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52)
검은 머리 영국 의사-52화(52/505)
52화 수혈 [2]
뭐든지 하다 보면 는다지 않나.
증류수 만드는 것도 하다 보니까 늘었다.
시간도 줄고, 더 깨끗해 보이기도 하고.
확실히 불가피하게 손가락이 들어가고 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흐음…….’
하여간 나는 그렇게 얻어 낸 증류수를 들고 환자 앞으로 다가갔다.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20분 정도는 흘렀는데, 그 사이에 환자 상태는 퍽 안 좋아져 있었다.
혈압을 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게 안 돼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안 좋다고 하는 건, 느낌이 안 좋다는 뜻이었다.
너무 일반인의 표현이긴 하지만…….
내가 짬밥이 있으니 그것보다는 낫겠지…….
‘살 수 있나, 이거.’
제대로 된 수혈을 한다손 쳐도 몇 팩이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몇 팩이라 함은 320mL들이 전혈을 말하는 것이니, 1L는 족히 채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헌데 지금 이 환자에게 들어간 건 기껏해야 100mL 남짓한 양의 혈액이었다.
그것도…….
이것저것 섞어서.
그건 이미 피가 아니라 독이지 않을까.
푹.
하여간 나는 이미 잡아 둔 바늘 대신 새로운 곳을 찔렀다.
어떻게 잡았는지는 모르겠는데, 환자의 바늘이 들어가 있는 곳은 그냥 손목 근처의 정맥이라서 그랬다.
게다가 바늘 굵기도 상대적으로 가늘었다.
이놈들이 진짜 대충 만든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구멍 직경이 글쎄 얼마나 될까.
기껏해야 21게이지(G, 숫자가 클수록 직경이 좁은 바늘) 정도 되지 않을까?
‘피가 들어가겠냐, 그래서.’
수혈할 때 메뉴얼이 18게이지이고 가능하면 16게이지를 쓴다는 걸 감안해 보면, 오히려 그래서 환자가 아직 안 죽은 것 같았다.
구멍 폭이 너무 좁으니, 혈구 대신 혈장만 들어간 게 아닌가 하는 얘기였다.
어쨌든 항체는 들어갔으니 문제가 일어나긴 하겠지만.
그래도 혈구가 다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어흠. 그걸 또 잡을 필요가 있나?”
그렇게 바늘을 푹 찌르고 나니, 블런델이 물어 왔다.
탓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블런델은 나를 일종의 동반자 내지는 스승으로 인정하고 있어서 그랬다.
산부인과 방면에 있어서는 아니겠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함에 있어서는 확실히 그랬다.
“아무래도…… 부족하면 피를 더 줘야 할 텐데. 여기에 붓고 있는 동안에는 좀 그렇지 않을까 해서요.”
“아…… 피랑 물이 섞이면?”
“네. 뭐…… 어차피 안에서 섞이긴 하겠지만, 굳이 밖에서부터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그래, 그렇지. 그런 건 조심하는 게 좋겠네. 확실히 자네는 사려가 깊어.”
진짜 이유는 따로 있긴 했지만, 그런 이유를 말하기엔 아직 리스턴급은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나는 임금님 귀 당나귀 귀를 시전하기로 했다.
별 건 아니었다.
그냥 속으로 생각하기였다.
이따 정리해서 애들한테나 얘기해 줘야지.
‘혈압이 떨어진 상황…… 아니, 이 새끼들은 혈압이 뭔지도 모르지. 혈관 안에 피가 너무 없는 상황에서는 말초 정맥을 잡는 게 어렵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고…… 애초에 대량의 수액을 주려면 큰 혈관을 잡아야 하니까.’
내가 잡은 건 그중에서도 경정맥이었다.
쇄골하 정맥이 관리하기에 더 편하기도 하고, 환자 입장에서도 그렇긴 할 텐데…….
아무리 나라도 혈압도 모르고 맥도 잘 안 잡히는 상황에서 보다 깊숙한 정맥을 잡는 건 무리였다.
칼로 절개창을 넣고 들어가 찾는다면야 금세 찾긴 하겠지만.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을 터였다.
내가 너무 잘하잖아?
‘그리고 혈액이 들어가는 부위에는 혈액만 들어가는 게 좋아. 게다가 저렇게 피떡이 져선…… 아마 바늘구멍도 막혔을 거다.’
물론 이 시기 의료진은 구멍이 막히면 막힌 대로 그냥 밀어 넣을 게 뻔했다.
안에 들어가 있던 피떡이 그대로 주르륵 혈관 안으로 들어가겠지?
“하.”
생각만 해도 시벌 한숨이 그냥 막 나왔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 배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죄 같단 말이지.
지가 잘하는 줄 알고 막 죽이고 있잖아.
조르륵.
내가 진짜 대단한 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물은 붓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짜 내가…….
나만 사람 살리려고 노력한다, 진짜.
눈물을 넘어 피눈물이 나오려는 무렵, 조지프가 입을 열었다.
“어…… 환자분이 살짝 몸을 움직이는 거 같은데?”
“응? 그래?”
기특한 놈이 그래도 환자를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여간, 환자를 보니 확실히 의식이 차츰 돌아오고 있었다.
이때가 중요했다.
경정맥이 잡기도 좋고, 잘 들어가기도 해서 다 좋은데…….
움직이면 진짜 위험할 수도 있거든.
“잡아.”
“어, 어어.”
해서, 앨프리드랑 같이 환자의 이마를 눌렀다.
어깨도 꾹 누르고.
가뜩이나 피도 많이 흘린 데다가 애초에 영양도 그리 좋지는 않았던 터라 구속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쉬워서 좀 당황스러웠다.
“으…….”
나 정도 짬이 생기면 얼굴만 봐도 이게 진짜 고통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법이었다.
아니, 사실 이 시점에서 엄살 부린다는 생각을 하는 게 이상하긴 했다.
하여간 그렇게 아파하는데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저항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더군다나 어깨도 너무 얇았다.
‘나 참…… 이래서야, 이거…….’
사람들이 왜 감염만 됐다 하면 픽픽 죽어 나가나 했더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일부 빈민가 사람들에게는 약보다 그냥 고기나 수프가 더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콘돔 팔아 벌 돈으로 그런 거나 좀 줄까.’
물론 지금은 내 코가 석 자였다.
딴 데 얹혀사는 주제에 고기에 수프가 웬 말인가.
“으…….”
내 생각과는 별개로, 환자는 고통 속에서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걸까.
배?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그쪽일 가능성이 크긴 컸다.
하지만…….
“환자분 좀 어떠세요?”
“환자분, 저 닥터 블런델입니다. 어떻습니까.”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그러나 환자는 일단 블런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사람은 익숙한 목소리에 더 잘 반응하는 법이니.
“아…… 배…… 배가…….”
“아, 네. 애를 낳았으니까요. 배가 아플 수 있죠.”
“그…… 근데 왜 허리가 이렇게 아프죠?”
“허리?”
“네, 여기…….”
나는 잠시 뒤로 빠져서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표정이 그리 좋진 못했을 터였다.
허리.
허리가 아프다는 건…….
그중에서도 뒤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너무 아픈 나머지 손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진 않았지만.
“으음. 허리가 왜 아프지. 아, 그리고 열이 좀 나는데. 누구 손 안 씻은 사람 있나? 아닌데. 열이 벌써 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블런델은 대화를 나누면서 환자의 체온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염에 의해 열이 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기에 그랬다.
아무리 뭘 몰라도 이건 아는 모양이었다.
“으, 우웨엑.”
그러다 환자가 토를 하니, 좀 더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이유는 모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뭔가 좋지 못한 이유 때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으음. 이거…… 피를 더 줘야 하나?”
그런 와중에 블런델이 개소리를 해서 내가 나섰다.
“우, 우선은 물만 주면서 좀 보죠. 피 그거 또 뽑고 하려면 너무 힘들고. 환자분이 일단 아까보다 의식은 좋아졌으니까요.”
“으음. 아닌데, 피를 줘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일단은 좀.”
어떡하지!
하고 있는데, 누군가 들어와서 말을 건넸다.
구세주였다.
“블런델 교수님. 환자분 곧 애 나올 거 같다는 환자가 있습니다.”
“아, 그럼. 이따가 보지.”
환자 죽이는 돌팔이 치워 주면 그게 구세주지, 구세주가 별건가.
나는 그렇게 떠나가는 블런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환자를 돌아보았다.
환자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허리와 배를 가리켰다.
이따금 팔에 꽂힌 주사를 가리키기도 했는데, 거의 네 사람이 환자 구속을 위해 달라붙은 상황이라 여의치는 않아 보였다.
하여간 환자가 보이는 증상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발열에 오한…… 복통에 허리 통증. 와…… 이런 걸…… 이거 진짜 교과서에나 실려 있는 내용인데.’
자궁에서 피가 너무 많이 흘러나온 마당이라 정확한 확인은 불가했지만, 아마 혈뇨도 좀 나오긴 했을 터였다.
이럴 때 소변 줄이라도 있으면 진짜 좋을 텐데 마땅한 재료가 없으니 만들 수조차 없었다.
다룰 수 있는 재료라고 해 봐야 철밖에 없는데, 그런 걸로 소변 줄을 만들 수는 없잖아.
아니…….
아니다, 만들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환자 고통은 쥐뿔도 신경 안 쓰는 놈들도 많잖아?’
소변 못 싼다고 하는데 철로 된 관을 쑤셔 박을 생각을 못 했을까?
놀랍게도 방광의 구조는 꽤 예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어우.’
소름 끼치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지금도 가져오라고 하면 병원 어딘가에 고문 기기가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시간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지금 이 환자가 보이는 증상들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나만은 알고 있었기에 그랬다.
‘급성용혈수혈반응…….’
현대 의학에서는 사실 참고하는 정도에 불과한 질환군이라고 보면 되었다.
ABO식 혈액형을 틀리게 수혈했을 때 볼 수 있는 질환이거든.
이런 짓을 하는 건 명백한 의료 사고였고, 어지간한 나라에서는 이따위 실수는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군에서도 그랬다.
괜히 군번줄에 혈액형 새겨 넣는 게 아니란 말이지.
최소한 이런 부작용은 피하자는 의미에서 하는 거다, 이건데…….
“일단 물 부을게. 조지프. 너 물 좀 더 만들어다 줘.”
“응? 물 붓는 게 효과가 있을까? 피를 넣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일단 물부터. 할 수 있는 걸 하자.”
“어…….”
“아, 좀 하라면 할래?”
“어어. 알았어.”
치료?
치료랄 게 없었다.
그냥 지금 하던 것처럼 물 붓는 게 다였다.
아니, 여기에 더해서 이뇨제도 줘서 좀 빼 주면 좋은데…….
이뇨제는 먹고 죽으려 해도 없을뿐더러, 있어도 주면 안 되었다.
피를 왜 줬어 지금.
피가 너무 많이 나서, 그러니까 혈압이 낮아져서 줬잖아.
모든 것이 백업된 상황이라면 모를까, 지금 오줌 많이 누게 만드는 건 살인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조르륵.
하여간 난 최선을 다해 물을 붓기 시작했다.
수혈한 지 한 40분은 되었다는 생각에 희망을 품으면서였다.
보통은 15분 이내에 뭐라도 발생하거든.
이게 늦춰졌다는 건…….
아무래도 내 수액이 효과를 봤다는 거 아닐까?
이게 생각보다 꽤나 희석을 시키고 있다는 거 아닐까?
‘하지만 들어간 양이 많긴 해……. 이제 생각나네. 2~30mL만 들어가도 발생할 수 있는 게 이 급성용혈수혈반응인데…….’
그렇다고 희망을 품는 건 너무 섣부른 생각이었다.
나는 물을 붓는 동시에 보호자를 불렀다.
그러곤 환자와 대화를 나누게 했다.
무슨 말을 할까?
그건 중요치 않았다.
다만 후회가 남지 않기를 바랐다.
죽음이 익숙할 수밖에 없는 시대라도 가족은, 그중에서도 아내를 잃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