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35)
제 29화 왕성에 도착하기까지.
화랑에서의 일이 있고 그 다음날 아침, 나는 그 동안 아무런 언질도 없이 가만히 내버려 두었던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기사단장을 불러 들였다.
“감옥에 가두어 놓은 벤자민 엠브로스와 그의 아들 이스파엘 엠브로스, 그리고 제프리 찬텔을
데리고 오십시오.”
제프리 찬텔은 에르미아 엠브로스를 죽이려 했던 그 남자의 이름이었다.
기실 나는 백작이 된 이래 처음으로 백작의 의무이자 권리를 행사하려 하는 것이었다.
진 윙겟 경이 절도 있게 대답하고 수하 기사들을 데리고 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에게 내릴
판결을 다시금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는데, 내 뒤에 서 있던 지라르경이 조용히 물어왔다.
“제프리 찬텔경은 어떻게 처리하실 것입니까?”
“글쎄요… 우선은 제가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으니 그와 이야기를 해볼 작정입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엠브로스양과 전부터 알던 사이라는 것,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원한이 있어 복수를 하러 돌아왔다는 것 뿐이니까요.”
“그와 벤자민 엠브로스간에 모종의 계약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백작 작위를 물려 받던 날 일어난 사건이라 그들이 감옥에 갇힌지도 며칠이나 흘러 갔지만,
그 동안은 내 주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 나는 그들에 대해 따로 뭐라 명을 내리질 않았었다.
덕분에, 그 동안 그들에 대한 심문이나 문초 같은 게 없어 나는 알고 있는게 전혀 없었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테지만…
“이제부터 알게 되겠지요. 그런데 지, 아니… 첼릿 나는 이 자리에 에르미아 엠브로스양을 참여
시켰으면 좋겠는데요, 그건 너무 이기적일까요?”
지라르경은 어제 일이 있은 후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부탁해왔었다.
그래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름을 부르기로 했는데, 처음부터 계속 지라르경 지라르경 이라고
불러와서 자꾸 그를 부르려 할때 성이 먼저 튀어나오려 했다.
“아무래도, 엠브로스양께는 어려운 일이겠지요. 여성에게 얼굴을 다치는 건 큰 충격이
아니겠습니까? 우선 오늘 심문을 한다고 이야기는 전하게 했습니다.”
“끄응…잘 했어요. 에휴, 아무리 얼굴을 가린다고 해도 사람들 앞에 서는건 역시 무리겠지요?
그나저나 이브스햄은 불렀는데 안 보이네요?”
“엠브로스양께 잠시 들렸다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흐음… 아, 혹시 첼릿도 그 제프리라는 사람을 알고 있죠?”
“그는… 전에 엠브로스 기사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소질도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데다가 성품도
좋아서 저와 진이 눈여겨 보는 자중 한명이었지요.”
“오, 유망주였다는 소리네요?”
“얼굴도 잘 생긴데다가 매너 또한 좋아서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답니다. 문제는… 그에게
호감을 가진 여자들 중에 에르미아 엠브로스양도 있었다는 거지요.”
“엥? 왜 그녀가 제프리 찬텔에게 호감을 가진게 문제라는 거지요? 백작가의 딸에게 잘 보이면
좋잖아요?”
잘만 하면 그녀와 결혼해서 신분이 상승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그는 백작가의 딸이라는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엠브로스양에게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항상 거리를 두고 타인에게 대하듯
예의만 차렸으니까요. 그가 그렇게 대하니 엠브로스양은 내성적이라 과감하게 다가서지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전전긍긍 하고 있었지요.”
“그녀가… 내성적이라고요?”
이브스햄과 벤자민에게 잡혀서 꽁꽁 묶여 있던 날, 비록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침착하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 말투로 이야기하는 여성이 내성적이라니…
내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자 첼릿이 허허 웃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죠. 그때 엠브로스양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고 나서기를 싫어했지요.
하지만 10년 전의 그 사건과 전 백작님의 교육으로 인해 지금은 많이 당당해진거랍니다.”
“10년전의 사건이라뇨?”
첼릿의 말에 나는 그 사건이 아무래도 에르미아 엠브로스와 제프리 찬텔이 연류되었음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멀리서 바라보았지만, 전혀 돌아봐주지않자 엠브로스양의 마음에 앙금이 가라앉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쌓이고 쌓인 감정이 한번에 폭파되었던 겁니다. 사실, 엠브로스양이
그랬다는게 정말 믿겨지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무슨 일인데요?”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만, 제프리가 엠브로스양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어떤 다정한
행동을 다른 여성에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엠브로스양의 하녀에게 말이죠.
그걸 엠브로스양에게 들킨 거죠.”
“저런…”
“제프리는 엠브로스양에게 어떤 일말의 기대를 주지 않으려고 다른 여성들에게와는 달리
냉정하게 대했거든요. 그런데 그게 엠브로스양을 더욱 서운하게 한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됐죠?”
“너무 화가난 엠브로스양이 그 즉시로 백작가 마법사의 방으로 달려가 황산을 가져와 제프리에게
던져 버렸습니다.”
“허걱….”
“그래도 주위에 다른 기사들이 있던 터라 급히 조치를 취했기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얼굴과
성대는 영영 망가지고 말았답니다. 최고위 신관이나 고위 마법사들이 있다면 고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을 만나는 건 국왕 폐하를 만나는 것 만큼이나 어렵고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테니 일개
기사인 제프리로써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죠.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제프리는 백작가에서
조용히 사라졌답니다.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지만…”
“하아… 그래서 그가 엠브로스양에게 원한이 생긴 거군요.”
“예.”
내가 한숨을 쉬자 첼릿도 낮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의 말투에 무지 안타깝다는 감정이 절절하게 서려 있어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를 아끼십니까?”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정말 좋은 인재였으니까요. 가르치는 재미도 쏠쏠했고, 진이 정말로
아끼던 아이였거든요. 지금 진 녀석 표현은 못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척 끙끙 앓고 있을
겁니다.”
“흐음… 그래요?”
어차피 이번에 판결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을 터였지만 제프리라는 사람들은
제일 큰 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봐야 처형은 아니고 추방쯤 되겠지만…
묘한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지만 그에게 원한 같은 건 없었던 터라 다른 용병들처럼 그냥 풀어
줘도 괜찮지만, 이브스햄이 그냥 놔주려고 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도가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이브스햄이 원하는 쪽으로 하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윙겟 경의 의견도 들어봐야 하겠는걸?’
그렇게 결심하고 있을 즈음, 홀의 문이 열리더니 이브스햄이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어라?”
예의상 나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뒤를 따라오는 한 사람의 모습에 나는 내뱉던 인사를 끝내지 못하고 놀라서
입을 벌렸다.
여기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엠브로스양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높은 열로 인해 성대가 상해 여성의 고운 목소리가 아니라 거친 허스키한 음색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어서 오세요, 엠브로스양. 직접 오실줄은 몰랐는데요.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나았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나았기는 나았다.
얼마 전까지만해도 충격 때문인지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도 힘겨워 하던 그녀가 지금 하녀의
부축을 받고 있기는 해도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얼굴은 얆은 베일로 가린 채 눈만 내놓고 있었고, 손에도 얇은 실크 장갑을 낀 채 겉으로는 피부를
조금도 노출 시키지 않고 있는 그녀를 보자니 정말 안됐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좀 앉겠습니까?”
“그리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 곳은 정식으로 손님을 맞거나 아니면 판결을 내릴때 사용되는 홀이라 단상 위에 나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있을 뿐이라 다른 이들은 모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백작의 허락 하에 단상 밑에 다른 이들이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을 수가 있었다.
엠브로스양처럼 여성이거나 아니면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거나 할때 말이다.
이브스햄은 전 백작이기는 했지만, 혈연상 내 손자였기에 앉지 않고 서 있는 거다.
한 병사가 의자를 가져와 그녀가 그 위에 몸을 앉힐 무렵 홀 문이 열리고 진 윙겟 경을 선두로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는 기사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 그리고 그들을 묶은 줄을 잡고 있는
사병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죄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벤자민 엠브로스와 이스파엘 엠브로스를 맨 앞에, 제프리 찬탈이 그 뒤에, 또 그 뒤에는 벤자민
엠브로스가 고용한 듯 싶은 용병들이 주르르 무릎이 꿇혀졌다.
추운 날 난방이 절대 되지 않는 차가운 지하 감옥에 며칠 갇혀 있었던 탓인지 아무런 문초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빨리 해결하고 풀어줘야겠다 마음 먹으며 첫 말을 어떻게 꺼낼지 궁리하고
있는데 이런 내 생각이 허무하게도 첼릿이 나섰다.
“죄인 벤자민 엠브로스, 그대는 감히 백작님을 살해하려고 했다. 이는 네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큰 죄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그러자 창백한 얼굴에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하고 있던 벤자민이 갑자기 회심의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글쎄올시다… 내 죄가 크다면 다른 사람의 죄도 클게 분명한데, 나는 감옥에 갇히고 다른 사람은
멀쩡하게 서 있다니 이거 참 아이러니하지 않소?”
그러면서 한쪽에 서 있는 이브스햄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거였다.
“안 그렇습니까 형님?”
그러자 이브스햄이 헬쓱해지더니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익, 닥쳐라. 네 놈의 죄는 명명 백백하다. 이제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아,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저도 할 말은 있습니다만? 설마 말도 못하게 하고 죽이는 건
아니겠지요?”
벤자민의 말에 이브스햄이 분노해 뭐라 더 말하려고 했지만, 첼릿이 먼저 나섰다.
“벤자민 엠브로스!!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뭐, 어차피 너는 현행범이라 시인을 하던 부인하던
상관 없지만, 변명할 거리라도 있는가?”
“아아, 물론 시인합니다. 저는 단지 제 모든 죄상을 명명백백하게 고하려고…”
“네놈이 정녕 죽고싶은 게로구나. 그나마 옛 정을 생각해서 목숨만은 구하도록 노력하려고
했더니!!”
이번에도 이브스햄이 벤자민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에 첼릿의 눈초리가 살짝 찌푸려졌지만, 이브스햄이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지라 아무 말도
안 하는 듯 했다.
이브스햄이 자꾸 그렇게 벤자민의 말을 자르고 흥분하자 오히려 벤자민은 더욱 더 여유로운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호오, 제 목숨을 구해주려 하셨습니까? 이거 참 눈물 나게 고마우신 말씀입니다.”
“이익, 네 이놈!!”
능글맞은 벤자민과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이브스햄의 모습을 보자니 아무래도 벤자민은
이브스햄이 자신과 공모해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걸 밝히려고 하고, 이브스햄은 그걸 막으려는
듯 해보였다.
그런데, 웃긴건 그건 내가 다 알고 있고 그 동안 이브스햄도 거기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둥의
말도 안 했으면서 – 물론 나도 가만 있었지만 – 이제와서 벤자민이 말할까봐 전전긍긍 하는
거였다.
이브스햄은 내가 증거가 없어서 그를 가만 나두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내가 정말 그가 미웠다면 내 능력만으로도 얼마든지 그를 해칠 수 있다는 걸 이브스햄도
알텐데 말이다.
아니면, 나나 그나 덮어 두려고 했는데 벤자민이 들춰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이브스햄에게
벌을 내리게끔 하려는 걸 막는 걸까?
그의 죄가 드러나더라도 내가 용서해주면 땡일텐데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모든 일의 결정은 내 손안에 있으니 아무리 증거가 명명백백하더라도 내가 안 보면
그만이었다.
그걸 모르는 이브스햄이 아닐텐데 그는 너무나 전전긍긍했다.
그래 이상하다 싶어 벤자민과 이브스햄의 언쟁을 제지하지 않은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이브스햄이 자꾸만 이야기하면서 힐끗 힐끗 이쪽을 쳐다보는 거였다.
처음에는 내 눈치를 살피는건가 싶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는 거 보면 그게 아닌 듯 싶었다.
그래 가만 보니 앞으로 나선 첼릿의 눈치를 자꾸 살피는 거였다.
‘왜? 아아, 그러고보니 대대로 백작은 첼릿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했지? 그래서 그러는 건가?
호오, 그러고보니 기사단장이 첼릿 제자라고 했지? 그러면 첼릿이 기사단을 꽈악 잡고 있는
거겠네? 그래서 그러나?’
내가 그렇게 고개를 갸웃 갸웃 하는데 벤자민의 능글맞은 언행에 분노할대로 분노한 이브스햄이
나를 쳐다보았다.
“백작님, 더 이상 이 녀석의 말을 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죄가 명백한 이상 그냥 처형 하시지요.”
“오오,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죽기 전에 신관의 기도는 받을 수 있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있는 법이라구요, 형님.”
처형 당하기 직전의 사람이 저렇게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지 기가막혔지만,
아마 벤자민도 겉으로는 여유롭게 굴어도 속으로는 외줄을 타고 절벽을 건너가는 심정일 거였다.
“닥쳐라. 네 목숨을 잃기 전에 네놈의 혀를 뽑도록 하겠다!”
“아아, 왜 제 혀에 그렇게 관심이 많으실까?”
뭐, 그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물어보면 모든게 밝혀질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구경하는 건 관두고 슬슬 나서기로 했다.
“둘다 그만 하시죠. 당신들의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다 들어줄테니까, 우선은 거기 용병들.”
내 부름에 뒷쪽에 옹기종기(?)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용병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지하감옥에 무단 침입하여 죄인을 이끌고 도망친 죄가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당신들이 돈을
댓가로 저지른 일이니 크게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뭐, 일을 실패했으니 댓가도 못 받겠지만…
해서, 가벼운 벌금형을 내리기로 하겠습니다.”
내 말이 의외였던지 용병들의 눈이 둥그래졌지만, 대부분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벌금은 얼마정도…”
한 용병이 조심스레 묻자 나는 시선을 다시 벤자민쪽으로 돌렸다.
“벤자민 엠브로스경, 저들에게 계약금을 얼마나 줬지요?”
내 질문이 의외였던 듯 벤자민도 얼떨떨한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대꾸했다.
“아… 그러니까… 한 사람당 은화 30씩…”
“흐음, 그래요? 윙겟경, 그 정도면 저들의 수준이 어느정도라는 이야기인가요?”
“계약금은 보통 약속한 금액의 10%를 주니까, 대충 저들은 금화 3개씩 받는다는 이야기군요.
그 정도라면… 2급 정도요? 가장 활동을 많이 하는 괜찮은 실력을 가진 용병들이 그 정도 입니다.
일급은 그보다 10배정도, 특급은 100배정도 받지요. 일급 용병 이상이면 착수금부터 금화나
백금화밖에 취급을 안 한답니다.”
“헉… 차이가 심하군요. 뭐, 어쨌든 벌금은 한 사람당 은화 20씩으로 하도록 하죠. 윙겟경,
저들은 그렇게 정했으니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우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멋쟁이!!”
내 선언에 눈에띄게 안도하는 기색을 보이는 용병들은 윙겟경의 눈짓에 따라 자신들을 이끄는
기사들에게 순순히 끌려나갔다.
그들의 모습에 첼릿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근거렸다.
“너무 가벼운 형벌을 내리신게 아닙니까?”
“생각 같아서는 그냥 풀어주고 싶었는 걸요. 사실 저들은 벤자민에게 고용되었을 뿐이잖아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럼 됐으니까 그 정도로 넘어가요. 지금 중요한건 저들에 대한 처분이 아니잖아요.”
“그렇군요. 그럼 저들은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첼릿은 그러면서 눈짓으로 이제 남은 세 명을 가르키고 있었다.
벤자민은 여전히 이브스햄과 치열한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고, 그 옆의 이스파엘과 그 뒤의
제프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흐음…”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재로 가죠. 윙겟경, 저들을 서재로 데려와 주세요. 그리고 이브스햄, 엠브로스양 그대들도
서재로 와주세요.”
“배, 백작님?”
나의 갑작스러운 명에 이브스햄은 물론이거니와 윙겟경이나 첼릿, 그 주변의 기사나 사병들,
무릎꿇고 있던 벤자민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그들을 싸악 무시한채 듀비를 데리고
척척 걸어 그 홀을 빠져나갔다.
“해인님, 뭘 어쩌시려고요?”
내가 척척 걸어가자 첼릿이 다급하게 쫒아오며 물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려구요.”
“예?”
내 말에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첼릿에게 나는 싱긋 웃어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하지만,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서 듣기 보다는 마주 앉아서
듣고 싶어서 그래요. 그들도 무릎을 꿇은 채 이야기 하는 것 보다는 소파에서 앉아서 하는게
더 좋지 않겠어요?”
“그들은 죄인입니다.”
“압니다. 하지만, 뭐랄까… 내가 너무 무른 걸지도 모르지만 그들을 무릎 꿇혀 놓고 위에서
닥달하고 싶을 만큼 그들이 밉지가 않네요.”
“하, 하아…”
첼릿이 아무말도 못하고 한숨만 내쉬자 그 동안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듀비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그들이 해인님께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흐음… 아까 늙은 인간이 자신의 아들에게 백작 작위를 넘겨주고 싶어 했지요. 그런데 중간에
내가 나타나서 작위를 가로채게 되니까 날 죽이려고 했어요.”
간단 명료한 내 설명에 듀비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간단하게 대답했다.
“죽여야겠군요.”
그러자 그 뒤를 첼릿이 있었다.
“당연한 겁니다. 해인님을 죽이려 한 죄는 그 무엇으로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을 소파에 앉게 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시겠다니…”
“죽이지 않습니다.”
“예?”
첼릿의 말을 자르고 불쑥 내 던진 내 말에 놀란 첼릿이 그도 모르게 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죽이지 않겠다니요? 그럼 평생 감옥에 가두시게요?”
“아뇨.”
간단하게 대답한 나는 서재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도대체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저도 묻고 싶군요. 갑자기 저들을 서재로 데려오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첼릿이 서재로 들어오자마자 나를 다그치는데, 그 뒤로 서재 문이 벌컥 열리고 뛰어온 듯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헥헥거리는 이브스햄이 들어오더니 다그쳐 묻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고 소파에 자리를 잡으며 자리를 권했을 뿐이었다.
“진정하고 앉으세요. 아, 차 드실래요?”
“백작님, 지금 차가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들은 즉결 처형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더 들으시겠다는 겁니까?”
엄청 흥분한 듯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외치는 이브스햄의 말을 칼칼한 음성이 부인했다.
“모두 다는 아니에요. 최소한 한 사람은 그렇지가 않아요.”
“에르!!”
놀란 이브스햄이 돌아보는 가운데 그녀는 천천히 소파쪽으로 다가왔다.
그래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자리를 권해야 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엠브로스양.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백작님. 차는 방금 전에 마시고 와서 생각이 없어요.”
그녀가 자리를 잡고 앉자 이브스햄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서재의 문이 열리며 윙겟경이 들어왔다.
“죄인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윙겟경. 아, 미안하지만 그들 포박도 좀 풀어주시겠습니까?”
“예에? 아, 예…”
내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 윙겟경이었지만, 빙긋 웃으며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서둘러
대답하며 포박을 풀었다.
“자, 거기 세분,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아, 그래, 차 좀 드시겠습니까?”
서재에 들어와 나는 열심히 차를 권했지만, 아무도 마시질 않았다.
지금 세명도 마찬가지인 듯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힐끔 바라본 채 대답은 안 하고 꾸물 꾸물
내가 가르킨 소파로 와서 앉았다.
“거참, 별로 내키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듀비, 차 마실래요?”
“저는 주십시요.”
“좋아요, 윙겟경은?”
듀비의 긍정적인 반응에 방긋 웃으며 문 가까이에 서 있는 윙겟경을 바라보자 그는 아직도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 저, 저는 됐습니다.”
“그래요? 그럼 차 두잔만 가지고 오라고 하세요. 기사분들은 나가셔도 좋습니다.”
“예에? 그러다가 죄인들이 무슨 일을 벌이면 어쩌시려고요?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제프리는…”
윙겟경이 크게 놀라며 외쳤지만, 나는 그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걱정이 된다면, 윙겟경은 남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여기 있는 누구도 함부로
행동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아… 그, 그거야…”
더듬 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윙겟경은 어쩌실 거죠?”
“…. 여기 있겠습니다.”
“그러세요.”
상황이 무지 어색해서그런지 시종이 차를 가지고 올 때까지 감히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윙겟경은 내가 의자를 권했지만, 사양하면서 첼릿 옆에 섰고, 듀비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달콤한 냄새를 피어올리는 차를 기분 좋게 한 모금 마신 나는 긴장으로 인해 침묵이 흐르는
주변을 한번 훑고는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해볼까요? 벤자민 엠브로스, 원하는게 뭐죠?”
“예?”
내가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는지 그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싱긋 웃어준 나는 소파에 편하게 자세를 고치고 다리를 한번 척 꼰 뒤 재차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이브스햄과 무슨 거래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내가 잘못 본 겁니까?”
“아, 그, 그게…”
“백작님, 그 무슨…”
벤자민과 이브스햄이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제가 틀린 겁니까?”
또 한번 묻는 내 말에 벤자민이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제 아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있다면, 제가 감옥에 갇힌 걸 그냥 둘 수 없어 용병들을 고용해
감옥을 습격한 것 뿐입니다. 그 전에 있던 모든 사건들은 제가 꾸민 짓이며 아들은 조금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브스햄 생각은 어떠세요?”
“말도 안됩니다. 이스파엘이 전혀 몰랐을 수가 없어요. 이스파엘도 같이 꾸몄을 겁니다.”
“너무 단정하시는 것 아닙니까 형님?”
“흥, 네 녀석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내가 아니다. ‘그’ 일로 날 협박해서 아들을
살리려는 모양인데, 백작님께서 날 그냥 두고 계시는 걸 보고도 모르겠냐?”
“백작님이야 형님이 어떻게 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라르경은 어떨까요?”
“지라르경은 백작님의 수하다.”
“그렇긴 합니다만…”
“지라르경.”
이브스햄과 벤자민의 격렬한 언쟁에 갑자기 내가 끼어들면서 첼릿을 부르자 이브스햄과
벤자민은 입을 다물었고, 첼릿이 대답했다.
“예.”
“벤자민 엠브로스와 그 아들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습니까?”
그의 대답은 간결했다.
“처형 하십시오.”
“왜요?”
이번에도 간결했다.
“백작님을 해하려 했으니까요.”
“아들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쓰지 않았는데요?”
허옇게 질린 두 부자를 힐끔 바라보며 다시 묻자 첼릿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백작님을 해하려 했던 죄인을 구출하려 했으니 공모죄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브스햄과 벤자민이 같이 나를 죽이려 했으면 어땠을까요?”
이번에는 이브스햄까지 하얗게 질렸다.
“이자를 잡을까요?”
첼릿은 사실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내 말이 끝나는 즉시 검을 빼들어 이브스햄의 목을 겨눴던 것이다.
“배, 백작님…”
“검을 거두세요, 지라르경. 나는 이야기를 듣고 싶을 뿐입니다.”
내 말에 첼릿은 그 즉시 검을 거두고 너무나 간결한 대답을 내뱉았다.
“처형하십시오.”
그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입니까?”
“예.”
“그렇군요. 그럼 한가지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한 어린 아이가 무지무지 미워하는 청년이
있었답니다. 그 아이는 이 청년이 죽기를 바랬는데 청년은 건강해서 당장 늙어 죽거나 병들어
죽을 확률이 극히 낮았지요. 그래서 고민고민 하던 아이가 꾀를 써서 이 청년이 잘 다니는 길에
자그마한 함정을 팠답니다. 이 함정에 발이 빠져 나자빠져서 머리를 부딪혀 죽게끔 말이지요.
그걸 모르는 청년은 그 길을 지나다가 정말 그 작은 함정에 발이 빠져 넘어져 버렸지만, 아쉽게도
죽지는 않고 작은 타박상만 입었답니다. 그럼 여기서 이 어린 아이를 살인 미수죄로 잡아서
처형해야 할까요?”
뜬금 없이 엉뚱한 말을 좔좔좔 내밷는 날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그건 첼릿도 마찬가지였던지 – 그는 내 뒤에 서 있어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 황당함이 가득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말씀을요. 그 정도로는 그 청년이 죽을리가 없지 않습니까? 재수가 없어서 넘어질때
머리를 짱돌에라도 박아서 뇌진탕에 걸리지 않는 한 말입니다.”
“하지만 죽이려는 목적으로 함정을 팠고, 청년이 거기에 걸렸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가 한 일에 청년이 죽을까봐 겁을 먹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청년 또한
그런 일 정도로 어린애가 처형되기를 원치 않을 겁니다. 가볍게 혼내기야 하겠지만…”
“그렇군요. 그럼 저도 그 청년으로써 가벼이 벌을 내리고 끝내도록 하죠.”
“예?”
내 말에 첼릿이 다시 소리를 높였다.
“이브스햄과 벤자민이 나를 죽이려 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죽었습니까? 저 둘이 나에게
한 일은 내가 말한 어린애가 청년을 죽이려고 작은 함정을 판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그 정도로는
죽는다는 위협도 못 느끼거든요.”
“아니, 그래도…”
첼릿이 뭐라고 더 하려고 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벤자민을 불렀다.
“벤자민 엠브로스, 당신이 관리하는 영지에 대한 서류를 봤는데, 확실히 영지 관리하는데
유능하더군요. 아직 어리숙한 나지만 당신같은 인재를 놓치기는 아깝더군요. 해서, 당신의
지위는 그냥 보장해드리지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벤자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당신에게서 엠브로스란 성은 빼앗겠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제게 소속 된 영지 관리인이자 영주 대리인일 뿐, 엠브로스 가문 사람은 물론 제 손자도
아닙니다. 당연히 작위 계승권도 박탈되겠지요.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벤자민은 소파에서 내려와 땅에 무릎을 꿇고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신, 사건의 전모를 다 알았으면 좋겠는데요? 당신이 그 날 엠브로스양에게서 작위를 빼앗으려 했던 모든 일을 말입니다.”
그러자 벤자민은 차마 소파 위로 올라가서 앉지도 못하고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띄엄띄엄 이야기를 시작했다.
벤자민과 이브스햄은 지금 남아있는 엠브로스 사람들 중, 그나마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어렸을때는 물론,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서도 자주 왕래가 있었던 모양이다.
벤자민이 엠브로스 영지 중 가장 척박한 곳을 골라 가서 거기를 크게 부흥시킨 것도 반은
이브스햄을 돕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보니 제프리 찬텔과 에르미아 사이에 있었던 일까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제프리를 단지 안됐다고만 생각 했는데, 몇년 전 이브스햄의 아들이 죽고 그에게
자식이라고는 에르미아만 남게 되자 작위에 대한 욕심이 생기면서 그를 다시 떠올렸다고 한다.
혹시나 그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를 수소문 했지만, 에르미아가 결혼을 하면 작위는
자연스레 이스파엘에게 넘어오게 되었기 때문에 그냥 알아만 두고 있자는 생각이었단다.
그러나, 에르미아가 다른 귀족가 여식들과는 달리 혼기가 차도 결혼 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제프리 사건때문에 충격을 받아서 그러는가 보다 싶었지만… – 나중에 이브스햄이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여러가지 영지를 꾸려가기 위한 교육을 받는 걸 보고 안되겠다고 생각
해서 일을 꾸몄다고 한다.
마침 제프리가 에르미아에대한 복수심도 가지고 있었기에 일의 진행은 수월했다고 한다.
대신 어려서부터 친딸만큼 예뻐한 아이였기에 죽이지는 않기로 했는데 제프리가 자기 마음대로
죽이려 했다는 거였다.
그 말 그대로, 그때 그 자리에 내가 없었다면 에르미아는 정말 죽은 목숨이었다.
아들인 이스파엘과도 처음부터 논의가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계획은 우선 벤자민이 어떤 핑계를 대든 이브스햄을 서재에 데리고 가 있는 사이,
그들이 있는 줄 모르는 제프리가 서재로 와서 에르미아를 불러내어 그 곳에서 복수를 한다는
거였다.
원래는 그녀의 얼굴에 약한 황산을 끼얹기로 했었단다.
제프리가 당한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나마 비슷하게 말이다.
그리고 그때 둘이 튀어나가 제프리는 잡히고 – 나중에 벤자민 부자가 구출해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제프리는 거기서 잡혀서 자기도 죽으려 했던 듯 싶다 –
에르미아는 파티에 못 나가니 대신 이스파엘이 나가 작위를 받는 다는 스토리였다.
“거참… 그런데, 궁금한게 있는데… 정말 작위를 가지고 싶다면 꼭 그렇게 엠브로스양을
다치게 하지 않아도 방법이 있잖아요. 둘은 6촌이니까 결혼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둘이
결혼 시키면 되잖아요?”
이 나라에서는 같은 친척이라도 6촌 이상으로 먼 친척이면 결혼이 가능했다.
불가능한 건 4촌이나 5촌 까지만…
“그, 그게…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스파엘에게는 벌써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요? 유부남이었군요.”
“예에…”
“그래요,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아, 그리고 이브스햄.”
내 부름에 이브스햄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에게는 따로 처벌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그대는 벌써 큰 벌을 받은 것 같아서 말이죠.”
“감사합니다, 백작님.”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이브스햄이었지만, 순간 슬쩍 첼릿의 눈치를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하기야, 그는 지금까지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으니 자신에게 아무런 처벌을 내리지
않을 걸 짐작하고 있었을 터였다.
문제는 첼릿이었지…
첼릿이 여기서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줄 정말 몰랐었다.
하기야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계속 엠브로스가를 지키고 있었으니 그게 당연한 걸라나?
“자, 그러면 남은 사람은 제프리 찬탈, 당신 뿐이군요. 당신은 할 말이 없습니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더 숙이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에…”
그의 남의 일을 이야기 하는 듯한 무관심한 어조에 내가 황당해하자, 그 즉시 내 뒤쪽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망발인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겠는가?”
윙겟 경이었다.
첼릿이 말해주길 그가 제일 안타까이 여기고 있을거라더니만,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해라.’
라는 듯한 제프리의 행동에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윙겟 경의 호통에도 제프리는 고개만 더 푹 수그렸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에르미아 얼굴 못지않게 흉측하게 일그러진데다가 색도 거므틱틱하게 변해 있었다.
엠브로스양은 그나마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는 죄인의 몸이었기에 그나마 가리지도
못해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 밖에 없었다.
“할 말이 없다면 하는 수 없지요. 그럼 이브스햄, 저 자를 어떻게 할까요?”
이브스햄은 내가 자신에게 물을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저는… 그러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지금까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에르미아가 끼어들었던 것이다.
“백작님, 제가 감히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그녀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었던 터라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감사합니다. 백작님, 제프리 찬탈이 저에게 했던 일은 제가 먼저 그에게 했던 일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그러니 만약 제프리 찬탈이 벌을 받게 된다면, 그 원인을 제공한 저 또한
그와 같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요. 그래서요?”
내가 그녀의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며 묻자 그녀가 당황한 기색을 떠올렸다.
“예? 아, 예, 제 말씀은 그러니까… 만약 제프리 찬탈에게 벌을 내려주신다면 저도 같이 벌을
받게 해주십사하고…”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참고하도록 하지요. 할 말은 그게 다입니까?”
“예, 예에… 감사합니다.”
내가 너무나 산듯하게 받아들이자 그녀는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던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끝맺었다.
“이브스햄은요? 할 말이 없으신가요?”
내 말에 이브스햄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백작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따님의 인생이 망가졌으니 원한이 클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제 딸 또한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으니 벌을 내려달라고 간청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제 딸은 회복할 수 있거든요.”
“호오, 그래요? 어떻게 말입니까?”
“수도에 있는 고위 신관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백작님께서 수도로 가실때 딸과
같이 동행을 허락해 주십사 간청하려고 했었지요.”
“그 고위 신관이 고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할 겁니다. 완벽하게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대신 돈이 좀 많이 들겠지요?”
“허허허… 아마도 그렇겠지요. 그러나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렇군요.”
이브스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도중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원래 제프리에게도 큰 처벌을 내리고 싶지 않았던 데다가, 에르미아 엠브로스와 이브스햄까지
큰 원한이 없는것을 보고 그냥 놔주려고 했지만, 그 보다 더 좋은 해결책이 보였던 것이다.
“자, 그렇다면… 제프리 찬텔, 그대는 어떤 처벌을 내리든 감수하겠습니까?”
“네.”
그는 체념한 듯 대답했지만, 내 뒤쪽에서 긴장감이 전해져 왔다.
아마도, 진 윙겟일 듯…
“좋아요. 아, 윙겟 경, 물어볼게 있는데… 제프리 찬텔이 전에 엠브로스 기사단의 기사라고 했었죠?”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실력이 어느정도였지요?”
“에… 예전에는 저희 기사단의 중간 레벨 정도 였습니다.”
“그래요? 그럼 실력이 꽤 있는 건가요?”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흐음, 그렇군요. 그럼 한가지 더? 엠브로스 기사단은 월급이 좀 많겠지요?”
“예? 아, 뭐….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괜찮은 편이 어느 정도인데요?”
“그러니까… 에… 1급 용병이 평균적으로 버는 수준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윙겟경이 내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주려고 애썼지만, 용병 세계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알 수 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아까 듣기로는 1급 용병들은 선금으로 금화를 받는다고 했으니 꽤 받는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그래요? 좋군요. 좋아요, 제프리 찬탈, 몰래 백작가의 서재에 잠입한 죄, 그리고 엠브로스 가문
사람을 죽이려 한 죄에 대한 처벌을 내리도록 하지요. 우선, 기사단으로 복귀할 것.”
“예? 그게… 처벌입니까?”
제프리가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에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당연하죠. 망가진 얼굴때문에 기사단을 버리고 나간 것 아닙니까? 내 생각에는 꽤 심한
형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거기다가 그게 끝이 아니거든요. 두번째는 이번 수도에 갈때 동행
하도록 하세요.”
“윽….”
내 친절한 설명에 제프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브스햄, 엠브로스 양의 얼굴을 치료하러 갈때 제프리 찬텔도 같이 동행 시키세요. 그리고
거기에 드는 비용은 엠브로스가에서 빌려주는 형식으로 하겠습니다. 매달 이자는 10% 씩 해서
다 갚을때까지 제프리 찬텔의 월급에서 50%씩 차압하도록 하세요. 제프리 찬텔, 당신은 평생이
거리더라도 그 돈을 다 갚을때까지 기사단직을 수행해야 할 겁니다. 혹여 오랜 세월동안
기사단에서 빠져서 실력이 현저하게 낮아졌다면 중노동을 시켜서라도 돈을 다 받아낼테니
실력을 크게 키우는게 좋을겁니다. 이브스햄은 이와 같은 내용이 들어간 저 자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해서 저에게 가지고 오세요. 이런 일은 직접 문서로 남겨두는 게 좋겠죠?”
줄줄이 내뱉는 내 선언에 앞에 있던 이들이 놀라움으로 눈을 휘둥그래 떴다.
“…. 허, 허허허… 허허허허… 이거 참… 왠지 백작님이 무섭게 느껴집니다만… 알겠습니다. 곧
계약서를 작성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브스햄의 얼빠진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이 심히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내가 또 입을 떼자 사람들은 뭔 이야기를 할까 긴장한 눈으로 – 특히 제프리 찬텔이 – 나를
주시했다.
“엠브로스양, 아까 말씀하시길 제프리 찬텔과 같이 벌을 받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아, 예에…”
무지 긴장했는지 그녀가 두손을 마주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나타나기 전에는 백작 작위를 이어받기 위하여 여러가지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사실입니까?”
“네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만족스럽게 바라본 나는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럼 당신은 치료를 받고 난 후 제 보좌관으로 임명하겠습니다. 설마 얼굴이 망가졌다는
이유 하나로 기껏 받은 교육을 썩힌 채 수나 놓으면서 빈둥빈둥 놀면서 지내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제가 용납 못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혹여 실력이 낮다고 생각한다면 치료와 공부를 병행
하시는게 좋겠지요. 만약, 당신이 형편 없다 생각되면 서류 정리만 죽어라고 시킬테니 각오
하십시오. 대신, 월급은 드리겠습니다. 물론, 당신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높아질테지만, 낮다면
그만큼 월급도 낮아질겁니다.”
“네, 네!”
“이브스햄, 엠브로스양에 대한 이와 같은 계약서도 같이 작성해서 가지고 오도록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좋아요. 제 판결은 끝이 났습니다. 윙겟경은 즉시 제프리 찬탈을 기사단쪽으로 인도해 가시고,
벤자민 엠… 아, 그렇군요. 두 부자는 성부터 새로 정하셔야겠군요. 오늘 하루는 여기서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돌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전까지 새로운 성을 마련해서 기록하고 가시구요.
질문 있습니까?”
“어, 없습니다.”
“저, 저도…”
이브스햄과 벤자민이 벙찐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모두 나가보세요.”
내 축객령에 다른 사람들이 엉덩이를 소파에서 떼려고 하는데 에르미아 엠브로스가 가만히
손을 들어 나를 불렀다.
“저, 저기… 백작님.”
“네?”
“괜찮다면 오늘부터 일하고 싶은데요? 저기… 백작님 의향은 어떠실지…”
거절 당할까봐 주저주저 말하기는 하지만, 일에 대한 의욕이 있다는 건 마음에 들었다.
“저야 보좌관이 금방 생기는 게 좋기는 하지만, 비실대는 보좌관은 싫습니다. 그 마음은 고맙지만
혼자 잘 걸어다닐 수 있을때까지 참고 계시는게 좋을 듯 하군요. 그때까지는 이브스햄이
엠브로스양 역할을 해줄 겁니다.”
“네에…”
푹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향해 빙긋 웃고는 나는 다시 한번 축객령을 내렸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들 보세요.”
그에 이제야 정말 사람들이 슬금 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명에 따라 진 윙겟 경도 제프리 찬텔을 데리러 내 뒷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슬쩍 내 귓가로 얼굴을 가져다 대더니 작게 속삭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에 나는 싱긋 웃어보였다.
“별말씀을…”
고위 신관을 만나 뭔가 부탁을 하려면 큰 돈이 들어간다고 들었다.
제프리 찬탈이 그 돈을 갚으려면 아마 반 평생 뼈빠지게 고생좀 할 터였다.
그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나서 평화로운 며칠이 흘러갔다.
나는 여전히 이브스햄과 엘버트 집사의 도움으로 영지에 대한 파악을 하고 있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브스햄과 조엘에게 벨레니 국가의 귀족 사회와 정계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태어날때부터 귀족가에서 태어나 착실하게 그 세계에서 교육받고 자라온게 아니라서 그런지
이브스햄은 날 왕성으로 보내는 걸 엄청 걱정했다.
그나마 조엘이 옆에 있어줘서 나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한 건 아니었던지 틈만 나면 날
붙잡고 귀족 사교계와 정치 세계에 대하여 설교를 늘어 놓았다.
웃긴건 그런 이브스햄과 조엘이 완전 쿵짝이 잘 맞아가지고 나중에는 아예 이브스햄이 날
붙잡고 설교할때는 조엘도 같이 합석하는게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한 일주일 정도 더 지나고 나자 대충 교육시킬건 다 시켰다고 봤는지 이제는 은근히
왕성으로 출발했으면… 하는 눈치를 보였다.
원래는 영지에서 작위 수여식을 한 다음 – 아니면 전대가 죽으면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
될 수 있는한 빠른 시일 내에 (보통 일주일 내외에) 왕성으로 향하는게 보통이었다.
뭐, 언제까지 꼭 와야 한다고 기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왕에게 정식으로 충성 맹세를
하기 전까지는 작위를 완전히 받았다고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서두르는 거였다.
늦으면 늦어지는 만큼 정식으로 작위를 가진 귀족으로써의 활동도 늦어지니까 말이다.
만약 정계에 진출할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늦어질수록 손해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브스햄의 걱정도 있었고, 또 작위 수여식 파티때 일어났던 자그마한 소동 처리도
있고 해서 일주일이 훨씬 넘는 시간동안 왕성으로 출발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나고, 한달이 가까워지게 생기자 날 보내는 걸 걱정하던
이브스햄이 이제는 너무 늦는게 아닌가 싶어 걱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 어느날은 단도직입적으로 나에게 왕성행에 대해 운을 떼었다.
“이제 슬슬 가셔야 할 때가 아니신지요?”
“어딜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묻자 이브스햄의 얼굴이 굳어졌다.
“왕성 말입니다. 설마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조엘 자작이 계속
이 곳에 머물고 계시는 것 또한 백작님과 같이 왕성으로 가기 위해서라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아, 그랬지요.”
“보통 귀족이 작위를 받게 되면 벌써 출발해서 왕성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겁니다. 백작님은
너무 늦으셨어요. 그러니 이제 출발 하셔야지요.”
“급할 것 없잖아요? 어차피 기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라면서요.”
“급할 게 없다니요. 사실 생각 같아서는 파티가 끝나자마자 왕성으로 출발시키고 싶었다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우리 엠브로스가문으로써는 요즘 시기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요.”
엠브로스 가문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그저 작위만 가진 지방 영주에
불과한 가문이었다.
그러나, 전 엠브로스 백작이 친여왕파에 가담하고 친여왕파가 몇년 전 노예 매매상들을 싹
쓸어버리는 걸 계기로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을때 드디어 중앙 진출에 대한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중앙 진출하여 권력을 가지게 되는 건 모든 귀족들의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지방 귀족에게는 그 꿈을 이루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걸 가능하게 한 사건이 바로 몇년 전, 그러니까 내가 집에서 가출하다가 노예매매상에게
잡혀 팔려가기 직전 조엘과 만나게 했던,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펼쳤던 노예매매상 척결
사건이었다.
전 국왕의 외동딸이었던 현 여왕이 왕위로 등극할 때에는 나이가 불과 15세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녀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의 숙부였던 공작이 섭정을 펼쳐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권력을 차지하는 이들은 모두 숙부의 측근들이었고 말이다.
원래는 여왕이 성년이 되면 그가 물러나야 했지만, 사람의 심리가 어디 그렇겠는가?
섭정을 펼치던 숙부는 여러가지 핑계, 또는 그가 장악하고 있는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물러나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왕은 그를 물러나게 하기 위하여 뒤로 힘을 모았지만, 굵직 굵직한 중앙 귀족들은
이미 숙부의 측근들이라 힘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조엘의 아버지인 멕알파인 공작과 전 국왕의 측근이었던 렝포드 후작 – 조엘과 만났을
당시 작전 지휘를 하던 렝포드 자작이 그 후작의 아들내미였다. – 그리고 혜성처럼 나타나
벨레니 국가 최연소 소드 마스터로 이름을 날리는 리건 블랜차드라고 하는 후작이 여왕의 측근이
되어 주면서 그제서야 친 여왕파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세 귀족은 친 여왕파의 세 기둥이며, 그녀의 가장 큰 측근이자 신임을 받고 있어서 굵직
굵직한 자리를 하나씩 꿰어 차고 있다고 한다.
하기야, 조엘 아버지만 봐도 그가 재상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큰 자들이 여왕에게 붙어 세력이 커졌지만 – 이때 우리 엠브로스
백작가도 친 여왕파에 들어갔다. – 정권을 잡고 있는 건 여전히 여왕의 숙부와 그 측근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한꺼번에 제거하기 위해 노예매매상인의 척결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국법으로는 금지하고 있지만, 능력있는 자들이 뒤쪽으로는 다 가지고 있다는 걸 이용한 것이었다.
거기다가, 그녀의 측근들은 노예를 소지하고 있지 않았고 말이다.
나중에 이브스햄이 털어놓기를, 원래 우리 가문도 중앙에 진출해 있는 꽤 큰 가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내 외할아버지인 오스번 엠브로스 백작께서 내 어머니를 친딸로 인정하고 데리고 있는
바람에 그 일로 인하여 거의 왕따가 되다시피 해서 중앙에서 물러나 지방 귀족이 된 거라나?
그런 상황이었으니 이브스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여왕의 숙부측에 붙지는 못했을 거라고 했다.
지금으로써는 그게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지만 말이다.
그 노예 매매상인 척결 사건때 엠브로스 백작가도 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서서 크고 작은 공들을
세웠기에 여왕의 신임을 받아 드디어 중앙쪽으로 진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게 바로 몇년 전 이야기인데, 아직 중앙쪽에다 탄탄한 기반을 잡기전에 내가 덜컥 백작이
되어버린 것이다.
원래 이브스햄은 아직 미미할 때 자신이 기반을 잡기 보다는 아예 딸에게 물려줘 그녀가 확실한
기반을 잡아 정권에 진출하거나, 아니면 거기서 큰 가문의 남자와 엮어 명실공한 중앙 귀족으로
굳어지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벤자민 엠브로스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를 빠드득 가는 폼을 보니, 내가 용서해줬다고 해도 앞으로 벤자민 부자가
쫌 고생을 할 듯 싶었다.
자업자득이긴 했지만, 이브스햄과 벤자민 사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나에게는 유익이었다.
뭐, 지금에와서 이야기지만, 사실은 그 두 부자를 살려준 이유가 이브스햄을 견제하기 위함
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크게 작용하기는 했지만, 그 밑에는 그 두 부자를 죽이고
이브스햄 부녀를 그냥 놔두었다가는 만약 에르미아 엠브로스가 자식을 낳았을 경우 그 애를
백작으로 세울 계획을 또 꾸미지 않는다고 단언을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이야 에르미아를 구해줘서 나에게 고마워하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언젠가 변하는 거
아니겠는가?
그러나 만약 벤자민 두 부자를 지위를 보장하고 나둔다면 이브스햄과 그 두 부자 사이는
견원지간이 될 테고, 만약 이브스햄이 뭔가를 꾸민다면 두 부자는 든든한 내 아군이 되어줄
터였다.
비록 서류상으로 보기만 한 거지만, 벤자민은 꽤나 현명한 자였으니 그런 상황에서 꽤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 거다.
게다가 그 둘에게서는 엠브로스란 성을 앗아버렸으니 백작이 되려할 꿈도 버렸을 거고 말이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그 둘은 서로를 견제하며 나에게 더 잘보이기 위해 애쓸테니 이러나
저러나 나에게는 이익 아닌가?
으음, 이렇게 말하니 나도 엄청나게 나쁜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솔직히, 이건 나중에 곰곰히 생각하니까 떠오른 거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조금만 더 있다가 출발할게요.”
“언제요?”
“글쎄요… 하지만, 슬슬 출발 준비는 시작하고 계세요.”
“하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으시며 안됩니다.”
내 말에 이브스햄이 그쯤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고 귀찮아서 미루고 있는 건 아니었다.
뭐, 사실 아직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이 추운 겨울에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기는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잽싸게 제일 가까운 지부로 달려간 잭슨 녀석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벨레니 국가에는 아직 지부가 진출하지 못해서 국경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더니 정말 오래 걸렸다.
그가 돌아 와서 레이언 녀석과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떠나려고 했던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내 능력으로 잽싸게 다녀오고 싶었지만, 아무리 나라도 며칠 이상이 걸리는
거리인데다가 그 동안 여길 비워놓는 걸 이브스햄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할지 마땅치도 않았다.
아직 이브스햄에게는 내가 상회 사람이라는 걸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으음, 그러고보니 첼릿에게도 말 안 했네. 나중에 서운해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만약 그 이야기를 했다간 둘다 똑같이 당장 그만 두라고 펄펄 뛸거라고 짐작 되지만 말이다.
정 오래 걸리면 잭슨에게 천천히 다녀 오라고 하고 나도 왕궁에 갔다와서 만나면 될 게 아니냐고
묻고 싶겠지만, 왕성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기 때문에 이리 서두르는 거였다.
그렇다고 수도로 찾아 오라고 그럴 수도 없고…
그 동안은 이브스햄이 나에게 여러가지 교육(?)을 시키느라 그가 보내주지 않아서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가 직접 보내려고 하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전에 부디 잭슨이 돌아와줘야 할텐데…’
그러나 잭슨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날로부터 5일이 더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쯤 되자 이브스햄의 빨리 출발하자는 압력도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백작님, 출발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엠브로스양은?”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회복되어 이제 장거리 여행도 괜찮을 거라고 합니다. 더욱이
마법사도 같이 동행을 하니 염려 놓으셔도 될 겁니다.”
‘그러니까, 마법사 보다는 의원이나 약사가 더 도움이 될텐데…’
여전히 의원이나 약사를 마법사보다 아래로 보는 이브스햄의 고정관념에 한숨이 나왔지만,
내가 뭐라고 한다고 해서 고쳐질 것도 아니라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러니 이제 출발 하셔야죠?”
“그렇군요. 그럼 날씨 좋은 날을 선택해서 출발하도록 하죠?”
내 말에 이브스햄의 얼굴이 환히 펴졌다.
“요즘 날씨가 계속 좋았으니 내일도 좋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내일 출발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내일이라… 나쁠 건 없겠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이브스햄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 동안 계속 미뤄 왔는데 이제와서 선선히 그러겠다고 하니까 기다리던 대답이긴 했지만,
오히려 믿겨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정말이십니까?”
“어? 나쁜가요?”
그의 말에 내가 장난스레 되묻자 그가 얼른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아닙니다. 나쁘다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알겠습니다, 내일이란 말이지요?”
몇번이나 다짐을 받은 그는 내가 마음이 변할새라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혀를 쏘옥 빼물었다.
‘가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나쁘지 않다고만 했지.’
이러한 내 모습을 뒤에서 다 지켜보고 있던 첼릿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해인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죠?”
그의 말에 나는 생긋 웃어 보였다.
“나쁜 생각.”
날짜를 미루는 게 힘들다면, 아예 출발할 수 없게 만들면 된다.
이번 여행의 중심 인물은 바로 나, 이런 내가 없어진다면 왕성으로 출발 할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이렇게 잭슨이 늦을 줄 알았으면, 차라리 여기에 큰 소동이 벌어지더라도 처음부터 내가 직접
나서서 그를 찾아가는 게 나았을 거였다.
잭슨이 여기로 오는 중이라면, 늦어도 며칠 안에는 그와 조우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아무 소동 없이 무난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면 더없이 만족스러웠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이런 내 생각을 알아차린 것일까?
첼릿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발 엉뚱한 생각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런 그에게 빙긋 웃어보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자, 이 이일을 듀비에게도 알려 줘야지.”
듀비는 현재 내 곁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벤자민 부자와 제프리 찬텔에 대한 판결을 내린 날 저녁, 듀비의 실력을 높이 산 첼릿이 그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던 것이다.
둘 모두 이 곳에서는 최강으로 손꼽히는 – 물론 둘 중 듀비가 더 강하지만, 첼릿도 기사단에서는
첫번째로 꼽히는 실력자였다 – 실력자이므로 항상 둘 모두 내 곁에 붙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거였다.
사실, 내 자신도 스스로의 몸쯤은 지킬 수 있는데다가, 여기서는 날 위협하는 위험 같은 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듀비와 첼릿은 하루를 둘로 나누어 교대로 내 곁에 있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스스로를 위한 수련을 하고 말이다.
그 제안은 사실 첼릿 스스로를 위한 제안이었다.
첼릿은 그 동안 자신 정도라면 이 나라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라 자부하고 있었기에 수련도
전보다는 약간 게을리 하고 있었는데, 듀비에게 한번 꺾인 이후로 자부심도 같이 꺾여져
더욱 더 수련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거렸다고 한다.
그런데 내 호위기사로 있는 바람에 한시도 내 곁에서 떨어질 수 없었으니 수련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조엘의 심복이자 호위 기사인 데니형 같은 경우에는, 조엘 스스로가 시간 있을때마다 몸을 단련
했기에 그 시간에 데니 형 또한 수련을 할 수 있었지만, 나는 몸을 단련하는 걸 아예 포기해
버렸으니 첼릿이 생각할 시간이라고는 내가 잠들어 다른 기사들이 내 침실을 지켜줄 때 뿐이었다.
하지만, 듀비와 교대로 한다면 듀비가 내 곁에 있는 동안 수련 하는 게 가능했다.
듀비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던 터라 기꺼이 수락되었고, 그 둘은 하루씩 번갈아가면서 내
곁을 지키기로 했다.
내 생각으로는 수련을 한다고 하면 최소한 며칠 정도는 계속 그에 몰두해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 둘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뭐라 그러겠는가?
그 둘은 나보다도 그쪽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잘 아는 이들인데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듀비가 수련을 하고 첼릿이 내 곁을 지키는 날이라, 듀비는 지금 성 옆에 있는
숲에 가 있었다.
정글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살아오면서 검술을 습득했기 때문인지, 연무장을 이용하는 첼릿과는
달리 듀비는 숲속에 자리를 잡고 거기서 수련을 했다.
“어차피 새벽에는 돌아올텐데요. 그때 이야기해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럴수는 없었다.
새벽에 출발할 예정이니까.
“산책겸 한번 가보죠 뭐. 정 몰두하고 있으면 그냥 오고요.”
내 말에 첼릿은 아무 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숲으로 가는 방향에는 기사들 전용 연무장이 있었다.
“하앗~!!”
“하앗~!!”
오늘도 그 곳에서는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오며 열심히 훈련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숲으로 가는게 급한 일은 아니었던 터라 연무장이 가까워지자 나는 발걸음을 늦추며 연무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같이 그쪽으로 시선으로 돌리던 첼릿이 입을 열었다.
“아, 오늘은 수련 기사들이 하는 날이군요.”
“그래요?”
수련 기사들은 아직 정식 기사가 되지 않은 상태로 기사단에 있는 사람들을 말했다.
기사 학교를 졸업 하거나, 아니면 뛰어난 자질을 가진 것이 인정된 사람들을 뽑아 기사단에서
2년 이상의 수련 생활을 하고나면 나중에 정식으로 기사의 작위를 받을 수 있는게 정석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수련 기사 과정을 겪어야 하는 건 귀족이던 평민이던 상관 없이 기사를 목표로 하는 모든 이들의
의무였지만, 수련 생활이란 한마디로 기사의 시종 노릇을 하는 거였으니 권력 있는 귀족들이
자신의 자제들에게 그런 일을 시킬리가 없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보통 기사 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연스레 귀족 작위를 받게 되고 수련 기사가
되는 사람들은 힘 없는 귀족이나 평민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수련 기사가 되면 기사들이 훈련 받을때 같이 훈련을 받지만, 이렇게
그들만 모아 놓고 기사들이 지도를 해주는 날이 며칠에 한번 씩 따로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던 모양이다.
연무장 높은 지대에는 윙겟 경이 몇몇 고참 기사들과 지켜보는 가운데 기사들이 수련 기사들을
한명씩 맡아서 지도해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자식아, 검술을 똑같이 흉내 낸다고 그게 다 되는 줄 아냐? 네걸로 만들어야지, 네 걸로!”
멋드러지게 검법을 선보이고 만족해서 히죽 웃어보이는 수련 기사에게 그를 맡고 있던 기사가
엄한 목소리로 질책을 던졌다.
“야,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잖아! 너 도대체 학교에서 뭘 배워 온 거야? 그것도 제대로 못해?
다시!”
“옙!!”
내가 보기에는 잘 하고 있는 듯 보이는데, 지도해주는 기사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기사의 질책에 수련 기사가 잽싸게 처음부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너 이작식, 그 동안 놀고만 있었냐? 검 하나 제대로 못 다뤄? 네가 검을 휘둘러야지, 너가 검에
휘둘리고 있잖아!! 그만!! 안돼겠어, 이 자식. 풋샵 50회 실시!!”
“실시!!”
한쪽에서는 기사의 호령에 수련 기사가 잽싸게 엎드려 우렁찬 구령을 붙이며 팔을 굽히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빨리빨리 못하나?”
“넷, 다섯, 여섯…”
‘으음… 역시 기사가 안 되길 잘한 듯…’
무지 엄격해 보이는 모습에 몸을 한번 부르르 떨며 시선을 돌리는데, 연무장 한쪽 구석에 아무도
지도해 주는 이 없이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눈 주위와 콧등, 그리고 뺨 절반을 가려주는 검은 가면을 쓴 그는 주위의 소란에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묵묵히 가검을 들고 정면 내려베기를 하고 있었다.
“제프리 찬탈이군요.”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안 첼릿이 입을 열었다.
그는 흉악한 얼굴을 남에게 절대로 안 내보이려고 했기에 항상 모자나 망토를 두르고 있게 할
수는 없어서 가면을 쓰고 있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적응은 잘 해가고 있나요?”
“진의 말에 의하면 수련에 몰두해 있다고 합니다. 다른 기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게 좀 걱정
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차차 나아지겠죠. 갑자기 잘 어울리기는 힘든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군요. 실력은 어때요?”
“기사단에서 나가기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세상을 떠돌아 다니면서 경험이
쌓인 탓이겠죠. 그는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검사로써는
오히려 잘 된 일이겠죠. 검에만 몰두할 수 있을테니까요.”
“어쨌든, 저 사람도 얼굴이 치료됐으면 좋겠는데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제프리를 힐끗 바라보며 숲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찰나, 저 멀리서
누군가가 열심히 나를 부르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백작님~ 백작니이이이임~~”
내 시종으로 배정된 켈빈이었다.
그는 얼마나 열심히 뛰어 왔는지 내 앞에 도착해서 말도 못 꺼내고 한참동안이나 헥헥 거리는
거였다.
그가 숨을 다 고를때까지 기다린 나는 켈빈이 겨우 몸을 똑바로 세우자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켈빈?”
“손님이 오셨어요. 그 왜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지신 잘생기신 분 있잖아요?”
내가 아는 사람 중 연보라색 머리에 잘 생긴 얼굴을 가진 이는 딱 한 사람 밖에 없었다.
“드디어 왔군. 그래, 지금 어디 있지?”
“응접실에요.”
켈빈의 말을 들으며 급하게 발걸음을 옮긴 나는 성에 도착해 응접실 문을 박차듯 열고 들어가며
외쳤다.
“잭슨, 너어어~~ 왜, 왜그래?”
원래는 왜 이렇게 늦어냐고 한 마디 하려고 했지만,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 말은 쏘옥
들어가버렸다.
“여, 여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리며 인사하는 잭슨의 모습은, 한 일주일은 밥을 못 먹은 사람 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온 몸은 먼지 투성이에 피로한 기색이 가득 들어 있었다.
척 보아하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쉬지도 못한 채 열심히 달려왔음이 분명했다.
그런 사람에게 늦었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괜찮냐? 살아 있어?”
“아아… 죽지는… 않았다… 나.. 물, 물좀…”
내가 따로 시종을 부르지 않아도 그때쯤 시녀가 따뜻한 우유가 담긴 대접을 가지고 들어왔다.
잭슨의 꼴을 보자마자 집사가 준비해서 보낸 모양이었다.
잭슨은 그걸 보더니 번개같이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마시는데, 까딱 잘못하다가는 체할 것 같아
겁이 날 정도로 엄청 빠른 속도였다.
“야, 야아… 천천히 마셔. 그러다 체하겠다.”
“꿀꺽, 꿀꺽, 꿀꺼억~ 크하~ 살았다.”
내 우려와는 달리 한 방울도 남김 없이 싸악 마신 잭슨이 그제야 혈색이 도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더 줄까?”
“응. 이왕이면 우유 말고 먹을걸로 줘.”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아아, 정말 힘들었어. 도대체 왠 놈의 거리가 그렇게 먼 거냐?”
시녀가 밖으로 나가자 잭슨이 소파에 털썩 드러누우며 투덜거렸다.
“레이언하고는 연락 됐어?”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묻자 잭슨이 아차 하는 얼굴로 벌떡 일어나 앉더니 자신이 가지고 온,
그와 마찬가지로 엄청 지저분한 가죽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 상자 안에는 왠만해서는 깨지지 않게 솜이 사방에 깔려 있었고, 가운데에는 네모난 받침대에
고이 올려진 내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수정 구슬이 있었다.
받침대와 수정 구슬은 붙어 있는 형태였는데, 그걸 탁자 위에 올려놓은 잭슨은 받침대에 빨간
구술이 박혀있는 쪽이 내 앞으로 오게 하더니 입을 열었다.
“자, 네가 마법을 할 줄 알아서 마법사는 안 데리고 왔어.”
“이게 뭔데?”
“뭐긴 뭐야? 통신용 구슬이지. 너무 거리가 멀어서 화면은 안 뜨고 소리만 들릴 거야.”
“오오, 이게 통신용 구슬이야?”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 나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그걸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며
살펴봤다.
얼만큼 능력 있는 마법사가 만들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꽤 좋은 것들은 한 나라 안에서
-물론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까지는 안되겠지만서도 – 영상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국경이 바뀌면 영상을 보이는 건 힘들고 이야기만 나눌 수 있다고 한다.
그런 통신용 구슬들은 각각 한 세트로 있어서 같은 세트의 구슬들 끼리만 주고받을 수 있지
다른 걸로는 연락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다른 걸로도 연락 가능하다면, 자기가 연결되고 싶은 상대 말고도 다른 상대와 연결되는 수가
종종 있지 않겠는가?
“거기 빨간 구슬 보이지? 거기에 빛이 나올때까지 마나를 주입하고 이야기 하래.”
“누가 받는데?”
“통신 담당 마법사겠지. 본부 직통이니까 누군가가 받으면 레이언 대라고 하면 돼. 아, 마나는
계속 주입해줘야 한댄다. 빛이 꺼지면 연락이 끊어진대.”
“알았어.”
그때 음식을 가지고 온 시녀가 도착하여 우리는 대화가 잠시 끊겼다가 시녀가 나간 뒤에야
나는 통신용 구슬을 탁자위에 놓고 마나를 주입했다.
약 2서클에 해당하는 마나를 주입하자 그제야 빨간 구슬에 빛이 들어왔다.
“이제 이야기 하면 되는 거야?”
그 빛을 확인하고 내가 잭슨에게 묻자 잭슨의 대답 대신 구슬로부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네? 여보세요? 거기 누구십니까?]“아앗, 네, 네. 베지테크스 상회 본부입니까?”
[네, 그런데요? 본부 사람이라면 등급과 이름을 대십시오.]등급이란, 무슨 패를 가지고 있느냐를 말하는 거였다.
나는 은패를 가지고 있었기에 은 등급이었다.
“아, 저는 은등급의 해인 오스번이라고 합니다. 레이언 베지테크씨를 뵙고 싶은데요.”
[잠시만요, 신원을 확인하겠습니다. 은등급, 은등급이라… 아, 예. 여기 있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 말소리가 끊겼다.
“오, 뭐야. 여기는 신원 확인도 하냐?”
내가 구슬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녀가 가지고 온 오트밀을 열심히 퍼먹던 잭슨이
대꾸했다.
“당연하지. 아무나 바꿔주는 줄 알아?”
“그래봤자 등급하고 이름만 확인하네 뭘… 딴 사람이 등급하고 이름을 알아내서 연락하면
어쩔껴?”
내 물음에 잭슨은 다시 오트밀 그릇에 얼굴을 박고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모르지. 난 통신 담당이 아니니까.”
잠시 후 구슬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해인, 너 해인이냐?]“오옷, 크리스? 레이언이 안 나오고 왜 너가 나오는 건데?”
내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나 여기 있어.]“그래? 어쨌든, 둘 다 잘 있었냐?”
[우리야 잘 있지. 그러다가 네 소식을 듣고 엄청 놀랐다. 너 백작이라면서?]크리스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지.”
[하기야, 주디스 오스번님의 인간 아버지가 귀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거 같아. 아마 그쪽이겠지?]
“응, 정확하게 말하면 벨레니 국가의 엠브로스 백작이셨지.”
[그래, 어쨌든 네가 상회를 탈퇴하지 않는다는 건 고마운 일이야. 우리도 슬슬 그쪽으로 진출을해볼까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아.]
기대어린 크리스의 말에 나는 삐질 웃었다.
“기대를 깨서 미안한데 크리스, 엠브로스 백작가는 중앙 귀족이 아니라서 아마 큰 도움은 못
될거야. 이제 슬슬 진출하려고 하기는 하지만 내가 잘 할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러자 레이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씀? 네가 어때서? 넌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사실 네가 중앙 귀족이던 지방 귀족이던우리로써는 귀족과 친하다는 건 엄청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너 혼자 어떻게 할 필요도 없어. 비록 나라가 다르지만, 우리상회의 정보력은 그 나라까지 뻗어 있거든. 네가 우리 상회를 탈퇴하지 않는 한 우리가 널 힘껏
도와주마.] [바로 그거야. 그까짓 중앙 귀족? 걱정마, 걱정마. 우리가 팍팍 밀어주고 끌어주고 응원해줄테니!
이 레이언 베지테크스를 믿어 보라고!] [확실하게 자금력은 대줄테니 걱정 마라. 우리 상회 재력이라면 큰 도움이 될 거다.]
둘이 번갈아가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 둘이 너무 든든하게 느껴진다는 거였다.
“아하하.. 그렇게까지 도와줄 건 없는데.”
[무슨 소리? 너 같은 인재에게 이 정도 도움은 당연한 거지. 거기다 우리도 그만큼 네 배경을써먹을테니 빚을 진다고는 생각하지 마. 투자한 만큼 뽑아낼 거다.]
크리스의 덤덤한 말에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어디 잘해봐라.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지금은 네가 중앙으로 진출해서 자리를 확실하게 잡는 것만 생각해. 어중간한 위치에서 상회일도 같이 하려다가는 둘다 안되는 수가 있으니까 하나씩 확실하게 하자고. 우리나 너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아. 게다가, 벨레니국으로 진출하는 건 생각만 하고 있었지 아직 어떻게 하자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거든. 우리도 이제부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착실하게 모으고 계획을 짜야지.
하지만, 우선은 널 명실공한 중앙 귀족으로 만드는 것 부터 시작될 거 같다.]
“그렇구나. 아, 그럼 연락은 어떻게 할건데?”
[생각 같아서는 잭슨을 너에게 붙여주고 싶지만, 이제 곧 봄이잖아? 상회가 또 바빠질 시기라잭슨같은 녀석이라도 절실할 때라서… 어느정도 체계가 잡힌다면 우리가 먼저 너에게 소식을
보낼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최대한 빨리 연락할께.]
“내가 언제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우리 상회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말라니까. 우리에게 벨레니 국가에서 엠브로스 백작 찾는 건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그래, 알았어. 그럼 나는 이쪽 일에 전념하도록 하지.”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자, 레이언의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인아, 우리가 연락하기 전에는 상회 일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돼, 알았지?네가 그쪽 일을 잘 해나가는 건 우리 상회에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너는 예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베지테크스의 사람이야. 아, 그러고보니 이 소식 안 알려줬지?]
“무슨 소식?”
[너 이번 해부터 금 등급으로 올랐다. 그랜드마 지부에서 한 일 덕분인줄 알아.]“아하하, 그러냐? 그럼 월급은 꼬박꼬박 줄겨?”
내 농담에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챙겨놓고 있으니 걱정 마라. 레이언 녀석이 약속한 보너스까지 벌써 계산해놨다.]“아하하, 대단한걸? 나중에 받을 돈이 크겠어.”
[그래, 기대하고 있으라고. 나중에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해라.]크리스의 말에 이어 레이언의 말이 들려왔다.
[잘 있어. 아, 그리고 그 통신 구슬은 잭슨 녀석보고 가지고 오라고 했으니까 잘 챙겨주고.나중에 만나면 백작님이라고 해야 하나?]
“됐네요. 그런 호칭으로 불리고 싶은 마음 별로 없어. 어쨌든, 나중에 만나자.”
[그래]레이언의 대답으로 통신이 끊겼다.
그러자 벌써 음식을 싹 해치운 잭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겠다, 벌써 금 등급이라니. 쳇, 나는 언제나 거기까지 올라가나?”
“후후, 부럽냐? 아아, 사실은 네가 늦어가지고 너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예정대로 나는 내일 출발해야겠는걸? 너는 내가 여기에 이야기를 해놓을테니 있고 싶은 만큼
있다가 가도록 해.”
내 말에 잭슨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도 없는데 내가 무슨 재미로? 아, 그래 나도 내일 쫓아가련다.”
그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엥? 그럼 너도 여기 수도로 가려고?”
“수도까지는 가지 않고, 길이 같은 곳만 가려고. 너랑 같이 가면 편하게 이동할 거 아니냐?
아무래도 백작께서 이동하시는 건데. 상회에는 봄이 되기 전까지만 도착하면 되니 시간은
좀 널널해서 괜찮아.”
“그래? 그럼 너 좋을 대로 해라.”
“그러지. 아, 나는 이만 자러 갈란다. 내일 아침까지 계속 잘거니까 저녁 먹으라고 깨우지 마라.
대신, 아침은 푸짐하게 차려놔.”
입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을 하는 잭슨 녀석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자라.”
다음 날, 성의 앞마당에는 엠브로스가의 문장이 새겨진 고급 마차 여러대와 짐 마차, 그리고
기사들을 위한 수십마리의 말이 몰려들었다.
“그러니까… 기사단도 같이 간다고요?”
나는 오늘 아침에야 들을 수 있는, 이번 왕성행의 일행의 규모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당연한 일입니다. 백작님을 호위 해야죠. 하지만, 왕성의 규칙상 다는 못가고 일부만 갑니다.”
“허어…”
나는 기껏해야 나와 나를 호위할 기사 몇명, 그리고 이브스햄과 그녀의 딸을 위한 기사 몇명,
나와 그 기사들의 시종, 그리고 이브스햄과 에르미아를 위한 시종 몇명… 그러니까 다 합해봐야
20명쯤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에르미아양이 있으니 그 정도는 허용해 줘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건 기사단장 윙겟을 비롯해 호위 기사만 30명이었다.
거기에 사병에 시종들에 에르미양을 위한 시녀에 짐꾼들까지 합하니 숫자는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뭔 짐이 그리도 많은지, 짐마차가 사람이 타고 가는 마차의 두배였다.
조엘이 이 영지에 들릴때 데니 형만 동행하고 와서 다행이었지, 조엘까지 형식을 갖춰서 왔다가는
수도로 돌아가는 일행은 이보다 더 불어 있을 거였다.
성 앞마당에 와글와글 모여있는 인원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자 조엘이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였다.
“후후후, 제가 딸랑 둘만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계셨죠?”
“족집게시군요. 이거야 원 너무 거창해서… 어디 외출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뭐, 사적인 외출은 이정도 까지는 아니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지금은 공적인 외출이라서 그러는
거랍니다. 거기다가 국왕의 공식적인 나들이에 비하면 약소한 거라고요.”
“하아….”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분주하게 출발 준비를 하는 일행들 속으로 한번 파고들었지만, 모두들 그에
대비에 두툼한 망토를 걸치고 있었기에 추위를 타게 하지는 못했다.
나 또한 이브스햄이 부랴부랴 마련해준, 안쪽에 부드러운 털이 그대로 달린 고급스러운 망토를
걸치고 있었기에 크게 춥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털의 느낌이 좋아서 나는 아까부터 은근슬쩍 손등을 털에 대고 부비고 있었다.
많은 시종들이 달라붙어 분주하게 움직인 덕에 잠시 후에 출발 준비가 다 되었다.
이브스햄과 그의 딸, 그리고 그녀를 위한 시녀들과 백작가의 마법사인 엘버트가 마차에 오르고
모든 기사들이 말위에 오르자 나도 나를 위해 준비된 새하얀 백마 위로 올라갔다.
원래는 나도 마차를 타고 편안하게 가고 싶었는데, 조엘이 말을 타고 가는 바람에 손님이
말을 타고 가는데 주인이 마차를 타고 갈 수가 없어서 반 강제적으로 말을 타고 가게 된
것이었다.
조엘이나 데니 형이야 기사 수련을 받은 사람들이고, 여기 올때 말을 타고 왔으니 갈 때도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그가 그러는 거에 나까지 영향을 받는다는게 좀 황당하기는 했다.
뭐, 이브스햄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마차를 타고 가게 되었지만…
“오, 그렇게 하니까 귀족 같다.”
내 옆에 준비된 말에 오른 잭슨이 쿡쿡 웃으며 속삭이자 나는 입술을 비쭉였다.
“뭐냐, 옷만 잘 차려입은 거 뿐이잖아. 그럼 고급 옷 입은 사람들은 다 귀족으로 보이냐?”
“아니지, 너는 원래 얼굴이 말끔해서 그런지 은근히 귀티가 났으니까.”
“남말하고 있네. 너는 안 그러냐? 아, 너 그렇게 말해서 은근히 네 자랑 하는 거지?”
“헤헷, 들켰나?”
그렇게 우리 둘이 속닥 거리는중에 윙겟 경의 큰 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출발~!”
그의 외침과 더불어 선두에서 엠브로스 백작가의 깃발과 기사단의 깃발을 든 기사들이 제일
먼저 말을 몰았고, 그 뒤에 선 일행들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행은 순조로웠다.
비록 라센국이나 왈그린 국처럼 모든 길이 잘 닦여있지 않았고, 날은 무척 추웠지만, 그 외에는
우리 일행이 움직이는데 위협이 될 만한 건 없었다.
가끔 인적이 드믄 곳에서는 들짐승들이나 몬스터들이 나온다고 하기는 했지만, 수십명이,
그것도 완전 무장한 기사들이 눈을 부랄리고 있는 일행을 덥칠 만큼 어리석은 이들은 없었다.
일행이 많다보니 속도가 느려서 그 다음 마을에 도착하지 못해 노숙하는 날이 많았지만,
노숙에 익숙한 나였기에 견디지 못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백작이라는 이유 하나로 노숙한다고 해도 두터운 망토를 두르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시종들이 다 알아서 해줬으니, 오히려 전에 노숙하던 것 보다는 훨씬 편했다.
문제는… 기사들과 잭슨의 사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나는 하찬은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잭슨은 며칠 뒤 우리와 헤어질테고, 그가 친한건 나지 기사들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기사들이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가만히 보니 잭슨이 우리 일행에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나와 듀비 뿐이었다.
그나마 듀비는 원래 말이 없으니 천상 나와 주로 대화를 했었는데, 나는 그 말고도 여러 사람들,
그러니까 일행 진로에 대해서 윙겟 경과 계속 이야기를 해야 했고, 조엘이나 이브스햄과도
이야기를 해야 했으니까 잭슨에게 크게 신경을 써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 날도 우리는 날이 저물때까지 마을에 도착하지 못해 적당한 공터를 잡고 야영을 해야만 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잠시 이브스햄과 에르미아를 살펴보고 돌아오던 중, 앞쪽에 있던 잭슨을
발견하고는 반가이 부르려는데, 그 보다도 먼저 잭슨이 옆을 지나가던 기사와 슬쩍 부딪혀
버렸다.
다행이도 강하게 부딪힌건 아니라 누구 하나 다친 사람이 없었고, 둘 다 단련한 사람들이었기에
넘어지지는 않고 약간 몸을 휘청 거리는 정도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런 부딪힘이 있고 난 후 잭슨은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예의상 먼저 그 기사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 괴씸한 기사 녀석이 잭슨의 사과를 받으면 뭔가 대답이라도 해줄 것이지 마치 아무
말도 못 들은 양 그냥 쓰윽 지나치는 것 아닌가?
잭슨을 완전히 무시하고 말이다.
“저저~!!”
아무리 엠브로스 백작이 되었다지만 엠브로스 기사단의 기사 보다는 잭슨을 가깝게 여기고 있던
나였기에 그 즉시 그 기사를 불러 뭐라 한마디를 해주려고 달려가려는데 내 뒤를 따르던 첼릿이
나를 잡았다.
“해인님.”
“첼릿, 설마 지금 저 기사의 편을 들어주려는 건 아니겠지요?”
말리는 기색이 다분한 첼릿의 기색을 알아챈 내가 노골적으로 화를 들어내며 말하는데, 내
말이 조금 컸던지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잭슨이 내 머리를 폭 눌렀다.
“야야, 됐어.”
“돼긴 뭐가 돼? 저런 무례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어떻게 하긴?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지. 넌 엄연히 내 손님이라고. 그런데…”
“그래서?”
흥분해서 막 떠들던 나는 잭슨의 조용한 한마디에 가로막혔다.
“그, 그래서라니?”
“그 기사에게 한마디 하고 나서는 어쩔거냐고?”
“어쩔 거냐니? 당연히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해야지.”
“뭘? 뭘 못하게 해?”
잭슨의 냉담한 반응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방금 전에 당한 일은 잭슨이 아니라 오히려 나 같지 않은가?
“뭐냐니? 널 무시 못하게 하는 거지.”
그러자 그 동안 조용히 듣고 있던 첼릿이 나섰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듯 싶습니다. 잭슨씨도 그걸 알고 계시는 듯 한데요.”
“에?”
내가 그의 말을 이해못해서 되묻는데 잭슨이 씨익 웃었다.
“저 기사분의 말이 맞아. 너는 그냥 가만히 있는게 나아. 내가 네 손님인 덕분이 이나마의 대우를
받는 거라고. 그보다 나은 대우를 받느냐 아니냐는 전적으로 내 능력에 따라 달린 거니까.
너는 그걸 가지고 이래래 저래라 할 수는 없는 거야.”
“물론,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지만… 아까 그건 너무한 거 아니냐? 사과를 했는데
무시해버리다니…”
“그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너와의 친분 없이 저들을 만났다면, 나는 저들에게
함부로 말도 못 걸 처지인걸? 그런 상황에서 아까처럼 부딪혔다면 내가 한대 얻어맞아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그런데 너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활개를 치고 다니니 저들은
날 같은 기사급으로 존중해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낮게 취급할 수도 없으니 무시하는게
최선일 수 밖에.”
“끄응…. 신분이라는 거 꽤 골치 아픈거네…”
잭슨의 말에 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리자 잭슨이 하하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그래, 정말 쓸데없이 골치만 아픈 거지.”
“어휴, 그럼 내가 잘못했나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너 따로 가게 해줄걸…”
내가 후회 막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잭슨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무슨 소리야? 여기에 낀건 내 의지였다고. 네 덕에 편안한 여행을 해왔는데 그깟
무시좀 당한다고 무슨 대수냐? 혼자 여행하는 것 보다 훨 났다고. 뭐, 그나마 그것도 얼마 안
남았다만…”
“미안,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줘야 했는데….”
“네가 미안할게 뭐 있냐? 그리고,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당하기만 하는 멍청이로
보이냐? 걱정 마. 여길 벗어나기 전에 그 녀석들에게 멋드러지게 한방 먹여 줄 생각이니까.”
잭슨은 부기사단장인 첼릿이 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러자 첼릿이 씨익 웃었다.
“어떻게 하실지 기대가 되는 군요. 쉽게 당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약 당한다면 녀석들의
불행이겠죠.”
의미심장한 첼릿의 미소를 보자니, 왠지 잭슨에게 당한 기사들은 그걸로 끝이 아니라 그 뒤에
기사단장과 부기사단장의 분노가 기다리고 있을 듯 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아주 확실한 방법이거든요.”
그 방법이라는 것은 다음 날 저녁에 알 수 있었다.
그 날 우리는 다행이 자그마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곳은 무슨 백작이라는 작위를 가진 영주가 직접 관리하는게 아니라 영주 대리인이 관리하는
곳이었는데 우리 일행이 오자 성에서 몇몇 기사가 나와 정중하게 우리를 초대했다.
성이 없는 마을에서라면 몰라도, 성이 있는 곳에 도착할때면 항상 그런 대접을 받아왔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자연스레 초대를 받아들여 성으로 향했다.
이렇게 하면서 주위의 귀족들과 자연스레 안면을 익힐 수 있는 거라는 이브스햄과 조엘의
충고를 들으면서 말이다.
그래 그들의 말대로 몇몇 귀족들과 얼굴을 익혔지만, 그들은 나보다는 조엘에게 더 큰 관심을
나타냈기 때문에 크게 친해지지는 못했었다.
이번 영주 대리인에게도 별 호감을 느끼지 못한 나는 예의상 대화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주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어두고는 얼른 식사를 끝내고 침실로 물러갔다.
그러자 나와의 친분 때문에 같이 저녁 식사에 참여한 잭슨이 같이 일어나 나오다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해인아, 내일 너희 일행이 출발하기 전에 나는 나 먼저 떠나려고 한다.”
이 성에 도착하기 전에 잭슨이 여기서부터 길이 갈라질 거라고 귀뜸해줬기에 나는 크게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침은 먹고 갈 거지?”
“물론이지. 그래도 너희들은 아침 먹고 준비할게 많을테니, 나는 먼저 갈 거라고. 그래서 말인데…”
“응?”
“오늘 그 기사들 콧대를 눌러주려고.”
씨익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잭슨의 표정에 나도 피식 웃었다.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
“구경가도 될까?”
“안돼. 보려면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봐. 네가 보는데 창피를 당하면 그 기사들이 무안하잖아.
아무리 얄미워도 그 정도 배려는 해줘야지. 지금부터 그 기사들에게 갈테니까 너는 모른체
하라고.”
“어디서 할 건데?”
“마굿간 있는데서. 그럼 간다.”
그러면서 걸음을 옮기는 잭슨의 등에다 대고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해봐라.”
그리고는 잭슨의 모습이 사라지자 나도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첼릿이 아니라 듀비가 내 곁에 있어주는 날이었기에 나는 듀비를 보며 물었다.
“나는 몰래 보러 갈 생각인데, 듀비는 어때요? 같이 갈래요?”
그러자 그도 씨익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그가 어떻게 할지 궁금하군요.”
“좋아요.”
방으로 돌아온 나는 내 시종으로 따라온 켈빈의 시중을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를 얼른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린 후 듀비를 데리고 조용히 창문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비록 잠옷 차림이긴 했지만, 실프들에게 방어벽을 부탁했기에 추위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남의 시선도 말이다.
어차피 듀비와 나는 몰래 살펴보려고 했을 뿐이라 실프들에게 의지하여 허공에 떠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허공에 누군가가 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할 거였다.
우리가 성 뒤쪽에 있는 마구간을 찾아냈을 즈음, 잭슨이 어떻게 했는지 – 아마도 기사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발끈하게 했겠지만… – 분노한 기사들 몇명을 데리고 그 곳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윙겟경과 첼릿이 포함된 몇명의 기사들이 구경꾼으로 같이 있었다.
그런 많은 사람들 속에서 잭슨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허리에 검을 차더니 들고 있던 왠
푸대자루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가, 감자?”
그 뭔가가 감자란 걸 확인한 나는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그건 거기 나온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던 듯 황당해서 잭슨을 바라보는게 보였다.
그들은 아마도 잭슨과 대련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감자를 꺼내들었으니…
잭슨은 감자 세개를 꺼내들더니 말발로 그 이유와 대결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 손님으로 온 거니 기사와의 사이에서 피가 나면 내 입장이 난처하지 않겠느냐는
이유로 대련하자는 기사들의 의견을 묵살시켜버리고 자신의 제안을 당당하게 관철시켰다.
그의 제안은 단순했다.
감자 세개를 베어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기사라면, 아니 검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물체를 베는 연습을 했을 터였다.
그것이 대나무던지, 각목이던지, 집단이던지, 아니면 허공에 던져진 과일이나 채소라던지
말이다.
그렇기에 기사들은 잭슨이 감자를 베는 거라고 말하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어지는 베는 방법을 듣고는 황당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우선 한 발은 앞에, 한 발은 뒤로 놓은 채 앞으로 내민 발 등에 감자 하나를
올려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감자는 검을 드는 손에 쥐고 – 검은 허리에 차고 있는 상태이다. – 나머지 하나는
누군가가 맞은편에서 들고 서 있는 거였다.
그래 손에 들고 있는 감자를 허공으로 던져서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빼어들어 대각선으로
벤 다음 앞으로 내민 발 등에 있는 감자를 허공으로 차 올려 감자의 허리(?)를 베고, 마지막으로
상대방이 던져주는 감자를 베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잭슨이 직접 시범을 보여주는데 세 감자의 몸은 너무나 간단하게 갈라지는 거였다.
그에 그걸 보고 있던 기사들이 우습다면서 자기들도 하겠다고 나섰다.
잭슨이 한번 연습을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너무 자신감에 차 있던 기사들은 그의
권유를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검을 허리에 차고 감자 하나는 발등에, 하나는 손에 쥐었고, 상대편에서 감자를 던져
주는 기사도 대기했다.
그래서 성공 했을까?
답은 당연하게도 실패했다였다.
아마도 잭슨은 그걸 노리고 있었겠지만…
검사들은 검을 휘두를때 몸을 지탱하기 위해 하체를 단련하지만, 그와 함께 모든 상황에 재빠르게
반응하기 위한 훈련을 한다.
검을 들고 상대방을 노릴때 몸을 낮추는 이유가 몸을 긴장시켜서 여차하면 쉽게 몸을 이동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발 등에 올린 감자를 차 올려 베기 위해서는 손에 들린 감자를 허공에 던져 벨때까지는
발을 조금도 움직이지 말아야 했다.
동그란 감자는 투박한 가죽 신 위에서 간신히 균형을 잡고 있었으니 조금만 움찔해도 옆으로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기사들은 우선 손에 들린 감자를 허공에 던져 베는 것에 집중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발을
조금이라도 움직여 감자를 발등에서 떨어뜨리는 거였다.
그러니 벨 수 있는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자 하나만 벤 채 대결은 끝나버렸다.
“이런… 거 보십시오. 그러니까 미리 연습을 하셔야 한다니까…”
맨 처음 나섰던 기사들이 모두 다 실패하자 잭슨이 당연한 거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발끈한 몇몇 기사들이 또 나섰다.
이번에 그들은 한번씩 연습을 했지만, 기사가 되기 위하여 목검을 손에 쥔 순간부터 몸에
익어버린 것이 한 순간에 주의한다고 금방 바뀌는 건 아니었다.
결국 10여명의 기사가 실패하고 그 뒤에 한 기사가 가까스로 성공 했지만 – 발 등의 감자만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감자 베는 건 그들에게 식은죽 먹기였으니까… – 이미 기사들측은
기가 팍 죽어 있었다.
“잭슨씨가 머리가 좋군요. 기사들의 버릇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에 반하는 대결을 펼쳤으니…”
원래 그 정도 대련쯤이야 조금만 연습하면 기사들에게는 정말 식은죽 먹기보다 쉬웠을 거다.
단지 한 번도 안 한 일을 갑작스레 할려니 어려웠을 뿐이지.
결국 그리하여 그 대결은 잭슨의 승리로 끝났고, 그쯤해서 나는 방으로 돌아왔지만, 아마도
그 기사들도 윙겟경이나 첼릿에게 한 소리야 듣겠지만 크게 혼나지는 않았을 듯 했다.
그들은 잭슨의 실력에 진 것이 아니라 재치에 진 것이니까 말이다.
뭐, 재치도 실력의 일환이려나?
그 다음 날 잭슨은 정말 아침식사 후 나와 듀비에게만 작별 인사를 건넨 후 조용히 먼저
떠났다.
그리고 그 뒤 우리 일행이 출발하려 하는데 몇몇 기사들이 괜히 내 근처를 기웃 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기색을 보이는 거였다.
결국 원하던 이를 찾지 못해 돌아서는 그들의 얼굴에는 아쉬운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왜 아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도 곧 수도를 향해 출발 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만 수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윙겟경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편해서 좋았기는 하지만 추운 날에 여행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군요. 다음에는 따뜻할
때만 골라서 다녔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