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33)
제 27화 예상치 못한 만남, 예상치 못한 사건
나는 실레스틴이 오면 쉽게 들어가서 내 볼일을 보고 나올 수 있으리라 여겼다.
아무리 정령사라도 실레스틴이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기척을 쉽게 숨길 수 있을테니 그녀가
저 성 안에서 서재의 위치를 찾아 오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였다.
하지만, 한참 뒤에 그녀가 돌아왔으때 나는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커다란 성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면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내 어리석음때문이었긴 하지만…
[서재로 보이는 방이 정확히 23개던데요?] [아, 그, 그래?]조금만 생각해보면 서재가 그쯤 되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수도에 있던 조엘네 커다란 저택만 해도 그랬다.
조엘네 아버지인 공작 서재는 물론이거니와 조엘 개인 서재에 그 여동생에게도 공부방 비스무리한
작은 개인 서재가 있었다.
거기에 집사에게도 개인 서재가 있었고, 기사단장에게도 개인 서재가 딸려 있었다.
뭐, 서재라고 해봐야 거의 사무실 용도로 쓰이고 정작 수많은 책들을 보관하는 도서관은 따로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여기에서도 백작과 그의 직계 자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을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 서재를 가지고 있을 거였다.
아니면, 예전에 어떤 사람들이 사용했다가 비워놓은 곳이거나…
그래서 나는 다시 실레스틴에게 부탁해했다.
[저기… 미안하지만, 다시좀 가줄래? 이번에는 지금도 쓰고 있는 서재이며, 그 서재에 커다란여자 초상화가 걸려 있는 곳이면 돼.]
생각 같아서는 백작 개인 서재를 찾아달라고 하고 싶지만, 내가 불러낼때까지는 정령계에서만
살던 실레스틴이라 아직 인간 사회에 대해 잘 모르기때문에 백작이 뭔지 잘 모르고 있었다.
만약 내가 그 백작이란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면 부탁하기가 쉬웠겠지만 말이다.
내가 다시 성으로 그녀를 보내자 실레스틴은 무지 불만에 찬 표정을 해보이더니 다시 성으로 날아
들어갔다.
실레스틴이 내 두번째 주문에 맞는 서재들을 찾아 돌아왔을때에는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아아, 어차피 성에 숨어 들어가는 건 한밤중이니까… 지금은 우선 밥부터 먹어야겠어. 배가무지 고프거든.]
내 말에 실레스틴이 다시 한번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이 서재에 대해 알아오자마자 들어갈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녀가 내 부탁에 불만 어린 표정을 지어 보여서 잠시 후에 성에 몰래 잠입해 들어갈 때 내 호위를
그녀에게 맡기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호위할때 그녀는 정령이 아닌 실체를 가진 인간처럼 행동하게 해주겠다고도 해서
그녀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몇시간 뒤로 미뤄졌으니 실레스틴이 불만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에이, 그런 표정 짓지 마. 어차피 성으로 들어가는 건 한밤중에 할 거였다고. 게다가 들어갈 때내가 배가고픈 상태라면 곤란하잖아.]
그래서 실레스틴을 그렇게 달래놓고 다시 마을로 돌아간 나는 오늘 밤 백작의 성에 잠입해 들어
가리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잡입 결행일은 또 하루 미뤄지고 말았다.
식사를 하러 우리가 방을 잡은 여관에 갔다가 잭슨 녀석에게 붙잡혔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아무데나 가서 배를 채우고 돌아다니며 시간을 때우려고 했는데, 축제 분위기가 고조
되었기 때문인지 너무 거리가 복작복작 해서 어디가 어딘지 몰라 헤매다가 짜증이 나서 그냥
여관으로 돌아 왔던 것이었다.
하기야, 아무데나 음식 파는 곳으로 갔다가 맛없는데 걸려서 돈 버리고 입맛 버리면 어쩌는가?
그냥 잘 아는 안전한 곳으로 가는게 났지 싶어 갔다가 식당에 있던 잭슨과 마주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하필 그때 이 녀석이 식당에 있을 건 뭐람. 점심 시간이 지나도 한참이나
지나 있었는데…’
그리하여 나는 그 다음 날에야 잭슨과 듀비를 재워두고 몰래 성에 잠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 날이 백작의 생일이라 성에서는 거대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흐음… 이걸 좋아해야 할지… 어쨌든 복작복작해서 경계가 삼엄하지는 않겠군. 그럼 그냥
가볼까?’
나는 하늘이 어두워져감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불을 밝히고 시끌시끌한 성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아래로 내려갔다.
원래는 조용히 숨어 들어갈 장소를 찾아 내려고 어둑어둑해질 즈음 미리 성 위로 날아와서
살펴 보다가 성의 불이 다 꺼진 한밤중에 몰래 숨어들어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파티가 열린다면 아마 새벽까지 저렇게 환하게 밝혀 있을테니 저녁이나 한밤중이나
그게 그거일거 같아서 기다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때를 기다려야 하는 일도 아니니 말이다.
나를 태워주고 있던 슈리엘이 인적이 없어보이는 3층의 어떤 커다란 창문 앞에 나를 내려줬다.
비록 창문이 잠겨 있었지만, 정령들이 내 곁에 붙어 있는 한 나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해인님, 눈 앞에 보이는 인간들은 모조리 쓰러뜨리면 되는 거죠?]소리나지 않게 조용히 방 안으로 내려서자 미리부터 내 옆에 형상을 드러낸 실레스틴이
흥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냐, 아냐, 내가 부탁할때만 나서서 쓰러뜨리면 돼. 아, 그리고 명심해야 할 건 절대로 죽이면안된다는 거야.] [에이, 보는 족족 모조리 쓰러뜨리는게 아니었어요?]
실망한 표정의 실레스틴을 보며 나는 땀을 삐질 흘렸다.
[나는 이 성을 접수하기 위해 온 게 아니거덩. 그러니까 내가 부탁할때까지는 절대 나서서두안돼고, 사람들에게 들켜서도 안돼, 알았지?] [네에~]
불만 어린 대답이었지만,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안심하고 빈 방을 가로질러 커다란 방 문에
귀를 대 밖에 누가 있어 소리를 내는지 들으려고 하는데 실레스틴이 흥미 어린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지금 뭐하세요?] [뭐 하긴, 밖에 누가 있나 없나 알아보려는 거지.] [에, 그런건 제가 할게요.]내 말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실레스틴이 문틈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그녀의 얼굴이
마치 문을 그대로 통과한 듯 쑥 밖으로 나가는 거였다.
‘헉… 유령 같다…’
내가 그 장면을 보고 경악하고 있는 순간 문 밖으로 나갔던 실레스틴의 머리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더니 생긋 웃는 거였다.
[아무도 없네요.] [아, 그, 그래? 그럼 가자. 여기서 가장 가까운 서재가 어디 있지?] [음… 이 윗층에도 한 군데 있습니다.] [그래? 그럼 우선 그쪽으로 가보지.]우리가 몰래 들어온 건물은 성을 정면에서 바라봤을때 오른쪽에 있는 두 커다란 건물 중 끝에
있는 곳이었다.
그래 여기에 과연 백작의 서재가 있을까 싶었지만, 하나 하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이.. 복도 끝에 있으려나?]몰래 숨어 들어오기는 했지만, 복도에 아무도 없었고, 옆에 든든한 실레스틴까지 있자 나는
간덩이가 부었는지 몰래 숨어 살금살금 가는 대신 당당하게 실레스틴을 대동하고 계단을 찾아
걸어갔다.
그런데 너무 긴장을 풀고 있었던 모양이다.
막 복도 끝에 다다랐을 즈음, 복도 끝에 있던 계단을 올라오는 시녀의 기척을 눈치 채지 못했으니
말이다.
조금 긴장하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면, 아무리 복도와 계단에 두툼한 양탄자가 깔려 있는 바람에
시녀의 발걸음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해도 기척은 느낄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허걱…’
나는 무지 놀라 멈칫 거렸지만, 실레스틴은 뭐가 뭔지 모르니 태연하게 그 시녀가 올라오는
계단 쪽으로 다가가는 거였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시녀는 계단을 올라오는 중이라 앞만 바라보고 있다가 옆에서 실레스틴이
다가오자 그제야 그녀를 알아차리고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실레스틴이 지나가도록 비켜서는 거였다.
아마도 실레스틴의 옷차림이 화려해서 성으로 초대 된 손님 중 하나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실레스틴이 지금 바람의 창은 숨기고 있지만 옷차림만은 귀족 영애들이 입는 드레스 못지 않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초록색의 드레스 였던 것이다.
시녀의 행동에서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나는 멈칫했던 발걸음을 다시 떼고 얼굴에서도 당황한
기색을 지운 채 그 시녀에게 다가갔다.
실레스틴을 초대 된 손님 중 하나라고 오해했다면, 그걸 이용해먹을 생각이었다.
“저기, 백작님의 서재가 어디지? 거기로 레이디를 모시고 오라는 명을 받았는데…”
나는 실레스틴이 어느 귀족가의 영애라는 걸 은근히 강조하면서 묻자 시녀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았는지 날 똑바로 바라 보지도 못하고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네, 네. 백작님의 서재는 본관 2층에 있습니다.”
“그래? 고마워.”
나는 그녀가 보지도 않았지만 생긋 웃으며 위쪽으로 올라가려는 실레스틴을 이끌고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순간 나는 멈칫 거릴 수 밖에 없었다.
[에… 본관이 어디야?]분명 이 성을 이루고 있는 커다란 다섯 건물 중 하나인건 분명한데, 그 중 어디인지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다시 그 시녀를 붙들고 본관이 어디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눈치 챌까봐 물어볼 수도
없고…
‘끄응… 어쩌지?’
실레스틴과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곧 이어 또 다시 계단을 올라오던 다른 시녀를 보고는 고민을
맺을 수 있었다.
‘질문을 달리 하면 되잖아?’
“이봐요, 본관을 어떻게 가죠? 아직 여기가 익숙하지가 않아서…”
아까 그 시녀가 실레스틴을 귀족 영애로 오해한 걸 보고 난 뒤 나는 아예 그렇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뭐, 귀족 영애가 시녀가 아닌 시종을 데리고 있는게 어쩌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귀족 영애 맘 아니겠는가?
내 질문을 받은 시녀 또한 실레스틴을 귀족가 영애인줄 알고 감히 바라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가르쳐줬다.
이 성은 위에서 보면 다섯 건물이 통째로 다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 그러니까 일층은
돌아가면서 일층대로 쭈우욱 연결 되어 있고, 이층은 이층대로 쭈우욱 연결 되어있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 안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각 건물은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큰 건물과 건물을 잇는 통로로 보이는 것도 따로
독립된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래 본관으로 가려면 이 건물을 나가 마당을 가로 질러가야 했다.
심정 같아서는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하늘에서 떠 올라 누구의 눈에 뜨이지도 않게 본관
건물로 향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그것대로 귀찮을것 같아서 –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또 인적
없는 곳으로 골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니… –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실레스틴을 앞세워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건 정말 잘 선택한 방법이었다는 걸 나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본 건물로 가는 동안 수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기는 커녕 친절한 안내까지 받아 가며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모든 호의는 내가 아닌 실레스틴을 향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모자를 깊숙히 눌러 써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실레스틴의 시종이라고 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본 건물은 양 옆의 건물들을 이어주는 가운데 부분에 있던, 성의 가장 큰 건물이었다.
하기야, 성의 커다란 입구가 그 곳에 있는데다 건물도 성을 이루고 있는 건물 중 가장 컸으니
누구라도 쉽게 눈치 챘을 것이다.
못 알아챈 내가 어리석은 거지.
‘쩌비… 별로 긴장을 안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네. 이런 단순한 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얼어 있었다니…’
커다란 본관의 홀에 들어서며 나는 남 모르게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실레스틴에게 속삭였다.
[실레스틴, 2층으로 가자.]오늘 저녁에 열리는 백작의 생일 축하 파티는 1층에 있는 파티장에서 열릴 예정이라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쪽으로 향하고 있어 우리만 2층으로 올라가는게 의아하게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우리는 당당하게 계단을 올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2층까지 온 건 좋았는데…
‘도대체 이 많은 방들 중 어디가 백작의 서재인 거야?’
넓고 길다란 복도 위를 걸어가며 나는 난감한 눈으로 쭈우욱 늘어서 있는 고풍스럽고 커다란 나무
문들을 바라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방 문마다 열어서 확인하고 싶었지만, 복도를 바삐 오가는 하녀들이나 시종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지나가는 시녀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반년 가까이 공작가에서 시종 노릇을 한 덕에 쌓인 내 경험이 그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었기에
감히 그러지 못했다.
사실 공작가에서도 내가 아무리 조엘의 시종이라고 하지만, 백작의 서재에는 함부로 드나들
권리가 없었다.
그 곳은 백작의 직계 가족과 백작의 신임을 받는 몇몇 부하들만이 드나드는 것이 가능했다.
청소 조차도 해럴드 집사와 시녀장이 특별히 고른 시종과 시녀들이 담당했고, 다른 시녀나 시종이
들어갔다간 큰 벌을 받았다.
그런건 백작 가족들이 사용하는 침실이나 개인 서재도 마찬가지였다.
뭐, 나야 조엘이 이상하게 신임을 해서 그의 방을 담당할 수 있었던 거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내가 어떤 사정에 의하여 – 예를 든다면 해럴드 집사나 조엘의 심부름으로 – 백작의
서재에 간다고 해도 그때는 항상 서재에 백작과 그의 심복들이 있을 시간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해럴드 집사, 혹은 대니 형과 항상 동행한 상황에서였다.
거기다가 그런 중요한 곳이 있는 구역은 그 집안에서 오랜 세월 일을 해온 베타랑 시종이나 시녀가
담당하고 있었기에 지금이 아무리 바쁜 시기라고 해도 어딘가에 담당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곳에서 백작 서재의 위치를 묻는 다는 건 ‘나 수상한 사람이요’라고 광고하는 거나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물론, 여기서 멀찍이 떨어진 별관이라면 아직 경험이 별로 없는 초짜 시녀나 시종들이 담당할
테니 수상하게 보일 염려 없이 당당하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였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백작 서재의 위치를 알아내야 하거니와 그 곳에 들어가는 것도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들어가야 했다.
아마, 이 복도를 계속 비워두려 하지는 않을테니 밖의 창쪽으로 들어가야 할테지만 말이다.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고 우선은… 백작 서재의 위치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투명인간이 아닌 이상 저 많은 눈들 모르게 알아내는 건 불가능 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존재가 내 곁에 있었으니…
‘아, 정말… 자꾸 실레스틴의 능력을 잊어버린 단 말이야…’
나는 내 머리의 능력에 다시금 회의를 느끼며 실레스틴을 불렀다.
[실레스틴, 이 층에 서재가 어디 있는 줄 알아?]그러자 실레스틴의 뚱~ 한 대꾸가 들려왔다.
[다음 다음 방문이요. 지금 제 안내로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나는 그녀의 뚱한 반응보다는 그녀의 말에 놀라서 물었다.
[뭐? 아니 너는 서재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있었단 말이야?]그러자 실레스틴의 기가 막히다는 투의 대꾸가 돌아왔다.
[이 성에 들어오기 전에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 있는 서재들의 위치를 알아내라고 하신 건해인님이셨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알고 있죠.] [아앗~ 맞다. 그랬었지?]
‘아아~ 내가 오늘 왜 이럴까?’
지금 옆에 잭슨 녀석이 없다는 걸 극히 다행으로 여기며 나는 다시금 속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실레스틴과 나는 2층 복도를 당당하게 지나 3층으로 올라갔다.
밖으로 나가기는 나가더라도 우선은 시선이 없는 곳으로 가야 했으니 말이다.
다행이 3층 복도는 2층과는 달리 돌아다니는 시녀들이 없이 조용했다.
뭐, 가끔 시녀들이 왔다갔다 했지만, 우리가 아래층 서재와 가깝고 비어있는 방을 찾았을 즈음에는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좋아, 들어가자.]그 다음 서재로 다시 몰래 들어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지 서재가 2층이라 지상에서 가까운 곳이었기에 다른 사람들 눈에 쉽게 뜨일까봐 걱정을
했지만, 그것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실레스틴이 흙먼지를 동반한 바람을 불게 했기 때문이었다.
추운 겨울날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사람들은 저절로 몸을 움츠러뜨리기 마련인데, 거기에다
흙먼지까지 동반 되었으니 그것들이 눈에 들어가지 안도록 자연스레 눈을 감거나 찌푸리는게
당연했다.
그렇게 흙먼지 때문에 시선들이 흐트러진 사이 나는 다시 실레스틴의 도움을 받아 잠긴 서재의
창문을 쉽사리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쯤에는 갑작스런 흙먼지 바람은 그쳤고 말이다.
아무도 없는 서재는 불 조차 모두 꺼놨기에 어두컴컴했지만 – 물론 서재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지만 말이다 – 실레스틴과 내가 주위를 보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서재 안으로 들어와서 깊숙히 눌러 쓴 모자를 벗고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재는 꽤나 넓었다.
레이언 녀석의 사무실의 두배 정도?
커다란 커튼에는 얇은 레이스 커튼과 두꺼운 빌로드 커튼들이 이중으로 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푹신해 보이는 고급스러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커다란 책상이 창문 앞에 떠억 버티고 있고 그 앞에는 고급스러운 소파 세트, 주변에는 화려한
장식장과 무지 견고해보이는 책장이 있는 것이 전형적인 서재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듯한 커다란 벽난로가 있었고, 그 위에 내가 찾던 것이
있었다.
“아~”
내 상반신을 다 가릴 정도의 커다란 초상화에는 대충 17 ~ 18세의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실제로 만지면 무척 부드러울 것 같은 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그 소녀는
당당하고 지적인 빛이 흐르는 제비꽃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실레스틴… 이분이 내 어머니야.]커다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을 받은 채 하얗고 고급스러운 의자에 우아한 자태로, 그러나
허리와 어깨를 반듯이 펴 당당함을 잃지 않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내 어머니는 자존심 있고 당찬 여인이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저 성질 드러운 엘라임이 폭 빠진 여인이었으니 말이다.
목이 넓게 파인 연한 보라색 실크 드레스를 입어 눈과 하얀 피부가 화사하게 돋보였고, 목과
귀에는 한 세트로 보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귀걸이가 걸려 있었고,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진
엄마의 손에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외할머니께서 물려주신 마법 반지는 왼손의 검지에,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후계자
반지는 오른손 중지에 끼워져 자신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목에 – 후계자 반지는 너무 커서 끈에 꿰어 목에 걸구 있었다 – 걸린 후계자 반지를 만지작
거렸다.
‘헤에.. 저때에 벌써 가지고 계셨구나.’
어머니는 화려한 다이아 장신구나 우아한 드레스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아름다우셨다.
얼굴은 나와 똑같은데 말이다.
뭐, 그래도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위엄과 우아함을 지니고 계셨지만 말이다.
그 모습을 바로 대하자니 인정하구 싶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핀잔이 새삼 납득이 갔다.
엄마를 쏘옥 빼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쩜 그렇게 못생겼냐는…
‘쳇… 이제는 아버지가 그 말을 해도 아무 말도 못하게 생겼잖아?’
나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실레스틴을 돌아보았다.
[실레스틴, 이제는 초상화가 주르르 걸려 있는 화랑을 찾아줘. 네가 돌아올때까지 나는 여기있을게.] [그럴게요. 아, 지금 이대로 가도 될까요?] [아앗, 그건 절대 안돼. 미안하지만 모습을 숨기고 가주라.] [에엣… 너무하세요. 저는 오늘 여기와서 한번도 안 싸워 봤다구요오~] [너 혼자 있을때 수상한 행동을 하면 안된다구. 나중에 또 그 모습으로 있게 해줄게.] [그때도 싸울 일이 없으면요?]
그 정도로 실레스틴을 달래서 보내려구 했는데, 얘가 이번에는 쉽게 안 넘어갔다.
[아앗… 으음.. 뭐, 그때는 가기 전에 한바탕 하게 해줄 수도 있는데?]그래 그녀를 달래기 위해 얼결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 말에 실레스틴의 눈이 반짝 거리는
거였다.
그때야 나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버스가 지나간 뒤에 손을 드는 격이었다.
[정말이죠? 그럼 약속하신 거에요?] [그, 그래…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그래 ‘아주 잠깐’ 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되게 불안했다.
‘부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넘어갔으면…’
이런 내 마음과는 반대로 실레스틴은 무지 기쁜 표정을 짓더니 바람으로 화해서 사라졌다.
그녀가 휭 하니 사라지자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어머니의 초상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머리카락 색과 눈 색은 달랐지만,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의 얼굴은 나와 흡사했다.
매일 거울 속에서 보던 얼굴을 이렇게 초상화속에서 마주보자니 기분이 되게 묘했다.
거기다가 초상화 속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내 어머니고 말이다.
‘아아… 보고 또봐도 절대 질리지 않을 거 같아. 어쩜 저렇게 예쁘게 생기셨을까? 울 아버지가
반한 것도 이해가 돼.’
어쩌면 화장발일 수도 있지만, 커다랗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오똑한 코, 거기에 고집스럽게
다물린 분홍빛 입술…
‘아, 그러고보니 귀를 그냥 드러내셨네…’
어머니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은 뾰족한 귀 뒤로 넘어가 있었다.
외할아버지께는 어머니가 하프 엘프라는 것이 꼭꼭 숨길 정도의 비밀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그러니까 백작가랑 의절하고 외할머니랑 결혼해서 사실 수 있었던 거겠지만…
‘으음… 어머니의 초상화를 여기에 냅두고 가려니 차마 발걸음이 안 떨어질 거 같아. 이거…
훔쳐가면 안될까? 어쩌면 아버지도 무지 좋아하실지도 모르는데… 거기다가.. 내 어머니
초상화 가지구 가는데 그게 잘못된 거라구 볼 수도 없지 않을까?’
처음에는 그냥 딱 한번 보고 가려구 했지만, 한번 보고 나니까 차마 발걸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 가지고 갈까 말까 하는 고민에 끙끙 거리느라 나는 서재 문이 벌컥 열어질때까지도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벌컥~
“…. 아닙니까?”
“허허허, 그렇게 생각… 누구냣?”
“허걱…”
어두운 방 안이었지만, 허공에 떠 있는 정령들의 몸에서 희미한 빛들이 발산되고 있었기에
사방을 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정령들의 몸에서 나온 빛은 어디까지나 희미한 빛이었기에 갑자기 열려진 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 그래봤자 형광등에는 비교할 수 없는 밝기였지만, 어두운데 있던 나에게는
엄청 밝은 빛이었다 – 빛 때문에 갑작스레 적응을 못한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려야 했다.
그때문에 나는 갑작스레 서재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달랐다.
내가 빛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사이 나에게 척척 다가와 내 팔을 붙들었던
것이다.
“누구냐니까?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그제야 겨우 빛에 적응한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나를 붙들고 호통을 치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대충 쉰 중반 혹은 그 보다 더 나이를 먹어보이는, 중년대 남자였다.
나 보다 반 뼘 정도 큰 키에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고 굵고 빳빳해 보이는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월의 힘 때문에 귀 밑에 히끗 히끗한 새치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어두운 눈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매섭게 날 노려보고 있었고, 내 팔을
붙든 가느다란 손가락에 들어간 힘도 강했다.
그러나 그렇게 강건해 보이는 중년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놀라움으로 인하여 눈이 치켜
떠지며 당혹한 감정을 드러내는 거였다.
“너, 너는…”
그리고 그와 같이 들어왔던 다른 남자 또한 당혹함이 가득 든 감정으로 입을 여는 거였다.
“혀, 형님… 혹시…”
그에 그제야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는 날 잡은 남자와 비슷한 연령대인 듯했는데, 혈색
좋은 얼굴에 약간 통통하다 – 절대 뚱뚱한 것이 아님 – 싶은 정도의, 좋게 말하면 풍채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 이들은 서재에 몰래 침입한 자를 대하는 것 치고는 좀 당혹스러운 면을 보이는 것
같아 나는 내가 무지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도 잠시 잊은 채 멀거니 그들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내 팔뚝을 잡고 있는 중년 남자가 당혹스러운 감정을 가라앉혔는지 침착한, 그러나 무시
못할 날카로운 기색이 담겨 있는 어조로 물었다.
“넌 누구지? 주디스 오스번님과 무슨 사이냐?”
어머니의 초상화를 본 다음에야 내가 어머니와 무지 닮았다는 걸 깨닫기는 했지만, 다짜고짜로
어머니와의 관계를 추궁받게 될 줄은 몰랐던 나는 당황해서 눈이 동그래졌다.
“어, 어머니신데요…”
나의 더듬거리는 대답에 그 두 중년 남자의 눈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게도 내가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걸 납득했으면 놔주던가, 아니면
여기에 어떻게 들어 온 거냐고 추궁을 할 것이지 그 두 중년 남자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둘이서 나는 이해하지 못할 시선을 주고받더니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듯 하던 풍채
좋은 중년 남자가 달려들어 내 나머지 팔을 한 손으로 틀어쥐더니만 어느새 꺼내들었는지 모를
손바닥 크기의 짤막한 단도를 꺼내 내 목에 들이대는 거였다.
“움직이지 말게나. 이게 이렇게 작아 보여도 목에 있는 동맥까지는 충분히 닿는다네.”
“히익…”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새파란 날을 번쩍이는 단도가 내 목에 차가운 감촉을 선사하고
있는 바람에 나는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체격 좋은 중년 남자가 그렇게 나를 제압하자 빼빼 마른 중년 남자는 좀 요상한 시선으로 체격
좋은 중년 남자를 쓰윽 바라보더니 날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우선은 활짝 열린 서재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대신 어두컴컴해진 사방을 조금이나마 밝게 하기 위하여 서재의 커다란 창문에 쳐진
커튼들을 활짝 열어 제쳤다.
그러자 밖의 환한 불빛들과 달빛까지 쏟아져 들어와 보통 사람인 그들이라도 그럭저럭 사방을
분간할 수는 있을 수준이 되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형님?”
체격 좋은 중년 남자가 빼빼 마른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아까도 그렇게 부른 듯 싶었더니만 빼빼 마른 남자가 풍채 좋은 남자의 형님이었던 모양이다.
빼빼 마른 중년 남자는 나를 한번 힐끔 바라보더니 주저 없이 입을 열었다.
“당분간은 숨겨 둬야지. 축제가 끝나 귀족들이 다 돌아갈때까지 숨기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최소한 오늘이 지날때까지만이라도 숨겨야 해.”
그러면서 그는 두터운 커튼 안 쪽의 얇은 레이스 커튼으로 다가가 그걸 쭈욱 찢기 시작했다.
“죽여야 하지 않을까요?”
체격 좋은 중년 남자의 말에 나는 기가막혔다.
‘아니, 내가 뭘 잘못… 아니, 물론 여기 몰래 들어온 게 잘못이긴 하지만.. 그거 가지고 사람
목숨을 없애려 하다니 너무하잖아?’
이런 내 항의어린 시선을 알아챈 것일까?
길게 찢어진 레이스 커튼 조각을 가지고 온 빼빼 마른 중년 남자가 나에게 조금은 미안하다는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오늘 여기 나타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며칠 후, 아니 최소한 내일 왔더라면
이렇게까지는 않했을 텐데 말입니다. 운이 없었다고 생각 하십시오.”
그러면서 찢어진 커튼 조각으로 우선은 내 입을 막고 손 발을 꽁꽁 묶는 것이었다.
이럴려고 그 예쁜 레이스 커튼을 찢었던 모양이다.
체격 좋은 중년 남자까지 형님을 거들자 나는 금세 꽁꽁 묶여 서재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이 자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역시 죽여야…”
그런 나를 바라보며 체격 좋은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지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빼빼 마른
중년 남자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지금 죽일 수는 없어. 우선은 여기에 숨겨 두자. 어차피 내 서재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으니
쉽게 발견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처리는 내일 생각하자꾸나.”
하지만 체격 좋은 중년 남자는 형님의 의견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너무 무르십니다. 우리가 여기에 이대로 이 녀석을 두고 갔다가 이 녀석이 탈출이라도 하면
어쩌시려구요? 철저하게 경비가 세워져 있는 지하 감옥도 아니고, 쇠사슬로 결박한 것도 아니니
얼마든지 탈출이 가능하다고 생각 안 하십니까?”
동생의 주장에 형님의 마음이 흔들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날 없애는 것이 께름직 한지 빼빼 마른 중년 남자는 주저했다.
“하지만… 그래도 죽일 것 까지는… 그러다가 시체를 들키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냐?”
“그건 걱정 마십시오. 형님이 말씀하셨듯이 이 곳에 숨겨 두면 누구도 쉽게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설사 시체를 들켰다 해도 백작의 서재에 몰래 침입했다가 들켜서 죽여버렸다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 자의 정체를 아는 건 우리 둘뿐이니 우리만 입다물고 도둑으로 몰면
그만입니다. 설사 알아채는 자가 있다 해도 확실한 증거가 없으니 뭐라 말도 못할테구요.”
‘내 정체가 뭔데?’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입도 봉해진 상태라 나는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어야만 했다.
둘의 대화에서 내 목숨이 왔다갔다 했지만, 정말 죽을까봐 겁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 상태가 되자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이 세계로 넘어올 수 있는 나이트급 정령들이
벌써 내 곁으로 와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고, 심부름 보냈던 실레스틴도 벌써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들 모르게 모습을 숨기고 있을 뿐이지…
이미 실레스틴이 그들 둘을 처리하겠다고 말했지만, 내가 사태를 두고보자고 하며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는 직접적으로 날 죽이려 하지 않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왜 날 죽이려는지도 궁굼하고…’
뭐, 최상급 정령들에게 부탁해 잡아서 엎어놓고 패면 쉽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들을, 거기다가 몰래 잠입한 장소에서 그랬다가 일이 커지면 또 머리
아파질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가만히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거였다.
나중에 정말 죽을 위험에 처한다면 그때 정령들에게 도움을 청할 거였다.
그러는 동안 그 둘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어떻게 죽이려고? 피를 흘리는 건 절대 안돼. 여기에 숨겨놓을텐데 혹시라도 누가 들어 온다면
쉽게 들킨다고. 아무리 내 서재라고 해도 아무도 안 들어온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니까.”
빼빼 마른 중년 남자의 말에 나는 눈이 동그래졌다.
‘내 서재? 여기가 자기 서재라면… 저 남자가 백작이었단 말이야? 아니, 자기가 백작인데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지?’
상황을 지켜보면 지켜볼 수록 사태를 이해할 수가 있는게 아니라 더욱 더 복잡해져 가기만 했다.
그런 와중 체격 좋은 남자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피를 내야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건 아니죠. 익사 시킬 수도 있고, 목을 조를 수도 있고,
질식 시켜서 죽일 수도 있고… 모두 피를 안 흘리고 죽이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어째 재미있다는 기색까지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 남자의 말도 기가 막혔지만, 그 보다는 그런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백작의 모습이 더 기가막혔다.
“흐음… 여기는 물이 없으니 익사는 불가능 하겠고, 목을 조르는 건 나중에 시체를 들켰을 때
수상하게 여겨질 수 있겠지. 아무래도 질식 시키는게 나을 듯 하군.”
“옳으신 말씀이시군요. 그럼 질식 시키죠.”
사람을 죽이는 말을 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가막혔지만, 우선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아, 물론 안 죽을 수 있게 조치는 취해놓고 말이다.
[실레스틴, 나 질식 안 하게 해줄 수 있지?] [그거야 해줄 수 있지만, 언제 나서게 해주실 거예요? 저 녀석들을 그냥 냅둘 거예요?] [글쎄… 지금 생각 중.] [헉… 언제까지 생각만 하고 계시려구요?] [아하하… 글쎄…]내가 그렇게 실레스틴과 투닥 거리는 동안 두 중년 남자는 이미 자신들이 의논한 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우리는 시간이 없으니 죽을때까지 옆에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어. 그러니 우선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다 숨겨 놓고 알아서 질식 되게 조치를 취해야 해.”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쑥덕인 둘은 낑낑 대며 나를 들어 올려 – 내가 그렇게 무거운지 몰랐지만… –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책장과 벽 사이의 어두운 공간에다 나를 집어 넣었다.
그 공간의 위치는 창문쪽가 가까워서 입구라고 볼 수 있는 곳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런 곳이니 누군가가 서재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내가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자, 그러면…”
내가 그 어두운 공간에 처박히자 만족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던 체격 좋은 중년 남자는 서재
안을 두리번 거리더니 곧 고급스러운 소파로 다가가 그 위에 보기좋게 놓여 있던 두툼한
쿠션들 중 하나를 가져왔다.
“이거면 충분히 질식할 겁니다.”
그러더니만 쿠션으로 내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그 위를 남은 레이스 커튼 조각으로 칭칭 감았다.
그려면 그들이 쿠션을 잡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질식 되고도 남을 터였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나는 실레스틴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기에, 너무 꽈악 묶여 머리쪽이 아프다는 것만 빼면은
숨쉬는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날 죽게 만들어 놓고 물러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내가 있는 공간을 커튼으로 잘 가려놓기 전에 서재의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는
누군가 들어오는 거였다.
비록 나에게는 서재의 문쪽이 안 보였지만, 어두운 공간에 갑자기 빛이 들어왔기에 문이 열린
걸 짐작할 수 있었고, 백작과 그 동생이 물러나는 대신 황급히 내가 구겨져 있는 공간으로 들어와
몸을 숨기기에 누군가가 들어 왔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이 방의 주인이니 떳떳하게 있으면 어두운 방에 있었다 해도 아무런 의심을 안 받았을텐데
그 둘이 하고 있던 짓이 옳지 못하니 반사적으로 몸을 숨긴 듯 했다.
“어떤 녀석이 들어온 거지?”
“글쎄요… 아, 저 자는 얼마 전에 저희집에서 고용한 기사인데… 여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요.”
“조용히… 우선은 두고보지.”
두 중년 남자는 내 앞을 가로막은 채 커튼의 틈사이로 서재 내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탁!
저벅, 저벅, 저벅…
문이 닫히는 가벼운 소리가 난 다음 서재로 들어온 남자가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서재 안의 불을 켰는지 내가 있는 공간을 가리고 있는 커튼이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대담한 놈이군. 허락도 없이 들어온 주제에 불까지 키다니.”
백작이 마음에 안 든다는 어조로, 그러나 그 남자에게까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어떤 소음도 들려오지 않는게 남자가 아예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이거나 아니면 가만히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후자인듯 백작이 다시 기가 막히다는 어조로 낮게 중얼거렸다.
“뭐냐, 저놈? 들어 왔으면 목적을 실행할 일이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아앗, 움직였다.”
내가 실프들에게 부탁해 상황을 알아보지 않아도 백작이 알아서 중계 방송을 해주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드디어 이 서재로 들어온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발소리는 얼마 안가 멈췄다.
그리고 잠시후…
이번에는 백작 동생의 중계방송이 들려왔다.
“저, 저놈 참 여유가 많군요. 이 상황에 초상화 감상이라니…”
황당하다는 백작 동생의 말이었다.
‘초상화? 어머니의?’
내 의문을 해소시켜주는 백작의 말도 곧 이어 들려왔다.
“주디스님이 그만큼 아름다우시기는 하지.”
누군지 몰라도 어머니의 모습에 폭 빠진 모양이었다.
한~ 참이 지나도 초상화 앞에 있을 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저 놈은 왜 온거지?’
이런 내 기가막힌 심정과 백작의 심정은 같았던 모양이다.
“저놈 여긴 왜 온 거야?”
“이거 참 문제군요. 시간이 없는데… 이러다가는 옷도 못 갈아입고 파티장에 나서게 생겼는걸요?”
“끄응…”
“어쩌죠? 그냥 나설까요?”
“아냐, 잠시만 더 두고보자. 그래도 아무 짓도 안 하면 그때 나서지.”
“그런데.. 여기에 있던 걸 뭐라고 해명하죠?”
“흥, 우리가 왜 해명을 해야 하지? 해명을 해야 할 건 허락도 없이 내 서재에 들어온 저 놈이다.”
“하긴, 그건 그렇군요. 그럼 이제…”
그 둘의 소건거리는 대화는 누군가가 서재를 노크하는 소리에 중단 되었다.
똑똑~
그리고 노크한 이는 안에서 허락의 말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서재의 문을 벌컥 열었다.
“아버지? 갑자기 왠 호출… 누구지?”
목소리로 보아하니 성인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안에 자기가 기대하지 않은 인물이 있는 걸 보고 놀라움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단아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멋대로 들어온 거라면 어서 나가도록 해요. 다른 이가 봤다면 당신은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그녀는 가만히 초상화를 바라보는 남자가 별 다른 짓을 하지 않고 있기에 너그럽게 용서를
해줄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그녀의 그러한 너그러움을 받을 생각이 없었던지 나가는 대신 입을 열었다.
“들어 오시지요, 에르미아 엠브로스양. 당신이 여기에 왜 오셨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엠브로스? 헤에, 그럼 저 여자도 백작가의 사람이었군?’
탁!
다시 가볍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의 발걸음 보다 좀 더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마 에르미아 엠브로스라는 여자가 안으로 걸어 오는 모양이었다.
“그대는 누구지? 그러고보니 낯이 익기는 한데… 아버지의 명으로 여기 있는 건가?”
그러나 남자는 에르미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엉뚱한 말을 꺼냈다.
“이거 참 영광이군요. 몇번 스치듯 마주쳤을 뿐인데 제 얼굴을 기억해주시다니 말입니다. 당신의
현명함은… 여전하시군요.”
왠지 묘한 어조의 남자 말이 끝난 뒤 잠시 침묵이 찾아 왔다 에르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날 알고 있는 듯한 어조로군.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었던가?”
“그렇습니다.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이었죠.”
남자의 목소리는 즐거운 듯 했지만, 그 밑에는 무시 못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걸 알아챘음인지 그 뒤를 이어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당장 사람을 부르겠다.”
“원하시는대로 기꺼이… 저는 제프리 찬탈이라고 합니다. 10년 전 당신 때문에 인생을 망친
불운의 기사이지요.”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소개가 끝나자 놀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정말 에르미아와 잘 아는 사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백작도 마찬가지인 듯 백작의 몸이 경직되는게 눈에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왠지 백작은 나설지 말지 무지 갈등하는 것 처럼
보였다.
하기야, 숨어있다가 이제와서 나서려니 모양새가 무지 않좋았으니 갈등하는 것도 이해가 되기는
했지만…
그러한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 제프리…”
침울한 에르미아의 말을 뒤이어 거친 제프리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안하십니까? 미안 하실 것 없습니다. 곧 당신도 나와 같은 고통을 맛보게 될 테니까요.
커스트 틴더!”
“꺄아아악~~!!”
남자가 마지막에 외친 건 마법 주문이었다.
그와 함께 여자가 비명을 지르자 백작이 놀라서 갈등하던 것도 다 제쳐두고 뛰쳐 나갔다.
“에르!!”
그리고 그 뒤를 백작의 동생이 쫓았는데, 그는 커튼을 나가기 직전 날 힐끔 바라보았다.
그래 나는 얼른 눈을 감아 죽은 척, 혹은 죽어가는 척 했지만, 눈을 감기 전 그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회심어린 표정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뭐, 뭐냐… 저놈…’
커스트 틴더는 남을 괴롭히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이었다.
말 그대로 저주스러운 발화였으니까 말이다.
틴더라는 마법은 3클래스의 마법으로 단순한 발화 마법이었다.
건조한 장작 더미에서 갑자기 불이 붙게 하는 그런 류의 마법 말이다.
물론, 강력한 마법사가 인간에게 사용하면 사람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기도 하지만, 사실 어떤
마법이든 사람에게 잘못 사용하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런데 커스트 틴더는 순전히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이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불꽃이 보이는 틴더 마법과는 달리 처음에는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속에서
부터 타들어가기 때문에 어느정도 탈 때까지는 불꽃은 보이지 않고 연기만 피어 오른다.
그리고 어느정도 탄 뒤에야 겉으로 불꽃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때는 늦어서 그때 불을
끈다 해도 이 마법에 걸린 생물체는 대부분이 죽는다.
거기다가 천천히 타들어가서 당한 사람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고통 당하게 하다 죽게 만든는
엄청 악질적인 마법인데다 5서클의 마법이라 그 이상의 마법사가 오지 않는 한 쉽게 끌 수도
없었다.
“에르~!! 게 누구 없느냐? 밖에 아무도 없느냔 말이다~!!”
백작의 다급한 외침에 화답하듯 서재의 문이 벌컥 열리며 여러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신관을, 아니, 마법사를.. 하여간 빨리 아무나 모셔오거라. 어서!! 그리고 저놈을 잡아라!”
“찬 물을 가져와라!”
“다른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도록 신중히!”
“기사들은 저놈을 잡아라.”
소란스럽게 들려오는 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실레스틴에게 부탁해 내 몸을 결박하고 있는
천조가리들을 뜯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도 오랫동안 꽁꽁 묶여 있었던 터라 팔 다리를 주물러가며 근육을 풀고 있는데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소란스러움을 뚫고 들려왔다.
“이런… 에르가 엉망이 되었군요. 이래가지고서야 오늘 파티에 나서지도 못하겠는데요?
오늘 백작 작위를 물려주겠다고 다 공포하셨는데 에르가 이지경이 되어서 어쩌십니까, 백부님?”
그 동안 들은 소리로 추측건데 지금이 무지 다급한 상황이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참으로 얄밉게도 침착한 목소리였다.
“이스파엘…. 네 이놈…”
백작의 이 가는 소리를 뒤이어 백작 동생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 애의 말이 틀린 건 아니죠, 형님. 그렇지 않아도 곧 파티 시간이 다되어가지 않습니까?
오늘 에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형님은 물론이거니와 저희 백작가는 웃음거리는 물론
구설수에 오르게 될 겁니다.”
“에르는 나가게 될 거다!”
백작의 단호한 외침 뒤에 낯선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님을 모셔왔습니다.”
“오, 어서…”
커튼 틈새로 빼꼼히 내다보니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는 대략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급하게 몸을 숙이고 있는게 보였다.
사람들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폼이 그 에르미아가
바닥에 눕혀져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에르미아를 살펴보던 마법사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게 사람들 사이로 얼핏
보였다.
“어떤가?”
백작의 다급한 음성에 마법사는 무지 죄송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이건 제 실력으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단지… 기세를 조금 늦출뿐…”
“어떻게 안되겠는가?”
“완전히 해결하려면 안티 매직 쉘을 익힌 마법사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6서클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라면 어떻게든…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만, 제 능력으로는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 합니다.”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 백작이 털썩 주저 앉았다.
“백작님.”
옆에 있던 자가 놀라서 백작을 부축했지만, 백작은 넋 나간 표정으로 자신의 딸만 바라볼
뿐이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허어… 이거 참… 에르도 저 모양이고 형님도 이 지경이시니… 이거 참 난처하군요. 어쩔 수
없이 제가 나서야 하나요?”
무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어쩐지 은근히 좋아하는 기색을 풍기는 백작
동생이었다.
‘하, 눈가리고 아웅한다는 게 저런 걸까나?’
나는 백작 동생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눈쌀을 찌푸렸다.
그러한 심정을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던지 주의의 몇몇 사람도 눈쌀을 찌푸리는게 보였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백작 동생은 여전히 좋아하는 기색이 깔린,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형님보도 한참이나 부족한 제가 나서서 백작가의 명예에 흠집이나 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백작 대신 나서는 걸 기정 사실화 하는 백작 동생의 말에
주위 사람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하기야, 백작 딸도 죽니 사느니 하는 가운데 있었고, 백작 또한 딸의 상황에 반은 넋이 나가
있었으니 오히려 동생이 백작 대신 나서는 것이 옳은 것일지도 몰랐다.
단지, 은근히 좋아하는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백작 동생이 노리는 건 그것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에르가 저렇게 되었지만,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 아들이 있으니까요.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 저 녀석 정도라면 백작으로써 엠브로스 가문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드러내놓고 아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순간까지 멍하니 엉거주춤 서 있던 백작의 몸이 곧추서더니 눈에서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다. 파티에는 내가 나갈테니까.”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에 백작 동생이 움찔 했지만, 금방 능글 맞은 웃음을 베어물며 대꾸했다.
“그러십니까? 하기야, 제가 제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는 것 보다는 백작이신 형님께서 물려
주시는 게 더 모양새가 좋을테지요.”
백작 동생의 말에 백작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렸다.
“네 아들? 미안하지만, 네 아들이 작위를 물려받지는 못할 것 같구나.”
그러자 백작 동생의 눈초리가 치켜 떠졌지만, 그는 다시금 능글맞은 표정을 회복했다.
“후후, 고집을 부리시는 군요. 그래봤자 현제 제 아들 말고 백작 작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에르는… 정말 안됐지만 지금 죽을지 살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 하지만 그래도 네 아들에게는 절대 주지 않겠다.”
“후후후, 그러십니까? 그럼 누구에게 주시려구요? 엠브로스 백작 가문 사람들 중 제 아들보다
작위 계승권이 높은 사람이 더 있는 줄 몰랐는데요?”
여전히 여유 있는 백작 동생의 얼굴은 그 다음 나온 백작의 말에 일그러져 버렸다.
“아니, 한 사람 있지.”
“그게… 누굽니까? 제가 모르는 사람이 있는 줄 몰랐군요.”
“너도 알텐데?”
그렇게 말하며 백작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작님!”
그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는지 아까까지 계속 백작을 부축하고 있던 중년 남자가 다시 부축
하려고 했지만 백작은 그 손길을 뿌리치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째 그가 다가오는 방향이 내가 있는 쪽인 듯 했다.
백작 동생도 그렇게 느꼈는지 비식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설마라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잘 아는 구나.”
백작이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옮기며 대꾸하자 백작 동생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
졌다.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형님도 곤란하실텐데요.”
“네 아들에게 작위를 넘기느니 차라리 내가 곤란한 게 났다.”
백작 동생의 얼굴에서는 이제 여유있는 표정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매서운 눈길을 흘리며 백작에게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우습군요. 과연 백작 작위를 제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을까요? 저는 이미
늦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두고보면 알겠지.”
그러던 백작은 내가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정중하게 요청했다.
“나와주시겠습니까? 제 짐작이 맞다면 당신은 이미 결박을 풀고 태연하게 서 계실 것 같은데요.”
“쓸데 없는 짓입니다.”
옆에 있던 동생이 비웃었지만, 내 쪽을 바라보는 백작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 나는 괜히 머쓱한 표정으로 커튼을 제치며 밖으로 나왔다.
그 순간 백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고, 반대로 백작 동생의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우리가 한가지 간과한게 있지. 주디스님은 뛰어난 마법사이자 정령술사셨지. 그 분의 아들이
아무런 힘 없이 우리에게 잡혀서 결박 당한 것이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나?”
“이익…”
일그러지는 백작 동생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며 백작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작위가 자네 아들에게까지 돌아가지 못해서 어쩌나?”
하지만 백작 동생은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형님도 참 순진하시군요. 저자가 주디스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다고 그걸 믿으신단
말입니까? 주디스님과 닮았다는 거야 저도 인정하지만, 이 세상에 닮은 사람이야 또 있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영문은 모르겠지만, 저 백작 동생이란 남자에게 그런 취급 당하니 나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목에 걸고 있는 엠브로스 가문 후계자 반지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마법 반지를 들어
보였다.
“이거면 됩니까?”
“충분 하군요. 주디스님의 반지에 백작 후계자 반지라…”
백작가에서 후계자 반지가 사라진지 꽤 오래 되었을테지만, 어머니의 초상화에 섬세하게 그려진
채 남겨져 있었던 터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이익…”
백작 동생이 낭패한 표정으로 이를 빠드득 갈며 뒤돌아 서는 사이 백작은 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이런 부탁 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알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무지 진지하고 간절한 백작의 표정에 나는 나도 모르게 물었다.
“무엇입니까?”
“할 수 있으시다면..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다른 건 건 바라지 않겠습니다. 목숨만 붙어 있게
해주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보잘 것 없는 제 목숨이라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주제에 참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다른 부탁이라면 단칼에 거절하겠는데, 나에게 무릎까지 꿇으면서 부탁하는 것이
딸을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라 나는 차마 거절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나 또한 내 어머니가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날 살려서 이 세상에 내놓으셨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3클래스 유저 마법사인 내가 5클래스의 저주 마법을 풀 능력 또한 없었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내 옆에 있던 엘라스트라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엔다이론 정도면 충분히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옆에 있던 실레스틴이 투덜댔지만 나는 두 부녀를 도울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엔다이론을 불러냈다.
“엔다이론, 저 아가씨를 도와줄 수 있을까?”
나의 부름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파란 빛 늑대는 우아한 동작으로 이제는 피부가
뜨거운 열기로 인해 마구 일그러져가는 에르미아의 몸에 자신의 커다란 앞발을 턱 하니 올려
놓았다.
그러자 그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발화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애를 쓰던 마법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에르미아는 몰골이 너무 일그러져 처음의 그 단아했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무척 괴로울텐데 미동도 없는 걸 보니 아마 그 고통을 못 이겨 기절했거나, 아니면 주위에서
그녀를 위해 기절시켜 놓은 듯 했다.
이제와서 엔다이론이 도와줘 마법을 푼다 해도 그녀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는 어려울
듯 싶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던 말던 엔다이론은 그녀의 몸에 올려놓은 발을 통해 그녀의 몸속으로
엄청나게 차가운 물의 기운을 흘려넣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뜨겁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몸을 식혀주는 한편 그녀의 몸 속에 있는 불의 기운을
차츰 차츰 잠재우기 시작했다.
푸른 연기가 피어 오르던 그녀의 몸에서는 이제 불의 기운과 엔다이론의 물의 기운이 맞부딪혀
만들어지는 듯한 수중기가 뿌옇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오, 불의 기운을 물의 기운으로써 막는 방법이 있었군. 나는 마법을 어떻게 풀 것인가만고민하고 있었잖아?]
엔다이론의 방법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실레스틴이 옆에서 또 삐죽였다.
[왜 저런 자를 도와주시는 건데요? 해인님을 죽이려 했던 자의 딸이잖아요.] [물론 그렇긴 하지만…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말야.]우리가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동안 엔다이론이 집어 넣은 거대한 물의 기운을 이기지 못한
에르미아의 몸 속에 있던 마법적인 불의 기운은 점차 사그러들더니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제서야 엔다이론이 에르미아의 몸에서 발을 떼었고, 잠시 쉬고 있던 마법사가 다가와 그녀의
몸을 살펴보더니 안도의 빛을 보이며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초조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백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목숨은 건지셨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마법사의 말에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든 백작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말을 몇번이나
중얼거렸다.
설마 나를 죽이려 했던 자에게서 이런 대접을 받을 줄 몰랐기에 쓴 웃음만 지우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주위에 있던 어떤 중년 남자가 갑자기 헛기침을 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어흠, 백작님… 이럴 때 이런 말씀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서둘러 파티장에 가셔야 합니다.”
“아, 그렇군.”
아마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파티에 대한 건 까맣게 잊고 있었을 터였다.
백작은 다시 고개를 들어 신색을 회복하더니 주위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지시를 내렸다.
“에르를 방으로 조심스레 데려가게. 다른 분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신관을 모셔오도록 하고.
엘버트, 첼릿, 자네 둘에게 이분을 맡기겠네. 이 분이 누구신지는 다들 잘 알겠지? 자네들에게
부탁하는 내 뜻을 알리라 믿네.”
백작의 말에 파티 생각을 일깨운 중년 남자와 기사 차림을 하고 있던 한 남자가 공손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자, 그럼 이쪽으로…”
중년 남자가 나를 이끌고 나가려고 하는 그때였다.
“가만 두지 않겠어!!”
이를 빠드득 갈며 원한에 찬 목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사람이 있었다.
백작 동생이었다.
그는 야차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에는 아까 날 제압할 때 썼던 작은 소도를 들고 나를
향해 몸을 던지고 있었다.
“위험!”
나를 맡을 기사가 내 앞을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그 보다도 먼저 원한에 찬 사람을 낚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쿠당탕~!!
한번 나서고 싶어 안달을 했던 실레스틴이었다.
그녀는 백작 동생의 팔을 잡고 그가 달려들던 속도와 힘을 이용해 업어치기를 했던 것이다.
덕분에 백작 동생은 서재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 기사들이 검을 빼어
그를 겨눴다.
[꺄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주위 사람들의 놀라운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분 좋은 얼굴로 방방 뛰던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생긋 웃어보이고는 사르르 모습을 감춰 버렸다.
“저, 저분은…?”
날 이끌고 가기 위해 내 곁으로 다가왔던 중년 남자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묻기에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호위 무사요.”
“하아…?”
내 설명에도 중년 남자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그는 곧 신색을 회복하고 나를
끌었다.
“어쨌든, 이쪽으로 오십시오. 한시가 바쁩니다.”
그 중년 남자에게 반쯤 끌리다시피 해서 내가 도착한 곳은 누군가의 침실로 보이는 커다란
방이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중년 남자는 나를 침실 가운데에 세워 놓은 채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아, 이거야 원…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 중년 남자의 모습이 문 안쪽으로 사라지자 나는 내 뒤를 따라 온 짙은 금발의 기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기사는 이런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더니 아련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거였다.
“정말… 어머님을 많이 닮으셨군요.”
“예? 아… 예. 그렇더라구요.”
내 어정쩡한 대답이 이상했던지 기사가 의문 어린 표정이었다.
“어째… 대답이 불안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아하하… 그게… 실제로 어머니의 얼굴을 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거든요.”
머쓱한 내 대답에 기사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지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님은… 돌아셨군요.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묘한 슬픔이 담긴 그의 말에 이상함을 알아챌 수 있었던 나는 기사를 향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어째… 어머니를 알고 계신 듯 하네요?”
그러자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거야 당연합니다. 절 이 백작가로 데리고 오신 분이 바로 주디스님이셨는걸요.”
“예”
더욱 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가 되물었지만, 그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하고는 다른 말을
꺼냈다.
“그건 나중에 자세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선… 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해인이에요. 해인 오스번… 음.. 정확하게 말하면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가 되겠지만…”
“그러시군요. 해인님… 아, 죄송합니다. 해인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예? 아, 예. 좋을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해인님,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스러우시겠지만 해인님은 곧 있을 파티장에서
백작의 지위를 물려받으시게 될 겁니다.”
“예?”
아까 백작과 그의 동생 사이에서 작위 운운 하는 하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 동안
이런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아왔던 나로써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랬으니 그 기사의 말에도 어리벙벙할 뿐이었다.
다행이 그 기사는 이런 날 ‘왜이래?’ 라고 바라보는 대신 이해 한다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모든 걸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은 아니실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주디스 엠브로스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만 항상 기억하십시오.”
“아… 뭐…”
‘여기서 ‘난 아들이 아닌데요?’ 라고 말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겠지?’
그런 생각에 난 떨떠름하니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러다가 정말 내 스스로도 ‘난 아들이다’라고
여기게 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분의 아들이신 이상, 당신은 얼마든지 백작의 작위를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십니다. 잠시 후
겪으실 행사에서 이걸 기억하시고 당당하게 행동하십시오. 갑작스레 생소한 일을 겪으시게 될
테니 당황스러우시겠지만, 제가 곁에 있을테니 너무 걱정하시 마십시오. 해인님은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아, 예…”
‘작위 계승식이라…’
그러고보니 나는 공작가에 있는 동안 그런 걸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기야, 일년도 있지 않았으니 귀족가의 모든 행사를 본다는 것도 불가능 했을테지만…
그런 일에 내가 직접 참여하게 되었는데도 아직 피부로 직접 와닿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내 신경이 둔감해서 그런지 두렵고 떨리기는 커녕 별 걱정도 되지 않았다.
금발 기사는 그 뒤로도 몇가지를 더 이야기 해줬고, 내가 그에 한 귀로 흘려 들으면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방 한쪽의 작은 문 뒤로 사라졌던 중년 남자가 급한 걸음으로 다시
나왔다.
“자, 어서 이걸로 갈아 입어 주십시오.”
그의 손에는 옷꾸러미가 들려 있었는데 중년 남자는 그걸 근처에 있던 의자에 걸쳐놓고
또 한쪽에 있는 서랍장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더니 서랍을 빼어 안을 열심히 뒤적거리는 거였다.
‘옷? 여기서?’
중년 남자의 예상치 못한 주문에 놀란 나는 감히 옷을 갈아입을 생각은 못한 채 쭈뼛대고 있는데
친절하게 여러가지를 이야기해주던 짙은 금발의 기사가 답답했는지 나에게 달려들어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서두르십시오.”
“에엑? 제가 할게요. 그런데, 꼭 여기서 갈아 입어야 하나요?”
기사의 손길에 벗겨지려는 옷자락을 부여 잡으며 내가 주춤 물러나자 저쪽 서랍을 열심히
뒤지던 중년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소리쳤다.
“남자끼린데 뭐가 어때서 그러십니까? 그리고 여기서 갈아 입으셔야 제가 시중을 들어드릴 수
있지요. 어서 벗으십시요. 지라르경, 서둘러 주세요!”
중년 남자의 외침에 지라르라 불린 기사의 손길이 단호해졌다.
“시간이 없으니 무례를 범하겠습니다.”
“우아아악~~!!”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열심히 몸부림치자 지라르 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꾸 그러시면 시녀들을 불러 덤비게 할겁니다.”
“헉… 그러니까… 제가 벗겠다니까요.”
내가 단호하게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뒤로 계속 물러나자 지라르경이 한숨을 쉬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럼 빨리 벗으시죠. 안 그러면 제가 벗겨드릴 겁니다.”
그가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꾸물꾸물 대자 지라르 경의 눈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자꾸 그렇게 천천히 하실 겁니까?”
“그, 그게… 남이 보는 앞에서 벗은 적이 없어서…”
‘젠장, 내 평생에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옷을 벗게 될 줄이야…’
바로 눈 앞에서 날 빤히 바라보는 남자를 대하고 옷을 벗으려니 정말 손이 안 움직였다.
이때 저쪽 서랍장을 뒤지던 중년 남자가 뭔가를 찾아 들고 몸을 돌리다가 아직 내가 상의도
채 못 벗고 있는 걸 본 모양이었다.
“지라르경, 정말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중년 남자의 재촉에 지라르 경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단호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해인님, 정말 죄송합니다.”
“녜?”
뜬금 없는 지라르경의 사과말에 내가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해주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쉬익~
“우악~!!”
뭔가 매서운 바람이 날 가르고 지나갔다 싶었는데, 그 순간 내 겉옷들이 산산 조각으로 흩어져
몸에서 스르르 떨어지는 거였다.
나와 마주보는 상황이었으면서도 언제 검을 빼들어 휘둘렀는지 모를 정도의 빠르기였다.
희멀건 내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 나는 황급히 내 가슴을 가리려 했지만, 그것도 내 마음대로
못했다.
“잘 하셨습니다, 지라르 경. 자, 도련님 빨리 이걸 입으시지요.”
중년 남자가 가슴을 가리려는 내 팔뚝을 잡아 채어서 부드러운 실크 셔츠의 소매에 집어 넣었던
것이다.
“우에~”
내가 언제 도련님이 된건가 싶었지만… 그걸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지라르경, 바지좀 가져다 주세요.”
“알겠습니다, 집사님.”
나에게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이보리색의 실크 셔츠를 입히며 중년 남자가 백작가의 집사였던
모양이다.
“자자, 도련님 팔좀 벌려 주십시오.”
집사의 요청에 이어 의자에 고이 올려져 있던 바지를 가지고 온 지라르 경의 요청이 들어왔다.
“다리 한쪽만 들어 보세요.”
“아고고~~”
“고개 좀 들어 주십시오.”
실크 셔츠를 다 입히자 집사는 실크 셔츠의 깃을 빳빳하게 세우더니 거기에 흰색 레이스로
된 길다란 타이를 매었다.
타이의 매듭에는 블루 사파이어로 된 육각형의 커다란 브로치를 달았다.
지라르경이 입혀준 바지는 전체적으로 흰색인데 양쪽 다리 바깥 부분에 세로로 허리선에서부터
시작해 밑단까지 금줄과 은줄이 서로 꼬인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늬는 곧이어 집사가 입혀준 재킷의 소매 단과 테두리에도 있었다.
자켓 또한 바지처럼 하얀 색이었는데 차이나 칼라처럼 칼라가 세워져 있었고 길이가 무릎 위까지
내려왔다.
“자자, 거의 다 되었습니다. 잠시 머리좀…”
집사는 내 머리를 질끈 묶고 있던 가죽끈을 풀더니 빗을 가지고 와 단정하게 빗어 내렸다.
그렇게 내가 거의 옷을 다 차려입고 있을 무렵 급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침실 문을 다급하게
두드렸다.
“집사님, 집사님!”
“들어와라.”
집사의 허락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시종은 커다란 붉은 망토를 들고 있었다.
“빨리 가셔야 합니다. 백작님이 파티장에 나서셨어요.”
“이쪽도 다 됐다. 자, 도련님 어서 가시지요.”
마지막으로 내 옷 매무새를 정리해준 집사는 잰 발걸음으로 나를 이끌고 침실을 나섰다.
그 뒤를 지라르경과 붉은 망토를 들고 온 시종이 따랐다.
지라르 경은 걸음을 좀 더 빨리해 내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빠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해인님이 들어서시자마자 작위 계승식이 시작될 겁니다. 우선 해인님이 입장하실 문에서부터
붉은 융단이 백작님이 앉아 계시는 단까지 이어져 있을 겁니다. 그 길을 가운데에서 쭈욱 따라
가셔서 단위에 오르시면 백작님이 자리에서 일어서실 겁니다. 백작님과 두세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서신 다음 거기서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댄 자세로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십시오. 이때
왼손은 몸에 붙이시고 오른손은 살짝 주먹을 쥐신 상태로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대셔야 합니다.”
그건 기사가 자신의 주군을 섬긴다는 맹세를 할때나 혹은 귀족이 왕을 배알할때 사용되는,
벨레니 국의 귀족 예법 중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극상의 인사법이었다.
‘아, 그러고보니 작위 계승식에서 쓰이기도 한댔지?’
내가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공작가의 후계자를 가장 가까이서 모셔야 할 시종은 귀족의
예법에 통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헤럴드 집사에게서 배웠던 게 생각이 난다.
그동안은 한번도 사용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지라르 경의 말을 들으니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난 뒤 천천히 일어나셔서 백작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백작님이 맹세문을 읇으신
다음 맹세하겠냐고 물으실 테니, 맹세하신다고 대답하시면 됩니다.”
그의 빠른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우리는 벌써 일층으로 내려와 한창 파티가 열리고 있는
홀로 향하고 있었다.
“원래는 작위를 물려 받으신 새 백작님께서 맹세문을 읇으셔야 하지만, 해인님이 그걸 외우실
시간이 없어서 백작님이 대신 해주시는 겁니다. 그 뒤에 백작님이 해인님께 엠브로스 백작 가문의
검과 백작의 반지를 주실 겁니다.”
거기까지 지라르경이 설명했을 때 집사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날 돌아보았다.
“아차차, 깜빡 했습니다만.. 후계자 반지 가지고 계시지요?”
“아, 예.”
“그거 얼른 손가락에 끼십시오. 작위 계승식을 할때 후계자는 후계자 반지를 끼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야 후계자 반지를 주디스님이 가지고 계셨으니 후계자 반지를 주위 사람들에게
보이는게 생략 되었지만, 후계자 반지가 돌아왔으니 해야지요.”
“엣? 그런가요? 하지만.. 이거 나에게는 너무 큰데…”
“대충 엄지 손가락에라도 끼고 계십시오.”
집사의 말에 나는 목에 걸고 있던 끈을 풀러 후계자 반지를 꺼내 왼쪽 엄지 손가락에 끼는데
지라르경의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 백작님께선 해인님의 손가락에 끼인 후계자 반지를 빼낸 다음 그 자리에 백작의 반지를
끼의줘실 겁니다.”
“그럼 후계자 반지는?”
“대기하고 있던 보관 상자에 넣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해인님의 후계자가 생길때까지
그 곳에 보괸될테지요.”
‘후, 후계자라… 으음…’
“검은 받은 뒤 한 손에 들고 계십시오. 그 뒤 백작님께서 작위가 계승되었음을 선포 하시고 자리를
비켜주실테니 백작님이 앉아 계시던 의자에 앉아 계시면 됩니다.”
“그게 끝입니까?”
“아닙니다. 그 뒤에 저희 백작가에 소속된 기사들의 충성 맹세를 받으셔야 합니다. 한 명씩
아까 말씀드린 그 자세로 해인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할 겁니다. 그럼 해인님은 들고
계신 검으로 그의 오른쪽 어깨에 한번 왼쪽 어깨에 한번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엠브로스 백작 작위를 이어받은 나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는 그대의 충성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라고요.”
지라스경이 자신의 검을 빼어들어 시범을 보여주며 해준 말을 입속으로 다시 읇조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집사가 내 뒤로 다가와 시종에게서 받아 든 붉은 망토를 어깨에 걸쳐 줬다.
그 붉은 망토의 등에는 금실로 엠브로스 백작 가문의 문장이 크게 수놓아져 있었고, 테두리는
모피로 둘러져 있었다.
“이건 대대로 작위 계승식을 할때 후계자께서 걸치시던 것입니다.”
그 망토는 두터운데다 엄청 커서 묵직한 무게감을 내 어깨에 전달해줌과 동시에 내 뒤로도
멀리까지 질질 끌렸다.
“윽… 이걸 파티 끝날때까지 걸치고 있어야 합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 귀족가의 파티는 기본이 3 ~ 4 시간이었다.
거기에 파티의 주인공은 중간에서 빠지지 못하니 끝까지 나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러니 그 동안 이걸 계속 걸치고 나면 내 어깨가 무사하지 못할거란 생각에 기겁을 하자
지라르 경이 싱긋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충성 맹세를 다 받으시고 다시 파티가 제개 되면 적당한 때를 봐서 옆의 시종에게
넘겨주시면 됩니다. 파티때 여러 귀족들과 안면을 익히게 되실텐데 망토를 걸친 채 파티장을
종횡무진 하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가요? 그건 다행이군요.”
그때였다.
파티장 안쪽에서 누군가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님입십니다.”
그것을 신호로 굳게 닫혀있던 파티장으로 통하는 문을 대기하고 있던 시종 둘이 조심스레
열기 시작했다.
“자, 이제 시작입니다. 허리와 어깨를 똑바로 펴시고 정면을 바라보십시오. 당당하셔야 합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걸로 여겨졌는데, 파티장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그 안에
있던 시선들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리자, 그제서야 이게 바로 현실이라는 것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헉… 이거 잘못 걸린 게 아닐까?’
일순 그런 불안감이 들었지만, 뒤에서 누군가 슬쩍 떠밀자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발을 내딛었다.
‘에라, 될대로 되라지.’
당당하게 걷는 건 일부러 의식할 필요 없었다.
사실 조엘네 저택에서 지낼 때도 나의 행동이 조엘의 명예에 직결되는 것이었기에 나는 공작
부부와 조엘, 그리고 그의 여동생 안젤라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비굴하게 굴지 않도록 교육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곳에서 머무는 기사들에게도 예의는 깍듯이 지켰지만, 필요 이상으로 굽실거리며
지내지는 않았고, 항상 어깨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정면을 바라본채 걸어다녔다.
그 교육의 효과가 수많은 시선을 받아 약간 떨리는 이 자리에서도 여실히 발휘되어 나는
무의식적으로 당당하게 단 위에 있는 백작을 바라보며 붉은 융단위를 걸어갔다.
“잘 하시고 계십니다.”
드디어 단 위에 도착하여 백작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무릎을 굽힐 때 내 망토 자락을 정리해주는
척 가까이 온 지라르 경이 낮게 속삭였다.
‘뭐… 처음 해보는 일이 아니라서…’
그렇게 예를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초최해진 백작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여…”
라는 말을 서두로 하여, 백작은 나라에 충성하고 백작가의 명예에 먹칠하지 않으며… 등등의
레파토리를 읆기 시작했다.
‘흐음… 세계는 달라도 어디나 사람이 생각하는 건 비슷비슷 한가보군.’
백작의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를 흘려들으며 속으로 피식 웃던 나는 마지막으로 백작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 한 백작이 될 것을 맹세하는가?”
“맹세합니다.”
“그 진실된 맹세를 믿고 이 자리에서 그대에게 백작 작위를 물려주겠노라.”
‘진실되기는 개뿔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걷으로는 어디까지나 진지한 표정을 고수한 채 나는 어서 빨리
이 식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백작의 손짓에 대기하고 있던, 제복을 입은 기사가 조심스레 폭신해 보이는 빌로드로 감싸인
쿠션이 붙은 쟁반을 가지고 앞으로 나섰다.
그 위에는 여러 보석으로 장식된 삐까번쩍한 검이 한 자루 올려져 있었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 후계자 반지 대신에…”
백작은 다시 입을 열며 내 손을 들어 주위 사람들이 내 손에 끼인 후계자 반지가 잘 보이도록
했다.
뭐, 그래봤자 저쪽 멀찍이 있는 사람들이 이 반지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만, 단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보인 모양이었다.
주위에서 놀람에 찬 작은 소리들과 웅성거림이 들려오는 걸 보니 말이다.
그에 백작은 만족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천천히 내 손가락에서 후계자 반지를 빼내어 옆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내민 섬세한 세공이 된 상자에 내려놓고 자신의 손가락에 끼인 반지를
빼내어 내 손가락에 다시 끼워줬다.
“엠브로스 백작가를 상징하는 반지를 끼워주노라. 또한…”
그리고는 기사가 들고 있던 쿠션 쟁반에서 화려한 검을 들어 나에게 건네줬다.
“뒤를 돌아 사람들을 보며 검을 천천히 치겨 드십시오.”
지라스 경의 지시에 나는 천천히 뒤돌아서 검을 치켜 들었다.
그러자 뒤의 백작이 내가 현 엠브로스 백작이 되었음을 선언했고, 아래에서 우렁찬 함성과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 백작은 단에서 내려가고 나는 백작이 앉아 있던 의자에 당당한 자세로 앉았다.
지라스 경은 내 오른쪽 뒤에 섰고 말이다.
“그럼 다음은 엠브로스 백작님께 대한 충성 서약식이 있겠습니다.”
진행자인 듯한 시종의 외침에 단상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붉은 융단 위로 올라와 나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일어서십시오.”
‘젠장, 이렇게 금방 일어서게 할 것을 뭐하러 앉게 했담…’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순순히 일어서서 그의 앞에 섰다.
” 저 엠브로스 기사단 단장 진 윙겟 남작은 엠브로스 기사단을 대표하여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쯧쯧… 진부하게 엠브로스 기사단이 뭐야? 좀 멋있는 이름을 지을 것이지…’
속으로 그렇게 중얼댔지만,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위엄 있는 표정으로 – 내가 그런 표정
지으면 웃길지도 모르지만… – 지라스 경이 시킨 말을 읇조리며 검을 진 윙겟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기사의 양 어깨에 가져다 댔다.
“엠브로스 백작 지위를 물려받은 나…”
그렇게 해서 시작된 충성 서약식은 10여명이 앞으로 나서서 읆조리자 끝났다.
5명쯤 지나자 슬슬 지겨워진 나는 설마 수십명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다.
그만큼 엠브로스 백작가가 큰게 아닌건지, 아니면 대표들만 나온 거라서 짧게 끝난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서약식이 끝나고 진행자의 유연한 진행으로 인하여 다시 파티가 재개되었을때 나는
백작, 그러니까 전 엠브로스 백작의 인도에 따라 망토를 벗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내 뒤는 여전히 지라르경이 따르고 있었다.
“인사 하십시오. 이쪽은 저의 영지의 이웃 영지를 다스리고 계신…”
전 백작이나 지라르 경이나 내가 혹시라도 실수할까봐 무지 긴장한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내가 자연스레 귀족 예법으로 다른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며 축하를 받는 걸
보고 눈이 둥그래졌다.
“주디스님께서 귀족 예절까지 가르치셨습니까?”
“아뇨. 다른 사람에게 배웠는데요.”
“그렇습니까? 누군지 몰라도 그 분께 감사해야 겠군요. 사실 어색해 하실까봐 걱정 많이 했습니다.”
‘어색하하는게 아니라 다른 귀족들에게 비웃음을 살까봐 걱정한 거겠지만… 그나저나 나에게
예법을 가르친 사람이 맥알파인 공작가의 집사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전 백작의 말에 피식 웃음 지으며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전 백작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상하군요. 분명히 참석 하셨는데 어디 있는 거지?”
“누가 말입니까?”
“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 제일 중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안 보이는군요.”
계속 두리번 거리던 백작은 그 누군가가 안 보이는 지 결국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만 자리를 피해 쉬고 계시겠습니까? 제가 찾아보고 오도록 하죠.”
그렇지 않아도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좀 피곤했던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 테라스에 나가있죠.”
“알겠습니다. 찾으면 그쪽으로 데리고 가던지 시종을 보내던지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렇게 해서 전 백작과 헤어진 나는 지라르 경을 데리고 사람들 틈을 헤치며 테라스로 향했다.
유리 문을 열고 파티장 밖으로 나서자 매서운 겨울 바람이 엄습했지만, 파티장의 시끄러운 소리
들과 복작스러움이 사라진 곳이라 그런지 오히려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정 추우면 정령들에게 부탁하면 되고 말이다.
“춥지 않으십니까?”
“견딜만 한데요 뭐.”
“다행이군요. 아, 아직 아무것도 안 드셨을텐데 뭐라도 요기할 걸 가지고 올까요?”
그 동안은 어린애 돌보는 유모처럼 내 뒤를 따라다니던 지라르 경이었는데 테라스에는 다른
사람들이 없어 잠시 날 혼자 나둬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주겠어요?”
그의 친절한 말에 출출함을 느낀 내가 반색하며 묻자 지라르경이 피식 웃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고마워요.”
내 감사의 인사를 뒤로 하고 지라르 경이 다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가자 혼자 남겨진 나는
테라스에 놓여진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쿠션이나 방석 같은게 없어 차가운 기운이 엉덩이를 타고 올라왔지만, 피곤한 몸을 쉬게 하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아아… 힘들었다. 정말 지겹다니까? 저놈의 파티는 도대체 언제쯤 끝나는 거야?”
차가운 기운을 무시하고 의자의 등받이에 등을 대고 머리까지 뒤로 젖힌 나는 눈을 감고 온 몸을
타고 올라오는 시원한 기운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 테라스를 향한 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라스경이 벌써 왔나 싶은 나는 좀 더 편한 자세로 있고 싶은 유혹을 애써 떨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 지라스경 벌써…”
하지만,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내 눈앞에는 다른 인물이 버티고 서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이야.”
장난기가 가득 들어있는 녹색눈이 부드럽게 휘었지만, 생각지 못한 인물을 만난 탓에 나는
마주 웃어주지 못하고 눈을 크게 치켜떴다.
“에?”
그러자 그가 섭섭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반갑지 않은 거야? 나는 무척이나 반가운데…”
그러며 놀라서 굳어진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는 손을 뻗어 바람에 휘날려 뺨을 간질이는 내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 귀로 넘겨줬다.
“흐음.. 머리를 많이 길었는데?”
그의 행동에 정신을 차린 나는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으윽… 정말… 여전하시군요, 조엘님은.”
그랬다.
내 앞에 나타난 이는 전에 잠시 내가 몸을 의지한 공작가의 장남인, 조엘 맥알파인 이었던 것이다.
나의 투덜거림에 조엘의 얼굴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장난스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도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