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18)
제 18화 엔더비 산맥
그날 저녁 나는 한명 더 늘어난 인어들을 배 위에 데려다주고는 가레스를 찾아갔다.
그는 마일즈와 같은 방을 쓰고 있어서 나는 마일즈가 보고 있는데 나와 가레스만 받은 마법
물품을 보이고 이야기 하는게 쫌 꺼름직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안될것
같아서 그냥 그날 저녁 찾아간 거였다.
방 문을 노크하자 기다리라는 가레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그가 직접 방문을 열어주었다.
“엥? 네가 왠일이냐?”
방문을 연 가레스는 나를 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도록
비켜서줬다.
“실례하겠습니다.”
선실로 들어가니 다행이도 마일즈는 린제이 방에 갔는지 없었고 가레스 혼자 마법책을
읽고 있다가 나를 맞았는지 방 가운데 있던 탁자 위에 마법서가 펼쳐져 있었다.
내가 선실을 슬쩍 둘러보자 가레스가 오해를 했는지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을 건넸다.
“저런, 마일즈를 찾아온 거냐? 그녀석 지금 데이트 가고 없는데…”
그말에 나는 황급히 가레스를 돌아보며 부정했다.
“아하하.. 아뇨. 가레스님을 뵈로 온 거예요.”
“응? 나를? 왜? 아, 이런 손님을 계속 서 있게 했군. 이리로 앉아라.”
다시 한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마일즈는 내가 서 있는 모습을 보더니 아차 싶은지
작은 탁자로 나를 안내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나는 마일즈가 오기 전에 용건을 끝내야겠다 싶어서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꺼냈다.
“아까 낮에 가레스님이 치료해주신 인어 기억하시죠?”
“내가 치료해준 인어? 아아… 그래, 그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고 있던 녀석?”
바로 오늘 낮의 일이니 가레스가 기억 못할리가 없었다.
“예, 그런데 그 인어가 치료해줘서 고맙다고 가레스님께 이걸 전해달래요.”
그 말을 하면서 나는 팔찌를 그에게 건넸다.
“흐음… 이 팔찌를 말이냐?”
아무 무늬가 없는, 내 새끼 손가락만한 굵기의 단순한 링 모양의 금팔찌였지만, 자세하게
살펴보면 팔찌 안쪽에 아주 자잘하게 무엇인가가 음각되어 있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것도 사실 내가 그 팔찌에서 마나가 느껴져서 세세하게 살펴보다가 알아챈 거였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거였다.
가레스 또한 그 팔찌를 받아 드는 순간 그 팔찌에 어려 있는 마나를 눈치챘는지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무래도… 제가 보기에는 마법이 걸려 있는 듯 해요.”
“그렇구나. 잠시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팔찌를 자세히 살펴본 가레스는 곧 팔찌 안쪽에 음각되어 있는 걸
발견했지만, 너무 작게 새겨져 있어 잘 보이지 않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쪽 침대 옆에
있던 커다란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쪽 침대를 가레스가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 곳에서 자그마한 확대경을 꺼내더니 다시 탁자로 돌아와 눈에 확대경을
끼고는 팔찌 안쪽을 아까보다 더 자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흐음… 이런…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 구만. 라이트!”
하지만 곧 등불만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지 마법을 써서 빛의 구를 하나 만들어 낸 뒤에 다시
살피는 거였다.
너무 집중하고 있는 그 모습에 나는 감히 말을 건네지도, 심지어 함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
채 숨을 죽여 그가 다 살펴보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거의 30분이 지났을 무렵, 팔찌를 천천히 돌려가며 그 안에 음각된 무언가를 다 읽은
가레스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확대경을 눈에서 떼었다.
“훗… 그렇군.”
“뭔데요? 무슨 마법이 걸린 거죠?”
“레비테이션이 걸려 있구나. 흠, 괜찮군.”
역시 그 또한 마법사라서 그런지 낮은 클래스의 마법이 걸려 있다고 하나 마법 아이템을
얻게 된 것이 무지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레비테이션 마법은 물체나 사람을 떠오르게 하는 마법으로 2클래스 마법에 속한다.
뭐, 3 클래스의 플라이 (날아다니는 마법)을 익힌 사람에게는 별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여러
상황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고 내 마법 스승 노만이 말해줘서 나도 익혀놓고는 있다.
이 마법은 그냥 위로 떠오르게만 할 뿐 양 옆으로 이동은 못하는 거라서 높은데서 떨어질 때
안전하게 착지할 수는 있게 해주지만, 그 외에 어디에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레스가 기분 좋아하니 나쁠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을 타서 내가 받은, 팬던트를 꺼내들었다.
“저기…”
“응?”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는 가레스를 향해 나는 멋적게 웃으며 그 커다란 팬던트를 그에게
보였다.
“저도 이것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이것에도 마나가 느껴져서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뭔지
잘 모르겠어서 말이죠.”
“어디, 이리 줘봐라.”
가격으로 치자면 아무래도 가레스가 받은 팔찌 보다는 내가 받은 팬던트가 조금 더 비싸
보였다.
예쁘지는 않더라도 보석이 6개나 박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팬던트의 모습을 보자마자 가레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버리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내가 더 비싼 걸 받아 가레스가 마음이 상한 줄 지레 짐작하고 그걸 왜
그에게 보여줬을까 하며 마구마구 후회하는데 내가 그러건 말건 가레스는 다시 확대경을
눈에다 대고 그 팬던트를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내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지만, 그가 뭐라고 할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그러니까 팔찌 살펴보는 시간 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르자 가레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팬던트로부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난 그가 뭐라 말할까 겁이 나 초긴장한 상태로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후우… 이거 참…”
“왜, 왜요?”
그런데 처음 나오는게 무지 난처하다는 목소리였기에 나는 위가 조여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끄응…”
가레스는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서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팬던트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이거 참… 어떻게 보면 대단한 물건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실패작인 것 같기도
하고…”
“실패작이요?”
실패작이란 말에 나는 일순 그걸 나에게 건넨 시노윅이란 인어 녀석에 대한 괴씸함이 치솟아
올랐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가레스는 낮은 클래스라고 해도 확실한 마법 아이템이고 나는
조금 더 비싸 보여도 실패작이니 가레스의 맘이 크게 상하지는 않을거 같아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 되었다.
그래 차라리 정말 실패작이길 바라며 묻자 가레스가 팬던트를 내 쪽으로 좀 밀어 나도 잘
보이게 한 후 설명했다.
“이걸 보면 말이다…”
그러면서 그가 가르키는 건 팬던트 앞면의, 6개의 보석이 박힌 곳이었다.
“여기 있는 보석들은 각각 마법으로 가공되어 꽤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는 마법석이다.
그게 하나도 아니고 6개를 박아놓은 걸 보니 엄청난 물건을 만들려는 것 같거든?”
마법석은 보석을 마법으로 가공해 놓은 것을 말한다.
보통 마법사들이 마법 아이템을 만들때 많이 사용하는 것이 보석인데, 이건 예쁘게 보이거나
비싸게 받아 먹으려는 것의 여부를 떠나 보석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법을 가공할때 필수적으로 재료에 마나를 집어 넣어야 하는데 강도가 약한 것들은 마나를
받아들일때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기 일수다.
보통의 철이나 돌의 경우에도 마나 주입할 당시에는 견딜 수 있을지 모르나 며칠 못가 마나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릴 정도니 일반 나무나, 유리 등등은 엄두도 못내는 것이 당연했다.
뭐, 철이나 돌은 마나를 주입할 때 견딜 수 있으니 정 그것을 사용하고 싶으면 ( 예를 들면
마법검을 만들때 말이다.) 계속 마나의 힘을 견딜 수 있도록 강도 강화 마법을 따로 걸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생략하고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보석이라 마법석 하면 대부분이 보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 마법석은 얼마나 많은 마나를 품고 있느냐, 어떤 마법이 저장되어 있느냐에 따라
원 재료 값보다 적게는 수십배에서 많게는 수백, 혹은 엄청 대단한 마법이 있을 경우 수천배
더 비싼데, 그러한 마법석을 6개나 모아 박아뒀으니 엄청난 물건을 만들려고 했다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왠만한 마법 아이템에도 마법석이 두개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는 걸 봐서도 말이다.
뭐, 사실 내가 이제까지 본 마법 아이템이 몇개 없지만서도…
‘그러고보니 엄마가 물려주신 반지도 마법 아이템이었지? 아하하하…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네…’
속으로 실소를 흘리는 그 와중에도 가레스의 설명이 계속 들려왔기에 나는 얼른 그의 말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 6개의 마법석이 오성망 마법진을 이루고 있어. 봐라, 다섯개의 보석이 별 모양의 꼭지점에
위치해 있고, 가운데 하나가 버티고 있지? 아마 이 마법진이 움직인다면 엄청난 마나가
나올 거야. 최소한… 5, 6서클 정도는 무난하지.”
“헤에, 그래요?”
5 서클이라면 가레스와 같은 경지지만, 6서클이라면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경지다.
그리고 그 정도만이라고 해도 마법 세계에서는 무지 괜찮은 마법사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겉으로 드러난 이 마법진 말고도 또 다른 마법진이 있는 거 같아.
아무래도… 이 팬던트 안에 있는 듯 한데… 아마 이 팬던트는 두개의 판을 겹쳐서 만든 걸
거야.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요?”
가레스가 잠시 말을 끊자 나는 다급해져서 얼른 그의 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런 내 심정을 무시한 채 그는 찬찬히 팬던트를 다시 한번 살펴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문제는 이 결과물이 실패작인 것 같다는 거지. 아니면 아직 완성되지 못했거나… 어떤
마법진이든지 다른 마나가 치고 들어오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이건 전혀 반응이
없거든. 마치 보통 돌이나 나무처럼 말야. 그렇다고 마법진이 온전히 드러나 있지 않으니
뭘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요?”
“그래. 뭐, 내가 보기에는 실패작인 것 같다만… 이것 좀 보거라.”
그러면서 가레스가 가르킨 것은 팬던트의 옆면이었는데 거기에는 멋드러진 글씨체가 양각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멋드러진 글씨체에 비해 내용은 조금 장난스러운 것이었다.
“‘위대한 현자이자 천재 마법사인 아름답고 우아한 맥키니언 데모스테네스님’? 이건 이걸
만든 돈이 무지 많아 넘쳐나는 어떤 멍청한 녀석이 만들다 실패하니까 자화자찬 하기 위해
재미삼아 새겨 넣은게 틀림 없어. 내 이때까지 위대한 현자이자 천재 마법사란 칭송을 받는
이들 중에 맥키니언 데모스테네스란 자가 있다는 말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하.하.하…”
가레스의 한심하다는 말에 내가 어색하게 웃자 가레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이걸 만든 녀석은 다시 부시려고 했나보다. 하지만, 뭐 어쩌다보니 이렇게 온전히
남아 네 손에 들어왔구나. 그래, 너도 마법 공부한다고 했었지?”
팬던트를 만지작 거리다 다시 나를 보며 묻는 가레스에게 나는 얼른 대답했다.
“예, 아직 낮은 클래스까지 못 익혔지만요.”
“뭐, 그걸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요는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니까. 어쨌든, 내 결론은
그러니까 그냥 가지고 있다가 돈 없을때 여기 있는 마법석이라도 팔아 먹거라. 하긴, 그것
만으로도 너는 엄청나게 횡재한 거다.”
가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장난스레 눈을 찡긋 거렸다.
그 모습에 그가 내가 더 비싼 거 받았다고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 기색은 없어 나는
안도감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레스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장난스레 눈을 찡긋 거렸다.
그 모습에 그가 내가 더 비싼 거 받았다고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 기색은 없어 나는
안도감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팬던트를 다시 받아들때 느껴지는 묵직함을 생각하면 가격도 가격이지만, 여차할
때 무기로 써도 무방할 것 같았다.
마법석이라는 이름은 돌보다도 단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트레이드 마크니까 말이다.
하지만 계속 그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는 무겁고, 그렇다고 소지품에 넣어두고 다니자니
엄청 비싼거라 불안해서 팬던트에 달려 있는 가죽끈을 새로 갈아 목에 걸고 다녔다.
처음에는 목에 묵직한 무게감 때문에 몸까지 휘청일 것 같았지만, 배 위에서는 내가 크게
움직이는 것도 없는 일이라 크게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며칠 지나자 차차 익숙해져서
괜찮아졌다.
그러는 동안 우리 일행은 순풍을 받아 빠르게 항해를 할 수 있었고, 드디어… 드디어 인어의
영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에 목표를 인어의 섬으로 잡았기는 했지만, 그건 바다 위에는 이정표가 없어서 목표로
삼은 것 뿐이고, 인어의 섬 근처에는 암초가 많아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배 처럼 큰 배가
다가가기도 힘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어의 섬이라고 불리는 것도 커다란 바위가 바다 위로 빼꼼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라 그 위에 장정 열명 정도밖에 올라가 있지 못할 크기었다.
바위치고는 무지 큰 편이지만, 섬이라고 하기에는 무지무지 작은 축에 속하는 것이라 처음
부터 그 위에 올라가서 인어들과 협상을 하기도 어려운 환경이라 우리 배는 인어 영역의
근처에 도달하자 멈춰서서 닻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인어들을 데리고 배 옆 수면 위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고, 인어들과 협상을 할
레이언과 또 한명의 사무요원,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마법사들을 비롯한 무사들이
갑판위로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에 기다렸다는 듯이 배 앞쪽 바다 위에서 세명의 인어가 불쑥 솟아 올랐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듯, 레이언 녀석은 인어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그들이 뭐라 하기 전에
다급하게 외치는 거였다.
“베지테크스 상회에서 나왔습니다. 족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뭘 저렇게 다급하게 말하나 싶어 황당하게 레이언 녀석과 인어들을 바라보는 사이 세 인어
중 가운데 있던 인어가 배에 걸린 베지테크스 상회를 상징하는 깃발과 레이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인어들만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던 레이언 녀석이 다급하게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기다고 있겠습니다. 부디 족장님을 모셔와 주십시오.”
아마 그 인어는 족장님을 모셔올테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걸 레이언이 잽싸게 가로채며 말하자 불만인 듯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화내는 대신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양 옆에 있는 두 인어를 데리고 바다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거였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르겠지만 잔뜩 긴장한 채 갑판 위에 있었던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거였다.
“뭐, 뭐야?”
왜들 그러는지 이해를 못해 나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마침 레이언 근처에
있던 가레스가 레이언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다, 잘했어.”
뭘 잘했다는 지 모르겠지만, 레이언은 그런 가레스의 말에 씨익 웃어보이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아… 정말 긴장했어요.”
그 모습에 의아함이 더욱 더 커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갑판 위를 향해 외쳤다.
“뭐야? 도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야? 나도 좀 알게 설명좀 해봐!”
그러자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던 레이언이 머리를 긁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게… 핫핫핫… 인어들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들으면 아름답지만 물 밖에서 들으면
그렇잖아…”
그의 말을 듣던 나는 일순 황당해졌다.
“뭐냐… 그러니까.. 아까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 급하게 말했던건… 인어들이 말할 틈을 안
주려고 그랬던 거란 말야?”
“아하하하… 말하자면 그런 거지…”
레이언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옆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인어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들은
지금 고향에 돌아 왔다는 감격에 폭 빠져 옆에서 뭔 이야기를 하던 말던 상관 없는 듯 했다.
“나원 참… 그러면 이전에는 어떻게 대화를 한 거야?”
그런 레이언과 인어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장난삼아 말하는 듯 해도 그 어조에 절절한 감정이 들어 있다는 걸 눈치 챈 나는 그런 거에
질색하는 그들의 모습이 웃겼지만, 그렇다고 이해 못하겠는 것도 아니었기에 놀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확실히, 물 밖에서의 인어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걸 이해하기에 아까 그 인어도 불만인 듯 했지만 그냥 물러나준게 아니었을까?
뭐, 내가 좋을대로 해석한 거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그 인어들이 자신들의 족장을 부르러 간 사이 대략 30여분쯤이 흘렀을까, 우리가
여기 도착했을 때 맨 처음 나와서 맞아(?) 준 인어가 아닌 다른 인어들의 모습이 하나 둘
바다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고 약간 떨어진 곳에서 우리쪽만, 정확히 말하면
내 옆에 있는 인어들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내 옆에 있는 인어들과 가족인 듯 한데, 그렇다면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가족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니 기뻐해야 할텐데 내 옆에 있던 인어들은 그러기는 커녕 괜히 하늘이나
바다 속을 살펴보며 그들의 시선을 피하는 거였다.
그래 순간적으로 황당해 얘들이 왜 이러나 싶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달려 나온(?) 인어들의 시선에는 다시는 볼 줄 알았던
가족을 만난 기쁨도 있었지만, 그 기쁨 못지 않은 분노도 같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긴, 여기 있는 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안 듣고 젊은 혈기로 인하여 멀리 멀리 나갔다가
노예 매매 상에게 잡힌 이들이 었으니 말이다.
부모님 말 안 듣고 멀리 나갔다가 늦어서 경찰 아저씨의 인도를 받아 집으로 돌아온
말썽꾸러기의 심정일거다.
‘쿡쿡쿡… 기쁨 보다는 두려움이 앞서 존재하겠지?’
내가 데려온 인어들의 가족들이 다 온듯 더 이상 바다 위에서 인어들이 솟아 오르는 것이
멈추고 잠시 시간이 지나서 맨 처음 우리를 맞이한 인어들이 다른 인어들을 데리고 솟아
올랐다.
그 인어들 중 머리에 금테를 쓰고 있는 한 인어가 앞으로 나왔다.
아마 그 인어가 족장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 족장이 채 앞으로 와 입을 열기도 전에 레이언이 먼저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족장님. 갑작스레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면 안되겠습니까?”
그러자 족장 인어가 멈칫 하더니 의아한 시선으로 레이언을 바라보며 뭐라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먼저 레이언이 잽싸게 그의 말을 가로채며 입을 열었다.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만, 저희 일행중에 물의 정령을 다루는 자가 있어서 제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에 어려운점은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레이언 녀석이 왜 그러는지 알아챈 듯 족장 인어는 피식 웃더니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주고
자신이 먼저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자, 이러한 이유로 잘 부탁해 해인아.”
족장 인어가 바다 속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레이언은 곧바로 나에게 시선을 돌려 한 마디
하는 듯 하더니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신의 옆에 있던 사무요원의 뒷덜미를 잡고 그대로
배 위에서 뛰어내렸다.
“우아앗, 야 임마~!!”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놀라기는 했지만 떨어지는 그들을 못 잡아줄 건 아니었다.
날 이렇게 놀라게 하는 괴씸죄를 적용하여 그냥 바다에 빠뜨려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사무
요원의 품에는 이번 거래를 위한 서류가 안겨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이 바닷물에 닿기
전에 잡아줬다.
“하하하, 고마워. 자 이제 우리도 들어갈까? 족장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실례라고.”
정말 오랜만에 레이언 녀석의 능글맞은 표정을 보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 동안 이 녀석도 인어섬에 도착할때까지 나름대로 긴장하고 있다가 드뎌 조금
긴장을 풀었다는 뜻일 것이다.
“웃기고 있네.”
나는 이죽거리면서도 순순히 운다인(물의 중급 정령)을 불러내어 레이언 녀석과 사무 요원을
보호하게 하며 밑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가 다가가자 족장 인어가 먼저 말을 건네왔다.
“그건 족장님도 마찬가지 아니신지요. 그 모습은 여전하십니다.”
레이언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녀석 특유의 능청스런 목소리로 대답하자 족장 인어가 피식
웃었다.
“당신의 말투 또한 여전합니다. 어쨌든, 다시 만나서 반갑고, 제 동족들을 무사히 데리고
와 줘서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약간 기가막혔다.
레이언 녀석이야 인간 세상에서 상회를 운영해 나가니 다른 이들을 대할 때 겉치례에 불과한
인사를 하기도 하지만, 족장 인어까지 그런 말을 주고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긴, 내가 인어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 그동안 당한 거에 의하면 무지 철없다는 것
외에 – 내가 상대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는 곧 그 감정을 접고 그 곳에서 물러났다.
어차피 운디네야 내가 여기 없어도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을테고, 그렇다고 내가 족장 인어와
거래를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 레이언 옆에 있던 사무 요원에게 살짝 눈짓한 나는 그 둘을 감싸고 있던 운디네에게
그들이 부탁하는대로 하라고 말해놓고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갑판 위에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던 가레스가 날 발견하고 물어왔다.
“끝난 거냐?”
“아뇨. 그냥 뒤에서 지켜보는 것도 지루해서 그냥 나만 올라 왔어요.”
가레스에게 대꾸하며 나는 허공을 훌쩍 날아올라 갑판 위에 내려섰다.
물론, 내 힘으로 한 게 아니라 엔다이론이 그렇게 해준 거지만…
“야… 이제 너도 좀 쉴 수 있겠다. 그 동안 매일 불려 나와서 나 태우고 다니느라 정말
고생했다. 내일 부터는 당분간 그럴 일도 없을테니 돌아가서 푹 쉬어라.”
이제 인어들을 넘기고 나면 매일 아침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을테니 그런 인사를
한 거였다.
내가 엔다이론의 등을 쓱쓱 쓰다듬고 그를 정령계로 돌려보내자 내 말을 듣고 있었던 듯
잭슨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 정말 그 동안 고생했어. 어휴, 사실 여기까지 어떻게 견디면서 왔는지 신기하다니까.”
“얼씨구… 네가 왜 살아다는 표정을 짓냐? 그 동안 인어들을 끼고 살았던 건 바로 나라고.”
잭슨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에 내가 기가막혀 녀석을 흘겨보자 그가 하하 웃었다.
“아하하하… 나도 마음으로 같이 애써줬다는 거지. 내가 네 고생을 잘 아니까 힘내라고
마음속으로 얼마나 응원을 해줬는지 알아?”
“쳇, 아프지 말라고 빌었었겠지. 내가 아프면 네가 내 대신 인어들을 데리고 있어야 하니까.”
“아하하하, 짜식이 그런 걸 가지고 뭘… 내 돌아가면 한턱 쏠테니 그만 맘 풀어. 게다가 이제
저 인어들과도 작별이잖냐.”
“그래, 이제 정말 작별이다. 아아, 난 다음에 이 운행에 끼고 싶지 않아. 만약에 나 보고
다시 참여하라고 하면 월급을 세배로 줘야 한다고 할 거야. 뭣도 모르고 참여했다가 정말
고생 무지 많이 했잖아?”
그렇게 내가 투덜투덜 대는 동안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던 몇몇 무사들 사이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온다!”
“빨리, 빨리 받을 준비 해!”
“어이, 이쪽으로 모이라고!!”
“뭐, 뭐야?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야?”
무사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에 내가 또 의아하여 묻자 잭슨이 씨익 웃으며 설명해줬다.
“뭐긴 뭐야, 힘들게 왔으니 댓가를 받는 거지.”
“엥?”
‘이건 또 무슨 말이야?’
하지만 그 질문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나는 굵은 물줄기가 커다란 궤짝들을 든 채 솟아
오르더니 그것들을 갑판 위에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았다.
“에엑~!!”
내가 입을 떠억 벌리는 사이 여러개의 물줄기는 계속해서 올라와 물건들을 갑판 위에
계속 떨어뜨렸다.
쿵, 쿠쿵, 쿠당탕탕~~!!
“에엣, 좀 사살 내려 놓으란 말이다!!”
“어, 거기 거기.. 그건 받아. 그냥 떨기지 못하게 해!!”
“아앗, 여기 찌그러졌잖아?”
“이봐, 거기 빨리 저쪽으로 치워! 또 떨어지잖아!!”
“아앗, 좀 천천히좀 줄 것이지…!!”
“바로 저것 말이다. 인어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댓가지.”
가레스는 그 모습을 가르키며 히죽 웃었다.
하기야, 물을 다루어서 물건을 건넬 수 있는 이가 여기에서 나 외에는 인어들 밖에 없겠지만,
그 힘을 이용해 물건을 옮기다니 좀 황당하기도 했지만, 인어들이 사용할 만한 방법 다워
나도 가레스처럼 히죽 웃었다.
바다에서 부터 물줄기에 휩싸여 허공에 떠올랐다가 갑판 위로 떨어지는 물건들은 다양했다.
뭐가 들었는지 모를 궤짝부터 시작하여 녹이 슬고 찌그러진 투구에다 물이끼가 잔뜩 붙어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도 모를 액자까지…
무사들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그 물건들이 갑판에 부딧히기 전에 받거나 아니면 떨어진
물건들을 재빨리 주워다가 갑판 구석으로 옮겨놨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 허공에서 떨어지는 물건들과 부딪힐 위험이 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사들은 아주 익숙한 듯 한 마디씩 투덜 거리면서도 아주 재빠른 손길로 떨어지는
족족 잽싸게 옮겨 놓아 물건끼리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허공에서 떨어지는 물건들이 – 내 눈에는 솔직히 잡동사니들로 보였지만… – 작은
언덕을 이루었을 무렵 더 이상 줄 물건이 없었는지 바다 위에서 물줄기가 물건을 들고 솟아
오르는 일이 멈췄다.
그 대신 내가 불러낸 운다인에게 보호 받으며 물 속에서 족장 인어와 이야기를 하던
레이언과 다른 한명의 사무요원이 바다로 부터 나와 갑판위에 올라섰다.
“이야기는 잘 끝났나 보지?”
열심히 일하는 무사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하여 갑판 한쪽 구석에 가만히 서 있던
가레스가 다가가며 묻자 레이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안될 이유도 없으니까요. 그냥 예전에 맺었던 계약을 다시 확인하고 약간 수정하는
작업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냐? 그럼 이제 출발할 수 있는 건가?”
“아뇨, 아마 빨라야 내일 쯤에나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물건은 확인해야 하니까요.”
“물건을 또 확인해? 거래하는게 한 두번도 아닌데 알아서 줬겠지.”
“그래도 확실하게 해야죠. 만약 확인도 안 하고 그냥 출발했다는 걸 크리스 녀석이 알았다간
저는 그날로 죽습니다.”
“헹, 크리스 녀석 핑계 대지 말거라. 크리스 녀석이 그런 말 안 했어도 네 스스로가 했을
것 아니냐?”
“하하하…”
가레스가 녀석을 살짝 흘겨보며 말하자 레이언은 그걸 부정하지도 않은 채 그냥 웃어 넘기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평소 대충 대충 지내는 것 같지만 괜히 크리스가 그를 상회 대표로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날 늦은 저녁까지 갑판 위에서는 인어들이 건네준 물건들을 확인하는
작업이 벌어졌다.
거기에는 가레스를 비롯한 마법사들과 잭슨까지 동참했지만, 나는 아직 물품 감정을 할 줄
몰랐기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냥 옆에서 멀거니 구경만 했다.
처음에는 나 같은 인력을 낭비하는게 아까웠는지 감정된 물건을 더 이상 상하지 않게 물기를
말릴 겸, 표면에 붙은 물이끼를 닦는 작업을 시켰는데 내가 또 의욕이 넘쳐서 깨끗하게
닦으려고 빡빡 문지르는 걸 보고 기겁하며 뺏더니 그 뒤에는 아무것도 안 시키는 거였다.
뭐, 덕분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었지만…
하지만 오래 바닷물에 잠긴 채 있어서 잔뜩 녹이슬고 해초까지 덕지덕지 묻은 갑옷이라던지
투구까지 아주 소중한 것인 양 유리처럼 조심스레 다루는 모습이 되게 웃겼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옛날 금화라던지 아니면 금, 은 보석으로 꾸며진 귀중품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것들이야 내가 보기에도 비싼 것들일테니 조심스레 다루어지는 것은
이해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아무리 골동품이라지만, 이 세계에서는 1000년 된 유품들도 흔하던데 저런 낡은 갑옷을
누가 비싼 돈을 주고 산다는 건지…
뭐, 한국에서라면 비싸게 팔지도 모르겠다.
티비 같은데서 보면 유럽의 어떤 부자들은 그렇게 오래된 갑옷이라던지 검 같은 걸 취미로
수집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 같으면 돈 주고는 안 살거 같다.’
그때 이런 내 생각을 뚫고 린제이가 마일즈에게 건네는 말이 들려왔다.
“호오, 이것 괜찮은 걸 건졌는데요?”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다른 물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녹이 슬고 낡고, 거기다가 찌그러지기
까지 한 투구였다.
그 투구는 안면 가리개가 없어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머리만 보호하게 되어 있었는데
얼굴이 드러나게 뚫린 구멍쪽의 테두리를 부드럽게 쓸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여기좀 봐요. 백금을 입혀놨군요. 거기에다가 이 가운데 박힌 건 제법 큰 오팔인데요?”
정정해야겠다.
저런 보석들이 있으면 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드디어 다음날 우리는 인어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그 곳을 떠나 엔더비 산맥으로
향했다.
나는, 이번 항해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아침에 갑판에 서서 푸른 하늘과 바다, 그리고
열심히 배웅하느라 손을 흔드는 인어들을 바라보며 배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 정말.. 이게 정말로 배를 타는 거지. 그 동안은 내가 운송에 참여하는 건지 운송을
쫓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니까.’
점점 멀어지는 인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잭슨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 드디어 헤어졌구나. 이제 저들을 다시 만나려면 3년을 기다려야 하나, 5년을 기다려야
하나…”
기지개를 쭉 펴며 시원하다는 듯 말하는 그를 향해 나는 씨익 웃었다.
“뭐야? 섭섭해? 그럼 당장이라도 다시 만나게 해줄 수는 있는데…”
“사양할랜다. 이왕 다시 만날 거면 아주 오래, 오~~ 래 있다가 만났으면 좋겠어.”
“키득키득키득, 동감이야.”
서로 동질감이 가득 담긴 시선을 교환하며 둘이 웃는데 나는 문득 내 옆에 조용히 서 있는
듀비의 모습을 발견하고 의아함을 느꼈다.
뭐, 듀비가 내 곁에 있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뭐랄까… 그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던
것이다.
평소 내 곁에 있을 때에는 항상 나에게 시선을 주고 있지 않아도 나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내 옆에 있어도 내가 있는 줄 아는건지 모르는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바다 저 너머만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거였다.
그 동안 항해를 하면서 나는 인어들에게 시달리느라 마음 편하게, 운행을 시작하기 전 처럼
그와 같이 있어본 적이 없었기에 배에서 항상 이러고 있었는지 아닌지도 몰랐기에 이런 그의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듀비?”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무지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봤다.
그가 내 곁에 있는 게 불편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린다고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런 그의 모습이 신경쓰였다.
왜 사람도 평소 안하던 짓 하면 오래 못 산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그래 혹시 무슨 일이 있는건가 싶어 그를 불렀더니 예의, 평소와 다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나를 향했다.
“예?”
그 모습을 보니 아까 내가 느꼈던 그런 이상한 모습은 사라지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듀비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어 나는 내가 잘못 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왕 부른거 한번 물어보자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음, 혹시 무슨 일 있어요? 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가라앉아 보여서…”
그러자 오히려 듀비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뇨, 별 일 없습니다만… 제가 이상하게 보였습니까?”
그렇게 되묻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나는 삐질삐질 웃으며 그냥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아니예요. 제가 잘못 봤나 보죠. 아무 일 없으면 됐어요.”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옆에 있던 잭슨이 갑작스런 내 질문에 의아했던지 물어왔지만, 이번에도 그냥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아냐, 내가 잘못 봤나봐.”
“갑자기 마음이 편해지니 헛게 보이냐?”
“그동안 하도 시달려서 몸이 허해진거 같아. 몸 보신이라도 해야 할까봐.”
“쿡쿡쿡, 그래 우리 돌아가면 맛있는거 많이 많이 먹자고.”
“훗, 네가 한턱 내기로 했었지? 난 잊지 않았다고.”
듀비가 괜찮다고 해서 그런지, 나는 내가 잘못 본 거라 치부해버린 뒤 잭슨이 걸어온 장난에
맞대응하며 킥킥 거렸다.
그 뒤로 우리는 일주일동안 정말 평화로운 항해를 계속 했다.
그 동안 항해한 것 처럼 깊은 바다 위를 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인어들을 데려다 줬으니
마지막 종착지점인 엔더비 산맥을 향해 가는 것이었기에 점점 얕은 바다로 다가가고 있는
상황이라 더 이상 바다 몬스터들이 습격해오는 일도 없었다.
하기야, 그 동안 바다 몬스터들을 유혹(?)해서 우리를 습격하게 만든 원흉이었던 인어들이
없으니 더욱 더 습격 받을 확률이 낮아졌을 거다.
그래 나는 그 동안 해보지 못했던 한가하고 평화로운 배 여행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갑판 위의 햇볕이 따끈따끈하게 비치는 곳에 안락 의자를 가져다 놓고 편안하게 누워
일광욕을 즐기며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게으름을 피워댔다.
선글라스와 선크림이 없는게 크게 흠이었지만, 뭐 없으면 없는대로 살아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이렇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뭘 하던 상관하지 않고 놀기만 했지만, 아무도 나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기야, 이건 내 생각이지만서도 그 동안 배 위에 있던 이들 중 가장 고생한 사람이 선원들
빼고 바로 나 아니겠는가?
물론, 육체적으로는 크게 힘든 건 아니었지만,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생을 했으니 말이다.
뭐, 그것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이제 얼마 후에는 목적지에 도착해 땅을 밟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떠 전체적으로도 약간 느슨해진 분위기였다.
그러는 와중에 해민이도 오랜만에 나와 같이 있게 되어서 기쁜지 내 곁에 찰싹 붙어서 같이
일광욕을 즐기면서 지냈다.
고양이들이 햇볕 쐬는 걸 좋아한다는 걸 들어본 적은 있는데 수인족들도 그런 걸 되게 좋아
하는 모양이었다.
듀비 또한 예전처럼 계속 내 근처에 있었는데 그는 일광욕을 별로 즐기지 않는지 근처 그늘에
자리를 잡은 채 햇볕 가까이는 오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문득 그를 돌아보면, 멍한 시선을 무작정 저 멀리 바다쪽으로 던지고 있어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계속 괜찮다고 했기에 나중에는 배 위에서 할 일
없이 있는 터라 무료한 나머지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버렸다.
뭐, 원래 그는 항상 자신의 일은 모든 걸 스스로 챙겼고, 또 남이 챙겨주는 걸 부담스러워
했기에 나는 그에게 거의 신경 안 쓰고 살았다.
대화 또한 필요한 말 외에 안 했기에 아마 처음에는 신경 썼을지 몰라도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
후로 부터 점점 신경을 끄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으음, 이럴때 보면 나도 참 개인주의인 성격인 거 같다.
하기야, 아버지가 군인이시라 나도 여기저기 이사를 다녀 나라 곳곳에 친구들을 사겼지만
그 지방을 떠난 뒤에는 그쪽 친구가 연락을 하면 주고 받긴 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먼저
연락하는 적이 없었고, 그러다보면 곧 친구를 잊곤 했던 것이다.
그러한 성격이 지금도 통해서 항상 나에게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는 해민이는 자주 챙겨주고,
내가 먼저 쓰다듬어주곤 했지만 듀비에게는 거의 관심도 안 가졌던 것이다.
물론, 듀비도 날 좋아해서 내 곁에 있는 게 아니었으니 내가 이러던 말던 크게 상관 없는
눈치라 나는 내가 그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빈둥대는 와중에도 배는 목적지를 향해 착실히 항해를 계속하여 며칠 뒤에
드디어 저 멀리 푸르른 옷을 입고 있는 엔더비 산맥 끝자락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육지다아~!! 육지가 보인다아~!!”
제일 먼저 그 모습을 발견한 사람은 역시 배의 중앙 돗대 위의 망루에 있던 선원이었다.
그가 기쁜 음성으로 크게 고함을 지르자 사람들이 우르르 갑판위로 올라와 바다 저 너머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그리고 잠시 후,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서서히 자그마한 점 부터 시작된 육지가
보이자 서로 들떠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와, 드디어 땅이다 땅~!!”
“아, 이 감격~!! 이 얼마만에 보는 육지란 말이더냐~!!”
“으핫핫핫, 잘 있었느냐 엔더비 산맥이여! 내가 다시 돌아왔노라~!!”
“오 마이 스위트 러브 땅~!! 나는 영원히 너만 사랑하리라아~!!”
그런데, 이런 그들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감격은 육지에 내려서 하고 지금은 짐 부터 챙겨라. 내릴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니냐?”
무덤덤, 냉정한 머튼의 목소리..
그는 오랜만에 육지를 봤는데도 기쁜 감정은 없는지 여전히 표정 변화 없이 사무적인
태도였다.
그는 무지 들떠서 날뛰는 사람들을 몇마디로 냉각시키더니만, 그래도 미적미적대며 갑판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거의 등떠밀다 시피 갑판 밑으로 내려보내는 거였다.
‘아직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을테니 좀 좋아하게 나둬도 좋으련만… 쯧쯧, 저렇게 살면
능력은 인정 받을지 몰라도 인생 살아가는데 재미가 별로 없을거 같은데… 과연 누가 저
남자랑 결혼할 것인지… 아, 그러고보니 머튼이 결혼 했던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노친네처럼 속으로 쯧쯧 거리는 와중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걸 직접 당사자에게 물어보기는 –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머튼은 대하기가 어려
워서… – 뭣해서 다른 누군가에게 물어볼 이가 없을까 두리번 거리는 그때,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렇게 급하게 할 것 까지는 없잖아? 거리를 보아하니 오늘 저녁쯤에야 해변가에 다다를
것 같고, 그러면 상륙은 내일 아침에나 할텐데…”
레이언이었다.
하지만 머튼은 레이언에게도 가차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준비 해야죠.”
그 한마디를 끝으로 머튼 또한 짐 싸는(?) 이들을 지휘하려는 듯 서둘러 갑판 밑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 뒷 모습을 바라보며 레이언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저리 살면 인생이 삭막할텐데…”
그 순간 나는 아까 내가 떠올린 생각은 그 동안 레이언 녀석과 같이 지내면서 그 녀석의
영향을 받아서 하게 된게 아닌가… 심각하게 고찰해봐야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녀석을 닮아가는 것은 정말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건지 모르는 건지 레이언은 머튼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갑판 한쪽
구석에서 편안히 앉아 있는 나에게 다가와 내 발치께의 의자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여어, 팔자 좋은데?”
그의 몸에 내 다리가 살짝 닿자 나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치운 채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다.
녀석과 신체적 접촉을 하면 왠지 녀석을 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레이언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고울리가 없었다.
“넌 뭐 하냐? 짐 정리 안 해?”
나는 당연히 할 게 없었다.
처음 부터 이 운송에 참여할 때 내 임무는 오로지 인어들을 관리하는 것뿐.
그러니 이 배 화물칸에 있는 얼마만큼인지도 모를 짐을 관리하는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빈둥대고 있을 수 있는 거였다.
육지에 내릴때 나는 단지 내가 이 배에 가지고 온 짐만 가지고 내리면 되는 거였다.
뭐, 그렇다고 해도 다시 라센국으로 돌아갈때 이 배를 또 타고 갈테니 그 모든 걸 다 챙기는
대신 드워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기간에만 사용될 몇가지 물품만 챙기면 되니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였다.
하지만, 레이언 녀석은 드워프와의 거래를 직접 담당하니만큼 알게모르게 챙길 것들이
최소한 나보다는 많을 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빈둥댈 수 있나?’
이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 레이언이 히죽 웃었다.
“이게 다 상관의 좋은 점 아니겠어? 어차피 서류는 나와 같이 온 녀석이 다 챙길 테고
나도 내 짐만 챙기면 되겠지.”
“쯧쯧, 너 같은 녀석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불쌍타… 아, 그러면 나도 불쌍한 건가? 으음…
상회에 남는걸 심각하게 고려 해봐야겠는걸?”
왠지, 이 곳에서 지내면서 나도 모르게 말발이 늘어가는 것만 같았다.
“으악, 내가 크리스에게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나 좀 봐줘어~”
“네가 어디가 예쁘다구… 널 보면 더더욱 있고 싶지 않아.”
“그럼 크리스를 봐서라두…”
“내가 크리스에게 빚이라도 졌남?”
“돌아가면 내가 한 턱 쏜다!!”
“겨우 한번?”
“그럼 두번.”
“뭘루?”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훗, 고려해 보지.”
씨익 웃으면서 그쯤에서 – 어차피 처음부터 다 장난이었지만… 아무래도 레이언 녀석이 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 타협을 보는 날 보던 레이언이 고갤 갸웃 거렸다.
“너 어째 점점 상인틱 해진다? 상회에 들어와서 그러는 거냐, 아니면 원래 천성이냐?”
“너, 어째 점점 상인틱 해진다? 상회에 들어와서 그러는 거냐, 아니면 원래 천성이냐?”
“훗… 글쎄다…”
그날 저녁이 되자 레이언은 갑판 위에 선원을 비롯하여 모든 일행을 집합 시키더니 이제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여 마지막 볼 일을 본다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느니, 도착하면 창고에 가지고 온
맥주를 풀어낼테니 힘내자느니 하면서 사람들의 분위기를 띄웠다.
드디어 육지를 보게 되었다는 소식이 이미 배 구석구석에 퍼져 그렇지 않아도 흥분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말에 뛸뜻이 기뻐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한 분위기 덕분인지 그 뒤에 다시 머튼의 닥달로 인하여 상륙할 준비를 밤 늦게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신나하면서 움직였기에 예상보다 일찍 끝나는 대 업적을 이룬 모습을 지켜보자니
레이언 녀석이 이 효과를 노리고 일부러 이 시점에 사람들의 마을을 띄워 놓은 건 아닌지
심히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러나, 배는 해안가에 가까워지자 강한 바람이 사라진 덕분에 속력이 느려져서 당초 늦은
저녁때쯔음이면 도착 할거라는 예상을 깨고 그 다음 날 이른 새벽에야 원하던 지점에 도착하여
닻을 내릴 수 있었다.
뭐, 그래봤자 닻을 내리기까지 대기하고 있는 선원들이나 잠을 못 자 퀭한 눈을 하고 비틀 거렸지,
상륙하는 인원들이야 짐 정리를 다 하고 각자 자신의 선실에서 잠을 청했기에 아침 일찍 상륙하는
일정에는 크게 차질이 없었다.
해가 떠오르자 다른 때 같으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선실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 있고, 단지 임무가
있어 달콤한 잠의 유혹을 힘겨이 뿌리친 몇 사람들만이 조용히 배 위를 돌아다녔을 그 시각에
그날은 모든 이들이 선실을 박차고 나와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 빨리 빨리 움직여!!”
“이봐, 창고에 있는 거 다 가지고 올라 왔어?”
“아직 반도 안 올라온거 안 보여?”
“거기, 보트 내릴 준비 다 됐지?”
“짐을 싣기만 하면 돼.”
“선원들도 내려 가나?”
“오랜만에 도착하니 지금 내려가고 저녁에나 다시 배로 돌아온다던데?”
“그래? 그럼 배에는 누가 남아 있는 거야?”
“몰라. 선원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런데 신경쓰지나 말고 일이나 하라고.”
“쳇, 난 그런 것도 모르는 거냐?”
“거기, 잡담하지 말고 일이나 해!”
“히익…”
“거봐, 내가 일이나 하라고 했잖아.”
두 무사가 일 하는 와중에 잡담하다 머튼에게 걸려 호통을 받는 모습에 주위에 있던 무사들이
숨죽여 킥킥 거렸다.
그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식사도 못하고 부지런히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해변에 모든
이들이 상륙했을 때는 아침때도 한참 지난, 거의 점심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때문인지 사람들은 그토록 원하던 육지에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기는 커녕 잽싸게
몇개의 팀으로 나뉘어 캠프를 치고, 짐 정리 하고, 음식을 만드느라 바빴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 한가하게 앉아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으니…
몸을 움직이는데는 하등 도움이 안된다고 자부하는 세 마법사와 레이언의 보좌관 역할로 따라온
사무요원, 그리고 대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일에 쏙 빠지는 레이언녀석과, 의욕은 있는데
요령이 없어 의욕이 무색할 정도로 하등 도움이 안되는 나와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해민과 듀비가 바로 그들이었다.
평소 나 아니면 레이언과 같이 놀던(?) 잭슨은 의욕은 나보다 좀 딸려도 이런 일에 경험이 많아
요령이 좋았기에 머튼에게 붙들려서 캠프 세우는 팀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래도 남들 일할 때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으려고 해변 공터의 한쪽 구석에 얌전히
쭈그리고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드디어 도착했구나.”
“저런, 좋아하기는 아직 일러. 아직 고생이 남아 있다고.”
“나 안 좋아 했어. 배가 너무 고파서 좋아할 기력도 없는 걸 뭐. 다른 사람들은 배고프지도 않나,
어떻게 저렇게 잽싸게들 움직이지?”
“배고프니까 더욱 더 잽싸게 움직이는 거야. 머튼은 정리가 다 안되면 식사도 못 먹게 하거든.”
“으윽…. 머튼 대장 성격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역시 배고파서 안되겠군. 이번에 돌아가면 캠프 차리는 거라던지, 짐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는
마법을 한번 개발해 봐야 겠어.”
우리 옆에 힘 없이 앉아 있던 가레스도 견딜 수가 없었던지 투덜거렸다.
그러자 마일즈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것 보다는 머튼 대장에게 최면을 걸어 짐 정리나 캠프 차리는 것 보다 우선 식사 먼저하게
하도록 하는게 빠를 걸요?”
“음, 그렇지만 나중에 최면에 걸렸다는 걸 알아차린 머튼의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요?”
살짝 끼어든 린제이의 질문에 마일즈가 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 거렸다.
“아하하하… 하긴… 머튼 대장에게 그랬다간 난 반은 죽어나겠지?”
“그건 그렇고… 이봐, 이름 뿐인 대표.”
뜬금 없이 가레스가 레이언을 부르자 그 주위에 앉아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다 그에게로
쏠렸다.
“예?”
“이번에 북드워프족 마을에 찾아갈때 말이야… 이 늙은이도 같이 가야 하나? 그냥 이 싱싱하고
젊은 두 녀석만 데리고 가면 안될까?”
평소에는 늙었다거나 노친네라는 소리를 들으면 펄펄 뛰며 자신은 정정하다고 주장하던 가레스가
스스로 늙은이라고 지칭하는거 보니 북드워프족 마을로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예? 아하하… 그래도 같이 가주시는게 일행들에게 큰 힘이 되지 않을까…”
가레스의 뜨거운(?) 눈빛을 받으면서도 일행에 참가시키려는 레이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레스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나 보다도 강하고 젊은 새로운 전력도 보강 되었겠다, 나 하나 빠져도 괜찮잖아.”
“무슨 그러한 말씀을… 그래도 경험 많으시고 실력이 뛰어나신 가레스님께서 참여 하셔야
든든하죠.”
“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면서 이렇게 대단한 인력을 모시면서도 푸대접이나 하는 주제에…”
“푸, 푸대접이라뇨, 저희가 뭐 섭섭하게 해드린 거 있습니까?”
“당연하지. 이 늙은이를 보고 산을 걸어 올라가게 하잖아. 그것도 좀 낮은 산이야? 저렇게
높은 산을 5일은 헤매고 가야 하잖아? 아니지, 저번에는 길을 잃어서 일주일이나 넘게
헤매다가 신호를 보고 마중 나온 드워프들에게 구조 되어가지고 간신히 도착했지 아마?”
“아하하하.. 그, 그때는…”
“시끄러워. 그때도 날 그냥 걸어 올라가게 했잖아! 그때는 나이가 그래도 좀 젊었으니까 견딜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리는 못한다. 날 삭신이 쑤셔서 죽게 할 작정이 아니면 나 데리고
갈 생각 하지 마. 아니면 누구보고 엎고 가게 하던지, 가마를 태우고 가던지.”
“그, 그런…”
“뭐, 이번에는 나 빼도 전력이 크게 낮아지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배를 잘 지키고 있을테니
나머지 녀석들이나 데리고 잘 갔다 와.”
“예? 으음… 아니.. 그게…”
“아니면, 나를 모시고 갈 수단을 강구해보던가.”
레이언이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가레스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가레스 또한 자신이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니까 저렇게 레이언을 놀리며 안 간다고 하는
것이고, 레이언 또한 괜찮으니까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걸 거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레이언이 평소의 여유만만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모습이
재미 있어서 지켜보는데, 내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나의 쓰다듬음을 즐기고 있던 해민이가
슬그머니 나를 톡톡 치는 거였다.
“응?”
그래 의아한 마음에 그를 내려다보니 해민이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다가 살짝 고개를 돌려
내 뒤에 앉아 있는 듀비를 바라보는 거였다.
“으응?”
그래 해민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역시나 항상 존재감 없이, 요즘 들어 더더욱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듀비가 앉아 있었는데, 오늘도 배 위에 있었을
때 처럼 시선을 딴 곳으로 던지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보내는 곳에는 엔더비 산맥의 끝자락이 있었는데 가만 보니 시선이 그 산맥의
끝자락을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멍하게 있는 것은 아니고 뭔가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듯 한데…
‘뭔가를 바라봐?’
거기서 뭔가가 떠오른 나는 옆에 앉아서 계속 가레스에게 당하는 – 아니면 당하는 척 해주는 –
레이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응?”
느닷없는 내 옆구리 공격에 레이언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그가 그러던 말던, 내가 그의 얼굴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어 그가 기겁을 하건 말건 나는 그의
귀를 손으로 꽈악 잡아 도망가지 못하게 막은 후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있지… 엔더비 산맥 너머에 뭐가 있지?”
내 질문이 의외였던지 레이언은 나에게 귀가 잡혀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이녀석 귀 안 아픈가?’
정말 안 아픈지 레이언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여전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녀석을 마주바라보자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더니 자신도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뭐긴 뭐가 있어. 엔더비 산맥이 프스카야국 과 아메리 국의 경계선이잖아. 그러니 동쪽으로는
아메리 국이 있고, 서쪽으로는 프스카야국이 있지.”
그렇게 말해줘봤자 방향 감각이 없는 나로써는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어디가 동쪽이고 어디가 서쪽인데?”
그러자 레이언은 무지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내가 노려봐주자 순순히 입을
열었다.
“어디가 어디긴, 이쪽이 동쪽이고 저쪽이 서쪽이잖아. 해가 저쪽에서 뜨는 거 보면 몰라?”
“오… 그렇군. 미처 생각을 못했네…”
그렇다면, 듀비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엔더비 산맥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엔더비 산맥 동쪽 너머에 듀비와 관련이 있는 뭔가가 있던가? 아메리 국에 친척이 있는 것도…
아, 맞다.’
그제야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 나는 나의 무관심함을 탓하며 다시 레이언을 향해 속삭였다.
“있지… 푸른 엘프족이 사는 곳이 어디에 있지?”
“푸른 엘프족? 아아…”
의아한 듯 되묻던 레이언은 내 뒤에 조용히 앉아 있던 듀비를 힐끗 곁눈질 하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층 목소리를 낮춰 내 귀에 속삭였다.
“푸른 엘프족은 새클턴 국의 밀림에 살고 있잖아. 그리고 그 곳은 아메리국의 바로 옆이라고.”
“역시나…”
자기 자신이 극구 우겨서 내 곁에 남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살던 곳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에휴… ”
나는 여전히 자신이 살던 곳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듀비를 살짝 곁눈질해 본 후 다시
레이언에게 속삭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이봐…”
나는 여전히 자신이 살던 곳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듀비를 살짝 곁눈질해 본 후 다시
레이언에게 속삭이기 위해 몸을 기울였다.
“이봐…”
“응?”
나와 마찬가지로 내 뒤에 있는 듀비를 힐끔 훔쳐보던 레이언이 즉각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듀비말야, 언제까지 상회에 묶어둘 거야?”
“응? 으음… 그게…”
내 단도직입적인 말에 레이언은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에휴, 지금까지는 듀비 같은 타입이 없어서… 뭐, 나야 돕기위해 남는다면 딱히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이종족들은 어떻게 했는데?”
“흐음… 보통은 자신들 종족과 거래 할때 수월하도록 돕는다던지… 상회에 와서 도울때도 자신의
종족에게로 돌아가서 그 곳 가족과 어른들에게 허락을 맞고 다시 오니까… 뭐, 일년에 한번
쯔음은 가족에게 갔다 오도록 배려도 해주니까… 음.. 하지만 듀비처럼 집이 너무 먼 경우는
없어서… 대부분은 집과 가장 가까운 지부에서 일하도록 해주니까 말야. 뭐, 그래봤자 우리
지부가 있는 국가는 라센과 왈그린 뿐이라서… 이쪽에 집이 있는 이종족들은 전부 집으로
돌아갔거든…”
“원래 그러는게 정상이라고 봐.”
내 작은 중얼거림에 레이언이 심히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그러는게 나도 편해. 그냥 그들을 채용한다고 생각하면 돼니까. 하지만, 듀비의
경우는 다짜고짜로 집에 갈 생각도 안하고 은혜를 갚겠다고 눌러 앉았으니… 이거야 원,
주군을 선택한 고지식한 기사도 아니고…”
레이언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곤란한 시선을 저 너머 바다로 던지자 그 모습에 괜히 화가 난
나는 투덜거렸다.
“널 따르는 것도 아니잖아. 듀비가 머무는 건 내 곁이라고. 네가 나보다 더 곤란하냐?”
“물론, 너도 곤란해 하는 거 알아. 듀비가 네 곁에 있겠다고 선언한 후 며칠 동안은 네가 무지
불편해 하는 게 보였으니까 말야.”
레이언의 단호한 말투에 나는 속이 뜨끔했다.
‘윽… 그렇게 내가 티를 많이 냈나?’
물론, 그때 갑자기 듀비가 달라 붙어서(?) 속으로 엄청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레이언 녀석이 알아차렸다면 듀비가 모르고 있을리가 없었다.
‘으음.. 혹시.. 듀비가 내가 불편해 하니까 일부로 존재감 없이 조용히 지내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내가 듀비에게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잘못을 해온 것 같았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모르는 사이 그가 곁에 있는 걸 불편하게 느끼고
그를 서운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덕분에 그는 내 곁에서 존재감 없이 지내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나는 이제 그에게 완전히
무관심 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아아… 생각하면 할 수록 그에게 잘못한 일만 떠오르는 구나…’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바늘로 콕콕 찔리다 못해 이제는 송곳으로 찔려
무지 아픈 양심을 부여잡았다.
그는 그 나름대로 자신을 구해준 이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어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눌러
참고 여기 머물고 있는 건데 말이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이 자꾸 커지자 그걸 어떻게든 해보려고 물빛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단정하게 뒤에서 묶은 머리카락이 마구 삐져나오고 흐트러졌지만, 그에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러는게 이해가 되었는지 레이언은 잠시 내가 진정하길 기다리더니 입을 열었다.
“뭐, 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나름대로는 곤란했다고. 그의 위치가 어정쩡하니 말이지.
하지만, 너에게 붙어 있으니 내가 함부로 어쩔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 동안 가만히 있었던
거야.”
“그러냐? 그럼 네 생각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내 질문에 레이언은 아무말 안 하고 있었어도 생각해 둔 건 있었는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가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해서 구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우리가 평소 하던 일을
하는 와중에 그랬던 거니 그에게 큰 댓가를 안 받아도 손해볼 건 없어. 그래도 이왕 구한 거
처음에는 블루 엘프족들과 새로운 거래를 위한 포석으로 이용하려고 생각했었지. 그래봤자
우리에게 이득이고 그쪽은 손해인 거래가 아니라 양쪽 모두 이득인쪽으로 하려고 한 거니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
의심스런 눈초리로 레이언을 바라보던 나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건 다행이네. 하기야, 그러니까 다른 종족들과 계속 거래를 유지하는 거겠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노예매매상을 터는 것 만으로도 이득은 충분히 본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종족들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는 거니까 그들 종족간의 거래를 위한 포석으로
그들을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거 뿐이야. 그런데 블루 엘프는 자신의 종족을 구해줘도 은혜 입은
자는 스스로 은혜를 갚으라는 원칙인 듯 하니 거래를 틀 포석이 생기지도 않은데다, 듀비 또한
은혜를 갚을때 까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니 블루 엘프와의 거래는 틀렸다고 봐야지. 우리가
그들과 거래를 틀기 위해 정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그들을 찾아 헤매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야. 게다가 블루 엘프가 우리들에게 어떤 이득을 줄 수 있는지도 모르고.”
“설명이 장황하군. 그래서 결론은 뭔데?”
“결론이라고 해봤자… 우리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거지. 지금 당장 듀비가 집으로 간다고 해도
보내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그 혼자 머나먼 길을 가게 나두겠냐? 그 길이 험하다는
것도 충분한데 말야. 그래서…”
“그래서?”
“듀비와 이야기를 해봐야지. 그가 원한다면… 우리가 라센으로 돌아갈때 약간 먼 길을 돌아
가게 되더라도 새클턴의 해안에 그를 내려줄 용의도 있어. 인어도 없으니까 해인이 네가 힘을
좀 보태주면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릴 것 같지도 않고…”
“듀비가 순순히 가려고 할까?”
“만약 그가 은혜를 다 못 갚아서 못가겠다고 버티면, 다음에 다시 이 곳으로 올때 그가 돌아가는
것으로 하면 어때? 우리가 그를 구해준 은혜가 그리 큰건 아니라고 인식시킨다면, 다음에 여기
올때는 빨라야 3년, 늦으면 5년쯤 걸릴 테니 그 동안이면 충분히 은혜를 갚을 시간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는 듀비 덕분에 블루 엘프에 대한 걸 좀 알게 될테니 블루 엘프족과 거래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야. 그도 딱 정해진 기일이 끝난 후에 집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생각
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싶은데.”
“흐음… 괜찮은 생각이라고 봐.”
레이언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문득 내가 듀비와 헤어지는데 대해 아무 감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이라도 빨리 떨기려고 한 느낌이 나지 않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무리 웬수 같은 사이라고 해도 막상 헤어질때면 미운정이라고 해서 조금이나마 서운함을
느끼기 될 텐데, 듀비에 대해서는 오히려 안도감이 드니 말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듀비에게 미안해졌다.
‘아… 내가 이렇게 이기적일줄이야… 내가 이럴줄은 처음 알았어.’
아마 해민이와 헤어지게 된다면 너무 서운해서 붙들고 엉엉 울지도 몰랐다.
물론, 순순히 보내주기야 하겠지만서도…
‘으음… 아무래도 지금부터라도 그에게 좀 관심을 가져야겠어.’
그렇게 스스로를 탓하는 동안, 어느새 각자의 일을 끝마친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입만 놀리는
우리들을 불렀다.
벌써 캠프가 다 차려지고, 짐도 정리가 다 되고, 늦은 아침 겸 점심 식사까지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내 생각에 빠져 있느라 몰랐지만, 마법사들쪽은 벌써 그걸 눈치채고 우리를 부르기 전에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가 있었다.
해민이나 듀비, 그리고 레이언만 내가 움직이지 않으니 그냥 내 옆에 있어줬던 것이다.
그러다가 잭슨이 우리를 부르러 오자 레이언이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자, 가서 우선 점심 부터 먹자고. 그리고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그래, 우선 먹고 보자.”
그날, 점심을 먹고 난 후 모든 일행이 약 1시간 정도의 휴식을 가진 뒤 그날 저녁에 가지게 될,
육지에 오르게 된 기쁨을 나눌 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이때는 나도 도울 수 있었는데, 내가 할 일이라고는 바다 속에 들어가서 맛난 생선을 잡는
거였다.
그리고 내가 잡아올린 생선들은 선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받아서 곧바로 손질하기 시작
했다.
해민이와 듀비는 잭슨과 레이언, 그리고 몇몇 무사들과 함께 근처 산에 가서 사냥해오게
되었다.
해민이와 듀비는 나와 떨어지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바다 속에서는 그들이 나에게 도움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기에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들만 또 우두커니 앉아 있기는 싫었는지 레이언이 사냥하러 같이 가지고 제안하자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기야, 수인족은 보통 산에서 살아간다고 들었고, 블루 엘프족 또한 정글에서 살아간다고
했으니 산 속은 그들에게 익숙할 터였다.
음… 뭐, 듀비에게는 좀 추울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마법사 일행들은 캠프의 주위에다 임시용 결계 마법을 치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땅을 밟게 된 것이니 만큼 오늘은 보초도 세우지 않고 모든 이들이 파티에 참여
하기로 했기에 만약을 대비하는 것이다.
하기야, 마법사들이 있었으니 그럴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리고, 이번에는 대단한 정령사 – 바로 나다. 에헴… – 까지 있었으니 선원들도 오늘 하루는
배를 비우고 파티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고 배는 내가 불러낸 정령들이 하루 동안 지켜주고 말이다.
뭐, 하루동안 뭔 위험이 있지 않아 보이지만, 그래도 유비무환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캠프의 공터에서는 여기저기 커다란 모닥불이
여기저기에서 피워졌고, 근처 가까운 산으로 사냥을 나갔던 이들이 기쁜 표정으로 많은 습득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손질을 시작했고, 배에서 날라져
온 수많은 짐들 중에서 술통 여러개가 끄집어내져 공터로 날라져 왔다.
술은 맥주가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무지 기뻐했다.
다른 술도 있었는데, 폼을 보아하니 오늘 사람들이 엄청 마셔댈 것 같으니까 아마 꺼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포도주와 위스키 – 나는 맥주를 제외한 노란 색의 술은 모조리 위스키라고 한다. – 는
맥주보다 비싸니까 엄청 마셔대면 아마 감당이 안되어서 못 꺼내는 걸지도…
하기야, 포도주와 위스키 – 나는 맥주를 제외한 노란 색의 술은 모조리 위스키라고 한다. – 는
맥주보다 비싸니까 엄청 마셔대면 아마 감당이 안되어서 못 꺼내는 걸지도…
나는 아직 맥주건 와인이건 입에 안 대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식사할 때 한잔씩 권하기도 했지만, 내가 딱 한마디 하니까 더 이상 권하지 않는
거였다.
“울 아부지가 못마시게 해서리…”
물론, 그때 내가 말한 아버지란 한국에 계시는 엄격한 군인 아버지를 말하는 거였고, 그 뒤에
‘성인이 될 때까지’란 단서가 붙는다는 걸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내 나이로 나는 성인이지만, 한국은 만 20세가 되어야 성인이니 그쪽으로 하면
나는 아직 성인이 아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뭐, 이 곳 사람들이 내가 말한 아버지가 엘라임이라고 착각하건 말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술을 입에 대지 않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아버지께선 여기 안 계시니까 한모금 마시던 고주 망태가 되게 마시던 상관 없을테지만,
개인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해가 안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다.
한국에 있는 해민이 녀석이야 친구들이 유혹하니까 거기에 넘어가서 마셔본 적이 있긴 하지만,
나는 친구들이 유혹을 해도 그 쓴 물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뭐, 맥주야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맛으로 마신다고 하지만… 어쩌면 술을 마셔본 적이 없어
이해를 못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마셔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긴장을 풀며 술과 모닥불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바베큐에 흠뻑 빠져
즐기고 있을 때 나는 돗수가 약한, 배에 같이 타고 온 주방장이 나를 위하여 특별히 만들어준
칵테일 같은 혼합 음료를 다른 음식들과 같이 홀짝이고 있었기에, 절반이 넘는 이들이 취해서
쓰러진 한밤중이 되어도 말짱한 정신으로 사슴인지 멧돼지인지 모를 고기를 즐기고 있었다.
레이언 녀석은 얼마나 술이 강한지 그 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권한 술을 사양하지
못하고 다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고 말짱한 얼굴로 아까부터 취한 가레스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루는 마일즈를 놀리고 있었다.
가레스는 의외로 술에 약해서 맥주 몇 잔과 와인을 조금 마시더니 그대로 정신이 흐려져서
마일즈를 붙들고 있었는데, 그는 취하면 아무나 붙잡고 수다를 떠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원레 가레스는 마일즈와 린제이 둘 다 붙들었는데 마일즈가 정의감(?)을 발휘하여 가레스의
모든 관심을 자기에게 쏠리게 만들어 린제이를 풀려나게 했던 것이다.
하기야, 마일즈의 폼을 보아하니 이런 일을 한두번 당한 것도 아닌 듯해 보였다.
머튼은 이럴 때에도 고지식한 자세를 유지하며 술은 적당히 거절하고 대신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부하들을 챙기고 있었다.
잭슨은 자신보다 나이 많은 선원이나 무사들의 장난 어린 놀림의 대상이 될 까봐 일찍부터
자리를 피해 주방장을 돕는다는 핑계를 대고 바베큐 굽는데 전념하고 있었다.
뭐, 그 주방장이라는 사람도 아까부터 자신의 본업을 내팽개치고 다른 이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 공터의 모습을 쭈욱 둘러본 나는 내 무릎에 앉아서 남들이 맛나게 마시는 술잔을 힐끔
힐끔 바라보면서 고기를 먹고 있는 해민이와 – 내가 술을 안 마시니까 아직 성년이 안 됀
해민이도 술 마시는 걸 엄금하고 있었다. – 마찬가지로 내 옆에서 조용히 가끔 가다 고기 한점
씩 맛보고 있는 듀비를 바라봤다.
해민이는 너무 늦은 시각이니까 이제 재워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바라본 거고, 듀비는 그와
오랜만에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 바라본 거였다.
‘우선 그러려면 해민이부터 재워야겠지?’
그렇다고 해민이 혼자 천막에 재울 수는 없어서 – 아무리 우리보다 강한 수인족이라고는 하나
아직 어린애라 혼자 두는게 걱정스러웠다. – 주위를 둘러보다가 가레스에게 잡혀 연신 그의
횡설수설을 들어주고 있는 마일즈를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는 린제이가 보였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지만, 우선은 여자라는 이유로 – 물론… 나는 남자라 인식되어서 이
곳에 있는 이들 중 해민이 다음으로 어린 나이지만 아무도 들어가서 자라고 하지 않구 있었다. –
아까 들어가서 자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마일즈가 걱정되는지 고집스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라면 해민이를 데리고 가서 잘 수는 있겠다 싶어, 나는 듀비에게 잠시만 있으라고
손짓한 후 그녀에게 다가갔다.
“린제이.”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치며 부르자 그녀가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생각지 못한 그녀의 반응에 나는 미안하다는 뜻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혹시…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응? 아, 아니.. 이제 들어가야지. 왜?”
“아뇨, 혹시 지금 들어가실 거라면 해민이를 부탁할 수 있을까 해서요.”
내 말에 품에 안긴 해민이가 항의하는 듯 낮게 으르렁 거렸지만, 녀석의 눈에 가득 담긴 졸리움
때문인지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내가 있으니까 계속 옆에 있긴 했어도 아까부터 졸리긴 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지금이 평소 그 아이가 자던 시각보다 훨씬 늦은 시각이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 해민이 녀석의 반응이 귀여워 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그 모습을 보던 린제이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뭐… 나도 슬슬 졸리던 참이었으니까 내가 데리고 자줄 께. 너는 조금 더 있을 모양인가
보지?”
그녀가 의외로 순순히 허락하자 조금 놀라웠지만 부탁하는 내 입장으로써야 나쁠게 없었기에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해민이를 넘겼다.
“너무 심하면 가레스님 좀 재워줘요.”
그녀는 가기 전 근처에 앉아 있던 레이언에게 당부의 말을 던지고는 해민이를 안고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곧바로 린제이의 당부를 들은 지 얼마 안되는 레이언을 잡아 끌었다.
“어이, 이리 와봐.”
뜬금 없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레이언은 짐작하는 게 있었는지 순순히 일어나 나를 따라왔다.
그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듀비에게 말했다.
“듀비, 잠깐 이야기좀 할래요?”
그러면서 그와 레이언을 데리고 사람들이 없는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내가 몸을 돌렸는데도 불구하고 둘은 요지부동 거기서 움직이지 않는 거였다.
“뭐야, 왜 안 따라오는 건데?”
의아함과 약간의 분노를 섞어 물어보는데 오히려 레이언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거였다.
“어딜 가려고?”
“어디긴 어디야. 좀 조용한 곳으로 가려는 거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나를 보며 레이언이 피식 웃었다.
“이 주위에는 결계 마법이 펼쳐져 있다는 걸 잊었어? 결계를 깨지 않는 한 우리는 가고 싶어도
못 나간다고.”
“아… 맞다.”
듀비와 이야기를 할 생각에 그걸 깜빡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슬그머니 몸을 돌려 원래 내 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 모습에 레이언이 다시 씨익 웃더니 내가 노려보자 얼른 듀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듀비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진지함과 부드러움
만이 감돌고 있었다.
나와 레이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지 듀비도 요즘 계속 짓고 있던 멍한 표정을 지우고
우리를 조심스레 바라봤다.
“저에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나는 심호흡을 한번 깊게 내쉬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듀비… 있죠, 아까 레이언과 좀 이야기를 해봤는데… 여기서 듀비의 고향과 그렇게 멀지
않다면서요?”
내 말에 듀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아직 돌아갈 마음이 없습니다.”
잠시 뜸을 들인 듀비는 단호하게 말했다.
고향 이야기를 꺼내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내 뒤를 이어 레이언이 입을 열었다.
“뭐, 지금 당장은 우리도 당신을 보내줄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당신 혼자 고향으로 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인간 세상에 대한 경험이 없는 당신 혼자 나라 하나를 건너고 또 다른 국경을
넘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거기다 엔더비 산맥도 넘어야 하고…”
그렇게 말하며 레이언이 공터 뒤쪽부터 이어져 있는 산을 슬쩍 바라보며 말 끝을 흐리자 듀비도
그 시선을 따라 자신의 뒤쪽을 바라보더니 다시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지…”
레이언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되려 듀비에게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게 있는데… 당신은 은혜를 갚기 위해 여기 있는다고 했는데, 그 정도가 얼만큼이죠?”
“예?”
듀비가 금방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레이언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몇년 동안 있는다던지, 아니면 얼만큼 상회에 도움이 된다던지, 뭐 그런거 말예요.
정확히는 당신도 말하기 힘들테니까 대충이라도…”
그 말에 듀비는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노예매매상에게 잡혔을때 저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럴때 저를 구해주신 거죠.
단순히 노예매매상에게서 구한 차원이 아니라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입니다.”
왠지, 이야기가 거창해져서 나는 약간 불안함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은혜는 제가 죽는 날까지 보답해도 모자르다고 생각합니다만…”
“에엑?”
나는 기껏해야 한 몇년 정도 봉사하다 돌아가겠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평생이라니..
레이언도 무지 놀란 표정으로 듀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둘이 놀라움을 숨김없이 나타내자 평소 무표정한 듀비의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
“제가… 여기 있는게 불편하신 겁니까? 최대한 신경쓰지 않게 해드린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제 노력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그의 말에 나와 레이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예요. 절대 불편하지 않아요.”
“불편이라니요, 당신이 우리 상회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데 그런 소릴 합니까?”
“그럼, 왜들 그렇게 놀라시는 건지…”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나는 은근 슬쩍 레이언을 바라봄으로써 모든 설명을 그에게로 떠 넘겼고,
레이언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다가 입을 열었다.
“난, 아니 우리 집단은 상회입니다.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죠.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상회의
일을 꾸려오면서 깨달은 원칙은 모든 이익에는 그만한 댓가가 있다는 겁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나도 묻지는 않았지만, 갑자기 상인이 어쩌구저쩌고 이야기를 꺼내는 레이언을 이해하기 힘들어
뭔 소리냐는 시선으로 레이언을 바라보았다.
“듀비, 당신이 우리에게 고마워 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구해준
이종족들 모두가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그
상황에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때 죽을 운이 아니었던 거 뿐이죠. 목숨을
구함 받은데 대한 감사는 당신의 명을 길게 정해놓은 신께 감사하세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단지
운이 좋은 만남에 대한 고마움이면 충분합니다. 당신이 평생 우리에게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그건 우리가 치룬 댓가에 비해 너무나 엄청난 이득이라 우리는 도저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듀비, 당신이 우리에게 고마워 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구해준
이종족들 모두가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당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그
상황에서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때 죽을 운이 아니었던 거 뿐이죠. 목숨을
구함 받은데 대한 감사는 당신의 명을 길게 정해놓은 신께 감사하세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단지
운이 좋은 만남에 대한 고마움이면 충분합니다. 당신이 평생 우리에게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그건 우리가 치룬 댓가에 비해 너무나 엄청난 이득이라 우리는 도저히 받을 수가
없습니다.”
레이언의 말을 다 듣고 난 뒤에도 듀비는 그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려는 듯 잠시 가만히 있더니
가라앉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부담스럽다는 말이군요?”
빙빙 돌려서 말했지만, 바로 그 말을 한 거였기에 레이언이 삐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에 듀비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슬쩍 나에게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 또한 괜히 그의 시선에 찔려 삐질삐질 웃는데 듀비가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럼,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해인님께서 원하시는데로 하겠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묻는데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하면 그게 또 듀비한테는 실례일 것 같아 나도 애써
듀비처럼 진지한 표정을 고수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있잖아요… 솔직히 이야기 하면 처음에 듀비한테 이야기 했듯이 내가 듀비를 구한 것도 아닌데
당신이 나에게 은혜를 갚는다고 해서 되게 부담스러웠거든요?”
그에 듀비가 움찔하며 뭐라고 입을 열려는 것 같아 나는 얼른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아, 잠깐만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아요. 내가 아니면 다른 이들은 믿을 수가 없다는
거죠? 사실, 나도 은혜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녀석(레이언)의 말이 아니라도
당신이 곁에 있겠다면 그것도 좋을 거라고 여겼거든요.”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고 있는 듀비에게 배시시 웃어보인
뒤 재차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부담스러워 한다는 거 알고 조용히 있어주는 바람에, 내가 신경 많이 못 쓴거
같아서 듀비에게 무지 미안해요. 게다가… 요즘 기분도 안좋은데 그것도 눈치도 못 채고…
집에 가까이 왔는데 돌아가지 못해서 마음 아프지 않아요?”
내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듀비의 표정이 눈에 뜨이게 흔들렸다.
하기야, 자신이 살던 곳 가까이 왔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데 마음이
안 아프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의 고지식한 청년 듀비는 미안한음 표하는 내 말을 자신을 질책하는 것으로 알아
듣고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것이었다.
“신경쓰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부터 안타까움이 절절 배인 한숨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그게 아니예요. 오히려 이제야 알아채서 듀비에게 내가 너무 미안한걸요. 그래서 말인데…”
나는 듀비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는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레이언에게 말해봤더니, 아까 그가 당신에게 이야기 했듯이 이제까지 당신이 상회를 도와준
것 만으로도 당신을 구해준 댓가는 충분하대요. 그러니 당신만 원한다면 드워프의 마을에 갔다
온 뒤 우리가 약간 시간이 더 오래 걸리더라도 블루 엘프족이 살고 있는 새클턴 국의 정글까지
데려다 줄 수 있대요. 물론… 블루 엘프족의 마을까지는 같이 동행하지 못하겠지만…”
내 말이 끝나자 듀비는 갈등이 생기는지 잠시동안 망설였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고지식한 사상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감정을 이겼는지 듀비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냥… 해인님 곁에 있겠습니다.”
‘에휴우…’
나는 속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고는 옆에 있는 레이언 녀석을 힐끗 돌아보았다.
레이언은 우리가 어쩌겠냐는 뜻으로 어깨를 슬쩍 으쓱해 보였다.
“뭐, 정 그러시다면… 하지만, 들어보니까 드워프의 마을까지 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가
보던데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은혜는 갚지 않을까… 싶은데… 뭐, 아직 다시 배를 타고 출발
하기까지 시간이 있으니까 생각해 보세요.”
“아, 그리고…”
내가 말을 끝맺으려고 하자 레이언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래 듀비와 내가 그를 바라보자 레이언이 나를 향해 눈짓을 주며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이번 여행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이 된다면, 한… 3년이나 5년 동안이라면
은혜를 갚기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하는데요?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 올때까지 그 정도의
시간이 걸리거든요. 그때는 드워프의 마을에 오기 전에 먼저 새클턴 국에 들리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앗, 그걸 깜빡 했다.’
레이언이 말을 안 했으면 듀비에 대한 안타까움에 젖어 있느라 잊어버릴 뻔 했었다.
그래 머쓱함과 고마움이 담긴 시선을 레이언에게 보내는데 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겠노라고 약속은 못 하겠지만… 유념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여전히 거절하는 분위기였지만, 다음에도 다시 올 기회가 있다는 걸 알았는지 듀비의 얼굴에
있던 그늘이 가신 것 같았다.
“그래요. 뭐, 솔직히 이야기하면 당신이 여기 머물러준다면 우리야 좋긴 하죠. 단지… 너무 과한
이익을 꿀꺽 해서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자, 그럼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고,
나는 내일을 위하여 이만 자러가야 겠군요. 먼저 실례할께요.”
레이언은 듀비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내 어깨를 두어번 툭툭 치며 씨익 웃어보이고는 자신의
숙소 쪽으로 버렸다.
덕분에 갑자기 둘만 덩그라니 남아버리자 나는 무지 어색함을 느꼈다.
그 동안 듀비와 있을때면 항상 해민이도 같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해민이가 듀비를 질투하는지 미워하는지 모르겠지만, 듀비에게 시선을 보내지
못하도록 계속 내 곁에 들러 붙어서 내 시선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던 해민이를 아까 린제이 손에 붙여 재우러 보내버렸으니 나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 되자 되게 당황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진작 듀비와 대화도 좀 해보고 친해질 걸… 하는 후회를 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라고 누가 그랬더라?’
나는 속으로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리며 이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를 어떻게 해보려고 입을
열었다.
“저기…”
“저어…”
그런데 그 순간 듀비 또한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둘은 서로 말을 하려 했다는 걸 알고 놀라 멈칫 거리며 입을 닫았다.
그렇게 둘다 입을 다무니 또 다시 우리 주위에 침묵이 내려앉아 나는 피식 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그러자 이에 질세라 듀비도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먼저 말씀 하십시오.”
“저는 별거 아니니까 먼저 말씀하세요.”
“저도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끝도 없을 거 같아, 나는 하는 수 없이 먼저 하려던 말을 꺼냈다.
‘아… 정말 별거 아니었는데…’
“아니… 나는 그 동안 듀비에게 너무 무관심 했던거 같아서 사과하려고요. 생각해보면 갑자기
낯선 곳에 떨어져 당황스럽고, 아는 이도 없어서 혼자 힘들었을텐데…”
내가 그 기분 잘 안다.
나만큼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본 사람 있겠는가?
기껏 떨어져봐야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이겠지, 설마 차원을 넘어온 사람이 지금까지의 세월 동안
과연 몇이나 있었을지…
그런 경험을 한 주제에 듀비에게 동변상련은 느끼지 못할 망정 무관심 했었으니…
‘에휴… 매번 새로이 미안함을 깨닫게 되는 구만…’
그러면서 듀비의 눈치를 힐끗힐끗 살피는데 놀랍게도 듀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 동안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고 무슨 일 있을때 잠깐 어두운 표정을 유지했지 이처럼 그가 웃는
모습은 한번도… 아니다, 그와 맨처음 만났을 때 기습적으로 내 입술에 뽀뽀하면서 약하게 웃어
줬던가 같기는 하다.
어쨌든, 그렇게 희귀하고 보기 힘든 그의 미소를 다시 보게 되자 – 그것도 되게 멋진 미소를 –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움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에 피가 몰려 화끈 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듀비가 무뚝뚝하게 굴기는 해도 잘생겼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런 이의
보기 힘든 미소를 보게 되었으니…
‘아앗, 그래도 이게 왠 요상한 반응이람?’
내가 예상치 못한 나의 반응에 당황하고 있는데 듀비의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습니다. 절 부담스레 여겨주시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은혜를
갚는다고 해인님 곁에 머무는 것이 약간은 억지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해인님 곁이 아니라면 안심이 되지 않아 고집을 부린 것이었는데, 그런 절 받아주시지 않으
셨습니까? 물론, 탐탁지 않게 여기시기는 했지만…”
화끈 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키면서 듀비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게 그런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그러자 듀비가 다시 피식 거리며 웃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해인님 곁에 있으니까 말이죠.”
“아니 뭐… 그게… 어쨌든, 이제는 조금 더 신경 쓰도록 노력할게요.”
듀비의 말에 나는 머쓱해진 표정을 감추고자 슬쩍 고개를 숙이며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말했는데
쿡쿡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그래 설마.. 하는 생각에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니 놀랍게도 내 앞에 있는 듀비가 작지만
그래도 소리를 내어 웃는게 아닌가?
나의 놀란 시선과 마주치자 겸언쩍어 하면서 얼른 웃음을 그쳤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헤에, 오늘은 듀비의 새로운 면모를 또 보게되네…’
“크흠,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게 신경쓰시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훗훗, 해민이가
계속 방해할 거 아닙니까? 해인님께서 전보다 더 제게 신경을 쓰는 걸 본다면 아마 더더욱
심하게 방해를 할 거 같습니다만.. 후후후…”
살짝 주먹진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는 듀비의 모습은… 되게 멋져 보였다.
레이언 녀석도 잘 생긴건 인정 하지만, 그 녀석은 항상 웃음을 헤프게 흘리고 다녀서 잘생긴건
인정하지만 기생 오라비라고 여겨질 뿐 멋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듀비의 웃음은 흔히
볼 수 있는게 아니라서 그런지 오랜만에 활짝 웃는 그의 모습이 생각지도 않게 멋지게 보이는
거였다.
그에 넋을 잃고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가 쑥스러운 듯 슬그머니 내게서 얼굴을 돌리고는
입을 열어싸.
“흠 흠, 그런데… 이제 주무셔야지요? 평소 주무시는 시각보다 많이 늦었지 않습니까?”
“예? 아, 자야지요. 그래요, 우리도 얼른 자러 가죠?”
듀비의 말에 또다시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몸을 돌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면서 대꾸했다.
그리고 먼저 저벅저벅 우리의 숙소로 걸어가는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그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랐다.
‘헉… 그, 그러고보니 나 듀비랑 같은 방을 쓰지? 그런데.. 오늘은 해민이가 없으니… 단
둘…
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