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95)
검은 머리 영국 의사-495화(495/505)
495화 대기근 [5]
그날은 그냥 그렇게 숙소로 돌아왔다.
이미 정식으로 사무라이들과 함께 민가를 습격 아니, 방문하게 되었으니 굳이 야밤에 길도 모르면서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백작은 우리의 활약을 듣고는 무릎을 탁 내리쳤다.
다행히 숙소에는 좌식 가구, 즉 의자나 침대가 마련된 후였기 때문에 앉아서 칠 수 있었다.
확실히 일본은 이미 양이들과 수교한 지가 오래되었다 보니 좌식 가구들도 다 구비가 되어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게 갑자기 온 것이로구만!”
괘씸한 건, 처음부터 내어 주질 않았다는 거다.
우리의 위력을 보고 나서야 내어 주었다는 얘긴데…….
이런 게 섬나라식 기 싸움인가 싶었다.
마음에 안 들면 당당하게 싸움을 걸지 그랬어?
그랬으면 맘 편하게 시모다부터 조지고 도쿄로 돌진했을 텐데.
우리 대영제국의 군대가 수는 좀 적어도 이런 전근대식 군대 정도는 아마 그리 어렵지 않게 몰아낼 수 있을 게 분명하잖아?
“잘했네. 그렇지 않아도 이게 푸대접인지 아니면 관습인지 헷갈리던 참이었는데, 푸대접이었구만그래.”
나도 이렇게 화가 나는데 백작님은 속이 넓은 건지 뭔지 딱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냥 상황 분석이나 늘어놓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착한가?’ 했겠지만 이젠 아니다.
귀족들은, 특히 대영제국의 귀족들은 하나같이 정치적인 면모가 있다는 걸 배웠기에 그렇다.
역시 귀족들은 다르다, 타고 나길 그렇게 났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단지 자리와 교육이 그렇게 되게끔 인도하는 거다.
엘긴 백작 정도 되면 영국 내에서도 상당한 부와 명예를 자랑하는 곳이니만큼 어려서부터 어마어마한 교육을 받았을 터였다.
‘또 마냥 그렇다고 보기엔…… 전대 엘긴 백작님은 코카인 빨다가 비명에 가시긴 했지…….’
21세기 미국에서는 젊은 사람이 심장 마비로 오면 일단 코카인 검사부터 한다.
달러 지폐 90% 이상에서 코카인이 검출될 만큼 사용자가 많은 국가이다 보니 마약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에 대해서도 의료진들이 숙지해야만 하기에 그렇다.
아무튼, 젊은 사람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코카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강제 각성인데 엘긴 백작님같이 나이가 많은 사람이야 오죽했겠나.
“사실 우리 영국이 이 변방에까지 군대를 파견하는 건 무리지 않나. 최대한 외교적으로 상대를 해야 했는데, 자네들이 큰 건 해 준 거야. 좋지 못한 뜻을 품고 있다가 스스로 뉘우치고 이렇게 나온다는 건 좋은 일이지.”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백작은 처음부터 여길 무력으로 어찌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긴 하다.
아편 전쟁이 ‘전쟁’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애매하단 생각이 들 만큼 금세 또 싱겁게 끝나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영제국은 당시 전쟁에서 쓴 돈을 회수하는 중이었다.
물론 청과의 무역이 이제 완전히 불공정 무역이 되었기 때문에 벌어들이는 돈이 상당히 많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수하는 속도가 어마어마하지 못한 건 당연하게도 점령지라 할 수 있는 홍콩 등지에 유지 중인 군대 때문이다.
‘하긴, 군대는 그 존재만으로 모든 자원을 빨아먹는 존재지.’
북한처럼 운영한다면야 뭐…… 좀 낫긴 할 거다.
군인이 농사도 짓고 닭도 치고 해서 자급자족을 할 수 있으면 된다 이 말이다.
그게 뭐 역사적으로 아예 없었던 군대도 아니긴 하다.
둔전이라고 조조도 했잖아.
하지만 당시 군대와 지금 군대는 좀 많이 다르다는 게 문제다.
기껏해야 창이나 찌르는 게 다인 군인과 총을 조준해서 쏴야 하는 군인도 다르지만 군 편제 자체도 많이 다르다.
“자네들이 벌써 큰일을 해 준 거야. 사실 아픈 VIP 정도나 치료해 줘도 참 다행이다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이야…… 과연 자네들은 단순한 의사가 아닌 주술사요 소드 마스터구만그래.”
백작은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구만 들여온 것이 아닌지, 탁자 위에는 나름 열과 성을 다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사케도 있었다.
놀랍게도 탁주가 아닌 내가 아는 사케였다.
맛도 대강 비슷해서 상당히 먹을 만했다.
오히려 와인과 비교했을 때 이쪽이 더 낫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아, 들게. 이거 의외로 괜찮아. 일본인들이 생각보다 술을 잘 빚는구만그래.”
“아, 네. 감사합니다.”
“아무튼, 흐음…… 이렇게 되면 우리 대영제국의 긴 팔이 일본까지 닿게 되겠네.”
“그게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내 말에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하는 몸짓은 아닐 터였다.
일단 이들은 내가 일본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다.
‘사실 21세기에는 딱히 그러진 않았는데.’
21세기의 일본이야 뭐…….
이미 맥아더 쇼군에게 도게자 시원하게 박고 군국주의에서 자유주의 진영으로 누구보다 신속하게 탈바꿈한 나라 아니던가.
중간에 잠깐 정신 못 차리고 미국을 경제적으로 이겨 먹으려다가 한 번 더 혼쭐이 나긴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말을 잘 듣게 된 나라였다.
괜히 미국인들이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국가 4위가 일본인 것이 아니다.
1, 2위는 사실상 한 몸인 캐나다와 영국인 것을 감안하면, 또 3위는 1, 2차 세계 대전에서 한편이었던 프랑스라는 걸 감안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의 메인 빌런이었잖아.
‘지금의 일본이라면 얘기가 아주 많이 달라지지.’
문제는 19세기 일본은 곧 군국주의에 물들게 될 거란 데 있다.
지 혼자 그렇게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그나마 청이 건재한 상황이라면 괜찮겠지만 청은 이미 맛탱이가 가 버렸다.
아시아의 병자 취급 정도가 아니라 그냥 맛 좋은 먹잇감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실제로 우리 영국뿐 아니라 이런 일이라면 언제나 빠지지 않는 프랑스도 한 숟갈 얹었다.
거기에 더해 네덜란드, 미국 그리고 심지어 독일까지 왔다.
걔네가 칭다오를 달라고 했다던데, 그제야 알았다.
왜 칭다오 맥주가 유명했는지.
“의미가 없진 않지. 러시아. 놈들이 여기서도 남하를 꾀하고 있지 않은가.”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백작님이 답했다.
대영제국 귀족들이라면 늘 가지고 다니는 지도를 어느새 늘어놓은 채였다.
지금이 19세기 중엽이라는 걸 감안하면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지도였다.
확실히 괜히 유럽이, 그중에서도 대영제국이 지금 세계를 호령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조선은 대동여지도가 1861년에 나오는데…….
이놈들은 벌써 한참 전부터 세계 지도를 이렇게나 정확한 형태로 그리고 있었다.
“아, 네. 정말 땅덩이 하나는 어마어마하네요.”
“그래, 사람도 많지. 욕심도 많고. 우리 대영제국이 적절하게 눌러 주지 않았다면 이미 유럽 본토 중 상당한 땅이 러시아에 넘어갔을 걸세. 슬라브가 좀 그렇거든.”
“아…… 네. 그럴 거 같긴 합니다.”
내가 끄덕인다고 해서 민족 차별한다고 하진 말기 바란다.
이 당시에는 인종은 물론이거니와 민족별로도 차별하는 게 그냥 패시브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해 놓은 짓을 보다 보면 어떻게 사람이 같은 사람한테 이런 짓까지 하나 싶지?
답은 간단하다.
같은 사람으로 안 보면 된다.
뭔가 눈코입은 비슷한데 달려 있지만 실은 사람이 아닌 열등한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상상 가능한 모든 악행 아니, 상상도 못 했던 일까지도 다 할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청을 활용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내부 사정이 도저히 그게 안 될 거 같더구만.”
“왜 그렇죠?”
콩키스타도르를 떠올려 봐라.
걔네 원주민 말살하겠답시고 천연두 걸린 사람 옷을 선물로 주고 그랬다.
물론 당시 남미에 입성한 스페인 군사들이 보기에 아즈텍 문명에 만연하던 식인 풍습이 악하게 보이긴 했겠지만…….
그거 하나를 핑계 삼아서 지금까지 골수까지 빨아먹고 있는 건 좀 그렇다.
심지어 아즈텍과 전혀 상관없는 문명들까지도 ‘그때 봤지? 우리 말고는 다 인간 아니야’라고 하면서 빠는 건 진짜 그렇다.
물론 나는 이런 말을 감히 백작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애초에 따지고 보면 대영제국의 귀족까지 해먹고 있는 주제에 그런 말 하는 것도 내로남불이기도 하고.
“자네가 청에 대해 물으니 영 어색하구만…… 혹 틀린 얘기가 있으면 바로잡아 주게나.”
그러한 배경은 뒤로하고, 나는 일단 백작님의 말을 들었다.
실제로 좀 궁금했던 내용이라서 그랬다.
부잣집은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이 있지 않나.
게다가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에 성공했는데 청은 그럴 기미조차 없다가 그냥 망해 버렸다는 것도 이상했다.
“청은 기본적으로 오만한 국가일세.”
“아…… 그거야 정말 맞는 말씀이죠.”
청이 아니라 그냥 중국 통일 왕조는 대대로 그러했다.
근거 없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럴 만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미 서구 문명이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었을 무렵에도 청이 더 잘 살았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사실 21세기의 중국도 오만하기 그지없지 않나?
뭐만 하면 우리는 대국이니 소국과는 다르다고 하고…….
“우리와의 전쟁에서 형편없이 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는 고쳐지지 않고 있지. 대강 들어 보니, 해군은 밀렸지만 육군은 여전히 최강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네.”
“뭐…… 실제로 우리가 집어삼키기엔 너무 큰 땅이긴 하죠.”
“그래, 인도와는 다르지. 청은 청으로의 정체성이 다들 너무 강하니까 말이야.”
아, 백작님이 어떻게 이렇게 세계정세에 밝냐면, 애초에 엘긴 백작들이 대대로 맡아 온 직함들이 외국 총독이라 그렇다.
21세기에도 대영제국 박물관에 있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벽을 손수 뜯어 온 것도 이 엘긴 백작이다.
아,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고 선대 백작님이 그랬다.
거의 뭐 해적이라 이건데, 그것이 대영제국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보니 당연하게도 중히 쓰이고 있다.
“하지만 군이 강하진 않네. 아버지와 함께 영청 전쟁도 같이 가지 않았나, 내가.”
“그러셨죠.”
그때도 있었다.
비록 전투에 나서진 않았지만, 아직 우리 대영제국으로서도 드물게 보유하고 있는 흑선 그러니까 증기선을 타고 유유히 전장을 누볐다.
“항구까지야 해군이 진압했지만 그 근처를 제압한 건 육상전을 통해서였지. 그때 우리 군 사상자가 몇이나 있었나?”
“거의 없었습니다.”
“자네 덕에 살린 목숨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위협이 될 만한 전력은 아니야. 그런데도 황실은 고집을 부리고 있네. 그런 놈들만 믿고 있다가는 러시아가 이쪽에서 부동항을 노릴 때 낭패를 보게 될걸세.”
“하긴…… 그렇겠군요.”
하여간 너무 보수적인 인간들이 문제다.
세상은 달려 나가고 있는데 죽자고 지가 알고 있는 것만 쥐고 있는 게 문제다, 이 말이다.
비단 이 시기에만 통용되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사실 21세기는 19세기와 비교하는 게 이상한 일일 만큼이나 빠르게 변하고 있지 않나.
근데도 손에 쥔 기득권 때문에 난리법석을 치다가 나라 전체가 골로 가거나 그럴 뻔한 사례들을 수도 없이 보아 온 나로서는 청의 몰락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