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500)
검은 머리 영국 의사-500화(500/505)
500화 역병 [3]
“어…….”
와중에 찝찝해하는 놈들이 있길래, 내가 손수 모범을 보이기로 했다.
이럴 때 쓰려던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쓸모 있을 법한 걸 들고 오기는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님의 방식으로 해야 한다!”
물론 가방을 뒤적거리면서도 나는 컨셉을 결코 놓지 않았다.
아마 주님께서도 이런 나를 보면 감동 감화하심이 있지 않을까 싶다.
오늘만은 불경함을 용서하고 기적을 내리실 수도 있다.
하지만…….
의사는 늘 기적은 없다는 가정하에 움직여야 하는 법이다.
애초에 모든 학문은 기적에 기대는 순간 퇴보하기 마련이지 않겠나?
되다 만 것들, 즉 19세기 놈들이야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지만 난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로 만든…….”
나는 스포이드를 꺼냈다.
원래 유리로 만드는 게 정석인데, 배 타고 일본까지 오는 동안 깨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더랬다.
배를 타 본 사람은 알 거다.
바다란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고 그중에서도 대양은 진짜 더럽게 흔들린다는 걸.
그나마 극동으로 오는 바닷길은 대서양 건너는 식의 개같은 경로는 없기 때문에 조금 낫기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흔들 아주 장난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꼴랑 인천항에서 백령도 가는 바닷길에도 사관 학교 애들 다 멀미하고 쓰러지고 했었는데 영국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게 망상이다.
‘쇠로 만드니까 진짜 좀 영험해 보이는데?’
하여간, 그래서 쇠로 만들었다.
단점은 안에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인데…….
사실 스포이드는 유리로 만들어도 시야가 왜곡되기 때문에 정확히 용량을 점선으로 표시해 놓지 않으면 어차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 19세기 인들에게는 그렇게까지 정밀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사실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는데 돈이 많이 든다) 별 차이는 없을 거 같다.
아무튼,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다행히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적절한 용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성수 제조기다!”
“허어…….”
“그런 게 된단 말인가?”
리스턴은 아직도 적극적으로 나를 돕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면 안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이렇게 해서 실질적으로 무언가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해 본 적이 있어서였다.
아니…….
어쩌면 헷갈리고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내 연기력이 일취월장하는 것도 있지만 저 인간이 생각보다 미신, 괴력난신에 굉장히 나약하거든.
대체 어떻게 구한 건진 모르겠는데 무당도 불러왔잖아.
쪼오옥.
아무튼, 나는 철제 스포이드로 죽어 가는 소의 종기에서 농양을 채취했다.
소라는 동물은 원래도 냄새가 지독한 편인데 죽어 가는 녀석이다 보니 진짜 아주 역했다.
얘 근처에서 살면 코털이 바바리안처럼 굵고 길어질 거 같다는 예감이 들 지경이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비인후과 애들은 이런 거 논문 내고 그러더라.
확실히 외상 외과에 비하면 할 일 없는 거…… 아니, 이렇게 되면 너무 비난인가?
“후…….”
나는 그렇게 채취한, 악취가 나는 농양을 내 혀끝에 툭 떨어뜨렸다.
아무래도 정식으로 배양한 것도 아니라서 한두 방울이 아닌 여러 방울을 떨어뜨렸다.
태반은 죽어 나간 바이러스와 그 바이러스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백혈구들의 사체일 거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살아 있는 바이러스가 있어서 죽어 가는 것일 테니 너무 많이 떨어뜨리진 않았다.
아무리 소에 들어간 놈이 인간에게 좀 약한 면모를 보인다고 한들 많이 들어가서 좋을 건 없을 거라 그랬다.
당연히 이것도 종교적으로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욕심은 내지 마라. 우리 불경하고 더러운 인간들이 주님의 성수를 너무 욕심내다간 화를 면치 못할 것이야!”
진짜 내가 생각해도 지랄이다.
하지만 먹히는 지랄이다.
내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오…… 역시…… 성수라는 게 그냥 그렇게 막 될 리가 없지!”
일단 레드 코트들부터 넘어왔다.
“주여! 저에게도 은혜를!”
“그래, 기도해라! 이 성수만 맞으면 앞으로 이 천연두를 걱정할 일은 없을 테니!”
“와아아아아!”
“우오오오!”
“역시 믿고 있었다구!”
찰스 대위는 그냥 병사가 아니라 상당히 배운 사람이고 또 19세기이니만큼 당연히 좋은 집안 출신이지만 넘어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이들은 이미 런던에 있을 적부터 내 명성을 귀에 피나게 들어왔을 테니까.
거기에 더해 배 타고 오면서부터는 내가 펼치는 기적을 직접 목도하기도 했고.
“나, 나도 주게.”
결국, 나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리스턴도 굴복했다.
차고 있던 검을 뒤로 둘러메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약간 종교적인 생각도 있긴 했을 텐데 태반은 자기 키가 너무 커서 그런 것일 거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그냥 복종과 굴종의 의미이지 않겠나.
“허어…….”
“저자의 말이 역시 사실인 모양이다!”
사무라이들에게 리스턴은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일찍이 무사로 이름을 떨쳤던 미야모토 무사시가 환생한다 해도 저만한 위력을 보일 수 있겠나?
내 생각에는 비천X검류라는 게 실존하고 히무X 켄신의 스승이 있다 해도 리스턴을 이기기는 쉽지 않을 거 같다.
가상의 인물과도 비빌 정도다, 이 말이다.
그러니 총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칼을 숭상하는 사무라이들이 보기에 리스턴이 어떻겠나.
“저, 저도!”
“저에게도 은혜를!”
“야소? 야소라고 하셨소? 그 야소가 실존한단 말인가!”
게다가 일본은 나름대로 개항한 지 오래된 나라다.
물론 저기 포르투갈이라고 이단 놈들의 나라랑 붙어먹었긴 하다.
놈들이 이단이라는 증거가 있냐고?
축젯날에 지진 빔 맞고 나라 전체가 골로 갔는데 그게 증거가 아니면 달리 뭐가 증거겠냐.
그에 비해 우리 대영제국이 모시는 하나님은 아무래도 찐인 거 같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악행을 저질러도 봐주지.
‘그러고 보니까…… 21세기에도 잘나가잖아……?’
인과응보, 업보라는 게 정말로 있다면 사실 앵글로·색슨들이 그렇게 잘살면 안 되는 거다.
막말로 세계사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면 영국을 의심하라는 밈도 있을 정돈데…….
심지어 미국도 비슷한 놈들이다.
걔네는 늘 우리는 빈 땅, 미개척지인 서부를 개척했다고 하지만 거기가 정말 빈 땅이었냐?
거기 살던 원주민들이 들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한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당시를 미화한 영화니 게임이니 많이도 만들었다.
뭐 나도 레데리2를 감명 깊게 플레이하긴 했는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오, 주여.’
그런 걸 생각해 보니 역시나 우리가 믿는 주가 진짜 주라는 확신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게 가능할 리가 없다.
전 세계를 수탈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편 전쟁까지 저지른 놈들이 계속 잘 나가고 심지어 이미지도 좋아진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
해서 나는 아까보다 더욱더 충만해진 신앙심으로 주를 부르짖었고, 당연하게도 모든 사무라이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성수를 받아 마셨다.
솔직히 엄청 쓸 텐데 누구 하나 뱉기는커녕 인상을 찌푸리는 놈도 없었다.
엄숙 그 자체였다.
일본 애들이야 별일 없어도 이런 분위기 조성하는 데 있어서는 프로페셔널들이다 보니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경건한 느낌이었다.
“저게…… 무슨 일이야…….”
“뭐지?”
“왜…… 저분들이.”
그러고 있자 가뜩이나 아파 뒈지겠는데 칼 찬 무사들이 오자 겁먹은 채 방 안에 숨어들었던 사람들이 점차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아파 보이는 사람도 있고 아직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둘이 섞이면 안 되지.’
감염 질환에서 제1 원칙은 격리다, 격리.
코로나 돌 때 특히 양놈들은 대체 왜 이렇게 나의 자유를 억압하냐면서 난리법석을 피우던데, 그게 뭐 걔네가 자유를 더 잘 알아서라기보다는 그냥 학교에서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을 못 배운 탓이라고 보면 된다.
흑사병으로 인구 절반을 홀랑 날려 먹은 대륙에 살고 있는 주제에 천 년도 안 된 사이에 다 까먹고 자유 찾는 거 보면 진짜 대단한 놈들이다.
하긴, 그렇게 기억력이 자주 리셋되는 놈들이니까 진심으로 지들이 정의롭고 옳은지 알고 사는 거긴 할 거다.
“자, 이제 일어나라! 마스크도 쓰고! 주님의 성수는 완벽하나 우리는 완벽하지 않나니! 성수의 효과가 완전히 발휘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주의하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정말이지 자연스럽게 주술사스러운 말을 떠들고 있었다.
전생에 의사가 될 게 아니라 어디 사이비 교주라도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아…… 아니지. 그래 봐야 뇌종양으로 죽었을 텐데…….’
21세기 교주가 19세기로 오면 생존에 유리할까?
아무래도 선진화된 포교 방법에 통달하고 있을 테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의학 지식만큼 유용할 거 같진 않다.
“자, 손대지 말고! 막대기 아니, 총과 칼집으로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막아라! 내 친히 보기 전까지는 저들끼리 아무도 뭉치지 못하게 해!”
“하잇!”
아무튼, 내 명에 의해 충직한 레드 코트들과 사무라이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러자 괜히 나왔다 싶은 사람들이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아픈 사람들부터 뒤처졌기에 그랬다.
뭐 감염된 사람들 중에서도 잘 뛰는 놈들이 있기는 할 텐데, 그런 놈들은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원래 감염이라는 게 사람마다 경과가 다 다를 수 있거든.
다들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치사율 100% 감염병이라는 게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어어.”
“어…….”
아무튼, 뒤처지거나 쓰러진 사람들은 내 부하들이(사무라이들도 포함이다 이제) 손 아닌 칼집이나 총으로 툭툭 쳐서 서로 떨어지게끔 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시골이다 보니 건물 밀도가 떨어져서 그랬다.
처음엔 이런 사람들은 다 아픈 사람들이겠거니 했다.
“형님.”
“아, 그래. 주님의 칼이 간다.”
해서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의사가 환자 보는데 신체 검진은 해야 하지 않겠나 해서 리스턴을 출동시켰다.
“으아아!”
“살려 주십쇼!”
환자들이 다들 살려 달라고 했다.
당연했다.
웬 털이 부숭부숭 난, 심지어 머리털은 좀 이상하게 난 얼굴 뻘건 거대한 백인이 칼 들고 달려오면 나라도 비명 나온다.
“오, 오니다!”
그래도 오니까지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까 리스턴이 진짜 오니의 형상이긴 했다.
혹시 일본 도깨비의 원형이 백인 깡패인가 싶은 순간 리스턴이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렀고, 그 결과 그렇지 않아도 이게 옷인지 고쟁이인지 몰랐던 것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오…… 이 사람은 병변이 없네. 저쪽으로.”
“이 사람은 이쪽.”
“이 사람은…… 저기.”
나는 그렇게 몸을 드러낸 사람들을 밭인지 황무지인지 모를 정도가 된 땅들을 이용해 분류했다.
원래 같으면 환자들은 하나하나 격리하는 게 맞지만 인력이 안 되지 않나.
자원이 부족할 때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하는 법이다.
“으아아.”
“오니…….”
“오니를 부린다…….”
작업을 하는 동안 계속 이런 말을 듣다 보니 내가 마치 키부츠X 무잔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