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51)
검은 머리 영국 의사-51화(51/505)
51화 수혈 [1]
“피 납니다!”
나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재구성해 보았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개새끼들.
뻔하지.
“어디!”
블런델은 맨날 있을 일임에도 불구하고 헐레벌떡 달렸다.
아마 그랬을 거다.
“환자…… 질 안에서…… 출혈이…….”
“이런.”
전치태반(태반이 산도를 막는 것)이었을까?
나도 산부인과 지식은 그렇게까지 훌륭한 건 아니다 보니, 인제 와서 예상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그때 난 해부 실습실에 있었단 말이지.
하여간, 환자는 어마어마한 출혈을 보였다고 했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21세기에도 산부인과는 응급 환자를 마취과 컨펌 없이 그대로 수술방으로 밀고 들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과이지 않나.
그만큼 엄청난 출혈도 흔한 과였다.
“틀어막아!”
“네!”
다만 문제가 있다면…….
21세기 산부인과는 뭐라도 할 수 있는 데 반해, 이 시기의 산부인과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제왕절개를 시행해 볼 수도 있긴 하지만, 마취라는 게 없는 시대에서 둘 다 살리는 건 어렵다고 봐야 했고, 산모 또는 태아 둘 중 하나만 살리게 되는 경우가 최선이었다.
대개는 둘 다 죽었다.
그 외의 경우, 즉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는 상황인 전치태반과 같은 경우라면 말 그대로 손 쓸 도리조차 없었다.
“계속…… 계속 나오는데요.”
“어쩔 수 없어! 틀어막아!”
특히 지혈에 있어서는 여전히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마취가 가능해졌으니, 정말로 위험할 것 같으면 배 열고 자궁 절제술이라도 하면 나았을 텐데.
원래 사람의 발상이라는 게 그렇게 딱딱 바뀌지는 않는 법이었다.
게다가 피도 나는 상황이지 않나.
붉은 피.
조금만 봐도 기절하는 사람이 있는데,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누구라도 냉정을 찾기 어려웠다.
“어…… 환자 의식이!”
“이런 젠장! 또!”
다행이라는 말을 쓰기는 어려웠다.
의사가 죽음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긴 하지만, 이 시기 의사들에게는 좀 다른 의미로 쓸 수밖에 없거든.
익숙해도 너무 익숙하잖아.
맨날 죽어.
진짜로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허구한 날 죽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전치태반이 찢어지면서 피가 나는 상황에 질 입구를 천으로, 그것도 더러운 천으로 틀어막는 게 한계인데 치료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나.
차라리 피를 멎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어찌 되었건, 피가 멎으면 감염의 위험성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테니까.
“어쩌죠. 관찰실로 갈까요?”
“음.”
이 시기 관찰실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집중치료실 또는 중환자실하고는 좀 다른 개념이었다.
말 그대로 관찰했다.
그러다 환자가 가면, 안타까워했다.
아이구 저런, 이러면서.
그런데도 보호자들 중에서는 오히려 좋아하는 이들이 있었다.
뭐가 되었건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두통으로 왔다가 피 뽑히고 죽는 경우가 종종 있는 19세기 병원에서는 이 또한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아니, 아닐세.”
하여간, 우리의 닥터 블런델은 그때 손을 내저었다.
용기?
아니, 만용을 냈다.
여기서 내가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사실이 좀 한스러웠다.
‘아…… 내가 그 발상을…… 준 거나 마찬가지겠지?’
얼마 전, 아니, 얼마 전도 아니고 바로 어제지.
블런델과 나는 꽤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나름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영감을 너무 많이 준 모양이었다.
특히 볼륨.
즉 혈관을 채우고 돌아가는 물의 개념에 대해…….
“피를 주지.”
“네? 수혈을요? 그건…… 어…… 송아지를 어디서 구하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몰라도, 19세기 의료진들 역시 뭐가 되었건 수혈에 대한 개념은 잡혀 있었다.
이미 심장이라는 기관이 있고, 그 기관이 뛰면서 혈관으로 피를 보낸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피에 뒤섞인 물질이 전신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또 피가 부족해서 죽어 가는 동물에게 피를 주면 살아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허나 어떤 피를 줘야 하는지는 몰랐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 피를 준다는 건 일종의 흡혈귀 같다는 인식 때문이었을까?
대개의 병원에서는 동물 피를 줬다.
“아니, 우리는…….”
사람에게 동물 피를 주면 어찌 될까?
같은 사람끼리조차 다른 혈액형의 피를 주면 양이 적을 땐 용혈성(적혈구를 파괴하는 성질) 부작용을 겪고, 양이 많으면 죽는데, 동물 피를 주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수혈의 역사는 죽음의 역사와 동음이의어인 수준이었다.
나도 대체 이 시기에는 뭘 어떻게 했나 궁금해서 찾아보니까 그렇더라고.
해서 교황청에서 이를 아예 금했는데, 영국에서 교황청의 권위가 뭐 대단한 건 아니니 어긴다고 해서 별일이 있지는 않겠지만.
간호사는 그로 인한 폐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낯빛이 대단히 어두웠다.
“우리는 사람 피를 준다.”
하여간, 우리의 블런델 교수는 신박한 발상의 전환을 해냈다.
간호사의 낯빛이 더더욱 어두워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이들조차 만류하기 시작했다.
했을 거다.
진취적인 데라고는 없는 놈들이니까.
“그, 그건…… 흡혈귀나 하는…….”
“네. 그건 안 될 일입니다!”
“시끄러워! 언제까지 그런 미신에 사로잡혀 있을 건가! 명색이 과학자라는 것들이 뭐? 흡혈귀? 그러니까 시신이 되살아난다는 둥, 이상한 말이나 하지!”
“진짜로 살아났다는데요?”
“뭔 지랄이야!”
“그, 동양…… 조선에서 온 마술사가 시신 하나를…….”
“지랄 마! 살아 있는 사람을 묻었는데 그걸 구해 온 거지. 그걸 어떻게…… 아휴. 내가 이런 것들을 데리고…….”
블런델은 믿음이 부족한 자들 아니, 오히려 미신에 대한 믿음이 너무 큰 놈들에게 역정을 내고는 말을 이었다.
“피를 주면 깨어난다는 실험. 무엇으로 했나?”
“개 피로 했습니다. 아, 그렇다면 개 피로 할까요? 사실 송아지나 어린 양의 피를 쓴다는 것이 다분히 성경적인 사고에서 나온 결론 아닙니까.”
“후.”
그는 화를 참느라 여념이 없었다.
개 피를 주자고?
하아.
“개끼리 놓고 실험한 거잖아! 피가 없어진 개에게 개 피를 준 거라고! 그럼 피가 없어진 사람에게는 뭘 줘야겠나!”
“아.”
“사람 피를 줘야지!”
여기까지만 했으면 진짜 인류는 위대한 진보를 방금 경험했을 터였다.
출혈성 쇼크로 인한 사망을 수혈로 치료한 첫 케이스는 100년도 더 전이긴 했다.
그러나 그건 개에 대한 ‘실험’이지, 치료는 아니지 않나?
사람을 살린 적은 아직 없었다.
얘들이 그런 적 없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인류가 없다.
“다들 팔 내밀어 보게!”
지금?
지금도 없다.
“자자. 조금씩만 뽑을 거야. 어차피 모아서 줄 거니까 걱정 말라고. 걱정 말고 내밀게. 내 것도 줄 테니.”
왜?
혈액형에 대한 개념이 없었거든.
당연한 일이긴 했다.
수혈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은 시대에 혈액형을 알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나.
그럴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우연한 발견조차 발생할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하.”
나는 그렇게 모아 둔 피 아니, 핏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은 피 뽑는 기술도 그렇고 넣는 기술도 그렇고, 영 좋지 못해서 많이 못 넣었다는 점이었다.
기껏해야 100mL나 들어갔을까, 저거.
“환자가 조금 좋아졌네. 보게나. 하하. 너무 좋은 일이다 보니 자네 생각이 나더구만.”
놀라운 것은 저 피의 집합.
그러니까 혈액형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그냥 아무 피나 모아서 만든 피가 나름의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으…….”
“아까까지만 해도 의식이 아예 없었네.”
“여긴…… 애는……?”
“아, 애는 밖에 있습니다. 걱정 마시죠, 부인. 어려움이 좀 있긴 했지만 괜찮을 겁니다.”
확실히 출혈로 인한 혈압 저하에서 승압제를 제외한 수액류 중 혈압 올리는 데 최고는 피라더니만.
꼴랑 그거 들어갔는데도 환자는 정신을 좀 차렸다.
그걸 보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제로에 수렴할 것 같은 확률의 기적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설마…… 여기 있는 7명의 혈액형이 모두 같고, 그게 또 환자의 혈액형과 같았나……?’
만약 그랬다면 환자는 살아날 수도 있을 터였다.
4의 8승 분의 1, 그러니까…….
65,546분의 1, 즉 0.000015퍼센트의 확률이긴 한데…….
‘음.’
다시 말하면, 그냥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적이라는 건 쉬이 벌어지지 않는 법이었고.
그럼 그걸 왜 기적이라고 부르겠냐…….
‘아이고…….’
나는 핏덩이를 들여다보았다.
물론 피라는 게 산소에 닿으면 일정 부분 굳는 건 맞았다.
지혈 작용이라는 게 있거든.
하지만 이렇게까지 안쪽으로 훅 굳지는 않는 법이었다.
더군다나 이거 넣고 지금 시간이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는데…….
‘확률적으로 보면 뭐…… 죄다 섞였다고 봐야겠지.’
O형도 있기야 하겠지만…….
의미가 있겠나.
다 섞였는데.
환자가 AB형이라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섞어서 줬잖아.
이건…….
일종의 독약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일단. 수액도 좀 줄까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독약도 거의 극독이었다.
피끼리 안에서 엉기면…….
그게 뭐 뇌나 폐 또는 심장으로 가는 혈관을 막게 되면 어찌 될까?
‘뇌경색, 폐색전, 심근경색.’
와…….
시벌.
하나하나 다 사인으로 너무 훌륭한 질환들이라, 나는 생각할 시간도 없이 나섰다.
원래 같으면 뭘 줘야 할지 생각이라도 좀 더 했겠지만, 모르겠다.
그래도 물이라도 주면 낫지 않나 싶었다.
희석을 시키면, 저거 100mL도 못 들어간 것 같으니까 효과가 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 그럴 것 없이 피를 더 주면 어떤가?”
그랬더니 우리의 블런델이 미친 소리를 했다.
피를 더 줘?
저런 식으로?
“그…… 피를 아무리 적게 뽑았다곤 해도 많이 뽑은 것 아닐까요?”
“나온 피에 비하면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적네. 열 배는 더 줘야 해.”
와.
이 새끼.
인 앤 아웃을 이렇게 열 받게 풀어?
너 진짜 내가 로버트 교수님이었으면 죽었다.
“아…… 근데 지원자가 있을까요? 그전에 일단 물부터…… 물은 많은 양을 줄 수 있으니까요.”
“아, 그전에 준다는 개념인가?”
하지만 나는 태평이고, 이놈은 블런델 교수였다.
교수를 건드리는 건 안 될 일이란 얘기.
해서 일단 달랬다.
이 새끼가 사고 치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열 받아도 뭐 어쩌겠어, 이거.
“네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허락을 구한 나는 부리나케 움직였다.
의사인 내가 일단 물부터 끓여야 한다는 현실이 참 그렇긴 했지만.
하여간, 이 짓도 여러 번 하다 보니까 손에 익어서 그런지 속도가 팍팍 났다.
“이거 이렇게 하라고?”
“어. 증류!”
“어어. 근데 증류는 보통 술 만들 때 하는 거 아닌가.”
“시끄러워. 빨리 만들어야 해. 환자 죽어. 전에 봤지? 물 넣으니까 사는 거?”
“어어. 알았어.”
물론 도우미들도 있었다.
내 거짓말에 넘어가서 최선을 다하는 애들.
‘물 넣는다고 다 살면…… 수액이란 걸 왜 만들고 인공 혈액 연구를 왜 하겠냐…….’
당연히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