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13)
제 12화 해인, 취직하다.
생각지도 못한 녀석을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다시 만난데 대한 놀라움으로 내가
눈을 크게 치켜뜨며 녀석을 가르키자 나를 지키려는 듯 내 옆에 서 있던 엘라임이
물어왔다.
“아는 놈이냐?”
“아니, 안다기 보다는… 한번 마주친 놈인데…”
그 마주침이 절대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엄청 얄미운 놈이라 그냥 가고 싶었지만, 그 마음 보다는 그가 관련된 것이 틀림 없는 이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기에 가는 대신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이런 내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먼저 제안해 왔다.
“자자, 우선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떨까? 여기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야.
도와준 것에 대한 답례를 하고 싶은데 같이 가겠어?”
그의 제안을 당장에라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같이 있던 엘라임과 이프리트가 마음에
걸려 그 둘을 돌아보자 이프리트는 싱긋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줬고 엘라임도
마지 못한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좋을 대로 해라.”
척 보기에도 ‘우리는 도둑 집단이요’라고 광고하는 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나는 이들이 우리를 안내하는 곳도 소설 속에서 흔히 보았던 뒷골목의 어두컴컴하고
음침하고 톡 건드리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허름한 건물 안의 비밀의
방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내 예상을 깨고 이들이 안내한 곳은 우리가 만난 곳에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평범해보이는 주택의 뒷문이었다.
어차피 우리가 만난 곳이 크게 풍족하지는 못해도 넉넉하게는 사는 편인 중산층
사람들이 살 듯한 깨끗한 주택가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 곳에 있는 집들은 모두 2층짜리 주택에 아담한 정원이나 텃밭 정도는
넉넉히 꾸밀 만한 앞마당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안내한 곳은 그런 집들 중에서도
큰 축에 속하는 주택이었다.
“이리로…”
그 주택 안에서는 사람이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가 도착하자 얼른 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보는 사람이 있나 없나 살피는 한편 얼른 우리를 안으로 끌어 들였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우리 셋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향으로 안내되었는데
그 곳은 화려하고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당하게 우아하고 세련된 맛을
풍기는 응접실이었다.
그곳 가운데 마련된 푹신해 보이는 천 소파에 앉으려는데 나는 이상하게 뭔가가
자꾸 신경을 건드리는 걸 느껴 편하게 앉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응접실을 왔다갔다
하며 뭐가 내 신경을 거스리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러자 나와는 달리 편하게 소파에 자리잡은 엘라임이 의아하게 날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 뭐가 잘못 됐어?”
“아뇨… 잘못된 것은 없는데… 거참…”
응접실을 한바퀴 삥 돌아보았지만 결국 신경이 거슬리는 원인을 알아내지 못한
나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아, 자꾸 뭔가가 신경을 거슬려요. 왜 그러지? 뭔가 되게 거북한데… 아까 뭐
잘못 먹었나? 아 되게 신경쓰이네…”
그러자 엘라임의 맞은 편 소파에 편히 앉아 있던 이프리트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해줬다.
“우릴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있어서 그래. 그것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거 같은데
너무 신경쓸 필요 없으니까 편하게 앉아라.”
이프리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였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태평하게 ‘아 그렇습니까?’
하고 앉을 수가 없었다.
“에에? 우릴 지켜보는 시선이라고요? 그럼 지금 우리가 감시 당하고 있단 말인가요?”
“둔하기는… 그럼 몰랐었냐? 아주 뚜렷하게 기척이 느껴지는 구만…”
한심하다는 엘라임의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울컥 하기보다는 놀라움에 그의
옆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오오, 그런 것도 느낄 수 있어요? 대단해… 그런 건 오랫동안 수련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후후, 우린 보통 사람이 아니잖니.”
부드러운 이프리트의 대답이 충분히 납득이 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난 눈치 못 챈거죠?”
“멍청하니까.”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그 즉시 튀어나온 엘라임의 대답에 나는 기가 팍 죽었다.
“으윽…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다니… 우웅… 정말 난 둔한가요?”
이프리트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싶어 그를 쳐다보자 그가 난처한 듯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글쎄다… 넌 우리와 다르니 뭐라고 단정하기가 어렵구나. 하지만, 보통 인간에
비하면 예민한 거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래도 위로해주려고 하는 이프리트의 말을 엘라임이 가차없이
잘라버렸다.
“내 기운을 이어받은 거에 비하면 둔한 거야.”
“윽… 너무해요.”
내가 더더욱 기가 죽어서 웅얼거리자 이프리트가 내 편을 들었다.
“맞아. 너무하잖아? 우리랑 비교하면 안돼지. 내가 보기에는 보통 인간에 비하면
훨씬 뛰어나구만.”
“하찮은 인간이랑 어떻게 비교를 해?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하지만, 저 녀석이
둔한 건 사실이야. 아, 글쎄 처음에 여기 데려왔을때 어땠는줄 알아? 아무것도
할 줄 아는게 없어가지고…”
엘라임의 입에서 내가 이 곳에 처음으로 와서 있었던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그래요. 나 못났어요. 그러니까 그만 하자구요. 그건 그렇고 왜 우릴 감시하는
거죠? 우린 자기들을 도와줬는데…”
기껏 화제를 돌리려고 했는데, 엘라임은 이런 나의 의도를 철저하게 뭉개버렸다.
“거봐, 이 녀석이 이렇게 멍청하다니까. 인석아, 그건 인간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나라도 알겠다.”
엘라임이 계속 날 면박주자 이프리트가 나서서 날 옹호해줬다.
“아이고, 그만 좀 해. 성격 하고는… 이 아이는 아직 세상 경험이 없잖아? 우리야
오랜 세월을 살았으니 금방 눈치 챌 수 있는 거고.”
그렇게 엘라임에게 한 소리 해준 이프리트는 나에게 시선을 돌려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아무래도 이들은 인간들 관점으로 봤을 때 떳떳이 드러내놓지 못할 일을 하니까
우리가 도와줬다고 해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이상 조심하는 거지. 왜 인간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라는 말도 있잖아. 혹시라도 우리가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프리트는 거기에서 말을 끊었지만, 나는 그 뒤에 올 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한마디로 수 틀리면 우리를 없애려는 거 아닌가?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테지만, 나는 그들이 괜히 괘씸해졌다.
원래 그 은발의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이 별로 맘에 안 들었을뿐더러, 기껏 도와
줬더니만 – 물론 처음부터 그들을 도우려 했던 건 아니었지만… – 이렇게 감시를
해서 사람 신경을 건드리니 말이다.
‘이거 이거 도와준 사례를 한 몫 단단히 받아내야겠는 걸?’
내가 그렇게 단단히 마음 먹고 있는데 우리가 있는 응접실의 문에 정중하게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들어오라는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이 달칵 열리며 예의 그
맘에 안 드는 은발머리의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 메이드 복을 입은 아가씨가 은쟁반에 도자기로 된 찻잔 세트와
간단한 다과를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실례 했습니다. 중요한 손님을 너무 기다리시게 한건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는 아까의 시커먼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있었는데 짙은 파란색 바지와
옅은 하늘색의 얇은 셔츠가 정말 기분 나쁘게도 녀석에게 잘 어울렸다.
하여간 한번 나에게 기분 나쁘게 낙인 찍힌 녀석이라 무엇을 해도 내 맘에 안 들었다.
180은 훌쩍 넘는 키에 – 왜 일케 모두 다 키가 큰 건지 모르겠지만… – 호리호리한
몸매, 허리까지 늘어진 부드러운 은발 머리, 거기에 나보다는 쬐께 못하지만
일반 인들에 비하면 무지 좋은 깨끗하고 윤기가 흐르는 피부,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보고 또보고 아무리 봐도 잘생긴 녀석이었다.
‘생긴거만 따지면 조엘보다 더 잘생겼잖아? 흐음, 하지만 남자다운 거는 조엘이
한 수 위야. 저 녀석은 남자다운 거보다는 쉽게 보지 못할 능구렁이 같은 기운이
풍겨.’
하지만 그 녀석과 깊게 연관하고 싶어하지 않는 나로써는 그가 능구렁이던, 비단
구렁이던 그냥 도와준 사례비만 넉넉하게 챙기고 난 뒤 헤어질 마음이었으니 상관
없는 일이었다.
‘아, 아니다. 돈을 두둑하게 받아내는데 지장이 있으려나? 안 주려고 머리쓸 테니까
말야. 으음… 상관 없는게 아닌데?’
내가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그 은발의 녀석은 소파 중앙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메이드 차림의 하녀가 우리 앞의 탁자 위에 자신이 가져 온 것을 내려 놓았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응접실에 있는 이들은 나와 두 정령왕, 그리고 지금 막 들어온
그 은발 녀석 이렇게 넷 뿐인데 하녀가 내려놓은 찻잔의 숫자는 다섯인 거였다.
‘어라? 그럼 이 하녀도 같이 마신다는 건가?’
내가 이렇게 의아하게 생각 할 무렵 다시 응접실 문에 누가 노크를 하더니 그 사람
또한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딸깍 열고 들어왔다.
‘뭐, 뭐야… 여긴 왜 이렇게 미남들이 많은 거지?’
그 또한 남자였다.
그는 어깨를 조금 넘는 밝은 갈색의 생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은발 머리 녀석보다는
약간 작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다.
얼굴은 은발 머리 녀석 못지않게 잘생겼는데 그 보다 약간 더 갸름해서 중성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풍겼다.
그리고…
‘안경? 헤에, 이 세계에도 안경이 존재한단 말야?’
왼쪽 눈에 외알 안경을 차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는 얼굴은 나보다 대충
3, 4살 정도 많아 보이는데 안경 때문에 더 나이가 많이 들은 듯한 인상을 풍겼다.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보인 그는 고개를 들자마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실례가 안 될 정도로 나와 두 정령왕을 살펴 보는 거였다.
‘오옷, 참모 타입의 남자야. 머리가 좋아보이는데? 그럼 나머지 찻잔은 이 사람을
위한 거였나?’
그가 들어오자 은발의 남자가 우리에게 소개 했다.
“저의 가장 절친한 친구 입니다. 제가 도움을 받은 분들을 모시고 왔다고 했던
같이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말씀은 들었습니다. 제 친구를 도와주셨다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온 그는 은발 머리 남자의 맞은 편에
앉았다.
덕분에 그의 가까이에 있게 된 나는 그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어라? 이 남자…’
그에게서는 약간 진한 바람의 정령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헤에, 정령사였구나. 바람의 정령하고… 음… 희미하지만 땅의 정령 기운도 느껴져.’
내가 그 남자를 새삼스럽게 살피는데 은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드시지요.”
그러면서 그가 먼저 붉으스름한 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래 나도 얼결에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는데, 당연하겠지만 엘라임과 이프리트는
손도 안 대었고 그 밝은 갈색 머리 남자 또한 찻잔에 손을 안 대는 거였다.
그러자 차 한 모금 마신 은발머리 남자가 찻잔을 내려 놓으며 싱긋 웃었다.
“훗… 조심 성이 많으신 분들이시군요. 독이라도 탔을까봐 경계하시는 겁니까?
의심을 풀어드리기 위해 제가 시범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한 모금 마신 상태였다.
‘에구… 뭐, 한 모금이라면 괜찮겠지… 중독 되더라도 아버지랑 아저씨가 어떻게든
해줄테니…’
내가 이렇게 태평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 그 은발 녀석 못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띈 이프리트가 대꾸했다.
“그런 경계는 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런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죠.”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 폼이 네 볼 일을 보라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엘라임과 이프리트는 나 때문에 여기와 앉아있는 거지 이 곳에 올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은발의 녀석은 이런 이프리트의 말을 달리 해석한 모양이다.
“호오, 그럼 술을 즐기시는 모양이군요. 그걸로 대접해 드릴까요?”
폼을 보아하니 정말로 그럴 거 같아서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됐네요, 그런거 별로 관심 없으니까. 나는 단지 당신이 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따라 온 것 뿐이니까.”
처음부터 내가 반말로 나가자 밝은 갈색 머리 남자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하지만, 난 꿀릴게 하나도 없었다.
먼저 반말을 한 건 은발 머리 녀석이었고,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좋은 감정 없는
녀석에게 존대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녀석들이 기분 나빠봤자 뭘 어쩌겠는가?
이렇듯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당당하게 나갈 수가 있는 거다.
이프리트나 엘라임이 가만히 있고 내가 나서서 이 곳에 온 용건을 이야기 하자
은발머리의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는데 그 눈은 맨 처음 녀석을
만났을 때의 장난기라고는 하나 없이 냉정, 침착, 치밀한 기색이 가득 들어 있어
나는 솔직히 좀 놀랐다.
“호오… 그러니까 나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야?”
목소리는 능글맞고 입가에는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상체를 내밀고
두 팔꿈치를 무릎 위에 댄 채 깍지 낀 양 손으로 턱을 바친 녀석의 모습은 절대 물렁하고
만만한 녀석이 아니라는 오로라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움츠러든 건 아니었기에 나도 마주 씨익 웃어주며 대답했다.
“당신 자체가 아니라 당신의 상황에 관심이 있다는 거지.”
‘저 녀석에게 밀린다는 건 내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지.’
‘저 녀석에게 밀린다는 건 내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내 나름대로 치열한 말싸움을 할 거란 예상에 단단히 마음먹고
있는데 허망하게도 날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싱긋 웃으며 숙였던 상체를 피더니만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등을 대고 다리를 턱 꼬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거기에 한 술 더 떠 무지 아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쳇, 이 외모에 안 넘어오다니… 역시 넌 여자가 아니지?”
“저게 주글라고~!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거의 반사적이라고 할 만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내 바로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이 흔들렸지만, 다행이 넘어지지는 않았다.
나의 이런 강한 반응에 은발 머리 녀석은 약간 과장되게 화들짝 놀라며 사과
했다.
“아앗, 미안, 미안… 네 아픈 곳을 찌를 줄은 몰랐는데? 정말 미안해…”
이것도 사과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안 미안한 표정으로 몇번이고 사과해봤자 놀리는 걸로만 보일 뿐이었다.
물론 저 녀석이 일부러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냐, 너. 지금 나에게 시비 거는 거야? 정말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네?”
녀석의 행동에 더더욱 열이 받은 나는 한 술 더 떠서 다리 하나를 탁자위에
올려 놓으며 여차하면 탁자를 뒤엎을 생각으로 녀석을 노려보자 녀석이 얼른
두 손을 내저었다.
“이런, 이런… 사과 했잖아. 다시는 안 그럴테니 진정 하라고. 너도 싸우러 온
건 아니잖아?”
‘돈 받으러 왔지…’
녀석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에 나는 탁자에서 다리를 내리고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지만 녀석을 향해 한 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네 녀석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냥 싸우는 수도 있는데?”
“하하하, 무서운데? 앞으로는 조심하지. 자, 그럼 내가 아까 왜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그가 본론으로 들어갈 것 처럼 보이자 나는 녀석을 노려보는 걸 그만두고 조용히
그의 입에서 나올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아, 그래, 아까 여러명이 같이 있는 걸 봤으니 나 혼자 난리쳤다고 해도
믿지는 않겠지?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속해있는 단체는 노예매매상만 집중적으로
노리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지.”
“노예매매상만 터는 도둑 집단이라고?”
나는 역시… 란 생각에 불쑥 물었는데 내 말에 은발 녀석이 인상을 약간 찡그렸다.
“도둑이라…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듣기는 좀 그렇군. 그러나 우리가 야밤에
몰래 녀석들의 본거지를 터는 건 이 나라가 노예 매매를 합법적으로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지, 노예 매매가 옳은 건 아니잖아? 특히나 조용히 잘 살고 있는 다른 종족의
사람들을 강제로 납치, 혹은 끌고 와서 노예로 만드는 것은 더욱 더.”
“헤에, 그럼 너희들은 그렇게 노예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야?”
녀석의 말에 ‘의적’이란 단어를 떠올리며 묻는 내 말에 은발 녀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들은 아니야. 우리는 단지 이종족들을 구해줄 뿐이야.”
“엥?”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는 날 바라보며 녀석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사람들도 가끔 구하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일부 사람들에 불과해.”
“그게 무슨 소리야? 노예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어? 모두 기회만 있으면
도망치려고 하지 않겠어?”
내 말에 은발 녀석이 피식 웃었다.
“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네 녀석에게 설명해 봐야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예상에게서 탈출해봤자 먹고 살 길이 막막한 녀석은 오히려 노예로 있기를
원한다고. 여자인 경우는 특히나… 노예로 있는다면 힘들 지언정 먹고 살 수는
있으니까. 게다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으면 한번 탈출을 했다 해도 다시
붙잡히는 경우가 허다하거든. 그러니 인간은 대부분 노예로 남아있길 원한다고.”
그의 말에 나는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걸 느꼈다.
“설마… 아무리 먹고 사는 길이 막막해도 그렇지, 그래도 노예로 있길 자처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훗, 네가 믿던 안 믿던 사실인걸? 우리도 처음에는 유사 인종 구할 때 같이 사람들도
구했었지.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고 다시 잡히거나 아니면
다른 노예상에게 잡혀서 노예가 되더군.”
“그런…”
왠지 힘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 너무 냉정한 사회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착잡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는데 내 옆에 있던, 그 동안 가만히 앉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내 옆에 앉은 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을 지킬 힘이 없으면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약육강식… 이라는 거죠.”
그의 냉정한 말에 응접실 분위기가 잠시동안 차가워졌다.
이 사람은 아무래도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게 현실적인 거겠지만, 그래도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건 너무 슬픈 일 같았다.
아직 20살도 안 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렇게 차가워진 분위기를 좀 바꿔보고자 은발 머리 녀석이 좀 과장되게
활기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핫핫, 저 녀석이 좀 냉정해서 말야. 너무 신경쓰진 말라구. 어쨌든 우린 노예
매매상에게 잡힌 유사 인종들을 구출해내서 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돌려
보내는 일을 하고 있어.”
녀석의 말을 들어보면 녀석이 속한 집단이 꼭 의적의 집단 같았지만, 나에게
미운 털이 박힌 녀석이 정의로운 – 물론 법을 어기는 거지만… – 일을 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아서 내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자 그가 삐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핫핫, 물론… 조금 댓가는 받고 있기는 하지…”
“조금?”
내침김에 더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묻자 녀석이 다시 삐질 웃으며
말했다.
“핫핫… 그러니까… 우리 집단을 운영하는 정도는… 물론, 좀 풍족하게…”
“훗, 챙길 건 다 챙긴다는 소리네?”
녀석이 오로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도가 아니라는 걸 알자 무지 기분이 좋아진
내가 생긋 웃으며 말하자 은발 녀석이 마주 생긋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설마 날 정의의 사도로 생각한 거야? 난 이래뵈도 계산은
철저한 놈이라 이득이 없는 일에는 안 움직여.”
“후후, 그렇지?”
녀석의 말에 더욱 더 기분이 좋아진 –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생각하니 무지 기분이 좋았다. –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은발의 녀석이 더욱 더
진한 미소를 씨익 지어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 아까 보니까 상당히 강한 정령사던데 우리 집단에 들어오지
않겠어?”
“에에? 내가?”
나를 가르키며 눈을 둥그렇게 떠 보이자 은발의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옆에
앉아 있던, 두 정령왕을 바라보았다.
“두 분도 같이 들어와주시면 더욱 좋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 정령왕은 한꺼번에 입을 열었다.
“필요 없어.”
“미안하지만… 관심 없군요.”
그렇게 매몰차게 단번에 거절을 했건만 은발 녀석은 마치 예측을 했었다는 양
실망한 기색을 조금도 내 비치지 않은 채 수긍했다.
“뭐, 싫으시다면 강요 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 폼이 나는 자신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너는 어때? 너만이라도 들어온다면 상당한 전력이 될 거야. 네가 아까 불러냈던
그 정령… 정령사들에게 전설로만 내려오던 최상급 정령이었지?”
정령은 하, 중, 상급은 이 세계에서 활동하다보니 이쪽 세계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지만, 최상급 정령은 활동을 정령계에서 하다보니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게다가 정령왕 다음으로 불러내기도 힘든 정령이라 – 사실 상급 정령사라고 하면
7서클의 마법사와 동급으로 보기 때문에 최상급 정령을 불러내는 건 8서클에
도달하는 것으로 같이 취급 된다. – 계약을 맺는 사람도 10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
하기 때문에 정령왕과 함께 전설로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정령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녀석이 정령사들 사이에서도 전설이다
시피한 최상급 정령을 알자 나는 되게 의아했다.
“호오, 당신은 정령사가 아닌 거 같은데 어떻게 알았지? 아아…”
하지만 곧 내 옆에 앉아 있던 갈색 머리의 남자의 존재를 의식한 나는 그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정령사가 아니라 하더라도 정령사인 그의 친구가 말해주면 얼마든지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내가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를 힐끗 거리며 수긍하자 은발 녀석이 맞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저 녀석도 정령사거든. 이미 알아챈 것 같지만… 어쨌든, 어때?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물론 보수도 네 능력에 맞춰서 충분하게 지급될 거야.”
내 어떤 면을 보고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한 건지 모르겠지만, 은발 녀석은
되게 자신만만했다.
그 모습이 또 무지 못마땅했던 나는 녀석이 원하는 대답과는 정 반대되는 단어를
내뱉었다.
“싫.어.”
악센트까지 넣어가면서 말이다.
내가 이프리트나 엘라임 처럼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던지 은발 녀석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되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싫다고? 아니 왜?”
그래서 나는 녀석의 그 당황해 하는 모습을 즐겁게 구경하며 대답해줬다.
“당신 밑에서 일하는 거잖아. 그건 절대로 싫어. 나 보고 당신 명령을 들으라고?
사양할래.”
내 말에 한순간 벙 찐 얼굴을 하던 은발 녀석이 곧 이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풋, 푸하하하~~ 큭큭큭… 아하하하… 그, 그런 이유였어?”
“뭐냐, 그게 그렇게 웃겨? 아니, 그럼 그거만큼 네 제의를 거절 할 더 중요한
이유가 어딨어?”
“하하하, 맞다, 맞아. 그거 보다 더 큰 이유는 있을 수가 없지.”
무지 재미있다는 듯이 손으로 무릎을 치며 웃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아까의
기분 좋았던 감정이 싸악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냉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대답했으니까 됐지? 이만 가겠어.”
그화 함께 나를 따라왔을 뿐인 이프리트와 엘라임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갈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내 옆에 앉아 있던, 과묵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은발 머리 녀석이 나를 제지했다.
“잠깐만 기다려봐.”
힐끗 돌아보니 녀석은 하도 웃어서 흘러 나온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욱 더 아니꼬왔던 나는 배배 꼬인 어조로 물었다.
“뭐냐, 너?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어?”
그러나 은발 머리 녀석은 이런 내 배배꼬인 음성에 전혀 개의치 않고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거였다.
“물론, 너 같은 능력자를 그냥 놓친다는 건 너무 아깝잖아?”
아주 시원한 어조로 말한 녀석은 거기에 살짝 윙크까지 곁들이는 거였다.
마치 여자를 꼬시려는 것 처럼 말이다.
아마 녀석에게 악감정을 가지지 않은 보통 여자라면 얼굴을 붉힐 만한 모습이었지만,
녀석에 대한 악의로 똘똘 뭉친 나는 단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내 능력을 높이 봐주는 건 고맙지만, 아무래도 네 녀석 밑에서 일하는 건 싫다구.”
그러자 은발 녀석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다시 한번 제안했다.
“좋아. 밑에서 일하는게 싫다면 일을 의뢰하는 방식은 어떨까? 나는 너에게 일을
부탁할 뿐, 그 일을 하는 모든 과정에서 전혀 터치하지 않겠어. 물론 네가 요청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도와줄테지만 말야. 그리고 보수는 일을 끝낸 후에
흥정으로 결정하는 거야, 어때?”
녀석의 입장에서는 꽤 많이 양보하는 듯한 제안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키지가
않았다.
“그것도 싫어. 어차피 네가 나에게 일을 맡기는 식이고 내가 어떻게 하든 전혀
상관 안 하겠다고 하지만, 네가 시킬 일을 전혀 모르는 내가 나 혼자 어떻게 일을
해내냐? 어차피 네 도움을 받을 테고 그러면 알게모르게 네 지시를 따라야 하잖아.
게다가 너와는 같이 일하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아.”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세계는 물론 이 도시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이 곳에 와서 교육을 받은 거라고 해도 다른 나라의 수도에서 겨우 6개월, 그것도
저택에 콕 쳐박혀서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렇게 좋은 제안을 해줘봤자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는 오히려 부담만
될 뿐이었다.
차라리 내 입장에서는 아까처럼 녀석의 밑에 들어가는 게 더 좋은 제안이지만, 녀석의
밑에 들어가는 건 무지 싫으니 어차피 녀석의 제안은 나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그렇게 내가 다시 한번 거절하자 녀석은 포기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 했다.
“후우… 그래… 뭐, 정 내키지 않는 다면 하는 수 없지. 하지만, 정말 아쉽군.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야.”
되게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하는데 나는 거기에다 대고 ‘그럼 우리는 갈테니까
우리가 도와준 사례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맘에 안 드는 녀석이라고 해도, 내 능력을 높이 사서 자기 딴에는 좋아 보이는
제안을 두번이나 했는데 나는 그걸 단칼에 거절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속으로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며 나는 녀석에게 작별을 고했다.
“자, 그럼 볼 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볼께. 다시 만나면 인사는 해줄게.”
그러자 이 은발 녀석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이상하게 대꾸하는 거였다.
“말은 고맙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일은 아마 없을 거야.”
“뭐? 으힉~!!”
녀석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으려는 찰나, 일어났을 때
내 옆으로 와 있었던 이프리트가 정말 번개 같은 속도로 내 팔을 잡아서 날 자신의
곁으로 끌어 당기는 거였다.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런 질문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전에 내 목 바로 옆을
샥~! 하고 지나가는 어떤 물체 때문에 쏙 들어가 버렸다.
얼른 고개를 돌려보니 내 옆에 앉아 있던 그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이 어느새
나에게서 훌쩍 멀어진 채 손가락 사이야 폭이 손가락 굵기 보다 약간 더 큰 단검을
끼운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냐…”
내가 무지 당황한거에 비해 되게 태연하고 침착한 엘라임이 덤덤한 어조로
그 은발 녀석을 향해 물었다.
그러면서도 내 옆으로 다가오는 폼이 여차 하면 날 보호하겠다는 태새였다.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응접실 문이 콰당 하고 열리면서 눈을 제외한 온 몸을 시커먼
옷으로 감싼 시커머스 십여명이 우르르 달려 들어오는 거였다.
“이게 무슨 짓이야? 기껏 도와준 은인에게 이럴 수 있는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해치려고 하는 녀석들의 태도에 너무 기가막힌 내가
은발 녀석을 노려보며 외쳤지만, 녀석은 내 말에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생글 생글 거리며 대꾸했다.
“우리를 도와준 은인이라 살 기회를 주기 위해 제안까지 했잖아. 내가 무척 양보하면서
말야… 그런데도 그 제안을 거절한 건 바로 너야. 나도 무척 아쉽다고.”
“뭐, 뭐시라?”
너무 기가 막혀서 말까지 더듬는 나에 비해 은발 녀석은 너무나 얄미우리 만치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거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이 나라의 법에 접촉되는 행위를 하고 있는데다, 말은
안 했지만 우리에게 원한 가진 녀석들도 많아서 말이지. 우리 얼굴을 알고 하는
일도 알게 된 이상 너희들을 고이 보내줄 수가 없어. 나를 원망하고 저주해도 좋으니까
얌전히 죽어만 줘.”
그래서 나도 녀석을 마음껏 비웃어줬다.
“하, 정말 바보 아냐? 너 우리를 너무 얕보는 거 아니냐? 나만 해도 최상급 정령사라고.
내 힘만으로도 여기를 탈출하는 건 물론 이 집을 다 부셔 버릴 수도 있다고. 그런데
우리를 죽이겠다고?”
그러자 내 말에 녀석은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여유만만한 얼굴로 피식 웃어 보였다.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겨우 매직 미사일을 막지 못해 쩔쩔맨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익~!!”
맞는 말이었기에 내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이빨만 빠드득 가는데 녀석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우리는 미안하지만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우리가 아무런 준비 없이 너희를
여기로 불러 들였을 거라고 생각해?”
“뭐? 무슨…”
그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내가 혹시 뭔가를 놓친건 아닌지 몰라 주춤 거리며 사방을
살펴 보았지만, 나를 비롯한 두 정령왕을 위협할 만한 어떤 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있다면 오로지 우리 눈앞에서 무기를 들고 있는 녀석들 뿐이랄까?
“무슨 준비를 했다는 거야? 네가 말하는 준비란 저 녀석들이냐?”
그래도 혹시나 몰라 내가 은발 녀석을 향해 묻자 대답은 이프리트에게서 흘러
나왔다.
“혹시… 마법진을 말하는 거냐?”
“예?”
뜬금 없는 소리에 이프리트를 바라보니 그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이 방 전체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을 말하는 거란다. 안티 매직 쉘이라고, 이 마법진이나
마법 법위 안에 있으면 마법을 전혀 못 쓰거든.”
“정말요? 어디예요?”
그의 말을 듣고도 다시 한번 둘러 보았지만, 내 눈에는 마법진은 커녕 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내 모습이 엄청 띨띨해 보였는지 은발 녀석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설명해줬다.
“너 바보냐? 그런걸 누가 눈에 띄게 냅두겠어? 모두 가구나 장식장, 양탄자 같은
것으로 안 보이게 가렸지. 어쨌든 대단하시군요. 그런 걸 알아채는 걸 보면, 당신은
마법사이십니까?”
“마법사는 아니고… 술사라고 할 수 있겠군요.”
술사란 말은 내 마법 스승인 노만에게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술사란 태어 날 때부터 물, 불, 바람, 대지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물을 움직일 수 있으면 물 술사, 바람을 움직일 수 있으면 바람 술사로 불리는데
이들이 그렇게 물이나 바람을 움직이는 원동력 또한 마나라고 한다.
내가 물을 움직일때 엘라임에게서 받은 물의 정령 기운을 사용하는 것 처럼 말이다.
오랜 옛날 아직 마법이 많이 퍼지지 않았을 때에는 이러한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
‘술사’라는 이름으로 많이 활동을 했었지만, 마법학이 많이 퍼진 이후에는 이들이 마법에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로 인식되어 마법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세계에
스카웃(?) 하기 때문에 지금은 순수한 술사들은 보기 힘들다고 한다.
뭐, 모두 마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개발
하는 것 보다는 마법에 정진하는 것이 더 큰 힘을 얻기 때문에 순수하게 자신의 능력만
개발하는 이가 드물어 졌기 때문이다.
가끔 마법사의 길을 버린 자들 중에서 술사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정말 드문 경우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법사는 자신의 마법적 지식과 마나만 있으면 어디에서건 마법을 시전할
수 있지만, 술사들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물체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 술사라면 근처에 물이 있어야 하고, 바람 술사라면 바람이, 불 술사라면 불이
주변에 있어야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노만에게서 그러한 설명을 들었을 때 완전히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하긴 그러고보니 엘라임은 물을 다루고 이프리트는 불을 다루니 술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단지 물이 있고 없고, 불이 있고 없고에 하등 상관 없다는 것만 빼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걸 알리 없는 은발 녀석은 비죽이 웃었다.
“그러십니까? 뭐, 당신이 어떤 술사이든 상관 없습니다. 아니, 마법사였다고 해도
상관 없군요. 안티 매직 쉘 마법진이 있는 이상 이 곳에서는 어떤 마법은 물론 술법도,
정령술도 – 정령술도 기본적으로 마나를 사용하여 정령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 –
사용할 수 없을테니까요. 이 방은 오직 자신의 육체적 능력만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거든요. 그리고, 우리들은 그 육체적 능력에 자신 있지요.”
한 마디로 우리의 능력은 모두 봉쇄 되었다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에 분해 할
겨를도 없이 급히 내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으엑…”
내 가슴은 언제 볼록(?) 했냐는 듯 어느새 납작 가슴으로 돌아와 있었다.
“히잉…”
울상을 지으며 재빨리 팔짱을 껴 가슴을 가렸지만, 너무 늦은 행동이었고, 오히려 덕분에
‘갑자기 왜 저래?’ 라고 하는 듯한 시선만 잔뜩 받았다.
내가 이러는 것에는 상관 없다는 듯 은발 녀석은 잠깐 나에게 향했던 시선을
이프리트와 엘라임에게 보내더니 씨익 웃으며 최후의 말을 던지듯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작별의 시간이군요.”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듯 십여명의 시커먼스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르르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뒤로 와르르 물러났다.
그들이 채 우리에게 닿기도 전에 엘라임 주위에서는 거대한 물기둥이 소용돌이 치며
치솟아 올랐고, 이프리트의 주위에서는 거대한 화염 기둥이 화르르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작별의 시간이긴 작별의 시간이지.”
엘라임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날 돌아보았다.
녀석들을 살릴지 죽일지 결정하라는 듯 했다.
“음… 그래도 받을 건 받고 처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당장에 처리하자는 대신 어물 거리며 주저하자 엘라임이 얼굴을 찡그리며 한마디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무지 경악한 은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안티 매직 쉘의 범위 안에서 마법을 쓰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다.
안티 매직 쉘은 6클래스의 마법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서클을 가진 마법사라면
안티 매직 쉘 마법을 깨트리고 마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정령왕은 당연하겠지만 그 보다 더 윗단계의 존재들이었기에 쉽게 물과 불의
기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발 녀석은 이들이 정령왕이라는 걸 모르고 단지 술사라고만 알고
있었으니 마법진을 눈치 챘다고 해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던 거다.
이프리트는 경악하는 은발 녀석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당신들이 이 아이의
목숨을 노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눈빛이 매섭게 변하는데, 부드러운 어조로 살벌한 말을 하는게
되게 안 어울리면서도 차갑게 말하는 것 보다 더욱 더 살 떨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 보다도 이프리트의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에 헤벌죽 웃음이
나왔다.
내가 그러는 동아 이프리트는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자들을 향해 서서히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고, 천천히 올라가는 그의 팔에는 작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그의 팔을 따라 회전하면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러는 동아 이프리트는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는 자들을 향해 서서히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고, 천천히 올라가는 그의 팔에는 작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그의 팔을 따라 회전하면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뒤로 물러나!”
그 모습에 잔뜩 긴장한 표정의 은발 머리 녀석이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어디서
가지고 왔을 모를 검을 치켜들었다.
그 녀석도 호리호리해서 운동과는 거리가 먼 관리직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녀석이 치켜든 검은 보통 검보다 폭이 약간 좁은 것이었는데, 그의 가슴까지
올라온 검 끝으로 부터 천천히 희미한 하얀 빛무리가 나타나 검을 감싸기
시작했다.
“어라? 검에서 빛이 나네?”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모습에 두 눈이 휘둥그래진 내가 중얼거리자 이프리트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검기라는 거란다. 검술에서도 높은 단계에 이른 자만이 사용할 수 있지.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야.”
‘헤에, 저게 검기?’
내가 그렇게 신기해 하는 동안 이프리트는 이제는 커다란 화염이 된, 자신의 손바닥
위로 모인 불덩어리를 마치 장난감 공 던지듯 가볍게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갑자기 엘라임이 나서서 이프리트의 앞을 가로 막는 거였다.
“저 녀석들은 내가 처리한다.”
“뭐?”
황당해하는 이프리트를 힐끗 돌아본 엘라임은 다시 은발을 비롯한 잔뜩 긴장한
녀석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 놈들은 내 아이를 해하려 한 놈들이아. 그러니 내가 처리하겠어. 너는 물러나
있으라고.”
절대로 양보 못한다는 듯한 단호한 엘라임의 말에 이프리트는 피식 거리며 화염을
거두고 내 옆으로 물러났다.
“그래, 그래. 내가 물러나지.”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더니 눈을 살짝 찡긋 하는 거였다.
그래서 나도 그냥 피시식 웃어줬다.
앞으로 나선 엘라임은 녀석들을 향해 한번 코웃음을 날려주고는 오른 팔을 옆으로
들어 살짝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엘라임의 손짓에 따라 아까 엘라임이 자신의 힘을 나타냈을 때 천장에 닿을
정도로 치솟았던 물기둥이 옆으로 쫘악 늘어나더니 마치 폭풍우가 칠때의 그 거대한
파도처럼 녀석들을 덮쳐가는 거였다.
‘오옷, 저것은 웨스트모어랜드 후작가의 성에서 보여줬던 여러명을 한번에 후려치는
비법….’
몇몇의 몸 놀림이 빠른 자들은 재빨리 문 밖으로 튀어 나가거나 아니면 소파 같은
가구 뒤로 숨어 자신을 덮치는 재앙을 피해냈지만, 미처 반응 못한 몇몇의 인물들은
거대한 물결에 정통으로 맞아 튕겨 나가다가 벽에 부딪혀버렸다.
콰앙~!!
“크어억~!!”
“커윽~!”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커다란 통나무로 문을 부수는 것만 같은 큰 소리가
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에구… 아프겠다…’
그 와중에 몸을 피한 몇몇의 인물에 포함된 밝은 갈색 머리의 남자는 물결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훌쩍 소파 위로 뛰어 올라 그 소파의 등받이 부분을 재차 박차고 다시
한번 허공으로 날아올라 물결을 훌쩍 뛰어 넘었다.
그리고 그것 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채 밑으로 떨어질 때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단검 세개를 한꺼번에 엘라임을 향해 던지는 거였다.
“위험~!!”
엘라임은 자신에게 단검 세개가 쇄도해 온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척까지
다가왔음에도 태연한 얼굴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래 곁에서 보고 있던 내가 더 다급하여 뭘 어떻게든 하려고 몸을 움직이려 하는데
그걸 이프리트가 막았다.
“괜찮아, 괜찮아.”
“예?”
단검이 코 앞까지 날아왔는데도 가만히 있는 것이 무엇이 괜찮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막 이프리트를 향해 항의하려는 찰나, 결국 단검은 엘라임을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엘라임을 통과하여 마루 바닥에 꽂히고 말았다.
“엥?”
그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멍청해진 나를 향해 이프리트가 다정하게 웃으며
설명해줬다.
“훗훗훗,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힘이 통하지 않는단다. 단지… 저런 마나를 머금은
힘이라면 몰라도…”
그러면서 이프리트가 가르키는 다른 한쪽의 허공에서는 흰 빛으로 감싸인 검을
엘라임을 향해 겨눈 채 떨어지는 은발 머리의 녀석이 있었다.
“오옷, 시간차 공격~!!”
그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의 공격은 아마도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이고, 이번 은발 머리의
녀석의 공격이 진정한 공격일 터였다.
친구라더니만 호흡이 척척 맞는 녀석들이었다.
“흥!”
그러나 엘라임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단검을 신경도 안 쓴 것처럼, 매섭게 달려드는
은발 녀석을 향해서도 힐끔 시선만 던지고는 코웃음만 날려주는 거였다.
대신, 은발 녀석이 치켜든 검이 엘라임에게 닿기도 전에 바닥에 잔뜩 고인 물에서
갑자기 하나의 물줄기가 치솟아 오르더니 그대로 허공에 무방비로 있는 은발 녀석의
복부를 꿰뚫어 버렸다.
“커윽~!!”
덕분에 엘라임을 노렸던 그의 검은 엘라임으로부터 약 한뼘 정도 떨어진 허공에서
딱 멈추더니 그대로 밑으로 떨어졌다.
“와우…”
피 튀는 그 모습에 내가 다시 한번 눈쌀을 찌푸리는데 엘라임은 자신의 발 밑으로
떨어진 녀석을 향해 무정하게도 물줄기를 다시 한번 쏘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물줄기가 은발 녀석에게 닿기도 전에 저쪽에서 단검이 날아와 물줄기를
튕겨내었고, 그 틈을 타서 은발 녀석은 자신의 복부를 움켜진 채 황급히 몸을 굴러
그 자리를 피해냈다.
“아앗, 물줄기를 튕겨 냈다?”
“검기를 머금은 단검이었거든.”
“헤에…”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 또한 검기를 다룰 정도의 경지에 다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자 나는 녀석이 다시 보였다.
하기야, 여차하면 우리를 해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를 상대 할 사람을 아무나
보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마도 저 밝은 갈색 머리와 은발 녀석이라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를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여겼을 거다.
밝은 갈색 머리가 있는 쪽까지 몸을 피한 은발 녀석은 비틀 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노려보았다.
그가 비틀 거리자 시커먼스 한 사람이 얼른 부축하려고 했지만, 은발 녀석이 자존심
상하는지 뿌리치고 자신의 힘으로 똑바로 섰는데, 손으로 감싸쥐고 있는 복부에는 피가
흥건했고 입에서도 가느다란 피 한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훗… 이건 정말 예상 외군요. 이렇게 강한 분들인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면
조금 더 철저하게 준비를 했을텐데…”
“뭘 어떻게 준비하건 소용 없었을 거다.”
엘라임의 냉정한 대답에 은발 녀석이 입술 끝을 올리며 비죽이 웃었다.
“훗, 그렇습니까? 아주 자신만만 하시군요. 하지만, 저도 자신있게 말씀 드리겠는데,
당신이 여기 있는 우리들을 처리한다 하더라도 쉽게 이 저택을 빠져 나갈 수는 없을
겁니다.”
“웃기는군. 하프 엘프 주제에 죽기 전에 발악이라도 한번 해보겠다는 거냐?”
엘라임의 말에 은발 머리 녀석과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치켜
떠졌다.
하지만, 그들은 곧 엘라임이 범상치 않은 자였기에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거라
여겼는지 곧 침착함을 되찾았지만 나는 달랐다.
“에엑? 하프 엘프? 저 사람들이 하프 엘프 였어요?”
나의 놀람에 찬 외침에 엘라임은 날 힐끗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프리트는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아니 모두는 아니고 저 은발을 하고 있는 이와 밝은 갈색 머리의 이만이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단다. 몰랐니?”
“예에… 와… 하프 엘프래. 진작 좀 말해주지 그랬어요?”
내가 무지 신기해 하자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의 눈초리에 분노의 기색이 감돌더니
가시가 잔뜩 돋힌 말투가 튀어 나왔다.
“하프 엘프가 그리도 신기한가? 미안하지만 우리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예전에 그것 때문에 맺힌게 많았는지 원한 가득한 그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서 사과하려고 입을 열었다.
“에엣,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고… 나는 나 말고 나와 같이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이를 만난 게 너무 반가워서…”
하지만 나는 곧 녀석들의 냉담한 눈초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안타깝군. 너도 하프 엘프였을 줄이야… 하지만,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은발 녀석의 냉담한 말에 나는 힘 없이 한숨을 내쉬는데 엘라임이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아.”
“예?”
“이 녀석들은 안 봐줄 거다. 저번의 그 녀석들이야 너에 대한 살기가 없는데다 네가
원하지 않으니 봐줬다만, 이 녀석들은 널 해하려 한 놈들이다. 하프 엘프던, 그냥 엘프던
그 댓가를 치르게 할 거다.”
냉정하고 단호한 엘라임은 나에게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든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매서운 기새를 뿜어냈다.
그 기세가 얼마나 강했는지 응접실 안에 있던, 아까 엘라임의 물결 공격을 겨우 겨우
피해냈던 유리로 된 제품이나 도자기등의 깨지기 쉬운 장식품들이 와장창 깨져 버렸다.
아마 유리창이 있었다면 그 또한 견디지 못하고 모두 깨졌을 거다.
그리고 앞에 있는 녀석들도 엘라임의 기세를 견디지 못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는 녀석들도 있었다.
‘아아…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는 건 싫은데… 그렇다고 엘라임을 말리기도
그렇고… 다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고 외면해야 하나?’
그나마 여기가 바다 속도 아니고, 엘라임이 이 곳에서 힘을 자유 자재로 사용할 수
없기에 망정이지 만약 저번에 나에게 정령의 기운을 깨우치게 한다고 힘 쓸때 처럼
기운을 내뿜었으면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을 거다.
내가 이렇게 갈등하는 동안 엘라임이 끝장을 보려는 듯이 녀석들에게 한발 다가갔다.
그러자 그때 뒤로 한 걸음 물러났을 뿐 엘라임의 기세를 정면으로 받아도 버텨내고
있던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이 단검을 치켜들더니 기합성을 지르며 엘라임에게
달려들었다.
“이야아압~!!”
“흥~!!”
하지만 그렇게 온 몸을 던지며 해오는 공격도 엘라임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는지
엘라임은 코웃음을 치며 물 줄기 하나를 녀석에게 쏘아 보내는 것에 그쳤다.
어차피 그 물줄기는 엘라임의 조절을 받아 유도 미사일 처럼 녀석이 어디로 피하던
끝까지 쫓아갈 거였다.
역시나, 녀석이 자신을 향해 쏘아져 오는 물줄기를 얼른 고개를 숙여 피하자,
녀석의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갔던 물줄기가 다시 머리를 틀어 녀석의 등을 향해
달려 들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은발 머리를 비롯한 시커먼스들이 그 모습에 경악성을 토하자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은 자신의 뒤에서 물줄기가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얼른 바닥을 굴러 다시 한번 피해냈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나서 엘라임에게 달려드는 거였다.
하지만 그는 채 몇 발자국도 가지 못해서 그의 허벅지를 물줄기에 꿰뚤려야 했다.
그가 서 있는 바닥은 엘라임이 불러낸 물천지였기에 물줄기는 어디에서든 솟아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크윽~!!”
그러나, 그때 그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 뱉으며 힘 없이
옆으로 쓰러지는 척 하면서 엘라임을 비롯한 나나 이프리트가 경계를 거둔 틈을
타서 번개같은 솜씨로 단검을 던졌다.
그런데, 정말 황당하다고 해야 할지, 놀랍다고 해야 할지 그 단검은 엘라임을 향하여
날아간 것이 아니라 그와 좀 떨어져서 사태를 바라만 보고 있던 나에게 날아왔던
것이다.
“으엑~!!”
내가 단검이 나에게로 날아왔다는 걸 알아차린 건 이프리트가 얼른 날 잡아 자신에게
끌어당기고 날아오는 단검을 불꽃으로 휘감아 멈추게 해 바닥으로 떨어뜨린 뒤였다.
“어우…”
불에 타 시커멓게 그을린 채 떨어진 단검을 바라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고 있는데
그 순간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왔다.
“커억~!!”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엘라임이 열받아서 그 갈색 머리 녀석의 옆구리를 직접
발로 차서 날렸던 것이다.
얼마나 세게 찼는지 녀석은 말 그대로 공중을 붕 떠서 녀석의 편이 있는 곳에 가서
털썩 떨어졌다.
그나마 시커먼스 녀석들이 재빨리 몸을 날려 녀석을 받아내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바닥에 그대로 나가 떨어질 뻔 했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죽여주지.”
엘라임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십개의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녀석들이 어찌 할 틈도 안 주고 한꺼번에 처리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이제야말로 정말 시체를 보게 되는 구나… 하며 걱정 반 불안 반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 절대 절명의 순간 고운 미성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날아왔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응접실의 거의 떨어져서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문을 통해 가냘픈 인영이 손살같이 뛰어 들어와 엘라임의 앞에 엎드렸다.
“부탁입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밝은 녹색의 길다란 생머리를 가진 그 아름다운 이는 머리카락을 뚫고 나올 정도로
길고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었다.
“엘프?”
놀람에 찬 내 물음에 확인이라도 해주는 듯한 엘라임의 물음이 곧바로 들려왔다.
“뭐냐, 엘프여. 내 앞을 가로막다니, 너도 죽길 원하는 건가?”
“감히 제가 위대한 존재의 앞을 어찌 가로막겠습니까? 그러나 잠시만, 잠시만 아량을
베푸시어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엘라임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던 엘프는 다시 한번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갑자기 나타난 처음 보는 엘프가 다짜고짜로 애원조로 나오니 의아하기도 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호기심도 있었기에 나는 엘라임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뭔지는 모르지만 한번 들어보는게 어때요?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뭔지는 모르지만 한번 들어보는게 어때요?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엘라임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작게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쯧쯧, 무르긴… 그런 건 엄마를 그대로 닮았군…”
하지만 혹시나 가만 있다가는 은발 머리 녀석이나 혹은 그 동료 녀석들이 기회를
엿봐 도망갈까봐 문에다가 두꺼운 물의 막을 쳐 놓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라.”
엘라임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 엘프는 너무 고마워 하면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아, 저기 말 하려는데 미안하지만… 이 분이 누군지 아세요?”
자꾸 엘라임보고 ‘위대한 존재, 위대한 존재’라고 하는 그 엘프의 모습에서 나는
그 엘프가 정말 엘라임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엘프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 또한 엘프의 피가 흐르는 자군요.”
잠깐 보는 것 만으로도 척 알아채자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오옷, 아니,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러자 항상 나에게 친절한 이프리트가 이번에도 나서서 다정하게 설명해 줬다.
“엘프는 다른 종족 보다 육감이 상당히 발달해 있단다. 상대방이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있어도 느낌으로 이 사람의 기분 상태를 알 정도거든. 그렇기에 엘프 앞에서는
거짓을 말하지 못하지. 거짓을 말한다는 걸 느낌으로 알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엘프를
진실의 종족이라고도 한단다. 엘프들 사이에서는 거짓을 말해봤자 금방 알아채니
거짓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다보니 항상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예 엘프의
문화가 되어 버렸지.”
“아, 그래서 나에게 엘프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고, 아버지의 정체도
알아챈 건가요?”
이프리트의 설명에 내가 다시 한번 묻자, 이번에는 그 엘프가 대답했다.
“아무리 그런 감각이 발달했다고 해도 자세하게 느끼는 건 아닙니다. 단지 막연하게
느낄 뿐이지요. 당신의 몸에 엘프의 피가 흐르는 걸 안 것은, 당신에게서 우리 엘프들
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감각이 희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에… 그럼 제 아버지는요?”
“저분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단지 저희가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라는 느낌을 받은 것 뿐이지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마도 드래곤이
아니실런지…”
그 엘프가 그렇게 조심스레 떠보면서 엘라임을 바라보았지만 엘라임은 말해 줄
마음이 조금도 없는지 고개를 휙 돌리며 냉정하게 말했다.
“네까짓게 알 거 없다.”
그러자 엘프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빌었다.
“아,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위대한 존재시여. 당신의 심기를 거스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엘라임 앞에서 조심스러운건 좋은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하자 엘라임이 짜증스러운지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래서 나는 엘라임이 뭐라고 하기 전에 얼른 나서서 그 엘프를 재촉했다.
“자자, 괜찮으니까요 본론으로 넘어 가자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러자 그 엘프도 엘라임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챘는지 얼른 본론을 끄집어 냈다.
“아, 예. 저기 그러니까… 부디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뭐? 너도 저 녀석들과 한패인가?”
엘라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그에게서 다시 매서운 기새가 폴폴 피어오르자
엘프는 두려움에 떠는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런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아따, 그만 좀 해라. 이왕 말 들어보기로 했으니 끝까지 들어보는 게 어때?
네가 무섭게 노려보니까 제대로 말도 못하잖아.”
엘라임이 무섭게 다그치자 엘프는 더더욱 움츠러들어 말을 못했다.
하긴, 나도 이제야 알아챈거지만 그 엘프는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한 두살 정도
어려보이는 애였다.
나도 엘라임이 정색을 할 때는 무서워서 말도 못 꺼내는데 저 엘프는 어떻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이프리트가 나서준 듯 했다.
“흥!”
역시나, 엘라임은 이프리트에게는 꼼짝도 못하겠는지 기분 나쁘다는 티를 역력히
내면서도 기운을 거두어들였다.
나는 엘라임이 시선을 돌리자 이프리트에게 고맙다는 눈짓을 보낸 뒤 엘프를
격려했다.
“자자, 걱정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봐요. 끝까지 들어줄테니까.”
“아, 예. 정말 감사합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푸른 숲의 엘프족인데
인간들의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혀 이 곳으로 끌려와 평생 인간들의 노리개가
될 뻔 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저들의 도움으로 풀려나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위대한 존재께서 저들을 해하신다면
그 희망이 깨질지도 모릅니다.”
“흥,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간절한 엘프의 말에도 불구하고 엘라임이 냉정하게 반응하자 그 엘프는 울상이
되었다.
“부탁입니다. 제발… 이 곳에는 저 말고도 다른 엘프들은 물론 다른 종족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와서 돌아갈
수가 없게 된다면 얼마나 절망하겠습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 잠깐만요. 궁금한게 있는데, 왜 저들이 없으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죠?
당신들은 지금 탈출 한 상태잖아요.”
엘프가 애원하는 걸 방해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의아해서 불쑥
물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대답은 저 뒤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은발 머리가 나서서 대답했다.
“이 나라를 빠져 나갈 능력이 없기 때문이야. 저들만의 힘으로는 어렵지.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간다면 노예증이 없는 엘프들은 당장에 관원들에게 걸려 노예 매매상에게
넘어가든지, 아니면 노예 사냥꾼들에게 붙잡혀 넘겨질 테니까. 이 나라가 이종족의
노예 매매를 합법한 이상, 이 나라에서 이종족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건 불가능해.
마을 하나는 손쉽게 날려버릴 정도의 능력이 있으면 모를까…”
“아… 그렇구나. 몰랐어…”
은발 머리 녀석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디 별세계에서 살다 왔냐? 다른 나라에서 왔다 해도 전 세계 사람이 다 아는
라센 국의 법칙을 모르다니… 정말 이해 할 수가 없군.”
“냅둬. 나도 나름대로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는 거야. 그런데, 너희들은 노예로
잡힌 이종족들을 구출 해주고 댓가를 받는 줄 알았더니만, 집으로 데려다주기까지
하는 거야?”
“그래, 어차피 탈출만 시켜줘봤자 열에 아홉은 모두 붙잡힐게 뻔하니까. 차라리
아예 고향까지 데려다주고 더 많은 댓가를 받는게 저들에게나 우리에게나 좋은
일이잖아.”
“헤에… 그건 그러네.”
은발 녀석의 말에 내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이에 엘프가 힘을
얻었는지 더욱 더 간절한 표정으로 엘라임에게 애원했다.
“위대한 존재시여… 제발, 제발 이렇게 부탁 드립니다. 저 뿐만이 아닌 이 곳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당신의 자비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엘프는 엘라임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결졍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엘라임은 그 엘프를 그냥 무덤덤한 눈으로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할 말은 그거 뿐?”
자신과는 전혀 상관 없다는 듯이, 소 닭 보듯 쳐다보는 그 시선에는 처음부터 그
엘프가 어떤 이야기를 하던 엘라임은 자신의 행동을 바꿀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단지 내가 부탁해서 엘프의 말을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예? 아… 예… 그러니까…”
그동안 간절히 말했던 엘프 또한 그것을 알아챘는지 절망에 가득 찬 눈으로 엘라임을
올려다보다 안되겠던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발 좀 어떻게 해달라는 그의 너무나 간절한 눈빛에 나는 뭔가 해주고 싶었지만,
갑자기 뭘 하려니 마땅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허둥대기만 할 뿐이었다.
그에 엘라임이 내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하자 잠시 멈췄던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시선을 다시 그 은발 머리 녀석 일행으로 돌렸고, 그 엘프는 이제 다 끝났다는 표정으로
처연하게 천장을 올려다봤는데, 그 순간 그 엘프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그 엘프의 하얀 뺨을 타고 내려와 턱에서 방울져 밑으로 떨어지는 그 눈물
방울을 멍 하니 바라보는 순간 내 머리 속으로 물방울 다이아몬드란 단어가 스쳐
지나갔고, 그와 함께 좋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물론… 내가 이렇게 보석을 좋아하는지도 처음 깨달았고 말이다.
“아, 그러고보니 지금 생각난건데…”
한번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다급하게 입을 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고,
엘라임 또한 자신의 행동을 잠시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또 뭔데?”
“저 말이예요, 처음 부터 이 곳에 온 이유가 저 녀석들을 도와주는 댓가를 받으러
온 거였잖아요. 그런데 저 녀석들을 그냥 없애버리면 나는 빈 손으로 그냥 돌아
가네요.”
그러면서 내 빈 손바닥을 엘라임에게 들어 보이기까지 했지만, 엘라임은 물러나는
대신 다시 은발 녀석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에 가면 그까짓 보석들 쯤이야 내가 준다고 했잖아.”
“에엣, 아버지는… 그냥 받는 거랑 댓가로써 받는 거랑 같나요? 게다가 내가 기껏
도와줬는데 그걸 그냥 허공으로 날리기는 싫다구요.”
그러자 엘라임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찡그린 얼굴로 날 돌아 보았다.
“그러면,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걸 탈탈 털은 뒤에 마음대로 하라고?”
그에 나는 무지 미안한 표정으로 애교스럽게 웃으면서 한가지 더 덧붙였다.
“에헤헤헤… 그리구요… 아버지… 제가요 나쁜 녀석들만 골라서 몽땅 털면서도 그가
누구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괴도 같은 역을 예전부터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요…”
두 손까지 모아쥐며 배시시 웃는 나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엘라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니까… 저 녀석들을 봐주라고?”
“핫핫핫, 뭐… 그래주심 고맙다는 거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젠장… 요 근래에는 안 그러더니만…’
엘라임의 기분 나쁘게 틱틱대는 버전이 갑자기 실행되었다.
팔짱을 딱 낀 채 살짝 내려깐 눈으로 날 바라보며 하는 폼이 지금 되게 기분이
안 좋은 듯 했다.
그래서 나는 엘라임의 심기를 안 건드리는 선에서 되게 조심스럽게 주저리
주저리 이유를 늘어놨다.
“아니 뭐… 그럴 이유는 없지만… 사실 말이죠… 제가 처음에 저 은발 녀석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우리는 극진히 대접 받고 집으로 돌아갈 거였으니까… 이렇게 된
데에는 제 책임도 있구요… 원래 저 녀석이 싫어서 제안을 안 받아들인 거였는데,
이 엘프의 말을 들어보니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닌거 같고요… 게다가 여기 있다는
엘프들이 가엽잖아요. 지금 얼마나 마음 졸이며 있겠어요? 집에 갈 수 있느냐 못
가느냐의 기로가 달려 있는데….”
“그래서?”
“그러니까… 제가 지금 저 은발 녀석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좀 봐주시면
안될까나… 하고…”
손가락을 배배 꼬며 힐끗 힐끗 엘라임의 표정을 살피는데 도통 엘라임의 표정은
안 변하고 그의 팔짱도 안 풀어지는 거였다.
“싫다면?”
“아… 좀 봐주세요. 만약 내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저 녀석들도 우리를 공격할
이유가 사라지는 거니까 아버지에게 무례하게 대한 걸 백배 사죄할 거 아니예요?
아버지가 한번만 봐주시면 우리는 저 녀석들의 진심 어린 사죄와 함께 덤으로
선물 까지 듬뿍 받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라고요, 예?”
“녀석들의 사과 같은 건 죽음으로써 하면 돼.”
“어우~ 아부지이~ 그리고…”
조금의 미동도 안 보이는 엘라임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무지 긴장한
채 나만 바라보고 있는 저 불쌍한 커다란 양들을 한번 힐끔 바라본 뒤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정령들의 대화법을 정말 오랜만에 사용했다.
[엄마도 하프 엘프셨다면서요… 비록 엄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엄마와 같은 하프엘프들을 해한다는 게 좀 그래요… 어차피 나에게 처음 부터 살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충분히 서로 서로 좋게 넘어갈 수도 있고요… 게다가 혹시 친척일지도 모르는
엘프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안 될까요?]
애교가 안되자 나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진심으로 부탁했다.
그러자 이 마음이 통했는지 엘라임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몸을 휙 돌려
엘라임의 물결에 쫄딱 젖고 뒤집어져 있는 소파로 다가가 발로 걷어차 휙 뒤집더니
소파에 있는 물기를 한꺼번에 빨아내 말린 뒤 거기에 털썩 주저 앉았다.
“좋을 대로 해라.”
“와앗~ 고맙습니다아~!!”
내가 두 팔을 들어올리며 환호성을 지르자 잔뜩 긴장한 채 지켜보고 있던 은발 머리
녀석을 비롯한 시커먼스들은 안심이 되자 힘이 빠졌는지 땅에 주저 앉았고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엘프가 해결 됐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즉시 엘라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호오, 역시 자식에게는 약한 건가?”
그 동안 조용히 지켜보고만 이프리트가 싱글 싱글 웃으며 다가가 엘라임 곁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말을 건네자 엘라임이 눈썹을 치켜 떴다.
“시끄러워!!”
그때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이 뚫린 배를 부여잡고 비틀비틀 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신세를 졌군. 이 빚은 나중에 꼭 갚겠다. 그리고…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
“훗훗훗, 이자는 비싸게 쳐주길 바래.”
녀석에게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그 녀석도 씨익 웃으며 내 손을 맞잡았다.
피가 잔뜩 묻은 손이라 좀 찝찝하긴 했지만… 뭐, 좋은게 좋은 거겠지.
밝은 갈색 머리 녀석과 악수를 하고 있는데 은발 녀석도 다가왔다.
“어쨌든, 이걸로 한 팀이 된건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덕분에
죽을 뻔 했으니까 말야. 다음 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목숨은 절대로 노리지
못할 거다.”
“아, 그래. 가장 중요한게 있었지? 보수는 얼마나 줄래? 그리고 아까 도와준 답례도
당연히 하겠지?”
“핫핫핫, 너도 돈 되게 좋아하는 구나?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하자고, 나중에. 지금은
죽을 뻔 했다 살아나서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까.”
내 노골적인 질문에 은발 녀석은 땀방울을 흘리면서 하하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절대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걸 다시한번 실감하며 전의를 다지던
중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녀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지금 문득 생각난 건데… 너 내가 최상급 정령사라는 거 알고 있었지?
아까 만났을 때 내가 최상급 정령을 데리고 나타났으니까.”
그러자 은발 녀석이 나를 멀뚱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런데 그게 왜?”
아무렇지도 않게 되묻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게 왜라니? 너 바보 아니냐? 내가 최상급 정령사라는 걸 알면서 안티 매직 쉘
마법진 깔아놨다고 자신만만하게 검 들고 나서냐?”
내가 무지 한심하다는 듯이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이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안티 매직 쉘을 깔아놨으니 당연히 네가 정령을 못 불러낼 줄 알았지.”
“아니, 내가 최상급 정령사라는 건 알았다며? 그럼 나에게는 그게 안 통할 거라는
건 알았을 거 아냐?”
내 말에 은발 녀석의 눈이 둥그래졌다.
“뭐어? 그게 정말이야?”
“….. 몰랐냐?”
어이가 없어진 내가 묻자 은발 녀석의 고개가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에게로 휙
돌아갔다.
그러자 그 밝은 갈색 머리의 녀석이 움찔 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왜 날 보냐? 나도 몰랐다고.”
“야, 너도 정령사잖아. 그런데 왜 그걸 몰라?”
“내가 정령사지 마법사냐? 내가 마법진에 대해 어떻게 알아? 마법을 배운 적도
없는데…”
“뭐야, 그럼 도대체 거금을 들여 깔아 놓은 이 마법진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였어?”
머리를 박박 긁으며 투덜대는 은발 녀석의 모습이 하도 안쓰러워서 나는 기꺼이
선생 노릇을 자처했다.
“아니, 넌 네가 깔아 놓는 거에 대해선 잘 알아둬야 할 거 아니냐?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깔았어?”
“이거 깔은 마법사 녀석이 드래곤이거나 마도사가 아닌 이상 힘을 못 쓴다고 했단
말야.”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하는 은발 녀석을 향해 나는 무지 무지 한심하다는 시선을
마음 껏 팍팍 내 쏘으며 말했다.
“맞아. 안티 매직 쉘은 6클래스의 마법이란 말야. 그러니 6서클 이하의 마법사에게는
통용이 되지. 하지만 7서클 이상의 마법사에게는 소용 없다고. 그리고 마도사란
7서클 이상의 마법사에게 붙여주는 명칭 아니냐? 그리고 최상급 정령사는 마법사로
치면 7, 8 서클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준 나는 입을 떡 벌린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두 녀석을
향해 확인 사살을 해줬다.
“그런 것도 몰랐냐?”
“하… 이거 참… 무식한 자가 용감한 법이라더니… 드래곤 앞에서 마법사라고 깐죽
댄 꼴이었잖아?”
한참을 멍 하게 있던 은발 녀석이 무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물론 웃다가 배가 땡기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기는 했지만…
“야, 너네 치료 안 받아도 돼냐? 하프 엘프라고 해도 배를 뚫렸는데 죽을 수도
있잖아.”
지금은 피가 멎었지만, 아까 피를 철철 흘렸던 것을 기억해낸 나는 병원, 아니 의원에게
달려가지 않고 내 옆에 멀뚱히 서 있는 녀석들을 의아해서 물었더니 녀석들이 피식
웃었다.
“괜찮아. 아까 상처가 너무 심해서 힐링 포션을 마셨거든. 게다가 우리 담당 의원에게는
빨리 가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말야…”
“힐링 포션?”
전에 어깨를 치료해주던 의원에게도 들었던 말이라 나는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밝은 갈색 머리 녀석이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아, 나도 궁금한게 있는데…. 여장이 취미야?”
“에?”
뜻밖의 말에 뜨악 해서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이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계속 입을
열었다.
“뭐… 난 남의 취향해 대해 참견할 마음도 없고, 너는 얼굴이 받쳐주니 제법 잘
어울리기는 한데… 이왕 하는거 완벽하게 가슴은 만들어 넣지 그래? 다 좋은데
가슴이 밋밋하니 전체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망치는 걸?”
“뭐, 뭣?”
내가 너무 기가막혀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은발 녀석이 얄밉게도 아는 체 하며
끼어들었다.
“아아, 얘 가슴? 아까 만났을 때는 부풀어 있었어. 아마도 마법으로 해놨나보지?
여기 들어와서 사라진 거 보면 말야. 내 말이 맞지?”
“흐음… 그래? 그럼 괜찮지만… 여장 하는 거 좋아하면 내가 괜찮은 의상실 소개해줄까?
이 나라는 좀 괴상해서 여장을 즐기는 남자들도 꽤 있거든. 그들이 즐겨 찾는
의상실을 알고 있는데… 어때?”
“주…..”
“뭐?”
“뭐라고?”
“죽어버려어엇~~ 이 자식드으으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