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504)
검은 머리 영국 의사-504화(504/505)
504화 조약 [1]
“오, 자네 왔는가.”
엘긴 백작님은 우리 없는 동안 아주 그냥 팔자가 피셨는지 살이 더 찐 상황이었다.
여기가 무슨 영국처럼 엄청 부유한 나라는 아니지 않나.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기근이 덮친 상황이다.
당장 여기서 몇 마일만 밖으로 나가면 굶어 죽는 사람이 천지는 아니어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접을 하고 있다는 것은…….
“자네 덕을 아주 톡톡히 봤네. 며칠 전부터 뭐…… 소도 잡아 오고 닭은 매일 잡고 아주 난리도 아닐세. 해산물은 이제 그만 주면 좋겠는데…… 이 미개한 놈들은 왜 이걸 익히지도 않고 자꾸 주는 겐가.”
“익히지 않은 해산물을 먹어요?”
“그렇다니까! 예의상 한점은 먹었는데…… 아휴…… 밑에 웬…… 그걸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 쌀? 밥? 아무튼, 그걸 깔아 놨는데 이게 또 시더라고. 미쳐 버리는 줄 알았네.”
“신 밥도 줬다고요?”
“어, 그렇다니까. 그나마 좀 달아서 먹었지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토했을 거야.”
“달기까지 했다고요?”
“그래!”
아니…….
이제 보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백작님이 번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하니 19세기에 초밥이 있을는지는 몰랐다.
그것도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상당히 비슷한 형태로.
‘그러고 보니 전통 있는 초밥집들은 1800년대에 연 초밥집들도 있다고 하긴 했지?’
아무리 그래도 좀 살게 된 후에, 그러니까 메이지 유신 이후에 생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갑자기 입에 침이 미친 듯이 고이기 시작했다.
전생에 먹었던 초밥 맛이 생각나서 그랬다.
그때도 사실 마트 초밥 말고 스시야에서 먹는 초밥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그나마 교수님이 1년에 한 번 정도 사은회로 우리가 선물을 드리면 답례 형식으로 사 주시는 게 다였는데…….
‘와 이러니까 내가 일뽕이라도 된 거 같네.’
오해할 수 있는데, 아니다.
정 미심쩍으면 네가 한번 영국 와서 살아 봐라.
아, 21세기 영국 말고 19세기 영국.
이 미친 새끼들은 음식을 어떻게 하면 맛없게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놈들 같다.
간혹 깨어 있는 척하는 놈들이 그 정도는 아니네, 영국 음식 생각보다 괜찮네 하는데…….
영국 놈들 본인도 지들 음식은 맛이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겸손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앵글로·색슨이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미 문명인 아웃이다, 진짜로.
“그나저나 자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내가 잠시 초밥에 눈이 돌아가 있던 사이 엘긴 백작은 나와 리스턴을 제대로 된 의자에 앉혔다.
그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찰스 대위도 함께였다.
나머지 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거의 2주가 넘도록 나와 함께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허나 리스턴도 찰스 대위도 스스로 대답하는 대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뭐…… 사실상 내가 다 하긴 했지?’
역시나 경우를 아는 놈들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잘산 거기도 하다.
복 중에 가장 큰 복이 인복이라고 하잖아?
근데 인복이 있으려면 당연히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하나 있는데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거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
내가 좋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나도 좋은 사람이 되면 되는 거다.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네, 평이가 저지른 일입니다.”
“응?”
언젠가 쓸 자기 계발서, <19세기 영국에서 동양인으로 성공하는 법>에 들어갈 내용을 머릿속으로나마 써 내려가고 있으려니 둘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뭔 일인가 싶었다.
해서 둘을 보니, 둘 다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를 보면서가 아니라 백작님을 보면서였다.
다시 말해 지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예 모르고 있다는 걸 어필하고 있는 듯했다.
‘뭐…… 그것도 어떻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
막말로 둘이 한 게 뭐 있나.
아, 리스턴은 꽤 많은 일을 하긴 했다.
간이 집도 만들고, 곰도 잡아 오고, 중간중간 마을로 접근하던 멍청한 놈들 내쫓기도 하고.
나중에 알고 보니 마냥 멍청한 게 아니라 막부에서 접근을 막은 지역, 즉 역병이 도는 지역만 전문적으로 터는 놈들이라고 했다.
-그런 줄 알았으면 베는 건데.
리스턴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셨지만, 뭐…… 내쫓기만 해도 잘한 거라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눈앞에 있는 작은 재물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병을 퍼뜨릴 수도 있는 놈들이지 않나.
아…….
아니, 이렇게 생각하니까 죽이는 게 맞는 거 같다.
얼굴 기억했으니까 나중에라도 마주치면 죽이라고 해야겠다.
“그래, 평.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하여간, 엘긴 백작님이 나를 보며 물었다.
나도 귀족이지만 ‘같은’ 귀족이라고 하기엔 상당한 차이가 있지 않겠나.
일단 나는 말단이고 이쪽은 무려 백작이다.
심지어 세습 작위다.
쭉쭉 물려줄 수 있는 자리다, 이 말이다.
심지어 해적질하는 나라에서 가장 우대하는, 외국으로 나도는 귀족이시다.
“아,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내 궁금해 죽는 줄 알았네. 자네가 주술로 악신을 죽였다느니…… 뭐 그런 소리가 들려서 말이야.”
“아.”
그런 쪽으로 소문이 돌았군.
예전의 나였다면 기함했을 거다.
‘내가 21세기 의사인데 어떻게 이런 모함을!’ 이러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많이 성장했다, 나도.
‘그럼 그쪽으로 이용을 해야겠군.’
왜……?
왜 바꿔?
악신 죽이는 게 생각해 보면 진짜 어려운 일이잖아.
그런 게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거부터 해야 하긴 하겠지만…….
적어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거 진짜 어마어마한 거다.
그럼 그걸 이용할 생각을 해야지 죽자고 아니라고 하는 건 멍청한 짓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 그러긴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죠.”
“허. 자세히 듣고 싶구만.”
“그 전에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
“이곳은 주님을 믿는 자가 거의 없는 믿음의 황무지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여기서만 가능한 이적들이 있습니다. 아마 이미 주님의 땅이 된 대영제국에서는 같은 기적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그것은…… 왜…… 왜 그러시는 거지?”
백작님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이것도 퍽 불경한 일이다.
어디 감히 인간 주제에 신의 섭리를 이해하겠다 나선단 말인가.
물론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이미 다 논리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겸손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이미 충분히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 영국에 더한 이적이 필요합니까?”
“아…….”
“여기서 더 바라는 것은 욕심이고 더 나아가 주 여호와를 시험하는 일에 해당할 겁니다.”
“아, 그렇구만. 내 생각이 짧았네!”
“다만 성수는 그대로 통할 겁니다.”
“성수……?”
“이미 제너라는 선지자를 통해 선보이신 바 있습니다. 그가 세례 요한인 셈이죠.”
“제너…… 에드워드 제너? 우두로 천연두를 치료할 수 있다고 했던 놈…… 아니, 분 말하는 건가.”
제너는 위대한 사람이 맞다.
하지만 그가 택했던 방식이 좀 폭력적이긴 했는데,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서양에 잔뜩 퍼져 있는 백신에 대한 반감 중 태반은 그가 조성한 게 아니었을까?
물론 탓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가 살린 사람 수는 감히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을 테니까.
“네. 원래 인자는 핍박을 받기 마련이죠. 그의 이론을 공격하는 학자가 많은 줄로 압니다. 주님의 은혜를 어찌 이론으로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 그렇게 생각하니, 납득이 가는구만그래.”
“네. 이것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간혹 맞고 죽는 사람도 있긴 하던데.”
엘긴 백작의 말이 맞긴 하다.
아무리 우두라 해도 바이러스는 바이러스지 않나.
쇠약한 사람이거나 면역 저하자거나 혹은 건강한 성인이라고 해도 아다리가 맞지 않은 경우에는 충분히 감염될 수 있고 또 그로 인해 죽을 수 있다.
확률로도 설명할 수 있고 이론적으로도 풀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19세기 후반에, 그러니까 나 죽을 때쯤 돼야 가능한 일이다.
아직은 신비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시대지 않나.
‘누군가는 나를 시대와 야합했다고 하겠지만…….’
너희 중에 시대를 온전히 거스를 수 있는 자만 돌을 던지라고 하겠다.
21세기 같은 말랑말랑한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 소리를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거다.
만약 내가 여기서 처음부터 그랬잖아?
지금 이룩한 의학의 진보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죽거나 배제되어서 이스트엔드에서 굶어 죽어 가고 있을 테니까.
아니, 나는 노란 원숭이니까 맞아 죽어 가고 있을 공산이 크다.
“죄인은 어디에나 있죠.”
“응?”
“주님이 보시기에 죄인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한없이 깨끗해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경우도 있고 또 한없이 나쁜 놈으로 보이는 놈이 이상하게 승승장구하는 경우가 있는 걸 많이 보셨을 겝니다.”
“아…… 그건 그렇긴 하지. 하, 그것이 신의 섭리다, 이건가.”
권선징악이라는 전통의 패턴은 동양에서만 공유되는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도 다 좋아하는 이야기다.
왜 그럴까 하고 고민해 봤는데…….
아무리 봐도 실제로는 그게 잘 안 돼서 그런 거 같다.
‘천벌?’
나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시커먼 런던과는 달리 화창한 하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저 하늘이 인세를 제대로 굽어보고 있단 느낌은 받지 못했다.
21세기도 그랬듯 지금도 여전히 나쁜 놈들이 더 잘나가는 경우가 있기에 그렇다.
“그렇구만…… 그럼 주님의 이적을 발휘한 거다, 이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하다 보니 좀 이상해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여기 리스턴 경이나 찰스 대위가 보기엔 그랬을 수 있죠. 하지만 주님께 맹세코 전부 주님의 행사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겠지. 자네가 설마하니 뭐, 진짜 이단이겠나.”
“그럼요. 그런 요사스러운 말을 하는 놈들은 전부 혀를 뽑아야 합니다. 이 또한 주님의 뜻입니다.”
“하하.”
“물론 저는 주님의 사자이므로 용서를 한 번쯤은 하겠지만요.”
“과연. 아무튼, 자네가 역병을 막아 준 덕에 막부는 우리에게 아주 호의적으로 나오고 있네. 아무래도 지금까지 근처에서 떠돌던 흑선이니 하는 것들과는 다르게 보는 거 같아.”
엘긴 백작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과거 우리의 식민지였던, 그런 주제에 감히 태평양 너머 필리핀을 식민지 삼은 것도 모자라 일본에도 침을 바르려고 했던 미국을 언급했다.
“아무래도 우리 대영제국이 미국과는 다르지 않겠나.”
“그럼요. 거기야 뭐…… 사실 근본 없는 것들 아닙니까? 보셨습니까? 아무 데나 침이나 뱉고…… 촌것들이죠.”
“그래, 그래. 그럼 오늘 내일은 푹 쉬게. 모레 막부에 들어가게 됐어. 원래 더 일찍 불렀는데, 내 자네와 함께 가려고 좀 기다려 달라 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