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17)
제 16화 인어의 섬으로
출발일을 며칠 앞둔 어느날이었다.
저녁 즈음에 그날도 무사들의 진을 다 빼놓는 격렬한 훈련을 마칠 즈음,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졌다.
물론, 그 상회 – 정확히 말하면 창고와 무사들 숙소 – 건물이 잡리잡은 곳이 해변가인 터라
평소에도 선선한 바닷 바람이 불어오기는 했지만, 그날 저녁에 느낀 바람은 평소에 훈련하는
사람들의 땀을 씻어주는 부드러운 바람이 아니라 뭔가를 예고하는 듯한, 어떠한 기운을 품은
바람이었다.
바람으로 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은 나 뿐이 아닌지, 다른 무사들 처럼 땅에 철퍼덕
주저 앉아서 헥헥 거리고 있던 잭슨도 진지한 표정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머튼을 향해 소리쳤다.
“여어, 대장님… 아무래도 내일 오후쯤이면 시작될 거 같은데요? 징조는 아침부터 시작될 거
같습니다.”
“그래? 하긴, 슬슬 시작될 때도 되었지… 하지만, 그래도 훈련은 계속 될 거다.”
“으엑… 그래도 심할때는 빼주실 거죠?”
“정 어려울 거 같으면…”
“하아, 이번에는 부디 강하길 바래야겠네?”
“그러지 않는게 좋을껄? 까딱 잘못하다가는 훈련 기간이 배로 늘 수도 있을테니…”
“아하하하… 하긴…”
주어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척척 말이 통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도대체 뭐에
대해 이야기 하나 궁금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나와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궁금하기야 하겠지만, 꼭 알아야할 필요성도 없다고 생각
했기 때문이고, 나와 상관 있다면 그들이 내가 묻기도 전에 알게될 거였기 때문이다.
아니나다를까, 그쯤에서 대화를 끝낸 머튼이 마법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일쯤에 폭풍이 올거라니 세 분은 내일 훈련은 빠지셔도 좋습니다.”
그제야 나는 머튼과 잭슨이 한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나 강하길 바라다 까딱 잘못해서 훈련 기간이 배로 늘어난다는 건 ‘아하~’ 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쉽게 이해가 되었다.
폭풍이 강하다면 훈련을 못할테지만, 그와 함께 우리가 타고 갈, 지금 항구에 정박해 있을
배에 피해가 가기라도 한다면 그 배를 수리하느라 출발일이 늦춰질테고 그러면 그와 함께
훈련 기간도 늘어난다는 건 당연할 거였다.
그런 걸 이해하며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데 머튼이 나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너도 내일은 훈련에 나오지 않아도 좋아. 아니, 아니, 넌 집에서 통근하지… 음… 그렇다면
넌 이번 폭풍이 물러갈 때까지 집에서 푹 쉬도록 해라. 폭풍이 끝나면 오도록.”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잭슨의 부러움이 가득 담긴 말이 날아왔다.
“좋겠다아~ 폭풍이 끝나려면 적어도 3, 4일은 걸릴텐데… 그 동안 집에서 놀 수 있다니…”
잭슨의 말에 하하 웃는데,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손을 꼬옥 쥐는게 느껴졌다.
의아해서 돌아보니 거기에는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해민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집에서 쉰다는 건 여기에 안 온다는 이야기니, 그건 폭풍이 끝날 동안 해민이와 내가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소리였으니,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해민이가 그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미안한 감정 보다는 그런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해민이를 품에 꼬옥 안고
쓰다듬어주었다.
“에구 에구, 그런 표정 할 거 없어. 단지 며칠 뿐인데 뭐… 며칠 후면 다시 올 거야, 응?
그때까지 잘 놀고 있어?”
그렇게, 칭얼대는 애 달래서 놀이방에 맡겨놓는 엄마의 심정(?)으로 해민이를 듀비에게 맡겨
놓은 나는 생각지도 않은 며칠의 휴가 동안 무엇을 하며 보낼까 골몰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차피 폭풍이, 아니 폭풍이 아니라 태풍이 온다고 해도 바다 속 깊숙히 있는 우리 집까지는
그 기세가 닿지 못할 거였다.
게다가 집 주위에는 엘라임이 친 결계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평화로운 집안에서 엘라임이나 이프리트와 쎄쎄쎄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상
혼자 놀 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 이왕 며칠의 시간을 번 것 오랜만에 마법 수련을 해볼까 하는 기특한 결심을 했는데
하늘이 내가 마법 익히는 걸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지 나는 며칠의 휴가 내내 마법책의 단
한줄도 읽지 못했다.
새벽부터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첫날 아침, 신나게,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느지막히 일어난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머니의 서재로 향했다.
“좋아, 우선 복습부터 해야지.”
평소에 아침에 일어날때면 거실에 앉아서 내 아침 인사를 꼬박꼬박 받던 엘라임과 이프리트가
거실에 없었지만, 내가 늦게 일어나서 어디 간거려니… 하고 편하게 생각한 나는 서재로 들어가
전에 어머니의 서재에서 찾아 뒀던, 1클래스와 2클래스의 마법서를 빼서 마악 펼치려고 하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아이야~]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니 문가에는 여전히 불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프리트가 허공에 둥둥 뜬 채로 나에게 부드러운 미소짓고 있었다.
“아, 좋은 아침이예요. 아까는 어디 다녀오셨나보죠?”
그러자 이프리트의 부드럽게 휜 눈에 개구쟁이 같은 장난기가 어리며 빛나기 시작했다.
[후후후, 바쁘지 않으면 같이 가련?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단다.]“재미있는 거요?”
물론 마다할 내가 아니었기에 나는 기꺼이 책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순순히 이프리트를 따라
서재를 나섰다.
‘공부는 조금 있다 와서 해야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이프리트는 불의 정령이면서도 자신의 집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엘라임의 결계 너머의 바다로
뛰어 들어 위로 향했다.
정령왕쯔음되면 자신의 기운과 반대되는 곳이라도 별 큰 피해는 입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도 불 속에 자유자재로 드나들까나?’
그런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이프리트의 뒤를 따르던 나는 – 바다 속이라면 이제 정령의
도움 없이도 내 마음대로 자유 자재로 다닐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 이프리트가 멈춰
선 곳에 다다르자 의아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곳은 우리 집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 멀리 간 해수면 위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곳에는 아침에 안 보이던 엘라임이 있었는데 무지 기분이 나쁘다는 기분을 팍팍
풍기며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아버지?”
그런 엘라임의 모습에 더더욱 어리둥절해진 내가 엘라임에게 말을 걸려고 했는데 이프리트가
내 팔을 살짝 건드리는 거였다.
그래 그를 돌아보았더니 그는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 든 눈으로 웃으면서 작게 속삭였다.
[그냥 놔두거라. 지금 심기가 심히 불편하거든.]“예? 아니… 그게 왜…”
[후후후, 잠시만 기다리면 그 이유를 알테니 조급하게 굴지 말거라. 다 알면 재미기 없지 않니?]평소 온화하고 부드럽고 인자하고 현명하고… 하여간 성자 혹은 군자 같은 면모만 보여주던
이프리트에게 이렇게 장난스러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던 나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프리트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기에 저리 재미있어 하는가 무척 궁금하기도 해서 그가
시키는대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엘라임에게서 약간 떨어진 해수면 위에 이프리트와 함께 주저
앉아서 뭔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폭풍이 다가 오는 중이라 그런지 바람이 강하게 불고, 구름이 해를 가려 날도 추웠지만,
그러한 것은 이프리트의 옆에 있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프리트가 나를 위하여 자신의 기운으로 내 주위에 결계를 쳐주고 있는 듯 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나는 엘라임이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저 멀리 수평선 쪽에서
한 무리가 날아오는것을 볼수 있었다.
[온다.]그 뭔지 모를 무리가 이프리트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이프리트의 눈이 기대감으로 더욱
반짝였다.
그에 나도 뚫어져라 그 무리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무리들은 엄청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는지
점점 내 눈에 완전한 형상이 보였는데, 그것은 놀랍게도 엄청난 바람을 동반하고 있는 바람의
정령들이었다.
물론, 공기중에 바람의 정령은 많이 보이지만 강한 바람을 동반한데다가 그 곳에는 평소 쉽게
볼 수 없는 바람의 상급 정령 실레스틴이 열명이나 앞장서고 있었고, 그 뒤에는 그 보다 더
많은 중급 정령 실라이론들이 그 거대한 몸집이 무겁지 않은 양 떠억 버티고 날아오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아직 그들과의 거리가 한참 멀고도 먼데도 우리 주위에 있던 – 물론 엘라임과
이프리트의 존재 때문에 멀찍이 떨어져 있긴 했지만… – 하급 정령인 실프와 운디네들이
두려움에 떨며 사방으로 흩어져 그들과 거리를 조금이라도 넓히려고 전전 긍긍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기야, 그들의 위세가 얼마나 위압적이었는지 멀리 있는데다가 이프리트의 기운으로 보호
받고 있는 나에게까지 전달 될 정도였으니 하급 정령들이 그리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평소에 보기도 힘들고 같이 어울리는 일은 더더구나 드믄 상급과 중급 정령들이 저렇게
험악한 분위기로, 마치 패싸움이라도 하러 가는 조직원들 처럼 떼거지로 우르르 몰려 오는
모습에 어리둥절하여 고개가 갸웃 거려졌지만, 나는 곧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이 바로 폭풍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헤에, 폭풍이 저들이라면… 화산 폭발은 불의 상급, 중급 정령들이 험악한 기세로 나오는
거고, 해일은 물의 상급, 중급 정령들이 그러는 걸까나?’
처음 보는 생경한 모습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계속 그 모습을 주시했다.
그런데, 무지 덩치들이 큰 실라이론들 위로 누군가가 또 날아오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 되었다.
실라이론들이 너무 큰 모습을 가지고 있어 미처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한 거였다.
그는 황당하게도 승전하고 돌아온 대장군 처럼 떡하니 폼 잡은 모습으로 중간에 있는
실라이론의 등에 올라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내가 한국에 있을때 봤던 그리스 신화의
만화에 나오는 포세이돈의 모습과 흡사했다.
하얗고 풍성하고,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머리카락과 입 주위를 뒤덮고 있는 풍성하고 곱슬
거리는 수염은 몸을 감싸고 있는 하얀 천과 마찬가지로 바람에 거칠게 휘날렸지만, 그의
건장한 근육질의 몸은 그런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꿋꿋하게 서 있었다.
거기다가 그의 손에는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들고 있는 것 처럼 하얀 색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가끔가다 한번씩 그 지팡이를 휘두를때마다 그 거센 바람들이 요동을 쳐서 그의
저~ 밑에 있는 바다까지 크게 출렁였다.
그러면 그것이 기분이 좋은지 아주 커다랗게 광소를 터트리는 거였다.
[크핫핫핫핫~~!!]그 모습에 그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엘라임이 한마디 했다.
[미친놈!]아주 철천지 원수에게 이를 갈며 하듯 절절한 감정이 배어있는 엘라임의 그 말에 나는 어리둥절
해서 옆에 있던 이프리트에게 속삭였다.
“저 분이 아버지하고 아는 분이세요?”
그러자 이프리트는 그게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아직 눈치 못 챘니? 그가 바로 네 아버지와 앙숙 사이인 바람의 정령왕이야.]“헤에, 저분이 말이에요?”
사실 바람의 상급 정령들과 중급 정령들을 앞세우고 장군처럼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눈치 못 채는 게 더 이상한 일일거다.
나도 어느정도 어렴풋이, 그러니까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눈치 채고는 있어서 이프리트의
확인에도 크게 놀라지 않고 그렇구나…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바람의 정령왕이 다가오는 모습만 노려보고 있느라 나나 이프리트에게는 조금도
신경 안 쓰고 있는 줄 알았던 엘라임이 내 말을 들었는지 흥분해서 말을 내뱉았다.
[저 ‘분’ 이라니! 저 놈은 ‘놈’이라는 말도 아까운 녀석이다. 그런 놈에게 ‘분’이라는 존칭을써 줄 필요는 없어!]
엘라임의 기세에 밀린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자 속으로 피식 피식 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뭘 그리 시시콜콜한 거 까지 따지고 드는지… 정말 둘 사이에 쌓이고 쌓인 감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상급 정령들과 중급 정령들을 거느린 바람의 정령왕은 우리쪽으로 빠르게 다가
왔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엘라임은 바람의 정령왕이 어느정도 가까워진 시점에서 갑자기
자신의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방출하는 건 아니었고, 마치 적을 앞둔 병사가 싸움을 하러 가기 전에 자신의
무기를 점검하는 것 처럼 엘라임의 몸에서 뻗어나온 기운은 그의 주변을 감싸며 부드럽게 요동
쳤다.
“저, 저기… 아버지 모습이 심상치 않은데…”
그 모습에 약간 불안을 느낀 내가 이프리트에게 속삭였지만, 이프리트는 태연하게 웃을
뿐이었다.
[후후후, 내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다고 했잖니.]“예? 그, 그렇다면 혹시…”
[아, 글쎄 두고보면 안다니까.]“하아…”
이프리트의 말에 나는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광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트리며 날아오는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이프리트 아저씨 까지 있으니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
그렇게 속으로 낙천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빠르게 날아오던 바람의 정령들 위에 당당히 버티고 서 있던 실피드가
갑자기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분명히 내가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랬는데도 어느 순간, 정말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나는 내가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 보았지만, 여전히 빠르게 날아오는
바람의 정령들 위에 떡 하니 버티고 있던 실피드는 정말로 없었다.
그에 얼떨떨해진 내가 이프리트를 향해 실피드의 존재가 사라졌음을 알리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는 입을 떠억 벌리고야 말았다.
저 하늘 높은 곳에 있어야 할 그 실피드가 어느새 내 앞에 떠억 하니 서 있는 것이었다.
“저, 저, 저…”
너무 놀라 내가 실피드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말을 더듬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런 나의
버릇 없는 모습은 신경쓰지 않았다.
모두의 이목이 실피드를 향해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실피드의 시선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엘라임에게 향해 있었다.
[여어, 오랜만이지?]실피드는 오랜 친우를 만나는 것처럼 친근한 목소리와 미소를 띄우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엘라임 못지 않게 무지 매서운 빛을 띄우고 있었다.
[오랜만? 네 놈은 내 평생 만나고 싶지 않은 놈이야. 왜 이렇게 너를 만나는 시간은 빨리빨리 돌아오는 거지?]
그에 못지 않은 매서운 빛을 발하는 엘라임이 이죽거렸지만, 실피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주는군. 너 빨리 소멸할 생각 없냐?] [네 놈보다는 더욱 더 오래 살아서 너 소멸하는 건 꼭 지켜볼 거다. 다음에 나올 바람의정령왕은 네 놈보다는 더욱 더 센스 있길 바라지. 취향도 성격처럼 형편없는 네 놈보다
더 형편 없을 수는 없겠지만 말야.] [호오, 네 녀석이 성격을 따지다니, 이건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인걸? 성격 드러운 걸로치면
나보다 네가 한수 위 아니였던가?] [남말하고 있네. 누구 성격이 누구보다 났다는 거야?]
두 정령왕이 성격가지고 티격태격 대자 말릴 생각은 안 하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프리트가 소리 죽여서 웃어댔다.
[네놈의 드러운 성격에 비한다면야 내 성격은 성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성자가 가다가 넘어져 뒤통수깨지는 소리하고 있네. 누구 성격이 드럽다는 거야?]웃고 있는 이프리트나 애들 처럼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두 정령왕이나 우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계속 바라보고 있는 사이 두 정령왕의 흥분은 점점 높아갔고, 그와
함께 두 정령왕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기운은 점점 강해지고 거칠어져 갔다.
그러자 두 정령왕의 기운에 반응하여 주위에 있던 바람이 거칠게 소용돌이치자 그에 못지
않게 바닷물도 크게 출렁거려 높은 파도를 만들어내며 치솟아 올랐다.
[이 자식이 보자보자하니까 한번 해보자는 거냐?] [웃기고 있네. 야, 언제 네놈이 나를 보고 있었냐?] [시끄러워. 네 놈은 떠드는 것 밖에 재주가 없지?] [하, 정말 소멸되고 싶어 환장한 놈이로구나. 오냐 소원이라면 내가 친히 소멸시켜 주지.] [흥, 누가 누구를 소멸시킨다는 거야?]그 둘은 말 싸움으로 부족한지 정말 서로를 향해 공격을 하기 위하여 동시에 뒤로 물러나
실피드는 허공에 둥둥 떴고, 엘라임은 바다 위에 똑바로 서서 실피드를 노려 보았다.
“저기… 정말 치고받고 싸울 거 같은데… 그냥 둬도 괜찮을까요?”
점점 더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두 정령왕의 기운에 반응해 사방의 물과 바람이 요동을 치자
나는 불안한 마음이 커져서 이프리트를 향해 물었지만, 이프리트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매년 이 정도로 싸웠는걸 뭐.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하아?”
대치하고 있는 두 정령왕을 바라보다 힐끗 위를 바라보니 빠르게 날아가고 있던 실레스틴들과
실라이론들이 어느새 내 머리 위쪽에 도착해서 멈춘 채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네 놈을 손봐주기로 하지.] [그건 내가 할 말이다!]실피드의 말에 매섭게 받아친 엘라임이 문득 생각난 듯 내 쪽을 힐끔 돌아보다가 못내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좀 더 멀리 가 있어. 위험하단 말야.]그러자 이프리트가 배실배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호오, 역시 이 애가 걱정되나 보지? 걱정 말라고. 내가 확실하게 보호할테니…] [뭣? 누, 누가 걱정을 한단 말이냣? 나는 네 놈을 믿지 못하는 것 뿐… ]이프리트의 말에 엘라임이 화들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허공에서 엘라임과 대치하고 있던 실피드가 어느새 왔는지 우리 앞에 떡 하니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흐음…]아까 살벌하게 풍겨대던 기운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그는 놀라움과 신기함, 그리고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에게 다가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비록 이프리트가 나를 자신의 기운으로 감싸고 있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실피드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는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바다 위를 걸어 나에게 다가와 살펴보더니
그걸로는 만족을 못했는지 갑자가 그의 커다란 손을 뻗어 내 팔을 잡고 자신쪽으로 끌어
당기는 거였다.
“우, 우악… 무, 무슨 짓이예요?”
너무 당황스러웠던 나는 이프리트에게 고개를 돌려 도와달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실피드에게
나를 해할 기운이 없어서 그런지 그는 싱긋 웃기만 하고 가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에게 원망어린 시선을 보내는데 갑자기 우악스런 손길이 내 턱을 잡더니만 실피드
쪽으로 확 돌리는 거였다.
“우갸갸갸~!!”
실피드는 내 코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어 나를 요조모조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흐음… 이거 참… 신기하군… 신기해…]그러더니 내 팔을 다시 한번 꼬옥 잡아 보기도 하고, 볼을 콕콕 찔러보기도 하고, 내 옆구리를
쓰윽 만져 갈비뼈를 확인해 보기도 하고…
어찌보면 마치 변태에 가까운 그 행위에 몸둘바를 몰라 어찌할바를 몰랐지만, 당황스러울
뿐 소름이 돋는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비록 실피드가 건장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눈에는 호기심과 신기함이
담겨 있을 뿐 다른 야리꾸리한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편한 건 사실이라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고 꼼지락 거렸지만, 그의 힘이
워낙 세어서 나는 그에게서 조금도 떨어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날 구해준건 역시 엘라임이었다.
[이 변태같은 자식!! 당장 그 손 놓치 못해?]그러자 그때까지도 계속 내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있던 실피드가 행위(?)를 멈추고 고개만
살짝 들어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네놈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뭣이라? 아니, 이놈이 이래도…]엘라임이 실피드의 말에 흥분해서 곧바로 달려들 태세를 취했건만, 실피드는 그런 엘라임을
싸악 무시한 채로 여전히 한 팔로는 날 잡은 채 이프리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이 녀석 뭐냐?] [보면 알잖아?]이프리트는 여전히 싱글 싱글 웃으며 장난스레 슬쩍 대답을 회피했다.
그에 실피드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실피드 또한 이프리트에게는 함부로 못하는 모양인지
뭐라 하지는 못하고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넌 뭐냐?]그에 나는 정말 얼결에 대꾸했다.
[사람인데요?]내 대답에 실피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사람? 사람이라고? 네가? 너 지금 날 물로 보는 거냐? 네 몸에 흐르는 엘프의 기운은그럼 뭐냐?] [이 자식이! 물이 뭐가 어때서 그래? 네 놈을 물에 비유하면 물에게 실례야~!!]
엘라임이 옆에서 흥분한채로 방방 뛰었지만, 그는 내가 실피드의 손아귀에 있어서 그런지
함부로 덤비지는 못하고 제자리에서만 방방 뛰었다.
그에 실피드가 신기하게 엘라임을 쓰윽 바라보더니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흐음… 너 솔직히 말해봐. 너, 엘라임의 맹약자냐? 아니지? 맹약자라고 하기에는 정령의기운이 지나치게 많잖아? 안 그래?] [맹약자는 아니고… 저 분이 제 아버지신데…]
그러면서 나는 실피드에게 붙잡히지 않은 팔을 들어 엘라임을 가르켰다.
그러자 내 팔을 따라 엘라임을 한번 힐끗 바라보는 실피드의 눈이 다시 나를 향했는데
그 곳에는 가소롭다는 감정이 잔뜩 들어 있었다.
[허, 참… 기가막혀서 말도 안나오는 군. 너, 지금 내가 누군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왜 모르겠는가?
이프리트가 친절하게 가르쳐줬는데 말이다.
하지만 실피드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라는 걸 눈치 챘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실피드가 기가 막히다는 시선을 그대로 엘라임에게 던지면서 피식 거렸다.
[야, 이 놈이 네 자식이래는데? 너 언제 자식이 생겼냐?]실피드는 아마 엘라임을 열받게 하기 위하여 놀린 듯 싶었지만, 엘라임은 흥분해서 펄펄 뛰는
대신 살벌한 기운을 풀풀 풍기기는 했지만 착 가라앉은 채 실피드만 가만히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실피드는 엘라임의 반응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피식 웃으면서 이프리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 저 녀석이 너무 열받아서 말도 못하는 모양인데? 안 그래, 이프리트? 감히 천한 이종족의혼혈아 주제에 정령왕의 자식이라고 떠들어대니 화가 안 나고 배길 수가 있겠나.]
그러자 이프리트는 이전까지의 장난스러운 미소보다는 약간 미안함이 담긴 – 아마도 나에게
보내는 감정이겠지만… – 미소를 머금으며 조심스레 대꾸했다.
[글쎄…]이프리트 조차 자신이 생각하던 반응이 아닌, 어정쩡한 반응을 보이자 실피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뭐. 오늘 둘 다 뭐 잘못 먹었어? 평소 답지 않게 왜 그런대? 소멸할때가 다 되었나?]그렇게 둘의 반응을 의아해 하면서도 실피드는 내 팔을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꽉 쥐어서 나는 아픈 건 둘째치고 피가 안 통하는지 나는 팔이 마비된 거
같아 고통스러워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을 봤는지 엘라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더니 버럭 호통이 터져 나왔다.
[바보같이, 지금 뭘 맹하니 있는거야? 여기가 어디 인지 잊었어?] [응? 누가 뭘 어쨌다고?]실피드는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인 줄 알고 엘라임에게 인상을 쓰며 한마디 했지만, 나는 그게
나를 향해 하는 말이라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여기? 어디긴 어디야. 바다… 아항…’
여기는 바다 위, 그리고 바다 위면 엘라임의 영역이자 내가 나의 힘을 전부 끌어내어 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 다시 한번 나를 재촉하는 듯한 엘라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채근하는 줄은 몰랐던 실피드가 – 어차피 그는 내가 엘라임의 자식이라는 것을 전혀
믿고 있지 않았으므로 나에게 말한 것이라고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을 터였다. –
흥분한 채 엘라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동안 나는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기운을 아래 바닷물에게로 뻗었다.
‘부탁해~!!’
그러자 나의 의지와 기운을 받은 내 발 바로 아래의 바닷물이 순식간에 치솟아 올라 검처럼
날카롭게 변하여 실피드가 앗~ 하는 사이 내 팔을 잡고 있는 그의 손목을 잘라냈다.
예전에 이프리트가 엘라임의 팔을 잘라낸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 실피드의 손목을
잘라낼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그에게는 큰 타격이 가지 않을테고, 형체가 없는 그의 손은 잘렸다 해도 다시 만들어질
것이 뻔했으니까.
역시나, 그의 손은 실피드의 몸에서 떨어져나오자마자 바람으로 변하여 허공으로 흩어졌고,
실피드의 잘린 손목에서는 피가 나는 대신 다시 손이 생겼다.
[이 녀석이 감히~!!]큰 타격은 없었지만, 얕보던 나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한 실피드가 분노하여 나를 돌아보았지만,
그때는 이미 엘라임이 달려와서 나를 자신의 등 뒤로 보낸 뒤였다.
[누구 보고 이 녀석이라는 거야? 네 놈이야말로 내 아들에게 해를 가하려 했으니, 오늘은절대 용서 못 한다!!]
“하아… 딸이라고 해줬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는데…”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강하게 주장하지는 못하고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나에게
이프리트가 다가왔다.
[괜찮으냐?]무지 미안함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나는 싱긋 웃어줬다.
아무래도 내가 실피드에게 잡히는 상황은 이프리트도 예상 못했던 듯 했다.
“뭐, 크게 다친건 없어요. 단지 팔이 좀 저릿저릿 하네요.”
그러면서 소매를 올려 실피드에게 잡혔던 부위를 보니 손자국 모양이 그대로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어지간히도 손아귀 힘이 셌던 모양이다.
“어쩐지… 팔이 마미되는 것 같더라니…”
[이런, 이런… 네 아버지가 정말 화난 것 같구나…]내 팔뚝에 난 멍자국을 바라본 이프리트가 그의 불꽃 날개로 내 팔을 가볍게 감싸쥐며
말했다.
그에 화들짝 놀란 내가 돌아보니 엘라임이 막 실피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내 아들에게 상처를 내다니~!! 넌 죽었어!!]지금까지도 매서운 기운을 뿜고 있었지만, 그래도 서로 정말 죽이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힘 겨루기를 하는 것과 같은 분위기였는데, 이제 엘라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날카로운 살기였다.
“허걱…”
그 살기가 나에게 향한 것이 아니고, 게다가 나는 이프리트의 기운으로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이 저릿저릿 할 정도였다.
실피드도 그와 같은 엘라임의 반응에 놀랐는지 그대로 맞서지는 못하고 뒤로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네놈한테 무슨 아들이 있다는 소리냐?] [보고도 몰라? 저 애가 내 아들이란 말야!!] [무슨 바람의 정령이 추락하는 소리하고 있네. 우리가 후손을 어떻게 만들어? 안 그래이프리트?]
엘라임이 너무 살벌하게 달려들자 실피드가 이프리트에게 도움을 바라는 시선을 보냈다.
[물론… 우리는 불가능하지만, 인간들은 가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가 있거든.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뭐야, 그럼 저 이종족의 혼혈아가 정말 엘라임의 자식이 맞다는 소리야?]
여전히 엘라임의 공격을 맞서지 못한 채 피하면서 실피드가 소리치자 이프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이 아이는 엘라임 자식이 맞아.] [웃기는 소리. 믿을 수 없어!!]실피드가 고개까지 저으며 못 믿어하자 그게 또 엘라임을 열받게 한 모양이었다.
[네놈이 믿건 말건 상관 없어!!]엘라임의 기운에 의하여 바닷물들이 마치 거대한 창 처럼 뾰족하게 솟아 실피드를 공격하자
실피드가 두 손을 휘저으며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
그러자 강풍이 불어와 바닷물로 된 창을 향해 쏘아져 갔고,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 여파로 인하여 바람과 바닷물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고, 충돌 여파가 얼마나 강했는지
바다에 거의 100m에 달하는 구덩이가 순식간에 생겼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 구덩이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여파로 인하여 그 구덩이 깊이만한 엄청나게 높은
파도가 일어나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파도는 곧바로 육지쪽으로 향했다.
영화에서나 봤을까한, 아니 그 보다 더 큰 파도의 모습에 입을 떠억 벌리고 있는데 옆에서
걱정스러운 듯한 이프리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이런, 올해는 아무래도 해일이 무지 크겠는데? 으음… 인간들의 피해가 심각하겠군…]“해일… 해일이라면… 바닷물이 육지를 덮치는 거죠?”
[그렇지.]“거기에다가… 바람의 정령왕이 아마도… 그 쪽으로 가고 있었죠? 내가 듣기로는 폭풍이
온다고…”
[맞아.]“큰일이다아앗~~!!”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정확하다면, 지금 그레이험 항구의 부두에는 이번에 내가 타고 갈
배가 정박해있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리 먼 바다로 항해하는 배라 튼튼하게 지어졌다고는 해도 10층 높이의 파도가
한번 휩쓸고 지나간다면 그게 무사히 남아있을리가 없었다.
비록 내가 해일의 피해에 대해 직접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기에
나는 황급히 바다 속으로 뛰어 들어 항구로 향했다.
위로 날아갈 수가 있지만, 거기는 지금 엘라임과 실피드가 싸우고 있었기에 날아가기가
어려울거라 생각하여 판단한 거였다.
[해인아? 어디 가니?]뒤에서 이프리트가 다급하게 물으며 쫒아왔다.
[항구에요. 거기에 이번에 제가 타고 갈 배가 있거든요. 아무래도 무사할 것 같지가 않아서요한번 보러 가려구요.]
비록 그 배를 직접 보지는 못하고 말로만 있다고 들었지만, 어차피 배에 상회의 문장이 새겨져
있을테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저기요, 저는 아무래도 그 배를 사수해야 할 거 같으니까, 아저씨는 부디 아버지 좀말려주세요. 부탁드릴께요~!!]
나는 뒤따라오는 이프리트에게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 어차피 바다 속이라 정령들의
대화법을 사용해야 했지만, 어쨌든 – 부탁하고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로질렀다.
항구에 도착하니 작은 보트들은 항구 위로 끌어 올려져 단단히 묶여 있었고, 그렇지 못한 수많은
배들은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지만, 거친 바다의 물결과 바람에 의하여 마구 들썩이고 있었다.
그 많은 배들 중 빨리 배를 찾아내기를 바라며 부둣가를 달려가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막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크리스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달리지 않고 정령들의 보호를 받으며 공중으로 날아가고 있던 터라 나는
즉시 엔다이론을 불러내어 그의 옆으로 나란히 달리면서 소리쳤다.
“크리스~!! 지금 배를 향해 가는 거지이이이~~!!”
그러자 크리스의 고개가 휙 돌려지더니 그의 눈에 놀라움과 다행이라는 감정이 뒤섞인채
나를 바라보았다.
“너 어떻게 여기 와있냐아~~?!”
“폭풍이 심해져서 걱정이 되어서 와봤어~~!! 그런데 배는 어디 있는 거야아아아~~!!”
“큰 배라서 깊은 데이 정박해 있어어어~~!! 너가 와줘서 다행이다아아~~!! 우리로 충분할까
걱정이 되었는데에에~~!!”
그렇게 고함을 질러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부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몇 척의 커란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 큰 배들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마구 흔들리고 있었는데, 크리스는 그 중에 한 배에 다가가
내려섰다.
그의 뒤를 쫓아 내려서보니, 그 배 위에는 벌써 가레스를 비롯한 마법사들이 배 주위에 결계를
펴고 있었고, 잭슨은 그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왔어요?”
우리가 도착한 것을 제일 먼저 잭슨이 발견하고 반색하며 다가왔다.
“상황이 어떠냐?”
그의 인사에 크리스는 살짝 고개만 끄덕여주고 곧바로 사태를 묻자 잭슨도 미소를 지우고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안좋아요. 이번 폭풍은 제가 그 동안 겪은 거에 비해 엄청 심하다고요. 게다가 아무래도
큰 해일도 일어날 거 같아요. 우리로써 배를 보호할 수 있을지…”
“어떻게든 해봐야지. 마법사들의 상태는 어때?”
“아무래도 상태가 심상치 않아서 아까부터 방어 마법을 펼치고 있어요. 하지만, 배가 워낙
커서 지금 무지 힘들어하는 거 같아요.”
잭슨의 말이 아니더라도 배의 갑판 중앙에서 마법을 펼치고 있는 마법사들의 얼굴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글 송글 솟아나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고, 안색도 무지 안좋아보였다.
“좋아. 교대를 하자. 우선 해인아, 너 혼자 이 배를 보호할 수 있을까?”
크리스가 다급하게 나를 돌아보자 나는 약간 망설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도 해보지는 않았지만… 할 수는 있을 거 같아요.”
“좋아. 그럼 네가 먼저 나서라. 만약 네가 지치면 그 뒤에 나와 잭슨이 나서마!!”
“알았어.”
크리스에게 대답한 나는 즉시 바람과 물의 상급 정령을 불러내었다.
마법사들의 모습을 보니 조금만 더 마법을 유지시키다간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실드로 배를 보호하고 있다고 해도 바다 위에 배가 떠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파도에 의해 전체적으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람과 물결이 더욱 더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신경써서
균형을 잡지 않으면 갑판 위에 제대로 서 있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러한 상황은 마법을 유지하는데에만 집중을 해야 할 마법사들에게는 체력 저하보다도
더욱 더 치명적이었기에 나는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 배가 부서지지 않게 보호해줄래?”
내 부름에 응하여 모습을 드러낸 두 상급 정령들에게 부탁하자 그들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
뒤 서로 마주보았다.
[내가 겉에다 할까?] [좋겠지. 힘들면 말해. 교대해줄테니.] [호호호, 언젠가 힘들어진다면…]가볍게 의견 교환을 한 실레스틴이 웃으며 날아오르자 그 뒤를 엘라스트라가 뒤따랐다.
뭐, 그래봤자 그 둘의 능력으로 배 전체를 바람과 물의 방어막을 친 뒤에 다시 내 곁으로
내려왔지만…
그들이 방어막을 치자마자 크리스틴의 신호로 마법사들은 실드를 없애고 저마다 자리에
주저 앉아서 얼굴의 땀을 닦으며 가뿐 호흡을 내쉬었다.
그러한 그들을 잭슨과 크리스가 부축하여 갑판의 구석에 데려다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점점 배의 흔들림이 심해져서 아무것도 없는 갑판 가운데 앉아 있다가는 잠시 후에
이리 데구르르 저리 데구르르 구를 지도 모랐기에 뭔가를 잡아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곳에다
마법사들을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나 또한 배 위의 흔들림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배의 난간을 손으로 잡아 몸을 지탱하며
바다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이제 아주 쬐끄마하게 엘라임과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두 정령왕이
쉴새없이 교차하고 떨어지고, 그와 함께 주변이 요동치는 걸 보니 아직까지도 격력하게 싸우는
모양이었다.
“아아… 부디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프리트 아저씨는 어디에 계시는 거지?”
둘 사이에 이프리트의 모습은 안 보였기에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엘라스트라가 그 말을
받았다.
[뒤쪽에 계시는데요?]아무래도 나 보다는 엘라스트라의 감각이 한 수 위인 듯 싶었다.
“끄응… 말려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냥 두고 보시려나?”
[제가 알기로는 매년 두 분 정령왕께서는 세계 이곳 저곳에서 싸우신다고 하시던데요? 그러니이제와서 불의 정령왕께서 말리시기도 어려우실 거예요.]
“아니… 물론 싸우는 건 알고 있는데…. 이번에는 나때문에 더 커져버렸거든…”
나를 그 곳으로 데려간건 이프리트였으니 이 싸움이 커진 데에 그도 일조한 셈이라 그에게
둘의 싸움을 적당히 말려달라고 부탁한 건데 아무래도 여의치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하군요. 저는 두 정령왕께서 대결하시는 모습은 처음 봐요. 정령계에서는다른 정령왕들께서 막으시기때문에 저 정도까지 대결하시는 적이 없거든요. 하기야, 두 분은
정령계에서도 잘 마주치시지도 않지만…]
나는 심란해서 한숨을 푹푹 쉬는데 실레스틴은 경의와 감탄, 놀라움을 가득 담은 시선을
바다 넘어 저 편으로 보내며 중얼거렸다.
“으윽… 지금은 감탄할 때가 아니라고. 두 분 때문에 이곳이 난장판이 될 판이라는 거 몰라?”
만약, 실피드가 그때 나를 무시하고 그냥 엘라임과 투닥거렸으면, 이 곳이 난장판이 아니라
허허 벌판이 되었다고 해도 이 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의 동정만 보냈을 뿐
나와는 상관 없는 일로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상회의 배야 여차 하면 달려와서 지켜줬겠지만…
하지만, 이번에는 나 때문에 피해가 커질지도 모르는, 아니 거의 확실하다는 것을 느끼자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일어 어찌할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사실, 내가 한국에 있을때에도 우리 나라에 매년 태풍이 한두번씩은 와서 휩쓸고 가는 바람에
태풍의 피해를 어느정도 아는데다가, 다른 나라에 심각한 피해가 일어나는 모습도 뉴스에서
봤었기에 그런 피해가 나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니 태연하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내 심정을 아는 것인지 엘라스트라가 위로의 말을 건네왔다.
[이 곳에 폭풍과 해일이 일어나는 건 해인님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년 일어나야 할자연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해인님이 아니었더라도 이 곳은 폭풍과 해일의 피해를 입어야
했으니 그 피해가 조금 커졌다고 해도 해인님이 마음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 곳에
사는 이들도 매년 그러한 일을 겪었을테니 아마 대비하고 있을테지요.]
“으음… 그래도, 그래도… 히익~!!”
마음 한 구석에서는 엘라스트라의 말이 맞다고 내가 이럴 필요는 없다고 외쳤지만, 또 다른
한 곳에서는 그래도 내 탓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외치고 있어서 나는 웅얼웅얼대며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바다 저편의 두 정령왕을 보는데, 갑자기 내 눈 앞에서 엄청나게 커다란
파도가 일어 배를 덥치자 나도 모르게 놀라 뒤로 주춤 주춤 물러났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배 갑판의 난간을 조금씩 넘는 정도의 파도 – 그것도 높은 파도 – 만
오다가 갑자기 내 머리 위까지 화악 덥칠것 같은 엄청난 높이의 파도에 정말 나를 덮치는 줄 알고
순간적으로 움찔해서 눈까지 감아버렸다.
머리로는 이 배 주위를 실레스틴과 엘라스트라가 방어막을 쳐놨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본능적인 반응은 어쩔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 뒤에 배가 크게 흔들리는때 미처 난간을 잡지 않고 있다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
데굴데굴 굴러갈 뻔 했지만 옆에 있던 엘라스트라가 얼른 내 몸을 잡아 지탱해줬기에 갑판
위를 데구르 구르는 사태는 면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위태위태한 모습을 본 잭슨이 자신도 심하게 흔들리는 갑판위를 조심스레
균형을 잡아가며 천천히 걸어서 다가왔다.
“괜찮아?”
“아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그러게 왜 거기 서 있어? 이리와, 저기 돗대에 있으면 괜찮을 거야.”
그도 위태위태하게 서서 나를 도와주려는 듯 손을 내미는 모습이 마치 나를 혼자 두기 불안한
어린아이로 보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허탈해졌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나를 생각해주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 그가 내미는 손을 기꺼이 잡았다.
물론, 엘라스트라가 나를 잡아주고 있어 넘어질 염려는 없었지만, 그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인도에 따라 위태위태 걸어가 배의 가장 중앙에 있는 커다란 돗대의 굵은
밑둥에 도착하여 갑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미리 앉아 있던 크리스가 말을 건네왔다.
“괜찮아? 지치면 말해라.”
“응? 아아… 아직은 끄떡 없어.”
그러자 그가 피식 웃어보였다.
“하기사… 하지만 정말 대단해. 혼자서 이 큰 배를 감당하다니 말이야. 최상급 정령사란
중급 정령사와는 차원이 다르구나…”
부러움이 약간 담긴 듯한 그의 어조에 나는 머쓱해져서 히죽 웃어보였다.
“뭐… 그래도 크리스는 나보다 검술이 뛰어나잖아. 검술로 한다면 나는 아마 한방 감도
안 될걸?”
그는 내가 자신을 위로하려는 줄 알았던지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물론, 위로의 목적도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에 대한 부러움 또한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고 실레스틴과 엘라스트라가
쳐놓은 방어막 밖으로 보이는 광경을 주시했다.
그날 나는 밤을 꼬박 새어가며 배를 지키느라 갑판에 머물러야 했다.
그 동안 배가 너무나 많이 흔들려 한명의 마법사가 멀미때문에 얼굴이 노랗게 되어 크리스와
잭슨에 의해 실려나갔고, 배가 너무 흔들리는 바람에 배를 고정하고 있던 닻과 연결되었던
부분이 망가져서 닻이 떨어질뻔 했던 일이 일어나 마법사들이 그렇게 요동치는 배 위에서
동분서주 해야 했다.
나는 그때 마법사들이 마법을 쓰는데 집중할 수 있도록 배가 흔들리지 않고, 물결에 따라
배가 흘러가지 않게 고정시키는 역활을 맡아야 했다.
물론 나는 부탁만 하고 엘라스트라가 힘을 써줬지만, 지금까지 정령들이 내 부탁을 들어주면서
사용했던 마나의 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마치 예전에 엘라임과 계약을 맺겠다고
그를 불러냈을때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마나의 양과 비슷한 마나가 빠져나가 머리가 띵할
지경이라 그 이상으로 마법사들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배를 그냥 보호하는 것에 비하여 요동치는 바다에서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는 것이
몇배는 더 어렵고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엘라임과 실피드의 다툼은 내 머리위를 지나 결국은 육지 위로 올라가더니 결국
실피드가 엘라임의 공격을 피해 정령계로 황급히 가버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엘라임도 바다가 아닌 육지 위에서는 큰 힘을 못 쓰는지 실피드가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바다로 되돌아갔지만, 결국 큰 해일이 일어 항구를 그냥 덮어버렸다.
다행이 이 곳은 매년 이런 폭풍과 해일을 겪는 터라 건물들과 시설들이 튼튼하게 지어져
초토화되는 일은 없었고, 이프리트의 중재로 인하여 엘라임도 온 힘을 쏟아 부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 영향력은 밤새도록 계속 되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겨우 잠잠해져 노심초사 하며
밤을 꼴딱 세운 난 일출을 바라보며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우리가 출발하는 날은 참으로 날씨도 화창하고, 뜨거운 햇볕에 헥헥 거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시원한 바닷 바람이 불어와 어루만져주는 그런 날이었다.
“아아, 정말 며칠 전에 폭풍이 몰아쳤다는 것을 못 믿겠구만.”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키는 레이언 녀석의 중얼거림에
그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나는 나도 모르게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뭣이라? 그럼 저것들은 뭔데?”
내가 가르킨 항구의 부둣가에는 여기저기에서 이번 폭풍때문에 부서지고 날아가서 없어진
건물 곳곳을 수리하느라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뚝딱뚝딱 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건물들을 튼튼하게 지었다고는 해도 그 강한 폭풍에 피해가 전혀 없을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바닷물까지 쳐들어 오는 바람에 항구 도시의 절반이 침수 피해를 입어
아마 몇주간 동안은 꼼짝없이 그 뒷처리를 해야할 판이었다.
특히나, 도시 밖의 해변가에 세워진 수많은 상회의 커다란 창고들을 비롯하여 우리 상회에도
바닷물이 덮쳐 들어와 내가 배를 지키느라 고군분투 하는 동안 그 곳에서도 물건들을 바닷물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리뛰고 저리 뛰었었다.
“하.하.하… 뭐, 그렇다는 거지.”
그러는 와중에, 상회의 대표라는 이 녀석은 이렇게 위급한 상황일 수록 달려와서 솔선 수범은
보이지 못할 망정, 검사라는 이유로 배를 지키는데에도 정령사와 마법사만 보내놓고 자신은
쏙 빠지는 것도 모자라 – 하기야, 배를 지키는데에는 그의 말대로 그다지 도움이 안될테니 이해가
갔다. – 도시 밖에 있는 기지에 – 대외적으로는 창고라 명칭된 – 바닷물이 덥쳐 왔을때는 어딜
갔었는지 사라져서 그 다음날 새벽에 폭풍과 해일이 물러갔을쯔음에 슬그머니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녀석이 마치 자신도 그때 아주 열심히 일했다는 듯이 날씨타령을 하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와 같이 있던 크리스나 잭슨도 마찬가지인듯 그들은 레이언 녀석에게 한번씩 찌릿한 눈길을
보내더니 나에게는 잘했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나는 꼼짝없이 배가 망가지겠다 싶었는데 말입니다.”
가레스는 그날 일이 생각하기도 끔찍한듯 몸을 한차레 부르르 떨더니 감격스러운 시선으로
저 멀리 보이는 배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저도 꼼짝없이 훈련 기간이 늘어나는 줄 알았거든요.”
지금 우리는 부두에 선 채로 짐을 커다란 배로 옮겨 싣기 위하여 작은 보트로 쉴 새 없이
부둣가와 배를 왕복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대부분의 짐은 어제 다 실어놨고, 오늘은 식료품을 비롯하여 나머지 짐만 옮기면
되었기에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자, 그럼 다녀올테니까 그 동안 상회를 잘 부탁해.”
그 모습을 본 레이언은 이제 사람들을 실어 나르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보트를 힐끔
바라보더니 우리를 배웅하러 나와준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니어도 나는 상회를 잘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걱정은 네놈이 과연
드워프들을 살살 구슬릴수 있을까 하는거야. 저번처럼 한판 뜨자고 방방 안뛰었으면
좋겠는데…”
무지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크리스의 시선에 레이언은 감히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은근슬쩍 비껴내더니 크리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하하, 그래도 그 뒤에 마음이 잘 맞아서 해결 되었잖아? 이번에도 잘 될거야.”
“글쎄… 내가 믿는건 이번에 또 있을지도 모를 불확실한 네놈의 운이 아니라서…”
회의적으로 중얼거린 크리스가 레이언 옆에서 피식 거리며 웃고있는 사무요원을 바라보았다.
“잘 부탁해. 왠만하면 내가 갈텐데… 요즘 이곳 분위기가 수상해서 본사를 비울수가 없으니
너만 믿겠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침착, 냉정, 듬직스럽게 대답하는 시무요원을 믿음직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크리스가 그와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레이언은 머슥하게만 보고 있었다.
그래 이 기회를 또 놓칠 내가 아니라 나는 레이언 녀석의 옆에 슬그머니 다가가 속삭였다.
“쯧쯧, 어지간히도 신뢰를 못 받는구나.”
“하하하…”
그렇게 배웅 나온 이들과 떠나가는 이들의 인사가 한차례씩 끝나자 레이언을 비롯한
경호 담당 무사들과 마법사들, 그리고 잭슨은 보트에 올랐다.
“그럼 나중에 보자.”
“알았어.”
그리고 나는 크리스와 함께 보트를 타고 큰 배로 향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내가 그들과 합류하는 건 오늘 밤이었다.
크리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깊은 바다로 나가 타국으로 가거나, 아니면 해변가를 따라
국내의 다른 항구를 갈 때마다 국가에 소속된 직원이 나와서 배를 검사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이 나라도 노예를 법적으로 허락한다고 해도 무역을 금지한 물품은 있을 터이고
그런한 것은 반도인 이 나라에서는 많은 부분 배를 이용하여 운송될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러한 검사는 내국을 운행하는 것 보다 타국으로 가는 배가 더 철저할게 뻔했다.
그런데, 노예매매가 아닌 일반 물품을 다룬다고 등록이 되어있는 베지테크스 상회에서
타국에서 국내로 들여오는 것이 아닌, 국내에서 타국으로 나가는 배에 노예로 분류되는
인어가 타고 있다면 의심을 살 것이 뻔했다.
노예 매매를 한다고 등록되어 있는 상회라면 이 나라에서는 노예도 타국으로 수출(?)
하기도 하니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지금은 폭풍이 휩쓸고 간 뒤라 그런 검사가 전보다는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
물론 상회쪽에서는 그걸 노리고 폭풍이 지나가자마자 육로와 해로 양쪽으로 이종족들을
운반하는 거다 – 조심해서 나쁠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물의 최상급(나이트급 정령이라고도 한다) 정령과 계약을 맺은 내가 지금 인어들을
보호하고 있는 도시 외각의 상회소속 기지 근처의 바다 속에서 인어들을 데리고 라센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바다까지 가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배와 만난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크리스와 함께 얌전히 레이언과 그 일행들을 배웅하고는 곧바로 도시 외곽에
있는 상회 소속의 기지로 달려갔다.
“잘 할 수 있겠어?”
이번에도 배웅하러 온 크리스가 해변가에서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음… 한 번도 안해 봤지만… 어쨌든 한 명도 안 잃어버리면 되는 거 아냐?”
“그래, 잭슨이 계속 정령들을 보내서 길을 인도한다고 했으니까 너도 정령 한명을 바다
위로 내보내 놓는게 좋을 거야.”
“그 이야기는 어제 다 했잖아.”
“그래, 그래…. 어휴, 이렇게 인어들을 데리고 가게 된 건 또 처음이라 내가 다 긴장되네.”
“걱정하지 말라니까. 자, 그럼 나 이만 간다.”
“부디 조심해라.”
크리스에게 씨익 웃어보인 후 그 옆에 있는 밥과 빅터 등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자
그들도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냥 바다 속으로 들어가도 숨이 막혀 죽을 염려는 없었지만, 나의 이런 신체를 인어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는 귀찮아서 그냥 엔다이론을 불러 공기가 가득 든 구체를 형성하게
하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는 미리 이야기된 대로 12명의 인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라함 대륙의 북쪽 바다인 호바트 해에는 바닷물이 따뜻하고 해초류가 풍부하여 다른
바다들 보다도 더 많은 물고기들이 산다고 한다.
하지만, 덕분에 다른 바다 보다도 더 바다의 몬스터들이 많았고, 또 곳곳에 암초가 숨겨진
해류가 엄청 강한 곳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배를 가지고 돌아다니지 못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어들도 그 곳에 사는지도 모르겠지만…
인어들 또한 무시무시한 몬스터로 부터 자신들을 지켜내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바다 속에서
무리를 이어 산다고 했다.
그 인어들 무리가 사는 영역에는 바다 위로 자그마한 바위섬이 솟아 올라 있었는데,
영역 안에 있다보니 가끔 인어들이 그 위에 올라가 노는 모습이 항해 하는 사람들 눈에
가끔 띄었기에 그 바위섬은 이제 인어의 섬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그 주변이 인어의 영역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그 곳은 노예매매상들이 감히 침범치 못하는 곳이었다.
인어들 또한 바다속에서 무서운 적들로 부터 자신들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대단한 무기로 중무장한 그들이라도 인어들이 철저하게 지키는 그
곳을 침범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어들의 무기란 바로 물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물술사’라고 불릴 수 있는 바로 그 능력인데 바다 속에서 평생 살기
때문인지 인간들의 마법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무척 강력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능력이 한가지 더 있었는데 그 능력을 이 곳에서는 ‘음파’라고 불렀다.
그건 원래 인어들이 물 속에서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한 방법인데, 이게 여차 하면 상대방의
정신을 쏙 빼놓거나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만드는 공격 능력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우리 식으로 한다면 엄청나게 큰 소리를 질러서 상대방의 귀를 멀게하는 형식과
비슷한 것인 듯 싶었다.
게다가 이 능력은 또 다르게 우리 같은 육지에 사는 종족들이 물 속에 들어가면 엄청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 처럼 들려서 예전에는 인어의 목소리는 천상의 목소리라고 일컬어지기도
했었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또한 너무나 아름다워 사람들을 홀릴 지경이었기에,
세이렌이라는 몬스터 –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홀리게 한 뒤 그 사람의 피를 빨아먹어
죽이는 몬스터 – 와 착각되기도 했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그들의 천상의 목소리는 물 밖으로 나오면 괴상하게 꺽꺽 거리는 목소리로 변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앞에 ‘물속에서’ 란 단서가 꼭 붙기는 하지만…
그래서 인어들은 노예매매상에게 잡히면 제일 먼저 목소리를 제압 당하고 마나 제어기를
달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영원히 말을 못하게 하는 건 아니고 마법을 걸어 놓는 것이기 때문에 마법만 풀리면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가끔 그렇게 찬사를 받는 인어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고객이 꼭 있기에 함부로 말을
못하게 할 수 없다나?
덕분에 우리에게 구출 받은 인어들은 그러한 구속에서 모두 풀려났기에 나는 솔직히 크게
긴장하지 않고 있었다.
혹시라도 모를 사태가 있을때에 그들은 내가 도와주기위해 다가갈 잠시의 시간을 벌 정도의
능력들은 모두 충분히 가지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 곳은 울 아부지의 영역이고 말이다. 훗훗훗….
‘그래도 완전히 나태하면 안되겠지만…’
“자, 그러면 우리도 출발하도록 하죠?”
내가 먼저 앞장서서 바다속을 헤치며 나아가자 그들도 곧 뒤를 따랐다.
그 인어들의 양 옆쪽과 뒤쪽에는 내가 불러넨 물의 중급 정령 운다인들이 호위하듯 따르고
있었고, 내 앞에는 이 주위를 담당하는 엔다이론이 붙어 있었다.
이 주위에는 내가 놀았던 구역(?)이 아니었기에 나는 만약을 대비하여 그에게 같이 있어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인어의 섬에 도착할때까지는 인어들이 바다 속에 있을때 나는 계속 그 근처에 있는 엔다이론
들을 불러내어 같이 있어줄 것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나는 내 옆에서 조용히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는 엔다이론을 보며 싱긋 미소를 지어준 후
뒤를 따르는 인어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지금 나는 내 힘으로 바다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불러낸 엔다이론이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 물론 엔다이론에게 내 마나를 공급하기는 하지만… – 내 앞의 장애물을 신경쓸 필요가
전혀 없어 이렇게 딴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지테크스 상회에서 구출된 다른 이종족들은 힘이 없는 어린 아이들이나 아니면 여자들인
것에 비하여 지금 내가 데려가는 인어들 중 8명이 성년이 남자였다.
물론, 성년이 된지 얼마 안되긴 했지만…
그리고 나머지가 성년 여성이고,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고 하니,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인어들의 영역 주위에는 인어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탓에 인어들은 태어나자마자 성년이 될 때까지는
어른 인어들이 보호하는 영역에서 조금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걸 철저하게 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성년이 된 해부터였기에 그때 호기심으로 갓 성년이 된
인어들이 나이 많은 인어들의 충고를 무시하고는 처음부터 영역에서 너무나 먼 곳으로 갔다가
몬스터들에게 당하거나, 아니면 그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노예매매상들에게 잡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지금 내 뒤를 따르는 그 인어들이 바로 그 어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멀리 멀리 갔다가 노예
매매상에게 잡힌 이들이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인어들이니, 아마도 이들은 인어들의 영역으로 돌아가면 이제부터는 어른들이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아주 잘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지시를 아주 잘 따라줄테고 말야.’
바다 속에서 산다는 몬스터를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믿는 구석이 있는 터라 크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 나는 이번 일정이 시간만 오래 걸릴 뿐 크게 어려울 게 없으리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런 태평한 나의 예상은 곧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어지고 말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될
줄 모르는 나는 나를 잘 따라주는 인어들이 좋게만 느껴졌다.
가끔가다 한번씩 돌아보아 그들이 잘 따라 오는지 확인하는 걸 잊지 않으며 앞으로 전진
하는데 바다 표면에 보내놨던 운디네가 내 곁으로 내려왔다.
잭슨이 보낸 실프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좋아, 앞장 서줄래?”
바다 위의 허공에서는 실프가 잭슨을 향해 날아가고, 운디네가 바다 표면에서 그 실프를 쫓아
가면, 바다 밑에 있는 엔다이론이 운디네를 쫓아 길을 안내하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
형식이었다.
‘아아, 줄줄이 비엔나란 바로 이런 것이겠지? 잭슨이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잭슨이 보내온 실프를 따라서 30분 정도 빠른 속도로 바다 속을 질주하다보니 저쪽에 바다
속으로 푹 들어와 있는 배 밑동이 보였다.
굵고 길다란 쇠사슬에 매달린 닻이 내려져 있는 걸 보니 잭슨이 정령을 보낸 뒤 우리가
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다른 배일 수도 있는 일이라 나는 인어들은 바다 밑에 잠시 머물게 하고
나와 엔다이론만 위로 올라가 고개를 내밀어 보니 그 곳에는 계속 그러고 있었던 듯 레이언과
잭슨, 그리고 해민이와 듀비가 배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어~ 일찍 도착했구나?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 알았으면 닻은 내리지 않는건데…”
먼저 내 얼굴을 발견한 레이언이 손을 흔들며 외치자 나도 그 배 밑으로 다가가며 대꾸했다.
“헤에, 너네도 지금 막 멈춰선 거였냐? 듀비, 당신은 배를 타고 가는데 괜찮았어요? 해민이는?”
“저는 괜찮습니다. 이 곳에 올때도 배를 타고 왔으니까요. 하지만… 이 녀석은 조금 지친
듯 싶습니다만…”
그러자 해민이가 즉시 으르렁 거렸지만, 왠지 안색이 별로 안 좋아보였다.
“으음… 해민이는 배를 처음 타는 거지? 이거 괜찮으려나?”
해민이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중얼거리자 잭슨이 끼어들었다.
“괜찮을 거야. 아까 약을 먹였으니까 심하지는 않을테고, 밥이 그러는데 수인족들은 쉽게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고 했으니 아마 내일이나 모래쯤이면 팔팔해질 거야.”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의 말에 작게 안도한 내가 주위를 둘러보니 아주 저~~ 멀리 그레이험 항구도시가 있을,
육지인 듯 싶은 아주 까맣고 내 엄지 손톱만한 점이 보였다.
그 외에는 하늘과 바다만 보이는 것이, 이 넓은 바다 위에 우리 배 한척만 달랑 떠 있었다.
하기야, 며칠 전의 그 강한 폭풍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배가 망가졌다는 소릴 들었으니 지금
항해할 수 있는 배는 거의 없을 터였다.
“음… 생각보다 꽤 많이 왔네.”
“운이 좋았지 뭐. 좀 나오자마자 순풍이 불어와가지고 생각보다 더 빨리 올 수 있었거든.”
내가 저 멀리 까만 점으로 보이는 육지 쪽을 바라보며 말하자 레이언도 나와 같은 쪽을
바라보며 냉큼 말을 받았다.
“뭐, 그게 아니라도 빨리 올 수 있었잖습니까? 원래는 마법사분들께 부탁해서 마법으로 바람을
불게 할 생각이셨으니까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괜히 마법사들 기운을 빼지 않게 되어 다행이잖아?”
잭슨과 레이언이 말을 주고받을즈음, 인어들도 하나 둘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 그러면 배로 옮겨타실래요? 전속력으로 달려왔을테니 힘드셨을텐데…”
그들을 향해 레이언이 묻자 인어들은 일제히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두, 세시간 정도는 정말 빠른 속도로 달려왔건만, 그들의 체력상으로는 이 정도는 까딱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배는 엄청 피곤해서 나가떨어질 정도가 아니면 타고 싶지 않거나…
“그래요? 그럼 조금 더 바다 속에 계세요. 하지만 힘들면 해인이에게 말씀하셔서 배 위로
올라와야 합니다.”
레이언이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로 말하자 그들은 모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
거리고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레이언이 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그렇게 되었으니까 조금 더 부탁한다.”
“그러지 뭐.”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옆에 있던 잭슨이 히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좋겠다~ 저렇게 미남 미녀들에게 둘러싸여서 갈 수 있다니… 완전 천국에 온 기분
이지?”
“천국?”
그의 말에 피식 실소가 나왔다.
‘원한다면 기꺼이 교체해줄 수도 있는데…’
인어들의 피부는 햇볕을 많이 받지 않아서 그런지 안의 실핏줄이 보일 정도로 하얗고 투명
한데다가 바닷물로 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함인지 약간 끈적끈적한 분비물이 둘러쌓고
있었는데 – 마치 개구리의 피부 처럼 말이다 – 그 분비물 때문인지 피부는 마치 기능성 화장품을
잔뜩 바른 피부처럼 촉촉하고 기름기가 자르르 흘렀다.
거기다가 인간과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니 기미 주근깨는 물론 여드름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에 옅은색의 눈동자는 정말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대부분 원색에 가까운 빨강, 주황, 밝은 초록, 에메랄드색, 밝은 파랑, 금발
등등이라서 그들의 아름다운 외모를 한층 더 빛나도록 받쳐주고 있었는데, 나는 아름다운 건
둘째치고 어두침침한 바다 속에서도 확 눈에 뜨이는 색들이라는 것 하나는 무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이런 조건들 때문에 인어들이 미남 미녀로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순전히
햇볕 아래에서나 그렇게 보이는 거지, 햇볕이 잘 안 드는 어두침침한 물속에서 창백한 얼굴
주위에 빨갛고 파란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헤엄치는 걸 보면 소름이 오싹 끼친다.
햇볕이 강해 바다 속 깊이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낮에는 인어들을 보면 정말 신비스러운
분위기이지만, 햇볕의 기운이 약한, 이른 아침이나 어둑어둑해질때의 저녁에 보면… 예전에
영화에서 본, 지저분한 물속에 마네킹이 가라앉아 물결에 따라 하늘하늘거리는 몰골을
실제로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나마 지금은 그다지 깊지 않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어 괜찮지만, 출발하기 얼마 전 저녁에
인어들과 인사를 하느라 바다 속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꼈던 오싹한 기분이란…
더구나 예전에 물속에서 팅팅 불은 시체를 한번 만나 크게 놀랐던 경험이 있었던지라 더더욱
몸서리치는 건지도 몰랐다.
그 뒤에 왜 저녁에 그들을 만나러 갔을까… 하고 얼마나 후회를 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훈련때문에 낮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저녁에 빅터가 그들을 만나게 해준 거였는데
아마 빅터 또한 어두컴컴한 곳에서 그들을 본 적이 없어 아무 생각없이 짬이 나는 그 시간대에
만나게 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 한번 놀란 뒤로는 아무리 낮에, 빛에 의하여 아름답고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들과
같이 동행하게 되었다고 해도 절대로 아름답게 비춰지질 않았다.
레이언의 출발하자는 말에 따라 배는 다시 닻을 올리고 천천히 출발했고, 나는 인어들을 데리고
바다 속에서 그런 배를 따라 움직였다.
해질때까지 아무 사고없이 무사히 항해를 한 후 밤이 되어서 인어들이 잠자리에 들고 싶어하자
나는 그제야 인어들을 위하여 미리 마련된 배 위의 미니 풀장 같은 곳에 그들을 옮겨 두고 나에게
배정된 선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곳에는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해민이가 평소보다 기운 없는 몸짓으로 나에게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에구, 미안… 해민이 괜찮아?”
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묻자 해민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해
보였지만, 아무래도 안색이 파리한게 평소보다는 좀 안좋아 보였다.
“저녁은 제대로 먹은거야?”
내 질문에 배시시 웃어보이기만 하는 해민이를 대신하여 듀비가 대꾸했다.
“조금밖에 못 먹었습니다. 그것도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겨우 겨우 먹은 거죠. 지금은
약도 다시 먹은 상태입니다.”
“그래요? 으음… 나 때문에 해민이만 고생시키는 거 같네?”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중얼거렸는데, 녀석은 그걸 자신을 놓고 올 걸 그랬다는 푸념으로
생각했는지 얼른 나에게 더욱 더 꼬옥 달라붙는 거였다.
그에 나는 하하 웃으며 해민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듀비가 말을 걸어왔다.
“내일도 바다 속에서 계셔야 합니까?”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아요. 오늘 보니까 인어들이 될 수 있는 한 바다 속에 있으려고
하는 것 같더라구요.”
“하지만, 해인님이 힘드실텐데요.”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는 듀비의 시선에 나는 괜히 찔려서 얼른 손을 내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오늘 해보니까 크게 힘들지도 않더라구요.”
내 몸둥이 하나 바다 속에 빠져도 잘 살수 있는 나였는데 말이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힘들면 그 인어들이
뭐라 하더라도 그냥 배 위로 올라오십시오.”
“하하하, 그럴게요.”
듀비의 걱정스러운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태평한 마음가짐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생각했던 것 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정이 될 거 같다고 여유롭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뒤 나는 생각을 조금 수정했다.
어렵지는 않지만 엄청 열받게 하는 일정이라고 말이다.
그레이험 항구를 떠나 무사히 레이언등이 타고 있는 베지테크스 상회의 배와 조우한 후
호바트해를 향해 출발하는 며칠동안은 정말 하품이 나올 정도로 따분했다.
아침이 되면 인어들을 바다 속으로 내려주고, 그 곳에서 배가 항해하는 것을 따라 쭈욱
전진하다가 인어들이 피곤하거나 아니면 잘 시간이 되면 다시 배로 올려주는 것이 내가
한 일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오죽했으면 엄청 지루해서 내가 그 바다 속에서 마법책을 보며 공부할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할 정도였을까?
내가 이 정도였으니 한창 피 끓는 나이(?)의 젊은 인어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처음 사람들 눈을 피해 올때만 해도 직접 말은 안 했지만 무지 긴장해서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더니 며칠 동안 아무일도 없자 슬슬 긴장이 풀리면서 주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거였다.
거기에는 배의 속도도 한 몫을 했다.
이 무지 커다란 배는 오로지 바람의 힘을 받아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으니 바람이 잘 불어주는
날에는 전진 속도가 빠르지만 약한 날에는 현저없이 느려지는 거였다.
그렇다고 언제 어느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마법사들이 바람 없다고 마법을 써줄
수도 없는 일이고, 나도 바다 속에서 인어들에게 매어 있는 몸이라 힘을 써줄 수도 없어
그냥 바람이 불어주는 거에 맡겨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속도가 바로 문제였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배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그건 인어들이 바다 속에서
빠르게 헤엄치는 속도에 비하면 느린 속도였다.
그나마 그럴때는 그래도 많은 거리를 가야하기 때문에 인어들이 장거리를 뛴다 생각하고
배의 주위에 얌전히 붙어 있기는 했지만, 속도가 느려지면 몸을 배배 꼬면서 지루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거였다.
그러더니만 기어코 ‘조금만 놀다 올께요.’ ‘잠시만 갔다 오면 안될까요?’ ‘저기만 갔다 올게요.’
에서부터 시작하여 ‘앗, 저기에 뭐가 있는 거 같아요.’ ‘생선을 잡아올께요.’ 등등의 별의 별
핑계를 다 가져다 대면서 배에서 멀리 떨어져 돌아다니는 거다.
처음에는 안된다고 했지만, 그러니까 이제는 슬그머니 말도 없이 뒤로 빠지는 거다.
물론, 그때마다 내 곁에 항상 붙어있는 엔다이론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럴때마다
잠시만, 잠시만… 그러면서 무지 애처럽게, 아니면 엄청 귀찮게 졸라대는 거였다.
그러면서 정말 아주 잠깐 동안만 갔다오면 내가 또 이렇게 열이 받질 않는다.
그렇게 허락해줬으면 내가 걱정하기도 전에 올 것이지 이건 내가 정령을 보내서 끌고 올때
까정 감감 무소식인 것이다.
얼마나 열받았으면, 부글부글 끓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깍듯이 예의를 지켜 ‘이제
가셔야죠.’ ‘시간이 되었습니다.’걱정 했잖아요.’ 등등 공손하게 대했던 내가 일주일 쯤 지나자
막가회에 가입서를 내고 회원이 되어버렸겠는가?
‘야, 안와?’ ‘확 끌고 온다?’ ‘묶어놓을까보다!!’ ‘당장 안 오면 배로 던져 버린다?’ 등등의
반말은 기본이고 협박까지 서슴치 않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협박은 그들에게 씨알도 안 먹혔다.
처음에는 하도 자기들 멋대로 해서 바다 속으로 데려다 주지 않고 그냥 배에 두었더니만
이들이 자신의 능력, 즉 물을 다룰 수 있는 술사의 능력으로 – 주위가 온통 물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 배를 빠져나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그래서 열받아서 운디네들을 잔뜩 불러서 그들을 거의 묶다시피 해 내가 끌고다녔더니만
얼마나 서럽게 울면서 징징대는지… 정말 성년이 된 게 맞는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것도 12명이나 되는 인어들이 내 주위에서 서로 풀어달라고, 이럴수가 있냐고, 약속이
틀리지 않냐고 떠들어대니 그들의 입을 막지 않고서는 내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내가 입을 다 막아버리면 그들이 노예매매상에게 잡힌 것과 뭐가 다르겠냐고
내 고충을 모르는 레이어 녀석과 잭슨 등등이 – 인어들이 그들에게 다 꼰질렀던 것이다. –
나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입을 막지 않는 대신 내 주위에 정령들을 동원해서 소리가 통하지
않는 방어막을 쳐버렸다.
그랬더니만… 이 괘씸한 인어 녀석들이 시끄럽게 짹짹대도 안 통하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자신들의 힘으로 운디네의 결박에서 벗어나서 도망치는 거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바다 속에서 인어들을 잡기 위한 정말, 열받고도 열받는 술래잡기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이 인어 녀석들은 그걸 또 무지 재미있는 걸로 생각해서 사방으로 잽싸게 도망을 치는데다
자신들의 능력을 다 동원하여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에 아무리 나라 해도 그들을
모조리 잡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러다보니 배와의 거리가 멀어져서 황급히 배를 쫓아가고…
그 다음날 부터 정말 며칠간은 그런 술래잡기에 재미를 붙인 인어들은 내가 미처 선실에서
나와 그들을 바다 속으로 넣어 주던지, 아니면 협박을 해서 배애 잡아두기도 전에 자기들
끼리 배를 빠져나가 도망가는 것이다.
나보고 잡으러 오라는 것인 양…
그러면 레이언 녀석은 또 뭔 일 있을지 모르니 데려와달라고 사정사정하고…
‘어휴… 내가 못살아, 정말…’
바람난 남편을 둔 부인이 하는 대사를 내가 하루에도 수십번씩 중얼거리게 될 줄이야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내 한국에 있을때 요정들이나 무지 장난꾸러기라고 들었지만서도, 살다살다 -비록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 이렇게 말 안 듣는 철 없는 장난꾸러기들은 정말 처음봤다.
겉만 멀쩡하고 우아하고 현명하게 생겼으면 뭘 하겠는가?
자기네를 지켜주는 내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물론 나이 지긋한 인어들은 어떨 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데리고 가는 인어들은… 에휴,
정말 내가 나이가 좀 더 많았다면 엎어놓고 엉덩이를 팡팡 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그렇게 어른들 말 안 듣고 혼자 멀리 멀리 갔다가 노예 사냥꾼들에게 잡혀서 그렇게
무시무시한 경험을 – 설마 노예가 된 것이 그냥저냥한 경험이었겠는가? 목숨이 왔다갔다 했을
그런 경험이었겠지… – 했으면 이제 정신을 차리고 좀 지루하더라도 자신들의 영역에 도착할
때까지만이라도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하는게 아니냔 말이다.
그것도 솔직하게 액션 영화나 공포 영화를 보면 사람들 중에 꼬옥 몇몇은 말 안듣고 혼자
행동하다가 위험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었지만, 우째 내가 데리고 가는 인어들은
한, 두명도 아니고 전체가 다 이럴수가 있는건지… 나는 정말 그들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이가
빠득 갈릴 정도였다.
결국 그들에게 시달리다 시달리다 못한 나는 제풀에 지쳐서 그냥 그들을 내버려 두게 되었다.
단지 그들 옆에는 운디네를 한명씩 붙여 놓아 어디에 있든지 금방 내가 알 수 있게 하고는
어두워질때쯔음 해서 엔다이론과 운다인들을 수십명 불러내어 한꺼번에 잡으러 가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래 그들이 어디서 뭘 하건 신경을 끄고 나도 내 시간을 가졌다.
물론 그들이 배에서 멀리 떨어지는 건 막기 위하여 그들 개개인에게 운디네를 붙여놓는 것
말고도 운다인들을 불러 감시하게 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그들도 운다인 정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개개인이 가지고 있으니
있어봐야 그리 큰 일이 나겠나 싶었다.
그러는 동안 배는 전진에 전진을 거듭하여 아스타르드 국에 속해있는 어떤 항구 – 나는
인어들을 데리고 멀찍이 떨어진 바다 속에 대기하고 있느라 가보지는 못했다. – 에 잠시
들려 식량과 물을 공급 받았다.
레이언 말에 의하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거리만 봤을때 드디어 1/3 정도 왔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드디어’가 아니라 ‘이제 겨우’였다.
1/3 정도 오는데 그렇게 골머리를 썪게하는 인어들이었는데 나중의 2/3 거리를 갈 때는
과연 어찌할것인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생각이 너무 강했던 것인지, 아스트라드국의 항구에서 보급을 마치고 다시 깊은 바다로
나온 배와 조우할 때 레이언이 조심스레 나에게 충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흘려듣고 말았다.
“여기서부터는 가끔 바다의 몬스터들이 나온다고 해. 그러니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사실은, 그 몬스터라는 것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그런가보다… 라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렇게 다시 배와 조우한 우리는 호바트 해를 향해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인어들은 여전히 멋대로 내 곁을 벗어나 자기들끼리 놀러 다녔고, 나 또한 그들이 너무 배
주위에서 벗어나 운다인들이 경고를 보내오기전에는 조금의 관심도 쏟지 않은 채 엔다이론의
등에 올라타 마법책을 펴들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주위에서 느껴지는 색다른 기척에 놀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기척은 고요하고도 무척 거대해서 마치 조용하고 도도하게 흐르는 커다란 강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그런 감정과 비스므무리 했다.
과연, 내가 시선을 보낸 그 곳에는 내가 한국에서 봤던 한강만큼이나 아주 거대한 물체가
스르륵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 배가 지나가고 있는 것은 무척 깊은 바다 위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밑바닥이 어두움에
휩싸여 보이지 않아 과연 얼마나 깊은지 나도 모를 정도로 깊었다.
아마 최소한 바다 속에 있는 우리집 주위의 바다 깊이보다 두 세배는 더 깊은 곳일 거다.
그래 인어들이 너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가 혹시 뭔 일이 있으면 어쩌나싶어 신경을 안 쓰려고
했어도 어쩌다보니 나도 우리 배의 밑동이 내 손바닥 두 세개 정도 합친 것만하게 보일 정도로
꽤 깊이 내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커다란 바다 속 생물체를 – 그건 절대 물고기가 아니었기에 – 만나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 생물체는 커도 너무 컸다.
지구에서 가장 큰 생물체는 흰수염고래라고 들었던 적이 있는데, 이 생물체하고 그 고래하고
비교한다면 삐까삐까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거대한 생물체가 움직이는데 바다 속은 평소와 같았다.
그 큰 몸체가 움직이는데도 천천히 움직여서 그런지 큰 물결의 요동이 일어나지 않는 거였다.
하기야, 그 생물체의 생김새도 물결이 요동치지 않게 하는데 한 몫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생물체는 전체적으로 보자면 가오리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모꼴의 몸통에 뒤로는 엄청 굵고 길다란 꼬리가 천천히 좌우로 흔들려서 마치 남산 타워가
왔다갔다 하는 것만 같았다.
가오리처럼 양 옆에 눈이 달려 있고 입은 몸의 아래쪽에 있었는데 주식이 생선인지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살짝 튀어나온게 언뜻 보였다.
몸 전체는 두가지 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위에는 정말 청명한 파란색이었고, 아래에는 하얀
색이었는데 거대한 몸에 너무 잘어울려 전체적으로 그 커다란 가오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와우~!!”
그렇게 거대하고 아름다운 가오리가 천천히 내옆을 지나가는데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뭉클한
감동이 마음속에서 부터 솟아나와 온 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 가오리를 조용히 바라보는데 마침 가오리의 눈이 바로 내 눈 높이의 위치에서 스르륵
지나갔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가오리가 바다 속에 동동 떠 있는 내가 신기했는지 새까맣고 커다란 눈동자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보는 거였다.
아기의 순수한 눈동자 같으면서도 어딘지 함부로 범접 못할 그런 기운이 서려있는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데… 이런 일은 정말 직접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런 감동 모를 것이다.
나를 위해 하려는 것도 아니니 두려움은 생기지 않았다.
단지 위대한 자연의 산물을 보는 것만 같은 경의로움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아마도, 높은 산에 등산하러 올라가 꼭대기에 다다라 안개와 구름이 가득하게 낀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동이 이와 같을지도 몰랐다.
평소 쉽게 느낄 수 없는 그러한 감동에 도취된 나머지 나는 그 거대한 가오리가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스윽 지나쳐 저 멀리 사라져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 엄청 거대한 가오리가 아주 조그마한 점이 되고도 아예 눈에서 안보일때까지
계속해서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와…. 정말 엄청나게 대단하구나. 저렇게 큰 생물은 정말 처음 봤어.”
내가 여전히 가오리가 사라진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내 옆에
붙어 있던, 이 근처를 담당하는 엔다이론이 말을 받았다.
[이 주위에는 저렇게 큰 생물체가 많지요. 인간들이 몬스터라고 부르는, 공격형 생물도꽤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엔다이론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양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주위 바다 속을 흔들었다.
“꺄아아악~~!!”
[인어가 공격 당하고 있습니다!]그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한명의 운디네가 나에게 달려와서 알렸지만, 그 전에 이미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챈 나는 대충 고개만 끄덕여준 채 비명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렸다.
[인어가 공격 당하고 있습니다!]그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한명의 운디네가 나에게 달려와서 알렸지만, 그 전에 이미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눈치챈 나는 대충 고개만 끄덕여준 채 비명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렸다.
그 인어는 얼마나 멀리 가 있었는지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한참 더 밑으로 내려가고 거기서도
더 배에서 멀리까지 가서야 겨우 그 인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인어의 뒤로는 아주 거대한 뱀 모양의 시커먼 괴물체가 뾰족한 이빨이 다 드러나도록 커다란
입을 벌린 채 인어를 쫓고 있었다.
인어는 그런 무서운 기세에 넋을 잃은 듯 멍하니 있었고, 대신 내가 그의 곁에 붙여 놓았던
운디네가 그를 이끌고 열심히 도망치고 있는 거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인어들도 한 인어의 비명 소리를 들었는지 그 주위에 몰려와 위험한
자신의 동족을 어떻게든 도우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너무 두려워 가까이 가지 못한 채 자신들의 힘을 써서 그런지, 아니면 그
거대한 뱀 괴물이 그 정도에는 까딱도 안 해서 그런지 그들의 능력은 그 괴물 뱀의 속도를
조금씩 늦춰주는 역할을 했을 뿐, 그 괴물 뱀에게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우와, 도대체 저게 뭐지?”
[일이라는 대형 뱀장어 몬스터입니다.]“뱀장어?”
그러고보니 뱀장어처럼 길쭉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원체 얼굴이 흉악하게 생겨서 뱀장어도
뱀도 전혀 안 닮았다.
단지 길쭉한 몸이 비스무리 하달까?
나는 엔다이론을 세명이나 더 불러낸뒤 인어들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모두 배로 가. 빨리, 빨리~!!”
그리고 운디네를 한명 더 불러서 온 몸이 굳어진 인어를 힘겹게 끌고 오는 운디네를 돕게
했다.
엔다이론을 불러내기는 했지만 너무나 거대한 괴물이라 나는 죽인다는 생각은 못하고
우선 인어들이 배에 가는 시간을 벌어야겠다고만 생각했다.
나의 부탁을 들은 세 엔다이론은 그렇지 않아도 나 만큼이나 큰 몸집을 더욱 더 크게 만들어
-그래봤자 그 괴물 뱀장어보다는 작았지만… – 괴물 뱀장어에게 달려 들었다.
한명은 꼬리를, 한명은 중심부를, 한명은 그 머리 부위를 꽈악 물고 늘어지자 괴물 뱀장어의
속력이 줄어들었다.
아니, 자신의 몸에 들러붙은 엔다이론을 떼어내기 위하여 잠시 그자리에 멈춰서서 온 몸을
비비 꼬며 뒤흔들어댔던 것이다.
나는 그틈에 이제 나에게 가까워진 인어를 받아들고 잽싸게 배쪽으로 달려갔다.
바다 밖으로 나와보니 레이언을 위시한 많은 무사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내가 뛰쳐 나오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괴물 뱀장어가 나타났어. 저기 인어들은 다 왔지?”
“그래, 무사히 왔다.”
“다행이군.”
레이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인어를 재빨리 다른
인어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고 왔다.
그때 즈음에는 이미 머튼의 지휘 아래 무사들과 마법사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리를
잡은 채 긴장한 모습으로 바다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괴물 뱀장어가 어디로 튀어나올 지 모르기 때문에 무사들은 거의 배 갑판을 빙 둘러
서다시피 하여 배의 사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출발하기 전에 교육(?) 받은 대로 듀비와 해민이를 데리고 다른 마법사, 잭슨과
함께 갑판 중간쯤에 서 있었다.
선원들도 배를 조정할 최소 인원만 남고 모두 갑판 밑으로 내려간 상태였다.
하지만, 처음 몬스터가 나타나는 거라서 그런지 대부분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 있다기
보다는 여차하면 들어갈 태세로 몸을 반쯤 밖으로 빼내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레이언과 그의 부관으로 온 사무요원도 마찬가지였다.
레이언 녀석은 실력이 있다고 아예 대놓고 우리 옆에 버티고 서 있었고, 사무요원은
다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선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반쯤 몸을 넣은 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밖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상회에서 사무 처리에 관한 경험은 풍부했지만, 이렇게 호바트해로 가는 항해에
참여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었으니 평소 냉정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해도
궁금증을 참기 힘들었나보다.
그런데,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한참을 기다려도 괴물 뱀장어가 나타나기는 커녕
날치 한마리 나타나지 않는 거였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사람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기다렸지만, 그래도 계속 안 타나서
머튼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왜… 안 나타나는 거지?”
“글쎄요…”
뭐 그 또한 나에게 정확한 답을 구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지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냥 간 거 아닐까? 네가 너무 빨리 도망쳐서 네 흔적을 놓쳤다거나…”
레이언이 슬쩍 말을 해봤지만 자기 스스로도 그럴 확률이 적다고 느껴졌는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보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어쩌면 그럴수도 있겠네… 사실, 내가 인어를 데려오면서 너무 급해가지고
엔다이론들을 불러서 저지시키고 왔거든.”
내가 머쓱하게 입을 열자 잭슨이 놀란 어조로 끼어들었다.
“엔다이론? 물의 상급정령?”
“응, 급하니까 엔다이론을 부르게 되더라구.”
그러자 잭슨이 허망하다는 어조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너 최상급 정령사였지? 이봐, 일 정도면 너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지 않아? 엔다이론만으로도 충분할 걸? 우리로써도 약간 힘들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처리 못할 정도의 몬스터는 아니라고.”
“그, 그래?”
그런건 생각도 못해봤다.
처음 보는 몬스터라 어느 정도 강한지도 모르는데다, 인어들이 너무 무서워해서 나도
덩달아 어찌해볼 생각은 못하고 냅다 줄행랑을 쳐서 배로 돌아오는 것 밖에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아니, 그런데 그 정도면 인어들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았을라나?’
인어들에게도 각자 물술사의 능력이 있었으니 쉽게는 안되더라도 힘을 합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나도 도왔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것도 모르고 무조건 놀라고 무서워해서 도망쳤으니 그 인어들은 어지간히
바다 속 경험이 없었나보다.
물론, 나도 몰라서 같이 도망쳤으니 할 말은 없지만…
“네가 엔다이론을 불러서 저지시켰다면 아마도 지금쯤 계속 거기서 엔다이론과 대치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 그럴지도…”
그럴지도가 아니라 정말 그러고 있는 듯 했다.
“저기… 아무래도 내가 한번 갔다오는게 좋을 거 같아.”
나 혼자 몬스터가 있는 바다 속에 들어갔다고 온다고 하는데도 아무도 말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 잘 생각했다.’ 라는 눈빛을 보내는 이들까지 있었으니…
‘참내, 내 실력을 믿어주는 건 좋지만, 너무들 하는 거 아냐?’
나는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며 유일하게 나의 편(?) 이라고 할 수 있는 듀비와 해민이를
돌아보았다.
“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듀비와 해민이는 무지 염려스러운 기색이었지만, 그들이 바다 속에 따라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십시오.”
듀비의 걱정스러운 당부의 말과 해민이의 포옹을 기분좋게 받으면서 나는 배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잘 갔다와~!!”
“올때 이왕이면 물고기도 잡아와주면 고맙고~!!”
옆집 놀러가는 애 배웅하는 듯한 잭슨과 레이언 녀석의 배웅에는 대꾸도 안 한 채 나는
바다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혹시나 모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엔다이론을 옆에 불러내서는 아까 괴물 뱀장어를 마지막
으로 봤던 곳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니 그 곳에는 세 엔다이론이 괴물 뱀장어를 물고
늘어져 꼼짝도 못하게 제압하고 있었다.
[헤에… 정말 엔다이론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하잖아?]세 엔다이론은 정말 여유만만해 보였기에 나는 조심하면서도 슬그머니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다가가는 내 기척을 느낀 것인지 꼼작 못하는 상황에서도 괴물 뱀장어가 까만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거였다.
그에 괜히 놀라서 움찔 거리는데 이 뱀장어가 나를 계속 바라보면서 제압당해 제대로 못
움직이는 몸을 자꾸 꿈틀거리는 거였다.
이 녀석이 영리해서인지 내가 엔다이론을 불러 자신을 제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
싶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를 바라보는 뱀장어의 눈에 눈물이 촉촉히 고이기 시작하더니 무지
애처러운 울음소리까지 내는 거였다.
끼이익~~ 끼이익~~
엔다이론에게 제압당해 움직이도 못하는 상태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처럽게 우는
그 뱀장어를 보자니 처음에 무서운 감정이 사라지고 왠지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따지고보자면 이 뱀장어도 우리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먹이감(?)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달려들었을 거였다.
그건 자연의 섭리일 뿐 큰 잘못도 아니고, 게다가 우리 일행이 다친 것도 아니고 나에게
제압된 상태이니 위험해보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어떻게 되었나 보기 위해서 내려왔지 이 뱀장어를 꼭 죽여버리겠다는 마음
같은 건 없었기에 그 뱀정아거 그렇게 애처럽게 구니까 마음이 되게 약해졌다.
[으음… 그냥 놔줄까? 불쌍한데… 이대로 놔주면 그냥 도망치지 않을까?]그 뱀장어의 모습을 보며 옆에 나를 따라왔던, 이 주변을 담당하는 엔다이론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글쎄요… 하지만, 좋을대로 하십시오. 이대로 놔준다고 해도 저 녀석이 위협이 되는 것도아닐테니까요.] [저기, 너는 여기서 오래 있었을테니까 예전에 저 녀석이 혹시 인간의 배를 습격한 일을
본 적 없어? 그때는 저 녀석이 어떻게 했지?] [음… 인간이 타고 있는 배를 일부로 공격을 한 적은 없습니다. 가끔 공격을 할 때도
인간들이 저 녀석의 성격을 어쩌다 건드려서 그렇게 된거지만… 그럴때는 악착같이
공격을 하죠.] [그, 그래? 으음….]
악착같이 공격한다는 말에 나는 그냥 여기서 놔주지 말고 엔다이론들에게 부탁해서
저~ 멀리 끌고 가서 놔주라고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런 나의 망설임을 어떻게 생각
했는지 엔다이론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신이 상대도 안된다고 여기면 그냥 물러나는 녀석이죠. 그러니 그냥 놔주심이어떨까 싶습니다만… 일부러 생명을 해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원하시는대로
하십시오]
원래부터 마음이 많이 악해져 있는데다가 은근히 그냥 놔주길 바라는 엔다이론의 말까지
듣고나자 나는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마음이 약해져 있기는 하지만, 그 괴물 뱀장어가 몬스터라는 사실에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죽여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사람들 사이에서는 몬스터 하면 그 몬스터가 어떤 것인지 성격 파악(?)을 하기에 앞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도 은연중에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괴물 뱀장어거 불쌍하게
생각되었어도 그냥 놔주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엔다이론까지 그렇게 말해주니 나는 망설임을 접을 수 있었던 거다.
[그렇지? 역시 그냥 놔주는 것이 좋겠어.]내가 손뼉까지 짝 치면서 말하자 왠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괴물 뱀장어의 눈에
살짝 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 녀석은 내가 정령의 대화법으로 엔다이론과 말을 하고 있는 건데 알아들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분위기를 보아 대충 때려잡던가…
하지만 막상 놔주려니 그 거대한 몸체를 바로 앞에 두고 그냥 놔주기도 왠지 무서웠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내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그걸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쓴 적도 없어 내 능력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는데다가 나보다 수십배는 더 큰 커다란
덩치를 내 코앞에서 그 속박을 풀어주는데 쪼금이라도 떨리면 떨렸지 태연할 수는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고 기분 좋게 놔주는데 무섭다고 엔다이론에게 부탁해 내 주위를 수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놔주라는 말을 하기전에 녀석과 약간이라도 간격을 넓히고 싶어서 슬그머니
위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는 엔다이론에게 애써 웃어보이며 필요 없는 변명을
했다.
[아하하… 이 녀석 놔주면 할 일도 없으니 다시 배로 돌아가야 할 거 같아서…]생각해보니 배로 돌아갈거면 그냥 옆으로 가도 될걸 괜히 위로 떠오른 것 같아 아차
싶었지만, 이제와서 다시 옆으로 갈 수도 없어서 계속 떠오르며 어느정도 거리가 멀어진
거 같자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능청스럽게 그 괴물 뱀장어를 속박하고 있는 엔다이론에게
말했다.
[아, 맞다. 저 녀석도 놔줘야지? 이제 그만 풀어줘.]그러자 뱀장어의 주위를 둘러 싸고 있던 엔다이론들이 자신들의 힘을 풀어버리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괴물 뱀장어는 자신을 꼼짝도 못하게 묶고 있던 힘이 사라지자 마치 정말 사라졌는지
확인을 하듯 슬그머니 몸을 움직여보면서 여전히 자신의 주위에 있는 엔다이론들을 둘러
보았다.
아무래도 여차 하면 자신을 다시 속박할 것 같아 그들의 눈치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내 부탁이 없으니 엔다이론이 뱀장어에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엔다이론의 포위망에서 스르륵 빠져 나왔다.
그런데, 포위망을 빠져 나가더라도 밑으로 빠졌으면 좋았으련만 하필이면 슬그머니 위쪽
으로 올라오는 거였다.
‘뭐, 뭐야?’
그에 놀란 내가 슬그머니 더욱 더 위쪽으로 올라가는데 우연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건지
슬쩍 고개를 돌린 괴물 뱀장어와 내 눈이 따악 마주쳐버렸다.
‘엑?’
그랬으면 내가 기껏 놔줬으니 고맙다는 시선을 보내고 자신의 갈 길을 가야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 뱀장어가 무슨 속셈인지 자신의 머리 위쪽에 있는 나에게 스르륵 다가오는
거였다.
처음에는 그에 움찔 놀라서 엔다이론을 부르려고 했지만, 나를 위협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듯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기에 나는 엔다이론을 부르지도 못하고, 또 녀석에게
겁을 먹었다는 걸 보여주기 싫었기에 더 이상 녀석에게서 멀어지지도 못한 채 속으로만
초조해 하면서 녀석이 다가오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뱀장어 녀석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멈춰섰다.
그와의 거리는 대충 10여미터 정도로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면 안심할 수 있는 거리였겠지만,
덩치 큰 녀석과 마주하고 있으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10배나 더 먼 거리라도 안심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긴장한 채 녀석을 쏘아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 어차피 이 주위에는 인어들도, 또한 상회의 배도 없었기에 나는 내 능력으로
물 속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 물을 다루는 내 능력을 사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말이다.
이런 내가 위협적이었던지, 아니면 처음 부터 나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던지 이
뱀장어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순간적으로 씨익 웃어보이는 거였다.
물론, 뱀장어가 정말 입을 벌려 웃어봤자 그게 웃음으로 보이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그런
느낌이었다.
‘헤에, 역시 고마워 하는 건가?’
녀석의 그런 반응에 나는 은혜를 아는 놈이라 생각하며 마주 웃어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것도 스르르 풀렸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그 틈을 노렸던 모양이다.
내가 씨익 웃어주자 놈은 이제 돌아가는 듯 슬그머니 몸을 돌리더니 갑자기 축 늘어져 있던
꼬리를 무섭게 휘둘러 나를 쳐버렸던 것이다.
[꾸에에엑~~]아무런 경계 없이 방심하던 차에 당한데다가 녀석의 내 몸뚱아라보다 더욱 더 굵은 꼬리의
힘찬 공격에 정면으로 맞은 나는 그대로 날려가버렸다.
하필이면 놈이 꼬리를 내리고 있다가 휘돌리면서 올려 처버렸기에 내 몸은 바다 표면까지
떠오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높은 허공까지 날려 올라가버렸다.
‘젠장, 저노무시키이이~~’
그 와중에 바라본 놈은 회심의 일격을 나에게 먹이자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잽싸게
도망치고 있었다.
간덩이가 부은 놈이라고 해도 후환이 두렵지 않을리가 없었던 것이다.
‘으아아아~~ 다음부터는 몬스터란 녀석들을 그냥 놔주더라도 반쯤은 죽여버리고
말겠어어어~~~’
온 몸의 뼈와 근육이 아우성을 치는 고통 속에서도 빠드득 이빨을 갈며 다짐하고 있는데
내 몸을 지배하던, 날 공중으로 날아가게 했던 힘이 다 했는지 서서히 멈추다가 다시 밑으로
추락하는게 느껴졌다.
어차피 아래는 바다였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물 표면에 욱신거리는 몸을
그대로 헤딩시키는 것은 엄청 아팠기 때문에 통증때문에 자꾸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는
정신을 간신히 간신히 끌어당겼다.
[에, 엔다이….]하지만, 내가 미처 엔다이론을 부르기도 전에 갑자기 내 몸을 누군가가 떡하니 붙잡는
거였다.
다행이 내 상태를 알고 있는 자였던지 부드럽게 잡았기에 나는 큰 통증을 느끼지 않고
허공에 멈출 수 있었다.
[아, 고, 고마…에엑~!!]내가 아까 곁에 데리고 있던 엔다이론인줄 알고 감사의 인사를 하며 돌아보는데, 생각도
못하고 있던 자가 나를 붙잡고 서 있자 나는 감사의 인사도 다 못한 채 두 눈과 입을 떠억
벌렸다.
너무나 놀랍게도 나를 잡고 있는 사람은 탐스러운 은빛 머리칼과 수염을 휘날리며 우람한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였던 것이다.
전에 엘라임과 싸울때 나를 대하던 태도로 볼때 절대 나에게 이러한 친절을 베풀 것 처럼
보이던 위인이 아니었는데, 그가 나를 떡하니 잡아줬으니 내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엘라임과 싸우던 당시 내가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팔을 잘랐던 것이 – 어차피 큰 타격도 아니었지만… – 생각나자 나는 잔뜩 긴장된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설마 그때의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건….’
그를 직접 겪어본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평소 엘라임에게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놈, 싸가지 없는 놈, 치사한 놈 등등… 안 좋은 묘사만 들은데다가 그때 잠깐 겪었을때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위인이라 생각 되었다.
그래 나이트급 정령들을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부른다고 상대가 될까 안될까, 머리
속에서 온갖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실피드가 갑자기 팔을 쓰윽
뻗어 내 뺨을 꾹 찔렀다.
“엥?”
별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무척 긴장을 하고 있던 상태라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바라보는데
실피드는 혼자서 뭘 생각하는지 고개를 갸웃 거리다 끄덕끄덕 하는 거였다.
[흐음… 역시 실체군, 실체야.]“무, 무슨…”
그의 영문 모를 행동에 내가 움츠리자 실피드가 나를 바라보더니 픽 웃었다.
[그렇게 겁 먹을 것 없다.]‘그렇게 말해도 어떻게 겁을 안 먹냐…’
속으로 투덜거리며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자 그가 다시 한번 픽 웃더니 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힘이 나를 감싸고 있는지 나는 밑으로 추락하지 않은 채 여전히 허공에
동동 떠 있었다.
그런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 구석을 세심하게 바라보던 실피드는 신기하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다시 나와 시선을 맞췄다.
[정말 신기하구나… 신기한 존재야. 내가 직접 보고 이프리트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서도…다시봐도 정말 신기하군. 어떻게 너 같은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원해서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서도… 동물원 원숭이 보는 듯한 그 시선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실피드가 무서운 관계로 입을 꾸욱 다물고 그의 눈치만 살폈다.
내가 그렇게 계속 굳어있자 실피드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굳어 있는 거냐? 겁 먹을 필요가 없다니까? 이프리트하고는 잘 논다면서?내가 이프리트보다 무섭게 보이냐?]
위압감만 가지고 본다면, 사실 엘라임이나 이프리트나 실피드나 다 비슷비슷했다.
하기야 셋 다 정령왕이니까 어느 누가 더욱 더 강하거나 그렇지는 않겠지만서도…
이프리트와 엘라임은 사이가 좋지만, 실피드와는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긴장하고 있을 수 밖에…
[아니… 뭐… 험험, 그러니까… 아버지하고…. 바람의 정령왕님하고… 사이가…음…. ]
곧이 곧대로 사이가 나쁘니까 나에게 해꼬지 할지도 모르잖아요… 라고 말할 수는 없어
얼버무렸지만, 그 정도만해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다.
[흐음, 엘라임 녀석이 너에게도 나에 대한 험담을 잔뜩 한 모양이지? 하여간 속 좁고성질 급한 녀석이라니까. 그러니 자극하는 재미가 있지.] [아니… 뭐…]
그의 말에는 아주 심히 공감하는 바였지만, 그의 앞에서 ‘맞아요, 맞아.’ 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던 터라 나는 머뭇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말하는 폼을 보니 엘라임과 매번 투닥거린다고는 해도 그를 미워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뭐, 내가 엘라임과 사이가 안 좋은 건 사실이긴 하지.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너에게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야. 설사 안 좋은 감정이 있다고 해도 너처럼
신기한 존재를 없애버리고 싶지도 않고…] [누가 누굴 없앤다고?]
실피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옆에서 차갑고 띠꺼운 엘라임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갑작스런 엘라임의 등장에 약간 놀랐는데 실피드는 눈치채고 있었던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누가 없앤다고 했냐?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지. 남의 말좀 제대로 듣는 게 어때?] [네놈 말은 듣고 싶지도 않아.]실피드의 유들유들한 말에 엘라임이 인상을 팍 쓰면서 틱틱 거렸다.
[하여간 속 좁은 놈이라니까.] [누굴 보고 속 좁다고 하는 거야? 네놈이야 말로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속을 가지고 있잖아!] [내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면 네놈 속은 밴댕이 소갈딱지만도 못하다.] [뭣이라? 이…]엘라임이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누군가가 그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아이고, 그만들 좀 해라. 언제까지 계속 싸울 거냐?]부드럽고 따뜻한 말투, 이프리트의 등장이었다.
그러자 실피드가 얼른 변명하려는 것 처럼 입을 열었다.
[아니, 이 녀석이 기껏 자기 아들을 도와줬더니만 시비를 걸잖아.] [뭐? 네 놈이 안 도와줘도 이 녀석은 잘만 살아. 솔직히 말해보시지, 네놈이 왜 여기와서내 아들에게 찝적 거린 거야?] [찝적 거리다니? 순수한 호의로 도와준 거 뿐이야.] [순수한 호의가 다 사라졌냐? 네놈이 순수한 호의를 보인다고 하면 지나가던 지렁이가
웃다 까무러칠 거다.] [호오, 그래? 그럼 네놈이 말해봐라. 내가 네 아들에게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바다로
떨어지는 거 기껏 잡아줬더니만…]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 바다로 떨어지는 걸 왜 잡아? 그리고, 네 놈이 방금 내 아들
볼을 은근슬쩍 만진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신기해서 그냥 한번 만져본 것 뿐이야.] [웃기지 마! 네 놈의 시커먼 속을 봐서는 절대 그냥 만졌을리 없어. 내 아들에게 흑심을
품은 거지?] [뭐? 네놈이야말로 속이 비뚤어졌으니 모든게 비뚤어져 보이는 거 아냐?]
엘라임과 실피드의 티격거림이 계속 이어지자 이프리트가 또 나섰다.
[둘다 정말 그만두지 못해? 아니, 아니다.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갈 테니 둘이서 신나게싸워라. 얘 아픈거 보이지도 않아?]
안 그래도 엘라임과 실피드의 티격거림을 구경하고 있는 동안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지금 몸이 안 쑤시는데가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그래서 틈을 봐서 이 상황에서 빠지려고 했는데 이프리트가 이런 내 상태를 알애채준
것이었다.
덕분데 티격대던 두 정령왕이 잠시 입을 다물고 내쪽으로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 어색해서 웃을 기분이 아닌데도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어보였더니 실피드가 다시
엘라임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여는 거였다.
[맞아, 이렇게 아픈 애를 기껏 도와줬더니 말야,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 망정…] [내 아들은 이 정도로는 까딱 없어. 네 놈이 도와줄 필요가 없단 말이다.] [하이고, 네 아들은 정말 너 같은 아버지를 둬서 불쌍하구나?] [누가 불쌍하다는 거야? 나 같은 대단한 아버지를 둬서 행운이지!]이프리트 때문에 잠시 중단되었던 티격거림이 다시 시작되자 이프리트가 한숨을 쉬더니
그의 커다란 날개로 나를 살며시 감싸앉아 실피드의 힘으로 부터 나를 빼내었다.
[그래, 싸워라 싸워. 덕분에 소멸할때 까지는 심심하지 않겠다.]혼잣말 같았지만, 두 정령왕에게 들릴 정도로 컸기에 나는 그의 품에 조심스레 안기면서
힐끔 두 정령왕의 표정을 살폈다.
실피드는 머쓱한 표정이었고, 엘라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다가 내가 힘 없이
이프리트의 품에 안기자 그제야 다가왔다.
[이리 줘. 내가 데려다 줄께.] [저런, 실피드와는 다 싸운 거야?]장난기가 가득 어린 이프리트의 질문에 엘라임의 표정이 다시 한번 구겨졌다.
[누가 싸웠다는 거야? 나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그러자 뒤에 가만히 있던 실피드가 끼어들었다.
[뭐가 사실이야? 너의 비뚤어진 시각이 사실을 제대로 볼 수 있겠냐?] [누가 비뚤어진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네 놈이 착각하는 거지!]실피드의 이죽거림에 엘라임이 참지 못하고 받아치자 이프리트가 피식 웃으며 나를
데리고 그 곳을 떴다.
멀어지면서 바라보니 엘라임은 내가 가는지도 모르고 실피드와 계속 티격거리고 있었다.
[착각? 흥, 네놈이 착각하는게 아니고?] [하, 착각도 유분수다, 이놈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뭐가 어쩌고 어째? 여기서 한판 해볼까?]……..
[왠지… 두분은 서로를 정말 미워하는게 아닌 것 같은데요?]점점 멀어지는 두 정령왕을 보자니 그런 생각이 들어 이프리트를 향해 묻자 이프리트가
피식 웃었다.
[그렇지. 뭐, 엘라임이나 실피드나 둘 다 정말 서로를 미워하는 건 아니란다.] [그렇죠? 으음… 바람의 정령왕님도 그렇게 나쁜 분은 아닌 거 같아요. 하지만, 저렇게만날때마다 티격거리시면 질리지도 않으실까요?] [후후후, 서로 은근히 즐기고 있는 걸테지. 사실 옆에서 보고 있는 나도 재미있거든.
덕분에 소멸할때까지 심심하지는 않을 거 같아.]
이프리트의 웃음에 나도 마주 웃어주고 몸을 살짝 움직이는데 욱신거리던 몸이 움직이지
말라는 듯 격한 통증을 유발시켰다.
“에구구구…”
나도 모르게 고통에 신음성을 흘리자 이프리트가 나를 안스럽게 바라보았다.
[저런, 많이 아프냐? 그러게 조심하지…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런 덩치 큰 녀석에게 맞으면견디겠느냐?] [이런… 보고 계셨어요? 잠시 방심하는 바람에… 움직이지 않으면 괜찮아요.] [후후후, 네가 엔다이론을 불러내는 걸 보고 혹시나 싶어서 엘라임과 지켜보고 있었지.
설마 실피드도 보고 있을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아, 저 배에 내려다 주면 되지?]
이프리트가 시선으로 가르키는 곳을 바라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는지 상회의 배에 거의
다 도달해 있었다.
[예에.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후후후… 자, 나는 그 둘에게 가봐야겠구나. 몸 조심 하거라.]배 위의 사람들이 놀라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이프리트는 갑판 위에
살짝 나를 내려놓고는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해인?”
“해인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놀라서 나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멋적게 웃어보였다.
“아하하… 그게 말이지…”
제 17 화 인어도 인어 나름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이프리트는 불의 최상급 정령 셀레아나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배 위의
일행들은 그가 내가 불러낸 셀레아나인줄 알고 있었다.
그래 이프리트가 나를 배의 갑판에 내려놓고 사라지던말던 신경쓰지 않고 갑판 위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주저 앉은 나에게 놀라서 달려와 부축하려고 했다.
“아그그극… 사살, 사살 좀… 에구구…”
제일 먼저 듀비가 달려와 내 팔을 잡아 나를 세우려고 했지만, 온 몸의 뼈가 삐그덕 거리는
것 같고, 근육이 쿡쿡 쑤시는 상태라 듀비가 잡으니 근육들이 아프다고 일제히 고통을 호소
했다.
그걸 견디지 못한 내가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인상을 찡그리자 당황한 듀비가
그대로 나를 다시 갑판에 앉혀주었다.
그리고 그 뒤를 달려온 마법사 가레스가 익숙한 태도로 내 몸을 살펴보았다.
“괜찮으냐?”
“전혀 안 괜찮아요.”
듀비가 나를 일으켰을때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근육통이 생겼지만, 다시 갑판에 가만히
내려놓자 그나마 통증을 견딜 수 있었기에 나는 가레스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했다.
이런 내 대답을 들은 가레스는 피식 웃으면서 온 몸의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골대를
조심스레 쓸며 입을 열었다.
“훗… 입이 살은 거 보니 죽지는 않겠구나… 그래… 다행이 뼈가 부러진 데는 없군. 음음,
타박상이 좀 심할 뿐이지만… 젊은 녀석이니 약 먹고 며칠 푹 쉬면 금방 나을 거다. 네
선실로 가 있으면 내가 약을 보내주마.”
“예, 감사합니… 윽…”
대충 진료를 끝낸 가레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도 감사의 인사를 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곧 온 몸이 고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반쯤 일으키다 다시 갑판에 앉아버렸다.
“쯧쯧,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던 레이언이 가레스가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혀까지 차면서
말을 걸어왔다.
“아니, 뭐… 그 녀석을 상대하다가 한 방 먹었지 뭐…”
방심하고 있다가 꼬리에 차여서 허공으로 날려 갔다고 말하기에는 창피해서 그냥 그렇게
얼버무렸는데 다행이 주위에 있던 이들은 그 정도로 충분히 납득한 표정이었다.
“그래, 그럼 확실하게 처리한 거야?”
다시 묻는 레이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녀석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기껏 놔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나에게 한방 먹이고 튄 녀석이었으니 내가
무서워서라도 다시는 나타니지 못할 것이다.
“그럼 다행이고… 혼자서 수고했어.”
내 확신에 찬 어조를 들은 레이언은 안도와 미안함이 뒤섞인 눈으로 웃어보이자 나도
마주보며 씨익 웃어줘다.
“말로만 치하할 셈이냐?”
“…. 나중에 특별 수당을 지급해주마.”
“훗, 당연히 그래야지.”
한대 얻어 맞은듯한 표정을 보이는 레이언 녀석에게 내가 다시금 씨익 웃어보이는데
이제껏 가만히 있던 잭슨이 나섰다.
“자자, 이제 이야기도 끝난 것 같으니 그만 해인이를 선실로 옮기지요? 이 애는 환자라고요.”
그러면서 부축해줄 것 처럼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기겁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뭐야, 이대로 잡아서 부축하려는 건 아니지? 그러면 아프단 말야.”
내 말에 잭슨은 안심하라는 듯 양 손을 벌려 보이며 싱긋 웃었다.
“걱정 마. 나는 손을 안 댈 테니까. 대신에…”
그가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림과 동시에 실프 두명이 나타나더니 각각 내 상체와 하체를
떠받들어 나를 부드럽게 허공에 띄우는 거였다.
“오오… 이런 방법이 있었군.”
미처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잭슨이 나를 들어올리자 나는 나도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리며
대단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때, 아프지 않지?”
내 시선 때문인지 잭슨이 의기양양하게 묻자 나는 그의 애 같은 태도에 피식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웃는 대신 무지 고맙다는 시선으 그에게 팍팍 보내주며 대꾸했다.
“그러게, 정말 너무 고마워.”
잭슨 덕분에 편안하게 선실로 옮겨진 나는 이번 항해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인어들에게
신겅 안 쓴채 마음 편안히 하루를 마감할 수 있었다.
그게 너무 행복했기에 나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나댕길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지만
완쾌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그날 하루 더 선실에서 뒹굴 거렸다.
인어들은… 상식을 가진 보통의 경우라면, 자신들을 보호 하려다가 내가 타박상을
입었으니 하루 하고도 반나절 즈음은 좀 답답하더라도 배 위에서 얌전히 머물러 주기를
기대하겠지만, – 어차피 같이 바다 속에 들어가 그들을 보호해줄 나도 없고 말이다. –
나는 이 철없는 인어들이 그렇게는 못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기에, 나 대신 그 인어들을
담당할 잭슨과 레이언이 무지 고생하게 될 것이란걸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 그들이 가엽기도 하고, 그 동안 나 혼자 떠맡았게 했던 레이언 녀석이 그 인어들에
의해 고생할 것이 너무 고소해서 혼자 키득키득 거렸다.
역시나, 내 예상과 틀리지 않게도 밤이 지날 때 까지는 얌전히 배에 머물던 인어들이
아침이 되자 바다로 나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레이언과 잭슨이 내가 아파서 같이 가줄 수가 없으니 오늘만은 참으라고 달래고,
내가 누구때문에 아픝데 다 나을때 까지 참아줄 수 없냐고 양심에 호소하고, 당신들 끼리
바다 속에 들어갔다가 만약 몬스터에게 잡혀간다면 이번에는 우리쪽에서 아무도 돕지
못하니 당신들끼리 해결해야 한다고, 끌려가면 구해줄 수 없으니 그냥 잡아먹히는 수 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늘어놔서 정오때까지 버텼지만, 결국 오후가 되자 인어들의 생떼에
밀려버렸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냥 바다 속으로 내보내 줄 수는 없는 일이라 약간의 타협을 봐서
바다로 들어가기는 하되 바다 깊이 들어가지 말고, 배에서 보이는 깊이와 거리에서만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이는 걸로 하여 인어와의 논쟁을 끝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인어와 협상(?)을 끝내자 몸과 마음이 다 지쳐서 축 늘어진 레이언이
휘청 휘청 거리며 내 선실로 와서 나에게 하소연 한 것이다.
그때 나는 폭신한 침대 위에서 배게를 등에 받치고 편안히 앉아 해민이가 가져온 간식을
먹으며 마법서를 탐독하던 중이었다.
그래 절인 배추처럼 힘 하나 없이 흐물흐물 한 레이언 녀석의 모습이 너무 고소해서 웃음이
막 비져 나오려는 걸 참느라고 혼났다.
그나마 레이언은 협상을 끝낸 뒤 인어들과 헤어져 내 선실로 와서 하소연이나마 할 수
있었지만, 잭슨은 정령사란 이유 하나로 실프들을 불러 인어들을 감시(?)하게 하는 동시에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갑판에서 저녁까지 떠나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는 뒹굴거릴 수 있었지만, 그 다음날 또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뒹굴거릴 수는
없었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다음 날 아침 선실을 나섰다.
그러자 제일 먼저 잭슨이 헬슥해진 얼굴로 달려와서 내 두 손을 꼬옥 부여잡으며 너무나
기뻐하는 거였다.
“일어났구나~!! 다행이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냐?”
내가 다 나았다는 사실만 가지고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심정 절실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나도 그의 두 손을 맞잡으며 대꾸했다.
“고생했지? 이제 내가 왔으니까 걱정 마.”
“응, 응, 고마워 해인아. 정말 고마워.”
그의 손등을 토닥 토닥 두들겨주며 말하자 잭슨은 정말 눈물까지 그렁 그렁 맺혀서는 너무
고마워 하는 거였다.
그런 잭슨의 뒤로 머쓱한 표정의 레이언이 슬금슬금 다가오기에 나는 씨익 웃어보이며
지긋이 바라봤다.
이러한 나의 눈길에는 ‘이렇게 힘든 일을 나 혼자 맡았으니까 봉급을 더 올려줘야 하지
않아?’ 란 시선이 노골적으로 들어있었기에 잭슨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그래도 안색이
안 좋은 레이언은 순간적으로 비틀 거리며 식은땀을 삐질 삐질 흘렸다.
그 뒤로 나는 다시 인어들을 데리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인어들은 어제 그렇게 생떼를 써서 바다에 들어가 놓고서도 내가 같이 들어갈 때보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해 불만이었는지 내가 같이 들어가주자 무지 반가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순전히 자신들을 위하여 날 반기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반가워
해줘도 전혀 고맙지 않아 쓴 웃음만 흘렸을 뿐이다.
인어들은 어제 그렇게 생떼를 써서 바다에 들어가 놓고서도 내가 같이 들어갈 때보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해 불만이었는지 내가 같이 들어가주자 무지 반가워했다.
하지만, 그들이 순전히 자신들을 위하여 날 반기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반가워
해줘도 전혀 고맙지 않아 쓴 웃음만 흘렸을 뿐이다.
그렇게 내가 다시 인어들을 전담하게 된 지 며칠이 지났다.
인어 녀석들은 괴물 뱀장어를 나 혼자서 처리한 사건 이후로 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
졌는지 예전보다 더욱 더 겁 없이 나돌다 나녔다.
덕분에 나는 전보다 더 많은 물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인어들에게 붙여놔야만 했다.
그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나는 저녁에 인어들을 배로 옮겨놓을 즈음이면 전보다 더 파김치가
되어 선실로 들어가자마 그대로 골아 떨어지곤 했다.
그런데 그것이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다를 정도로 많은 정령들을 하루종일 불러
내서 피곤한 건지, 아니면 이제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쌓이는 인어들로 인하여 생긴
정신적인 피로 때문에 녹초가 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휴, 정말… 다음에 몬스터가 나타나면 죽기 직전까지 가만 냅둬볼까보다… 한번 크게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지…’
하지만, 노예매매상들에게 붙잡혔다가 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짐스레 움직인 것은
단 며칠 뿐이었으니 몬스터에게 혼이 난다고 해도 그 효과가 오래 지속될 것 같지 않았다.
하루나… 길어봐야 이틀?
‘그래도… 그 정도의 시간만이라도 얌전히 있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이런 나를 신께서 가엽게 여기셨는지 그로부터 이틀 뒤 나의 바램대로 바다 몬스터가
나타났다.
그날도 나는 많은 운디네와 운다인들을 불러내어 인어들을 감시하게 하고는 나는
엔다이론에게 몸을 의지한채로 마법 공부를 하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저~ 멀리에서 인어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이자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이 따끔
거렸다.
이틀 전 내가 생각했던게 기억 난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때 생각한대로 정말 인어들이 죽기 직전에 갈 때까지 냅둘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엔다이론에게 힘없이 말했다.
“어쨌든… 가보자고.”
이번에 나타난 건 거대한 문어였는데, 저번에 상대한 괴물 뱀장어보다 더 커보였다.
그 뱀장어는 일자고 이 문어는 공 모양이라서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커다란 덩치로 바다 밑바닥의 울퉁불퉁한 바위 옆에 가만히 있다가 멋도 모르는 인어가
다가가자 그 굵은 발로 휘릭 잡은 모양이었다.
내가 그 곳에 가보니 한 인어가 문어의 거대한 빨판에 잡혀서 마악 입으로 가는걸 나 보다
먼저 그 곳에 도착한 인어들이 열심히 자신들의 능력을 사용하여 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문어의 다리는 그 인어를 잡은 다리만 있는게 아니라 그것 말고도 7개나
더 있었기에 문어는 자신이 식사하는 걸 방해하는 주위의 다른 인어들을 잡으려고 그 7개의
다리를 사방으로 휘저어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인어들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에도 급급해 문어에게 잡힌 인어를 제대로 돕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인어의 수가 거대 문어 다리의 숫자보다 많았기에 간간히 문어의 식사를 방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마나 문어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한 채 겨우 겨우 간신히 막고 있는 것이, 인어들이
물술사라고 하지만, 이제 겨우 성년이 된지 얼마 안된 인어들이었기에 큰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탓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물술사라고 하면서 자신의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에
나는 솔직히 그들이 내 능력 정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물론, 내 능력이 높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건 내가 직접 겪어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엔다이론이나 엘라임이 말해준거라 솔직히 정말 얼마나 높은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 말고도 다른 물술사를 처음 만나보는데다 그들이 몸 하나는 지킬 실력이 된다고
자신있게 말하니 직접 보지는 않고 나 정도 될 거라고 오해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왠걸… 저번에 일, 그러니까 그 괴물 뱀장어를 상대할때보니까 그 능력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터무니없이 약한 거였다.
그래 그 상황에 장난칠 일은 없을테니 처음에는 얼어가지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제대로 못 펼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한번 시켜보니… 그들의 능력으로 공격을 하는 건 2 서클의 마나를 넣은
매직 미사일 정도의 효과를 나타내는 거였다.
그 중에서 능력이 가장 높다 하는 인어도 3서클의 마나를 넣은 매직 미사일 정도였다.
물론… 매직 미사일이 1클래스의 마법이기는 하지만 사람 하나는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공격 마법이고 실력이 높은 마법사가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그보다 몇 단계
높은 공격 마법 못지 않은 효과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1 서클의 마나를 사용한 단 하나의 매직 미사일의 공격 효과를 봤을때, 그건 실력
있다고 이름난 검사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검사에게 전혀 영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째든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의 큰 타격은
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대충 2 클래스의 공격 마법에도 아픔만 느낄 뿐 치명적인 타격은 받지 않는 일이나
지금 나타난 거대 문어 녀석에게는 별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자꾸 귀찮게 만들어 분노하게 만들었으니 오히려 역효과가 나버린 상황이었다.
‘정말… 저 정도면서도… 자신의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고 큰 소리치냐…’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쉰 나는 거대 문어에게 잡힌 인어쪽으로 운다인들을
급히 보냈다.
그 인어는 정말 문어의 입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는데 그나마 인어들 중 능력이 높은 인어가
문어의 다리를 필사적으로 얽어매고 있었기에 아직도 안 먹히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래 버틸 수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운다인을
두명 보내어 한명은 그 다리를 잡아 입으로 가까이 못 하게 끌어당기고 다른 한명은 그
다리를 잘라버리라고 했던 것이다.
나의 부탁을 들은 운다인들은 거대 문어가 사방으로 휘두르는 그 굵직 굵직한 다리 사이를
샥샥 피해 인어가 잡힌 다리로 다가가더니만 한 명의 몸이 길쭉하게 늘어나 그 다리를 한번
동여맨 뒤 잡아 당기자 다른 한명의 몸은 아주 얇아짐과 동시에 날카로워지더니 그 다리를
향해 내리쳤다.
쿠워어어~~
인어들의 공격은 잘 버틸 수 있었지만 운다인의 공격에는 그렇지 못한 듯 한대 맞자마자
문어는 온 몸을 비틀면서 괴로워했다.
그도 그럴것이 운다인이 마치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해 내리치자 완전히 자르지는 못했지만,
그 굵은 다리를 절반 정도 잘랐던 것이다.
거대 문어의 고통을 호소하는 몸부림에 인어들은 위협을 느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도 운다인에게 반쯤 잘린 거대 문어의 다리는 힘을 못 쓰게 되었는지 스르륵 풀려
뱀처럼 감고 있던 인어의 몸을 놔주기는 했지만, 그 문어의 다리에 달린 큰 빨판에 인어가
떡 하니 붙어가지고 안 떨어지는 거였다.
‘정말… 골고루 하는구만…’
문어의 반쯤 잘린 다리에서 피가 마구 쏟아지는데다 문어가 몸부림을 치며 온통 주변의
물을 휘저어놓아 피가 주위로 점점 번지고 있었다.
이대로 피가 계속 나오다가는 주변의 시야가 피 때문에 아예 안 보이게 될 거 같아서
나는 문어에게 가까이 다가가있던 운다인들에게 그 빨판에 붙은 인어를 떼어서 데리고
오라고 손짓한 뒤 주위에 있던 인어들에게 빨리 배로 돌아가로 소리쳤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엔다이론들을 불러내서 문어를 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다행이 거대 문어가 자신의 상처에 대해 신경을 쓰느라고 우리를 쫓아오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편으로 약간 안심을 하면서도 거대 문어를 계속 주시하는 상태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데 운다인 둘이 인어를 문어 빨판에서 떼어 냈는지 그 인어의 양 팔을 하나씩
잡고 빠른 속도로 나에게 다가왔다.
보니까 그 빨판에 찰싹 붙었던 인어의 등짝은 얼마나 빨판에 강하게 붙어 있었는지 그 자리가
시뻘개져 있었고, 빨판의 끝 부분에 살짝 걸린 허리 아래쪽의 비늘들은 반쯤 뜯어져서
덜렁덜렁 거렸다.
그게 꽤 아팠는지 인어는 물살때문에 비늘이 이리저리 흔들릴때마다 인상을 찡그리며
작게 신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비늘이 뜯어진 부분을 감싸주고 있을 만한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기에
나는 그 인어를 붙잡은 운다인들에게 그를 – 인어가 남자였다. – 배로 옮기라고 지시한
후 나도 재빨리 배쪽으로 달아났다.
그러면서 바라보니 문어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있을 뿐 우리를 따라올 생각은 하지 않는
듯 보였다.
대신 아까처럼 아파서 마구잡이로 몸부림은 치지 않고 그냥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게 화가나서 노려보는 건지, 아니면 먹이(?)들이 달아나니까 아쉬워서 보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안 쫓아오니까 거대 문어를 상대 안 해도 된다는 것과 이제 인어들이 배로 돌아가
얌전히 있을테니 오늘 하루 일과는 끝이 났다는 생각에 나는 배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기분이 좋아져서 입에 미소가 떠오를 것만 같았다.
정오가 지난지 몇시간이 안되어 인어들이 다급하게 바다에서 뛰어 올라 속속들이 배 위에
내려앉자 – 인어는 다리가 없어서 서 있지 못한다. – 갑판에서 배의 경호를 서던 – 경호라기
보다는 대기하는 것 같지만… – 무사들이 깜짝 놀라 비상종을 울렸고, 그러자 덕분에
선실로 연결된 갑판 문에서 무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뭐야, 이번에는 무슨 일이야?”
“또 몬스터가 나타난 거야?”
“젠장… 이번에도 그냥 대기만하다가 끝나는 거 아냐?”
비상종은 미처 내가 갑판에 내려서기도 전에 울렸기 때문에 나는 우르르 나오는 무사들을
보고 나올 필요 없다고 하기도 그래서 머쓱하게 갑판에 내려섰다.
그러자 우르르 나오는 무사들 틈에 섞여 같이 달려나온 레이언과 잭슨, 그리고 마법사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뭐가 나타난 거야?”
긴장이 배인 어투로 묻는 레이언의 뒤로 역시나 긴장이 가득한 잭슨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해인아, 혹시 다친 건 아니겠지?”
“아아, 나는 괜찮아. 이번에는 직접 상대하지 않고 그냥 도망쳐 왔거든.”
머쓱하게 대답하는 내가 멀쩡한 걸 확인한 잭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레이언이
다시금 물었다.
“상대 안 하고 도망쳐 왔다고? 뭐가 나타났는데?”
“거대한 문어. 인어 한명이 잡혀서 거의 먹힐뻔해가지고 그녀석을 빼내서 곧바로 이리로
왔어. 하지만, 오면서 보니까 쫓아올 생각은 안 하는…”
그런데 이런 내 말이 무색하게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크게 진동하는 거였다.
덕분에 갑판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비틀거렸지만, 모두 실력 있고 경험 많은 사람들이었기에
재빨리 주위에 있는 무언가를 잡거나 중심을 잡아 넘어지는 사람들은 없었다.
단지 인어들만이 놀라서 비명을 질러댔지만 말이다.
“뭐, 뭐지?”
“온 건가?”
“어떻게 된 거야?”
그렇다고 그 상황에 태연하게 있는 건 아니었기에 무사들이 당황스런 목소리로 한 마디씩
하는데 그 와중에 배의 한쪽 면에서 갑자기 굵고 길다란 문어의 다리 네개가 바다로 부터
쭈욱 올라오더니만 그대로 배의 옆면에 달라붙는 거였다.
너무 거대한 녀석이 그렇게 달라붙으니 커다란 배라고 해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
쪽으로 기울자 무사들이 당황해서 갑판 위까지 올라온 다리 끄트머리를 무기로 마구 때려서
떼어 놓으려고 했다.
“뭐야? 안 쫓아 온다며?”
그 모습을 본 레이언이 나를 바라보며 묻자 나는 무지 난처해졌다.
“아니… 안 따라 오던데… 언제 쫓아 왔지?”
내가 머쓱하게 대꾸하자 레이언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재빨리 자신도 검을 빼들었다.
“젠장, 어쨌든 저 녀석을 빨리 떼어 내! 이러다가 배가 넘어지겠어!!”
머튼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무사들은 열심히 문어의 다리를 때려서 떼려고 했지만, 문어
다리의 끄트머리만 떨어질 뿐 배 아래 쪽은 문어의 다리가 여전히 붙어 있었기에
머튼이 다시 소리쳤다.
“마법사들, 어떻게좀 해봐요. 잭슨, 해인, 너희들도 빨리~!!”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문어도 크지만 우리가 타고 있던 배도 컸기에 문어가 배를 완전히
감싸지는 못하고 한쪽 면에 달라붙어서 배 위로 기어 올라오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거였다.
완전히 감싸였다면, 사방에서 배에 달라붙은 문어 다리를 떼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방으로 인원이 분산 안 된건 좋은데 대신 배가 문어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안전하게 선실에 들어가 있어야 할 선원들이 배의
균형을 위하여 우르르 몰려 나와서 바다 위로 껑충 솟은 갑판에 거의 기다시피 올라가
매달려 있어야했다.
그리고 우리는 푹 꺼진 갑판 쪽에서 바다로 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무언가를 꼬옥 잡고
문어 다리를 떼어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배를 부수지 않게 조심해!”
“지금 그거 따질 때야?”
“하지만, 배가 부서지면 우리는 끝장이라고~!!”
“젠장…”
“시끄러워. 거기 떠들지 말고 네놈들 일이나 해! 마법사쪽은 배에 강화 마법 좀 걸어줘요!”
“배 전체에 거는 건 불가능해. 우리가 무슨 마도사인 줄 알아?”
“그럼 이쪽에다만 해주면 되잖아요!”
“좀 기다려봐.”
“아악~ 내 검 떨겼어.”
“괜찮아요. 제가 잡아드릴께요.”
“잭스으으은~~ 불의 정령으로 공격하면 어쩌자는 거야? 배 태울 일 있어?”
“젠장, 조심하면 되잖아요!!”
“으아아악~~ 린제이! 배에 구명이 뚫렸잖아아~~!!”
“어머.. 하지만 그렇게 크지도 않잖아요!”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저런 건 안에서 수리하면 돼요. 어이, 비토하고 빌, 빨리 내려가서
살펴봐!!”
“해인구우우운~~ 배 부수지 말라니까?”
“죄, 죄송해요. 하지만… 너무 세게 달라붙어서 잘 안 떨어지는 걸요…”
“강제로 떼지 말고 스스로 떨어지게 만들어봐!”
“그렇게 잘 하면 네놈이 해봐라 이놈아!!”
정말.. 그 괴물 문어가 나중에는 우리의 공격을 견디다 견디다 결국 질려서 엄청난 양의
먹물을 우리에게 뿜어대고 사라질때까지 우리는 정말 정신없이 움직였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는 것 같았다.
여기서 머튼이 소리치면 저쪽에서 조장들이 잔소리 하고, 레이언도 한 몫 거들고, 거기에
대꾸하고..
무슨 정신으로 내가 뭘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 배 위로 기어 오르려는 문어와의 처절한 사투는 반나절이나 다 되어서야
끝났다.
마지막에 괴물 문어의 머리가 갑판 위로 불쑥 솟아 올랐을때는 배가 부서질까봐 너무
두려워서 엘라임을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하필이면 오후까지 인어들을 감시하는 많은 운다인과 운디네들을 불러내 유지하고,
또 지금까지 그들을 불러 문어와 사투를 벌이느라 문어의 머리가 갑판 위에 올라왔을
때에는 나는 너무 지쳐서 헉헉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행이 문어는 그 큰 머리를 갑판에 떨어뜨리지 않고 대신 엄청난 양의 먹물을
갑판 위에 떨어뜨려놨다.
얼마나 그 양이 많았는지 나는 작은 폭포를 보는 것만 같았고, 갑자기 닥친 먹물 세례 때문에
그 먹물에 휩쓸려 몇몇 사람들이 바다에 떨어지는 사태도 발생했다.
다행히 그 괴물 문어는 먹물만 뿜어대고 내뺐으므로 그들은 바다에 빠지는 것 외에 다른
사고를 당하지 않아 무사히 배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쯔음에는 갑판에 있는 나머지 일행들도 멍하게 먹물을 뒤집어 쓰고 있다가
그 괴물 문어가 가버렸다는 것을 깨닫고는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그 모습도 정말 난리였다.
옆에 있는 사람을 얼싸앉고 방방 뜨는 것은 그나마 정상적인 반응이었고, 어떤 이들은
갑판에 찰랑고여있는 먹물을 다른 사람에게 뿌려대질 않나, 그 위를 뒹굴지 않나, 거기에서
레스링을 벌이지 않나…
그것도 그나마 봐줄만 했다.
왜 기분이 좋은데 주먹을 날리는 건지…
괴물 문어와 사투를 벌일 때 가장 많은 잔소리를 해댔던 머튼은 부하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고, 레이언은 그걸 알아차리고 도망치려다가 선실 문앞에서 잡혀서 질질 끌려와
바다로 던져졌다.
가레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투덜대며 먹물덕분에 아예 검은 로브가 된 마법사 로브를 쥐어짜고 있던 그에게 무사들이
덥쳐서 바다에 던졌고, 괴물 문어를 무찔렀다는 기쁨에 찌인한 키스를 나누던 마일즈와
린제이 – 이 둘은 연인 사이였나보다. – 는 애인 없는 무사들에 의하여 눈꼴시다는 이유로
둘이 밧줄로 칭칭 동여매어 바다에 떨어져야 했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가 날린 주먹에 턱을 얻어맞고 그대로 바다 위로 떨어졌다.
젠장할…
그래서 열받은 내가 갑판 위에 있는 녀석들을 모조리 바다 위로 쳐넣으려고 했는데,
더욱 더 열받게도 그들은 내가 그렇게 손을 쓰기도 전에 갑판에서 벌이던 난리에 더욱
더 흥분한채로 모조리 바다위로 뛰어드는 거였다.
거기서도 얼마나 맛이 간 모습을 보이던지… 나는 내가 정말 이 집단에 들어온 것이 잘한
일인지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볼 정도였다.
그렇게 두 번째 몬스터를 물리쳤다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 나는 그로부터 3일 후에
범고래에게 팔을 물려 피를 철철 흘리는 인어를 들고 배로 달려야 했다.
이 인어가 그냥 잘 지나가는 범고래떼에 다가가 괜히 장난을 하다가 범고래가 성이 나서
인어의 팔을 콱 물어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그 인어가 재빨리 도망치고, 내가 그에게 붙여준 운디네와 근처에 있던 운다인이
도와줘서 그정도로 끝냈지 그 인어 혼자 있었다면 아마 고래떼에 둘러싸여서 큰 일을
당했을 것이다.
‘하여간… 정말 가지가지야… 어휴… 이건 특별 수당이 아니라 월급을 두배로 올려 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
그 일은 그래도 인어들에게 교훈을 줘서 그 뒤로 인어들은 함부로 다른 바다 생물들에게
장난을 치거나 만지지 않았다.
그래, 그 뒤로 정말 편안한 여행이 계속…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만은… 이번 운송에
마가 끼었는지 우리는 그로부터 5일 뒤에, 또 일주일 뒤에, 또 4일 뒤에… 하여간 며칠에
걸러 한번씩은 꼭꼭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일주일이 넘게 몬스터가 안 나타나면 괜히 막 불안하고 일찍 나타나면
한 건 넘겼다고 안심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하니 이건 너무 심한 거 같았다.
우리 배야 다행히 실력 있는 무사들도 많았고, 마법사에 정령사까지 타고 있었으니 어찌
어찌 잘 헤쳐 나갔지만, 만약 이런 실력자들이 없는 배는 어디 남아나겠는가?
그래 또 다른 몬스터 – 이번에는 거대 오징어였다. 그걸 보아하니 아마 꼴뚜기 모습을 한
거대 몬스터도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 를 물리치고 난뒤 모두가 쉴거였기에 그 틈을 타
레이언에게 다가가 슬쩍 물어보았다.
“있지… 원래 이렇게 몬스터들의 습격이 잦아?”
“응?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그렇게 대답하는 레이언 녀석이 어물어물 하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 왠지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정말? 그럼 너 예전에 인어들을 운반(?)할 때도 이렇게 며칠에 한번씩 몬스터가
습격해왔단 말야?”
“음… 그게… 뭐… 이렇게 자주는 아니고… 가끔 왔었지.”
“가끔? 얼마나 왔는데?”
자꾸 내 시선을 피하며 어물어물 대답하는 레이언의 모습을 보며 내가 자꾸 캐묻자
레이언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게… 보름에 한번쯤? 많으면 한달에 세번정도…”
“뭐? 아니, 그런데 이번에는 왜 며칠에 한번씩 꼴이야?”
기가막혀서 입이 떡 벌어지는 걸 느끼는데 레이언이 이런 날 힐끔 보더니 다시 한숨을
푸욱 쉬며 말했다.
“에휴… 그게 말이지… 그 전에는 인어들이 바다 속에 들어가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으니까…
이번처럼 매일 들어가지 않고… 며칠에 한번 정도… 그것도 하루 종일은 불가능 하고
몇시간정도 잠깐씩 이 주위를 도는 것 뿐이니까.”
“뭐야, 그럼 인어들이 매일 매일 바다 속에 있는 거하고 몬스터 습격이 잦은거하고 관련이
있다는 소리야?”
“뭐… 말하자면 그렇지.”
머쓱하게 대답하는 레이언의 말을 이해못한 나는 다시 물었다.
“아니 어떻게 관련이 있는데?”
그러자 레이언이 나를 쓰윽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럼… 너는 주변에 먹이가 왔다갔다 거리는데 안 나오겠냐?”
“머, 먹이? 으음… 뭐, 그건 그렇군…”
생각해보니 이해 불가능한 게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또 다른 생각도 떠오르는 거였다.
“어, 잠깐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인어들이 계속 바다 속에 들어가있으면 우리는
계속 몬스터의 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거네?”
“그렇지…”
힘 없이 대답하는 레이언을 향해 나는 눈을 부라렸다.
“그렇지가 뭐야, 그렇지가… 아니, 너는 그럼 몬스터가 습격하는 원인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인어들이 매일 바다에 나가 하루종일 있는 걸 그냥 냅뒀단 말야? 당장 내일부터 바다 속에
들어가는 시간을 줄이던지 해야지!”
내가 그렇게 속사포처럼 따지고들자 레이언이 무지 처량하고 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해인아… 그러면 네가 인어들을 설들 시킬 자신이 있냐? 나는 절대 인어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다.”
“윽….”
레이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레이언도 레이언이지만 나 또한 그 인어들의 생때를 겪어봤던 것이다.
그거는… 몬스터와 싸우면 싸웠지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이대로 가자.”
“그렇지?”
“응…”
“에휴….”
성질 같아서는 생떼를 쓰던말던 그냥 엉덩이를 몇대 패주고 밧줄로 꽁꽁 묶어 배 안의
창고에 콕 쳐박아둔 채 데리고 갔으면 좋으련만, 이들은 그동안 인어 종족과 베지테크스
상회간의 우정(?)과 신뢰를 더욱 더 견고하게 – 한 마디로 거래를 더욱 쉽게 해줄 – 해 줄
녀석들이니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는 입장이라 우리쪽은 그냥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어쩌면 처음에 인어들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배려하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너무 오버
였는지도 모른다.
지금껏 인어들을 데려다주는 것만으로도 인어 종족과의 거래는 원활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이번에 거래 상대 서비스 차원에서 괜히 인어들 편의를 생각해주다가 미처 그 동안 알지
못했던 인어들의 성격때문에 두 배로 고생하고 있는 신세를 생각하니 레이언이 평소의
유들유들한 성격을 잃어버리고 한숨만 푹푹 쉬는 것도 당연했다.
아니, 두배가 아니라 수십배라고 해야 하나?
한번 이렇게 인어들을 데리고 가줬으니 그 다음부터는 계속 이러한 상태로 데리고 가야할
테니까 말이다.
‘으음… 왠지 내 고생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안돼겠어. 이번에 가면
엘라임에게 사정을 해서라도 인어들을 그냥 확 쥐어잡아버릴까? 음음… 물론 레이언 녀석
몰래 해야겠지? 상황을 보건데, 레이언 녀석이 내가 엘라임의 딸이라는 걸 안다면 그 즉시
인어들과의 거래를 끊어버리고 나와 거래를 하자고 할 것이 뻔해. 레이언이 아니라도
크리스가 알았다간 그렇게 되겠지? 휴우…. 내 아버지가 엘라임이라는 걸 숨기길 아주 잘
한거 같아. 그런데… 인어들에게는 그걸 밝혔다가 그게 레이언 귀로 들어가면 어떻게 하지?
으윽… 분명 그럴 가능성이 있어. 으음… 그럼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둬야
하나? 그렇다면 다음 운행에도, 그 다음 운행에도 고생할 게 뻔한데? 지금 인어들이 이런데
다음 인어들 성격이 좋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잖아? 으윽….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할까?”
레이언은 레이언 대로, 나는 나대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민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이런
우리의 상황에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유유히 흘러 우리 배는 드디어 서대륙의
3국을 지나 대륙의 북해에 해당하는 호바트 해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는 기쁨에 선원들은 물론이고 배에 타고 있는 무사들까지 얼마 안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배에서 내려 땅을 밟게 된다는 희망에 찬 얼굴로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는 모습들에 배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게다가 인어들 또한 자주 몬스터들에게 습격을 당한 탓에 이제는 겁도 없이 혼자 멀리 가지
않고 배와 내 주위에서만 머무려고 하는 덕에 나도 조금은 편해진 상태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약간 들떠 있었다.
‘이제 2주 정도만 버티면 되는 구나아… 아, 정말 길고도 긴 세월이었어….’
기분이 들뜨다보니 그 동안 인어들을 외면하느라 억지로라도 잡고 있던 마법서가 손에 안
잡힌 탓에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엔다이론의 위에 길게 드러누어 편안히 바다 속을 감상했다.
호바트해는 북쪽에 있는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따뜻했기에 내가 살던 케르겔렌 해
보다 좀 더 아름다운 바다 속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 키보다 더 크게 자란 해초들 사이 사이로 보이는 산호초들의 모습과 그 위를 헤엄쳐
다니는 화려한 색들을 가진 물고기때들, 그리고 그들을 노리느라 그들 틈에서 노는 것 처럼
보이는 커다란 물고기와 고래들, 그들 틈에 간간히 보이는 인어…
‘인어? 어휴, 또 저 속에 들어가있네? 저러다가 멀어지려면 어쩌려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천진하게 웃는 인어를 째려보았다.
이 곳에는 내 손바닥 만한 아주 작은 물고기들이 엄청나게 많은 수가 모여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인어들이 그들 틈에 은근슬쩍 들어가 장난치다가 너무 거기에 열중해서 – 물고기
떼가 엄청 크기 때문에 시야도 잘 안 보일 정도다 – 우리와 거리가 너무 멀어지는 바람에
잃어버릴 뻔 한 적이 한번 있었다.
물론 그 인어에게 운디네를 붙여 놓아둬서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하필이면
인어들이 스스로 배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웬만큼 멀어지면 제제를 가하던
운다인들을 불러내지도 않았을때라 그 인어는 물론이고 나 또한 그 인어가 멀어졌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저녁에 인어들을 배로 옮기면서 숫자를 세어보다가 한 녀석이 빠지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려 얼마나 놀랬던지…
그래도 운디네를 붙여놔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는데, 발견했을때 그 인어는 자신만
혼자 남겨진 줄 알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사방으로 우리를 찾으며 다니고 있었다.
이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 잠깐 놀다가 일행을 잊어버렸으니 우리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도 몰라 새파랗게 질려서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다가 결국 못찾아서 엉엉
우는 모습이라니…
그때 내가 짠 하고 나타나자 다짜고짜로 나에게 안겨서 엉엉 우는데 완전 어린애 같았다.
하기야, 성년이 지났다고 정신까지 온전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 뒤로 내가 다른 인어들에게도 주의를 줬는데도 또 저렇게 내 말을 안 듣고 물고기 떼에
들어가 놀고 있는 거다.
‘그래… 어디 한번 너도 일행을 잃어버려가지고 저번의 그 인어처럼 눈물 콧물 다 짜면서
울어봐라.’
나는 인어를 발견하는 그 즉시 그 인어에게 뭐라고 하는 대신 속으로 벼르면서 그 인어에게
운다인을 붙여줬다.
눈물 콧물 다 짜면서 엉엉 울기 전에는 절대로 데려오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훗… 오늘 저녁에는 엉엉 우는 인어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겠군? 훗훗… 레이언하고 잭슨도
불러서 같이 구경이나 할까?’
요근래에는 인어들이 나나 배 주위에서만 맴돌았던 탓인지 몬스터의 습격이 한동안 없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무책임한 판단을 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태평하게 드러누워 바다 풍경에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이런 나의 안일한 태도를 신께서는 그냥 냅두지 못하셨나보다.
태평하게 바다 풍경을 구경하다가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있는 나에게 운디네 한명이
다급하게 다가와서 알렸다.
[인어가 몬스터에게 쫓기고 있습니다!]“엑!!”
덕분에 엔다이론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다 엔다이론 등에서
떨어질 뻔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엔다이론이 얼른 자신의 늑대 앞발을 들어올려 균형을 잡아준 탓에 비틀
거리기는 했지만, 굴러 떨어지지는 않았다.
“어디야, 어디? 안내해줘.”
그 와중에 용케 정신을 차린 나는 다급하게 나에게 다가온 운디네에게 재촉했다.
‘어휴… 내가 왜 몬스터 생각은 못했지? 어우, 어우, 어우, 요근래 좀 안타나났다고 헤이해
져서는…’
운디네의 뒤를 따라가며 나는 초조해서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동안 여행하면서 계속 그래왔듯이 그 주변의 바다를 담당하는
엔다이론들에게 부탁하여 혹시라도 인어들에게 무슨일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인어들은 나에게는 물론 바다를 담당하는 엔다이론들에게 보호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나는 혹시나 아까 내가 방치해둔 그 인어가 몬스터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엄청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그 인어에게는 운다인까지 붙여 두었으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아냐, 아냐… 그런데 내가 부탁한 거는 그 인어 녀석이 엉엉 울때까지 가만 내버려 두라고
한 거였으니… 그 인어가 안 울면 말짱 꽝인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욱 더 초조해졌다.
그러는 와중 운디네는 빠른 속도로 계속 앞으로 있는 거였다.
‘어우, 이노무시키는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젠장… 이러면 괜찮을라나 몰라. 제발
목숨만은 붙어 있어도….’
그렇게 초조하게 달려가다보니 드디어 운디네가 말한 그 문제의 인어가 보였다.
그 인어는 일, 그러니까 거대한 뱀장어의 날카로운 이빨에 꽈악 물린 채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능력으로 그 거대 뱀장어를 채 공격해보지도 못하고 뱀장어가 휘두르는 대로
그대로 휘둘리고 있는 거 보니 사태가 심각한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너무 다급하여 엘레스트라를 불러냈다.
“저 인어 좀 구해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괴물 뱀장어 앞에는 갑작스레 거대한, 그러니까 괴물 뱀장어보다도
더 큰 엘라스트라의 몸집이 스르륵 하고 나타났다.
원래는 그보다 한 절반 정도… 그러니까 괴물 뱀장어보다도 작은 모습으로 나타나고는
했는데 나의 다급한 마음이 전달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바다 속이라서 그런지 엄청나게
큰 모습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러자 입에 물고 있던 인어를 흔들어대고 있던 괴물 뱀장어가 엄청 놀랬는지 머리를 흔드는
것도 잊어버리고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입을 떠억 벌렸다.
덕분에 일의 입에서 마구 마구 흔들리던 인어가 일의 날카로운 이빨에 걸려 덜렁대며 늘어져
있는 걸 내가 다가가서 얼른 빼내어 뒤로 물러났다.
물론, 일이 공격할까봐 걱정되긴 했지만 그 녀석은 엘레스트라의 모습에 겁을 먹어 딱
굳어있는 바람에 내가 가까이가도 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얼른 인어를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런 엘레스트라의 위압감에 감탄 할 법 했지만, 지금은 내 품에 축 늘어져서
미동도 않고 있는 인어의 안위가 더욱 급했기 때문에 나는 재빨리 한마디 하고 배로 향했다.
“저기, 미안하지만 그 놈 대충 쫓아주고 와.”
내가 다급한 마음에 너무 빠른 속도로 전진하다보니 배에 뛰어 오를 때에는 내 뒤로 물보라가
촤악~ 하고 높이 솟아 올라 갑판위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달려왔다.
“뭐야, 뭐. 또 나타났냐?”
“종을 울려! 비상 사태야!!”
그들을 둘러보던 나는 갑판 위에 가레스가 없음을 깨닫고 다급하게 외쳤다.
“가레님 어딨어요? 빨리 불러와요!!”
내 외침에 한 선원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 한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인어를
조심스레 갑판 위에 누이다가 어리둥절 해졌다.
인어의 얼굴이 내가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던 것이다.
“누, 누구지 이 인어는?”
인어라고 해서 우리가 보호하는 인어인줄만 알았지 생전 처음보는 인어인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옅은 숨을 내쉬고 있는 그 인어는 우리가 보호하는 인어들보다 몇살 정도
어려보이는 인어였는데 양아치인 듯 싶었다.
뭔 놈의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는지 양쪽 귀에는 각각 두개,개씩 구멍을 뚫고 거기에
커다란 귀거리를 하나씩 차고 있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코에도 구멍을 똟고 내 새끼 손톱
반만한 다이아 코거리를 한데다가 목걸이는 최소한 다섯개 이상을 걸고 있었다.
거기에 팔찌도 양쪽 손목에 몇겹씩 한데다가 팔뚝에도 금으로 보이는 환(고리)을 차고 있었다.
게다가 유두와 배꼽에도 피어싱을 하고 있었는데 그 두개의 피어싱을 또 금줄로 이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길다란 꼬리 끝의 지느러미 양 끝에도 구멍을 뚫어 거기에도 뭔가가 하나씩 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괴물 뱀장어에게 물려 흔들리는 와중에서도 용케 안 떨어지고 잘 붙어 있었다.
“어휴… 이렇게 달고 다니면 안 무거울라나?”
그 인어의 모습에 내가 황당함을 금치 못하자 옆에 같이 와 있던 한 무삭 조심스레 물었다.
“이거… 떼줘야 하나, 그냥 냅둬야 하나?”
“그, 글쎄요… 그냥 냅두고 잠시후에 가레스님이 오시면 물어보기로 하죠?”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가레스가 헐래벌떡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헉헉, 뭐, 뭐냐? 무슨 일이야?”
그가 다가오자 인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사람들이 길을 터주어 가레스는 쉽게 인어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나는 입을 열었다.
“일에게 물려서 신나게 흔들렸습니다.”
가레스는 나에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인어를 향해 있었다.
그 인어 곁에 앉은 가레스는 우선 인어의 코에 손을 대어 숨을 확인하고 맥을 잡아 심장이
제대로 뛰는 지도 확인했다.
그런 다음에야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꼬리를 살폈다.
그 꼬리는 절반이 넘게 비늘이 다 뜯겨지고 일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난 건 둘째치고 하도
물고 흔들어서 그 이빨 자국의 상흔이 길게 찢겨져 있었다.
오는 도중 지혈은 할 줄 몰라 우선은 운디네를 불러내 예전에 엘라임이 나에게 했던 것 처럼
붕대로 감았던 탓인지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힐!!”
가레스가 그 곳에다 손을 가져다대고 시동어를 외치자 곧 그의 손에서 파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와 인어의 상처 부위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마치 실개울처럼 끈임 없이 흐르던 피가 차차 멈추어지며 벌어졌던 상처도 아주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아물어갔다.
어느정도 상처가 회복되자 가레스는 마법 시전을 멈추었다.
“후우… 대충 된 거 같군.”
마법은 위험할때는 아주 유효하기는 하지만 자주 쓰면 오히려 면역력이 약해져 쉽게 병에
들게 하거나 욱체를 약화시키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보통 치료할때 완치를 시키는 대신
위험한 고비를 넘기는 정도로만 치유하는게 상식이었다.
그래 가레스 또한 그 상식 그대로 완벽하게 치유하는 대신 위험한 수준만 넘긴 정도로
마법을 시전하고 가지고 왔던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인어는 누구냐?”
가레스 또한 인어의 얼굴을 다 알고 있었는지 내가 데리고 온 인어가 우리가 보호하는 인어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의 물음에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가레스가 잠시 날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인어가 나타난 걸 보니 인어의 섬에 거진 다 온 모양이로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레스가 붕대의 매듭을 묶고있는데 인어가 정신을 차렸는지 신음을
얕게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크에에…”
하지만, 그 인어의 목소리는 물 속이 아니었기에 금속과 돌이 마찰되는 듯한 거북한 음성으로
들려왔다.
“이런, 이런… 깨어나나보다. 너 빨리 이 녀석 바다 속에 집어 넣어라. 그리고 누구인지
신원은 꼭 물어보고.”
가레스 또한 대기 속에서 울려퍼지는 듣기 거북한 인어의 목소리를 듣고싶지 않았던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서 나에게 손짓했다.
그 모습에 나는 황당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피식 실소를 흘리면서도 가레스가 시키는
대로 인어를 조심스레 안아들고는 다시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갑판 위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하던 인어는 바다의 차가운 물에 담기자 완전히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뜨고는 그를 안고 있던 나를 바라보았다.
“흐에에엑~~”
그리고 그 순간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날 밀쳐냈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되게 기분이 나빴다.
“아니… 내가 그렇게 괴물처럼 생겼어요? 왜 그렇게 놀라요?”
이래뵈도 뛰어난 미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괜찮게 생긴 축에 속한다는 이야기를 듣던차에
마치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반응을 보이니 내 입에서 나간 말투가 곱지 않을리가 없었다.
그 인어는 내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가 내가 가만히 서서 그를 째려보자 그제야 이상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날 보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밝은 은회색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까 갑판에 있을때는 그의 긴 머리가 완전히 뒤엉켜 뭉쳐있는 탓에 몰랐는데 그의 머리에도
장식품이 달려있는 거였다.
‘어휴… 머리에서 발끝, 아니 꼬리 끝가지 장식품을 안 단데가 없구만…’
그 모습에 기가막혀서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그는 머리를 벅벅 긁다가 머리에 달아 놓은
장식품이 손에 걸렸는지 장식품을 빼내어 손으로 머리를 쓱쓱 빗어 정리한 다음 다시
장식품을 달았다.
그제야 머리가 단정해져서 앳되고 깔끔한 얼굴이 드러났지만, 나는 시큰둥하니 그 인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인어는 머리를 매만지자 이제는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 손목의 팔찌 등등 몸에 착용한
장신구를 일일이 확인하다가 자신의 꼬리에 두툼하게 매여있는 붕대를 발견하더니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저기…”
하지만 녀석에 대한 인상이 좋지 못했던 터라 나는 즉각적으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왜? 없어진 거라도 있어?”
나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움찔 거린 그 인어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며 헤헤 웃어보였다.
“아뇨… 그게 아니라…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구요.”
공손하게 인사까지 하는 그였지만, 한번 꽁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던 나는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
이런 나의 반응에 그는 다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위만 살펴보는데, 배 주위에 있던 다른
인어들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런데 그 중 한 인어와 이번에 구해준 인어가 아는 사이인지 눈이 마주치자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는 거였다.
“어?”
“시, 시노웍?”
“혀.. 형?”
“시노웍~~!!”
“혀어어엉~~!!”
그들의 놀란 외침 덕분인지 멀리 있던 다른 인어들또한 막 달려와 나는 인어들의 주위에
둘러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어들 중 물고기 떼에 혼자 들어갔던 인어의 모습도 보이는 거였다.
‘엑… 저놈 용케 일행을 안 잃어버리고 따라왔네? 체엣, 엉엉 우는 모습을 보게 되는 줄
알았더나미나…’
나는 그렇게 속으로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 인어대신 엉엉 울어주고 있는 두 인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혀어어엉~~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어어~~ 우에에엥~~~”
“으흑흑~~ 나도 마찬가지야아아~~ 어흑흑… 이렇게 널 다시 보게 되다니이이~~”
그들은 한참이나 울다가 드디어 진정을 했는지 벌겋게 부어오른 눈을 나에게로 돌렸다.
“훌쩍, 이, 이놈은… 제 동생입니다.”
나는 철 없는 인어 녀석들에게 열받은 탓에 반말을 하게 되었지만, 인어들은 계속 나에게
존대를 해주고 있었기에 이제는 완전히 그렇게 굳어진 탓에 나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이번에 새로 구한 밝은 은회색 머리의 인어를 바라보았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건 아마 인어들 섬이 가까워졌다는 이야기 같은데… 그럼 이 근처에
다른 인어들이 있는 거야?”
이제껏 다른 인어들에게 반말을 해왔는데 새삼 다른 인어에게, 그것도 나이가 더 어린
인어에게 존대를 하기가 또 어색해서 그냥 반말로 물었다.
사실, 아까도 기분이 안 좋았던 터라 처음부터 반말로 나갔고 말이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시노윅이라는 밝은 은회색 머리의 인어가 눈에 뜨일
정도로 움찔 거리는 거였다.
그래서 혹시나 이 녀석도 혼자 멀리 나온 케이스인가 싶어 녀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아니나달라, 이 녀석이 자꾸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거였다.
그러자 나 대신 이 녀석과 얼싸안고 이산가족 상봉의 장면을 연출했던 형 인어가 자신의
동생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뭐냐, 시노윅… 너 혹시 혼자서 몰래 나온 거야?”
그러자 시노윅이라는 인어가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 아니야. 형… 나는 분명히 허락 맞고 온 거라고.”
하지만 형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고 자신의 동생을 물끄러비 바라보더니만
뭘 알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지금 하고 있는 거…”
그러자 시노윅이 다시 흠칫 거리더니 이제는 숨길 수가 없었는지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와 함께 형은 시뻘개진 눈 못지 않게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동생을 향해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너, 너, 너어어어~~ 또 혼자서 난파선의 보석 탐험에 나선 거냐? 내가 혼자 가지 말라고
도대체 몇번이나 말했어? 그런데 또 나왔던 거야?”
“아니… 그게…”
“하여간 정말 말 안 듣는 녀석이라니까? 너 집에 가면 혼날 줄 알아. 도대체가 바다 무서운
줄을 몰라요, 이놈이. 바다에는 얼마나 위험한 요소들이 많은줄이나 알아? 그런데 아직
능력도 미미한 놈이말이야, 혼자서 돌아다니다가 몬스터라도 만나면 어쩔 뻔 했어? 앙?
네가 아직 그런 일을 안 당해봐서 이렇게 기가 살았지? 엥?”
그렇게 내가 평소 인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마구 동생에게 퍼붓던 형 인어의 눈길이
동생 꼬리에 있는 붕대를 발견하고는 눈이 둥그래져서 동생의 양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이거, 이거 왜 그래? 응? 이거 어디서 다친 거야?”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형에게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제대로 대답도 못해주는 동생을 위하여 내가 대신 대답했다.
“일에게 깨물려서 그래.”
내 말에 형 인어의 몸이 일순 굳더니 그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다시 동생에게로 향했다.
“너, 너어어어~~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왜
말 안 들어? 응? 응? 하여간 내 그러 줄 알았어. 저 분이 안 도와줬으면 어쩔 뻔 했어?”
“자, 잘못했어 혀엉~ 다시는 안 그럴께에~~ 응? 그러니 제발 놔줘어~~”
앞뒤로 연신 흔들리면서도 동생이 애절하게 외치자 그제야 진정한 듯 형이 동생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너, 집에가서 두고보자. 이번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무지 기가막혔다.
‘남말하고 있네… 자기도 멀리 나왔다가 노예매매상에게 붙잡힌 주제에…’
그렇게 한바탕 형과 아우의 소동이 끝나는 것 같자 인어들은 또 흩어져서 배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인어를 만났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들떠 보였다.
하기야, 그 인어가 혼자 멀리 나왔다고 해도 어린 인어가 혼자 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자신들의 고향이 있다는 소리였으니 당연할터였다.
그렇게 인어들이 삼삼 오오 흩어지고 형은 아우의 곁에서 찰싹 붙어서 데리고 다니려는
듯 폼을 잠는데 시노윅이라는 인어가 그러한 형을 잠시 제지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 이 녀석이 왜이러나… 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애가 주저주저 하더니 나에게
자신의 목에 걸린 줄 하나를 꺼내어 주는 거였다.
“응?”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주는 걸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라 나는 그가 주는 걸 받아들었다.
그러자 녀석이 헤헤 웃으며 말하는게 아닌가?
“절 구해드린 답례로 드리고 싶었어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옷, 이 녀석은 그래도 다른 녀석들보다는 났네.’
라고 기특하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녀석의 폼을 보아하니 다른 목걸이들은 모두 줄 조차
화려하게 장식된 금줄, 혹은 백금줄인데 지금 주는 건 줄은 낡은 가죽끈이었고, 팬던트는
시커머튀튀한 금속에 보석이 몇개 박혀 있는 거였다.
그러니까 녀석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른 목걸이들 중에 가장 안 예쁜 걸로 골라준 것이다.
그래 기가막힌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널 구해준 건 나지만, 치료해준 건 다른 분인데 나에게만 주면 어쩌지?”
그러자 내 말에 흠칫한 녀석은 무지 망설이더니만 자신의 팔뚝에서 여러개의 팔찌 중 하나를
빼서 나에게 건넸다.
“그, 그럼… 이걸 그 분께…”
그리고는 내가 뭐라 더 말할까봐 두려운지 잽싸게 몸을 돌려 형에게 다가가는 거였다.
그 모습에 나는 기가막혀 하면서도 녀석이 준 걸 살펴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것들은 그 녀석이 가지고 있는 장식품 중 가장 초라한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은은한 마나가
감지되는 것이 아무래도 마법이 걸린 물품인 듯 싶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아무리 초라한 것이라도 마법이 걸린 물품은 엄청 화려한 장신구보다는
몇배나 가치가 있는 거였다.
“뭐, 화려한 걸 좋아하는 인어에게는 별 소용이 없는 걸라나? 어차피 인어들이 마법을
쓴다는 소리도 못 들어봤고 말야.”
그러면서 나는 그가 준 물품을 주머니에 잘 넣어뒀다.
아직 마법에 대한 지식이 낮은 나로써는 이것들에게 걸려있는 마법이 뭔지 알아낼 수 없었기에
조금 있다가 가레스에게 보여줄 참이었다.
물론, 저 인어가 가레스에게 준 팔찌도 전해줄 겸 말이다.
“훗… 그래도 다른 인어들보다는 났네. 다른 인어들은 아마 고맙다는 말만 하고 지나쳤을
텐데… 아직 어려서 순진해서 그러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