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ughter of the Elemental King RAW novel - Chapter (74)
제 44화 Come Back (4)
나의 어리석음에 나는 고개를 푸욱 숙이고 한숨을 푹푹 쉬면서 벌써 저마치 가고 있는 리건을 따라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고 했다.
콰과광~!!
예고 없이 들려오는 폭발음과 땅에서 솟구쳐 오르는 흙더미에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내 주위에 있던 이들이 그 폭발의 힘으로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는 걸 보고 있었다.
‘어라… 그런데 왜 난….’
이라고 의아하게 생각하던 나는 곧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희미한 빛의 장막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아~ 역시 빽이 좋아.’
하지만 그러한 기쁨은 잠시였고, 나는 곧바로 사방으로 날려간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듀비, 첼릿, 괜찮아요? 램버트님 괜찮으세요?”
폭발한 장소와 가까이 있었던 탓에 뒤로 튕겨 나가기는 했지만, 다행이도 폭발이 크지 않아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나의 부름에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쿨럭, 쿨럭… 젠장, 그 놈들… 그냥 얌전히 돌아간 게 아니었잖아? 언제 저런 걸 설치해 놓은거야?”
잔뜩 뒤집어쓴 흙먼지 탓인지 기침을 하며 램버트가 투덜댔다.
“괜찮으세요, 램버트?”
내가 부축하려고 하자 램버트는 그걸 가볍게 거절하며 스스로 일어나더니 몸을 이곳저곳 움직여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어디 부러진데는 없는 것 같군.”
“첼릿과 듀비는요?”
“뭐… 저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몰골을 빼면 정말 괜찮은 표정이었기에 나는 안심을 하고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떨어진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에구구구~~ 젠장, 이 나이에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아아~~ 저 놈들은 노인 공경이란 말도 모른다더냐아아~~”
앤더슨 스니볼리의 부축을 받으며 투덜대는 남작을 보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거기다 다른 기사들도 모두 일어나서 툭툭 먼지를 털고 있었다.
“모두 괜찮으신거죠?”
“아아… 뭐… 살짝만 나가 떨어진 거라서…”
대표로 대답을 하며 흙먼지를 털어내던 차트워드경은 문득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단장님은?”
“예? 아, 그러고보니 못 봤는데…”
설마 리건에게 뭔 일이 있으랴 싶어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는데, 갑자기 앤더슨 스니볼리가 새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아앗, 그러고보니 폭발하는 장소에 계셨던 것 같은데…”
그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하얗게 질려 아직 흙먼지가 가라앉지 않아 제대로 잘 보이지도 않는 폭팔한 장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브, 블랜차드 후작니이임~!!”
“단장님~!!”
하지만 과연… 얼마 달려가지 않아 우리는 폭발한 장소 한 가운데에 떠억하니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빨리 실프를 불러내 흙먼지를 날려 보내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을음까지 뒤집어 썼지만, 사지는 멀쩡해 보이는 리건이 그 곳에 있었다.
“아아, 정말 다행입니다.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 모습에 차트워드경이 안도한 표정으로 한달음에 달려가서 묻자 리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바로 그의 반듯한 이마에 힘줄이 하나 빠득 솟아 올랐다.
그 이유는 이런 폭발 장치를 해 놓은 함정에 걸렸다는 것도 조금은 있겠지만, 그 보다는 곧바로 들려온 – 그것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들리고 나와 리건에게만 들린 – 웃움소리가 더 큰 공헌을 했을 거였다.
[푸핫핫핫핫~~ 멍청한 도마뱀 같으니라구. 인간들이 거기다 장치를 해 놓은 걸 못알아채고 있었단 말이야?] [훗, 꼴 좋다. 잘난체 하더니만…] [해인이를 넘본 댓가다 이놈아.]‘저, 저렇게 대놓고 비웃다니….’
[이봐들 너무한거 아니야?]그렇게 말하는 이프리트 아저씨의 얼굴에도 웃음이 비식 비식 새어나오고 있었다.
“호오… 이거 참… 너무 감격해서 할 말을 잊을 지경이군. 이처럼 대단한 대접을 해주시다니 말이야. 이런 대접을 받았는데 가만히 있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한쪽 입꼬리만 싸악 올린 미소를 띄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는데, 웬지 한 무게 잡을때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던 듯 다급하게 달려온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주춤 물러나는게 보였다.
‘게다가… 저 말을 폭발물을 장치한 사람들에게 하는 건지, 아니면 정령왕들에게 하는 건지 헷갈려…’
잠시 그렇게 무서운 미소를 띄고 있던 리건은 고개를 획 돌려 차트워드경을 매서운 눈길로 바라봐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차트워드경, 그대는 빠른시간 내에 마법사들을 데리고 출발한다.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가 자네가 보고를 하도록. 그리고… 그 보고할때 그라함 대제 보석 이야기는 빼놓도록 하게. 그건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심상치 않은 리건의 분위기에 잔뜩 쫄아있던 차트워드경은 그즉시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해인.”
“예?”
차트워드경의 대답을 들은 뒤 곧바로 날 보는 리건의 말에 나도 화들짝 놀라 대답하자 리건이 그 살벌한 미소를 씨익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마르타국 인물들을 추격하도록 한다. 캠벨경을 지금 즉시 추적할 수 있겠지?”
“추, 추적이라면 제가…”
그러면서 남작이 나섰지만, 리건은 그에게 고개도 돌리지도 않고 말을 중간에서 딱 잘랐다.
“물론, 마법사가 더 뛰어나지만 지금은 빠른 기동력이 필요하다. 게가다 어차피 켐벨경은 정령사니 같은 정령사인 해인 정도면 충분히 추적이 가능하겠지, 안 그런가?”
“아, 예. 가능합니다.”
“좋아, 그럼 자네의 능력을 보여주길 바라네.”
이까지 빠드득 갈며 조용히 분노하는 리건 덕분에 오늘 하루 편안히 쉰다는 이야기는 물건너 가버렸고, 대신 성에 들어가 추척할때 필요한 식량이라던지, 모포라던지 지도라던지 하는 필수 물자만 구입 하자마자 나는 팀원들을 데리고 허공으로 날아 올라야 했다.
처음에는 클라우드 남작이 마법을 펼쳐서 미로트 남작과 켐벨경이 도망간 – 아마 켐벨경의 정령이 그 둘을 데리고 날아간 것 같다 – 방향을 알려줬기에 그쪽으로 향하다가 꽤 많이 왔다… 싶었을때 슈리엘들을 풀어 켐벨경의 기운을 찾았다.
땅의 하급 정령과 바람의 중급 정령과 계약을 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테고 기사와 같이 동행하는 사람은 더더욱 흔치 않을게 뻔했으니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리건은 그들을 찾아놓기만 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이 한 마을의 여관에 묶으면 우리는 좀 떨어진 다른 여관에서 묶고, 그들이 노숙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500m 이상은 떨어진 곳에서 노숙했다.
가끔 그들이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서 습격을 받을때가 있었는데, 그러면 리건은 허공에서 내려다볼 뿐, 조금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5일…
나는 도대체 리건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결국 물었다.
“도대체 뭔 생각이래요?”
“뭐가?”
“마르타국 사람들을 추격하는 거 말이에요. 도와주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르타국 사람들을 습격하는 것도 아니고… 지켜보기만 하려고 쫓아온 건 아니잖아요?”
그러자 리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지금 때를 기다리는 거야.”
“때?”
“그래, 네가 말했듯이 나는 마르타국 녀석들을 도와줄 마음도 없고 의리도 없다.”
아마도… 성 밖에서 습격 당했을때 적들을 우리에게 남겨놓고 도망친 사실에 꽁한 모양이었다.
“그럼요?”
“하지만… ‘그걸’ 새클턴 놈들에게 넘기고 싶은 마음은 요만큼도 없지. 아마… 새클턴 놈들 미노트 남작이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야. 그러니 지금 세밀하게 녀석들을 몰아가고 있지.”
“몰아… 가요?”
“눈치 못 챘냐? 습격하는 장소와 타이밍이 아주 교묘해. 덕분에 마르타국 녀석들이 원하던 방향과 많이 어긋나 있거든. 미노트 남작과 켐벨경도 처음에는 습격에서 도망치기 바빠 몰랐겠지만 지금쯤은 눈치 채고 있겠지. 어느 한쪽으로 몰리고 있는걸…”
그런데… 나는 왜 몰랐을까나…
[너야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고 있으니 당연한거 아니냐.] [어라라…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너무 구박하지 마라.]아버지의 핀잔에 노아스가 내 편을 들어줬지만 실피드는 왠일인지 아버지 편을 들었다.
[그래도 가끔은 생각하면서 살아야지. 그런것 까지 아버지를 닮으면 안돼.]역시… 아버지를 편드는 게 아니었다.
[오호라 실피드… 네놈 이야기를 지금 착각 하는 것 아니더냐?] [어허, 무슨 소리. 나는 항상 깊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지.] [놀구 있네.]아버지의 말에 리건이 입을 열었다.
“그래, 말 잘했다. 왜 여기서들 놀고 있는 거냐?”
그러자 재미있게도 실피드와 노아스가 동시에 대답하는 거였다.
[그거야 재미있으니까.] [쿡쿡쿡, 좀 봐주지 그래?]뒤이어 그동안 웃기만 할 뿐 조용히 있던 이프리트 아저씨도 웃으면서 입을 열자 리건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쯧쯧, 도마뱀 녀석들은 밴댕이 소갈딱지더니만… 네 놈도 거기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구나.]그 모습에 실피드가 마치 연장자가 철 없는 어린애를 보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며 혀를 차자 리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호라… 손바닥 뒤집듯이 수시로 마음을 바꾸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같은 심성의 소유자 한테서 그런 이야기 듣고 싶지 않은데?”
[그거 참 말 잘했다.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군.]아버지의 편들기에 실피드의 눈길도 가늘어졌다.
[허… 얼마 전까지만해도 저놈을 죽이네 살리네 했던 주제에.] [시끄러워.]가만 있다가는 이 엉뚱한 대화가 계소 이어저 처음에 알아보려 했던 이야기는 그냥 사그라들거 같았다.
“저기 리건… 그래서 리건이 결국 생각하는게 뭔데요?”
그래 아버지랑 실피드랑 투닥거리는 사이 슬그머니 리건에게 다가가 묻자 찡그린 얼굴로 아버지와 실피드가 투닥거리는 걸 보고 있던 리건이 표정을 풀고는 순순히 대답해줬다.
“간단해. 새클턴 녀석들 이번 일을 아주 성심성의껏 계획하고 준비한 모양인데, 그걸 망쳐놓는 거지. 아마 지금까지 녀석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풀려왔으니 무척이나 기분이 좋겠지? 그걸 마지막에 뒤집어 놓는 거야.”
[성격도 드럽다니까.]노아스가 한마디 하자 리건이 킥 웃었다.
“내가 이런거 이제 알았냐?”
“그… 마지막이라는건 뭔데요?”
“지금 미노트 남작과 켐벨경을 몰아가는 마지막 장소에서 새클턴 녀석들이 잔뜩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 거다. 미노트 남작이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가지고 있다니까 그거까지 감안해서 그 둘을 없애버리고도 남을 정도겠지.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계획대로 둘을 없애고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손에 넣었을때 우리가 나타나서 보석을 탈취하는 거야.”
“그… 보석 가지고 싶으셨어요?”
“아니. 하지만, 이대로 놈들에게 얌전히 보석이 넘어가는 건 도저히 두고보지 못할 것 같아서. 저번에 대한 답례를 해줘야지.”
그러면서 씨익 웃는데… 그거 보니 나는 절대로 리건의 성격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인 만큼 모든 일에 여유있게 행동하더니만, 그 이면에는 이런면도 있었나보다.
아무래도… 새클턴 녀석들이 준비한 함정에 멋지게 걸려들은게 리건의 자존심을 팍 상하게 한 모양이다.
[자존심만 쎄서는…] [도마뱀 녀석들 자존심이야 너무 멋대로 커서 탈이지.] [하여간… 잘났어 정말.]아버지와 실피드, 노아스가 번갈아가며 입을 열자 리건이 씨익 웃어보였다.
“남 이야기할게 아니지, 아마?”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미노트 남작과 켐벨경은 막다른 길목으로 몰리고 말았다.
그들은 어느 작은 마을에서 머물다가 밤에 갑자기 기습한 사람들로 인하여 잠자다 말고 쫓겨 나갔는데, 그 기습한 사람들이 그들을 살살 몰아 그 마을 근처에 있던 커다란 산으로 올려 보냈던 것이다.
“이런 젠장할… 하필이면…”
그 산은 얼마나 높고 가팔랐는지, 산 꼭대기에는 햐앟게 눈이 덮여 있는게 보였다.
그 산을 보고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예전에 한국에 있을때 본, 어떤 사진집에 있던 일본에 있는 후지산 사진이었다.
커다란 호수를 앞에 두고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산 꼭대기에 있는 하얀 눈이 붉게 물든게 참 인상적이었는데, 아마 눈으로 하얗게 뒤덥인 산 꼭대기 때문에 떠오른 듯 싶었다.
그런데 그 산을 본 리건은 못마땅한듯 인상을 팍 찡그리는 거였다.
“아… 부디 깊이 들어가지 말아야 할텐데…”
“저 산이… 험하기로 유명한가 보죠?”
리건의 중얼거림에 조심스레 물었지만, 리건은 얼굴을 굳힌 채 아무말도 안 해줬다.
대신 이제 십여명으로 늘어난 사람들에게 쫓겨 산 속을 파고 들어가는 미노트 남작고 켐벨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뒤에서 쫓아가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느긋했다.
보아하니 그들 중에는 마법사들도 섞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느긋한 그들에게 확실하게 몰린 미노트 남작과 켐벨경은 산 속으로 얼마 들어가지 않은 어떤 공터에서 또 다른 십여명의 시커먼 복장을 하고 있는 그들과 맞닥뜨려야 했다.
“네놈들은 누구냐?”
이미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을 미노트 남작에게서 당당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흠…. 대화로 시간을 끌려 하는거 같은데… 어림 없는 것 같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건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커먼 남자들이 갑자기 덤벼들기 시작했다.
“역시… 대단한 녀석들만 모아왔군.”
그런데 덤벼드는 사람들은 다섯명일 뿐,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두 명은 켐벨경을 노렸고, 나머지 세 명은 미노트 남작을 노렸다.
미노트 남작의 움직임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원래 그 남작의 실력도 뛰어났는데, 거기에 더해 그라함 대제 보석의 도움까지 받으니까 펄펄 날았다.
분명, 요 사흘동안 그를 이쪽으로 몰기 위해 행해진, 밤마다 계속되는 습격으로 인하여 제대로 쉬지 못하고 피곤할텐데도 세 사람의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 반하여, 켐벨경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기에 그와 계약한 정령중 최상위에 있는 바람의 중급 정령인 슈리엘은 부르지 못하고 땅의 하급 정령인 노움과 바람의 하급 정령인 실프들만 불러서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세명이었던 실프도 검사가 휘두른 검기 맺힌 검에 의해 허리가 양단되는 부상을 입어 정령계로 강제 송환당했고, 두 명의 노움도 그 검사와 한 조를 이뤄 켐벨경을 공격하던 다른 정령사의 노움에 의하여 제압당하고 말았다.
“큭…”
그리하여 결국 켐벨경이 무릎을 꿇고 나자 이제 남은건 미노트 남작 뿐이었다.
촤랑~!
앞과 왼쪽에서 같이 덤벼 오는 검을 한꺼번에 걷어내고 몸을 낮춘 채 빙그르르 돌려 뒤에서 덤벼오는 검을 피해냈다.
그리고 돌아가는 그 반동으로 검까지 부드럽게 회전시켜 그를 베지 못하고 허공을 베어버린, 뒤에서 덤벼들던 검사의 팔을 향해 올려베었다.
“크윽~!!”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검을 떨어뜨리지 않았지만, 검을 쥐고 있던 팔에 길게 혈흔이 생긴 탓인지 그 시커먼 사람은 더 이상 검을 휘두르는 대신 다른 팔로 다친 팔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걸 신호로 이번에는 새로운 두 사람이 투입되었다.
한 사람은 길다란 검은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창을 들고 있었다.
휘릭~
채찍이 먼저 덥쳐들었다.
날카로운 파공성을 흘리며 뱀처럼 유연한 몸짓을 하며 날아와 미노트 남작이 검을 잡고 있는 팔을 노렸다.
촤락~
하지만, 그건 미노트 남작의 팔이 살짝 움직임으로 인하여 팔 대신 검을 휘리릭 감았다.
그 순간 채찍을 휘두른 사람이 채찍을 잡아당겼고, 그 틈을 노린 창을 든 사람과 검을 든 두 사람이 미노트 남작에게 달려들었다.
미노트 남작은 그 셋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멀찍이서 채찍을 팽팽히 당기고 있는 사람에게 몸을 날렸고, 그 채찍을 잡아당기고 있던 사람도 마주 미노트 남작을 향해 몸을 날렸다.
쉬익~
검과 채찍이 얽혀있는 상황이라 미노트 남작과 채찍을 든 사람은 자신들이 들고 있던 무기 대신 손과 발로 두어번 공수를 교환했고, 그 틈에 미노트 남작을 놓친 세 사람이 뒷쪽에서 미노트 남작에게 다시 덤벼들었다.
창이 허리 부근을 노리는 걸 몸을 땅에 납작하게 붙이다시피 낮춰 피한뒤, 자신의 몸 위로 차례로 떨어지는 두개의 검과 채찍을 든 남자의 발을 데굴데굴 굴러서 피한 남작은 벌떡 일어나 검을 잡아당겼지만, 채찍에 단단히 얽혀 있어서 빠지질 않았다.
그에 난처한 듯 인상을 찡그린 남작은 단호한 표정으로 쥐고 있던 검을 채찍을 든 사람에게 던지더니 그와 함께 자신과 가까이 있던 검을 들고 있는 사람의 품으로 자신의 몸을 던졌다.
“헛!”
헛바람을 삼키고 자신의 품으로 파고 들어오는 미노트 남작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미노트 남작은 두어 걸음 더 빠르게 걸어 그자를 쫓더니만 부드럽게 몸을 회전시켜 그 검사의, 검을 붙들고 있던 팔을 잡아 강하게 바깥쪽으로 꺾어 버렸다.
“크윽!”
그 검사는 바깥쪽으로 뒤틀린 팔의 고통때문에 신음소리를 흘렸지만, 용케도 검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가… 비록 6개월 정도지만 검술의 기초를 배워서 아는데, 검을 처음 배울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손에서 검을 떨어뜨리면 안된다는 거다.
물론, 방금 같은 미노트 남작의 경우에는 어쩔수가 없는 거겠지만….
하여간 그런 거의 세뇌라고 할 수 있는 교육 덕분에 아마도 그 검사는 팔이 바깥으로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검을 떨어뜨리지 않는 걸거다.
그걸 보면, 또 검을 다루는 사람들은 ‘음… 교육을 잘 받았군.’ 이런다니까.
“흠… 확실히 괜찮은 녀석이군요.”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 왜 끄덕거리는지 모르겠지만 – 첼릿처럼 말이다.
그러고보니, 첼릿도 백작가에서 기사들에게 훈련 시키는 위치에 있었지.
그렇게 첼릿에게 칭찬(?) 비스무리 한걸 받은 그 검사는 미노트 남작에게는 엄청 얄미운 놈이었던지, 팔을 꺾었는데도 검을 놓지 않자 인상을 찌푸리며 그 사람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무릎에 그 검사의 팔뚝 부분을 강하게 내리쳤다.
빠각~ 하는 소리가 난 걸 보니 아마 뼈가 부러지던지 아니면 최소한 금이라도 갔을 것 같다.
그 고통 속에서도 그 검사는 ‘크윽~’하고 작은 신음정도에 그쳤지만, 검을 더 이상 잡고 있을 수가 없었던지 손에서 검이 스르륵 빠져 나갔다.
그걸 잽싸게 잡아채서 한바퀴 돌려 본 미노트 남작은, 왼 손으로 팔뚝을 잡고 있던 검사를 막 자신에게 덤벼오는 두 시커머스 사람에게 던져버리고 잽싸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그가 깜빡하고 있는게 있었으니…
“끄윽….”
남작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를, 시커멓게 차려입은 한 사람이 조용히 남작의 등 뒤에 바싹 붙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와함께 남작의 입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붉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 내린 걸 보니…
“흠, 뒤를 찔렸군. 멍청하긴, 뒤를 조심했어야지. 쩝… 아까워라. 그게 아니라면 몇 녀석 더 상대 할수 있었을텐데…”
이 세상에서 재일 재미있는게 불 구경이랑 싸움구경이라더니만, 격투를 재미있게 관전하던 램버트가 무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쩝 다시며 상황 설명을 끝냈다.
맨 처음 미노트 남작과 켐벨경을 공격하기 시작할때도, 몇몇 사람만 나와서 공격할 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계속 가만히 있어서 아무래도 남작은 주위 사람들에게 신경을 안 쓴 모양이었다.
마지막에…
“이런 비겁한…”
이라고 중얼거리며 쓰러지는 거 보니까 말이다.
하지만 미노트 남작에게서 ‘비겁하다’ 라는 말을 들은 그 시커먼 사람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의 등에 박혀 있던, 단검 치고는 약간 길어보이는 검을 빼내고는 엎어져 있던 남작을 뒤집어 그의 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거의 남작의 옷을 벗기다 시피해 탈탈 털고 나자 그의 허리띠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보석을 드디어 발견해냈다.
“흠… 이건가?”
그 보석은 그 남자의 손 안으로 들어가자 연한 자주색 같은 빛을 발했다.
그는 그것을 높이 들어올려 이리저리 비춰보더니 피식 웃으며 그걸 품에 넣으려고 했다.
그 순간!
“지금이다!”
라고 외치며 리건이 뛰어 내렸다.
그리고 그 뒤를 못마땅한 표정의 첼릿과 듀비, 그리고 으갸갸갸~~ 하는 이상한 기압을 넣은 램버트가 뛰어 내렸다.
나?
나는, 어차피 내려가봤자 검술을 못하니 짐덩어리만 된다고 해서 위에서 지켜보다가 정 위험할때 지원 사격이나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종횡무진하는 그 넷을 보니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금방 끝날 것 같기도 했다.
시커멓게 차려입은 존재들은 갑자기 위에서 떨어져 내린 내 일행들을 보고 동요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고 곧바로 조를 짜서 덤벼들었다.
그 사람들도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본 실력을 드러내는 그 넷 에게는 정말 쨉도 안되었다.
‘어라… 그러고보니 내 일행은… 모두 인간이 아니잖아?’
5000살 먹은 드래곤 부터 시작해서 200살 넘게 먹은 블루 엘프에 100살 넘게 먹은 하프 엘프에 200살이 훨씬 넘은 드워프까지.
‘오호라… 이런 파티들은 돈주고 구해도 못 구할텐데.’
한 사람에게 5명씩 붙었지만 그 다섯명들을 제압하는 건 우리쪽이었다.
사방팔방에서 너무나 화려한 씬들을 펼치고 있어 내 눈은 전후좌우를 쉴새없이 왔다갔다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까 남작이랑 싸울때는 그래도 ‘대단한 실력이네…’ 라고 감탄할 만한 실력자들이, 그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상대하니까 완전 진검 앞에 몸사리는 대나무처럼 그들이 한번 휘두를때마다 그냥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그 순간 또각또각 하는 효과음이 나지는 않았나 싶을 정도여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역시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챙긴, 치사하게 뒤에서 찌른 그 사람만이 남았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4명을 보고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품에서 보석을 꺼내서는 허공으로 휙~ 하고 던져버리는 거였다.
아마 내 생각에는 갑자기 나타난 우리 일행이 보석을 노리고 온 것일테니 보석을 다른 곳, 더구나 멀~리 던저버려 우리의 시선을 돌린 뒤 자신은 튀려고 했던 것 같았다.
보석을 얻든 뺏기든, 일단 어떻게 된 건지 상황 보고는 할 사람이 필요할테니 말이다.
정말 그것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참….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그가 보석을 던지자마자 고개를 돌린 건 단 한명, 램버트 뿐이었고, 나머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황당한건… 그가 하필 보석을 던진 곳이 내가 있는 방향이라, 나는 정말 얼떨결에 그 보석을 받고야 말았다.
그 보석을 쥐는 순간… 나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뭐라고나 할까… 기분이 마구 들뜨면서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기운도 마구마구 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 헤에… 이게 그라함 대제의 보석 효과인가보다… 생각했지만 그것뿐, 나는 그 보석을 한 손에 쥐고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내려섰다.
“아… 저기… 이거…”
내 앞에서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시커머스를 한번, 보석에 눈을 빛내는 램버트를 한번, 그리고 리건을 한번, 듀비와 첼릿도 서비스로 한번씩 본 나는 마지막으로 리건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어떻게 하죠?”
은빛으로 예쁘게 빛나는 보석을 들고 난처한 표정을 짓자 옆에서 램버트가 냉큼 말했다.
“어디, 나도 한번 보자. 그 유명한 보석이라는거…”
“아, 예. 여기…”
내 손에서는 은빛으로 빛나던 것이 램버트 손에 들어가자 너무나 정열적으로 보이는 붉은 빛으로 변했다.
“히야… 이거 제법 세팅이 잘 되어 있잖아? 내 친구놈에게 보여주면 불을 뿜을 거야. 그 놈은 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보석 세팅을 잘하는 줄 알거덩. 쿡쿡쿡, 그 모습을 봐야 하는데…”
어두워서 달빛에 의지해야 했겠지만, 그렇게 대충 살펴보던 램버트는 보석을 나에게 넘겼다.
“자.”
“에? 아, 예.”
램버트가 주기에 받기는 받았는데, 이거 어째… 커다란 보석을 받아서 입이 찢어진다기 보다는 엄청난 골치덩어리를 받은 기분이라 떨떠름 했다.
그래 그런 시선으로 보석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리건의 말이 들려왔다.
“여기 오래 머물 이유가 없으니 빨리 뜨자. 해인, 넌 뒷정리좀 해라.”
뒷정리라는 것은 공터를 깨끗하게 비우라는 소리였다.
그래 한 사람 남아 있는 건 어쩔껀데요… 라고 물어보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누가 손을 썼는지 조용히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어이구… 잽싸기도 하셔라.’
속으로 괜히 툴툴대던 나는 몇몇의 노움들을 불러내 공터를 치우게 했다.
“아, 이것도… 파묻어버리면 안될까요? 아니면… 부셔버리던가… 가지고 있기 싫은데…”
그런데 보석을 깰 수 있나? 라고 중얼거리려고 한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주변을 진동시키는 엄청난 마나를 느끼고 놀라버렸다.
얼마나 거대한 마나였는지, 그걸 느끼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라면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데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못 느꼈는지 가만히 있는 거였다.
“듀비, 첼릿 방금 뭐 안 느껴졌어요?”
둘 다 마법사는 아니라고 해도 검기까지 다루는, 즉 마나르 다루는 경지에 있는 사람들인데, 날 소름까지 돋게 만든 이 강력한 마나의 파동을 느끼지 못할리가 없었다.
그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들이 오히려 이해가 안되어 물어보는데, 대답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거였다.
그제서야 나는 그들이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첼릿? 듀비? 램버트?”
내 부름에도 그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거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놀라 그들에게 다가가려는데 리건이 내 팔을 잡아 제지했다.
“놀랄 거 없어. ‘타임 스톱’ 마법에 걸린 거야.”
“에엑? 타임 스톱이요? 그거… 9클래스 마법이잖아요?”
말로만 들어보던, 긍국의 9클래스 마법이 바로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는데 어째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사실 첼릿이나 듀비, 램버트가 가만히 있다는 것 외에는 주변에는 크게 바뀐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타임 스톱이라는 마법이 시간을 멈추는 거라 환경이 갑자기 바뀌는 건 없지만….
‘아, 그럼 아까 그 강력한 마나의 파동이 바로 타임 스톱 마법이 시전되느라 생긴 거구나.’
아까 느꼈던 충격이 다시 떠오르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역시 9클래스 마법이다… 라고나 할까?
그렇게 9클래스 마법을 겪어 본 충격에 젖어 있는데, 리건이 또 날 잡아 끌었다.
“가자, 만나뵐 분이 계신다.”
“예에? 갑자기 무슨…”
그러나 내가 ‘예?’ 라고 물을때 리건과 나는 빛에 휩싸였고 ‘무슨’ 이라고 중얼거릴때 나는 주변 환경이 화악 바뀌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슬그머니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입을 다물려다가 놀라서 다시 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푸르른 수목에 둘러 쌓여 있었는데, 눈 깜빡 할 사이 내 주변에 있던 푸르른 수목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너무나 거대한 동굴 속에 서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동굴도 보통 동굴이 아니라, 얼음으로 된 동굴이었다.
그것도 뿌연게 아니라, 마치 티 하나 없는 맑고 투명한 얼음이라, 밤하늘에 떠있는 달빛을 그대로 투과, 굴절시켜 동굴 안이 환상의 나라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환상의 나라인 것 처럼 느껴지는 동굴 가운데에는….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는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솔직히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고 상상도도 많이 봤었지만, 이야기를 듣거나 상상도를 봤을때에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정말 실제로 실체를 보는 순간,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딱 한가지였다.
“아름답다….”
이게 얼음 동굴때문인지, 달빛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드래곤들이 모두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후후후, 고맙구나 신기한 종족의 아이야.]동굴을 울리는 듯한, 그러나 부드러움이 담긴 목소리에 나는 화급히 정신을 차렸다.
나를 위해서인듯, 드래곤은 바닥에 몸을 낮추고 그 거대한 머리 또한 바닥에 뉘인 상태로 날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칸 콜트페이스님.”
리건의 정중한 목소리에 나도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구나, 블루족의 아이야.]‘아, 아이….’
5000살이 넘는 리건에게 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은 정녕 몰랐다.
“예, 칸 콜트페이스님. 보아하니… 생의 끝을 기다리고 계시는 군요.”
[후후후, 그렇지. 이럴때 참 예기치 않은 방문을 받아 놀랐지만…] [신경쓰이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빨리 처리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아니, 아니야. 끝을 바라보는 시기에 정말 즐거운 만남이 있다는 건 기쁜 일이지.]‘도대체 뭔 소리래…’
그 둘의 알 수 없는 대화에 소외된 내가 멀뚱히 서 있자 실버 드래곤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신기한 종족의 아이야, 너는 누구더냐?]이름을 대답해야 하나, 인간 종족의 백작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내 핏줄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그때, 나 대신 답해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 자식이야.]“아, 아버지.”
아버지를 필두로 실피드와 노아스, 이프리트 아저씨까지 줄줄이 나타났다.
[오호… 4대 정령왕을 한꺼번에 만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인데… 오늘은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하는군. 그런데… 정령왕의 자식이라?] [내 기운으로 인하여 태어난 존재. 이 세계 식으로 이야기하면 내 자식이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이기도 하구 말야.] [4대 정령왕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도 하지.] [정령의 기운과 육신을 한꺼번에 가진 존재지.]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아스, 이프리트 아저씨, 실피드가 줄줄줄 입을 열었다.
‘오옷… 쑥시러라….’
[거참…]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실버 드래곤의 중얼거림에 이프리트 아저씨가 한 마디 더 보탰다.
[정령왕과 하프 엘프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기도 하고 말야.]아저씨의 말에 실버 드래곤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사랑의 결실이라… 너는 정말 소중한 존재로구나.]“아하하하….”
그런걸 직접 들으니 되게 쑥스러워서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실버드래곤이 뜻밖의 말을 건네왔다.
[그래… 이런게 바로 인연이라는 거겠지? 내 마지막 길의 마지막 인연이 즐거웠다는 뜻에서 아이야, 네 원이 있다면 한 가지 말해보려므나. 내 능력이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부자가 되고 싶다던지, 강대한 마나를 가지고 싶다든지, 아니면… 그래, 뭐.. 차원을 넘어간다든지 하는거라도….]“차원을… 넘어가요?”
내가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해 되묻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실버 드래곤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래. 이 세계 너머에는 다른 세계가 있거든. 거기로 보내준다는 거지.]그 순간… 네 정령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당혹스러운 노아스의 말에 실버 드래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게 보였다.
아버지쪽으로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내 쪽은 보려고도 하지 않는데다가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의 곁에 있었던 덕분에 발달한 감에 의하면 뭔가가 부글부글 끓는데 그걸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멍청하기는… 아, 넘어가면 다시 끌고 오면 되잖아?]실피드의 말에 이프리트 아저시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보였다.
그러한 4대 정령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던 나는 쓰윽 고개를 돌려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의 실버 드래곤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그라함 대제의 보석을 쓱 내밀었다.
“이것좀 없애주세요.”
내 말에 4대 정령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에 나는 씨익 웃었다.
그러고보면, 노아스나 실피드도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심술로 인하여 저쪽 건너편 세계에 쫓겨 갔다가 끌려온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뭘 그리 놀래요? 그쪽이 그립기는 하지만…진작에 넘어가는 걸 포기했다구요. 아버지 구박 받으면서 여기서 사는게… 운명이려니… 해야지 어쩌겠어요?”
만약 기회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까… 하는 답은 예전에…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을때부터 결정하고 있었다.
한국에 있을 내 가족이 안 보고 싶어졌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양부모님들께는 해민이가 있었고, 원래 나는 너무나 좋으신 분들이 그들이 가지고 계시던 크나큰 사랑을 듬뿍 떼어서 나누어 주신 것 뿐이니 말이다.
여기에서는… 친어머니가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하시면서 나를 아버지께 남겨준 거였으니… 어디에 머물러 있을지는 뻔한 거 아니겠는가.
[어머, 어머, 어머… 어쩜….] [허… 잘 컸네. 이게 다 내 교육 덕분인 줄 알아라.]노아스와 실피드의 말이 끝나고도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안 했다.
나도.. 왠지 쑥시러워서 괜히 농담조로 말을 한 다음에는 잽싸게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뭘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쳇, 보기도… 쑥스럽고 말이지.’
정령왕들이 한쪽에서 수선을 떨든 말든 가만히 나만 바라보고 있던 실버 드래곤이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그 보석을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이지? 그 보석이 아름답지 않으냐? 게다가 마법적인 힘도 있는데…. 너는 그 힘을 가지고 싶지 않니?]“보석… 이 예쁜 건 알고 선물 받으면 입 찟어지게 좋아는 하지만… 그렇다고 보석을 모은다던지 보석을 늘어놓고 흐뭇해 하는 취미는 없거든요. 게다가… 이 보석에 들어있는 힘이 아니라고 해도 아버지 잘 만난 덕에 힘이라면 차고 넘칠만큼 있구요. 그리고 이건…. 이게 가진 상징이니 뭐니 해가지고 귀찮은 일만 발생시키는 애물단지일 뿐인걸요. 제가 보석을 좋아하더라도 이런 귀찮은 건 사양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냥 버리자니 다른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또 귀찮아 질거 같아서 아예 없애버렸으면… 하는데 마침 부탁 하나 들어주신다니 부탁 드릴게요.”
나의 길~ 다란 대답에 실버 드래곤의 눈이 다시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러냐? 네가 정 그렇다니 그걸 내가 받아 처리는 해주겠다만… 그걸 부탁을 들어줬다고는 할수 없겠구나. 이건 원래 내 물건이었으니 말이다.]내 손에서 갑자기 동동 떠서 실버 드래곤에게 날아가는 보석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나는 실버 드래곤이 말한 의미를 깨닫고 입을 떠억 벌렸다.
“녜에? 이게 원래 드래곤님 거였다구요? 어… 호, 혹시 그러면… 그 1000년 전의 대마법사 메이크피스님이…?”
[후후후… 정말 그리운 이름이군. 그래, 나의 마지막 유희때 이름이 바로 메이크피스였지.]“오오옷… 이럴수가. 전설적인 존재를 내가 보게 되다니… 이거 참 감격이군요. 아, 그런데 한가지 여쭈어볼 것이 있는데… 호, 혹시… 그… 그라함 대제와의 사이가 어떤 것이였는지요? 단순한 친구? 아니면 연인?”
[후후후… 그건 그냥 비밀로 남겨두는 게 좋겠지. 다 알아버리면 재미가 없잖아? 전설이란 비밀스러운 맛이 있어야 하는 거라구.]“헉… 그, 그렇습니까?”
[자, 그럼 보석은 원래 내걸 나에게 돌려주는 거니 넘어가고, 너의 소원은 뭐지?]실버 드래곤의 부드러운 채근에 골똘히 생각하던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절…. 여자로 만들어주세요.”
[호오, 특이한 소원이구나. 이유를 물어도 될까?]“거창하게 이유… 라고 할 것 까지는 없는데요, 전 원래 여자로 자랐거든요. 제가 여자인 줄 믿었구요. 그런데 여기와서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무성인 거에요. 그러면서 자꾸 남자로 오인받구… 차라리 정말 여자인데 남자로 착각하면 그나마 났지만, 이건 무성인 주제에 그러니까 아니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고?]“제 평생의 대부분을 절 여자라고 여기고 살았는데 이제와서 바뀌고 싶지 않아요. 특별히 남자가 되고 싶다고 여긴 적도 없고요.”
내 말에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실버 드래곤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천천히 말했다.
[네가 무성인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의 영향때문이겠지? 정령에게는 성별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네 유전자 자체를 변형시키지는 못하니 차선책을 썼으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떻지?]“그… 차선책이 뭔데요?”
[내가 너에게 폴리모프 마법을 걸어주는 것이지. 그러나 폴리모프는 어디까지나 마법, 실제로 널 여자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란다. 뭐, 그래도 애는 낳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 혹시나 네가 여자로 있는게 마음에 안 들면 마법을 풀면 되니까 괜찮은 방법이지 않니?]여자로 될 수 있다면 마법이 아니라 마법 할아버지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더구나 드래곤이 걸어주는 마법인데다가 애까지 낳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두번 생각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주세요!!”
[좋아. 그럼… 그래, 이렇게 된거 이걸 써볼까나?]드래곤의 중얼거림이 끝나자마자 실버 드래곤에게 날아갔던 그라함 대제의 보석이 다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내 앞에서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더니만, 겉의 부분은 바닥에 떨어져 흩어지고 가운데 알맹이는 그대로 허공에 떠 있는 거였다.
그걸 바라보는데 드래곤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 가운데… 그러니까 실버 드래곤의 피라는 것이 스르르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 내가 어어… 하며 뒤로 물러나려고 하자 웃음기 어린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너무 겁먹지 말거라. 너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그래 주춤 거리면서 가만히 있자, 그 피가 내 목 아래쪽에 닿더니 스르르 스며드는 거였다.
‘헉… 내 몸이 피를 흡수했다.’
[네 목뼈 속에다가 봉인해 놨으니 폴리모프 마법의 마나가 되어주기도 하겠지만, 혹여 네가 마법을 쓴다면 그런데 보탬도 좀 될게다. 자… 그럼 이제 여자가 될 준비가 되었니?]그래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실버 드래곤이 낮게 속삭였다.
[폴리모프!]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목 안에서 강한 마나의 파동이 퍼져 나온다 싶더니만, 서서히 내 몸을 중심으로 강하게 한번 휘몰아치고 나타날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목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여자가 된 걸 축하한다.]강한 마나의 파동으로 인하여 얼결에 눈을 꼬옥 감고 있다가 실버 드래곤의 음성이 들리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내 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전신을 비출 수 있는 타원형의 거울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깔끔하게 묶였던 머리가 풀린 내가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가슴’이 있었다.
“오… 오오오옷, 오오오오오오오옷~~~ 럴수 럴수 이럴수가아~~ 세상에, 내가 여자가 되었네에에~~”
감격에 차서 거울에 들어갈 듯이 바라보고 있자 누군가가 나를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끌어당겼다.
[흠흠, 창피한 꼴을 보여 미안하군, 실버 드래곤이여.]아버지였다.
평생 이제는 못 될 줄 알았던 여자가 되어 좀 기뻐하는게 어디가 창피한 거라고…
그래도 겉으로는 감히 항의할 생각은 못하고 속으로만 쳇쳇 거리는데 실버 드래곤의 웃음기 어린 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이제야 제정신을 차렸군. 내 평생에 넋나간 물의 정령왕을 보게 되다니… 이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일까나?] [시, 시끄러웟!]아버지의 냉정한 외침에도 실버 드래곤의 휘어진 눈은 풀리지 않았다.
[자… 아쉽지만 나는 점점 피곤해져서…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군. 블루 족의 아이야, 그리고 정령왕의 딸이여 즐거운 만남이었다. 같이 와준 4대 정령왕들에게도 감사를 표하지. 마지막으로 내 용심 써서 그대들이 원하는 곳을 보내주도록 하겠네. 어디로 가고 싶은가?]실버 드래곤의 선심 가득한 말에 나는 누가 말하기 전에 냉큼 대답했다.
“벨레니국의 수도에 있는 엠브로스 백작 저택이요!”
그러자 실버 드래곤의 눈이 더더욱 휘어졌다.
[좋다.]“아, 저기 참고로… 아까 리건하고 제가 왔던 공터에 있는 드워프 한명하고 하프엘프 한명하고 블루 엘프 한명도 같이 보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도록 하지. 그럼… 이제 작별이군.]“편안한 안식이 되시길 바랍니다, 칸 콜트페이스님.”
리건의 말이 끝나자마자 4대 정령왕도 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편안한 안식이 되길….]그들의 보기 드문 진지한 인사에 나는 평범하게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지 못하고 그냥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칸 콜트페이스라는 실버 드래곤은 수명이 다해 자연으로 회귀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드래곤을 마지막으로 본 존재들은 – 대부분 드래곤이었겠지만 – 그렇게 인사하는 거라고 했다.
아마, 드래곤의 예의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당시 그걸 몰랐던 나는… 그냥 차라리 아버지가 인사하는 걸 따라할껄… 하고 쫌 후회를 했었다.
하여간, 4대 정령의 인사와 나의 꾸벅거리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우리를 둘러싼 새하얀 빛이 터져나왔고, 그 빛이 사라질 즈음 나는 익숙한 주위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함께 황당한 듯한 외침들을 들을 수 있었고 말이다.
“뭐, 뭐야 갑자기 이게에에~~!!”
“해, 해인님?”
“허걱, 엠브로스 백작니이이임?”
나는, 아니 우리 일행은 벨레니 국 수도 루더포드에 있는 엠브로스 백작 저택 현관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훗, 드디어 돌아왔네.”
======================================================
에필로그
그 후에 어떻게 되었냐 하믄…>
“뜨어어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아아아~~?”
갑자기 저택 앞으로 뚝 떨어진 우리 일행을 보고 놀란 시종의 연락을 받고 왔는지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나에게 이브스햄이 달려왔다가 내 모습을 보고 입을 떠억 벌렸다.
칸 콜트페이스 레어에서 전신 거울을 봤을때는 가슴이 나오고 허리가 약간 얄상해 진것 외에 바뀐게 별로 없어서 금방 알아차리지 못할 줄 알았는데, 첼릿도 그렇고 이브스햄도 그렇고 보자마자 내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채는게 신기했다.
“헤에, 그렇게 티나나요?”
“티, 티가 나다니요. 해인님, 갑자기 왠 여장을 하신 겁니까아아~~”
“여장이 아니라 여자가 된 거야.”
갑자기 나타나는 익숙한 음성에 나는 남들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려 했건만, 놀랍게도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누, 누구…?”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을 대표로 이브스햄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는 함부로 말 하기가 어려웠는지 말 끝을 흐리며 나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흔히 볼 수 없는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이 똑같은 존재였으니까.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불쑥 나타났다는 사실보다는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놀라워 물었는데 내 말 한마디에 주변이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해인아, 우리도 왔어~”
아버지 뒤로 노아스가 배실배실 웃으며 손을 흔드는데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어줄 수 밖에 없었다.
온건 알고 있었다.
내가 궁금한건, 왜 다른때와는 달리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내느냐 하는 거지.
“저, 저기… 누구신지….”
이브스햄이 조심스레 물어오자 내가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4대 정령왕이 대꾸했다.
“아버지.”
“큰아버지.”
“삼촌.”
“고모.”
처음부터 아버지, 이프리트 아저씨, 실피드, 노아스의 순서로 한 마디씩 대답하자 황당하다는 눈빛이 나에게로 쏟아져 나는 다시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아.하.하.하….”
그리고 그 뒤로 익숙한 듯한 투닥거림.
“웃기지 마. 네가 왜 큰 아버지야? 놀고있네. 넌 작은 아버지 해.”
“어허, 이거 왜이러나 동상. 솔직히 말해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아도 얼마나 많은데.”
“시끄러워. 동생 삼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 하라고!”
“자자, 그만해라. 해인이가 난처해하지 않냐?”
이프리트 아저씨의 다독거림에 아버지와 실피드가 잠시 입을 다물자 이브스햄이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해, 해인님?”
“아… 그러니까… 이 분은 친아버지고… 나머지 분들은… 아버지의 의형제분이라고나 할까나… 핫핫핫….”
내 어색한 말투에 사람들이 미묘한~ 시선을 보내자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자세한 이야기는 씻고 나서 하도록 하죠.”
“아, 그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이 저택 집사인 크레이그가 황급히 대답하며 시녀들과 시종들을 재촉했다.
“예에에에~~? 그, 그러니까… 지금 해인님이 여자가 된게… 실버 드래곤의 저주란 말씀이십니까아?”
대충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자 일행들은 다시 자연스레 내 서재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변한 내 모습에 대해 설명을 구하는 이들에게, 나는 간단히 아메리국에서 만난 실버 드래곤이 여자로 만들어줬다고만 했는데, 이브스햄이 거기서 ‘저주’란 단어를 끼워 넣은 것이다.
“저, 저주가 아니라… 마법을 건 건데요.”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해명을 해줬지만, 패닉 상태인 이브스햄과 이브스햄의 딸 에르, 첼릿은 접수를 못하는 것 같았다.
“어, 어쩌다 그런…. 가여우신 해인님…”
에르의 말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내가 걸어달라고 한건데…”
“아아… 괜히 변명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저기요…”
괜히 나에게 마법 하나 잘못 걸어줬다가 애꿏은 칸 콜트패이스만 사람에게 저주를 건 사악한 드래곤 이라고 욕을 먹게한게 아닌가 싶어 굉장히 찝찝 했다.
그리고… 그건, 정말 기정 사실로 들어나 나중에 [르윌라르 벨레니 여왕 치사 00년에 여왕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왕실 기사단 소속 해인 오스번 엠브로스 백작이 거룩하신 여왕 폐하의 명을 이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린 아메리국에서 만난, 그 사악하고 그지없는 드래곤을 만나 저주를 받아 여자가 되는 기이한 사건이 있었다.] 라고 벨레니국 역사책 한 귀퉁이에 적히게 되었다.
그나마 칸 콜트페이스의 이름을 안 밝혀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그 실버 드래곤의 이름을 악룡으로 만드는 일을 할 뻔 했다.
“해인, 악룡의 저주로 여자가 되었다면서?”
하여간, 내가 집에 돌아오고 보고를 위하여 – 물론 대제의 보석 이야기는 쏘옥 뺐다. 게다가 직접적인 보고는 우리보다 며칠 늦게 도착한 에아머스 차트워드경이 했고 말이다 – 왕성에 잠시 입궁했을때 벌써 내가 저주를 받았느니 어쨌느니 하는 소문이 퍼지고 부풀려져 9대까지 여아만 낳게 했다는 둥 황당한 이야기까지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수근거림에 귀찮아진 내가 리건에게 일찍 퇴근한다는 말을 남기고 성을 나오려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조엘이 데니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어라… 오늘 저녁쯤에나 인사 드리러 가려고 했었는데….”
“인사고 뭐고, 여자가 되었다며?”
오랜만에 만나본 조엘은 예전에 있던 여유로움은 어디로 보내버렸는지 얼굴에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여자가 된게 그렇게 이상해요?”
그렇지 않아도 뒤에서 저주를 받았네 어쨌네 하는 수근거림이 싫어 일찍 집으로 가려는 길이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조엘이 그러니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지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조엘이 내 팔을 휘익 잡아챈 뒤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라라…?”
왕궁의 커다란 정원의 인적이 드문 곳 까지 날 데리고 온 조엘은 팔을 놓고 몸을 휙 돌려 날 보더니 무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해봐. 혹시… 혹시 반려가 생긴 거야?”
‘반려? 갑자기 그게 무슨…?’
조엘의 말에 눈을 떼구르를 굴리며 의아해하고 있자 조엘이 성큼 다가와 내 양 팔을 붙잡았다.
“정말 그런 거야? 테오르도족은 자신의 연인을 만나면 성별을 결정지을 수 있잖아? 그 반려가 도대체 누구지? 설마… 블랜차드 후작인가?”
“아닌데요?”
“그럼?”
무지 딱딱하게 굳은채 묻는 조엘을 보자니, 그제야 내가 정글에 떠나기 전 조엘네 집에 들렸을때 조엘이 자신을 위해 내가 여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느니 어쨌느니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하하하… 정말 아니에요. 드래곤이 여자로 만들어준게 맞아요. 그리고, 나는 테오르족이 아니에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블랜차드 후작과도 아무 상관 없는 거지?”
거기서 왜 자꾸 리건 이야기가 나오냐고 묻고 싶었지만… 으음… 으음…. 새클턴 정글에서 리건에게 키스 당한게 떠올라 나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해졌다.
그러한 변화를 눈치챈 것인지 잠시 풀려지려던 조엘이 다시금 굳어졌다.
“서, 설마…”
하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팔을 붙잡고 있던 조엘의 팔이 탁 쳐 내지고 나는 누군가의 품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여간 한 눈을 팔 수가 없어.”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등장에 조엘의 눈이 커졌다.
“어, 어어어…”
하여간 쉽게 볼 수 없는 머리카락 색 덕분에 아버지와 나는 어딜 가서도 연인이라고 오해받을 일은 없었다.
한 순간에 혈연인 걸 알아차리니 말이다.
“아버지?”
“도대체 그 드래곤에게는 왜 여자가 되겠다고 말한 거냐? 차라리 되려면 남자나 될 것이지. 이거야 원… 이제부터 벌레들이 얼마나 꼬이겠냐구우~”
“어머나, 말은 똑바로 해라. 전에는 안 꼬였었니?”
“인간들은 남자라도 예쁘면 꼬이던데…”
그 뒤로 이제는 의례히 그러려니… 생각하듯 노아스와 실피드가 나타났다.
그리고 이프리트 아저씨도.
“아하하하, 그러니 우리가 이렇게 진을 치고 있는 거잖아.”
그랬다.
갑자기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당당히 아버지니 삼촌이니 소개하던 그들을 이해할 수 없어 이유를 묻자, 벌레퇴치하러 왔댄다.
‘왜 이제와서…’ 라고 물었더니만, 그렇지 않아도 슬슬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나서려고 했는데, 내가 여자가 된다니까 이제 때는 왔다~ 라고 생각이 되었다나 어쨌다나.
그 이야기를 들은 리건은 좋아했다.
그 동안 자기만 견제당하고 있는 게 얼마나 억울했는지 아냐면서….
왠지 이제 리건과 같이 그 ‘견제’당하는 사람들 중에는 조엘도 끼일 것 같은건… 착각이 아니겠지?
“너, 누가 누구하고 상관 관계가 있다는 거야? 절.대. 아무 상관 없.어!”
아버지는 아직도 놀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조엘을 냅두고 나를 이끌고는 그 자리를 쌩 하니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앗, 나중에 인사드리러 갈게요오오~~!!”
그 뒤로 나는 어떻게 살았냐 하면….
“백작님, 오늘도 꽃과 선물들이 도착했습니다만?”
내가 저주인지 축복인지로 여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고, 공식 석상에 몇번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갑자기 첫눈에 반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닭살 돋는 글이 써진 편지와 함께 꽃과 선물들이 한아름씩 배달되기 시작했다.
내 짧은 평생에, 이렇게 큰 인기를 끌어본 적은 정말 처음인거 같았다.
뭐, 모두들 나의 배경을 가지고 이러는 거겠지만…
그리고 리건은 남들이 있건 없건 예전보다 노골적으로 나에게 은근한 스킨쉽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내 생각인데… 나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다기보다는… 몰래 지켜보다가 열받아서 튀어 나오는 아버지를 비롯한 정령왕들을 놀리기 위한게 아닌가 싶었다.
예전에는 리건과 나만 있을때만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제는 내가 돌아온뒤로 아버지란 이름으로 -물론 저택에 안 머물고 대부분 정령계에 머무시기는 하지만… – 모습을 드러낸 덕에 요즘은 사람들 앞에서도 불쑥 불쑥 모습을 잘 드러냈던 것이다.
그걸 은근히 즐기는거보니, 리건이 악취미를 가지고 있던지, 아니면 아메리국에서 폭탄 함정에 당했을때 정령왕들이 대놓고 웃은거 보고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던지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리건이랑 나랑 결혼하네 어쩌네 하는 소문까지 돌아서 조엘이 놀라서 사실 확인 차 달려오게도 만드는 헤프닝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문때문에 내가 여왕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했다.
여왕이 별로 티를 안 내서 잘 몰랐다가, 리건과의 소문이 난 직후 슬쩍슬쩍 날 바라보는 눈길로 알아챈건데, 여왕이 아무래도 리건을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뭐 여왕의 자리쯤 되고보면 리건보고 ‘야, 너 나랑 결혼해.’ 라고 해도 될거 같은데… 하긴, 리건이 그런거에 눈 하나 깜짝할 존재도 아니니 거절 당할까봐 아무 말도 못한 거 같기도 하고….
듀비는… 은혜를 아직 다 못 갚았다고 여전히 첼릿과 함께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나중에 은혜를 갚고 나면 나에게 꼬옥 하고싶은 말이 있다는데, 그게 과연 뭘지는….
아, 그리고 베지테크스 상회가 드디어 벨레니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도 그 곳 일을 좀 돕기 위하여 새클턴 정글에서 돌아와 얼마 뒤 로얄 기사 시험을 쳐서 당당히 합격하여 리건의 보좌관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름만 올려놓고 기사단 일은 거의 관심을 끊었다고나 할까?
그러자 나와 같이 리건의 보좌관이었던 조르디 엘리노어가 이따시만하게 큰 꽃다발과 선물을 가지고 와서 정말 축하한다고 인사하고 갔다.
너무 좋아하면서 축한다고 하니 왠지 심술이 생겼지만, 선물까지 사들고 오니 또 너그러운 내가 뭘 어쩌겠는가?
감사하다고 하고 넘어갔지.
================================================
공지입니다.
이걸로 정딸도 완결이군요.
음, 제가 넘 마감일을 넘기는 바람에
책이 금방 나온답니다.
그리하여… 이 글들은 이번주 금요일에
삭제할 예정입니다.
퍼가시는 분들도 그때 모두 삭제해 주세요.
그리고…
이른 인사이지만
추석 잘 지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