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29)
제 22화 그랜드마 지부에서 (3)
한동안 아까의 식사 거리를 다시금 꺼내 확인해보고는 지쳐서 그 옆의 맨 땅에 드러누운 세명을 바라본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슈리엘을 돌려 보냈다.
어차피 저들의 상태를 보아하니 더 이상 이동하기는 힘들었고, 날도 캄캄해져 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게 좋을 듯 싶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슈리엘이 급하게 내려선 곳은 주위에 인가가 보이지 않는 대신 작은 숲이 보이는 어느 대로변이었다.
라센국은 상업이 발달한 나라라서 그런지 주위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 같은 것이 없는데도 길은 잘 닦여 있었다.
국가에서 일부러 길을 낸 것인지, 아니면 많은 이들이 자주 오고간 덕에 생기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슈리엘의 보호를 받으며 허공을 날아갈 때에는 몰랐지만, 막상 땅에 내려서자 깊은 가을의 차가운 밤 공기에 피부에 소름이 오싹 돋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팔을 한번 쓰다듬고는 얼른 길과 조금 떨어진 곳의 공터에다 카사를 불러놓고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세 명을 질질 끌어다가 그 주위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더 친절을 베풀어 각자의 짐에서 침낭을 꺼낸 뒤 그들을 데굴 굴려 침낭 위에 올려 놓았다.
덕분에 그들 옷이 흙투성이에 마른 잎들이 묻었지만 그런거 까지 일일이 신경 써줄 기분이 아니었던 터라 싸악 무시해 버렸다.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세명이 널부러진 덕에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찬 공기와 찬 땅에서 해방시켜준 후 나는 다시금 아까 그들이 만들어놓은 흔적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약간 멀찍이 떨어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단검으로 땅을 파 생긴 흙들을 그 흔적들 위에다 뿌렸다.
미관상 보기도 안 좋고, 혹시 밤 바람에 날려 우리가 노숙하는 곳 까지 냄새가 풍길수도 있어서 조취한 거였다.
물론, 땅이 정령에게 부탁하면 훨씬 간단한 일이었지만, 내 깨끗한 양심상 차마 이런 일을 부탁할 수가 없어서 내가 직접 했다.
그러고 난 뒤에야 나는 일행과 카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와 앉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실프를 불러내어 찬 물을 부탁한 뒤 내 얼굴과 손을 씻은 뒤 수건에 물을 적셔서 세명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제야 그들은 정신이 난 듯 눈을 뜨고 날 바라보았다.
“어이구, 이제 정신이 드냐? 물 좀 줄까? 아, 시원한 우유가 있는데 그걸로 주리?”
드뎌 대충 할 일을 끝내고 출출하다 싶어 음식 꾸러미를 뒤적일 생각이었다.
내 말에 잭슨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근야… 물이나 좀…”
“그래, 그래.”
세 명에게 돌아가면서 물을 먹이고 나니 그제야 살았다는 표정들이었다.
“샌드위치 좀 먹을래?”
물론 나는 그들이 거절할 줄 알고 예의상 물어본 말이었다.
지금도 계속 속이 울렁거려 우유도 못 마시는데 샌드위치를 어떻게 먹겠는가?
아무리 그게 엄청 맛있는 거라고 해도 말이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세명이 고개를 흔들자 나는 사악하게 씨익 웃으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냠냠 먹어줬다.
세명의 부러움과 원망이 가득 담긴 눈길을 당당하게 받아 내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출발한 첫 날이 지나갔고, 다음날이 되자 겨우 속이 가라앉은 그들은 간단하게 빵을 물에 적셔서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같이 베이컨을 비롯한 여러 야채와 과일까지 들어간 샌드위치를 할당 받았지만, 감히 먹을 엄두를 못 내 손도 못 대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지만, 기실 나는 그들이 비행 멀미를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었기에 멀미에 좋은 약 같은 건 챙겨오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들 또한 자신들이 비행 멀미를 할 줄은 생각 못했으리라.
특히나 잭슨은 더더욱…
그는 자신이 멀미를 한다는 것에 너무나 황당해 했다.
나 보다 오랜 시간 동안 상회에서 일해온 그는 이 시대의 운송 시설이란 시설은 다 겪어본 터였다.
배, 마차를 비롯하여 단거리지만 정령타고 하늘을 날아보기 까지한 그였다.
그래 아주 자신있게 나섰는데 이렇게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릴 줄이야…
“괜찮겠어?”
그나마 어제 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약간 창백한 그들을 불러보며 묻자 그들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괜찮아. 설마 죽기야 하겠어?”
“곧 익숙해질 겁니다.”
“키잉~!!”
“그래, 정말 그러길 바래. 에휴, 그래도 금방은 익숙해지지 않을테니 제일 먼저 나오는 좀 큰 도시에 들러서 멀미약을 마련할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아.”
그렇게 해서 다시 출발한 나는 금방 또 속이 울렁거려 얼굴빛이 노래진 이들을 보고다시금 한 숨을 내쉬고는 제일 먼저 보이는 제법 큰 도시에 내려서 멀미약을 구해야했다.
그래, 거기서 잠시 쉬며 멀미약을 복용하고, 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속이 안 좋아 못 먹는 맛있는 샌드위치를 얼마 안 있으면 상한다는 이유 하에 다 빼앗아 먹은 뒤 우리는 또 다시 출발했다.
다행이 멀미약이 효과가 있는지 그 뒤로는 처음처럼 구토 증세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비행하고 나면 왠지 힘을 쓴 나 보다도 더 녹초가 되어 흐물거리는 그들이었다.
원래는 내가 지치면 그 뒤를 이어 잭슨이 우리를 데리고 이동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보다도 더 지쳐 나가떨어지는 그를 보고 차마 나와 체인지를 하자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배에도 금방 익숙해졌으니 비행에도 금방 익숙해질 것이라 여기고 멀미약만 먹인 채 계속 속행을 했지만, 3일이 지나도 여전히 내가 힘들어서 땅으로 내려오면 나보다도 더 흐느적 대는 그들이었다.
그러니까 나만 억울했다.
그들을 데리고 이동하는 것도 순전히 나 혼자인데다가 내가 힘들어서 내려서면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보였던 그 많은 마을들은 다 어디가고 허허 벌판만 펼쳐져 있는 거였다.
그러니 노숙하면서 필수인 불침번을 세워야 하는데, 나 보다도 더욱 더 흐느적 거리는 그들에게 차마 불침번을 서라고 할 수가 없는 거였다.
평소 내 힘이 팔팔하다면 정령들을 불러내서 부탁이라도 하겠지만, 내가 정령술을 쓰다가 지친 거라 정령에게 불침번을 부탁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 천상 나는 지친 상태에서 감기는 눈과 필사적으로 싸우며 그들 중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기운을 회복하여 일어나줄 때 까지 버티는 수 밖에 없었다.
크으~ 이 얼마나 힘든 상황인가?
하기야 어디 불침번 뿐인가?
식사 준비도 다 내가 해야 했고, 심지어는 지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에게 물을 먹여주는 등의 뒤치닥거리도 다 내 몫이었다.
그러니, 이건 동료들이 아니라 짐덩어리들이었다.
그래, 사흘째 되는 날 밤 나는 도저히 이대로 가다간 내가 견디지 못할 거 같아 대책을 강구했다.
“이봐들, 나좀 봐봐.”
생각 같아서는 똑바로 앉아서 경청할 준비를 하라고 하고 싶지만, 아예 땅과 착 들러붙다시피 누워있는 이들에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 말에 눈이나마 나에게 향한 채 내 말을 들으려고 하는 그들의 모습에 만족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있지, 이대로 가다간 내가 지쳐서 쓰러질 거 같아.”
내 말에 그들은 그 동안 나에게 되게 미안했는지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너희를 원망… 안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어쩔 수 없어서 그런거니까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내가 너무 힘드니까 우리 방법을 달리하자.”
그러자 의아한 눈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는 세 짐덩어리들…
“있지, 내가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너희들이 날아가는데 익숙하지 못해서 힘들어하는데 굳이 너희들이 다 깨어날때 까지 기다렸다가 날아갈 필요는 없는 거 같아. 그러니 차라리 너희들이 잘때 이동하는게 어떨까? 그러면 내가 지칠 때쯔음에는너희들이 좀 어질어질 하더라도 최소한 피곤하지는 않을 거 아냐? 슈리엘의 등 위는편안할테니… 그러니까 내일 부터는 너희들을 재워서 데리고 가려는데, 어때?”
나는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내어 생각했건만 이런 내 말에 한 하프 엘프와 블루 엘프, 그리고 어린 수인족은 시큰둥한 표정이다.
“그게… 그렇게 효과가 좋을까?”
회의어린 잭슨의 말에 듀비는 동감한다는 눈빛이었지만, 내 의견을 정면으로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던지 아무 말도 없었다.
뭐, 해민이는 아무 생각 없이 다시 침낭에다 얼굴을 파묻었지만…
그런 세 명의 반응에 나는 이마에 힘줄이 뾰록 하고 솟는 것이 느껴졌다.
“우쒸, 뭐야? 하여간, 내 맘대로 할 거야. 너희들은 결정권이 없어. 불만 있으면 혼자 알아서 오든지 말든지… 흥, 내일부터는 너희들을 재워서 데리고 갈 거다, 알간?”
세 명을 째려보며, 특히나 잭슨을 위주로 째려보며 말하자 그가 뭐라 하겠는가?
“그래,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그래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테니…”
“좋을대로 하십시오.”
“키잉~”
엎드려 절받는 거란, 이런 기분일까나?
나는 세 녀석이 매우 매우 괴씸해서 내일 부터는 그들이 아무리 힘겨워해도 손수 물을 먹여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들이 알아서 먹건 말건 내비둬야지. 흥…’
하여간, 나도 꽤나 쪼잔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들 셋은 내 제안에 시큰둥 했지만, 그들에게는 놀랍게도 내 제안은 확실한 효과가있었다.
내가 제안을 한 그 다음 날 자고 일어나보니 다른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약간 기운을 회복하여 안색이 안 좋은채였지만, 그래도 멀쩡하게 일어나 있었다.
거기에다 마지막 불침번이었던 듯한 잭슨은 아침식사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 동안 나 혼자만 하게 했던 것이 꽤나 미안했었나보다.
물론, 내 아침 식사는 푸짐했지만, 나머지 세 명은 아직 속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상태 였기에, 게다가 오늘도 그들을 괴롭게 하는 이동이 시작되기 때문에 스프가 아침 식사의 전부 였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노숙한 자리를 정리하고 나자 나는 어제 이야기한 대로 그들을 잠재웠다.
‘슬립’ 마법은 1클래스의 마법이라 3클래스 유저인 나에게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르르 잠에 빠진 그들을 내가 불러낸 슈리엘이 따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알아서 등에 태우고 내가 올라타기를 기다렸다가 하늘로 날아 올랐다.
슈리엘의 등에 올라타고 날아가는 일을 어려워하는 그 세 명을 잠재우자 나는 모든 면에서 편하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른때 같으면 그들이 혹시 속이 안 좋아 땅으로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전전 긍긍하며 그들의 안색을 살피느라 긴장하고 있는데다가, 식사 때마다 땅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휴식 시간을 주면서 식사도 먹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푹 잠들어 있으니 나는 느긋하게 주위를 감상하며 비행을 즐길 수 있었고, 잠들어 있는 그들을 깨울 필요 없이 배고프면 슈리엘 위에서 마치 간식을 먹듯 챙겨온 음식들을 우물거릴 수 있었다.
‘히야~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렇게 편안한 상태에서 비행을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욱 더 빠르게 날아간데다가더 오랜 시간동안 비행 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지쳐서 땅으로 내려간 시각은 한밤중이었다.
사실 조금 더 갈 수도 있었는데, 하루 종일 슈리엘 위에서 잠들어 있던 그들이 깨어날 기미를 보였기에 아래로 내려간 거였다.
그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아침에 출발할 때 나는 그들이 오래오래 푸욱~ 자라고 마법을 사용할 때 마나를 쬐게 좀 과하게 넣었었다.
그랬더니 평소대로 마법을 걸었더라면 늦어도 점심때쯤이면 깨어났어야 할 그들이 저녁이 다 되도록 안 깨어나는 거였다.
그래서 쬐께 걱정을 했지만, 심장도 제대로 뛰는 데다가 숨도 규칙적으로 쉬기에 그냥 가만 냅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랬던 것이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고 느껴졌다.
‘훗… 마법도 강하게 걸기를 참 잘했던 거 같아.’
그리하여 그들이 잠에서 깨어날 기미를 보이자마자 잽싸게 아래로 내려간 나는 노숙할 자리를 찾고 모닥불을 피워 그들이 완전히 깨어났을 무렵에는 노숙 준비를 다 갖추고 태연하게 모닥불 가에 앉아 베이컨을 굽고 있을 수 있었다.
“우웅… 엇, 어떻게 된 거야?”
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어두운 밤 하늘과 자신의 주위에서 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발견한 잭슨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몸을 일으켰다.
“하, 이제야 일어나냐? 아무리 내가 마법을 걸어 재웠다지만, 정말 오래도 잔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놨으면서, 나는 뻔뻔스럽게 잭슨을 향해 한심하다는 어조로 핀잔했다.
그러자 우리의 순진한 미스터 잭슨께서 정말 자신이 잠들었다가 늦게 일어난 줄 알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는 거였다.
“아… 이런… 정말 미안해. 내가 그 동안 좀 피곤했었나봐…”
그의 어쩔 줄 몰라하는 태도에 나는 비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얼른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에게 웃는 모습을 보이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아주 착한 척,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응? 어어… 그러고보니 훨씬 괜찮아진 거 같은데?”
“그래? 그거 참 다행이네. 그럼 식사는 할 수 있어?”
“그, 글쎄… 그래도 지금 상황이라면 빵은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헤에… 정말?”
생각지도 않은 잭슨의 말에 난 좀 놀랐다.
그가 괜찮다고 하기는 했어도 나에게 미안해서 예의상 하는 말인 줄 알았던 것이다.
“으응… 아무래도 우리를 자면서 데리고 간다는 네 제안이 유효 해나봐.”
“그러게…”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듀비와 해민이도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다른때 같으면 멀미하느라 지쳐서 나에게 와서 안기기는 커녕 누워서 비실비실 거리느라 바빴을텐데 오늘은 비틀 거려도 나에게 다가와 폭 안기는 거였다.
“헤에… 너도 오늘은 좀 괜찮은가 보다. 듀비도 그래요?”
해민이의 금빛 곱슬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듀비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너무 오랫동안 자서 머리가 좀 어지럽긴 합니다만, 그 외에는 다른때 보다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잤다는 말에 가슴이 뜨끔 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웃었다.
“잘 됐네요. 그럼 오랜만에 스프가 아닌 빵으로 식사를 할 수 있겠군요?”
그들은 그날 늦은 저녁이었지만, 뭔가를 씹어 먹을 수 있다는 것에 – 그것이 비록 빵일 뿐이라 그렇게 씹는 맛을 즐길 수는 없었더라도 – 무척 만족해하며 저녁 식사를 했다.
그렇게 기분 좋아하는 얼굴들로 보아 내일은 정상적으로 식사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저녁을 끝내고 나의 도움을 얻어 간단하게 씻은뒤에 그들은 불침번을 자청했고, 거부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너무 자서 도통 잠이 안 올 것 처럼 말똥말똥해 하는 세명을 나두고 내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다른때 같으면 해민이가 같이 들어와 자려고 했겠지만, 지금 그는 전혀 졸립지가 않고 오히려 그 동안 너무 움직이지 않아 좀이 쑤셨는지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해민아, 너무 멀리가지 마라~”
나는 그에게 한마디 주의를 준 후 하품을 하며 눈을 감았다.
내일도 그들을 잠재운 뒤 날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흔드는 느낌에 나는 부시시 정신을 차렸다.
“해인아, 일어나봐.”
어깨가 흔들리는 바람에 잠시 떨어졌던 잠이 끈질기게 다시 붙으려는 걸 애써 떨겨 놓으며 눈을 뜨는데 아직 채 밝아지지 않아 어두컴컴한 새벽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우웅… 뭐야.. 아침도 아니잖아?”
다시 침낭에 몸을 파묻으며 눈을 감으려는데 또 다시 어깨가 흔들렸다.
“일어나보라니까.”
“왜에? 불침번 서라고?”
그에 졸리움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투덜대며 일어나보니 어느새 보닥불은 꺼져 있는것도 모자라 흙으로 덮여 있었고, 다른 이들의 짐이 깔끔하게 챙겨져 있는 거였다.
“어라? 뭐 하는 거야, 이 새벽에?”
“출발하려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나를 깨우기 위해 내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잭슨이 일어서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뭐?”
남은 아직 잠이 덜깨서 비몽사몽이건만, 이런 상태의 나보고 또 힘을 쓰라는 건가 싶어서 그를 째려보자 잭슨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내 의문을 해소시켜 줬다.
“내 몸 상태가 좋아진거 같아서. 그 동안 너 혼자 이동하느라 잠시 잊었겠지만, 원래는 네가 힘들때 내가 대신 일행을 이동시키기로 했었다고. 그 의무를 지금 이행하려고.”
그렇다고 잘 자는 사람을 이 꼭두 새벽에 깨워야 했을까?
나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투덜댔다.
“그런건 아침에 해도 되잖아? 왜 꼭 꼭두새벽에 해야 하는데?”
내가 다시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갈 기색을 보이자 잭슨이 날 잡아 일으켰다.
“아니, 그 동안 속이 안 좋아서 스프만 먹었더니만 영양이 모자라는 거 같아서. 오랜만에 우리 아침에 맛있는 것 좀 먹자고. 지금 이동하면 아침에는 어떤 마을에든 도착할 거 같으니까. 내가 이동시키는 동안 너는 자면 되잖아. 너도 갓 짠 우유에 따뜻한 스프, 갓 구운 빵을 아침으로 먹고 싶지 않아?”
내가 먹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는 잭슨이 유혹했다.
“쳇…”
역시나 그걸 차마 뿌리치지 못한 나는 침낭에서 빠져 나와 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벌써 준비를 다 끝마치고 있었기에 내가 내 짐을 챙기자마자 잭슨이 실프들을 불렀다.
“그럼 출발할까나?”
높은 상공에서 날아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잭슨은 실프들에게 낮은 비행을 부탁했다.
너무 이른 새벽이라 근처에 마을이 있더라도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이는 아마 없을 터였다.
실프들이 내 몸을 부드럽게 떠받들어주며 날아가자 차갑게 느껴지는 새벽 공기가 내몸을 스쳐 지나갔다.
“에구… 추워.”
하지만, 그 차가운 공기 조차 다시 들러붙는 잠에게는 이기지 못하여 나는 곧 해민이를 품에 안고 듀비의 어깨에 기대어 다시금 잠에 들고 말았다.
그러다 다시 잠에서 깨어나을때에는 우리는 제법 큰 어떤 성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이른 시각은 아니었던지 성문이 활짝 열려 있어 우리는 그 곳 성문을 지키는 경비대에게 상회 소속 패를 보여준뒤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 안에는 이제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고, 우리는 좀 돌아 다니다가 제법 크고 깨끗한 여관으로 들어가 잭슨이 말한 대로 맛있는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그 뒤로 우리의 이동 속도는 정말 빨라졌다.
내가 수면 마법으로 그들을 데리고 이동하다가 지치면 잠시 쉬었다가 잭슨이 우리를데리고 또 이동을 했다.
그리고 식사는 잠시 쉬는 동안 이루어지거나, 아니면 잭슨이 이동하는 동안 이루어져 – 고공 비행할때는 멀미하는 이들이 그나마 비행에 익숙해졌는지 잭슨의 저공 비행할때는 멀쩡한 거였다 – 이동 속도가 전보다 훨씬 빨라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처음 레이언 녀석에게 말한 9일 보다 하루 늦은 10일 후에 – 국경은 고공 비행하는 와중에 그냥 넘어버렸다. – 우리는 드디어 왈그린 국의 수도 그랜드마 도시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호오… 정말 도착 할 수 있었을 줄이야. 본부에서 연락을 받고서도 반신반의 했건만…”
그랜드마 지부에 들어가 당당하게 도착했음을 알렸을때 그 곳 지부장은 놀란 눈으로우리를 맞이했다.
자신을 퍼거슨이라 소개한 지부장은 40대 줄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혈색 좋은 동글동글한 얼굴에 눈꼬리가 아래로 쳐져 있어서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아도
마치 빙그레 웃는 것 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양쪽 뺨이 통통해서 꼭 만두나 찜빵 같이 보이는 이 남자는 잘생기지는 않았어도 호감 좋은
인상이라 상업쪽에서 종사하기에는 딱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회색 머리를 안 어울리게시리 목덜미 바로 위에서 꽁지머리로 질끈 묶고 있는 그는 우리를
향해 웃고 있었지만 – 인상 때문에 그리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 말투는 왠지 탐탁지
않은 기색이 들어있었다.
“어디보자…”
뭔 잡동사니들이 그렇게 많은지 비좁아 보이는 그의 사무실로 데리고 가 그나마 그 사무실에
있는 것들 중 가장 깨끗해 보이는 소파에 앉혀놓은 뒤 자신의 책상에 놓여 있는 한 뭉치의
서류를 들여다보는 거였다.
“흐음… 어디보자… 정령 검사에 최상급 정령사? 가만, 최상급 정령사는 또 뭐야? 그냥 상급
정령사라고 하면 될 걸…”
전에도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최상급 정령, 즉 나이트급 정령은 이 세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정령이 아니기 때문에 – 정령왕보다도 더 보기 힘들거다. – 최상급 정령사라는 것은 정령사들
사이에서도 전설로나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정령사도 엄청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실정이었으니 최상급
정령사라고 해도 상급 정령을 두개 이상 맺은 정령사겠거니… 하고 여길 뿐이었다.
사실 내가 상회에 소속된 이후 최상급 정령을 드러낸 적은 – 물론, 상회에 소속되고 신입 환영회
에서 실력을 보일 때 최상급 정령들이 날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때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터라 본 이들이 없었다. – 드워프 마을에 갈 때 이프리트가 셀레아나 모습으로 나를
배로 데려다 줬을 때 딱 한번 뿐이었다.
사실 그때도 셀레아나의 모습을 본 이들은 그 모습이 최상급 정령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오로지 같은 정령사였던 잭슨이나 내가 실제로 최상급 정령을 다루는 걸 직접 목격한 크리스와
레이언만이 사실에 근접하게 알 뿐 – 그들도 내가 물의 정령왕의 딸이라는 건 모르니까 말이다 –
이었다.
그러니 정령사도 아닌 보통 인간으로 보이는 그랜드마의 지부장은 최상급 정령사라고 내
능력이 떡 하니 쓰여 있어도 상급 정령 둘 정도 부리는 정령사인 걸로 생각해버렸다.
“그래, 무슨 무슨 정령들과 계약을 맺었지?”
“바람, 불, 물, 땅.”
왠지 그는 날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걸 숨길 마음도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 나도 사무적으로 대꾸하자 그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 참 대단하군… 보통 정령사들은 4속성을 한꺼번에 다 가지고 있기는 힘들다고
하던데…
하기야, 그러니까 그 나이에 상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거겠지?”
그의 중얼거림에 잭슨이 왜 가만히 있느냐는 듯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저 남자랑 계속 일할 것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생각하라지…’
어차피 그도 내 말을 들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고 말이다.
“어디보자… 블루 엘프? 호오… 쉽게 보기 힘든 종족을 보게 된 건 영광이지만,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그의 중얼거림에 잭슨이 끼어들었다.
“검술만으로 친다면 저 보다도 높은 수준의 실력입니다.”
“여기도 그렇게 나와 있긴 하네. 일류 검사를 상회하는 실력이라고…”
퍼거슨, 그러니까 그랜드마 지부장은 잭슨이 끼어든게 못마땅하다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수인족 꼬마라…”
우리에 대한 서류를 다 읽었는지 그는 서류를 자신의 복잡한 책상 위에 던져 놓고는 곧바로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자, 그럼 따라 오게나.”
우리에 대한 보고를 다 읽었으면 이번 임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거기에
대한 설명 한 마디 없이 다시 사무실을 나서려는 퍼거슨의 모습에 우리가 환영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이번 임무에 그렇게 도움이 안 될 것 처럼 보인단 말인가?
‘히유… 레이언 녀석이 제시한 걸 받기는 다 틀렸군…’
그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자신의 사무실과 같은 층에 있는, 바로 옆에 있는 다른 이의 사무실
이었다.
똑똑~
“클리프, 안에 있는가?”
퍼거슨의 목소리에 답하는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는 퍼거슨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나는 퍼거슨의 사무실
못지 않은 복잡한 사무실과 함께 그 가운데에 위치한 소파에서 다섯명의 남자들이 자리에서
막 일어나며 우리를 맞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다섯 명의 남자들 중 상석의 자리에 있던 남자가 퍼거슨의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우리들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본부에서 지원해준 이들이 도착해서 데리고 왔다네. 어쨌든 지원해 줬으니 이번 작전에서
뭔가 임무를 줘야 할 것 아닌가?”
“저들이 지원자들입니까?”
그렇게 묻는 사람은 상석에 있는 사람의 오른쪽에 있는 자였다.
그는 약간 기가막히다는 듯한 시선으로 우리를 쭈욱 둘러보았는데, 사실 퍼거슨의 말을 듣자마자
보인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나는 점점 기분이 가라앉았다.
“소개하지, 이쪽이 정령검사라고 하는 잭슨, 그리고 최상급 정령사라는 해인, 이쪽은 블루 엘프이자
검사인 듀비, 마지막으로 아직 성년이 안된 수인족인 해민.”
퍼거슨의 소개에 우리가 고개를 숙여 보이자 소파 상석에 앉아 있다가 일어난 이가 이들 중
가장 높은 자였던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나. 와줘서 고맙네. 사실 지원 요청을 하기는 했지만, 시일이 너무 촉박해서 기대는
못하고 있었거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왼쪽에 서 있던 남자가 혼잣말 하듯, 그러나 우리에게도 다 들릴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렸다.
“하기야, 아예 없는 것 보다는 났지.”
상석에 있는 남자가 그에게 엄한 눈길을 보내 입을 다물게 하기는 했지만, 이미 그가 전달하고
싶었던 바는 다 뱉은 후였다.
“에헴, 그럼 나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테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게. 아, 그리고 이들에
대한 건 클리프 자네가 담당하도록 하게나.”
상석에 있던 남자의 이름이 클리프였던 듯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험험, 그럼 잘들 알아서 해보게나. 나중에 저녁때 쯤 보고를 받도록 하지.”
퍼거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를 내버려둔 채 혼자 나가버렸다.
“자자, 그 쪽에 서 있지만 말고 이쪽으로 오게나. 이번 일을 같이 하게 된 동료들인데 인사를
나누어야지.”
부드러운 어조로 우리를 부르는 클리프가 그나마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문가에 엉거주춤 서 있던 우리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우선 나부터 소개하자면, 이름은 클리프라고 하고 평민이라 성은 없다네. 이곳 경비 책임을
맡고 있는 덕에 이번 작전에서도 대장을 맡게 되었지.”
그렇게 말하는 그는 이 곳에 있는 이들 중 키가 제일 작았다.
대충 눈으로 가늠해서 나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약간 작은 듯 했다.
그러나 무척 단단해 보이는 몸은 그가 거저 경호대장이 된 것이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오른족에 서 있는 두 남자는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했더니만, 동갑에 같이 상회에 들어와
지금까지 붙어 다니는 친구사이라고 했다.
붉은기가 도는 갈색 머리가 톰슨, 짙은 금발머리는 싱거라고 했다.
그리고 왼쪽에는, 아까 우리를 칼보는 듯한 발언을 한 은회색 머리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 이 곳에 있는 다섯 남자 중 가장 어려보이는 – 녀석이 도터라고 했고, 그 옆에 있는 갈색
머리의 평범한 인상의 남자가 루터라고 했다.
“지원자들은 자네들이 전부인가?”
보고를 받아 다 알고 있을거면서도 확인차 물어보는 루터의 질문에 잭슨이 대답했다.
“예. 시간이 여의치 못해 많은 인원이 같이 오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군. 본부에서 지원해줄 정도에 그 먼 거리를 열흘안에 주파할 정도니 꽤 능력이 높은가
보군. 하지만, 문제는 경험이겠지. 이런 일은 몇번이나 해봤지?”
그의 건조한 질문에 잭슨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두번 밖에 참여하지 못했으며 나머지는…”
거기서 잠시 머뭇거리던 잭슨은 한숨처럼 나머지 말을 내뱉았다.
“…. 아직 한 번도 참여해 보지 못했습니다. 상회에 가입한 지 얼마 안 되었거든요.”
변명처럼 붙인 뒷 말은 차라리 안 붙인 것이 더 나을 뻔 했다.
잭슨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까 나에게 단단히 찍힌 그 녀석이 이죽였던 것이다.
“하, 그럼 신입을 우리에게 보내 준 거란 말이야? 이거 참 대단한 지원인걸?”
신입인 걸 부정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었다.
‘젠장, 그냥 여길 뒤엎어 버리고 가버릴까?’
기분 나쁜 건 나뿐만이 아니었기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걸 타개하기 위함인지 클리프가 나섰다.
“그만 하거라. 같은 동료끼리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 강한 동료애로 묶여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우선 그 녀석을 향해 질책을 한 후 그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자네들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잘 알겠네. 그러나, 이런 일에는 경험이없으니 작전 짜는 건 우리에게 맡기고 그에 따라주게나.”
사실 처음부터 내가 작전 회의에 참여해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참견할 생각도없었다.
그의 말대로 경험도 없었고 말이다.
어차피 그가우리를 작전 회의에 참여시킨다 해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처럼 구경만 하다 결론이 나면 고개나 끄덕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으로 축객령을 듣게되자 굉장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잭슨이 클리프의 말을 거들며 나섰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사실 레이언님으로부터 이 곳 지시를 따르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럼 저희는 인사도 나누었으니 이만 쉬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렇군. 내 자네들이 막 도착했다는 걸 깜빡 했구만. 미안허이. 내가 안내해줄 테니 따라 오게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클리프 사무실에 들어가서 소파에 한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클리프를 따라 부리나케 그 곳을 나와야 했다.
그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지부 건물 뒤쪽에 있는 또 다른 건물이었다.
지부 건물보다는 높이는 작았지만 면적은 좀 넓은 편으로 정원과 담벼락이 딸려 있었다면 어느 거대 저택으로 보일 만 했다.
물론, 실용성 위주의 건물이라 아름다운 면이 별로 없는 밋밋한 회색 돌로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말이다.
“이 곳은 기숙사라네. 자네들이 이번 임무를 끝낼때 까지 이 곳에서 지내게 될 거야. 이번 임무를 맡은 애들이 다 여기 있거든.”
건물 입구에는 경비원인 듯한 세 남자가 앉아서 잡담을 하고 있다가 우리가 일어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대장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그 중 한 사람이 클리프의 뒤에 짐을 들고 서 있는 우리를 힐끗 보면서 묻자 클리프가 우리를 소개시켜줬다.
“아아, 이들은 본부 소속 사람들인데 이번에 잠시 우리 지부에 합류하게 되었네. 그래서 며칠 여기서 머물테니 안면들을 익혀두게나.”
“아… 그렇습니까?”
그들도 이번에 있을 작전을 알고 있었는지 그의 말에 즉각 ‘아~’ 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그 뒤에 우리를 바라보면서 미심쩍다는 저 눈빛들은 뭔지…
“어차피 나중에 인사를 정식으로 시킬테니 그때 다시 보기로 하고, 3층에 그 방 비었지?”
“뭐, 요즘 대부분의 녀석들이 운송에 나가서 빈 방은 많습죠.”
“그런거 말고. 3층의 그 방 말이야.”
“예. 비어 있습니다. 그 동안 새로 들어온 신입도 없었잖습니까?”
“알겠네. 아, 그 방에 아무것도 없을테니 필요한 것들 좀 가져다 주겠나?”
“그러죠.”
건물 입구에 있던 세 남자 중 계속 클리프와 이야기를 하는 한 남자가 선선히 대답하자 클리프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를 데리고 계단으로 향했다.
“시선들이 좋지 않더라도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군. 아무래도 본부에서 지원이 온다고 해서 우리는 경험도 많고 능력도 인정할 만한 이들이 올 줄 알았거든. 뭐, 시즌이 시즌이라 그쪽도 바쁘겠지 만서도… 어쨌든, 기대를 좀 많이 해서 그런거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말게나.”
클리프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기야, 그렇게 노골적으로 못마땅하다는 시선들을 보내오는데 안 미안할 수가 없겠지.
어쩌면, 그도 우리를 보고 내심 실망을 해서 그에 대한 미안함도 있을지도 모른다.
“이해 합니다.”
잭슨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고개는 끄덕여 보였다.
“그래도, 레이언님이 추천한 사람들이니 나는 기대하고 있다네. 부디 이번 작전에서큰 활약을 해주길 바라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자, 다왔군. 이 방이네.”
그렇게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3층 복도의 맨 구석쪽에 있는 방문 앞에 도착한 클리프가 문을 열어 보였다.
“사실, 지금은 빈 방들이 많아서 2인실로 두개를 줘도 좋지만… 그 방들은 원래 임자가 있는 거니 좀 불편하더라도 이쪽 방을 주는게 좋을 거 같아서 말야. 이 방은 다른 방들보다 크기도 크다네.”
그 곳은 양쪽 벽에 2층 침대가 각각 하나씩 붙어 있는 4인실 방이었다.
그래도 제법 넓직하여 좁아 보이지는 않는데다 방 가운데에 안락 의자 4개가 놓인 탁자도 있었다.
항상 청소가 되어서 그런지 깨끗하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방이라 썰렁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시트나 세면대 등은 곧 가지고 올 걸세. 필요한 거나 궁금한게 있으면 그 사람에게물어보도록 하게나. 내가 지금 일하다 나온 거라 세세히 도와줄 수가 없겠군. 우선 푹 쉬다가 오늘 저녁이나 같이 하도록 하세.”
“신경써주셔서 감사 합니다. 저희는 알아서 할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러지. 그럼 푹들 쉬게나.”
잭슨이 우리 일행 대표로 – 어느새인가 그는 우리 일행의 대변인이 되어 있었다. – 인사를 하자 클리프가 뒤에 있던 우리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다.
“쳇… 어쩐지… 그 째째한 레이언님이 왠일로 거한 조건을 걸었나 했더니만…”
클리프가 나가자마자 싱긋 웃고 있던 잭슨이 짐을 던지다시피 방 한 구석에 내팽개치더니 안락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투덜댔다.
“키잉…”
그 동안 내 팔에 들러붙은 채 내내 조용히 있던 해민이가 기운 없는 표정으로 아직 시트도 깔리지 않은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해민이도 피곤한가보네. 하기야, 익숙치 않은 여행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래도 해민아 조금 있으면 시트 올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았다가 시트 깔고 자. 그냥 자면 춥잖아.”
잭슨이 그런 해민이를 바라보며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지만, 해민이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오른쪽에 있는 이층 침대의 아래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으음, 많이 피곤했나보네.”
걱정스러워서 다가가 머리를 쓸어 넘겨줬는데 해민이는 꼼작도 안 했다.
그러고보면 녀석의 이마가 좀 따뜻한 거 같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여행을 너무 오래 해서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 하는데 잭슨이 안락 의자에 앉아서 기지개를 쭉 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으갸갸~ 에구, 나도 피곤하다. 시트 오면 빨랑 잘란다. 야, 그 전에 우리 침대나 정하자. 해민이야 벌써 하나 차지하고 누웠으니… 넌 어디 쓸 거냐?”
잭슨이 나를 보며 말하자 나는 침대들을 둘러보다 어깨를 으쓱 했다.
“뭐, 아무데나 상관 없지만… 듀비는 어디 쓸래요?”
“저도 아무 곳이나 상관 없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한 듀비는 정신없이 자고 있는 해민이를 힐끔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저 아이는 해인님과 떨어지기를 싫어하니 저는 이쪽 침대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듀비가 해민이가 사용하는 것의 맞은편에 있는 침대를 가르키며 말하자 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민이가 하도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 그런지 이제는 내 주위 사람들이 나와 해민이가 붙어 있는 걸 당연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아래인가 위인가가 문제인가?”
듀비가 입을 다물자 은연중 듀비와 한 침대(?)를 쓰게 된 잭슨이 문제를 제시하자 듀비는 이번에도 선선히 대답했다.
“저는 아무쪽이나 상관 없으니 좋은 쪽을 고르십시오.”
“그럴까요? 그럼 제가 아랫쪽을 사용할테니 듀비가 윗쪽을 사용하시죠?”
“좋습니다.”
그렇게 대충 사용할 침대를 정했을 무렵 누군가가 우리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예.”
마침 문 가까이 서 있었던 듀비가 대답하며 문을 열어주자 두 남자가 양 손에 한아름 짐을 들고 들어왔다.
아까 입구에서 봤던 세 남자들 중 대답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던 두 남자였다.
잭슨 또래로 보이는 두 남자는 한명은 침대 시트를, 다른 한명은 세수대야와 물이 가득 담긴 단지를 가지고 와서는 탁자 위에 우르르 내려놨다.
“우리 조장님 말씀이 좀 답답하겠지만서도 정식으로 소개가 될 때까정 건물 안을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시우. 뭐, 그래봤자 저녁때쯔음에는 소개가 될 테니 한잠 푹 자고 일어나면 시간은 다 지나가 있을 거요.”
침대 시트를 가지고 온 남자가 무뚝뚝하게 말하자 세수 대야와 물이 가득 든 단지를가지고 온 남자도 입을 열었다.
“물이 부족할 거 같으면 지금 말씀하세요. 더 가져다 드릴테니. 아, 그리고 또 다른필요한 건 없으세요?”
“물은 되었습니다. 단지 수건 좀 가져다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저희가 가지고 있는게 더러워서… 그리고 빨래 거리가 있는데 처리할 수 있을까요?”
그나마 세수대야와 단지를 가져온 남자는 무뚝뚝하지 않아서 그런지 잭슨이 그를 향해 정중하게 요청했다.
“본부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서는 빨래 담당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어요. 그래 이 곳에 머무는 녀석들이 내놓은 걸 한꺼번에 모아 빨아서 가져다 준답니다. 헌데 사람이 많다보니 옷의 양도 장난이 아니기 때문에 옷 안에다 이름을 서 놓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해요. 옷에 이름을 써놨나요?”
물단지를 가져온 남자의 친절한 설명에 우리는 선듯 빨래감을 내놓지 못했다.
잭슨이나 나나 개인집에서 살고 있었기에 옷에 이름을 새겨 넣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흠, 그런가요? 그러면 저희는 안되겠군요. 그럼 그건 나중에 처리하도록 하죠.”
“그러세요. 수건은 곧 가져다 드리죠.”
잭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물단지맨(?)은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지만, 시트맨(?)은그러는 대신 우리를 하나 하나 훑어봤다.
“그런데… 당신들은 뭔가 한 가락 하나보지? 여기까지 파견된 거 보면. 아니면 거기서 제일 능력이 딸려서 이쪽으로 쫓겨온 건가? 당신은 특기가 뭐요?”
시트맨은 자기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잭슨을 제일 먼저 겨냥했다.
자신의 실력에 꽤 자신이 있었던 모양인지 잭슨을 약간 깔보는 눈치였다.
“정령 검사입니다. 검술은 겨우 이류 딱지 뗄 정도이고 정령술은 중급이죠.”
“그렇수? 흐음… 능력이 있기는 있었구만. 그럼 이 젓비린내나게 생긴 곱상한 녀석은?”
잭슨의 말에 조금 주춤 거렸지만, 자기가 뛰떨어진다고 생각되지 않는지 전혀 주눅들지 않은 표정으로 날 가르켰다.
그에 나가려고 몸을 돌린 물단지 맨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그러나 나는 시트맨의 태도가 너무 기분 나빴기에 대답해주고 싶지 않아 그들의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대신 잭슨이 대답해줬지만…
“그 애는 최상급 정령사로 저래뵈도 상회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입니다. 그리고 그 옆은 일류급 검사이지요.”
잭슨은 시트맨의 거만한 태도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는지 ‘손꼽히는 실력자’란 말에 악센트를 팍팍 넣었다.
그에 두 남자의 눈이 휘둥그래졌지만, 날 다시금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 꼬맹이가?”
“에이… 설마요.”
그들은 잭슨이 과장 했다고 여기기로 한 모양인지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가 내 또래중에서 좀 뛰어난 실력을 가졌을 거라고 추측한 모양이다.
“최상급 정령사는 무슨… 그저 기껏해야 중급 정령사겠지.”
“그래도 저 나이 또래치곤 대단한 거잖아. 지원으로 보낼 만 했네.”
우리 방을 나가며 저희들끼리 수그런거리는 소리에 내 예상은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래봤자 꼬맹이야. 저런 애를 어디다 써먹어? 벌벌 떨며 아무것도 못하는 혹덩어리가 안되면 다행이겠다.”
‘우쒸…’
그들이 목소리를 전혀 낮추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텅텅 빈 복도 구조상 작은 소리라도 잘 울려 퍼져서 그런지 귀를 가만히 기울이고 있지 않아도 멀어져가며 주고받는 그들의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렸다.
게다가 그 시트맨의 마지막 소리는 내 귀에뿐만이 아니라 내 가슴속에까지 크게 울려퍼졌다.
빠드득…
나도 모르게 이를 갈았는지 방 안에 이 가는 소리가 울려퍼지자 잭슨이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무 화내지 마라. 어차피 여기 계속 있을 것도 아니고, 작전 들어가면 네 실력을 저 보는 눈도 없는 녀석들에게 유감 없이 보여줄 수 있잖아.”
“흥, 필요 없어. 어디 얼마나 뛰어난 놈들이기에 우리를 무시하는 건지 한번 두고 보겠어. 레이언 녀석, 우릴 이딴 곳으로 보냈단 말이렷다? 어디 돌아가서 한번 두고보자.”
그 순간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국경 너머에 있던 레이언 녀석은 오한이 들었을 거다.
아주 깊고 절절한 한을 담아 씹어 내뱉었으니 말이다.
“자자, 그만 흥분하고 잠이나 자자. 줄기차게 달려왔는데 피곤하지도 않냐? 난 씻고자련다.”
“쳇…”
잭슨이 먼저 그들이 가져다 준 대야와 물을 한쪽 구석으로 가지고 가며 씻으려고 하자 나는 그쯤에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시트들을 펼쳤다.
“내가 말이지, 이 먼 곳까지 와서 왜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냔 말야. 안 그래요 듀비?”
각각의 침대 위에 시트를 깔면서 투덜거리자 듀비가 피식 거리며 웃었다.
“그럼 돌아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생각 같아서는 다 뒤집어 엎고 돌아가고 싶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빈 손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악작같이 작전에 참여해서 레이언 녀석이 제시한 그것들을 다 받아내야죠. 음, 그래도 이 억울함이 안 풀릴 거 같은데…”
“작전 들어갈때 네 실력을 보여서 이곳 녀석들을 한방 먹이라니까.”
세수를 하려다가 아직 수건이 도착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잭슨이 세수 대야에 물만 채우고는 돌아서서 끼어들었다.
“흥, 내가 실력을 발휘하면 이 곳 녀석들에게나 도움이 되는 거잖아. 별로 돕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말야. 고생하는거 구경하며 놀려주면 안될까나?”
“이봐, 이봐. 그러다 작전이 실패하기라도 하면 우리도 위험하다고.”
잭슨이 난처하게 웃으며 말하지 않아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쳇, 그랬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거지. 젠장…”
“적들을 때려 부셔서 이 울분을 푸는 건 어때? 좋은 생각이지?”
“몰라.”
그때까지 울분을 참고만 있고 싶지 않았던 내 손 아래 죄 없는 시트들만 신나게 팡팡 두들겨졌다.
자고 있는 해민이에게 시트를 덮어주고 나머지 빈 세 침대에도 시트를 다 깔았을 즈음 물단지맨이 다시 돌아왔다.
“수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네 분이시라 하나씩 쓰시라고 가지고 왔으니 부족하진 않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물단지맨은 혼자 와서 그런지 방 안에 들어오지 않고 그냥 문 밖에서 수건만 넘겨주고 돌아갔다.
그에게 항상 우리 일행의 대변자로 활약(?)하는 잭슨이 수건을 받고 돌아서서 문을 닫고 나자 우리는 부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먼저 씻는다?”
잭슨이 자신이 쓸 수건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잽싸게 세수대야 쪽으로 달려가자 나는 사악하게 씨익 웃었다.
“어?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내가 씻는 거 도와주려고 했는데, 그냥 얼굴만 씻으려고? 그럼 좋을대로 해.”
나의 사악한 말에 멈칫 한 책슨이 우거지상이 된 얼굴을 내쪽으로 돌렸다.
“엇…. 이이~ 치사하게…”
사실 직접 물 속에 들어가서 피부를 쓱쓱 싹싹 씻는게 더 개운하고 시원하기야 하지만, 지금은 목욕할 처지도 안되는 데다 다들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하는 상황이었으니 운디네의 도움은 정말 달콤한 유혹이었다.
“캬캬캬캬~~”
우여곡절 끝에 우리 일행은 각자의 침대 속에 몸을 파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자지도 못한 것 같았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잠 속에서 강제로 끌어 올려졌다.
쾅, 쾅, 쾅~!
노크 소리도 아니고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에 화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무슨 일이시죠?”
이런 일에 가장 잽싼 듀비가 제일 먼저 일어나 방 문을 열어보니 그 곳에는 시트맨이 서 있었다.
“아따, 무지 피곤했었나보구만? 한~ 참을 두드렸는데 이제야 나왔네.”
싱글싱글 웃으며 태연하게 말하는 시트맨의 얼굴에 매직 미사일을 한다발 먹여주고 싶었다.
내 단언하건데 저 녀석은 처음에는 작게 노크를 하다가 우리가 안 나오자 점점 큰 소리로 문을 두들긴 것이 틀림 없었다.
처음부터 문이 부서져라 두들겼을거고 그 시간도 짧았을 거였다.
이 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좋은 청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무리 깊이 잠들어 있었다고 해도 보통의 노크소리도 듣고 깰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참을 두들겼다고 말하다니…
‘되게 뻔뻔한 인간이네. 완전 철면피야.’
시트에 몸을 돌돌 말고 눈만 빼꼼이 내밀어 노려보기만 하는 나와는 달리 듀비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간 잭슨은 대외용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잭슨과 눈이 마주친 시트맨이 움질 거리는 걸 보니 잭슨이 얼굴은 웃고 있어도 눈에서는 매서운 빛이 뿜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러는 것도 잠시, 다시 태연한 신색이 된 시트맨이 그렇게 우리를 깨운 이유를 밝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어서 말이오. 잠시 후에 다시 데리러 오기야 하겠지만서도 미리 알려주지 않으면 그때까지 계속 잘 거 같아서…”
자신이 이런 친절을 베푸는데 고마워 해야 당연한 거 아니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의 시트맨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저녁때가 다 되었을 정도로 우리가 그렇게 오래 잤나 싶어서창 밖을 바라보니 어둑어둑해지기는 커녕 밝은 햇빛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시간을 확인한 잭슨이 다시 시트맨에게로 눈길을 돌렸지만 그의 철면피 신공은 엄청 높은지 그는 안색의 변화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군요. 그런데… 저녁 식사를 언제 먹죠?”
화를 억누르고 있는지 잭슨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그에 아무리 두터운 철면피 신공을 터득하고 있다 하더라도 불안함을 느꼈는지 시트맨은 서둘러 대답했다.
“곧 먹을 거요. 잠시 후에 데리러 올테니 준비하고 있으시오.”
그리고는 우리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잽싸게 몸을 돌려 가버리는 거였다.
“젠장!”
시트맨이 저 멀리 가버리자 잭슨이 낮게 중얼거리며 죄 없는 방문을 부서져라 세게 닫아 버렸다.
그러고도 화가 안 풀렸는지 아직도 침대 속에서 꼬물꼬물 거리고 있는 내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봐, 일어나. 저녁 먹으러 갈 준비를 하고 있으랍신다.”
“우쒸… 여기는 도대체 저녁을 언제 먹길래 벌써 먹는 거야? 아직 해도 지지 않았구만…”
잭슨 못지 않은 분노를 담아 투덜대며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해민이는 평소의 그 예민하던 감각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여전히자고 있는 거였다.
다른때 같았으면 나 보다도 먼저 일어나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 많이 피곤한가보다… 라고 생각한 나는 해민이는 깨우지 않은 채 나두고 나만일어나 서둘러 움직였다.
그렇게 푹 자지도 못하고 잘 자던 와중에 억지로 일어나서 준비랄 것 까지도 없이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앉아있는데 잠시 후에 데리러 온다던 녀석은 커녕 생쥐 한 마리도 오지 않는 거였다.
“잭슨아…”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잭슨 역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응…”
“우리 당한 거지?”
“아마도…”
“내가 만약 이 곳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 그 넘을 찾아내어 신나게 두들겨 주고 돌아가면 뭐라고 할래?”
내 말에 잭슨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바보 멍청이.”
“왜?”
잭슨을 째려보며 묻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럼 돌아가서 뭐라고 할 건데? 어떤 싸가지 없는 놈에게 놀림 당해서 열받아서 뒤집어 엎고 왔다고 할 거야?”
“그럼 너 같으면 어떻게 할 건데?”
“우선은 참아야지. 지금 뒤집어 엎어봤자 이 지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 뿐이야. 게다가 우리는 이 곳 사정을 모르니 더욱 더 불리할 뿐이고. 그러니까 참고 기다리다가 기회가 왔을 때 자근자근 밟아주는 거야.”
“만약 그 기회가 오지 않으면?”
그러자 잭슨은 아주 무시무시하게 씨익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럼 가기 전에 여기 뒤집어 엎어서 그 자식을 찾는 거지. 네가 안 해도 나는 할 거고, 만약 네가 한다면 도와주겠어.”
“그거 맘에 든다. 아, 그리고 시트맨 말고 아까 사무실에서 그 싸가지 없는 넘도.”
“두말하면 입 아픈거 아니냐?”
“듀비는 어때요? 참여 할래요?”
혹시 듀비는 이런데 관심이 없어 빠질까봐 걱정했는데, 이런 내 걱정을 날려주려는 듯 듀비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해인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좋았어. 그럼 우리 셋이 가기 전에 여길 한번 뒤집어 엎고 가자고. 아, 그런데… 레이언 녀석에게는 뭐라고 변명하지?”
“훗훗훗, 네 아버지를 대면 만사 오케이일 걸?”
걱정 없다는 듯 태평한 잭슨의 말에 나는 쬐께 마음이 걸렸다.
내 힘이 아닌 아버지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기분이 안 좋았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 으음… 에잇, 아무려면 어때? 열받는데 이용할 건 다 이용하는 거야. 좋았어, 그 자식들 어디 두고보자고.”
그렇게 우리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그 괴씸한 넘들에게 복수하려고 이를 빠득빠득 갈고 있을때 드디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어떤 놈이 어떤 얼굴로 왔는지 볼까나?”
탁자에 앉아 있던 잭슨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문을 여니 거기는 물단지맨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러다 깔끔하게 옷을 다 차려입은 잭슨을 보고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는 거였다.
“어라라? 벌써 일어나서 준비까지 하셨어요? 저는 지금 일어나시라고 깨우러 왔는데…”
빠드득…
그 시트맨이 더욱 더 괴씸해지는 순간이었다.
잭슨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차마 눈 앞의 물단지맨에게 화를 내기도 그렇고 시트맨이우리를 놀려주려고 아까 와서 깨우고 갔다고 고자질 할 수도 없었던지 그냥 웃으며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아, 별로 피곤하지 않았는지 금방 눈이 떠지더라구요.”
‘금방 눈이 떨어지기는 개뿔이…’
아, 정말 이 곳에 와서 나의 단정한 언어 생활에 마구마구 금이 가는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나는 입이 거친 미소녀가 – 뜬금 없이 무슨… – 되는게 아닐까? 요즘은 약간 삐딱한 기질이 있는 애들이 인기가 많다던데… 나도 이렇게 된거 이쪽 노선으로… 쿨럭..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그러셨군요. 체력이 정말 대단하신… 아, 혹시 잠자리가 불편해서 잠을 잘 못 주무신건 아니신지…?”
물단지맨은 정말 우리를 염려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아까 시트맨에게 당한게 너무열받은 상태였기에 저 사람이 시트맨과 한통속이라 다 알면서도 연기를 하고 있는지의심스러웠다.
‘아아… 이렇게 서로 의심하니까 각박한 세상이 만들어지는 건데.. 크흑흑.. 하지만 아까 그 시트맨이 너무 얄미워서…. 같은 그릅의 녀석이라는 것 때문에 쉽게 믿을 수가 없어어…’
내가 이러건 말건 잭슨과 물단지맨의 화기애애한 – 겉으로만 그럴 뿐인지 몰라도 –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아닙니다. 잠자리는 정말 편안했습니다. 저희가 그냥 일찍 깬 것 뿐입니다.”
“그렇습니까? 역시 본부에서 지원 나오신 분들이라 뭔가 다르셔도 다르시군요.”
‘다르긴 개뿔이…’
“그런데, 저희를 깨우러 오셨다니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었나봅니다?”
“예. 곧 여러분을 데리러 올 겁니다. 아무래도 상회 분들이니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좀 늦게 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요. 잠시 후에 다시 데리러 오겠습니다.”
“아, 얼마 안 남았다면 그러 필요 없이 지금 나가죠. 괜히 두번씩이나 왔다갔다 하실 필요 없이 말이죠.”
“그러실까요? 그러면 저도 편하죠.”
흔쾌한 물단지맨의 말에 잭슨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어때? 그래도 괜찮지?”
준비야 아까 대 했으니 안될 것도 없었다.
“물론…”
‘물론이지’라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한쪽 침대에서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해민이가눈에 띄이자 저절로 말 끝이 흐려졌다.
아까 깨워도 안 일어나기에 그냥 냅뒀지만, 피곤하더라도 저녁은 먹고 자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곤히 자는 해민이에게 다시 다가갔다.
“해민아, 일어나. 저녁 먹어야지? 해민아?”
하지만 어깨도 흔들어보고 불러보아도 해민이는 요지부동 꼼짝도 안 하는 거였다.
그래 걱정되어 이마에 손을 대어보니 미열이 있는 것 같던 아까보다 조금 더 뜨뜻해져 있었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해민이를 바라보자 잭슨과 듀비가 의아했는지 다가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꼬마가 어디 아픈 겁니까?”
그래도 그 동안 같이 여행을 해서 정이 들었는지 둘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음… 열이 있는 거 같아. 수인족이라고 해도 아직 어린애인데 이번 이동이 무리가되었나 보네.”
“그럼 그냥 쉬게 나두지? 건강한 애였으니까 푹 쉬면 나을 거야.”
약간 열이 있는 것 외에는 크게 아픈 것 같지 않자 잭슨은 대수롭지 않은 걸로 여긴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듀비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을 못 먹는게 걱정되시면 식사를 끝내고 오며 뭔가 먹을만한 걸 가지고 오면 될 겁니다.”
“그, 그럴까?”
나 또한 그 동안 해민이가 아픈 걸 못 본데다 이번 이동에서 크게 힘든 일은 없다고봤기 때문에 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해민이는 듀비와 이동 내내 자면서 왔기 때문에 지친 것 외에 몸에 다른 어떤 해가 가해진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떨치고 대신 시트나 한번 잘 덮어준 후 방을나섰다.
“이쪽은 라센국에 있는 본부에서 온 이들이다. 잠시동안 우리와 같이 일을 하게 되었으니 그 동안 잘 지내도록.”
내가 항상 식사를 해결하던, 그레이험 항구 도시 외곽에 있는 기숙사(?) 식당보다는작지만, 실내 장식은 훨신 더 깨끗하고 멋지게 꾸며놓은 식당의 맨 앞에다가 우리를세워놓고는 클리프가 소개의 말을 하자 우리는 예의상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잭슨입니다. 잘 부탁 합니다.”
“해인이라고 합니다.”
“듀비 입니다.”
그러자 예의상이라고 느껴지는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저희들끼리 우리를 힐끔 바라보면서 속닥 거리는 모습들도 보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처음에 우리를 맞은 지부장이나 아니면 이번 작전의 수뇌급들이 보인 것 처럼 노골적인 실망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의아함과 호기심, 혹은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적을 보는 듯한 경계나 긴장 정도?
거기에다 가끔가다가 아까의 물단지맨처럼 주변의 분위기에 상관 없이 반갑게 환영해주는 자도 있었다.
말 그대로 아주 가아아아아끔 보이는게 문제면 문제겠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 보다는 나은 거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본부에서 오셨다고요?”
방긋 웃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온 사람은 아가씨였다.
그것도 보통 아가씨가 아니라 엄청 예쁜 아가씨였다.
나보다도 반뼘은 더 커보이는 키에 들어갈데 들어가고 나올데 나온, 남자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멋진 글래머 몸매, 거기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하고 곱슬곱슬하는 금발 머리에 파란 눈, 섹시하게 그을린 피부에 도톰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붉은 입술…
“와우~”
인생의 대부분을 여자로 살아온 나 조차 눈이 휘둥그래지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섹시한 미녀였다.
그러나 마치 여우처럼 살짝 치켜 올라간 눈에 날카로운 빛이 어린 걸 보아 흔히 말아는 골 빈 글래머는 아닌 듯 했다.
뭐, 그건 어쨌든 나 조차도 눈을 떼지 못하는 미녀였으니 남자들인 잭슨이나 심지어듀비 마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를 쳐다보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왜 멋진 미남이나 예쁜 미녀에게 눈이 돌아가는 건 인간으로써 당연한 본능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단지맨이 와서 그녀와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야, 벌써 이야기를 나눈 건가요? 내가 소개해주려고 했는데…”
그의 말에 나는 그제야 무례하게도 그녀의 질문에 대답도 안 한 채 그녀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자리에서 사과의 말을 건넸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너무 정중한 나의 사과에 금발 머리의 쭉쭉 빵빵 미녀는 놀랍다는 둣 눈을 동그랗게치켜 뜨더니 호호 하고 웃었다.
“호호호~ 어머나, 그렇게 정색을 하고 사과를 할 것 까지는 없잖니. 내가 무안하게시리… 아직 젓살도 다 빠지지 않은 어린 녀석이 그런 말투를 쓰다니… 애늙은이 같잖아?”
‘허, 허거걱… 애, 애늙은이?’
그녀의 말에 경악한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붕어처럼 입만 벙긋 거렸다.
그녀의 말투를 보아하니 나를 어린 애 취급하는 듯 하는데, 그럼 아까 우리에게 다가올 때 사용한 존대는 잭슨과 듀비를 향한 것이었단 말인가?
‘내, 내가… 그렇게 어려보이나?’
상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런 취급을 조금도 당하지 않았었는데, 이 상회에 들어와서는 툭하면 툭하면 애송이라 불리며 어린 취급을 당해야 했었다.
뭐, 사실 그런 취급 당해도 할 말은 없는 것이, 상회에 들어와 같이 어울리는 이들 중 내 또래가 하나도 없이 모두 나보다도 나이가 적게는 몇 살에서 몇 십살, 심지어레이언이나 크리스 같은 경우에는 백 몇살까지도 차이가 났으니 그들이 나를 애 취급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머리로 이해는 해도…
‘계속 그런 대접 받으면 열받는단 말이다.’
자신들도 내 나이였던 적이 있었으면서 그 생각은 안 하고 항상 어른이었던 것 처럼구는 모습에 솔직히 약올랐다.
그리고 괜히 나는 왜 이렇게 늦게 태어난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물론, 그럴때마다 나이 많은게 좋더냐… 하고 그 생각을 지워버리지만 말이다.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건 말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잭슨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랜드마지부의 미녀 버지니아는 외모 만큼이나 내면도 아름답다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그 유명한 버지니양을 만나 참으로 영광입니다. 그레이험 본부의 잭슨이라고 합니다.”
“호호호, 본부에 있는 분들은 모두 그렇게 아부를 잘 하시나요? 하지만… 뭐, 듣기에 나쁘지는 않군요.”
‘헉… 나는 애송이 취급을 하더니만… 잭슨이랑 나랑 몇살 차이가 난다고 저 넘은성인 대접을 해준단 말이냐아아아~~’
버지니아라 불린 그 금발 미녀의 반응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던 상관없이 매끄러운 잭슨 녀석의 답변이 이어졌다.
“제 말이 귀에 거슬리지 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잭슨이 귀족들이나 하는 식으로 한 손을 배에 얹고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 어차피 아부하려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 우리를 보고 있었던 듯한 어떤 넘의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이고, 본부에 있는 넘들은 모두 기름통에 한번 빠졌다가 나온 모양이지? 본부에 가면 느글 느글 거려서 우째 살랑가 모르겄군.”
그러나 모두들 이런 일에는 익숙한 듯 그의 말을 못들은 척 눈길은 커녕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대화에나 집중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합석하시겠습니까? 제 일행들을 소개시켜 드리죠.”
“기꺼이 합석하도록 하죠. 아, 이쪽은 이미 아시는 사이겠죠? 제 동생이예요.”
그녀의 말에 혼자 속으로 궁시렁 궁시렁 대던 나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우연이 있나. 그런건가요?’
잭슨의 반응에 물단지 맨은 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보니 정식으로 소개할 시간도 없었군요. 비토라고 합니다.”
“하하하, 그렇네요. 도움은 받았으면서 정작 서로 소개할 시간은 없었으니… 저는… 아, 들어서 아시겠지만 잭슨이라고 합니다.”
아까 버지니아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옆에 비토도 있었다는 걸 상기해낸 잭슨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비토가 사람 좋게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이쪽은 듀비입니다. 블루 엘프죠. 그리고 이쪽은 해인이.”
“아, 그러고보니 어린 수인족도 같이 있지 않았습니까?”
“무척 피곤했는지 일어나지 못하더군요. 그래서 푹 쉬라고 나두었습니다.”
“그런 거였습니까? 체력 강하기로 이름 높은 수인족이 나가 떨어질 정도라니… 무척 힘든 이동이었나보군요?”
“하하하, 그렇다기 보다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 걸 겁니다. 아마도…”
맨 처음 이동할 때 고생한 것이 떠올랐던지 잭슨의 안색이 잠시동안 헬쓱해졌지만, 그는 곧 하하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버지니아와 비토 남매랑 친해질 수 있었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날 저녁 식사 이후로 그들을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이유인 즉슨, 그들은 우리가 지원하기 위하여 온 이번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버지니아양은 남들 눈에 확 뜨이는 외모와 그에 못지 않는 실력으로 인하여 그랜드마 지부의 버지니양 하면 너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번 처럼 비밀스러운 임무에 투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녀를 눈치 챈다면, 그 즉시 베지테크스 상회 그랜드마 지부를 쉽게연관짓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비토 또한 버지니양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덩달아 유명해져서 어느 사이엔가 그 두 남매는 비밀스러운 임무에는 제외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명한 것도 가끔은 안 좋은 점도 있는가 보다.
하기야, 어떤 일에든 다 장단점이 같이 있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간 이번 작전에 참여할 인원이 다 모이자 작전 계획은 금방 짜여질 수 있었던지 그 다음날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그작전이라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정령왕의 딸] 23장 내가 물로 보인다 이거지?1해민이는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가 저녁을 먹고 방으로 되돌아 갔을때에도 여전히 자고 있었다.
“얘 아직도 자네?”
침대에 웅크린채 눈을 감고있는 해민이의 머리카락을 슬며시 쓸어올리며 중얼거리자 잭슨이
다가왔다.
“왠지, 아까보다 더 안색이 창백한 거 같다?”
그가 잠든 해민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한마디 하자 나는 새삼 해민이의 얼굴을 다시금 살펴
보았다.
방금 전에는 원래 애 얼굴이 흰 편인데다가 날이 어두워져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평소 발그레한 뺨이 핏기가 하나도 없는 거였다.
“정말 그러네? 어디 아픈거 아냐?”
놀라 잭슨을 바라봤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글쎄… 미안하지만 수인족에 대해 별로 아는바가 없어서…”
잭슨이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난처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수인족은 물론이거니와 엘프나 인어같은 이종족들을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을리가 없었다.
“어쩌지? 여기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
“우선은… 내일까지 두고보자. 그래도 안깨어나면 그때 이야기 하자고.”
“내일까지 기다리다가 혹시 늦는거 아니야?”
“설마… 크게 다친것도 아니잖아. 단순한 몸살일 수도 있어. 어쩌면 내일은 팔팔하게 일어
나서 돌아다닐지도 모르지.”
“그랬으면 좋겠지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잘 덮혀있는 시트를 괜히 다시 정리해줬다.
스스로 해민이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정작 해민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있는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서 뭐라도 하지않으면 자기 비하에 빠질것만 같아서였다.
수인족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못한채 걱정만 하지않고 그를 위해 뭔가 조처를 취해
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에휴, 내일 기회가 된다면 당장 수인족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도 해민이가 여전히 안좋은 안색으로 일어나지 못하자 우리는 결국
비토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수인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랜드마 지부에서 우리에게 친절
하게 대해준 극소수의 인물 중 한명이라 도움을 청하려니 떠오르는 이가 그였던 것이다.
다행이도 비토와 친한 이중 한사람이 수인족에 대해 제법 알고있다고 했다.
그래 비토가 그의 도움을 구하러 가는 사이 우리는 아침 먹으러 갈 생각도 못하고 비토가
수인족에 대해 잘 알고있는 이를 데리고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리던 이는 아니오고
정말 보고싶지 않았던 시트맨이 온거였다.
“무슨 일이죠?”
그넘에게 당한게 있었으니, 아무리 타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잭슨이라도 고운 말투가
나올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그 시트맨 넘은 지가 한짓은 다 잊어버렸는지 아주 가관으로 목소리를 쫘악 낮게
깔아 대꾸하는게 아닌가?
그렇게 말하면 멋져 보이는줄 아는감?
“제 3 연무장으로 집합하라는 호출이요.”
“지금 당장?”
아픈 –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 해민이를 데리고 갈 수도, 그렇다고 그 혼자 두고
갈 수도 없는 터라 우리가 망설이자 그 시트맨 넘이 아주 못을 박듯이 내뱉는 거였다.
“지금 당장 모이랍시오.”
시트맨의 단호한 말에 잭슨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돌아보았다.
“우선 갔다오자.”
“해민이는?”
내 항의 어린 시선에 잭슨이 작게 웃더니 듀비를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듀비가 해민이랑 같이 있어주겠어요? 어차피 듀비는 작전에서도 해인이랑 같이
행동할거잖아요. 아무래도 이번 작전에 해인이는 큰 역할을 맡게 될거 같으니까… 해인이는
작전 설명에 직접 가야 할 거 같고… 게다가 우리 중에서는 이런 일에 내가 경험이 많으니까
나도 가야할 거 같고…”
잭슨은 듀비를 혼자 남게 한다는 거에 좀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지 그의 눈치를 살피
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듀비는 잭슨을 생각해서인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여기 남을테니 걱정 마시고 다녀 오십시오.”
“정해졌으면 빨랑빨랑 갑시다잉? 이거 늦었다고 나만 혼나는거 아뇨?”
그말을 들으니까 왠지 더욱 더 꾸물꾸물대서 정말 그녀석을 혼나게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잭슨이 이런 내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깨를 툭툭치며 먼저 앞장서서 방을 빠져
나가자 어쩔수 없이 나도 서둘러 밖으로 나가야했다.
하지만, 도저히… 이대로 참다가는 도저히 열받쳐서 견딜수가 없을것 같아 나는 슬며시 복도
공중에서 동동 떠다니고 있는 죄없는 애들을 노려봤다.
씨익~
내가 그렇게 슬며시 웃자마자 그와 동시에 우리의 발걸음 소리만 들리던 적막하던 복도에
요란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이쿠~”
`우하하하~~’
라고… 생각 같아서는 속으로나마 신나게 웃어주고 싶었지만… 더욱 더 열이 받게도 그 넘은
소리만 요란하게 질렀지 앞으로 넘어지려고 하자마자 몸을 둥그렇게 말아 낙법으로 유연
하게 한번 구르고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거기에다 더불어 뒤를 슬쩍 돌아보며 기분나쁘게 씨익 웃는 거였다.
마치 내가 수작을 부렸다는 걸 다 알아챘다는 듯이…
`열받아, 열받아, 열받아아아~~’
그넘이 고꾸라지면 놀려줄 말까지 다 생각해 놓고 있었는데…
저녀석의 몸이 저렇게 재빠를 줄은 몰랐던 것이 실수였다.
그래 다시 어떻게 하면 저녀석을 혼내줄까 속으로 고민 고민 하고 있는데 잭슨이 내 어깨를
툭 치더니 고개를 설래설래 저어 보였다.
`쳇….’
시트맨의 안내를 받아 가게된 연무장은 건물 지하에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되는 작전 훈련을 하게 되다보니 특별히 마련된 듯 했다.
그레이험 항구도시에 있던, 내가 훈련 보조를 빙자한 작업을 하던 그 곳 보다는 작지만
(그 곳은 종합 운동장 크기였다.) 그래도 실내에 있는 공간 치고는 꽤나 넓은 (보통 학교
운동장 만했다.) 그 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클리프를 비롯하여 우리가 이곳에 온 첫날 클리프의 사무실에서 봤던 네
남자들도 함께 있었다.
시트맨이 빤히 쳐다보는 그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모여있는 사이로 들어가자 – 그도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잭슨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 것 같
았는데 내 착각이려나? – 클리프가 잭슨과 날 힐끔 바라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해민이와 듀비가 없는 것에 대해 뭐라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히 찝찝한 것이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같은 상회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아랫 사람이 아니라서 함부로 터치하지 못하는
걸라나?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아무래도 이곳에 와서 푸대접을 많이 받다보니 그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괜히 찝찝하고
혹시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닌가… 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아아,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해… 레이언 녀석, 혹시 이곳에 와서 이런 푸대접을 받게 될
줄 알고 한달이라는 휴가를 약속한게 아닐까?’
지금 심정으로는 그 휴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잽싸게 돌아가서 어디 좋은 온천 휴양지라도 알아봐야겠다.
내가 임무 끝에 다가올 행복한 휴가 – 절대적으로 행복해야 한다. 안그럼 열받아서 내가
뭔짓을 할지 모른다. – 를 상상하며 피곤한 정신을 달래고 있는데 클리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자, 다 모였으니 이번 작전을 설명하겠다. 우선 이번 작전은 세 조로 나누었다. 임무에 따라
조 이름을 잠입조, 혼란조, 회수조 라고 부르겠다.”
거기서 잠시 클리프가 말을 멈추고 고개짓을 하자 기다리고 있었던 듯 네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혼란조는 따로 두 팀으로 나뉜다. 그럼 도합 4개의 조가 되지? 회수조는 내가 직접 지휘
한다.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조니까 말이다. 혼란 1조는 루터가, 혼란 2조는 도터가 맡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잠입조는…”
거기서 잠깐 나를 바라보던 클리프는 단숨에 내뱉었다.
“본부에서 지원나온 해인군이 지휘한다.”
`엑? 나? 잭슨도 아니고 나? 이게 도대체…’
나는 물론이거니와 잭슨도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니, 솔직히 이런 일에 경험이 전무한 나를 조장으로 세운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
아닌가?
모인 무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
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날 대놓고 애송이 취급한, 도터를 비롯한 세 남자도 아무런 말도
안하는 거였다.
뭐, 그들이야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무슨 근거로 내가 조장 되는걸 납득했는지 이
해가 안되었다.
혹시 클리프가 자신의 직위로 내리 누른건가?
그렇다고 남들 가만히 있는데 내가 나서서 못하겠다고 하기는 또 뭣해가지고 황당해 하는
와중에 그냥 잠자코 있는 사이 – 사실 말할 겨를도 없었다. 곧바로 조원 호명이 있었기
에… – 조장 밑에 조원들이 척척 나누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더더욱 황당한건 잭슨이 루터가 지휘하는 혼란 1조에 배치된 거였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잭슨이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그말을 끝으로 자기가 배속된 혼란 1조 조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내곁으로 톰슨과 싱거가 다가온 거였다.
오늘 하루동안 올해 놀랄 일을 다 당하는 듯한 심정이었다.
그들은 나 외에 다른 조의 조장을 맡은 이들과 함께 작전 계획을 짜는 자리에 참여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래 나는 아까 조장을 발표할 때 잠입조 조장으로 그들 중 한명이 맡을 것이라 여겼었다.
그런데 조장은 내가 되고 그들은 내 지휘를 받을 조원이 된거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잭슨이 중얼거리던 말을 되뇌이며 나는 클리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어떤 두사람을 시켜 커다란 궤도를 가지고 오게 했는데, 그곳에는 커다란 저택의
도면이 그려져 있었다.
이번에 우리가 방해할 경매가 열리는 장소였다.
“잘 들어라. 이번 경매는 이 저택 지하에서 열린다고 한다.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이번
특상품은 임신한 수인족 여인이라고 하더군.”
수인족이 노예로 팔리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왜 임신한 수인족 여성이 특상품인지는 그
당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두명이라서 특상품이라고 불리는 것이려니 했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갓 태어난 수인족의 아이를 어머니 에게서 떼어놓고 인간 손
에서 길들이면 그 인간에게 충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였다.
한번 충성하게 만들면 인간과는 달리 배신을 모르는데다가 왠만한 장정 서넛, 심지어는
대여섯 정도는 쉽게 처리할 능력이 있었으니 보디가드로는 최상이었고, 외모 또한 아름
다웠기에 돈많은 넘들의 애완용으로 부르는게 값일 정도로 비싸게 팔린다고 한다.
왠만한 저택 값은 쉽게 상회하는 가격이라나 어쨌다나…
게다가 덤 – 이렇게 말하면 뭣하지만 – 으로 여자 수인족까지 얻을 수 있었으니 가격은
배로 치솟았다.
여자 수인족이 있다면 아기 수인족을 나중에 또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방법이 인간적으로 해서는 안될 짓이었지만 말이다.
그런거 보면 인간은 잔인해지려면 악마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잔인해 지는 생물이었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번 작전의 목표는 그 가여운 수인족 여인을 구출하는
한편, 그녀를 사기 위하여 돈이 많아 주체를 못하는 넘들이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귀중품
들도 덤으로 챙기는 거였다.
“잠입조는 경매에 참가한 것처럼 꾸며 잠입해 있다가 혼란 1, 2조가 혼란을 야기 시켰을
때 경매에 참가한 자들을 잠시 묶어두도록 한다. 그때 저택의 무사들이 달려들겠지만,
혼란 1, 2조가 상대할테니 잠입조는 경매 참가자들에게만 신경 쓰도록, 그리고 회수조는
저택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려있을때 목표물을 회수한다. 회수 완료시 신호탄을 쏠테니
그때 전원 철수한다, 이상. 질문 있나?”
클리프가 말을 끝내길 기다렸다는 듯 잭슨이 손을 번쩍 들었다.
“다른 조는 몰라도 잠입조는 임무에 비해 인원이 너무 적은것 아닙니까?”
클리프는 그런 질문이 나올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잠입조에 인원을 더 보태주고 싶어도 불가능 하거든. 경매에
참여하는 사람은 본인 이외에 경호와 수행원을 다 합하여 최대 3명까지 데리고 갈 수
있다는 규칙이 있다. 그런 규칙이 없다면 경호원들을 우르르 데리고 와 분란을 야기시켰을
테니 그쪽으로서는 필수 조건 이겠지만… 그리하여 우리 지부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와
본부에서 손.꼽.힌.다 는 실.력.자 를 배치한게 아닌가? 우리로써는 가능한 한 최대한의
지원을 해준거야.”
그에 잭슨의 입이 막히자 이번에는 내가 손을 들었다.
“질문이요.”
“뭔가?”
“그럼 저와 같이 가는 이들은 누구누구죠? 이 두분하고 듀비나 해민이 둘 중 한명입니까?
지금 말씀드리자면 그 둘은 저와 떨어지려 하지 않을텐데요?”
“수인족은… 그곳에서는 애완동물 취급하기 때문에 허용 인원수가 찼다 하더라도 데리고
들아가는게 가능하다. 그러므로 너와 같이 가는 이들은 저 둘과 너와 같이 온 그 둘이
되겠지.”
“그거 다행이군요. 그럼, 이번 경매에 참여하는 이들은 대충 몇명 정도 되죠?”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50여명쯤? 참가 인원이 그 정도이니 경호 무사들까지 합한다면 적어도 100명은 쉽게 넘는다고 보면 될 거다.”
그의 말을 가만 듣고 있자니 좀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다섯명이서 백명을 훨씬 넘는 이들을 상대하라는 겁니까?”
“말하자면 그렇지.”
“하…”
두려운 건 아니었다.
임무의 성공이나 실패에 상관 없이 내 몸 하나 무사히 빠져나올 자신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기가 막힌건 클리프가 이 임무를 나에게 맡긴 것이 내 실력을 높이 사서 그랬다기 보다는 날 희생양으로 세운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물론 이쪽 지부의 실력파 둘을 나에게 보내주기는 했지만, 뭐랄까… 그건 나에게 도움이 되라고 보냈다기 보다는 변명할 거리를 만들기 위해 보내준 것 같았다.
지금은 나를 희생양으로 세운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나중에 혹여라도 –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 내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우리쪽에서는 최선을 다해 도와 줬다.’라는 식으로 변명할 수 있게끔 말이다.
“왜? 못할 것 같나?”
이죽거리는 내용이었지만, 말투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삐딱한 반응을 이끌어내기에는 충분 했다.
“그렇다면 어쩌실 겁니까? 이제와서 작전을 변경하기라도 하실 겁니까?”
팔짱까지 딱 끼고 건들거리며 이죽거리자 클리프의 주위에 있던 지부 사람들의 눈이치켜 올라갔지만, 정작 당사자인 클리프는 옅게 미소만 띄울 뿐이었다.
“불가능하단 것을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리고 자네는 우리를 돕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어렵더라도 임무를 완수해주기를 바라네. 참고로 말하자면 정체만 들키지 않는다면 그 곳에 있는 자들을 죽여도 무방하네.”
“말은 참 쉽게 한다.”
나는 잭슨과 우리에게 주어진 방으로 돌아오면서 투덜 거렸다.
해민이가 걱정되 걸음은 자연적으로 빨라졌지만, 그 와중에 연무장에서 들었던 작전에 대해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참 이 감정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우습게도 클리프에게 서운한 감정이 전혀 안 들었다.
이 곳에서 그 동안 감정이 너무 안 좋았기에 아마도 나는 쉽고 편안한 임무를 맡겼더라도 혹시 내가 큰 공을 차지할까봐 날 배척하는지 의심부터 했을 거였다.
그래 그 임무를 맡을때 그럴 줄 알았다…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한다 싶었다.
게다가 또 다른 문제는 다른 조들은 곧 자신들의 임무에 맞게 훈련에 들어간다는데,우리조는…
“어휴, 정말… 뭘 해봤어야 훈련을 하자 그러던지 말던지 하지?”
기가막히게도 내 조원으로 들어온 두 녀석이 그냥 개인적으로 알아서 하자고 하는게아닌가?
그래 내가 기가막혀서 바라보니까
“그럼 할게 있나보지?”
라고 하는 거였다.
“아으… 열뻗쳐. 정말… 훈련을 핑계삼아 둘을 확 두들겨 패버릴까?”
다른때 같으면 나의 이런 투덜거림을 거들던지 달래던지 하면서 뭐라 반응을 보였을잭슨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래 의아해서 힐끗 돌아보니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거였다.
“뭘 생각해?”
“아니… 그냥 좀…”
“그냥 뭐?”
“별거 아니야.”
무지 심각한 얼굴로 별거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만은, 자기가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캐묻기도 뭐해서 그냥 신경 끊고 발걸음만 재촉했다.
그런데, 방에 도착해보니 무척이나 황당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크르르르…”
해민이는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뜨고 침대 위에 있었는데 평소의 반짝반짝 빛나는 예쁜 황금색 눈동자는 어디가고 살기가 가득 든 가늘어진데다 초점도 제대로맞지 않는 눈이 사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방에는 듀비와 비토는 물론 버지니아에 처음 보는 왠 중년 남자가 조심스레 해민이를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무슨 일이에요? 해민아?”
그들이 혹시나 해민이에게 위협이라도 가해 애가 저렇게 된 건 아닌가 싶어 그들 사이를 지나쳐 해민이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가까이 가기도 전에 해민이가 몸을 더욱 낮추며 나에게 살기를 드러내는 거였다.
“카오옹~!!”
“해민아?”
설마 나에게 이럴 줄은 몰랐는데, 여차하면 나에게 달려들 것 같은 해민이의 모습에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그때 방에 있던 중년 남자가 날 잡더니 반 강제적으로 방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거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 나왔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딱히 누구를 집어 물을 수 없어 방에 있던 이들을 향해서 묻자 나를 데리고 나왔던 중년 남자가 대답해줬다.
“큰 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네. 수인족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과정을 지금 겪는 것 뿐이니까.”
“예?”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되묻자 그제야 좀 더 자세한 설명이 돌아왔다.
“지금 수인족의 성년식을 치르는 거라네.”
“성년식이요?”
“그래. 수인족은 성년이 되는 날을 기해 한 며칠 정도 저런 상태가 된다네. 수인족들은 그걸 ‘각성의 시기’ 라고 부르는데 저 아이가 겪는게 바로 그거지.”
“그, 그런 겁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냥 내버려 두면 돼. 수인족들이야 어디 아무도 없는 동굴 같은 데에 혼자 가둬두고 정신 차리면 스스로 나오게 하지만, 여기서야 어디서 동굴을 구하겠는가? 그냥 방에 가둬 둬야지. 혼자 가만히 내비두면 자기가 알아서 정신 차릴 거야.”
“아… 그렇습니까?”
“아, 그리고 한가지 더 주의할 게 있는데 저 상태에서는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하거든. 그러니 정신 차릴 즈음 무척 배가 고플 걸세. 그러니 한 사을 뒤쯤에 방 문 앞에 먹을 것을 가져다 놓고 그걸 다 먹을때까지 가까이 가지 않도록 하게. 안 그러면덤벼들 수도 있거든.”
“예? 서, 설마요.”
“믿기 어려워? 갓 성년이 된 수인족의 50%가 ‘각성의 시기’를 끝내자마자 죽는다는 걸 알면 놀라겠군.”
중년 남자의 말에 나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서로 잡아먹는 건가요?”
“아하하하… 상상력이 참 대단하구만. 수인족이 아무리 피를 좋아하고 호전적인 종족이긴 하지만 같은 종족을 잡아먹지는 않는다네. 단지 막 성년이 되어 혈기가 마구넘치는데다 배까지 고파서 신경이 무척 날카로운 상태가 되기 때문에 작은 자극에도마구 공격을 하게 되는 거야. 사실 수인족들 사이에서는 서로 힘을 겨루는 건 흔히 있는 일이고, 그 일로 인해 다치거나 죽는 것도 다반사니 이상할 건 없는 일이지.”
“하아아…”
“그래서 주의하라는 거지 잡아먹힐까봐 그러는 게 아니야.”
“아하하… 예…”
“자, 그럼 해줄 말은 다 했으니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예에? 이렇게 도와주셨는데 무슨 사례라도…”
갑작스런 중년 남자의 말에 잭슨이 당황하며 입을 열자 그 남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뭘 바라고 온 것도 아니고, 단지 친한 녀석의 부탁을 받은 것 뿐이니 자네가사례할 필요는 없네. 게다가 말로만 듣던 ‘각성의 시기’를 겪는 수인족도 봤고 말이야. 뭐, 구경 당한 당사자야 무지 신경이 날카로워졌겠지만… 허허허… 그럼 난 이만…”
사람 좋게 웃으며 등을 돌려 걸어가는 남자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잭슨은 비토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 하는 사람이예요?”
“여기 정보 처리 부서에 속해 계시는 분이세요. 여러가지 아는게 많으신데, 특히나 이종족에 대해 잘 알고 계시죠.”
“헤에…”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거죠? 아무래도 다른 방을 찾아야 할 거 같은데.”
“그래야죠. 가까이 가지 말라는데 해민이 있는 방에서 같이 생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앗~!!”
버지니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하던 잭슨이 갑자기 비명을 질러 나는 화들짝놀랐다.
“왜? 왜그러는데?”
“짐! 우리 짐이 그 방에 있잖아!!”
“헉스…”
“어쩌지? 해민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다시 한번 들어갔다가 나올까?”
“위험할 겁니다. 아까 그 녀석이 우리를 향해 덤비려고 했던 것 좀 보세요. 문가에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그나마 나았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면 지체 없이 덮쳤을 걸요?”
토드의 말에 잭슨이 나를 돌아보았다.
“해인아, 네 정령술을 사용하면 안될까?”
“에… 그 방법 밖에 없는 거냐?”
그러자 버지니아가 끼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며칠만 버티지 그래? 어차피 사나흘 뒤면 저 애는 정신 차릴텐데. 그때까지 급하게 필요한 거라도 있어? 왠만한 거는 내 동생에게 빌려서 쓰면 될 테고,식사야 식당에서 하니까.”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게 하자. 그렇지 않아도 아까 사람들이 있어서 상태가 안 좋을텐데 거기다가 더 자극하고 싶지 않아. 듀비도 괜찮죠?”
내가 버지니아의 제안에 적극 찬성하며 잭슨과 듀비를 바라보자 그 둘도 딱히 나쁠 건 없었는지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뭐… 선심 한번 쓰지.”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럼 제가 빈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래 잭슨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연무장으로 가가 바빴고 밤 늦게 파김치가 된 몰골로 흐느적 거리며 돌아와 침대 위로 푹 고꾸라졌다.
식사도 조원들끼리 훈련이 끝나고 같이 했기 때문에 그와 얼굴 마주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명색이 잠입조 조장인 주제에 무지 한가했다.
작전 계획일이 일주일도 채 안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뭐, 그래도 아주 빈둥대고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첫날에는 건방진 조원 톰슨과 싱거가 찾아와 듀비의 실력을 알고싶네 어쩌네 하면서대련을 신청하기에 내가 듀비에게 가능하다면 죽지 않을 정도로 밟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랬더니만 듀비가 정말로 그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지 못할 만큼 목검을 몽둥이 삼아 두들겨 팬 것이 아닌가?
캬~ 그때 얼마나 시원하던지, 체한 것이 한꺼번에 쑥 내려간 기분이요, 며칠 동안 꽉 막혔던 코가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그들 둘은 의무실에서 사람이 나와 들것으로 싣고 데려가야 했다.
“캬아~ 듀비, 너무너무 잘 했어요. 듀비도 저 둘에게 쌓인게 많았나봐요?”
들것에 실려 연무장을 빠져 나가는 둘의 모습에 내가 너무 좋아하며 듀비에게 말을 걸자 그가 옅은 미소를 보이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그런 가닙니다. 저희 마을에서는 자신보다 실력이 낮은 자가 가르침을 청했을 때 저만큼의 가르침을 내려주는 것이 예의인지라 그에 따랐을 뿐입니다.”
“녜?”
“그러니 어른들께 가르침을 받으려 할때는 반 죽는 건 각오해야 합니다.더욱이 가르침을 받다가 다치는 건 치유술사들의 치유도 못 받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2, 3주는 꼼쩍 없이 누워 있어야 하죠.”
“허, 허걱… 진짜요? 그러다가 죽는 거 아니예요?”
내 두 눈이 휘둥그래지자 듀비의 미소가 진해졌다.
“정말 죽이려고 가르침을 내리는 어른은 없죠. 그냥 온 몸에 피멍이 들거나 뼈가 부러지는 정도입니다. 그 정도에 죽을 정도로 저희 종족이 약하지는 않답니다. 게다가한번 가르침을 받으면 얻는게 정말 많거든요. 각오하고 고르침을 받을 만 하죠.”
그렇게 말하는 듀비의 얼굴에는 종족에 대한 것인지, 자신에 대한 것인지 모를 자부심이 가득 했다.
“그, 그래요? 그렇다면 듀비도 그런 가르침을 받았나요?”
“후후, 당연히 받았었죠. 일년의 절반을 침대에서 살았던 적도 있었는 걸요?”
“허허… 그러면서 골병 안 들고 용케 지금까지 살아남았군요.”
“후후, 그 정도에 죽을 정도면 블루 엘프라고 할 수 없답니다.”
“그, 그런가요? 블루 엘프들은 정말 대단한가봐요.”
“어느 종족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게 듀비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의무실에 실려간 둘은 집중적인 치료를 받아 작전 실행일 이틀 전에야 간신히 정상적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우리 해민이가 드디어 ‘각성의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진정한 수인족으로써 거듭났다.
단지 며칠동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동안 급속한 성장이 이루어져서인지 나보다 반뼘은 작았던 해민이가 나보다 약간 더 커져 있었다.
손, 발은 나보다 한 마디씩은 더 길어졌고, 커트 정도의 길이었던 금발 고수머리도 어깨에 닿을 듯 말듯 길어져 꽁지머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신체가 커지자 덩달아 위까지도 커졌는지 해민이는 그가 나오기 전에 미리 준비해 방 문 밖에다 가져다 준 음식을 다 먹고도 배가 차지 않아 식당으로 가서 장정 3인분의 음식을 더 먹어 치웠다.
“엄청 먹는구나. 그렇게 배가 고팠어?”
같이 식당으로 가서 먹는 걸 지켜본 내가 놀랍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말을 건네자 식사를 다 끝내고 우아하게 냅킨으로 입가를 닦던 해민이가 씨익 웃으면서 대꾸하는 거였다.
“당연하죠. 며칠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는걸요?”
“허거걱…”
막 20대에 들어선 남자 같은,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러고보니 수인족은 성년이 되면 인간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듣기는 했다.
그러나 들어서 알고 있는 것 하고 실제로 접하게 된 것하고 어디 같겠는가?
머리로는 언젠가 해민이와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해민이가 말하는 걸 보게 되니 어쩐지 해민이가 낯설게 느껴졌다.
뭐랄까… 아직 결혼은 커녕 연애 한번 못해본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어쩐지 어린애였던 자식이 갑자기 어린이 되어 나타난 걸 보는 심정이랄까?
이런 미묘하고 심숭생숭한 마음에 말을 못하고 가만히 있자 해민이가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많이 이상해요?”
그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꾸해줬다.
“하아… 왠지 아들 녀석이 갑자기 여자 한명을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걸 듣고 있는 듯한 심정이야.”
그러자 같이 와줘서 내 말을 듣고 있던 버지니아가 깔깔 웃으면서 내 등짝을 때렸다.
“쬐끄만 녀석이 하는 말 하고는… 호호호, 너 그렇게 애늙은이처럼 굴면 여자애들에게 인기 없다고.”
“하, 하아아…”
‘여자애들에게 인기라니… 그런 건 이쪽에서 사양하고 싶은 거라구…’
우리는 해민이가 성년이 된 걸 기념하여 조촐한 파티를 하기로 했다.
비록 잭슨은 바빠서 참여할 수가 없었지만, 두 조원을 의무실로 실려가게 하는 바람에 더욱 더 한가해진 나하고 듀비, 버지니아와 비토 남매, 그리고 해민이를 살펴봐준 중년 남자까지 불렀다.
장소는 해민이가 각성의 시기를 보낸 넓직한 4인실 방, 음식은 비토가 준비해주었고, 나는 버지니아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나가 해민이에게 줄 멋진 옷을 샀다.
해민이의 몸이 커지는 바람에 전에 가지고 있던 옷들이 안 맞아던 것이다.
뭐, 듀비나 잭슨, 아니면 비토의 옷을 빌릴 수도 있지만, 새로이 성년이 되었는데 남의 옷만 빌려 입힐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자금도 여유로워 나는 기분 좋게 지갑을 열었다.
“자, 해민이가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파티는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그날 저녁 당장에 열렸다.
어차피 시간이 많은 사람들만 있었던 터라 준비하는데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뭘 거창하게 차린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단지 축하 케잌이랑, 해민이가 좋아하는 새끼 돼지 통구이를 비롯한 몇몇의 음식, 그리고 어른들이 마실 맥주랑 내 차지인 음료수 정도였다.
그런데 해민이 녀석이 건배하는 걸 보더니 자신도 맥주를 마시겠다고 나서는 거였다.
그래 당연히 나는 반대를 했다.
“안돼!”
그랬더니 요 녀석이 컸다고 반항하는 거였다.
“왜요? 저도 이제 다 컸다구요.”
“그래도 안돼.”
“안돼는 이유가 뭔데요?”
‘허걱…’
이 녀석이 머리가 굵어졌다고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려고 했다.
그리고 참으로 안타깝게도 나는 논리적으로 안돼는 이유를 설명할 껀덕지가 없었다.
“에… 그러니까 많이 마시면 안 좋으니까 그러지.”
“그럼 적당히만 마시면 돼죠?”
내가 버벅거리자 요녀석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얄밉게 대답하는 거였다.
“뭐? 아니.. 그게…”
그래 내가 못 마시게 하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려는데 정말 정말 얄밉게도 주변 사람들이 해민이를 응원하는게 아닌가?
“뭐 어때? 이제 성년이잖아.”
“그래요, 그래요. 자자, 해민아 한잔 하거라. 성년이 된 걸 축하한다.”
비토는 아예 잔을 해민이 손에 쥐어주고 맥주까지 가득 따라주는게 아닌가?
“아니 이 사람들이 정말~!!”
내가 매섭게 주위 사람들을 노려보며 경고조로 말했지만, 허망하게도… 아무도 내 말에 신경쓰지 않는 거였다.
게다가 해민이도…
“조금만 마실께요. 그럼 괜찮죠?”
라고 말하며 냉큼 맥주를 마셔버리는게 아닌가?
‘크흐흐흐… 벌써 다 컸다고 내 말을 안 듣다니…. 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소용 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야아아~ 내 귀여운 해민이가, 해민이가아아~~’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나도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해민이는 신체적으로도 성장했지만, 정신적으로도 성장했다.
문제는… 정신적으로 성장했다고 무조건 좋게만 볼 수 없다는 거겠지만 말이다.
전에는 항상 내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매사에 조심스러우며 방어적인 성격이었는데, 이제는 다 컸다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뭐,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지만, 혈기까지 같이 넘쳐서 녀석의 행동 하나 하나가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하다는게 문제였다.
더군다나 이 곳 지부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안 좋게 대하는데, 성년이 된 해민이는 그런 걸 못 참아 대놓고 으르렁 거리는 거였다.
그럴때는… 사실 조금은 속이 시원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무조건적으로 화를 내며 정면으로 대응하는게 옳다고는 볼 수 없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그게 또 수인족의 방식이라니 – 마음에 안 들면 싸움을 걸며 무조건 승자가 옳은 것 –
어쩌겠는가?
오히려 지금은 해민이가 으르렁 거리면 지부쪽 사람들이 슬슬 피하는 형편이라 전보다 수월하게 지낼 수 있기는 하지만 왠지 마음 한편이 불안한 것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가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아… 이런게 자식을 키우는 기분인가 봐.”
그러는 동안 시간은 착실히 흘러 작전 결행일은 하루하루 다가왔다.
경매가 열리는 그 저택의 도면을 머리속에 기억시키고, 퇴로로 지정된 거리를 직접 찾아가
눈으로 확인하는 등등의 잡다하지만 꼭 필요한 일들을 하다보니 나는 네개의 조 중 가장 한가한
조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 와중 얼결에 맏게 되었지만 그래도 의무는 다하고자 내 머리 속에도 잠입할 방법이 착착
세워졌다.
그래봤자 손님으로 잠입한다는 계획 테두리나 준비는 다 지부에서 해줬지만, 세세하게 다듬는
것도 중요한게 아니겠는가?
“여장을 해야겠어요.”
“에?”
내 선언이 갑작스러웠음인지 그동안 나와 몰려다닌 일행들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게 편할 거 같아요. 아무리 위세당당한 기사들을 데리고 있다해도, 여자면 으례 조금은 안심
하잖아요. 게다가 노예를 사러 다니는 어린 귀족 여자라면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어린애라
여길테니 경계까지 늦춰지겠지요. 얼굴을 가리고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그런
자들이야말로 경계 대상의 일위이지 않겠어요? 임무를 완수하려면 경계 대상이 되는 건 피하는
게 좋겠죠.”
“흐음,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일리는 있네. 게다가 해인이는 얼굴이 곱게 생겨서 여장이
잘 어울릴 거야. 아, 그래. 내가 여장하는 거 도와줄까?”
버지니아가 눈을 반짝이며 제안하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우신 말씀. 사실 제가 부탁을 드릴 생각이었어요.”
“호호호, 넌 아주 훌륭한 코디를 만난 거라구. 기대해 내가 아주 예쁘게 꾸며줄게.”
“아하하… 예, 잘 부탁 드려요.”
버지니아가 너무 좋아하며 말하자 조금 불안했지만, 여기서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처음에는 그녀에게 이런 계획에 대해 말할 엄두도 못 냈었다.
처음 상회에 가입했을 때 상회 안에는 이런 일에 대해 알고있는 이들과 그냥 단순히 운송
상회인 줄 아는 이들로 나뉘어 있다고 들었기에, 버지니아가 어느쪽인지 모르니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참 어이없게도, 그녀는 내가 잠입조 조장이 된 걸 이미 알고 있었고 며칠동안 친하게
지낸 것도 인연이라고 날 걱정해 주었던 것이다.
그녀도 지부 쪽에서 나를 희생양으로 세운 거라고 엄청 흥분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를 – 그 대목이 쬐께 허망했지만… – 그런 자리에 밀어 세울 수 있느냐는
거였다.
잘하다가는 지부장에게 쳐들어 갈것만 같아 – 이미 그럴려고 했다가 여러 사람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무산되었다는 건 나중에 안 일이었다. – 내가 죽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있게 말해 흥분
을 가라앉히기는 했지만…
이것도 나중에 같이 안 사실인데, 버지니아와 비토 남매의 실력이 높아 그들이 유명해지기
전에는 이런 일에 항상 참여했었고 지금도 가끔 다른 지방 지부에 지원을 나가기도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번에 너무 실력자들이 모자라 두 남매를 참여시키는 걸 심각하게 고려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본부에서 우리를 보내주겠다고 해서 그 안건이 철회 된거라나?
“머리는 어쩔거야? 솔직히 그 예쁜 머리카락을 그대로 이용했으면 좋겠지만, 흔한색이 아니
라서 위험하겠지? 게다가 귀족 여자치고는 너무 짧아.”
“그렇죠? 그래서 가발을 썼으면 하는데요. 그리고 눈 색도 바꾸었으면 좋겠어요.”
“흐음, 그래야지. 아, 가면도 쓸래?”
“좋죠.”
“그럼 은발 머리에 은색 가면은 어때? 무척 신비스러울 거야. 거기에 머리 장식이랑 귀걸이
목걸이도 다이아몬드에 은으로… 아니, 아니다. 빵빵한 귀족 아가씨가 은장식을 한다는 건
말이 안돼니까, 백금으로 하자. 장식은 백금 한세트로 통일하고, 드레스에 구두까지도 같은
계통의 색으로 차려입는 거야.”
“에에? 그러면 너무 화려한데… 눈에 띄지 않을까요? 저는 그냥 단순하게 검은색 드레스로
하려고 했는데요.”
“노, 노. 안돼지. 그런데는 수수한게 오히려 눈에 튄다고. 화려하게 꾸며야 오히려 그런 쪽 부류
로 보일꺼야. 기사들도 가문의 문장은 없지만 삐까번쩍한 갑옷과 고급 망토를 걸쳐야겠지.”
검지 손가락을 내 코앞까지 들어올려 좌우로 흔들면서 좔좔좔 내뱉는 버지니아의 모습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평소 그녀가 몸매의 아름다움은 잘 살리면서 야하지는 않고 세련되게 입고 다닌다 생각 했더니
만, 이런데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자자, 그럼 대충 정해졌으니 의상을 구해볼까나? 이런 것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나도 덩달아 일어나며 물었다.
“저도 도와드릴까요?”
“아냐, 네가 돌아다니며 옷을 산다면 그쪽 사람들 눈에 뜨일지도 몰라. 그럼 안돼지. 특히나 너는
눈에 쉽게 뜨이고 잘 기억되는 타입이거든.”
그녀의 말에 나는 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입을 열었다.
“제 머리카락 때문에요?”
내 머리카락 색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나 단 둘 뿐이라는 걸 잘 알기에 이곳에서 외출할 때는
항상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릴 수 있도록 챙 넓은 모자를 깊숙히 눌러
쓴 채 다니곤 했었던 것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너에게는 독특한 매력이 있어서, 외모가 아니라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너는 그냥 여기있어. 나는 잘 다니던 이들이 있으니까 그들이랑 가면돼.”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한가지 걱정이 떠올랐다.
“저기, 그런데… 버지니아가 산 옷을 제가 입고 나타나면 당신과 관련이 있다는게 들통나지
않겠어요?”
나는 무지 진지하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크게 웃어보였다.
“오호호호~ 걱정할 거 없어. 나랑 같이 쇼핑하는 사람들도 네가 입을 전체 코디는 절대 모를
테니 말야. 나만 꽉 믿고 있으라고.”
그러면서 나에게 한쪽 눈을 찡끗해 보이는 거였다.
너무 자신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더이상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렇습니까? 그럼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변장 문제가 해결되어 만사가 다 해결 되었다고 안도하고 있었건만, 또 다른 문제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절대 싫습니다.”
“하아~ 정말… 이번 한번 뿐이라고 했잖아, 응? 이번 따악 한번마안~!”
“싫습니다.”
“자꾸 그렇게 고집 피울거야? 그럼 이번 작전에 빠질 생각이란 말이지?”
“그, 그건…”
“그러니까아~ 응? 평소에는 이런거 절대로 안 시키잖아.”
“왜 하필 저만 그래야 합니까? 저도 기사처럼 꾸미고 가겠습니다.”
“나도 가능하면 그렇게 해주고 싶지만, 이미 설명했다시피 같이 갈 수 있는 인원수가 정해져
있으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다른 한 사람을 줄이면 되잖습니까?”
“히유… 자꾸 억지 부릴 거야? 그렇지 않아도 인원이 적어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되는 구만, 꼭 인원수를 줄여야 하겠여?”
그랬다.
문제는 해민이였다.
앞서 지부쪽에서 계획한대로 나는 신분을 밝히기 싫어하는 어느 돈 많은 상인 혹은 귀족가의
자제로, 그리고 듀비와 지부에서 지원해준 톰슨과 싱거는 날 호위하는 기사로, 그리고 해민이는
다른데서 구입한 수인족 노예로 하기로 되어있었다.
물론, 이게 해민이의 의사도 묻지않고 일방적으로 결정된데다 해민이의 역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거였지만, 인원을 한명이라도 더 채우려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었다해도 해민이에게 못할 짓을 하긴 한거지만…’
나는 찔리는 양심에 속으로 부터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하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누…’
그렇다고 고집 부리는 해민이를 작전에서 빼놓기는 너무 아까웠다.
성년으로 성장한 해민이의 능력이 얼마나 상승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해민이의 능력으로도 톰슨이나 싱거의 실력을 윗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톰슨이나 싱거를 다른 조로 넘기고 해민이는 그가 원하는 대로 기사로 분장
시켜 데리고 갈까 했는데, 톰슨과 싱거가 자신들을 떼어놓으려면 차라리 둘 다 안하겠다고
강짜로 버티는 거였다.
참, 내 기가 막혀서…
그래서 그럼 차라리 그러라고 했더니만 클리프가 와서는 기껏 보내준 실력자를 왜 다시 제하
려고 그러냐고 펄펄 뛰는 거였다.
아직 어려서 경험이 없다지만 그렇게 생각이 없느냐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자신네 지부에서 보내
준 이들을 다 보내는 건 우리 지부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까지 하는 거였다.
그래서 느낀 거지만… 남의 지부에 지원 나와서 조장까지 한다는 건, 정말 못해먹을 짓이었다.
그렇다고 듀비를 떼어 놓는다는 건 생각도 못하겠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해민이가 어렵겠지
만 이번 한번만 눈을 딱 감고 해준다면 다 해결이 될 듯 했는데… 저렇게 필사적으로 싫어하니
한숨만 푹푹 나올 뿐이었다.
“아하… 어쩔 수 없지. 그럼 이번 작전에서는 아쉽지만 해민이를 빼고…”
그러자 해민이가 무지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어떻게…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에휴휴휴~ 해민아… 나도 너를 꼬오옥 데리고 가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잖니. 내 마음만
강요해서 네가 무지무지 하기 싫은 차림을 시키는 것도 차마 못할 짓이니…”
그러자 해민이의 입이 댓발 튀어나왔지만, 자신도 할 말은 없었는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래 나는 결국 해민이는 참여시키지 않는 걸로 결정을 내리고 힘없이 그걸 다른 조원들에게
– 그래봤자 세명이지만… – 알리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해민이가 나를 불렀다.
“잠깐만요.”
“응?”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해민이를 바라보니, 해민이는 몇번이나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이를
빠득 빠득 갈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얼굴은… 가릴 수 있는거죠?”
그 순간 나는 너무 기뻐서 해민이에게 달려들어 녀석을 얼싸안고 부비부비 댔다.
“어흐흐흐~ 그럼, 그럼. 그 정도는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에고, 예쁜 녀서어억~~
고마워, 고마워어어~~.”
정말… 힘들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나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버지니아의 손에 이끌려 몸단장을 해야 했다.
불쌍한 해민이는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는 표식을 팔목에 차고 후드 달린, 땅에 끌릴 정도로 긴 망토를 둘러 머리부터 발 끝가지 가렸다.
그리고 듀비는 머리카락으로 귀를 덮고 그 위에 넓적한 띠를 둘러 길고 뾰족한 귀를가렸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피부에는 진한 갈색의 향료를 발라 인간 같지 않은 파르스름한 피부를 가렸다.
그러니까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색을 가진 늠름한 인간의 기사처럼 보이는 거였다.
그리고 나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의 연한 금발의 가발을 쓰고 눈은 이미지마법으로 밝은 청록색이 되었다.
얼굴에는 눈 주위와 콧등을 가리는 은색의 광택이 나는 가면을 썼고, 머리는 반 묶음 식으로 틀어 올려 높은 곳에서 묶어 교묘하게 옆 얼굴을 가리도록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게 하고는 다이아몬드와 자수정으로 꾸며진, 자그마한 왕관 모양의 머리장식으로 고정시켰다.
거기에 몸에 두른 것은 연한 보리빛의, 보기에도 엄청 거추장스러운 드레스였다.
상체와 엉덩이 부분까지는 연보라색이고 치마 아랫단으로 내려갈 수록 색이 흐려져 종아리 부분 부터는 아이보리색으로 변해버렸는데, 드레스 전체에는 자잘한 다이아몬드들이 드문드문 매달려 있어 움직일때마다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목 주위는 넓게 파여 목이 날씬하고 길게 보이도록 했으며, 그 주위는 굵은 레이스 처리로 되어 있었고, 어깨는 마치 새가 양 날개를 펼친 것과 같은 모양새였으면, 소매는 팔꿈치를 덮었다.
거기에 치마자락은 엄청나게 길고 풍성해서 치마 속에 애들 한 두명은 쉽게 숨길 수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 허리에 마치 스카프 처럼 보랏빛 천을 덧대어 둘렀다.
그리고 전혀 보일 것 같지 않은 발에는 흰색 가죽으로 만들어져 진주로 장식된 화려한 하이힐이 신겨졌다.
“꺄아~ 내가 한 거지만 너 정말 예쁘다.”
화잘발로 인하여 뺨은 발그레하고 입술은 분홍빛으로 촉촉하게 빛났다.
하이힐 때문에 불편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전신 거울을 바라보던 나는 흐믓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버지니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엄청 예쁘기는 한데… 처음에 말하던 것과는 많이 다르네요. 그때는 흰색 일색이 될 줄 알았는데…”
“호호호, 그게 말이지 쇼핑을 하다보니 생각지 못했던 에쁜 것들이 너무 많더라고. 그래서 생각을 바꿨지. 마음에 안 드니?”
“설마요.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기는 뭣하지만 이렇게 꾸미니 저도 엄청 미인으로 보이네요.”
“오호호호~~ 나도 같은 생각이야. 자 마무리를 하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남정네들에게 가 보자고.”
그러면서 버지니아가 건네주는, 팔뚝 중간까지 올라오는 흰색 실크 장갑을 끼고 밖으로 나가니 기다리고 있던 세 남자 – 해민이는 시커먼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었기에 눈이 안 보였다. -의 눈이 휘둥그레 떠져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버지니아는 무지 만족스러워 했다.
“호호호, 어때요? 누가 봐도 있는 집안의 영애지요? 아아, 생각 같아선 귀족 사교계에 내놓고 싶다니까요. 해인아, 혹시 그럴 생각 있니?”
“아하하하… 별로요…”
“웅… 아쉽네.”
“자, 서둘러 주십시요. 여기서 지체하다가는 경매 시간에 늦을 것입니다.”
버지니아는 몇 마디 더 하고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싱거의 재촉에 다른 말은 못하고 마지막으로 치마자락을 정리해 주면서 나에게 속삭였다.
“임무를 무리해서 꼭 성공시키려 하지 말고 무사히 돌아 올 생각이나 해. 네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 해도 여기서 널 탓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예, 명심할게요.”
건물 밖으로 나가니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부는 물론 상회 사람이었다.
“부디 몸 조심해.”
걱정이 가득 담긴 버지니아의 표정에 나는 생긋 웃어줬다.
“걱정 마세요. 무사히 돌아올테니까요.”
나와 해민이, 듀비가 마차에 오르자 문이 닫혔고 – 톰슨과 싱거는 말을 타고 동행하기로 해다. – 곧 마부의 ‘이럇!’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다그닥, 다그닥~
경쾌한 말 발굽 소리를 들으며 마차 안의 세명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치 007을 생각나게 하는 이런 일을 처음 맡았기에 다들 긴장과 흥분으로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거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만은, 마차 안에서 초긴장 하고 있는 것은 나 뿐이었다.
불안해 하는 것도 긴장의 연속으로 봐준다면 말이다.
그 이유가 앞으로 해야 하 일때문이 아니라 바로 옆 해인이 때문이라는 것이 좀 허망하지만, 곧 있을 작전은 마차 안에 있던 우리들에게는 있으면 있으려니… 하는 그저 무덤덤한 일이 되어 있었다.
원래 말이 별로 없던 듀비는 인간 기사로의 분장이 어색한 듯 가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갑옷을 만지작 거릴 뿐, 예의 무덤덤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고, 해민이는 처음부터 자신의 배역에 불만이 많았던 터라 마차 안에서도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숙히 눌러쓰고 팔짱까지 떠억 낀 채 ‘나 지금 엄청 기분이 저조하오’ 란 메시지가 가득 담긴 오라를 풀풀 풍기며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괜히 그에게 미안해서 말을 걸지도 못한 채 혼자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전 같으면 해민이가 화 났을 때 꼭 껴안고 부지부지 하면 조금후에 모르는 척 풀어져서 헤헤 웃어주고는 했는데, 이제는 다 컸다고 그 방법이 안 통했다.
하긴, 자신이 먼저 매달려 오는 일도 없어졌으니 부비부비 전법이 안 통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하아, 애가 성장해서 늠름해진 건 좋은데 귀여운 맛이 사라졌어. 흑흑, 내 귀여운 해민이를 돌리도…’
수인족은 성년이 되면 그 즉시 부모와 떨어져 한 명의 당당한 수인족으로써 살아간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런 해민이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성인이 되어도 부모와 쉽사리 단절 하지 못하는 인간들 틈에서 자라온 나로써는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변해버린 해민이의 모습이 당혹스럽고 섭섭하게도 느껴졌다.
이제 해민이는 나와 듀비가 붙어 있어도 질투하지 않고 그저 무덤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해민이를 볼때마다 왠지 나는 이제 해민이에게 필요 없어진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되게 씁쓸했다.
하긴, 나는 해민이에게 ‘주인’이 아닌 ‘보호자’였으니 말이다.
“에휴…”
그런 일련의 생각들이 떠오르자 내 입에서는 다시금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창 밖을 바라보던 듀비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요즘들어 한숨을 많이 쉬시는 군요.”
“에? 아하하… 그러네요. 나도 모르게 그만… 후우…”
나는 애써 밝게 대답하려 했지만, 점점 기운이 빠지더니 마지막에는 다시금 한숨이 푸욱 하고 새어나왔다.
“이번 일이 걱정 되십니까?”
“아… 그것도 있고.. 다른 일도 있고요.”
솔직히 이번 일이 그렇게 크게 어렵게 생각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식은 죽 먹기 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저는 이번 일을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 잘 될테니 걱정 마십시오.”
듀비의 위로에 나는 빙긋 웃었다.
“그래요. 그래야겠죠. 하지만 너무 안심하고 있어도 안 될 것 같아요. 상식적으로 볼때 저희가 뛰어들 곳은 무척 위험한 곳이거든요.”
“괜찮을 겁니다. 만약…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제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해인님은 꼭 지켜드릴테니까요.”
“쿡…”
이건 절대 내가 웃은 게 아니다.
나는 듀비의 말이 너무 고맙다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 보다도 먼저 해민이가 입을 열어버린 것이다.
“쿡쿡…”
지금까지 답답하지도 않은지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뒤로 넘기면서 얼굴을 드러낸 해민이는 조롱이 가득 담긴 어조로 이죽거렸다.
“쿡쿡쿡, 여차하면 목숨을 바쳐 지켜드리겠다고? 키득키득, 우습군… 지금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거지?”
수인족의 습성 중 한가지는 부모나 자신이 인정한 자 외에는 절대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게 아무리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수인족의 특성상 인정한다는 건 자신보다 강하다는 거고, 서열도 그렇게 정해진다고한다.
그런 이유로 이 곳에서 해민이의 존대를 받는 이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뭐, 나야 해민이보다 강해서 존대를 받는다기 보다는 얼결에 보호자였으니 받는 거였지만…
본부에 돌아가면 생길지 모르지만, 여하튼 지금은 그랬다.
듀비조차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 하긴, 내가 뭘 알겠는가만은… 어쨌든 – 듀비 정도면 해민이의 인정을 받을 만도 한 것 같은데 말이다.
특히나 해민이는 듀비의 실력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년이 되기 전에는 툭하면 듀비에게 싸움을 걸어 그에게 지던 해민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해민이는 말을 할 수 있자마자 듀비에게 하대를 했다.
뭐, 듀비야 해민이가 하대를 하던 존대를 하던 별로 상관하지 않는 눈치였고, 해민이도 성년이 된 뒤 듀비에게 일부러 싸움을 걸지 않아 아직까지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있어 내심 다행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필 지금 해민이가 ‘열받던 차에 잘됐다’는 식으로 나오자 나는 심장이 벌렁 거렸다.
‘왜 하필 지금인거야아아~~!!’
하지만, 놀랍게도 듀비는 그런 이죽거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썹 하나 까딱하지않은 채 해민이를 직시 했다.
“그렇군, 너도 있었군. 너도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헉, 듀비에게 이적거림을 받아 칠 능력이 있었단 말인가?’
그러자 반대로 해민이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뭣이라? 조, 조금? 이게 지금 누구에게…”
이까지 빠드득 갈며 불끈 쥐어진 주먹에서 전에 봤던 것 보다 더 굵고 긴 손톱이 튀어 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내 심장도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줄 알았다.
까딱 잘못하다간 경매가 벌어지는 저택에 도착 하기도 전에 마차 안에서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난 황급히 해민이를 말리려고 했다.
허나,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 그리고 해민이가 채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먼저듀비가 입을 열었다.
“뭐냐, 애송이. 설마 이제 갓 성년이 된 네 녀석 주제에 자신은 애송이가 아니며 이번 작전에서 나 보다도 더 해인님께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의 표정은 ‘감히 네까짓게…’ 라고 말하고 있는 듯 엄청 거만하고 오만해 보였는데, 듀비의 그런 모습은 색다른 멋으로 다가왔다.
‘오호, 저 표정도 제법 잘… 헉, 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 듀비의 얼굴을 보고 감상할 때가…’
나도 예쁘고, 아름답고, 멋있고, 잘 생긴 것에 시선이 쏠리는 보통 인간인지라 듀비의 색다른 멋있는 모습에 잠시나마 빠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눈보라가 날리는 것만 같은 살벌한 주위 분위기 덕에 잽싸게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애, 애송이? 지금 그거 나에게 하는 소리냐?”
해민이는 이제 완전히 변이하여 살기까지 흩뿌리고 있었다.
그래 나는 조마조마해 질식 할 것만 같았구만, 듀비는 여전히 태연자약 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으득… 오냐, 다시는 그 입을 놀리지 못하게 해주마.”
듀비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민이는 순식간에 한 손으로 듀비의 멱살을 거머쥐고 손톱이 길게 빠져 나온 다른 한 손은 허공으로 치켜 올렸다.
“해민아!!”
너무 위험 수위에 다다른 해민이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 정령들을 불러내서라도 그를 막으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전에 듀비가 해민이의 어깨 너머로 날 바라보며 눈짓으로 만류하는 거였다.
내가 잘못 봤나 싶었지만, 그와 함께 해민이의 옆구리 옆으로 빠져나온 듀비의 손은가만히 좌우로 저어지고 있었다.
그에 나는 황급히 일으키던 몸을 주춤거리며 다시 앉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듀비는 다시 해민이에게 시선을 돌려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증명해 봐라.”
“뭐?”
듀비의 뜬금 없는 말에 당장이라도 내려칠 것 같았던 해민이의 손이 멈칫 거렸다.
그 틈을 타서 듀비가 다시 한번 더 입을 열었다.
“네가 애송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번 작전에서 나 보다도 더 도움이 될 거라는걸 내게 증명해 보이란 말이다.”
“무슨 헛소리야? 그런 내가 여기서 네 놈의 멱을 따면 다 증명이 될텐데…”
해민이는 듀비의 말이 당혹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듀비의 멱살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러나 듀비는 여전히 오만하게 해민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이제는 그의 입가에 진한 비웃음까지 매달렸다.
“지금? 여기서? 훗, 네놈은 그래서 내게 애송이란 소리를 듣는 거다.”
“무슨 헛소리야?”
해민이가 이제는 듀비의 멱살을 양 손으로 붙잡고 그를 거의 들다시피 하여 듀비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대며 으르렁 거렸지만, 듀비는 여전히 눈썹 하나까딱하지 않았다.
“쯧쯧, 그것 까지 설명해 줘야 한단 말이냐? 이래서 애송이들이란…”
“죽여버리겠어!!”
듀비의 비웃는 말에 해민이는 그대로 그의 목줄기를 물어 뜯으려는 양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바로 직전에 듀비의 멱살을 잡은 해민이의 양 손은 듀비의 양 손에 살포시 덮이더니(?) 그대로 해민이의 몸통과 함께 옆으로 비틀려 넘어졌다.
그러니까 듀비가 해민이의 양 손을 붙잡자마자 그의 손목을 비틀어 넘어뜨리자 해민이의 몸통까지 마치 도미노가 쓰러지는 것 처럼 같이 쓰러지는 거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자 해민이는 듀비에게 거의 눌리다시피 제압 당해 마차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제기랄~!! 이거 못 놔? 이거 놓으란 말야, 이 자식아!!”
그러나 듀비는 친절하게 해민이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그가 잡고 있던 해민이의 손목을 조금 더 사알짝 비틀어줬다.
“정말, 요즘 애송이들은 너무 무례하다니까.”
“아윽!”
순식간에 해민이의 인상이 오만상으로 찡그려지는 걸 보면 무지 아픈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존심이 있는지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를 삼키는 거였다.
“호오,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는 이건가? 그래봤자, 넌 지금 나에게 제압당해 바닥에쓰러져 있잖아, 애.송.이.씨.
“빠드득…”
해민이의 이 가는 소리가 너무 살벌하게 마차 안에 울려 펴져 나 조차 흠칫할 정도였지만, 듀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걸 보며 듀비의 간이 얼마나 큰지 한번 해부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듀비의 설교는 계속 되었다.
“내가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걸로 착각했다면, 넌 그야말로 애송이 중 애송이다.지금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다는 걸 모르는 거냐? 잠시 후면 아주 중요한 작전을 실행해야 한단 말이다. 그런데 한 순간의 감정으로 인해 그걸 다 망치려고 해? 그래서 넌 애송이라는거다. 내 말이 불만이라면 네 스스로 이번 작전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잘 협조해서 네가 당당한 수인족이라는 걸 증명해 봐라.”
해민이의 귀에다 아예 입을 가져다 대고 조용 조용하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속삭인 듀비는 그쯤 하고 해민이를 풀어줬다.
그에 나는 다시 해민이가 듀비에게 덤벼드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 했지만, 다행이도 듀비의 설교가 먹해 들었는지 해민이는 듀비를 죽일 듯이 노려볼 뿐 그낭 비틀린 손목을 어루만지면서 자신의 자리에 앉는 거였다.
그런 모습에 듀비에게 경탄이 일기도 하고 해민이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우선은 이 상황이 잘 마무리 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해민이가 만지고 있는 손목을 바라보았다.
듀비가 얼마나 강하게 쥐고 있었는지 벌써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많이 아파? 찬 물좀 내줄까?”
그래 걱정이 되어 해민이에게 말을 건넸는데 해민이는 오히려 흠칫 하더니만 망토 속으로 자신의 손을 집어 넣어 가리는 거였다.
“괜찮아요. 별 거 아니예요.”
‘별게 아니긴…’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해민이의 자존심을 더 이상 건드리고 싶지 않은데다 듀비가 그냥 가만히 냅두라는 눈짓을 보내오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나중에 듀비에게 무사히 해결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으면서 말이다.
그 뒤 얼마지 않아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굵은 철창살들을 엮어서 만든 아치형의 우아하고 커다란 정문을 지나 엄청나게 넓은정원을 지나자 멋들어진 저택이 있었다.
저택 정문 앞에는 이미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손님들이 하나 둘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저택 안에서는 뒤이어 도착하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탄 마차가 저택 정문 앞에서 멈추고 싱거가 즉각 마차 문을 열고 날 에스코트하여 내리게 하자 대기하고 있던 한 남자가 다가왔다.
짙은 금발에 멋들어진 팔자 콧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였는데 흰 색 셔츠 위에 검정색정장을 입고 있어 마치 커다란 저택에 있는 집사를 연상시켰다.
“어서 오십시오, 아름다운 레이디. 저에게 당신께 인사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내 앞까지 다가온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이에 싱거가 긴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머리기름을 발라올백으로 넘긴 그 중년 남자의 머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이 이번 경매를 주최한다는 이 저택의 주인인가보죠?”
그러자 중년 남자는 굽혔던 허리를 피더니 미소를 띄었다.
“아닙니다, 레이디. 저는 그 분을 모시는 일개 보좌관에 불과 합니다.”
“보좌관이라고요? 실례지만 성함이…”
나는 일부러 당황한 척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물어보았다.
그에 나를 에스코트하느라 내 손을 받치고 있던 싱거의 팔이 긴장으로 인하여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도 싸악 무시했다.
보좌관이라는 남자는 송구스럽다는 듯 머리를 살짝 숙여보이며 내 질문에 답했다.
“저는 프랭클린이라고 합니다. 평민이라 성은 없으니 편하게 프랭이라 불러 주십시오.”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기가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노려봤다.
“뭐, 뭣이라? 평민? 감히, 감히 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네까짓게 뭐라고 나불대는것이냐!”
나의 갑작스런 반응에 내 일행들이 놀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정작 내 분노를 고스란히 받는 프랭클린은 태연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역시나…’
나 또한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놀라지는 않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다시 분노에 찬 외침을 터트렸다.
“이, 이 무례한 녀석 같으니라고! 가겠다. 이런 무례한 놈이 있는 곳에는 한시라도 있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정말 갈 것처럼 몸을 홱 돌리자 싱거와 톰슨의 입이 뜨억하며 벌어졌다.
그들은 돌발적인 내 행동을 제지하려 뭔가 하려고 했지만, 그 보다 한발 앞서 프랭클린이 내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척 꿇는 것이었다.
계속 도착하는 손님들이 다른 이들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며 힐끔힐끔 쳐다보았지만 그나 나나 상관하지 않았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하해와 같으신 너그러움으로…”
그러나 나는 매정하게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시끄럽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 썩 비키거라!”
“고귀하신 레이디, 부디 화를 풀어주십시오. 분노를 잠시만 가라앉히시고 경매에 참가해 주신다면 제 평생의 은인으로 알겠습니다.”
“네 따위의 은인은 되고 싶지도 않아!”
프랭클린의 간절한 부탁을 다시 한번 거절하자 싱거는 이마를 짚었고 톰슨은 더운지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속으로 웃고 있는데 프랭클린의 간절한 어조가 다시 들려왔다.
“경매를 구경하시기 위해 먼 곳에서 이곳까지 오신 게 아닙니ㅏ? 그냥 돌아가신다면제가 모시는 분이나 레이디께서나 무척 안타까우실겁니다. 그러나, 만약 레이디께서경매에 참여해 주신다면 제가 모시고 계신 분께서 이놈을 용서해 주신 레이디께 친히 감사의 인사를 드릴 것입니다.”
“이 경매의 주최자가?”
어차피 경매를 망치기 위해 온 것이였기에 나는 주최자가 누군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난다면 그가 엄청난 악인이 아니라면 좀 미안할 거 아니겠는가?
어차피 노예를 사고 파는 상인이 착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말 경매를 구경하기 위하여 온 철없는 귀족 아가씨라면 경매 주최자를 만나는데 흥미가 있을터였다.
같은 나라 사람이 아니라 오랜 인연이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 나는 속으로는 시큰둥 했지만, 겉으로는 약간 흥미가 있다는 듯 되물었다.
하지만 얼른 허락하지 않고 생각하는 척 뜸을 들이자 톰슨은 애가 탔는지 얼른 받아들이라는 눈짓을 눈알이 빠져라 열심히 보냈다.
현 상황이 아니라면 마구 웃어줬을테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속으로만 신나게 웃었다.
평소 톰슨이 나에게 괜찮게 보였으면 즉시 그 사인을 받아줬겠지만, 밉보이던 놈들 중 한 명이라 나는 거기에 더 뜸을 들여 톰슨과 싱거의 애간장이 다 타서 재가 되도록 만들어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사죄를 하니 용서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무지 감격스럽다는 듯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의 인사를 한 그는 벌떡 일어나 약간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말했다.
“추한 꼴을 보여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이제 경매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프랭클린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동안 내 뒤에서 – 아까 그 사건 이후로 싱거가 에스코트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 따라오는 두 남정내의 원망과 책망 섞인 시선을 받는 건 무지 재미있는 일이었다.
뭐, 잠시 후에 이 일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겠지만…
경매장에 가는 길은 생각외로 길었다.
나는 저택에서 한다고 해서 저택 안에 있는 파티 홀 같은 곳에서 하리라 예상을 했었다.
그러니 아무리 멀어봐야 저택의 종단 혹은 횡단, 거기에 좀더 보태 일, 이층 위의 거리일텐데 내가 걸어간 거리는 내가 예상한 최장거리보다 더 길었다.
분명히 저택 안으로 들어가 어떤 문을 지나자 길다란 복도가 나와 거기를 쭈우욱 걸어갔는데 90도 직각으로 꺾이거나 갈래길이 나온 건 아니었지만, 직선이 아니라 은근히 구부러진데다가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거였다.
경사가 무척 작아서 걸어가는 것만으로는 밑으로 내려간다는 걸 몰랐는데, 지하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땅의 정령들이 문득 문득 눈에 뜨이는 걸 보고 알아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알아챘다는 걸 겉으로 들어낼 수는 없어 묵묵히 중년 남자의 뒤를 따라가면서 예상한 것 보다 조금 더 주의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렇게 길다란 복도를 끝내자 활짝 열린 커다란 문이 나왔는데 그 안쪽이 바로 경매가 열리는 홀이었다.
날 안내한 중년 남자는 입구에서 나에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고, 나는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금단추가 달리고 테두리를 짙은 남색으로 마무리한 흰색 제복을 입은 다른 남자에게 인계되었다.
“입장권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정중한 요청에 나는 슬쩍 손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 답했고, 내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톰슨이 자신의 품에서 손바닥 만한 금색 카드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걸 본 제복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장섰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그 커다란 홀은 앞쪽에 넓은 단상이 있었고, 그걸 반원으로 둘러싼 형태로 손님들의좌석이 있었다.
그런데 그 좌석들은 마치 영화관처럼 뒤쪽으로 올 수록 점점 자리가 높아져 어디서든 단상이 잘 보이게끔 되어 있었다.
내 좌석은 약 10여개의 층을 이루는 좌석 중에서 중간 층에 있는 곳이었다.
같은 층에 있는 각각의 좌석들은 좀 멀리 떨어진데다가 2미터 정도 되어보이는 칸막이가 양 옆으로 쳐져 있고, 뒤쪽에는 두터운 천이 내려져 있어 옆에 누가 있는지 모르도록 설치되어 있었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니 동그란 작은 탁자가 있었고 그 주위로 무척 편안하고 우아한 소파가 자리하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장미 한 송이가 꽂힌 작은 꽃병이 있었고, 자그마한 금종이 그 옆에 놓여 있었다.
나를 안내한 제복맨은 탁자 위에 있는 금종을 가르키며 설명했다.
“뭔가 필요한 게 있으시면 이 종을 울리시면 됩니다. 그럼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올것입니다. 간단한 음료와 다과, 식사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주문하셔도 됩니다. 경매는 잠시 후에 시작될 것입니다.”
이 말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막힘 없이 줄줄이 읇던 제복맨은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필요하신게 있으신지요?”
“됐어요.”
내가 손짓하며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자 싱거가 얼른 준비하고 있던 은화를 제복맨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제복맨이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칸막이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싱거와 톰슨은 험악한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올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었지만 긴장되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뭔 일이냐는 시선으로 마주 봐주었다.
“설명을 들어야겠습니다. 아까 왜 그런 것입니까? 그러다가 그 놈이 사과를 안 했으면 우린 그냥 되돌아가야 했다고요!”
다른때라면 톰슨이 나에게 존대를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내가 이 팀의 팀장이었기에 그는 나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분노가 가득차 있었지만, 그래도 상황을 잊어버릴 만큼 그가 바보는 아니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무지 작았다.
그래 나도 그와 같은 크기의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화를 내지 않고 그에게 인사하는 것을 허락했다면 우리는 그 즉시 당장 의심을 받았을 겁니다. 저택 정문에서 그 남자가 그랬던 건 내가 진짜 귀족의 여식인지 아닌지 시험한 거였습니다. 그걸 모르시겠습니까?”
“예?”
어리벙벙한 톰슨의 얼굴을 향해 씨익 웃어준 나는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신분을 밝히지 않아도 된다 하나 아마 경매 주최측에서는 대충 이 곳에 들어오는 이들이 누구인지 짐작은 하고 있겠죠. 그러나, 갑자기 나타나 입장권을 산 내 신분은 모를테니 당연히 경계를 했을테죠. 그래서 정말 타국에서 온 귀족인지 아닌지 시험을 해본 겁니다.”
“그게 시험이었다고요? 그렇다면 왜 그의 인사를 받아줬다면 귀족이 아니라는 겁니까? 그는 분명히 귀족식 예법으로 인사를 했는데…”
싱거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어조로 물었다.
“맞아요. 분명히 그는 귀족식 예법으로 인사를 했죠. 그러나 귀족 입장에서 볼때 귀족의 레이디 에게 그런 인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기사의 작위 이상을 가진 사람 뿐입니다. 즉, 기사도 아닌 평민 이하는 그런 인사를 할 수 없죠. 그랬다간 오히려 귀족 모독죄로 당장에 끌려가 처형 당할테니까요.”
이렇게 설명했는데도 알아듣는 눈치들이 아니라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예법상으로는… 아, 그러니까 이론상으로는 말이죠 예의를 차리는데 그런거 구분은 안되 었지만, 귀족들에게는 그런게 있지 않습니까? 자신들과 평민은 다르다고 말이죠. 아까 그 남자의 인사 답례가 뭔지 아시겠지요? 레이디가 손을 내밀면 남자쪽에서 그 손등에 입을 댈 수 있죠. 귀족이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평민이 자신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 대는 걸 참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건 정말 귀족들 사이에서 지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제야 이해한 듯 두 남자가 작게 감탄사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왠만한 하급 기사들까지도 귀족 레이디에게는 그런 인사는 꿈도 못 꿉니다.그 남자도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내가 무례하다고 화를 내도 전혀 당황하는 눈치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게 시험이라는 것을 눈치 챘죠.”
“그런데 이상하군요. 우리는 귀족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어째서 우리가 귀족이라고 생각한 걸까요? 만약 그 남자의 인사를 그냥 받아줬다면 우리를 평민출신의 상인 집안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싱거의 질문에 나는 다시 한번 설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어야 했다.
“아니요. 그들은 처음에 우리가 신분을 숨기려고 했을때 이미 귀족이거나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이 곳에 잠입하려는 사람들이라고 예상했을 겁니다. 그러니 만약 인사를 받아들였다면 즉시
수상한 인물로 점찍었겠죠.”
“어째서죠?”
“만약 상인 집안의 여식이었다면 신분과 얼굴을 숨기지 않으려고 했을테니까요. 이 경매를 주최
하는 자는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커다란 상회를 가지고 있는 자.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언제 어느때라도 이익을 추구하려는 상인이 이 기회를 놓치려 하겠습니까? 신분을
숨기려는 자는 그러한 이익에 신경 쓸 필요없는 부자란 소리겠죠? 그런 자가 누구일까요?”
“귀족 이겠군요. 괜찮은 영지와 튼튼한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는… 그런 집안의 여식이라면
돈 쓰는 일만 알고 있을테죠?”
톰슨이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대답했다.
사실 평민이라면 부모 잘 만나 태어날때 부터 죽을때까지 노동이라는 걸 모르며 호위호식하다가
죽는 귀족이 마음에 들리 없었으니 말투가 곱지 않은게 쉽게 이해가 갔다.
“정답이예요. 그러면 이제 내 행동에 대한 설명이 되었나요?”
내가 씨익 웃으며 묻자 싱거와 톰슨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하긴, 애송이라고 여기던 녀석에게 한방, 그것도 제대로 얻어 맞았으니 기분 좋을리가 있나?
그 반대인 나는 무지 고소했지만 말이다.
톰슨은 얼굴을 굳히는 것으로 끝냈지만, 싱거는 뭐 씹은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리는 거였다.
‘아쭈구리… 그래, 너 잘났다. 어디 두고 보자구.’
내가 싱거의 모습에 속으로 이를 가는데 가만히 있던 듀비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옵니다.”
그러자 나와 같이 소파에 앉아 있던 해민이가 후다닥 일어나 내 뒤쪽으로 가서 서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톰슨과 싱거도 얼른 자세를 바로하고 표정도 근엄하게 바꿨다.
우리 주위의 좌석이 비어있어 그 자리의 주인이 온 것일지도 모르지만, 혹시나 모르는 일이었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우리에게 볼 일이 있는게 아니라 옆 좌석을 차지하러 온 거라면 이런 사적인(?) 대화도
위험했다.
아무리 칸막이가 쳐져 있고, 우리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방음이
안되는 이상 주의할 필요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쪽으로 다가오던 그 발자국 소리는 우리 좌석 뒤에서 멈췄고, 곧 간이벽에다 대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그에 톰슨이 좌석을 가리고 있는 천을 약간 들춰서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주인님께서 레이디를 뵈러 오셨습니다.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마 밖에 서 있는 자는 그의 시종이었던 듯 했다.
톰슨은 거의 형식적으로 나를 돌아보더니 내가 미처 뭐라 눈짓을 주기도 전에 다시 고개를 돌려
시종을 바라봤다.
“저희 레이디께서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언제?’
하지만 이런 황당한 내 기분과는 상관 없이 밖에서 감사의 인사가 들렸고 곧 천이 크게 젖혀지며
밝은 회색 정장을 입은 중년 남자가 시종을 대동한 채 들어왔다.
그에 나는 무지 못마땅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저에게 용무가 있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아름다우신 레이디. 좀 전에 제 보좌관이 크나큰 무례를 저질렀다 들었습니다.
수하를 잘못 다룬 점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 그러니까 당신이…”
내가 미처 말을 맺기도 전에 중년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바로 이 저택의 주인이자 이번 경매의 주최자입니다.”
그는 이 나라에서도 손꼽힐 만큼 커다란 상회를 가진 자 치고는 무척 평범하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
나이에 비해 흰 머리가 많아 회색으로도 보이는 반백의 머리에 보통의 키를 가진, 잘 차려 입은
점만을 빼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보통의 중년 남자였다.
큰 상회를 운영하는 사람다운 카리스마라던가 위엄이라던가, 아니면 무지 지혜로워보이는
매서운 눈길 같은 건 전혀 없어 이 사람이 정말 상회를 운영하는 사람이 맞나 의아할 정도였다.
나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 나도 마주 앉으면서 약간 당혹스럽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으음… 생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계시군요.”
내 말에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습니까? 하긴, 그런 말을 많이 듣는 편이죠.”
“귀족… 이신가요?”
“하하하, 아닙니다. 저는 평민 출신의 상인이죠. 저희 증조할아버지때부터 저희 집안은 대대로
상인의 길을 걸어왔답니다.”
“그러세요?”
나는 예의 바르게 대답하면서도 시큰둥한 기색을 슬쩍 내비치는 걸 잊지 않았다.
돈은 많지만 잘생긴 것도 아닌 평범한 중년 남자에게 부유한 귀족가의 여식이 무슨 흥미를
느끼겠는가?
그걸 알아차렸음인지 – 어쩌면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 그는 날씨 같은
무난한 몇가지 화제로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한번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는 경매 시작을 핑계로
금방 돌아가버렸고, 나도 당연하겠지만 잡지 않았다.
“저 사람이 정말 노예매매상이예요? 전혀 그렇게 생기지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도 이종족들을 강제로 납치해 팔아 넘기는 악당으로 생각되어지지
않아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묻자 싱거가 투덜거리는 어조로 대꾸했다.
“아니, 노예매매상은 뭐 이마에 ‘노예매매상인’이라고 써붙이고 다닌답니까? 저 놈이 맞아요.”
“그래도… 악당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원래 멀쩡한 놈들이 더 나쁜 악당인 법이라고요.”
싱거의 퉁명스런 대답에, 나는 정말로 진지하고 순진하게 대답했다.
“에… 그럼 내가 악당인가?”
그에 잠시 주위가 얼어붙었지만, 미리 예상했던 거라 나는 미소 짓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던 터라 나 조차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해인님은 절대 악당이 아닙니다.”
“아.하.하… 고마워요 듀비.”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린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자 싱거가 못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획 돌리며 씹어 내뱉듯 입을 열었다.
“우린 놀러온 게 아닙니다. 임무에 집중해 주십시오.”
그 뒤 좌석쪽 천장에 배치된 모든 조명들은 꺼지고 각자 좌석에 있는 작은 마법등만이 남자
단상을 향한 밝은 조명이 켜지며 약간 능글맞은 기가 있는 남자가 올라왔다.
“오늘 이 곳에 와주신 신사숙녀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희 상회에서는 항상 최상품의
물건만 여러분께 제공드리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하고 있으니 결코 여러분들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아… 서론이 기네. 어디든 너무 형식을 따진다니까. 그냥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시작하면 좀 좋아? 아, 해민아 뭐라도 좀 먹을래?”
내 앞 안락의자에 편히 자리를 잡은 해민이를 위해 뭔가를 시키려고 하는데 톰슨이 작게 충고
했다.
“시키지 않는게 좋아요. 어차피 먹지 못할테니까.”
“예?”
“여긴… 구역질 나는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이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음식을 먹을 정도로
비위가 강한게 아니라면 음식을 시키는 건 낭비가 될 겁니다.”
“으음…”
톰슨이 경멸하는 인간들이 모였다고 해서 음담패설이 난무하고 소란스러운건 아니었다.
약간의 웅성거림은 있었지만 소위 배운자들만 모아놔서인지 조용하고 원활하게 경매가 진행
되었던 것이다.
큰 소리를 내는 건 경매를 이끌어가는 단상위의 중년 남자 밖에 없었다.
그의 지휘 아래 대기하고 있던 이번에 팔릴 상품(?)들이 하나 하나 단상위로 올라왔고 그에
따라 설명이 이어졌다.
한명 한명 올라오는 이들은 약을 먹었는지 촛점 없는 눈동자로 그들을 이끄는 이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자, 이 엘프로 말씀드리자면…”
그렇다고 해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나는 괜스레 듀비나 해민이를 보기가 창피해져서 단상위를 바라보는 대신 안락한 의자에 앉아
몸을 깊숙히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자리를 잡고 조용히 경매를 관람하던 톰슨이 내 팔을 툭툭 쳤다.
“왜요?”
그래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니 톰슨 뿐만이 아니라 싱거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잠시 주위를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작전이 실행될텐데,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우선
건물 안의 퇴로는 알아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러고보니 여기에 들어오는 것만 생각하느라 이 홀 안을 살펴보는 건 깜빡 잊고 있었다.
“그러세요. 조심하시구요.”
“여러분도 조심하시길.”
“다녀 오겠습니다.”
평소 내가 마음에 안 들었어도 예의는 깎듯이 지키는 톰슨과는 달리 건들거리며 날 깔보는 티를
역력히 드러내는 싱거마저 왠일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칸막이를 빠져 나갔다.
그에 저 놈이 왠일인가… 싶어 바라보았지만, 의아함도 잠시 나도 곧 할 일을 생각해냈기에
그들에 대한 건 잊어버렸다.
[슈리엘!]나는 듀비나 해민이가 신경쓰지 않게 정령의 대화법으로 슈리엘을 불러 이 주위에 사람이 몇명이
있는지, 입구는 몇군데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곧이어 네 명의 최상급 정령들을 불러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본격적으로 일이 벌어질 시간이었던 것이다.
“자, 모여봐요.”
주위에서는 경매가 한창이었지만, 나는 거기에서 신경끄고 해민이와 듀비를 불렀다.
주위를 살펴보고 온다던 싱거와 톰슨은 조심하느라 그런지, 살펴볼게 많은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운디네를 불러서 탁자 위에 물로 우리가 있는 홀 안의 모습을 그렸다.
“자, 이 안은 부채꼴 모양이예요. 여기 뾰족한 부분이 단상이고요. 층은 다섯층이래요.
첫 층에는 좌석이 5개, 두번째 층에는 7개, 10개, 14개, 19개로 총 좌석은 56개고요, 지금 현재
이 안에는 48개의 좌석만 채워져 있다는 군요. 우리가 있는 건 세번째 층의 7번째 좌석에 있는
거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듀비와 해민이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다시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입구는 세 곳이예요. 단상 옆에 하나, 그리고 맨 뒤에 손님들이 출입하는 가장 넓은 부분에
양 옆으로 하나씩.”
“그렇다면… 우리팀이 셋으로 나뉘어 입구를 하나씩 맡아야 하겠군요. 이 곳을 잠시동안 고립
시키려면 말이죠.”
“그럼 내가 하나, 이 블루 엘프 녀석이 하나, 그리고 가장 약한 인간 두 놈이 하나를 맡으면
되겠군?”
해민이가 흥분된 어조로 끼어들었다.
성년식을 치루고 난 뒤 누군가와 싸우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하던 녀석이었으니 지금도
무지 날뛰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해민이가 강해졌다고 하나 그 애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좋은 작전이지만, 벽을 등지고 하는게 아니라서 위험해. 아까도 말했지만, 이 곳에는
48좌석이 차 있다고. 그들이 모두 자신의 호위 무사를 3명씩 다 데려왔단 말야. 거기다 밖에서도
공격할텐데, 그러면 사방에 적들이 둘러쌓이게 되잖아?”
“난 문제 없어요. 충분히 지킬 수 있다고요. 그리고 저 시퍼런 엘프 놈도 충분히 감당하겠죠.
문제는 약해빠진 두 인간 녀석인데, 그 놈들이야 해인 누님이 도와주시면 되잖아요?”
“그러지 말고 내가 세 입구를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막을테니까, 너희들이 날 보호해주면 어떨까?
그러면 앞뒤로 협공을 당할 걱정도 없고, 이 안에서 우리도 힘을 합쳐서 같이 싸울 수 있잖아?”
내 의견에 해민이는 별로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듀비가 끼어들었다.
“폼을 보아하니 혼자 들뛰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해인님의 주위에서 멀찍이 떨어져 혼자
날뛰면 되잖아? 해인님 보호는 나와 두 인간이서 하며 되니까. 대신 네 놈이 위험해도 도와주러
가지는 않을테니 알아서 하도록 해.”
“흥, 웃기지 마라. 내가 나서서 놈들을 금방 다 처리해줄테니 네 녀석들이 할 일은 별로 없을
거야.”
“좋을대로. 어쨌든, 그러면 해인님의 계획대로 하는 건가?”
“응? 으음… 뭐, 나야 신나게 싸운다면 계획이야 어떻던 상관 없지.”
‘허… 아까 마차 안에서도 느낀 거지만… 듀비 정말 너무 대단하다.’
내가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걸 느꼈음인지 나에게 시선을 돌린 듀비가 옅게 웃어 보였다.
“자, 그렇다면 이젠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두 인간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사실
안 돌아와도 상관은 없지만… 그 전에 작전이나 실행 되었으면 좋겠어.”
해민이는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벌써부터 길다란 손톱을 꺼내들고 안절부절 못했다.
“진정해, 그러다가 신호가 오기도 전에 네가 먼저 난리치겠다. 해가 지면 시작할 거라고 했으니
금방 신호가 올 거야.”
우리가 이 곳에 도착한 시간은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막 물들이기 시작할 때였다.
여기에 들어온지도 한참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어둑어둑해지고도 남을 터였다.
‘흐음… 여긴 창이 없으니 알 수가 없잖아? 하지만…’
나는 곧 공중에 동동 떠다니는 애들을 보고는 생긋 웃었다.
[얘들아? 밖에좀 보고 와주련?]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정령들이 내 기세에 눌려 밖으로 나가보기도 전에 멀리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콰과광~
“시작입니다.”
멀리서 난 소리라고 해도 워낙 큰 소리였기에 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다 들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경매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경매가 잠시 중단될 정도로 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아, 여러분 진정해주십시오. 저희 쪽에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금세 조치할 터이니 걱정
하실 것 없습니다.”
경매를 진행하는 남자가 큰 소리로 외쳐 소란이 잠시 가라앉나 싶었는데, 중년 남자가 참 허망
하게도 또 다시 굉음이 들려왔다.
콰과과광~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자자, 아직 오늘의 하일라이트인 물건이 아직 안 나왔습니다. 여러분께
선 보일 물건이 많이 남았습니다만, 성격 급하신 몇몇 분들이 있으신거 같으니 지금 그냥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자 경매를 진행하던
사람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말은 효과가 있었는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멈췄다.
그러자 한숨 돌린 중년 남자가 더욱 더 신나게 외쳤다.
“자자, 기대하십시오~ 오늘의 하일라이트 임신한 수인족 계집입니다~!”
주변이 술렁거렸지만, 그건 아까처럼 당혹스러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어쩌시렵니까? 신호가 왔으니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듀비가 나를 보며 말했지만 나는 선뜻 움직이자고 할 수가 없었다.
정말 비 오는 날 먼지나게 두들겨 패주고 싶은 두 놈이 아직 안 돌아왔던 것이다.
“톰슨과 싱거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잖아요. 지금 밖에 있는 거라면 내가 정령들에게 부탁해
입구를 막았을때 그들은 둘이서만 밖에 고립된다구요.”
[우리 애들이 찾아올 수 있어요!]만약을 대비해 불러놓은 최상급 정령들 중 실레스틴이 나섰다.
그녀도 지금 무지 상기된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무지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하는 거예요, 누님? 지금 나가려는 놈들이 생겼어요. 이러다가 다 나가면 어떻게 해요?”
천을 조금 젖혀 바깥 상황을 살피던 해민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차피 그 둘은 이런 경험이 많으니 처신을 잘 할 겁니다.”
“좋아요. 그럼 우리끼리 시작하도록 하죠. 실레스틴, 잘 부탁해.”
[맡겨만 주시라고요.]실레스틴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섯 마리의 슈리엘이 허공으로 나타나 사방으로 흩어져 갔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나는 내 힘을 끌어 올렸다.
[노에아넨! 셀레아나!]그그그~~
내가 그들을 부르자마자 뭔가가 긁히는 듯한 커다란 소음이 들렸고 그와 함께 놀란 외침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헉, 저, 저게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엇! 입구가 다 막혀버렸다!!”
“뭐냐, 네 놈들. 우릴 여기에 가둔 것이냐?”
“이건 함정이야. 우리를 죽이려는~~”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 부탁을 받은 노에아넨이 입구를 막고 그 주위를 셀레아나가 일으킨 불꽃이 감싸고 있어
사람들은 막힌 입구 근처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 진정해 주십시오. 이건 뭔가 착오가 있는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경매 진행자가 당혹스러운 와중에서도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아까부터
불길한 소음이 들려와 사람들이 조금씩 불안해 하는 상황인데다가 갑작스레 입구까지 막혀
버렸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움에 패닉 상태에 빠져 그의 말을 듣지도 못했다.
“저놈 잡아라! 저 놈을 잡아 이게 어찌된 일인지 알아내야 한다!”
“마법사, 입구를 부셔버려. 어디 누구 다른 마법사 없소?”
사람들이 난리를 치며 자신의 칸막이에서 빠져 나오기에 우리도 슬그머니 빠져 나와 상황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이 무사일 줄 알았는데 상당부분 마법사도 섞여 있어 그 마법사들이 막힌 입구를 향해
마법을 난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입구를 막고 있는 건 나였던 터라, 그 곳에 마법이 난사되면 그 타격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온다는
걸 듀비는 알고 있었는지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보다도 먼저 아무도 모르게 내 옆에 있던 노에아넨이 투덜거렸다.
[저놈은 날 뭘로 보는 거야? 저까짓 인간들의 공격 쯤이야 가렵지도 않다고.]“하하하, 저 정도라면 괜찮대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 곳에 있는 마법사들 중에 소위 고위 마법사는 없었던 모양이다.
“누님, 저쪽은 이미 싸움을 시작했는데, 저도 가면 안될까요?”
“응?”
낮게 속삭이는 해민이의 말에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그 곳에는 경매를 진행하던
진행요원(?)들이 다른 사람들의 호위 무사들에게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이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냐?”
“당장 익실직고 하란 말이다!!”
“모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희 상회에서 손님 여러분께 폐를 끼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저건 저희가 한 것이 아니라 필시 어떤 놈들의 음모가 있음이 틀림 없습니다.”
벌써 몇대 맞았는지 몰골이 아니었다.
그들은 강제로 제압된 채 단상에 끌려와 있었다.
그 옆으로 이번 경매의 하일라이트였던 임신한 수인족 여성이 굵은 쇠창살 우리에 갇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풀어줄까요?”
해민이는 그녀가 무척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래 그녀쪽을 자꾸 바라보며 안달하고 있는데 듀비가 그런 그를 제지했다.
“지금은 우선 나두는 것이 좋아. 좀 불편하겠지만, 위험하지는 않잖냐. 만약 그녀를 풀어준다면
우리는 그녀를 안정시키는 한편 그녀를 지켜야 하는 이중고를 겪겨될 거다.”
“네 놈에게 묻지 않았어!!”
그때였다.
소란스러운 홀 내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울려퍼졌다.
“저자다. 저 가면을 쓴 여자가 입구를 막은 거야!!”
나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외치는 그자의 주위에 땅의 중급 정령 노임이 떠억 버티고 서 있었다.
아마 나와 같은 정령술사였기에 입구를 막는 것이 정령의 힘이고 그 원천이 나였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그자의 옆에 있던 노임이 스르르 땅으로 스며들더니 곧장
나를 향해 뻗어왔다.
비록 홀 바닥으로 들어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정령의 기운이라면 내 감각을 숨긴 채
나에게 다가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공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중급 정령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 주위에 있던 경호 무사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던
것이다.
“저들을 잡아라!!”
“우선 제압해버려!!”
“나서라 해민아.”
듀비가 낮게 속삭이며 쌍검을 빼어들자 해민이가 힘차게 자신을 감싼 망토를 벗어제꼈다.
“으랏차, 드디어 내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구나~!!”
“수인족이다. 조심해!”
“거 보십시오. 저희 상회에서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단상 쪽에서 외치는 소리를 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훌쩍 허공으로 뛰어 올라야 했다.
원래는 내 주변에 대한 일은 해민이와 듀비에게 다 맡기고 나는 가만히 구경이나 하고 있으려고
했는데, 한 손으로 열 주먹을 다 막을 수 없는 법이라고 해민이가 내 주위에서 멀어져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듀비가 내 앞을 가로막아도 적은 그 둘을 몇 겹으로 에워싸고도 남을만큼 많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듀비가 나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여 허공으로 뛰어
올라가 준 것이다.
내가 허공으로 뛰어 오르자마자 맨 처음 나를 발견한 정령술사와 계약한 노임이 내 바로 발
밑에서 나를 따라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지만,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엘레스트라와 – 나는 네 최상급
정령들의 모습들을 모두 숨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내 기운을 받아 확실하게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 부딪히자마자 깨갱하고는 다시 땅 속으로 사라졌다.
그에 그 정령술사가 잠시 경악하기는 했지만, 노임이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자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정령들이 나와 같은 생물들이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이번에도 그 노임이
공격해왔어도 심하게 다쳐서 정령계로 보낼 마음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전력차이도 엄청나 노임의 공격 같은 건 나에게 별로 대수롭지 않아 그냥 방어만 한
것 뿐인데 노임과 계약한 정령술사는 이걸 모르는 모양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가만 있을 수가 없어 계속 공격을 감행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 만이 아니라 몇몇의 무사들이 내 쪽을 향해 단검 같은 걸 던지거나 몇몇 마법사들도
마법 공격을 시행했지만, 엘라스트라가 거뜬히 막아주고 있었기에 나는 관심을 끄고는
듀비랑 해민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민이는 아까부터 우리에게서부터 멀찍이 떨어져 나가 완전히 변이한 상태로 종횡무진 하고
있었고, 듀비 또한 지켜줘야 했던 내가 스스로르 보호하자 이제는 쌍검을 빼어들고는 멋들어진
검무를 한바탕 추고 있었다.
적이 우리 셋을 개개인으로 둘러싸고도 남을 만큼 많다지만, 그래도 한 명을 에워싸고 공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같은 무리가 아닌 여러 무리가 섞여서 공격을 할때에는 공격자끼리는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넓은 공격 범위를 확보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공격할수 있는 자는
많아야 셋이나 넷 뿐이었다.
우리로써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불행한 건 그렇게 적은 수에 둘러쌓여 그들을 쉽게 쓰러뜨리는 건 좋은데 그들을
쓰러뜨려도 곧바로 그 뒤에 다른 놈들이 다시 공간을 채우기 때문에 듀비와 해민이는 좀처럼
쉬지 못하고 계속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들이 보통 인간들보다 체력이 강하다고 해도 이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다 쓰러질때까지
상대하는 건 어려울 거 같았다.
‘뭐, 지금은 둘다 펄펄 날고 있으니까… 나중에 정 힘들면 그때 내가 도와주면 되겠지. 아, 그런데
톰슨이랑 싱거를 찾으러 간 정령들은 왜 이렇게 소식이 없지? 도대체 그 둘은 어디까지 갔길래…’
그러자 재밌게도 마치 내가 그 생각을 할 땔 기다렸다는 듯 내가 그 둘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자
마자 그 둘을 찾으러 보냈던 슈리엘들이 돌아왔다.
[그 둘을 찾았습니다.] [그래? 그 둘은 어디에 있지?] [여기서 좀 떨어진 어느 커다란 건물의 3층의 커다란 방에 있었습니다.]‘여기서 조금 떨어진 커다란 건물? 그렇다는 건 우리가 이 곳에 올때 본 그 커다란 저택?
아니, 그 두 녀석은 왜 거기까지 간 거지?’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그 둘은 거기서 뭐하고 있었지?] [방 안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습니다.] [방안을 뒤져?]우리가 우리가 맡은 임무를 수행할때 도움이 되라고 이 주변을 둘러보고 온다던 이들이 왜
멀리 떨어진 저택까지 가서 어떤 방을 뒤지고 있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설마하니 이 주위를 눈으로 봐도 도대체 어떻게 된 구조인지 알 수가 없어 아예 본체에 이 곳
설계도면을 찾으러 간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러한 내 추측이 어리석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언제 작전이 실행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이곳 설계 도면을 찾으러
간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정말 하고싶지 않은 결론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에휴… 그러니까… 이용… 당한 건가? 어쩐지…’
그러니까 그 둘은 처음부터 내 작전에 동참할 맘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아니면 실행되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어떤 물건을 찾으라는
명을 받고 우리와 함께 잠입한 듯 했다.
우리 셋은 희생물로 내놓고 말이다.
‘하… 그래놓고 뭐? 자기네 지부에서도 최대한도로 지원해줄 만큼 해준 거라고? 나원 참
기가 막혀서…’
아무리 본부에서 지원으로 보내줄 만큼 실력자라고 해도 이런데 생판 경험이 없는 나를 조장으로
세우고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긴다 했을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설마하니 같은 상회 소속이자
같이 일하게 된 동료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을 했겠는가 싶어서 안일하게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왔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 허어… 정말 이럴 줄이야…’
어차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사람들이라 ‘어떻게 이럴수가…’ 라는 절망감 같은 건 들지도
않았다.
게다가 따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만약을 대비하여 – 정말 만의 하나였을 거다. 우리가 살아돌아오리란 걸 생각
못했을테니 말이다. – 그 둘이 사라진거에 대한 변명거리도 준비해 놨을 거다.
그 둘이 우리를 버리고 다른 일을 보러 갔다는 증거가 없는 이상 우리가 따지고 들어봤자 이미
처음부터 한통속이었던 그들에게 씨도 안 먹힐거고 말이다.
‘허어… 이 곳에 와서는 된통 당하기만 하는 구나…’
그렇다고 화가 나지 않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이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화가 난다고 무작정 그들을 쥐어팰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두손 놓고 얌전히 당하는 것도 열받는 일이었으니 뭔가 내 감정을 풀어줄 방법이
필요했다.
내가 멀쩡이 짠 하고 살아돌아온다고 그들이 ‘헉, 이럴 수가…’ 하면서 절망하지는 않을 터였다.
내가 화난 건 충분히 예상 하겠지만, 같은 상회 사람들이니 증거 없이 그들에게 함부로 해꼬지
못하리란 건 그들도 알고 있을테고, 게다가 난 이쪽 지부 사람이 아니라 이번 작전만 끝나면
곧바로 여기를 떠나니 조금만 버티면 나는 이만 빠드득 갈다가 가버릴 거라고 계산해 놨을 거였다.
그렇다고 엉뚱한 이들에게 화풀이 할 정도로 내가 어리석지는 않고 말이다.
‘하아… 정말 열받네… 뭐 좋은 수가 없나?’
이제와 생각하면 내가 맡은 임무가 목숨을 내놓고 할 정도로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 의심스러웠다.
이 손님들이 아무리 봉이라고 해도 상회가 자신들의 모든것을 버려가면서까지 지켜줄 필요가
있는 건지 말이다.
‘에이… 하지만, 그건 아닐 거야. 밖에서 여길 뚫으려고 하는 걸 봐서는 그나마 우리를 희생물로
세우기는 했지만 타당성 있는 임무를 맡긴 거 같기는 해. 하지만.. 이용당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겠지…’
아버지에게 확 꼰질러가지구 상회를 뒤엎어서 레이언 녀석이 이 곳 지부장을 끌고와 내 앞에
무릎을 꿇히고 싹싹 빌게 만들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러면 괜히 찝찝할 거 같아 역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는게 나을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여기서 뭘 얻을 수 있느냐는 건데… 살아가는 건 둘째치고 빈손으로 간다면
나만 억울하지. 그러니까 여기서 뭔가를 가지고 가서 녀석들의 배를 아프게 하고 내 기분을
좋게할까나?’
아래에서는 듀비와 해민이가 열심히 이리뛰고 저리뛰고 하고 있건만, 허공에 있는 나는
엘라스트라의 안전한 보호 아래 엔다이론의 등에 올라타서 태평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해민이나 듀비나 저들에게 쉽게 당할 이들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다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듀비는 내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서인지 여전히 내 아래쪽에서 무사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는데, 그의 주위를 둘러쌓고 있는 무사들은 듀비의 실력을 의식해서인지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있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에 비해 해민이는 적들에게 둘러쌓이는 대신 오히려 자신 스스로가 적 한가운데에 뛰어들어
한바탕 난리를 친 뒤 다른 곳으로 뛰어 들어가 또 휘저어 놓는 식으로 동분서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민이의 기세 또한 너무 매서웠기에 무사들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얼른 몸을
피해 해민이가 다른쪽으로 갈 때까지 몸을 사리는 거였다.
그래 해민이를 바라보니 왠지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는 듯 했다.
해민이가 술래이고 적들은 술래인 해민이에게 터치 당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다니는
쪽이고 말이다.
그러다보니 무사들에게 둘러쌓여 그들만 상대하는 듀비에 반해 해민이는 무사들 뿐만이 아니라
안전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손님들에게까지 가끔 손길을 뻗었다.
그때마다 그들을 보호하는 무사들이 앞을 가로막고 뒤에 있는 손님들은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몸을 피했는데, 황당하게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그 순간에 자신들이 품고 있던 보따리들을
챙기느라고 정신이 없는 거였다.
‘오호라~!’
물론, 나는 그런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보따리 안에는 이번 경매에서 상품(?)을 사기 위해 바리바리 싸들고 온, 저 사람들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금화 앤드 보석들이 들어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여기서 내가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훗훗훗, 지금 나는 도둑인데다가 저 사람들은 어차피 사람의 수치이니 약간의 벌을 줘도 상관은
없으렸다?’
경매의 절반이 훨씬 넘었을때 작전이 시행되었지만,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오늘의 하일라이트
상품(?)이 아직 팔리기 전이었기에 사람들의 주머니는 두둑했다.
거기에다 내가 여기에 들어올 때 커다란 자루를 준비해 가지고 온 건 아니었지만, 나는 왠만한
자루보다는 커다란 자루를 가지고 있었기에 여기에 있는 모든이들이 공평해질 수 있도록 싹
쓸어갈 수 있었다.
[자아, 슈리엘~ 너희들이 할 일이 있어.]아까 두 녀석을 찾으러 갔다 왔다가 정령계로 돌아간 바람의 매들이 다시금 나의 부름을 받고
이쪽 세계로 넘어왔다.
그들은 내 설명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하라면 해야 하는
입장이거늘…
내 설명을 들은 그들은 내가 지적한 한 뚱뚱한데다가 ‘나 돈 많아요~!’라고 광고를 하려는 듯
엄청 화려하고 비싸게 치장한 중년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우아아악~!! 이게 무슨 일이야? 살려줘~ 나 좀 살려줘어어~~”
내가 죽이려는 것두 아니고, 단지 슈리엘이 바람을 이용해 그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을 뿐인데도
그 남자는 숨넘어갈 듯 새파랗게 질려서 비명을 질러댔다.
노에스 손 벌려줘~]
노에스는 땅의 상급 정령으로써 엄청 거대한 거인이다.
그는 너무 커서 본체를 다 드러내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몸체 대부분은 땅 속에 있게 하고
필요한 부분, 예를 든다면 손가락이나 발가락이나 아니면 기껏해야 팔 정도만 드러내게 해서
일을 부탁한다.
뭐, 정령술사가 능력이 있다면 자신과 계약한 정령의 크기를 얼마든지 크게 할 수가 있기는
하지만, 노에스는 워낙에 크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가 팔을 뻗기만 하면 커다란 배도 띄울 수 있는 큰 강에 순식간에 다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라고 하니 전체가 얼마나 큰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만약 그를 크게 만든다면 한 대륙 정도는 다 차게 할 정도로 커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도 지금 그의 몸체를 드러내게 하지는 못하고 단지 한쪽 손바닥만 벌리게 했는데
그것도 너무 커서 우리가 있는 홀 바닥 전체가 들고 일어날 것 처럼 울렁거렸다.
그래 나는 황급하게 부탁을 변경해야겠다.
[아앗, 미안한데… 전체를 드러내지 말고 손가락 끝 정도 크기만 드러내주면 안될까나?슈리엘이 있는 곳 바로 아랫부분으로 말야.]
그러자 울렁거리던 바닥이 진정되더니 잠시 후에 슈리엘이 들고 있던 중년 남자의 밑바닥에
장정 한명이 쉽게 들락날락 거릴 것만 같은 크기의 시커먼 구멍이 열렸다.
[슈리엘~]사람들이 헛바람 들이키는 사이 내 부름을 받은 슈리엘은 곧 자기가 들고 있던 중년 남자를
탈탈탈 흔들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아~, 사,라,암,사,알,려,어,줘,어,어~”
흔들리는 와중 잘못 입을 벌리면 혀를 깨물텐데도 그 중년 남자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구해줄 수가 없는 것이 내가 나머지 두 슈리엘에게 혹시라도 우리 작업(?)
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으면 막으라고 부탁해놨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꽤 무거울 것 같은 중년 남자를 들고 탈탈 터는 슈리엘 덕분에 중년 남자의
몸에 있던, 비싸 보이는 장신구라던지 주머니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보석 같은 것들이
아래로 후두득 떨어져 노에스의 손가락 구멍(?) 사이로 들어가버렸다.
“우,아,아,아~,내,보,서,어,억~”
탈탈 털리는 와중에서도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들을 봤는지 중년 남자가 처절하게
외치며 손을 뻗었지만, 참으로 얄밉게도 그의 손길을 샤샤삭 빠져나간 보석들은 곧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한 1, 2분쯤 털고 나자 처음에는 후드득 거리며 떨어지던 것이 더 이상 떨어지는 것이
없자 슈리엘은 그를 땅에다 내려놨다.
“어구, 어구, 어구구구~~ 내 보석드으을~~”
한참을 흔들리고 난 뒤라 그 중년 남자는 어지러워서 내려놓자마자 제대로 서지도 못했건만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보석들을 찾기 위하여 엉금엉금 기다시피 구멍쪽으로 다가갔지만
그 중년 남자가 닿기도 전에 구멍은 쏘옥 땅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자, 그럼 다음은…]나는 그 중년 남자에게서 조금 멀리 떨어진 어떤 중년 부인을 지목했다.
[여자분이니까 특별히 치마는 잡아주도록 해.]“꺄아아악~~”
내 말이 끝나자마자 째지는 비명이 사방을 울렸고 이번에는 나이 지긋한 중년 부인이 허공으로
붙들려 올라가 탈탈 털리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보석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연이어서 계속 털리자 사람들은 허겁지겁 자신의 몸에
두르고 있던 보석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목표는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화려하게 차려 입은 손님들의 몸에도 물론 보석들은 많았지만, 그 보다도 손님들과
같이 온, 일명 호위 무사들에게도 한보따리씩 있었던 것이다.
보석이나 금화 같은 것들은 덩어리로 있으면 고가치 못지 않게 무게도 상당했는데, 그렇게
무거운 것들을 부자들이 스스로 들고 다닐리가 만무했다.
다 힘센 고용인들에게 들게하지.
“으아악~ 안돼, 안됀단 말이다~!!”
“사수해!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수해!”
잠시 전까지만 해도 완전 밀실이 된 이 홀을 나가기 위해 움직였는데, 이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보화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덕이라고 해야할까?
내가 직접 나서기 전에는 해민이야 자신이 사방을 들쑤시고 다녀서 자신이 직접 공격을 하는
편이었지만, 듀비는 내 주위에서 단지 무사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내가 나서게 되자 자신이 직접 공격을 하는 해민이는 상관 없었지만, 방어만 하던 듀비는
자신들의 고용주 보화를 사수하는데 모든 정신이 집중되는 바람에 조금 여유로워졌다.
그러자 그는 가만 있지 않고 쓸모 없는 줄 알면서도 계속 나에게 공격을 하는 이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홀 안은 한쪽에서는 나에게 보화를 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민이에게
들쑤시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이 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고심하는 등, 완전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니까 홀 안의 15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단 세명에 의하여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나는 열심히 보화를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한 사람들을 지목하면서 바깥 사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비록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이 홀을 막고 있는 실레스틴과 노에아넨이 변동사항이 생기면 그때
그때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건물 바깥에 보초(?)로 세워놓아 신호탄이 쏘아지면 알려달라고 부탁해놨던 실프가
언제 연락을 가지고 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거기에다 신호탄이 쏘아지면 이 곳을 빠져나가는 방법도 강구해야 했다.
비록 셀레아나와 노에아넨의 능력을 이기지 못해 번번히 실패하고 있기는 하지만서도, 홀의
세 입구 바깥쪽에서도 입구를 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내가 홀의 입구를 막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화를 털고 있는데다 해민이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녔기에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신경이 여러갈래로 분산되어 우리가 이렇게 쉽게
홀 안 사람들을 휘두르고 있지만, 만약 내가 입구를 개방시킨다면 홀 안 사람들이나 바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우리 셋에게로 집중될 것이 뻔했다.
뭐, 그래도 죽지 않고 빠져나갈 자신은 있었지만, 현재 나는 최상급 정령 셋과 ( 입구를 막고
있는 셀레아나와 노에아넨, 그리고 날 보호하고 있는 엘레스트라) 상급 정령 두명 (나를 데리고
허공에 떠있는 엔다이론과 땅 속에서 열심히 보화를 챙기는(?) 노에스 ), 그리고 중급 정령
셋 (보화들을 털고 있는 슈리엘들) 에게 한꺼번에 힘을 보내주고 있었기에 내 정령 기운의 소비가
장난이 아니게 많았다.
이렇게 많이 사용한 적은 아버지와 실피드에게 정령을 부리는 교육을 받을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없었기에 솔직히 조금 긴장은 하고 있는 중이었다.
뭐, 그래도 대충 내 기운의 크기를 재면서 소비를 최소한으로 조절하고 있는데다, 아직 서너시간은
충분히 버틸 자신은 있지만서도, 이 곳을 벗어나 무사히 돌아갈때까지 어떤 변수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 만약의 사태까지 생각해 놔야 했다.
그냥 직빵으로 돌아간다면 편할테지만, 우리가 상회 사람이라는 걸 감춰야되니 남들 눈에 뜨이지
않게 돌아가는 것만 해도 쉽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지금 해민이와 듀비가 아직까지는 팔팔하기는 했지만, 계속 쉬지 않고 날뛰면 얼마 후에는
지쳐버릴게 뻔했으니 그때는 내가 저 둘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계산에 넣어야 했다.
겉으로는 여유만만하게 방실방실 웃고는 있었지만, 머리속으로는 이러한 여러가지 생각과
긴장으로 인하여 내 딴에는 꽤 복잡했다.
하기야, 이러한 일을 행하면서 여유만만하길 바라는 건 무리였지만 말이다.
그나마 죽을까봐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하지만 여유만만한 상황은 점점 바뀌고 있었다.
내가 여전히 홀 안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나에게 보화를 털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보화를 사수하기 위해 긴장하는 쪽보다는 빼앗긴 분노로 인하여 나에게 덤벼드는
숫자가 많아졌던 것이다.
덕분에 듀비는 다시 방어하는 쪽으로 돌아섰고, 해민이는 전보다 좀 더 강경한 반발에 맞서야
했다.
아직까지는 둘 다 지친 기색 없이 잘 움직여주고 있었지만, 우리를 향한 공격이 점점 더 거세질
수록 나는 괜히 걱정스러워서 빨리 신호탄이 터지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내가 홀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을 다 탈탈 털고 난 뒤에도 신호탄은
올라오지 않는 거였다.
덕분에 해민이와 듀비는 처음 우리가 이 홀을 막았을때보다도 더욱 더 거센 공격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시간이 많이 흘러 듀비와 해민이에게 점점 지친 기색이 보이는 듯 하자 나는 차라리 나중에
뭔 소리를 듣더라도 신호탄에 관계 없이 이 곳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러자면… 여기를 빠져나가야하는데… 어쩌지? 입구를 개방한다고 해도, 입구를 열기 위해
안쪽에서나 바깥쪽에서나 입구쪽에 몰린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들을 다 정면으로 치고 나가기는
어려울 거 같고…’
그러면서 나는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수 밖에 없었다.
이 곳이 지하 깊은 곳이라서 천장을 뚫을때의 어려움은 둘째치고라도 천장을 뚫을 때 많은
잔재물들이 떨어지리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무사히 해결해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 치더라도, 위로 올라가 허공으로 날아가면
너무 사람들 눈에 띄였다.
물론, 지금이 한밤중이라 시내에 있는 주택가들은 잠에 빠져 있겠지만, 최소한 이 저택 내에
있는 사람들은 두 눈에 불을켜고 있을테니 천장을 뚫고 위로 올라가는데 눈에 안 뜨일 리가 없었다.
‘하늘도 안되고, 땅 위도 어렵고… 참내 그냥 땅 속으로 꺼지는 방법 없나? 가만… 땅 속?’
투덜대던 나는 문득 내가 떠올린 생각에 무릎을 쳤다.
‘그렇군. 땅 속이 있었지? 아아..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물론 내가 땅굴을 팔 능력은 안되지만, 나에게는 노에스가 있었다.
그의 손바닥이라면 우리 셋을 땅 속으로 이동시켜주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얼른 이 곳을 빠져 나가기 위하여 해민이와 듀비를 불러 올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눈에 이런 소란 속에서도 용케 무사히 있던, 단상위의 쇠창살 속의 임신한
수인족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임신한 상태라 그런지 다른 이종족 노예들처럼 약을 먹이는 대신 쇠창살로 만든 정육면체의
우리에 갖혀서 단상위로 올라 왔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또렷한 눈동자 속에 담긴 절망감이 이미 팔려서 홀 안 곳곳에 있는 다른 이종족들의
모습보다 더 날 사로잡았는지 모른다.
‘아아… 그러고보니 여기 있던 다른 이종족들도 깜빡 하고 있었잖아? 에휴… 이들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으니… 아무래도 힘좀 써야겠군.’
그리하여 나는 조금이라도 힘을 아끼고자 날 보호하고 있던 엘라스트라에게 보내던 힘을 끊고는
내 보호는 전적으로 엔다이론에게 맡겼다.
그리고 홀 안에서 열심히 보화들을 털어내던 슈리엘들을 돌려보내고 대신 엄청난 수의 실프들을
불러냈다.
[자, 그럼 여러부우운~ 한바탕 시작해 보자구요오오~]내가 불러낸 정령들을 향해 방긋 웃으며 말하자 갑자기 홀의 바닥이 크게 흔들리며 그 위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이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그 틈을 타서 단상 부분의 바닥에서부터 큰 흙더미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하자 단상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기겁을 하며 흔들리는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그 곳에서부터 멀어지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또 다른 아수라장이가 벌어지는 사이 내가 불러낸 수많은 실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약의 기운에 취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이종족들을 잡아 날라오기
시작했다.
단상 위에 있는, 우리에 갖힌 수인족 여성은 커다란 흙더미가 솟아오르는 바람에 위태하게
허공으로 올라갔다가 흙더미 안으로 굴러떨어지는 듯 보였지만 아마도 노에스가 잘 잡아줬을
터였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있던 엔다이론은 빠르게 아래로 하강하여 해민이와 듀비의 목덜미를 입으로
잡아 채 잽싸게 흙더미가 솟아 오른쪽으로 날아갔다.
“뭐, 뭐야?”
당황한 해민이가 엔다이론을 향해 손톱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그 보다도 내가 먼저 잽싸게 그를
제지했다.
“나니까 놀라지 말고 가만히 있어.”
“뭐 하시는 거예요, 누님? 적들을 두고 도망치려 하시다니요?”
“여기에 더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 그만 가려고.”
내 대답에 해민이가 불만에 찬 표정으로 뭐라 더 하려고 했지만, 하필 그때 엔다이론이 해민이와
듀비를 흙더미 가운데에 나 있는 구멍에 떨어뜨려서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실프들이 속속 이종족들을 데리고 도착하자 구멍은 더욱 더 넓어져서 그들을
맞이했다.
나는 구멍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대신 십여명의 셀리맨더 ( 불의 중급 정령 ) 들을 불러내어
사람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사방으로 보냈던 실프들이 다 도착하자 나는 내가 불러낸 홀 안에 있는
모든 정령들을 돌려보냄과 동시에 흙더미 안에 있는 구멍으로 뛰어 들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에 맞춰 노에스는 입구를 닫고 우리를 안전한곳 까지 땅 속으로 끌어
내렸다.
“해인님, 무사하십니까?”
사방을 노아스가 막고 있어 빛 한 점이 없었지만 엔다이론의 몸에서 나는 희미한 빛 때문에
주위를 분간하는 건 가능했다.
그러나 어둑어둑한건 여전했기에 나는 카사 한명을 불러내며 듀비의 부름에 답했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둘은 어때요? 해민이는 다친데 없어?”
“나야 뭐… 조금 더 싸우지 못하고 돌아 온게 아쉬울 뿐이라고요.”
해민이는 아까 갑자기 끌고 온 불만이 아직 안 풀렸는지 부루퉁한 얼굴로 대꾸했지만, 이제 싸움이
끝났다는 걸 인식했는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안해. 내가 더 버티기 힘들 거 같아서 그만 끝내려고 한 거야. 하지만 너도 많이 운동했잖아?
오늘은 그 정도로 만족해주라.”
“하는 수 없죠 뭐. 나중에 또 다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저 오늘 도움 많이 되었죠?”
“그러엄, 네가 없었으면 이번 작전은 실행하지도 못했을 걸 뭐. 수고했어.”
“저 시퍼런 엘프보다도 더요?”
해민이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마구마구 칭찬해주자 해민이가 두 눈을 빛내며 한번 더 물었다.
그에 헉… 하면서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해 하는데 이런 날 듀비가 구제해줬다.
“네가 몇명을 해결했는데?”
“뭐?”
그의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해민이는 그를 휙 돌아보다 인상을 찡그렸다.
“그런걸 누가 일일이 세고 있어? 그냥 되는 대로 쓰러뜨렸지.”
“그러면 누가 더 많이 해결했는지 알 수가 없지 않아? 나는 정확히 53명을 쓰러뜨렸다.”
듀비의 말에 해민이는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헹, 겨우? 나는 모르긴 몰라도 그 보다는 더 많이 쓰러뜨렸을걸?”
“그걸 누가 믿지? 일일이 세어본 것도 아니고 단지 짐작일 뿐이잖아?”
“뭐? 누님, 제가 더 많이 쓰러뜨린거 맞지요?”
듀비의 말에 말문이 막혔는지 해민이는 나를 돌아보며 도움을 구했다.
그러나, 내 입장이라는 것이 누구를 편들기 너무 애매했기에 나는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미안… 어떻게 빠져 나갈지 궁리하느라 제대로 보지는 못했어.”
“예? 허걱… 그, 그럴 수가…”
무지 서운한 듯한 모습으로 날 바라보기에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 네가 몇명을 쓰러뜨렸는지를 제대로 못 봤다는 거지, 네가 싸우는 건 잘 봤어.
굉장히 멋있던걸?”
“그, 그래요? 흐음… 뭐, 하는 수 없죠. 저도 쓰러뜨린 놈들을 세고 있지는 않았으니… 이봐, 퍼런
엘프 다음 부터는 그런 건 미리 미리 말하라고. 미리 말했으면 나도 셌을 거 아냐?”
“흐음… 그렇군. 나도 그건 미처 생각을 못했군. 그럼 이번은 무효로 하고 대결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지?”
“쳇… 하는 수 없지.”
해민이가 아쉽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듀비의 말에 수긍하며 물러나자 나는 감격에 찬
시선으로 듀비를 바라봤다.
‘듀비~ 훌륭해요오오~~’
그렇게 땅 속으로 이동한 우리가 다시 밖으로 나온 곳은, 이번 작전에 투입된 인원들이 훈련을
하던 그 실내 연무장이었다.
이동하는 와중 우리에 갇혀 있던 수인 족 여성을 우리에서 꺼내어주고 손목과 발목에 차여 있던
두터운 쇠 수갑도 풀러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성년식을 예전에 치른 성년 수인족이라서 그런지 해민이가 날 처음에 보자마자
믿었던것과는 달리 쉽게 날 믿지 못한 채 경계하는 바람에 좀 애를 먹었다.
그나마 듀비에게처럼 보자마자 전이해서 달려든 것은 아니었지만, 도와주러 온 거라고 해도
쉽게 믿지 못해서 달래고 달래서 겨우 손목 발목의 수갑만 풀었지, 수갑 때문에 생긴 그녀의
상처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그래 해민이 보고 그녀를 설득하게 하려고 했는데, 좀 어이없게도 그녀는 해민이 에게서 인간
냄새가 풍긴다는 이유 하나로 해민이를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손에서 자란 것으로 의심하는
바람에 수인족의 수치라고 해민이에게 덤벼들려는 걸 말리느라고 진땀 흘렸다.
정정당당하게 싸우다가 능력이 딸려서 지는 바람에 굴복하는 건 괜찮지만, 처음부터 인간의
손에 길들여져 싸워보지도 않고 인간을 주인으로 섬기는 건 수인족들이 수치로 여긴다나?
그래서 내가 그녀보고 당신도 인간에게 져서 잡힌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만, 함정을 파놓고 여러
명이서 떼로 덤벼드는 것은 비겁한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기는 건 이기는 걸로 여기지
않는다는 거였다.
뭐,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그렇습니까?’ 하고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가 자신은 수인족의 수치라고 자살하려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우리로써는 다행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해민이 보고 수인족의 수치니 뭐니 하면서 덤벼들때 나는 혹시나 그녀가 스스로 자결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아이를 가졌기에 자결을 미룬 거지만, 나중에라도 그렇게 되면 아이는 졸지에 어머니를
잃는 셈이 되니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그러한 작은 소동을 겪으며 연무장 바닥을 뚫고 도착해보니 새벽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었고
불은 다 꺼져 있었다.
하기야, 그 연무장에서 훈련하는 이들은 모두 작전에 투입 되었을테니 다른 시간이었더라도
사람은 없었을 거였다.
듀비에게 부탁해서 우리가 이 곳에서 안면을 튼, 이번 작전에 합류하지 않은 버지니아와 비토
남매를 불러오게 하는 동안 나는 노에스의 손바닥 안에서 구해온 이종족들을 벗어나게 한 뒤
멍하니 앉아 있는 이종족들 옆에 주저 앉았다.
“에구… 힘들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정령의 기운을 많이 가직 있는 나라도 오랜 시간동안
상급 정령들이나 최상급 정령들에게 힘을 마구 마구 보태준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계속 긴장하고 있던 몸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퍼지자 나도 모르게 기운이
쭈욱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이가 있었으니…
“여긴 어디지?”
수인족 여인은 당장이라도 대답을 안 하면 손톱을 빼어내 달려들 기세로 날 노려보며 물었다.
“여긴 왈그린 국에 있는 베지테크스 상회 그랜드마 지부예요.”
내 대답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을 보이는 수인족의 여인을 위해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에… 그러니까, 이번에 당신이 팔릴 뻔한 경매를 엉망으로 만들고 이종족들을 구출해낸 단체의
본부라고나 할까요? 뭐, 정식 본부는 다른 나라에 있긴 하지만, 이번 작전은 여기서 한 거니까…”
수인족 여인은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경계하는 어조로 다시 물었다.
“너희 단체에서 이종족들을 구해서 뭘 하려고 그러지? 설마… 네놈들도 우릴 잡은 놈들과 같은
일을 하는 거냐?”
끝에가서는 매서운 살기까지 보이는 그녀였기에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대답해야 했다.
“설마요. 정말 우리가 그런 일을 하는 단체였으면 당신을 왜 우리에서 꺼내주고 수갑 까지 풀어
줬겠어요? 으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종족들을 구해내는 건 단지 부차적인 일이래요.
원래 목적은 당신들을 사고 팔때 모여드는 자금을 털려고 하는 거죠.”
“그럼 우리는 어쩔 거지?”
“어쩌긴요, 당연히 집으로 돌려보내 드리죠.”
“뭐?”
수인족 여인은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뭐,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사실이예요.”
“믿을 수가 없군. 인간들은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종족이야. 아무 댓가 없이 우리를 도와줄
리 없어.”
“맞아요. 당신들을 마을로 데려다주는 댓가로 당신들과 거래를 하더라구요. 으음… 저는 저번에
이 곳에서 구출한 인어들을 데려다 줬는데… 그 댓가로 바다 속에 침몰한 배에 있는 물품들을
건져 주던데요? 뭐, 저도 이 단체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 다른 종족들을 데려다
준 적은 없지만… 엘프들을 그들의 마을로 데려다 주는 건 봤어요.”
내 말에 그녀가 약간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냐?”
나 같으면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아무리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줘도 의심했을텐데, 아니 친절한
건 더수상히 여겼을텐데 수인족 여인은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뭐, 그렇다고 내가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사실이예요. 아마 당신도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면 당신 마을에 데려다 줄 걸요? 수인족
하고는 어떤 거래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때 버지니아가 뒤에 듀비를 달고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며 내 말을 받아줬다.
“수인족에게는 보통 무력을 빌린다던가, 아니면 비싼 값에 팔리는 몬스터들을 거래하곤 하지.
수인족은 산에서 제왕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말야.”
“아, 그렇군요. 그런데… 몬스터를 사는 사람도 있나요?”
내가 실제로 본 – 뭐, 훈련 받을때 마법으로 이미지화 된 몬스터를 보긴 했지만, 실제는 아니었
으니까.. – 몬스터라고는 바다에 사는 뱀장어나 문어 괴물 같은 것들 밖에 없었기에 그런 걸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어리둥절 할 뿐이었다.
‘으음… 그런 것도 먹을 수 있나? 하기야, 먹을 수만 있다면 엄청난 식량을 얻는 거긴 하네.’
“그럼, 몬스터들의 힘줄이나 가죽 등은 보통 동물들보다 질기고 부드러운 경우가 많아서 비싼
값에 팔리지. 거기다 각질 또한 무척 단단하며 가벼워서 그런걸로 만든 무구도 엄청 비싸고 말야.
아, 트롤의 피 같은 건 잘 정제하면 포션을 만들 수 있으니… 몬스터들도 잡으면 돈 덩어리지.”
“헤에…”
포션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돈이 되는거긴 되는 건가 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버지니아는 생긋 웃어보이더니 유일하게 이종족들 중 또렷한 정신을
가진 수인족 여인 앞으로 다가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저희 상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희 상회는 이종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니
그렇게 경계 안 하셔도 돼요.”
수인족 여인은 버지니아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나를 한번 힐끗 보다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우선 숙소로 안내해 드리죠. 몸도 씻으셔야할테고, 상처도 치료하셔야 하잖아요.”
“흥, 이까짓 상처 쯤이야… 치료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배 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셔서 조심하셔야죠.”
“우리 수인족은 그렇게 약해빠지지 않았어.”
“예, 예. 하지만 좀 씻는 건 원하시겠죠?”
어쩐지 듀비와 버지나아만 왔다 했더니만, 비토는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오느라고 좀 늦은
모양이었다.
연무장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에 수인족 여인이 놀라 벌떡 일어나며 전이를 하려고 하자 버지니아가 황급히 말렸다.
“괜찮아요, 괞찮아. 우리 상회 사람들이예요. 여러분들 몸이 안 좋을 거 같아서 도와달라고 부른
거예요.”
“사실이냐?”
“그렇다니까요.”
수인족 여인은 버지니아에게 확답을 받는 것으로 성이 안 찼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이 인간 여자의 말이 사실이겠지?”
“사실 맞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얼굴을 덮고 있는 가면을 벗으며 방긋 웃어줬다.
화장 위에다 가면까지 쓰고 있어서 엄청 답답했었는데, 이제야 겨우 그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나는 무지 행복했다.
“버지니아~ 나 빨리 화장 지우고 싶어요.”
“어머? 왜? 너무 잘 어울리는데 아깝게시리…”
“어휴, 너무 답답한 걸요? 여자들은 이런 화장을 어떻게 즐겨 하는지 원… 아무리 화장을 하면
예뻐 보인다지만…”
“쯧쯧, 너는 여자의 마음을 너무 몰라.”
“모든 여자가 화장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걸요?”
“아, 그건 그렇고 해인아…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니? 다 같이 왔을 거 아냐?”
“같이 안 왔어요. 저희만 곧장 온 걸요.”
“뭐? 아니 왜? 퇴각하고 한 지점에서 만나서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잖아?”
“물론 그랬죠. 그런데 퇴각하고 만나는 장소를 아는 톰슨과 싱거가 작전을 실행하기 전에
경매장을 빠져 나가서 돌아오지도 않는데다가 힘은 떨어지는데 퇴각하라는 신호탄은 올라오지
않더라고요.”
“뭐? 아니, 그러면… 너하고 듀비하고 해민이 단 셋이서 경매장안을 막았다는 거야, 지금?”
“어쩔 수가 없었어요. 작전을 시행하라는 신호는 오는데 톰슨과 싱거는 돌아오지 않고… 나중에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찾으니 엉뚱한데 가서 딴 일 하고 있던 걸요?”
그 동안 걷지를 않아서 크게 불편함은 못 느꼈지만, 그래도 내 여린 발을 꽈악 물고 놔주질 않는
괘씸한 구두를 벗어 들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지만 내 말에서 버지니아는 뭔가를 알아챈 모양
이었다.
“뭐? 으음…. 그래, 알았어. 어쨌든 피곤할테니 올라가서 쉬어.”
“그러죠 뭐. 뒷일은 부탁할게요.”
버지니아가 알아채든 말든 나는 쉬라는 말에 기뻐서 생긋 웃으며 해민이와 듀비를 이끌고
우리 방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 내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으니…
“어딜 가는 거지?”
무척 초최한 상태였으면서도 어디서 그런 힘이 있는건지 잽싸게 내 앞으로 달려와 날 가로막으며
무서운 기색으로 물어보는데 나는 어리벙벙 할 뿐이었다.
“네? 아, 저 피곤해서 쉬러 가는데요?”
“나도 같이 가겠다.”
“예?”
뜬금 없는 수인족 여성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러자 수인족 여성이 눈을 가늘게 해서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날 바라보는 거였다.
“뭘 그렇게 놀라지? 내가 같이 가면 안된다는 건가?”
“아뇨, 안될 건 없는데…”
“그럼 뭐가 문제지?”
“아뇨.. 아무 문제는 없는데…”
“그럼 됐군. 이만 가지. 나도 피곤해서 쉬고 싶군.”
“에? 아, 예.”
버지니아를 힐끔 보니 그녀가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길래 나는 얼른 수인족 여성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나를 버리고 작전을 성공시키려고 했던 나머지 팀들이 돌아온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였다.
조금만 더 늦게 왔다면 날이 새어서 곤란했을 정도로 무척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잠이 들어 그들이 돌아왔는지도 몰랐을텐데, 그날은 예민하게 구는 수인족 여성
때문에 피곤한데도 잠을 못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를 따라 왔으면서도 나를 완전히 신용하지 못해 내가 조금만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도
퍼뜩퍼뜩 일어나 나를 노려보는 거였다.
차라리 그녀가 눕기 전에는 빤히 보고 있었으니 그나마 덜했지만 그만 자라고 눕히니 이건
완전히 신경이 더 예민해져가지고 오히려 더 안정을 취하지 못하는 거였다.
덕분에 나까지 덩달아 예민해져가지고 잠도 못 자고,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여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느라고 고역이었다.
그래 결국 그녀에게 슬립 마법을 걸어 푹 재우고 나도 자려고 할때 그들이 돌아온 거였다.
별로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잭슨이 조금 걱정이 되어 그를 만날 겸, 톰슨과 싱거가 무사히
돌아온 날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궁금해서 슬금슬금 찾아오는 잠을 냉정하게 외면하고
방을 빠져 나왔다.
“수고 하셨습니다. 작전은 성공 하셨는지요?”
그들도 이 곳에 도착하자마자 실내 연무장으로 직행을 하기에 나도 슬금슬금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버지니아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클리프를 맞으며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아니. 이번 작전은 완전 실패야. 그쪽에서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더군. 덕분에 아까운
마법 스크롤만 잔뜩 날렸지. 이번 경매의 하일라이트라는 그 수인족 여성은 커녕 이종족들은
한명도 구하지 못하고, 경매로 인하여 모인 자금도 얼마 탈취 못했어. 이번 작전은 완전 적자야,
적자.”
연무장에 모인 사람들은 클리프를 비롯하여 모두 위험한 고비들을 넘겼는지 몰골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에 있던 잭슨 또한 작전을 수월하기 실행하기 위하여 얼굴에는 시커먼 복면을 쓰고
약간 달라붙은 검은 색 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군데 군데 찟겨 있었고 한쪽
어깨와 얼굴은 불덩어리라도 맞았는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거기에 복면을 벗자 한쪽 뺨이 데여서 빨개져 있었는데 한쪽은 하얗고 한쪽은 붉은데다 군데
군데 검게 그을리기 까지 해서 얼룩덜룩하자 되게 웃겼다.
“푸, 푸하하하~~ 야, 잭슨 너 그게 무슨 꼴이야?”
클리프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모두 작전이 실패 했다는 걸 알고 있던 탓인지 분위기가 침울한
와중에 내 웃음소리가 울려퍼지자 모든 이들의 매서운 눈길이 나를 향해 꽂혀왔다.
하지만, 나는 무지 당당하게 그 시선들을 맞으면서 생글생글 웃으며 클리프를 향해 다가갔다.
“여~ 많이 늦으셨네요?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요.”
클리프는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가 곧 나인 것을 알고 흠칫 놀라더니 또 금세 그
기색을 지우고는 분노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벨이 잔뜩 꼬여있는 내가 그런 꼬투리를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호오, 참으로 표정 변화가 다양무쌍 하시군요.”
내 말에 클리프의 눈꼬리가 꿈틀 거렸다.
“재밌나?”
매서운 목소리였지만 나는 그대로 받아쳤다.
“구경하는 건 재미있네요.”
그러자 클리프의 눈꼬리가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잠을 아직 못 잔 데다가, 같은 작전을 수행했던 다른 사람들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
해서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평상조로 대답하자 클리프가 으르렁 거리듯 다시 되물었다.
“내 말은, 살아 있었으면 집합 장소로 오지 않고 왜 여기로 곧장 온 거냐고 물은 것이다. 우리
같은 비밀 단체에서 개인 행동은 곤란하다는 걸 모르는 건가? 아니, 퇴각 신호탄을 보고 퇴각을
하기나 한 거야?”
“물론, 우리도 퇴각 신호탄을 보고 퇴각해서 집합 장소로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나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날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클리프를 같이 매섭게 바라보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단 세명이서 그 홀 안의 100명이 넘는 인원수는 물론이거니와, 밖에서 홀 안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을 막는게 좀 힘에 부치더군요. 그래서 미리 그 곳을 빠져 나온건데, 우리를 안내하겠다고
호언 장담한, 지부 측에서 제공해준 두 잘난 남자들은 작전을 시행하기도 전에 홀을 빠져나가
돌아오질 않더군요. 그래서 못 갔는데요? 그 두 남자는 어딨나 궁금하네?”
그러면서 나는 생각난 김에 홀 안을 다시 살펴보다 구석에서 조용히 서 있는 톰슨과 싱거를
찾을 수 있었다.
“헤에, 잘 살아 왔네요? 나는 우리 작전지인 홀과 엄청 멀리 떨어진 저택 안 어느 방안을 뒤지고
있다고 해서 둘이 잘 살지 걱정했는데… 그런데, 그런 옷들은 언제 준비해가서 갈아 입었지요?
나랑 갈때는 경장 갑옷 차림이었는데… 마치.. 처음부터 우리와는 다른 임무를 가지고 간 사람들
처럼 말예요.”
그들은 휘황찬란했던 옷차림을 벗어 던지고 다른 이들과 마찬 가지로 검은색 일색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클리프가 나와 듀비, 그리고 해민이만 그 홀 안에 냅두게 하고 저 둘은 빼돌리려 했을
것이란 추측이 명백한 사실로 다가왔다.
그 둘은 피로한 기색에 몸도 성치 못해 고생한 흔적이 역력해서 그나마 내 분노를 가라앉혀
주었지, 만약 그 둘이 아무런 상처 없이 멀쩡했다면 나는 그 전에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우주
너머로 날려버린 채 저 둘에게 분노의 펀치를 가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클리프에게서부터 시선을 돌리고 있자, 클리프는 헛기침을 해서 자신에게로 주의를 돌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해도 멋대로 이 곳으로 돌아온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누군가에게 들키면 어쩔 뻔
했지? 아니지, 벌써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러자 그 동안 가만히 사태를 주시하고만 있던 버지니아가 내 대신 나서서 대답했다.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땅 속으로 이동해 왔으니까요.”
“응?”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클리프에게 버지니아는 다시 한번 좀 더 자세히 설명해야 했다.
“그러니까 해인군은 일행 둘과 함께 단 셋이서 많은 이종족들을 구해 땅 밑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잘 메우기는 했지만, 약간 티가 나는 연무장 바닥을 가르키자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클리프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인가? 어떻게 땅 밑으로 이동해 왔지?”
“땅의 정령에게 부탁했는데요?”
“땅의… 정령? 그런 것도 가능한 건가?”
“해보니까 되데요.”
무성의한 내 대답에 클리프의 눈썹이 다시 한번 꿈틀 거렸지만, 그는 화내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너희 셋이서 이종족들을 구해 온 게 사실인가? 어떻게 구했지?”
“홀 안에 있기에 그 곳에서 빠져 나올때 같이 데리고 온 것 뿐이예요.”
생각 같아서는 ‘잘요’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예의상 제대로 대답해준건데 클리프의 눈썹이
또 꿈틀 대더니 화를 버럭 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입니까?”
그래도 쫄 이유가 없었던 내가 당당하게 대꾸하자 클리프가 부들부들 떨더니만 허리에 찬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건방진…”
“호오, 해보시게요?”
날 따라 왔던 듀비와 해민이가 흠칫 하며 나서려고 했지만, 나는 그들을 제지한 채 내 옆에
거의 항상 있어주는 엘라스트라를 불렀다.
나와 듀비, 해민이를 감싼 거대하고 날씬한 수룡이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자 클리프와 같이
검을 손에 가져갔던 지부 사람들이 헉 하는 신음성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건 엘라스트라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클리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엘라스트라를 처음 보는지 입이 떠억 벌어져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던 것이다.
“드, 드래곤?”
“드래곤이 아니라 용인데요?”
내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지만, 내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엘라스트라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약간 놀라게 해주려고 했던 것 뿐인데, 놀라는 것 뿐만이 아니라 두려움까지 보이자
왠지 흐뭇해지면서 여기서 뭔가를 더 보여줄까~ 고민하는데 이 상황에서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던 두 인물이 이런 내 생각을 눈치 챘음인지 나를 말렸다.
“자자, 해인아… 네 기분은 이해 하겠는데 이제 그만 해라. 아무리 그래도 같은 상회 소속인데
이러는 건 너한테도 안 좋을 거야.”
버지니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달래려고 하자 잭슨도 나섰다.
“그래, 그래. 야, 난 빨리 가서 쉬고 싶다고. 너 때문에 소동이 일어나서 내가 침대에 눕는
것이 지체된다면 나는 너무 슬플 거야. 날 봐서라도 좀 봐주라. 우리 그냥 빨리 가서 자자, 응?”
잭슨이 늦게까지 잠을 못 자서 눈이 빨개지건 눈을 못 뜨건 나랑은 상관 없었지만, 사실 나도
지금까지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자지 못하고 나왔던 거라 잭슨의 빨리 가서 자자는 말에 귀가
솔깃 했다.
거기다가 내 상태도 아까 힘을 많이 썼지만, 아직 회복이 안 된 상태였기에 지금 엘라스트라에게 뭔가를 시키는 것도 힘든 상태였다.
뭐, 하기야…처음부터 엘라스트라에게 뭔가를 시키려는 게 아니라 단지 모습을 드러내게 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을 조금 놀래키려는 것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나는 순순히 엘라스트라에게 보냈던 힘을 뺐다.
“그래, 그래. 그만 가서 자자. 나도 슬슬 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서는 나는 뒤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지부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연무장을 빠져
나갔다.
‘후훗… 그래도 한마디는 해서 기분은 좋네. 거기다가… 우히히히~~ 홀 안에서 싹슬이한
보화들두 다 내차지구나… 키득키득…’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너무 좋아서 혼자 키들키들 웃자 같이 가던 잭슨이 의아하다는 듯
날 쳐다보았다.
“뭐야? 뭐가 좋아서 혼자 그렇게 웃어? 아까 클리프에게 한 마디 한게 그렇게 기분이 좋냐?”
“응? 아아… 뭐, 그것도 그거지만.. 후후후… 딴 것두 있어가지구… 아, 그건 그렇고 잭슨
깜빡할 뻔 했는데 말야, 너 아무래도 네 침대 못 쓸거 같다.”
잭슨의 말 덕에 방에 있던 수인족 여성을 떠올린 내가 말하자 그가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
거렸다.
“내 침대를 못 쓸거 같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아, 그게 말이지… 이번에 구한 이종족 중 한 명이 우리랑 같이 있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같이 있게 되었는데… 아까 재우려고 할 때 네 침대만 비어 있어서 네 침대를 줬거덩…”
“뭐, 뭐야아~? 그럼 나는 어디를 쓰라고?”
기겁을 하면서 잭슨이 우리 셋을 돌아보자 해민이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으르렁 거렸고
나는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결국 잭슨은 마지막 남은 듀비를 애절하게 붙들 수 밖에 없었다.
“으흐흐흑~~ 듀비이이~~”
그에 듀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와 같이 쓰시죠.”
“고마워요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