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501)
검은 머리 영국 의사-501화(501/505)
501화 역병 [4]
천연두가 도는 곳에 진입한 이상 나도 리스턴도 더 이상 에도 시내로 돌아갈 수는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해서 찰스 대위에게 편지를 들려 보내기로 했다.
물론 이놈도 들어가는 건 안 되기 때문에 통역사와 함께 가서 진짜 초입에서 편지만 전달하게끔 조치를 취했다.
사무라이 쪽도 마음이 급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실 동북아에서 천연두는 전통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역병이지 않았나.
“빨리 전해서 허투루 오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혹 다른 마을에는 이런 일이 있지 않은지 점검토록 하라!”
우두머리 격으로 보였던 사무라이는 과연 우두머리긴 한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사람들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내 감독하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건 설득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귀신의 저주는 잘 옮는다네. 자네들이야 성수를 마셔서 괜찮을 확률이 높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자네가 뫼시는 주군이 위험해질 수 있다네.”
“으아아.”
뭐…….
서양은 명예, 동양은 충(忠)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목숨을 다 바쳐 충성하는 것을 거의 최고의 미덕이라고 삼은 세계관이다, 이 말이다.
21세기쯤 되면 그런 것도 많이 퇴색되어 아랫사람은 충성을 안 하고 윗사람은 의리를 안 지키는 시대가 열리기도 하는데 19세기 일본 무사 계급에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아마 머리와 몸이 분리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 뻔하다.
얘네는 말 그대로 충성을 위해 죽고 사는 애들이거든.
“손을 씻어라! 빡빡 씻어! 아니, 차라리 잘라라!”
“미친놈이. 그냥 이 채로 갖다 주고 그 사람한테 손 닦으라고 하면 되잖아.”
“아.”
죽고 산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 묘사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발언도 이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사무라이 우두머리 말고는 아무도 자기 손모가지까지 잘라 가면서 충성을 맹세하고픈 사람이 없어서 설득은 쉬웠다.
무엇보다 우두머리도 충직한 부하 병신 만드는 거보다는 멀쩡히 돌아오는 게 좋은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순순히 나를 따랐다.
“그나저나 저들은 어쩌나?”
리스턴은 벌판에 네 개의 집단으로 분류된 채 서 있거나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미감염자, 밀접 접촉자(감염자 가족), 감염자, 중증 환자.
이렇게 네 개로 분류했다.
‘중증 환자는 버린다.’
마음은 아프지만 중증 환자까지 살리는 건 도저히 무리다.
물론 물과 먹을 것은 내어 주겠지만…….
그 이상 뭘 할 수는 없다.
애초에 지금 당장은 식음료도 없다.
우리 찰스 대위가 에도시내로 편지를 전달하고 그 편지가 엘긴 백작님에게 무사히 전달 된 후, 백작님이 우리에게 물자를 보내 줄 때까지는 우리가 덜렁 들고 온 물자가 다다.
당연히 마을에서 강제 징발도 하긴 할 거다.
하긴 할 건데…….
‘뭐가 있으려나, 여기……?’
영국에서는 못 본 몰골이다.
내가 살던 업턴도 만만치 않게 깡촌이었지만, 대단히 부유한 편인 조지프네 얹혀살았기 때문에 단 한 번이라도 배를 곯기는커녕 딱히 생활에 있어 결핍을 느낀 적도 없다.
런던에서는 어땠냐고?
초반 몇 달을 제외하고는 거의 호화 생활이었다.
솔직히 지금은 전생보다 낫다.
먹는 거만 빼고는 그렇다.
‘이런 게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건가.’
물론 이스트엔드로 가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넘어서는 참혹한 광경들이 얼마든지 있긴 하다.
자본주의의 노예인 영국 놈들은 심지어 돈 받고 거기 관광도 시켜 준다.
하지만 그 허름한 공간마저 뭐가 되었건 간에 19세기스러운 면모를 자랑한다.
그에 반해 여긴 정말이지 훌륭한 중세 시절 동양 깡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에도 시내는 그래도 이보다 훨씬 사정이 낫던데, 불과 도보로 한두 시간 거리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어쩌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리스턴이 물어 왔다.
하긴 참의사인 리스턴이 이런 상황에서 어영부영 시간 죽이는 걸 참을 수는 없을 터였다.
“아. 일단…… 저기 저쪽은 방법 없어요.”
“방법이 없어? 아니, 그게 의사가 할 말인가?”
“전에 다리 무너졌을 때 기억하죠?”
“아…… 트리아지(Triage). 기억하지”
누누이 말하지만 리스턴은 천재과에 속하는 사람이다.
내가 본 중 가장 똑똑하다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겠지만 적어도 상당히 똑똑한 축에 속한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의사는 사실상 대한민국 이과에서 제일 공부 잘했던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보면 되는데 거기서 상당히 똑똑한 축에 속한다는 건 일반적인 의미에서 천재가 맞다.
나?
나는…….
뭐 그 안에서는 그냥 평범한 축이었다.
“그때도 우리 다 살리려고 들지 못했잖아요.”
“가용한 자원 대비 최대의 효율을 내자, 이건가.”
“그렇죠.”
“헌데…… 자네는 지금 의술이 아니라 주술을 쓰고 있는데 주술도 그런가?”
이럴 때 보면 또 좀 멍청한가 싶기도 하다.
일반인 속이려고 시전한 연기에 왜 댁이 속냐고.
뭐…… 그덕에 성수랍시고 구린내 나는 소 고름을 먹긴 한 거니까 대강 넘어가도록 하자.
나중에 ‘실은 이런 거야 형’ 하고 개화하면 될 거 아닌가.
그래, 지금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위해서 잠시 넘어가는 게 좋겠다 싶다.
“그럼요. 신성력을 막 끌어낼 수 있으면 그건 예수님이죠. 저는 조금씩 빌려오는 거뿐입니다.”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나. 하긴, 자네는 예수님이랑은 거리가 많이 있지.”
“네. 제가 예수님이면 일단 오병이어부터 했죠. 사람들 굶어 죽는다는데 금 쪼가리나 나누어 주고 말았겠어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
해서 나는 주술사 메타로 나가기로 했다.
적어도 아시아에 있을 때는 그냥 이렇게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아시아를 미개하게 봐서 그런 것은 아니고…….
단지 아직 전근대 시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실학자들이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실학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그들이 왜 ‘실학’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을 거다.
일단 열하일기로 유명하신 박지원, 그분도 과거 시험 못 붙었다.
조선판 음서 제도로 올라간 거다 보니 아무래도 진정한 기득권에 들기는 좀 어려웠을 거다.
홍대용도 마찬가지다.
정약용은 뭐…… 예외긴 한데 대세 얘기하는데 예외적인 사례 하나 들고 오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
‘웹소설도 봐야 쓸 수 있다고 했지? 안 보고 성공한 작가 하나 보고 저분은 했는데요! 라고 하는 거만큼 화나는 일도 없다고 했어.’
내가 힘들다고 하니까 의사 출신 웹소설 작가가 진지하게 조언을 해 주길래 대강 웹소설이라는 걸 훑어본 적이 있다.
솔직히…….
수준 떨어지더라고.
그래서 나는 안 읽고 쓰겠다고 했다가 얻어터질 뻔했다.
어릴 때 복싱 배워서 별명이 분당구 일보라고 하더니 그게 진짜일 줄은 몰랐다.
위빙 돌리면서 리버 블로우 날리는데 난생처음 무릎 꿇고 울었다니까.
아무튼, 이 시기 동북아는 적어도 기득권층에게는 여전히 살 만한 시대이기 때문에 딱히 변화를 원치 않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괜히 개화시키겠답시고 깝치면 좋아하겠어?
‘조선에는 활쟁이들이 많지…….’
혹시 <최종X기 활> 봤는가?
그런 무사들이 마을마다 있는데 대체 왜 호란에 당했는지는 의문인데, 아무튼, 편전이라도 날아오면 리스턴은 몰라도 나는 그 길로 저승행이다.
그래, 오늘부터 나는 한동안 진정한 야소 무당이다.
“자 이 부정한 것들을 저 안으로 옮겨라! 내가 나누어 준 이 천으로 손을 감싸고, 다 옮긴 후에는 불태워야 한다! 부정한 것이 옮으니까!”
마음을 정하는 게 어렵지 정하고 나서 움직이는 건 뭐 쉬운 일이지 않나.
애초에 행동력이 있는 편이었는데 19세기 오고 나서는 더더욱 그렇게 된 마당이다.
안 그러면 도저히 살 수가 없었어.
“하잇!”
사무라이들은, 묘하게 레드 코트들은 총을 막대기 삼아 그나마 걸을 수 있는 감염자들을 다른 건물들로 몰아붙이는 일을 맡고 지들은 중증 환자를 직접 들어 옮기게 되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성실히 일했다.
비쩍 말라 가지고 힘을 쓸 수 있을까 했는데 다행인지 뭔지 환자들이 훨씬 비쩍 말라서 번쩍번쩍 잘도 들었다.
물론 그 와중에 체격이 나름 괜찮은 사무라이들도 있어서 더 수월하긴 했을 거 같았다.
그래 봐야 우리 자랑스러운 레드 코트들에 비하면 나약해 보이는 녀석들이지만 말이다.
“자 너희들은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
“네, 네.”
그렇게 중증 환자와 일반 감염자들을 부하들에게 옮기게 시키고 나와 리스턴은 접촉자들과 비감염자들을 각기 다른 집으로 옮겼다.
집 꼬락서니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거의 뭐 움집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다다미가 있는 집은 상당히 잘사는 집인 모양이었다.
대부분은 그냥 흙집이다, 흙.
‘아니, 뭐…… 초가집도 그렇긴 하지……?’
군대 있을 때 사관 학교 애들 순례하는 거 군의관으로 따라간 적이 있는데, 그때 한번 초가집에서 잔 적이 있다.
자려고 잔 게 아니라 일정이 개같이 꼬여서 그렇게 됐다.
그나마 애들은 밖에서 침낭 깔고 노숙하고 나는 대위랍시고 안에서 잤는데, 자다가 도망 나왔다.
와…….
밤 되니까 초가집 지붕이랑 벽에서 지네가 나오더라.
“저희는 밖에 있죠.”
“밖에? 노숙을 하자고?”
“그럼 안에 들어갈 거예요?”
“아…… 아니. 대신 만들지, 뭐.”
“만들어……?”
“응. 만들면 되잖아. 텐트처럼.”
해서 노숙하려고 했는데 리스턴이 끙 하고 몸을 일으키더니 칼을 뽑았다.
마침 우리 부하들도 다 일을 마친 참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리스턴이란 사내는 주목받는 데 익숙하고 또 익숙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보니 전혀 괘념치 않았다.
그저 뚜벅뚜벅 걸어서 오랜 가뭄에 비쩍 곯은, 심지어 껍데기는 이미 다 떼서 끓여 먹은 탓에 말라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 앞에 섰다.
그나마 원래는 썩 풍경이 좋았을 마을인지 그런 나무들이 상당히 있었다.
“흡!”
리스턴은 칼을 휘둘렀다.
“저저…….”
“저러다 날 다 나가지.”
“아니, 부러…… 허.”
사무라이들은 아무래도 칼 쓰는 사람들이다 보니 비쩍 마른 나무의 강도가 어떤지 잘 알 수밖에 없지 않겠나?
괜히 베기 시험할 때 속이 빈 대나무로 하는 게 아닐 터였다.
해서 쯔쯔 혀를 찼는데 그것도 역시나 잠시뿐이었다.
소드 마스터 정도가 아니라 그랜드 마스터급에 이른 리스턴의 검은 마른 나무를 단칼에 베고 또 베었다.
‘아니…… 저거 광선검인가?’
무림인도 무리고 제다이 나이트급은 돼야 할 거 같은 신기를 발휘한 리스턴은 순식간에 적당한 길이로 잘라 낸 나무를 기둥 삼아 땅에 박고는 그 위로 지붕을 얹었다.
그러자 삽시간에 벽은 없지만 지붕은 있는 일종의 간이 건물이 완성되었다.
“이만하면 잘 만하지?”
“어, 그렇네요.”
“이봐들!”
“네, 네!”
“이거 가지고 가서 알아서들 지어.”
“하, 하잇!”
심지어 그 짧은 사이에 나머지 애들도 누워 잘 수 있을 만큼의 나무토막을 완성하기까지 했다.
‘그냥 이대로 막부로 쳐들어갈까?’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잠시 발칙한 상상도 들었다.
리스턴만 있으면 뭔가 될 것도 같아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