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503)
검은 머리 영국 의사-503화(503/505)
503화 역병 [6]
제사.
제사(祭祀)란 신이나 신령, 죽은 사람의 넋 등에게 제물을 봉헌하는 의식을 말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 했다.
문명권과 관계없었다는 말인데, 당연히 일본에서도 신사니 뭐니 해서 이런 걸 한다.
서양은 안 하지 않나 싶을 수도 있는데, 아니다.
얘네도 다 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번거로우니까 안 하게 된 거지…….
“사람은 안 된다니까.”
하여간, 4일이 더 지났다.
14일이 되었다는 얘긴데 놀랍게도 내 부하들, 그러니까 레드 코트들과 사무라이들은 아무도 안 죽었다.
심지어 처음에 조심성 없이 시신 들추고 했던 놈도 살았다.
그놈은 솔직히 성수 덕이 아니라 그냥 지가 강해서 살아난 거 같다.
19세기 일본에서 그렇게 막 사는 놈이 성인이 되었다는 거 자체가 강함을 입증하는 거 아니겠나?
“가, 감사합니다!”
“됐네. 내가 믿는 주께서 우리를 지키신 것인데 내가 감사를 받는 건 적절치 않은 거 같군그래.”
하지만 뭐…….
얘네들이 그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겠나.
막말로 이놈 말고 다른 애들은 실제로 성수 그러니까 소 농양에서 기인한 예방 주사, 아니 예방액의 도움으로 살아났을 거다.
“하지만 그럼 이 마음을 어떻게…….”
“헌금이라는 게 있네. 우리가 영국으로 돌아가면 정식으로 자네 이름으로 바치도록 하지.”
“저, 정말입니까? 그런 수고를……? 영국은 땅끝에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하하. 나는 직업이 의사고 또 신을 모시는 사람인데 그게 수고스럽다고 할 수 있겠나?”
“아니, 그러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집에 가서…….”
“급할 거 없네. 일단 제사부터 드리지. 어허 사람은 안 된다니까.”
해서 나는 정식으로 헌금을 걷기로 했다.
‘자네 정말 영국에 가서 다 바칠 생각인가?’
‘물론이죠.’
‘정말?’
‘수수료는 좀 떼고요. 솔직히 이번 일은 주님보다 제가 더 바쁘긴 했어요. 왜 갑자기 하늘은 보고 그래요?’
‘벼락이라도 떨어질까 봐 그랬네.’
‘아…… 안 그러더라고요. 마음이 넓으신 분입니다.’
리스턴은 그런 내 행태에 경악을 하더니 혀를 쯔쯔 차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아주 잠시뿐이었다.
그도 결국엔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돈을 걷었다.
뛰어난 머리가 어디 가는 게 아니고, 또 조선말과 일본어가 어느 정도 비슷해서 그런가 벌써 나보다 일본어를 더 잘했다.
“돈.”
“아, 하잇!”
“더 많이.”
“하잇!”
방향성이 확실해서 더 그런가 싶기도 하다.
사실 의산데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은데…….
“아잇 사람은 안 된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또 멀쩡한 사람을 들이밀고 있다.
놀랍게도 사무라이나 통역사가 하는 짓이 아니고, 이 마을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적당한 크기의 산 제물을 바치라고 했더니 벌써 몇 명을 끌고 오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딱히 죄책감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아니…… 게다가 어린애잖아?’
아, 어리다고 해서 진짜 아기라는 건 아니고 나보다 조금 어린 정도다.
그러니까 십 대라는 건데…….
‘이렇게 보니까 좀 이쁘게 생겼네.’
여자애다.
어?
그러고 보니 싹 다 여자애였다.
그래 봐야 200호 남짓한 마을에서 이만한 나이대 여자애가 얼마나 될까 싶어 계산을 해 보니 그냥 한 바퀴 돌리고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남녀 차별 보소.’
확실히 일본이 조선보다 이런 면에서 좀 더 미개한 듯하다.
내가 뭐 19세기 조선은 안 가 봤으니까 정확하게는 말 못 하겠는데…….
우리 편견과는 달리 생각보다 조선은 남녀 차별이 덜한 사회였다고 들었던 거 같다.
뭐 제대로 공부한 사람한테 들었던 건 아니고, 그냥 웹소설 하는 친구 놈한테 들은 거라 불확실하긴 하다.
“대체 어떤 사람을 원하시는 겁니까.”
하여간, 내가 한 4번째 빠꾸를 먹이자 통역사가 달려왔다.
정말이지 송구스럽다는 얼굴을 한 채였다.
미친놈인가 싶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 적이 없어서였다.
“사람 필요 없다니까? 리스턴 형님이 잡아 왔잖아?”
우리 리스턴…….
미국에서 그 큰 곰도 혼자 잡았던 사람 아닌가.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기가 필요하다, 이거지?’ 하더니 갑자기 산으로 들로 뛰어 들어가 저걸 잡아 왔다.
말 그대로 집채만 한 곰이 있었다.
그것도 가죽은 또 귀신같이 벗겨 놔서 약간 인체의 신비전에 있을 법한 퀄리티로 세워 놓았다.
이따 불 한번 피워서 연기가 올라간다 싶으면 끄고 마을 사람들 몸보신이나 시켜 줄 요량이었다.
통역사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한번 보고 나면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광경이다.
녀석도 곰 쪽을 힐끔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물이 아니라 그 답례 아닙니까.”
“답례……? 뭔 소리야 그건 또.”
“지금 제일 좋은 집 다 비워 놓고 치우고 있지 않습니까.”
“아…… 우린 필요 없는데.”
19세기 일본 농촌은 좀 끔찍한 수준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어떻게 성공하고 난 다음에 지은 집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여기는 좀 아니다.
그나마 촌장인지 나발인지의 집은 상당하긴 한데, 거기도 반복되는 기근 탓에 관리가 좀 안 되었는지 여기저기 무너져 있다.
한때는 괜찮았던 적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들어가서 자라고 하면 폐가 체험 같은 게 될 거 같다, 이 말이다.
“아, 우리라고 하진 말게나.”
“응?”
그때 리스턴이 나섰다.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끔뻑이고 있으려니 리스턴이 슥 다가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 하룻밤을 허락하겠다, 뭐 이런 거던데……?”
“아……? 아. 아니, 그럼 답례라는 게?”
“하하, 그런 거지. 우리 고생은 했잖아.”
“아니, 그렇다고 해도 그냥 막 잔다고?”
“막이라니. 생각해 보게. 우리 같이 우수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씨앗을 뿌려야 할 의무가 있다네.”
“지랄…… 지랄 마세요.”
우생학의 깊은 뿌리가 이미 자라고 있다는 걸 느낀다.
열강들이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수탈할 수 있는 학문적 기초가 거기 있으니 뭐 할 말 다 한 셈이다.
심지어 다윈의 진화론이 거기에 쐐기를 박을 거다.
그 결과 정말 이상한 이론이 하나 나오는데…….
우리 백인은 주님의 선택을 받은 선한 민족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화된 인간으로서 나머지 열등한 인종을 가르치고 개화하고(수탈도 하고) 할 의무와 권리가 있다는 거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자기 필요에 따라 섞어 만든 기가 막힌 이론이라 할 수 있겠다.
“지랄이라니.”
“그리고 형님은 그러고 싶습니까?”
“그러고 싶네. 이쁘잖아.”
“쟤 내가 기억하는데, 천연두 앓았던 애예요. 그나마 우리가 밥 줘서 저만치 나은 거지…… 아직 온전한 상태도 아닐 거라고요.”
“으음…….”
“환자를 범하고 싶습니까?”
“버, 범하다니. 상호간에 다 양해가 된 건데.”
“쟤가 양해했어요? 여기 있는 마을 놈들이 한 거지.”
내 말에 리스턴은 한 자락 남아 있던 양심이 팔락거리기 시작했는지 끙 소리를 냈다.
그나마 이 형님이랑 다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막말로 힘으로 ‘나 할 건데!’ 하면 누가 말릴 수 있겠나.
허나 내 세 치 혀만으로도 어느 정도 제어가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런 제기랄.”
“그래요.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임을 우리 잊지 않도록 해요.”
“제길!”
“욕은 이제 하지 말고요. 사람들 겁 먹어요. 아까 곰 혼자 이고 왔을 떄부터 이미 다들 쫄았다고.”
“그걸로 어필한 거 아닐까? 강한 남성! 이것이야말로 모든 여인들이 동경하는 사내 아니겠나.”
“그…… 저게 동경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보여요?”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리스턴은 말 그대로 오니라도 본 듯한 소녀를 확인하고는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물론 눈이 마주쳤던 소녀는 ‘꺄악’ 하고 도망갔다.
상호 간에 양해?
말이 되냐?
‘만약 덜커덕 임신이라도 해 봐라…… 자식은 그대로 나X토 되는 거야…….’
생각보다 인간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용납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그나마 티브이로라도 접했으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지 않나.
나X토야 구미호라도 가지고 있고 또 엄청 세기라도 하지…….
‘아니, 세긴 하겠네. 리스턴 자식이면.’
음.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궁금하긴 하다.
하지만 내 싸구려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몇몇의 인생을 가지고 실험하는 건 역시 할 짓은 아닌 듯했다.
해서 우리는 답례를 정중히 거절하고, 곰에 불이나 붙이기로 했다.
오랜 가뭄 탓에 사방에 널리고 널린 게 마른 장작이다 보니 불붙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앞에 선 채 부채를 펼쳤다.
“주여어어어어!”
어릴 적 보육원 원장님을 따라서 갔던 부흥회의 한 목사님을 따라 소리를 질렀다.
약간 쉰 목소리가 홀리해 보인다는 건 그때 학습했더랬다.
나야 뭐 나이도 어리고 해서 짱짱한 목소리만 튀어 나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내가 보여 주었던 여러 이적 때문인지 아니면 선 채로 불타고 있는 곰 사체 때문인지 다들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제 이 악령이 마을에서 완전히 떠나게 하소서어어어어! 아멘 안 해?”
“아이메느!”
“이제 이 땅에 태평천하가 강림하게 하소서어어어! 태평 안 해?”
“태평!”
나는 부채를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곰 사체 주변을 돌았다.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였는데 아멘은 아무래도 19세기 일본인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발음인 듯했다.
아이메느라니.
누구도 네 신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했거늘…….
해서 나는 조금이라도 일본 친화적인 문구를 찾다가 시간이 없어서 그만 내 이름을 부르고 말았다.
우연일까?
아니면 내 이름은 주구장창 들어와서일까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귀신같이 발음을 잘해서 놀랐다.
“자아 간다, 간다. 이놈 태평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태평!”
때마침 리스턴이 일부러 남겨 둔 가죽 끝이 후루룩 타면서 흰 연기가 아닌 검은 연기가 나길래 나가라고 외쳤다.
그러자 다들 막 자지러지듯 놀라면서 태평을 외쳤다.
그사이에 곰을 살폈는데 더 이렇게 했다가는 홀랑 탈 거 같아서 그만하기로 했다.
어차피 뭐…….
여기서 더 해 봐야 신앙심이 깎이면 깎이지 더 올라갈 거 같진 않아서였다.
이미 만땅이다, 이 말이다.
‘신앙심 이빠이데스네.’
나는 그 생각과 함께 후후 웃고는 리스턴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리스턴이 칼을 뽑아 들고 달려와서는 곰 토막 쇼를 선보였다.
모르는 이들에게는 이 또한 신성한 의식으로 보일 거 같았다.
사람 뼈보다도 훨씬 두꺼운 곰 뼈가 그냥 뎅강뎅강 잘려나가니 이게 신성력이지 다른 게 신성력이겠나.
하여간, 그렇게 토막 난 곰을 굽자 솔직히 말해서 막 먹기 좋은 냄새가 나진 않았다.
곰이 맛있었으면 21세기 사람들이 얼마나 맛잘알인데 가축화했겠지 않겠나.
하지만 그건 나나 리스턴처럼 배부른 인간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었고 다른 마을 사람들은 그저 고기가 귀할 뿐인 듯했다.
딱히 말도 더 안 했는데 여기저기서 태평, 태평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