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502)
검은 머리 영국 의사-502화(502/505)
502화 역병 [5]
다행히 엘긴 백작님은 꽤나 서둘러 주셨더랬다.
일단 내가 영국에서부터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물품들부터 해서 자기 돈도 좀 써서 먹을 것과 마실 거에 옷가지 등까지 다 싸서 보내 주었다.
-당연한 일이죠. 우리 대영제국은 이곳에 협력자를 만들어 두려고 하는 거니까요.
누가 지배하건 간에 흑선과 영국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하는 건 좋은 일이지 않겠나.
‘영국이 그런 걸 신경 썼나요?’라고 묻는다면 마땅히 할 말이 없긴 하다.
솔직히 많이 신경 썼다고 하기엔 여기저기서 저지른 개짓거리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
하지만 신경을 쓰긴 쓴 거다, 그게.
놀랍게도 인도에서는 잘 먹히기도 했다.
우리가 괜히 기본적으로 DIVIDE AND RULE, 즉 분할 통치 개념을 들고 있는 게 아니란 얘기다.
‘우리보다 더 미운 다른 놈들을 만드는 방식으로 써먹고 있지.’
이걸 괜히 쓰겠나?
다 품이 덜 들게 만들려고 한다.
아무래도 현지인들이 우릴 미워하게 되면 이리저리 힘이 들기 마련 아니겠어?
이건 사실 딱히 식민 통치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적당히 이용해 먹기 위해서도 호감작은 필수다.
21세기 중국이 동북아에서 고립된 이유가 뭔가.
호감작을 안 해서 그렇다.
물론 뭐…… 내부적인 단속이 필요해서 그러는 거긴 할 텐데, 틈만 나면 김치도 우리 거 한복도 우리 거 하고 있으니 이게 되겠어?
‘능력이 되면 하는 게 맞지.’
그런 의미에서 영국은 지가 식민 통치했던 나라들하고 여전히 영연방이라는 이름하에 잘 지내고 있다.
인도와 영국도 사이가 크게 나쁘지 않다는 걸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신기한 일이고 또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
그 한 가지 방편으로 내가 나선 것이라고 보면 된다.
바야흐로 대영제국의 위대한 귀족 김태평이다, 이 말씀이다.
“죽은 사람들은 더 나왔나?”
“네, 아무래도 4번 그룹에서 더 나왔습니다.”
“그럴 테지. 일단 꺼내서 5번 집으로 가져다 놔.”
“아…… 네. 근데 슬슬 썩기 시작하는데 괜찮을까요?”
“안 괜찮지. 사실 싹 태우는 게 좋긴 한데, 그래도 되나?”
내 말에 통역사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가 이내 답했다.
“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태워야 하면 태워야죠.”
영국에서야 내가 일본통으로 통하지만, 사실…… 알 게 뭐란 말인가.
일본 매장 풍습이니 뭐니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기껏해야 만화책이나 봤지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자리에 통역사도 있고 사무라이도 있다는 건데, 단지 이런저런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좋은 것도 아니었다.
“자네들이 좀 해 주게나. 우리는 달리 할 일이 있어서.”
“아…… 네. 근데 위험하진 않습니까? 접촉하는 게…….”
“위험할 수 있지. 그래서 자네들이 해 줘야 하는 거지. 자네들이야말로 막부의 진정한 충신들이지 않나. 이거 이대로 두었다가 에도 시내로 번지기라도 하면…….”
“하잇.”
써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심지어 레드 코트가 아닌 사무라이들이 움직이면, 아무래도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저 개새끼들은 같은 나라 사람인데 시신 불태우는 불상놈이 되고 우리는 계속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도 모자라 성수까지 베풀어 주는 위대한 외국 분들이 되게 된다.
내 망상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지금.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하, 감사는 무슨.”
긴 막대기에 바가지를 매달고 거기에 밥을 담아 넘기는 중이다.
당연하게도 마스크를 하고 있다, 나도 저들도.
저들의 마스크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수준이긴 할 거다.
며칠째 같은 거 쓰고 있으니 뭐…….
거적때기이지 않겠어?
하지만 그 순간 만큼에라도 공기 중으로 번지는 양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 거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좀 불안해서 먹을 거 주는 건 집 안이 아닌 밖에서 하고 있다.
“여기 마실 것도 가져가게.”
“네!”
물은 무거워서 막대기에 매달 수가 없어 둥근 철통에 담은 채로 밀어 주는 형식으로 하고 있다.
다 먹고 빈 통을 다시 굴려 주면 우리는 그걸 소독액으로 박박 닦아서 다시 물을 채워 주고 있다는 얘기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힘들지는 않다.
직접 간호를 하는 것도, 직접 치료를 하는 것도 아니라 그렇다.
‘사실 치료야 뭐…… 아까 다 했지.’
며칠 전에 우리 애들부터 성수 아니, 우두를 먹였던 것처럼 이 사람들도 다 먹였다는 얘기다.
그게 어떻게 치료가 되냐고 할 수 있는데 감염력이 보다 약한 우두라서 될 수 있는 거다.
실제로 소의 고름 즉 바이러스가 들어가게 되면 인체는 즉시 그에 저항해 싸우기 위한 항체 반응을 일으킨다.
이 항체가 공교롭게도 사람에게 두창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에게도 통하는데 그래서 예방 주사로 효과가 있는 거다.
당연히 치료제로도 쓰일 수 있다.
다만 변수가 있다면 항체 반응이 얼마나 적절히 일어나는가 여부인데…….
“3구역에서도 심해진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 다 빼서 4번 구역으로 보내. 빈 데 있지? 거기로.”
애초에 잘 먹지도 못한 사람들이 뭐 얼마나 면역력이 있겠어.
픽픽 쓰러지는 게 당연하다.
이때 사실 제일 중요한 게 무얼까?
“아, 네! 저희가 할까요?”
“왜 너네가 하냐. 우리는 먹을 거 주는 역할이고 이송은 사무라이들이 하는 거야.”
“그…….”
“주님의 말씀이야. 저들도 다 알아들었잖아?”
먹는 거다, 먹는 거.
밥이라도 잘 먹고, 잘 자면 훨씬 나아진다는 얘기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겨 내지 못하는 나약한 종자들이 있긴 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21세기에도 같은 질환임에도 불구하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언제든 있지 않나.
아, 왜 위험한 일은 다 사무라이에게 맡기고 있나, 인종차별인가 싶을 수도 있을 거다.
아니다.
‘아무래도…… 원인균 자체가 좀 다르지 않겠나? 유럽하고 여기는?’
바이러스 자체는 비슷한 종류겠지만 바이러스는 엄청나게 변이가 빠른 놈들이지 않나.
당연히 유럽과 여기 바이러스는 다를 거다.
그럼 아무래도 여기 있는 놈들이 해당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이 조금이라도 더 세지 않겠어?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진 않겠지만 말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 스스로 너희를 구원하라고! 그럼 보상이 뒤따를 것이다! 너희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신다!
뭐 이런 고급 설명은 아무도 못 알아먹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해 두긴 했다.
확실히 이런 식의 설명이 훨씬 잘 먹히긴 한다.
사무라이들도 우리 애들도 다 알아먹었다.
“네!”
“하잇!”
특히 사무라이들은 이렇게 하면 내가 믿는 신이 그들에게도 뭔가 베풀 것이라는 말이 기뻤는지 뭔지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우리 레드 코트들이야 가장 위험한 임무에서는 배제되었기 때문에 역시나 기쁘게 움직이고 있다.
물론 처음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긴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살아나는 사람들이 점점 나오기 시작했다.
천연두의 치사율은 이렇게 원래 호발하던 지역에서는 대개 30에서 40% 정도가 나오는데 우리는 거의 5% 이내로 나오는 거 같았다.
성급한 판단도 아니고, 거의 열흘이 넘게 지난 시점에 내린 결론이니만큼 다들 놀라고 있다.
“이럴 수가. 이것이 성수의 힘인가.”
‘다들’에는 놀랍게도 리스턴이 포함되어 있다.
이게 벌써 반세기 전에 제너의 종두법의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걸 감안하면 진짜 놀라운 일이다.
심지어 제너는 영국인이잖아.
배울 때는 그냥 그렇게 바로 자리 잡게 된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백신이 자리 잡는 게 쉬울 리가 없지.’
면역학이 완전히 자리하기는커녕 개념이 서기도 전에 나온 백신이지 않나.
생각해 보면 뭘 아는 것도 아닌데 그냥 한번 해 볼까 하고 병원균을 찔러 넣은 건데 진짜…… 우리 영국인들의 용기는 알아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제 몸에 찌르진 않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집안 애한테 그랬다.
미친놈이다, 진짜로.
‘그런 식으로 했으니…… 납득이 잘 안 되지…….’
이론적으로 정립된 것도 아니야.
심지어 연구 방식이 인도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저희 중에 아무도 죽지 않다니…….”
“사실 꼼짝없이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약간 열이나 나고 말았지.”
“그건 신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튼, 이 자리에서 압도적으로 의학적인 지식이 있는 리스턴도 저 지랄이니 뭐 일반인들은 어떻겠나.
특히 사무라이들은 거의 뭐 나를 신처럼 모시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상당한 존경심과 두려움을 보내고 있긴 했는데, 그때는 그냥 용한 주술사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진짜 신 중의 하나가 된 기분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거 같긴 하다.
“걸리면 십중팔구 죽는 병인데…… 어찌 이럴 수가.”
자연적인 상태에서 치사율이 30~40%지 않나.
헌데 현재 일본은 자연적인 상태가 아니다.
대기근이다.
대기근이 있기 전에는 소기근이었다.
그나마 여긴 사실상 에도 권역이라 망정이지 다른 곳은 더 지옥일 거다.
아무튼,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이런 감염병은 치명적이다.
십중팔구가 딱히 과장은 아닐 거라는 얘기다.
“성수에 주님의 은혜로 먹을 것도 먹었으니…… 이게 다 우리 주님의 은혜라고 보면 되네.”
“허…… 정말로 강한 신인가 보군요.”
“그 덕에 대영제국이 이렇게 잘나가는 거 아니겠나?”
“그렇군요…….”
물론 말은 저렇게 해도 진짜로 신이 있다고 믿진 않을 거 같다.
적어도 신이 강해서 대영제국이 잘됐다고 믿진 않을 거다.
19세기쯤 되면 비단 산업 혁명 즉, 근대화가 이루어진 곳이 아니라 해도 어느 정도 괴력난신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기에 그렇다.
저기 조선에 가도 사실…….
정말 불가항력적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미신에만 기대는 일은 드물지 않겠어?
‘아닌가……?’
솔직히 헷갈리긴 한다.
일본만 아니라 조선도 잘 몰라서 그렇다.
무식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막말로 19세기, 20세기 조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있겠어.
기말고사 끝나고 진도 나가는 곳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린 시험에 안 나오면 공부도 안 해요.
“그래도 아직 안심하기는 일러. 좀 기다려 보지.”
“네, 네.”
“내 생각에는 한 4일 정도 기다려 보다가…….”
“4일이면 될까요?”
천연두의 자연 경과는 대개 2주라고 보면 된다.
직접 치료해 봐서 아는 건 아니고, 그냥 너무 중요한 질환이라 그렇다.
심지어 이거 아직도 생화학전에 쓰려고 모아 두고 있는 놈들이 많다 보니 의과 대학에서도 한번 쭉 훑어서 배운다.
혹시 모를 팬데믹 사태에 대비하는 거다.
‘이제 보니 회귀할까 봐 배웠나 싶기도 한데.’
아무튼, 질환은 격리를 언제 시작할지도 중요하지만 언제 해지할지도 중요하다.
나야 근거가 있지만 얘들은 전혀 모른다는 게 문젠데…….
그거야 뭐 상관없다.
“하하, 내가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이라고 했군그래.”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런던에 비해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정말이지 맑은 하늘이 있다는 거다.
그래 봐야 하늘만 보이지만 나는 거기에 뭔가 다른 것도 보이는 척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네. 그때 감사의 제단이라도 차려야겠군그래.”
“제단이요?”
“그래. 적당한 동물을 바치지. 소는 말고.”
“동물이라…….”
“참고로 사람은 안 받으시네.”
“그렇군요.”
아쉬워하는 통역사의 뒤통수를 후리고, 나는 제사 지낼 때 어떻게 하면 더 그럴싸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