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45)
제 37화 드디어…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키득키득 웃던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그 상황에서 눈뜨고 일어나는 것 보다는 그냥 잠든 척 하고 있는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예상으로는 잠깐만 자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마음이 안정되어서 그런지 잠깐 잔다는게
아예 아침까지 자버렸다.
그것도 아버지가 깨우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잤을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언제까지 자고 있을래?]서늘한 아버지의 말투와 날 흔드는 손길에 부스스 눈을 뜨고보니 어느새 해가 하늘에 반짝 떠서
웃고 있는 거였다.
“헉… 우와, 우와, 우와… 이게 어떻게…”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키다보니 세상에나, 내가 아버지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던 거였다.
“어… 어어어…”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밤을 샜다는 사실에 놀란 것 보다 아버지가 내게 다리 베게를 해줬다는
-것도 밤새도록… – 게 너무 놀라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뭐냐? 밤새 벙어리라도 된 거야? 왜 그렇게 버벅거려?]“어어… 음… 아버지… 혹시… 밤새도록…”
속으로 설마…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건만 아버지는 흥 하며 시선을 돌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타박만 해댔다.
[멍청한 녀석. 아주 대놓고 통곡을 하지 그러냐? 애처럼 펑펑 울기는…]“힉…”
아버지의 타박에 얼굴이 붉어져서 어쩔줄 몰라하는데 나의 영원한 구원자 이프리트 아저씨가
나섰다.
[왜 아침부터 괜히 타박이냐?]그리고 그 뒤를 잇는 다른 정령왕들의 목소리.
[그러게나 말이야. 어제 밤과는 또 딴판일세…]실피드의 뒤를 이어 노아스가 짓궃은 목소리로 마무리를 했다.
[호호호호, 설마 천하의 엘라임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밤새도록 자식을 포근하게감싸고 있었다는게 창피한 거야?] [시끄러워! 이것들은 왜 안가고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그렇게들 할 일이 없어?]
아버지의 투덜거림에 실피드가 능글맞게 대꾸했다.
[어허, 기껏 밤새 같이 있어줬더니만… 은혜도도 몰라주다니.] [은혜는 무슨…]실피드의 말에 꿍시렁 거리기는 하면서도 더이상 뭐라고 하지 않는 걸 보니 조금은 다른 정령왕
들에게 고마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가 당황해 할때 이프리트 아저씨를 선두로 세 정령왕이 아버지에게 우르르 달려가서
그의 화를 풀려고 어떻게는 노력해줬을테니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나자 나는 세 정령왕을 향해 배시시 웃을 수 있었다.
그러자 이프리트 아저씨도 마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제는 무척 놀랐지? 그래도 무사히 해결되어 다행이다.]“아하하… 예. 걱정끼쳐드려 죄송했습니다.”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을 담아 그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아버지의 일갈이
들려왔다.
[너 그렇게 한가하냐? 변태 도마뱀 녀석이 일어나자마 잽싸게 보내라고 하던데…]그러고보니 어제밤에 정령왕들과 같이 수다떨던 리건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는 내 모습이 리건을 찾는다는 것인 줄 알아채고 이프리트 아저씨가 넌지시
알려줬다.
“그렇군요. 저도 슬슬 돌아가야겠네요. 아마 제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내 말에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얼른 거들었다.
[그래, 어여 어여 가봐라.]“넵~!”
돌아가면 리건에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하는건 둘째치고 일행들에게 뭐라 변명을 해야하나…
고민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큰 일(?)이 해결되어서 그런지 돌아가는 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나의 밝아진 얼굴 덕분인지 듀비와 첼릿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그리고 나는 그제서야 그들의 눈 밑에 생긴 검은 그늘을 발견하고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것들은 분명히 나를 걱정해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생긴 것이 틀림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걱정 많이했죠?”
“그래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이제 다 괜찮아지신 겁니까?”
“넵. 덕분에요. 다음부터는 걱정 안끼치도록 할게요.”
듀비는 첼릿처럼 말을 건네지는 않았지만 두 눈에 안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서 그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이는데 리건이 다가왔다.
“잘 잤냐?”
“아하하하… 덕분에요. 아,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네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후작님이
아니셨다면 어떻게 할 줄 몰랐을거에요.”
남들이 있었기에 후작님이라고 정중하게 호칭까지 사용하며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했건만,
리건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씨익 웃더니 오른 손을 들어 내 턱을 스치듯 스윽 만지는 거였다.
“훗… 확실히 효과가 있었지?”
‘나는 어제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한 기색이 두 눈에 가득 들어 있었다.
덕분에 아버지와 화해 했다는 기쁨으로 반쯤 잊고 있었던 어제의 문제의 상황이 생각나 버렸다.
그리고, 그것은 내 뺨을 화끈 달아오르게 했다.
“윽…”
그래 나도 모르게 리건의 시선을 피하며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의 손길 마저 피하자
리건이 키득키득 웃으면서 그쯤에서 물러서줬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그 사건이 뇌리에 강하게 남아서 자꾸
그를 의식시키는 바람에 도저히 리건을 전처럼 대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 부터 자의든 타의든 리건을 피해서 도망다녔는데, 같은 그룹에 있다보니
그것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어 가끔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자꾸 묘하게 피식거리고 웃으니까 더더욱이나 그를 의식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거였다.
[저, 저, 저, 저놈이이~~ 내 저럴 줄 알았어!]이까지 빠드득 갈면서 당장이라도 리건에게 달려들 듯이 노려보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는 화들짝 놀라야 했다.
[호오, 저 파란 드래곤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데?]능글맞은 실피드의 목소리에 이어…
짓궃은 노아스의 목소리까지…
[그만들 해라. 그러다 엘라임이 뭔 일 내겠다.]이프리트 아저씨의 말에 노아스가 까르르 웃었다.
[꺄하하하~~ 그러길 바래. 그것만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어디 있을까. 요즘 정말 살맛난다니까.] [너무해요, 노아스님…]
주위에 사람들이 있는 터라 나는 속으로 푸욱 한숨을 내쉬고 정령의 대화법으로 말을 건넸다.
[어머, 해인아 화났니? 하지만, 얘 조금만 봐줘라. 이런 재미있는 구경은 내 일생에 한번 볼까말까 하다고.] [내 저놈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너너 쓸데없는 맘 품지 말랬지? 그 눈빛 당장 거두지 못해!!]
아버지가 리건을 향해 바락 바락 외쳤지만, 리건은 못들은 척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나를 향해서
싱긋 웃기만 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때, 듀비가 스윽 앞으로 나서더니만 리건의 시야에서 나를 가려버렸다.
“해인님, 이쯤부터는 조심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요 며칠 조용한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어떤 놈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듯 하거든요.”
“아, 그, 그래요?”
나는 내심 신경쓰이게 만드는 리건의 시야에서 벗어날 거리를 마련해준 듀비가 반가워서 반색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예. 아무래도 제가 생각하는게 틀렸으면 하지만 말입니다.”
진지한 어조로 대답한 듀비는 어느 순간 무엇을 발견했는지 내 팔을 냉큼 움켜잡고는 일행들이
가는 방향을 벗어나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어어.. 듀비?”
“듀비,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그에 놀란 첼릿이 다가와 물었지만, 듀비는 첼릿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에게 말했다.
“가서 램버트좀 데리고 와주겠습니까?”
“램버트씨를… 요?”
당황한 첼릿이 되묻자 듀비는 고개를 살짝 까딱해보이고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나를 데리고
갔다.
“듀비, 어디 가는 거에요?”
“가보시면 알게 됩니다.”
듀비가 나에게 해가 될 일을 할리가 없으니 뭔가 이유가 있나보다… 싶은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가 이끄는대로 순순히 따라갔다.
잠시 후에 첼릿이 램버트를 데리고 우리 뒤를 따라왔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우리는 완전히
일행들에게 벗어나 있었다.
“이거,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램버트가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던지 드디어 입을 열어 궁시렁 거리는데 듀비가 걸음을
딱 멈췄다.
“다행이 있군요.”
그의 말에 그의 시선을 따라가보니 어떤 커다란 나무에 내 다리보다도 더 굵은 덩굴이 칭칭
감겨 있었는데, 그 덩굴에 늙은 호박같이 생긴 열매가 드문 드문 달려 있는게 보였다.
늙은 호박중에서도 동글동글한게 아니라 오이처럼 길죽하고 아랫쪽이 좀더 굵은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작은 건 내 팔의 반만 하고 큰건 내 팔 전체 길이 만했다.
“헤에… 열매인가요?”
“그렇습니다. 가끔… 먹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먹는 것 보다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요.”
내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한 듀비는 내 팔을 잡은 손을 놓고 가볍게 뛰어 오르더니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열매를 하나 따까지고 내려왔다.
“제가 너무 민감한게 아닌가 생각이 되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하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무일 없다면 저녁에 씻어내면 될 겁니다.”
그렇게 뜬금없는 말을 하던 듀비는 차고 있던 검을 들어 그 열매를 반으로 뚝 자르더니만
다짜고짜로 내 머리 위에다가 그 열매의 즙을 들이붓는 것이었다.
“에엑…”
그 열매는 마치 야자수 열매처럼 즙이 많아서 따로 짜지 않고 절단면만 기울였는데도 물이 많이
나와서 내 몸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다.
열매라고 해서 달콤할 줄 알았는데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온 즙을 살짝 맛보았더니만 쓰고 신
맛이 너무 강해서 나도 모르게 인상이 팍 찡그려질 지경이었다.
“으엑… 너무 시네요… 이걸 먹는단 말이에요?”
몸을 한번 부르르 떨면서 투덜거리자 듀비가 피식 웃으며 대꾸해주는 거였다.
“가끔은… 입맛이 묘한 녀석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나머지 반동강 난 열매의 즙을 첼릿에게 씌워주고 다른 열매 하나를 더 따서
램버트와 자신도 뒤집어썼다.
“도대체 우리가 왜 맛도 없는 과즙을 뒤집어 써야 하는 거야?”
램버트 또한 듀비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는 다는 걸 알았는지 과즙을 뒤집어써도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는 했지만, 끈적거리는 과즙이 기분 좋을리 없었던지 툴툴 거렸다.
그런데, 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려는 양 저 멀리에서 우리 일행임이 분명한, 다급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거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빠르게 일행들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앞 뒤 안가리고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려고 했던 나는 일행들이 보이는 지점에서 첼릿과
듀비의 팔에 잡혀 버렸다.
“자자, 진정하세요 해인님. 무작정 뛰어든다고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고요.”
낮게 속삭이는 첼릿의 말에 듀비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힉… 저 거미 놈들에게 걸렸구만…”
램버트의 경악 어린 말투를 들어보니 전에 여기 왔을때 만난 모양이었다.
그의 말대로 일행들을 공격하고 있는 건 커다란 거미였다.
시커먼데다 온 몸에 털이 숭숭 난 그 녀석들은 몸통이 성인 남자 머리만해서 몇놈 정도라면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을텐데 수없이 많은 놈들이 나무 위에서 일행들 머리 위로 마치 소나기
처럼 뚝뚝 떨어지니 문제였다.
“그럼 어떻게 해요? 보고만 있어야 하나요?”
아버지에게 말 잘못하는 바람에 아버지를 화나게 하고 화해 하느라 잠시 기억의 저편으로
밀쳐 놓기는 했었지만, 아나콘다 정령들의 일로 인하여 나는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기에 거미떼에 공격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듀비의 말이 곧바로 들려왔다.
“저 안으로는 저희 셋이 들어가겠습니다. 저런 난전에서는 해인님이 곁에 있는게 오히려 저들에게
불편할 것입니다. 해인님은 여기 계십시오.”
냉정하게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맞는 말이었기에 나는 할말이 없었다.
나는 체술에는 영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내가 기가 팍 죽어 주춤거리자 듀비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계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저 놈들은 불에 약하니 불의 정령들을 불러서 끌어
올려진 사람들을 구해주십시오.”
“예?”
듀비의 말을 이해 못한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자 듀비가 빠른 어조로 설명했다.
“저 놈들은 먹이 위에 떨어져서 독이 묻은 침으로 기절시킨뒤 거미줄로 꽁꽁 묶어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체액을 빨아먹고 삽니다. 그러니 아마 저놈들의 독에 당한 사람들은 나무 위로 끌어 올려져
있을겁니다. 죽지 않았을테니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요. 해인님께는 그들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여유가 있으시면 우리도 도와주시구요. 해인님께 저놈들이 덤빌 염려는 안 하셔도
됩니다. 해인님께 발라드린 과즙은 저놈들이 싫어하는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해인님께는 접근
하지 않을겁니다. 아셨지요?”
숨도 안 쉬고 쏟아지는 듀비의 말에 숨도 안 쉬고 듣고 있던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쉬었다.
“그럼, 잠시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첼릿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체술에 능력있는 셋은 총알같이 튀어나가 사람들에게 합류했고
뒤에 남아있던 나는 돌아가면 검술을 진지하게 배워볼까…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정령들을
불러냈다.
“셀리맨더, 운다인!!”
혹여 나무 위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다가 나무에 불이 붙을까봐 염려하여 물의 정령도 불러내자
불타오르는 도마뱀들과 아름다운 여성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자아, 잘 부탁해!”
하급 정령들은 어린아이들 같아서 그들을 불러내서 뭔가 부탁하려면 이거해라 저거해라 라고
일일이 지시를 해야하고 계속 지켜보면서 변수가 생길때마다 조정을 해줘야 하지만, 중급 정령
부터는 그들 스스로의 지능이 뛰어나기때문에 방향만 지시해주면 그들 대부분이 왠만한 것은
알아서 해결해주고는 했다.
거기다가 상급으로 올라가면 내가 따로 신경써서 기운을 전달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기운을
가져다 쓰기때문에 내가 딴데 신경을 써도 상관 없었다.
그런것 때문에 나는 보통 상급 정령들을 불러내지만, 이번에는 숫자도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쉽지만 상급 정령들을 불러낼 수는 없었다.
한 무리의 운다인들과 셀리맨더들은 거미들이 죽치고 있을 나무 위로 향했고, 나머지 십여명의
셀리맨더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레 기습 공격을 당했을텐데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서로 도와가면서 거미들에게
대항해갔다.
하지만 위에서 갑작스레 떨어져 독침을 꽂으려고 하는 거미들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는지
쓰러지는 사람들도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독침에 당해도 기절만 할뿐 죽지는 않는 거라고나 할까?
파틴 클리우드 남작과 앤더슨 스니볼리는 자신들이 이런 난전에 도움이 안된다는 걸 아는지
자신들의 주위에 실드를 친 채 한쪽 구석에서 얌전히 있다가 자신들에게로 떨어져 내리는 거미
들만 공격하여 죽이고 있어다.
쥬디 블러드무어경은 그래도 기사 작위를 딸 정도로 검술 실력이 있어서 그런지 바람의 정령들을
불러내어 자신을 돕게 하는 한편 자신도 앞으로 나서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리건과 에아머스 차트워드 경을 보니 그들은 그야말로 종횡무진 하면서 단번에 두 셋의 거미를
한꺼번에 처리하고 있었다.
거기에 첼릿과 듀비, 그리고 램버트까지 가세하고 내가 불러낸 셀리맨더들까지 합류하자 상황은
훨씬 나아지고 있었다.
셀리맨더들이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거미들이 사람들에게 닿지 않도록 보호해주자, 위에서
떨어지는 거미들 신경쓰랴, 밑에 떨어져서 달려드는 놈들 신경쓰랴 사방으로 신경이 분산되어
쩔쩔매던 용병들도 이제는 위는 거들떠보지 않고 아래에서 떨어져 내리는 놈들에게만 마치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신나게 무기들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후에는 마치 뻔데기처럼 거미줄에 칭칭 감겨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무 윗쪽으로 보냈던 셀리맨더와 운다인들도 활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에게 딸려서 거미들도 같이 떨어졌다는 거였지만, 사람들을 안전하게 땅에
내려놓던 운다인들이 사정없이 처리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일행들에게 여유가 생기자 마법사들의 실드 안에서 몸을 보호하며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안내인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일대에는 놈들의 영역이니 여기 있다가는 끝 없이 달려들겁니다.
어서어서 여기서 벗어나세요.”
그의 말을 들었는지 몬트리올경이 거미 세마리를 처치하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더니 한쪽을
가르키며 외쳤다.
“저쪽으로!! 기사들은 진로를 뚫고 용병들은 뒷쪽을 방어하라!”
그러자 듀비가 내쪽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해인님!!”
“알았어요. 실프!!”
듀비에게 대답하며 그쪽으로 뛰어가던 나는 땅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수십명의 실프들을 불러냈다.
실프들이 나의 부름에 답하여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여기 저기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허공에 둥둥 띄워 날아가는 걸 확인한 나는 알아서 중간 지점을 차지한 마법사들 옆으로 합류했다.
다른 국 사람들도 벌써 그 거미들의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저 멀리 이동하고
있었다.
첼릿은 내 옆으로 돌아오고 리건과 듀비, 그리고 에아머스 차트워트경이 맨 앞에 서서 앞에서
달려드는 놈들을 일사천리로 해결하기 시작했고 뒤에 있던 기사들이 사방을 경계해주는 가운데
체술이 떨어지는 우리들은 일행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하여 그들의 속도에 맞춰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려갔는지 서서히 숨이 차서 헥헥거리며 무거워진 발을 힘겹게 뗄 무렵 드디어 거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몬트리올경이 외쳤다.
“정지.”
엄청나게 그 반가운 말이 들리자마자 나는 맨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 거리며 숨을 골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기사들은 쉬지도 못하고 주위를 경계했으며, 용병들은 번데기처럼 거미줄에 둘러쌓인 사람들의
몸에서 거미줄을 떼어냈고, 마법사들은 꼼짝 못한 그들을 살펴보기 위해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해인님, 저쪽으로…”
한가운데 떠억 버티고 앉아 이리뛰고 저리뛰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내 존재를 보다 못해
첼릿이 나를 부축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을 구석자리로 데리고 갔다.
‘아아… 이럴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나는 무능력한 거 같단 말이야…’
속으로 시무룩하니 생각하면서도 내 곁으로 다가온 듀비와 첼릿, 그리고 램버트가 아까 바른
과즙들과 땀들이 뒤섞여 지저분한것을 보고는 운디네들을 불러내 그들의 몸을 씻어줬다.
덤으로 나도…
“어이, 나도 좀 부탁하지?”
그러면서 슬금슬금 다가온 리건과 에아머스 차트워드경, 그리고 내친김에 리건의 수하들까지
다 씻겨줬다.
“후훗, 이럴때는 정령사들이 참 편하게 느껴진단 말이야.”
나도 은근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리건의 말에 반박은 못하고 입맛만 쩝 다시며 고개를
돌리는데 클라우드 남작이 꼼짝도 못하는 이들에게 마법을 걸어주는게 보였다.
“큐어~!!”
그의 시동어를 들은 나는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큐어 마법은 해독작용을 해주는 마법인데, 이건 몸 속에 있는 독에 반응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나를 아무리 집어넣어도 몸 속에 독이 없으면 아무런 능력도 나타내지 못한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마나를 뭉텅으로 집어 넣어도 몸속의 독만 해독시켜줄 뿐 딴 사건이 발생
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치유 마법은 배우지 못하게 한 노만 스승도 이 마법만은 가르쳐줘서 익혀놨었다.
물론, 주위에 중독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해서 실전에서 써먹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 마법이
필요하다면 내가 도움이 되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체력이 딸려서 헥헥 거린거지 마나가 딸려서 헥헥 거린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 내가 마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나는 잽싸게 클라우드 남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거기서는 엔더슨 스나볼리도 아까 그 왕거미 독에 당한 사람들에게 붙어 마법을 시전해주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백작님?”
다른때에는 부상자들 치료하는데 가까이 오지도 않던 내가 다가오자 볼일이 있는 줄 알았던지
남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 저 도와드릴까 하고요. 지금 사용하시는게 해독 마법 맞지요? 해독 마법은 저도 익혔거든요.”
“호오… 백작님이 마법도 익히셨습니까? 그런데 왜… 아, 하긴… 정령술이 그렇게 강하니…”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남작은 스스로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에게 옆에 있는
사람을 가르켜보였다.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넵.”
나도 드디어 부상자들에게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기쁨으로 남작이 가르킨 용병에게 다가간 나는
그 기쁜 마음 그대로 마나를 듬뿍 넣어서 주문을 외우고 시동어를 외쳤다.
“큐어!!”
그러자 남작이 시전했을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찬란한 녹색의 빛이 내 손에서 뿜어지더니만
용병의 몸 속으로 스며드는 거였다.
그걸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작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움직이자 입을 열었다.
“저어… 백작님?”
“네?”
그의 말에 내가 혹시 잘못한게 있나 싶어서 불안한 마음으로 돌아보는데 남작이 약간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하는 거였다.
“저기… 그렇게 잔뜩 써주실 거라면 한번에 한 사람씩 하시지 말고 서너 사람에게 한꺼번에 써
주시는게 어떨까… 싶은데요? 마나가 아깝군요.”
“아.하.하.하… 그, 그렇습니까? 제, 제가 아직 마법에 능숙하지 못해서 말이죠.”
어찌 되었든, 그럭저럭 무사히 거미의 독에 중독된 자들을 – 원래 그냥 둬도 몇시간 후면 자연스레
마비에서 풀린다고 하지만, 그 시간 안에 뭔 일이 생길지 모를 위험한 장소라서 일부러 마법을
시전해준 것이다 – 깨워놓자, 경비병을 세워두고 모두들 잠시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지도자들이
회의를 벌였다.
그래봤자 리건과 몬트리올경, 클라우드 남작, 그리고 용병단의 대장 트레비스와 안내자뿐이었지만…
몬트리올경이 거미들이 제일 적어보여 뚫기 쉬울 것이라 판단, 제시한 방향으로 줄기차게 달려
왔더니만 다른 국가들 사람들과 동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뭐, 정령들을 풀어 놓는다면 그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테지만, 무작정 그들을 찾아 합류하는
것 보다는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알아차리고 우리가 찾아갈 던전과의 방향과 거리를 가늠하는게
먼저인 모양이었다.
다행이 내 지위가 그다지 낮지 않아서 나는 그들이 회의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조용조용 이야기 하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흥분 했으니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건 너무 위험 부담이 큽니다.”
트래비스의 목청이 제일 먼저 터져 나왔다.
그러자 그 뒤를 얄미우리만치 냉정한 몬트리올 경의 목소리가 이었다.
“당신의 의견은 잘 알았소.”
“뭡니까, 정말 우리끼리 던전을 향해 갈겁니까?”
기가 막히다는 트래비스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클리우드 남작이 물었다.
“몬트리올경… 나도 저 자의 말에 동의하오만… 너무 위험 부담이 큰 거 아니오? 우리가
던전에 빨리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이 지도에 의한 것일뿐인데… 어차피 이 지도는 정확한
것도 아니지 않소? 게다가 우리끼리 간다는 것도 걸리고…”
“물론 저도 그걸 생각 안 해본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남작, 우리가 다른 국가 사람들과 같이
간다고 해봤자 몬스터들이 들이닥칠때 어디 그들이 우리를 도와주기라도 했습니까? 지금까지
계속 우리는 우리끼리만 싸워 왔습니다. 그러니 같이 가든 따로 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거기다가 지도가 정확하지 않다고 해도 얼추 비슷하지는 않습니까? 차라리 우리끼리
가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몬트리올경의 웅변에 남작이 조금은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뭐라 하는 대신 리건을 돌아보았다.
“후작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리건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몬트리올경, 물론 공을 세우고 싶어하는 자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 거기다가 지금 있는
일행들만으로도 대단한 실력이라는 것도 납득하고. 하지만 말이네,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세 국가로 나뉘어 따로따로 행동해도 수월하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것은 여기는 대략적으로
알려진 곳이기 때문일세. 하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지. 우리는 정확한지도 아닌지도 모를 지도
한장만 달랑 가지고 던전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일세. 거기에다가 던전에 또 뭐가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던전에 제일 먼저 도착했다 치더라도 우리가 공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은가? 어쩌면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제일 먼저 죽으러 간다는 것과 같을지도 몰라.”
그의 말에 몬트리올 경은 멈칫 거렸고 트래비스는 얼굴이 펴졌다.
그런 그들을 힐끔 바라본 리건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해서 다른 국가들과 합류해야 하는 건 아니지. 어차피 그들이 우리를
기다려주지도 않을테지만 말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각 국가 일행들에게 지도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선은 같이
행동 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국가간에 통신 장비같은 것은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그들과 연락을 하려면 그들이 있는 곳 까지 가야만 했다.
하지만, 만약 통신 장비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거기로 갈테니 기다려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우리를 기다리다가 몬스터의 침략이라도 받으면 어쩐단 말인가?
물론 그쪽이 움직이다가 습격을 당하면 그들의 책임이지만 말이다.
“그럼 후작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던전에 무엇이 있고, 그 물건들이 어디로 배분되는가만 알면 되는
것일세. 굳이 거기에 있는 것들을 차지하지 않아도 상관 없어. 게다가 어차피 거기서 가장
위험한 건 다른 국가들과의 신경전 때문에라도 마법사 길드에서 차지할거고 말이야. 그러니
일부러 먼저 가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길을 닦아줄 필요는 없지 않나?”
“으음…”
몬트리올경에는 잠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을 뿐, 그도
리건의 말이 옳다고 생각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후작님의 말씀은 다른 국가들과 합류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의 뒤를 따라가자는 말씀
이시죠?”
“그렇지.”
몬트리올경의 질문에 리건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남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저어… 저 또한 후작님의 의견에 찬성이지만 말입니다, 만약 다른 국가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간다면 문제가 한가지 생길텐데요.”
그의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남작에게로 몰렸다.
트래비스의 시선에는 ‘일이 잘 해결되었는데 왜 지금 초를 치려고 하냐…’ 하는 원망의 빛까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남작은 그런 시선에도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진로를 보하할때 던전에 도착할때까지도 우리 뿐만이 아닌 다른 국가 사람들도
최소한 여러번은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당할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선 국가 사람들이 몬스터와
싸운 장소를 지나가야 할텐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몬스터와 한바탕 격전을 치르면 황급하게 그 곳을 떠나 다른 장소로 이동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흘린 피 냄새를 맡은 다른 몬스터들이 몰려들것을 대비해서였다.
만약 우리가 다른 일행들의 뒤를 따라갈때 그들이 몬스터와 격전을 치룬 장소에 다른 수많은
몬스터들과 우리가 같이 도착한다면 그것만큼 낭패는 없을 것이리라.
남작은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거였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은 그의 말에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리건만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것이었다.
“걱정할 것 없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게는 뛰어난 정령사가 있으니까.”
근처에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한번 들리기 시작하자 계속 듣고 있던 나는 뜬금없이 내
이야기가 나오자 의아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근처에 있던 날 한번 보더니 다시 리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들을 대표로 남작이 묻자 리건이 느긋하게 대꾸해줬다.
“남작, 자네는 다른 일행들을 탐색하는 것만으로 바쁠테니 계속 앞쪽에 뭐가 있는지 탐색할
수는 없겠지. 그걸 꾸준히 하는 것도 힘들테고, 마법이 시전될동안 우리는 계속 기다려야 할테니
행보도 늦어지겠지. 하지만, 누군가가 우리 앞을 정탐해서 수시로 보고해주면 어떨까? 내 알기로
상급 정령들은 정령술사와 대화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던데… 정 그게 아니더라도 간단한
의사는 표시할 수 있을 거 아닌가. 앞쪽에 몬스터와 싸운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야.”
그제야 사람들이 이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미처 백작님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남작의 말에 어느 누구도, 나 조차도 웃지 못했다.
나도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오래 산 존재는 달라도 뭔가 다른 걸까나?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른 국가 사람들을 쫓아가기로 했고, 그 즉시 남작이 다른 일행들이 어디
있는지 알기 위해 탐색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우습게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한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탐색 마법을 펼친 결과 녹스국이나 마르타국 일행 또한 새클턴 일행의 뒤를 쫓는 모습을 보여
줬던 것이다.
더욱이 새클턴국 일행측은 이런 움직임을 알고 못마땅했는지 진행 속도를 늦춰서 결국 며칠
뒤에는 네 국가 일행이 그냥 합류하게 되었다.
몬트리올경은 그것 보라는 듯 우리끼리 곧바로 던전을 향해 갔어야 한다고 궁시렁대기는
했지만, 다른 일행들은 차라리 잘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계속 몬스터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무사히 물리쳐 나가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다.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희생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 던전에 다다랐을즈음 우리 일행들은
1/3가량 줄어 있었다.
웃긴건, 이것도 예상 외로 뛰어난 실력자들이 파견되어 왔기 때문에 처음 정글에 들어올당시
예상했던 숫자보다 많이 남은 편이라 사람들의 분위기는 침울하기는 커녕 약간은 들떠 있을
정도였다.
뭐, 어쩌면 드디어 목적지인 던전에 다다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쯤 되자 사람들은 여전히 각국 일행을 중심으로 움직였지만, 전체적인 지시는 새클턴
국 일행을 따랐기 때문에 은근히 새클턴국의 리더인 보르바 할레언 백작을 전체 일행의 리더로
암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여깁니다.”
일행 중 맨 앞쪽에 있던 안내자들의 말에 일행들이 웅성웅성 거리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 보았다.
그 곳에는 마치 산 단면을 단칼에 잘라낸 듯한 깎아지른 절벽이 떠억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참 특이하게도 그 절벽이 얼마나 크고 높은지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절벽의 위와
옆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는 거였다.
뭐, 정글의 무성한 수풀의 방해로 인해 양 옆은 끝까지 볼 수가 없다지만, 위로도 까마득하게
높았다.
각도도 수직인데다 높이도 까마득하자 어느 누구도, 심지어 마법사들도 위로 올라가서 살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절벽에 뻥 뚫린 커다란 동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던전이 이 안쪽에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저희도 끝까지 들어가서 확인을 하지는 못했지만, 침입자들을 방어하는 능력을
보아할때 정말 대단한 마법사가 만든 것이 틀림 없습니다.”
할레언 백작의 말에 전에 이 곳에 한번 와봤던 안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 우선은 여기서 하루를 보내면서 의논을 한 뒤 내일 아침 들어가는게 어떻겠소이까?”
다른 이들이 드디어 던전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흥분한데 반하여 여전히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마르타국 일행의 리더인 폴트팩트 백작이 제안하자 할레언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이오. 어차피 시간도 늦었고 하니 오늘은 이 근처에서 야영을 하기로 하고, 우리는
그 동안 내일 일정에 대해 의논합시다.”
그렇게 전체 일행의 암묵적인 리더가 결정을 내리자 아랫 사람들은 그가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우르르 사방으로 흩어져 노숙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는 첼릿이 다 알아서 해주고 나중에 데리러 올 것을 알기 때문에 – 어느새 익숙해져서
게으름을 피는 나였다. – 그거에는 신경쓰지 않고 커다란 동굴에 슬금슬금 다가갔다.
“해인님, 가까이 다가가시면 위험합니다.”
그 모습을 본 듀비가 잽싸게 곁으로 붙으면서 말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요. 그냥 살펴보려는 것 뿐이니까.”
동굴은 얼마나 큰지 높이가 약 2m 는 충분히 넘어보였고 너비도 넓어서 승용차 한대가 쉽게
드나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승용차가 아니라 12인용 승합차도 충분해 보였다.
안쪽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본 동굴 벽이 매끈매끈한게 자연적으로 생긴게 아니라
인공적으로 누가 뚫어놓은 것 같았다.
듀비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다가가 슬쩍 만저보니 딱딱하고 차가운 돌벽의 느낌이 고스란히
젼해졌다.
듀비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게 팔을 잡는 바람에 동굴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 옆의 절벽으로
이동하며 만져보니 커다란 바위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힘을 주고 긁어내리니 바위 위에 붙어있던 흙덩어리가 바스라져 흘러내렸다.
“으음…”
분명히 바위가 맞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듀비가 물어왔다.
“해인님? 뭔가 이상합니까?”
“글쎄요… 그걸 나도 모르겠네요…”
나는 얼빵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손을 내밀어 눈 앞의 절벽을 이루고 있는 바위를 만졌다.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해도 분명히 바위가 확실했다.
‘거참… 진짜 바위가 맞는데… 어떻게 실프들이 그냥 통과할 수가 있는 거지? 실프들이 땅속에도
들어갈 수가 있었던가? 끄으응…’
그랬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절벽을 아무 생각없이 보고 있는데 어떤 실프 녀석 한명이 친구와 손을 잡고
재잘대며 절벽의 바위를 그냥 스윽 통과해서 들어가는 거였다.
절벽에서 실프들의 행동을 관심있게 관찰한 적도 없었던 나는 그 모습이 의아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실프들도 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나보다… 라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실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각 마법이군.]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프리트와 노아스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렇군.]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걸? 꽤 넓은 지역에 걸쳐 이런 강력한 마법을 걸어 놓다니…] [환각 마법이요?]듀비가 있어서 입으로 내지는 못하고 정령의 대화법으로 질문하니 실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눈을 현혹시키다 못해 촉감까지 확실하게 느낄 수 있게 해놨군. 그정도면 큰 능력은아니다만, 꽤 넓은 법위에다 통채로 걸어놨으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야, 이거 어째
느낌이 묘하다?]
실피드가 말을 건넨 것은 아버지였다.
아까부터 다른 정령왕들이 한마디씩 한거에 비해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절벽에다 손을 댄
채 지금까지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실피드가 질문을 던지자 그제야 절벽에서 손을 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에 정령의 기운이 섞여 있어. 물의 정령같은데… 능력으로 보아하니 상급 정령이상인데? 흠, 좀더 알아봐야겠군.]
아버지는 그렇게 놀라운 말을 툭 내뱉더니 그대로 샤샤삭 하며 절벽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피드도 얼른 아버지의 뒤를 따라 절벽 속으로 뛰어들었고 노아스와
이프리트도 나에게 미소를 보인 뒤 그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뒤에 뭐가 뭔지 도통 이해를 못한 나만 남겨두고 말이다.
‘이런…’
잠시 후 첼릿의 부름으로 듀비에게 이끌려 노숙 준비가 끝난 공터로 간 나는 저녁을 먹고 난
뒤 한가롭게 마법서를 펼치고 있던 파틴 클라우드 남작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남작, 바쁘십니까?”
“응? 아니 백작님께서 저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남작은 무척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까지 오는 도중 나는 이런 식으로 남작에게 다가와 말을 건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걸 깨달은 나는 한번 삐질 웃어보이고는 본론을 꺼냈다.
“저기, 여쭈어볼게 있어서 말이죠. 그… 던전이 있다는 동굴 말입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
되지 않습니까?”
아주 진지하게 물어보자 남작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펼쳤던 마법책을 덮고
내쪽으로 몸을 돌렸다.
“흠… 그러고보니 백작님도 마법사셨죠?”
“예? 아아… 이제 겨우 발을 디딘 햇병아리입니다만…”
남작의 말에 쑥스러워서 머리를 긁적이는데 남작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러니 백작님께서 마나의 기운을 느껴도 하등 이상할게 없겠지요.”
남작의 말에 나는 멈칫 했다.
“아, 그럼 남작께서도 눈치 채셨단 말입니까?”
남작도 인간 세계에서는 고위 마법사에 속하는데다 이러한 고대 유물 전문이었으니 그 절벽이
환각 마법이라는 걸 눈치 챘을지도 몰랐다.
그래 이야기가 쉬워지겠다 생각해서 반색을 했는데 남작이 마치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 같은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허허, 백작님 저 또한 마법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도착했을때 동굴 안에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건 진작에 눈치 챘지요. 뭐, 그게 아니라고 해도 던전을 발견한 사람들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동굴 안에 들어가는 자를 막기 위한 여러가지 장치가 있다고 말입니다.”
가만히 듣자하니 내가 말하고 싶은 것과 남작이 말하는 것이 약간 핀트가 어긋난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에… 그, 그랬지요. 아, 그런데 저는 동굴이 있는 절벽 자체에서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혹시… 저 절벽이 환각 마법인 것은 아닌지…”
아버지를 비롯한 정령왕들이 환각 마법이라고 했으니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작은 내 조심스러운 말에 껄껄 거리며 웃더니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것이었다.
“허허허,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니 그런 의심을 할 수도 있겠군요. 사실 환각 마법중 고위 마법은
사람의 시각은 물론 청각이나 촉각까지도 좌우할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남작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눈짓으로 저쪽으로 보이는 엄청 커다랗고 높은 절벽을 가르켰다.
“저렇게… 대단위로 환각 마법을 펼치려면 엄청난 마나가 필요할 겁니다. 아마도… 8서클 이상의
마나를 가진 8클래스 익스퍼트의 마법사가 수십개의 마법석을 가지고 마법진을 펼쳐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니면, 드래곤이 만들었거나요.”
그리고서는 날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물론, 인간들 중에 8클래스를 터득한 대마법사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던전을 숨기는데 저런 엄청난 마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을테지요.
던전이 왠만한 왕성만큼 크지 않는 이상 그런 마법을 사용하는 건 엄청난 낭비일테니까요.”
“어, 그러면 만약 드래곤이라면요?”
내 질문에 남작은 잠시 생각하는지 흐음… 거리더니 쉽게 입을 열었다.
“뭐, 특이한 취향을 가진 드래곤이거나 아니면 레어를 잠시 비우게 된 드래곤이라면 저런 마법을
펼칠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몬스터들을 조정해서 자신의 레어를 지키게
하면 그만일텐데. 거기다가… 환각 마법을 펼쳤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이왕 펼칠거 뭐하러
동굴은 만들어 놓는단 말입니까? 그냥 모두 절벽으로 해놓으면 될텐데…”
남작의 말은 하등 틀린게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오… 그것도 그렇군요.”
하지만, 그의 논리가 맞다고 해도 아버지를 비롯한 정령왕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 저 절벽은 정말 환각 마법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침입을 막으려 했다면 왜 동굴을 만들었지? 남작의 말대로 그냥 몽땅 절벽으로 두를
것이지…’
남작의 너무나 논리적인 말에 저 절벽이 환각 마법이란 결론을 이끌어내기는 커녕 제대로 시도
조차 못한 나는 오히려 이해 할 수 없는 난제를 얻는 바람에 남몰래 끙끙거려야 했다.
“뭐냐? 표정이 왜 그래?”
한참동안 생각한 뒤에 저 환각 마법을 만든 마법사가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나보다… 라는
결론을 내릴 즈음 리건이 다가왔다.
요 근래에는 아버지를 비롯한 세 정령왕이 리건과의 대화를 사사건건 방해 놓고 있어서 예전에
그 키스 사건 이후로 자꾸 의식되던 리건을 피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분들이 결계를 조사하러
가시는 바람에 나는 리건을 정면으로 맞닥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태연하게 행동하려고 나는 슬쩍 리건의 시선을 엇나가게 맞으면서 대꾸했다.
“아니… 뭐 좀 생각하느라고…”
“뭘 생각하는데 그렇게 심각해? 흠, 그런데 오늘은 방어벽들이 안보이네? 어딜 갔나?”
자신이 나에게 다가왔는데도 정령왕들이 나타나지 않자 리건이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훑어
보았다.
“아아, 절벽 속으로 갔어요. 좀 이상하다고…”
거기까지 말한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리건을 돌아봤다.
‘그러고보니 드래곤이 마법의 종족이라고 했었던가?’
“리건, 저 절벽 보면서 이상하다는 거 못느꼈어요?”
“왜? 엘라임이 뭐라고 해?”
리건이 싱글거리면서도 목소리를 낮춰서 물어보는 배려는 해줬다.
그에 나도 주위를 흘끗 바라보며 똑같이 목소리를 낮춰서 대꾸해줬다.
듀비랑 첼릿은 내일 본격적으로 던전 안으로 들어간다니까 마지막으로 검술을 대련해보고
싶었던지 같이 사라져 있었고, 렘버트도 자신도 같이 하자고 덩달아 같이 가고 없어 현재
내 주위에는 날 신경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보통 목소리로 대화를 해도 들을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자연스레 작아졌다.
“저 절벽이 다 환각 마법이라고 하던데요? 알고 있엇죠?”
“응, 도대체 저 넓은 지역을 혼자서 독차지 하고 싶어하는 녀석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던 참이야.”
“그런데 왜 동굴은 만들어 놨을까요? 거기 안에서도 침입자들을 저지하는 여러가지 장치를
해놨다면서…”
내 질문에 리건은 내가 끙끙 거리고 고민한 것에 비해 너무나도 단순 유쾌 명쾌하게 대답하는
거였다.
“자기가 드나들 입구가 필요했나보지. 어차피 그 안에 침입자들을 막아놓는 장치를 해놨다고
해도 그 장치를 다 알고 있는 본인이야 쉽게 드나들거 아냐?”
그의 명쾌한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뻔 했지만, 그 순간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반박했다.
“공간 이동 마법은 뒀다 뭐해요?”
내 말에 리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보더니 물었다.
“너 아직 공간 이동 마법 안 배웠지?”
이제 겨우 4클래스 마법 익히고 있는 내가 무슨 공간 이동 마법이겠는가?
그래 기 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리건이 설명해줬다.
“공간 이동 마법은 이동할 장소의 좌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세밀한 마법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그런데 이동할 장소가 강력한 마법 결계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봐라. 분명히
결계의 마나에 의해 공간 이동 마법에 영향이 갈텐데 누가 마법으로 드나들고 싶어하겠어?
9클래스의 마법사이거나 드래곤이라면 몰라도.”
리건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하던 나는 다시 한번 말해봤다.
“저 던전을 만든 사람이 9클래스의 마법사일수도 있잖아요? 아까 클라우드 남작에게 물어보니까
저 크기의 환각 마법을 만들려면 최소한 8클래스 이상의 마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하던데…”
“9클래스 마법사라면 애써서 따로 입구를 만들 필요도 없었겠지. 아니면 그가 아닌 9클래스까지
익히지 못한 다른 존재가 드나들 필요가 있었거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9클래스 운운했지만, 9클래스까지 익힌다는 건 정말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만큼 힘든 일이었다.
오죽 어려웠으면 다른 클래스는 유져, 익스퍼트, 마스터란 단계가 있는데 유독 9클래스만 하나의
마법을 익혀도 마스터라고 인정해주겠는가?
예전에 마법 스승 노만에게 지나가는 투로 9클래스까지 간 마법사가 몇명이냐구 물었을때
노만이 피식 웃으며 마법 길드에 정식으로 기록된 이는 단 한명이라고 했다.
바로 최초로 대 마법사 호칭을 받은 메이크피스였다.
하지만, 그것도 그가 9클래스일거라고 추측을 할뿐, 그가 9클래스 마법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걸 본 자는 한명도 없다고 했다.
솔직히 8클래스 마스터도 흔하지 않아 어쩌다 가끔 등장할때마다 초천재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 물론 인간중에서다. 엘프나 하프 엘프들중에서는 인간들 사이보다 조금 더 자주 등장한다 –
9클래스 마스터가 어떻게 나오겠는가?
그래서 마법사들은 8클래스란 말도 경외감에 젖어 이야기 하건만 9클래스란 말을 옆집 애 이름
부르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걸 보면 드래곤이란 존재가 정말 마법의 종족이라는게 맞는
듯 했다.
그걸 생각하면서도 리건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리건이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해인아, 너 얼굴에 뭐 묻었다.”
“에?”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정글을 뚫고 지나가는데다 매일 매일
노숙하는 상태라 보통 사람들이라면 깨끗함을 유지할 수 없었겠지만, 나는 물의 정령왕을
아버지로 둔 덕에 언제 어느때고 몸을 씻을 수 있어 정글에 있는 사람 답지 않게 깨끗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그래 리건의 말에도 아무 의심 없이 놀라면서 뺨을 손으로 쓸어내렸는데 리건이 뚱 한 얼굴로
말했다.
“거기가 아냐. 그래서 지워지겠냐? 이리와봐.”
가볍게 손짓하는 태도와 그의 말에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에게 슬쩍 가까이 다가가 앉아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리건이 입가 가까이를 닦는 척 하더니만 갑자기 내 턱을 쥐고 얼굴을 끌어 당기더니만
입술에 쪽 소리 나게 뽀뽀하는 거였다.
‘헉~!’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 차마 소리는 못 내고 얼어 붙어있는 나에게 리건이 씨익 웃으며 말하는
거였다.
“엘라임이 없는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는 거 아니겠어? 그럼 나 간다.”
그러고는 여전히 얼어 붙어서 꼼짝도 못하는 날 놔두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일어서서
저쪽으로 가버리는 거였다.
‘저, 저 인간.. 아니 드래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아아~~!!’
다음날 아침 일찍 사람들은 드디어 던전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지금까지보다 더 비장한 각오를
다진 채 준비를 시작했다.
어제 각 국 리더들의 회의에 갔다온 몬트리올경의 말에 의하면 동굴 안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앞은 커녕 자신의 발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다 미로 마법 – 길을 헤매게 하는 마법, 미로가
보이는 환각부터 시작하여 계속 길을 가는데 실제로는 한 자리를 뱅글뱅글 돌게 하는 등의
시술자의 상상력과 능력에 따라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을 구사할 수 있다. – 까지 걸려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아무리 좁은 공간에 같이 있더라도 한번 헤어진 동료들과 다시 만나기 힘들다.
그럴때 동료들과 헤어지지 않기 위하여 서로 끈을 연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인지 가끔가다 불쑥 불쑥 골렘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살아 숨쉬는 생명체가 아니지만 마나로 움직이는 로보트같은 존재들로 그들을 만든 마법사의
의지만 따르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저 곳을 만드는 마법사는 들어오는 자들을 무조건 죽이려고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골렘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되겠지만, 이 새클턴 정글을 뚫고 던전까지 도착할
실력자들에게는 애를 먹이는 대상이 될 지언정 죽음의 절망에 빠뜨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뭐, 엄청나게 뛰어난 대마법사가 매칸더 V나 태권 V 같은 능력의 골렘을 만들어놨다면 몰라도,
던전을 발견한 모험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정도까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안개를 짙게 깔아놓거나 미로 마법을 펼쳐 놨어도 들어온 동굴 입구는 확실하게 찾을 수 있게
해놨다니 아마도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헤메게 하고 약간의 위협만 가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혹시나 동굴을 통과할지 모를 – 우리를 인도한 모험가들 같은… – 존재들을 대비해 던전에
또 다른 장치를 해놓은 모양이지만, 그런거야 솔직히 던전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심을 포기하고
뒤돌아간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각 국의 리더들이 주의하고 있는게 바로 그 던전에 준비된 장치들이었다.
동굴을 통과한 모험가들도 확실하게 파악 못하고 뒤돌아 도망쳐 올 정도도 대단한 것일테니
말이다.
“자, 다들 혹시 골렘들과 맞서 싸우다가 괜히 애꿎은 동료 치지 않도록 조심해라.”
트래비스가 용병들에게 주의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던지자 용병들이 왁자하니 웃어제꼈다.
정글을 통과할때는 각 국들끼리 무리를 이어 통과했지만, 이번에는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이
고생이라는게 뻔했기에 각 국 리더들끼리의 회의에서 이제부터는 다 같이 움직이기로 합의를
봤다.
그래봤자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자들이 맨 앞에서 길을 뚫고 체술에 능력이 딸리는 자들은 가운데
서며, 그 주위를 나머지 무사들이 보호한다는 방법은 변함이 없었지만, 가운데 있는 마법사들이
마냥 보호만 받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동굴 안에 있다는 마법들을 무력화시키고 일행들이 흩어지지 않게끔 구심점을 잡아줄테니
말이다.
리건은 그 능력을 다른 국가 사람들한테서도 인정 받고 있었기 때문에 몬트리올경과 같이
맨 앞에서 길을 뚫는데 불려갔지만, 첼릿과 듀비, 그리고 램버트는 내 부하로 인식 되어 있기
때문에 내 옆에 있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동굴 앞에서 자리를 잡자 맨 앞쪽에서 일행을 진두지휘하게 될 보르바 할레언 백작이
외쳤다.
“자, 들어갑시다.”
그리고 그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다른 사람들도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동굴은 입구가 엄청 큰데다가 그 근처에는 햇빝을 가릴 울창한 수풀이 없어 햇볕이 그대로 들어
가는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동굴 안으로 서너발자국 들어가자 금방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했고
열발자국쯤 들어가자 모험가들이 이야기했던 안개가 발을 감싸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임시로 각 국 모든 마법사들의 지휘를 맡은 마법 길드 일행의 리더 콘스틴스가 주위
마법사들에게 눈짓했다.
“라이트~!!”
“윈드 실드!”
능력이 뛰어난 몇몇 마법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마법사들이 두패로 나뉘어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일행들 주위로 부드러운 바람이 형성되어 안개를 밀어내 시야를 확보하는 한편, 일행들
틈으로 안개가 들어오지 못하게 방어막을 형성했고, 일행들 중간에 있는 마법사들 머리위로
밝은 빛을 뿜어내는 빛의 구가 여러개 떠올랐다.
동굴 안에는 생각했던 것 보다 공간이 넓어서 나는 일행들이 길죽한 타원형의 모습으로 전진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약간 타원형인 모습으로 뭉쳐 있을 수 있었다.
할레언 백작은 일행들 주위에 바람의 막이 형성된 걸 보고 다시 손짓하며 외쳤다.
“전진!”
그에 의해 앞으로 걸어나갈수록 안개들이 점점 짙어지는게 보였다.
바람의 장벽때문에 일행들 틈사이로는 끼어들지 않았지만, 바람의 장벽 너머에는 어느새 안개가
너무 짙어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용케 우리가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뒤에 보이는 동굴 입구
덕이었다.
이렇게 짙은 안개 사이에서도 입구가 보이는게 신기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입구 반대로 가면
안으로 들어가는 거 아니겠는가?
기실 이 방법은 던전을 발견한 모험가들이 사용한 방법이었다.
그래봤자 방향을 신경써서 가늠하는 건 길을 제시하는 리더들 뿐이었고, 나머지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앞사람만 따라갈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앞으로 얼마간 전진하자 안개 사이로 희끄므레한 그림자가 비치더니만 거대한 물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쿵, 쿵~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지 한 걸음 한 걸음 디딜때마다 방아 찍는 소리가 나는 것은 물론, 그것들이
가까워질 수록 땅을 통해서 미세한 진동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전원 전투 대형으로!”
앞쪽에서 할레언 백작의 외침이 들리자마자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무기를 빼어들고 바깥
쪽에 있는 무사들은 세, 네사람씩 짝을 지었고, 안쪽에 있는 무사들은 자신들이 호위하는 마법사들
쪽으로 조금 더 바싹 다가섰다.
“드디어 납시셨군.”
주위의 어떤 용병의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짙은 안개를 헤치고 드디어 골렘이 나타났다.
그건 한 마디로 표연하자면 대략 3, 4m 는 되어보이는 둔해보이는 로봇처럼 생겼다.
‘오옷… 완전히 태권 V 에 나오는 로보트잖아?’
몸이 돌이라는 것과 눈이 단순히 붉은 동그라미라는 것, 그리고 얼굴에는 눈을 제외한 코하고
입, 귀는 없다는 것이 달랐지만 말이다.
‘흠, 이제보니 손가락도 없군. 발가락은 있남?’
생전 처음보는 모습이었기에 잠시 흥미가 있었지만 6, 70 년대에 나온 SF 만화에나 등장할 법한
모습에 나는 곧 흥미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달리 진중한 자세로 골렘들을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자, 우리는 지원 합시다.”
어차피 동굴 안에 골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낮은 계열의 마법사들만 라이트 마법과
원드 실드 마법을 펼치는데 동원되었고 고위 마법사들은 이런때를 대비해서 빠져 있었던
것이다.
무사들을 지원해주는 거라면 고위 마법사들이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테니 말이다.
그래 나또한 무사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운다인과 슈리엘들을 불러냈다.
“골렘의 핵을 찾아서 부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자꾸 재생 되니까 힘이 빠지는 결과만
나올 뿐이에요.”
내 옆에 같이 붙어있던 클라우드 남작이 정령술이 더 높다는 이유로 마법사들 틈에 끼게 된
쥬디 블러드무어경과 나에게 설명해주려는 듯 속삭였다.
“핵이요?”
그러나 골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는데다가 이번에 본게 처음이었던 나는 그의 말을 선듯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러니까 인간으로 치자면 심장 같은 겁니다. 골렘을 움직이게 하는 마나석이죠. 인간의 경우
심장이야 왼쪽 가슴에 있지만 골렘의 경우 마법사들이 쉽게 찾을 수 없게 하기 위해 일정하지
않은 곳에 넣어 두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좀더 자세한 남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러니까 한마디로 동력원 같은 거로군. 자동차로 말하면 엔진인가?’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봤자 내가 고민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그러려니… 하고는 그냥
흘려들었다.
어차피 내가 맡은 역할은 무사들을 지원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디텍트 매직!”
근처에 있던 어떤 마법사가 낮게 시동어를 읇조리는게 들려왔다.
‘헤… 그러고보니 골렘이 움직이는 마나를 제공한다니 마나 탐지 마법을 사용하면 골렘의 핵이
어디인지 알 수 있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기대 어린 눈으로 그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를 쳐다봤지만, 남작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 경험이 없는 마법사로구만. 이렇게 강한 마법진 안에서 마나 탐지 마법을 사용해봤자
마법진 때문에 방해를 받아 소용없을텐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역시나, 그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마법진 안에서는 탐색 마법이 소용 없는 법이지. 지금은 효율성이 극히 낮긴 하겠지만, 무조건
잘게 부숴서 핵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다.”
마르타국의 리더인 쉐리든 폴트팩트 백작이 그 마법사를 향해 충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 마법사는 마르타국 소속이었던 모양이다.
“아, 예… 죄송합니다.”
그렇게 비 무사 진영에서 선배들의 충고(?)가 오가는 동안 골렘들과 직접 싸워야 하는 무사
진영의 맨 첫줄이 드디어 골렘들과 맞부딪혔다.
“쳐라!!”
“와아아아~~”
“매직 미사일!!”
한 마법사가 만들어낸 푸른 빛의 빛나는 미사일이 쌩 하고 날아가 골렘의 머리와 부딪혀 폭발을
일으켰다.
커다란 쿵~ 소리와 함께 그 골렘이 뒤로 넘아갔지만 무사들은 그걸 버려두지 않고 달려들어서
골렘의 몸을 조각조각 분해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드 남작이 말하는 그 핵을 찾는 것이었다.
다행이 막 나타난 골렘의 숫자는 다섯이었기에 우리쪽의 인원이 너무나 여유가 많았기에
많은 시간을 들여 확실하게 처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걸 여유있게 지켜보는 다른 무사들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었기에 여유 있는
와중에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쿵, 쿵, 쿵…
역시나, 다섯의 골렘을 땅바닥에 드러눕게 만들어 열심히 핵을 찾는 와중에 두 골렘의 핵을
발견해 막 부서뜨리는 순간 왼쪽 방향에서 진동소리가 들리더니 골렘 셋이 또 나타났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여유가 있었기에 마법사들은 한가하게 잡담을 나누면서 가끔가다 한번씩
매직 미사일을 날려서 골렘을 넘어뜨려주곤 했었다.
그 모습에 쥬디 블러드무어경과 나는 기껏 불러낸 정령들을 머쓱하게 바라보고는 다시 돌려
보내야 했다.
원래 무사들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데다가 심심한 마법사들이 가끔 거들어주니
정령사인 우리 몫까지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법이야 시동어를 외쳐 마법을 구현 해야 마나를 소비하지만, 정령은 이쪽 세계로 소환해 놓고
있는 것만으로도 계약자의 마나를 소비하는 일이었기에 정령을 불러다 놓고 가만히 냅두고 있는
것은 마나 낭비일 뿐이었으니 돌려보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러한 여유는 오른쪽에서 골렘 넷이 다가오고, 다시 앞쪽에서 일곱 골렘, 그리고
다시 왼쪽과 오른쪽에서 각각 골렘 두개가 다가오자 파도에 모래성이 휩쓸리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매직 미사일!!”
“아이스 미사일!!”
“프리즈 스피어(얼음창)!!”
아까는 간간이 쏟아지던 마법 시동어들이 봇물처럼 줄지어 쏟아져 나왔고 정령술사들도 정령계로
돌려보냈던 정령들을 다시 불러 모아야 했다.
“애들아, 부탁해!!”
나 또한 아까 돌려보냈던 슈리엘과 운다인들을 향해 말하자 그들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갑자기 수가 불어난 골렘들을 맞아 힘겨워하는 무사들을 돕기 위하여 날아갔다.
“젠장, 많이도 나오는구만…”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이 후방에서 지원하는 덕인지 여전히 여유있게 골렘들을 하나 하나 부숴서
분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차하면 돕기 위하여 달려나가기 위하여 마법사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용병 하나가 질린다는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핵이 문제야 핵이… 그걸 부수기 전에는 골렘을 완전히 쓰러뜨리는게 아니니 원…”
클라우드 남작이 숨이 찬지 잠시 한숨을 돌리면서 푸념조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일행들이 골렘을 베어서 쓰러뜨리는 것에 비해 골렘을 완전히 처리하는 건 엄청 더뎠다.
그나마 처음에는 골렘들 숫자가 적어서 골렘의 핵을 찾을때까지 완벽하게 분해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숫자가 갑자기 불어나서 골렘을 한번 쓰러뜨리면 다시 재생하기 전에
분해해서 핵을 찾을 틈도 없이 곧바로 다른 골렘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러니, 쉽게 쉽게 쓰러뜨려봤자 핵이 제거되지 않은 골렘들이 자꾸 재생되어 되살아나니
이건 힘빼는 것 밖에 되질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더 그 다음부터는 골렘들이 아주 가끔가다가 하나나 둘씩 나타나서 우리는
그럭저럭 더이상 위험해지지 않은 채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골렘이 오니까 꼭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서 우리가 정신 없이 힘만 쏘옥 빼놓을
정도로 골렘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힘빼기만 하던 순간,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장난기가 동했는지 골렘
다섯을 왕창 보내버렸다.
“헉…”
그리고 두 골렘이 다른 무사들을 상대하는 틈을 타서 골렘 셋은 일차 방어선(?)을 그대로 통과해
버린 채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을 호위하고 있는 2차 방어선까지 도착해버렸다.
“이런!!”
“침착하게!!”
당황한 2차 방어선의 무사들이 달려나갔고, 놀란 마법사들과 정령사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나도 다급하게 운다인을 한명 더 불러내어 둘 중 더 가까이 다가온 골렘에게 공격하려는 그
순간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 골렘의 오른쪽 어깨와 가슴의 중간 부위, 그러니까 거의 겨드랑이 부위가 다른
부위보다 눈에 들어오는 거였다.
뭐랄까… 그곳이 다른 곳 보다 더 밝게 보인다고나 할까?
하여간, 알수 없는 이유로 그 곳이 눈에 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 어쨌든 공격을 해야 했으니까
– 그 부분을 향해 운다인을 보냈다.
그런데 이게 왠일?
운다인의 매서운 물의 창이 내가 지적한 곳을 꿰뚫어버리자마자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골렘이
뒤로 그대로 넘어가더니 말 그대로 돌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라라..?”
내가 한방 먹이고 그 뒤를 이어 시간차 공격을 하려고 준비했던 용병은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
버렸고, 나 또한 이런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기에 입이 떠억 벌어졌다.
“우와, 백작님 운이 좋으셨는데요?”
내 옆에서 여차하면 튀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쥬디 불러드무어경이 그 모습에 내 어깨를 탁
치며 웃었다.
나 또한 무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서 마주 히죽 웃어보이고는 다음 골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골렘의 아랫배쪽, 그러니까 사람으로 치자면 배꼽 부위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운다인에게 그쪽을 공격하게 했더니만 그 곳을 꿰뚤린
골렘이 바로 전 골렘처럼 뒤로 넘어가 돌덩어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되자 주위에서 히죽 웃으면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경직이 되어버렸다.
“배, 백작님?”
쥬디 블러드무어경도 입이 떠억 벌어진 채 날 돌아보았고, 클라우드 남작이 눈을 휘둥그래 뜬
채 날 바라보며 물었다.
“백작님, 혹시 골렘의 핵이 거기 있는 걸 아셨습니까?”
“에? 아, 아뇨… 그냥 거기가 눈에 띄여서…”
눈에 띄인 부분을 공격한 것 뿐인데 이런 결과가 나타날 줄 몰랐기에 나 또한 크게 놀란터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흠, 그러십니까? 그럼, 다시 한번 실험해 보는게 어떻겠습니까? 마침 골렘이 한놈 더 있는데…”
마르타국 리더인 쉐리든 폰트팩트 백작이 나머지 한 골렘을 가르키며 제안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 골렘을 둘러싼 용병들이 물러나고 모두들 골렘과 나만을 주시하는
거였다.
그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골렘을 바라보고는 다른 곳 보다 내 신경을 끌어당기는 골렘의 오른쪽
발등을 향해 운다인에게 공격 하도록 지시했다.
슈욱~ 퍼억~!!
운다인이 날린 창이 이번에도 그 발등을 꿰뚫자 그 골렘 역시 발 하나가 부서진 채로 돌덩어리가
되어 버렸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경악을 담은 채 나에게 향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거참 신기한 일이군요.”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던지 잠시동안 앞쪽에 나간 무사들을 후방 지원해주던 마법과 정령이
잠시동안 중단 되었을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거기에 핵이 있는지 아신 겁니까, 백작님?”
그런 이들을 대표로 클라우드 남작이 물었지만, 나 역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했기에 제대로
설명해줄 수가 없었다.
“아, 아뇨… 그게, 그러니까… 괜히 신경이 쓰여서 그쪽을 공격했더니만…”
그래 우물쭈물, 더듬더듬 대답하자 내 말을 들은 콘스틴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흠, 백작께선 마나에 대해 민감한 신경을 가지고 계시나보군요. 무척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마나에 예민한 감각을 가진 존재들이 있긴 하죠. 그래서 마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 핵이 있는
부위가 괜히 신경 쓰이시는 걸겁니다. 잘됐군요. 백작님만 계시다면 핵이 어디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을테니까.”
“아니, 그렇게 알아낼 수 있었다면 미리 미리 공격좀 하시지 그랬습니까? 그럼 이렇게 힘빼지는
않아도 됐을텐데…”
콘스틴스 뒤로 남작이 투덜거리는 어조로 말하자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쩝… 그게 말이죠… 저 골렘들이 가까이 왔을때에나 알 수 있는 거 같은데요? 일예로, 저렇게
멀리 있는건 신경 쓰이는 부분이 없는걸요.”
그러면서 내가 저 멀리서 무사들과 대치중인 골렘을 가르키자 이번에는 폰트팩트 백작이 고개를
끄덕여다.
“하기야… 여기는 거대한 마법진 안인데다 이 주위도 우리가 윈드 실드를 쳐놨으니 가까이 가지
않는 한 못알아챌수도 있겠군요.”
“그럼… 직접 가까이 가시는 방법밖에 없겠군요.”
마법 길드 소속의 한 마법사의 말에 나는 속으로 저 치열한 싸움 터로 뛰어 들어야 하나… 싶어
헉스 하는데 다행이도 콘스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좋지 못하다. 백작님이 저 전투장에 끼어든다면 오히려 남에게 짐만 될 뿐이지. 그냥
저쪽에서 골렘 한놈씩만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겠구나.”
그리하여 발빠른 용병 한병이 앞쪽으로 달려가 이러한 내용을 보르바 할레언 백작에게 전달
했고, 백작의 지휘 아래 골렘이 하나 하나씩 안쪽, 그러니까 내가 있는 곳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덕분에 수월하게 골렘들을 처리하게 되었지만, 내가 핵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동안 혹시나
방해가 될까 싶어 마법사들은 무사들을 지원하던 마법을 중단해버려 앞으로 나가있던 무사들이
전보다 쬐께 더 고생을 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골렘을 처리하다보니 있는 골렘을 우리가 다 부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정말
우리를 지켜보는 자가 있어서 이제 골렘은 소용 없다고 생각한건지 더 이상 골렘이 나타나지
않아 우리는 다시 전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굴이 생각보다 굉장히 길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천천히 전진했다고 해도 해가 져서 입구가 어두컴컴하게 보이기 시작했는데도 던전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 거였다.
긴장한 채 전진하느라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 먹은 아침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고 계속해서 걷느라 일행도 탈진한 상태이고 해서 할레언 백작은 하는 수 없이 휴식을 명했다.
하기야, 동굴 입구가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전진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던 것이다.
혹여나 길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좋은 자리를 찾을 생각도 안 하고 그자리에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사람들은 물과 육포를 꺼내 허기와 갈증을 달랬다.
나무가 없으니 모닥불을 필 수도 없었다.
오로지 마법사들이 띄어놓은 라이트만이 안개에 감싸인 이 세상에서 유일한 빛이었다.
그것도 마법사들이 모두 탈진할까 두려워서 이동할때의 1/3 수준의 라이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꺼버렸기에 아까보다도 한층 어두컴컴한 분위기였다.
그 덕분인지 아무런 사망자도 없이 – 물론 다친 사람은 생겨 버렸지만… – 골렘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침울했다.
말을 꺼내는 것마저 꺼려지는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조용히 할 일을 찾아서 하거나 일찌감치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나는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바꿔보자 입을 열었다.
“거참 이상하네요. 골렘들도 수월하게 물리쳤는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어둡죠? 불이 적어서
그런가?”
그러면서 나는 쌀쌀한 주위 공기도 덥힐 겸 불의 하급 정령 카사를 불러내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클라우드 남작이 – 뭔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모두들 가까이 붙어
있었다. –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아마도… 여기에 쳐진 결계 영향일 듯 합니다. 안개하고 미로 마법만 쳐진줄 알았더니, 사람의
심리를 가라앉히고 불안하게 만드는 심리 마법도 함께 쳐진 것 같군요. 불안하게 해서 그냥 돌아
가도록 말입니다.”
“거기에 기온도 낮추고 말이죠.”
내가 몸을 한번 부르르 떨며 투덜거리자 첼릿이 즉시 반응했다.
“해인님, 추우십니까?”
기실 정글에 들어올때 무더운 기온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옷을 얇게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노리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동굴 안의 기온은 마치 중앙 대륙의 가을 밤의 기온
정도라서 다른 사람들도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그나마 낮에는 계속 긴장한채 움직이고 있어서 나았지만, 지금은 찬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가만히 있자니 더 추위를 느끼는지도 몰랐다.
첼릿이 여벌옷을 꺼내 어깨에 둘러주려고 하자 나는 배시시 웃었다.
“괜찮아요, 카사를 불러냈으니 조금 있으면 따뜻해질 거예요.”
그러자 첼릿이 한숨을 내쉬더니 옷을 그대로 내 어깨에 둘러주며 말했다.
“해인님, 정령은 그냥 돌려보내시고 이대로 견디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
질지도 모르는데 힘을 아끼셔야죠. 정 추우시면 제게 붙으십시오. 체온을 나누면 그렇게 크게
춥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 그럴까요? 흠, 그럼 듀비도 이리 와요. 우리 셋이… 아니구나. 램버트, 램버트도 이리오시죠?”
내 부름에 램버트는 날 쓰윽 바라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날 뭘로 보는 거냐? 우리 드워프는 이 정도의 기온에 굴복하지 않는다. 너희들이나 실컷 체온을
나눠라.”
“에… 같이 붙는게 좋을텐데… 뭐, 싫으시다면… 우리 셋이 붙어서 자도록 하죠?”
붙어 잔다고 해도 야시시한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드러누우면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 때문에 견디기 어려웠기에 바닥에 침낭을
여러곂으로 깔고 그 위에 엉덩이만 올려놓은 채 다른 사람의 등을 마주대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꼬옥 껴안고 자는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이 방법도 충분히 괜찮았기에 – 거기다 아무리 추워도
동성과 껴안고 자고 싶지는 않았을테니 – 다른 사람들도 모두 두셋이 모여서 이러한 방식으로
자리를 잡고는 잠이 들었다.
덕분에 춥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과 등을 붙이고 있느라 쭈그리고 앉은 채 잠을 자야 했기에
다음 날 일어났을때에는 온 몸이 엄청난 알이 배긴 것처럼 엄청 뻐근했다.
“아구구구…. 젠장, 빨리 던전을 찾던지 해야지 이거야 원… 오늘 밤에도 이렇게 자고 싶지는
않군.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이던가…”
클라우드 남작이 투덜거리며 뻐근한 팔다리를 두드리자 그와 등을 맞대고 쪼그린채 잠들었던
앤더슨 스니볼리가 엄청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안에 도착하기를 간절히 바래야겠죠.”
몬트리올경도 뻐근했던지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며 남작의 말을 받았다.
모든 사람들의 심정이 그와 같았던 모양인지, 그날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전진하는 일행의
속도는 전날에 비해 많이 빨라졌다.
게다가 그 전날과는 달리 우리를 위협하는 골렘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서 전진 속도에 도움을
줬기에 우리는 날이 저물기도 전에 던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던전으로의 접근을 막는 거대한 마법 결계를 벗어났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짙은 안개가 낀 길이 이어질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한 지점을 지난 순간 우리
앞을 방해하고 있던 짙은 안개와 낮은 기온이 마치 물에 씻겨 나가는 비누거품처럼 한순간에
싸악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험난한 시험을 통과한 우리를 축복이라도 해주는 듯 우리 앞에는 밝은 햇빛을 받고
있는 넓고 푸르른 초원이 쫘악 펼쳐졌고, 그 초원 한 가운데에는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아담하고
예쁜 집 한채가 서 있는 것이었다.
“어쩜, 저렇게 예쁠까… 나도 저런 집에서 살아봤으면…”
그 모습을 본 쥬디 블러드무어경이 감탄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감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새하얀 벽과 초록색 지붕, 그리고 지붕에는 다락 창문인듯한 자그마한 창문이 달려 있었고
벽에는 아치형의 커다란 창문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집 주변에는 지금도 누군가가 계속 가꾸고 있는 듯한, 내 허리에도 미치지 못할 키 작은 관목
들이 울타리인양 둘러싸고 있었다.
“저게… 던전인감?”
“던전이라기보다는…. 별장 같구만…”
“무시무시한 괴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동감이야. 문 두드리면 예쁘장한 아가씨나 인심 좋아보이는 부인이 나와서 어서오세요… 라고
할 거 같아.”
사람들이 그렇게 한 마디씩 주고받으면서 홀린 듯 초원 위에 홀로 우뚝 선 집을 바라봤지만,
여기에 오기 전 엄청나게 위험한 장치가 되어 있다는 충고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에 어느
누구하나 그 곳에 다가갈 엄두를 내지는 않고 초원 밖에서서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이 곳을 발견했던 예전 모험가 일행의 말에 의하면 던전을 발견하자마자 동굴 속에서와는 달리
살기 어린 매서운 공격들이 날아와서 던전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피하느라 급급하다가
뒤를 돌아 도망쳐 나왔다고 했었다.
그래서 우리들도 안개가 걷히고 햇볕이 보이자마자 전방의 멋진 풍경을 볼 틈도 없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살기 어린 매서운 공격을 막고자 초긴장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고 공격은 커녕 돌맹이 하나 던져지는 일도 없자 의아해서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다 멋진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황당해하던 일행이 한 마디씩 주고받은 후 한참이 지나도 우리를 공격할 어떠한 조짐이 보이지
않자 공격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보르바 할레언 백작은 거기서 좀 더 기다리다가 안되겠다
싶었던지 휴식을 명하고 각 국 리더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들은 초원에 들어가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들었지만, 왜 이런 일행 중에는
가까이 가는 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평소 영화에서 그런 사람들이 제일 먼저 목숨을 잃는 걸 보고 쯧쯧 혀를 차던 나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막가는게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슬금 슬금 초원쪽으로 다가갔다.
“해인님!”
그 모습에 얼른 첼릿이 질책하듯 날 부르기에 나는 씨익 웃으며 돌아봤다.
“아니, 그냥 가까이서 한번 보려구. 위험한 짓은 절대 안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우리가 잠시 머물고 있는 곳은 막 초원이 시작되려는 듯 풀들이 드문 드문 나 있는 곳이었다.
안개가 사라진 지점부터 내 걸음으로 10여 걸음쯤 (그 공간이 우리가 있는 곳) 가면 그 곳부터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야생초로 뒤덥인 초원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야생초들로 빼곡하게 뒤덥힌 곳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 그 곳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고 그 바로 바깥쪽에서 살펴보려 했던 것인데, 첼릿은 그걸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안됩니다. 그러다가 일행을 향해 공격이 시작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구요?”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붙들고는 다시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가며 책망하듯 말하자 나는
첼릿의 손길에 다소곳이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일행들이 괜히 공격을 받는 건 한번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에이…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할 거였다니까요.”
“그래도 절대 안됩니다. 어차피 잠시 후에는 눈으로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직접 들어가기 까지
할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일행들이 있는 곳까지 나를 끌고온 잭슨은 듀비와 램버트 사이에 날
앉히더니 엄한 눈초리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여기서 꼼짝 말고 계십시오.”
그러면서 첼릿이 내 바로 앞에 주저앉자 나는 완전히 일행들로 인하여 삼면이 막힌 형국이 되어
버렸다.
물론, 첼릿이 내가 허튼 짓을 못하도록 감시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기에 내 입에서
허탈한 미소가 흘러 나왔다.
“체, 첼릿…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렇게 할 필요는…”
그러나 첼릿은 괜히 저 푸른 초원으로 시선을 돌린 채 내 말은 싸악 무시했다.
‘끄으응… 어차피 함부로 초원에 다가갈 마음도 사라졌는데…’
하지만 폼을 보아하니 그런 말을 해봤자 첼릿은 이러한 자세를 풀것 같지도 않기에 나는 얌전히
입다물고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심각하게 머리를 맞댔던 지도부측 회의도 끝이 났다.
뭐, 솔직히 결론은 나와 있을터였다.
처음부터 엄청난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한 상황에서 시작된 탐험이었으니 지금에
와서 엄청 수상하다고, 위험할께 뻔하다고 해서 이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테니 강행돌파 한다고
나올 수 밖에…
단지 동굴에서와 다른 사항이 있다면 모든 일행이 한 곳에 뭉쳐 가기보다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면 공격 마법이 사방으로 분산될테고, 운이 좋거나 능력이 되는 팀은 눈앞에 보이는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뭐, 말이야 위험을 분산시킨다고 하지만 보니까 각 나라들이 자신들이 먼저 도착하거나, 아니면
위험에서 뒤로 슬쩍 빠지려는 등의 각자 자신의 나라에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내기 위해 머리를
짜내어 도출된 결과인 듯 싶었다.
대신 어느 팀 먼저 출발하고 어느팀은 나중에 출발하는 건 없애고 각 국 일행씩 멀찍이 떨어진
채 같은 시간에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저 푸른 초원 위에 자리잡고 있는 예쁜 집에서는 어떠한 공격의 조짐도 보이지
않아 리더들측에서는 내침김에 점심을 먹고 강행돌파 하기로 했다.
먹고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고 하지 않던가?
오랜 시간동안 공격이 없어서 그런지 일행들은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은
느긋한 표정으로, 거기다가 동굴 안에서는 꿈도 못꾸었던 모닥불을 피우고 스튜를 끓이고
고기를 구웠다.
사실 예상되는 위험만 아니라면 이 곳은 소풍 장소로는 최적의 장소인데다가, 비록 내색은
안 했지만 저 곳을 돌파하여 뭔 일을 당하게 된다면 지금의 식사가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리더들도 푸짐하게 차려 먹으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지글지글 거리는 고기 굽는 소리가 들려오고 구수한 스튜의 냄새가 그 뒤를 따르자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동굴 안에서는 불도 못 피웠지만, 그 바깥에서도 불을 피워 음식을 했지만, 언제
어디에서 몬스터들이 나타날지 몰라 긴장속에 이런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닌 급조된 음식으로
배만 채우는 식으로 식사를 해결했는데, 그때와는 달리 그나마 제대로 된 음식 – 물론 식당에서
나오는 것에 비하면 조잡할테지만 – 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기분이
사르르 녹았던 것이다.
이제 이 식사 시간이 지나면 언제 다시 이런 식사를 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으니 당연한지도
몰랐다.
“으으으음~~ 정말 맛있구만. 이럴때 맥주 한잔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더 좋았을텐데…”
두툼한 베이컨 한 입을 잘라먹은 램버트가 감동어린 표정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자 첼릿이 피식
웃었다.
“어쩔 수가 없지요. 그래도 무사히 돌아가기만 하면 어디 맥주 뿐이겠습니까? 최고급 포도주도
문제 없지요.”
“아아, 가끔 인간 사회에 가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어. 드워프 마을에서는 구경도 못할 신기한
음식들이 많거든. 흐흐흐, 이번에 나가면 한번 제대로 돌아봐야지.”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내 옆에서 묵묵히 자기 몫의 음식을 먹고 있는 듀비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듀비는 음식을 별로 가리지 않는 거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없는 거 같고… 듀비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뭐예요?”
내 질문에 듀비는 잠시 고개를 갸웃 하더니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딱히 좋아하는 건 없는것 같습니다. 저에게 음식은 배만 채워주면 되는 것이거든요. 딱히
좋아해서 찾는 건 없었습니다.”
듀비의 말에 내가 ‘그래요?’ 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며 뭐라고 말하려는 찰라 램버트가 끼어들었다.
“거참 불쌍한 종족이로구만. 설마 자네 종족 모두 음식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음식을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다니… 그런 슬픈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음식은 자고로 맛으로
먹어야 하는 거야, 맛으로! 음식 먹는 기쁨을 모르다니…”
그러면서 정말 안됐다는 표정으로 램버트가 듀비를 바라보았지만 듀비는 어깨만 으쓱 거릴
뿐이었다.
“뭐… 저희 종족 전부가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 주변에서는 딱히 맛이란 것을 찾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흠… 그런건 인간과 참 다르군요. 뭐, 종족이 다르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음식을 즐기는 건 유사 인종 대부분이 그럴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첼릿은 약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듀비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음식의 맛을 즐기지 않는다는 건 램버트님 말대로 슬픈 일인거 같아요. 이번에 돌아가면
우리 한번 맛있는거 먹으러 다녀요. 뭐, 멀리 가지는 못할테지만, 그래도 도시에서 맛있는
식당이라도 알아서 한번 순례 하자고요. 그럼 혹시 알아요? 듀비도 음식을 맛으로 먹게될지.”
내 말에 램버트가 짧은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아, 그거 좋은 생각이다. 나도 거기에 참여하도록 하지.”
“아하하하, 환영할게요.”
그렇게 다른 일행들에 비해 떠들썩하게 식사를 한 덕분인지 우리가 식사를 끝냈을쯔음에는 다른
일행들은 벌써 식사를 끝낸 것으로도 모자라 정리까지 거의 다 끝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리 일행들도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흠, 저기에도 어떤 마법이 설치되어 있단 말입니까?”
전체 리더인 보르바 힐레언 백작이 묻자 마법 길드 일행의 리더인 콘스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략 환상 마법과 물 계통의 공격 마법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마법이 더 설치되어 있을수도 있지만, 지금은 두 마법의 힘이 강력해서 다른 마법은 잘 모르겠군요.”
콘스틴스의 말에 힐레언 백작의 고개가 갸웃 거렸다.
“그렇다면… 지금 보이는 저 초원의 모습도 가짜라는 겁니까?”
“그럴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설치한 것도 아니고 설치된 마법을 확인한 것도 아니니 장담은
못합니다. 결국은… 부딪혀봐야 알겠지요.”
그 말에 힐레언 백작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각 국 리더들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무운을 빌겠소. 모두들 저기서 무사히 만나기로 합시다.”
“백작님 또한 행운이 있으시길…”
“여러분들에게도…”
팀은 역시나 새클턴국, 마르타국, 벨레니국, 녹스국으로 갈렸고 마법 길드에서 나온 이들은
찢어져서 몇명씩 각 국에 합류하기로 했다.
사실, 마법사들이 많으면 전력이 증강되어 좋기는 하겠지만, 지금처럼 기동성 또한 절실히
필요한때에는 마법사의 딸리는 체력이 걸림돌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 한 팀에서 전적으로 마법사 길드 소속들을 모두 보호하기도 어려웠고, 혹시나 마법사 길드를
보호하는 팀이 전멸하기라도 하면 큰일이기에 그렇게 흩어놓은 것이었다.
한 곳에 모여있던 리더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눈뒤 각 팀의 리더들이 자신들의 일행을 이끌고
미리 정해진 장소로 이동했다.
우리팀도 리더인 몬트리올경이 일행들을 이끌고 다른팀과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 도착하자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전체적인 작전은 다른 팀들과 같이 출발한다는 거였지만, 세부적인 사항은 팀 일행끼리 의논해야
했던 것이다.
“제 생각에는 어차피 다른 나라들도 같은 시간에 출발할 것이 뻔하니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전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초원 안으로 들어가면 공격 마법은 각 나라들로 분산될테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몬트리올경은 아무래도 많은 공을 세우는데 대한 집착을 다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클리우드 남작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데에는 먼저 도착한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먼저 도착하는 사람들이
먼저 공격을 받고 죽는 수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아마 다른
나라들은 몰라도 마르타국만은 그렇게 생각할겁니다.”
“흠… 그렇다면 다른 팀들이 움직이는 걸 보아가면서 거기에 맞춰 움직이도록 하지. 한… 두번째나
세번째쯤 되도록 하면서 말야.”
리건이 그렇게 말하자 몬트리올경이나 클리우드 남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용병대장 트래비스도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는 방법은 역시나 마법사가 가운데 서고 그 주위를 무사들이 둘러싸는게 좋겠지요?”
몬트리올경의 말에 이번에는 트래비스가 입을 열었다.
“이러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는 잠시 말을 끊고 자신에게 시선이 몰린다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기동성을 확보해 놓는게 좋을 듯 싶습니다. 그런데,
그러자면 마법사들의 체력이 문제겠지요? 그러니 각각의 마법사들 옆에 용병들을 한 놈씩
배치해 놓는 겁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들이 마법사들을 업고 달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트래비스의 말에 몬트리올경이나 리건은 혹한 표정이었지만, 마법사인 클라우드 남작은 못마땅
하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마법사들도 빨리 달릴 수 있네. 간단한 마법을 쓰면 자네들보다도 훨씬 빨리 달릴 수 있어!”
그러나 그의 말은 몬트리올경에 의해서 반박되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왕이면 마법사들의 체력을 보존해놓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무사들이
지쳤을때 마법사들도 같이 지쳐버리면 어떠한 위험이 닥쳐왔을때 서로 짐만될테니까요. 차라리
무사들이 지쳐있을때 마법사들이라도 체력을 보존해놓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듯 하군요.”
“제 말이 바로 그거입니다.”
트래비스까지 거들고 나서자 클리우드 남작의 찌푸려진 눈쌀은 펴지지 않았지만, 납득은
되었던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뭐… 일리 있는 말이군.”
“그리고 들어갈때 마법을 펼친 채 들어가는 것 보다는 뭔 일이 있을때 펼치도록 해두는 것이
좋겠지요. 처음부터 무리하게 마법을 펼쳐서 체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을테니까요.”
그렇게 벨레니국 일행은 최대한 마법사들의 체력을 보존하여 나중을 대비하는 한편 모두들
무리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자, 그럼 슬슬 준비하도록 하죠. 약속된 시간이 다되어 갑니다.”
마나를 주입하면 밝은 빛을 내었다가 마나가 떨어지면 빛도 같이 흐려져 결국에는 검게 변하는
수정을 꺼내보이며 몬트리올경이 일행들을 재촉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가 꺼내들어보인 수정은 빛이 무척 흐려서 곧 꺼질듯이 보였기에 일행들은
그가 재촉하기 전에 알아서 서둘러서 대열을 갖췄다.
그리고 드디어 수정에서 깜빡깜빡하던 빛이 꺼지고 검게 변하자 몬트리올경이 외쳤다.
“전진!!”
다른 팀들을 힐끗 보니 그들은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에 맞춰 우리도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고, 일행들 중 뒤쪽에 위치해 있던 나도 그 속도에
맞춰 막 초원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이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눈앞에서 별이 번쩍 했다.
“아코!!”
다른 사람들은 잘만 보내줬으면서 나만은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갑자기 생겨서 그 벽에다 얼굴을
정통으로 박았던 것이다.
제일 큰 충격을 받은 코를 부여잡고 뒤로 두어걸음 물러난 나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막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려고 노력했다.
“에구구구~~!!”
그 보이지 않는 벽과 내가 충돌하는 소리가 어지간히 컸던 모양이다.
내 주위에 있던 이들은 물론이고 나보다도 먼저 앞으로 나간 일행들까지 놀라서 되돌아 왔으니
말이다.
“해인님, 괜찮으십니까?”
다급한 첼릿의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고통과 눈물을 참느라 말을 해줄 수가 없어 손만 휘휘
저어 보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약간 당황스러운 어조의 리건 음성도 들려왔다.
물론, 나는 그의 질문에는 대답해줄 수 없었지만…
‘나도 그게 알고 싶다우. 어구구 코야…’
잠시 후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자 나는 간신히 눈에 맺힌 눈물을 지우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내 주위 가까운 곳에는 나와 친한 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 너머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일행들이 황당한 표정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백작님?”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짜증스런 기색이 역력한 몬트리올경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내가 일어난 걸 보더니 주위 사람들을 헤치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벌써 출발했단 말입니다. 백작님 때문에 약속을 안 지키는 나라로 찍히고
싶지는 않군요.”
“나도 그러길 바라지는 않습니만, 제 능력으로는 어쩔 수가 없군요. 뭔가가 절 가로막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고, 나도 이유를 알고 싶었는데 몬트리올경이 마치 내가 일부러
그랬다는 것 처럼 비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자 열받아서 같이 땍땍 거리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백작님이 저 곳으로 못가게 막기라도 한단 말씀이십니까?”
“그거야 저도 모르죠.”
기가막히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몬트리올경을 마주 쏘아보며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아까
날 가로막았던 보이지 않은 벽이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면서 보이는 건 다른 국가 사람들은 벌써 저마치 앞으로 나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록 가운데 있는 집에 도착하려면 멀었지만, 그래도 초원 안으로 꽤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연유인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그래서 몬트리올경이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빨리 가도록 하죠.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너무 늦었습니다.”
몬트리올경은 내가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출발하려는 줄 알고 따라오면서 재촉 했다.
“글쎄요…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말이지요.”
그런 몬트리올경에게 나는 시큰둥하니 대꾸하면서 초원쪽으로 손을 뻗었다.
왠지모르게 아까 내 앞을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은게 우연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과연, 내 느낌이 정확했는지 내가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눈앞에서 스르르 뭉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내 손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바람?’
아까는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인데다 움직임이 너무나 조용했기에 눈치채지도 못하고
당했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눈치챌 수 있었다.
거기다가 바람이라면…
‘설마… 실피드님?’
황당해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실피드의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나 다른 두 정령왕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때 같으면 나에게 이런 일을 행사할때 근처에 나타나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 나는 고개를 갸웃 거렸다.
‘에… 아닌가? 그럼, 누가?’
그러나 이런 나의 고민은 길게 가지 못했다.
가만히 서 있는 날 냅두지 못하고 몬트리올경이 또 쨍알댔던 것이다.
“백작님, 뭐하시는 겁니까? 지금 한가하게 가만히 서서 일광욕이나 하고 계실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누가 가기 싫어서 안 간답니까? 날 못가게 막고 있잖아요!”
그의 짜증어린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나는 내 앞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을 손으로 탁탁
치며 맞받아 쳤다.
내 손짓에 의하여 무언가가 내 앞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벽에 물체가 부딪히는
듯한 ‘탁탁’ 소리까지 났기에 사람들은 내 말을 믿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환장하게도 당황한 첼릿이 다가와 “도대체 뭐가…”하면서 내가 손으로 집고 있는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그의 손은 날 막고 있는 벽을 스윽 통과해 초원쪽으로 잘만 뻗어지는
거였다.
“엥?”
“어어…?”
기가막힌 나와 당황한 첼릿이 서로 마주보는 사이 몬트리올경의 분노에 찬 외침이 울려 퍼졌다.
“백작님, 지금 장난이나 하고 계실 때입니까?”
“몬트리올경, 경은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입니까?”
내가 인상을 팍 찡그린채 그를 돌아보며 묻자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뭔 생각을
했는지 눈을 가늘게 뜬채 날 노려봤다.
“그럼 그게 뭡니까? 설마… 우리를 못 가게 방해하시려는 겁니까?”
그의 근거 없는 모함에 나는 기가막혀 탄식을 터트렸다.
“허… 아니, 내가 그럴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럼 왜 백작님만 초원으로 못 들어가는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잘만 들어가는 구만…”
“아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나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몬트리올경과 내가 핏대를 세우며 본격적으로 바락바락 싸우기 시작하는데 리건이 끼어들어
중재에 나섰다.
“자자, 둘다 그만 하시오. 지금 우리끼리 싸울때요?”
“하지만 후작님, 지금 백작님 때문에 우리 일행만 전진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몬트리올경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항의하자 리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경의 심경은 충분히 이해하오. 하지만, 엠브로스 백작 또한 지금같은때에 괜히 엉뚱한
장난을 저지를 사람또한 아니지 않소? 분명 무슨 연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오.”
리건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아, 글쎄 제가 일부러 그러는게 아니라니까요. 저도 왜 그러는지 모른다구요!”
내 말에 리건은 고개를 갸웃 하더니 내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두세걸음 떨어진 곳으로 가서는
자신이 초원으로 몇발자국 들어가보더니 도로 나와서 나에게 손짓했다.
“여기로 한번 가보지?”
그에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 해보이고는 그가 초원으로 들어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초원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바람의 벽이 날 가로막았다.
그 뒤로 몇번 자리를 옮겨보고 다른 사람들과 해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들은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데 오로지 나만 가로막는 거였다.
“거참… 아무래도 저 안에 있는 누군가가 백작님이 들어오는 걸 원치 않는 모양이군요.
이유가 뭘까요?”
그 모습에 클리우드 남작이 턱을 쓰다듬으며 누구에게랄것도 없이 질문을 던지자 몬트리올
경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모르죠, 저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밉보였는지…”
‘하여간 말을 해도 꼬옥…’
내가 몬트리올경을 흘겨보며 속으로 꽁알거리는데 리건이 말했다.
“어쩌면… 엠브로스 백작이 들어오는 걸 두려워하는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마음에 들어서
던전 안으로 들어가서 다치는걸 원하지 않는 걸지도…”
리건의 말을 묵묵히 듣던 나는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분명히 전체 일행이 동굴 입구를 들어오기 전에 아버지를 비롯하 네 정령왕들은 이 곳이 수상
하다며 조사한다고 먼저 들어갔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먼저 간 그 분들의 모습이 콧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였다.
그렇다고 그분들께 뭔 일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말이다.
‘아니면 여기서 뭔 일을 벌이다가 체력이 떨어져서 정령계에 가 계시는 건지도… 어, 그러면
혹시 날 막는건 경고일까나? 체력이 떨어져서 여기에 직접 와서 돕지 못하니까 정령계에서
지켜보면서 경고를 하는건감?’
고개를 갸웃 거리면서 나는 다시 초원쪽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자 그 즉시 바람이 미묘하게 움직이며 내 앞을 가로막았지만, 잠시 그 바람의 벽에 대고
힘을 주어본 결과 내가 엔다이론이라도 불러서 강행돌파한다면 충분히 뚫을 수 있으리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뭔가 경고를 해주는 걸까? 그럼 말로 해주면 될텐데… 아, 정령계에서는 나에게 직접
말할 수 없지? 흠… 그렇다면 정령을 보내서 전달하기라도 하던지…’
그렇게 속으로 종알거리면서 나는 내가 들어가지 못하는 지점 바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초원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황당한 걸 발견했다.
푸르른 야생 풀들 사이로 운디네들이 방긋 방긋 웃으며 놀고 있는 거였다.
‘우, 운디네? 운디네라구?’
눈을 씻고 다시보니 운디네가 한명이 아니라 수십명이 거기서 노닐고 있었다.
‘허허… 운디네라니…’
보통 땅에는 땅의 정령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겉으로 나오지 않고 땅속에서 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보니 동굴에 들어오기 전, 동굴이 있던 절벽을 실프들이 웃으면서 통과하는 걸 보고
황당해 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정령왕들은 그때 그 절벽이 환상이란 것을 말해주었고.
‘자, 잠깐만… 그럼 이 초원도 환상이라는 이야긴데? 운디네가 있다는건… 이게 땅이 아니라
물이라는 이야기잖아? 그럼… 이 초원 전체가 다 물? 혹시 호수?’
내가 얻은 결과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뒤에서 우리 일행의 리더들이 의논하는게
귀에 들려왔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백작님을 못들어가게 하는게 뭔지는 몰라도, 백작님때문에 우리 일행
모두가 마냥 여기 있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비록 전력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냥 우리끼리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얄미운 몬트리올경의 말에 이번에는 클리우드 남작도 거들었다.
“후우… 후작님,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만 여기 있을 수는 없지요.”
거기다가 우리팀에 배분된(?) 마법사 길드의 마법사도 재촉했다.
“물론입니다. 우리도 어서 들어가지요? 여기는 큰 위험이 없는 것 같으니 백작님은 여기서 우리를
기다리시는게 좋겠습니다.”
“다른 팀들좀 보십시오.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은 채 벌써 반이나 갔군요.”
몬트리올경의 투덜거림에 다른 이들까지 초조한 얼굴로 리건에게 재촉하는 빛을 보내자 리건이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날 바라봤다.
“어떻게 할래?”
그래 나는 이들에게 말해주려 했던 내 추리를 다시 속으로 집어 삼켰다.
‘맘대로들 하라지.’
“저때문에 지체 되었다니 정말 죄송한 마음을 금할 수 없군요. 그렇다면 저는 제가 데리고 온
사람들과 여기 그냥 있겠습니다.”
“그럼 결정 되었군요. 자자, 다들 움직일 준비를 해라. 늦었으니 서둘러야 한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몬트리올경이 반색을 하면서 뒤돌아 다른 일행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나는 결국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디 행운이 함께 하시길요. 이건 내 예상인데… 저기 보이는 집까지 가는건 쉽지 않을 걸요?
내 예상이 틀리길 바라지만… 나중에 나보고 경고 안 해줬다고 하면 안돼요? 나는 분명하게
말했으니까.”
내 말에 리건과 트래비스 용병대장이 날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흘려 들었다.
뭐, 어차피 그들 또한 저 안에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예상했을테니 말이다.
거기다가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아무런 방해 없이 전진하고 있었으니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