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34)
제 28화 재회
“도대체 그 동안 어디 있었던 거지?”
“에… 그게… 아버지에게 끌려서 집으로 갔었죠.”
“아버지? 웨스트모어랜드 후작성에 갑자기 나타났었던 그 물술사?”
“예.”
내 말에 조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앉았던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랬군. 그럼 그때 거기서 여기로 온 건가?”
조엘이 앉기에 따라서 그의 맞은편에 앉았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어리둥절 해졌다
“예?”
그래 뭔 소린가 하고 조엘을 쳐다봤더니 아까의 그 미소는 어디로 버렸는지 그의 얼굴은
겨울 밤바람 못지 않게 차갑게 굳어진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정말 놀랐지. 아까 파티장에서 작위를 계승받기 위하여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널 봤을때
나는 순간적으로 환각을 보는 줄만 알았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널 여기서 볼
줄이야. 그것도 당당한 백작이 된 널 말야.”
“아… 그게…”
얼결에 된 거라고 말하면 절대 믿어줄 것 같지 않은 분위기라 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조엘의 차가운 질문이 다시 들려왔다.
“왜지?”
“예?”
쾅!
“왜 날 속였느냔 말이다!”
조엘은 무척 분노한 어조로 외치며 주먹을 탁자로 내리쳤다.
어지간해서는 흥분한 내색도 안하는 녀석이었는데 저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걸 보니 무지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억울한 건 나였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제가 언제 조엘님을 속였다는 겁니까?”
내 반박에 조엘의 입매가 비웃음으로 일그러졌다.
“하긴… 속인 건 없지. 너는 단지 아무 말도 안 했을 뿐이니까.”
“예?”
점점 알수가 없어졌고, 머리까지 지끈지끈 아파왔다.
“부디… 알아듣게 설명좀 해주시겠습니까?”
하지만, 조엘 녀석은 계속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현 엠브로스 백작.. 아니지, 이제는 전 백작이라고 해야겠군. 전 백작의 외동딸을 제치고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귀족이었으면서 어떻게 자존심을 억누르고 반년동안 내
시종 노릇을 했는지 이해 할 수가 없군. 그랬는데 이제와서 백작으로 나서다니… 역시 엠브로스 가는 우리 맥알파인 공작가와 다른 길을 걷겠다는 건가?”
“예에?”
이거 왠지… 내가 원하지 않았으면서도 아주 복잡 다단한 세계로 점점 끌려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와 함께 내 머리속도 점점 복잡해져갔다.
그러는 와중에 조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네가 우리집에 시종으로 들어온 시기다. 그때는 엠브로스 백작가나
우리나 다 같은 친여왕파였는데 무엇때문에 네가 우리 집안에 잠입한 거지? 그래서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이 도대체 뭘까?”
“잠입이요? 내가 도대체 왜 조엘네 집에 잠입 했다는 겁니까?”
“나도 그걸 알고 싶어. 말해봐, 해인. 왜 네 신분을 숨기고 우리 집안에 들어온 거지?”
“숨기긴 누가 뭘 숨겼다는 거예요? 절 시종으로 잡아둔 건 조엘님이셨잖아요.”
“물론 널 잡은 건 나지. 하지만, 네 신분을 밝혔더라면 널 시종으로 삼는 대신 엠브로스 백작가로
고이 돌려 보내 줬을 거야.”
조엘의 그 말에 나는 그제야 그가 뭔 이야기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백작가 사람이라는 걸 숨겼다는 겁니까?”
내 말에 조엘이 피식 웃었다.
“숨긴게 아니지. 아까 네가 말했지 않나? 숨긴게 아니라 단지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조엘의 비아냥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나원 참… 기가막혀서…”
좋아서 웃었던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기가막혀서 저절로 나온 웃음이었다.
내가 픽~ 하고 웃자 조엘의 눈꼬리가 꿈틀 거렸지만, 나는 싸악 무시했다.
“내가 언제 말 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습니까? 조엘님이 혼자서 추측하고 단정한 거지. 이런걸
바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한다는 거겠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조엘이 날 매섭게 쏘아보기에 나는 지지 않고 마주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숨기던 말 하지 않던 내가 백작가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그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막말로, 저는 제가 백작가 사람이라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고요.”
하지만, 이 사실이 조엘에게 안 먹힌 모양이었다.
내 말에 조엘은 천천히 차가운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대더니 팔짱을 터억 끼면서 이렇게 대꾸했으니
말이다.
“…. 그 말을 내가 믿을 거라고 보는가?”
“믿든 안 믿든 그건 사실입니다. 엠브로스 백작 성에 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고요.”
“그러니까… 처음 오자마자 백작이 널 알아보고 백작 작위를 물려줬다? 아예 백작이 산속 깊은
곳에 유거하는 널 찾아와서 백작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하지 그래? 그게 더 믿음이 가는데…”
조엘의 비아냥에 나는 발끈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 침착한 목소리가 조엘의 말을 맞받아쳤다.
“해인님 말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자작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
됩니다만?”
시선을 돌리니 거기에는 언제 돌아왔는지 지라르경이 여러가지 음식이 조금씩 담긴 접시를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고마워요.”
조엘은 싸악 무시한 채 지라르 경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접시 위에 있던 포크를 막 집어들려고
하는데 조엘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믿기 힘들군.”
“그러니까 믿거나 말거라니까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
내 말에 조엘과 지라르경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 무슨 소리야?”
“지구가 뭐죠?”
“아하하하… 그러니까… 그런게 있어요.”
“흐음… 하지만, 누구라도 믿기 어려울 거야. 사실 오늘 작위를 물려주겠다는 선포를 들었을 때
나는 전 백작의 친 딸 에르미아 엠브로스가 받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거든.”
“원래는 그 아가씨가 받기로 되어 있었을걸요?”
나는 접시에 올려져 있는, 먹음직 스럽게 두툼하지만, 한 입에 넣을 수 있게 작은 샌드위치를
콕 찍어 입에 가져가며 조엘의 말을 거들었다.
“커흠흠…”
그 순간 내 뒤에 서 있던 지라르경이 추운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조엘은 그런 그에게 시선 조차 돌리지 않고 나만 똑바로 바라본 채 물었다.
“그래? 그런데 왜 네가 받게 된 거지?”
그래 나도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나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조엘님께 얼결에 끌려갔듯이, 이번에도 얼결에 끌려 나온 거거든요.”
“해, 해인님!”
지라르경이 뒤에서 다급하게 부르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지라르경?”
“아니, 그, 그게…”
“예?”
말똥 말똥 거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지라르경은 안절 부절 못하다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가요?”
그의 말에 나는 다시 접시쪽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풋, 푸하하하하~~”
갑자기 조엘이 마구 웃어제꼈기 때문이다.
이 넘은 또 왜이러나.. 하는 시선으로 내가 그를 바라보며 한 입 크기의 고기 꼬치를 먹는 동안
신나게 웃어제낀 조엘이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다 말이야?”
“예?”
“아니… 훗훗, 그런게 있어. 아니, 아니… 이제 백작님이 되셨으니 나보다는 지위가 높으신
분께 하대를 할 수가 없겠군. 어쨌든,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엠브로스 백작님. 아참, 데니가 저와
동행했는데 만나 보시겠습니까? 그도 백작님을 보면 무척 기뻐할 겁니다.”
“하아?”
데니형도 왔다니 반갑기는 했지만, 그 보다도 갑작스레 변한 조엘의 행동에 적응이 안되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얼떨떨 하기만 했다.
내가 이러던 말던 조엘은 다시 내가 알던 조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그때 이 요상한 분위기를 타개해준 인물이 등장 했으니…
“아이고, 여기다 모여 계셨군요.”
나에게 백작 작위를 물려준 전 백작이었다.
그의 모습을 보자 조엘이 예의상 자리에서 일어났고 덩달아 나도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나만 앉아 있는 건 좀 그렇지 않겠는가?
“안녕하십니까, 백작님.”
조엘이 먼저 나서서 전 백작에게 인사를 하자 전 백작이 허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허허, 백작님은 무슨… 이제는 물러난 노물일 뿐입니다. 엠브로스 백작은 바로 저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다가온 전 백작이 조엘을 가르켜보였다.
“백작님, 이 분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그 분입니다. 제가 소개시켜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인사를
하고 계셨군요.”
“아, 그렇습니까?”
이번 파티에서 가장 신경써야 할 인물이 조엘이었다는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비록 나보다 한단계 낮은 자작이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이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맥알파인 공작의 후계자, 그러니까 미래의 공작이었으니 현재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에
있는 전 백작 또한 그에게 함부로 하대를 못하는 거였다.
자작이라는 작위는 국법상으로 백작 아래의 단계에 있지만, 이 자작이라는 작위가 공작이나
후작의 후계자에게 내려지는 작위였으니 말이다.
“하기야, 맥알파인 공작가라면 알고 계신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군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가문 아닙니까?”
슬쩍 조엘을 띄워주는 전 백작의 말에 조엘이 겸양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과찬의 말씀을… 엠브로스 백작가야말로 요 근래에 여왕 폐하의 크나 큰 신임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무슨 말씀을요. 아, 이번에 새로운 백작님을 여왕폐하께서 잘 봐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아직 경험이 많지 못하신 분이니 조엘님께서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뭘 어떻게 하지 않아도 여왕폐하의 신임을 한 몸에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데…”
대충 상대편을 높이는 인사치례를 끝내려는 듯 조엘이 화제를 바꾸려 했다.
“예?”
그에 전 백작이 예의 바르게 반응을 해주자 조엘이 나와 전 백작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전 백작님의 뒤를 이어 백작이 된 거라면… 현 백작님이 전 백작님보다는 아랫 사람일 것
같은데… 어째 전 백작님이 윗 사람 대하듯 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 나도 그게 궁금 했다. 뭔 사정으로 인하여 나에게 백작 작위를 넘겨 준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나를 깍듯이 윗사람 대할 것 없잖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전 백작을 쳐다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그건 간단합니다. 현 백작님은 제게 할아버지뻘이시거든요.”
“네?”
조엘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더 놀랐다.
내 외할아버지가 아마도 전 백작 전대의 백작인 건 알겠는데 아직 나와 전 백작의 확실하게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뻘이라니…
아직 결혼도 안 한 나에게 50대의 손자는 너무한 거 아닌가?
하지만 전 백작은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아, 여긴 너무 춥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여기에 계속 계신다면 감기에 걸리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모두들 들어가시지요.”
그러자 지라르경도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밖에 너무 오래계셨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해인님.”
“아, 그럴까요?”
그렇게 전 백작과 지라르 경의 권유로 인하여 다시 파티장 안으로 들어간 나는 조엘과 계속
붙어 있기는 했지만, 우리 주위로 몰려드는 다른 귀족들로 인하여 더 이상 개인적인 이야기는
나눌 수 없었다.
드디어 몇 시간이 흐른 후 재미 없는 파티가 끝나자 전 백작과 지라르경은 나를 침실로 데리고
갔다.
“헤에… 여기는…”
그 곳은 내가 옷을 갈아입던 바로 그 방이었다.
“여기는 대대로 엠브로스 백작이 쓰던 방이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백작님이 되셨으니 당연히
이 방을 쓰셔야지요. 파티 동안 급하게 준비시켜 부족한 게 많을 겁니다.”
전 백작이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자 나는 한숨을 쉬고 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외할아버지가 백작이셨다는 것도 몰랐고,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화려한 생활을 했던 것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생활했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과분하게 여겨질 정도이니 그런 건 걱정 마시고요, 이제 제대로 된 설명을 들었으면 하는데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백작의 안색을 살피고는 덧붙였다.
“피곤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전 백작은 딸내미가 죽을 뻔 했고, 그 딸에게 물려줄 작위를 나에게 넘겨야 하는
충격속에서도 티 하나 안 내고 꿋꿋하게 파티에 참석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이 파티 주최자이니 자리를 비우지도 못하고 끝까지 버티고 있었으니, 온전한
정신일때도 피곤했을 거였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티를 안 내더니만 여기에 우리끼리 있어서 그런지 창백한
안색과 피곤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들을 권리는 있었다.
나도 익숙지 않은 파티에 붙들려 있어서 그런지 정신이 하나도 없고 빨랑 편하게 눕고 싶었지만,
그 보다도 이 모든 상황에 대해 속시원하게 알고 싶었다.
내 말에 전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신 겁니다. 실례지만…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아, 그러세요.”
전 백작이 폭신해 보이는 소파를 곁눈질로 보며 말하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지만, 한 잔 해도 되겠습니까?”
“좋을대로 하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전 백작이 어딘가로 걸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먼저 지라르경이 그를 제지하며 나섰다.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전 백작님은 우선 앉으시지요.”
“고맙군.”
전 백작이 정말 고맙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지라르경이 나를 바라보았다.
“해인님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전 됐어요.”
그의 말을 거절하며 전 백작의 맞은 편에 앉자 전 백작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는 것이 보였다.
“후우, 정말… 제 생애에 오늘 처럼 피곤한 날은 없었던 것 같군요. 몇년 전 반대파를 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할 때도 이만큼은 피곤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힘 없는 전 백작의 말에 나는 쬐께 미안해졌다.
“너무 힘드시다면… 내일로 미룰까요?”
전 백작이 내일 아침 당장 도망갈 것도 아닐테니 내가 조금만 참아줄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전 백작이 힘 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런 설명은 빠를 수록 좋겠지요. 아, 고맙네.”
전 백작은 지라르 경이 건네준 크리스탈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신 뒤에 나를 바라보았다.
“우선, 제 이름은 이브스햄 엠브로스라고 합니다. 저와 백작님의 관계를 말씀드리자면… 제
아버지가 주디스님 막내 동생의 손자이십니다. 그러니 백작님께서 제 할아버지 빨이신 거죠.
절 불러주실때 그냥 이브스햄이라고 불러주심 됩니다.”
“헉… 그, 그런 겁니까?”
나의 기겁하는 표정에 백작이 피식 웃었다.
“뭐, 이렇게 나이 많은 손자를 두고 싶어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주디스님이 백작님을 늦게
나으시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니 어쩔 수가 없죠. 그리고 이쯤 하면 아시겠지만… 제 딸에게
갈 작위를 백작님이 가로챘다는 생각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작위는 원래 백작님 것이었으니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가 그렇다니 그런 건줄 알아야겠지.
“그, 그런 가요?”
그래서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전 백작, 그러니까 이브스햄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모양입니다.
“원래… 작위는 주디스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백작님, 그러니까… 제 고조 할아버님이자
백작님의 할아버지께서는 후계자를 주디스님으로 삼으셨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말씀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러한 결정은 감정적인 것이었지 우리 엠브로스 가를 위한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벨레니 국가에서는 이종족이나 이종족의 피가 섞인 사람을
천대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에 대한 설명은 외할머니께 들었었던 터라 나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예.”
“그런데, 이걸 아셨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인간 세상이 싫으셨던 건지 주디스님께서 성년이
되시자마자 가문을 떠나셨지요. 그렇다고 아예 모습을 감추신 건 아니었지만, 백작님의 할아버님
께서 돌아가시고 백작 작위를 물려받을때는 나타나지 않으셨답니다. 그래 그 분의 바로
아래 동생, 그러니까 제게는 큰 증조 할아버지가 되시겠군요. 분께 돌아갔지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작위가 제 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뭐, 그 당시에는 주디스님의 허락 하에 동생분께서 작위를 이어받으시고 그 분이 돌아가시자
그분의 장남이 이어받으시고, 또 손자께서 이어받으셨지요. 거기까지는 사실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손자분… 그러니까 백작님의 조카뻘 되시는 분이 사고로
돌아가셨을때 일어났답니다. 혹시, 저희 나라의 작위 계승에 대한 법을 아십니까?”
“대충은요. 우선권은 아들에게 있지만, 아들이 없을 경우 딸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이브스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는 군요. 그런데 거기에는 단서가 붙지요. 결혼하지 않은 딸이라는 것 말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백작님의 조카뻘 되시는 분이 사고로 돌아가실 때 작위를 물려받을 아들까지
있었던 게 문제였지요. 그래 작위가 딸에게 돌아야 했지만, 그 당시 딸들은 모두 결혼을 한
상태였거든요.”
“저런… 그래서 제 어머니에게 돌아갔어야 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원래 처음부터 작위는 주디스님 것이었으나 그 분이 사양해서 동생분께 간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분의 대가 끊기는 바람에 계승권의 1순위는 다시 주디스님이 되신
거죠. 그래 정석으로라면 주디스님을 찾아서 그 분께서 사양 하셔야 그 다음 순위로 넘어가야
했습니다만…”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이브스햄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또 한모금 마셨다.
“후우… 그 다음 순위의 계승권자는 제 아버님이셨습니다. 운명인지 모르겠지만, 주디스님의
바로 밑 동생분께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작위를 물려받으시는 분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셨거든요. 거기다가 작위를 물려받으신 분도 외아들을 낳으셨고 말입니다.
그 분의 아들은 작위를 물려받을 아들과 사망하셨고… 그래서 주디스님의 막내 동생의 장손
이셨던 제 아버님께 순서가 올 수 있었던 것이었죠.”
“그랬군요.”
“나쁜 놈이라고 말씀하셔도 할 말은 없지만, 제 아버님께서는 주디스님을 찾지 않고 그대로
작위를 물려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곧 제게 물려주셨지요. 이름뿐인, 아무런 힘도 없는 집안을
백작가로 만들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셨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브스햄의 모습에 나는 괜히 멋적어져서
위로의 말을 건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어머님이라면 그냥 당신의 아버님께 작위를 넘겼을테니까요.”
“아, 예… 사실 제 아버지의 변명도 그랬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제게 작위가 넘어왔고, 저 또한
제 아들에게 물려줄 작정이었지요. 그런데… 아마 벌이었던지 제 아들은 10살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지요.”
“그, 그러셨습니까? 참으로 안타까우셨겠군요.”
내가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 어찌할 바를 몰라하자 이브스햄이 피식 웃었다.
“위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래전 일이라 상처는 많이 가라앉았으니까요. 그런데 저에게는
아들이 그 녀석 하나 뿐이었거든요. 그 외에는 딸이 한명이었습니다. 저는 이 아이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싶었지요. 그러나 제가 죽을 즈음에는… 아마도 딸은 결혼한 상태일 겁니다. 우리
나라 법으로는 결혼한 딸에게는 작위를 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저는 딸이 결혼하기 전에 작위를
물려주려고 했던 겁니다.”
“그날이 오늘이었군요.”
“예….”
내 말에 이브스햄이 내 눈치를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는 아랑곳 없이 나는 계속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내가 나타나자 놀라셨겠군요. 따님에게 작위를 물려주는데 방해가 될 거라
생각하셨나보죠?”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 보다도 먼저 그… 에, 이름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동생분이 문제였군요. 그분도
자기 아들에게 넘기려고 사건을 꾸몄던 거 같은데.”
내 말에 이브스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 녀석은 제 아버지의 동생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제 사촌 동생이지요.
제 딸 다음으로 작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넘어가면 제 딸이 후손을 보지 않고 죽지 않는 이상은 작위는 물건너 갈테니 오늘을 노린 것 같습니다.”
“흐음… 그랬군요. 그래서 그분도 저란 존재의 등장이 반갑지 않았겠네요.”
“그랬을 겁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 말을 긍정하는 이브스햄을 바라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고 죽이려는 건 너무 하지 않았어요?”
분노나 살기가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건만, 이브스햄은 최후의 통첩이라도 받은 것 처럼
얼굴이 하얗 질린 채 굳어버렸다.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 정도에 죽을 내가 아니라 겁먹은 것도 아니었고, 또 죽을
걱정이 없었으니 이브스햄이나 그 동생이 날 죽이려고 할때도 어리둥절할 뿐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노나 이해를 떠나서 이브스햄의 행동은 용서가 안되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정령사가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엄마의 초상화 한번 보려고 했다가 –
물론 보통 사람이었다면 몰래숨어들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한번 보고싶으면 정문으로 찾아
가 정식으로 요청 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 이 세상을 하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에 눈이 어두우면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옳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뭐, 이브스햄이야 내가 복수할 생각으로 그러는 건지, 인간적으로 용서할 수 없어서 그러는
건지 모를테지만 말이다.
아니, 아무래도 상관 없으려나?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이브스햄을 어떻게 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그냥
냅둘 수도 없었다.
지금 그의 사촌 동생이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 이브스햄 딸내미도 죽이려 했지만, 그건
아직 증명이 안 되었으니까 – 잡혀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그 사촌 동생이나 이브스햄이나 똑같아 보이는데 이브스햄을 용서해주면
사촌 동생만 혼줄이 나는 거 아니겠는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무지 난감했다.
이브스햄도 그걸 알고서 내 앞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말씀… 어떻게 생각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처분은 모든 파티가 끝난 다음에 내려 주십시오. 제가 갑자기 사라지면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그의 말에 난감해 하고 있던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죠.”
“그럼…”
내 말에 슬슬 대화의 장을 파하려고 했던 이브스햄의 말은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에
끊겨 버렸다.
“백작님, 백작님!”
“무슨 일이냐?”
나 대신 내 뒤에 있던 지라르경의 말에 문이 열리고 기사 차림을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큰일입니다. 지하 감옥에 가둬놨던 벤자민 엠브로스와 이스파엘 엠브로스가 탈출했습니다.”
아마 그 둘은 이브스햄의 사촌 동생과 그의 아들일 것이다.
기사의 말이 끝나자 이브스햄이 벌떡 일어나며 놀라움을 포했다.
“뭣이라? 어떻게?”
“밖에서 도와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지하 감옥을 습격하여 그 둘을 데리고 갔습니다.”
“아마, 벤자민 엠브로스가 데리고 온 자들일 것입니다. 만약을 대비했나보군요.”
침착한 지라르 경의 말에 이브스햄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서 그들을 잡아들이라고 하십시오. 그 둘을 나두었다간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브스햄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나는 보고하기 위해 달려온 기사에게 물었다.
“도망자들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예? 아, 그, 그것이…”
그 기사는 내가 백작이 되었다는 걸 몰랐던 모양이다.
나에게 존대를 하는 이브스햄의 말에 당황하느라 내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버벅거리자 지라르
경이 나섰다.
“뭐 하는 건가? 백작님께서 묻고 계시지 않는가?”
지라르경의 호통에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부동 자세를 취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아, 예. 아직 성을 빠져나가지는 못했고,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진 단장은 뭘 하고 있지?”
이브스햄의 물음에 기사는 부동 자세를 여전히 유지한채 대답했다.
“단장님께선 일단의 기사들을 데리고 뒤쫓고 계십니다.”
“골치 아프군. 다른 귀족들이 알기 전에 빨리 잡아들여야 할텐데…”
이브스햄의 중얼거림에 지라르경이 나를 바라보았다.
“백작님, 부디 제가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나는 모르고 있는 사이 지라르경이 내 호위 기사로 결정 된 모양이었다.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을 떠날때는 꼭 호위 대상의 허락이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 혼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더욱이 아까부터 툴툴대고 있는 실레스틴을 달랠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는 일이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그러니 앞장 서 주세요.”
“예? 아, 예.”
보고 하러 온 기사보고 앞장 서라고 했더니만, 그가 순간적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이브스햄까지 갈 필요는 없겠죠?”
내 말에 이브스햄이 고마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딸에게 가겠습니다.”
“그러세요.”
조용하게 성을 빠져나와 성 옆에 있는 숲으로 달려가니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숲속에 들어가
수색하고 있었다.
“단장님!”
보고하러 왔던 기사는 단장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고, 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던 단장은
나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백작님까지 오셨습니까.”
“상황이 어떻습니까?”
“좋지 않습니다. 저쪽은 꽤나 실력자들만 있더군요. 숲을 포위하고는 있는데, 병사들로는 상대가
안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저 포위망을 좁혀 도망가지 못하게 막은 후 기사들에게 상대 하게 하는
게 상책이지만, 저쪽은 둘러쌓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겠지요.”
“아직 숲을 빠져나가지는 못했겠지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수색하고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을 숲 밖으로 내보내 주시겠습니까?”
뜻밖의 내 말에 단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저들을 풀어주실 생각 이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단지 저에게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 모든 기사들과 병사들은 단지 숲만 포위하게
해주십시요.”
“그, 그런…”
막 뭐라고 하려던 단장은 내 뒤쪽에 있던 지라르 경의 얼굴을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요.”
그가 몸을 돌려 옆에 있는 기사들에게 뭐라 지시를 내리자 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곧 이어 신호인 듯한 피리 소리들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런데, 정말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불신의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단장에게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네. 자, 모두 다 나왔나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의 말대로 잠시 기다리자 곧 사방에서 병사들이 달려와 모두 숲 밖에서 포위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어쩌긴요, 잡아야죠. 실레스틴!”
내 말에 옆에 있던 실레스틴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뛰쳐 날아갔다.
[녜에~ 기다리고 계세요오~~]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내 부름에 아무런 변화가 없자 단장을
비롯한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그런 그들에게 씨익 웃어준 채 잠시 기다리자 멀리서 끄아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메아리쳐
울리더니 곧이어 하늘에서 뭔가가 내 앞으로 뚝 떨어졌다.
그건 기절해 있는 사람이었다.
“이, 이자는!”
“어서 잡아라!!”
병사들과 기사들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달려들어 포박을 했는데, 채 포박을
해서 한쪽에다 끓어다 놓기도 전에 또 떨어져다.
올려다보니 실레스틴에게 불려 나온 듯한 슈리엘이 다시 숲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실레스틴이 잡아서 기절 시킨 녀석들을 날라다 놓는 모양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단장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지만, 나는 배시시 웃을 뿐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지라르경이 자신의 생각을 물어왔을 뿐이었다.
“정령을 불러내신 거군요?”
그에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녭. 이래뵈도 정령술사거든요.”
“하아, 정말 놀랍습니다. 정령술사셨다니… 그런데 이런 일도 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단장이 감탄어린 어조로 말하는 동안에도 숲속에서는 계속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더불어
슈리엘들이 날라오는 사람들도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주변의 몇몇 기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과 병사들이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이번 일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브스햄의 사촌과 그의 아들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마지막으로 실레스틴이 무지 개운한 얼굴로 땅에 우아하게 착지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녀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우훗, 너무 즐거웠어요!]너무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내가 그녀에게 이상한 취미가 생기게 해준 건 아닌지 좀 걱정
스러울 정도였다.
[좋았다니 다행이네. 어쨌든, 사람들을 기절 시키는 선에서 끝내줘서 고마워.] [그거야 해인님이 원하셨잖아요.]그렇게 실레스틴의 행복해 하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나는 쉽게 이번 일을 끝낸 덕에 무지 좋아
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뒤로한 채 지라르경과 내 방으로 돌아갔다.
“역시… 라고 해야 할까요? 아까 레이디 엠브로스양을 구해주실 때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더 대단하시군요.”
“칭찬은 고맙지만 크게 기쁘지는 않네요. 이건 다 부모님 잘 만나서 생긴 능력이거든요.”
내 말에 지라르경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스님께 물려받으신 거겠죠? 주디스님도 정말 대단한 정령사셨습니다.”
지라르경은 어머니에게 도움을 받아서 그런지 거의 숭배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마도 나의 이런 능력은 어머니보다 아버지 영향이 더 컸을테지만,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머니께 물려 받은 것도 있고, 아버지께 물려 받은 것도 있죠.”
그러자 지라르경이 나를 바라봤다.
“제가 주제 넘은 질문을 드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해인님의 아버지라는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디스님의 배우자 되시는 분이니 결코 평범하지 않을 듯 싶습니다만…”
“절대 평범하지 않죠. 아마 이 세상에 어머니 같은 분은 단 한분이었을걸요?”
‘정령왕을 남편으로 삼다니 말야.’
하지만 이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그쯤에서 입을 다물자 지라르경은 내가 말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우리는 그런 침묵 속에서 내 침실에 도착했다.
안에는 나보다 서너살 어려 보이는, 그러니까 대충 16, 7세쯤 보이는 소년이 침대보를 정리
하다가 내가 들어서는 걸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누구지?”
“녭, 이제부터 백작님 시중을 들어드릴 캘빈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건강해보이는 피부에 나와 비슷한 키를 가진 그 소년은 반짝 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에 황금색이 섞인 갈색 눈을 가진 그 소년은 콧잔등에 주근깨가
나 있고 뺨은 발그레한 것이 아직 어린애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 소년의 씩씩한 인사에 지라르경이 설명을 덧붙였다.
“집사인 엘버트님의 막내 아들입니다. 몇달 후면 17세가 되지요.”
“아, 집사라면… 아까 그?”
계승식 전에 지라르경과 같이 내 옷을 갈아 입히던 사람을 떠올리며 묻자 지라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어딘지 집사와 이 소년의 얼굴이 닮은 듯 했다.
“그래… 네가 내 시중을 들게 되었다니… 잘 지내보자.”
작위를 이어받아 백작이 된 나에게 내 시중을 담당할 전속 시녀나 하인이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평생 시중을 받으며 살아본 적이 없던 내가 막상 시종을
갖게 되니 조금은 어색했다.
그래 어색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자 켈빈이 다시 싹싹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녭. 이제 주무실 거지요? 목욕하시고 주무실 건가요, 그냥 주무실 건가요?”
“간단하게 씻고 그냥 잘 거야.”
“그럼 제가 옷을 벗겨 드리겠습니다. 씻을 준비도 해드리구요.”
켈빈이 부지런을 떨며 나에게 다가오자 지라르경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지요. 혹시 제가 필요하실 일이 생기면,
제 방은 백작님 바로 옆 방이니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세요. 지라르경도 푹 쉬세요.”
“예.”
지라르경이 침실 밖으로 나가는 사이 켈빈이 익숙한 솜씨로 실크 레이스로 된 타이를 풀고 겉옷을
벗겨 정돈했다.
그 소년이 내 겉옷을 구겨지지 않도록 의자에 걸쳐 놓는 모습에 나는 그 동안 계속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보니 켈빈 깜빡했는데…”
“녜?”
“너, 혹시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니?”
“물론이죠. 15세가 된 후부터 어머니 심부름으로 자주 마을에 갔다 왔는 걸요.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래, 잘됐구나. 그러면… 아, 아니다.”
나는 켈빈을 통해 잠시 잊고 있었던 듀비와 잭슨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했지만, 생각해보니
지금은 새벽이었기에 연락을 취하기에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그게… 그래, 펜하고 종이좀 가져다 주겠니? 아, 씻을 물 준비해주고 갔다주면 좋겠어.”
그렇다고 내일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낼 생각을 하니, 지금 자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듯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 보내기는 그렇고 해서,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녜. 아, 그리고 이거 갈아입으실 옷인데요, 제가 시중 들어드릴까요?”
잠옷으로 보이는 옷을 꺼내들고 묻는 켈빈에게 나는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나 혼자 갈아 입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
간단하게 씻고 잠옷으로 갈아 입은 뒤, 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 채 며칠 성에
머물겠다고만 쓴 편지를 써서 슈리엘을 통해 잭슨에게 전달 한 후에야 나는 침대에 들 수
있었다.
폭신한 침대에는 부드러운 실크로 된 이불 위에에 털이 고스란히 달린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진
이불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가죽 주머니가 들어 있어 침대 안을 따스하게 뎁혀 놓고
있었다.
“오오, 좋은데? 이 맛에 사람들이 귀족이 되려는 걸까나?”
침대 안의 기분 좋은 따뜻함에 녹아내린 나는 마악 쫓아오는 잠을 반갑게 맞으면서 중얼 거렸다.
하지만 그 다음날이 되자 나는 인상을 북북 쓴 채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왜 귀족이 되려는 거지? 이렇게 귀찮은데 말이야.”
그도 그럴 것이, 약간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나를 기다리는 건 정말 귀찮은 빽빽한 스케줄이었던
것이다.
아침 겸 점심을 먹은 나에게 일단의 하녀들이 달려와 내 옷의 치수를 재고 나자 이브스햄과
집사가 와서 대강의 스케줄을 말해주는데 한숨만 푹푹 나올 뿐이었다.
우선 그 날은 점심때부터 오후 늦게까지 성 밖에 있는 넓은 숲에서 사냥이 있었고, 저녁에는
그날 포획한 사냥물로 벌어지는 가벼운 만찬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낮에는 귀족들과 같이 온 기사들 끼리의 검술 대회가 있었고 – 거의 귀족들
구경거리였지만, 진검을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대회였다. 물론 진료팀은 대기하고 있었고, 큰
상품도 걸려 있었다. – 그날 저녁에는 그 기사와 주군을 축하하는 파티가 있었다.
그 다음날에도 또…
하여간, 매일 파티, 파티, 파티가 있었는데 이놈의 파티는 올 해의 마지막 날 밤이자 새해 첫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때까지 나는 항상 전 백작과 조엘과 같이 있었지만, 그들 말고도 다른 귀족들에 둘러 쌓여
있었기에 개인적인 이야기는 전혀 할 수 없었고, 대니 형을 만나기는 했지만, 다른 이들의 눈
때문에 제대로 인사 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새해 파티를 하고, 새해 첫날에는 파티의 피로를 씻고 그 다음 날이 되어 귀족들이
모두 자기 영지로 떠나고나서야 나는 드디어 크게 한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아아, 정말 지겨웠어. 도대체 무슨놈의 파티를 그렇게나 오래 하는 건지 원…”
자신의 영지를 향하는 귀족들을 배웅하고 돌아서자마자 나는 그동안 계속 미소 짓고 있느라
경련이 일 것만 같은 볼을 주물러 근육을 풀어주며 투덜 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브스햄이 – 사실 그에게 불평 하느라 투덜댄 거였다. –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귀족의 세력이 크면 클 수록 파티의 기간 또한 늘어나니까요. 파티의
날짜는 그 귀족의 부와 권위를 자랑하는 한 수단이거든요.”
“그래도요… 어휴, 다시는 이런 파티 하고 싶지 않네요.”
“뭐, 좋을 대로 하십시오. 이제 백작님은 당신이시니까요.”
공손한 어조로 말하는 이브스햄을 힐끗 곁눈질한 나는 그 동안 묻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 묻지 못했던 걸 꺼냈다.
“그나저나… 따님은 어떠세요? 이제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내 질문에 이브스햄의 얼굴이 흐려졌다.
“정신은 차렸습니다만… 아직 침대에서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회복되고
있으니 얼마 후에는 일어나 걸어다닐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이게 모두 백작님 덕분이지요.”
“그런가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그럼 완전히 회복될 수 있는 겁니까?”
“정상… 으로는 돌아오지 못한답니다. 우선은… 얼굴도 문제고… 여자애인데…”
“아…”
그러고보니 엔다이론이 그녀를 도와줄때에는 그녀의 얼굴이 화상으로 인해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건 완전히 회복이 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후우… 제 잘못으로 인한 벌을 딸이 대신 받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 죽겠다는
소리를 하지 않지만… 그건 자기 얼굴을 아직 못 봐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레이디 엠브로스양께 무슨 일이 있나보죠?”
이브스햄이 죄책감 어린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하는데 뒤에서 누가 끼어들어 우리 둘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브스햄의 딸인 에르미아 엠브로스의 일은 물론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이스파엘과 벤자민에
대한 일 모두를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조엘이 싱글 싱글 웃으며 서 있었다.
다른 귀족들은 다 자기 영지로 돌아갔는데 조엘만은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레이디 엠브로스양이 안 보여서 이상하다고 생각 했는데, 무슨 일입니까?”
그가 다가오며 이브스햄을 향해 묻자 이브스햄은 금방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미소까지 띄우며
대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제 딸 아이가 몸이 안 좋아 요양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건데, 귀족이 되려면 연기 솜씨도 뛰어나야 할 듯 싶었다.
“그렇습니까? 그거 참 안타깝군요. 제가 위로차 방문하고 싶습니다만…”
“감사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해서요. 대신
맥알파인 자작의 고마운 마음은 전해 드리죠.”
“그래주시겠습니까?”
그들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보다는 우선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버트!”
커다란 홀에서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엘버트 집사를 발견한 나는 그를 부르며 다가
갔다.
그러자 엘버트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나를 맞았다.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사람 좀 데리고 왔으면 하는데요.”
“말씀 하십시오.”
나는 엘버트에게 잭슨과 듀비가 머물고 있는 여관의 이름을 대면서 그들을 데리고 와줄 것을
부탁했다.
귀찮은 귀족들도 다 보내 버렸으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해 하며 날 기다리고 있을 듀비와
잭슨을 데리고 오는 것은 물론, 내가 백작이 된 것도 알려줘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잭슨을 통해 레이언과 크리스에게도 연락을 취하고 말이다.
상회를 그만 둘 생각은 없지만, 얼결에라도 내가 백작이 되었으니 상회와의 관계도 바뀌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브스햄과 그의 사촌 동생에 대한 일도 결정을 내려야 했다.
더블어 에르미아 엠브로스를 죽이려 했던 그 괴인에 대한 처리까지도 말이다.
‘골치 아파.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못 잡았는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제는 내 전용 서재가 된 백작의 서재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여전히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부드럽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는 계속 잊고 있었던 또 다른 사실 한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내 그림자처럼 행동하는 지라르경을 돌아보았다.
“지라르경,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주겠어요?”
지라르경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가 단호한 표정을 하고 있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랜만에 연무장을 갔다 오도록 하죠. 한시간이면 되겠습니까?”
“네, 충분해요.”
그가 서재 문을 열고 나가자 나는 재빨리 서재의 탁자에 고이 올려져 있는 주전자를 들어
컵에 따랐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불렀다.
“아버지~ 좀 나와 보실래요?”
원래 지라르경이 있어도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눈에 보이지 않을테고, 정령의 대화법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그가 전혀 눈치채지 못할테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안 그런 척 하기도 미안해서
아예 그를 내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불러내는 것도 물의 정령에게 부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예전에 아버지에게
이 세상의 모든 물은 아버지와 연결이 되어 있기에 그 모든 물들이 아버지의 귀이자 눈이라는
말을 들어 한번 해본 거였다.
그런데, 정말 역시나…
내가 부르자마자 컵 속에 얌전히 담겨 있던 물이 공중으로 치솟더니 쭈욱 늘어나 아버지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나온 건 아버지 뿐이 아니었다.
서재 한쪽에 마련된 커다란 대리석 벽난로 안에서 타오르며 서재 안을 훈훈하게 뎁혀주던
불꽃이 화르르 치솟아 오르며 그 곳에서 이프리트가 모습을 드러냈고, 창문도 안 열었는데
갑자기 부드러운 소용돌이 바람이 생기며 그 곳에서 실피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재의 마루바닥 틈새에서 흙가루가 마구 솟구치더니 허공에서 뭉쳐저
노아스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거였다.
“어라, 나는 아버지만 불렀는데…”
그들의 모습에 내가 난처한 표정을 띄우며 중얼거리자 실피드가 즉각적으로 반응해왔다.
“왜, 우린 오면 안돼냐?”
“에… 그건 아니지만… 그게….”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여주려고 부른 건데 다들 몰려오면 창피하지 않겠는가?
그래 아버지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며 아버지쪽으로 시선을 돌렸더니만, 내가 뭐라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눈은 그리움에 젖은 채 어머니의 초상화를 줄곧 바라보고만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이런 아버지의 무방비스러운 상태를 가만히 놔둘 실피드가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실피드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한번 쳇 거린 후 고개를 돌리더니 못본
척 해주는 거였다.
그리고 이프리트와 노아스도 슬그머니 아버지의 주위에서 물러나 그가 다른데 신경 쓰이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거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나는 왠지 마음이 따뜻해져 옴을 느꼈다.
그리고 신께 정령왕이 단 한 명이 아닌 네명이나 있게 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아버지가 정신 없이 어머니의 초상화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이프리트와 노아스는 나와 실피드를
데리고 서재와 연결되어 있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옆방과 서재는 두터운 나무 문이 달린 입구로 연결 되어 있었는데, 그 옆방에는 커다란
책장에 책 대신 수많은 서류들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져 있었다.
즉, 그 옆방은 백작의 사무실이었던 셈이다.
그 모든 서류들은 엠브로스 영지와 백작가에서 벌인 일에 대한 기록들과 보고서들이었다.
그리고 책장들 사이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굳건해 보이는 커다란 서류함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중요한 서류들만 따로 추려 보관되어 있었다.
서류함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었는데, 그 자물쇠의 열쇠는 며칠 전에 이브스햄이 나에게
넘겨 줬었다.
그리고 그 방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이브스햄과 집사가 골라 놓은 서류들이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이것들은 현재 엠브로스 백작가에 대한 보고서들로 백작이 된 내가 가문에 대한 걸 파악하게
도와줄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것들을 나에게 넘겨 주면서 집사와 이브스햄은 내가 서류를 제대로 이해 하도록
도와주려 했지만, 이래뵈도 한국에서 고등 학교 수업까지 받았고, 반년 동안 공작가의 집사일을
돕던 나였기에 – 그때 배운 것들을 지금 써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뭐, 어차피 생소한 분야의 전문 지식이 아닌, 단순한 보고서였으니 말이다.
“이것들은 뭐냐?”
실피드는 사무실 가운데에 마련된 소파에 털썩 앉으며 그 앞 탁자에 놓여 있던 서류들을 가벼운
바람으로 허공에 날리며 물었다.
“아앗, 건드리지 마세요. 그거 나중에 제가 다 검토해야 할 것들이라구요.”
“헤에, 그 경호 무사인가 뭔가를 한다더니만, 이제는 서류 가지고 씨름도 하냐?”
실피드는 순순히 내 말대로 서류들을 다시 제 자리에 얌전히 내려놓더니만 그 서류들 중 하나를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엠브로스 영지의 현황? 너 언제 엠브로슨지 엠브런슨지 하는 영지의 관리 인이
되었냐?”
실피드 뿐만이 아니었다.
이프리트와 노아스도 자리를 잡고 앉아 흥미진진한 얼굴로 서류들을 읽기 시작하는 거였다.
정령왕들이 언제 인간의 영지 관리에 관심이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나도 자리를 잡아 앉으면서 푸념했다.
“관리인이 아니예요. 어머니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얼결에 여기 백작이 되었단 말예요.”
“호오, 백작? 그거 인간들 사이에서는 꽤 높은 자리에 있는 거지?”
노아스의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하지만, 높은데 있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더라구요. 백작 된지 이제 일주일이 지났
건만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요.”
“저런 무슨 일인데 그러니?”
이프리트의 부드러운 말에 나는 그 동안 백작의 성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하다보니 좀 이상했다.
다른때 같으면, – 가끔 심심할때마다 내가 뭘 하나 보기는 했지만도 대부분은 내버려 뒀었다 –
내가 갑작스럽게 정령들을 부르면 무슨 일인가 꼭 살펴보는 정령왕들이, 이번에는 나이트급
정령들이 놀라서 내 곁으로 달려 왔는데도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는 않았단 말인가?
어쨌든, 나는 쭈욱 있었던 이야기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물어봤다.
“그런데, 정말 몰랐어요?”
내 질문에 이프리트는 슬그머니 내 시선을 피했고, 대신 노아스가 깔깔 거리며 대답했다.
“모르긴! 엘라임이 네가 꽁꽁 묶인 거 보고 당장에 달려가려고 하는 걸 우리가 막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니? 이프리트가 네가 태연하게 가만히 있는 걸 보고 뭔가 생각이 있는 거 같다고
해서 엘라임을 못가게 막았다고. 우리 잘 했지?”
“아하하… 정말 잘 하셨어요.”
그때 아버지가 나타났으면 어떻게 될지 쉽게 상상이 갔다.
아마… 성이 통채로 물바다가 되던지 터져 나가든지 했을 거였다.
저번에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에서처럼 피가 안 멈춘다고 소리치며 아버지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놓을 수도 없었을테니까.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서 나는 왠지 커다란 마음의 짐을 덜어 놓은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 동안은 이브스햄이나 그의 사촌 동생 부자, 그리고 에르미아와 그녀를 죽이려 했던 그
정체 모를 남자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을 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 의논을 해야 할지
몰라 혼자 전전긍긍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라르경이나 집사가 나에게 극진히 대해주기는 했지만, 그들은 모두 이브스햄에게도 그렇게
해왔을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브스햄이 나에게 공손히 대한다 해도 그가 처벌 받을 당사자였으니 그에게 의논
하는 건 더더욱이나 어려웠다.
시내의 여관에 묶고 있는 듀비나 잭슨은 마음을 터놓는 친구이자 동료라고 생각은 하지만, 집안
일을 시시콜콜 이야기해주며 조언을 구하고 싶지는 않았고, 조엘은 이브스햄에게 어떻게든 이
집안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내려고 – 나에게 안 그러는게 신기하지만, 나에게 다가오기만 하면
이브스햄이 대신 나서거나 지라르경이 막긴 했었다. 그렇다고 포기하는게 이상하긴 했지만.. –
탐색전을 벌이고 있었으니 더더욱 불가능 했다.
그래 의논할 대상 하나 없어 불안함 속에서도 외로움마저 느끼고 있었는데, 이렇게 아무런 어려움
없이 터놓고 이야기할 대상들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니 웃음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하기야, 솔직히 정령왕들은 인간 세상에 관심을 표하지 않았으니 관심 없는 일에 끌어들이는
게 미안해서 처음부터 아예 이런 일에 대한 의논 상대에서 제해놨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진지하게 들어주건 건성으로 듣고 잊어버리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앞으로는 그들이 귀찮아 하건 말건 이런 일에 자주 애용해야지. 우후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던 말던 세 정령왕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하는 거였다.
그러다 잠시 후 실피드가 머리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내뱉었다.
“에잇, 정말 골치 아프군. 그냥 다 죽여 버리면 돼잖아?”
하지만, 그 뒤를 노아스가 즉각 반박했다.
“그 이브스햄이라는 녀석은 죽이면 안됀다잖아.”
절대로 죽이면 안됀다는 건 아니었다.
단지… 곤란하다는 거였지.
“안돼긴 뭐가 안돼? 그냥 간단하게 죽여 버려. 골치 아프게 머리썩히지 말고.”
실피드의 투덜거림에 노아스가 또 반박했다.
“하지만, 해인이가 죽이기 싫다잖아.”
“그럼 그냥 살리던가.”
“하지만 해인이를 죽이려 한 녀석들을 어떻게 그냥 놔둬?”
“그럼 죽여!”
그런 어린애들 같은 논쟁을 중단 시킨 건 이프리트였다.
“자자, 둘다 장난은 그만하자고.”
그러자 정말 그게 장난이었던지 둘은 금새 입을 다무는 거였다.
이프리트는 둘이 조용해지자 온화하지만, 오래 산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연륜 있는 깊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해인아,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지?”
그의 질문에 나는 삐질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래서 말씀 드린 건데…”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모든 상황을 제외하고 그들만 놓고 본다면 너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사실… 그냥 놔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약간 머뭇거리며 말하자 실피드가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바보냐? 너 죽이려고 했던 놈들을 그냥 놔줘? 본때를 보여줘도 모자를 판에…”
“으음… 그렇기는 하지만… 뭐랄까… 미워지지가 않는 걸요. 그들이 정말 저를 죽일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구… 아마, 죽이지 못하리란 걸 알아서 그런가?”
“이런, 멍청이. 그렇다고 그냥 냅둘 거냐? 어쩌면 그 녀석들은 네가 이번에 그냥 봐주면
얼씨구나 하고 다음에 또 죽일 기회를 노릴지도 몰라.”
실피드의 실랄한 말을 노아스도 거들었다.
“음, 그건 그러네. 해인아, 네 말에 의하면… 네가 사라지면 다시 작위는 그 이브스햄인지
소시지 햄인지 하는 그 인간 딸에게 넘어가는 거잖아. 그 딸이 없어지면 그 사촌 아들인지
뭔지에게 넘어가고. 그러니 그들이 또 널 죽이려 하지 않을까?”
그녀의 말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 생각은 미처 못했어요. 저는 단지 이브스햄 사촌이 감옥에
갇혀 있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날 죽이려 했은 처벌을 면치 못할 거라는 생각만
했죠. 제가 보기에는 이브스햄이나 그 사촌이나 똑같은데 명분이나 필요성 때문에 한 사람은
처벌하고 한 사람은 냅둔다는 건 싫거든요.”
“아, 그럼 좋은 생각이 났어. 널 죽인다고 해도 백작 작위가 그들에게 안 넘어가게 하면 되잖아?
그럼 그들이 널 죽일 필요가 없으니, 너는 네가 좋을대로 그들을 그냥 냅둬도 괜찮지 않을까?”
노아스가 손벽을 짝 치며 하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거 참 괜찮은 생각인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실피드의 말도 이어졌다.
“거기다 그 사촌 녀석인지 뭔지 하는 녀석도 너에게 도움이 될 거 같은데?”
그에게 시선을 돌리니 그는 아까 들었던 서류 뭉치 중 앞장을 몇 장 넘긴 채 읽고 있다가
우리를 향해 서류를 들어 보였다.
“여기에 의하면 그 녀석이 영지를 꽤나 잘 다스린 모양이야. 그 녀석이 다스리기전에는 별 소득이없던 영지인데 그 녀석이 다스린 후 3년이 지나자 소득이 점차 올랐군. 여기에 덧붙여진 설명에
의하면 그 녀석이 뭔가를 개발했다고 쓰여 있는데?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호오, 그래? 그럼 그 사촌 녀석이 네가 없어도 작위를 못 받게 할 방법은 있는 건가?”
노아스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국법에 의하면 혈연이라 할지라도 정당한 근거에 의해 가주가 계승권을 박탈 할 수 있어요.
지금처럼 벤자민 엠브러스가 나를 죽이려 한 이상 그건 쉽겠죠. 그에게 엠브러스라는 성을
빼앗으면 돼요. 문제는… 에르미아 엠브로스는 그게 어렵다는 거죠. 그의 아버지인 이브스햄이
절 죽이려 했지만 백작으로 만들어준 사람이니까요.”
“뭐가 문제야? 그 여자애는 크게 다쳤다며?”
“다쳐도 살아 있는 한 작위 계승권이 있죠. 여자라서 결혼하지 않는 한…”
내가 말하는 중에 실피드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잘됐네. 얼른 결혼시켜버리면 돼잖아?”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그녀가 결혼한다 해도 계승권을 가질 수 있다는 거죠. 작위를 가진 사람이 후손 없이
사망했을 때 그 작위를 물려받을 가까운 친적 남자 (우리나라로 말하면 6촌이다. 할아버지가
형제인 경우까지) 가 없으면 결혼을 했다 해도 딸이 물려받는게 가능해요.”
내 말에 세 정령왕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거였다.
“하기야, 저 녀석이 후손을 생산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생산 할 가능 성이 있기나 한 거야?”
“모르지. 저 녀석 엄마도 엘라임에게서 후손을 보게 했으니…”
그들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저 크게 헛기침을 했다.
“험험, 어쨌든… 그래도 이브스햄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정상으로 돌아오기는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녀는 그냥 놔둘까봐요. 몸이 안 좋은데 작위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게다가
이브스햄이 날 죽이려 한다 해도 제가 쉽게 죽어주지도 않을테고 말예요. 이브스햄에게는
딸이 저렇게 된게 가장 큰 형벌일테구요. 뭐, 우선은 제가 그녀를 직접 보고 판단할 거지만요.”
“뭐, 네 일이니가 너 좋을대로 해라.”
“그래, 그래. 여차하면 우리도 있으니까 걱정 말고.”
실피드와 노아스의 말에 이프리트도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도움을 기대하지 못했던 세 정령왕 덕분에 어느정도 결정을 내릴 수 있어 홀가분해진
나 또한 그들에게 가벼운 미소를 되돌리는데 서재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 똑~
“백작님, 저 집사입니다.”
그래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갔다.
“네, 무슨 일입니까?”
내 대답이 들리고 나자 서재의 문이 열리며 언제나처럼의 단정한 모습을 한 엘버트가 들어왔다.
“말씀하신 분들을 모셔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응접실에 계십니다.”
“제가 직접 가보도록 하죠. 아, 그 둘이 머물게 될지도 모르니 방을 마련해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엘버트 집사가 나간 후, 나는 여전히 어머니의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를 힐끗 보면서
그냥 놔두고 나갈 지, 아니면 나 나간다고 말을 해야 할지 갈등하고 있는데 사무실 쪽에서
우르르 나온 세 정령 중 이프리트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냅두거라. 지금 무슨 이야기인들 귀에 들어 오겠냐. 이럴때는 그냥 놔두는게 제일이란다.”
“그럴까요? 그런데, 저 이만 나가봐야하는데 어쩌실래요?”
내 말에 노아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해인이 따라갈래.”
그러자 그녀의 뒤를 이어 실피드도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
“바쁜 몸이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같이 가주도록 하지.”
“아.하.하.하… 이거…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요? 아, 이프리트 아저씨도 같이 가실 거죠?”
나는 삐질 웃으면서 세 정령왕을 달고 응접실로 향했다.
그 곳에는 듀비와 잭슨이 마치 자기 집에 온 양 고급스러운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대접으로
나온 다과를 즐기다가 응접실에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진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두 녀석은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나에게 득닥같이 달려와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 태세로 외쳤다.
“야, 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해인님!!”
“아하하~~ 오랜만이지?”
내 태연한 말에 잭슨 녀석이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오랜만인건 아냐? 응? 도대체가 말이야, 당분간 백작의 성에 있어야 할 것 같다는 편지 한장
보내놓고 지금까지 아무 연락 없으면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애탈지 생각이나 해봤어? 너
우리 생각이나 한 거냐?”
쉼 없이 다다다 나온 잭슨의 말에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말투가 매섭기는 해도 그 안에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 그 동안 사정의 여의치가 못해서 연락도 못하고 너희들도 못 불렀어. 자, 자,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우선 좀 앉자.”
내 말에 그 둘은 진정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해인님.”
듀비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잭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영문을 모르겠다. 네가 백작의 성에는 왜 온 거냐? 나는 혹시나
붙들려 온 건 아닌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어째 그건 아닌 거 같다?”
그의 말에 나는 삐질 웃었다.
“으음… 그게말이지… 내가 얼결에 여기 백작이 되어버렸어.”
내 말에 듀비는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이었지만, 잭슨은 그렇지가 못했다.
“…. 해, 해인아?”
“응?”
부들부들 떨리는 잭슨의 목소리에 내가 부드럽게 응답해주자 그가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요 며칠 피곤했는지 헛것을 들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다시 말해줄래?”
“으음… 그게 말이지… 내가 얼결에 엠브로스 백작이 되어버렸다구.”
내 대답에 여전히 얼빠진 표정의 잭슨이 물었다.
“그게… 가능한 거냐?”
“그게… 내 외할아버지께서 엠브로스 백작이셨다네.”
“그, 그럼… 너 귀족이었냐?”
“으음… 그게.. 그렇게 되겠지?”
내 말에 잭슨은 벌떡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정말 내 멱살을 잡고 탈탈탈 흔들었다.
“으음이 아니야, 으음이!! 지금이 그렇게 태평하게 말할때야?”
고함을 지르듯 소리 친 잭슨은 그쯤에서 내 멱살을 쥔 손을 탁 놓더니만 절망에 빠진 포즈를
취했다.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오랜만에 괜찮은 녀석이랑 동료가 되었다고 생각
했더니만, 그 녀석이 재수없는 귀족 녀석이었다니~~ 거기다가 이제는 뭐? 백작이 되었다고?
아아, 정말 운도 지지리도 없지….”
“이봐 잭슨… 그러니까… 나도 얼결에 되었다니까?”
내 말에 잭슨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나를 째려봤다.
“얼결은 무슨 얼어죽을 얼결!! 원래 작위를 받을 녀석이 어떻게 되기라도 했어? 갑자기 덜컥
너에게 떨어지게!!”
“응.”
내 단호한 말에 잭슨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응?”
“으응. 그렇다니까. 그래서 정말 얼덜결에 내가 받게 된 거라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뭐, 원래 계승권은 내가 일순위였지만 이브스햄은 딸내미가 아프기 전까지는 그녀에게 물려
줄 계획이었으니까.
이런 내 말에 ‘그랬군.’ 이란 표정을 지으려 했던 잭슨의 눈초리가 뭔 생각이 떠올랐는지 다시금
치켜 올라갔다.
“그래도! 그래도, 왜 네가 귀족이라는 걸 말 안 했어?”
“그거야… 나도 얼마전에 알았으니까.”
내 말에 잭슨은 흥 하고 콧방귀를 끼었다.
“말도 안돼. 태어나서 지금까지 모르다가 얼마전에야 알았다고? 그럼 얼마 전에는 어떻게
알았냐?”
“거야… 외할머니를 만났으니까.”
“외할머니?”
내 대답에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 처럼 멍한 표정을 짓던 잭슨은 곧이어 고개를 갸웃 하더니
풀죽은 표정이 되었다.
“으음… 으음… 그, 그랬구나… 으음… 미안해… 아, 저기… 늦었지만, 백작 된거 축하한다.”
그의 풀 죽은 사과에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원해서 된건 아니지만, 어쨌든 고맙다.”
잭슨이 미안해하는 건 내 외할머니가 엘프라는 걸 지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벨레니국은 흔하지는 않지만, 라센 국이나 왈그린 국에는 하프 엘프가 흔했다.
사람과 엘프가 종족을 초월하는 사랑으로 인하여 탄생 한 것이었으면 나쁘지는 않았을테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잭슨 또한, 그런 아픔을 가진 하프 엘프였던 것이다.
뭐, 내 외조부모님은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신 거고, 그래서 어머니가 태어나신 거지만, 아마
어머니도 이 나라에서 하프 엘프라는 것 때문에 이런 저러한 상처를 많이 받으셨을 거였다.
나는 때를 잘 만나고 부모님을 잘 만난 덕택에 그런 일은 전~ 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면, 아버지가 날 태어나자마자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보낸 걸 고맙게 여겨야 할 듯 하다.
어쨌든, 잭슨은 나 또한 엘프의 혼혈이었기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이런 저러한 상처를
받았으리라 오해하고, 그런 날 몰아붙인걸 미안하게 생각하는 거였다.
그리고, 엘프의 혼혈이면서도 백작이 된 걸 축하해주는 거였고 말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상회는 그만 두게 될 거냐?”
다시 진정을 하고 자리에 앉은 잭슨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와 나의 인연은 같은 상회에 소속 되었다는 걸로 시작되었으니, 잭슨에게는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나도 그때문에 그를 불렀고 말이다.
“그게, 사실 시작한지도 얼마 안됐고, 나쁘지도 않아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아무래도
백작이 된 이상 전 처럼 계속 할 수는 없을 거 같아서… 그리고 레이언과 크리스의 의견도
들어봐야 할 것 같고 말야.”
“그렇겠지?”
내 말에 잭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듀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해인님은 돌아가지 않으신 겁니까?”
“으음… 그게 말이죠 듀비, 아무래도 내가 여기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되어서요. 당분간은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할 듯 하거든요.”
“그, 백작이라는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럼 그만 두시면 되잖습니까?”
[멍청하기는, 그걸 왜 그만 두냐?] [쉽게 그만 둘 수도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잖냐? 저 블루 엘프는 인간이 아니니…]실피드, 노아스, 이프리트로 이어지는 세 정령의 잡담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나는 삐질 삐질
설명하기 시작했다.
“으음, 으음… 제가 맡은게 말이죠, 한번 맡은 이상 제가 하기 싫다고 그만 둘 수 있는게
아니라서요… 에… 그러고보니 듀비는 어쩌실래요? 저는 당분간 여기 있고 잭슨은…”
내가 말 끝을 흐리며 잭슨을 돌아보자 그는 내가 뭔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냉큼 말을 받았다.
“나는 여기서 제일 가까운 지부로 돌아가서 본부에 연락을 취해야 해요. 그래서 아무래도 우리
둘이 떨어질 것 같은데, 듀비는 어떻게 하실래요?”
잭슨의 말에 듀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해인님은, 그 상회 일을 그만 두시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상회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다른 형태겠지요.”
잭슨도 불쑥 끼어들었다.
“아마 본부측에서도 백작이 참여하겠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을 걸요? 해인이가 그만 두겠다고
해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질 겁니다.”
“문제는… 다른 일도 맡는 바람에 제가 전적으로 상회 일만 할 수 없다는 거지요.”
“음, 음.”
내 말에 잭슨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우리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고민하고 있던 듀비는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단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냥 해인님 곁에 남아 있겠습니다. 그래도 상회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하겠지요?”
“에… 뭐… 해인이가 상회를 돕게 될 테니, 해인이가 잘 되는 게 상회로써도 이롭겠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간접적일텐데…”
아무리 듀비가 나 때문에 상회에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나와 상회 중 나를 선택할 지는
몰랐는지 – 듀비는 아무래도 뛰어난 무사였기에 잭슨은 은근히 같이 가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나는 듀비가 내 곁에 남아 있어주겠다는 것이 기뻤지만, 앞으로 내가 백작으로써
살다가보면 듀비가 상회에 있던 것 보다 힘들어질게 뻔했기에 걱정도 되었다.
“듀비, 같이 있어주겠다는 건 정말 고마운데요, 제가 이번에 새로 맡게된 일은 인간들 속에서만
활동하는 거거든요. 상회에서는 여러 이종족들이 같이 있어서 어느정도 괜찮았겠지만, 제 곁에
있는다면 훨씬 더 불편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겠어요?”
내 걱정스러운 말에도 듀비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잭슨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인간들이 어떤지 아직 잘 몰라서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예요. 막상 당해보면 힘들텐데…”
“괜찮습니다.”
“뭐, 좋을대로 하세요. 나중에 힘들면 그때 상회로 돌아가셔도 될테니까.”
잭슨이 그렇게 말하며 날 힐끔보자 나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럼, 잭슨 혼자서 가는 걸로 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도와줄테니까. 언제 출발할래?”
“이왕 성까지 온거, 호사는 한번 누려보고 가련다. 내일 출발할게. 도와주려면… 후후후, 여비나
쬐께 보태줘. 아앗, 말도 필요하다.”
“알았어. 아, 방을 준비해 놓으라고 했는데 가서 쉴래?”
내 말에 잭슨이 반갑다는 듯 손을 번쩍 들었다.
“응응, 나는 가서 쉬련다. 아, 목욕도 할 수 있을까?”
“시종을 붙여주라고 할테니까 시종에게 말해. 듀비는 어쩔래요?”
“저는 별로 피곤하지 않으니까 해인님과 함께 있겠습니다.”
“그러세요. 할 일이 있으니 이만 갈까요? 으음… 그런데 듀비?”
막 일어나려던 나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듀비를 바라보았다.
“예?”
아무 사심 없이 대답하는 그에게 나는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으음… 정말 미안한데요… 듀비가 제 곁에 있으려면… 아마도 호위 무사로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물론 지금까지도 듀비는 나를 지켜주는 형식으로 내 곁에 있었지만, 그래도 ‘동료’로써 같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위무사’로 있는 건 나는 고용주고 듀비는 고용된 자가 되는 걸 뜻하는 거라 괜시리
듀비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듀비는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거였다.
“상관없습니다. 해인님이 편하실대로 하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의 정확한 뜻을 알고도 괜찮은 건지, 아니면 몰라서 괜찮은 건지 몰랐지만, 그래도
그가 쉽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왠지 더욱 미안해졌다.
그래서 듀비를 단순한 무사가 아닌, 기사로 만들 방법을 궁리하며 잭슨을 시종딸려 올려 보내고
듀비를 데리고 지라르경이 있을 연무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앗~!”
“하앗~!!”
“거기! 동작이 틀렸잖아!!”
“제대로 못하겠나!!”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이 성에 온 후로는 이런 저러한 일 때문에 연무장에는 이번에 처음 오는 거였다.
하지만, 왠지 분위기가 무척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연무장이라는 곳은 어디나 비슷 비슷한
듯 싶었다.
1월의 차가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연무장에서는 가벼운 옷차림을 한 기사들이 열심히 교관들의
호령에 따라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모습들은 맥알파인 공작가 저택에 있는 연무장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했다.
단지, 다른 점이라고 하면 그 곳에 있던 연무장보다 조금 더 큰 곳이라는 것과, 인원수는 훨씬
많다는 것, 그리고 연무장에 있는 이들은 모두 기사들, 혹은 그들의 종자나 견습 기사들 뿐이라는
거였다.
내가 있던 공작가의 저택은 수도 안에 있어서 – 수도 안에서는 각 작위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수도 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는 기사의 수가 한정되어 있었다 – 공작가의 사설 기사단
모두가 들어올 수 없었지만, 이 곳은 엠브로스 영지 였기에 백작가의 사설 기사단이 버젓이
백작의 성에 같이 상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간 곳이 사설 기사단용 연무장이었고, 병사들용은 또 따로 있었다.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춰서 선 채 똑같은 검법을 선 보이는 기사들 사이로 교관들이 지나다니면서
틀린 부분을 지적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의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몇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거기에는 내가 찾던 지라르경 말고도 생각지도 못했던 조엘과 데니까지 나와서
구경하고 있는 거였다.
사설 기사단의 훈련 모습을 남에게 보여줘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지만…
왜 무협지에 보면 남의 무공을 수련하는 걸 보는 건 큰 실례라고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게 하등 상관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 쪽으로 다가가자 사람들이 내 기척을 알아챘는지 나를 돌아보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명목상으로든 어쨌든 여기 있는 이들 중에서는 – 정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지만 내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조엘과 인사를 나누고 기사 단장인 진 윙겟 경, 부 단장인 지라르경과 가벼운 목례를
주고받은 뒤에야 나는 조엘 뒤에 목석처럼 서 있는 데니 형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예의에 맞게 고개만 숙여 보이는 모습에 침울해진 나는 가벼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조엘과 다시 재회한 그 파티 날에는 다른 이들때문에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지만,
그 뒤로는 몇번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내가 맥알파인 공작가에 있을때 마치 친 형처럼 대해준 그였기에 이번에도 아무 생각 없이
– 신분제가 없는 세상에서 살다 온 나로써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그런거에 별 생각이 없어서 –
반가이 그를 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게 왠일인지 대니는 전혀 나와 몰랐던 사이였던 듯, 딱딱하게 예의를 차려가면서
거리를 두는 거였다.
조엘처럼 화라도 냈으면 상황 설명이라도 할 수 있었으련만, 전혀 모르는 사이처럼 대하니 이건
아예 말을 붙일 엄두 조차 나지 않는 거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게 증오나 미움이 아닌 아예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무관심이라더니만
그 말이 정말 맞다는 걸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조엘도 갑자기 백작이 되어 나타난 나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으니 데니 형 또한 그 비슷한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 쯤은 예상을 했지만, 그래도 나와 사이가 좋았으니 금방 풀고 전처럼
친해질 수 있을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이건 마치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밑에서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으니…
상황이 이러니 조엘도 어중간하게 끼어들어 중재하기도 난처했는지 그냥 수수방관하는
형편이었다.
‘에휴우~ 차라리 예전이 나았던 거 같아…’
잠시 데니 형 때문에 침울 모드에 빠져 있던 나는 사람들이 나와 같이 온 듀비에게 시선이 쏠려
있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다가 지라르경의 말에 의해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백작님, 같이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아무래도… 사람은 아니신 듯 한데요.”
“아, 사실은 이 분을 소개시키려고 나왔습니다. 인사하세요. 이 분은 얼마전에 저와 인연을 맺게
된 블루 엘프족이십니다. 당분간 저와 함께 있을 거예요.”
내 소개에 듀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서 꾸벅 인사를 했다.
“듀비라고 합니다.”
다른 종족을 보는 신기함에 사람들이 듀비를 찬찬히 살펴보는 사이 나는 지라르경을 향해 설명을
덧붙였다.
“지라르경, 사실 듀비는 인연을 맺은 후 부터 계속 저를 보호해주고 계셨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저를 보호해 주시려고 하는데요.”
내 말에 지라르경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내 호위는 전적으로 지라르경의 담당이었는데 그걸 듀비와 같이 하게 되었으니 약간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듀비를 기사로 만들 방법을 의논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지만, 내친김에
다 말해버렸다.
“그래서… 아무래도 아직 인간 세상에 적응을 못했는데 그냥 제 곁에 있는다면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아서요. 듀비씨께 기사 작위를 주는게 어떨까 싶은데…”
내 말에 다시금 지라르경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백작님의… 호위 기사 말씀이십니까?”
“예. 물론, 지라르경께도 계속 부탁드릴 겁니다.”
내 말에도 지라르경은 못마땅한 눈으로 듀비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조금 지난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람이 아니시니… 인간들 사이의 예법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지만, 실력은 확인해봐야 할 듯
싶군요. 괜찮겠습니까?”
“아, 실력은 제가 보증합니다. 일류 검사의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죠.”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지라르경의 말에 내가 황급히 나서서 대꾸했지만, 지라르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백작님께서 그러시니 믿음은 갑니다만, 이 나라에서는 일반 검사들과 기사들과의 기준은
좀 차이가 나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확인을 해봐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내가 아닌 듀비를 보며 말하자 계속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듀비가 나섰다.
“원하신다면.”
듀비의 말에 지라르경이 피식 웃더니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두드렸다.
“제가 상대해도 좋겠습니까?”
그러면서 은근 슬쩍 지라르경에게서 매서운 기세가 피어 올랐지만, 듀비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나 상관 없습니다.”
“호오, 자신만만 하시군요. 좋습니다.”
지라르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홱 돌려 연무장에서 열심히 검법을 수련하는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전원 동작 그만!!”
타닥!!
그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자신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우리가 있는 쪽을
향하여 부동 자세를 취하는 거였다.
‘오오, 멋있다.’
“지금부터 대련을 할테니 자리를 마련 하도록.”
또 다시 떨어진 지라르경의 말에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져 연무장 가운데 커다란 자리를
마련했다.
그 모습을 만족스레 훑어 보던 지라르경은 듀비를 향해 말했다.
“가실까요.”
지라르경의 살벌한 기세 때문에 혹시나 진검으로 대련을 하는 건 아닐까 걱정 했지만, 다행이
지라르경은 연무장으로 내려가서 듀비에게 목검을 건네주는 거였다.
기사들끼리의 대련은 보통 가검으로 하지만, 듀비에게는 가검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가검은 가짜 검이라고 해도 쇠를 두드려 만든 것이기 때문에 꽤나 비싼 거라, 일반 용병이나
무사들은 가검을 소지하고 있지 않고, 돈이 엄청 많거나, 아니면 기사들이나 소지하는 거였다.
대련이 있다고 해서 대련할 자리를 마련해주는 기사들은 그 장소에 지라르경이 직접 나서는 걸
보고 놀란 듯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듀비를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지는 게 보였다.
“아아… 정말 왜 이렇게 되었지? 여기 온 뒤로는 잘 되는 일이 없는 거 같아.”
둘이 자세를 잡는 걸 보며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투덜거리는데 내 옆에서 같이 구경하고 있던
기사 단장 윙겟 경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저 블루 엘프라고 하는 분은 크게 다치지 않을 겁니다. 지라르경은 저래뵈도
엄청난 실력의 소유자거든요.”
자신의 부하라서 그런지 윙겟 경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가득해보였다.
그의 표정만 보면 지라르경이 절대로 질 것 같지 않지만, 듀비의 실력도 엄청 뛰어나다는게
문제였다.
그리고… 연륜도 훨씬 훠어어얼~ 씬 지라르경보다 많을 거고 말이다.
지금에서야 밝히는 거지만, 듀비는 나이가 많았다.
뭐, 인간의 나이 치고는 쌩쌩한 청년의 나이지만, 인간으로보자면 엄청난 나이다.
무려 233세니까 말이다.
아, 새해가 지났으니까 이제 234세인가?
그걸 떠올린 나는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에휴… 쉽지 않을텐데….”
내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자리를 잡은 둘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대련하기 전의
예를 취하고 목검을 천천히 치켜 올렸다.
듀비는 왼손은 마치 뒷짐이라도 진 것 처럼 뒤로 돌려 그 손에 들고 있던 중검(70cm) 길이의
목검은 등에 세워 붙여놓고, 오른 손에 쥔 장검(1m) 길이의 목검을 앞으로 치켜 들고 무릎은 약간
굽힌 상태로 지라르경을 바라보았다.
그에 비해 지라르경은 장검 길이의 목검을 두 손으로 잡고 검 끝이 미간까지 올린 정자세를
취한 채 금방이라도 공격 할 듯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마주 보는 둘 사이에서는 천천히 매서운 기세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긴장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우선은 시선 싸움, 즉 기선 제압과 서로에
대한 상대방 탐색에 들어갔다.
‘으음… 듀비에게 미리 지라르경을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나?’
하지만 지금 보니 기세 만큼은 지라르경도 듀비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거였다.
게다가 무지 진지한 지라르경의 표정을 보니 그런 부탁을 했다는 걸 나중에라도 알게 된다면
엄청 자존심 상해 할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의원을 대기시켜 놓는게 좋을 거 같은데…’
성에는 성 사람들을 위한 의원 뿐만이 아니라 약사는 물론 그들의 보조원까지 따로 상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르미아를 치료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느낀 건데 이 성의 사람들은 다친 사람을 치료
하는데 의원과 약사보다는 마법사나 신관을 더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거였다.
내가 잠깐이나마 마법을 배워서 아는 거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 마법을 배운다고 해서
그걸 배울때 사람의 인체와 상처가 났을때의 대처법, 혹은 하다못해 기본적인 의료 행위에
대해서 자세하게 배우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아마, 치유 마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마법사나 공부하면 몰라도 말이다.
단지 힐링 마법의 원리와 마나 응용, 그리고 마법을 발현하는 법만을 배울 뿐이었다.
그 보다 더 윗단계의 회복 마법인 리커버리 마법을 배울때도 그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러니 그냥 치유 마법만 배운 마법사보다는 처음부터 사람의 인체와 병에 대해 연구한 의원이나
약사가 훨씬 훠어얼~ 씬 에르미아에게 도움이 될 거였다.
그런데, 금방 눈에 보이는 마법이라는 것 때문인지 사람들은 의원이나 약사를 마법사보다는 한
단계 낮게 취급하는 거였다.
그건 신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에르미아 때문에 영지 내에 있는 신관을 모셔온다기에 얼떨떨해서 그제서야 신관에 대해 알아본
나였지만, 아무리 신의 축복을 받아서 엄청난 고위 신관은 떨어진 팔다리도 순식간에 붙여
버린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능력을 개발하는데만 힘을 쏟을 뿐 의원들처럼 처음부터
의학을 공부하는 건 아닌 듯 했다.
게다가 중환자도 순식간에 살려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가진 고위 신관들은 이 세상을
통틀어 채 몇십명도 안된다고 한다. – 사실 생각해보면 고위 마법사들도 그 정도의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거보면 마법사나 신관이나 비슷한 점도 많은 듯… –
그래서 제법 큰 영지라는 엠브로스 영지에 상주하는 신관들 중 가장 높은 신관이 달려와서
보여준 능력이래봤자 백작가의 마법사인 벨헤븐이 할 수 있는 힐링 마법 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라고나 할까?
뭐, 그것도 그녀에게는 도움이 많이 되겠지만서도, 그래도 내 생각에는 의원과 약사가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하긴, 그들도 그녀 곁에 붙어서 꾸준히 치료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법사나 신관이 오면 그들이
의원과 약사를 제치고 치료를 주관하는 거였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내가 어깨를 다쳐서 치료를 받던 그레이험 항구의 그 그린모어 의원이
내가 신전 대신 의원을 택했다고 무지 좋아했던게 쉽게 이해가 갔다.
“타앗~!!”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눈싸움이 끝나고 본격적인 육탄전으로 돌입했다.
먼저 움직인 건 지라르 경이었다.
지라르 경은 한 걸음 듀비를 향해 다가가며 그가 내밀고 있던 검을 옆으로 크게 쳐냄과 동시에
듀비의 품으로 파고 들어 그의 가슴을 향해 올려 베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듀비가 여유있게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중검을 쓰윽 앞으로
빼내어 가로막자 오히려 지라르경이 검을 향해 몸을 들이미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지라르경은 침착하게 올려 베기를 하려던 검으로 듀비가 앞으로
내민 중검을 쳐내고 다시 그의 가슴을 찌르려고 했다.
허나 그때는 지라르경이 먼저 쳐냈던 듀비의 오른 손에 들려진 목검이 지라르경의 목을 노리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라르경은 듀비를 공격하는 대신 다시 그의 검을 막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듀비의 오른 손에 들린 검을 지라르 경이 막는 사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듀비의 왼 손에 들린 검이 지라르 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절대 절명의 순간, 지라르경은 손목을 살짝 틀어 위에서 내리 누르고 있는 듀비의 검 위로
자신의 검이 올라가게 하면서 부드럽게 팔을 돌려 듀비의 오른 손의 검을 움직여 듀비의 왼손의
검을 막아내는 거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듀비의 두 검이 부딪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검을 한꺼번에 걷어내면서
듀비의 비어있는 옆구리를 향해 다가갔다.
“오오~”
그 동작이 마치 물이 흐르는 것 처럼 얼마나 자연스럽고 멋있었는지 보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절로 흘려 내었다.
나 뿐만이 아니었다.
보고 있던 기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조엘과 데니까지 한 순간 넋을 잃는 모습에 윙겟 경이 마치
자신이 감탄을 받은 것 마냥 뿌듯해 하며 중얼 거렸다.
“지라르경의 능력은 대단하다니까요.”
하지만, 그 뒤에 보인 듀비의 실력도 만만치 않았다.
듀비는 검이 허공으로 올려쳐진 상태에서 지라르경이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공격해 들어오자,
지라르 경의 검이 들어오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부드럽게 몸을 회전하며 검을 피해내는 동시에
쳐 올려졌던 오른 손에 들린 검을 아래로 하강시켜 허공을 찌른 지라르경의 검 중앙 부분을
강하게 내리쳤다.
“크읏~!”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은 듯 지라르경이 인상을 약간 찡그리며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지만,
검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충격을 무시하지는 못하겠던지 더 이상 공격해 들어가지 않고 잠시 뒤로 물러나서
숨을 골랐다.
“후우, 대단하시군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 지라르경이 진정으로 감탄한 얼굴로 말하자 듀비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 역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던 윙겟 경은 놀란 감정을 숨기지도 않은 채 중얼거렸다.
“세상에나… 저 스승님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있었다니…”
너무나 작은 소리라 바로 옆에 있던 나 밖에 들을 수 없었던 말이었지만, 윙겟경의 말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스, 스승? 누가? 누구의? 아니, 도대체 어떻게?’
대련하고 있는 둘 중 윙겟경이 아는 자는 바로 지라르경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윙겟경은 엠브로스 기사단의 단장이고 지라르경은 그 밑의 부단장이었다.
게다가 척 보기에도 윙겟 경은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고, 지라르경은 기껏해야
20대 중반, 많으면 후반으로 보이는 쌩쌩한 젊은이었다.
물론, 20대의 나이로 보이는 주제에 실제 나이는 그보다 엄청나게 많은 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내 눈앞에서 지라르경과 대련을 하고 있는 듀비만 해도 그렇고, 내가 아는 이들 중, 외할머니를
비롯하여 레이언과 크리스또한 100살이 넘는 주제에 쌩쌩한 20대 젊은이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몇천년의 세월을 살아왔으면서도 태어난 그 순간부터 소멸될 그 순간까지 조금도 변화가
없을 네 정령왕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인간 세상에서, 그것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종족들을 노예로만 생각하던 이 나라에서 기사의 작위까지 받은 사람이 인간이 아닐 수가
없을 터였다.
‘아니면 그걸 숨기고 있던가…’
하지만 그런 건 숨긴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법을 이용하거나 변장을 해서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점점 성장하거나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계속 똑같은 모습을 가진 자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아아, 몰라 몰라 몰라. 생각하지 않을래.’
내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내고 대련 장소를 바라봤을때 지라르경과 듀비는 다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지라르경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두 손으로 잡은 검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데 반해, 듀비는
아까와는 달리 오른 손을 약간 위로 더 들고 왼 손의 검은 가로로 눕혀 배 높이에 둔 채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아까 자세는 방어 위주인 것에 비해 지금은 적극적으로 공격을 할 태세 같았다.
“핫!”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듀비가 먼저 움직였다.
오른 손에 들린 검으로 지라르경의 검을 쳐내고 왼 손에 들린 검으로 지라르경의 손목을
노리고 들어가자 그 빠른 공격에 지라르경은 분분히 뒤로 물러나며 검을 좌우로 움직여 양쪽에서
쇄도해 들어오는 검들을 막기 바빠 보였다.
그래도 지라르경의 얼굴은 침착했고, 듀비의 공격은 번번히 지라르경의 검에 막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듀비는 방금 전까지 계속 해오던 것 처럼 듀비의 손목을 노리며 강하게 그의
검을 쳐냈다 싶더니만 갑자기 그 자리에 주저 앉는 자세로 몸을 낮추며 오른 손에 든 긴 목검을
뻗어 지라르경의 다리를 노렸다.
너무 순간적인 일인데다가 그 방금 전에 듀비가 지라르경의 검을 쳐냈기에, 지라르경은 검을
내려 듀비의 검을 막을 생각을 못했다.
대신 검을 잡은 한 손을 놓아 균형을 잡은 채 재빨리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 지라르경에게서
멀어짐과 동시에 검을 놓은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재빨리 한바퀴 굴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멋진 구르기.’
흠 잡을 데 없는 동작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지라르경이 우위를 점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지라르경이 듀비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듀비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도 지라르경과 같은
방향으로 구르더니면 지라르경이 자세를 잡자마자 아래쪽으로 치고 들어왔다.
“핫!”
다급한 지라르경의 기합소리를 들으며 듀비는 왼손에 들린 목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지라르경의 검을 견제함과 동시에 더욱 더 지라르경의 품으로 파고 들어 그의 턱 아래에
목검의 끝을 가져다 댄 거였다.
그 순간 나는 옆에 있던 윙겟 경의 놀람에 찬 작은 중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이건… 말도 안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지라르경이 싱긋 웃으며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나자 듀비 역시 차분한
얼굴로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제가 졌습니다. 이런 대련, 정말 오랜만이군요.”
“저 역시, 이쪽 세계로 온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듀비의 진심 어린 말에 지라르경이 환하게 웃었다.
“그렇습니까? 이거 참 영광이군요.”
지라르경은 자신이 졌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홀가분하고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덕분에 혹시나 그가 듀비에게 져서 자존심 상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내 마음도 한시름
놓았다.
“좋으시겠습니다, 백작님. 정말 뛰어난 호위 무사를 두게 되셨군요.”
쭈욱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조엘이 대련이 끝나자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운이 좋았지요.”
조엘이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나 또한 예의 바르게 겸양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에 조엘이 잠시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더니 돌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아까 듣기로는 저 블르 엘프분에게 기사 작위를 주길 원하신다고 하신 듯 한데…”
그의 입에서 듀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나도 모르게 약간 긴장했다.
조엘의 인격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듀비에게 기사 작위를 주면 어떨까라고 생각할 때
부터 듀비가 이종족이라는 것 때문에 반대를 당할까봐 걱정하고 있었던 탓에 그에 대한 말이
나오자마자 반사적으로 경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뭐, 처음부터 듀비에게 기사 작위를 주려는 이유가 내 곁에 있을 때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괜한 고생을 할까봐 걱정되어서 였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럴 의도는 없었건만 조엘의 말에 나도 모르게 약간 예민하게 반응해버렸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잔뜩 경계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시를 세운 어조로 물었으니 조엘이 당황해 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의 반응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당신을 경계하고 있습니다.’란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고 난
뒤었다.
‘에구…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덕분에 조엘보다 더 당황해버린 내가 얼버무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조엘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조엘이 이런 내 기색을 알아챈 것인지 피식 웃더니만 평이한 어조로 말을 꺼내는 거였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백작님의 결정에 제가 뭐라고 할 권한은 없는데 말입니다.”
“아, 아뇨. 저야말로… 너무 예민하게 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신 겁니까?”
내 말에 조엘이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블루 엘프분께 기사 작위를 내리시는 걸 다시한번 재고해 주시는게 어떨까 싶은데요.”
“예?”
그의 말을 듣자니 ‘역시나…’ 란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이종족에 대한 별다른 편견이 없어 보이는 조엘도 어쨌거나 사람인지라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게 되나보다.
묘하게 조엘에 대한 실망감이 피어오르면서, 내가 엘프와 혼혈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짖궃은 궁금증마저 생겼다.
하지만, 우선은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으니 그렇게 말한 이유까지는 들어봐야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뭔지 들어도 될까요?”
그런데 내가 미처 조엘의 대답을 듣기 전이었다.
어느새 우리가 있는 곳 까지 다가온 지라르경이 불쑥 끼어드는 것이었다.
“백작님, 그런 이야기는 성으로 돌아가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연무장은 아무래도 중요한
말씀을 나눌 적당한 장소는 아닌듯 싶습니다만…”
주위를 둘러본 나는 지라르경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고 조엘을 서재로 안내했다.
조엘로써는 처음으로 서재에 들어오는 거라, 그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눈에 확 들어오는 내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고 잠시 넋이 나갔다.
아마, 이제부터 내 안내를 받아 서재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 저럴 것이다.
놀란 표정으로 초상화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저런 행동 말이다.
“아… 음…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신데 처음 보는 분이군요. 그런데, 백작님과 굉장히 닮았네요.
실례가 안된다면 누구신지 물어도 될까요?”
평소 같으면 그런 모습을 재미있게 봐주련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대답하는 내 말투는 약간 퉁명스러웠다.
“제 어머니십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이유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원래 예의상 차라도 권해야겠지만, 그런 예의 조차도 차릴 기분도 아니라서 완전히 다 무시해
버린 채 나는 조엘의 대답을 재촉했다.
‘아아, 그러고보니 외할아버지의 초상화는 아직도 못 봤잖아? 으윽…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여유가 없어, 여유가… 어쨌든, 지금 일 마무리 짓고 외할아버지 초상화를 보러 가야지.’
하지만, 이번에도 조엘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에 지라르경의 말이 들려왔다.
“백작님, 우선은 자리부터 권하시는 게 어떠실지요? 그리고 차를 준비시킬까요?”
그러고보니 내가 팔짱을 떠억 낀 채 책상에 기대고 서 있는 바람에 서재로 우르르 들어온 모든
사람들, 그러니까 조엘과 지라르경을 비롯하여 듀비와 데니까지 멀쭘히 서 있었던 것이다.
“하아… 그렇군요. 그럼 다들 앉으시겠습니까? 조엘 자작, 차 드실래요?”
예민하게 굴지 말고 침착하자고 마음속으로 다시한번 다짐하며 자리에 앉자 조엘도 마주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전 백작님과도 같이 티타임을 가졌거든요.”
“그렇습니까? 아, 듀비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리고, 데, 아니 링클레터경과 지라르경도 앉으시지요.”
데니형의 성은 링클레터였다.
그는 이미 기사의 작위를 받았기에 지금처럼 찬바람이 쌩쌩 부는 상황에서는 링클레터 경이라고
정중하게 부르고 있는 중이었다.
내 권유에 듀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지만, 지라르경과 데니형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의는 감사합니다만, 이대로 있겠습니다.”
지라르경이나 데니형 같은 경우는 나나 조엘을 하루종일 따라다니면서 결코 같은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았다.
뭐, 데니 형은 조엘과 단 둘이 있을때에는 같이 앉기도 하고, 지라르경도 필요에 의하면 가끔
자리에 앉기도 하지만 대부분 저렇게 곁에 항상 서 있었다.
그 이유가 호위 기사는 언제 어떤 상황에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므로 항상 몸을 긴장 상태로
유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나?
그런거 보면 호위 기사라는 직종은 엄청 다리가 튼튼해야 할 듯 싶었다.
그런 그들의 사양에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더 이상 아무말 않고 조엘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와 마주쳤다.
“조엘 자작?”
도대체 그 표정의 의미가 뭐냐고 물은 거였는데 조엘은 예의 편안한 미소를 띄우며 자세를
바로했다.
“그거 아십니까? 만약 저 블루 엘프 분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신다면, 블루 엘프분은 지금처럼
백작님 옆자리가 아닌 지라르경 옆에 서 있어야 할겁니다.”
“음…”
조엘의 말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었기에 나는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그의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뒤에 서 있던 지라르경이 끼어들었다.
“백작님, 저도 사실 블루 엘프분께 작위를 드리는 것에 반대합니다.”
“지라르경은 왜요?”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그래도 이번에는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려 애쓰며 물었는데,
대답은 조엘이 했다.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의 말에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 들자 조엘이 설명해줬다.
“기사라는 건, 물론 평민보다는 많은 특권과 권리가 있습니다만 그만큼 의무와 책임도 같이
있으니까요. 거기다가, 이제부터 백작님께서 몸을 담그시려는 귀족들의 세계에서 기사의
작위라는 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블루 엘프분을 보호하시려고 작위를 주시려는
것 같은데, 그게 오히려 블루 엘프분을 보호하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조엘의 말에 이어 지라르경이 덧붙였다.
“기사가 되면 그에 따르는 의무를 지셔야 하는데, 인간이 아니신 분이 그 의무를 어떻게 받아
들이실지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종족으로 계신다면 그런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으며, 귀족들도 계급을 내세워 함부로 굴수도 없겠지요.”
“몇년 전이라면 이종족이라는 이유로 업신여김을 당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여왕폐하께서
이종족과 인간은 동등하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고수하고 계시니까 이종족이라고 해도 대할
수는 없을겁니다. 뭐, 뒤에서 뭐라고 하는 건 어쩔 수가 없을테지만요.”
“아, 예…”
조엘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지라르경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아직 기사가 뭔지 제대로 모르는 분께 함부로 기사 작위를 받아라 받지 말아라고
말할수는 없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인간 세상에 대해서 잘 아시게 되었을때 의견을
물어야 하는게 아닐까요?”
“핫… 으음… 그렇군요…”
그 생각은 전혀 못했다.
듀비에게 기사 작위를 주는 것만 생각하느라 다른 생각은 조금도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백작이라는 것도 쉬운 직업은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 것과 동시에 나는 아직도 너무나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요, 듀비.”
“무엇이 말입니까?”
그는 옆에서 자기 이야기가 한참 오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이것 저것, 모두 다요. 어쨌든, 미안해요.”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그래도요… 아, 그리고 조엘 자작, 충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라르경도요. 두 분이 아니었다면
큰 실수를 할 뻔 했군요.”
내 진심 어린 감사에 빙긋 웃던 조엘이 막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 이제야 생각 난 건데 말입니다.”
“네?”
“혹시, 베르쿠스 남작 영애를 기억하십니까?”
“예?”
뜬금 없는 조엘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게 누구일까 생각해봤지만, 영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백작이 되었다지만 귀족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서 내가
아는 귀족이라고 해봐야 전 엠브로스 백작이었던 이브스햄과 조엘, 그리고 그의 가족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계속 생각해 내지 못하자 조엘이 설명을 덧붙였다.
“2년 전에 웨스트 모어랜드 후작령에 몬스터 사냥을 가지 않았습니까? 그때 만났던 버릇 없던…”
거기까지 말하자 나는 그제야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헉…”
그리고 그 기억의 책장을 펼치자마자 하얗게 굳었다.
그 동안 이 나라에 올 일이 없었던 터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때 아버지에게
끌려서 집에 가기 전 나는 그 남작 영애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 남작 영애를 좋아한 듯 보였던 후작가의 차남, 다니엘 웨스트모어랜드 녀석에게
어깨를 찔리기도 했고 말이다.
“아앗, 그러고보니 그거 어떻게 됐습니까? 일이 잘 해결 되었습니까?”
잘못하다간 계속 범인이라고 누명을 쓰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런 얼굴로 바라보는데
조엘이 빙그레 웃었다.
“그 사건은 2년전에 이미 해결이 되었답니다.”
“엣? 그럼 범인이 밝혀졌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녀의 유모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남작 영애가 고용한 용병들을 데리고
나갔다고 말해주더군요. 그래 그들을 찾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성문 수비대에게 잡혀
있더라구요.”
“어떻게요?”
“수비대측에서는 몰래 성을 빠져나가려고 하기에 수상해서 심문하기 위해 잡았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수월하게 잡았지요. 그 녀석들에게는 불행이지만,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녀석들이
용병이 된지 얼마 안되는 건달들이라 우리가 들이닥치자 지레 겁을 먹고 순순히 실토하더군요.”
“그 둘이 남작 영애를 죽였다고요? 왜 죽였대요?”
“실수로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밟았는데, 엄청 화를 내면서 뺨을 때렸더랍니다. 평소 그녀의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안 좋은 감정이 그렇지 않아도 쌓여 있었는데, 그 일을 계기로 폭발해서
우발적으로 죽인 거랍니다.”
잠깐 만난 사이였지만, 그때 당한 일을 생각해볼때 절대로 이해가 안 가는 일은 아니었다.
“으음… 정말 그 둘은 운이 안 좋았네요…”
얼굴도 모르는 그 둘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중얼거리자 조엘이 피식 웃었다.
“그렇습니까? 어쨌든, 나중에 다니엘 웨스트모어랜드 경을 만나면 그때 일을 사과할겁니다.”
“아아… 뭐…”
그 일로 그도 아버지에게 거의 죽을 뻔 했으니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 일로 그도 아버지에게 거의 죽을 뻔 했으니 피장파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그를
괴씸하게 여기고 있지 않아 사과를 받는다는 말에 좀 얼떨떨 했다.
물론 나야 억울하게 당한거고, 그는 당해도 쌌지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은 수도로 가셔야 겠지만 말입니다.”
조엘의 말에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그 전에 할 일이 많아서 문제겠지요. 끄응… 저는 다음 일을 또 처리하러 가야 할 듯
하군요.”
“그러십시오. 저는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 저도 나가야 하니 같이 나가시죠.”
그렇게 문 밖으로는 조엘과 같이 나왔지만, 그와 나는 갈 길이 달랐기에 문앞에서 다시 헤어졌다.
“그럼 저녁 식사 시간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녜.”
조엘과 헤어져 역대 백작과 그의 부인 초상화가 주르르 걸려 있는 화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지라르경이 조심스레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한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그의 말에 별 뜻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라르경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렵사리 질문을 꺼냈다.
“혹시… 조엘 자작님과는 전부터 알고 계시던 사이였습니까?”
“아아… 예. 몇년 전에 우연치 않게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후에 다시 헤어졌었지만…”
“평범한 인연은 아니었나봅니다. 조엘 자작께서 자청해서 수도로 같이 가주시기로 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브스햄이 연 파티가 모두 끝나 다른 귀족들이 다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조엘이 남아 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나와 같이 수도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귀족이 작위를 물려받게 되면 왕궁으로 가서 국왕을 알현하여 자신이 작위를 물려 받았음을
고하고 국왕에게 새로이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뭐, 진심으로 하는게 아니라 거의 형식적인데다 요즘은 귀족들도 많아서 절차도 무지 간단한데,
그래도 이제 작위를 가지게 된 귀족으로써 정식으로 국왕과 처음으로 얼굴을 맞대는 자리라
그 자리에는 평소 친분 있는 작위를 가진 귀족들을 대동하게 되는데, 이 것은 그 사람의 힘이
되어줄 거라는 걸 알리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왠만큼 친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잘 참석치 않으려고 했고, – 물론 힘 있는 귀족이( 예를
들면 공작 정도?) 알현하는 자리라면 친하지 않아도 참석하려 하겠지만 – 알현하는 측도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들 중 될 수 있는 한 높은 작위를 가진 자가 참석하기를 원했다.
그 자리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우르르 가는게 아니라 최소한 5명까지만 같이 참석할 수 있었다.
증인 비스무리한 역할로 말이다.
그런 자리에 조엘 녀석이 참여해주겠다고 하는데다 – 물론 이브스햄이 은근슬쩍 부탁하기는 했지만,
그도 조엘이 덥썩 허락할 줄은 몰랐을 거다 – 왕성으로 갈때 같이 가기 위해 빈둥대면서도
성에 머물러 있으니까 엄청난 친분이 있는 걸로 보이는 거다.
조엘이 지금 나보다는 낮은 작위인 자작이지만, 금방 죽지 않는 한 미래의 맥알파인 공작,
그러니까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큰 귀족가의 장남이었으니 한마디로 나는 킹카중의 킹카를
잡은 셈이었던 것이다.
“뭐… 독특한 인연이었지요.”
차마 조엘의 시종 노릇을 반년간 해줬다고는 말할수가 없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지라르경이 무지 심각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백작님…”
“예?”
마침 그때 초상화들이 걸린 회랑에 도착했던 터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나 바로 전 백작이었던
이브스햄의 초상화부터 바라보고 있는데 지라르경의 무지 심각한 음성이 들리자 당황해서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만, 그가 음성 못지 않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만 천천히 검을 빼어
땅을 짚더니 것두 모자라 한쪽 무릎을 꿇어 땅에 대는 거였다.
그 와중에서도 그의 시선은 절대 내 눈을 떠나지 않았다.
“지, 지라르경?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생각지도 못한 그의 행동에 당황한 내가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들어주십시오, 해인님.”
“지라르경,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다 들어줄테니까 그만 일어나세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는 당신을 진정한 제 주군으로 삼았습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제 모든 것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다는 걸 왜 몰라 주십니까?”
“지라르경… 충성 서약이야 이미 전에…”
“해인님, 이건 제 진심입니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우선 일어나서…”
“그럼 제 마음을 믿어주시겠습니까?’
나는 우선 그를 달래서 일으키려고 했었다.
그런데 지라르경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묻자 차마 그렇다는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가 의지가 되는 사람이고, 나에게 해를 가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물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엠브로스 백작가의 기사이기때문에 의무적으로 그런 것일 뿐, 나에게
정말 충성을 다한다고는 믿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내가 안지 이제 며칠이나 되었는가?
만약 그가 충성을 받치고 있다면 오랜 시간 그가 모신 이브스햄에게 받치고 있을 거라고,
현재 이브스햄이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나를 극진히 모시고 있어 그도 같이 그러는 것 뿐이라고,
이브스햄이 나에게 등을 돌리면 그 역시 주저없이 그럴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호감이 가기는 했지만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그를 완전히 신임하지 않고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었다.
그가 언제 등을 돌리더라도 ‘쩝,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아쉽군…’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랬기에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을 믿느냐고 묻자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선을 피하면 ‘예’라고 거짓말이라도 하겠는데,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본채 묻고 있으니
마치 누군가가 내 입을 막고 있기라도 한 양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가 않는 거였다.
그래 아무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자 지라르경이 쓸쓸하게 웃어보였다.
“물론… 이해는 합니다. 이제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제 말을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겠지요.”
“저기… 지라르경… 물론 저는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지라르경이 입술 끝을 비틀며 웃었다.
“사람이 아닙니다.”
“예?”
순간적으로 뭔 소린가 싶어서 되묻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프 엘프입니다.”
“엑?”
두 눈이 크게 떠지고 입이 떠억 벌어졌다.
내가 그렇게 놀라던 말던 지라르경은 계속 입을 열었다.
“저 첼릿 지라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프 엘프입니다. 제 어머니는 누군지 모릅니다. 단지 운
나쁘게 노예 사냥꾼에게 붙잡힌 엘프라는 것 외에는… 저를 낳고 얼마 후에 돌아가셔서 저는
노예 상인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이름도 없이 팔릴 날만 기다린 채 희망 없이 살아가는 저를
구해주신 건 주디스 오스번님이셨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이름을 지어 주셨고 이 엠브로스
백작가로 데리고 오셨습니다.”
뜻밖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계속 그의 이야기에 귀만 귀울이고 있었다.
“저에게 그 분의 귀를 보여주시며 자신도 하프 엘프라고 말씀해 주셨지요. 그러면서 제 귀는
엘프들의 귀를 닮지 않고 인간의 귀를 닮은게 행운이라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그 분이 힘써
주셔서 저는 엠브로스 기사단의 시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의 추천으로 훌륭한 스승님을
만나서 검술도 배우고 기사가 될 수 있었지요. 그 뒤로 저는 실력을 쌓아 언젠가는 그분께
은혜를 갚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그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던 나는 그가 말을 멈추자 얼른 재촉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향해 쓰게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어느정도 제 능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이 정도면 주디스 오스번님께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을 무렵, 주디스님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헛… 그런 일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불확실한 말만 남기고 말이지요.”
슬픈 미소를 띄우는 그를 보자니 왠지 그가 어머니를 짝사랑 한게 아닐까 싶었다.
‘에휴, 어머니는 알고 계셨나 몰라.’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동안 지라르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래서 저는 계속 기다린 것입니다. 주디스님이 다시 돌아오시기를… 그리고 이제, 해인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의 넋두리 비슷한 말에 나는 손을 들어올려 말을 끊었다.
“자, 잠깐만요. 여기 계속 있었다구요? 어떻게요? 아, 저기.. 실례지만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죠?”
“제 나이는 올해로 136세입니다.”
“헉…”
그건 레이언이나 크리스보다도 더 많은 나이었다.
아마 그 둘을 구하기 전 어머니께서는 지라르경을 먼저 구하신 모양이었다.
“제 정체는 전전전 백작님부터 대대로 백작님들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아, 저기 혹시… 기사단장도 알고 있었나요?”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지라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대로 백작님들과 기사단장들의 도움으로 제가 하프 엘프라는 걸 숨기고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겁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현 기사단장은 제 제자입니다.”
“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서 기사단장인 진 윙겟 경이 지라르경에 대해 그렇게 자부심을 느끼고 듀비에게 졌을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래서 ‘스승님’이라고 했던 거고 말이다.
“이제 저를 믿으시겠습니까? 만약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다면 전 백작님이나 현 기사단장에게
물어보셔도 됩니다.”
“아, 아니요. 믿어요. 그러면… 지라르경이 나에게 충성을 받치는 것도 어머니의 은혜를 갚기
위함이겠군요? 어머니 대신 말이에요.”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세상에 그 분이 안 계시는 이상 은혜를 갚을 길은 이것 뿐이니까요.”
내 말에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나는 왠지 머쓱해졌다.
“그러다가 내가 굉장히 나쁜 놈이라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신은 주디스님의 아드님이시니까요. 게다가, 정말 심성이 나쁜
분이셨다면 엠브르스양을 도와주지도 않았을 거 아닙니까?”
“하아…”
이제는 아들이라는 말을 들어도 덤덤했다.
완전히 포기 상태라고나 할까?
“그럼, 이제 조엘 자작과의 인연에 대해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아?”
순간적으로 혹시 지금까지 한 모든 이야기가 조엘과 나 사이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야기 한 건가
싶었지만, 그래도 이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거라 허탈하지는 않았다.
“그러죠. 그럼 우선 일어나는게 어때요? 나까지 불편해지잖아요.”
“알겠습니다.”
그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검을 도로 차자 나는 다시 초상화들쪽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처음부터 간략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몰래 집에서 가출해서 노예상인에게 잡혀서 팔릴 뻔하다가 조엘과 만난 이야기부터
웨스트모어랜드 후작령에서 살인범으로 몰려 검에 찔린 채 집으로 돌아간 이야기 까지.
그리고 내친김에 상회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물론 간략, 간략하게… 그 사이 사이 있었던 해프닝은 완전히 다 빼고 말이다.
“거참… 조엘 자작의 시종 노릇을 하셨다니… 뭐, 덕분에 귀족 사회에 대해 조금쯤은 경험을
하게 되셨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해인님의 아버님께서 살아계신다는
말씀입니까?”
“예.”
“그럼 그 분은 왜 안 오시는 겁니까?”
‘아까도 왔다 갔는데요?’
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 변명하는 걸 그에게도 그대로 들려주었다.
“내 아버지는 엄청나게 특이한 분이시라서요. 인간 세상에 절대 관여 안 하시고 관심도 없으시죠.”
“그, 그렇습니까? 그래도 해인님이 백작님이 되셨는데 아무렇지도 않으시겠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죠. 아마, 그런 귀찮은건 왜 맡았냐고 핀잔이나 주실 걸요?”
어머니 초상화에 푹 빠져 있는 모습에 내가 백작이 된 뒤로는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십중 팔구는 분명히 그랬을 거다.
“하하하…”
지라르경의 황당함이 가득 담긴 웃음을 흘려 들으며 내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내 6대 위의
백작 초상화가 있는 곳이었다.
바로 내 외할아버지셨던 오스번 엠브로스 백작님 말이다.
그 분은 부드러워보이는 갈색 머리에 보라빛 눈동자를 가졌다는 것 외에 어머니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선이 굵고 강해보이는 턱,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해보이는 눈을 보자니 정말 강직한 기사외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이 분 체형을 닮지 않았다는 게 무척이나 고마웠다.
하지만, 어머니를 지극하게 사랑하셨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매섭게 나를 쏘아보는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왠지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 외할머니가 아닌 검은 머리에 인자해보이는 초록색 눈을 가진 가리가리한
귀부인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 분이 바로 울 어머니의 새 어머니이지만 어머니를 친딸처럼 사랑해주신 백작부인이셨다.
‘안녕하세요, 두분?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라고 합니다. 만나뵙게 되어 오랜만이에요. 나중에
기회 있으면 아버지와 같이 오겠습니다. 아버지를 보시면 아마 엄청 놀라실 거예요.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