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3)
제2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정말 성격 드러운 남자였다.
그러나 이 황당 무개한 곳에서 만난 인간이라 나 또한 그 처럼
틱틱대서 그와의 사이가 틀어지는 건 원치 않았기에 속으로
꾸욱 참은채 나는 입을 열었다.
“저기요.. 초면에 실례지만 뭐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 들어있는
어투로 대꾸했다.
“흥, 실례인 건 아니 다행이구나. 뭐가 궁금한거냐?”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는 건지…
초면에 질문하는 건 실례인 줄 알면서 초면에 반말하는 건
실례라는 걸 모르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아쉽지 저 인간이 아쉬울 건 하나도 없었다.
아까까지 없다가 갑자기 나타난 걸 보면 저 인간은 이 곳을
나가고 들어오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 무례한 놈에게 공손히 입을
열었다.
“저기요… 여기가 도대체 어디죠?”
그러자 이 남자는 나를 무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성의없이 대꾸했다.
“너 눈은 뒀다 스프 만들어 먹냐? 네가 봤으면 여기가 어딘지
알 거 아냐? 정령들 말로는 밖에 나가도 봤다며? 아, 하긴…
하찮은 인간으로 살아온 주제에 언제 바다 속에 들어와 봤겠어?
어딘지 모르는 건 당연할 지도…. 잘 들어라. 이 곳은 바다속이다.
인간들 말로는… 그래, 케르겔렌 해 바닥이군.”
‘나도 이 곳이 바다 속이라는 건 안다. 그런데 케르겔렌 해라니…
도대체 지구 어디에 박혀있는 나라의 바다인 거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툴툴 댔지만, 겉으로는 더 없이 공손하게
다시 물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제가 왜 인간은 올 수 없는 바다 속에 들어온
거죠? 게다가 바다 속에 이런 집이 있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군요.
이건 어찌된 건가요?”
그 남자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심히 못마땅하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치고 있었지만, 그래도 순순히 대답은 다 해주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왔느냐고? 그건 내가 데려다 놓은 거다. 그리고
이 집이 왜 바다 속에 들어와 있냐고? 내가 가져다 놓았으니까
여기 있는 거지. 바닷물이 이 곳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결계를 친
것도 내가 한 거고.”
그의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저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다고요? 이 집도? 도대체 당신은
누구신데 그런 일을 하신 거죠?”
“빨리도 물어보는 구나. 보통 처음 본 자가 있으면 그가 누구인지
제일 먼저 물어보는 거 아니냐?”
아마 자기가 누구인지 안 물어봐서 심사가 비틀린 모양이었다.
이 남자도 보기에는 안 그러게 생겼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우러를 줄 아는, 왕자병 기질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사과까지 해야 하는 건지…
“흥, 그렇다고 사과 할 일은 아니지.”
‘뭐냐… 이 인간….’
나는 이마에 혈관 마크가 뾰록이 솟아 오르는게 느껴져 얼른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그냥 냅뒀다가는 그걸 본 저 남자가 그걸 꼬투리로 뭔 소리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이마를 집는 걸 의아한 눈초리로 보더니 곧 관심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작게 코웃음 치며 시선을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정령왕이다. 정확히 말하면 물의 정령왕이지.”
그의 말에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는 엄청 놀라는 내 모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더니만
입을 열었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네가 감히 정령왕을 만날 줄 꿈에라도
상상 했겠느냐? 다 이해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속에서 마구 떠오르는 오만가지 생각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정령왕? 정령왕이라고? 허걱… 그럼… 이, 이사람이… 어른 유령이구나..
허걱… 드디어 만났어.. 어쩜 좋아? 꼬맹이들 유령을 볼 때부터
어른 유령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걸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벌써 만나다니..
그러고보니 ‘왕’이라고 했지? 이 유령 마을의 대빵인가봐…
근데.. 날 데려 왔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왈칵 눈물이 솟는
것을 느꼈다.
‘흐으윽… 그럼 그렇지… 나에게 갑자기 영적인 능력이 생길 리가 없어…
전에 희미하게 봤던 그 천사가 죽음의 천사가 틀림 없었던 거야….
내 눈에 유령들이 보일 때 미리 짐작을 했어야 했는데…’
내가 놀란 표정을 짓다 말고 갑자기 울자 그 남자가 무지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 보았다.
“야, 너 왜 우냐?”
나는 눈에서 흘러 내리는 눈물은 닦을 생각도 안 한채 그를 애절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흑흑… 저는 죽은 거로군요… 훌쩍… 저도 유령이 된 거지요? 그래서
제 눈에 유령이 보이는 거고… 흑흑… 여기는.. 저승이었군요? 훌쩍, 저승은
음산할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바다 속의 옛날 집이라는게 이상하지만..
흑흑… 근데, 심판은 언제 받나요? 유령의 왕이시라니… 혹시 제가 천당 갈지
지옥 갈지 아시나요? 훌쩍, 심판 받을 때는 천사가 절 데리러 오나요?
흑흑… 나 죽었다고 엄마가 많이 울텐데… 훌쩍, 너무 울어서 실신 안 했으면
좋겠는데… 흑흑… 내 친구에게 꿔준 2만원도 못 받았구… 이럴 줄 알았으면
꼬불쳐 둔 돈으로 옷이라도 살걸… 훌쩍… 무지 사고 싶었던게 있었는데…
흑흑… 아, 만화책 빌려온 것도 갔다 줘야 하고…”
죽었다 생각하니, 왜 이렇게 아쉬운 일들만 마구 마구 떠오르는 것인지…
부디 지영이가 나에게 꿔간 돈 입 싹 딱지 말고 해민이에게라도 전해줬으면
좋겠지만, 그 지지배 심보가 꿀꺽 하고도 오리발 내밀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라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돈 없다고 해민이 생일에 그냥 넘어 갔는데 그거라도
받고 마음 풀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심난한 나에게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무슨 변고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숨도 못 쉴 정도의 압력이 생기더니만
어떠한 힘에 의하여 침대에 앉아 있던 내가 날려가 침대 뒤에 있던 벽에
강하게 부딧혀던 것이다.
쿵~!!
얼마나 세게 부딧혔는지 잠시 동안은 너무 아파서 말 조차 안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이런 내 상태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거의 고함을 질러대듯이 말했다.
“유령이라니!! 감히 나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감히 하찮은 유령으로
생각한단 말이냐? 이건 나에 대한 모욕이야!!”
그가 말하는 동안 아까의 그 숨도 쉬지 못할 압력이 여전히 지속되었고
벽에 심히 부딧히고 거기에 더해 벽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바닥에
부딧히는 바람에 어깨와 등짝, 옆구리가 아파서 나는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콜록, 콜록~!!”
반사적으로 나오는 기침 때문에 온 몸의 근육이 쑤셔왔지만, 기침을
멈출 수가 없었다.
대신 이러한 나의 모습에 그 남자가 잠시 정신을 차렸는지, 숨도 못 쉴만큼
압박을 가하던 기운이 씻은듯이 사라졌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허공에 길다란 물줄기가 만들어지더니만, 그게 내 몸을
마치 뱀 처럼 한번 휘감은 다음 번쩍 들어서 다시 침대 위에 내려 놓는 거였다.
그리고는 아까 그 이상한 압력처럼 공중에 분해되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허…”
아픈 와중에도 그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차가운
말로 경고했다.
“앞으로 한번만 더 날 그딴 유령으로 생각하면 그땐 아무리 너라도 죽여버릴 테다.”
그러나 난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벌써 죽었는데 뭘…”
이미 죽어다는 걸 안 이상 좀 아프기야 하겠지만, 두려울 건 없었다.
뭐, 어쩌면 영혼을 아예 소멸 시킬지도 모르겠지만, 그런거는 한번도
보지도 못한 거라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아까의 공손 모드를 버리고 이리 당당히 대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 남자의 눈이 분노로 치켜 올라갔다.
“죽어? 누가 죽었단 말이냐!!”
“누구긴 누구예요. 당신과 나, 이 곳에 있는 이 꼬맹이 유령들 모두… 여기
유령 마을 이잖아요. 음, 저승이라고 해야 하나?”
그 남자는 내 말에 기가 찬지 허공을 향해 부르짓더니 날 매섭게
노려 보았다.
그런데 그 기세가 너무 살벌하고 무서워 나는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다
못해 온 몸이 덜덜 떨리는 지경이었다.
허공의 꼬맹이 유령들도 무서움을 느끼는 건지 싸그리 내 방에서 사라져
버렸다.
“정말 죽고 싶은 게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그런 하찮은 허깨비가
아니라 정.령.이란 말이다. 정.령!!”
그 살벌한 기세에 입까지 얼어 붙은것 같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겠기에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 그러니까.. 정령이나 유령이나…”
하지만 그의 매섭다 못해 전율이 좌르르 흐르는 눈길을 받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그 상태로 날 한동안 노려 보더니만 뭔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에 힘을 풀고 나에게 물었다.
“너, 정령이 뭔지 모르는 거냐?”
그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믿기 힘들다는 빛이 떠올랐다.
“정말 몰라?”
그에 나는 발악적으로 입을 열어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요. 정령이 뭔지 아는 사람이 있나!!
그냥 전설이나 판타지 소설에나 나오는 유령이나 요정 같은 거 아니예요?
그런게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러자 그가 내 말투를 똑같이 흉내내며 말했다.
“너야말로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정령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정령을 모르는 네가 이상한 거야!! 비록 정령이 보통 사람의
눈에 안 보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정령의 존재를 알고 있어!!”
그의 말에 나는 너무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지만, 그의 시선이 되게 당당한 것이, 날 이기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야, 그럼 저 남자가 말한게 사실이란 거야? 아, 하지만… 도대체 누가
정령의 존재를 믿는 다는 거지? 솔직히 유령의 존재도 안 믿고 신의 존재도
안 믿는 사람이 태반 아냐?’
내가 이렇게 속으로 혼란스러워 할 때 날 지그시 보던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어 날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했다.
“그렇군… 네가 있던 곳에서는 정령의 존재를 알지 못하나 보지?”
“예? 예…”
“그랬었군… 하긴… 세계가 다르니 그럴 수도… 하지만, 이 곳 사람들은
모두 정령의 존재를 알고 있고, 정령술사도 있어서 정령들과 계약을 맺어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다.”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사람 말은 꼭 내가 딴 세상에 떨어졌다는 소리 같잖아? 하긴 뭐…
이 곳이 저승 비스므리한 유령 세계 같으니까 맞는 말일 수도…. 근데,
이건 뭔가 핀트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저 성격 더럽고 무서운 남자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혼자서
이해 하려고 낑낑대고 있는데, 이 모습을 본 자칭 정령왕이라는 남자가
비웃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해 못해 낑낑대는 모습 하고는…. 네가 멍청하다는 것을 알리지 못해
야단이로군. 도대체 너 같은 것을 위해 왜 그녀가…”
말을 하다가 점점 흥분한 그의 눈빛이 다시 매서워져 내가 찔끔하는
순간, 그가 뭔가 말을 하려다 멈추고 내 시선을 피했다.
비록 고개는 돌렸지만, 그의 주먹이 꽈악 쥐어저 부르르 떨리는 걸 보니
몹시 격양된 감정을 진정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린 그는 아까의 그 냉정한 모습을
되찾았지만, 날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허공을 보는 듯 초점이
흐려 있었고,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이해 할 수가 없어… 그래, 정말 이해 할수 없는 노릇이지.. 네까짓게
뭐라고…”
그의 띄엄 띄엄 나오는 말에 의해 더더욱 상황이 엉킨 실타래 처럼
이해가 안 갔지만, 그가 온 몸으로 절대로 끼어 들지 말라는 오로라를
팍팍 뿜어내고 있는 터라 나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자기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크게 한숨을 한번
쉬더니 날 바라보았다.
“잘 들어라. 난 귀찮은 것은 질색이지만, 네 멍청함에 경의를 표하며
단 한번만 설명해 주마. 너는 원래 이 세계에서 태어난 자였다. 하지만,
내가 다른 세계로 보내 버렸지. 그러다 지금 다시 데려 온 것이다.
네가 있던 세계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는 정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정령이란… 젠장 내가 왜 이런 것 까지 설명해야
하는 거지?”
잘 설명하던 그 남자는 점점 귀찮아졌는지 인상을 팍 찌그러트리며
투덜댔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황당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하.하… 이 곳에서 태어 났다뇨…. 비록 고아이기는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태어 났는데요… 여기가 어딘 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설마 애를 낳고 해외에다 버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러나 나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다.
그 남자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무서운 눈길로
날 노려봤기에 입을 벙긋하기는 커녕 온 몸이 저절로 떨렸고,
솔직히 이야기 해 실례까지 찔끔 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런 표정으로 나에게 한 걸음 뚜벅 다가서더니 날 어찌하지는
못하겠는지 괜히 애꿏은 벽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기세는 엄청났는데 다행이도 벽이 튼튼했는지, 벽은 금 하나, 우그러짐
하나 없이 꿏꿏이 버텨 내었다.
평소라면 그 모습에 웃음이라도 터트렸겠지만, 분위기가 너무 무서웠기에
난 웃지도 못한 채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는 벽에 주먹을 가져다 댄 그 상태로 나를 향해 또박 또박한
말투로 말했다.
“경고 하겠다. 한번만 더 네 친모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면 아무리
너라도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내 친엄마라는 사람을 아주 잘 아는 듯한 말투이기에 나는 그에게
질문하기가 무척 두려웠지만,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입을 열었다.
“제… 친엄마를 아세요?”
그는 무지 말해주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해준다는 기색을
역력하게 나타내며 말했다.
“….. 그래.”
다행히 대답은 해주는 모습에 나는 조금은 안도하며 용기를
더욱 짜냈다.
“지금… 어디 있는지… 아세요?”
친 부모에 대한 미련은 예전에 버렸다.
지금 내가 이렇게 입을 여는 건, 단지 호기심일 뿐이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몇번이고 되내며 그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속으로는 이런 내가 우습기도 했다.
처음 보는데다가, 자신을 있는지도 모를 정령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믿고 이러고 있는 건지…
“그녀는… 죽었다.”
“…그렇군요….”
그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오기 전까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스르르 풀리면서 허탈한 기분과 함께 한편에서는
안도감이 자리 잡았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 친모라는 사람과 가까운 사이었던
모양이었다.
“제 친모라는 분과… 가까우셨나보죠?”
그는 날 힐끔 보더니 귀찮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혹시… 그렇다면….”
나는 다시 두근 두근 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아니, 여는게 아니라 입이 제 맘대로 멋대로 열리는 기분이었다.
‘바보, 바보.. 입 다물어!! 그걸 저 사람에게 물어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냥 입 다물라니까!!’
“혹시… 제 친모가… 절… 왜 버렸는지 아세요?”
듣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너무나 알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서로
뒤엉키는 걸 느끼며 난 그 남자의 입을 주시했다.
아마 금방 대답을 해준 듯 한데, 그가 말해주는 게 마치 몇 년이라도
되는 것인 양 너무나 길게 느껴져서 내가 기다리다 못해 지칠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묘하게 웃음 짓는 것이 왠지 맘에 안 드는 대답이
나올 것 같았다.
“훗…. 널 왜 버렸냐고? 하, 정말 재미있는 질문이군. 널 왜 버렸냐라…”
저 남자를 만나면서 지금까지 받은 비웃음 중에 가장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비웃음을 나에게 보내며 그는 한동안 킥킥 거리더니
내 질문에 대답해줬다.
“널 버릴 수나 있었을까? 네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너 같은
것 하나 낳겠다고 그렇게 갖은 애를 써놓고서, 정작 그렇게 널 원하던
자신은 네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죽어버렸지. 우습지 않나? 정말
너무나 웃긴 이야기야, 안 그래?”
그러면서 미친 듯이 허공에다 대고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게 정말
재미있어서 그런게 아니라는 것 쯤은 아무리 눈치 없는 나라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온 몸에서 뿜어지는 슬픈 감정이 나에게도 전염 되었는지
코 끝이 찡해져 왔다.
한참을 그렇게 웃던 남자는 돌연 웃음을 딱 그치더니 날 보고 정색한
채 입을 열었다.
“널 버린건 나였다. 너 같은 게 그녀 대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 그래서 널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린 거다.
그러니, 원망하려면 날 원망해라.”
이런걸 바로 청천벽력이라고 하는 걸 거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너무 놀라서 한 동안 말을 할수도 없었다.
그 동안 얼굴도 모르는 채 친 부모를 수없이 원망하고 원망하고 또
원망 했었는데, 그렇게 나에게 원망을 듣던 친모는 날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고, 생전 모르는 자가 날 버렸다니….
“나, 날… 버린게 당신이라고? 도, 도대체..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나는 침대 위에서 몸을 반쯤이나 일으키며 그에게 소리쳤다.
그가 버려준 덕분에 양부모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으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에게 고맙다고 절을 해야 할 판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한 채 오로지 가슴 저 밑바닥에서 부터
솟아 오르는 분노를 담아 소리를 질렀다.
그 남자는 그런 나를 같잖다는 듯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와 헤어지게 만들었으니까. 더 살 수도 있었는데 너 때문에 그녀가
내 곁을 일찍 떠나 갔으니까! 난 너 같은 건 원하지도 않았어! 단지
그녀가 내 곁에 좀 더 오래 있어주길 바랬지.”
“무, 무슨 인간이… 그렇다고 해도 애를 버리다니요? 아무리 당신
애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면 친부에게라도 데려다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내 분노에 찬 외침에 그 남자가 어이 없다는 듯 웃었다.
“킥… 킥킥킥… 친부? 친부라고? 정말 웃기는 군. 그래, 인간들이 말하는
뜻 그대로의 친부에게 가고 싶은 거라면… 멀리 갈 필요 있나?
바로 네 앞에 있지 않느냐?”
“예에?”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 못한 내가 어리벙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더 진한 비웃음의 미소를 띄우며 벽에 대지 않고 밑으로
그냥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들어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르키며
당당히 말했다.
“내가 바로 인간식으로 말하면 네 친부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큰 벼락을 맞아 버렸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말은 커녕 입을 뻥긋 할 수도 없을 것 같았지만,
억지로라도 입술을 벌리고 혀를 놀렸다.
“하…하.하.하… 지금 농담 해요?”
힘겹게 단어를 나열하는 내 입술은 직접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추위에 떨 듯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절대로 믿을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앙 다물고 두 팔로 상체를 감싸 앉았다.
그렇지 않으면 사시나무 떨듯 떨려오는 이 몸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부디 거짓말이라고 말해주길 바라며 그 남자를 바라보는데, 이 악마 같은
– 이순간에는 내 눈에 그렇게 보였다. – 남자는 날 바라보며 피식 웃고
있는 거였다.
마치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 덕에 나는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정리되자 온 몸의 떨림도 곧 멈췄다.
나는 아직도 날 내려다보고 있는 그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웃기지 마요. 절대 믿을 수 없어. 당신이 내 친부라고? 그렇다면
증거를 대 보시지! 당신이 내 친부라는 증거를 대보란 말이야!!”
그렇게 말하면 그가 증거를 못 댈테니 당연히 당황하며 자신의 말을
취소할 거라 여겼다.
허나,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조금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증거? 훗, 일부러 내가 보여줄 것도 없지.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될 테니까…”
“내… 모습을?”
이 방에는 거울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이 곳에서 눈을 뜬 뒤로 내 모습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 내 맘을 알아차렸음인지, 그가 자신이 직접 문을 열어 방 밖으로
나가며 나에게 손짓했다.
“거울을 찾는 거면 따라 와라.”
나는 떨리는 마음을 붙잡은 채 비칠 비칠 일어나서 그의 뒤를
따랐다.
거실에는 이 방안에서 몰려 나간 파랗고 녹색인 유령, 아니 저
남자와 이 애들의 말에 의하면 정령인 애들이 – 나는 은연중에
저들이 정말 정령이라고 믿게 된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가 안
믿으면 어쩔 것인가? 걍, 밑을 수 밖에…- 모여 있다가
그 남자를 보더니 움찔 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남자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우리가 나온 문
바로 옆에 있던 작은 문을 열고는 나에게 손짓 했다.
“들어가 봐라.”
아까 내가 거실에 나올 때는 바로 옆에 있어서 못 본 듯한 곳이었는데
그의 손짓에 따라 그 곳을 들여다 보자, 그곳은 욕실이었는데 놀랍게도
21세기의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욕실과 비슷했다.
비록 좌변기는 없었지만, 한쪽에는 천으로 가릴 수 있게 된 나무로 만들어진
욕조가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서서 세수를 할 수 있는 높이에 세면대가,
그리고 세면대가 붙어있는 벽에는 거울이 붙어 있었다.
아무래도 나 보고 저 거울을 보라고 이 곳으로 데려와 준 듯 했다.
그런데, 저 남정내 때문에 욕실에 있는 정령이 모조리 나간데다 그
남정네 또한 욕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 서 있는 바람에 욕실
안은 무척 어두웠다.
그러고보니, 아까 정령들이 방 안에서 모조리 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방 안의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던거 보면, 저 남자의 몸에서도 빛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 채 그를 그냥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나는 정말 둔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욕실 안에 거울이 있어본들 안이 어두컴컴하여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어두워서 잘 안보이는데요?”
그러자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대더니 손을 가볍게 허공에다 휘저으며
낮은 톤으로 중얼 거렸다.
“정말 가지 가지 하는군. 니트라스!”
그러자 마치 민들레씨 처럼 생긴 빛의 구가 생기더니 욕실로 들어와
사방을 훤히 밝혀주는 거였다.
놀라서 그 빛의 광구를 바라보자 그 빛의 광구는 마치 반갑다는 듯이
빛을 깜빡 깜빡 거렸다.
“이게… 뭐죠?”
“빛의 하급 정령, 니트라스다.”
“그럼… 얘도 정령이예요? 하지만, 쟤네들 처럼 사람처럼 안 생겼네요.”
“정령이라고 다 똑같이 생긴 건 아니지. 거울 안 보냐?”
“아…”
그제야 황급히 거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 니트라슨지 다무슨지 때문에 사방이 밝아져 전보다
훨씬 잘 보이기는 했지만, 하필 그 빛의 정령이 내 뒤쪽에 동동 떠 있었기에
얼굴에 그림자가 져 앞은 더욱 안 보였다.
“얘, 얘, 거기 있지 말고 이 앞쪽으로 좀 와바.”
그 동안 물의 정령들과 바람의 정령들과 이야기를 해서인지
나는 뒤도 안 돌아본 채 그냥 손짓만으로 그 빛의 정령을 불렀다가
처음 본 내 말을 들어줄 까 싶어 아차 했지만, 의외로 니트라스는
순순히 내 말에 따라 앞으로 와 줬다.
“아… 고마워.”
그러자 왠지 빛의 정령이 방긋 웃는 것만 같았다.
‘거참… 그냥 기분 탓인가…’
하지만 지금 내 기분이 낭만적인 분위기에 폭 빠져 있는게 아니라
무지 심각한 상태였기에 단순히 기분 탓만은 아닌 듯 했다.
뭐, 어쨌든간에 그에 대한 생각을 계속 붙들 순 없었기에
나는 차근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170cm나 되는 여자 치고는 좀 큰 키에 당연히 혼혈이라 생각했을
정도로 작고 이목구비가 뚜렸한 얼굴, 그게 바로 나였다.
‘아니, 평소 그대로고만… 도대체 뭐가 증거라는 거야? 얼굴이
닮은 것도 아니고.’
얼굴은… 인정하기 싫지만 저 남자 쪽이 훨씬 훠어어얼씬 잘 생겼다.
비록 나도 키도 크고 항상 커트 머리를 하고 다녀 여학교에서
보이쉬한 매력으로 애들에게 한 인기를 받고 있는 몸이었지만,
저 남자에게 비하니 명함도 못 내놓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두 얼굴이 닮은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다시 한번 얼굴을 확인한 후에 그에게 고개를 돌려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냐고 물으려는 찰나, 다시 급작스럽게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 눈에 뜨인 거였다.
너무 놀란 나는 아예 거울에 바싹 붙어서 들여다보다가 정 안되겠기에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하나 뽑았다.
“이젠 별 짓 다 하는군…”
내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남자가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에 대꾸해줄 여력이 없었다.
“내 머리…. 내 머리가….”
정말 기가막히게도 그 흑단 같이 까매서 염색해도 제대로 물도
안 들던 내 머리가 저 남정네와 똑 같은 연한 파란색, 혹은 좀 진한
하늘색(간단히 물색)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동양인임을 증명하는 흑갈색 눈동자가 저 남자와 똑같이
파란색으로 변해 있었다.
저 남자의 눈동자는 비록 파란색이지만 빛의 각도에 따라 파란 색으로
변했다가 은색으로 변했다가 했는데, 내 눈동자도 똑같이 그러는
거였다.
“이… 이럴수가… 이게 도대체….”
내가 망연자실하게 서 있자, 그 남자가 기분 나쁘게 히죽 거리며
말을 건넸다.
“어때? 확실한 증거지?”
그러나 이대로 수긍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를 향해 바락 바락
우겨댔다.
“이건 사기야. 분명히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 염색을 해 놓은게
틀림 없어. 나는 원래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였단 말예요!!”
물론 이게 억지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루 아침… 은 아니고 한 순간에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이 바뀔 수도 있는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갈뿐더러, 이 현실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저 남자와 똑같은 머리색과 눈동자색이라니…
만약 인정한다면, 내가 저 사람의 딸이라는 걸 인정하게 될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그걸 저 남자도 눈치 챘는지 그는 아까 처럼 비웃거나 이죽대는
대신 몸을 돌리며 지나가는 투로 말을 던졌다.
“억지 부리지 마라. 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이 세상에서 나와
너만이 가지고 있는 색이니.”
“하, 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는 분명히 검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카락
이었단 말이예요. 동양인 같은…”
그의 모습이 벽에 가려져 사라질 것 같자 나는 얼른 그의 뒤를
쫓아가며 반박했다.
“그건… 아마도 네가 있던 곳까지 내 힘이 미치지 못해서 그런 걸 테지.
이 세상에는 내 힘이 미치니까 본래의 색으로 돌아온 걸 테고…”
비록 단정 짓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말은 추측에 가까웠다.
그걸 알아챈 나는 그 곳에서 희망을 발견한 기분으로 얼른 다시
반박했다.
“그 반대일 수도 있잖아요. 원래 검은 색인데 이 곳에 와서
색이 변한 것일 수도…”
하지만,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가 몸을 획 돌리며 날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기에 나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어물거렸다.
‘젠장… 내가 왜 주눅이 드는 건지…’
“네 머리는 물고기 대가리냐? 내가 아까 말했지? 넌 이곳에서 태어
났다고. 태어날때 본 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색이었어.”
“그… 그래도…”
할 말 없게 만드는 말이었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기에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나를 그 남자는 귀찮다는 듯 쳐다보더니 거실에 놓여진
소파의 한 자리에 앉으면서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래서 주춤 주춤 그의 손짓에 따라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자
그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한가지 더 증거를 대주지. 너는 내 기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존재하는 정령들을 볼 수도, 게다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않느냐? 그건 같은 정령들 외에는 아무도
못하는 일이다. 신의 자식이며 자연을 사랑하고 조화로운 종족인
엘프도 자연에 분포해 있는 정령을 보지도 못해. 단지 정령과의
친화가 유달리 뛰어난 엘프라면 중급이나 상급 정령의 기운을
겨우 느끼긴 하겠지만… 이게 바로 내가 네 친부라는 증거다.”
“하아….”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한숨만 내쉬었다.
“게다가 지금 너는 모르겠지만, 너에게서는 나와 같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어. 네가 나의 계약자가 아닌 이상 이 세상에 나와 같은
기운을 풍기는 자가 있는 건 불가능 하지. 정령이 후손을 생산할 수
없다는 걸 감안해본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그걸 보면 넌 나와
관련된… 뭐, 뭐냐?”
그 남자는 설명해주다 말고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와 만난 이래 그의 이런 표정을 처음 보는 거라 통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난 그럴 여유도 갖지 못한 채 그의 멱살이라도 틀어쥘
모양새로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의 멱살을 틀어 잡고 싶었지만, 그와 내가 앉아
있는 가운데에 소파 탁자가 놓여 있는 바람에, 팔이 짦아 그의
멱살은 잡지 못하고 대신 탁자만 부서져라 내리쳤다.
하지만, 그 탁자는 뭔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큰 소리만 날 뿐
멀쩡했고, 대신 내 손만 엄청난 통증과 함께 새빨개졌다.
하지만 그 손을 부여잡고 호호 부는 대신 나는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게 무슨 소리냐구요?”
“뭐, 뭐가 말이냐?”
너무 당황스러운지 그가 말까지 더듬었다.
그가 처음으로 내 기세에 밀린 것이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갔다.
“당신 정령이라면서요? 정령왕 맞죠?”
“그, 그런데?”
“정령은 후손을 생산하지 못한다면서요? 근데 당신이 어떻게
내 친부가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당신이 내 친부가 아니거나
정령이 아니란 소리잖아요. 맞죠?”
그러자 그가 나에게 밀려 깨트린 포커 페이스를 다시 회복했다.
계속 나에게 밀릴 줄 알았던 그가 의외로 본래 신색을 되찾자
나는 어리벙벙했지만,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제자리로 돌아온 그는 이런 내 모습에 눈, 아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아라. 올려다 보기 귀찮다.”
다시 풍기기 시작한 그의 카리스마 덕에 나는 주춤 주춤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역시나, 내 쫄은 모습에 그가 픽 하고 웃었다.
‘저 나쁜 자식!! 분명히 내 친부라는 것도 다 뻥일 거다!!’
그는 소파에 등을 편안하게 기대고 다리를 꼬더니만, 약간 내리깐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확실히… 정령은 후손을 생산 못하지. 후손을 생산할 수 있는 생식기
자체가 없으니까. 우리 정령은 정령계에서 탄생하고 소멸한다.”
“거봐요. 그러니까 당신은 내 친부가…”
“말 끝까지 들어.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예의가 없는 거냐?
네 친모는 마법사이자 정령술사였지.”
“마법사? 모자에서 비둘기 꺼내고, 손수건에다 넣은 동전 사라지게
만들고… 그런 묘기를 보이는 사람 말하는 거예요? 내가 살던 곳에서는
마술사라고 하는데…”
내가 다시 한번 끼어들자 그의 눈썹이 꿈틀 거리더니 매서운 눈빛을
나에게 보냈기에 나느 찔끔 하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썹을 약간 치켜 뜬 그 상태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끝까지 들으랬지? 그리고 그런 재주를 가진 자를 누가 마법사라고 하는
거냐? 마법사라면 적어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불덩어리나 물줄기,
혹은 얼음 덩어리라도 생성해낼 수 있어야지.”
“설마…”
다시 한번 입을 열려고 하다가 또 한번 매서운 눈길을 받은 나는
얼른 입을 다물고 속으로만 생각 했다.
‘슬레이어즈에 나오는 리나 같은 사람이 이 세계에 있나보네…’
“정말…. 누가 널 키웠는지….”
‘젠장… 누가 데려 오랬나? 나도 한국에서 있고 싶다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또 눈길을 받을 것만 같아서
나는 속으로만 중얼 거렸다.
“정령술사는 알겠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정령들과 계약을 맺어
그 능력을 빌어 쓸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네 친모는 마법사이자
정령술사였어. 물론 마법보다는 정령술이 더 뛰어났지. 나 까지 소환해
계약을 맺을 정도였으니….”
설명하다 말고 잠시 회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던 그는 내가 눈만
말똥말똥 뜬 채 그를 바라보자 다시 입을 열었다.
“뭐냐, 그 표정은?”
“묻고 싶어도 물을 수가 없어서 설명만 기다리는 표정이요.”
내가 투명스레 대꾸하자 그가 다시 한번 나를 찌릿 노려봤다.
“아아, 또 그게 얼마나 대단한건지 모르겠지? 정말 설명하는 건 귀찮군.
그러니까… 내가 네 엄마와 계약을 맺기 전 인간과 계약을 맺어본 건 내가
태어나서 단 한번도 없었다. 몇백년 전에 바람의 정령왕은 어떤 인간과 한번
계약을 맺어봤다고 하지만 말야. 그러니까 알겠냐? 정령왕과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뛰어난 정령술사는 몇백년마다 한번 나올까 말까야.
그 외에 대부분의 계약자는 엘프나 드래곤이지.”
“드래곤?”
너무 놀라서 끼어들지 말라는 말을 잊고 내가 입을 열자 또 다시 찌릿
한 눈길이 나에게 쏟아졌다.
물론 이번에는 내가 몰라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드래곤, 얼마나 많이 들어본 말인가?
동양에는 용, 서양에는 드래곤, 성경책에도 나올 정도로 그 유명한 – 비록
실존하지는 않지만서도 – 영물(?)의 이름이 나오는데 내가 어찌 안 놀랄수가
있을까?
내가 묻고 싶은건, 한국에서 알던 드래곤과 이 곳에 있는 드래곤이 똑같은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드래곤은… 아, 정말 귀찮아. 그건 나중에 가르쳐 줄께. 정말
암 것도 모르는 애 가르치려니 귀찮군. 그러니까 궁금한 건 잘 간직했다가
나중에 질문해, 알았어?”
“예….”
“좋아. 다시 한번 설명을 끊었단 봐라… 내가 어디까지 설명했더라? 아, 맞아.
드래곤과 엘프가 정령술이 더 뛰어나단 이야기까지 했지? 우선 드래곤이라는
놈들은 나중에 설명하고, 엘프가 자연과 가까운 존재라고 하나 인간 보다
조금 더 나을 뿐, 정령왕까지 불러낼 수 있는 능력자는 극히 드물어. 그러니
네 엄마는 정말 대단한 정령술사라고 할 수 있는 거지.”
그러면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알아 듣겠냐?’ 라고 묻는 것 같아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 네 엄마는 하프 엘프였지만… 아, 하프 엘프는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을 말한다. 가끔 엘프와 인간 사이에서 후손이 태어나기도 하지.
어쨌든, 네 엄마는 인간 중에서도, 또한 엘프 중에서도 뛰어난 정령술사이긴
하지만, 마법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200살이 되어서야 겨우 7클래스의
마법사였으니까.”
“헉….”
내가 두 눈을 크게 치켜뜨며 놀란 탄성을 자아내자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날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래? 설마, 마법 실력이 너무 낮아서 놀란 건 아니겠지?”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제 친모가 200살이나 넘게 사셨다고요?”
“그야 당연하지. 네 엄마는 하프 엘프라고 했잖아? 아, 넌 아무것도 모르지…
엘프는 보통 1000년 동안 살아. 인간은 100년 동안 살지? 그래서 인간과
엘프의 혼혈은 보통 400에서 500살 정도 살지.”
거기까지 말한 그는 날 매섭게 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네 엄마는 너 때문에 최소한 200살은 더 살 수 있었던 생을
버렸던 거라고. 알겠어?”
“예…”
비록 내가 원한 건 아니지만, 나 낳은 뒤 돌아가셨다니 내가 뭔 할 말이
있겠는가?
“뭐, 그건 그녀의 선택이었지만… 후우, 정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맘대로 죽어 버리다니…”
‘생사를 누가 맘대로 정할 수 있는감? 다 자기 운명이지…’
내가 속으로 또 꽁알 거리고 있을때 다시 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험,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군. 어쨌든, 네 엄마는 날 소환한 뒤에
인간도, 엘프도 없는 오지로 가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나와
같이 있었지. 우린 그렇게 둘이 행복하게 살았어.”
거기까지 말한 그는 또 다시 회상모드로 돌입하여,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 세계로 소환된 나는, 설마 내가 그녀와 사랑에 빠질 줄은
몰랐지. 처음에는 그녀와 참 많이도 투닥대었는데… 나는 감히 정령왕인
나에게 바락 바락 대 들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건 꿈에도 상상 못했어.
우리 정령왕에게는 비록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한수 양보해 주는데
말이야.”
‘당신 성격이라면 나도 가만 안 있겠다… 지가 무슨 성격이 좋은 줄 아남?
하여간, 내 친모라는 분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나보네. 그러니까 둘이
그렇게 투닥 대다가 정이 들었단 말이지?’
그렇게 잠시 꿈속을 거닐던 그가 중요한 대목에 이르렀는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나를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그녀가 갑자기 나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하더군. 하지만, 내가 그녀의 원을 들어주고 싶어도 정령은
후손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들었을 당시에는 난 이룰 수 없는 바람을
이야기라도 해본 줄 알고 그냥 흘려들었었지. 하지만, 그녀는 그게
아니었던 거야.”
거기까지 말한 그는 탁자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내가 잠시 잊은 거지. 마법사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였으니까 말이야. 그녀는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나의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거야.”
점점 이야기속으로 빨려 들어간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탁자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날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날, 그녀가 나에게 나의 기운을 달라고 하더군. 아주 간절한 소망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진 기운의 약 1/10 정도를 달라고 하는 거야. 그건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절대 들어주지 않았을 좀 무리한 요구야. 그로 인해 내
수명이 1000년 정도 줄어들 테니까.”
그의 말에 내가 다시 한번 입을 떠억 벌리자 그가 아차 싶었는지 얼른
설명해 주었다.
“아아, 그래… 넌 내 수명을 모르지? 우리 정령은 급에 따라 수명이 다른데,
보통 하급 정령은 평균 50년 정도, 중급은 100년, 상급은 500년, 최상급은
1000년 정도 살지. 그리고 나 같은 정령왕들은 만년 정도 살다 소멸한다.
나는 이미 5000년 가까이 살아왔지.”
“허거걱… 그렇게나 오래?”
내 입이 떠억 벌어지자 그가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였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엄청 오랜 세월이지만… 나에게는 별 감흥이
없는 시간이다.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녀가 너무 간절히 부탁을
했기에 나는 내 수명을 1000년 단축시키는 셈 치고 그 부탁을 들어줬지.
하기사, 그녀가 내 기운 절반을 달라고 했다 하더라도 난 들어줬을 거다.”
‘헤에… 생각 외로 꽤 사랑에 목숨 거는 타입이었네…’
내가 피식 피식 웃자 그가 날 찌릿 하고 노려봤다.
“뭘 웃냐? 난 단지 그녀가 마법 실력이 너무 늦게 늘어나는 것을 답답하게
여겨 내 기운의 힘을 빌리려는 줄 알았다. 내 기운이야 마법사들이 보면
물의 기운을 띈 마나였으니, 내 기운을 받으면 그녀의 마나가 증포 될 테고,
그럼 8클레스의 마법사가 되는 것도 가능했을 테니까. 아아, 넌 또 마나가
뭔지 모르지? 그건 나중에 설명해주마.”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깊은 한숨도 한번 내쉬고, 잘 넘겨진 머리도 괜히 한번 쓸어 넘기고,
시선도 소파를 향했다, 탁자를 향했다 하는 걸 보니 이제부터 말하려는
건 좀 말하기 어려운 내용인 듯 했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그녀에게 내 기운을 넘겨주고 갑작스럽게 기운을 잃은 몸을
회복하기 위하여 정령계로 돌아가 있는데, 그녀의 주변에서 마족의 기운이
느껴졌다. 너무 놀란 나는 채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 곁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녀를 만날 수가 없었지. 마족을 불러내어 계약을 맺는
동안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으려고 집 주위에 강력한 방어 결계를 쳐 놓았던
거야. 그녀 혼자만의 힘이었으면 비록 다 회복 못한 나라도 어떻게 해서든
뚫고 들어갔겠지만, 마족의 힘까지 합쳐 졌던 터라 나는 그녀 곁으로 갈
수가 없었다.”
마족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너무 분위기가 심각했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 거렸다.
“하는 수 없이 정령계로 돌아와 그녀 주변에서 마족의 기가 사라지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나는 사라지자마자 그녀에게 돌아갔지. 가서 왜 마족과
계약을 하는 그런 위험한 짓을 했냐고 따졌지. 물론 그녀를 위해서 하는
소리였어.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내게 너무나 냉정하게 날 몰아 붙였고,
그 모습에 화가 난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와 계약으로 묶인 관계라 그녀가 부르면 가야 하겠지만, 그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그는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폼을 보아하니 그때 그랬던걸 너무나 후회하는 모양이었다.
“그녀 또한 날 부르지 않았지. 10개월이 넘을 동안 단 한번도 부르지 않았어.
그녀에게 소환되어 계약을 맺은 뒤로 매일 매일 같이 지냈던 우리가
처음으로 오랜 시간동안 떨어져 있었던 거야. 그리고…. 10개월이 지난 뒤
그녀가 처음으로 날 불러지.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달려갔을 때 본 것은
마족에게 잡혀 마악 마계로 끌려가는 그녀의 시체와, 이 집에 덩그라니
남아 있는 너, 그리고 네 옆에 고이 접혀진 그녀의 편지 뿐이었다.
난 널 보는 그 순간 알 수 있었지. 모를 수도 없었을 거다. 네 몸에서는
내 기운이 강렬하게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네가 그녀가 말한 나와 그녀의 아이라는 걸 말이야. 아마 그녀는 내가
후손을 생산할 수 없자, 나의 기운을 마족의 능력으로 아기의 씨로 만들어
그녀의 몸 속에 받아 들인 듯 해.”
‘그러니까… 저 남자의 기운이 정자가 되어서 내 친모의 난자와 만나
내가 만들어졌단 소리지? 에혀… 친부 맞네… 그럼 내가 저 남자를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나…?’
내가 속으로 그렇게 고심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널 본 순간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그 즉시
널 한번 안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차원의 문을 열어 다른 세계로 보내
버렸지. 네 몸이 차원을 넘나들기에는 약한 것도 생각지 않았고, 어떤
세계로 떨어지던, 혹 잘못 되어 차원의 틈에 떨어져 죽어버린다 해도 아무런
상관 없었다.”
너무나 냉정한 말에 나는 입이 저절로 떠억 벌어지는 걸 느꼈다.
‘지, 진짜 친부 맞아? 절대로 아버지라 안 부를 거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남긴 편지를 보지도 않고 그대로 그녀와 내가 살던
집을 결계로 단단히 막아, 내 영역인 이 바다속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혔다. 어떠한 이의 손도 닿지 않게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자기가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기사, 처음 말을 시작한 이유가 그 남자가 내 친부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물어볼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는 뜻 같았다.
‘뭐야… 제일 중요한 건 안 가르쳐 놓고선…’
그가 내 친부라는 것 보다 가장 중요한 것…
“그런데, 그렇게 보내 버렸으면서 왜 절 다시 데려 오신 거예요?”
‘한국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물론 내가 실수로 생겨서 버려진게 아니란 걸 알아서 기분은 좋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출생에 대한 호기심에 불과한 일이었을 뿐,
나는 내 가족이 있고, 있어야 할 곳은 한국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내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서 ‘여기서 아부지랑 살겠슴다!’
라고 할 마음은 요만큼도 없었다.
내가 없더라도 저 성격 드러운 남자는 잘만 살것 같은데 일부러
옆에 있겠다고 힐 필요도 없을것 같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 이야기도 다 들었으니 기회를 봐서 ‘돌려보내 주세요~’
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내 질문에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기에
나는 부탁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네 친모가 원했으니까.”
“예?”
“귀 먹었냐? 네 친모가 원했다니까.”
“어, 언제요? 제 친모는… 에.. 그러니까…”
차마 나 낳고 죽은 다음에 시체 마저 마족이 가지고 갔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말끝을 흐렸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었기에 그 남자는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입을 열었다.
“물론 내가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지. 젠장… 그 마족이
어떤 놈인지는 알아 놨어야 했는데… 어쨌든, 네 친모는
내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미리 미리 준비를 해 놓은 거지.
네 옆에 놓아둔 편지를 보니 널 보살펴 달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널 데려왔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하….”
‘이거 이거….’
왠지 단호한 그의 말에서 불안함이 느껴졌다.
“저어… 저는 그 곳에서 잘 살고 있었거든요? 양부모님도
아주 좋은 분들 만나고, 동생도 생겼고요. 양부모님이
절 친자식 처럼 대해주고 계세요. 그러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으시구요, 아마 친모께서도 하늘 나라에서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 이만… 돌려보내 주셨으면…
엄마 아빠가 무지 걱정하실…”
쾅~!!
나는 움찔 놀라서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남자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며 소파용 탁자를
주먹으로 강하게 내려 친 거였다.
물론 탁자는 멀쩡 했지만, 그 소리와 그 남자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날 쫄게 만들기 충분 했다.
“한가지 말해두겠는데, 네가 엄마라고 부를 존재는
이 세상에서 단 한명 뿐이다. 이미 죽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는 건 내가 용납 못해, 알겠냐?”
“하, 하지만, 그 분들은…”
쾅!
“알.겠.냐.고.물.었.다.”
“예에…”
‘흑흑흑… 내가 언제 이리 비굴하게 되었누….’
역시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는 말은 진리였다.
억지로 대답하긴 했지만, 그게 마음에 든 듯 그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끼자 나는 다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저 이만 가봤으면 좋겠는데요… 아무래도 너무 오래
여기 있어서리…”
그러자 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가며 날 바라
보았다.
“어딜 가?”
“예? 저, 저기… 집에요…”
“내 말을 뭘로 들은 거냐?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
“예에? 하, 하지만…”
그런 황당 무개한 말에 내가 막 반박을 하려고 하려는데
그가 내 말을 가로채며 자신의 말만 했다.
“아까 말했다시피, 난 네 엄마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내가 널 돌봐줄 것이다.”
‘이봐 아자씨, 당신과 사느니 차라리 소녀 가장이 되겠다.’
“저기요, 정말 그러실 필요 없다니까요? 저 거기서 잘 살고
있었다고요. 제가 거기 있는게 편해요.”
나는 정말 간절한 애원조로 말했다.
그러나 이 남정네는 내 말을 단지 콧방귀만큼 취급했다.
“흥, 내 아들이 그런 하찮은 인간들의 보살핌을 받는다니…
절대 용납할 수…”
그러나 이번에는 물의 정령왕이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그의 말에 분노한 내가 벌떡 일어나 두 손으로 탁자를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탁자는 멀쩡하고 내 손만 아팠다.
“정말, 이 영감탱이가 누구 보고 하찮대? 그 분들이 내
부모님이라고 했잖아요!! 날 친딸처럼 키워주신 분들이라고요!!
당신이 내 친부라면, 어떻게 가족 같은 사람이랑 갈라놔요?
난 돌아 갈 거야!! 돌아 갈 거라고!!”
내 분노에 찬 외침에 정령왕은 잠시 움찔 했지만, 그건 정말
잠시일뿐, 다시 남을 깔보는 듯한 그러한 분위기의 무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입 아프게 하지 마라. 넌 여기서 사는 거야!”
전 같으면 그의 차가운 말투에 움찔 해서 주눅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너무 분노에 찬 나머지 나는 바락 바락 대들었다.
“누구 맘대로! 난 돌아갈 거야.”
그러자 이 남정네가 진하게 비웃는 미소를 띄우며 날 바라보았다.
“킥, 어디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 봐라. 마법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령왕도 아닌 네가 차원의 문을 열수나 있을까?”
“이… 이 영감탱이가!!”
“누구보고 영감탱이라는 거냐?”
“5000년이나 살았다면서요? 그럼 영감하고도 한참 영감이지.
빨랑 나 보내줘요!! 난 절대로 여기서 안 살아. 납치범으로
고소해 버릴까부다!!”
“납치범? 누가 납치범이라는 거냐? 내 아들 내가 데려 온걸
누가 뭐라고 그래?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감히 나 물의 정령왕
엘라임에게 누가 뭐라 할 수 있다는 거지?”
“누가 영감탱이 아들이라는 거예요, 누가? 난 여자라구요.
여.자! 딸! daughter!”
나는 한국에 살때 남자 같다는 말에 조금 민감했다.
내가 가슴이 좀 적고, 여자 치고 큰 키에 머리도 항상
커트 머리를 하고 다녀 내가 봐도 남자처럼 보이긴 했지만,
나는 유난히 남자 같다는 말에 크게 반응하고는 했다.
솔직히 말하면 스스로 생각해 볼때, 내가 그렇게 보이던 말던,
그런 소리 듣던, 말던 크게 상관은 없었다.
단지 날 부모님의 양녀라는 증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혼혈이라는
말에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 없다보니, 그 대신 남자 같다는 말에
대신 민감하게 굴곤 했는데, 그게 어느새 버릇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지금도 아들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벌컥 한 거였다.
“하, 네가 어딜 봐서 여자라는 거냐. 네가 여자라는 증거 있어?”
“이… 이 영감탱이가!! 척 보면 몰라요? 목에는 아담즈 애플이 없잖아요.
그리고, 비록 너무 작아서 안 보이지만 분명히 나는 여기에… 어라,
어라라?”
너무 분노한 나머지 내 가슴을 꾹 누르며 말을 하던 나는 평소와는
다른 좀 이상한 감촉에 말을 멈추고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어라… 어라라??”
그러자 그 모습에 엘라임이 손등으로 머리를 받치면서 무지
한심하다는 어투로 물었다.
“너… 지금 뭐하냐?”
그의 말에 지금 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나는 얼굴이
확확 타올랐다.
“뭐, 뭘 보는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요!!”
나는 후다닥 튀어서 맨 처음 내가 누워 있던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 곳에는 맨 처음 내가 봤던 것 처럼 초록색 정령들이 모여서
허공에서 떠돌다가 내가 뛰어 들어오자 동그래진 눈으로
나에게 모여 들었다.
[아, 우리를 볼 수 있는 인간이다!!] [인간이 다시 왔어!!] [어떻게 된 거야, 인간?]“시, 시끄러!! 너희들도 다 나가!!”
그러자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정령들이 삐졌는지
볼을 퉁퉁 불렸다.
[싫.다!] [안 나갈 거야!!] [우리가 왜 나가야 하는데?] [맞아, 맞아.] [우린 여기 있을 거야!]“너희들… 그럼 저 밖에 있는 영감탱이 불러 온다? 물의 정령왕이라고
하는…”
그러자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령들은 헛바람을 삼키더니 쏜살같이
방에서 사라졌다.
[히익!!] [알았어. 나간다구!] [나가면 되잖아!] [정령왕님은 불러오지 마!]그러나 단 한명, 안 나간 정령이 있었으니… 아까 내가 욕실에
들어갈 때부터 불려와 계속 내 머리 위에 동동 떠 있는 빛의
하급 정령 니트라스 였다.
이 애는 아까 정령왕이 불러내어 나에게 붙여준 후로 계속 날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날 따라와 방으로 들어온 거였다.
“너도 보면 안돼?”
비록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아서 괜찮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불안해서 다짐을 받으려 하자 그 빛덩어리가 알겠다는
뜻인지 살짝 아래 위로 움직여 보이더니 위로 날아 올라가
천장에 찰싹 붙었다.
그제야 나는 안심하고 후다다닥 윗 티를 걷어 올렸다.
비록 내가 수영장에서 납치(?)를 당한거긴 하지만, 이 곳에서
눈을 떴을 때 환자복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엄마가 날 데려다 놓은 줄 알고, 엄마가
갈아 입혔겠거니.. 하고 아무렇지 않게 있었는데, 지금은 이
옷을 입고 있는게 무지하게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 보다도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비록 A 컵이라고 하나
내가 여자라는 걸 증명해주는 가슴이 안 느껴지고 그냥 허허
벌판 같이만 느껴지는 감촉이었다.
그래서 후다닥 티의 앞섭을 걷어보니… 이게 왠일인지…
내 가슴이 남자처럼 평평하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호, 혹시….”
너무 놀란 나는 말까지 더듬으며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풀러 보았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고추는 달려 있지 않았다.
“후우… 다행이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정령왕이 들어왔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냐?”
“꺄아아악~~~”
“우악!!”
반사적으로 내지른 내 비명에 엘라임 조차 놀라서 한발짝
뒤로 물러섰다.
“뭐, 뭐냐?”
“뭐냐니요, 뭐냐니요? 숙녀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이런 실례가 어디 있냐구욧!!”
나는 재빨리 바지를 추스리고 티의 윗섭도 내리면서
그에게 쏘아 붙였다.
그러자 엘라임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누가 숙녀라는 거야? 아직도 네가 여자가 아니라는 걸
모르겠냐?”
“내가 여자가 아니면 남자인가요? 나 남자 아니예요! 확인(?)도
했다고요!!”
“물론 남자라고 할 수도 없지. 흠…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길래
성이 있을 줄 알았더니만… 하지만, 너도 보다시피 넌 성이 없어.
무성이라고 해야 할지, 중성이라고 해야 할지… 내 기운이 강해서
그런 건가?”
손가락으로 턱을 쓸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엘라임의 말에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제가 중성이라니요? 저 여자예요.”
“너 여자 아니야. 정령이 여자 남자 나뉘어 있는 거 봤어?
정령에게는 성이 없지. 그런고로 내 아들인 너도 성이 없는… 건가?
허참, 너 같은 종족은 이 전에도 없고 이 후에도 없어서
잘 모르겠군. 하지만 보통 성이 없으면 남자로 지칭되지 않나?”
엘라임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내뱉은 말이 내 머리 속에서 뱅뱅
도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니… 남자도 아니라니… 차라리… 남자로
변하는게 났지…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래…’
머릿속이 계속 빙글 빙글 돌아가자 시야까지 뱅뱅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이 세상에 둘도 아닌 단 하나밖에 없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자라는 것.
1/4은 엘프의 피가, 1/4은 인간의 피가, 1/2 은 정령의 기운이… 거기에
마족의 기운이 쬐께 보태진게 나….
‘그러면… 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