들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뒤로 숨긴 채 빙빙 돌리면서 서로의 의중을 탐색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놈들이다.
‘내가 을이면 골 깨지겠지만…… 을이 아니잖아?’
만약 1905년쯤의 일본이라면 아무리 내가 영국 귀족이라 해도 정부 측 인사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하긴 어려울 터였다.
일본이 엄청 세서가 아니라 러일 전쟁에 당장 써먹어야 해서 그렇다.
심지어 그때가 되면 우리 영국이 함대를 팔아먹기도 하잖아?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냥 전 세계 방방곡곡에 널리고 널린 중세 국가 중 하나이기에 그렇다.
“뭐가 아? 인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우리 둘 다 영국에서 정식으로 작위를 받은 귀족이고 이번 방문에도 정식으로 임무를 맡은 대영제국의 외교관임을 모른단 말인가?”
내 패악질을 이어받은 건 당연하게도 리스턴이었다.
아마 내 의중을 대강이나마 이해했을 터였다.
우린 그런 사이니까.
게다가 리스턴은 이런 식의 깽판에 있어 가히 스페셜리스트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앙? 알아, 몰라.”
그는 이미 외교관 앞에 서서 그에게 묻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슴팍을 푹푹 찌르고 있진 않았지만 아마 상대는 그렇게 느끼고 있을 터였다.
평생 그런 식의 대화를 해 온 사람이니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맞습니다. 그래서 사죄를 한 것이온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사무라이 우두머리가 다시 한번 통역사와 이리저리 거친 대화를 나누었다.
바카야로 빈도가 아까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두 배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더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저런 식으로 뭉개진 발음까지 알아들을 만큼의 일어 실력은 아니라 아쉬웠다.
하긴, 꼴랑 3주 일본 일주한 거 가지고 지금 이상의 실력을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다.
“그, 일단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숙소를 무단이탈한 것은 두 분…….”
“무단이탈? 무단이타알?”
상대의 말에 리스턴이 또 다시 강짜를 부렸다.
사실 무단이탈이 맞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느낀다.
“네, 그…… 저희에게 알리고 움직이셨다면 이런 일은…….”
“알렸네, 나는.”
“네?”
“나간다고 했잖아, 자네에게.”
“아니, 저는 그때 거기 있지도…….”
“내가 말했다고 하잖아. 그리고 저기 태평 경도 봤네. 맞지?”
어떤 논리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손발은 맞추어야 하지 않겠나.
해서 나는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통역사의 얼굴에 너무나 짙은 배신감이 드리우기 시작했지만 외면하기로 했다.
19세기 와서 는 것 중 하나가 꼴 보기 싫은 거 안 보는 것이기에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마음도 딱히 불편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대영제국의 귀족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셈인가? 나를 모욕할 셈이라면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겠네.”
리스턴은 나의 끄덕임을 확인하고는 버럭 화를 냈다.
딱히 화가 난 것도 아닌데 화를 낼 수 있는 것도 어찌 보면 재능 같다.
특히 상대로 하여금 벌벌 떨게 만들 수 있는 재주는 재능을 넘어 진기에 가깝다.
통역사는 코앞에서 너무나 무섭게 생긴, 심지어 덩치까지 큰 사람이 화를 내니까 떨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사무라이들은 그런 리스턴이 손을 칼 가까이로 가져가자 떨기 시작했다.
그럴 만도 하다.
아까부터 이놈들, 리스턴의 거리 안에 들어와 있었거든.
보통의 검사라면 또 모르겠지만 리스턴이라면 단칼에 여러 명을 절단할 수 있을 테니 사실상 게임 끝이다.
“아…… 그건 결코 아닙니다.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사무라이 대장도 쫄았는지 이번 스몰챗에서는 바카야로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이미 모욕감을 느꼈네.”
“그…… 제가 어찌하면 될지.”
“여긴 할복이라는 문화가 있던데.”
“제, 제발…… 그것만은.”
리스턴은 내게 주워들은 할복을 운운하다가 이내 방향을 훅 하고 틀었다.
실로 악당이나 지을 법한 미소를 지으면서였다.
“그럼 다른 방식으로 보답을 해야겠지.”
“보…… 답이요?”
“우리 영국은 거래의 나라일세. 오고 가는 것이 명확하다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이건 비단 우리 사이의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영일 간에 맺을 조약도 마찬가지일세.”
“아…… 네. 듣고 있습니다.”
리스턴은 통역사와 사무라이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통역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무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과연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폭력의 힘은 위대한 법이었다.
특히나 그 폭력이 항거 불가능한 수준이라면 뭐 말 다 한 셈이다.
“일단 나는 말일세.”
리스턴은 일부러 천박한 손동작을 하면서 말했다.
“알지 않나. 사내라면.”
“아……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저희가 이미 그건…….”
“아니, 아니. 나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편일세.”
아니, 일부러가 아니라 그냥 진심인 거 같기도 하다.
저 말을 내가 언젠가 리스턴에게 해 준 적이 있다는 것이 후회된다.
자꾸 소개를 해 주겠다 어쩌겠다 하면서 너무 무섭게 생긴 19세기 영국인들을 들이밀길래 나는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한다고 했던 건데, 그걸 저런 식으로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형님, 어디 다녀오셔요?
-아…… 자만추 하고 왔지.
누누히 말하지만 여기서만 이러는 게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인도 아대륙에서도, 심지어 잠깐 들렀던 스리랑카에서도, 청에서도 저랬다.
그러고도 매독의 ‘ㅁ’도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콘돔의 위력이라기보다는 그냥 면역력이 미친 거 같다.
왜 그렇게 단언하냐면…….
아무래도 우리 백작님은 걸린 거 같아서 그렇다.
얼마 전부터 자꾸 수은 찾고 비소 찾는 거 보면 확실하다.
딱히 내가 손을 쓰고 싶지도 않다.
아직은 나로서도 매독은 무리니까.
“네? 그건 대체 무슨 소리인지……?”
“남녀 간에 오고 가는 감정을 중시한다네, 나는.”
“네?”
리스턴의 말에 통역사는 정말로 당황한 얼굴이었다.
아마 이런 얘기를 듣는 게 처음이라 그럴 터였다.
나야 뭐 21세기 사람이니 사실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19세기 사람이 듣기에는 일본 아니라 영국에서도 이상한 말이긴 하다.
심지어 귀족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보통 혼인은 집안에서 결정하는 대로 또는 중매에 따라 하고 사랑은 바람을 피우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이 시기 영국과 유럽의 상식이지 않던가.
일본이라고 해서 딱히 다를 거 같진 않다.
아니, 더했으면 더했지 덜할 거 같지 않아.
“일반 서민들이나 양갓집 규수들을 좀 보고 싶다, 이 말일세.”
“아니, 이건.”
이 말은 내가 한 말이다, 통역사가 한 말이 아니라.
왜냐?
일본이야 아무래도 조선만큼 유교적인 성향이 약하겠지만 그래도 동양 아닌가?
서민은 모르겠는데 양갓집 규수를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하는 건 사실상 범죄 선언이다.
“흐음…… 그러시군요.”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는데, 통역사와 사무라이 우두머리의 표정이 좀 바뀌었다.
‘오우, 이 녀석 제법 놀 줄 아는 놈인가?’ 하는 얼굴 같다, 아무리 봐도.
아무래도 내 착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적절한 곳이 있습니다.”
“저희가 안내하죠.”
“하하…… 이건 오랜만인데.”
다들 진심이다.
심지어 우리한테 하는 말 말고, 지들끼리 하는 말 중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일어만 골라냈는데도 이 지경이다.
“강제로 하나요?”
“그걸 원하시는 거 같진 않아. 대강 데리고 다녀 보세.”
“2주면 길지.”
“길죠. 사랑하고 헤어지기 딱 좋은 시간이죠.”
흐뭇하게 웃는 꼴을 보면서 리스턴이 내게 속삭였다.
‘잘했지?’
잘하긴 한 거 같다.
그렇긴 한데…….
아무리 봐도 백작님이 원하는 방향은 아닌 거 같다.
이건 그냥…… 도적 떼의 두목이 된 느낌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