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6)
제 5화 새로운 체험(?)
나는 내가 이제 정령의 기운을 다룰 줄 (물론 아직 익숙한 건
아니었지만서도) 알게 되었으므로 엘라임 방식의 그 교육이라는
것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왠걸…
처음 정령의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되어 가라앉은 배의 1/4 가량
– 나중에 배에서 나와 보니 배 가운데에 엄청나게 커다란 구멍이
뻥 뚤려 있었다. – 을 부순 날, 나는 드뎌 교육에서 해방된 줄 알았다.
그래서 그날 밤에는 ‘아, 드뎌 나도 늦잠을 잘 수 있게 되었구나…’
라는 생각에 정말 기쁨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었다.
그러나, 왠걸….
그 다음날 이른 아침, 나는 어김없이 미처 깨지도 못했는데 엘라임에게
잡혀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
[아, 정말… 이제 정령의 기운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침마다잠에서 깨기도 전에 바다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하도 매일 겪는 일이다보니 그렇게 화가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늦잠을 잘 수 있을거라는 희망이 산산조각나자 허탈해져서
한마디 건네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랬더니 엘라임이 하는 말이…
[네 엄마가 그랬는데, 사람은 죽을때 까지 교육을 받아도 부족하다고하더라.] [에… 그….]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도 그 이야기를 학교에서 들었던 터라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는데, 엘라임은 그냥 해본 말이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 뭐… 그 말이 아니더라도, 넌 아직 정령의 기운을 쓴다고 할 수도없어. 제대로 쓰려면 아직 한~ 참 멀었다. 그러니 잔말 마고 갔다 와.] [예이…]
그렇게 해서 다시 시작된 교육은 전에 받던, 무조건 정령의 기운을 느끼거나
움직이게 하려는 목적이 아닌, 어찌 보면 날 재주꾼으로 만들려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첫 날 내가 한 일은 맨 처음 엘라임이 나에게 시도한 일로, 물컵에 담겨있는
물을 가지고 손가락에 붙어 딸려 올라가는 물기둥을 만드는 일이었고,
그 다음 날은 손을 안 대고 컵과의 거리가 약간 떨어진 상태에서 단순히
정령의 기운만을 사용해 물기둥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는 물컵에 담긴 물을 허공에 떠오르게 하는 것 부터 시작하여,
허공에 떠오르게 한 큰 물방울 한개를 여러개로 나누고 찌그러트리게 하더니만
밧줄 모양으로 길게 늘여서 자유 자재로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다.
나중에는 아주 가느다란 줄이 되어 내 몸을 감싼 채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하거나 아니면 실제와 똑 같은 사물의 모양으로 변형을 시킬 수 있어야 했다.
책이면 책, 꽃이면 꽃, 물로 만들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엘라임이 내놓은
사물과 완전히 똑같은 모양을 만든다는 건 참 어려웠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엘라임은 내가 물을 굉장히 세밀하고 자유 자재로
다룰 수 있도록 신경써준 것 같았다.
물론 그때에는 광대로 만들어서 내보내려는 줄 알았지만…
아마 엘라임이 정령이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내 재주로 돈 벌려고 그러는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뭐, 덕분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4, 5달쯤 흐른 뒤에는 – 바다 속에만
있었기에 날짜 관념이 별로 없었다. – 내가 물을 다루는 실력은 상급 정령인
엔다이론까지는 안되지만, 중급 정령을 뛰어넘는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물론, 내 정령의 기운만으로 보면 나는 상급 정령보다 좀 더 우위에 있다고
했다.
음.. 아무래도 그 경계가 상급 정령과 최상급 정령 사이인 듯 했다.
덕분에 이제는 바다속을 돌아다닐때도 엔다이론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스스로도 정령의 기운을 사용해 빠르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멀리 있는
물건도 물로 만들어진 밧줄로 이용해 집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는 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물이 사람들 눈에 보일 정도가
아닌, 그러니까 공중에 미세하게 떠있는 작은 물방울들 외에는 물이 없을
경우 일반 정령들은 그 공중에 있는 미세한 물방울들을 쉽게 모으고 불려서
물을 가지고 기둥을 만들건, 대접에 담건 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물을 불리고 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의 양은 일반
물컵의 반컵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이었다.
그러니까 내 두 손을 모아 뜰 수 있는 최대의 양의 물이 있어야만 내가
보통의 정령들 처럼 물을 불리고 기둥을 만드는 등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정령들은 물의 양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정령의
기운에 의해 자신이 낼 수 있는 능력에 한계를 보이지만, 나는 물의 양에
따라 능력도 비례하게 나타났다.
그러니까 물이 적으면 적을수록 큰 힘을 쓰지 못하고, 반대로 물이 많으면
많을 수록 큰 힘을 나타낼 수 있다는 거다.
덕분에 만약 싸움이 벌어진다면, 물이 없는 허허 벌판에서는 하급 물의
정령인 운디네에게도 꼼짝 못하지만, 물이 엄청나게 많은,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바다속과 같은 환경이라면, 조금 더 단련이 되었을 경우 상급 정령인
엔다이론도 제압하는게 가능하다고 했다. (이건 엘라임이 말해준 거다)
그래서 최상급의 정령과 비교하면 어떠냐고 물었더니 엔다이론과 엘라임은
엄청나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더니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최상급의 정령은 다른 정령들처럼 이 자연계에 나오지 못했다.
그들의 임무는 정령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기에 때가 되면 이
자연계로 나오는 정령들의 대열에 끼지 못했고, 그렇다고 정령왕들처럼
정령계와 이 자연계를 마음대로 왔다갔다 하지도 못한다.
단지, 그들이 이쪽으로 올 수 있는 경우는 이 곳에 사는 이들과 계약을
하는 경우인데, 그렇게 되면 정령계에서 사용하는 힘을 100% 다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지금의 내 능력 (그러니까 상급 정령보다 좀 더 뛰어난
수준 ) 으로도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반대로 정령계에서는 상급 정령과는 비교도 안되는 능력을
낼 수 있는 최상급의 정령이라 정령계에서는 틀림없이 내가 쨉도
안될 터였다.
그러나 정령계는 오로지 정령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육체를
가진 내가 갈 수가 없었기에 순수한 힘만으로 본다면 최상급 정령이
우위이지만, 주위 배경으로 보면 내가 유리하기에 다른 정령들 처럼
비교를 할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런 경우 내가 더 우위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뭐, 물이 없는 곳에서라면 그 반대이겠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니 난 물의 양에 따라 제약을 받으니 엘라임과 엔다이론 말처럼
누가 우위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마 물의 양에 따라 능력을 제약 받는 것이 내가 순수한 정령이 아닌
실체를 가진 인간, 엘프, 정령의 혼혈이라서 그러는 듯 했다. (나 같은
이가 없었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그렇게 지내는 동안 나는 가라앉은 배들이 있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쩌다 그 쪽으로 갈라치면 잽싸게 방향을 틀어 그 곳에서 멀어나곤
했다.
엘라임과 엔다이론은 내가 그 곳으로 안 가는게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내가 처음에 그 곳으로 간 이유 – 그니까 콩고물을 얻기 위하여 -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거니까 그 종이 다 그런가보다… 하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시체 하나 봤다는 이유로 그 곳에 다시 가는 자체를
두려워하는 걸 이해 못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냥 무서운걸 어떻게 그들에게 설명하겠는가?
그냥 무조건 싫다고 도리질을 치는 수 밖에…
그런데, 그 곳에 못가는 대신 내 마음 속에는 바다 밖에 있을 인간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런 마음은 바다속에 가라앉아 있던 배들을 보고 난 다음
부터 생기기 시작한 거 같았다.
엄마 집을 볼때는 바다 바깥에 어떤 인간들의 세상이 있을지 같은
건 별로 관심 있지도, 호기심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왜 배를 보고
난 뒤로 그런맘이 생긴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그 배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니까, 그 대신 엄마의
서재에서 혹시라도 바다 밖의 세상에 대한 책이 있을지 궁금해
찾아봤는데… 없었다.
엄마의 서재에는 온통 마법, 마법, 마법에 관한 것들 뿐이었다.
그 중에 유일하게 마법에 관련된 책이 아닌 건, 맨 처음 엘라임이
나에게 찾아준 요리책 뿐이었다.
그건 엄마가 엘라임과 은거할때 요리를 못해서 밥해먹고 사는데 지장이
되었기에 하나 특별하게 장만한 거라니… 그런거 보면 내 친모라는 분은
마법 외에는 세상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게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아, 하나 있기는 했다.
내 친부… 라고 할수 있는 엘라임.
어쨌거나, 배가 가라앉은 곳에는 못가는데다 엄마 서재에서 바다 바깥
인간들 세상에 대해 알 수 있는 책 하나 찾지 못하자 나는 이 세상의
인간사회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더 커져갔다.
왜, 사람의 마음이란 청개구리 같아서 속시원히 보여주면 오히려
호기심이 감소되는 법이지만, 안 보여주면 호기심이 두배, 세배로
커지지 않는가?
그리하여 나는 어느날 중대한 결심을 했다.
‘인간 세상에 가보자.’
내 수중에는 그날 배에서 건진 금팔찌 하나와 금화 다섯개밖에 없었지만,
뭐, 여차하면 다시 바다 속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돈이 없거나
인간 세상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다는 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곳에서 좀 떠돌아다니는 바람에 바다에서 멀어졌다 하더라도 아무
강이나 하나 찾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바다로 가는 건 쉬운 일일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까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건 즉, 내가 인간 세상으로 나간다 하면 엘라임이 허락해 줄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거였다.
인간 세상 잠깐 좀 구경하는 것이 뭐가 그리 큰일이겠냐만은, 왠지
엘라임은 허락 안 해줄 것만 같았다.
뭐, 보통 부모들이야 걱정이 되니 반대하겠지만, 엘라임은 내가 인간
세상 나가면 날 돌봐주는게 조금 더 귀찮아지니까 반대할 거 같았다.
그리고 엘라임이 반대를 한다면 나는 이 바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건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엘라임이 바로 물의 정령왕이 아니었던가?
그가 한마디 명령만 내리면 이 바다에 있는 모든 물의 정령들이 날
못 가게 막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중대한 결심을 했다.
‘가출하자.’
나중에 생각하면 참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한 엘라임의 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이 세상에 물이 없는 곳은 없고, 그 곳에는 어디나 물의 정령들이 있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엘라임은 그 어디나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난 그때까지 바다에서 벗어나면 엘라임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줄 알고 있었으니…
게다가, 그때까지는 엘라임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엘라임이 날 못
보는줄 착각까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주 대담무쌍하게도, – 엘라임이 보면 엄청 웃겼게지만…-
가출할 생각을 할 수 있었을테지만….
그리하여, 나는 그 결심을 한 날부터 가출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이대로 육지가 있는 곳 까지 헤엄쳐가서 뭍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그렇게 했다간 육지에 도착하기 전에 들킬 거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배’였다.
흔히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바다에서 지나가는 배에 구조 요청을 하면
대부분 다 들어주었던 거에서 생각해낸 것이다.
뭐, 실제로 바다에 빠져 있는 사람을 그냥 모른 척 지나갈 양심 불량의
배가 그렇게 많지 않을테고 말이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냥 헤엄쳐 가는 거나 배에 구조 요청을 해서 타고 가는
거나 그게 그거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배에 타면 엘라임의 시선에서
벗어날 것만 같았기에 아주 좋은 계획으로 보였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그때 엘라임은 날 지켜보면서 배를 잡고 웃었을 것 같았다.
‘멍청한 녀석’이라고 한마디 중얼거리기도 했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그 다음에는 배가 자주 다니는 일명 ‘뱃길’이라는 곳을 찾는 거였는데,
그건 쉬웠다.
엔다이론에게 물었더니 쉽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아마 그때 엔다이론은 내가 가라앉은 배 가까이에는 못 가니까 바다 위를
떠가는 배를 보고 싶은 걸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엔다이론 덕분에 난 생각지도 않게 바다 물 표면까지 올라가서
배가 지나가는 것 까지 목격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계획대로 착착 이루어지자, 그 다음에는 항상 나와 같이 다니던
정령들이 걸림돌이 되었다.
평소 날 도와주는 아주 좋은 녀석들이었지만, 엘라임의 명에 의해 내
곁에 온 녀석들이니 미안하지만 떨궈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배들이 자주 다니는 지점을 알아내고 익힌 나는 그 다음에는
정령들에게 ‘언제까지 너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나 혼자 한번
다녀 보겠다.’란 말로 떨궈 놓은 다음 집 근처부터 시작하여 천천히 혼자
다니는 연습을 했다.
솔직히 인간 세상에 가면 혼자 다녀야 할테니 미리 미리 연습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그리하여… 대망의 가출 계획 실행일날…
나는 내가 찾은 뱃길에 배가 얼마나 자주 다니나 미리 계산해 놨지만,
그게 하루나 이틀 정도의 오차가 발생했기에 아주 가슴 두근 두근 거리며
집을 나섰다.
시간은… 아침에 엘라임에게 바다 속으로 던져졌다가 돌아와서 엘라임에게
그 동안 물 다루는 연습의 성과를 확인한 다음, 과제 하나를 받은 뒤 엘라임이
돌아간 시각 부터 어두워지기 전까지 였다.
아마, 오후 2시 부터 저녁 6시나 7시 경쯤?
이 곳에는 시계가 없어서 정확한 시각은 몰랐지만, 날이 초여름 정도였으니까…
해가 아마 그때쯤에 질 것이다.
그때는 어두우니까 다른때는 나 혼자 내버려 두던 엔다이론이라도 해가
지면 곧장 날 찾아와서 내 곁에 있어주니까 그전까지는 배를 타야 해다.
만약, 못 타면 나는 내일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바다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뭔가 바다에 잘뜨는 걸로 잡고 있을 물체가
필요해서 진작에 약간 큰 나무 기둥 조각도 하나 준비해 놨다.
그걸 왜 가지고 나가는지 의아해 하는 엔다이론에게는 걍 씨익 웃으며
필요할 데가 있다고만 말했다.
드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수면 위로 나간 나는 수면 위에 양반다리
하고 앉아서 – 정령의 기운을 사용할 수 있게 된 후로 나는 물 위에서 걸을 수도,
달릴 수도, 춤을 출 수도 있었다. 음홧홧홧홧… 부럽지? – 초조하게 아무데서나
배가 나타나길 기다리기 시작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 말이 그 당시에 따악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한 1시간 정도 물 가지고 장난치면서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는 내 눈에 드디어
저 멀리서 배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였다.
처음에는 자그마한 점으로 보이던 그것은 잠시 후에 조금씩 커지면서
배의 형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앗싸~!”
나는 재빨리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손목의 팔찌와 주머니 속에 넣어둔 금화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옷은… 이 곳 사람들이 뭘 입고 다니는지 몰랐기에 그냥 내가 보기에 괜찮을
듯 하는 바지와 셔츠를 찾아 입고 있었다.
엄마가 여자라고 치마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그리고 배가 나로부터 약 100m 쯤 왔을때 부터 나는 한 손으로는 나무 기둥을
잡고 다른 한손을 열심히 휘저으며 소리쳤다.
“여기요오~, 살려주세요오~”
바다에 떠 다니는 사람치고 너무 목소리가 팔팔한거 아닌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배를 우선 잡는게 관건이었으므로 그냥 밀고 나가기로 했다.
배에서 날 봤는지 움직이던 배가 천천히 멈추더니 배쪽에서 첨벙~ 하는 뭔가
큰 물체가 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배에서 내려진 듯한 작은 보트가 내 쪽으로 저어 오기
시작하는 거였다.
드뎌 계획이 성공했구나… 하는 기쁨에 그 보트를 향해 헤엄쳐 다가갔다.
뱃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한 근육하는 보트에 탄 남정네들이 내가
다가가니까 보트를 멈추고 날 잡아 끌어올려주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기쁨에 차서 진심으로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보트 위에 있던 3명의 남자 중 유일하게 노를 안 잡고 있다가 날
끌어 올려준 남자가 씨익 웃으며 친절히 대답해줬다.
“뭐… 뱃사람이라면 당연한거 아니겠어?”
나는 그의 대답이 너무 고마워 배에서 내릴 때 내가 가지고 있는 금화로
사례라도 해야지.. 하고 결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배에 올라가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불룩 나온 배가
좋은 몸집으로 인하여 부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뿐, 조금도 둔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게. 정말 운이 좋았군.”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한국식으로 – 이게 이곳 예법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허허허, 그렇게 감사해 할 것 없네.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도리가
아닌가? 그런데.. 보아하니 꽤 어려 보이는데… 나이가 몇인가?”
나를 아래 위로 쓰윽 바라보며 묻는 말에 당연한 궁금증이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17입니다.”
내가 이 곳에 와서 얼마나 오래 바다 속에 머물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있을때는 이제 고 1의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던 터였기에 그쪽
나이로 치자면 18세가 맞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외국에서 나이를 이야기할 때는 만으로 이야기 했기에
한살 줄여 17세라 말한 것이다.
그러자 그 남자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만 입을 열었다.
“음… 얼굴이 약간 동안이로구만. 많이 봐줘야 17세로 보이는데 말야.
몸도 호리호리하고…”
내가 키는 컸지만 여자로 지낸 탓인지, 아니면 엘프와 정령의 혼혈이라서
그런지 근육은 없었다.
그래도 운동 신경은 제법 있는 편이라서 체육대회를 하면 반 대표 선수로
나가곤 했었다.
운동도 즐기는 편이었고….
“그래, 집은 어디인가?”
갑작스런 그의 질문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보니 이런 질문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생각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 인간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곳의 나라
이름이나 지역 이름은 하나도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바다 속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 아마 못 들어보셨을 거예요. 좀 구석진 시골이라서…”
그래서 이렇게 얼버무렸더니 그 남자는 사람 좋게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내가 이 세상 모든 지역을 아는 것도 아니니 그럴 수도
있겠구먼. 뭔가 사정이 있으니 내 더 묻지 않음세.”
그러면서 그가 가볍게 손짓하며 뒤로 물러나자, 날 구해주기 위해
보트를 저어왔던, 그리고 지금 내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두 남자가
갑자기 내 팔을 하나씩 붙잡으며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제압하는
것이었다.
“어?”
갑작스런 그 상황에 내가 어리둥절하며 보는데, 맨 처음 날 끌어 올려주고
내 인사에 친절히 대답도 해 주던 그 남자가 예의 그 친절한 웃음을 보이며
나서더니만 내 온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다행이… 고추가 있을 곳(어험험…)은 안 더듬었지만, 그래도 바지 주머니에
넣어 놨던 금화는 들켜서 고스란히 빼앗 겨 버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물론 배에서 내릴 때 어느정도 사례는 하려고 했지만, 그냥 빼앗기다니
되게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 남자는 내가 손목에 차고 있던 금팔찌까지
빼앗아 갔다.
“호오… 생각보다 부자구만?”
그렇게 놀리면서 말이다.
그리고는 곧 손가락에 있는 은반지로 보이는, 엄마의 유품을 보더니 그것도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주인이 죽거나 손가락이 잘리기 전에는 절대로 안 빠지는 마법
반지라 내 하얀 – 바다 속에만 있어으니 내 피부는 아기 피부처럼 무지 하앴다.
물론 잘 타는 체질도 아니지만… – 손만 시뻘개질 뿐 반지가 빠지지 않자 그건
그냥 포기했다.
“쳇….”
하지만 무지 아쉬운 듯 바라보는 걸 보아 나는 혹시라도 내 손가락을 잘라서
빼려는게 아닌가 싶어 긴장한채로 그를 바라보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듯 그는
그냥 뒤로 물러나 날 제압하고 있는 두 남자를 향해 지시했다.
“데러가.”
내가 얼이 빠져서 황당해 하고 있는 사이, 그 두남자는 갑판 밑으로 날 끌고
내려가더니만, 창고로 쓰는 법한 맨 밑에층에 도달해서야 커다란 쇠 자물쇠로
잠겨 있는 문앞에서야 멈췄다.
그 곳에는 그들 못지 않은 우락부락한 덩치의 대머리 남자가 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지루하다는 듯 몸을 꼼지락 거리다가 우릴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그러며 날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징그럽게 웃었다.
“이거.. 왠 놈이야? 히야… 사내 녀석 맞아? 피부가 여자 못지 않게 뽀샤시
하구만?”
말함과 동시에 내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내 오른쪽 팔을 붙든 남자가
그런 그를 제지했다.
“건들지 말고 문이나 열어. 애들 건드리는거 대장이 안 좋아하잖아.”
그러자 그 대머리 남자는 흠칫 하더니 뒤로 물러나며 투덜거렸다.
“쳇… 젠장… 그냥 한번 만져보는 것도 안되냐? 그나저나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애야?”
허리띠에 쇠사슬로 이어져 허공에 대롱 대롱 매달려 있던 열쇠를 잡아
자물쇠를 열며 묻자 내 왼쪽 팔을 잡고 있던 사내가 그 사내와는 조금
친한지 냉큼 대답해줬다.
“바다에서 건졌지. 큭큭큭… 우리가 누군줄도 모르고 구해주니까 좋아하는
꼴이라니…”
아까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냥 갈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으로 그냥 지켜보는 내 눈앞에 굳건히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어두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대머리 남자가 있는 곳도 창이 없어 햇볓이 안 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 곳은 그나마 등불이라도 있어 어둠을 밀어냈지만, 문 안쪽의 공간은
등불도 없어 무지 어두웠다.
그런 공간을 향해 두 남자는 나를 거칠게 밀어 넣었다.
“자, 얌전히 들어가.”
내가 그 둘의 힘에 밀려 문 안으로 들어가자, 그걸 기다렸다는 듯 대머리
남자가 얼른 문을 닫았고, 밖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이 곳에 와서 간뎅이가 부었는지 별로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어리둥절한 마음은 여전했다.
‘도대체… 여기가 뭐하는 데야?’
문이 닫힐 때에는 모든 빛이 갑자기 차단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잠시 후 나는 그 안을 떠도는 바람의 정령들 몸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들
덕분에 방안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나 외에도 약 20명쯤 되는 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자리잡고
있었는데, 워낙 쥐죽은 듯이, 존재감도 없고 미동도 없이들 있는탓에 나는
그들에게 말 걸기가 머쓱해져서 그냥 빈 공간으로 찾아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거야 원… 설마 이곳 정부같은데에서 가출한 애들 잡아다 집에
돌려보내주는 건 아닐테고… 조직 같은데 넘겨서 소매치기나 도둑으로
키우려는 건가?’
모두 내 또래로 보이는 것 같은데, 그 나이때에는 호기심이 왕성해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으면 한번쯤 시선이라도 보내야 정상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곳에 있는 애들은 인생사를 초월했는지 날 바라볼 생각도
안한 채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뭍고 있거나, 아니면 맨 바닥에 몸을 쪼그린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하기야, 방이 어두우니 보이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맨 처음 문이 열릴때
시선을 들어 한번쯤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것도 없었다.
문이 열리건 말건 자기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거 참…’
그들끼리도 속닥거리는 애들이 없는 걸 보면 각자 안면이 있는 애들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면 무지 혼을 내던가…
그런 그들이 사람처럼 움직임을 보이는 때는 식사때가 되어 한 몸집하는
사내들이 식사를 가져올 때 뿐이었다.
식사는 의외로 괜찮게 나왔다.
비록 밀가루로 만든 죽과 빵, 그리고 물 뿐인 식사였지만, 죽도 허여멀거기만
한게 아니라 들어간 것이 비록 고기는 없더라도 야채가 섞인 꽤 먹을만 한
것이었고, 빵도 검고 딱딱한게 아닌 하얀 밀빵이었다.
더구나 바다 속에서 요리를 할 줄 몰라 매일 고기와 연체동물을 비롯하여
조개만 매끼마다 구워먹기만 했던 나로써는 약간 맛이 없다 해도 오랜만에
접하는 밀가루 음식이었기에 눈물이 나올 만큼 감격했다.
‘헤에… 비록 이들이 뭐 하는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괜찮은
놈들이었군.’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식사는 하루에 두번 뿐이었고, 생리현상은 식사가
끝난 후에 단 한번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니까 식사때가 되면 다섯명의 사내가 들어오는데, 두명은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문을 막고 서 있고, 세명의 사내가 각각
자신이 담당하는 식사 (죽과 빵과 물) 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우리가
다 먹을때까지 그 자리에서 감시를 한다.
그리고 식사를 끝낸 우리가 접시를 – 숟가락은 안 준다. 그래서 죽은 그냥
마셔야 했다. – 놓으면 그걸 치운 다음 생리 현상을 해결하고 싶은 사람을
따로 분류한다. – 물론 대부분이 다 생리 현상을 해결한다고 하지만… –
그럼 그들을 일열로 쭈욱 세워놓은 다음 입구를 지키는 두명만 빼고 세
사람이 각각 한명씩 방에서 빼내어 밖으로 데려가서 일을 보게한 다음
다시 데려온다.
식사 시간이 유일하게 그 방에 등불이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밥을 먹는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인 듯 하지만, 감시하는
것을 수월하게 하려는 듯 했다.
뭐, 솔직히 나는 빛 한점 안 들어오는 곳이라 하더라도 정령들이 보이는
이상,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어려움도 없는데다가, 엘라임 덕분에 하도
아침을 굶다버릇해서 하루에 두끼만 먹는 것에 버릇이 들린 이상, 두끼만
준다해도 기분 나쁠 것 없었기에 그 곳에 있는 것에 어려움은 없었다.
단지 그 곳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과, 할일이 없어서 심심하다는 것,
그리고 잠자리가 딱딱한 그냥 나무 바닥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 움직이는 시간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잘때 몸 뒤척거리는 것을 빼면 말이다.
볼일 보러 갈때 움직이지 않냐고 물어본다면, 솔직히 나에게는 생리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땀은 나는데 큰 일과 작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나 할까?
한국에서 인간으로 살때는 화장실에도 꼬옥 가고 그랬었는데, 이 곳에
오면서 갑자기 그게 사라졌다.
엘라임의 말로는 이 곳에 와서야 정령의 기운이 활동하기 시작해서
그렇다고 하는데,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화장실 안 가서 편하긴 편했지만,
배설의 쾌감을 잃어버리니 뭔가 좀 허전한 거 같기도 하고,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더더욱 내 자신에게 각인되는 거 같기도 해서 기분이 좀 심숭생숭 했다.
지금이야 익숙해져서 덤덤하긴 하지만 말이다.
뭐 그리하여, 약… 10번정도의 식사를 받아 먹었을때… 음, 그러니까 대충
5일 정도 지났을때 배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하여 정박했다.
배의 밑쪽 선실에 갖힌 내가 어찌 알 수 있었냐 하면, 수다쟁이 정령들에게
들었다.
물론 내가 물어보면 바람의 하급 정령인 실프는 장난만 칠 뿐 제대로 대답을
안 해줬지만, 그들 사이에 간간이 섞여 있는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들도
있었으니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바람의 정령들에게도 내가 약간의 정령의 기운만 보여주면 대답을
들을 수 있었지만, 어린 여자애들 모습을 하고 있는 녀석들에게 힘을 사용해
대답을 듣는다는게 영 내키지 않은 일이라 나는 그냥 운디네들과 대화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의 식사를 받아 먹고 ‘여긴 우리가 내리는 곳이 아닌가벼…’
하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식사를 한지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데도
문이 열리며 일단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맨 앞에서 들어온 남자는, 전에 날 건져 주며 거짓 친절을 베풀었던 그
남정네였다.
그는 갑자기 밝혀진 등불에 적응 못하여 인상을 찡그리는 아이들을 쓰윽
바라보더니 예의 그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 너희들이 내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규칙은 잘 알고 있겠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 하지. 절대로 이야기를 하지 말 것.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말것. 잠시 후에 조용히 배에서 내려 준비된 마차에 올라타면 된다.
어려울 것 없지?”
그가 거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밖에서 한 남자가 들어오더니 이야기를 하던
그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 남자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한 줄로 서라.”
그러며 근처에 있던 한 아이를 일으켜 자신 앞에 세우자, 아이들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머뭇거리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그 아이 뒤에
일렬로 주르르 섰다.
그래서 나도 그들 틈에 살짝 끼어 줄을 섰다.
그렇게 아이들이 다 일렬로 서자 이야기를 한 남자가 몸을 돌려 나갔고
아이들도 그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남자와 같이 들어온 다른 네명의 남자들은 방 안에 들어서서 남은
아이는 없는지, 우리가 허튼 짓은 하지 않는지 감시하다가 아이들이
다 밖으로 나가자 뒤에서 따라왔다.
밖은 밤이었다.
배가 정박한 항구에는 인적이 없었고, 오직 내가 타고온 배에만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조심하고 있는지 소란스러운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게다가, 사방을 밝히기 위한 등불은 하나도 켜있지 않았기에 하늘에
걸린 반달의 빛에 의존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배에서 내리자 말 두마리씩 매인 마차 수십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배에 타고 온 애들은 나와 같이 갖힌 애들 뿐이 아니었는지, 우리
앞에는 아이들이 탄 듯한 마차가 막 떠나고 있었고, 그 다음 마차에는
나와 갖힌 아이들이 아닌, 처음 보는 아이들이 막 마차를 타고 있었다.
그 애들은 치마를 입고 있는 걸 보아 여자애들인 듯 했다.
나와 같은 방에 있던 애들은 모조리 남자애들이었던 터라 나는 새삼스레
그 쪽으로 시선을 주었지만, 그것도 잠시, 우리들을 감시하고 있던 남자가
날 툭툭 쳐서 얼른 시선을 내리고 앞의 아이를 따라갔다.
우리가 탄 마차는 밖을 내다보거나, 아니면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창이 다 막혀있는데다, 마차 안에는 앉을 의자도 없이 그냥 바닥만
있었기에 마차에 탄 애들은 배에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마차 바닥에 그냥
쪼그려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큰 마차가 아니었던 탓에 열명이 타자 나는 발을 편하게
피기는 커녕, 무릎을 구부려 가슴에 바짝 붙였는데도 옆의 애와 밀착될
수 밖에 없었다.
곧 마차 문이 닫히고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놈의 마차가 얼마나 덜컹 덜컹 거리던지 나는 바닥에 붙인 엉덩이가
무지 무지 쑤셔왔고, 그 반동으로 허리까지 아파왔다.
게다가 덜컹거리는 강도가 심해서 한번 덜컹 거릴때마다 입에서 저절로
‘윽, 윽’ 소리가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딴 애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데 나만
‘윽윽’ 거리는 것도 웃겨서 나는 입을 꼬옥 다문 채 소리가 안 나게 조심했다.
다행인것은, 그러한 불편한 마차를 오래 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시간 관념이 확실하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1시간은 안되었다…
싶을 즈음 마차는 드디어 멈춰섰고, 그러자 누군가가 와서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의 문을 열어 주었다.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항구에서 처럼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는지
횃불로 사방이 환하게 밝혀 있었다.
아마 어느 저택의 안뜰인 듯 했지만, 저택을 구경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곧바로 한떼의 남자들의 인도와 감시를 받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거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얼굴과 손을 씻을 수 있었다.
배에 있을 당시에는 마실 물만 주었기에 목욕은 커녕 머리를 감지도, 세수를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 다음 네명씩 잘려져 감옥처럼 한쪽 벽이 쇠창살로 막힌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비록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이기는 하지만, 쥐가 돌아다니거나 지저분
하지는 않았고, 배에서와는 달리 한쪽에 짚더미가 깔려 있었다.
비록 지하라 약간 습하기는 했지만, 맨 바닥에서 안 자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뻐서 그 곳에 얼른 가 몸을 뉘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다시 한번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고 나자 우리가 갖힌 방이 주르르 있는 층에서 맨 안쪽에
있는 아이들부터 차례차례 데리고 나가기 시작 했다.
그러니까 방 한칸에 있는 아이들 네명을 데리고 나간 뒤, 잠시 후에 또 다른
방에 갖힌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얼마 후에 또 다른 방에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그런 식이었다.
드디어 이제 여기에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에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부여앉고 기다리고 있자니 결국 우리 방 차례가 왔던지 한 덩치하는
남자가 방 앞에 서서 잠긴 철창문을 열었다.
“나와라.”
그에 같이 방에 있던 아이들이 조용히 일어서서 차례차례 나갔더니 그 남자는
‘허튼 짓 하면 재미 없을 줄 알아.’ 라는 듯한 시선으로 우리를 지긋이 바라보며
손에 쥐고 있던 채찍을 슬그머니 들어 보이더니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남자와 같이 왔던 또 다른 남자는 우리가 걸어가기 시작하자 우리의 뒤쪽에서
따라왔다.
그들이 우리를 데려간 것은 응접실 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지만,
우리가 들어간 작은 문과 그 문의 두배 정도 되는 두개의 문이 달린
커다란 입구 외에는 창문이 없어 사방이 막혀 있는 어느 넓직한 방이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화려하고 폭신해 보이는 커다란 안락 의자에 앉아 있는, 부유한 티를
팍팍 내고 있는 두 명의 중년 남자와 그들의 뒤에 서 있는 호위병인 듯한
한 몸집 하는 남자들, 그리고 보좌관인 듯이 두툼한 종이 뭉치와 깃털
펜을 들고 있는 두 남자가 각각 자신의 상관인 듯한 사람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간 작은 문 가까이에 서 있던 사람은 우리가 들어오고
우리를 안내한 남자가 한쪽 공간에 우리를 일렬로 세우는 것을 보더니
앉아 있는 남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이번에도 남자 아이들입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이번에 데려온
아이들은 꽤 괜찮은 물건들이죠. 그러니 전 보다는 30%는 더 주셔야 합니다.
이만한 애들 찾아서 데려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아시겠죠?”
그러자 앉아 있던 두 남자 중 입 둘레를 동그란 수염으로 감싸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무 비싸군. 우리가 어디 한두번 거래한 사이도 아닌데 말야… 하지만,
이번 애들이 전보다 났다는 건 사실이니… 10%정도로 하세.”
옆에 같이 앉아 있던 매부리 코의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은 그 정도로 봐주게나. 사실, 요즘 내 쪽이 심상치가 않아. 내 주요
고객 중 한명이 슬쩍 귀뜸해주길 국가 차원에서 대대적인 단속이 일어난다더군.
이번에 온 것도 나로써는 큰 모험을 감행한 걸세.”
일어서 있던 남자는 과장되게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너무들 하십니다. 두 분들도 제 사정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요즘 위쪽에서 아이들 데려오는 값도 많이 뛰었다고요. 최소한 25%를
더 주시지 않으면 본전도 못 건집니다. 그럼 저희는 이 장사를 때려 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매부리 코의 남자가 그의 엄살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허, 자네가 이 장사를 때려친다고? 난 내 생애에 그런 날을 못 볼줄
알았는데, 잘 하면 볼 수 있다니.. 이거 영광이군.”
“절 그렇게 대단히 봐주시다니 저야말로 영광이군요. 하지만, 10%는
정말 너무하신 겁니다. 이번 아이들은 그 정도로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두분 다 제가 얼마나 공평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변변치 않으면
오히려 제가 가격을 내려 드렸습니다.”
그러자 동그란 수염 남자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는 우리도 잘 아네. 그러니 지금까지 거래를
유지하는 것이고… 좋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15%로 하지.”
“20%! 그 밑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완강한 남자의 말에 매부리 코의 남자와 동그란 수염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을 주고 받더니 결국은 승낙했다.
“좋네. 단 나중에 나오는 아이들까지 괜찮다는 조건 하에서만.”
동그란 수염 남자가 말하자 일어서 있는 남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양심상 어찌 돈을 더 올려 받으려
하겠습니까?”
그의 말에 내 옆에 있던 우리를 데려왔던 남자가 기도 안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김빠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기야, 사람을 가지고 돈 거래를 하는 인간이 어찌 양심 운운 할
자격이 있겠는가?
일어서 있던 남자는 가격 흥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까보다 활기찬
얼굴로 앉아있는 두 남자를 재촉했다.
“자자, 그럼 어서 골라들 보십시오. 이러다 오늘 안에 거래를 끝내지
못하겠습니다?”
그 말에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진지하게 가만히 서 있는 우리를
마치 물건 감정하듯이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상의도 벗겨 보고
뒤도 돌아보게 하더니만 둘이 또 숙덕숙덕 거리며 의논 끝에 입을 열었다.
“나는 저 특이한 파란 머리 색의 아이로 하겠네.”
매부리코의 남자가 날 가르키면서 결정하자 동그란 수염 남자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
“난 나머지.”
서 있던 남자는 우리 주위에 있는 남자들에게 눈짓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런데… 벨레니쪽은 오늘 적게 선택하시는 군요. 이번
아이들을 놓치면 무척 아쉬우실텐데 말입니다.”
나는 나를 데려온 남자에게 이끌려 매부리 코 남자 뒤쪽에 서 있던 한 덩치
하는 남자들에게 넘겨졌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쪽에서 대대적인 단속이 펼쳐질 거라네. 물론
걸리지는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내가 들을 수 있는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날 넘겨받은 남자는 자신들 뒤쪽에 있는 커다란 문을 열고 날 데리고 나갔던
것이다.
동그란 수염 남자쪽으로 넘겨진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문 밖으로 인도되더니만 나와는 반대편으로 이끌려갔다.
그렇게 그 방을 나온 내가 다시 도착한 것은 또 어떤 방이었다.
‘또냐…’
그런 생각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그 곳 역시
내가 들어온 입구 외에는 창문이 없어 등불로 방 안을 밝혀 놓았는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함인지 덩치 좋은 남자 한명과 여자 한명이 채찍을 들고
의자에 편히 앉아 있다가 우리가 들어서자 시선을 보내왔다.
“자, 들어가.”
그 안에는 나 말고도 8명이 되는 아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있었는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자 애들도 5명 섞여 있었다.
내가 두리번 거리며 방 안을 살펴보자 채찍을 든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뭘 보는 거야? 빨리 자리에 앉아. 엉뚱한 짓 하면 혼날 줄 알아?”
‘별걸 다 가지고 시비네… 그렇게 히스테릭 하면 시집도 못 갈텐데…’
나는 속으로 꽁알꽁알 댔지만, 순순히 자리를 잡고 얌전히 앉았다.
나도 채찍으로 맞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가 들어온 뒤에도 한참 후에 한명씩 한명씩 세명이 더 들어오더니
더 이상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쪽 사람들은 좀 치사한지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식사는 커녕 물도 안 주면서 한 여자애가 조심스럽게 화장실 가고 싶다고
말하는데 매정하게 참으라고 하는 거였다.
그 여자에는 울상이 되었지만 더 이상 아무말도 못하고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여자애가 볼일을 보러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나 말고도 뒤에
세명의 애들이 더 들어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다른 두 명의 채찍을 든
여자들이 들어오고 나서였다.
아마 아이들 감시를 교대하러 온 듯 한데, 그들이 오고 나서야 우리들에게
식사가 배급되었다.
빵 하나와 사과 하나, 그리고 물이 다였는데, 이 곳에 와서 처음 접한
과일인데다 나에게 익숙한 사과란 사실에 나는 감격이 넘쳤다.
‘아… 이곳에도 사과가 있구나…’
사과를 나눠준걸 보니 아마 이곳 계절이 지금 가을인 듯 싶었다.
하긴, 배를 타고 오면서 여러 아이가 한 방에 있는데도 더운 것을 느끼지
못했으니 쌀쌀한 계절임이 분명했다.
그 날은 그 방에서 보내야 했는데, 바닥에 무지 오래된 것 처럼 보이는 양탄자라도
깔려 있어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찬 바닥에서 자야 했을 것이다.
다음 날이 되어 우리는 방에서 주르르 나와 다시 마차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배에서 내렸으니 이제 이것만 타면 여행은 끝이겠구나… 생각하며
슬슬 탈출계획을 세우려고 했는데, 이게 왠일인지 그건 여행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 마차에서 내리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또 배였다.
비록 처음에 탄 그 배만큼 큰 건 아니었지만, 또 배를 보자니 제일 먼저
드는 건 지겹다는 감정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바다 속으로 뛰어들긴 싫어서 몇칠을 꾸욱 참으니 드디어
배에서 내릴 수 있었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배에서 내려 맨 처음 탔던 그런 텅 빈 마차에 아이들이 남, 녀로 구분되어
탔다.
비록 덜커덩 거리는건 여전했지만, 발을 뻗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다 바닥에도
폭신하게 짚이 깔려 있어 되게 고맙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것도 잠시 뿐, 곧 내릴
줄 알았던 우리는 하루종일이 아니라 며칠 동안 마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마차에서 내릴 경우는 볼일을 보고 싶다는 때에만 한 사람씩 내릴 수
있었는데, 나는 볼 일을 보지 않으니 영… 마차에서 내릴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마차에서 식사를 받아 먹어야 했고, 마차에서 자야 했으며, 그
동안 세수 하는 건 정말 생각도 못했다.
그 동안 마차는 밤을 제외하고 계속 몇날 몇칠을 달리기만 했다.
이러다가 이가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엘라임에게 혼나던 말던 그냥
돌아가버릴까… 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데 드디어 마차 문이 열리더니
한 덩치의 남자가 얼굴만 쑥 들이민 채 말했다.
“내려.”
이제야 여행의 끝인가 싶었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란 걸 알게된 것이 여러번
이었기에 나는 이번에도 별 기대를 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를 목욕 시켜주고 – 목욕할때는 단체로 했기에 밑의
속옷은 안 벗었다. – 새 옷도 주기에 혹시나.. 했는데, 왠걸 다음 날에는 그 동안
탔던 마차가 아닌 좀 황당하게 설계된 짐마차에 타야 했다.
그 짐마차는 좀 커가지고 물건을 많이 실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커다랗고 튼튼해 보이는 괴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높이는 대충 1m 는 안되어보였지만, 길이가 2미터는 되어 보였고, 너비도
넓어서 사람 대여섯은 충분히 들어갈만큼 보였다.
물론 들어간다면 꼼짝없이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겠지만…
그런데, 그 곳이 우리가 들어갈 곳이었다.
아마도 우리가 들어간 뒤에 그 괴짝 위에다 짐을 잔뜩 실어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감출 셈인 듯 했다.
그런거보면, 이 앞에 무슨 검문이 있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곳이 바로 벨레니라는 나라로 넘어가는 국경이었다.
그러니까, 날 선택한 그 매부리코 남자는 벨레니라는 나라에서 이런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남자들은 우리에게 아침 식사 후에 내 새끼 손톱만한 웬 알약을 하나씩
나눠줘 먹게 했는데, 그 것이 수면제 였던지 먹고나서 그 괴짝에 들어가
누워 있자 잠시 후에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정신없이 잠이 들고 말았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때에는, 여전히 빛 한점 안 들어오는 어두컴컴한
궤짝에 갖힌 채 달리고 있었다.
다행히 궤짝 바닥에는 몸의 상함과 부딧힐때 나는 소리를 방지하기 위하여
짚이 깔려있었지만, 그 짚더미 만으로는 마차의 덜컹거릴때 느끼는 충격을
많이 흡수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자마자 제일 먼저 느꼈던 건
삭신을 마구 마구 엄습하는 통증이었다.
‘에구구구… 삭신이야…’
생각 같아서는 가볍게 체조를 해서 몸을 풀고 싶었지만, 겨우 누워있는게
최상일 만큼 낮고 좁은 공간이라 나는 자세를 옆으로 돌아 눞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히익~!!’
나는 헛 바람을 삼킨 채 얼른 바로 누웠다.
내 옆에는 나와 같이 탄(?) 아이가 죽은 듯이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는데
정령들의 몸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에 비춰 보이는 그 아이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보여 마치 시체 같이 보였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던 것이다.
슬쩍 만져보아 그 아이의 몸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낀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시 그 아이를 볼 용기는 나지 않았기에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나도 유전의 절반의 절반은 인간이라 그들이 먹인 약발이
들어 잠들긴 했지만, 나머지 1/4이 인간이 아닌지라 나와 같이 약을
먹은 아이들보다 약발이 덜 들은 모양이었다.
‘에… 그럼 독약을 먹더라도 난 죽지… 않으려나? 호오.. 어쩜 그럴지도.
그나저나… 이렇게 팔려 다니는 것도 곤란하니… 슬슬 탈출해야 할텐데…
근데, 이 곳이 어딘지나 알아야 탈출을 하던지 말던지 하지.’
하지만, 내 수중에는 돈도 한푼 없었다.
인간 세상에서 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하며, 돈 없는 자가 얼마나 처량한지
잘 알고 있던 나는 막상 내가 빈 손이라는 걸 깨닫자 곧바로 드는 생각은
‘이대로 갈 수는 없다’ 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처음 바다 속 집에서 가출할 당시에 가지고 있던 금팔지를
비롯하여 금화 다섯개를 배에 오르자마자 고스란히 털렸던 것이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이가 빠드득 갈렸다.
‘그래, 튈때 튀더라도 빈 손으로 튈 수는 없지. 암, 암… 그렇고 말고.
어차피 이들도 그 배에 있던 사람들이랑 똑같은 일당일테니 돈 털리는
일 정도는 겪어도 싸.’
그렇게, 내 생각에는 무지 괜찮은 계획을 세워 흡족해 하는데, 순간 배에서 내가
세운 계획의 결점을 가르쳐주며 보완하라는 듯 항의를 해왔다.
꼬르르륵~~
‘아… 가기 전에 잔뜩 먹고 가야 겠다. 먹고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잖아.
공짜로 주는 거 다 먹고 가야지.’
한번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닫자 점점 그 배고픔이 심해지더니 나중에는
속이 막 쓰려왔다.
‘아구구… 이거 너무 배고픈데?’
정신 없이 자다 일어났기에 나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를 데려가는 사람들은 매 끼마다 (비록 하루에 두끼기는 하지만…)
꼬박꼬박 식사를 챙겨줬었기에 나는 한끼 식사를 굶었거니.. 하고 있었는데
내 배가 엄청 고프다 못해 쓰리 걸로 봐서는 한끼 정도가 아닌 듯 했다.
‘아…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으윽… 이 사람들이 혹시 내가 탈출할까봐 기운 없게 하려고 일부러 굶기는
거 아냐?’
그런 쓸데 없는 생각까지 하면서 혼자서 한참 동안을 배고픔과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부스럭 부스럭거리며 옆에 누운 아이가 움직이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다시 한번
흠칫 놀라 비명성을 삼키며 다시 잽싸게 고개를 천장 쪽으로 돌려 버렸다.
마침 그 옆의 아이가 자신도 오랫 동안 가만히 누워 있어 온 몸이 결리는지
움직이느라 옆으로 드러 누웠는데 그게 하필이면 내 쪽으로 돌아누웠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그 아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거고…
‘히이익~’
그런데, 그 아이의 어둠 속이라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이 퀭 하고 쏙 들어간
데다가 피부가 푸석 푸석 거리고 약간 야위어 보이는 것이 며칠은 굶은
사람 같아서 더더욱 시체처럼 보였던 것이다.
우리가 비록 뭘로 팔려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식사는 매끼 꼬박꼬박,
그리고 꽤 괜찮게 나왔던 터라 잡혀가는 아이들의 얼굴은 피부도 윤이
났고 볼도 붉으스름하게 건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저리 며칠 굶은 사람 얼굴처럼 되었다는건…
우리가 정말 며칠 굶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쩐지… 엄청 배가 고프더라. 아구 배고파… 치사한 인간들…
혹시 식사비 아끼려고 우리에게 약 먹여서 며칠 재운 거 아냐?’
속으로 그렇게 밖의 사람들에게 욕을 해대고 있는데 이제는 반대쪽에서
부스럭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약효가 다 해 나머지 애들도 다 깨어나는 듯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쉬지 않고 계속 달릴 것 같던 짐마차가 정지하고,
우리가 누워 있던 궤짝 위에 올려놨던 짐들이 내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이 궤짝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배 속에서
한층 더 요란하게 꼬르륵 소리를 냈다.
우리를 이렇게 굶겨 놨으니 설마 지금 우리를 꺼낸 뒤에 아무것도 안
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드디어, 궤짝의 뚜껑이 위로 들어 올리며, 바깥의 시원한 공기가
괴짝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자, 나오너라.”
밖은 이제 막 저녁을 맞이하는 상황이었던지 태양이 막 지면서 마지막으로
서쪽 하늘의 한 귀퉁이를 붉게 물들이고, 사방은 어둑 어둑 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깜깜한 궤짝 안에 있던 나로써는 그 정도의 빛이라도 밝게 보여
사방을 둘러보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리둥절하게도 일행이 멈춰 서 있는 곳은 어느 건물 안이 아닌,
아무런 건물도 보이지 않는 허허 벌판이었다.
한쪽에는 꽤 높아 보이는 산이 시작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도 산을 끼고 돌아가는 것 같은데, 마을이나 성읍을 만나지 못해
오늘은 노숙을 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흐음… 한 며칠은 탈출 못하겠는데?’
내가 노리고 있었던 때는 우선 도시 안으로 들어간 뒤 마차에서 내리게
해 여관 같은 곳에서 하루 묵게 하는 날이었다.
바람의 정령들에게 내가 가진 힘을 보인다면 마차 안에 갖혀 있더라도
탈출 하는 건 문제가 아니겠지만, 도시가 아닌 이런 허허 벌판이라면
내가 도망치는 모습이 쉽게 포착될 것이었다.
물론 산으로 가면 괜찮겠지만, 나 홀로 산 속을 헤매며 인간 마을을 찾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뭐, 그것도 안 붙잡힐 때의 이야기겠지만….
내가 이렇게 생각을 하며 사방을 둘러보자 우리를 지키고 있던 남자들
중 한명이 날 툭툭 치며 한쪽을 가르켰다.
그 곳에는, 우리가 짐마차에 실린 괴짝 안에 타기 전에 타고 이동하던
예의 그 마차가 서 있었다.
오늘 탈출할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휘청 휘청 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그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엔 나보다 먼저 들어온 아이들이 맥 없는
모습들로 등을 마차 벽에 기댄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잠시 후 마차 문이 다시 열리면서 우리에게 식사가 주어졌는데,
치사하게도 달랑 묽은 죽 한 그릇을 주는 거였다.
내가 너무 기가막히고 분노하여 죽을 나눠주는 그 남자를 째려보자
그 남자가 이런 내가 어이없었는지 피식 하며 입을 열었다.
“허, 성깔 있다 이거냐? 하지만, 이틀이나 굶어서 빵은 못 먹어.
다 너그들을 위한 거니 얌전히 먹어라. 내일은 좀 더 나은 죽을 주마.”
우리가 며칠 굶었을 거라는 예측은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날 이틀이나 굶겼다 이거지? 흥, 네 놈들은 이로써 내가 도망갈때
잃을 돈들이 두 배로 더 많아졌다.’
그렇게 혼자 속으로 씩씩 거리는 동안 마차에 갖힌 채 이동되는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속으로 ‘도시로 들어가기만 하면, 도시로 들어가기만 하면…’
이라고 되내며 빨리 그날이 오기를 벼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날 비웃기라도 하듯 며칠 후 우리가 내린 곳은 3층으로
된 멋들어지게 지어진 어느 저택 앞이었다.
문제는… 그 저택이 인적 드믄 산 속에 나무들을 벗삼아 홀로 지어진
건축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거 보면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딱 좋은 별장이었지만,
탈출을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열받는 일이었다.
‘이런… 열받게시리… 이 일당들에게서 훔쳐가려고 했는데, 날 사가는
사람에게 훔쳐야 하잖아? 우쒸….’
속으로 하염없이 투덜댔지만, 겉으로는 내색 못한 채 나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고분고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건 커다란 욕조가 들어 있는 목욕탕이었다.
그 곳에서는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여자 한명이 채찍을 들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채찍을 들어 바닥을 한번 내리쳐 아이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자, 각자 옷을 벗고 머리와 몸을 깨끗이 씻는다, 알았나? 나중에 검사해서
지저분한 곳이 있는 녀석은 채찍 맛을 보여주겠어!”
욕조 안에는 따뜻한 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옆에는 우리를 도와주려는
듯 우리 또래의 여자 아이들이 서 있었다.
이런 일을 무지 많이 했는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 애들이 겁에
질려 옷을 벗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애는 이번에 들어온 애들은 어떻다느니 하면서 옆의
아이와 작게 수다떠는 것이었다.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여자이다보니 나는 팬티에 해당되는
속옷 바지는 안 벗은 채 몸을 씻을 수가 있었다.
몸을 다 씻고, 채찍을 든 우람한 여자에게 검사를 맡은 우리가 밖으로
나가니 거기에는 꽤 고급스런 옷감으로 만든 듯한 옷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까지 걸치고 나자, 나는 우리가 어떤 용도로 이들에게 붙들려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 때빼고 광내니 한결 같이 꽃같은 미모를 드러냈던 것이다.
아마 여자애들도 나랑 같이 있는 남자애들 못지 않게 예뻤을 것이다.
‘허, 참…그러니까… 노리개였냐?’
나는 내가 그렇게 예쁘게 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이들이 날
그렇게 여겼다는 것에 화를 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갈등이 생겼다.
하기사, 그러고보니 내가 여학교 다닐때는 한 인기 했었다.
물론… 큰 키와 보이쉬한 분위기를 풍기는 시원 시원한 외모 때문이긴
했지만….
‘쳇… 그러고보니 남자 치고 한 외모 한단 거였잖아? 여자로써 예쁜게 아니라..
쩌비.. 좋다 말았군. 쳇, 이 일당들 돈을 싹싹 쓸어갔어야 하는 건데….’
옷을 갈아 입은 뒤 우리는 우리를 사러 올 사람들이 올 때까지 대기하는
방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옮겨가는 와중에 저택의 창문으로 힐끗 보니 저 아래에 호수가
보였다.
‘호오… 여차 할때 이용하면 되겠다.’
그러니까 이 저택은 산 속의 절벽 위에 세워진 곳인듯 한데, 뒤쪽에 있는 벼랑
밑에 호수가 있는 듯 했다.
얼핏 봐서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절벽도 잘 안 보이는 창문에서 호수의
물이 보이는 거 보니 꽤 큰 모양이었다.
‘이 일당들.. 되게 부자인가 보네. 산 속의 이렇게 경치 좋은데에다 별장 짓고
말야.. 여기서 우리를 파는 거 같은데…’
우리를 꽃단장 시킨다는 건 상품의 포장 단계일테니, 곧 구매자들에게
선보인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에잉… 아까워라… 이 곳이 도심 속이었다면, 여기에 있는 돈들 내가 싹 쓸어
가는 건데… 아… 다시 생각해봐도 아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