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79)
검은 머리 영국 의사-79화(79/505)
79화 진통 [2]
비소.
우리 실생활에서 제일 흔하게 쓰이는 형태를 보자면 아마 쥐약일 터였다.
세상에 쥐약의 원료가 되는 걸 환자에게 먹일 생각을 하고 있다니…….
살짝 죄책감이 들려고 했지만, 이곳 환자들을 떠올리자 다시 심지가 굳어졌다.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근데 실험은 어떤 식으로…… 하시는지요?”
“글쎄. 이런 불로 가공해 보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뭐라도 되지 않겠나?”
“아.”
아!
화학자라는 놈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게 저것뿐인가?
‘아니…… 지금 화학식이라는 게 있기는 있나……?’
못 본 거 같긴 했다.
그러니 저런 미개한 말을 하고 있지 않겠나.
그 말은 곧 저 사람을 비롯한 다른 화학자들이 다 달라붙어도 비소에 불 피우고 하는 방식을 해 봐야 살바르산, 즉 606번 비소 화합물이 나올 가능성은 없다는 얘기가 되었다.
“그럼 가 보게. 걱정 마. 내가 화학 잘해.”
“아, 네.”
블런델이랑 리스턴 좋은 일만 시켜 주고 나는 괜히 왔나 싶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시대야말로 무한 긍정력이 없으면 버티기 힘든 곳이지 않나.
좋은 생각만 해도 멘탈 나갈 거 같은데 좌절하고 있을 틈은 없어야만 했다.
‘그래…… 빵을…… 빵을 사자.’
빵 사서 집에 가서 썩히자…….
‘그래! 생각해 보니까 플레밍이 영국 사람이잖아?’
여기도 영국이고요?
같은 곰팡이균이 자랄 거 같고요?
게다가 런던은 비도 자주 오고, 무엇보다 더러우니…… 뭔가 최적의 환경이었을 거 같았다.
‘그래, 이럴 게 아니라…… 아예 균을 키워 보자.’
균을 키우는 데 필요한 건…… 다름 아닌 배지(培地).
배지를 대체 무슨 수로 만드나 싶겠지만 이건 의외로 쉬웠다.
본과생 때 생리학이나 미생물학에 관심을 보이면 교수님들이 마! 너 집에서도 키울 수 있다 하면서 가르쳐 주시거든.
“한천…….”
“응? 뭔 소리야?”
“우뭇가사리 좀 사자.”
“어……? 갑자기? 시장을 가자고? 그런 데는 신사가 가는 게 아닌데.”
“실험 때문에 사는 거야. 요리가 아니라.”
“아.”
우뭇가사리 우린 물을 굳히면 젤리처럼 되지 않던가.
그게 균 자라는 데는 최적이었다.
좀 모자라다 싶으면 설탕을 뿌려도 되는데, 이 시기 설탕은 꽤 비싸서 그건 좀 어려울 거 같았다.
괜찮았다.
우뭇가사리만 있어도 되거든.
아무튼, 나는 신사 타령하는 놈들을 실험으로 설득한 채, 빵과 우뭇가사리 등을 한 아름 살 수 있었다.
“다음은 버드나무.”
“응……? 이 새끼 오늘 왜 이래 이거?”
“버드나무 있는 데로 가자.”
“아니…….”
내친김에 버드나무 껍질 좀 캐 왔다.
이거 우려서 사람한테 먹일 생각을 하니까 한숨이 진하게 묻어 나왔지만, 뭐 어쩌겠나.
아직도 조용한 데 있으면 절단 병동에서 들려오던 비명이 고막을 때리는 거 같은데…….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해야 하지 않겠나.
“이거 우려서 먹으면 아파하던 사람이 안 아파하더라고.”
“죽어서 그러는 거 아닐까? 아니, 농담이야. 그렇게 째려볼 일이냐?”
집에 와서 버드나무 껍질을 우리는 나를 보며 앨프리드가 이죽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색깔이 이게 좀 먹으면 안 될 거 같아 보이긴 했다.
내가 생각했던 건 엷은 한약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건…….
‘이건 좀…… 너무 지저분해 보이지 않나?’
그나마 다행인 건 냄새만큼은 썩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는데, 진짜 뒤지게 아파하는 사람 아니면 거부할 거 같은 색인 게 문제였다.
뭐, 괜찮았다.
여기 병원은 환자들이 아무리 미심쩍어 보이는 치료라도 일단 받긴 하거든.
병원에 대한 신뢰가 있다기보다는 어지간히 아프지 않고서는 절대 병원에 오지 않아서 그랬다.
“이건 뭔데?”
하여간 내가 째려봐서 그런가 아니면 이걸 먹으라고 할까 봐 그런가는 몰라도, 조지프는 우뭇가사리를 가리켰다.
나도 이게 뭔가 싶었던 시점이라서 쉬이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한천 배지를 받았지…… 집에서 만들진 않았거든.
뭔가 허여멀건한 물이 우라지게 나오긴 하는데 이걸 대체 어떻게 말려야 내가 익히 알던 형태의 우뭇가사리가 될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뭐가 안 될 수도 있어. 뭐가 되면 그때 말해 줄게.”
“음…… 기대 없는 얼굴은 아닌데……?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네.”
그렇다고 나도 몰루 이럴 수는 없어서 대강 둘러댔다.
“이 빵은…… 왜 여기다 늘어놨어?”
질문 세례는 끝이 없었다.
이번에는 앨프리드 선배였다.
사실 그럴 만도 한 모양새긴 했다.
세상천지에 어떤 미친놈이 빵을 잘게 썰어서 책상 위에 올려 두겠냐고.
그것도 수십 조각을 물도 좀 뿌린 채로.
“열은 없는데.”
조지프는 걱정이 되는지 내 이마를 짚었다.
열난다고 하면 열의 원인을 없앤다고 하면서 머리 자르려고…….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만한 놈들이다 보니, 나는 일단 고개부터 저었다.
“조선의 옛 고서에…… 썩은 빵…… 아니, 빵이 아니라 밥에 묻은 곰팡이를 먹었더니 열병이 나았다는 기록이 있어.”
빵 얘기가 나온 시점부터 이미 구라임이 들통나야 정상이었지만, 영국 애들은 예나 지금이나 중화사상 뺨치는 대영제국 마인드가 있어서 남의 문화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우리나라는 빵 같은 거 안 먹고 밥을 주식으로 먹는다고 하면 이상하게 볼걸?
“그래? 썩은 빵에?”
“오…… 곰팡이가 그런 효능도 있단 말인가.”
이것 봐.
뒤에 밥 얘기는 듣지도 않았잖아.
뭔가 귀에 필터링이라도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남의 전통문화 얘기만 나오면 싹 무시로 일관했다.
이때는 그 정도가 극심할 수밖에 없긴 했다.
진짜 대영제국이잖아.
“응, 일단 좀 보려고.”
“그럼 열병 앓는 환자들을 좀 구해 둘까?”
하여간 그렇게 납득을 시켰더니, 조지프가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나는 이게 대체 뭔 소린가 해서 눈을 끔뻑거렸고, 그사이에 나 빼고 둘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 그런 기록이 있었다면 확인을 해야 옳지.”
“응. 빵 썩으면 곰팡이 부분을 잘라서 먹이자고요.”
“그래서 살아남으면 진짜 효과가 있는 거죠.”
“아니면…… 다른 곰팡이를 먹여 볼까?”
“그럴까요?”
미친놈들이.
사람 죽이겠단 소리를 이렇게 신이 나서 떠들고 있네.
돌이켜 보면 이런 미친 실험 정신이 있어 의학이 발전한 것도 맞긴 할 텐데…….
그러는 동안 죄 없이 희생당한 환자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니, 아니! 환자한테 어떻게 바로 쓰냐!”
일단 책상 위에만 둘 게 아니라 집 여기저기 둘 거란 얘기도 더했다.
“대체 왜?”
“곰팡이 종류가 여기 있으면 다 똑같을 거 아냐.”
“응……?”
아.
지금은 진균은커녕 세균에 대한 개념도 없지, 참.
역사를 앞당긴다는 건 여러 의미에서 참 어려운 일이었다.
심심풀이로 읽었던 대체 역사물의 주인공들에게 존경심을 품으면서,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곰팡이가 여기저기 막 다른 놈들이 자라잖아. 곰팡이가 다 똑같지는 않잖아.”
“그런가……?”
“몰라, 나는.”
조용히 말하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통 터질 거 같은 마음을 다스려야만 했다.
“그런지 안 그런지 이번에 봐. 아무튼, 내가 다 생각이 있으니까…… 절대 이거 썩는다고 잘라서 먹이지 마.”
“어…… 그래, 뭐.”
“알았어.”
“진짜야. 먹이면 안 돼. 사람한테 곰팡이 먹인다는 발상을 대체 어떻게 떠올리는 거냐.”
“너는 먹인다며.”
“하.”
한숨을 푹 쉬고 있으려니 눈치 빠른 조지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일단 기다릴게.”
“그래…….”
착하긴 해서 다행이었다.
“근데 이건 내일 당장 먹인다는 얘기 아냐?”
그때 앨프리드가 내가 우려낸 버드나무 껍질 물을 가리켰다.
방금까지 내가 했던 말의 신빙성을 개박살 내는 비주얼을 지니고 있었다.
‘이상하네…… 고로쇠인지 뭔지는 꽤 모양도 그럴싸했는데……?’
왜 이렇게 불순물이 많지……?
껍질을 좀 닦았어야 했나?
일단 까만 것도 좀 이상했다.
하지만 이게 진짜로 이상한 건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었다.
막말로 21세기 대한민국 의사가 미쳤다고 버드나무 껍질 우리겠냐고.
그냥 필요하면 약을 주지…….
이건 너무 자연적이잖아.
“어…… 응.”
“저건 안 되고, 이건 돼?”
“이건…… 돼…….”
“말이 좀 이상한데.”
“아무튼, 곰팡이 먹이지 말라고!”
“아, 알았어. 알았어. 오늘따라 엄청 사납네.”
이럴 땐 그저 성질부려서 넘어가는 게 장땡이었다.
치졸해 보인다면 사실이니 할 말이 없었다.
뭐 어쩌겠는가.
나는 내가 옳다는 걸 알지만, 설명할 방도가 없는데.
‘음…… 아직 안 썩었군…… 그나마 다행인 건 이게 그럴싸해졌네.’
아침이 되자마자 나는 빵, 우뭇가사리 물 그리고 버드나무 껍질 우린 물을 차례로 살폈다.
우뭇가사리는 내가 늘 보던 그 한천 비슷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그걸 접시 여러 개에 퍼 담고서는 손바닥, 발바닥을 차례로 찍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너도 와서 좀 찍어라.”
“왜…… 왜? 이거 무슨 의식 같은 건 아니지?”
“의식?”
“그 왜…… 이단…….”
“아냐, 아냐. 실험이야.”
“실험이라고……?”
내가 생각해도 접시 위에 하얀 거 떠놓고 맨손, 맨발바닥 찍는 건 실험보다는 수상쩍은 의식에 가까워 보이긴 했지만…….
하여간 아닌 건 아닌 거라 단호하게 대처했다.
조지프는 그런 내 얼굴에 마지못해 따르긴 했지만 자세히 들어 보니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특히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를 반복하고 있었다.
억울했다.
‘나중에 두고 봐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게 한이 될 만큼 억울했다.
“그건…… 그건 가져가?”
“어.”
“냄비 그거…… 무거워 보이는데…….”
“그래도 가져가야 해. 가서 이것도 좀 우려 달라고 해야지.”
“너 진짜 이거 의식 아니지?”
“아니라니까 그러네?”
거기에 더해 나는 버드나무 껍질 우린 물도 챙겨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냄비 생긴 것도 마녀 솥 같아서 찜찜했지만, 나는 결심했다.
절단 병동 환자들만 일단 생각하기로.
그러자 약해져만 가던 의지가 굳건해졌다.
지옥 그 자체에 있는 환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감시켜 줄 수 있다면…….
진짜 마녀 솥이라도 짊어지고 갈 수 있었다.
“그…… 왜 나랑 거리를 둬?”
“응? 그렇게 느껴졌어? 아닌데?”
“지금도 너무 빨리 걷잖아.”
“아, 아냐. 아닌데?”
그런 대붕의 뜻을 몰라주는 뱁새 놈들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앞으로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절단 병동으로 향했다.
안에 있는 이들에게 구원을…….
아니, 저 새끼들이 자꾸 의식이라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단어가 이상한 게 나오잖아.
“제발…… 제발 풀어 주세요…….”
하여간 그렇게 안으로 들어선 내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의외로 킬리언이었다.
거친 아일랜드계 뱃사람은 절단 병동 하루 만에 세상에서 제일 가녀린 눈을 지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