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11)
제 10화 도망
데니 형이 요즘 나에게 서운함을 느낀 모양이다.
한마디로… 삐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게 내 잘못때문에 그런거라… 나는 정말 몸둘 바를 몰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아아…. 정말… 내가 기사랑 마법사들이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줄은
어떻게 알았겠냐고오오~’
이 일이 이렇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일이었다.
엘라임을 불러냈다가 된통 혼나고 난 뒤 나는 부단히도 마나를
다루는 연습을 하여 자유 자재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폭발은
안 일으킬 수 있게 되어 다시 노만에게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뭐,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이건 순전히 나 혼자만 부단히 연습하여
이루어낸 건 아니고, 엘라임을 불러낸 뒤 계속 내 곁에 붙어있는
네 나이트급 정령들과 엘라임의 도움을 받은 덕택이었다.
네 나이트급 정령들은 난 있을 필요가 없는데도 인간 세상을
구경 하는 건 난생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매정하게 돌아가라고 하냐고
난리를 쳐서 – 바람의 정령이 제일 그랬다. – 나는 하는 수 없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그랬더니 엘라임이 멍청하게 나이트급 정령들에게 휘둘린다고
잔소리 하고…
아아, 정말 내가 괜히 엘라임을 불러내가지고 그 동안 고생한
거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엘라임은 다행이 나보고 이왕 이렇게 나온거 구경이나 하고
집에 가라고 하더니만 – 난 처음에 엘라임이 평소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지 뭔 일인가 하고 놀랬었다. – 놀기는 무슨 개뿔이…
그 뒤로 – 엘라임과 나이트 급 정령들은 자신이 맘만 먹으면 인간들
모르게 머물 수 있다. – 계속 내 곁에 붙어 있더니만, 새벽 훈련때는
인간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고 종알대고, 대니 형에게 제대로 안 한다고
혼나면 또 혼난다고 잔소리 하고, 조엘 시중 들면 인간 따위 시중이나
들어 준다고 잔소리 하고… 등등등…
아마 엘라임은 내가 가출한 거 혼내줄려고 일부러 인간 세상에
머물게 해놓고 툭하면 잔소리를 하기로 작정한 거 같았다.
그래도 마나 제어를 서투르게 해서 자꾸 마법을 실패하면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나에게 책임감을 느끼기는 느끼는가 보다.
웃기는 건 세 나이트급 정령 (물의 정령 빼고) 들이었다.
이 녀석들은 처음에 내가 계약을 맺자고 불러냈을때는 날 보자마자
반말을 해대더니만, 엘라임이 내 아들이다라고 하니까 그때부터
존대를 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내가 왜 그렇게 안면을 바꾸냐고 했더니만, 인간들은
자신의 존대를 받을 존재들이 못된다나?
나도 인간의 피가 흐른다고 했더니, 절반은 엘라임의 기운이라고
나는 예외란다.
그렇게 고생 고생 하면서 노력하여 결실을 맺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게다가, 노만과 함께 다시 기사 연무장에 가서 드디어 2클래스의
마법을 무사히 성공 시킬 수 있었던 나는 너무 기뻐서 환호성까지
지를 정도였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던 노만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호오, 그렇게 좋으냐? 훗, 하기야… 그렇지 않고서 어찌 마법사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하… 아니 뭐…”
쑥스러운 마음에 몸둘바를 몰라하자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엘라임이 야유를 보냈다.
[흥, 그 정도를 가지고… 네 엄마는 7클래스의 마스터였단 말이다.네 엄마보다 못한 인간의 칭찬에 좋아하기는…]
‘내가 못살아…’
엘라임의 말에 티 안내고 속으로 한숨쉬고 있는데 노만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흐음, 이왕 이쪽 길로 들어선거 확실하게 하는게 어떠냐?”
“예?”
영문 모를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노만이 자세하게
말해줬다.
“아니, 솔직히 그 동안은 조엘님의 배려로 시간을 내서 마법을
배우기는 하지만, 보통 마법사들이 공부하는 시간에 비하면 택도
없지. 그러니 마법 수련하는 시간을 늘리잔 말이다. 으음… 그래,
새벽 수련을 그만두고 그 시간에 마법을 배우는 건 어떠냐?”
“에에? 하지만, 그건… 조엘님이 시켜서 하는 건데…”
내가 미쳤다고 새벽부터 공부 한답시고 머리를 싸매겠는가?
차라리 몸으로 때우는 수련이 훨씬 났지..
한국에 있을 때도 셤 공부 한다고 새벽에 일어나본적이 없는 나다.
그런데 이 곳에 와서 새벽에 공부를 하겠는가?
하지만 노만의 말을 거절할 명분이 없어 조엘의 핑계를 댄건데
노만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 반색 했다.
“그러냐? 그렇담, 조엘님의 허락만 구한다면 새벽 수련을 안 해도
되겠지? 알겠다, 내가 오늘 즉시 말씀드려주마.”
“어? 아니, 그러니까…”
‘그게 아닌데….’
전에도 한번 이야기 했지만, 나는 검사가 될 생각도 없지만, 마법사가
될 생각도 없다.
그저 단지, 검술은 조엘의 강요와 함께 배워두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배우는 거고, 마법은 호기심을 충족할 정도만 배우며 충분하다고
생각할 뿐, 몇 클래스의 마도사가 되겠다던가 그런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가 너무나 만족스러운 상태였다.
“새벽 수련을 말입니까?”
노만은 나에게 말한 대로 조엘이 왕궁에서 돌아오자마자
그의 방으로 쫓아가 다짜고짜로 나를 새벽 수련에서 빼 줄것을
부탁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해인이 녀석은 마나를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마법학만 학습하면 마법 능력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때에 조금이라도 수업 시간을 늘리는 것이
해인이에게도 더 좋을 듯 싶습니다만…”
“흐음…”
조엘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만 힐끔 나를 살펴 보았다.
나는 ‘아니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노만이 옆에 있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대신 눈빛에다 거절의 의지를 가득 담아 조엘에게
필사적으로 보냈다.
그랬더니 엘라임이..
[쯧쯧, 눈 뜨고 못 봐주겠군. 그냥 확 집으로 데리고 가 버려?] [치사하게 한번 말한 걸 바꾸다니요. 아앗, 그럼 어쩌냐구요.난 지금 힘도 없는데…] [힘이 없기는 왜 없어? 네 정령의 기운을 사용하면 되잖아.] [사용해서 어쩌라구요. 여길 뒤집어 엎으면 저는 검술이랑 마법을
배울 수 없게 되잖아요. 그래도 어느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싶다구요.]
솔직히…. 험, 험, 솔직히… 조엘 녀석이 날 새벽 수련에 집어 넣어
검술을 배우게 되었을 때 내 머리 속에는 정령의 기운과 검술을 쓰는
정의의 소녀 모습이 떠올랐었다.
쾌걸 조로 처럼 가면을 쓰고 나타나 악당들을 물리치는 ‘세느강의
별’의 여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노만에게서 마법을 배우자 이제는 세일러문이 떠오르더군.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냥 돌아가면, 그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지
않겠는가?
물론, 이 곳을 나가서 검사로써 이름을 날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한편으로는 나중에 불량배들이나 건달들이 나에게 시비를 걸 때
멋드러지게 검을 쓰윽 뽑으면서 ‘덤벼라! 내 오늘 너희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마!’라고 소리쳐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뭐, 그러다가 혹시 아는가?
위험에 처한 귀족가의 잘생긴 도련님이나 부자집 아들내미를 구해
줘서 거액의 사례금을 받기도 하고, 그들이 내 모습에 반해 쫓아다니게
될 지도…
‘므흐흐흐…’
[도대체 뭔 생각을 했기에 표정이 그리 음흉해 지는 거냐? 이야기하다가 딴 생각을 하다니, 재주도 좋아…]
‘핫.’
엘라임의 말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 거렸지만,
다행히 조엘은 생각에 잠겨 있고, 노만은 조엘을 바라보고 있느라
아무도 내 모습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단, 한사람 데니 형을 제외하고는…
‘히익~!’
데니 형은 왠지 모르지만 얼굴이 살짝 굳어져서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노만님의 청을 들어주시지요. 해인이도 원하는 것 같은데…”
무감각한 데니 형의 목소리가 내 양심을 콕콕 찔러댔다.
‘아, 아니.. 내가 언제 원한다고…’
[쿡쿡, 야, 저 녀석 너한테 삐졌나보다.]갑작스런 데니의 말에 조엘이 데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날 힐끔 보다가 다시 데니를 보더니 왠지 기분 나쁜
미소를 씨익 지어 보이며 노만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안돼겠습니다. 저는 제 시종이 체력이 없어 비실비실
대는 마법사가 되는 건 원치 않거든요. 체력도 어느 정도 받쳐주는
녀석이길 바라거든요.”
그러자 노만이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흐음.. 그렇습니까? 물론 마법사들의 체력이 약한 건 사실입니다만…
뭐, 조엘님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새벽
수련을 이틀에 한번이나 사흘에 한번 정도 나가는 걸로 타협하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체력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정도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해인이가 마법을 익힌다면 검술
같은 거야 그다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까는 나보고 새벽 수련을 그만두게 하라고 말한 데니 형이
분한 표정으로 나섰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해인이는 검술에도 재능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법은 혹시라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 조금 도움이 되고자 배우게 한
것일 뿐, 사실 검술을 배우는 이 녀석에게는 크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뭐시라? 조.금. 도움이 된다고? 그거 지금 마법을 두고 하는 소리인가?
내 마법사도 체력이 너무 나쁘면 안 좋기에 지금까지 가만 두고 있었네만,
사실 마법사가 검술을 배울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마법 한방이면
만사 오케인데. 다칠 각오를 하고 검을 휘두르며 적을 직접 맞대야 하는
검사보다는 훨씬 나은게 아닌가?”
“무슨 그런 실례의 말씀을. 비실 비실한 마법사가 뭐가 났단 말입니까?
마법을 못쓰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 뿐인 존재인 것을… 그런
마법사야 가까이 가서 한방 쳐주면 찍 소리도 못하고 나가 자빠지지
않습니까?”
“누가 한방에 찍 소리도 못하고 나가 자빠진단 말인가?”
“누구긴 누굽니까?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콧대만 높은 비실이들이
그렇다는 거죠.”
“그렇다면 머리는 텅 빈채 힘 좀 있다고 칼을 휘둘러대는 이들이
났단 말인가?”
“칼이라뇨. 건달들이 휘둘러대는 칼과 검사의 검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그게 그거지 뭐가 다르단 말인가?”
“자자, 두분…”
노만과 데니 형 사이에 스파이크가 튀고 설전이 난무하자 엘라임을
비롯한 네 정령은 무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다툼을 구경했는데,
보다 못한 조엘이 나서서 둘을 만류하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노만과 데니 형 사이에 스파이크가 튀고 설전이 난무하자 엘라임을
비롯한 네 정령은 무지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다툼을 구경했는데,
보다 못한 조엘이 나서서 둘을 만류하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만 하시죠. 서로를 헐뜯는 것 만큼 보기 안 좋은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검술이나 마법 둘 모두가 서로 비교해서 어느 한쪽이
뒤쳐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둘 모두가 오랜 세월 동안 부단한
노력을 통해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조엘의 말에 데니나 노만 모두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는 아니였지만 –
아무래도 조엘 또한 기사이니까.. – 조엘이 원하는 대로 입은 다물었다.
표정들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굳어진 상태였지만 말이다.
조엘은 그런 둘을 싱긋 웃으며 바라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해인이는 양쪽 모두에 재능을 보인다니 배울 수 있을때 배워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말은 곧바로 노만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건 좋지 못합니다. 토끼 두 마리를 쫓다가 둘 다 놓친다는 옛 말도 있지
않습니까? 역사 이래로 뛰어난 마검사가 가끔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검사가 운 좋게 마법 아이템이나 마법검을 얻어서 마법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보통 마법과 검술을 같이 배운 자는 둘 모두 뛰어난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거의 대부분 입니다. 초천재가 아닌 이상 마법과 검술 둘 다 뛰어난
경지까지 도달한다는 건 불가능 합니다.”
노만이 진지하게 말했건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조엘은 싱긋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훗, 해인이 녀석이 그 초 천재일지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혹시 압니까?
마법과 검술 모두 뛰어난 경지에 이를지… 후후후, 안 그래, 해인?”
“에? 아하.. 설마요…”
[훗, 인간인 주제에 보는 눈이 있었군. 암, 당연히 가능하지. 누구 아들인데…]하지만 노만은 심각했다.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체력을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정도라면 저도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검사로 키우기 위함이라면 반대합니다. 저 아이는
이제 겨우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선천적으로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다 해도 지금부터 마법에 매진해야 10년 뒤에야 겨우 괜찮은 마법사란
소리를 들을까말까 하단 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데니가 나섰다.
“검술 또한 이제 막 익히기 시작했는데 그만 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해인이가 검술에 재능이 없으면 몰라도 상당한 재능을 보이는데
이대로 그만 둔다는 건 너무나 아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섣불리 두개 다 손을 대었다가 둘 다 어중간하게 익히게 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깝더라도 과감하게 하나를 포기하고 하나만 집중적으로 익히는
것이 났다고 보네.”
노만의 말에 데니가 지지 않고 반박했다.
“그럼 그 포기 하는 한가지는 검술입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자네는 이 세상에 마법적 재능을 타고나는 이가 얼마나
되는 것 같은가? 전 세계 인구의 0.1% 도 안 된단 말일세. 그 중에서도 이 애처럼
뛰어난 재능은 그 0.1% 중에서도 극소수 밖에 없단 말일세. 하지만 검사라면
어떤가? 검사는 재능이 없더라도 자신의 노력하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가? 타고난 선천적 능력이 없으면 되기 불가능한
마법사와는 다르지 않은가?”
‘호오, 내가 그리 대단한 인물 이었던가? 홋홋홋…’
노만의 열변 같은 말에 데니는 뭐라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모습이 반박하지 못하는 것이 되게 분한 모양이었다.
그걸 본 노만이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조엘이 데니의 편을 들고
나섰다.
“물론, 노만님의 말대로 검술은 누구나 노력하는 것에 따라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는 있습니다만, 검술에 탁월한 재능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도 극히 드뭅니다. 그러니 해인이의 그 재능을 살려주지 못하고
그냥 사장시켜 버리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이기 무슨… 너희들이 내 스승… 은 맞군. 어쨌든 뭐냐구… 자기네들이 내 부모라도
되는 것 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려고 하다니… 그런건 내 의견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냐?’
나는 현재 내 상황상 그들의 격렬한 대화에 – 내 일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 끼어들지
못한 채 옆에서 불만스런 표정으로 그런 그들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런 내 불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조엘이 날 보고 싱긋 웃더니
내 생각하던 바를 그대로 말했다.
“하지만, 무엇이 어찌 되었건 이런 일은 우리가 정하기 보다는 당사자가
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정해봤자 당사자가 거부하면 소용
없으니까요.”
100번 옳은 조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명의 시선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는 조엘이 대표로 나에게 물었다.
“자, 말해봐라 해인아. 넌 어찌 했으면 좋겠지?”
조엘 녀석은 두 명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받고 난처해서 당황하는 내 모습이
재미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맙소사… 하필이면…”
노만과 데니는 ‘설마 내가 가르치는 걸 그만 두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란
시선이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무지 무지 난처했다.
사실 노만과 데니 둘 다 친한데 둘 중 어느 하나를 그만 두겠다고 할 수도
없고, 둘 중 제대로 익히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없고 그만 두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러나 둘 다 하겠다고 하자니, 노만이 이렇게 이야기 한 것이 모두 나를
위한 것인데 둘 다 하겠다고 하면 그런 노만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 같아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정말 무지 무지 난처했다.
그래 내가 우물쭈물한 채 아무 말도 못하자 보다못한 엘라임이 말을
건네왔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라고요. 내가 무엇을 선택하던 둘 중 한명의배려는 거절하게 되는 거니.. 에휴… 왜 이렇게 되었지?] [뭘 그리 복잡하게 구는 거냐? 어차피 한 사람의 배려는 거절하게 되는 거라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되잖아?] [아, 그것도 그렇네… 하지만… 그래도 그럼 미안하잖아요.] [그럼 달리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그건 없죠.] [거봐.]
‘에휴….’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무지무지 미안한 표정으로 노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에… 스승님… 저는 둘 다 배우고 싶은데요…”
그러자 노만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 하기사… 너에게 선택하라고 하는 자체가 선택을 못하게
하는 것임을…. 아무래도 조엘님과 링클레터 경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겠지.
그래, 알았다. 하지만 너무나 아쉽구나.”
노만의 말은 어찌 들으면 조엘과 데니가 내 앞길을 막는 것 처럼 들렸기에
조엘은 그의 말에 쓴 웃음을 지었고 데니는 더욱 더 표정이 굳어졌다.
[에엑, 스승님이 서운해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데니 형이 화나버렸어요.어쩌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엘라임을 바라봤지만, 엘라임이라고
뾰족한 수가 없었는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하는 수 없지 뭐. 어쩌겠어? 내가 확 뒤집어 버릴 수도 없잖아.]그래서 결국 나는 예전대로 새벽에는 검술을 배우고 오후에는 마법 수업을
받기로 결정 되었는데, 그 다음날 내가 새벽 수련을 하기 위해 연무장으로
가자 데니가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날 기다리고 있다가 구석으로
끌고갔다.
“너, 정말 검술을 배울 거야?”
정색한 얼굴로 묻자 나는 괜히 긴장해서는 실실 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이, 형… 왜 그래요? 내가 언제 검술이 싫다고 했남?”
하지만 데니의 얼굴은 풀리지가 않았다.
“좋다고 하지도 않았잖아. 어제 곰곰히 생각해보니 너 이 새벽 수련에 참가하게
된 것도 조엘님이 강제로 시켜서 하게 된 거였잖아. 만약, 노만님의 말씀대로
마법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한다면 새벽 수련에서 빼줄 수도 있어.”
“어어, 그러지 말아요. 물론 난 마법을 배우고 싶지만, 마법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고요. 그냥 마법이 어떤 건지 궁금한데다 나도 할 수 있으니까 배우는
거 뿐이지 이쪽으로 전력을 다하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게다가 난 검술도 배우고
싶구요.”
내 말에 날 뚤어져라 바라보던 데니가 씨익 웃었다.
“검술도 마법처럼 이거 열심히 배워서 검사나 기사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지?”
“엣? 아니… 그게… 뭐… 아하하하…”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상대에게 자연스레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난 뻔뻔스런 철면피가 못되었다.
그래서 대답은 못하고 웃음으로 얼버무리려고 하는데…
콩
“아얏~!!”
역시나 대충 대충 하는 걸 가만 두지 못하는 데니가 내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녀석~! 검술 배울때 대충 적당히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
녀석이 검술을 배운다고 말했을 때 부터 알아챘지만… 솔직히 말해봐. 너
마법 수업도 적당히 넘기고 있지?”
“앗, 아하하하… 뭐…”
“좋아. 내 너의 그 적당적당히 하는 정신 상태를 뜯어 고쳐 주겠다. 오늘 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다, 알겠냐? 마법 수업 시간을 늘리는 대신 계속 검술을
배우기로 한 이상 확실하게 가르쳐 주지.”
“엣? 그게 무슨…”
“따라 와. 오늘 부터 내가 너만을 위한 특훈을 시켜 주겠다!”
“어어, 형…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은데… 저기~ 이봐요오~”
성큼 성큼 걸어가는 데니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가면서 나는 근처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는 이제는 웃고 있는 조엘을 바라보며 어찌 해달라는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조엘 녀석은 그걸 싸악 무시한 채 손을 흔들어 보였다.
“행운을 빌어. 데니 녀석은 한번 한다면 하는 녀석이거든. 이걸로 네 검술
실력이 팍팍 늘테니 열심히 하라고.”
‘이 녀서억~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에에~~’
“행운을 빌어. 데니 녀석은 한번 한다면 하는 녀석이거든. 이걸로 네 검술
실력이 팍팍 늘테니 열심히 하라고.”
‘이 녀서억~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에에~~’
따악~!!
“아코~!!”
“제대로 막지 못해? 다시 한번~~!”
콕~!!
“켁!!”
“어딜 보고 하는 거야? 상대의 검을 똑바로 보라고 했잖아!! 눈은 뒀다 뭐해?”
“제대로 못해? 검법 배울때 뭐 했어? 너 연습 제대로 안 했지?”
“검을 어딜 겨누고 있는 거야? 제대로 겨눠!!”
“팔이 내려갔잖아. 똑바로 못 들어?”
“으헥~!!”
‘우에에엥~!!’
사실 그 동안의 수련은 기본 연습을 한 다음 데니가 검법 동작을 가르쳐 주면서
몇번이고 반복해서 혼자 연습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데니가 가끔 짬을 내어서 ‘이 동작은 적을 어떻게 막고 어떻게 베는 것이며
어떻게 치고 들어가는 것이다.’ 라고 설명해주는 것이 다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 동안의 배운 검법을 가지고 데니와 직접 검을 맞대어
대련을 하는 것이었다.
‘젠장… 그것도 겨우 검법 세개 익힌 사람에게….’
간단하게 검법을 설명하자면, 하나는 상대방이 내려쳐오는 검을 옆으로 흘려낸
다음 상대가 검을 수습하기 전에 상대를 내려치는, 일명 방어하고 공격하기 검법이었고,
또 하나는 상대와 검을 겨눈 채 대치 상태에 있다가 순간적으로 상대의 검을 쳐내고
공격해 들어가는 검법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상대가 내려쳐오는 검을 마치 뱀이나
덩쿨처럼 살짝 엮어서 옆으로 끌어내린 뒤 공격하는 검법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적절한 타이밍과 빠른 스피드, 그리고 바른 자세가 꼭 필요한
검법이었는데, 나는 아직 검법을 배운지 얼마 안 된 초짜중의 초짜였기에 이 모든
것이 완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 일 검법에서는 데니가 내려치는 목검을 눈 위에다 내 목검을 사선으로
들어 오려 막아 흘려내야 하건만, 맨날 제 위치에다 올리지 못하고 조금 낮은 위치에
올려서 그대로 데니의 목검에 이마를 얻어 맞곤 했다.
따악~!!
“아코~!!”
“팔 똑바로 올리라고 했지!! 넌 지금 머리에 검 맞아 죽었어!!”
거기다 사선의 각도가 제 각도를 내지 못하면 데니의 목검을 옆으로 흘려내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받아 내게 되었는데, 데니의 내려치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그렇게 받아내면 손목이 부러진 것 처럼 시큰 시큰 거리고 무릎이 저절로 꺾였다.
“으객~!!”
“각도가 틀렸잖아. 검 끝을 더 내리라니까!!”
이게 전부였다면 정말 나는 행복했을 거다.
그 다음 검법인 상대방과 검을 겨누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상대의 검 끝을 쳐냄과
동시에 상대 품으로 파고들어 검으로 내려 치던지 아니면 찌르던지 둘 중의
하나인데 나는 데니의 목검을 쳐서 옆으로 튕겨내질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상대의 검을 옆으로 멀리 튕겨내고 파고 들어야하는데 검을 튕겨내지
못하니 그 다음 동작은 아예 할 수가 없었다.
“힘이 없잖아, 힘이. 내가 지금 폼으로 검을 들고 있는 줄 알아? 힘껏 쳐내란 말야!”
게다가 방향을 잘못 잡으면 검 끝이 아닌 검 중간 부분을 치거나 – 그렇게 되면 데니의
검은 아예 꿈쩍도 않는다 – 검 밑의 허공을 그냥 헛치게 된다.
헛치게 되면 데니가 목검을 조금만 앞으로 내밀면 목검의 끝은 정확하게 내 목
바로 앞에 다가왔다.
콕~!
“넌 죽었어.”
“에구~”
“어딜 치는 거야, 어딜? 똑바로 보고 치라고 했지? 검 끝을 정확하게 힘껏 쳐야
상대의 검을 튕겨내지!! 내가 하는 거 잘 봐.”
그러면서 데니가 시범을 보이기 위해 나와 검을 겨누면 나는 바짝 긴장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봤자 데니가 검 끝을 치고 들어오면 내 검은 옆으로 팍 튕겨 나가고
그 순간 데니의 검 끝은 내 목에 와 닿아 있었다.
내 검을 치고 들어오는 시간이 과장 좀 보태면 1초도 안 걸린다.
그만큼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쳐내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예전에 무협지에서 검을 들고 싸울때 강하게
부딪히면 손아귀가 찢어지는 거 같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그짝이다.
나중에 검을 놓고 보면 손바닥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시뻘개져 있곤 했다.
그래서 검사들 손에 딱딱한 굳은 살이 백이는 걸 거다.
그렇게 새벽 수련을 끝내고 나면 나는 누가 살짝 건들기만 하면 폭 쓰러질 만큼
지치게 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 다음에는 노만과의 마법 수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만은 자신의 계획대로 내가 검법을 그만 두지 않고 계속 하게 되자 노만은
이대로 가만 있을 수는 없다며 집중 수업 방식을 택해 쉴 틈도 없이 날
몰아쳤다.
게다가 이제 2클래스와 3클래스의 마법도 배우다보니 마법진에 대해서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필연적으로 수학과 과학과 논리적인 사고와 세심한 관찰력 까지
필요하게 되었다.
마법은 단순 마법과 종합 마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단순 마법은 불을 일으키거나
물을 나오게 하거나, 빛을 비추게 하는 등등 한가지 요소가 필요한 마법이고
종합 마법은 두가지 이상의 요소가 복합적으로 필요한 마법, 예를 든다면 물과 빛을
형성해서 무지개를 보이게 한다든지, 아니면 바람과 불을 혼합하여 불 회오리를
만든다던지 등등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마법에 익숙해지려고 단순 마법 위주로 배웠는데 이제 복합 마법을
배우게 되니 여러개의 요소에 각각 마나를 분배하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요소는 집어
넣고 필요 없는 요소는 빼는 걸 배우다보니 머리가 다 지끈지끈 거릴 지경이었다.
그러자 숙제도 전보다 두배는 더 많아져서 잠 잘 시간 또한 팍 줄어들어 내가 완전히
시험을 코앞에 둔 고 3 수험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런 내가 너무 가여워 보였던지 해럴드 집사나 조엘은 내가 틈나는 대로 꾸벅
꾸벅 졸아도 모른 척 해주고 나에게 일을 맡기지 않으려고 애써줬다.
특히나 조엘 녀석은 내가 녀석을 시중들러 갔을 때 그냥 소파에서 자게 해 주고
자신혼자 다 처리한 다음 방을 나설때 날 깨워서 데리고 나가곤 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런 배려가 고마웠겠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이 그 녀석이었기에
나는 하나도 안 고마웠다.
게다가 정령들 또한 시키지도 않았건만 기특하게도 내가 복도를 걷다가 꾸벅 꾸벅
졸아버리면 녀석들이 알아서 내가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고 옆으로 부딪히지 않게
잡아주고 엉뚱한데로 가지 않도록 인도해줬다.
역시 나이트급 정령들이라 내가 특별히 그들에게 마나를 공급해주지 않아도 자신의
힘으로 적은 물리력은 행사할 수 있어 날 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나이트급이랑 계약을 맺길 잘 했다니까.’
물론 노만은 내가 정령과 계약을 했다는 걸 모른다.
나이트들은 하, 중, 상급의 정령들과는 달리 정령왕 처럼 이 세계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의 생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조차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노만에게 이들을 소개시켜줬다가는 내가 엘라임의 자식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가 아니겠는가?
나는 될 수 있는 한, 가능한 한 내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다.
뭐, 벌써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타고난 아이라고 비춰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인간이라고 봐주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17년이란 세월동안 인간으로 자라온 나는 내 정체를 솔직하게 밝힌다면
지금처럼 평범하게 지내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그걸 두려워 하는 것 같다.
약간 특이하게 보이는 것은 괜찮을지 몰라도 아예 차원이 다른 사람이라는걸
알게 되면 아무리 편하게 대하려고 해도 남들과 교류함에 있어 보이지 않는
벽이 쌓이게 될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아예 정령들과 계약을 했다는 걸 숨기게 된 것이다.
뭐, 노만은 자신이 정령사가 아니기 때문에 도와줄 수가 없으니 마법을 충분히
배워 어느 경지에 이르면 스스로 마법진을 그려 정령을 불러보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앞에다 대고 ‘벌써 정령들을 불러냈는데요?’ 라고 말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어쟀든, 이렇게 노만과 데니에게 집중적으로 수업을 받으며 고생하고 있는
날 신께서 불쌍히 여기셨는지 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날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어쨌든, 이렇게 노만과 데니에게 집중적으로 수업을 받으며 고생하고 있는
날 신께서 불쌍히 여기셨는지 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날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흐음… 사냥이라… 이번에는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인가?”
거의 모든 파티 초대장 같은 경우는 공작 앞으로 오기 때문에 조엘 앞으로 직접
온 초대장은 본 적이 없던 터라 나는 약간 신기해 하며 조엘에게 건넸는데 그는
익숙한 일인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초대장을 읽어본 후 옆에 서 있던 데니에게
넘겼다.
“하기야, 이제 슬슬 올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가시겠지요?”
“당연히 가야지. 나도 슬슬 바람도 쐬고 싶고… 게다가 그 녀석들 얼굴 본지도
오래 되었거든.”
“그러고보니… 정말 반년 만에 뵙는 것인가요?”
“아마… 그쯤 되었을 걸? 스테판 녀석이야 3달 전에도 잠깐 봤었지만, 볼레터
녀석은 반년만이야.”
“그러고보니 웨스트모어랜드 자작께서 녹스 왕국에 가 계셨었지요?”
“그렇지. 자신이 돌아오면 부른다고 했는데 초대장이 온 거 보니 돌아온 모양이야.
그렇다고 성으로 안 오고 곧바로 영지로 내려가있다니…”
그 둘의 대화에 상황을 전혀 모르는 나는 끼어 들 엄두도 못 낸 채 그냥 멀뚱
멀뚱 서서 듣고만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문득 시선을 준 조엘은 씨익 웃더니 데니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어떨까, 데니… 이번 사냥에는 해인이를 데려가볼까?”
그러자 데니가 정색을 하고 펄쩍 뛰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위험한 곳을 간단 말입니까?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안됩니다.”
“흐음… 하지만 노만님과 같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조엘의 말에 데니의 강경한 표정이 약간 풀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노만님이요? 흐음.. 하기야… 우리를 따라 앞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 분과
함께 있는 거라면 괜찮겠군요. 뭐, 솔직히 저도 위험하지만 않는다면 실전에서
검술이 어떻게 쓰여지는 지 볼 수 있게 데려가고 싶기는 합니다.”
“그렇지? 노만님과 함께 있게 한다면 괜찮을 거야. 게다가 검술은 물론
마법이 실전에서 사용되는 것도 보고 말이야.”
조엘의 말에 데니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내가 멀뚱히 바라보고 있자 얼른 그 기색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게다가 사내 녀석을 언제까지 저택에만 콕 박아
놓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번 사냥행이 저 녀석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좋은 경험이나마나… 기껏 사냥 가는 거에 왜 마법사까지 총 동원되어가지고
간단 말이야? 거기다 난 위험하니 뒤에 있으라고? 거참… 저 인간들 그렇게
안 봤는데, 역시 온실에서 고이 자란 화초들이었군…’
그들이 말하는 ‘사냥’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나는 단순히
예전 한국에 있을때 알고 있었던 오리 사냥이나 아니면 여우 사냥 같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속으로 정령들을 동원해서라도 혹시 가여운 새끼 동물들이나 아니면
새끼 달린 어미 동물들을 잡으려 하면 도망치게 도와주리라는 기특한 결심까지
하면서 여행 갈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이 저택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 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한껏 들떠 있었다.
솔직히 이 곳에 와서 계속 저택 안에만 머물고 있다가 처음으로 이 곳을
벗어나 다른 귀족 영지에 간다는 사실이 마치 소풍을 간다는 것 처럼 들려
기대 되기도 하고, 이 세계의 귀족 영지라는 것이 궁금하기도 해 나도 모르게
기분이 붕 떠버렸다.
그 ‘사냥’이라는 것에 대해 듣기 전까지는…
그래도 준비하는 기간에는 해럴드 집사의 교육 영향인지, 아니면 이번 사냥을
주최하는 웨스트모어랜드 후작 영지에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려는
데니와 노만의 몰아침에 눌려 좋아하는 티를 조금도 내지 못했던 나는 드디어
일주일 뒤, 조엘이 왕성에 정식으로 휴가를 맞고, 그 ‘사냥’에 갈 가문 소속의
기사들이 뽑히는 등의 준비가 끝나 드디어 출발하는 날, 그 동안 티내지 못했
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도 모르게 자꾸 주체할 수 없이 벌어지는
입 때문에 계속 싱글벙글 하고 있었다.
엘라임에게 칠칠치 못한 놈이라고 잔소리를 들었지만 그래도 입이 지 멋대로
벌어지는 걸 난들 어쩌겠는가.
게다가 놀러가는 것도 놀러가는 거지만, 갔다 오는 동안에는 데니의 검술 수업과
노만의 마법 수업도 잠시 방학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잠시 저택을 떠난다는 사실 보단 수업을 잠시 중단한다는 것이 더 좋았다.
[훗훗, 영감님도 대한민국 학생이었어봐요. 그럼 내 심정 이해할 테니…]그러자 같이 가는 기사들과 그들의 시종들은 나의 들뜬 마음을 이해하는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미소만 지은 채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내 마법 스승인
노만은 달랐다.
조엘과 데니를 비롯한 다른 기사들과 시종들은 모두 말을 탔지만, 노만과 나 –
그러고보니 나는 이 곳에 와서 말을 한번도 타보지 못했다. – 는 말을 탈 줄
몰랐기에 공작가에서 내준 고급스러운 마차를 타고 가게 되었다.
마차 안에서도 계속 벌어지는 입을 주체못해 싱글벙글 웃고 있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만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좋으냐?”
“아핫핫핫, 예. 괜히 들뜨게 되네요.”
그의 질문에 나는 쑥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대답하자 노만이 마차 안의 푹신한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 ‘사냥’ 가는 것이 좋은 거냐, 아니면 단지 여행을 간다는 것이 좋은 거냐?”
“그야…. 저택을 떠나 딴 곳에 가본다는 것이… 전 사냥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동물을 좋아하는 편이라… 아, 물론 고기도 좋아하지만…”
육식을 좋아하는 주제에 사냥은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쪼끔 양심에
찔려 나는 노만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노만의 말에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동물? 그게 무슨 소리냐?”
못 알아듣겠다는 듯이 되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내가 오히려 어리벙벙 해졌다.
“무슨 소리냐뇨? 사냥을 가는 거잖아요.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 아닌가요?
멧돼지나 사슴 같은 것…”
내 말을 듣고 있던 노만의 표정이 묘해졌기에 나는 말 끝을 흐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잘못 말한 것은 없었기에 노만의 표정이
이해되질 않았다.
‘아닌가? 아니, 사냥이 동물을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뭘 사냥한다는
거지?’
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노만은 관자놀이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문제나 주위 상황이 이해가 되었을때 노만이 자주 보여주는 버릇이었다.
“그래, 그래… 아무도 너에게 설명을 안해줬나 보구나. 해인아, 그냥 동물을
잡기 위한 놀이 같은 보통 사냥이라면 가문에서도 특별히 뛰어난 기사들만
골라내고 가문의 마법사인 나까지 동원하겠느냐?”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냥’하나 가면서 되게 요란떤다고 생각했던 거고…
“그럼… 스승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가 가는 ‘사냥’은 보통 동물을 잡기 위한 사냥이
아니란 말씀이군요?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사냥하는 겁니까?”
“몬스터.”
“몬…. 스터요?”
‘그게 뭐지?’
내가 아는 것이 당연하단 얼굴로 말하는 노만이었지만, 내가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어리둥절한 채 노만과 내 옆에 앉아있던 – 물론 노만의 눈에는 안 보인다 –
엘라임의 얼굴을 바라보자 노만과 엘라임은 황당한 얼굴로 동시에 말했다.
“설마… 몬스터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저어… 모르겠는데요…”
왠지 모르는 것이 잘못이라는 그 둘의 반응에 나는 약간 움츠린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의 노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농담이겠지? 트롤이나 고블린, 가고일 같은 건 보지 못했어도 들어 봤을거는
아니냐?”
‘듣지도 못했는데…’
“에… 그러니까 저기… 그게…”
내가 난처한 표정으로 볼만 긁적이고 있자 노만이 날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믿을 수가 없구나. 이 세상에서 몬스터를 모르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너 혹시 어디 딴 차원에서 온 사람 아니냐?”
‘바로 그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사실대로 말 할수는 없었기에 나는 항상 해럴드 집사에게 둘러댔던
말을 다시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말이죠… 제가 다른 사람은 만나지 못하는 아주 기~픈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제가 상식적으로 모르는 것이 많아요.”
“그렇다 해도 부모님이 몬스터에 대해 설명도 안 해주시더냐? 아니, 깊은 산속이나
숲속에서 살았다면 몬스터 한 두마리쯤은 볼 법도 한데…”
“핫핫, 그게.. 지금까지 몬스터라고 불리는 것들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다
부모님도 몬스터에 대해 한번도 말씀해주지 않았거든요.”
나는 그렇게 변명하면서 옆에 앉아있는 엘라임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엘라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래서, 지금 그게 내 탓이라는 거냐? 몬스터도 모르는 네가 이상한 거야.] [이상한게 아니네요 뭐… 내가 살던 곳은 몬스터라는 것이 없었단 말이예요.이상한 거라면 바로 이 곳이 이상한 거예요.] [네가 있던 곳이 이상한 거야.] [그…]
나는 엘라임의 말에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노만의 말이 들려왔기에 그냥 꾹
입을 다문 채 노만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잘 듣거라. 몬스터란… 음… 거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그래, 그래.
보통 동물이라면 사람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지?”
‘그거야 뭐…’
“보통은 사람을 보면 도망가지요.”
“그래, 보통 동물은 사람을 보면 몸을 피하지. 하지만 몬스터들은 오히려 그
반대다. 사람을 보면 해를 가하기 위해 덤벼들지. 그러니까, 사람을 보면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덤벼드는 생물들을 몬스터라고 여기면 대충 맞을 거다.
그 몬스터들 중에는 사람 만큼 지능이 높아서 대화도 할 수 있고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있고, 지능이 낮아 본능적인 행동을 하는 종류도 있고, 하여간
엄청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가 있지. 아, 그래. 사람의 형상을 한 종류도 있어.”
“헤에… 그래요? 앗, 그럼 혹시… 유사인종들도 몬스터라고 불리나요?”
“유사인종이 인간들에게 해를 입히더냐? 사람을 보면 잡아먹거나 죽이기 위해
덤벼드는 종만 몬스터라고 분류한 거야.”
“아하… 그렇군요. 그럼, 이번에 우리가 가는 사냥이 그러한 ‘몬스터’들을
잡으러 가는 건가요?”
“그래. 놀이로 생각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만큼 엄청
위험한 사냥이지.”
“아하… 그렇군요. 그럼, 이번에 우리가 가는 사냥이 그러한 ‘몬스터’들을
잡으러 가는 건가요?”
“그래. 놀이로 생각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만큼 엄청
위험한 사냥이지.”
“아니, 그러면 조엘님은 왜 그렇게 위험한 사냥에 가신대요?”
‘혹시나… 돈 많고 할 일 없는 녀석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몸을 던지는 건… 아니겠군. 조엘 녀석이 그렇게 멍청하다고 생각되진 않아.
게다가 강한 사람들만 뽑아서 가는 거 보니 준비도 철저한 거 같고…’
“나도 자세한건 모르지만… 몬스터 사냥은 조엘님과 그 친구분들이 학교를 졸업하기
전부터 시작되어 매년 이맘때쯤이면 누군가 한 사람의 주최로 사냥을 열더군. 뭐,
초여름과 늦가을이 몬스터들 위협이 가장 큰 때이니… 귀족들의 일종의 게임이라고
해도 백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지. 설마, 그런 걸 생각하고 시작한 건
아닐테지만…”
그렇게 나에게 설명해주면서 노만은 짐마차에 싣는 대신 마차에 탈때 같이 가지고
온 책꾸러미 안을 뒤지더니 입맛을 한번 다셨다.
“쩝, 역시 안 가지고 왔나?”
그 모습에 같이 노만의 짐을 꾸렸던 내가 의아해서 물었다.
“뭘 찾으시는 건데요?”
노만은 한번 더 자신이 가지고 탄 책들을 훑어보더니 결국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몬스터 도감 말이다. 매년 이런 사냥에는 가지고 다녔었는데, 올해는 익숙해졌다고
안 챙겼나보다. 으음.. 너 공부 시킬 생각만 했지 몬스터에 대한 건 생각도 못하고
있었군…. 이왕 이렇게 된거, 자!”
노만은 책 꾸러미를 뒤지다가 골라 내 놓은 책을 펼치더니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숙제. 도착하려면 일주일 정도 걸리거든. 그 동안 네가 할 것들.”
‘엑….’
저택을 떠난 그 시점 부터 수업은 중단된 줄 알았건만,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성에 도착할때까지 수업이 연장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노만의 폼을 보아하니… 그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성에 도착해도
틈만 있으면 수업을 시킬 것 같았다.
‘에거거…. 수업 안 하는 줄 알고 좋아했더니만…’
마차가 덜컹 덜컹 거리면 흔들려서 책을 읽기 힘들다는 핑계라도 대고 공부하는
것을 피하겠지만, 공작가에서 내준 이놈의 마차는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한국에서 기차를 탔을 때 만큼 흔들림이 적어 책을 읽는데 큰 불편이 없었다.
‘우쒸, 이 마차 만든 놈 누구야?’
그러나, 그나마, 그나마 수업의 절반 (두개 중 하나)이 줄어든 것만 해도
어디냐는 식으로 나 자신을 위로했건만… 신께서는 무심도 하시지, 점심때 식사를
하고 지친 말들과 사람들이 쉬기 위해 잠깐 멈춘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 왠종일
달렸건만, 그 정도로는 끄떡 없다는 무적의 체력을 자랑하는 데니가 어두워져
야영을 하기 위해 일행이 자리를 잡았을 때 나를 불러냈다.
“해인아!”
“예?”
“자기 전에 수련하자.”
“저… 형 안 피곤하세요?”
“견딜만 하다. 목검 가지고 저쪽으로 오거라.”
“예에…”
단호한 데니의 말에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부르짓었다.
‘이기 뭡니까아아~~!!’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다.
위스트모어랜드 후작령은 벨레니 왕국에서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후작령으로 퀸모드 산맥의 한자락이 이어져 있었다.
물론 후작령까지 뻗어있는 산맥 자락은 대륙에서 3대 산맥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퀸모드 산맥에 비해 작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퀸모드 산맥이라고
쳐주지 않지만(작은 것도 죄다.), 엄밀히 따지자면 퀸모드 산맥의 일부분이었다.
보통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퀸모드 산맥은 오른쪽 위쪽에서 왼쪽 밑으로 내려오는
형식의 사선으로 그려져 있는데 후작령으로 뻗어 있는 줄기까지 그린다면
기울어진 Y자 형을 그리게 된다.
그런데 이 산맥 줄기는 퀸모드 산맥의 가지라고 하기에는 안 어울릴 정도로
능선이 완만하고, 계곡 또한 깊지 않은데다가 왈그린을 거쳐 서스턴 해로 빠져
나가는 거대한 강줄기의 근원이기도 해서 물이 많았다.
능선 완만하지, 물 많지, 사계절 뚜렷하고 온난한 기후까지 갖춰진 이 곳은
필연적이라고 할만큼 동물이 많았다.
그리고 인간들 관점에서 볼때 없어도 되는데 괜히 와서 수만 잔뜩 불려놓은
몬스터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뭐, 사실 그 산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하루 세끼를 챙겨먹을 수 있는 몬스터들은
산을 잘 내려오지도 않기 때문에 가끔 마법 재료나 아니면 무기를 만드는 재료를
구하기 위한 사냥꾼이나 관심을 갖지 근처 마을 사람들이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문제는 지능도 딸리고 육체적 능력도 힘만 조금 세다 뿐, 둔한 몬스터들이었다.
그런 몬스터들은 자신들의 기척만 느껴지면 냅다 도망부터 가는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다가, 몬스터들 계열 중에서도 하급에 속하니 다른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건 꿈도 못 꾸지만 먹고는 살아야 하기에 산 아래에서 마을을 이루고 사는
인간들에게 눈을 돌렸던 것이다.
하기야, 이 대륙에서 이처럼 몬스터들의 습격을 자주 받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이 후작령은 벨레니 국가에서도 몬스터들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곳은 1000년 전 그라함 대제 시절에 몬스터들을 막기 위한 특별
요새가 건립되었고, 11국가로 나뉘어 벨레니 국가가 건립되었을 때, 건국
공신 중 하나인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이 이 곳을 자신의 영지로 받아 대대로
몬스터들의 침입을 지켜냈다고 한다.
이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은 뼛속부터 기사라고 불릴 정도로 고지식한 인물이라
그런 곳을 영지로 달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그때부터 웨스트모어랜드 후작 집안의
남자들은 성인이 되면 산으로 몬스터를 잡으러 가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서운 몬스터 잡으면 인정 받고, 못 잡으면 수치로 낙인 찍히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덕분에 웨스트모어랜드 후작 집안은 국가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뛰어난
기사 집안으로 위명을 떨치고 있다고 한다.
재밌는건 웨스트모어랜드 후작 집안의 여성이 집안에서 정해준 혼처가 싫거나,
아니면 집안에서 인정 못하는 낭군님이 생겼을 경우, 몬스터 잡아서 가주에게 떡 하니
대령하면 자신이 원하는 날에 원하는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그 집안 전통이라나?
덕분에 웨스트모어랜드 집안은 뛰어난 기사 집안으로도 유명하지만, 여기사를
가장 많이 배출해낸 집안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런데, 조엘이 학교다니던 시절 (데니도 조엘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 그의 친한
친구 중 한명이 웨스트모어랜드 후작가의 장남이었는데 학교 다니던 중 그의 성인식을
치르는 날이 와버린 것이다.(이 곳에서는 18세를 성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도
생일만 지나면 성인으로 취급 될테지만, 아무도 내 생일을 물어보지 않고 있다.)
후작가에서 성인식을 치르는 아이를 위하여 뛰어난 기사들과 용병들을 동행시키기는
하지만, 몬스터와 맞서 싸워 잡는 것은 오로지 그 아이의 몫이었기에 – 적당한 몬스터가
나타나면 홀로 맞서서 잡아야 하며, 이때 같이 간 기사들이나 용병들은 소년이 죽거나
아니면 능력이 안된다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몬스터를
잡을 기회가 단 한번 뿐인 건 아니고, 한번 실패하더라도 또 다른 몬스터에게 덤비면
된다고 한다. – 운이 없으면 몬스터도 못 잡고 크게 다치거나 죽는 일도 가끔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안 조엘과 또 한명의 친구인 윈체스터 백작가의 장남은 친구를
돕겠다고 나서서 같이 성인식 몬스터 사냥에 나섰다고 한다.
“에휴,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내 질문에 신나게 설명해주던 데니가 갑자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왜요? 그렇게 위험했어요?”
“아아.. 물론 위험했지. 하지만, 그때 조엘님이나 그 친구분은 집에 안 알리고
몰래 간 거였거든. 물론 난 입다물고 있겠다는 조건으로 따라갔지만, 나중에 밝혀져서
난 아버지께 죽을 뻔 했다고.”
“하.하.하… 그런 일이…”
집에는 안 알렸지만, 성인식에 참여하려면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허락이 있어야
했는데, 후작은 조엘과 그 친구의 의리를 보고 호탕하게 웃으면서 허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학교 졸업식 파티에 참여한 조엘 아버지와 친구의 아버지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발각된 거라나?
그때부터 소문이 나서 매년 열리는 몬스터 사냥에 참여하는, 이름을 날리고 싶거나
실력을 뽑내고 싶은 젊은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많이 참여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그 전에 후작 장남의 성인식때 같이 참여했다가 무사히 귀환한 것도 모자라 몬스터들
까지 잡은 그들은 간뎅이가 부어서 매년 여름 방학때 몬스터 사냥을 다녔다고 한다.
물론, 그것도 졸업식 전까지는 집안에 비밀로 하고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엘이 간덩이만 크고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라, 몬스터 사냥을
갈 때는 항상 뛰어난 용병들을 고용해 같이 갔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끼리만 갔다면… 어쩜 몬스터 사냥은 조엘이 졸업하기도 전에 중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여간, 그렇게 졸업식 이후로 참여자가 많아서 이제는 완전 매년 행사가 되어버린
몬스터 사냥은, 처음 몇명 없었을 때는 돌아가면서 사냥터를 물색하고 날짜를
잡았는데 이제는 몬스터 사냥에서 우승한 자가 그 다음 사냥을 주최할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몇가지 규칙까지 만들어졌다고 한다.
“헤에… 그럼, 몬스터들을 가장 많이 잡은 사람이 우승하는 건가요?”
“많이 잡는다고 우승 하는 건 아니고… 몬스터도 강한거가 있고 약한 것이
있잖아. 그러니까 약한 거 한마리는 1점, 좀 더 강한 몬스터 한마리는 2점…
이렇게 단계별로 점수를 매겨서 총 합산하는 거야. 그리하여 점수가 가장
높은 사람이 우승하는 거지.”
“오… 그렇군요. 하지만, 그 점수는 어떻게 정하는데요?”
“몬스터 도감이 있잖아. 마법사 길드에서 정식으로 몬스터를 등급 별로 구분한
거. 그것을 기준으로 하는 거야. 그리고 한 팀은 10명으로 제한되어 있지.”
데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하지만… 지금 같이 가는 우리 일행은 10명은 훨씬 넘는 걸요? 같이 가는
기사분들만 해도 20명이예요.”
“아아, 그건 팀원 중 한명이 부상 당하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가 가능하거든.
팀원은 누구를 하든 상관이 없어. 용병이든, 마법사든, 기사든, 그건 팀장의
마음이야.”
“헤에….”
“사냥하는 기간은 7일. 사냥터 근처에 캠프를 세우고 그 곳에서 출발한 날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리고 7일째 되는 날 해지기 전까지 돌아와야 해. 해진 후에
오면 아무리 몬스터를 많이 잡아도 실격이야.”
웃기게도 이 사냥에는 주최측에서 선발한 공정한 심사단까지 구성되어 있고,
의무반까지 갖춰진다는 말에 나는 좀 황당해졌다.
‘완전… 서바이벌 게임이네… 이거 정말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거 맞아?’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의 성은 요새란 이런 것이구나… 라는 걸 보여주려고
만들어진 것 처럼 보였다.
수도의 성벽 보다도 더욱 더 높고 두터운 성벽은 오랜 세월동안 이 곳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을 당당하게 내비치고 있었고, 성벽 여기저기에는 이 곳이 몬스터의
습격을 자주 받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여기저기 흉터가 가득했다.
게다가 후작의 성 주위에는 깊은 해자가 파여 있는데다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 팔둑의 두배나 되는 굵은 강철로 촘촘이 엮어진 철문에다 두껍고 무겁고 단단해
보이는 커다란 나무 문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와우….”
마차 안에서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자 노만이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이건 1000년 전 그라함 대제 때 만들어진 요새라서 그래. 뭐, 요즘은 몬스터의
습격이 그렇게 잦지는 않지만, 후작 집안의 성격 상 이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
“대단하네요. 그렇다는 건 이 성이 1000년 전의 유물이라는 거잖아요.”
나는 1000년 이라는 역사에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노만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1000년 전 유물 가지고 뭘 그러는 거냐? 엘프의 마을이나 드워프의 마을에 가면
1000년 전의 물건은 흔하고 만년 전 유물까지 있는데… 마르타 국에 있는 마법사
탑이나 녹스국의 성도 다 1000년 전 그라함 대제때 만들어진 게 아니더냐?”
“아….”
그러고보니 새삼 생각난 거지만, 엘프의 수명은 1000년이었다.
‘그러니까 엘프들에게는 조선왕조는 한 엘프 수명의 절반 정도밖에 존재하지
못한… 쩌비…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처량하군.’
후작의 성에는 몬스터 사냥에 참가하기 위한 많은 사람들이 벌써 몰려와
있었다.
여기서 올 해 몬스터 사냥 개최 기념 및 사냥하기 위해 모여든 모든 사람들의
행운을 기원하는 파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전야제를 열고 이번 사냥터로
지정된 곳으로 출발하게 된다.
“여어, 조엘~!!”
“와핫핫핫, 이 자식~!!”
우리가 도착하여 그 성 사람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두 명의, 조엘과 데니 또래의 청년이 달려와 조엘과 기쁨의 포옹… 은 아니고
기쁨의 목조르기를 시행했다.
먼저 달려온 남자가 달려들었을 때 조엘은 쉽게 상체를 숙여 피했건만,
그 뒤에 달려온 남자는 미쳐 피하지 못하고 걸려들었던 것이다.
“하하하, 짜식, 내 걸릴 줄 알았다. 나만 있는 줄 알았겠지?”
먼저 달려와 뒤에 달려온 이를 가렸던 남자가 호탕하게 웃자 조엘의 이를
빠득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너희두울~!!”
그러자 조엘의 목을 조르고 있던 남자가 그의 팔에 힘을 가하며 씨익 웃었다.
“조에에엘~ 무지 무지 반갑다. 같은 수도에 있었는데 어떻게 머나먼 지방에
와서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있는 거냐?”
“젠장, 스테판~!!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됐냐?”
그런 세 남자의 모습에 내가 황당해진 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데니가
속삭였다.
“저 두분은 조엘님과 가장 친한 친구분이시지. 저기 키가 크고 짙은 금발을 가진
분이 이번 사냥을 주최하신 볼레어 웨스트모어랜드경이다.”
그 볼레어라는 남자는 조엘보다 키가 반뼘은 더 커보이는 것이 190cm는
충분히 되어 보였고, 큰 키에 걸맞게 큼직 큼직 시원 시원해보이는 이목구비는
제법 남자답게 생겨 지나가는 여성들의 시선을 한번 쯤 더 돌아보게 할 만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지금 조엘님을 마구 흔드는 분이 스테판 윈체스터경이시지.”
그는 조엘보다 작은 키였는데 붉은 갈색머리에 무척 활달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인상이 친근감 있고 부드럽게 생겼다.
“여어, 데니. 오랜만이군. 여전해 보이는 걸? 그래, 여자 친구는 사귀었어?”
한동안 조엘과 투닥거리던 스테판이 여전히 조엘의 목에서 팔을 떼지 않은
채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데니를 발견했는지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데니는 쓴 웃음을 지으며 목례를 해 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두분.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핫핫핫, 나야 수도에서 빈둥댔으니 살이나 찐 거고, 이 자식은 녹스국에
가서 그 곳의 미녀랑 놀다보니 얼굴이 환해진 거야.
“어이 어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너 처럼 바람둥이인 줄 알아?”
“쳇, 맞아… 녹스국에는 내가 갔어야 했는데…”
심히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는 스테판의 틈을 발견했는지 조엘이 그의
팔을 뿌리치고 겨우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네가 녹스국의 외교사절로 안 뽑힌 건 여왕폐하의 현명한 처사셨다.
네가 갔어봐라, 분명히 녹스국의 유부녀들을 꼬셔서 그 남편들이 떼를 지어
널 잡겠다고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었을 걸?”
“푸핫핫핫, 그 말이 맞다. 그 말이 맞아.”
조엘의 말을 볼레어가 호탕하게 웃으며 긍정하자 스테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시끄러워, 이 의리 없는 자식아!! 너가 그러고도 친구냐?”
“자자, 그만하고 가자고. 조엘, 아버지께 인사 드려야지?”
“뭐? 이번에 후작님도 오셨단 말야?”
놀라움을 표하는 조엘의 표정이 맘에 들었는지 스테판이 얼굴을 풀고 끼어들었다.
“이번에 볼레어 동생 녀석이랑 사촌 동생 녀석이 성인식을 치르게 되었더다군.
그래서 그에 맞춰 사냥을 개최한 거고, 후작님도 친히 참석하신 거야.”
“호오… 그러냐? 그래서 너도 그에 맞춰 부랴부랴 온 거였군? 난 또 수도로 안 오고
왜 이리로 왔나, 의아했지.”
“훗, 어쨌든 가자고.”
그렇게 세 명의 남자가 가버리자, 남아있던 우리들은 성 시종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향했다.
우리와 같이 온 기사들은 후작 성의 기사 숙소로 안내 되었고 – 후작의 기사들은 사냥
터에 미리 가서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 후작의 본성에는 조엘의 시중을 들 나와
노만, 그리고 데니만이 남아서 방을 배정 받았다.
그런데… 심히 열받게도 조엘이나 데니나 노만은 모두 넓직한 – 물론 조엘의 방보다야
덜했지만- 손님 방을 배정받았는데, 나는 조엘의 방에 창고처럼 달려있는 시종 방이
배정되었다.
물론… 내가 시종이긴 하지만…
‘그래도 억울해.’
하지만, 힘 없는 놈이 어쩌겠는가?
이제와서 뒤집을 수도 없고.
마침이라고 해야할지, 엘라임이 옆에 없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꽤나 놀림을 받았을텐데…
조엘의 방에 비하면 무지 ‘검소’하고 무지 ‘아담한’ 방에 나는 내 짐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화려 무쌍한 조엘의 방으로 달려가 그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의 시종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파티는 내일 오후부터 밤까지라고 했다.
해럴드 집사에 배운 바에 의하면 보통 귀족들의 파티는 저녁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진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파티 다음 날 아침에 사냥 캠프로
출발하기 때문에 파티를 일찍 여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사냥 캠프로 떠날 때 다시 짐을 싸야 했으므로 나는 짐을 완전히 풀어
놓는 대신, 조엘이 이 곳에서 머무는 동안 충분히 갈아 입을 정도의 옷과 파티복만
꺼내어 옷장에 걸어놓은 뒤 내 방으로 돌아가서 대충 씻었다.
목욕을 하고 싶었지만, 내가 여기서 목욕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조금
있다가 후작과의 인사가 끝난 뒤 돌아 올 조엘의 목욕 준비도 해야 했기에
한가하게 목욕이나 하고 있을 시간의 여유 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물의 상급 정령 – 물의 상급 정령과는 계약을 안
맺었다. 그들의 말로 엘라임의 ‘일부분’이라 계약이 없어도 물의 정령은 내
맘대로 부릴 수 있다더군. – 이 곁에 있어서 옷을 입고 있건 벗고 있건, 좁은 곳에
있건 넓은 곳에 있건 쉽고 빠르게 온 몸을 씻을 수 있다는 점이랄까?
엘라스트라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은 뒤 성의 시종 도움을
받아 조엘 녀석의 목욕 준비를 해 놓고 그가 갈아 입을 옷을 꺼내놓는데
타이밍 좋게도 조엘 녀석이 돌아왔다.
“나 왔어.”
“목욕 하셔야죠? 준비 해놨습니다.”
“땡큐~ 역시 해인이 밖에 없다니까~”
평소에 안 하던 대사라서 그런지, 뭔가 대사가 묘한 것 같았지만, 그것이 뭔지
생각할 겨를 없이 나는 얼른 조엘의 뒤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왜냐고? 당연히
목욕 하는 걸 돕기 위하여… 뭔 상상을 하는 건가?-
그리고 준비 된 팔팔 끓은 물을 욕조에 반쯤 붓고 찬 물을 섞어 온도를 맞추는
동안 조엘이 옷을 벗고 들어왔다. – 중요한 부분은 가리고 있었으니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마시도록 –
“아아, 이제야 살 거 같군.”
“수건은 여기에 두겠습니다. 두개나 놓으니까 나올 때 물 떨어뜨리시면
안됩니다. 그리고 갈아 입으실 옷은 밖에 두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날 늦은 저녁이었다.
사냥에 참여하기 위하여 성에 도착한 이들이 후작의 초대를 받아 – 물론 난 아니다. –
성대한 저녁을 끝내고 각자의 숙소에서 내일을 위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을 시간에
나는 노만에게 마법 수업을 받기 위하여 그의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루 일과를 거의 끝내 조용해야 할 아랫층에서 여러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늦은 시간인데 무슨 일이지?”
뭐, 잠깐 뭔 일인지 보고 가는 정도야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슬그머니
발걸음을 돌려 아랫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남작 영애. 미처 오신다는 연락을 받지 못해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됐어요. 으휴, 이 성은 언제나 그렇듯이 여전히 음침하군.”
아래에는 수십은 될 듯한 인원들이 활짝 열린 성의 정문을 통해 짐을 들여다
놓고 있었고, 그 앞에는 그 짐들의 주인이 분명한 젊은 여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면, 그런 이 곳에는 왜 온거냐, 제네브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해 험담하는데 누가 좋게 들을 리 없었다.
이 성에 살고 있는 이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의 불만에 찬 중얼거림에 즉각
응수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에… 저 사람이… 아, 이번에 성인식을 치른다는 후작 차남이군.’
제네브라라고 불린 여자에게 응수하는 어조가 차가운 걸로 보아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제네브라라는 아가씨는 그 후작의 차남을 보자 고개를 획 돌리며 대꾸했다.
“흥, 누가 너 보러 온 줄 아니? 난 스테판님을 보러 온 거 뿐이라고.”
“그래, 그래. 아주 지극정성이구나. 스테판 형을 위하여 이런 음침한 귀신 집
같은 곳을 다 오고… 스테판 형이 이런 너의 정성을 알아줘야 할텐데 말이다.”
“어머, 알아주니 고맙구나? 그럼 숙소로 안내 좀 해줄래? 지금 내가 무척
피곤해서 말야. 널 상대해줄 기운이 없네.”
“누군 널 상대하고 싶어서 상대하는 줄 아냐? 집 주인의 의무를 다한 거 뿐이야,
불청객씨.”
그리고 그 후작 차남은 그녀가 보기도 싫다는 듯 곧장 시선을 돌려 맨 처음 그녀를
맞이한 인물인 듯한 중년 남자에게 한마디 하고는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가버렸다.
“안내해 드려.”
“이쪽으로 오시지요. 미처 준비를 못해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아, 걱정 말아요. 여기가 원래 후진 곳이라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쯧쯧… 성격이 정말 뭐 같은 여자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더 이상 볼 것도 없어 내 갈길을 가려고 했는데, 참 운도
지지리 없게도 한 발짝을 내 딛기 전에 밑에서 열심히 짐들을 옮기던 이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거기!!”
“엣? 저요?”
“그래. 지금 바쁘지 않으면 좀 도와줘.”
몰래 엿보고 있었다고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좀 보태서 홀에 작은
동산처럼 쌓여 있는 – 뭔짐이 그렇게도 많은지… – 짐꾸러미들에 폭 파묻혀 간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데 어찌 매정하게 ‘나 바빠요.’ 라고 말하며 갈 수 있겠는가?
“그러죠, 뭐…”
하면서 거들기 위해 내려갈 수 밖에…
그런데, 마침 중년 남자에게 안내를 받은 그 제네브라 라는 남작 영애 일행이
내가 내려오는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예의를 갖추기 위해 – 예의는 무슨 얼어죽을 예의… 빽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지… – 계단 한쪽 구석으로 몸을 비켜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는데
이 남작 영애라는 여자가 밑에서 부터 올라올 때 날 발견한 직후부터 날 빤~히
바라보며 올라오는 거였다.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껴 그녀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내가 언제 널 봤느냐는
듯 얼른 시선을 돌려 척척 올라와 날 지나가버렸다.
내 코 앞을 바로 지나갔기에 나는 그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그녀는 청흙색의 어깨에 닿을랑 말랑 하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고,
피부도 무척 하얀데다 얼굴이 작고 오밀조밀해서 마치 도자기 인형을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파란 눈동자가 담긴 눈이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간데다 앙다물린 붉은
입술의 모양이 왠지 성깔 있다… 라는 걸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내 이상형의 소녀 모습이었기에 – 작고, 가냘프고, 보호해
주고 싶은 예쁜 소녀의 모습 – 나는 부러움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밑에서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이~!!”
“예, 예. 갑니다.”
황급히 달려 내려가 그 곳에 있는 짐꾸러미 두개를 양 팔에 들고 나와 같이 짐꾸러미를
든 사내와 걸어 올라가는데,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 너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온 애냐?”
“아뇨. 저는 조엘 맥알파인님의 시종이예요.”
“아… 그 맥알파인 공작 집안의?”
“예.”
“그런데 왜 여기서 짐을 나르고 있냐?”
“아하하… 뭐, 어쩌다 보니… 돕게 되었네요.”
“뭐… 우리야 일거리가 줄어서 좋다만… 너도 참 멍청한 놈이구나.”
“하.하.하…”
‘젠장할…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척 보아하니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 남자를 따라 남작 영애의 숙소로
가보니 남작 영애는 폭신한 안락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얼른 짐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오자
뒤따라 그 남자가 나오면서 날 툭 쳤다.
“여, 예쁘지?”
누굴 가르키는 지 쉽게 알 수 있었던 터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엄청 예쁘네요.”
내가 쉽게 수긍하자 그 남자는 씩 웃으면서 내 어깨를 툭 쳤다.
“짜식… 너도 남자라고…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라. 어디 우리가 감히
말이나 걸 수 있는 신분이냐? 거기다 성깔도 엄청 드러워서 우리 같은 것들은
벌래처럼 생각한다고.”
“헤에… 잘 아시네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지. 전에도 여기 온 적이 있었거든. 얼마나 성깔을 부려댔는지…
얼굴만 안 예뻤다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니까.”
“그래요?”
“그렇다니까. 그 윈체스터 백작가의 도련님만 불쌍하지…”
“그 도련님이 왜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 남자는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뭐냐 너… 너 맥알파인 공작가의 도련님 시종이라면서? 두 분이 친구사인데
그것도 몰랐냐?”
“그게.. 시종으로 온지 얼마 안되었거든요.”
“그래? 하긴 뭐… 그렇다면 모를 수도 있지.”
그러면서 남자는 주위를 쓰윽 살펴본 다음 무슨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 하려는
것인 양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아, 아까 그 남작 영애가 윈체스터 백작가의 도련님을 좋아해서 쫓아다니잖아.”
“그래요?”
“그렇다니까. 척 보기에는 순해보이는데 얼마나 끈질긴 면이 있는지 그 도련님이
어딜 가나 쫓아간다는 거야. 아, 여기까지 쫓아 온 것좀 봐. 가능했다면 사낭터
까지 쫓아 갔을 걸?”
“호오….”
“에휴, 이제 우리만 죽어났지. 그 도련님이 사냥 가셨다가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
죽치고 있을테니… 그저 영애 눈에 안 띄길 바라는 수 밖에…”
“하.하.하….”
그날 나는 그 남자와 함께 남작 영애의 수많은 짐을 옮기기 위하여 도합 세번이나
아랫층 홀에서 부터 남작 영애의 숙소까지 왔다갔다 한 다음 노만의 숙소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노만에게는 엄청 늦었다고 혼나고, 안 해도 될 일을 한
멍청이라고 잔소리까지 덤으로 들어야 했다.
다음날 새벽, 평소의 습관으로 인하여 일찍 일어난 나는 데니의 손에 이끌려
후작 성 안의 기사 연무장으로 향했다.
평소 데니와 함께 새벽 수련을 하는 조엘은 오늘은 자신의 친구들, 그러니까
볼레어, 스테판과 함께 성 안에 마련된 연무장을 사용하기로 했기에 우리와
헤어졌다.
뭐, 처음에 조엘도 데니와 나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 곳에는 이번 사냥에
참여한 귀족들이 사용할게 뻔하다며 데니가 날 이끌고 바깥에 있는 기사 전용
연무장으로 향했던 것이다.
우리도 꽤 일찍 일어나서 향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곳에는 벌써 많은 이들이 와서
몸을 풀고 있었다.
그 곳 연무장은 얼마나 넓었는지, 수백은 될 것 같은 사람들이 넓게 간격을
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꽉 찬 느낌이 들지 않는 거였다.
아마 지금 있는 인원의 두배 정도 있어도 될 것 같은 크기의 연무장이었다.
새벽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갑옷을 갖추기 보다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와
몸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연무장에 있는 사람들은 각자가 알아서 수련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두 무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뭐, 딱히 금을 그어놓고 다른 무리 사람들 보고 넘어오지 말라고 팻말이라도
세워 놓은 건 아니었지만, 서로 시선을 주려고 하지도 않고, 어쩌다 시선이
향하기라도 할라 치면 얼른 돌려버리는데다,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기분 나쁘다는 감정이 가득 담긴 눈길을 한번 보낸 뒤 휙 돌려버리는 거였다.
‘뭐냐… 사냥할때 팀을 나눈다더니 벌써부터 팀끼리 싸우는 건가? 하지만…
팀은 여러개인데, 여기는 딱 두 무리잖아?’
‘뭐냐… 사냥할때 팀을 나눈다더니 벌써부터 팀끼리 싸우는 건가? 하지만…
팀은 여러개인데, 여기는 딱 두 무리잖아?’
데니는 그 곳을 둘러보다가 역시 아는 사람이 있는 곳이 좋다고 판단했는지
한쪽 구석에서 자리를 잡고 몸을 풀고 있는, 우리와 같이 온 링클레터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어, 데니. 좋은 아침이지?”
데니 또한 그 기사단의 소속이였기에 그가 가까이 가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데니를 발견하고는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벌써 나오셨군요. 이거, 제가 꼴찌인가요?”
그들 절반이 원래 공작가 저택에 있던 게 아니라 수도 밖에 있는 기사단에 있던
사람들인데다, 수도에서 부터 여기까지 같이 오기는 했지만 오는 내내 마차
안에서 노만이랑 같이 있었고, 마차에서 내릴때도 조엘이나 데니하고만 붙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낯이 안 익은 상태였다.
그래서 기사들과 친하게 인사를 나누는 데니 뒤에 멀쭘히 서 있는데 역시나
날 항상 챙겨주는 데니가 대충 인사가 끝나자 그들에게 날 소개시켜줬다.
“해인아, 인사해라. 우리 링클레터 기사단의 기사분들이시다.”
“처음 뵙겠습니다. 해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꾸벅 그들을 향해 인사를 하자 데인이 내 말 뒤에 덧붙였다.
“제 동생이예요. 지금 조엘님의 시종을 하고 있죠.”
“오호라, 이 녀석이 네가 동생 삼았다던 그 녀석이구나? 반갑다. 난 한센 프레스코라고
한다. 그냥 한센이라고 불러라.”
“예, 한센님.”
“한센님은 무슨… 그냥 한센 아저씨라고 해라.”
“예, 한센 아저씨.”
기사 계급은 평민보다 한단계 윗계급라 그런지 보통 기사들은 평민들을 꽤나 깔보는
편이었다.
어차피 그들도 귀족 출신이 아니라면 귀족들에게 존중 받지 못하면서 계급이 뭔지,
평민 앞에서는 거만하게 (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 구는 그들 모습을 보며 되게
웃긴다.
물론 그들 앞에서는 비웃지 못하지만…
공작가에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링클레터 기사단의 단장인 보가드 링클레터는 비록 기사 집안의 출신이었지만,
어렸을때 그의 아버지가 꽤 뛰어난 능력을 가진 기사가 아니었기에 집안이 가난해
평민들과 어울려 자라다보니 그런 편견이 별로 없는데다 공작 또한 그런거에 과히
신경쓰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링클레터 기사단에는 귀족 출신이나 기사 출신 집안
사람들은 물론 평민 출신 기사들도 적지않이 있었다.
그런데 평민 출신 기사들도 나에게 꼭꼭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게 하거나 ‘경’자를
붙이게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거 보면 계급에 대한 한이 무지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친한 사이에
꼭꼭 ‘경’ 자 안 붙인다고 그가 기사가 아닌 것도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아 인사는 주고 받지만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런 사람들 중, 그런거에 신경쓰지 않고 이름 부르라고 하는
사람보면 정말 사람같이 보였다.
그리하여 오늘은 새벽부터 좋은 사람을 만나는 구나… 하는 생각에 매우 좋은
기분으로 있는데, 데니와 나와 인사를 나누는 바람에 링클레터 기사단의 기사들이
잠시 행동을 멈춘 틈을 타서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디 분들이신가 했더니만, 그 이름 높은 링클레터 기사단분들이셨군요. 이거
참 반갑습니다.”
“핫핫, 이름이 높긴요. 그래, 어디서 오셨습니까?”
“아, 예. 저희는 윈체스터 백작가의 기사단입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그렇게 한 그룹(?)의 기사단이 와서 인사하자 그 옆에 있던 기사단 사람들도
이에 질세라 와서 하나 둘 인사하자, 연무장은 수련하는 곳이 아니라 화합을
다지는 화합의 장이 되버린 것 같았다.
“어제는 못 뵈었는데 언제 오셨습니까?”
“아하하.. 어제 저녁에나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인사를 나누게 되었군요? 반갑습니다.”
“이쪽이야 말로.”
그렇게 한쪽에서 화기애해한 말들이 주고받아지자 다른쪽에 있던 사람들의
수련에 방해가 된 모양이었다.
하기야, 누가 공부 좀 하려는데 옆에서 떠들면 공부가 되겠는가?
그렇게 수련에 방해가 되자 그쪽에 있던 사람중 하나가 되게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괜히 애꿎은 땅을 발로 차며 디럽게 가래 침을 퇘~ 뱉더니만 주위 사람이
다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이죽거렸다.
“제기럴~ 잘나신 기사 나으리들이 쫙 깔려 있으니 이거 어디 창피해서 무기를
휘두를 수 있겠나? 으쌰!!”
그렇게 말해놓고는 말을 끝내자마자 들고 있던 커다란 대검을 한번 크게 휘두르더니
땅에 푸욱 꽂았다.
그런데 이 사람의 힘이 얼마나 세던지 휘둘러지느 그 대검의 기세에 눌려 주위의
공기가 매섭게 밀려나며 땅에 꽂힐때는 대검의 절반 이상이 푹 꽂혀 버린 거였다.
그런 놀라운 모습에 기사들의 시선이 쏠리며 잠시 조용해지자 그 남자는 그런
반응이 맘에 들었는지 씨익 웃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남자 하나가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뭐, 대~단하신 기사 나으리야 모두들 원래부터 뛰어나신 분들이니 연습을
안 해도 몬스터들을 척척 잡으시겠지. 연습은 우리 같은 놈들이나 하는 거란다.
그러니 잔말 말고 더 연습해, 임마!”
그러면서 그가 발을 들어 땅에 꽂혀있던 대검의 호수(검에서 손잡이 부분과 검날
부분을 구분해주면서 검을 잡았을 당시 손을 보호하기 위하여 튀어나온 부분. 이
곳에 멋드러진 조각을 하기도 하고 보석을 박아 넣기도 합니다.) 부분을 강하게 걷어
찼다.
그러자 이 대검이 땅에서 쑥 뽑혀 나오며 처음 대검을 땅에 꽂아 넣었던, 대검 임자에게
날아가자, 대검 임자는 쳇, 하는 혀 차는 소리를 내며 가볍게 한 손으로 대검 손잡이를
잡아 한번 휘두르고는 등 뒤에 매고 있던 검집에 검을 집어 넣었다.
폼이야 무지 멋있기는 한데, 그들이 한 말이 이래저래 길게 말했지만 한마디로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기에, 이 말을 들은 기사들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 말을 들은 기사들 중 분노한 몇몇은 허리에 찬 검집에 손을 가져갔고, 그들 보다
성격 급한 몇몇은 아예 앞으로 나섰다.
“천한 용병 주제에 입만 살았군. 어디 그 입만큼 실력이 있는지 한번 볼까? 자신
있으면 나와라.”
저들이 바로 이번 몬스터 사냥에 고용된 용병들인 모양이었다.
“허, 이거 참 어디 무서워서 말이라도 제대로 하겠나? 잘못 말하면 목 베겠수.”
땅에 꽂혀 있던 대검을 발로 차서 뽑아내는 것도 모자라 임자에게 날아가게 한 남자가
익살스런 표정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어보였다.
그러자 그 사람 주위에 있던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는데 기사들의 표정은 더욱 더
굳어졌다.
“나와라. 한수 가르쳐 주지.”
“나오라면 나가야지. 힘 없는 놈이 별 수 있나?”
그는 그렇게 이죽대며 걸어오는데 건들거리며 나오는 폼이 전혀 안 두려워 하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폼이 오히려 좋은 기회를 잡은 사람 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오옷, 싸움이다. 싸움이야.’
그 둘이 적당한 거리에 마주 서서 노려보자 나는 약간 흥분된 마음을 느끼며
그들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이 세상에 싸움 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놈, 그 입을 다시는 나불대지 못하게 해주지.”
“어디 능력 있으면 한번 해보슈.”
하지만, 그 흥분되었던 마음은 그 뒤에 그들이 각자의 검을 꺼내들자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냥 기사가 저 남자를 혼내주려고 할 뿐이니 가검을 사용할 것이라 생각
했는데, 그 기사는 허리에 찬 진검을 뽑아드는 거였다.
게다가 상대 남자 또한 진검을 뽑아드니, 이거 잘못 하다간 이른 아침부터 피 보게
생긴 거 같았다.
아무리 내 피 아니고, 다쳐도 내가 안 아프다지만, 아침부터 그런거 보면 기분이
안 좋지 않는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도 말리려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응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여어, 그래이. 날려 버리라고.”
“네 실력을 보여봐라~!”
“음홧홧홧, 네가 이기면 내가 키스해 주마.”
“사랑해, 자기~!!”
그레이라 불린 사람은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응원하는 이들을 향해 싱긋 웃더니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엿이나 먹어.”
“우하하하하~~!!”
뭐가 그렇게도 웃긴건지, 그들은 그레이라는 남자의 행동에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기사들쪽 또한 비록 용병들 처럼 대놓고 소리치며 응원하지는 않았지만, 눈길이 다
‘저 시건방진 용병놈을 혼내주길’ 간절히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레이라는 남자는 그렇게 용병들의 응원에 답례를 해준 뒤 자신의 검을 잡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유들유들하고 여유만만했던 기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의 모습에서는
진지하고 매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제법이군.”
내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를 상대하고 있던 기사 역시 그를 얕볼수가 없던지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와라.”
기사의 한마디에 그레이가 피식 웃었다.
“사양않지.”
그리고 말이 끝나는 즉시 달려가기 위해 한 발짝 내딛는 순간…
“그만 두지 못해?”
갑자기 터져 나온 일갈에 그레이가 즉각 멈추려고 했지만 막 앞으로 나가려는
몸을 멈추려고 했으니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쿠당~!!
“젠장, 대장~!!”
그레이라는 남자는 넘어진 쇼크가 너무 컸는지 일어날 생각은 못하고 상체만
일으켜서는 갑작스럽게 소리쳐 자신을 넘어뜨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190이나 되는 건장한 키에 단단해보이는 근육, 시커멓게 그을린
피부에 오랜 세월의 연륜을 보여주는 주름이 잡힌 얼굴의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매섭게 그레이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대장?”
의아함에 찬 내 말을 들었는지 데니와 함께 내 옆에 있던 한센 아저씨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해 줬다.
“저 자가 용병단의 대장이지. 대장 이름이 트래비스라고 용병단 이름도 트래비스야.
유명한 만큼 실력 또한 괜찮은 편이지.”
그렇게 내가 설명을 듣는 동안 트래비스라는 용병단 대장은 척척 걸어와서
불만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레이의 뒷덜미를 잡은 채 그대로 끌고
용병들 틈으로 걸어갔다.
“내가 쓸데없는 일 벌이지 말라고 했지? 지금 싸워서 뭐하자는 거야? 싸우고 싶으면
내일 몬스터들이랑 실컷 싸워!”
“우쒸, 대장, 이것 좀 놓고 가슈~!! 내가 뭐 어린 앤감? 아 좀 놔줘요~!”
질질 끌려가면서 대장에게 사정하던 그레이였지만, 대장이 들은체도 안 하자
자신과 싸우려다가 자신이 대장에게 끌려가는 바람에 벙 쪄있는 기사에게 시선을
돌린 채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이, 기사 나리. 이렇게 되어가지고 당신이랑 못 싸우게 되었으니, 우리 나중에
봅시다아~!! 그럼 그때까지 빠빠이~!!”
“뭐, 뭐냐… 저녀석…”
괜히 분노탱천 하여 검을 뽑아든 기사만 우습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그 기사가 그냥 가버리는 용병에게 달려가서 검을 내리 칠 수도 없으니
이빨만 빠드득 갈면서 검을 집어 넣을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싸움이 허무하게 끝나기는 했지만, 피는 안 보게 되어 나는 혼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영 기분이 안 좋았다.
‘아까는 오늘 일진이 좋을 거 같았는데… 왠지, 오늘은 일진이 안 좋을 거 같군…’
그렇게 양쪽이 잔뜩 긴장했다가 맥없이 탁 풀려버리자 모두 수련할 생각이 없는
듯 기사고 용병이고 가볍게 몸을 푸는 시늉만 하다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래, 데니도 날 데리고 그냥 가볍게 몸만 풀다가 영 할 맘이 안 생기는지 날
툭툭 치더니 성을 눈짓으로 가르키며 말했다.
“후, 오늘은 별로군. 해인아, 우리 이만 가자.”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가버리는 상황에 우리만 남아 수련하기도 기분이 쫌…
그랬던 것이다.
“그래요, 형.”
거기에 수련 그만하자는데 내가 반대한 이유가 없었기에 나는 반색하며 목검을
내렸다.
그리고는 벌써 발걸음을 옮기는 데니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며 궁금했던 걸
물었다.
“형… 궁금한게 있는데…”
“뭔데?”
“아까 보니까 기사님들하고 용병들하고 사이가 안 좋던데… 원래 그렇게 안 좋은
건가요?”
그러자 데니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우리에게 신경쓰는 이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 해줬다.
혹시라도 용병들이 들을지도 모르니 큰 소리로 할 수는 없을 터였다.
“사이가 안 좋은게 아니라, 기사들이 용병들을 안 좋게 보는 거지.”
“왜요?”
“용병들이 뭐 하는 사람들이냐? 돈 받고 무슨 일이든 해주는 거 아니냐? 그들은
돈만 받으면 강도 짓이든, 암살이든 무엇이든 해주지. 주군을 섬기고 여자와 약자를
보호하는 우리 기사로써는 당연히 좋게 볼 수가 없는 것이지.”
“흐음….”
아무리 그래도 모든 용병들이 다 나쁘고 모든 기사들이 다 청렴결백한 정의의
용사겠는가?
그래서 쉽게 데니의 말을 납득하지는 못하자 이런 내 기색을 알아챘는지 데니는
얼른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렇다고 용병들이 다 그런 사람들은 아니고, 게중에는 괜찮은 사람들도
있지만,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안 좋게 보는 거지.”
“그렇군요.”
‘그런데… 기사들 중에도 주군을 배신하는 사람이 있지 않남?’
‘그런데… 기사들 중에도 주군을 배신하는 사람이 있지 않남?’
뭐, 그렇게 따지자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성으로 돌아온 나는 조엘의 시중을 들어준 뒤 노만에게
갔다.
점심 식사 후에는 파티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밖에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점심 식사가 끝난 뒤 조엘을 목욕 시키고, 머리 다듬고, 옷 입히고, 향수 뿌리고,
장신구 달아주는 등 부산하게 움직일 동안 후작성에는 주위에 있던 초대 받은
귀족들의 마차가 하나 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조엘 녀석이 단장을 거의 끝마쳤을때쯔음 조엘과 비슷한 파티복을 입은 데니와
평소의 후즐그래하고 오래된 로브가 아닌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만들어진데다
끝단에는 자잘한 수로 장식까지 된 멋드러진 로브를 입은 노만이 나타났다.
“준비 다 되었어?”
나를 향해 묻는 데니의 말에 조엘 녀석 준비 다 시킨 건지에 대해 묻는 줄 알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망토만 걸치시면 되요.”
그러면서 때 안 타도록 의자에 조심스레 걸쳐 놓은, 이 계절에 잘 어울릴 초록빛
망토를 가지러 걸음을 옮기는데 데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조엘님 말고 너 말야.”
“저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돌아보는데 데니는 이런 내 의문을 해결해주는 대신
조엘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해인이 녀석은 안 데려 가실 겁니까?”
“해인이? 글쎄…”
아마 조엘 녀석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던 거 같다.
그에 데니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어려운 자리가 아니니 데리고 갔으면 좋겠는데요. 괜찮은
기사들도 모여 들었으니 보여주고 싶고, 해인이도 파티 예절을 배웠으니
크게 문제될 것도 없고 말입니다.”
그러자 노만도 끼어들었다.
“저 또한 다른 마법사들도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말입니다. 이번 파티에 다른
마법사들도 참석할테니까요.”
날 챙겨주는 둘의 마음에 감동했지만,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에…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파티복도 안 마련했는데요?”
내가 파티에 참석해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니 마련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조엘 녀석이 씨익 웃으며 날 돌아봤다.
“내가 특별히 챙겨 넣으라는 꾸러미 있었지? 그거 가지고 와봐.”
“예? 예.”
갑자기 그건 왜 찾는건지 의아해했지만, 상관이 시키는데 별 수 있겠는가?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이 곳에 머무는 동안 필요하지 않을 거 같아서 가방에서 안
꺼내놨기에 나는 옷장안에 넣어 둔 커다란 가방을 꺼내야 했다.
그 꾸러미는 내가 조엘 녀석의 짐을 싸던 날 자신의 드레스 룸에 들어가 꾸물꾸물
대던 조엘 녀석이 보자기에 쌓인 그 꾸러미를 내밀면서 같이 챙기라고 했던
거였다.
‘챙겨두기는 했는데, 그게 뭐길래 지금 찾는거지?’
어차피 그 가방 안에 들어간 물건 모두 내가 집어넣은 거였기에 꾸러미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비단 같은 부드러운 천에 쌓인 꾸러미를 조엘에게 건네자 조엘은 방에 있던
이들이 보는 앞에서 그걸 풀었다.
“앗, 그건…”
안에서 나온 것은 옷이었다.
기껏 파티 복을 입혀줬는데 왜 또 옷을 꺼내는 건지 의아해 하는데 데니가 그
옷을 보고 뭔가 깨닫는게 있는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조엘을 바라보았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던 조엘이 데니니와 나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내 혹시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챙겨뒀지. 내가 입던 것 중에서 괜찮은
걸 골라 왔는데…”
‘나보다도 키가 한뼘은 더 큰 인간 걸 어떻게 입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감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 뱉을 만큼
내가 간이 큰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단지 난처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하지만 데니는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엘에게 다가가 그 옷을
꺼내 보였다.
“이건 조엘님이 학생때 입던 것이군요. 감회가 새로운데요? 이걸 입으신 조엘님
인기가 상당했죠, 아마?”
“훗, 내 이야기가 아니라 데니 이야기 아냐? 그때 데니도 인기가 상당했는데…
그래서 바람둥이가 된 거구.”
“누가 바람둥이라는 겁니까? 자꾸 저를 조엘님과 동일시 하지 마시라구요.”
데니가 꺼내든 옷은 짙은 청색의 윗옷이었는데 마치 한국에서 본 사관생도들
같은 스타일의 옷이었다.
겉으로 오는 옷자락이 절반을 지나 그 반대편의 절반을 덮을 정도로 큰데다
그 곳에 단추가 6개 달려 있었는데, 그 단추들이 모두 가운데 내 새끼 손톱만한
다이아가 박힌 금으로 되어 있었는데 크기가 100원짜리 동전만했다.
소매는 빳빳한 하얀 천이 마치 칼라처럼 접혀 있었는데 그 곳에는 가슴쪽에
달린 단추와 같은 모양이지만 크기는 조금 더 큰 금단추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게다가 그와 한세트로 보이는 허리띠는 가죽으로 된 것 같은데도 하얀색이었고,
백금으로 된 버클에는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호오… 해인이에게 잘 어울릴 거 같군요.”
옆에서 보고 있던 노만이 다가와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제가 저 녀석에게 어울릴만한 걸 찾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흐뭇한 표정의 조엘과 괜찮은 것 같다는 듯한 표정의 데니와 노만의 모습이
마치 인형에게 옷갈아 입히는 놀이를 하려는 애들의 모습과 겹쳐지는 건
왜인지…
‘그런데 남자들도 인형놀이를 하던가?’
그들의 기대에 찬 눈길에 밀리다시피 옷을 들고 내 방으로 향한 나는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쳇, 이렇게 옷 까지 준비해서 데리고 갈 생각이었으면 나도 목욕할 시간이나
주던지… 자기 혼자 실컷 단장해 놓고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갈아입으라고?
내가 정령들과 계약을 안 한 상태였다면 씻지도 못하고 옷만 갈아입을 뻔 했잖아?
그럼 그게 도대체 무슨 꼴이람… 에잉, 그런데 드레스도 아니고 제복 같은 옷이라니…
체엣…’
다행이도 길이는 대충 맞는데다 폼도 약간 헐렁하긴 했지만, 그렇게 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은 뒤 머쓱해진 표정으로 방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시선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호오, 제법 귀공자 같은데?”
“잘 고르셨습니다. 머리 색과 아주 잘 어울리는 군요.”
“훗, 내 안목도 제법 쓸만하지? 예상보다 훨씬 괜찮은데? 이거 저 녀석이 시종이
아니라 우리가 시종처럼 보이는 거 아냐?”
그렇게 찬사가 나에게 쏟아졌지만…
‘쳇, 남자 옷따위가 잘 어울린다는 찬사따윈 하나도 안 반갑다고! 나도 나폴나폴
거리는 드레스 한번 입어보고 싶어어~’
나는 하나도 안 기뻤다.
그렇게 해서 조엘의 어렸을때 옷까지 얻어 입은 나는 그들을 따라 쭐래쭐래
파티장으로 갈 수가 있었다.
용병과 기사의 싸움이 벌어질 뻔 했던 그 커다란 연무장의 거의 절반, 혹은
그보다 조금 더 큰것 같은, 실내에 있는 홀 치고는 엄청 엄청 큰 그 홀을 보는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여기 꾸민 하인들… 죽어났겠군. 끝나고 저거 어떻게 다 치우냐…’
였다.
윽… 몇달 간의 시종생활로 나도 뼛속까지 시종화가 되어가는 것인가?
그렇게 마음 속으로 이 곳의 일하는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며
엉거주춤이 아닌, 그 동안 해럴드 집사에게 받은 교육을 십분 활용하여 너무나
보무도 당당히 데니의 뒤에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렇게 조엘을 비롯하여 데니 노만의 배려를 받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내 입장은 어디까지나 시종이었다.
그렇기에 조엘과 인사를 나누는 인물들에겐 데니와 노만까지는 소개가 되었지만,
나에게까지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나마 데니나 노만과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과는 데니의 동생으로써, 혹은 노만의
제자로써 소개가 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내 입장으로서는 꽤나 큰 배려를
받는 것이었다.
뭐, 사실 그 사람들과 내가 나중에라도 교류할 것도 아니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닌 터라 별 상관은 없었지만, 조엘은 그게 꽤나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조엘이 날 아껴주고 있지만, 상대방의 입장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조엘은 날 계속 데리고 다니는 대신 자신은 슬쩍 자신의 친구들 틈에 끼어 버리고
나는 데니와 노만과 같이 가도록 떨궈(?)줬다.
하지만 데니도 돌아다니다가 안면 있는 기사들에게 붙잡혀 버렸고, 노만도 곧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과 만나 열렬한 즉석 토론회를 개최해버렸기 때문에
데니나 노만 옆에 서 있어도 되겠지만, 사실 내가 누누이 말했듯이 검이나 마법에
큰 흥미가 없었기에 곧 질려버려서 슬그머니 그들 사이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내 눈에 뜨인 것은 파티장 한쪽 면에 멋드러지게 차려져 있는 부페
상이었다.
저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가져다 놨는데 사람들은 먹는거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
그쪽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다.
‘쯧쯧, 먹는 거 빼면 무슨 재미로 사는 거람? 훗, 그럼 나라도 먹어줘야지. 기다려라,
내가 간다!!’
길다란 식탁 한쪽에 쌓여 있는 접시 하나를 꺼내 들고 식탁을 따라 걸어가며
맛있어 보이는 걸 하나 둘씩 집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 놓여진, 한 입에 들어가게끔 작게 잘려진 갈비 (뭔 갈비인지는
모르겠지만) 가 보기에도 무지 먹음직스럽게 붉은 소스가 발라져 샹드리에의
불빛을 받아 기름을 자르르 흘리며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한 손짓을 차마 거부할 수가 없어 몇개 집어주려고 손을 뻗는 순간, 누가 나보다도
먼저 그 것에 손을 댔는데, 내가 절반 정도 가져가도 이해는 하려고 했다.
어차피 나는 맛만 보려고 했던 것이다.
다른 먹을 것도 많았으니까, 절반을 먹던 몇개를 먹던 내가 먹을 한두개만 남기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하.지.만. 쟁반만큼 커다란 접시 통채로 몽땅 다 가져가버리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도대체 이런 XXX 없는 인간이 누구인가 싶어서, 순간 내 신분도 잊어버린 채 한마디
해주려고 그 인간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마침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어?”
물론 그 인간은 날 모르지만 말이다.
내가 작게 소리를 내자 그걸 또 들었는지 그 남자가 날 돌아보았다.
“응?”
그는 아까 새벽 수련때 연무장에서 기사들이 떠드는 소리에 한 소리 했던, 두 손을
사용해야 겨우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대검을 사용하던 용병이었다.
‘용병? 아, 그러고보니 용병들이 안 보이던데… 이 사람은 있네?’
그제야 깨달은 것이지만, 조엘과 데니와 노만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본 이들은
모두 귀족이거나 기사들 뿐 용병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 사실 처음부터 그들이 있던 없던 관심도 없었지만, 그를 본 순간 깨닫게
된 거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용병들이 없는 걸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그가 이 곳에 들어
왔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져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것 뿐인데 그게 그의
심기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다짜고짜 인상을 팍 일그러뜨린 그가 험악하게 물어왔던 것이다.
“뭐냐, 꼬마.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어?”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비굴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괜히 그를 건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뇨, 실례했습니다.”
그러자 앞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뭐냐, 덤버트?”
‘헤에… 저 사람까지 있었네?’
그는 한 기사와 싸울 뻔했던 용병 남자로, 지금은 단정히 파티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귀족처럼 보였다.
‘이름이… 그레이였던가?’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옷을 입어 답답했는지 맨 윗 단추와 소매 단추는 풀러놔서
한량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니, 왠 꼬맹이가 날 보기에…”
그 덩치 크고 대검을 쓰는 남자 이름이 덤버트였던 모양이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건…
‘훗, 마치 덤프트럭 같잖아?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
그레이라는 사람은 날 한번 보고 다시 덤버트에게 시선을 돌려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야야, 내가 몇개씩 덜어 먹으라고 했잖아. 접시까지 통채로 가져가니까 이상해서
바라본 거 아니겠어? 다 떨어지면 또 가져다 놓을테니 접시는 놓고 먹어.”
“에잇, 접시까지 가져가면 접시도 새로 가져다 놓겠지. 깔짝 깔짝 먹으려니 성에
안 차서 그런단 말야.”
“너가 그렇게 다 가져가면 뒤에 있는 사람은 못 먹고 기다려야 하잖아.”
그러더니 그레이는 덤버트가 들고 있던 접시에서 갈비 두개를 꺼내 나에게
내밀며 싱긋 웃어보였다.
“자, 먹을래?”
먹고 싶었던 터이기도 하고, 또 내 사전에 먹을 걸 준다는 데 사양이란 말은 없었기에
나는 기꺼이 들고 있던 접시를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가 그가 베푼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했건만, 그레이는 뭐가 그리 이상했는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갈비를 내 접시에 놓아주었다.
“에? 아, 그, 그래…”
“그럼…”
뭐, 그래도 갈비까지 받은 마당에 그가 황당해 하던 말던 나에게 피해가 없으면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기에 간단히 인사를 한 후에 지나쳐서 그 너머에 있는
음식들에게 마수를 뻗치려는데 그레이가 나를 잡았다.
“아, 잠깐만.”
“예?”
의아해서 뒤돌아보자 그가 싱긋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실례를 한 것 같은데… 우리 통성명이나 하지? 난 트래비스 용병단의
그래이라고 해.”
뭔 실례를 했다는 건지 의아했지만, 그가 기껏 손까지 내밀었는데 그 손을 부끄럽게
할 만큼 그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라 나도 마주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해인이라고 합니다. 조엘 맥알파인님의 시종으로 있습니다.”
“역시, 그랬었군.”
“예?”
이제야 알겠다는 듯한 그의 말에 의아함을 표시하자 그가 멋적게 웃었다.
“아니… 사실은 그 갈비를 준게 널 놀리기 위해서 그런 거였거든. 귀족 나부랭인
줄 알아서… 귀족들은 기껏 그런걸 줘도 모욕으로 받아들이니까…”
“하아… 그런 거였습니까?”
뭐, 모욕으로 안 받아들였으니 별로 기분 나쁠 건 없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미안, 진심으로 사과할께.”
“뭐 크게 화난 것도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귀족이었으면
큰일날 뻔 한거 아니었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그런 나부랭이들 하나 난리치는 것 쯤은…”
무지 태평한, 어찌보면 무책임한 얼굴로 웃어보이던 그래이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의 말을 자르고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전혀 괜찮지 않아, 그레이. 귀족들은 우리의 큰 고개들이니까. 내가 엉뚱한 짓
하지 말라고 했지?”
“아하… 대장…”
기가 팍 죽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모습으로 그레이가 시선을 돌린 곳에서는
역시 새벽에 봤던, 트래비스 용병단의 대장이자 그의 이름 또한 트래비스였던
인물이 척척 걸어오고 있었다.
그 또한 멋드러진 파티복을 입고 있었는데, 불편한 듯 한 손으로 목을 감싼 스카프를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얌전히 있으라고 했을텐데?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보지?”
그러자 화들짝 놀란 그레이가 얼른 대답했다.
“얌전히 있었다고요, 대장.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봐요, 아무 일도 없잖아요.”
그러면서 날 돌아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치, 해인아?”
차마 그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트래비스의 시선이 나에게
돌려졌다.
“너는….?”
하지만, 그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레이가 나에게 달라붙어 친한 척 한 손을
내 어깨에 올리더니 내 대답을 대신 자기가 말했다.
“아아, 여기에서 만난 애예요. 해인이라고, 맥알파인 공작 장남의 시종이라더군요.”
“흐음… 그런가? 만나서 반갑다. 난 트래비스라고 한다. 이 녀석이 철이 좀 없지만
악의는 없는 녀석이니 무례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네가 이해하거라.”
그러면서 그의 커다란 손을 내밀자 나도 자동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딱딱한 굳은 살이 잔뜩 잡혔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군. 그럼 난 이만…”
저쪽에 있던 어떤 사람이 트래비스를 부르고 있었기에 그는 오자마자 뭐 하나 먹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걸 보고 있던 그레이는 과장되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대장도 불쌍하단 말이야… 귀족들이 부르면 쪼르르 달려가야 하는 신세이니…
난 용병대 대장 같은 건 절대로 안 할거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는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자, 해인군,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잔 하면서 대화의 장을
만들어 볼까나?”
‘술이라고라고라? 미성년자에게 술을 권하다니…’
말해두지만, 한국에 계시는 우리 아빠는 군인이시기 때문에 좀 고지식한 면이
있어 학생이 술 담배 하시는 걸 무지 싫어하신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해민이 녀석이 수학여행때 술 마시고 온걸 들켜가지고
엄청 혼났지, 아마?
멍청한 녀석, 술냄새 풀풀 풍기는 걸 그냥 가방에 쑤셔박은 채 가젹왔으니 안 들키고
배기겠나?
어쨌든,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나는 성인이 될때까지 술을 마시려는
생각은 커녕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뭐, 이 곳에서는 성인의 나이지만… 그래도.. 왠지…
“핫핫, 죄송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곤란해서 말이죠. 그럼 전 이만…”
그래서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잽싸게 그의 손길에서 도망쳐 나왔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친하게 지내면 상당히 피곤할 것 같은 사람이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그는 나중에 다시 만날 것 같은 불길안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그의 손길을 피해서 물러난 나는 접시도 제법 음식물로 가득찼다 싶어
마음 놓고 이것들을 먹을 장소를 찾아 두리번 거렸다.
사람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게끔 몇개의 작은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왠일인지 그 곳에는 아무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서서 – 서 있는 것이 그렇게 좋은지…-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들고 있었기에 나는 식탁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결국 눈을 질끈 감은 채 그 곳에서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없는데 나 혼자 그 곳에 앉아 먹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난 그렇게 얼굴이 두껍지 않단 말이다.
용병들이라도 그 곳에 앉아서 먹었으면 좋겠지만, 덤버트는 음식을 들고 작은
식탁에서 음식들이 놓여있는 큰 식탁까지 왔다갔다 하는 시간들이 아까웠는지
그냥 큰 식탁 근처에 서서 먹고 또 음식을 퍼서 그 근처에서 먹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 사람들 눈에 안 뜨여 맘 놓고 먹을 장소가 어디 없나.. 하고 두리번
거리며 살피고 걷다가 미처 옆에서 오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부딧혀 버렸다.
뭐, 그렇다고 해도 내가 발바닥에 땀나게 빠르게 달린 것도 아니고,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있던 터라 조심조심 걷고 있었던 덕에 누가 넘어지거나, 아니면 내가
들고 있던 음식이 상대방 혹은 내 옷에 튀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나와 부딪힌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캬, 이 어디 내놔도 손색 없을 태도와 부드러운 말씨…
하지만, 나와 부딪힌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뭐야? 앞을 똑바로 보고 다니지도 못해요?”
톡 까놓고 이야기 하자면, 두 사람이 부딪혔을때 그게 어디 한 사람의 잘못이던가?
두 사람이 미처 못 봤기에 두 사람이 부딪힌 것 아닌가?
그러나 이 XXX 없는 말투와 어조로 봐서 상대방은 무지 기분이 안 좋아 신경질
나기 직전인 귀족 여자.
여기서 잘못 건드렸다간 큰일이기에 나는 다시금 저자세로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레이디.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재빨리 벗어나려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들어 그 여자를
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하고 가려는데 그 여자의 목소리가
날 붙들었다.
“어, 너는…?”
“예?”
그녀의 말투에는 날 아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있었지만, 이 곳에서는 날 아는 여자가
없었기에 의아함에 고개를 들어보니, 나와 부딪힌 여자는 바로 밤 늦게 도착해
소란을 일으키고 나에게 짐까지 나르게 한 원흉이었던 그 베르쿠스 남작 영애였다.
“아, 남작 영애셨군요.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그러자 그녀가 들고 있던 부채를 펴 자신의 입가를 가리더니 말을 건네왔다.
“뭐니, 너. 이 후작가의 시종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차려 입고 있으니 제법 귀족
같은데?”
“저는 조엘 맥알파인님의 시종입니다. 그 분의 배려로 이 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조엘 맥알파인? 아아, 그 맥알파인 공작의?”
“예. 그럼 전 이만…”
“어? 야…”
그녀가 날 더 잡으려는 것 같았지만, 성격 안 좋은 그여자와 있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던데다 빨리 음식을 먹고 싶었기에 나는 못들은 체 하고 재빨리
그 곳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그 남작가의 영애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남작가의 영애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파티장 안에서는 적당히 먹을만한 장소를 못 찾은 나는 커다란 홀에 달린
자그마한 – 홀에 비해 작다는 거지, 꽤 넓직한 곳이다. – 테라스로 나갔다.
“에구… 이거 먹기도 힘드네.”
보통 귀족들의 테라스에 가 보면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멋진 경관을 보며 차 한잔
마실 수 있게 작은 탁자와 의자를 놓는 것이 보통이건만, 그 곳에는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가진 이가 아무도 없는지 테라스에는 오로지 테라스(?)만 있었다.
그렇다고 서서 먹을 수는 없어서 테라스의 차가운 돌을 쌓아 만든 듯한 난간 위에
걸터 앉아 드뎌 시식을 하려고 하는 순간, 달갑지 않은 방해자가 나타났다.
“어머, 혹시… 내가 먹으려던 걸 방해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눈치를 딱 챘으면 가주지 왜 나에게 다가오는 건지…
속으로 궁시렁 댔지만 내 입장이
“예, 방해이니 그냥 가주시겠어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쾌하단 내색을
전혀 하지 못한 채 상냥하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자 제네브라라고 하는 남작 영애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고는
은근 슬쩍 나에게 다가왔다.
‘뭐, 뭐냐… 이 여자애…’
뒤로 물러나고 싶었지만, 내가 서 있던 곳이 하필이면 난간 바로 앞이었기에
물러날 곳도 없었다.
‘뭐야, 뭐… 남자면 몰라도 왜 여자가 나에게…’
내가 그렇게 속으로 부르짓던 울상을 짓던 나에게 다가온 제네브라는 음흉한
미소를 씨익 지어보이며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손을 들어 살짝 내 볼을
어루만졌다.
“어머나… 남자 주제에 나보다도 피부가 더 고운거 같잖아? 티도 하나 없고…
게다가 말랑말랑하기까지…”
“나, 남작 영애…”
너무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안 움직이는 입술을 움직여 겨우 겨우 입을 열었는데, 그 목소리마저 떨려 나오자
내 스스로 더욱 더 당황해 있는데 제네브라의 미소가 짙어졌다.
“쿡… 얼었네? 귀여워라… 게다가 이 신기한 색의 머리카락이라니… 어머,
엄청 부드럽잖아?”
나는 머리카락이 가늘고 생머리라 만지면 촉감은 죽여줬다.
대신 조금만 정전기가 일어나도 엄청 달라붙는데다 매일 착 가라앉기 때문에
머리 숱이 많지만 않았더라면 짧은 커트머리는 전혀 안 어울렸고, 숱이 많아도
아침마다 약간 떠 보이게 하기 위하여 매일 드라이를 해야만 했었다.
물론, 여기와서는 한번도 안 했지만…
‘젠장… 그런데… 이런 일은 여자에게 당하고 싶지 않단 말이다.’
나는 뒤로 물러나지 못하자 이제는 옆으로 슬금 슬금 피하면서, 경직된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띄우려고 노력했다.
“나, 남작영애… 이러시는 것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그러나 제네브라는 이런 내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가 할 말만 해댔다.
“너… 조엘 맥알파인경의 시종이라고 했지? 그런 남자의 시종 따윈 관두고
내게로 오지 않겠어? 내가 엄청 귀여워 해줄테니까 말야. 그런 남자 밑에 있는
것 보다는 훨씬 편할 거야.”
“하,하,하… 말씀은 고맙지만…”
나는 차마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떨어내지는 못하고 그냥 몸을 움직여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손길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너무 그녀의 손길만 의식한 나머지 내가 먹으려다 먹지 못한 음식이
담긴 접시가 난간 위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그냥 잊어버린게 화근이었다.
몸을 움직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난간 위에 있던 접시를 건드려버렸고, 덕분에
흔들린 접시는 난간에서 주륵 미끄러지면서 자신이 담고 있던 음식물을 그 앞에
있던 나와 남작 영애의 하체에다 쏟아부었다.
탁
주륵
좌르륵
챙그랑~!!
다행히 접시는 은접시라 깨지지는 않았지만, 바닥과 그대로 부딪히는 바람에 약간
찌그러져버렸고, 내 새하얀 바지와 제네브라의 화사한 연두색 빛 드레스 치마에
음식물 얼룩이 크게 생겨버렸다.
“꺄악~!!”
제네브라는 그렇게 용을 써도 나에게 안 떨어지더니만, 자신의 드레스에 얼룩이
생겨버리자 화들짝 놀라 떨어져버렸다.
“이게 뭐야? 얼룩이 져버렸잖아? 어떻게 할 거야?”
‘그게 내 탓이냐?’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더니 제네브라는 자신의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내 탓만
해댔다.
‘젠장… 억울하면 출세하라던 말이 딱 맞다니까.’
그리하여 나는 내 바지에 묻은 얼룩은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얼른 가슴 부분의
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고 그녀 앞에 무릎을 굽혔다.
“죄송합니다. 닦아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얄미운 여자의 치마를 억지로 닦으니 제대로 닦아질 리가 없는지
얼룩은 더 크게 번지고 말았다.
“이런…”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내 탓만 하고 있는 남작 영애가 그걸 보고 가만 있을리가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얼룩이 더 번졌잖아? 제대로 못해?”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이 터지는 순간 나는 눈 앞에 불꽃이 번쩍 하는 희안한
일을 겪었다.
짝~!!
갑작스레 고개가 홱 꺾여진 덕분에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지, 나는
내가 뭔 일을 당했는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본
순간, 치켜 올라가 있는 그녀의 손과 뺨에서 얼얼해지는 통증이 느껴지자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뺨을 맞았던 것이다.
너무 기가 막혀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 평생에 뺨을 맞아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치솟는 분노로 인하여 내 입장도, 여기가 어디인지도
잊어버렸다.
오직 눈 앞에 있는 저 여자 아이를 한대 패주지 않으면 속이 전혀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팔을 치켜드는 순간, 누군가가 내 팔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윽~!!”
돌아보니 그 곳에는 무지 차가운 얼굴로 날 매섭게 노려보는 조엘이 서 있었다.
“뭐 하는 거냐?”
조엘의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그의 얼굴은 예전에 내가 마굿간 뒤에서 하인 세 녀석에게 몇대 맞아주고 복수하려는
찰나 만났던 조엘의 얼굴보다 100배는 더 무서워 내 머리 끝까지 치솟았던 분노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아… 저…”
게다가 그의 몸에서는 무지 무섭고 위험해보이는 기운까지 폴폴 날리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 그대로 나에게 입을 열었는데, 말에서까지 냉기가 풀풀 날렸다.
“어서 영애께 사과하고 물러 가거라.”
“에?”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올려다봤지만, 조엘은 그것 조차
마음에 안들었는지 다시 일갈했다.
“뭘 하는 거지? 내 말이 안 들리나?”
그의 차가운 행동에 나는 온 몸이 부들 부들 떨릴 정도의 분노를 맛보았지만,
이를 악문 채 덤덤한 표정으로 조엘에게 붙잡힌 손을 빼낸 뒤 정중한 동작으로
제네브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작영애. 용서해주십시오.”
“아, 뭐…”
제네브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나는 다 듣지도 않은 채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몸을 돌려 그 곳에서 나갔다.
홀과 테라스를 연결시키는 유리문을 나가니 그 곳에서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은 채
서 있던 데니가 날 보자 반색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데니에게 다가가기보다는 얼른 몸을 돌려 그 홀의 입구를 향해
빠른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지금 데니와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이 홀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건, 아니 그 남작 영애와 조엘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데서 눈물을 흘린다면 내 자존심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아서
얼른 그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멀어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너도 귀족이란 말이지? 젠장할… 그깟 귀족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해서…’
제네브라라는 그 콱콱 밟아주고 싶은 남작 영애보다 조엘에 대한 분노가
더했다.
그에게서는 배신감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평소 괜찮게 여기던 녀석이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었다.
나는 그 남작 영애한테 뺨까지 맞았건만, 가제는 게편이라더니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같은 귀족이라고 그 여자 편을 들어 나에게 싸늘하게 대하던 그의 모습이란…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나쁜 자식, 나쁜 자시이이이익~!!’
성큼 성큼 걸어 내 방에 도착한 나는 그제야 눈에서 주르르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낸 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가방을 꺼내들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너희들 끼리 잘먹고 잘 살아라. 나쁜 자식… 다시는 네 꼴 안본다.
내가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는 줄 알아?’
그렇게 얼마 안 되던 짐들을 거의 쑤셔 넣다시피 가방에 신경질적으로 던져 넣던
나는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멈칫했다.
‘가만,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야? 하… 나도 참…’
내가 짐을 싸서 여기서 나가버린다고 해도 조엘이나 그 남작 영애란 지지배한테
피해가 가는 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나는 조엘에게 도움이 되는 것 보다는 그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많았으니,
내가 없어지면 그는 다른 시종을 구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동안 오히려 데니가 더 고생하면 고생했지, 조엘이 고생할 건 하등 없었다.
‘그냥 갈 순 없어. 아암, 절대로 그냥 갈 순 없지. 어떻게 해서든 꼭 복수하고
가버릴 테다. 여길 그냥 콱 뒤집어 엎어버리고 이 곳에 있는 값 나가는 것들은
모조리 싹 쓸어서…’
두 주먹 불끈 쥐고 복수의 불을 활활 태우며 계획(?)을 짜고 있는데 누가 내 방문을
똑똑 두드려 날 방해했다.
“해인아? 해인아, 거기 있니?”
언제나 날 챙겨주고 돌봐주던 데니의 목소리였다.
‘에… 어쩌지? 어쩌지?’
데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왠지 내가 계획(?) 했던 걸 데니에게 들키면 안된다는
생각에 – 머리로 생각한 것 뿐이어서 증거도 없는데, 데니를 보면 그게 다 들킬 것만
같았다. 내가 그렇게 바보일 줄이야… – 문을 열어주면 안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다고 저리 문 앞에 있는 데니를 모른 체 하고 있자니 양심에 찔리고…
그래서 혼자 열어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몇번 문을 두드려보던 데니는 이런 내가
열어주길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가 열고 빼꼼이 고개를 디밀었다.
“해인아!”
그러더니 방 중앙에 엉거주춤 서 있던 날 발견하고는 문을 열고 성큼 성큼 들어왔다.
“어… 형….”
그의 모습에 찔끔해서 어찌할바를 모르고 있는데 데니는 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내 침대 위에 있던, 짐 싸고 있던 가방을 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허… 뭐냐, 지금 가출이라도 하려고?”
그의 말에 욱 한 나는 몸을 홱 돌려 그 방을 나왔다.
“몰라요. 여기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요.”
생각해보니 이 곳을 뒤집어 엎고 값나가는 물건을 다 싹쓸어 간다면 저런 자질구레
한 건 가지고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스승님이 주신 책은 챙겨가야 하는데…’
하지만, 다시 떠오른 생각에 그 책만은 챙기려고 몸을 돌리는데 날 따라 내 방에서
나오던 데니가 날 보자마자 내 목에 팔을 걸어 조이면서 다른 한손으로 내 머리를
마구 흐트러 뜨렸다.
“바보 같은 녀석. 계집애 처럼 삐진 거야?”
“우갸갸갸~ 혀엉, 놔요오~”
“헤에, 너 정말 삐졌구나? 역시, 해인이가 삐졌대요~!!”
“안 삐졌어요~!!”
데니의 흥얼거리는 듯한 놀리는 말에 화가 나 빽 하고 소리를 지르자 그 순간
내 머리를 흐트러 뜨리던 손길과 목을 조이던 팔이 사라져 나는 순간적으로 휘청
거렸다.
재빨리 균형을 잡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을 거다.
황당해서 데니를 돌아보며 한 마디 하려고 했는데, 데니가 무척 부드럽지만 또한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에 나는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데니는 그런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엉망이 된 내 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물었다.
“왜 화가 난 거야? 날 버리고 가버리려고 생각했을 만큼 화가 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아….’
그러고보니 조엘 녀석에게 너무 화가난 나머지 데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게 미안해서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데 데니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그 철없는 남작 계집애 한테 한대 맞았다고 화난 거야?”
그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형… 혹시…”
하지만 데니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조엘님이 네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거야?”
“뭐예요, 다 보고 있었어요?”
나는 데니의 손을 슬쩍 치우고는 그를 지나쳐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데니를 만난 덕분에 아까의 그 끝도 없이 치솟아 오르던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까지 풀린 건 아니었기에 가지고 갈 짐을 챙기려고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자 데니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내가 한가지 가르쳐 줄까? 아마 그 철 없는 남작 영애는 다시는 너에게 추근대지
못할 거야.”
“그러던 말던 상관 없어요. 둘 다 보지 않을 거니까.”
“그럼 나는? 나도 안 볼 거야?”
그의 말에 내가 멈칫 하자 데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해인아, 조엘님은 귀족이라서 귀족 편을 든게 아니야. 아까 너에게 그렇게
대했던 건 조엘님이 그 철 없는 남작 영애한테 경고하는 모습을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거라고.”
“그게 아니겠죠. 남작 영애한테 함부로 할까봐 화를 냈던 거겠죠. 형도 봤을 거
아니예요? 저에게 엄청 화내시던 모습…”
“내가 보기에 너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 남작 영애한테 화를 내는 것
같던데?”
“조엘님 변호해 줄 필요 없어요, 형. 형께는 죄송하지만, 난 갈 거예요.”
노만에게 가져다 줄 책과 내가 가지고 갈 책을 다 꺼내든 나는 이 곳을 떠나기
전 그에게 책을 돌려줄 요량으로 책들을 들고 내 방에서 나오는데, 그 순간
조엘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조엘은 아까처럼 냉기를 풀풀 풍기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그 상태로 방 안을 둘러보던 그와 눈이 마주쳤지만, 나는 그와 말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무시해버렸고, 조엘 또한 아무말도 하지 않아 방안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자 데니가 조엘에게 다가가더니 좀 과장된 쾌활한 어조로 그에게 입을
열었다.
“핫핫, 조엘님, 저 녀석 삐져서 집 나간다는 군요. 조엘님이 삐지게 했으니 알아서
하세요. 대신 해인이 못 잡으시면 저도 화낼 겁니다.”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내게 맘을 써주는 데니 형의 행동에 가슴이 뭉클해졌지만, 그래도 조엘
녀석과는 같이 있고 싶지도 않았고,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데니 말대로 삐지긴 엄청 삐진 모양이었다.
조엘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조엘이
뚜벅 뚜벅 다가오자 나 또한 걸음을 옮겼다.
조엘이 나에게 다가오는 건 알았지만,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를 비켜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 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조엘이 방문 바로 앞을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에
비켜서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며 뚜벅 뚜벅 걷기만 해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한 걸음 옆으로 가서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조엘의 팔이 내 앞을 가로막더니 그와 동시에 날 자신의 품으로
끌어 당겼다.
‘으겍…’
얼마나 강하게 날 끌어 안았는지 내 팔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그렇게 날 끌어안은 상태로 내 귓가로 얼굴을 가져다 대더니 작게 속삭였다.
“바보…”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지금 누구 보고 바보라는 겁니까?”
그가 얼굴을 내 귓가에 대고 있는 바람에 내 얼굴 또한 그의 귓가에 가까이
닿아 있었다.
그런 상태로 소리쳤으니 그의 귀가 멍멍 했을 거다.
하지만, 이 인간은 좀 맛이 갔는지 잠시 멈칫 하더니 곧 쿡쿡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으신 겁니까? 저는 하나도 안 재미있으니 이것 좀 놔주시겠습니까?”
나는 할 수 있는 한 땍땍 거리면서 말했건만 조엘 녀석은 여전히 쿡쿡 거리더니
날 놔주지는 않은 채 오히려 내 머리 끝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짙은 남색 비단
리본을 끌었다.
아까 데니가 하도 머리를 흐트러뜨리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 있던 나는 조엘 녀석이
리본을 아예 벗기는 바람에 완전히 풀어져 흘러내렸다.
그래봤자 어깨에 닿는 정도였지만…
“뭐 하시는 겁니까?”
안긴 상태에서 계속 땍땍 거렸지만, 조엘 녀석은 꿈적도 안 했다.
이제는 내 머리 카락을 자기의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더니만 슬쩍 나에게서 자기
몸을 떼더니 앞으로 흘러 내린 머리카락을 내 귀 뒤로 넘겨주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물론 나는 녀석에게 앙심에 가득 차 있었으니 하나도 안 고마웠다.
그래, 날 내려다보는 녀석을 지지 않고 마주 바라보고 있는데, 녀석이 평소 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를 짓더니 내 귀를 만지작 대고 있던 손을 옮겨
아까 남작 영애에게 얻어 맞은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국이 남았군. 아파?”
“궁금하시면 직접 맞아 보시죠?”
그러자 조엘 녀석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쿡쿡, 몇번 맞아봤지만 난 맞을 당시 조금 따끔하고 말더라고. 하지만, 네 피부는 무척
연약해보여서 말이지.”
그러더니 이놈의 손가락이 볼에서 쓰윽 움직이더니 내 턱쪽으로 다가와서
아랫 입술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리 할 일이 없으시면 좀 놔주시죠?”
그렇게 앙칼지게 외치면서 이놈의 손가락을 콱 깨물어 줄까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녀석이 능글맞게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싫.어.”
‘뭐냐…이놈…’
“지금 장난 하시는 겁니까? 심심하시면 아까 그 남작 영애랑 노시지요? 전
같이 놀아 줄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요.”
“호오… 삐진 거냐?”
조엘 녀석의 그 얄밉고 능글맞은 대답을 듣는 순간 열이 확 뻗쳐 올라 내 입가에서
왔다갔다 하는 녀석의 손가락을 콱 물어줄라고 입을 벌렸는데, 그 순간 조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아랫 입술에 부드럽게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너무 갑작스런 상황에 뻣뻣하게 굳어 있는데, 조엘 녀석이 그런 날 내려다 보다
귓가에 다시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댄 채 속삭였다.
“절대로 안 놔줄 거야. 네 맘대로 가게 내버려 둘 줄 알아?”
그리고는 완전한 석상이 되어 있는 날 내버려두고 자기만 방에서 빠져 나가버렸다.
주륵~
타악~!!
“악~!!”
조엘 녀석이 빠져 나간 뒤 나는 혼자 멍 하니 서있다가 손에 힘을 좀 뺐었는지
팔에 들고 있던 책이 내 팔 안에서 빠져나와 떨어지더니 정확이 내 발등을 가격했다.
덕분에 정신 차리기는 했지만 발등이 엄청나게 아파 나는 한동안 앉아서 낑낑
대야 했다.
마법서란 것들은 쓸데없이 표지 두껍고 책 두께가 두껍기에 들기에도 상당히
무거운데 그걸 발 등에 떨어뜨렸으니… 멍이 안 들면 다행이다.
“으갸갸… 아퍼라… 젠장할… 조엘 자식 엉뚱한 짓을… 아호 아퍼… 이게 다
그 자식 때문이얏~!!”
혼자서 중얼 중얼 소리도 쳐봤지만, 덕분에 아까의 일이 다시 떠오르자 나는
얼굴이 화끈 거렸다.
“쳇… 그래도 여자가 아닌게 다행이네… 뭐… 그래도 나쁘지는… 에엣, 내가 지금
무슨말을…”
혼자 중얼 거리던 나는 내가 한 말에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어 혹시 누가 이 말을
들었을까봐 몰라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혼자 있던 방이었으니 내가 혼자 중얼 거리던, 생쇼를 하던 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냐. 체엣…”
혼자 별 짓 다 하고 스스로의 모습에 한심함을 느낀 나는 의기소침해져 한숨을
푹 내쉰 다음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들었다.
조엘에게서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뒤 노만에게 가져다 주려고 했던 책이었다.
그러나…
“쳇, 절대로 안 놔준다고? 웃기고 있네… 짜식, 이제 봤더니 순 바람둥이잖아?”
그래도 나는 스스로의 입이 스르르 벌어지면서 아까의 그 분노한 감정이 어느새인가
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래… 내가 그렇게 꼭 필요하다는데 있어주지 뭐… 그럼 앞으로 시종 일은…?”
나는 거기까지 중얼거리다 다시 한번 들고 있던 책들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권의 책이 한꺼번에 내 발등을 내리찍고 말았다.
스륵~
탁, 탁, 타악~!!
“아으윽~ 젠장할… 아까 맞은 데 또 맞았잖아?”
다시 주저 앉아 낑낑거리는 나였지만, 딴 생각으로 인하여 머리가 혼란스러워 큰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휴~~ 이게 어찌된 거지? 난 분명히 지금 남장하고 있는데… 설마하니 엘라임
까지 날 아들이라고 부르는 마당에 내가 여자인게 탄로난 것도 아니고… 그럼,
조엘 녀석이 그… 뭐시냐… 거시기? 그, 그러면… 이 글은… 거시기물? 흐미…
우째 이런 일이? 이거 마냥 헤벌래 해 있을 일이 아니잖아? 그, 그럼… 내가 조엘
녀석에게 내가 여자라는 걸 밝히면… 그 자식은 뭐라고 할까? 오호, 통재라~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아~”
혼자 앉아서 낑낑 거리고 생 쑈를 하고, 머리를 쥐어 짜며 고민 고민 하던 나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몰라, 알 수가 없어. 어떻게든 되겠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아~!!”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난 뒤 떨어져 있던 책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항상 곁에 붙어 있던 나이트급 정령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녀석들은 처음에 계속 내 곁에 붙어 있으면서 구경 하더니만, 이제는 자기들 끼리
어디론가 놀러 다니곤 했다.
엘라임도 요즘 계속 정령계에 가 있는 거 같고…
하여튼 만약 엘라임이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애가 맛이 갔다고 당장 끌고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거 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만…
“몰라, 우선 이거나 스승님께 가져다 드려야 겠다.”
다시 여기 머물러 있겠다고 생각을 바꿨어도, 어차피 이 책들은 노만에게 잠깐
빌린데다 이제 다 읽어서 돌려줘도 상관 없는 거였다.
아직 파티가 끝나려면 멀었기에 노만 역시 돌아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방에다 책만 가져다 놓고 나오다보니 그제야 아직까지 음식 얼룩이
묻은 옷을 안 갈아 입었다는 걸 깨닫고 얼른 내 방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휴… 내 정신좀 봐. 너무 정신이 없다보니 옷 갈아 입는 걸 깜빡 했잖아?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런데… 이렇게 중얼 거린 것이 무색하게도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저쪽 꺾어지는
복도쪽에서 자박 자박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한 소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내 또래의 소녀이긴 하지만, 화려한 파티 복장이 아닌, 후작 성의 하녀 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걸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이, 이런…. 하필이면…’
날 바라보며 걸어왔기에 피하지도 못하고 그냥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다가온
그 소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혹시 맥알파인경의 시종 아니세요?”
“아, 맞는데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아, 다행이도 일찍 찾았네요. 맥알파인경께서 찾으세요.”
“저를요?”
그녀의 말에 나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 동안은 조엘이 나를 부르려고 할때 다른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거나 데려오게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저택에 있을 때에는 조엘의 곁에 있거나 아니면 데니, 노만, 혹은 헤럴드와
함께 있는데다 내 행동 패턴이 거의 일정했기에 그와 떨어져 있을 시기에는 그가
직접 나를 찾으러 왔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여기는 맥알파인 공작 저택이 아닌데다가 나는 지금 조엘의
방에 있지도 않았으니, 그가 다시 방에 갔다가 없으니까 지나가는 하녀에게 부탁한
모양이라고 나는 스스로 납득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지금 어디계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곧바로 몸을 돌려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기 시작하는 그녀
때문에 나도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아야 했다.
그녀는 성을 빠져 나와 정원 쪽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니었지만, 해는 완전히 져버린 시각이라 성을 둘러 싼 정원
이곳 저곳에는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이들을 위하여 이곳 저곳에 등을 켜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등들이 정원 모두를 밝힐 수는 없는 법이라 정원의 깊숙한
곳은 어두컴컴했다.
이 후작의 성에 있는 정원은 수도에 있는 맥알파인 공작 저택의 정원에 비하면
크지 않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때는 엄청 큰 곳이었기에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으슥한 곳도 많았다.
그런데 나를 안내하는 시녀가 그렇게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나를 안내하자
나는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조엘 녀석은 이런 정원에서 왜 날 보자고
하는 거지?’
한번 시작된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져 결국 나이트급 정령들을
불러낼지 말지 고민하기까지에 이르렀을 때 시녀의 발걸음은 멈췄다.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조금만 더 가시면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전 이만…”
“에? 아, 감사합니다.”
조엘 앞도 아니고, 조엘이 있다는 방향만 가르쳐 준 그녀는 내 감사의 인사에
고개만 한번 까딱 거리고 다시 총총 걸음으로 성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되게 바쁜가보네… 저렇게 서둘러서 가다니… 성실한 사람인걸?’
성으로 돌아가는 그 시녀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본 나는 그녀가 가르쳐준, 조엘이
있다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곳은 등도 안 밝혀져 있어 오로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달빛과 별빛만이
정원을 비쳐주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걸어갔건만,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아무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였다.
‘얼마나 멀리 있는 거야?’
속으로 좀 짜증을 내면서 나는 조엘 녀석을 부르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조엘님? 어디 계십니까? 조엘님? 조엘니이이임~!!”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좀 께름직한데다 거부감 마저 드는 기분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평소 같으면 활발하게 날아다니(?)는 정령들도 이상하게 숨을 죽인
채 – 어차피 지들이 떠들어도 딴 사람들은 듣지도 못하는데 – 나를 주시하고
있는 거였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분에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엘라스트라]아무래도 제일 의지되는 건 물의 정령이었던 모양이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옆에 스륵 하는 공기의 움직임이 느껴지며 푸른 용이
조용히 나타났다.
그가 옆에 든든히 지켜주자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채 세 걸음도 떼지 못했을 때 엘라스트라가 말을 걸어왔다.
[사람의 시체가 있습니다.]그의 말에 혹시나 조엘인가 싶어 나는 얼른 엘라스트라에게 부탁했다.
[안내해 줘.]엘라스트라는 군 말 없이 매끈한 그의 몸을 움직여 허공에 둥둥 뜬 채 내 앞 허공을
스르르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뛰다시피 빠른 발걸음을 옮기는데 얼마 가지 않아 작은 정원 나무
아래 시커먼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엘라스트라는 그 시커먼 물체 위에 둥둥 떠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른 달려가보니 쓰러져 있는 건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였는데 등을
따라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죽음의 원인인 듯한 단검이 뾰족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상처에서 흘러내린, 주위에 흥건하게 고인 핏물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간 나는 무서운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얼굴을 덥고 있는
머리카락을 치웠다.
혹시라도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면서 내 손을 덥썩 잡을까봐 엄청 무서웠지만,
그 보다는 왠지 검고 긴 머리카락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히익~!!”
그리고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몸서리 치며 얼른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원한과 고통으로 가득 찬 표정에 눈도 부릅떠 앞으로 노려보고 있는 얼굴을 어두운
밤에 덤덤하게 마주 보고 있을 정도로 나는 강심장이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처녀귀신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무섭게 일글어진 얼굴은 내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베르쿠스 남작 영애가…”
그 순간 나는 조엘이 날 이 곳으로 불렀다는 것도 잊은 채 엘라스트라 보고 여기
있으라고 당부한 뒤 잽싸게 성이 있는 곳으로 뛰었다.
그러나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위에서 경호를 서고 있던 후작 성의 기사를
만날 수 있어 나는 그를 붙잡고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베르쿠스 남작 영애가 죽어 있습니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던 그 기사는 내 말에 무지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자신과 함께
있던 병사 중 한명은 성 안으로 보내 이 일을 알리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병사 두명과
함께 나의 뒤를 따라왔다.
기사와 함께 한 내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기사가 그녀의 시체를 살피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사와 같이 달려온 병사 한명이 얼른 마중 나가 그들을 이끌었는데 그 곳에는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은 물론, 그의 장남과 차남, 그리고 장남의 친구인 스테반
윈체스터와 조엘 데니까지 보였다.
“조엘님?”
여기서 날 기다려야 할 조엘이 후작들과 같이 달려오자 놀라서 그를 불렀는데,
내 모습을 본 조엘은 나 보다도 더 놀라 나에게 다가왔다.
“아니, 네가 왜 여기 있는 거냐?”
그의 반응에 나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왜 있냐니요? 조엘님이…”
하지만 내가 채 말을 다 하기도 전에 나와 같이 이 곳으로 왔던 기사가 입을
열었다.
“저 소년이 제일 먼저 시체를 발견해습니다.”
물론, 그건 조엘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 후작에게 한 말이었지만, 그로 인해
그 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네가 시체를 발견했다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데니 마저 놀라면서 나에게 다가와 다그치는데 후작이 끼어들었다.
“자자, 둘 다 진정하고, 괜찮다면 내가 질문을 하겠네.”
제일 연장자이자 이 곳의 주인이 나서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불안한 눈치의 데니와 조엘이 뒤로 물러났다.
“그래, 우선 자네가 누구인지 이야기 해 줄수 있겠나? 내 기억력이 딸려
자네가 누구인지 생각이 안 나는구만.”
그는 내가 아직 조엘의 파티복을 입고 있는 터라 귀족의 자제인 줄 알았는지
무척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시종이라는 걸 알아도 저 태도가 유지될 지 엄청 걱정스러웠지만, 나는
바른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저는 조엘 맥알파인님의 시종입니다.”
“그래? 흐음…”
내 말을 들은 그가 인상을 미미하게 찌푸리더니 조엘에게 시선을 돌렸고, 조엘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자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조엘을 바라본 이유가 내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랬군. 어찌 되었든, 자네가 여길 맨 먼저 발견했다고?”
다행이 크게 행동이 변하는 건 없어 나는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같이 있던 사람은 없었는가?”
엘라스트라가 같이 있었지만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를 댈 수는 없었다.
“저 혼자였습니다.”
“왜 여기 있었지?”
후작의 질문에 나는 잠시 조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조엘 님이 여기서 저를 부르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러자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엘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뭐라고?”
뭐, 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놀라는 조엘의 모습을 보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막상 확인하고 보니 상당히 황당했다.
아니, 조엘이 날 여기 불러낸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날 불러낸 이는
누구란 말인가?
조엘의 태도로 보아 그가 정말 날 불러낸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은 – 사실
누구라도 깨달을 수 있었겠지만 – 후작은 의심스런 표정으로 날 보면서
물었다.
“누가 조엘이 여기서 널 불렀다고 했지?”
‘자네’에서 ‘너’로 호칭이 바뀌는 걸 듣고는 나는 사태가 나에게 안 좋게
흘러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후작의 말에 솔직히 대답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제가 성 안에 있을 때 성의 시녀가 와서 저를 정원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조엘님이 이쪽에서 절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들어왔는데 조엘님은 안 계시고 이렇게…”
나는 그렇게 말을 흐리면서 눈짓으로 여전히 쓰러져 있는 그녀의 모습을
가르켰다.
“널 이 곳으로 데려온 시녀를 아는가?”
“이름은 모릅니다. 사실 오늘 처음 봤기 때문에…”
“인상 착의라도 말해봐라.”
“제 나이 또래에 등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였습니다. 키는
저보다 좀 작았다는 것 외에는 모르겠습니다.”
뭐, 이 정도까지만 이야기 해도 성 안에 있는 시녀들 중 범위가 상당히 좁혀졌을
것이다.
후작은 내 말을 듣자마자 근처에 있던 기사에게 입을 열었다.
“당장 성으로 돌아가서 이 아이의 말에 적합한 아이들은 모조리 끌고 오게. 우리
성의 시녀가 아니라, 임시로 마을에서 데려온 애들도 모조리!”
“알겠습니다.”
그 기사가 병사 몇명과 함께 부리나케 성으로 뛰어가버리자, 시녀들이 올 때까지
나에 대한 심문은 잠시 미뤄졌는지 후작의 시선이 시신을 살펴보던 이들에게로
옮겨졌다.
그러자 후작의 시선을 느낀 듯 시신을 살펴보던 기사들 중 한명이 일어나며
궁금해할 점을 알려줬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기습을 한 듯 싶습니다. 꽤 정확하게 심장을 찔린 것으로 보아
이런 일에 익숙한 이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것 외에 다른 외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심장을 찌른 단검은 무기상에 돈만 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용병들이나 도둑이
자주 사용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 그럼… 범인은 용병이나 도둑이라는 것인가?”
후작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을 옆에 있던 그의 장남 볼레어가 받았다.
“어쩌면 암살자일 수도 있습니다. 남작 영애를 노리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런데… 왜 영애가 여기 혼자 있는 거지? 시녀도 없이 혼자 으슥한 곳에 말이야…”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내뱉는 스테판의 말에 후작의 고개가 근처에 있던
기사에게로 돌아갔다.
“너는 지금 당장 가서 영애의 시녀를 데리고 와라. 어서!”
“예!”
“너는 지금 당장 가서 영애의 시녀를 데리고 와라. 어서!”
“예!”
후작의 명을 받고 다다다 달려가는 기사의 뒤를 보면서 나는 긴장감이 점점
내 마음을 옥죄어 오는 걸 느꼈다.
‘후우….’
조엘과 데니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 뿐 감히
다가오지는 못하고 좀 떨어진 곳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에구… 영감님이라도 부를까? 아냐, 그랬다간 그냥 다 뒤엎을 거야. 그냥
나이트급 정령들이나…’
조엘, 데니와는 단지 몇 발자국 떨어진 거 뿐인데도 지금 심정으로는 그들과
천리 만리 떨어진거 같고, 사이에는 넓은 강이라도 떡 하니 존재하는 거 같았다.
지금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그들 뿐인데, 그들 조차 어찌할바를 모르자
왠지 기대고 있던 기둥이 갑자기 치워진 듯한 기분으로 마치 허허 벌판헤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불안한 기분을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순간 존재도 잊고 있었던 엘라스트라가 쓰윽 나에게 다가오더니 마치
날 위로 하려는 것 처럼 그 길다란 몸으로 부드럽게 나를 감더니 자신의 커다란
머리를 슬쩍 내 어깨에 올려 놓았다.
[훗…. 뭐야, 위로 하는 거야?]내 웃음기 어린 말에 엘라스트라는 단지 씨익 웃어보이기만 했다.
잠시 후 날 이 곳으로 데리고 온 시녀를 찾기 위해 갔던 기사가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왔다.
“후작님!”
“그래, 수고했다. 거기 너, 이들 중에 네가 말한 시녀가 있느냐?”
병사들이 내 앞에 그들이 데리고 온 시녀들을 주르르 세워 놓았다.
그녀들은 다짜고짜로 끌려나와서 그런지 두려움에 떤채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어 나는 그녀들 가까이에 가서 얼굴을 봐야 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보면 움츠러드는 – 내가 괴물로 보이는지… – 그녀들을
살펴본 나는 유난히 날 피하려고 애를 쓰며 움츠리고 있는 시녀를 발견했다.
“이… 아가씨입니다.”
그러자 그 순간 그녀가 화들짝 놀라 도리질 치며 외쳤다.
“아닙니다. 아니예요. 전 저 분을 모릅니다. 지금 처음 뵈었습니다.”
그녀의 발악에 가까운, 두려움에 떨며 외치는 소리에 내가 더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이 애가 확실한가?”
“아.. 예…”
그러자 그 시녀가 더욱 더 자지러지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전 저분을 모릅니다. 믿어주세요. 정말입니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왔다면 두려움에 떠는 건 당연할테지만, 저 시녀의
반응은 좀 지나치다 싶다고 여기는데 그때 남작 영애의 시녀를 데리러 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후작님, 데리고 왔습니다.”
병사 두명에게 둘러쌓여 거의 연행되다 시피 온 그 남작 영애의 시녀는
두려움에 떠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래도 남작 영애를 가까이서 모시는 시녀라 그런지 바들 바들 떨기는 해도
침착하게 다가와 후작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네가 남작 영애의 시녀라고?”
“예… 그렇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지만 뚜렿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역시 성격 더려운
남작 영애를 모시는 시녀답다는, 이 상황과 전혀 안 어울리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후작의 질문이 다시 들려왔다.
“네가 모시는 남작 영애가 어디 계시는 지 아느냐? 너는 왜 남작 영애 곁에
있지 않았지?”
아무래도 후작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작 영애가 죽었다는 걸 알리지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 남작 영애의 시신은 고이 천으로 덮여져 성 안으로 운반되고 있을
터였다.
이 시녀가 그걸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후작의 질문을 들은 시녀는 무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다가
조엘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숙였다.
“그, 그게… 그러니까…”
그녀가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리자 후작의 목소리에 냉기가 깔렸다.
“왜 대답을 못하지? 빨리 대답하지 못할까?”
“저… 아가씨 께서는 그러니까… 잠시 바람을 쐬신다고…”
“혼자 갔단 말이냐? 너는 왜 안 따라갔지?”
“그게… 혼자 있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그래서…”
그녀의 대답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후작은 그녀의 말에 꼬투리를
잡아 따져 물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후작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너는… 네가 모시던 남작 영애가 죽었다는 걸 아느냐?”
그의 말에 남작 영애의 시녀가 경악을 하며 고개를 들어 후작을 쳐다보았다.
“허억~!! 그, 그게… 그게 사실입니까? 아가씨께서… 아가씨께서?”
“그래,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지.”
귀족들은 프라이드라는게 무지 무지 높아서 평민들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면
엄청나게 불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시종들은 항상 귀족 앞에 서면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 깔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런데 이 시녀는 너무 놀라서 그런지 그걸 잊고 그런 무례한 짓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뭐, 상황이 상황이라 그런지 후작은 그냥 나두고 있었지만, 그 다음에 그 시녀는
서 있을 힘도 사라졌는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그럴 수가…”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싸그리 사라져 유령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기야,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모시던 영애가 죽었으니 그녀 또한 영애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로 돌아가면 죽은 목숨이었던 것이다.
뭐, 그 남작이란 사람이 너그러우면 목.숨.만은 안 뺐을지 모르지만… 이로써 그녀의
인생은 끝장났다는 선고를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녀가 저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망연자실하게 자리에 주저앉아 ‘아가씨가… 아가씨가…’라고 중얼거리는 그녀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그 시녀가 고개를 들어 사방을 살펴 날
발견하더니 곧바로 나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저 자예요. 저자가 바로 아가씨를 죽였을 겁니다. 틀림 없어요!!”
“에엑?”
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싶어 뭔가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보다도 먼저 그 시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저 자를 만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분명히 저자가 죽인 거예요. 아까의
앙갚음으로 그랬을 거예요!!”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경악으로 물들어 있는 나에게 모든 이들의 차가운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 곧바로 후작의 질문이 날아왔다.
“넌 아까 맥알파인 경을 만나러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날 모른다고 극구 부인하는 시녀를 가르키며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저 시녀가 이곳에서 조엘님이 절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온 거구요.”
그러자 후작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이 곳에 남작 영애와 너 단 둘이 있었다는 건 사실이군.”
“제가 남작 영애를 발견했을때는 이미 숨을 거두신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기사에게 달려가 알린 것이 것입니다. 만약 제가 범인이라면 도망가지 왜 기사에게
알렸겠습니까?”
거의 외치다시피 두다다다 나온 내 말에 사람들이 납득한 표정을 지었는데, 단
한사람만이 납득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뛰쳐나와 날 윽박질렀다.
“닥쳐라. 네가 일을 저질러 놓고 아닌 척 알렸을 수도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 자국은 뭐냐?”
그는 이번에 성인식을 치룬다는 후작의 차남이었는데, 그는 정확히 내 다리쪽을
가르키고 이었다.
그 곳에는 아까 남작 영애때문에 이리저리 도망가다 접시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음식물을 쏟아 자국이 생겼는데 시간이 흘러서 바짝 말라있었는데 하필 검붉은
색으로 말라 붙어 어두운 곳에서 잘못 봤다가는 핏자국으로 오해 받을 수도…
“그건 남작 영애의 피가 튄 것이 아니더냐? 이 곳은 등불도 켜 놓지 않은 어두운
곳. 넌 남작 영애를 뒤에서 찌른 뒤 어두워서 자신의 몸에 피가 튄 것도 모른 채
기사에게 달려가 알린 것이겠지. 내 말이 틀렸느냐?”
‘젠장할…’
“아닙니다. 이건 음식물이 튄 것으로 냄새를 맡아 보시면…”
그러나 내 다급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후작의 차남이 검을 뽑아 들고 나에게
덤벼 들었다.
“닥쳐라. 네놈이 감히 제네브라를…. 용서 못해!!”
검을 뽑자마자 횡으로 크게 베어들어오는, 달빛에 시퍼렇게 반짝이는 검날에
나는 황급히 몸을 숙였다.
그 동안 데니에게 받은 교육 덕을 확실히 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후작 차남 또한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검술 수업을 받은 사람 – 아마
나보다 훨씬 훠어얼~씬 오래 받았을 거다. – 내가 밑으로 숙여 앉는 걸 보자마자
한 걸음 나에게 더 다가와 숙이고 있는 내 얼굴을 그대로 올려 차버렸다.
“꾸엑~!!”
그걸 피하지 못하고 턱에 그대로 맞은 나는 뒤로 나가떨어졌는데, 다행이 내 곁에
있던 엘라스트라가 땅에 쳐박히기 전에 슬쩍 받쳐줘 큰 충격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턱은 깨진 것 처럼 무자게 아팠다.
‘우욱.. 아파라… 하마터면 혀 깨물 뻔 했잖아?’
턱만 아픈 것에 안도하며 얼른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 보다도 먼저 내 가슴에
그 후작 차남의 발이 올라와 나는 다시 뒤로 넘어갔다.
“그만 둬!!”
“무슨 짓이야!!”
“다니엘!!”
“해인아~!!”
뒤에서 급하게 그를 부르며 – 차남 이름이 다니엘이었던 듯… –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날 부르는 소리도 들렸지만, 나는 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후작가의 차남, 그러니까 다니엘의 얼굴이 내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울고 있었다.
검을 매섭게 치켜들며 나에게 엄청난 살기어린 시선을 쏘아보내고 있었는데,
그 눈에 눈물이 맺혀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 혹시…’
그러고보니 제네브라라는 남작 영애가 밤 늦게 도착했을 때, 후작이나 그의 장남은
마중하지 않았는데 이 자식은 나와서 영애와 투닥댔었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내가 어떤 입장에 있는지도 까먹고 멍하니 있다가 엘라스트라가
날 확 밀쳐버리는 바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밀어도 내 명이 아니면 큰 힘을 쓸 수가 없었던 엘라스트라는 내 상체를 옆으로 조금
밀어놓는 것이 다였지만, 그 덕에 나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멍 하니 있던 덕에 큰 고통을 격어야 했지만…
푸욱~!!
“으악~!!”
엘라스트라가 날 밀어버린 덕에 내 목줄기를 노렸던 다니엘의 검이 내 오른쪽 어깨를
꿰뚫었던 것이다.
혹시, 칼에 크게 베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정말 안 좋은 경험이다.
평소에는 둔하디 둔한 신경도 이때만큼은 몇배로 민감해져서 검이 내 몸에 뚫고
들어오는 그 감각을 너무나 생생하게 내 뇌에 전달하는 것이다.
찔리는 순간에는 통증도 없다.
그저 차가운 금속이 내 어깨를 뚫고 들어오는 그 느낌만이 생생하게 느껴질 뿐…
그건 엄청 소름돋는 느낌이라 차라리 아픈게 훨씬 훠얼씬 났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놈의 고통이란 놈은 엉덩이가 얼마나 무거운지 내가 그 느낌을
생생하게 느낀 뒤에 찾아온다.
“끄윽~!!”
그 뒤에 찾아온, 통증에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녀석을 노려보자 이 놈은 나와 같이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며 검을 옆으로 비틀었다.
“아윽~!!”
검이 신체에 파고 들면, 이 얄미운 녀석을 피부가 꽈악 붙들고 안 놓아주려고
하기 때문에 검을 다시 빼려면 달라 붙은 피부를 떼어야 하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검을 툭 차서 떨구고 빼는 거고, 다른 하나가 바로 검을 옆으로 틀어서 안을
휘저어 놓고 빼는 거다.
그리고 잘 빼지는 건 당연히 후자다.
“다니엘~!!”
그 놈이 검을 옆으로 한번 비틀고 난뒤 다시 내 어깨에서 검을 뽑아 다시
날 겨누는 순간 뒤따라 달려왔던 인간들이 녀석을 잡아서 나에게서 떨궈놨다.
‘빨리 좀 올 것이지…’
그리고 그 뒤에 도착한 데니가 바닥에 엎어져 바둥거리는 나를 부축해 겨우
앉히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경악에 찬 얼굴로 앞을 바라봐야 했다.
그 앞에서는…. 갑자기 사방에서 몰려오는 물방울들이 하나 둘 뭉쳐져 커다란
물방울을 형성하더니 어느 순간 그 물방울이 터지며 수십배 수백배로 불어나
사방을 덮쳐 버렸던 것이다.
갑자기 공중에서 커지는 물방울의 모습에 사람들이 놀라 어리둥절해 피할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자신을 덥치는 커다란 물결에 그대로 휩쓸려 그대로 뒤로 날려가
버렸다.
“크윽~!!”
“커억~!!”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 물방울이 터진 그 곳에 엘라임이 떡 하니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엄청 분노한 얼굴로…
내가 이 곳으로 처음 왔을 때 멋도 모르고 엘라임 성질을 건드려 그의 분노를
샀을때보다 훨씬 훠얼씬 무서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갑자기 생겨난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뒤로 날려가버린 다니엘을 물줄기를 이용해
자신의 앞으로 끌고 오더니 한마디 했다.
“죽고 싶지?”
그런데 이 다니엘이란 놈은 아까의 그 펄펄 날리던 살벌한 기운은 엘라임의
무서운 기세에 눌려 대답도 못하고 꺽꺽 거리고 있는 거였다.
하기야, 엘라임의 물줄기가 그의 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으니 말도 못하는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엘라임도 그의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닌지 계속 자기 할 말만 했다.
“감히… 내 아들에게 손을 대다니. 네놈들은 다 죽었어.”
그런데, 무서운 말을 무표정으로 하면 그 무서운 기운이 훨씬 증폭되는 거
같았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는 처지였던 나 조차도 – 엘라임의 물결은 나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아마 날 보호하고 있던 엘라스트라 덕인 것 같지만… 엘라임에게 기운을
받았나? – 오싹해질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니, 그걸 정면으로 받은 다니엘은… 아마 반은 넋이 나갔을 것 같았다.
“죽어라!!”
그가 어쨌든, 엘라임은 자신의 할 말을 다 한 뒤에 손을 치켜 들었는데, 그의 손을
따라 밑에 있던 물에서 한 개의 물줄기가 솟아 오르더니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다니엘에게 떨어지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엘라임을 멈추기 위해 외쳤다.
“아, 아버지!!”
솔직히.. 나도 그때 내가 왜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는지 모르겠다.
뭐, 엘라임을 부르려고 했는데 얼결에 그렇게 나왔으니… 평소 내가 엘라임을 아버지라
여기고 있긴 여기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내 아빠는 한국에 계신 그 분 뿐이라고 스스로 곱씹었건만 말이다.
그래도… 아빠라고는 안 했으니 조금 차이는 둔 건가?
그렇게 다급하게 부른 효과가 있었는지 엘라임은 그 즉시 행동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에 무척이나 놀랐다는 감정이 생생히 떠올라 있었지만, 나는 그걸 감상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나 죽어요~!! 이거 왜 피가 안 멈추지? 나 이러다가 출혈 쇼크로 죽는 거 아니예요?”
이 곳에 온 뒤로 내 머리와 눈이 물빛으로 변하자 나는 혹시나 내 피도 파란 색으로
변한 건 아닌지 걱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걱정한 것이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로 내 피는 붉었고, 그게 지금 철철
넘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엘라임을 부를때 머리가 띵하고 어질어질 한것이 정말 출혈
쇼크가 생길까봐 스스로 겁이 더럭 날 정도였다.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엘라임의 행동은 신속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날아(?)와 나를 붙잡더니 어느새 크게 변화여 형상화
된 엘라스트라 – 그러니까 용 -을 냉큼 타고 하늘로 올라갔던 것이다.
“어? 어디 가요?”
“집으로.”
“상처는…”
“집에 가서 해.”
“자, 잠깐만요.. 가는 건 좋은데… 이대로 가면 난 도망치는 꼴이잖아요오오오~~”
내가 처절하게 외쳤지만, 엘라임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의 처절한
외침만 밤 하늘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