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497)
검은 머리 영국 의사-497화(497/505)
497화 대기근 [7]
당연하게도 양민의 머리를 베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제 명실상부 이 집단의 우두머리가 된 리스턴, 즉 소드 마스터 리스턴이 이를 원하지 않았기에 그랬다.
애초에 사람 생명 살리려고 의사가 된 사람이 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려고 들겠나.
물론 이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인간이기도 하지만…….
19세기 기준으로는 상당히 도덕성이 강한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도 딱히 말을 얹지 않았다.
“그냥 나오라고 하게. 막부 사람이라고 하면 나오겠지.”
“네.”
통역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라이들이 동네 이곳저곳을 다니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과연 저런다고 사람들이 나올까?’ 하는 의문이었다.
어떻게 봐도…….
나오면 안 될 거 같은 모양새이지 않나?
이게 혹시 나 혼자만의 착각인가 싶어서 리스턴을 바라보니, 리스턴 또한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평. 조선도 이러나……?”
“아뇨, 이러진 않을 겁니다.”
솔직히 나도 지금 조선 분위기가 어떤진 모른다.
막말로 가 봤어야 알지 않겠나?
뭐…….
사학자라면야 어지간히 생생하게 알긴 할 거 같다.
조선은 기록이 아주 많이 남아 있는 시대이니까.
애초에 그렇게 먼 옛날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당시 사람들이 기록에 미치기도 했다지 않나.
‘근데 내가 공부를 했어야지?’
의사씩이나 되어서 그런 것도 모르냐는 말을 한다면, 의사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답해 주겠다.
전공 바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현대 의학은…… 특히 90년대 이후에 쌓인 지식의 양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하다.
본격적인 글로벌 시대가 열림과 동시에 역시나 본격적인 지식 교류의 시대가 열려서 그렇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 시절부터 이것저것 관심을 보이는 애들도 있는데 보통 유급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게 한이 되어서 그런가 전문의 따고 난 후엔 자신이 관심 있던 분야를 지나치게 들이파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은데…….
아쉽게도 나는 아니었다.
“이건 그냥 도적 떼잖아. 저 봐. 저게 정부군이 양민을 대하는 태도란 말인가?”
리스턴의 말에 앞을 보니 사무라이 하나가 양민 하나를 끌고 나오고 있었다.
칼을 빼진 않았는데 하여간 우격다짐으로 끌고 나오는 중이었다.
저렇게 나와서 그냥 베어도 전혀 이상할 거 같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사무라이가 나오는 만화를 많이 봐서 그런가 눈앞에 그러한 장면이 펼쳐지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음…… 우리 영국은 저러진 않죠?”
“당연하지! 범죄나 인도할 때나 저럴까…… 어찌 양민에게 저런단 말인가.”
“하긴, 그것도 그래요.”
“게다가 저 양민들 꼴이 왜 저런단 말인가.”
우리가 중얼거리거나 말거나 사무라이들은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제 와 드는 생각인데 여기 있는 애들이 다 사무라이 계급인 것도 아닌 거 같았다.
하긴, 사무라이, 즉 무사 계급이면 나름 위 계급인데 이렇게 많이 몰려올 수는 없었을 거다.
그냥 병사들도 있을 거다, 이 말이다.
아닌가?
이게 뭐 아는 게 적으니 영 갑갑한 상황이다.
“그…… 모르겠네요.”
거기에 더해 드디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양민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래도 근대화가 진행된 국가에서 온 사람 아닌가.
사실 그런 영국만 해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던 내가 보기엔 많이 모자란 감이 있었는데…….
날 것의 일본은, 즉 전근대 시대의 사람들의 행색은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었다.
일단 다들 헐벗고 야위었다.
“다 모은 거 같습니다.”
“이게 다라고?”
“최근에 좀 죽은 모양입니다.”
“죽어……?”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통역사는 리스턴에게 상황 보고를 했다.
대화 내용은 심상치가 않았다.
물론 예상했던 바이긴 했다.
기근이 있었을 거다.
21세기에도 기근이 있긴 하다.
하지만 21세기의 기근은 대개 식료품값이 올라가는 데 그친다.
적어도 문명의 테두리 안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그러하다.
하지만 19세기의 기근은 내 생각보다 훨씬 혹독했던 모양이다.
“네, 먹을 게 없어서요.”
“먹을 게 없다라…… 그럴 수 있긴 한데. 여긴 사실상 에도 아닌가?”
“맞습니다. 에도입니다. 걸어서 한 시간 거리 아닙니까.”
“그런데 죽어?”
“먹을 게 없으면 죽어야죠. 어쩌겠습니까.”
리스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건 퍽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통역사의 말투가 너무나 침착했다.
먹을 게 없으면 죽어야 된다니?
19세기 런던 사람조차 놀랄 만한 말이지 않나.
물론 런던이라고 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엄밀히 따져 보면 죽어 나가는 사람의 수는 런던이 더 많을 거다.
하지만 거긴 그래도 최소한의 구호가 있다.
종교 단체가 되었건 정부가 되었건…….
“그럼 얼마나 죽은 건가?”
“모르겠는데, 잠시만요.”
원래 여자나 꼬시러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을 것이 분명한 리스턴이 흔들리는 동공과 함께 묻자 통역사가 촌장인지 뭔지 모를 사람에게 다가가 대화를 시작했다.
아쉽게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대화는 아니었다.
다만 ‘모든 집에’라는 말 정도는 알아들었는데, 분위기상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먹을 수 있었다.
‘모든 집에 죽은 사람이 있다, 이런 말이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역시나 통역사가 그런 말을 했다.
리스턴은 ‘허어’ 하고 한숨을 쉬더니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이 와중에 여자 만나는 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당연하죠. 그게 사람이 할 말입니까? 저 사람들 꼴을 보세요. 템스강 다리 밑에 거지라고 해도 믿겠어요. 이런데 뭔 여자입니까, 여자는.”
“아니, 나는 이럴 줄은 몰랐지. 상상이나 했겠나. 지금이 무슨 1400년대도 아니고 말일세.”
“저도 이럴 줄은 몰랐는데…… 뭐…….”
따지고 보면 우리가 기항했던 곳 전부 비슷했을 수도 있었을 같다.
런던이야 세계 방방곡곡에서 수탈해 온 물건들로 가득하니 적어도 부자들은 풍요한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었지만 다른 곳은 아니지 않나.
질소 비료라도 나온 시절이면 좀 수탈당하고 해도 남는 게 있을 테지만 아쉽게도 그건 20세기나 되어야 나오는 물건이다.
지금의 세계는 명백히 굶주리고 있다고 보면 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생애 몇 번쯤은 굶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다, 이 말이다.
“다른 곳이라도 가 볼까……?”
“다른 데라고 다를까요?”
“아니, 뭐 좀…… 나을 수도 있잖아.”
“…….”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우리 여기 휴가 온 거라고. 심지어 자네는 신붓감 구하러 온 거 아닌가.”
“형님은 신붓감이 아니라 거의 놀잇감 구하러 온 정도 아닙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그리고 그게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지금까지 오면서 나와 만난 이들은 전부 즐겼다네.”
나는 다시 한번 한심하다는 눈으로 리스턴을 바라보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제 보니 이 새끼 사람 눈이 아니다.
금수가 됐다.
하긴…….
여기까지 오면서 숱한 여자들을 꼬시고 눈물 흘리게 했는데 여전히 사람 눈깔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걸로 식량 사고, 요기라도 좀 하라고 하게나.”
물론 리스턴은 19세기 기준으로 훌륭한 사람이긴 했기 때문에, 이 비참한 땅을 그냥 떠나진 않았다.
작은 금덩이를 꺼내어 주었다.
사무라이 한 명에게 식량을 사 오라고 시키면서였다.
중간에 삥땅 칠 염려 따위는 안 해도 될 거 같았다.
바로 어제 피 칠갑을 한 리스턴을 본 덕이었다.
게다가 옆에 있는 나도 마음에 걸릴 거다.
“잠깐, 기도라도 해 주지.”
내가 저주, 아니 기도를 해 줘서 더 그럴 거다.
오면서 더 자세히 들었는데 과연 몇 년 전 청나라가 박살 난 이야기는 이미 에도에 짜하게 퍼져 있었더랬다.
당연하게도 나와 리스턴에 대한 얘기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심장에서 피 뽑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지 내가 더 유명했다.
하긴 영국 복색을 하고 영어로 떠드는 동양인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희귀한 시절이지 않겠나.
그런데 사람 심장에서 피를 뽑더니 죽었던 사람을 살렸으니 뭐…….
아무튼 그런 인간이 자기 머리에 손 얹고 외국어로 쏼라쏼라 떠들다가 중간에 하늘 보거나 하는데 겁이 안 나겠어?
“히익. 목숨을 걸고…….”
그렇다고 목숨까지 걸 일은 아닌 거 같았지만 아무튼, 우리는 그대로 그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향했다.
거기라고 해서 뭐 다를 거 같지 않았고, 역시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이 더 안 좋은 곳이 있어서 리스턴이 보다 큰 금덩이를 내놔야 했던 적도 있다.
“형님 이제 그만 포기하시죠. 이러다 금만 다 쓰겠어요.”
“후우…….”
해서 말려 봤다.
허나 리스턴의 눈은…….
내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눈이었다.
멀리 갈 것도 없고, 딱 내가 저랬던 적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2017년…… 코인…….’
그때 나는 인턴이었다.
그나마 태화이다 보니 월급이 300만 원 좀 넘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돈을 막 몇백씩 잃는 게 괜찮지는 않았다.
500만 원이면 세상에 치킨이 몇 마리냐.
그땐 심지어 전공의 특별법도 제대로 시행되기 전이라 주 100시간은 우습게 일했으니 더더욱 크게 느껴졌는데…….
그런 돈을 잃었으면 그만해야 되는데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는 게 문제다.
‘이번에 만회하자! 이런 생각만 했지.’
나는 나만 그런가 보다 해서 다시는 코인이고 주식이고 안 하기로 마음먹었었는데, 이제 보니 그냥 다 그런가 보다.
돈이 아니라 여자에 이렇게 집착하는 게 차이일 뿐이지 뭐…….
“또 가요?”
“그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지금 애들 다 지쳤는데. 일단 우리 애들은 총 들고 다녀서 무거워요, 저거.”
“괜찮아. 나중에 돈 많이 주면 되지. 어떤가. 괜찮지?”
“네!”
리스턴은 허언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약속한 금액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크자 레드 코트들의 사기가 오히려 올라가 버렸다.
사무라이들 또한 그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가 올랐다.
이렇게 되니 가지 말자고 하면 나쁜 놈이 될 분위기였다.
‘미친…….’
아니…….
본국에서 만나는 여자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정신이…… 어.
‘뭐야.’
거스를 수 없는 대세에 굴복한 나는, 그러나 의욕이 없다 보니 천천히 걷고 있었다.
리스턴의 뒤를 따라 걷게 되었다는 얘긴데 이 인간 뒷주머니에 꽂힌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한자가 쓰여 있었는데 내 짧은 한자 실력으로도 읽을 수 있는 글씨들이었다.
춘화(春畵).
중국, 일본,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남녀 간의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풍속화를 나타내는 단어다.
‘이 새끼……? 저런 걸 꿈꾸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인도에 있을 때는 또 이상한 책 꽂고 다녔던 거 같다.
거기 글씨는 내가 모르니 그냥 넘어갔는데 이제 보니 그거 카마수트라가 아니었을까?
‘그걸 혼자만 쳐 보고 있네.’
배신감에 몸이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