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19)
제 19화 거기 서! 아, 영감이 떠오른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항상 그랬던 것 처럼 해민이가 내 품에서 꼼지락 대면서 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걸 깨달으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우웅… 해민아… 간지럽다니까…”
내 투덜거림에도 목덜미의 간지러운 느낌이 가시지 않자 나는 가지 않으려고 들러붙는 잠을
아쉬운 마음으로 쫓아내며 눈을 떴다.
그러자 역시나 황금색의 눈동자를 가진 쬐끄마한 녀석이 날 보고 방긋 웃는다.
“요녀석, 간지럽다니까~!!”
그 귀여운 모습에 참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해민이를 잡아 옆구리를 마구 간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문뜩 떠오른 생각에 대신 놀란 눈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 그러고보니 너 어떻게 여기 있는 거니?”
내 말에 해민이가 뚱한 표정으로 웃음을 싹 지우고는 삐졌다는 듯이 고개를 팩 돌려버렸다.
어제 자신만 린제이 손에 떨궈놨던 것이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미안한 듯 하하 웃으며 해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듀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그 여자 마법사가 데리고 왔더군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여기로 오고싶어 했나 봅니다.”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돌아보니 벌써 일어나 씻고 깔끔한 모습으로 서 있는 듀비의 모습이
보였다.
“아, 잘 잤어요? 일찍 일어났나봐요.”
어제 일도 있고 해서 방긋 웃으며 아침 인사를 건네는데 해민이가 갑자기 뛰어 오르더니 내
얼굴을 덮치는 거였다.
“우게겍~~!!”
덕분에 기껏 일으켰던 몸이 뒤로 넘어가 나는 다시 간이 침대에 눕고 말았다.
“우엑, 해민아~!”
잠시 해민이와 장난이 섞인 실랑이를 하고 일어나보니 듀비는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에 해민이 머리를 살짝 쥐어박고는 나도 얼른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는 해민이랑 장난치느라 완전 엉망인데다 정전기까지 일어나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잠옷 대신 입은 편안한 티셔츠도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어제 밤에 듀비와 단 둘이서 잔다고 해서 되게 긴장했었지만, 어차피 한 침대도 아니고 일인용
간이 침대가 따로 떨어져서 있었기에 아무 일도 없었다.
그걸 알고도 긴장한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지게 말이다.
‘뭐, 그렇다고 뭔 일이 있기를 바란 것도 아니잖아? 도대체 뭐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요즘들어 가끔 헛된 망상을 하는 날 정신차리게 하기 위하여 운디네에게 아주 차가운 물을
달라고 해서 머리까지 감고 나자 그제야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해민이를 돌아보니 그 녀석도 아직 씻지도 않고 자다가 일어난 상태 그대로 나에게 달려온
듯 해서 그 아이도 씻기고 옷 갈아입고, 나도 머리 빗고 옷 갈아입고 나서 느긋하게 천막을
나오는데 밖에 듀비가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거였다.
“어라?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어요?”
내가 준비한 시간이 꽤 걸린걸 생각하며 미안함과 놀라움이 뒤섞인 얼굴로 묻자 듀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잠시 어디 갔다가 왔습니다. 여기 도착한 건 방금 전이었는 걸요.”
“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기다리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요.”
“기다리지 않았으니 미안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제 일 덕분인지 조금 더 친근한 대화가 오가는 듯 했는데, 그건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는지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해민이가 듀비를 향해 인상을 팍 찡그리며 가볍게 으르렁 거리더니
나를 끌고 앞으로 나가는 거였다.
“그래, 그래. 간다니까…”
캠프가 차려진 공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벌써 일어나서 모여 있었다.
그러나, 엉망인 폼을 보아하니 어제 신나게 술을 마시고 그대로 여기서 엎어져 자다가 일어난
듯 보였다.
‘그러길래.. 왜 술들을 마시는지 모르겠다니까?’
얼마나 마셔댔는지 그들 가까이 가자 술냄새가 코를 찔렀고, 숙취 때문인지 사람들의 안색이
다 누렇게 떠 있었다.
공터 가운데에는 세개의 모닥불이 모여 있었는데 각각의 모닥불에 커다란 솥이 올려져 있었고
그 안에는 스튜가 보글보글 끓으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어제 자신의 일은 잭슨에게 떠넘기고 술파티에 참여했다가 결국 뻗어버린
주방장이 누렇게 뜬 얼굴에 퉁퉁부어서 반쯤 풀린 눈을 한 채 커다란 국자를 들고 스튜를 휘젓고
있었다.
가끔가다 그 큰 입을 있는대로 다 벌려 하품을 해대는 폼을 보아하니 그 스튜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는 하지만 과연 맛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잠시 후에 그 모닥불 근처로 빵이 가득 든 커다란 바구니를 가져온 주방 보조가 스튜의 상태를
힐끔 보더니 활활 타는 모닥불에게서 나무를 몇개 빼내어 불을 줄이더니만 주위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알아서 퍼가세요. 오늘 아침은 닭고기 스튜에 빵이예요.”
그러자 사방에서 기운 없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하나 둘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
그 커다란 솥으로 다가갔다.
그러는 동안 다른 주방 보조들이 또 다른 빵이 담긴 바구니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그릇과 스푼이
가득 담긴 통들을 가져왔고, 멍하니 서 있는 주방장의 손에서 국자가 빼앗아지더니 솥에 살짝
걸쳐졌다.
그 모습에 나도 다가가서 내 아침을 챙기려는데 그 순간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 해인아 잘 잤어?”
그 곳에는 어제 가레스에게 잡혀서 수다를 들어주느라 제대로 술을 마시지 못해(?) 지금 현재
멀쩡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마일즈가 있었다.
“아, 잘 잤어요?”
그래 나도 같이 웃어주며 인사를 하는데 그가 무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내 두 손을 부여잡더니
입을 열었다.
“정말 반갑다. 잘 만났어.”
“에에?”
그러면서 어리둥절한 나를 이끌고 다른 사람들이 먼저 스튜를 퍼가기 전에 잽싸게 자신이
맨 앞 자리를 차지하더니만 내 손에 그릇들을 올려 놓는 거였다.
“에에에??”
그것도 모자라서 해인이의 손과 듀비 손에도 올려놓고는 싱글벙글 웃어대는 거였다.
“아, 정말 다행이야. 사실 나 혼자 이걸 다 어떻게 가지고 갈지 걱정이었는데…”
그러면서 우리가 들고 있는 그릇에 스튜를 가득 퍼 담더니 숟가락과 빵을 챙겨들고는 씨익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지 뭐냐? 자, 어서 가자?”
아무래도 폼을 보아하니 자신의 것 말고도 다른 사람들 아침까지 나르는 임무를 받은 듯
한데, 그가 가레스와 같이 있고 린제이의 남자 친구이니 그들것을 가지고 간다지만 그릇 숫자가
좀 많았다.
‘으음… 마일즈하고 가레스님거하고 린제이, 나, 듀비, 해인이면 여섯개이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릇은 총 아홉개이니… 누가 또 있는 거야?’
이러한 나의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풀렸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공터를 지나 한적한 곳으로 가자 그 곳에는 무지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가레스를 비롯하여 내가 예상한 린제이 말고도 레이언 녀석과 그 녀석의 보좌관, 그리고
잭슨까지 앉아있는 거였다.
“여~ 혼자 어떻게 우리것을 가져오나 했더니만, 해인이를 끌어들인 거야?”
우리를 보자마자 손을 들어 흔들면서 반갑게 인사하는 레이언 녀석의 모습에 나는 같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기 보다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녀석을 째려보았다.
“뭐냐?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왜 가만히 앉아서 받아 먹으려는 거야?”
그러자 레이언이 들었던 손을 내리며 무지 억우류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게 아니야. 저 마일즈가 가위 바위 보에 져서 혼자 갔다 오게 된 거라고. 그리고 가면서
자기 혼자 충분하다고 했단 말이야.”
“뭐? 그럼 우리는 왜 끌고 간건데요?”
레이언의 말에 따라 다시 마일즈를 째려보며 묻자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다.
“아니, 나는… 그냥 너희가 보이길래 같이 아침을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 뿐이야.”
“뭐야, 그게… 쳇…”
내가 투덜거리자 잭슨이 내 손에서 그릇을 받아들면서 웃었다.
“뭐, 좋잖아? 덕분에 같이 아침도 먹고 말야. 음~ 육지에서 처음 맞는 아침이라 그런지 기분이
되게 좋은걸? 공기도 짠 내음 보다 신선한 내음이 더 많이 나고 말야.”
바다가 바로 옆에 있어서 여전히 짠 소금기가 배인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래도 산이 바로 옆에
있어서 그런지 흙의 향기와 풀내음이 같이 날라져와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래 나도 기분을 풀고 가져온 그릇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는데 마일즈는 린제이에게
음식을 넘겼는지 둘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내가 같이 가겠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어제 늦게 자서 피곤하잖아.”
“당신 보다는 일찍 잤는 걸요.”
“나는 체력이 받쳐주잖아. 그리고 이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고.”
“그래도…”
“으맇게 왔으니 다 잘되었잖아. 자자, 그만 하고 식기전에 어서 먹어.”
“당신도 어서 드세요.”
‘으윽… 저들이 저렇게 닭살스러운 커플이었던가?’
평소 사람들 앞에서는 잘 티를 안 내더니만 오늘은 왠지 마구마구 하트를 날리고 있었다.
“에구에구, 속이야..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건가? 예전에는 이 정도에 끄떡 없었는데…”
그들이 옆에서 그러건 말건 마일즈는 퀭한 눈을 한 채로 투덜거리며 힘겹게 스튜를
떠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주위에 있던 이들이 저마다 작게 소리를 죽여 웃기 시작하는 거였다.
‘아니, 노인네게 숙취로 힘겨워 하는게 그리 웃기남? 자기들도 늙어보라지.’
그래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라 노인 공경을 일상 생활하 해야 한다고 생각(만?)하던 내가 좋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째려봤지만, 그들은 전혀 웃음을 멈출 생각을 안 했다.
오히려 잭슨은 나에게 다가와 웃음기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속삭이기까지 하는 거였다.
“푸후후후… 너 말야 어제 가레스님이 술을 얼마나 마셨는 줄 알아?”
내가 비록 마법사 일행 근처에 앉아 있었기는 하지만 그들을 계속 지켜본 것도 아니고 나 먹는
데만 신경쓰고 있었는데 알게 뭐겠는가?
그래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만 저어 보이자 이번에는 옆에서 웃던 레이언 녀석이 끼어들었다.
“맥주 딱 세잔이라고. 맥주 세잔.”
그러자 잭슨 녀석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호오, 놀랍네요? 그래도 한달 전보다 늘었잖아요? 그때는 맥주 한잔에 와인 한잔에 갔는데…”
“맥주… 세잔?”
내 비록 술을 안 마시는 대한민국의 모범 학생이지만, 맥주는 술과 음료 사이에 꼽사리 끼는,
그러니까 알코올 돗수가 극히 낮은 술이라는 건 안다.
그래 맥주 한두 잔이면 그냥 음료 마시는 것과 같은 거라고 들었는데…
“그거 마시고 취하신 거란 말야?”
나의 황당한 목소리에 레이언과 잭슨이 다시한번 키득 거렸다.
“쿡쿡쿡, 가레스는 술을 못하거든. 그러면서 술자리는 꼬옥 끼려고 한다니까.”
“키득키득키득, 그리고 그 다음 날은 숙취로 고생하면서 꼭 하는 말이 저거야. 매번 레파토리가
똑같다니까.”
“푸후후후.. 그러게 말야. 이제는 바뀔 때도 되었는데…”
그러면서 둘이 서로를 부여잡고 또 키득대며 웃는 거였다.
다행히 가레스가 아직 술이 덜깨서 정신이 온전치 못해 다행이었지, 아마 정신만 또렷했다면
이들은 머리에 매직 미사일을 한방씩 맞아도 찍 소리 못했을 정도의 모습이었다.
“나원 참… 누구 모습이 더 웃긴 건지… 그렇게 웃어대는 너희들도 꼴불견이다.”
그들에게 설명을 들었음에도 차마 내 정신 상태 상 같이 웃지는 못하고 대신 그 두녀석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주며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평소 아침 먹을때면 항상 하는 생각을 오늘도 하면서…
‘아, 김치 먹고 시포라… 배추김치도 좋고, 딸랑무도 좋고, 열무김치도 죽이고, 크윽…
깍두기도
먹고 시포… 오이 김치도… 어무이… 그립습니다…’
어제 저녁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신나게 술독에 빠져서 그런지 사람들은 오후가 되어서야
하나 둘 정신을 차렸다.
폼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오늘 출발하기는 글렀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오후가 되어 사람들이
완전히 제정신을 차리자 그제야 머튼이 모든 사람들을 불러모아 나머지 일정을 설명해 줬다.
뭐, 대략적인 내용을 이미 레이언에게 들었던 나는 집중해 듣지는 않았지만, 우선 드워프의
마을에 갈 사람들과 이 곳에 남아 있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이 곳 캠프와
배를 지킨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이 곳에 남아 캠프와 배를 지키는 이들은 몇몇의 무사들과 이번에
배를 움직여온 선장을 비롯한 선원 절반 가량 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다 드워프의 마을로 이동한다는 거여다.
물론, 캠프 주위에는 어제 밤 같은 대단한 결계는 아니더라도 몇몇의 만약을 대비한 결계가
쳐 있을 테고, 마법사 중에서 가장 강한 가레스가 남아 있는다고 하지만 사람 없는 곳에
너무 인원을 적게 남기는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어제 오늘 아무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배와 캠프 양 쪽을 지키는 인원이 30여명 정도라는
것은 한쪽에 있는 이들이 15명 정도, 그것도 하루를 3타임으로 나눠 지킨다고 계산하면 한
타임에 보초를 서는 이들은 다섯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니 아무리 내가 이런데에 경험이 전무하다고 해도 괜찮을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 정도로 충분하려나?’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당연한 듯, 아니 오히려 몇몇 무사들이 속삭이는 소리로는 전보다 조금
인원이 많아졌다는 소리를 듣고 그러한 의문을 속으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다음날이 되자 나는 왜 선원들까지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 드워프의 마을로 데려
가려는지 알아차렸다.
드워프의 마을로 가져가야 할 짐이 엄청났던 것이다.
처음에 배에서 많은 짐들을 내려 캠프에 가져다 놓을때 드워프의 마을로 뭔가 거래를 할 것들을
가져 가겠지만, 그거 말고도 우리가 드워프의 마을에 갔다 올 동안 이 곳에 남을 사람들이 –
그때는 선원들은 모두 남고 무사들도 절반정도는 남을 거라고 생각 했었으니까 –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 했었다.
그런데, 그 많은 것들을 몇개 안 남기고 다 가져가니 나는 순간적으로 그럼 우리는 갈때 뭘 먹고
갈 것인가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렇게 많은 짐 들의 90%가 식품이었던 것이다.
제일 많은 것은 와인과 맥주, 그 다음으로 밀과 쌀, 보리 같은 산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곡식류,
그리고 요리하는데 사용되는 여러가지의 양념과 향신료, 기름 같은 것들이었다.
‘누가 보면 마트 하나 새로 생기는 줄 알 거야.’
그 많은 짐들을 바라보며 입을 떠억 벌리는데 잭슨이 나에게 다가와 꾸러미를 내밀었다.
“자, 배급 식량.”
“응?”
나에게 주기에 순순히 받아 들었지만, 열어보니 커다란 빵 한 덩어리와 치즈, 그리고 말린
고기를 비롯한 비스킷 등이 들어있었다.
“드워프의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산길을 가야 하니까 요리를 못해 먹거든. 그러니까 각자
자신의 식량을 가지고 끼니때마다 그걸 먹는 거야. 빵과 치즈는 며칠 있으면 상하니까 제일
먼저 먹고, 그 뒤에 빵 대신 비스킷을 먹도록 해. 그거는 오래 가니까.”
“으응…”
“그리고 자신의 식량은 자기가 챙기도록 되어 있지만, 해민이는 어리니까 네가 잘 챙겨주고.
아, 물통도 각자 가지고 가야 하니까 챙겨두도록 해.”
“으으응…”
물이야 뭐, 나야 언제든지 운디네를 소환할 수 있었으니 따로 물통을 가져가지 않아도 걱정
없었다.
잭슨도 곧 그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 그렇군. 넌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으니 꼭 챙기지 않아도 되려나? 후후, 나중에 물이
없을때 잘 부탁한다.”
“아니 뭐… 그래도 일부러 안 가지고 갈 생각은 없는데 말야.”
아침을 먹고나자 일행은 곧바로 공터에 모여 각자 짐을 챙기고 출발 준비를 했다.
짐이 얼마나 많았던지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모든 사람들이 같이 감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커다란 짐을 짊어져야 했다.
그리고 나도 거기서 예외는 아니라서 어른 남자 둘이 양 팔을 쭉 뻗어야 겨우 감쌀 만큼 커다란
맥주 세통이 배당되었다.
“에엑? 이걸 어떻게 나 혼자 들고 가란 말이야?”
커다란 세개의 통이 하나로 묶어져 내 앞에 놓이자 나는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레이언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건 다른 건장한 남자 무사들보다도 더 많은 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이언은 능글맞은 미소를 띄우며 태연히 나의 매서운 눈초리를 받아내는 거였다.
“네가 충분히 그걸 들고 갈 능력이 되니까 맡기는 거 아니냐. 원래는 한 통 정도는 더 맡겨도
될 거 같았는데 말야.”
“뭣이라? 너는 내 힘이 그리 강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충분히 강하다고 보는 걸? 혼자 배 하나는 보호할 능력이니까 말야.”
그 말을 듣자 나는 순간적으로 허탈해져서 눈에서 힘을 뺐다.
“뭐, 뭐냐… 그러니까 너 지금… 정령들을 불러서 이걸 운반하라고?”
“그렇지. 잘 부탁해.”
생글 생글 웃으며 저만치 몸을 돌려 달아나듯 빠르게 걸어가는 레이언을 한번 노려봐준 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할당된 짐덩어리(?)를 보다가 듀비에게 몸을 돌렸다.
그 또한 커다란 밀이 담긴 자루를 두개나 짊어지고 가야 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듀비, 무거우면 내가 하나 정도 들어줄까요?”
그걸 굵은 천으로 된 끈으로 묶어 막 어깨에 짊어지려는 듀비에게 말하자 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머튼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지.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은 실제 무게보다 가볍게 하려고 마법을 걸어 놨으니까 말야.
안 그러면 이 많은 물건들을 옮길 엄두는 못 냈지.”
머튼도 이번 산행에 짐을 안 짊어지고 가는 몇 안돼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레이언 녀석과 힘 쓰는데 전혀 도움이 안되는 그의 보좌관, 그리고 마법사 둘과 아직 어린 해민이를
제외한 머튼을 비롯하여 11명의 무사였다.
이들은 만약을 대비해 일행의 앞 뒤, 그리고 사이사이에 포진하여 사람들을 보호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무사들은 한 번 휴식 시간을 가질때마다 다른 이들로 교체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길 안내를 한다는 레이언과, 일행 맨 뒤에서 가게 될 머튼은 교체를 안 한다나?
‘그 말인 즉슨, 나는 드워프 마을에 도착할때 까지 짐을 들고 가야 하고 레이언 녀석은 안 들고
간다는 소리잖아? 에잉… 맘에 안 들어.’
속으로 궁시렁 거리면서 나는 바람의 중급 정령 슈리엘을 불렀다.
그는 매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짐을 들게 하기에는 쬐께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로
상급 정령을 – 우람한 거인의 모습이라 짐 들게 하기에는 딱이지만… – 부르기는 뭣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뭐, 그래도 딱 한명을 불렀는데 그 가늘고 작은 – 물론 내 짐에 비해서지만… – 발로 짐을
쥐더니
거뜬히 허공으로 날아 오르는 거였다.
아무리 가볍게 하는 마법을 걸어 놨다지만, 그래도 최소한 통 하나 무게는 나갈텐데 말이다.
사실 거기에는 맥주가 꽉 차 있어서 한 통 만으로도 성인 남자 혼자가 들기 버거운 무게였던
것이다.
‘뭐, 정령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실제 힘과는 별로 관련이 없지만, 그래도 별로 기분이 안
좋네…’
속으로 머쓱하게 중얼거리며 저쪽을 보니 잭슨이 실프 네명을 불러내서 커다란 맥주통 – 으로
보이는 – 두개를 들게 하는 걸 보니 비실 웃음이 나왔다.
잭슨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려우니 정령들을 이용해 옮길 생각인 듯 했다.
“자, 준비가 다 되었으면 이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공터 중앙 바닥에 놓여 있던 짐들이 사람들의 등과 어깨 위로 모두 올라간 듯 하자 맨 앞에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레이언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가 몸을 돌려 걸어감으로 인하여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다녀 오십시오!”
“조심해서 다녀 오십시오!”
“어이, 몸 조심들 해~!”
“길 잃고 울지 말고 사람들 잘 따라 가라~!!”
“나중에 보자.”
뒤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일행은 드디어 드워프의 마을을 향해 산으로 한발
한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산은 처음부터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어서 – 아마도 상회 사람들이
몇년에 한번씩 사용하지 않았다면 아예 없었을 것이다. – 길이라고는 나있지 않았다.
그래 앞에서 가는 무사들이 일일이 나뭇가지를 쳐내고 풀을 베어 길을 내어야 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제대로 드워프의 마을을 찾아갈 수 있을지 심히 불안했지만, 레이언이 몇번 와
본데다 자신의 핏줄을 믿으라고 (그 동안 잊고 있엇지만, 그는 하프 엘프였다.) 큰소리를 치니
한번 믿어볼 뿐이었다.
산속에서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점심을 먹기 전에 한번 쉬고, 점심을 먹기 위해 한번 쉬고, 저녁 먹기
위해 한번 쉰 다음 저녁을 먹을 때가 되기 전에 벌서 사방이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행은 재빨리 근처에서 공터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인원이 너무 많아 같이 있을 만한 넓은 공터를 찾기가 어려웠기에 인원을 3팀으로 나뉘어
조금씩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봤자 아주 평평한 공터를 찾지는 못했지만, 편안하게 천막을 치고 잘 것이 아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사방 여기저기에서 모닥물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내 앞에도 듀비가 피워놓은 자그마한 모닥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산행이라고 해봐야 한국에 있을때, 중학교 수학여행때 설악산에 가본 것 하고, 아버지와 친하신
두 아저씨들이 의논하여 휴가때 세 가족이서 지리산을 갔다온 것, 그리고 고등학교 수학여행때
제주도에 있는 한라산을 올라가본 것이 전부였기에 나는 거의 맨 몸으로 올라왔음에도 지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자리를 잡았을때는 빵을 꺼내 먹기도 힘들었다.
하기야, 한국에서 산에 올라갔을때에는 관광객들을 위하여 길이 다 나 있었고, 산장도 있어
힘들면 편히 쉬기도 할 수 있었지만, 여기는 그런게 전혀 없는 완전 서바이벌이지 않는가?
“에구, 힘들어… 산에서 해가 일찍 진다는게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에고고고…”
해민이는 비록 짐을 들고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같이 걸어 올라왔건만 아직도 생생해
보였다.
역시, 산 속에 사는 수인족이라서 그런 건가?
“벌써 그렇게 지치면 어떻게 해? 아직 며칠 더 이러고 가야 하는데…”
잭슨 또한 힘들어 보여지만, 나 만큼은 지쳐서 완전 파김치가 되어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법사들도 나만큼은 지쳐 보이지 않았다.
그게 당연한 것이, 마법사들은 그래도 전공이 마법이라고 마법을 사용하여 올라 왔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레비테이션(부유) 마법을 사용하여 허공에 살짝 떠오르면 다른 한 사람이
떠오른 사람을 잡고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지치면 교대하고…
레비테이션 마법은 2 클래스 마법이라 각각 4클래스까지 도달한 그들로써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말이다.
‘에휴, 사실 나도 정령을 불러 편하게 올라왔으면… 했는데…’
그런데 그러자니 나 혼자 편히 가려니 양심에 찔리고, 듀비와 해민이를 같이 데리고 가자니
또 다른 사람들이 걸리고… 그래 결국 나는 씩씩하게 내 두 발로 걸어 올라왔던 것이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축 늘어져 있게 되었지만…
‘으윽… 내일도 이 고생을 해야 하다니… 그냥 양심이고 뭐고 혼자 편하게 갈까?’
그나마 내가 다른 이들 보다 나은 것은, 다른 이들은 이 더운 날 열심히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근처에서 물을 찾지 못해 그냥 찝찝한 가운데 자야 하지만, 나는
씻고 잘 수 있다는 거였다.
더불어 내가 안고 자는 해민이도 씻기고, 듀비도 원한다면 해주려고 했지만 해민이의 끈질긴
방해로 인하여 듀비가 그냥 포기 했다.
해민이 녀석이 요즘 유난히 듀비를 미워하는 것 같던데 이러다가 또 전처럼 듀비에게 무관심
하게 되는 건 아닌지 약간 걱정이 들었다.
완전히 해가 어두워지고 사방이 깜깜해지자 편히 앉아서 쉬고 있던 마일즈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마법을 시전하는 거였다.
대단한 마법은 아니고 환각 마법을 응용한 듯 싶은데, 밤 하늘 높이에서 마치 불꽃을 터트리는
것 처럼 아름다운 빛의 문양을 수놓았던 것이다.
물론, 그 문양은 상회를 상징하는 야생꽃 모양이었지만 깜깜한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배경으로 갑자기 나타난 빛의 문양은 무척 예뻤다.
그러나,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나는 밤하늘의 색다른 쑈를 구경하기보다는 어리둥절하여
마일즈만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 산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 여기 있어요~ 라고 선전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뭔 짓을 하는 거야?’
이런 내 황당함을 알아챈 것인지 잭슨이 피식 웃으며 설명해줬다.
“드워프들에게 우리가 오늘 아침에 출발했다는 걸 알리는 거야. 매번 올때마다 산을 출발한
첫날 밤에 이런 표식을 하도록 약속이 되어 있거든. 그럼 며칠 내에 우리가 도착한다는 걸
알고 그쪽에서도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마중나오니까 말야.”
“아… 그런 거였어?”
“후후, 그럼 할 일 없이 그러는 줄 알았냐?”
“아니, 뭐…”
다음날 아침이 되자 산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한국에 있을때 보다 빨리 회복되는 체력 덕분에 거뜬히 일어나서 오르기 시작했지만, 이런
산행을 하루도 아니고 며칠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왜, 드워프라는 종족들은 산 속 깊이에서 사는 거지? 산속에 뭐가 있다고… 에휴…’
하지만, 아무리 산을 좋아하는 종족이라 하더라도 산 꼭대기라던지, 아니면 엄청나게 깊은
산속에서 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 드워프들도 단체로 터전을 마련해서 살아간다는데, 집도 짓고 길도 내고 하려면 어느정도
공터는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 고비만 지나가면 드워프들이 자주 들락날락 거리며 만들어놓은 산길이 보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곳에서 산다면 한 며칠 거리 정도의 산속 정도는 왔다갔다 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레이언 녀석은 자꾸만 산 속 깊이 깊이 들어가는 듯 보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산 속에 살고 있다는 종족이라서 그렇겠거니… 했지만, 가도 가도 누군가가
산다는 흔적은 커녕, 보통 동물들도 살기 힘든 곳으로만 줄창 들어가는 거였다.
그러한 모습에 나는 왠지 산행을 출발하기 전 가레스에게 들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저번에… 레이언 녀석이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 산속을 꽤 오랫동안 헤맸었다고…’
그래도, 출발하기 전 레이언 녀석이 호언장담한 걸 일부러 생각하며 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
려고 하는 불안감을 애써 내리 눌렀다.
아무래도 이렇게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산속을 지나가면서 몬스터의 공격은 커녕, 산속에서
볼 수 있는 그 흔한 동물 한마리 보지 못해서 괜히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보통 산 속으로 가면 동물 한마리쯤은 볼 수 있는 거 아냐? 하다못해 토끼 한 마리
안 보이네…”
나는 괜히 주변을 살펴보며 소리내어 중얼거리자 옆에서 같이 가고 있던 듀비가 피식 웃으며
설명해줬다.
“동물들은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답니다. 특히나 자신의 안전에 관한 한 무척 예민하죠.
그런 동물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가는 길목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할 테죠.
만약, 동물의 모습이 보고 싶으시다면 몇 사람들과 조용히 오르셔야 할겁니다.”
역시, 정글에서 오래 산 블루 엘프 답게 동물에 대해 아는 점도 많았다.
“호오, 그런가요? 그럼 몬스터는 왜 안 나타날까요? 나는 위험하다고 해서 무척 긴장하고
있었는데 말이죠.”
“몬스터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많은 무리가 몰려다니는 종족이 아닌 이상, 아무리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녀석이라 하더라도 나타지 못할 테죠. 음… 가고일이나… 와이번 정도라면 모를까요.
하긴, 와이번이나 가고일 녀석들도 다 떼를 지어 사는군요.”
“그, 그래요?”
역시 아는 것도 많다.
“그럼 혹시 그 녀석들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요?”
“그런 녀석들은 이렇게 숲이 많이 우거진 곳에는 잘 안 나타나요. 하늘에서 먹이를 낚아 챌때
이렇게 나무들이 빽빽하게 있으면 어려우니까요. 보통 작은 나무들이 있는 곳이나 평원을
노리죠.”
“오오…. 그렇군요.”
그의 설명에 왠지 학생이 된 기분으로 듣고 있는데 내 팔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가던 해민이
녀석이 갑자기 듀비와 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해민이는 내 왼쪽에서, 듀비는 오른쪽에 있었는데 해민이가 내 오른쪽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그 아이는 아직 말을 못해서 대화가 불가능하여 거의 바디랭귀지로 자신의 뜻을 표현했는데
그게 요즘들어 되게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듀비와 이야기하는 게 점점 늘어나서 그런가?
은근히 나와 듀비 사이를 벌리며 자신만 보라는 듯이 매달리는 해민이를 쓰다듬어주며
나는 슬그머니 걸음을 빨리해서 일행의 앞쪽으로 갔다.
아무래도 혼자 불안을 안고 끙끙 거리기보다 차라리 물어보는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이봐, 레이언?”
“응?”
레이언은 저 앞의 길을 가늠해보며 열심히 손에 든 날카로워보이는 도로 길을 만드는데 열중한
채로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있지, 너 지금 가는 길 제대로 가는 거 맞아?”
그에 레이언은 잠시 손을 멈추고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뜬금 없는 소리야?”
“아니, 계속 산속 깊이로만 들어가는 거 같아서…”
“내가 길 안다고 했잖아. 이 길 맞으니까 걱정 마.”
“정말 맞아?”
“그렇다니까.”
“나중에 여기가 아닌가베… 하는 건 아니지?”
예전에 한국에 있을때 읽은 우스개 이야기에서 나폴레옹이 적이 포진해 있다는 제보를 받고
군대를 이끌고 산에 올라갔는데 적은 없었다고 했다.
그래 이 산이 아닌가베… 하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그 옆산으로 갔는데 그 곳에도 적이 없자
나폴레옹이 산을 둘러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까 그 산이 맞는가베…”
그러자 뒤에 있던 졸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지?
“저거 대장 아닌가베…”
한국인이라면 대다수 알고 있는 이야기라 내가 이렇게 말했으면 농담삼아 하는 말인 줄 알아
챘겠지만, 레이언은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걱정 말라니까. 날 그렇게 못 믿냐?”
‘물론 믿고야 싶지만…’
하지만 그 다음 날이 되도록, 우리는 여전히 누구의 손길도 없는 산속을 걸어가고 있는 거였다.
“레이언, 정말 이쪽으로 가는 거 맞아?”
“맞다니까.”
그러나 그 다음날에도 우리는 드워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산속을 걷고 있었다.
“레이언, 지인짜 맞는 거지?”
“아, 그렇다니까.”
그리고 그 다음날…
“레이언~!!”
내가 레이언을 부르자마자 레이언이 휙 돌아보았다.
“아, 정말!! 이 길이 진짜 지이이인~~ 짜 맞다니까 그러네!!”
레이언은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온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지만, 나는 녀석의
그런 몸짓을 무시한 채 한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봐, 이봐… 저기 있지, 저… 쪽에 있는… 그… 어쨌든 저기 있는 사, 아니, 분이
그… 드워프
라는 종족?”
“엥?”
차마 손으로는 가르키지 못하고 눈으로 그쪽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묻자 레이언이 내가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서는 나무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인영이 앞으로 걸어나와 자신을 우리
시선 속에 완전히 드러냈다.
“여어~ 에… 그러니까.. 이름이… 레이칸이라고 했던가?”
대충 130이나 140cm 로 보이는 키에 단단한 근육이 붙어 키에 어울리지 않는 굵은 몸집을
가지고 있고, 더부룩한 갈색 머리에 그와 같은 색의 수염이 뺨과 턱에 띄엄띄엄 나 있는 그는
레이언을 알아보고 활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자 레이언은 그를 보고 마주 웃어주는 대신 버럭 성을 내었다.
“레이언이라고 했잖아, 레이언!! 그새 또 잊어버린 거냐?”
“아, 그래 레이언… 뭐, 레이칸이나 레이언이나 그게 그거구만.”
“그게 그거라니! 남의 이름은 좀 확실하게 알아두면 덧나냐?”
“쳇, 별거 가지고 쫀쫀하게 굴긴. 역시 쫀쫀한 엘프의 피를 타고 나서 그런가?”
“뭣이라? 너희 종족을 위해 그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와준 이에게 할 말이 그거냐?”
“그러니까… 사람, 아니… 저분이 드워프?”
레이언과 아옹다옹 하는 작달막한 인영을 보고 중얼거리자 어느새 앞으로 나온 마일즈가 내
질문에 답을 해줬다.
“맞아. 출발한 날 표식을 보고 마중 나와준 모양이군.”
“헤에, 그럼 맞게 왔다는 소리였네?”
이런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그 마중나온 드워프와 핏줄을 가지고 아옹다옹 하던 레이언이
휙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몇번이나 말했잖아.”
“아, 그래 그래. 미안 해.”
뭐, 드워프까지 만난 이상 레이언의 말에 토달 이유가 없었던 나는 순순히 사과했고 그러자
레이언이 다시 그 드워프에게로 시선을 돌려 뭐라고 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드워프가 먼저 입을 열어 레이언의 말을 막았다.
“나도 사과하지. 사과 할테니 그만 하고 가자고. 여기서 밤 샐거야?”
그 드워프에게 쌓인게 많은데 다 풀지 못했다는 듯 레이언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드워프의 말이 옳은데다 사과까지 하니 뭐라 더 할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왔다고. 이왕 멈춘 거 여기서 조금만 쉬었다가 가도록 하지.”
“좋도록 해.”
드워프의 마을은 그 곳에서부터 다시 산 꼭대기로 더 올라갔다가 그 꼭대기를 넘어서 어느 큰
골짜기 밑으로 내려가자 그제야 보였다.
골짜기의 밑 바닥은 원래 공간이 좁아 보였지만, 아예 양 옆의 절벽을 파고 들어가 공간을 크게
넓혀 2, 3백 가구는 넉넉히 들어가 살 정도의 터전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게다가 골짜기 가운데로 냇물이 졸졸 흘러 물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골짜를 따라 내려오면서 절벽 중간 중간에 마치 오목 거울 같은 커다란 유리로 보이는 장치가
보였다.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밑으로 내려와 하늘을 잘 보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평지에
있는 것 처럼 빛이 잘 들어오는 것을 깨닫고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그것들은 골짜기 위에서 빛을 모아서 아래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는 듯 했다.
‘밤에는 달빛을 모아 주려나?’
게다가 골짜기를 내려올때는 날카롭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내려왔는데 그 마을에다는 무슨
수를 썼는지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지금까지 우리가 맞으면서 왔던 바람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거였다.
바람도 없지 빛을 잘 받아서 환하고 따뜻하지, 물 있지, 먹는 문제만 빼면 생물 살기에는 참 좋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마을 주위에는 적을 방어하는 목적인 듯한 튼튼하고 커다란 성벽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입구가 있었는데, 입구에는 그 큰 입구에 딱 맞는 청동으로 된 문이 달려 있어
왠만한 공격에는 끄떡도 없어 보일 정도로 튼튼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청동 문에는 그 큰 문에 걸맞는 엄청나게 큰 드워프가 그려져 있었는데,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끌을 들었다.
그리고 그 드워프의 뒷 배경에는 드워프를 다 감쌀 정도로 커다랗게 타오르는 불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은 문 두개가 딱 맞물렸을때 제대로 보였고, 문을 열때에는 불과 드워프가
세로로 두쪽으로 쪼개지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때에는 마침 문이 닫혀 있어서 그 그림을 볼 수 있었던 거였다.
우리를 안내한 드워프가 문에 다가가서 드워프의 키에 걸맞도록 밑에서 약 100cm 높이에,
그러니까 내 허리 만한 높이에 약간 돌출 된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그게 초인종 역할을 하는
것이었는지 문 안쪽에서 마치 실로폰 소리 같은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딩~ 동댕~ 딩~ 동댕~ 딩~ 동~ 댕~
처음 들어보는 간단한 멜로디의 실로폰 소리가 들리자 문 위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 프레스냐? 어서 들어와라.] [아, 프레스냐? 어서 들어와라.]고개를 들어보니 성벽 위로 빠꼼하게 두개의 깔대기 같은 장치가 보였는데, 하나는 망원경
처럼 생겼고, 다른 하나는 가운데가 뻥 뚤린 것이 나팔이거나 소리를 증폭 시키는 장치 갔았다.
아마 성벽 위에서 그 장치로 방문자를 확인하고 방문자에게 이야기를 하는 듯 싶었다.
평소 다른데서는 보기 힘든 그 모습에 듀비와 해민를 비롯한 몇몇 무사들은 놀라움에 찬 시선과
감탄사를 터트렸지만, 이 곳에 몇번 온 이들은 익숙한 듯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나 또한, 한국에 있을때 그 보다 훨씬 시설 좋은 것들을 많이 봤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단지 이 세계만의 장치에 호기심을 느꼈다고나 할까?
이 곳에 오기전에 드워프라는 종족에 대해서 듣길 뛰어난 장인에 발명가에 예술가라고 하더니만
입구에서부터 그런 걸 조금씩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았다.
성벽 위의 그 말이 들리고 그 커다란 청동 성문이 부드럽게 양 옆으로 열렸다.
그러자 프레스라는 그 드워프는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옆으로 비키더니 우리를 향해 정중하게
그 짧막한 상체를 숙이는 거였다.
“저희 북 드워프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 모습을 보자니 한국에 있을때 새로 가게가 오픈되어서 그 앞에서 예쁜 언니들이 가게 홍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물론, 한국에서는 늘씬하고 예쁜 옷을 입은 예쁜 언니들이었고, 여기는 짜리몽땅한 드워프라는
점이 다르지만…
‘음음, 외모가지고 비교한다는 거 알면 기분 나쁘겠지?’
일행 맨 앞에 서 있던 레이언이 그런 드워프의 모습을 한번 일별하고는 스스럼없이 척척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곁에 있던 나도 자연스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문 옆에 서서 우리 일행이 들어가는 걸 보고 있던 프레스라는 드워프가 일행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자 성벽 위를 향해 뭐라 뭐라 소리치더니 그 짧은 다리로 도도도 달려와 일행
앞쪽 대열에 끼어 들었다.
“상회에서 온다는 걸 알고 족장님께서 기대하고 계셔.”
그의 말에 레이언이 그 드워프와 만난 뒤 처음으로 느긋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아아, 이번에 새로운 여러가지를 가지고 왔으니 충분히 만족시켜 드릴 수 있을 거야.”
자신있게 레이언이 대답했건만, 아쉽게도 레이언의 대답이 프레스가 기대한 대답과는 틀렸던
모양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희들이 오기 얼마 전에 대회 시작이 선포 되었거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레이언을 비롯한 몇몇의 무사들이 그자리에 얼어붙었다.
“엑!!”
“어억~!”
“큭!!”
“서, 설마…”
하지만, 그들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뭔 일인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이언과
프레스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레이언은 충격에서 헤어나느라 설명을 못하고 있었고, 프레스는 다른 설명 없이 단지
이렇게만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기대하고 있지. 때맞춰서 잘 왔지 뭐야? 뭐, 아쉬운게 있다면 이번에 우리
아버지는 제비뽑기에서 떨어지셔서 못나가신다는 거지만… 만약 뽑혔다면 내가 도움이 되어
드렸을 걸…”
도대체 뭔 소린지 하나도 몰랐지만, 상황이 물어볼 엄두도 못내게 만들고 있었기에 우리는
묵묵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크윽… 젠장… 때를 잘 못 맞췄잖아? 어휴… 운도 지지리도 없지…”
레이언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투덜거리자 프레스가 무지 기분 좋다는 듯 히죽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자자, 어서 오라고. 족장님이 기다리실 거야.”
프레스의 뒤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주위를 둘러보기에 바빴다.
한국에 있을 때에나, 아니면 이 세계에 있을때에도 큰 도시라 해도 비슷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
-달라봐야 크게 다르지 않은 – 쭈욱 늘어서 있는 모습에 익숙했던 내게는 이 곳은 별천지 처럼
보였다.
건물 – 정확히 말하면 집이지만 – 건물이 쭈욱 늘어서 있는데 놀랍게도 이 건축물들이 전부
생김새가 달랐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똑같은 구석이 없다고 하는게 옳을 듯 했다.
게다가 쭈욱 늘어서 있다고 해도 똑바로 늘어선게 아니라 서 있는 위치가 각각 틀렸고, 각도
또한 틀렸다.
어차피 햇볕은 사방에서 내리쬐니 꼭 남향을 지향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심지어 울타리라던지
앞마당에 있는 화원이라든지, 아니면 길 앞에 난 골목길 하나 조차도 각각의 집 앞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곳이 하나도 없었다.
각자의 개성을 최대한 살린 그러한 모습들에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걸 느끼며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쿵쾅쿵쾅 하는 소리가 들리며 커다랗고 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 거기 섯, 이봐, 거기 좀 서라니까?”
불리는 당사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라면 호기심에 한번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겠지만, 나는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던데다가, 설마 나를 불렀으랴 하는 생각에
그냥 걷다가 듀비가 나를 잡아 멈춰 세우는 덕에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일행이 모두 멈춰선 채로 쿵쾅쿵쾅 달려오는 한 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나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프레스보다 약간 더 크고 더 듬직한 체구를 가진 드워프가
그 굵은 발을 열심히 놀리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이언이 약하게 떨며 프레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내 귀에 들려왔다.
“으윽… 버, 벌써 시작인 거냐?”
그에 반해 프레스는 무척 여유로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저 분은 이번에 족장님으로 뽑히는 바람에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시거든.”
“그, 그러냐? 그럼 우리를 마중 나오신 건가?”
“그럴걸?”
그들이 거기까지 대화하는 동안 열심히 뛰어오던 드워프가 우리 일행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좀 멈칫 하더니 그것도 잠깐, 득달같이 다가왔다.
그러자 족장이 다가오는데 일행의 대표인 레이언이 가만 있을 수가 없어 앞으로 나서며 그
드워프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와서 이야기지만, 레이언과 그 프레스라는 드워프가 평어체로 대화를 주고받는 이유는
그 동안 몇번 이 곳에 오면서 계속 만났던 데다가, 둘 다 100세도 약간 넘은 비슷한 나이였기에
편하게 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족장은 나이도 훨씬 더 많은 어른이니 편하게 대할 수는 없을 터였다.
“안녕하십니까, 족장님. 오랜만에…”
그런데, 참으로 허망하게도 그 족장 드워프는 정중하게 인사하는 레이언을 그냥 지나치더니 그
뒤쪽에 서 있던 내 팔을 덥썩 잡는 거였다.
“에엑?”
반사적으로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족장 드워프의 팔 힘이 얼마나 센지 나는 옴쭐달싹
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날 잡은 족장 드워프는 까치발을 해서 내게 얼굴을 들이밀듯 이모저모 살펴보더니 금방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더니만 부르짖는 거였다.
“오오~~ 영감이 떠오른다, 영감이! 너, 여기 가만히 있어. 내 곧 갔다 올테니 꼼짝 말고 여기
있어야 한다.”
그러더니 다시 부리나케 달려가는 거였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라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레이언을 돌아보자 그가 쓴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거였다.
“힘 내. 아마도 이 곳에 머무는 동안 너 뿐만이 아니라 이 곳에 있는 모든 일행이 그러한 일을
겪을테니… 어쩌겠냐? 재수없이 때를 잘못 맞춘 것이거늘… 다 운명이려니 해라.”
“엉뚱한 말만 늘어놓지 말고 알아듣게 설명좀 해봐라. 뭐가 어떻다는 거야?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일행이 다 겪을 거라니…”
내가 인상을 팍 쓰며 묻자 프레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뭐, 이왕 설명해줄 거 가면서 하죠? 어차피 족장님은 집으로 가셨을 테고, 우리도 목적지가
그 쪽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걸음을 옮기면서 시작된 레이언과 프레스의 설명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드워프의 마을에서는 일정기간에 대회를 연다고 한다.
최고의 장인이자 예술가로 칭송받는 이들이니 당연히 여는 대회도 ‘누가 누가 멋진 물건을
만드는가?’하는 대회인에 인간 세계에서의 대회와 다른 특이한 점이 인간 세계에서는 물건이
다 만들어져 모이는 날을 정하지만, 이 곳에서는 만들기 시작하는 날을 정한다고 한다.
‘자, 오늘부터 만들기 시작합니다!’라고 족장이 선언하면 그때부터 만들기 시작하는데, 기간은
무제한이라고 한다.
언제까지 만들어야 한다고 기간을 정하는 것은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데 지장이 된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말이다.
뭐, 그들이야 인간보다 오래 오래 산다고 하니 – 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드워프의 수명은 평균
500살 정도라고 한다. 성년은 100살. 하프엘프와 수명이 비슷하여 프레스와 레이언이 서로
말을 놓을 수 있었던 듯 – 상관이야 없지만, 그래도 5년이고 10년이고 참석자 개개인이 모두
다 마음에 드는 대회 출전 물품을 완성할때까지 기다려 그제야 대회를 개최한다니 무지 황당하게
여겨졌다.
대회를 열때까지 수십개를 만들었다 부쉈다 한다니 기간이 엄청 오래 걸릴 것 같기는 하다.
그러니 대회가 열리는 기간이 일정치 않은데, 처음 대회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한 뒤 한 일년
정도는 참가자들이 대회에 출품할 물건에 대한 영감이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별의 별 짓을
다 한다고 한다.
어떤 자는 온 산을 돌아다닌다거나, 어떤 자는 몇날 며칠이고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방
구석에 처박힌다거나, 어떤 자는 죽어라 일을 한다거나…
그러는 와중에 외부에서 들어온 신선한 자극, 그러니까 외부에서 들여온 물품이라던지, 아니면
외부 인사 – 딱 우리 같은 – 들이 왔다 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경향이 심하다고 한다.
그런데다 이 마을 풍토가 ‘대회에 참여하는 자들에 대해 최대한 배려를 해줘야 한다’ 이기
때문에 외부 이사든, 이 마을에 사는 자던 대회 참여자가 이리와라 하면 와야 하고 손 들어봐라
하면 들어봐야 한다는 거다.
참여자들을 최대한 배려해야 하는 것이, 대회 참여는 아무나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일을 가르친 스승이나 아버지가 ‘이제 너에게 가르칠 것이 없으니 하산 하거라… -물론 하산
하지는 않겠지만.. -‘ 란 소리를 들은 드워프만 자격이 주어지는데 그 연령대가 보통 300살
이후라고 한다.
그러니 대회 참가자들은 다 마을의 어른이니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터였다.
그래서 그 대회 시작한 후로 일년을 ‘마의 일년’이라고 한다나?
그래도 시작한 지 일년 후가 되면 모두 왠만큼 출품작을 정해 만들기 시작하기 때문에 괜찮은데
하필 우리가 그 수많은 기간을 나두고 그 마의 일년에 딱 맞게 온 거였다.
심사위원은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아 일선에서 물러난 원로들과 4장로, 족장이라고 한다.
드워프의 세계에는 8명의 장로가 관리하는데 족장은 매번 대회가 끝났을때 제비뽑기를 통하여
장로 중 한명을 뽑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매번 대회가 끝난 뒤 다음 대회를 위하여 8장로들이 제비뽑기로 4명을 뽑는데 그
중 한명이 족장이 되어 나머지 네 장로들과 다음 대회를 준비하고 제비에 안 뽑힌 세명의
장로들은 대회에 참여할 수 있는 영예를 얻는거라고 한다.
그리고 프레스의 아버지 또한 이번에 불행하게도 제비를 뽑아서 대회 출전은 못하고 준비
운영을 맡은 불행한 장로 중 한명이고.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나는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만, 대충 이해는 하겠는데 그럼 나는 아까 왜 붙잡힌(?) 거야? 족장은 대회에 참가 할 수
없다면서?”
내가 질문을 다 끝내자마자 레이언의 대답 대신 아까 그 드워프 족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어디 가는 거야?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그 근처에 있던 어떤 버섯 같이 생긴 앙증맞고 귀여운 집에서 아까
그 족장 드워프가 문을 걷어차며 득달같이 뛰어나오는 거였다.
그의 양 손에는 기타처럼 생겼지만, 그보다 작은 악기와 종이와 펜이 들려있었다.
“족장님이 집에 가실 것 같으니까 여기로 모셔온 거예요. 덕분에 족장님과 빨리 만날 수 있었
잖아요.”
무섭게 달려오는 족장의 모습에 내가 얼어붙어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프레스가 끼어들어
대신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좋아. 어쨌든 다시 만났으니까. 자, 잠시만 그러고 있어. 내 금방 끝날테니.”
“에? 에에에?”
그는 그의 굵고 투박한 손으로 내 팔을 잡아 끌어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 세우더니
나를 본 채 뒤로 물러나며 신신당부를 하는 거였다.
“그래? 뭐, 좋아. 어쨌든 다시 만났으니까. 자, 잠시만 그러고 있어. 내 금방 끝날테니.”
“에? 에에에?”
그는 그의 굵고 투박한 손으로 내 팔을 잡아 끌어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공간에 세우더니
나를 본 채 뒤로 물러나며 신신당부를 하는 거였다.
그 족장 드워프가 그렇게 신신 당부하지 않았어도, 그 전에 레이언의 말도 있고 해서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에 엉거주춤 가만히 서 있었다.
족장 드워프는 그렇게 나를 앞에 세워두고는 떡 하니 흙바닥에 앉아서는 아까 같이 챙긴 딱딱한
판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뭔가를 열심히 휘갈겨 쓰더니만 대력 30여분쯤, 아니 그것은 조금 안
된 시간이 흐르자 환호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거였다.
“좋았어. 다 됐다. 음음, 내가 봐도 멋진 작품이란 말야.”
나를 모델로 한, 비록 뭔가 만들지는 않았지만, 최고의 장인이라고 일컬음 받는 드워프가
완성한 멋진 작품이라는게 은근히 기대 되어 볼 수 있나 싶어 그에게 슬금슬금 다가가는데
족장 드워프가 그런 나를 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어보였다.
“너도 내 작품이 기대돼지? 보여줄까?”
그걸 기대하고 간 건데 거절할 이유가 없어 얼른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그러자 족장 드워프의 뒤쪽에 서 있던 레이언과 프레스라는 드워프가 묘한 미소를 흘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어서 그가 완성한 ‘무엇인가’를 보여주길 기대했다.
족장 드워프는 내 반응에 기분 좋은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면서 자신이 들고 나왔던 기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작은 악기를 턱 하니 손에 쥐고는 그 굵고 짜리몽땅한 손가락으로
줄을 딩딩 튕겨보는 거였다.
‘오호라, 나를 모델로 노래를 지었나보지? 과연 무엇이라 지었을까나?’
그 모습에 족장 드워프가 무엇을 끄적 거렸는지 대충 감을 잡은 나는 더더욱 기대감에 눈을
빛내며 족장 드워프를 주시했다.
그의 목소리가 굵기는 했지만, 성악가들도 그런 목소리로 멋진 노래를 하지 않는가?
‘아아, 역시 목소리가 크다 했더니만 노래를 하는 드워프였구나…’
잠시 악기의 음을 잡은 족장 드워프는 흠흠 하며 목청을 다듬더니 드디어 딩가딩가 하면서
밝고 명랑한 리듬의 간주를 시작하고는 입을 열었다.
음바음바 음바바바
신비한 색의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산길을 걷고 있었다네.
음바음바 음바바바
햇빛이 소년의 머리카락에 내려앉자
소년의 머리카락은 푸른 하늘빛으로
빛났지.
음바음바 음바바바
허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던 산비둘기 한 마리가
소년의 머리 또한 푸른 하늘인줄 알고
그대로 통과하려다
꽝~ 하고 부딪혔다네.
눈에서는 불이 번쩍, 천지는 핑그르르~~
산비둘기는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지.
그러자 하늘을 날던 그 제비가
너무 우스워 배꼽을 잡고 웃다가
나는 걸 깜빡하고 자신도 떨어지고 말았다네.
푸하하하~~ 아이고 우스워라
푸하하하~~ 이럴 수도 있었구나.
순식간에 두 마리의 새를 땅으로 떨어뜨린
신비스런 하늘빛의 머리카락 소년~~
노래의 흥에 빠져 어깨와 발로도 박자를 맞춰가며 열심히 부르던 족장 드워프는 노래의 끝을
멋드러지게 맺고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때, 멋지지? 환상적이지? 배우고 싶지?”
“하… 하.하.하… 하.하.하.하…”
기대에 차서 노래를 듣고 있던 나는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어이 없는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물론, 내 머리카락이나 눈의 색이 빛의 각도나 양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이렇게
햇볓을 정면으로 받고 있으면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걸로…’
웃어 넘겨야 할지, 예의상 괜찮다고 아부를 해야 할지 갈등하고 있는 사이, 말이 나오지 않아
흘린 웃음을 어떻게 생각한 것인지 족장 드워프가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호오, 너무 감격하여 말을 못하는 구만? 좋아, 좋아. 내 노래의 모델이 된 기념으로 내가 친히
이 노래를 가르쳐주마. 너도 좋지?”
‘허걱, 그, 그딴 노래는 배우고 싶지도 않단 말이닷!!’
나는 속으로 기겁을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배우겠다고 말하기도 싫었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며 서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날 구원해준 것은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해준 프레스란 드워프였다.
“족장님, 지금은 그럴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우선은 상회 일원들을 숙소로 안내해준 다음에
그들이 가져온 식품을 저장고에 가져다 놔야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햇볕에 노출되도록 나두면
맥주랑 와인들이 다 뜨끈뜨끈 해지겠습니다.”
그의 말에 족장 드워프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렇군. 큰일날 뻔 했어. 자자, 어서 움직이지? 자네들이 묶을 곳은 저번과 같은 곳이니 어서
서두르자고.”
우리들이 가져온 식품들은 오랜 기간 동안 배로 운반을 해와야 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도
상하지 않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특히나 맥주나 와인 같은 경우에는 발효기간 ( 맥주나
와인은 발효기간과 숙성 기간을 거쳐야 진정한 와인과 맥주로 거듭난다) 만 거친 제품들이었다.
물론, 우리가 먹기 위한 것들은 숙성 기간까지 거친 거지만…
그리하여 이 술들은 모두 배로 옮겨지는 동안 숙성된 거였는데, 이 숙성 기간동안에는 숙성 온도 (처음
며칠간은 통에서 재발효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실온 – 18~25도 사이 – 에 있어야 하지만 그
뒤에는 저온 – 냉장 온도. 3~5도 – 에 맞춰서 보관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 저온 마법에 걸린 통
속에 담겨 있다. – 통은 저온 마법에, 온도 보존 마법, 거기에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한 마법까지
걸린 마법 물품이다. –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마법에 걸렸다고 해도 역시 직사광선은 피해야 했기에 족장 드워프가
서두르는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드워프의 마을 까지 운반하는 동안 알게모르게 햇볕을 쐬었을 텐데
여기에다 더 쐬면 안좋을테니 말이다.
일행은 거기에서 둘로 나뉘어 한쪽은 – 그래봤자 10여명의 사람들 – 일행의 짐을 가지고 우리가
묶을 곳으로 향했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많은 인원들은 서두르는 족장 드워프와 프레스를 따라
드워프족 공동 창고로 향했다.
그 곳은 절벽 사이에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을 조금 다듬어 창고로 쓰는 듯 했는데, 동굴 앞에
튼튼하게 달아 둔 문을 족장 드워프가 열쇠로 자물쇠를 풀고 – 여기도 몰래 훔쳐먹는 이가
있었는지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 문을 열자 시원한 냉기가 화악 몰려 나왔다.
역시나 식량 창고라서 그런지 창고 내 온도를 낮게 유지시키는 모양이었다.
그 곳에다 들고간 식량을 창고 구석에 조심스레 쌓아 두자 같이 갔던 마일즈와 린제이가
식량 부대들과 술통에 걸어놓은 모든 마법들을 해체 시켰다.
아무래도 마법사들을 동행 시킨 이유가 운행에 닥칠 위험을 방어하는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
이런 통 같은 데에 마법을 걸거나 해체 시키기 위해 같이 동행하는 이유도 있는 듯 했다.
이런 마법들은 계속 유지 시키려면 마나를 모으는 결계를 따로 새겨 넣거나 그러한 마법을
걸어 줘야 하는데 이 마법이 고난위의 마법이라 가레스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그러한 결계 하나 하나 치는 것도 가격이 많이 드니까 아무래도 가레스를 비롯한 동행 마법사들이
자주 자주 바꿔 걸어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드워프족 창고에 들어간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테니 그들의 임무도 한가지가 끝나
이제는 어깨위의 짐이 한결 가벼워 졌을 것이다.
우리는 그 곳에 식량들을 놓고 내려왔지만, 족장 드워프와 프레스는 그 곳에 남았다.
아마 우리가 가지고 온 것들을 점검하고 정리하는 일들이 남아 그런 것이겠지?
게다가, 레이언 녀석이 이 곳에 온 적이 몇번 있어서 우리가 머물 숙소를 알았기에 따로 안내는
필요 없어 프레스의 안내도 필요 없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다.
“아… 어쨌든, 이것으로 운반은 끝난 건가?”
상회 일행이 우르르 창고에서 나와 숙소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나는 이제 내 일이 거의 끝이
났다는 것에 기뻐서 – 어차피 갈 때는 인어들이 없으니 내가 할 일은 배에서 뒹굴뒹굴 하는
것 뿐… 음, 심심하겠군. – 기지개를 피며 중얼거리자 레이언이 무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있지… 갈때도 운반할게 좀 있는데…”
“윽…”
기지개를 펴던 모양 그대로 굳어버리자 레이언이 조금 더 설명했다.
“아니… 이 곳에는 거의 물물 교환을 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드워프들에게 물건을 가져다
줬으니 또 받아가야지.”
“그, 그러냐?”
내가 힘 빠진 얼굴로 중얼거리자 레이언이 웃으며 내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 쳤다.
“힘 내. 내가 돌아가면 맛난 것 사준다니까.”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던 무사 한 명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 그러고보니 이번에는 대장의 노래를 듣지 못했네? 쿡쿡쿡, 대장의 노래도 아까 해인이
노래 처럼 재미있는데 말야.”
아무래도 그 무사는 전에 레이언과 함께 이 드워프의 마을에 왔던 다른 이들 중 한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무사가 끼어들며 그 말을하자마자 레이언의 얼굴이 다급해지면서 무사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왁, 왁~ 그건 말하지 맛!!”
하지만, 그걸 가만 두고볼 내가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레이언의 손길이 무사에게 닿으려고 하는 걸 차단하면서 무사에게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레이언의 노래라뇨.”
그 무사는 나의 지원에 힘을 입어 슬그머니 레이언의 손길을 피하면서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니, 전에 왔을때는 너 대신 대장이 아까 그 드워프에게 잡혀서 노래의 모델이 되어줘야
했거든. 그 노래도 참 웃겼는데… 내용이 뭐였더라?”
“으악~ 말하지 말라니까!!”
레이언의 말에도 불구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무사의 입에서 그 노래의 내용이 흘러나왔다.
“아, 맞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 반짝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이 정말 은인 줄 알고 멀리에
있던 까마귀가 날아와서 머리카락을 한웅큼 뽑아갔다네~ 음음, 그랬더니 그 소년이 아파서
눈물을 찔끔찔끔~”
그 무사는 이야기 하는 도중 멜로디가 기억 났는지 떠듬거리며 엉성한 노래까지 불러댔다.
“호오, 레이언 노래는 그거였단 말이죠?”
내 노래에 비하여 정말 손색이 없는 노래에 내가 씨익 웃어보이자 레이언이 냉큼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내 노래는 그게 아니라고. 너 말이야 기억 하려면 제대로 기억할 것이지…
내 노래는 가고일이 나타나서 내 머리카락을 잡아채려고 했지만, 그걸 오히려 내가 역습해서
한방에 가고일을 날려버린다는 내용이라고.”
“에이~ 정말?”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레이언을 바라보자 아까 그 무사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내가 부른 노래였는데, 대장이 내가 그렇게 약해 보이냐고 펄쩍 뛰어가지고
다시 가사를 바꾼 게 그 내용이 된 거야.”
“헤에, 그래? 으음, 그럼 아까 나도 펄쩍 한번 뛰어볼 걸 그랬나?”
“넌 뭘 가지고? 그래도 너는 약해서 까마귀에게 머리 뽑히고 우는 건 없었잖냐?”
“쿡쿡쿡, 아 그건 그렇네…”
약간 불만인 듯 투덜대는 레이언의 모습에 주위 사람들이 쿡쿡 거리는 동안 계속 걷고 있던
덕에 우리는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곳은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 부터 이 곳을 방문할 상회 사람들을 위해 맞춰진 거라 다른
드워프의 건물에 비하면 큼직 큼직 했다.
그렇다고 드워프들의 건물이 그에 비해 모두 작다는 게 아니라, 사실 우리가 묶는 건물은
단순한 직사각형 모양의 2층 건물이었다.
단순히 층수만 따지자면 드워프의 건물들 중 낮은 축에 속하지만, 드워프들은 자신들의 작은
키를 고려해서 그런지 문도 낮고, 한 층의 높이도 작고 아담한 사이즈로 만들어졌으니 그것들을
보다가 우리에게 맞는 건물을 보니까 큼직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가 드워프의 식량 창고로 갔다 오는 동안 먼저 이 곳에 왔던 이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이 건물을 지어서 우리에게 주었지만, 그건 임대를 해줬다는 것이 뿐 관리까지
해주는 건 아니었기에 우리가 직접 와서 – 물론 이 곳에 올때만… – 청소 하고 사용하다가
다시 정리해놓고 간다는 거였다.
이 곳을 비워 놓는 동안 가구들 위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 하기 위해 덮어 두었던 하얀 천들이
현관문과 직통해 있는 넓은 거실에 한가득 쌓여 있었다.
가구 대신 먼지를 맞아 준 천들 덕분에 그 거실 또한 먼지 투성이라 사방의 문이란 문은 다
열린 채 먼지들을 없애려고 했지만, 워낙 먼지가 많았기에 별로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한쪽에서는 먼지를 가라앉힌다고 문을 몽땅 열어놨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집안 구석
구석에서 가구 카바를 벗겨 내어 자꾸 가져다 던져 놨으니 먼지를 내보내도 내보내도 소용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이왕 가져대 놓을 것 뒷뜰에다 가져다 놓지, 왜 여기에다 가져다 놓는 거야?”
허공을 꽉 채우는 먼지를 조금이나마 덜 마시기 위하여 입과 코를 막으며 잭슨이 투덜댔지만
모두들 먼지를 피해 다시 밖으로 피하느라 제대로 듣는 사람은 없는 듯 했다.
나 또한 그 안에 먼지가 가득한 것을 보자마자 얼른 해민이를 데리고 뒤로 물러나느라 그가 뭐라
중얼거린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래 저 먼지 속에서 잘도 입을 벌리고 싶나.. 하고 생각하는데 잭슨이 자신의 말에 아무도
동의를 안 해주자 한숨을 내쉬더니 실프들을 불러서 거실에 쌓여 있는 먼지 투성이 천들을
들어서 밖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그래 저 먼지 속에서 잘도 입을 벌리고 싶나.. 하고 생각하는데 잭슨이 자신의 말에 아무도
동의를 안 해주자 한숨을 내쉬더니 실프들을 불러서 거실에 쌓여 있는 먼지 투성이 천들을
들어서 밖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뭐하게?”
어차피 집 안에는 사람들이 청소한답시고 먼지 투성이로 만들고 있었기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잭슨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면서 물었다.
“뭐 하긴. 어차피 며칠 머물다가 돌아갈 때 다시 가구들을 덮을 거 아냐? 그때 이 먼지 투성이를
그대로 덮을 수는 없으니 빨아 둬야지.”
“헤에, 네가 빨려구? 너 빨래도 하냐?”
“너도 혼자 살아봐라. 그럼 원하지 않아도 빨래 뿐만이 아니라 집안 일에 능통해진단다.”
“에? 너 혼자 살아? 뭐, 레이언이나 아니면 크리스와 같이 사는 거 아니야?”
“처음 상회에 들어왔을때에는 몇년 간 같이 살았는데… 다 커서까지 같이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나도 독립해야 겠다 싶어서… 혼자 산지… 한 5년쯤 되었나?”
“그래? 흐음… 혼자 살면 귀찮을 텐데… 집안 일을 너 혼자 다 해야 하잖아?”
내 말에 잭슨이 날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말이지…. 후후후, 사실 청소 같은 건 실프들에게 거의 맡기다 시피 하고
있어. 그래서 물의 정령과도 계약을 맺으려 했는데… 물과 나는 상성이 잘 안 맡는 모양이야.”
“정령들이… 니 쫄따구냐? 그런걸 다 시키게…”
나는 허공에 있는 실프들이 잭슨의 말을 듣고 눈을 부라리는 걸 보고는 심히 동감한다는 시선을
보내주며 투덜 거렸다.
어쩌면, 나는 집안 전체에 마법이 걸려 있어 청소할 필요가 없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 내가 다 청소 해야 하고 빨래 해야 했다면… 아마 잭슨처럼 변하게 되었을지도…
‘하지만… 나는 설겆이는 내가 하는데… 음… 빨래는… 엇….’
그러고보니 집에 있을 때 나는 한번도 내가 빨래를 안 했었다.
‘에구머니나… 그럼 그 동안 벗어놓은 옷들은 누가 빨아놓은 거였지?’
내가 집에 머문지 꽤 되었는데 그 동안 한 옷만 계속 입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돈은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기에 필요할 때마다 계속 쇼핑을 해온 데다가, 친엄마의 옷들도
꽤 많았기에 옷을 매일 매일 갈아 입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매번 옷을 갈아 입을때 나중에 빤다고 생각하고 한쪽 구석에 놓곤 했었는데…
그 다음 나갔아 오며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나중에 보면 다시 옷장으로 들어가 있는 걸 발견하긴 했는데… 지금까지 그걸 이상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헤구미… 나는 도대체 신경이 얼마나 둔한 걸까?’
한국에서 살때도 항상 부모님과 같이 살았으니 세탁 같은 건 다 엄마가 해줘서 그런데 신경을
안 쓰고 살았더니만, 이 곳에 와서도 그 버릇 그대로 살았었나 보다.
‘아니.. 그럼 도대체 누가 빨래를 한 거지? 설마… 아버지가? 에이… 그건 정말 설마다.
아냐,
어쩌면 그럴지도… 자신이 직접 빨래할 필요가 없잖아? 자기 쫄다구를 시키면 되는 거니…
아니, 그렇다면 계속 신경 써줬다는 건데… 정말 그랬나? 아니면… 그냥 한 정령을 불러놓고
다 맡겼나…?’
내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는 뒷뜰에 도착해 있었다.
그 곳에는 앞뜰과 마찬가지로 쭈욱 푸른 잔디가 – 물론 잔디는 아니고 여러 잡초들이 섞여
있었지만, 모두 발목 아래로 낮게 관리가 되어 있었기에 잔디 깔린 것과 비슷했다. – 깔려
있었는데 그 중앙 쪽에는 판판한 돌이 넓게 깔려 있었고, 그 공터 중앙에는 작은 우물이
있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데 우물을 만들어
놓다니 좀 황당하기는 했지만, 뭐 덕분에 아침마다 물 길러 가는 일이 없을테니 편하기는
했다.
그 우물에는 한국에서 옛날에 쓰던 방식으로 두레박을 깊은 우물 안으로 던져 넣어 물을 떠
올리는 것이 아니라 – 작은 우물이라 크게 깊지는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대략 120 ~
150cm
정도? 애 하나가 빠져도 충분히 빠져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보였다. – 우물 한쪽 구석에 어떤 장치가
달려 있었는데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우물 안으로 들어간 관을 통해 물이 빨려 올라 와서 밖으로
뻗어 나온 관으로 물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변형된 펌프로구만…’
잭슨은 그 변형 펌프 앞에다가 천들을 쌓아 두더니 뒷문을 통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커다란 나무 통을 들고 나왔다.
“해인아, 할 일 없으면 나랑 같이 빨래나 하지?”
“그러지 뭐. 어떻게 하면 돼?”
“이렇게 큰 천들은 일일이 손으로 빨기 힘드니까 발로 빨아야 해?”
“발?”
왠지 그렇게 말하니까 이불 빨래가 생각 났다.
내가 아직 한국에 있었을 때, 중학생이 되고 난 뒤에 울 집에 성능 좋은 새 새탁기를 들여놔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 전에는 봄이나 가을쯔음에 엄마랑 같이 이불 빨래를 했었던
것이다.
이불 빨래란 욕조에 물을 받아두고 그 곳에 가루비누를 푼 다음 이불을 넣고 그 위에 올라가서
신나게 밟는 것이다.
이게 그냥 평지를 밟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발 밟는데가 물이 있고 이불이 있어 물컹물컹 하기 때문에 일반 평지를 걷는 것보다 무척
힘든 일이다.
그래서 한 10분 정도만 밟고 나면 온 몸에 기운이 쫘악 빠진다.
혹시나… 그것 처럼 하는 건가 했더니 아니었다.
‘헛헛헛, 사람 예측이 가끔은 틀릴 수도 있지 뭐…’
잭슨이 커다란 나무 통을 들고 나오는데, 그 뒤로 세명의 무사가 끙끙 거리면서 아주 커다란
솥을 들고 나오는 거였다.
갑자기 왠 솥인가 싶어서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 공터에 무사들이 솥을 놓고 가버리자 잭슨은
뜰 구석에서 커다란 돌 세 덩어리를 들고 와 솥 밑에 받치더니만 날 돌아보았다.
“해인아, 이 솥에 물좀 채워주라.”
“그러기야 하겠는데… 이 솥은 뭐냐?”
나는 순순히 운디네를 불러서 간단히 지시를 하며 잭슨을 돌아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뭐긴 뭐야? 빨래를 삶아야지.”
“삶아? 아니 왜?”
왠만한 비누칠로 잘 안 빠지는 때가 끼었거나, 아니면 하얀 면 옷감이 너무 오래 입고 있어서
누렇게 변했을 때 하얗게 되라고, 아니면 소독하기 위해 빨랫감을 비눗물에 넣어 푹푹 삶는다는
건 알고 있다. – 이래뵈도 가사 점수는 좋은 편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이건 밖으로 입고 나다닐 옷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옷도 아니고, 단순한 가구 카바이면서
먼지만 쌓인 것 뿐인데 꼭 삶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냥 비누칠 해서 빨면 되는 거 아닌감?’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 곳에 와서 빨래를 한 번도 안해본 주제에 – 물론 한국에 있을 때도
대부분 엄마가 해주셨지만… –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어 그냥 멍한 채로 그만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이 세계에 비누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급할때면 그냥 정령들에게 부탁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세수 하거나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할때 나는 분명히 비누를 사용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내가 살던 한국보다 문화가 뒷쳐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상당히
발전해 왔기 때문에 비누라고 해서 무궁화표 빨래 비누 같이 생긴 것이 아니라 모양도 예쁘고
향기도 좋았다.
더욱이 샴프나 린스, 혹은 바디 클린저 같은 것이 없는 대신 머리 감을때 쓰는 비누, 목욕 할때
쓰는 비누, 세수 할때 쓰는 비누, 혹은 미용 비누 같은 비누들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들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나 소유할 수 있을 정도로 비쌌지만 어쨌든, 있기는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빨래 할때도 하이 타이 같은 가루 비누는 아니라 하더라도 무궁화표 빨래 비누
같은 비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는 그런 비누가 없었고, – 아예 모든 비누가 없어서 내가 사와야 했다. – 그런 비누를
볼 수 있는, 맥알파인 공작가에 있을때…
‘아, 그때 빨래를 한 적이 있긴 하다. 처음에 해럴드 집사님께 벌 받을 때 많이 하기는
했었는데…
그때는 할 일이 너무 많아 피곤해서 그런 거는 다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물론, 그 뒤에는 하녀들이 내 옷까지 다 빨아줬고 말야.’
이런 내 의문을 알아 챘는지 잭슨이 흐뭇한 표정으로 – 왜 그런 표정을 짓는 지는 모르겠지만… –
입을 열었다.
“훗훗훗, 이게 바로 살림살이 5년차 선배가 충고하는 건데, 빨랫감이 적을 경우에는 일일이
비누칠을 해서 주물럭대는 게 빠르지만, 이렇게 빨랫감이 엄청 많을 때는 한꺼번에 삶았다가
행구는게 더 편해. 언제 이 많은 빨래에 비누칠을 해서 주물럭 거릴래? 그럴려면 반나절이
다 가도 모자를 걸?”
“오, 그런 거야?”
“그렇다니까.”
“그럼 이거 – 엄청난 빨랫감- 솥에 넣기만 하면 돼?”
“잠깐만, 그 전에 이것들을 먼저 넣어야지. 빨랫감을 넣은 뒤 넣으면 완전히 물에 안 풀려서
어떤 빨래는 잘 안 빨린단 말야.”
그러면서 잭슨은 물이 가득 찬 솥에 내 주먹 반의 반 만한 (그러니까 1/4 만한) 하얀 덩어리
세개를 집어 넣었다.
“그건 뭔데? 비누야?”
“비누는 아니고, 빨래 삶을 때 같이 넣는 건데, 이걸 넣으면 때가 완전히 지고 빨래가 하얗게
돼. 자, 그럼 빨래를 집어 넣어.”
잭슨은 나에게 그렇게 지시를 하고 자신은 불의 중급 정령을 불러 내어 솥을 달구기 시작
했다.
빨랫감은 먼지 투성이라 직접 손을 대기 싫었던 나는 정령들을 불러 – 역시 나도 이런 놈이었다.
위에 잭슨을 향해 뭐라 뭐라 했던 건 다 취소 해야지.- 빨랫감을 솥 속에 넣었고, 그 뒤에 잭슨이
솥뚜껑을 닫았다.
잠시 후에 솥뚜껑과 솥 틈 사이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며 열심히 삶아지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자 잭슨은 솥뚜껑을 열고 언제 챙겨 왔는지 길고 커다란 나무 주걱 (처럼 생긴 것) 으로
안에 있던 빨랫감을 휘휘 젓고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그런데, 그 폼이 너무나 익숙해 보여서 나는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야, 되게 익숙한데?”
“당연하지. 매년 봄과 가을에 집안 커텐들이나 시트들을 다 갈아야 하거든. 그러니 많이 해봤지.”
“호오, 그렇구나. 너 장가가면 부인에게 사랑 많이 받겠다.”
내 말에 잭슨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훗훗훗, 당연한 말씀. 나 같은 일등 신랑감이 어디 있겠냐? 거기에 집도 있겠다, 안정적인
수입 있겠다, 얼굴 잘 생겼겠다, 이제 참한 신부감만 구하면 딱이지.”
“헤에, 결혼 할 맘이 있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럼 넌 평생 혼자 살 거야?”
“글쎄… 나는 아직 생각을 안 해봐서…”
“헤에… 그래? 그게 넌 아직 어리다는 거야. 그래도 애인 사귈 생각은 있겠지?”
“음… 그건 그렇지만…”
‘중성인 나는 누굴 사귀어야 하는지… 아니, 둘 다 사귈 수 있을라나? 그래도 여자랑 사귀는 건
좀…’
“후후후, 아직 연애도 안 해봤지?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 생겨봐라. 그럼 결혼 할 생각 들게
될 거다.”
“엥? 뭐야, 그럼 잭슨은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소리야?’
“우헤헤헤~~ 그건 비밀 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헤벌쭉 벌어지는 입을 보니 누군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과연 누구이련지… 나중에 레에언에게 살짝 물어봐야 겠군.’
그러는 동안 이제 충분히 삶아졌다고 생각 되었는지 잭슨은 불의 정령을 돌려보내고 솥뚜껑을
열었다.
척 보기에도 엄청 뜨거워보이는 김을 모락모락 솟아내는 천들이 제법 먼지를 떨어낸 채
동동 떠 있었는데, 잭슨은 그걸 한번 휘휘 저어 뒤집어 보더니 만족 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돌아봤다.
“자, 해인아 저 통 있지? 저기에다 찬 물 좀 채워 줘.”
그러고서 그는 커다란 통에 채 물이 채워지기도 전에 솥에서 빨랫감들을 건져 통에 집어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 채우지는 않고 한 1/3쯤 채우자 빨랫감 옮기는 걸 멈추고는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고 바지도 걷어 올렸다.
“자자, 너도 가만히 있지 말고 이렇게 해. 해민아, 너도 할래? 이거 참 재미 있는 거란다.”
해민이야 신기한지 잽싸게 자신의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잭슨은 듀비도 끼어들게 하고 싶은지 그를 슬그머니 돌아보았지만, 듀비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나는 바람에 차마 말도 꺼내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역시나, 내가 통에 물을 가득 채우자 잭슨은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간단히 자신의 발과 해민이
발을 씻은 다음 그 통에 들어가 철벌철벅 밟아대기 시작했다.
“자자, 뭐해? 빨리 들어와.”
왠지 그 폼을 보니… 한국에서 봤던 티비 프로 ‘그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가 생각났다.
세탁기는 커녕 빨랫 비누도 없었던 시절, 빨래를 빨아야 하는 아낙네들이 냇가 빨래터에서
커다란 솥에 잿물(볏집을 태워서 생긴 재에 물을 부어 만든 물) 을 넣고 빨래를 넣고 삶았다가,
거기서 건진 빨래를 냇물에 넣고 발로 밟아 빨던 모습이 방영된 적이 있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모습이 딱 그 모습이었다.
물론, 티비에서는 냇가였고 여기는 우물 가라는 것이 다르지만…
‘그리고 나는 한국에 있을때 이불 빨래를 해봤기 때문에 이런게 전혀 신기하지도 재밌지도
않단 말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까 도와준다고 했는데 투덜댈 수는 없는 일이라 순순히 신발 벗고
양말 벗고 통 속으로 들어갔다.
찬 물을 집어 넣어다고 해도 빨랫감이 푹푹 삶아져 뜨거웠었기때문에 물은 따뜻했다.
거기에 천은 물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려 밟는 감촉도 기분 좋아서 나는 인상을 풀고 철벅철벅
밟기 시작했다.
해민이는 처음 해보는 발 빨래에 신이 나서 물을 사방으로 튀기면서 밟아대고 있었고,
그 옆에서 잭슨은 잘한다며 해민이를 은근슬쩍 띄워줘, 해민이로 하여금 더욱 더 큰 힘을
내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덕분에 거기 말려들어 그날 빨래를 거의 혼자 하다시피 신나게 밟아대던 해민이는 저녁을
먹기도 전에 꼬꾸라져서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게,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아까 말했다시피 엄청 힘든 작업이었던 것이다.
뭐, 해민이 덕분에 뒷처리만 한 – 그것도 대부분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했다. 역시.. 나도
이런 놈이었던 것이다. – 잭슨과 나는 멀쩡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 많은 빨래를 했다는 이유 만으로 이 곳에 있는 며칠 동안 운 좋게도 설것이 당번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 이 곳에 있는 동안 우리가 밥해먹고 있어야 했기에 식사 당번과 설것이
당번이 필요했던 것이다. –
그래도 그 많은 빨래를 했다는 이유 만으로 이 곳에 있는 며칠 동안 운 좋게도 설것이 당번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 이 곳에 있는 동안 우리가 밥해먹고 있어야 했기에 식사 당번과 설것이
당번이 필요했던 것이다. –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자 나는 그런 당번 뭐하러 정했나 싶었다.
전혀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다.
하긴, 그날 저녁에는 필요가 있었다.
저녁이 되자 집안 곳곳이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고, 식사 당번들은 우리가 가지고 온 식량
말고도 드워프족에서 공급해주는 – 이 곳에 있는 동안 집과 식량은 드워프들이 준다 – 싱싱한
식료품으로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항상 식사를 할 때면 생각했던 김치를 바라는 마음이 쏙 들어갔다.
김치고 뭐고 제대로 된 식사만 있으면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는,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사상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이 산속을 헤매면서 제대로 된 식사 대신 매일 말린 건어물이나 육류를 그냥 먹는
거나 불에 구워 먹거나 해서 때웠으니…
반찬 투정하는 녀석들은 한 이삼일만 이런 생활을 하게 한다면, 반찬 투정은 그 다음 부터 쏙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지붕이 있는 진짜 집에서 식사다운 식사를 하고,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 뒤 폭신 폭신한 침대에 몸을 누이면서 행복함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이런 행복함이 이 곳을 떠나기 전 까지는 계속 되리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다음 날이 되기 전 까지는…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기에 그때까지 정말 달콤한 잠 속에 빠져 있던 나는 다급하게 우리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놀라 잠이 깼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내 품에 꼬옥 안겨 자던 해민이가 깨는 바람에 덩달아 깬 것이지만…
그런데, 더욱 당황스러운 건 우리 방 문을 누가 거칠게 두드려서 그 소리에 놀라 깬 것이 아니라
그 달콤한 시간을 방해 한 우리방의 침략자는 노크도 없이 그대로 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
그래 이 겁 없는 놈이 누구든 가만 두지 않을거라 속으로 이를 빠드득 갈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 보다도 먼저 이 못된 침략자가 성큼 성큼 내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오더니만 거칠게 내 몸을
흔들어 깨우는 거였다.
“이봐, 이봐아~ 얼른 일어란 말야. 어서, 어서…”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지 못한 채 오만상을 쓰며 눈을 뜨고 그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노려보았다.
“우쒸.. 무슨 일이야? 너 별일 아니면 대장이고 뭐고 반은 죽여놓을 줄 알아.”
졸음이 가득 한 목소리로 협박을 해봤자 별로 큰 효과는 없었겠지만, 설사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엇다 하더라도 내 방에 침입한 간 큰 녀석은 그런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한 녀석이었다.
역시나, 그 놈은 이런 내 반응에도 꿈쩍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별일이니까 문제지. 그러니까 빨리 일어나. 급하단 말야!!”
내가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레이언은 내 몸을 흔들어가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의 그러한 모습에 급한 일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몸이 엄청나게 반항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일어나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눈을 비비며 녀석을 바라보자 이런 내 말에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나도 무지 알고 싶은 사항이야.”
“엥?”
의아해 하면서 바라본 그 곳에는 나처럼 졸음에 겨워하는 잭슨이 서 있었다.
“너는 또 여기 왠 일이냐?”
“글쎄, 그건 나도 알고 싶은 사항이라니까? 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깨우더니 이리로 끌고 왔단
말이야.”
그러면서 레이언을 바라보는 잭슨의 눈에는 불만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하지만, 레이언은 이런 우리들의 시선에는 전혀 기죽지 않은 채, 아니 기죽는게 아니라 신경을
쓰지도 않은 채 우리 방 창으로 다가가 밖을 살펴보며 재촉했다.
“지금 그렇게 투덜댈 때가 아니라니까. 빨리 여기서 몸을 피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창문을 열고 몸을 내밀어 좀 더 자세히 밖을 살피는 레이언의 모습에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어리버리 할 뿐이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빚장이라도 쫓아 와?”
“그 보다 더 지독한 작자들이 쫓아오니까 그렇지. 자자, 정신 차렸으면 빨리 나가자.”
그러면서 레이언이 먼저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 내리자 – 내가 머무는 숙손느 2층에 있었지만,
검기까지 다루는 실력자인 레이언에게는 크게 높은 곳이 아니었다. – 우리도 얼떨떨했지만,
어찌 되었는 그의 뒤를 따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듀비 또한 – 레이언과 비해 어떨지 모르겠지만… –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내가 어떻게
해주기 전에 가볍게 창문에서 뛰어 내렸고 잭슨과 나는 각각 실프를 불러내어 편안하게
날아 내려왔다.
해민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뛰어 내릴 수 있었겠지만, 나에게서 떨어지기 싫은지 내
품에 안겨 같이 날아 내려왔다.
그렇게 우리가 땅에 섰을때는 아직 해도 뜨지 않아 주위가 캄캄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맞아. 이렇게 나왔으니 이유라도 좀 알자.”
잭슨과 나의 채근에도 레이언은 사방을 주의깊게 살피면서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큰 소리로 말하지 말란 말야. 자, 빨리 이쪽으로…”
몸을 작게 숙이고 재빠르게 이동하는 그 모습을 보자니 나는 검은 옷만 입었다면 영락없는
도둑일 거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상회 사람들이 머무는 건물 주위에서 벗어나자 곧바로 드워프들의 개성적인 집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집들 만큼이나 개성적인 정원의 그늘에 숨어 자꾸만 자꾸만 이동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렇게 숙소에서 멀어지니 아침을 제 시간에
먹기는 틀린 것 같다는 거였다.
그렇게 우리가 조심스레 움직이는 동안 서서히 시간은 지나 드디어 동이 트고 주위가 밝아져
왔다.
그러자 드워프 족들은 부지런한 사람들인지 여기 저기에 있는 집에서 잠에서 깨어 일어나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너무 늦었어. 최소한 성벽 가까이는 가야 하는데…”
그런 기척을 느낀 레이언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더욱 더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리고, 드디어… 드워프의 마을의 가장 변두리에 위치한 집에 닿았다.
이제 이 집만 지나친다면 레이언이 말하는 – 어딘지는 모를 – 목표에 도착하게 될 듯 했다.
그래도 레이언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조심스레 그 집 뒤쪽으로 해서 슬그머니 돌아갔고,
우리 또한 덩달아 긴장한 채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허어, 일찍 일어났구만? 그래, 아침 산책이라도 가는 건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레이언을 비롯한 우리는 죄 지은 것도 없건만 화들짝 놀라서 몸을 바로
폈다.
그런 우리를 싱글벙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사람.. 아니 드워프는 바로 어제 날 붙잡고서
웃긴 노래를 지은 족장 드워프였다.
이름이… 토드라고 했던가?
레이언은 토드 족장의 모습을 보고 작게 낭패다… 라고 중얼거렸지만, 토드 족장에게 다가갈
때는 그런 기색을 씻은듯이 지웠다.
역시나, 상회를 이끌어가는 대표 다운 표정 관리였다.
“아니, 족장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는 족장님의 집도 아닌데 말이죠.”
그러자 변두리에 있는 독특한 모양의 집 정원에 뒷짐을 진 채로 느긋하게 서 있던 토드 족장이
허허 웃었다.
“허허허… 어제 이 집 주인 녀석이 나를 초청하는 바람에 여기서 묶었다네. 하지만, 우리 집이
아닌지 일찍 잠이 깨어서 아침 산책이나 하러 나왔더니만 이렇게 손님과 만났네 그려…”
하지만 토드 족장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잠시 번뜩이는 것을 보아하니 그가 직접 말한 그런
단순한 이유만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짐작은 레이언의 작은 속삭임으로 인하여 더욱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젠장… 지키고 있었군…”
도대체 우리를 왜 지키고 있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자, 이렇게 만났는데 아침이나 같이 하는게 어떻겠나?”
아주 부드러운 토드 족장의 제안에 레이언의 얼굴이 일순 경직되는 것 같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의 순간이었고 레이언의 표정은 무지 안타까운 것 처럼 일그러졌다.
“아… 정말 고마운 제안이십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저희는 숙소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말도 안 하고 나와서 그대로 아침 먹을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일행이
걱정할 것입니다.”
“허허허, 그런 걱정은 할 것 없네. 내 아이를 시켜 자네들 숙소에 연락을 줄테니 말야. 오랜만에
온 손님과 아침을 먹게 된다면 이 집 주인 녀석도 무지 기뻐할 거야. 그러니 사양 말고 어서,
어서 들어오게나.”
그러면서 토드 족장은 레이언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한 채 레이언의 손을
꼬옥 붙잡고 –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지 다정한 이종족간이라고 생각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쩐지 도망 못 가게 잡는 듯 했다. – 집으로 향했다.
그러니 레이언의 뒤만 졸졸 쫓아온 우리들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집은 드워프의 마을에 있는 아주 개성적인 집들 사이에 그나마 우리가 흔히 보는 집 모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무와 황토로만 지어져 그 집을 본 순간 떠오르는 건 황토 찜질방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황토를 그대로 드러낸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과 황토와 비슷하지만 옅은
색을 가진, 나뭇결을 그대로 드러낸 가구가 배치되어 있어 너무나 아늑하고 황토 특유의 싱그러운
흙냄새와 나무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은은한 멋이 있는 집이었다.
거기다 혹시라도 어두우면 집안 전체가 칙칙하게 보일까봐 햇볕이 들어오는 창문이 집에 비해
꽤 크게 나 있었고, 현관문 바로 들어가면 보이는 거실 한쪽 구석에는 황토를 구워 만든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듯한 벽난로가 보였다.
그 벽난로 위에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베이지색 돌이 얹혀져 있었는데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우아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오오, 어서 오게나. 밖에서 하는 이야기는 잘 들었네. 좀 있다가 손님들을 한번 보러 가려고
했는데 손님쪽에서 먼저 오다니 무척 반갑구만.”
회색 머리를 가진, 그러나 토드 못지 않은 건장한 몸을 자랑하는 드워프가 거실에 있는 밝은
베이지색의 낮지만 커서 날씬한 사람이라면 두 사람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의자를 혼자
남김없이 차지한 채 앉아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일어나며 반겼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로님. 여전히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레이언과는 안면이 있는 드워프였는지 레이언이 그를 보며 인사하자 그 장로라는 드워프가
활짝 웃었다.
“허허허, 자네 또한 여전히 비리비리 하구만. 한대 치면 부러질 것 같으이. 그 동안 많이 먹고
살좀 찌지 그랬나.”
“하하하, 저야 체질이 이런 것이라니까요.”
한국의 여자들이 들으면 엄청 부러워 할 말을 내뱉으며 레이언은 토드 족장에게 이끌려 거실에
있는 큼지막한 소파에 앉았다.
이 곳 대부분의 집들이 보통 사람보다 키가 작은 드워프의 신체에 맞게 건축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낮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살짝 뛰어오르면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의 높이기는 했다.
뭐, 그래도 집안에서 뛰어다니지 않는 이상 움직이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단지, 천장이 우리가 생활하던 집들 보다 너무 낮아서 잘못 움직이면 부딪힐까봐 괜히 걱정이
되기는 했다.
“얘들아, 손님이 오셨단다. 어서 나와서 인사 해야지?”
레이언에게 비리비리하다고 한 그 드워프 장로가 안쪽을 향해 소리치자 곧 이어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안쪽에서 한 드워프가 걸어 나왔다.
그는 우리가 왔다는 것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별로 놀라지 않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 드워프를 바라보고 놀랬다.
그는 바로 우리를 안내해 드워프 마을로 왔던 프레스였던 것이다.
“여, 잘 잤냐? 족장님께 잡히다니 재수 더럽게 없는 녀석들이구나?”
“엥?”
저렇게 말하는 프레스의 태도를 보아하니 그 또한 뭔가를 알고 있는 듯 했지만, 족장과
자신의 아버지 앞이라 그런지 거기까지만 말 하고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그것만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그를 다그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프레스가 나온 쪽이 아닌 그 옆쪽에서 다른 드워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버지? 손님이시라구요? 그럼 식사를 더 준비할까요?”
프레스와 약간 큰 키에 – 그래봤자 도토리 키재기지만.. 어쨌든, 엄밀히 말하면 조금 더 컸다. –
더 듬직한 체구를 가진 그 드워프는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한 손에는 야채를,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식칼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보통 이런 가정집에 들어오면 부엌에서 나오는 쪽은 어머니와 아내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
이 아니었던가?
“자자, 내 아들들을 소개하지. 레이언 자네는 알겠지만, 이번에 새로 오신 손님들은 모르실테니…
저 쪽에 있는 애가 내 큰 아들로 테릭이라고 하네. 진로를 요리쪽으로 선택했지. 그리고,
저쪽은 여러분들을 마중 나갔을테니 이미 안면이 있을테지? 프레스라고 내 둘째 아들이야.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폼을 보아하니 내 뒤를 이을 것 같아.”
‘진로?’
의아했지만 속으로만 그랬을 뿐 겉으로는 티를 안 냈는데, 레이언이 설명해 줬다.
“드워프라고 모든 장인 기술을 다 섭렵할 수는 없으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해서
그쪽 일을 배우는 거야. 그걸 자신의 진로라고 하지. 이건 보통 성년을 전후로 결정하게 돼.”
“헤에…”
역시 드워프와 그 동안 교류를 해온 탓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맞았어. 나는 건축쪽의 길을 걷고 있고, 이 친구는 악기쪽 길을 걷고 있지. 스스로도 자칭
음류 시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말이야.”
레이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테릭과 프레스의 아버지가 덧붙여 설명을 했다.
역시 그 족장 드워프는 툭 하면 노래를 짓는다고 하더니만, 악기쪽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말해봤자, 이번에는 둘 다 대회에 나가지 못하는 떨거지 신세인 걸 뭐. 안 그래
호세?”
족장 드워프는 우리에게 손짓을 하며 자신이 먼저 그 호세라고 불리는 장로 앞으로 가서
털썩 주저 앉았다.
“쳇, 제비를 잘못 뽑은 탓이지 뭐. 아쉽지만 다음 번을 기약하는 수 밖에… 아, 그래 테릭아
이 손님들 식사도 같이 준비하거라.”
“알겠습니다. 재료가 부족하니 조금 더 가지고 와야겠군요. 프레스, 나 좀 도와줘.”
그렇게 테릭이 프레스를 데리고 거실을 나가버리자 우리는 족장 드워프의 손짓에 따라 주춤
거리며 낮지만 무지 넓고 편해보이는 소파에 조심스레 엉덩이를 걸쳤다.
“그런데, 두 분의 부인들께선 어디 가셨습니까? 안 보이시는군요.”
모든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순간적으로 침묵이 깔리면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역시나
이들과 전부터 안면이 있는 레이언이 입을 열었다.
“아아, 그녀들은 이번에 대회를 나갈 수 있게 되어서 말이야. 지금 아이디어를 찾겠다고 서재에
틀어박혀 있어.”
“호오, 그렇습니까? 그 두분은 대회에 나가시는 군요.”
“운이 좋았지. 에잉, 내가 뽑으려던 제비를 그녀가 뽑아가지고서리…”
족장이 투덜거리자 호세 장로가 받아쳤다.
“쯧쯧, 그 이야기를 제비 뽑은 날 부터 하더니만… 아직까지 투덜 거리고 있냐? 몇번만 더
하면 천번이겠다.”
“시끄러워. 그럼 네가 족장 할래?”
“네가 족장 제비를 뽑아서 족장이 된 건데 누굴 탓해?”
“누가 뽑고 싶어서 뽑았냐?”
“네 운이 나빴던 거지. 나도 재수없게 이번 대회 운영임원이 되어잖아? 그러니 투덜거리지좀
마라. 나이가 몇인데…”
“너보다 50살 밖에더 안 먹었다, 꼬맹아.”
“정확하게 말하면 49세야.”
우릴 초대해 놓고는 안중에도 없이 두 사람, 아니 드워프의 언쟁에 본의 아니게 소외된 우리는
그렇다고 이 자리를 피할 수도 없어서 그저 멀거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릴 소외시킨 채 둘이서만 투닥거리던 드워프는 잠시 시간이 지나 멀거니 그들만
바라본 채 앉아 있는 우리를 눈치 채고는 자기네들도 미안한지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허허, 이거 우리가 손님들을 앉혀놓고는 추태를 부렸구만.”
“이게 다 너때문이잖아. 나이도 어린게 어른에게 대들기는…”
하지만, 사과한지 채 일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둘이서만 투닥이기 시작하는 두 드워프였다.
“하여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칭 음류 시인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 만해서야…”
“뭣이라? 내 오늘 손님들도 있어 인심 좀 써서 이번에 새로 지은 노래를 – 그 순간 나는 괜히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 불러주려고 했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네 놈에게는 내 노래를
들려주지 않을 테다!”
“누가 네 엉터리 노래를 듣고 싶다고 했어? 매번 노래 지을때마다 들어달라고 애원애원 하기에
잠시 트롤 괴성을 들어준다 셈 치고 들어줬더니만…”
“뭣이라? 트롤 괴성?”
“사실이지 뭘 그래? 네놈 노래를 듣느니 차라리 탄광 속에 들어가서 곡괭이 소리를 듣던가,
아니면 대장간에 들어가서 망치질 소리를 듣는게 훨 났다.”
“네놈이 내 예술의 세계를 이해 못하다니… 어허… 이런 녀석이 우리 드워프 마을의 장로라는
것이 한탄스럽도다.”
“놀고 있네. 네놈이야 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는 모르는 주제에 예술이랍시고 엉터리 노래를
부르고 다니니 우리 드워프족의 수치야.”
“뭐, 뭣? 이놈이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그러면 누가 무서워 할 줄 알아?”
“그래, 그렇다면 오늘 한번…”
족장 드워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붕붕 휘두르며 선전포고를 하려는 찰나, 형 처럼
앞치마를 두른 프레스가 뛰어나와 소리쳤다.
“식사 준비 다 되었으니 오시래요~!!”
그러자 그 순간 족장 드워프와 호세 장로 사이에 흐르던 험난한 기류가 거짓말처럼 싹 사라지는
거였다.
“호세야, 식사가 다 되었단다.”
“그래, 우리 우선 먹고 놀자. 배고팠다.”
손님이라는 존재 조차도 말릴 수 없었던 투닥거림을 순식간에 해결한 식사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으면서 우리가 멀거니 앉아 있기만 하자 막 발걸음을 옮기던 두 드워프가 의아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뭐 하는 겐가? 식사 안 할 겐가?”
“아니 자네들은 배도 안 고픈가?”
“예? 아, 예.”
그제야 제 정신을 차린 레이언이 얼른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리도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이 집에 있는 식당은 – 다른 곳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니까… – 한국에서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엌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프레스와 그의 형 테릭이 분주하게 넓다란 식탁에다가 여러가지 음식을
옮겨놓고 있었다.
“자자, 어서 들 앉게나. 이래뵈도 내 아들 요리 솜씨는 좋다네. 이제 겨우 50년 차인데 이
정도라니
이쪽 길로 꽤 소질이 있었던 거지.”
‘5, 50년… 그 정도면 능력 없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대단한 요리사가 되어 있겠다.’
나는 속으로 약간 기가막혔지만, 내색은 못하고 그들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좀 황당하게도… 소파는 편히 앉았으니 약간 낮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딱딱한
식탁 의자가 낮으니 이건… 왠지 초등학생 의자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못 앉을 정도로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무릎이 의자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 뜨고
다리를 똑바로 펴지도 못하니 자세가 엉거주춤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우리와는 달리 너무나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은 드워프들은 무지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자, 드시게나. 음식은 제때제때 먹어야지, 식으면 맛이 없다네.”
아까는 애들처럼 티격태격 대면서 싸우더니만, 음식을 앞에 두자 인자한 어른이 되어 우리에게
권하고는 먹기 시작하는 두 드워프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음식을 두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에 우리도 각자 포크와 스픈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이 음식을 만든 테릭은 그래도 50여년동안 요리를 배웠다더니 제법이 아니라 무척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었기에, 나는 먹는 와중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쌓여 있던 레이언을 향한
원망이 스르르 녹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번만은 그냥 봐주겠다는 눈짓을 보내려고 레이언을 슬쩍 쳐다보는데, 왠일인지 레이언
녀석이 음식을 먹는 듯 마는 듯 하며 무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거였다.
물론, 드워프들에게 티를 안내려는 듯 얼굴은 침착해 보였지만, 음식을 집는 폼이나, 자그마한
빵 조각 하나가지고 완전 물이 될 때까지 계속 계속 씹고 있는 모습이 뭔가가 무척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래 왜 저러나… 하고 쳐다보고 있는 그 순간, 갑자기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집안으로
난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어디 있는 거야?”
“야, 빨리 안 나와!!”
“호세!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왔어!! 당장 나오란 말야!”
“토드, 너도 여기 있지?”
무지 화가 난 듯한 급박하고 거친 목소리를 들어보니 갑자기 난입한 인물은 한두명이 아닌 듯
싶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정작 이 집안의 주인이자, 저들이 찾는 주인공인 두 드워프는 태연하게
음식을 마저 먹는데 반해, 아까부터 불안해 하던 레이언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놀라 사레가 들려
켁켁 거리는 거였다.
“어어, 괜찮아요? 자자, 이거…”
옆에 앉아 있던 잭슨이 놀라 물컵을 건넸지만, 레이언은 손을 저어 그걸 거절하면서 가슴을
두들기며 켁켁 댔다.
그러는 동안 집안에 난입한 이들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더니만 기어코 식당을 발견했는지
문을 박차고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여기 있다!!”
“여기 있었구나!!”
그 바람에 레이언이 한층 더 놀랐지만, 정말 우습게도 그 덕분에 목에 걸렸던 음식물이 쑥 내려가
그가 기침을 멈출 수 있게 되었다.
“으힉, 켁… 콜록… 아, 내려갔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보고도 웃지 못하는 것이, 족장 드워프와 호세 장로를 신나게 찾던 드워프들은
정작 자신들이 찾던 이들은 본체 만체하고는 기껏 조용히 식사하고 있는 우리 일행들을 에워싸는
것이었다.
“어어어?”
그 모습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를 에워싼 드워프들 중 한 드워프가 상석에 앉아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식사를 마저 하고 있는 족장 드워프와 호세 장로를 향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냐, 네 놈들은? 이번 대회에 나가지도 않는 주제에 외부 손님들을 차지해?”
그러자 그 드워프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우리를 둘러 싼 드워프들이 일제히 상석의 두 드워프에게
살기 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헌데, 정작 그 많은 드워프들의 살기를 받는 두 드워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대꾸하는게 아닌가?
“무슨 소리야? 우리가 도망가는 녀석들을 잡아서 너희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 줬잖아. 자, 이제
우리 역할은 끝났으니 마음대로 데려가게.”
“헉…”
족장 드워프의 그 말로 인하여 나는 모든 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제 대회를 선포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마 우리를 되게 못살게 굴 거라고 레이언에게 충고를
들었음에도불구하고 우리가 잠자리에 들때까지 프레스와 족장 드워프 외에 다른 드워프들이
콧빼기도 안 보이자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왜 안 보이는지 의심도 안한 채 말이다.
‘크윽… 내가 이렇게 단순했을 줄이야…’
스스로 자책을 하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건너편에 앉은 레이언의
얼굴을 바라보니, 절망스럽게도 그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서려 있었다.
“휴… 결국은 붙잡히고 말았군. 이럴 줄 알았으면 잠이나 푹 자둘 걸.”
그러자 족장 드워프가 껄껄 웃으면서 그의 말을 받는 거였다.
“허허허, 그러지 그랬나? 내 그대들을 신경 써줘서 손님 쟁탈전을 오늘 아침까지 미뤄줬건만…”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내 뒤쪽에서 놀라움에 찬 목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다.
“우와… 이 녀석 머리카락좀 봐. 이런 신비한 색이 있나? 오오… 영감이 떠오를 듯 말듯…
좋았어. 이 녀석은 내가 데려 간다!”
그러면서 그 드워프의 손길이 내 팔에 닿는 순간 듀비와 해민이가 움찔 거렸지만, 그 보다도
먼저 다른 드워프의 손이 그 손길을 쳐냈다.
“무슨 소리야? 이 녀석은 내가 여기 들어오자마자 발견해서 찜해 놓은 거란 말이야. 네 녀석은
다른 걸 찾아 봐.”
“뭣이라? 눈으로 찜해놓으면 다냐? 먼저 잡은 자가 임자 아니냐?”
“웃기지 마. 이건 내가 찜한 거니 내 거야.”
그 순간 다른 드워프는 듀비의 모습을 이제야 알아 차린 듯 감탄사를 중얼 거렸다.
“오옷… 이자는 이 파르스름한 빛이 도는 피부하며 뾰족한 귀로 볼 때 블루 엘프족이구만. 오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야. 거기다 오오오옷, 이 근육좀 봐. 우리 드워프보다는
못해도 저 허약한 엘프보다는 났잖아?”
“이봐, 이 아이는 나에게 양보해. 넌 가구 전문이지만, 난 무기 전문이란 말야. 마침 이번에
특이한걸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이 아이에게 맞추면 되겠군.”
“잠깐만 기다려. 나도 이 애를 모티브로 가구를 만들어보고 싶단 말이야.”
“뭐? 하지만…”
“아아, 이러면 되겠다. 너는 이 애를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할 지 모르지만, 난 스케치만 해 놓으면
되거든. 그러니까 잠깐만 빌려줘. 스케치만 하고 너에게 넘길 테니까.”
“좋아. 그렇게 하지. 그럼 네 작업실에 들렸다가 가자.”
그렇게 합의를 끝낸 두 드워프가 양쪽에서 듀비의 팔을 하나씩 잡고 번쩍 일으키는 거였다.
그래봤자 듀비가 그 둘보다 키가 작았기에 완전히 일어나는데 무리가 있었지만, 그 두 드워프는
그런거에는 상관 안 하고 무작정 그를 끌고 식당을 나서는 거였다.
듀비는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두 드워프의 힘이 워낙 강했던지 여의치 못해 질질
끌려나갔다.
“듀비!!”
그의 그런 모습에 놀란 내가 벌떡 일어서자 그 순간 나 또한 다른 드워프의 손길에 잡혀버렸다.
그리고 내 품에 있던 해민이 또한 다른 드워프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캬옹~ 크르르~~”
아직 말을 못하는 해민이가 한껏 이빨과 손톱을 드러내며 으르렁 거렸지만, 그 드워프는 오히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 지 껄껄 웃는 거였다.
“허허허, 귀엽기도 하지. 암암, 이렇게 성깔 있는 녀석이어야 해. 아… 영감이 떠오르는 듯
하구만.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
“해민아아아~~!!”
평소 해민이가 이빨과 손, 발톱을 빼고 위협을 하면 아무리 쬐끄만 녀석이라도 꽤 위협적으로
보였는데, 그 드워프에게 잡혀 있는 모습을 보자 오히려 안되는 일을 가지고 애쓰는 것 같아
애처러워 보였다.
그런 상태로 멀어지는 해민이를 바라보며 안타까이 부르던 나 역시 다른 드워프의 손에 잡혀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를 도와주는 손길은 아무도 없어서 원망 섞인 시선이나마 보내려고 뒤를 돌아
보았지만, 잭슨과 레이언도 어느새 끌려갔는지 사라져 있었고, 몇몇 드워프들은 여전히 거기서
소리 높여 다투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드워프가 사라진 걸 보니 아마도 그들은 먼저 내 일행을 데리고 – 정확히
말하면 강제로 끌고 간 – 드워프의 뒤를 쫓아간 것 같았다.
그 예로 나를 끌고 가는 드워프가 내가 안 끌려 가려고 버티고 있자 아예 번쩍 들어 어깨에
들쳐메고 그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어가는데 뒤쪽으로 세 명의 드워프들이 게섯거라~!! 를
외치며 열심히 좇아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에휴…”
물론, 목숨이 왔다갔다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라면 쓰기는 탐탁지 않아도 정령들을 불러내서
어떻게든 해결 하겠지만, 어제 레이언이 신신 당부한 말도 있고, 또 나를 데려가서 뭔가
대단한 작품의 모델로 쓰겠다니 은근히 기대도 되어서 이 정도에서 가만히 있는 거였다.
뭐, 한편으로는 어제의 그 우스꽝스러운 노래 같은 작품이 나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들이 이렇게 거의 광적으로 우릴 잡아가는게 대회에 출품할 작품 때문이라니,
그냥 아무렇게나 만드는게 아니라 열과 성을 다해 만들 작품의 모델이 되는거였으니 은근히
기대가 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나를 이렇게 들쳐 메고 열심히 뛰어가던 드워프는 나를 데려가 모델로 삼을 행운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열심히 뛰었건만, 너무나 안타깝게도 뒤에서 쫓아오던 드워프들에게 따라잡힌 게 아니라,
앞에서 다른 드워프 둘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손님을 내놔라!”
“너 같으면 내놓겠냐? 절대 안돼.”
“흥, 그러면 힘으로 해결할 수 밖에!”
“네 놈들이 손님이 뭐가 필요하단 말이야? 그냥 머리 짜내서 할 수도 있잖아!!”
“무슨 소리. 나도 모델은 필요하다고!!”
그렇게 외치며 앞을 가로막은 두 드워프가 달려들자 날 들쳐메고 가던 드워프는 안되겠던지
나를 옆에다 조심스레 내려놓고 앞으로 돌진했다.
“그래, 어디 오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모델 하나 차지하는데 정말 피 터지도록 처절하게 싸우는 그 모습을 보아하니 왠지 한국의
대학 입시 지옥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한국에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하여, 여기서는 멋지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처절하게
애를 쓰는 모습이 왠지 가엽게 느껴졌다.
‘하기야… 괜히 드워프가 존경을 받는 거겠어? 다 저렇게 피나게 노력하니까 위대한 장인이라고
우러름을 받는 거겠지… 어휴, 그래도… 왠지 한국의 고 3 수험생들을 보는 기분이야.’
그러는 동안 뒤에서 쫓아 오던 드워프들이 가까이 당도했고, 그 중 제일 먼저 뛰어온 드워프가
싸움터로 뛰어드는 대신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내 허리를 잽싸게 낚아채고 튀었다.
하지만, 나 보다도 작은 드워프가 내 허리를 낚아챘다고 해서 내가 허공으로 뜬 게 아니라 오히려
발이 땅에 닿아 질질 끌리는 바람에 그 드워프가 달리는데 방해가 되었다.
덕분에 아까는 같이 뛰어오다가 이제는 그 드워프를 쫓던 다른 두 드워프가 금방 따라잡아서
날 낚아채서 튀던 드워프를 덥쳤다.
덕분에 나는 달리던 중 드워프의 손길에서 벗어나 그대로 좀 더 날아가다 땅에 부딪히고도
모자라 몇바퀴나 떼굴떼굴 굴러가야 했다.
그나마 항상 내 곁에 있어주던 상급 정령들이 안 다치게 도와줘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말고도 멍이 들고 긁히는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젠장할, 모델로 세울 거라면 극진히 모셔야 할 것 아니야!!’
그렇게 속으로 투덜대며 몸을 일으키는데 그 순간 또 다른 드워프가 나타나 내 팔을 낚아챘다.
‘으아악~~ 이거 모델 한번 하기도 전에 골병 들겠다아~!!’
그 드워프가 가장 운이 좋았는지 그 드워프는 다른 드워프들의 방해 없이 자신의 작업실에
나를 데리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나를 데리고 골짜기에 나 있는 구멍으로 데려가기에 겁이 덜컥 났는데, 그건
그냥 단순히 음침한 동굴이 아니라 어디론가 이어진 통로였었다.
그 모든 구조가 드워프 위주로 만들어져 천장도 낮고 계단도 낮아서 나는 자꾸 발이 계단에
걸려 넘어지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그 드워프가 나를 잡아줘서 겨우 겨우 나자빠지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이런, 이런… 조심 해야지. 그렇게 안 보이냐?”
“아, 예. 죄송합니다.”
동굴 안이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동굴 안에는 횃불이 일정 간격으로 걸려 있는 게 아니라 중간 중간에 빛을 내는 어떤 보석이
박혀 있어서 내부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보석은 정말 보석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보니 크리스탈에 둘러 쌓인 볼록 거울이었다.
그러니까 어딘가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볼록 거울이 반사해 내면 그 볼록 거울을 감싸는
크리스탈이 프리즘 처럼 빛을 사방으로 퍼트려 복도를 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그 빛이 더 이상 퍼지지 않는 한계선 쯔음에는 그와 비슷한 크리스탈에
감싸인 또 다른 볼록 거울이 달려 있어 그 빛을 받아 다시 반사해 내어 다른 쪽을 퍼트리는
거였다.
‘호오… 역시… 과학적인 원리가 상당히 도입되어 있구나. 빛의 각도와 반사를 알지 못하면 이런
구조는 만들어 낼 수 없었을텐데…’
거기다가 볼록 거울을 감싼 크리스탈은 절묘하게 세공이 되어 있어 빛을 반사하는 것 말고도
크리스탈 자체가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 처럼 보여 마치 진짜 보석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 동굴 안에는 여러가지 갈래 길이 가끔 나왔는데, 갈래길 마다 마치 도로 표지판 같은 안내판이
붙여져 있었는데, 글이 쓰여져 있는게 아니라 마치 무슨 암호 처럼 숫자가 써있거나 기호가
섞여 있어서 무슨 뜻인지는 몰랐다.
그렇게 그 드워프의 뒤를 졸졸 쫓아 드디어 끝에 도착하자 투박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나무문이
나왔고, 그것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서 환한 빛이 드러나 나는 살짝 눈을 찡그려야 해다.
물론, 우리가 통과한 복도가 어두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보다 더 강한 빛이 그곳에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빛에 익숙해진 내가 내부를 둘러보자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아~~”
투박한 문 바로 맞은편에는 거대한 면이 다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창으로 부터 밝은
햇빛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리창 너머로 건너편 골짜기가 보이는 것을 보니 여기는 아마 골짜기 중간쯤인 듯 했다.
이 드워프 마을로 올때 골짜기 여기저기에 뭔가 장치가 보였는데, 그건 단순히 드워프 마을에
햇빛이 닿게 하는 장치 뿐만이 아니라 이런 드워프들의 작업소도 끼어 있었던 모양이다.
유리창으로 가까이 가 살펴보니 골자기에서 약간 돌출되어 있는 면이 사선으로 되어 최대한
햇빛을 많이 받게 하고 있었고, 위로는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러고보니 작업실 안에는 도대체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온통 푸른 하늘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거기에 하얀 뭉게구름까지 그려져 있었다.
그것도 사방 벽과 천장 뿐만이 아니라 바닥까지 그렇게 그려져 있어 마치 내가 하늘에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내가 감탄의 기색으로 사방을 둘러보자 드워프가 무지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훗훗, 어때 멋지지?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광할한 푸른 창공
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이번에 너를 보자마자 딱 내 작품 모델이라는 걸 깨달았지.”
“아하, 제 머리색 때문에요?”
“뭐, 네 신비한 머리색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지만 말야. 이번에는 좀 특이하게
드워프가 아닌 다른 종족을 대상으로 물품을 만들어보고 싶었거든.”
“헤에, 어떤 진로를 걷고 계시는데요?”
“나? 나는 장신구쪽인데, 이번에는 목걸이를 한번 만들어 보려고.”
“그렇군요.”
그러면서 주위를 돌아봤는데, 아까는 이 작업실의 모습에 감탄하느라 미처 깨닫지 못한 건데
이 작업실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보통 작업실에는 일을 하기 위한 도구가 있기 마련 아닌가?
작업대와 의자, 그리고 물품의 재료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 곳에는 아무것도 없이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이 곳이 작업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내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여기… 혹시 작업실이 아닌 거 아냐? 내가 잘못 알았나?’
“저기… 여기가 작업실인가요?”
내가 조심스레 묻자 드워프가 의아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응? 맞아. 여기가 내 작업실이야. 왜?”
“아니, 작업실 치고는 너무 깨끗해서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예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내 말에 드워프가 피식 웃었다.
“아아… 그건 이번에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려고 비워놨어.
뭐, 그래봤자 필요한 도구는 바로 옆 창고에 다 있으니까 의아해 할 필요는 없구.”
그러면서 그가 한쪽 벽으로 다가가서는 중간쯤을 쓰윽 밀었다.
그러자 그 벽이 빙글 돌아가면서 벽 건너편의 또 다른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헤에…”
그 벽에는 티가 잘 안 나도록 회전문이 하나 달려 있었고, 그 너머에 그 드워프가 말한 창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창고에도 작업실보다는 조금 약하지만 창이 있었는지 환했다.
드워프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달리 할 일도 없었던 나는 쫄래쫄래 그 뒤를 따라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는 말 그대로 물건을 놓기 위하여 만든 장소라 작업실처럼 특별하게 공을 들이지 않아
사방이 바위벽이었다.
그나마 잘 다듬어놓아 벽은 매끄러워보였고, 어떤 공사를 했는지 흔히 동굴 속이라면 보이는
작은 물줄기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그러고보니 아까 작업실쪽으로 연결되던 그 계단 동굴도 그런 물줄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기는 약간 습기가 있었는데 이 곳은 습기가 거의 없이 건조했다.
그러니까, 공기중에 물의 정령들이 거의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창고에 습기가 많으면 물건들이 상하기가 쉬울테니 어떤 조치를 취해놓은 모양이다.
그런데 그 곳은 오만가지 잡동사니가 그득 쌓여 있어 함부로 들어가 움직였다가는 그 물품들과
부딪힐 것 같았고, 그랬다간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는 그 물품들이 와르르 무너질 거 같아 나는
몸을 움츠린채 조심조심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나와는 달리 이곳 주인인 그 드워프는 물건과 부딪히던 말던, 그 물건들이 와르르
무너지건 말건 사방을 헤집더니만 잠시 후에 원하는 걸 찾은 모양이었다.
“아, 여기 있었군.”
그래 조심스레 그의 뒤로 가보니 거기엔 이 곳에 처박힌지 좀 오래되었는지 척 보기에도 무지
낡은 나무 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건 예전 보물섬이라는 영화에서 봤던, 밑에는 직사각형 이었고, 뚜껑은 반원 모양인 그런
나무 상자였는데 잠그지는 않았는지 그냥 쉽게 열었는데 안에는 옷이라고 추정되는 천 뭉치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으음… 이거 오랜만에 열어봐서…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디 있더라… 아, 여기
있군.”
그 드워프가 조심스레 옷가지를 헤치다가 드디어 발견한 한 옷을 조심스레 꺼내 들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자, 이것으로 갈아 입거라.”
“에에엑~~?”
그것은 은빛 천으로 하늘하늘하게 만들어진, 한 눈에 척 보기에도 무지 예쁜 여자용 드레스였다.
“이건… 여자 옷이잖아요?”
물론, 나는 내 인생 대부분을 여자로써 살아왔기 때문에 그 드레스를 입는데 아무런 위하감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예쁜 옷을 돈 주고서라도 구입해서 입고 싶어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남들에게 남자로 인식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이런 나에게 여자
드레스를 주면서 입으라고 하다니 순간적으로 거부 반응이 일면서 혹시나… 하는 눈으로 그
드워프를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혹시… 이 드워프 미소년에게 여장을 시키고 즐기는 그런 거시기한 놈 아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드워프는 그런 거시기한 놈이 보통 가지고 있다는 음흉하고 느믈스러운 눈빛이
아니라 단지 영감을 얻어내려는, 좀 광적인 기질이 섞여있었지만, 진지한 눈빛이었다.
“뭐… 남자가 여장한다는게 좀 탐탁치야 않겠지만, 신기한 경험 한번 한다 셈 치고 좀 도와주지
그래? 네가 비록 이번에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에 많이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자 녀석을
세워두고 영감을 얻기는 좀 그렇잖아? 남자용 목걸이도 아니고 말야.”
“아니,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왠지 내키지가 않아 – 여자로 봐주는 거 하고 남자인 줄 알면서 여장시키려고 하는
거하고는 차원이 틀리니까 – 망설이는데 드워프가 그 은빛 드레스를 옆에 조심스레 내려 놓더니
다시 상자 안을 뒤적였다.
“흐음… 하기야 좀 꺼림직한 게 있겠지? 잠시만 기다려 봐. 그것도 여기에 나뒀던… 아 여기
있군.”
그러면서 상자에서 꺼내 들어 나에게 내미는 물건을 본 나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으에에엑~~!! 그게 뭐예요?”
그것은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색을 하고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약간 말랑말랑하게 보이는
인조 가슴이었다.
마치 브레지어처럼 생겼지만, 가슴을 감싸는 부위가 있는 대신 거기에 가슴 모양의 형체가 달려
있다는 게 달랐다.
물론 그게 뭔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지만, 그 드워프는 순진한 건지 내 질문에 곧이 곧대로
대꾸했다.
“뭐긴 뭐야? 가슴이지. 넌 여자가 아니니 가슴이 없잖아. 그러니 드레스를 입더라도 어디
어울리겠어?”
“그… 그, 그러니까.. 아니, 드워프들은 그런 것도 만듭니까?”
왠지 그걸 보니까 정말 변태 소굴에 온 것만 같아 소름이 쫘악 끼쳤다.
여기가 특수 분장실이면 몰라도 말이다.
그러자 그 드워프는 나와 인조 가슴을 번갈아 보더니 머쓱하게 웃었다.
“아… 하기야… 좀 이상하게 보일 테지? 오해는 하지 말라고. 이건 내가 만든게 아니라 내
친구
녀석이 만든 거야. 뭐, 지금은 이 마을에 없는데… 떠나면서 자신이 만든걸 다 나에게 주고
갔거든.”
그 친구 취향 한번 괴상하다고 속으로 부르짓던말던 그 드워프는 아련한 눈빛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그 녀석은 진로가 옷을 만드는 쪽이었는데, 여자 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이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이런 것도 그런 의미에서 만들어진 거야.
뭐, 그러다가 드워프의 체형은 아름다운 옷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부르짖으면서 엘프들의
체형에 심취해 있다가 마을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나가버렸지만…”
예술가들 중에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고 하더니만, 드워프들 중에서도 괴상한 사상을
가진 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냥 여자 체형을 잘 알면 되었지, 자기가 직접 여자 체형이 되어야 한다는 그 사상은
뭐냐?’
속으로 그렇게 꽁알대면서 온 몸에 솟은 닭살을 집어 넣는데 그 드워프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아, 그러고보니 그 친구가 너희 상회에 소속되어 있을걸? 그 반쪽 엘프 녀석이 엘프 체형과
비슷한 인간 체형을 마음껏 보며 연구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꼬여서 데리고 갔거든? 못 봤어?”
있다는 소리도 못들었지만, 그런 드워프라면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못 봤는데요? 저는 이 상회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었거든요.”
“그래?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나중에 그 녀석 만나면 안부나 전해 줘. 아마 거기서 인간들
몸에 맞는 옷을 만들고 있겠지? 흐음… 그런데… 이건 그 녀석 몸에 맞게 만든거라 너에게 너무
클 거 같다.”
여전히 손에 들고 있던 인조 가슴과 날 번갈아 바라보며 눈대중으로 칫수를 재고 있었는지
그 드워프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거였다.
“어쩌지? 다른때 같으면 이쪽 진로 녀석에게 줄여달라고 부탁을 하겠는데… 지금 기간이 기간
인지라… 아무래도 저 애 칫수를 잰답시고 빼앗아 갈 거 같고… 내가 한번 만져볼까나?”
“돼, 됐어요. 그런거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알아서 할테니 그냥 드레스 주세요.”
나는 드워프의 말에 다시 한번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낚아채다 시피 그의 옆에 고이 모셔져 있는 은빛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그래? 뭐, 그럼 네가 알아서 해라. 하지만… 가슴이 없으면 여자 티가 안 날텐데…
우웅…
여자 목걸이의 생명은 여자의 가슴과 얼마나 조화가 되는 것이냐 하는건데.. 괜찮을까…
뭐, 우선 이미지만 잡아보고 정 안되면 내 딸에게 부탁을 좀 해야 겠군.”
그 드워프는 그렇게 혼자 궁시렁 궁시렁 대면서 창고에서 몇몇 물품을 챙겨서 작업실로
나갔다.
“젠장… 내 신세가 왜 이리 되었누…”
창고 문이 닫혔다는 것을 확인 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들고 있던 드레스를 그제야 자세하게
살펴 보았다.
촉감이 마치 실크처럼 부드러웠고 힘 없이 하늘하늘 하는 것이 입었을때 감촉은 좋을 것 같았다.
창고 안이라 거울이 없어 옷매무새를 제대로 잡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쉬운대로 우선 옷 부터
갈아 입었다.
드레스는 소매가 없는 나시티 형태에 가슴이 약간 파여 있었고 그 곳에서부터 마치 파도가 치는
것 처럼 횡으로 부드럽게 주름이 지면서 몸에 살짝 붙는 스타일이었다.
나는 예전에 했던 방식 그대로 마법을 써서 가슴을 만들면서 마음 속 깊이에서 우러 나오는
한숨을 다시금 내쉬었다.
“에휴…”
거울이 없어서 내가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나는 그냥 눈으로 보이는 부분만 대충
정리를 하고는 작업실로 향했다.
“아, 나오는 군. 어때? 그건 내 친구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엘프들 체형에 맞춰 만들어본 몇개
안 되는 드레스였는데… 제법 너에게도 맞는 군.”
그는 나를 훑어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업실 가운데에 나를 세워두고는
자신은 창을 등진 채 의자에 앉았다.
그의 앞에는 이젤과 같게 생긴 받침대가 있었고, 거기에는 종이가 걸려 있었는데, 폼만 보면
그 드워프가 내 초상화를 그리려는 것만 같았다.
“자자, 거기에 서봐. 헤에… 가슴이 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마법을 쓴 거 뿐이예요.”
“그래? 마법사였나? 뭐, 어쨌든 다행이군. 자, 그 머리 묶은 것좀 풀어봐. 흠… 생머리구만.
잠시만 그러고 있어.”
그 드워프의 요구대로 질끈 묶은 머리를 풀어 손으로 쓱쓱 빗어 내리자 머리카락이 내 어깨 너머
등을 간지르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 드워프는 나를 그렇게 세워두고는 한참 동안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종이
위에 뭔가를 슥슥 그리고는 – 글을 썼을지도 모르지만… – 또 한참을 뚫어져라 보다가 그리다가
이제는 내 배경 – 그래봤자 작업실 벽이었지만… – 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또 그리다가 하는
거였다.
그렇게 잘은 모르겠지만 한, 한시간 정도 지나는 것 같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옆으로 좀 돌아봐. 아니, 너무 돌지 말고. 그래… 그 정도로…”
대충 45도 정도 틀어 세우더니 아무 말 없이 나를 봤다가 또 종이에 그렸다가 아무 말 없이
봤다가 종이에 그리는 일이 또 다시 반복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 드워프의 앞에 있던 종이는 하나 둘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처음부터 여러장의 종이를 앞에다 겹쳐놓았던 모양이었다.
어떤 거는 망했는지 커다랗게 엑스 자가 그려지기도 했고, 또 어떤 거는 심히 구겨지기도 했고,
또 어떤 거는 그냥 내버리듯 땅에 떨어지는데 나는 드워프쪽을 보지 못하고 약간 옆을 비껴
봤기 때문에 종이가 떨어진다는 건 알았지만, 거기에 무엇이 그려지거나 쓰여져 있는지는
볼 수가 없었다.
“좋아. 잠시만 고개를 좀 들어 보겠어? 아니, 너무 올리지는 말구. 그렇지. 아, 조금 내려봐.
음음, 좋았어. 그러고 있어봐…”
“고개좀 내려봐. 좋아. 잠시만… 음음, 이번에는 옆으로 돌려봐. 아니, 몸 말고 고개만…”
“뒤로 돌아봐. 옳지. 그러고 있어봐…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좀 돌아봐. 음음…”
“상체만 틀어봐. 조금만 더.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목걸이 하나 디자인 하는데 이런게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의 지시에 따라 자세를 취하면서 계속 서 있자니 어느샌가 다리가 무지 아파왔다.
거기에다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걸 보니 점심 시간도 지난 듯 싶었다.
물론,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창가에서 좀 떨어져 있어 해를 보지 못하니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정오는 지난 것 같았다.
그래 좀 쉬고 할 수 없겠냐고 물어보기 위해 드워프를 바라보았는데, 그는 아까부터 나를
정면으로 보게 한 후 부터는 그 동안 땅에 떨어뜨려 놨던 종이들을 몽땅 가지고 살펴보며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 후에는 나를 바라보는 일도 없어졌기에 나는 모델이 된 후로 한 자세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그러니 온 몸이 더 쑤시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그의 상념을 깬다는 건 정말 미안했지만,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그를 불렀다.
“저기요…”
하지만, 너무 작게 불렀는지 그는 미동도 안 했다.
“저기요오~”
그래 다시 한번 크게 불렀는데 그래도 미동도 안했다.
아니 아예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슬그머니 옆으로 한 발짝 옮겨갔다.
그래도 못 알아차리자 나는 이번에는 두어 발짜국을 옮겨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있어서 못알아차리는 거였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이번에는 일부러 걸음 소리를 내면서 몇발자국을 걸어 보았지만 그래도
못 알아차리자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없어진 걸 알고 그가 화를 낼 지도 모르겠지만.. 차라리 나중에 화를 받더라도 지금은
이 자리를 피해 나가서 밥이나 먹고 쉬는게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창고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 드워프는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는 아예 의자에서 내려와 종이를 바닥에 쫘악 펼쳐놓고 뚤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일까나?
“저기요, 저 이만 가볼께요.”
내가 그렇게 말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드워프는 듣지도 못하는 지 미동도 없었다.
속으로 한숨이 나왔지만 나는 작별 인사까지 했으니 나중에 화를 내면 못 들은 드워프 탓으로
돌려야지… 하는 핑계거리를 생각하며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슬그머니 작업실 문을 열고 나왔다.
“어휴… 만약 다른 드워프들에게 붙들려 모델이 되었어도 이 고생을 했을까나?”
그 생각을 하면 마을로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곳에 있는다고 해서 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랫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튀어야겠어. 다시 이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몬스터랑 싸우는 게 백배 났지.’
올때는 위로 올라왔으니 갈 때는 아래로 내려가면 다 되는 줄 태평하게 생각하고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쭈욱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쯤 걸어가자 나는 문득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그 동안 내가 걸어 내려온 계단은 모두 돌을 반듯하게 잘라서 만들어놓은 거였는데 어느새 그
돌 계단은 사라지고 단순한 흙으로 된 계단이 내 발에 밟히는 거였다.
의아함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달라진 건 그거 뿐만이 아니었다.
복도 중간 중간에 있어던 조명을 담당하는 크리스탈에 둘러쌓인 볼록 거울 장치도 어느새인가
사라져 있었다.
“어? 어라? 내가 잘못 들어왔나? 좀 이상한데?”
아까 그 드워프를 따라 이 곳으로 왔을때 여기가 마치 나무 밑 기둥부터 시작하여 올라갈 수록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지 같은, 올라갈때는 여러 갈래 길이 나오지만 내려올 때는 그 갈래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한 구조 같길래 아무런 망설임이나 생각 없이 그저 한 길만 쭈욱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여기고 혼자 나왔던 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뭔가 잘못된 길을 온 거 같은 생각이 들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다시 되돌아가 그 드워프의 작업실을 찾으면 될 거 같지만, 벌써 몇 개의 갈래길이 합쳐진
길을 왔던 터라 찾아가라고 하면 못 찾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가자니 어딘지도 모르는 엉뚱한 곳을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쉽사리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래도 모험심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냥 혼자 헤매고 다니느니 정령의 도움을 받고자 실프를 불러내려는 그 순간, 나는
다른 곳과 이 곳이 다른 큰 차이점을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곳에는 허공에 동동 떠다니는 정령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아버지에게 듣기로는 이 세상에 정령이 없는 곳은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곳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거였다.
그것을 깨닫자 왠지 나는 너무 불안해져서 어서 빨리 이 곳을 벗어 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정령의 이름을 빠르게 불렀다.
“엘라스트라!”
하지만 평소에는 내가 부르지 않아도 항상 내 옆에 머물면서 여차하면 도와주었던 엘라스트라가
지금은 내가 간절하게 부르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거였다.
그러니까 겁이 덜컥 났다.
내가 그 동안 그를 불러낸 이래 처음으로 내 부름에 나타나지 않는 그를 속으로 원망한 채 나는
침착하자고 되네이며 엘라스트라 다음으로 제일 믿음직한 불의 정령을 불러냈다.
“셀레아나?”
하지만 이번에도 나타나지 않는 거였다.
“시, 실레스틴…”
그 정도가 되자 나는 애써 침착하려고 하는데도 불안이 너무 커져서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나왔다.
하지만, 실레스틴 마저 나타나지 않자 이제는 절망스러워 다리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 앉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저 앉으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애써 떨리는 팔로 벽을 지탱해
간신히 서 있는 채로 나는 마지막으로 나머지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노, 노에아네에엔….”
그러자, 너무나 기쁘게도 내 바로 앞의 계단이 흐물흐물 해지더니 흙기둥이 쑤욱 솟아나며 그가
나타는 거였다.
“흐에엥~!!”
그가 이렇게 듬직하게 보이는지는 정말 처음 알았다.
그의 모습에 나는 순간적인 안도감으로 인하여 눈물이 마구 솟구쳐 오르며 온 몸에 힘이 빠져
스르르 주저 앉았다.
[쯧쯧, 그러길래 처음부터 저를 부르지 그러셨습니까.]이런 내 모습을 본 노에아넨이 노인처럼 혀를 끌끌 차더니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자신의 등을
돌려대는 거였다.
[자, 업히세요.]“우엥~ 고마워. 도대체 다른 녀석들은 왜 안 오는 거야아~!!”
나는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얼른 그의 등에 업혔다.
노에아넨은 너무나 가뿐하게 내 몸을 들쳐 업더니만 앞으로 향했다.
[그거야…]그러면서 내 질문 아닌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놀라서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흐엑? 노에아넨,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뒤로 가야지!”
내가 쭈욱 앞으로만 오다가 이상한 길로 들어섰으니 그 곳에서 빠져 나가려면 당연히 뒤로 가야
했다.
그런데, 이런 걸 노에아네는 몰랐는지 나를 업더니만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놀란 외침에도 불구하고 노에아넨은 여전히 앞쪽으로 걸어가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이 앞쪽에 해인님을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다.]“날 기다린다고? 도대체 누가?”
[그건 가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가보면 알게 되다니… 그럼 여길 계속 가야 한단 말이야? 아니, 잠깐만… 그런데 너는 왜 그
사람 말을 듣는 거야?”
[그것도 가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노에아넨이 내 질문에는 대답도 안 하고 마치 앵무새처럼 가보면 알 거라는 말만 되풀이 하자
나는 아까 완전히 사라졌던 불안감이 다시금 솟구쳤다.
아까는 다른 정령들은 못 와도 노에아넨 한명이라도 오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타난
노에아넨이 내 의사는 싸그리 무시하고 이 앞에서 날 기다리는 누군가의 말만 듣고 움직이는 걸
보니 괜히 불러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혹시.. 노에아넨이 그 사람의 최면에 걸려 내 말을 안 듣고 그 사람 말에만 복종하게 된 건…
헉, 그럼 난 함정에 빠진 걸까? 그런데… 정령도 최면에 걸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정령들을
부르지 말고 그냥 내가 뒤로 빠질 걸… 아무래도 안되겠다. 그냥 여기서 멈추라고 하고 슬쩍
내려서 뒤로 도망갈까? 노에아넨이 쫓아 오면… 으윽… 가만있어봐… 실드의 주문이 어떻게
되었더라?’
나는 여차하면 노에아넨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튈려고 실드 주문까지 막 생각해 놓고 있는데
노에아넨이 걸음을 딱 멈췄다.
그때가 하필이면 막 마나를 끌어 올려 실드를 전개할려는 찰나였기에 나는 노에아넨이 혹시 내가
마나를 끌어 올리는 걸 눈치 채고 막기 위해 멈춘 줄 알고 지레 놀라 얼른 끌어올린 마나를 풀어
버렸다.
“왜, 왜 멈추는 건데?”
[다 왔습니다.]“엥?”
나는 도망갈 생각만 하느라 어느덧 내 주변 공간이 계단만 나 있는 작은 동굴이 아니라 약
10여평의 원룸은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넓은 동굴이 되어 있었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내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노에아넨은 조심스레 나를 땅에 내려 놓아줬다.
드디어 나를 보고싶어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진장 떨리고 누구인가 싶어
호기심도 일었지만, 그래도 여차 하면 튀어야 한다는 생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던 터라 나는
도망갈 통로를 미리 확인해 놓기 위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 정확히 말하면 날 업은 노에아넨이 – 걸어왔을 통로가 있어야
할 곳에는 그냥 흙으로 된 벽만 덩그라니 있는게 아닌가?
“에엑?”
그래 주위를 둘러보니 그 곳은 입구가 전혀 없는, 사방이 다 막힌 완벽한 밀실이었다.
‘이, 이럴수가… 이렇게 해서 어떻게 도망을 가지? 역시… 아까 노에아넨이 이상하단 걸
깨달았을
때 도망가야 했었나?’
망연자실하게 우리를, 아니 정확하게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사방을 바라보며 서 있는데, 어디선가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건네왔다.
“호호호호,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단다.”
“헉!”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라서 그쪽으로 몸을 돌리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느새 나타났는지 한
아름다운 여성이 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여성은 거의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길다란 황갈색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동양인 같은
살구빛 피부에 머리카락과 같은 황갈색 눈동자, 그리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엄청난 미인은 아니지만 꽤나 예쁜 편인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몸 전체에서 우아함과 부드러움이 뿜어져 나와 왠지 우러러 보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땅에 질질 끌릴 정도의 길다란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목까지 감싸는데다가 손등을
거의 덮는 길이의 소매는 무척 긴 것이 무협 영화에서나 봤던 송나라나 명나라의 여성 복장과
비슷해 보였다.
물론,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것이지 옷 가운데 새겨진 황금색 무늬라든지 디자인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러고보니 이 곳에는 정령들도 없고, 불도 없고, 빛이 들어오는 창문도 없어 어두컴컴해야
정상일터인데 이상하게도 밝아 그녀를 보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마치… 우리를 둘러 싼 흙벽 전체가 미약한 빛이라도 발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여기는 어떻게 되먹은 구조인 거야?’
그녀에게서 다시 시선을 돌려 사방을 살펴보며 속으로 다시금 한숨을 내쉬는데 그녀의 우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저런… 너무 서 있으면 다리 아플텐데 앉지 그러니?”
이프리트 못지 않은 부드러움과 따뜻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수긍하기보다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여기에 뭐가 있다고 앉으라는 건지…’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여기 들어와 살펴본 바로는 이곳에는 사방을 막고 있는 흙벽과 내가 딛고
서 있는 흙바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누군지도 모를 그녀에게 직접 대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어 그냥 땅바닥에도 앉아야
할지 고민하면서 그녀를 힐끔 쳐다보는데 놀랍게도 그녀는 벌써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의자에 떡 하니 앉아있는 거였다.
‘에엥? 저 의자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탁자가 하나 나타나 있었고, 돌아보니 내 바로 뒤에도 그녀가 앉은 것과
똑같은 의자가 어느새 생겨 있는 거였다.
‘허어… 이런 걸 가지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하는 거겠지?’
내가 그 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자 그녀가 다시 한번 재촉했다.
“자자, 어서 앉아라. 그래 보여도 무척 편안하단다.”
그래 엉거주춤 엉덩이를 걸쳤더니 의외로 의자는 폭신했다.
물론 솜을 두툼하게 넣은 쿠션처럼 쏙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약간 붉으스름한 이 의자는 그냥
보면 딱딱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단단하면서도 포근한 맛이 느껴져 꽤나 안락했다.
그 기분에 등받이에 등을 편안하게 기대고 싶은 욕구가 생겼지만, 눈 앞에 정체불명의 인물을
두고 태연하게 있을 수는 없어 괜히 등을 곧게 세우고 몸을 긴장 시켰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을 본 그녀가 손 등을 덮는 소매로 살짝 입가를 가리며 호호 웃는 거였다.
“호호호, 저런…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는데…”
그녀의 부드럽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태도를 보아하면 긴장을 풀어도 될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정체를 알기 전에는 방심할 수 없는 거였다.
그래 나는 무례하지 않게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저기… 누구세요?”
“응? 나 말이니?”
‘그럼 여기에 댁 말고 누가 있수? 허걱? 그러고보니 노에아넨은 어디로 간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그러고보니 노에아넨이 내가 가란 말도 안 했는데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으음… 아무래도 이거… 노에아넨을 계속 데리고 있을 수가 없겠는데? 정령계약에 계약 파기
법도 있을라나?’
속으로 이렇게 중얼 거리는데 그녀가 다시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노에아넨은 내가 심부름을 시켰단다. 그렇게 찾지 않아도 곧 있으면 돌아 올 거야.”
내가 두리번 거리는 걸 보고 눈치 챈 모양이었다.
“에? 아, 아뇨… 그냥 갑자기 안 보여서 의아해서 말이죠.”
내가 그의 계약자인데, 나와 계약한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딴 사람에게 듣는다는게 기분이 좀
안 좋았다.
‘도대체 이 아가씨? 아줌마? 어쨌든 이 여자분은 뉘신데 노에아넨에게 심부름을 시킨 거야?
노에아넨이 걸려도 단단히 걸렸나 보네…’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는데 이런 날 빤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어 보였다.
“이런, 이런… 아까 내가 누구냐고 물을때는 알면서도 모른체 하는 건가 했더니만… 정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가 보구나? 아직도 모르겠니?”
솔직히… 나중에 생각하면, 내가 이 당시 침착했더라면 벌써 알아챘을 거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나는 너무 당황스러운 일만 계속 겪었던 터라 침착하게 사고할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었기에 그녀가 그렇게 말해봤자 논리적인 추측을 하기는 커녕 속으로 투덜대기만 했다.
‘처음 보는데 내가 어찌 안단 말이야? 가르쳐 주지도 않았으면서…’
속으로야 그렇게 궁시렁 댔지만, 겉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던 나는 가만히 고개만 저어 보였다.
“아앗, 정말 몰라? 우웅… 처음 보자마자 알아챌 줄 알았는데…”
무지 서운한 듯한 그녀의 표정에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못된 애 처럼 느껴져 미안한 감정이
드는 거였다.
“아, 아니… 그게… 죄, 죄송해요…”
그러면서 속으로 내가 왜 사죄를 해야하는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분위기상 사과를 안 하면
안될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그녀의 모습에 날 어떻게 할 거란 위협은 보이지 않아 차츰
차츰 긴장을 풀자 그제야 이 여인이 나와 아는 사이었던가…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 시작
했다.
하지만, 그러기 시작한 타이밍이 너무 늦어,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눈치 채기 전에 그녀가 먼저
자신의 신분을 밝혀버렸다.
“나는 땅의 정령왕이란다. 노아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
“아… 그러셨군요.”
그녀에게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내 머리의 둔함을 다시한번 통감했다.
‘우에… 아버지가 멍청하다고 한게 사실이었나봐… 노에아넨이 내 말을 안 듣고 움직이는 것만
봐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을텐데…’
물론, 그때는 평소 내 곁에 있어주던 다른 정령들이 갑작스레 모습을 보이지 않아 너무 당황
스럽고 놀라느라 제대로 생각을 못한 탓이기는 하지만…
그런거 보면 나는 은연중에 정령들을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 덕에 노력하지 않고 생긴 능력이라 잘 쓰고 싶지 않네 어쩌네 하면서 말이다.
‘우웅… 내가 이런 인간이었다니…’
그렇게 속으로 내 자신을 한탄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데, 이 분위기에 너무나 안 어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르륵~~
그건 당연히 내 배에서 나는 소리였다.
‘허걱!’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에구, 에구… 이게 도대체 무슨 추태냐…’
어쩌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아침에 일어나서 채 아침 식사를 끝내기도 전에 드워프에게 반 강제로 끌려가 점심도 못 먹구
지금까지 모델을 서주다 겨우 빠져나오는 길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창피한 건 창피한 거였다.
내 귀에도 또렷하게 들리는 그 소리를 노아스도 들었는지 그녀가 호호호 웃었다.
“호호호, 저런… 배가 고팠나 보구나. 식사 하러 가는 걸 내가 붙잡은 거니?”
“아니… 뭐…”
내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여는데 갑자기 혀 끌끌 차는 소리가 들리는 거였다.
“쯧쯧… 에잉, 하여간 내 망신은 네가 다 시키는 구나?”
‘허걱…’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차마 마주 바라보지는 못하고 고개만 살짝 돌려 바라보니 역시나… 거기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아버지가 떡 하니 서 있었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라 이프리트에다가 실피드도 같이 서 있는 거였다.
‘허걱… 저 정령왕들이 왜 여기 다 모인 거래? 에구구… 망신살이 뻗쳐다…’
덕분에 나는 얼굴이 더욱 빨개져서 고개가 더욱 더 아래로 내려갔다.
“배고픈 애를 데려다 놨으니 그렇지. 애가 식사를 한 뒤에 데려 오던가…”
이건 항상 나에게 따뜻한 이프리트의 말.
“호오, 배가 고프다? 정말 생물이잖아?”
이건 실피드의 말.
‘내가 무슨 동물원 원숭이냐?’
그 와중에도 나는 무지 신기하다는 실피드의 말에 속으로 투덜투덜 거리는데 아버지가 실피드를
향해 쏘아붙이는 말이 들려왔다.
“아니, 네 놈은 왜 따라 온 거냐?”
“왜? 나는 따라오면 안돼?”
“내 아들 만나러 오는데 네가 왜 끼어드는 거야?”
“뭐 어때서 그래? 안면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너도 지금 내 아들을….”
아버지와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다시 투닥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굳 타이밍이라고 해야 할지 그 둘의 싸움을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가게 하는 소리가
났다.
꾸르르륵~~
“푸, 푸하하하~~!”
그렇지 않아도 창피해서 얼굴을 푹 숙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한번 더 배가 요동을치자 나는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내 심정을 배려하지도 않은 채 실피드가 마구 웃어 제끼는 거였다.
“으하하하~~ 그거 참 신기하네. 야, 야 한번 더 해봐라. 자꾸 들으니까 재밌다.”
“뭐냐, 네놈. 내 아들이 장난감이라도 되는 줄 알아?”
“뭐 어때? 신기하니까 그러는 거지. 한번 더 해준다고 해서 크게 손해날 것도 없잖아.”
“그렇게 신기하면 네놈이나 햇!”
“아따, 되게 치사하게 나온다. 좀생이처럼…”
“뭐, 뭣?”
“둘다 시끄러워. 그렇게 싸우려면 나가서 싸우던가. 애가 배고프다는데 그게 그렇게 재밌냐?”
항상 내 편인 이프리트가 두 정령왕에게 핀잔을 주면서 나에게 다가와 노아스에게 물었다.
“너도 그래. 배고픈 애를 왜 불러들인 거야? 좀 먹을 만한 것 없을까?”
“호호호, 미안해라… 그런건 미처 생각을 못했네. 으음… 기다려봐. 내가 애들을 시켜서 좀
가져오게 할테니.”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 바로 옆 흙바닥이 볼록 솟아 오르더니 왠
드워프보다 조금 더 키가 작고 허연 수염이 난 통통한 할아버지로 변하는 거였다.
햇볕에 그을린 짙은 피부색에 뺨은 발그레 한게 어찌보면 귀엽게 보이기까지 했다.
노아스가 그 땅딸막한 할아버지에게 가볍게 손짓을 하자 그걸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그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다시 땅으로 사라지는 거였다.
“헤에… 저 할아버지도 땅의 정령인가요?”
“응? 어머, 처음 보니? 땅의 하급 정령인 놈이란다.”
“오오… 사실 땅의 정령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요.. 헤에, 처음 봤어요.”
“하기야… 이 세계에 있는 대부분의 땅의 정령들은 땅 속에 있을 뿐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이해 한다는 듯이 노아스가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아까 이프리트의 핀잔에 투닥거림을 멈췄는지
두 정령왕이 다가왔다.
“그런데 너도 참 웃긴 녀석이다. 내 아들을 한번 만나보려는데 여기에 네 공간을 만들건 또 뭐냐?
여기가 네 담당 구역이기는 하지만 정령계가 아닌 이상 꽤 힘겨운 일일텐데…”
아버지가 노아스가 막 만들어주는 – 그러니까 엘라임이 서 있던 자리 바로 뒤에 땅에서 솟아
오른 – 의자에 앉으면서 핀잔 섞인 말을 건네자 노아스가 호호 웃으면서 부드럽게 받아 넘겼다.
“호호호, 뭐 지금은 크게 힘 쓸 일도 없으니 상관 없잖아. 게다가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를
처음 만나는 건데 평범하게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고.”
“엉뚱하기는…”
아버지는 그렇게 툴툴 댔지만 괜히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는 걸 보니 그녀의 말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는, 아버지의 영원한 앙숙인 실피드가 갑자기 뜬금 없는 말을 꺼냈다.
“노아스 이런 말 들어봤어?”
“무슨 말?”
갑작스런 그의 말에 노아스가 의아하게 대답했지만, 의아했던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기에
다른 정령왕들과 나 까지도 그를 주목했다.
실피드는 우리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쓰윽 돌아보며 씨익 웃더니 말했다.
“인간 세상에서는 자기 자식에게 폭 빠져가지고 자식 말이라면 간이라도 빼어 주는 부모보고
이렇게 말한다더구만.”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 실피드가 아버지를 바라보며 기분 나쁘게 씨익 웃어보이며 말을 마저
이었다.
“팔.불.출 이라고…”
왠지 ‘팔불출’이라는 단어에 악센트가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이련가?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었다.
그 즉시 탁자를 손으로 강하게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실피드를 노려봤다.
“누가 팔불출 이라는 거야?”
하지만, 실피드는 이런 걸 예상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으로, 아니 거기에다가 기분 나쁜 미소까지
곁들이며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니, 왜 흥분하고 그러실까? 나는 그냥 그런 말이 있다고 한 것 뿐인데? 흐음… 괜히 찔리는
면이 있나보지?”
“뭣이라?”
아버지가 더더욱 화가 나서 눈을 치켜뜨는데 노아스가 끼어들어 아버지 편을 들어줬다.
“어머, 팔불출이 어때서 그래? 너는 그렇게 예뻐할 자식도 없잖아. 괜히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그녀의 갑작스런 말에 실피드는 앗뜨거라 하는 표정으로 얼른 부인 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나는 단지 재미있어서 그랬을 뿐이라고. 우리 정령들에게 자식이라니, 그런게
가당키나 해?”
그러자 생글 생글 웃으며 실피드를 바라봤던 노아스가 시무룩 해지며 대꾸했다.
“맞아… 우리는 자녀를 볼 수 없어. 그래서 난 엘라임이 부러워.”
그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막 입이 벌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있던 아버지를 바라봤다.
“엘라임, 그래서 말인데… 저 애 내 아들로 주면 안될까? 넌 성격이 더러워서 제대로 돌보지도
않을 거 아냐? 내가 무척 예뻐해줄게.”
“뭣이라? 운디네가 물 속에서 익사하는 소리 하고 있네. 내 아들을 누구에게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