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505)
검은 머리 영국 의사-505화(505/505)
505화 조약 [2]
막부고 나발이고 솔직히 내 알 바는 아니었다.
21세기의 일본은 마X오와 포X몬을 앞세운 귀여운 나라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일본은 덴노 반자이를 앞세운 아주 끔찍한 나라지 않나.
일이 잘되기야 하겠지만…….
글쎄.
대영제국과의 일이 잘되는 게 과연 무슨 결과를 초래하게 될까.
‘초밥이나 먹어 봐야겠다…….’
이곳의 음식이 확실히 영국보다는 낫긴 했다.
특히 나는 그나마 야채를 먹는 것에 익숙한 입맛을 지니고 있는 데다가, 간장 베이스의 소스는 그리워하기까지 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생에 애니로 일어를 배운 친구를 따라 일본 여행을 왔을 때 느꼈던 그 감동의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라멘……? 라멘와 난데스까?
내 나이 26.
인턴 끝나고 1년 차 들어가기 전, 교수님의 이제 들어오면 뒈지게 고생할 날만 남았으니 주말을 껴서 어디 다녀오라는 말에 무작정 날아왔던 곳이 바로 이곳 도쿄였다.
인턴 1년 동안 번 돈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본과 때 생활비로 썼던 마이너스 통장을 갚는 데 쓰였기 때문에 정작 여행에서 쓸 수 있는 돈은 그리 넉넉지가 못했다.
뭐 괜찮았다.
어차피 전생의 삶이란 대개 그러했으니까.
‘라멘이 없는 일본이라니?’
그때 먹었던 음식 중에 솔직히 제일 맛있었던 건 초밥도 아니고 소고기도 아니고 라멘이었다.
그중에서도 이치란.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놈들이 자꾸 아, 이치란? 라멘 맛 잘 모르는구나? 이 지랄 하던데…….
뭐가 되었건 입맛은 각자 다른 거 아니겠나.
나한테는 이치란이 최고였다.
솔직히 이번에 오면서도 그 비슷한 돈코츠 라멘이 있진 않을까 기대했었고.
하지만 정말로 놀랍게도 지금 일본엔 라멘이라는 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와규야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와규란 좁은 의미로 일본 재래 소를 뜻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와규는 소고기를 의미할 터였다.
나에게도 그랬다.
진짜 큰마음 먹고 방문했던 철판구이집에서 먹었던 와규 구이 맛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말을 잘못했다.
솔직히 이치란보단 그게 더 맛있긴 했네.
‘아예 소고기 먹는 문화가 없을 줄은 몰랐지.’
그 탓일까?
나한테 일본은 어쩐지 소고기의 나라로도 인식되고 있었다.
헌데 지금의 일본은 소를 먹기는커녕 신줏단지 모시듯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쯤 되니 어둠의 독립군, 대일본제국의 진정한 명장 무다구치 렌야의 말이 아예 없던 말은 아닌 거 같다.
일본인은 진짜 채식하는 초식 동물인가 싶기도 하다, 이 말이다.
하긴 그러니까 사무라이들도 체격이 저 모양이긴 할 거다.
칼 없이 붙으면 내가 이길 거 같어.
“아니, 그건 아닐세.”
“응?”
“저 인간들 눈을 보게나. 주술을 쓴다면 모를까…… 그냥 붙어서는 자네에게는 승산이 없어.”
“뭔 소리예요, 갑자기.”
“칼 없이 붙으면 이길 거 같다고 하지 않았나? 아, 생각한 건가.”
“뭐야. 시벌. 뭐야.”
이 양반이 요새 무당들하고 붙어먹더니 이제 점도 치나 싶었다.
알고 보니 그건 아니긴 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시내 구경 갈 거지?”
“어…… 네. 그러려고요. 형님은요?”
“나? 나도 가야지. 여기 혼자 있어서 뭐 해.”
“여자 꼬셔 본다면서요.”
“하하…… 포기했네. 주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듯하여.”
리스턴은 말로는 주님 주님 했지만 불만 어린 눈을 한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긴 뭐……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가는 데마다 굶어 죽고…….
끝에는 천연두 도는 마을을 마주쳐서 2주간 잡혀 있었으니 뭐…….
19세기 일본 사정을 고려하면 당연히 이렇게 될 일이었지만, 리스턴 입장에서는 충분히 ‘신이 원치 않았구나!’ 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럼 갈까요? 형님이랑 가는 거면 통역사만 데리고 가도 되겠네.”
“아…… 그래. 그놈들이랑 가면 번거롭지.”
“쓸데없는 시비는 피할 수 있다는데, 시비는 그놈들이 먼저 걸잖아요.”
“그러니까 말이야. 이곳의 지배층은 우리 영국의 귀족들과는 많이 다른 거 같아.”
할 말이 많았지만 구태여 말을 보태진 않았다.
대신 생각하는 건 자유이니만큼 몇몇 사례를 떠올렸다.
굳이 강간 대장까지 갈 것도 없었다.
그냥…….
우리 영국은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에겐 적용되는 법이 다르다는 것만 유념하면 된다.
아니, 사법 체계 전체가 돈 있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괜히 21세기에도 영국에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는 사람들이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 게 아니란 거다.
“네, 그렇죠.”
물론 내가 그런 걸 언급할 필요는 없긴 하다.
왜?
나도 이제 그 법체계에 의해 보호받는 기득권이거든.
모르긴 해도…… 어지간한 잘못으로는 기소될 일도 없을 거다.
날 기소하는 순간 해당 검사는 주술과 물리적인 폭력 외에도 각종 외압에 시달리게 될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어렵게 재판까지 간다고 해도 유죄가 뜨는 건 하늘의 별 따기일 거다.
나한테 이것저것 얻어먹은 사람들이 사방 천지에 깔려 있는 데다가, 내가 당장 사라지면 곤란해질 거물들이 많으니까.
“이래서…… 계몽을 해야 하는 거지.”
리스턴은 실로 영국인스러운 말을 하면서, 통역사를 대동한 채 거리로 나섰다.
그 말은 리스턴의 말을 죄 알아듣는 일본인이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통역사는 리스턴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신 웃기만 했다.
누가 보면 일본이 대영제국 식민지인 줄 알 거다.
온갖 모욕적인 말을 하는데도 현지인은 웃고 있으니까.
“네? 스시요?”
“없나? 그런 거? 어제 백작님이 드시고 있던데.”
“아…… 있긴 합니다만…… 사실 그게 백작님용이 아니라 하인들 먹으라고 갖다 둔 건데 착오가 있었던 겁니다. 아까 잘 말씀드렸습니다.”
“잉……?”
스시는 고급 음식 아닌가?
아까 철판구이 얘기했지만…….
무리를 해도 못 간 곳이 바로 스시야였다.
나중에 교수님이 사 줘서 한국에서나 갔지 내 돈으로 간 일본에서는 가격표 보고 얌전히 돌아서서 회전 초밥이나 먹었더랬다.
말이 ‘회전 초밥이나’지 거기도 비쌌다.
<미스X 초밥왕> 보고 있으면 비쌀 만한 거 같았다.
생선 가지고 별 지랄을 다 하는데 돈 좀 비싸게 받아도 되지 않겠어?
무엇보다 교수님 따라가서 먹은 제대로 된 초밥은 진짜 이것보다 맛있는 음식은 드물겠다 싶을 지경이었다.
“아…… 그게…… 그 항만 노동자들이 주로 먹는 음식입니다. 개중에는 좀 비싸게 받는 놈들도 있긴 한데…… 거참. 이게 왜 거기로 갔는지. 아! 제대로 된 스시가 있긴 합니다. 거기로 모실까요?”
“오, 그래? 제대로 된 스시?”
“네. 사실 이게 만드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거든요. 그나마 예전에는 고을마다 고유의 스시를 만들기도 했다고 하는데, 워낙 손이 많이 가다 보니 요새는 거의 없습니다.”
“오…….”
내 반응에 리스턴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긍정의 표시일 터였다.
영국인의 장점 중 하나였다.
워낙 자국 음식이 개판이다 보니 음식에 대해서만큼은 많이 열려 있다.
특히 인도 쪽에 주재하는 영국인들은 식성이 거의 반인도인이 되었을 정도다.
“스시라는 음식이 아주 맛있는 겁니다.”
“그래? 허……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기대가 되는데.”
그에 비해 나는 상당히 까다로운 편에 속한다.
싸가지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그냥 21세기 한국인이어서 그렇다.
맛잘알 쩝쩝박사님들이 만든 음식 먹다가 19세기, 그것도 하필이면 영국에 떨어졌으니 먹을 것이 있게 느껴졌겠어?
괜히 내가 계란프라이를 좋아하게 된 게 아니다.
그건 그냥 소금에 후추만 뿌려 먹어도 맛있잖아.
아, 소금도 후추도 17, 18세기에 비하면 많이 싸졌으니 그리 사치하는 건 아니다.
“음.”
“으음…….”
하여간, 그렇게 엄청 유명한 집이라고 호언장담하는 통역사를 따라 걷다 보니 과연 오래되어 보이는 음식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도 시대가 시작된 지도 벌써 수백 년이나 된 데다가 상업적으로도 제법 발달한 도시다 보니 꽤나 그럴싸해 보이는 곳이었다.
오래되었지만 잘 관리된 목조 건물 하며…….
나름 정갈하게 자란 나무와 풀 그리고 적절한 곳에 놓인 바위와 돌무더기까지,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보다도 더 좋아 보였다.
허나 그런 것보다 훨씬 인상적인 건 따로 있었다.
“대체 이게 뭔 냄샌가…… 김치보다 더 역한데……? 그러고 보니 자네 이런 거 좋아하지.”
“아니, 아뇨? 이건…… 이런 냄새는 저도 처음인데요?”
“무슨 소린가. 전에 김치 먹여 준다고 하더니 이런 거 꺼냈잖아.”
“그건…… 냉장고 없어서 예상을 못 한 거고.”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만그래. 세상에 물건을 차갑게 할 수 있는 기계가 어딨다고.”
“아니, 아무튼, 나는 이런 거는 몰라!”
냄새가…….
시발 진짜 욕 나올 정도로 역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옆에 어디 오물 처리장이라도 있나 싶을 지경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우리가 먹을 음식에서 나는 냄새인 듯했다.
통역사가 아까부터 마치 천상의 냄새라도 맡은 것처럼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뒤통수를 후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철썩 소리가 났다.
“으억.”
리스턴이었다.
“이 미친놈이 맛있는 거 먹여 준다고 해 놓고 이런 데를 와?”
“아…… 억울합니다. 진짜 맛있습니다.”
“맛이 있다고? 이렇게 냄새가 나는데?”
“네네. 생선을 발효시킨 거란 말입니다.”
나는 한 대 더 치고 싶었다.
모름지기 스시란 싱싱한 생선을 초밥 위에 올려 먹는 음식 아니던가?
“저기 항구에서 파는 건 가짜입니다. 이 진짜에서 나는 신맛을 흉내 내려고 일부러 식초를 뿌린 거예요.”
“아.”
“이렇게 제대로 만들려면 돈도 시간도 너무 많이 드니까 싸게싸게 만드는 거죠.”
“아.”
이제 보니 나를 한 대 후려쳐야 할 거 같았다.
스시에 이런 내막이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역시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하는 법이다.
무식하면 나같이 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이 미친 듯이 역한 냄새가 나는 가게에 들어와서 앉게 된다는 거다.
놀랍게도 리스턴은 이미 적응한 듯했다.
“생선 발효면 이럴 수 있지.”
태평한 소리나 해 대면서였다.
“아니…… 형님. 이걸 먹겠다고요?”
“그러고 보니 냄새가 이게 썩힌 게 아니라 삭힌 거야. 언젠가 한번 먹어 본 적이 있는데, 의외로 괜찮았네.”
“아니…… 형님.”
“하하. 자네도 먹어 보게나. 이거 맛있을 거야. 기대가 되는데?”
손을 싹싹 비비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 같았다.
미친놈…….
삭힌 거나 썩힌 거나 냄새가 이 정도 나면 도긴개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이내 스시가 나왔다.
열받게 뭉개진 생선 사이로 밥알이 잔뜩 있었다.
정말로 이게 내가 알던 스시의 원형이긴 한 모양이었다.
세상에 여기서…… 그 신선한 음식이 나왔을 줄이야.
“드셔 보시죠.”
“어…… 오.”
방금 리스턴 눈에 흰자위만 있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천상에 가는 맛인 모양이다.
“먹어 보게! 나는 더 먹어야겠어!”
독에 취한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런 호들갑을 보고 나니 나도 입맛이 싹 돌긴 해서 한 점 입에 넣어 보았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