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Haired British Doctor RAW novel - Chapter (8)
검은 머리 영국 의사-8화(8/505)
8화 니들 그러면 안 돼 [2]
“아픈 사람한테 그렇게 말 걸고 하면 안 되네.”
어디가 아프냐고 묻고 있는데, 닥터 제멜이 이렇게 말했다.
미친놈이.
어디가 아픈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냐.
너처럼 배에 더러운 바늘 푹 찌르기 전에 인마.
“그…….”
속으로는 청산유수지만.
겉으로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의사들이야말로 도제식 교육의 화신이지 않나.
물론 나야 이놈들한테 배우지 않아도 그만이긴 한데…….
동양인을 받아 주고, 거기다 면허도 줄 수 있는 학교가 여기 말고는 없을 것 같거든.
“아니, 가만히 둬 보게.”
그때, 리스턴 박사가 나섰다.
나지막하게 말했는데도 제멜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여전히 칼을 들고 있어서 그럴 터였다.
피도 뚝뚝 떨어지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뒤로 물러섰다.
-한마디 더 하면 다리부터 자르지 뭐.
이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분위기라서 그랬다.
“묻는 폼이 능숙한데. 확실히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배운 거 같아. 뭔가 새로운데?”
다행히 리스턴 박사는 대단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하긴, 저 양반이야말로 탐구 정신의 화신이 아니던가.
늘 들고 다니는 저 칼도 어디서 전해 내려오는 칼이 아니라 자기가 주문해서 만든 거라고 들었다.
이름하여 리스턴 칼.
생김새만 보면 블러드 본에 나오는 무기 같지만, 사람 다리를 30초 안에 자를 수 있는 수술용 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무슨 칭찬을 하는 건지 나도 좀 헷갈리긴 하는데, 하여간 리스턴 박사가 그런 사람이다, 이 말이었다.
“좀 더 해 봐.”
“네, 교수님.”
칼 든 사람이 더 해 보라고 하는데 안 할 수가 있을까?
토 달 사람도 없었다.
제멜은 칼과 나, 그리고 환자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했다가는 난리가 날 것 같아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잘된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시간을 벌었으니까.
“환자분 이제 배를 눌러 볼 거예요.”
“으…….”
물론 시간은 내게만 있었다.
환자는 아까보다 확연히 안 좋아 보였다.
살 수 있을까?
‘안 될 거 같긴 한데…….’
누가 보면 외과 교수라는 놈이 무슨 포기가 그리 빠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멜의 말에 따르면, 이 환자가 복통을 호소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난 마당이었다.
그 정도 방치되면 맹장염도 죽을병이 되기 마련 아니겠나.
심지어 항생제에 이런저런 치료제가 다 있는 21세기에도 그런데, 이곳은 그 이런저런 치료제마저 없는 19세기 런던이었다.
“아파요?”
“윽…… 아파, 아파.”
“뗄 때는?”
“으아악.”
“아, 안 좋은데.”
하여간 나는 환자의 우측 하복부를 눌렀다가 뗐다.
환자는 눌렀을 때는 압통을, 뗄 때는 반발 압통을 호소했다.
반발 압통 때 반응이 더 격렬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사람의 뱃속은 엉망진창일 거라는 걸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열면 어떨까.
뭐든 잔뜩 떡져 있지 않을까?
“안 좋다니, 당연한 얘기 아닌가. 그러니 피를 빼서 일단 붓기부터 줄여야 하네.”
진짜 의사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데, 돌팔이 새끼가 옆에서 앵앵거렸다.
아.
내가 리스턴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리스턴 칼로 바로 제멜 대가리를 부숴 버릴 수 있었을 텐데.
아니,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름 또 사법체계는 빡빡하게 굴러가는 시대니까.
“배를 열어 보면 어떨까요?”
하여간 나는 돌팔이 아니, 파리 유학파 제멜 대신 리스턴 박사를 보며 물었다.
이 양반은 생긴 거에 걸맞게 모험 정신이 넘치는 사람이지 않나.
그러니까 배도 가를 수 있지 않을까.
어?
갈라 보자고.
“미친 소리 하지 말게. 그건 금기야.”
아…….
의외로 또 꼰대 같은 면이 있었다.
“금기라니…… 어떤 연유에서 그렇습니까?”
하여간 나는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레 물었다.
“배를 열면 환자는 죽어. 이상하게 열이 나서 죽더라고.”
“아니…….”
이 미친놈아.
그건 니들이 그 칼로 쑤시니까 그렇지.
물로 닦고 불로 살짝 소독만 해도 그렇게 죽진…….
‘아니, 아닌가?’
나는 생각을 하다 말고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육안으로 봤을 땐 전혀 오염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비누로 닦았으니 균도 어지간히 죽었을 터였다.
하지만 깨끗하다고 할 수 있나?
남의 몸속에 집어넣어도 될 정도로, 그러니까 멸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나?
멸균 장갑도 없으니 맨손으로 해야 할 텐데.
“아니, 뭐 그렇다고 또 그렇게 고개를 축 숙일 필요는 없네. 모르는 게 죄는 아니야. 자네는 아직 신입생이니까.”
손을 보고 있는데 리스턴이 말을 이었다.
뭔가 기분이 좀 좋아 보였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원래 교수들은 학생이 자기 무서워하는 걸 좋아하거든.
기왕 착각하신 김에 그런 생각을 고착화시켜야겠다 싶어서 닥치고 있었다.
“하여간 너희들도 잘 들어. 배는 건드리면 안 돼. 그래도…… 배를 진찰하는 방식은 신선했어. 어디가 아픈지 저렇게 자세히 묻는 거…… 이런 건 아무리 우리가 배를 수술하지 못한다 해도 알아 두어서 나쁠 건 없지.”
“네, 명심하겠습니다!”
제일 크게 외친 건 부잣집 놈이었다.
사실 부잣집 놈인지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해산. 내일은 오늘 배운 거 물어볼 테니까 공부 철저히 하라고.”
“네, 교수님!”
리스턴 박사의 말과 함께 우리는 병실에서 빠져나왔다.
아쉬움은 당연히 남아 있었다.
저 환자.
내가 처음부터 봤다면, 가능성이 그나마 있었을 것 같았다.
아니, 지금도 저렇게 두는 것보다는 내가 보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나을 터였다.
‘100%……로 확답하기는 어려워. 생각해 보니까…… 장갑도 없잖아.’
허나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건, 100%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은 없어서였다.
한국에서도 학생이 깝치다가 문제 터지면 난리가 날 텐데 여기서?
그것도 조선에서 온 신비한 동양인이?
X되기 딱 좋았다.
“평아.”
“응?”
그래, 그러니까 그냥 나오는 게 맞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조지프가 나를 불렀다.
“해부 실습은 자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데, 가자.”
지옥으로 불렀다.
안 돼.
조지프. 거긴 지옥이야.
“해부 실습은…… 일단 그림부터 본 다음에 해야 하지 않을까?”
“그림? 아, 교과서? 그게 나을까?”
“그렇지. 뭘 알고 후벼야지. 뭣도 모르고 후비면 안 될 것 같은데?”
“너 개구리는 뭘 알고 후빈 거야? 그냥 후벼도 심장 뛰는 거랑 내장은 잘 봤잖아.”
조지프야…….
이 형이…….
아니, 아저씨가 실은 인마 외과 교수란다.
개구리 해부 따위는 진짜 발로는 못 해도 왼손만으로도 할 수 있다고.
자꾸 나를 일반화시키지 마.
넌 공부해야 해.
난 저기 들어가기 싫고.
“사람이랑 개구리랑 같겠어?”
“아…… 하긴. 그렇긴 하네. 그래, 그럼 책 먼저 보자.”
다행이었다.
조지프가 그렇게 고집이 안 세서.”
“저 새끼. 교수님 앞에서는 열심히 하는 척 다해 놓고 안 계시니까 실습실도 안 들어가네.”
그렇게 애써 설득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이죽거렸다.
부잣집 놈이었다.
뭐라고 할까.
지식으로 죽일까.
눌러 죽일 자신도 있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어서 별 타격이 없을 수도 있지만. 쟤가 열 받아서 부모한테 꼰지르기라도 하면…….’
가령 ‘동양 이단 놈이 학교에 있다!’ 이 지랄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어지간하면 아저씨가 막아 주겠지만.
여긴 업턴이 아니라 런던이었다.
아저씨만큼 끗발 날리는 집안이 많다, 이 말이지.
“왜 시비야, 인마. 들어가고 싶으면 혼자 들어가. 무서워서 그러냐?”
다행히 우리 조지프도 성깔이 있는 친구였다.
하긴, 악바리가 아니라면 리스턴 박사님을 보면서 그처럼 되겠단 꿈을 꾸기도 어렵지.
게다가 리스턴 박사님보다는 작아도, 우리 조지프도 175는 넘는다고?
그에 비해 이놈들은 난쟁이 똥자루였다.
기껏해야 160?
“무섭긴. 까부니까 기분이 나쁜 거지. 노랭이 놈이.”
“너 한 번만 더 평이한테 노랭이라고 하면…….”
“뭐 치게?”
“내가 치면 너 뒤질 거 같은데? 해부 실습이 아니라 해부 대상이 될 거 같은데?”
맵다…….
조지프야, 매워.
“너…….”
하긴, 런던 도련님이 업턴 출신 애들을 이길 수는 없지.
빈민가 친구라면 또 몰라도.
“너…….”
“우냐? 울어? 눈물샘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우는 거야?”
“어…….”
“난 그거 공부하러 갈 건데. 넌 알 때까지 저기 들어가서 울든가.”
조지프는 그렇게 부잣집 놈 어깨를 두들겨 준 다음 강의실로 향했다.
나도 녀석을 따라 강의실로 향했다.
뒤에서 진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일부러 돌아보진 않았다.
통쾌하긴 해도, 그렇다고 불똥이 튀는 건 사양이거든.
하여간 강의실 안은 책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말이 강의실이지, 학생이라고 해 봐야 위에까지 다 해서 20명이 채 될까 말까 한 규모다 보니 연구실이라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우리도 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레이 아나토미는…… 없구나, 역시.”
“응?”
“아니, 아니야.”
해부학 서적은 당연히 있을 것 같았는데.
뭔 잡지 같은 것만 있었다.
그나마도 내용이 허접한 것들뿐이었다.
그림은 잘 그리긴 했는데…… 그저 근육에 대한 도해만 있을 뿐이었다.
아직 내부 장기에 대한 관찰 또는 신경, 혈관의 분포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어 보였다.
‘내가 그릴까.’
조지프.
저놈에게는 방금 있었던 일을 제외하고서라도 빚진 것이 산더미였다.
우선 덕분에 굶어 죽지 않고, 또 맞아 죽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았나.
그에 비해 내가 베푼 은혜라곤, 외과 의사라는 시대착오적인 꿈을 꾸게 만든 것뿐이었다.
이제 와서 이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제대로 된 의사로라도 만들어 줘야 하지 않을까?
‘근데 뭐라고 하면서 그려?’
이것이 조선의 샤머니즘입니다…….
해부학의 아버지 헨리 그레이가 보입니다…….
자, 여러분! 이것이 그레이 아나토미입니다!
이 지랄을 해?
그랬다간 저기 광장에 끌려 나가서 실로 오랜만에 화형당하는 마녀 아니, 사탄의 자식이 될 것 같은데?
‘애초에 안 보고 그릴 수 있을 만큼 기억이 선명하지도 않은데…….’
그렇다면 나는 해부 실습의 귀재가 되어야만 했다.
손재주는 있으니, 그림이야 어느 정도 그릴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들어가서 썩기 시작한 시신을 맨손으로……?’
꺼림칙했다.
물론 의대생들이 해부를 그리 두려워하지 않는 걸 보면 썩 위험하지는 않나 싶기도 했다.
“야, 괜찮아?”
그때, 뒤에서 소란이 일었다.
뭔가 하고 봤더니, 선배 하나가 피가 줄줄 나는 손을 잡고 있었다.
냄새를 맡아 보니 해부 실습실에서 나온 게 분명했다.
“어…… 괜찮아.”
“많이 안 다쳤네. 다행이네.”
아니야, 다행 아니야.
너 그거 시신 만지다가 다친 거 아니냐?
진짜로 죽어…….
“피 좀 지혈하고, 다시 들어와.”
“어, 그럴게.”
안 된다고.
니들 그러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