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wn illuminating the clouds RAW novel - Chapter 20
20. 자백
* * *
‘오라버니, 오라버니.’
“화, 화야.”
옥사 벽에 몸을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꿈에서 자신을 부르는 예화의 모습에 익태는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 팔을 억세게 잡아채는 바람에 익태는 화들짝 놀랐다.
“곧 추국이 시작될 것이니, 죄인들은 일어나시오.”
죄인들은 다시 질질 끌려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인지, 벌써 해가 중천에 걸려 있었다. 영의정은 다시 시작될 고신이 두려워 벌써부터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옆에서 흐느끼는 아버지의 눈물에 짜증이 일어나기 시작한 익태는 그저 눈을 감아 버렸다.
도대체 조정 대신들은 무얼 하느라 아직도 자신들을 이곳에 내버려 두는 것인지. 이곳을 나가자마자 그 늙은이들부터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쓸모없고, 무능한 늙은이들.
추국장에 들어선 도운은 눈을 감고 부르르 떨고 있는 익태와 울고 있는 영의정을 지나 한 내관의 앞에 섰다. 부러뜨린 등채를 대신하여 새로 마련한 등채로 한 내관의 턱을 위로 올렸다.
“죄인에게 묻겠다. 약 여섯 해 전, 화성에서 의원을 교살하여 죽이고 익수사로 위장한 적이 있느냐?”
한 내관도 이번만큼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잠시 굳은 표정 그대로 도운을 바라보던 한 내관은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곧 고신에 너덜너덜해진 불쌍한 늙은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잔기침과 함께 흘러나왔다.
“소인은…… 절대…… 그런 일이 없사옵니다. 전하, 승하하신 의경 세자 저하를 보시어…… 제발 소인에 대한 곡해를 멈추어 주시옵소서. 평생을 궁에 매여…… 왕실을 위해 살아온 소인이옵니다…… 어찌 화성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소인에게…….”
어흐흐흐흐, 한 내관은 서럽게 흐느끼며 괴롭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증인 대령하라.”
“예, 전하.”
도운의 명에 재환의 등 뒤로 사내 둘이 졸래졸래 따라 들어왔다.
“전하, 화성 관아에 속해 있는 의생(醫生: 검시의)과 오작사령(仵作使令: 시체검안관노) 대령이옵니다. 당시 유빈마마의 부친이신 서 의원의 시신을 부검하였다 하옵니다.”
“당시 사건 경위가 어찌 되느냐?”
나라님의 용안을 처음 보는 순간, 소심한 의생은 긴장감에 토기가 올라왔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마른침을 몇 번을 삼킨 후에야 겨우 바들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이…… 여섯 해 전 유월 초하루가 지난날이었습니다. 고을에 유명한 의원이었던 서 의원이 강에 투신하여 자살했다는 고발을 받고, 그때 관아에 계셨던 현감나리와 형리, 그리고 여기 오작사령과 함께 서의원의 집으로 햐, 향하였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시, 시체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떠했느냐?”
“그것이 얼굴색이 푸르고 또 부, 붉었습니다. 무원록(無冤錄: 검시서적)에 따르면 익사체는 그 얼굴색이 붉거나 푸르지 아니하고, 허옇게 뜬 색이어야 합니다. 또한, 콧구멍 부분에 흰 거품이 자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아, 않았사옵니다. 익수사하였다는 시체가 그리 보이지 않으니, 타살을 의심해, 했사옵니다. 하여 혹 독살일까 싶어 은비녀를 입에 넣었지만 검어지지 아, 않았습니다요.”
의생은 말을 많이 하여 목이 타는지 목 근처를 손바닥으로 쓰다듬고는 입술을 한번 쓱 닦았다. 그러다 문득 저의 보고를 기다리고 계시는 나라님의 얼굴을 흘끔 바라본 의생은 얼른 입에서 손을 내리고 목을 바짝 움츠렸다.
“괜찮으니 천천히 이야기하거라.”
“……예, 예. 그것이, 독살이 아닌 듯하여 여기 있는 오작사령이 옷을 벗겨내고 시체의 몸을 사, 살폈습니다. 구타를 당한 것인지 몸 여기저기에 작은 상흔이 보였는데, 특히 목에 액흔(扼痕: 목이 졸린 흔적)이 보였습니다요.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있었습니다.”
“그것을 현감도 보았느냐?”
“예…… 예. 보았습니다요.”
“그래서 처결을 어찌하였느냐?”
이때부터 의생은 눈에 보이게 떨기 시작했다. ‘처결은…… 처, 처결은…….’ 이라는 말만 반복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만 계속 떨었다. 보다 못한 오작사령이 나서 대신 고했다.
“전하, 처결에 관해서는 쇤네가 압니다요. 그것이 그날, 쇤네는 나리들을 모시고 시체를 검안하고 바로 관아로 돌아왔습니다요. 그 후, 현감 나리께서 상부에 올릴 시장(屍帳: 시신의 상태를 기록한 그림)을 작성하시는 것을 도우려, 이놈이 현감 나리 곁에서 먹을 갈고 있었습니다요. 한데 그때 손님이 찾아와 소인은 바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손님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사건을 익수사로 종결하라, 현감 나리가 그리 명하셨습니다요.”
“네 그때 왔었다는 인물을 기억하느냐? 혹, 이곳에 있더냐?”
“그것이 얼굴은 잘…… 여섯 해 전, 한 번 본 사람인지라 기억하기가 쉽지도 않거니와…… 아! 그 양반이 고급스런 부채를 들고, 이렇게 하관을 다 가리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못 봤습니다요.”
도운의 입술 끝이 비죽 올라갔다.
“그 부채의 생김은 기억이 나느냐?”
“그것이 정확히 생각나는 것은 없고, 검은색에 무언가 자개문양이 요로코롬 박혀 있었던 것만 기억합니다요. 검은색 부채가 흔한 것은 아니라 소인이 그것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요.”
“그래? 혹, 이리 생겼더냐?”
도운은 입고 있던 쾌자 아래 허리춤에서 합죽선을 꺼내 활짝 펼쳐 보였다. 도운의 손에 들린 합죽선을 보자 한 내관이 경기하듯 몸을 들썩거렸다. 늘 가늘기만 했던 그의 눈이 처음으로 번쩍 뜨여 그 안에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파르르, 한 내관의 콧속에서부터 뜨거운 김이 솟아올랐다. 도운의 손에 들린 합죽선을 바라보는 한 내관은 눈을 부라리며 사납게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형틀에 포승줄로 결박당한 몸이 앞으로 나가지 않자 곧 발작을 일으키듯 발버둥 쳤다.
“내놔아아!”
“무엇을 내놓으라는 것이냐? 혹 이 부채 말이냐? 부채가 너에게 매우 소중한 물건인가 보구나. 그리 난리를 피우는 것을 보니.”
“저의 것입니다. 주상이 함부로 가져갈 물건이 아니오!”
“닥치거라!”
‘크헉’, 쇳소리로 기침을 해대는 한 내관의 입에서 타액이 질질 흘렀다. 단단한 등채로 한 내관의 가슴을 강타한 도운은 합죽선을 재환에게 건네주었다.
“주상이라? 건방진 놈. 네놈이 진정 왕실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냐! 네 그 불손한 태도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종사관은 합죽선을 자세히 보아라.”
“예, 전하.”
재환은 합죽선을 조심스럽게 받아 세심히 살펴보았다. 햇빛에 비쳐 보니, 투명하리만큼 얇은 한지 사이로 비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에 쥐기 편하도록 얇게 깎아 만든 대나무 속살이나 겉대 사이에 무엇을 숨기기는 매우 힘들어 보였다. 이어 부채 머리끝에 달려 있는 선추가 눈에 들어왔다. 재환은 쪽빛 선추끈에 매달린 장방형 모양의 작은 선추를 손으로 쥐었다.
장수를 상징하는 불로초와 거북이가 정교하게 조각된 대추나무 선추 아래에 작은 박쥐 문양 비취가 이어져 있었다. 재환은 망설임 없이 햇빛에 반짝이는 박쥐 장식을 손으로 당겼다. 작은 서랍처럼 열리는 그 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종이가 나왔다. 재환은 서둘러 합죽선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종이를 폈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종이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의경 세자의 죽음에 동조한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모두 합심하여 한일환의 조카를 중전에 올리고, 모든 권력을 함께 나눈다는 동맹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 한일환을 시작으로 조정대신들 일곱 명의 이름과 지장이 찍혀 있었다. 충격적인 사실에 재환은 한 내관을 노려본 후, 떨리는 손으로 연판장을 도운에게 넘겼다. 연판장을 확인한 도운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종사관은 무얼 기다리고 있는가. 당장 가서 역당들을 추포하지 않고.”
“예, 전하. 소신 명 받잡겠사옵니다!”
재환은 의금부에 대기하고 있던 겸사복장 이하 겸사복들과 나졸들을 끌고 의금부를 나섰다. 그들의 형형한 기운에 육조거리를 지나던 백성들이 길을 비켜주면서도 무슨 일인가 목을 빼고 바라보았다. 일곱 명의 대감들 댁으로 인원을 분배하여 보낸 재환은 좌상 대감의 가택으로 향했다. 아버님과 동문수학했던 좌상의 배신은 더 큰 배신감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좌상의 가택으로 쳐들어온 재환과 군관들에 의해 집안은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나 버렸다. 종사관의 신분으로 가죽목화를 신은 채 방 안으로 들어온 재환의 모습에 좌상은 바닥을 벌벌 기며 도망 다녔다.
“어째서, 왜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가진 것입니까? 어찌 그런 무서운 생각을!”
“그것이…… 그것이…… 이보게, 재환. 자네 아버지와 나 사이의 옛정을 봐서 제발 나를 못 본 척해 주면 아니 되겠나? 내 이리 잘못을 빌겠네. 응?”
“못 본 척해 드리면 어찌하시렵니까? 도주라도 하시렵니까?”
비굴한 좌상의 모습에 재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겨우 이런 추잡한 간신배 따위들이 세자 저하를 독살하여 사직을 흔들고, 제 누이를 유폐시키고, 제 식솔을 노비로 만들었다.
“죄인을 포박하라!”
“이보게, 이보게!”
자신을 향해 부르짖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재환은 뒤를 돌았다.
* * *
도운은 눈에서 피가 나올 듯 벌겋게 날이 선 한 내관을 향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이제 네 죄를 인정하겠느냐?”
“무슨 죄가 있다 이러십니까? 소인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모다 모함이옵니다.”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할 증좌가 네 합죽선에서 나왔다. 이래도 발뺌을 하는 것이냐?”
“그 합죽선이 저의 것이라는 증좌가 어디 있사옵니까? 설령 그것이 소신의 것이라 하여도, 누군가 선추 안에 장난을 친 것이겠지요. 소신의 선추에는 누군가가 조악하게 위조한 연판장이 아닌 패철(佩鐵: 나침반)이 들어 있었사옵니다.”
계속된 한 내관의 발뺌에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계속 여유로운 미소만 짓던 도운은 뒷짐을 지고 익태의 앞에 거만하게 섰다.
“너는 어떠냐? 네 죄를 인정하겠느냐?”
“모함이옵니다.”
도운을 노려보는 익태의 눈초리가 한 내관의 그것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이렇게 닮은 모습을 보니 핏줄은 핏줄인가 보구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도운은 헛웃음을 짓다, 이를 갈며 자신을 쏘아보는 익태를 향해 일갈했다.
“내 분명 한 번만 묻는다 하였다. 이미 한 번을 물었으니 다음엔 언제 다시 물어볼지 모른다.”
“한 번을 물어도 두 번을 물어도, 백 번, 천 번을 물어도 소신의 대답은 같사옵니다. 저의 무고함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사옵니다.”
이제 슬슬 결말을 봐야 할 시간이었다. 도운은 자신을 죽일 듯 바라보는 익태에게 씩하고 근사한 미소를 보여 준 후,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죄인을 대령하라!”
도운의 한마디에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여인의 발악하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이윽고 금군들에게 잡힌 언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끌려 들어오는 여인의 모습을 확인한 익태의 눈이 충격으로 커졌다. 왜, 대체 저것을 왜? 참을 수 없다는 듯 익태는 도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대감마님! 도련님! 쇤네를 살려 주시옵소서.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 쇤네는 죄가 없사옵니다. 허어엉. 살려 주시옵소서.”
영의정과 익태의 앞으로 끌려가던 언년은 그들을 돌아보며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그러다 결국 형틀에 묶인 언년은 목을 잔뜩 움츠리고 겁먹은 눈으로 주위만 둘러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살려…… 살려 주십시오. 쇤네는 잘못이…… 잘못이 없습니다아.”
“시끄럽다. 네 지금 예가 어디인 줄 알고 눈물 바람인 것이냐! 당장 그치지 못할까!”
도운의 추상같은 호령에 언년은 히끅대며 억지로 울음을 멈추었다. 도운의 무서운 얼굴을 바라보며 끅끅거리던 언년은 곧 속곳이 축축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축축함이 이내 치마까지 번지고, 금세 지린내가 올라왔다. 무릎이 맞부딪힐 정도로 다리가 심하게 떨렸다.
“너의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
“모…… 모르옵니다, 전하. 소인은, 소인은 잘못이 없사옵니다.”
“네가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알아볼 것이다. 네 보름 전, 여기 앉아 있는 죄인의 사가를 다녀온 적이 있지?”
“예?”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나는 듯했다. 도운의 하문에 겁이 난 언년은 바들거리며 익태를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죽일 듯 바라보는 익태의 모습에 언년은 보기에도 안쓰럽게 입술을 부들거렸다. 금세 눈물이 한가득 차올랐다.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두려움에 사지가 달달 떨렸다.
“그, 그런 일 어, 없습니다요. 참말 없사옵니다.”
겁에 질려 없다고 대답한 언년은 아직도 저를 예의 주시하듯 노려보는 익태를 흘끔 바라보았다.
“내 다른 죄인들에게도 그리했지만, 두 번은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지금 자백을 하거나, 고신을 당하다 이대로 죽거라.”
“예? 저, 전하! 전하!”
겁에 질려 자신을 부르는 언년을 차갑게 바라보던 도운은 지체 없이 돌아섰다.
“시작하라!”
찢어질 듯한 언년이의 처절한 비명이 시작되었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주리를 틀어 버리는 억센 장정들의 손에 벌써부터 허벅지의 살점들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뼈가 꺾여 버릴 것만 같은 고통과 생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지 못한 언년은 곧 게거품을 물고 혼절해 버렸다.
“히익! 푸, 푸!”
얼굴을 강타하는 찬물세례에 정신을 차린 언년은 입에 들어간 물을 뱉어내며 바람 빠지는 소리로 숨을 몰아쉬었다.
“소곤을 준비해라.”
도운의 한마디에 나졸은 버드나무를 납작하게 깎아 만든 소곤을 손에 쥐었다. 침을 탁탁 뱉어낸 손바닥으로 나졸이 소곤을 차지게 감싸 쥐는 모습을 보자마자 언년은 겁에 질린 채 고개를 흔들며 울었다.
“제발…… 제발, 전하, 전하! 아아악!”
곤장의 종류 중 가장 작다는 소곤 한 대만으로도 허벅지가 끊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언년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경기하듯 몸을 뒤틀었다. 귓가에 ‘휘잉’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두 번째 매타작 소리가 철썩하고 바로 울렸다. 단 두 대 만에, 언년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갔었습니다요! 갔었습니다요! 전하, 쇤네가 갔었습니다요! 허어엉, 그러니 제발 그만 치십시오. 허엉.”
“언년이 네 이녀언!”
언년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리자 곁에서 고신을 당하던 익태가 언년을 부르며 창자가 끓어오르듯 소리를 질렀다. 곁에서 소리를 지르는 익태를 무시하고 도운은 언년의 앞으로 다가섰다.
“내 뭐라 하였느냐, 두 번 물어보지 않을 것이니 고신을 당하다 죽으라 하지 않았더냐. 한데 네가 이제 와 자백을 한들 무슨 소용이냐? 계속 쳐라!”
“예, 허나…… 허나! 아아악!”
언년을 포함한 죄인들의 울부짖음이 절정에 도달할 때쯤, 재환은 포승줄에 줄줄이 묶여 굴비 두름이 된 죄인들을 끌고 의금부로 들어왔다. 의금부에서 나는 피비린내와 피떡이 된 죄인들의 모습에 겁을 집어먹은 대신들은 벌써부터 살려달라 울부짖었다. 그 모습에 도운은 짜증이 난다는 듯 소리쳤다.
“쓸데없이 왜 자꾸 살려 달라 비는 것이냐! 감히 일국의 세자를 독살하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네놈들이 아무리 빌어도 절대 아니 살려 줄 것이니, 괜히 힘 빼지 말거라. 앞으로 고초를 견디려면 아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옵니다. 곡해이시옵니다. 그것은 한 내관 저자가 모다 꾸민 일이옵니다. 모함이옵니다. 이는 모함이옵니다. 소신들은 아무 죄가 없사옵니다. 정말이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전하!”
“그럼 여기 찍힌 이 지장은 너를 모함한 자가 네 엄지를 잘라다 찍은 것이냐? 뭣들 하느냐! 어서 저놈의 손가락부터 확인해라.”
나졸들이 억지로 좌상의 손가락을 쫙 펴서 먹물을 발라 종이에 꽉 눌러 찍었다. 도운은 종이에 찍힌 좌상의 엄지손가락 지문과 연판장과 비교했다.
“네 손가락이 다섯 개씩 잘 붙어 있고, 연판장과 지금 네가 찍은 손도장 모양이 이리 같은데 억울하단 소리를 지껄인 것이냐! 뻔뻔하기가 하 없다! 요망한 저놈들의 손바닥에 장을 지지거라!”
“예!”
금세 인두가 준비되고 대신들의 손바닥에 장이 지져졌다. 피비린내에 살타는 내까지 더해져 의금부는 역한 냄새로 가득 찼다. 죄인들이 내지르는 신음이 사방에 곡성처럼 메아리쳤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들의 목소리와 역한 냄새에 언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감을 자극하는 공포와 고통에 눈물이 질질 흘렀다.
핏물에 절어 버린 치마가 이미 뭉개진 다리에 철썩 달라붙었다. 매타작을 맞을 때마다 언년의 허벅지에서는 떡방아 찧는 듯 둔탁하면서도 찰진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마지막 찰진 소리를 끝으로 언년은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얼굴을 후려치는 차가운 물벼락에 언년은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더 이상 악을 지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 전하…… 갔었습니…… 흐흑, 갔었습니다아…… 제발…… 용서를…… 갔었습니다.”
가늘게 흐느끼며 읍소하는 언년에게 다가간 도운은 냉정한 눈으로 언년을 질타했다.
“그러게 한번 물을 때 답을 잘하지 그랬느냐. 언년이 너는 예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눈치가 없느냐. 유빈이 네가 상전의 의중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눈치가 없다 지적하였다지? 지금 보니 유빈의 말대로 네가 정녕 눈치가 없음이라. 쯧쯧, 보거라. 결국 네가 상전의 충고를 업신여기다 이 꼴이 되어 버렸지 않느냐.”
“쇤네가…… 죽을죄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제발 용서를…….”
허어엉, 눈물에 콧물까지 범벅된 언년은 엉엉거리며 잘못을 빌었다. 뭐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매타작만 멈출 수 있다면,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죄인의 사가에는 왜 갔느냐?”
“……흐윽, 중전마마, 중전마마 심부름을…….”
“네 이년! 그 입 다물라! 으악!”
언년을 향해 소리를 지르던 익태는 자신의 허벅지를 힘껏 내려치는 나졸의 억센 힘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익태의 발악을 비릿하게 바라보던 도운은 시선은 그대로 익태에게 두고 언년에게 물었다.
“무슨 심부름이었느냐?”
“초를…… 전하의 처소에…… 초를 들이라…… 그리만 말하면 된다…… 그러셨습니다.”
“그것뿐이냐?”
“예, 예. 정녕…… 그것뿐이옵니다. 정말이옵니다. 믿어주시옵소서! 전하, 제발!”
“언년아.”
“……예, 예…… 전하…… 살려 주시옵소서. 갔었습니다…… 이년이 갔었습니다…… 이제 그만…….”
“진작 말을 했어도 어차피 너는 이 꼴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네가 감히 중전의 위세를 등에 업고 유빈 앞에서 건방을 떨어대었느냐. 내 이제부터는 감히 유빈을 능멸한 너의 방자함을 엄히 다스릴 것이다. 매를 계속 쳐라!”
“예? 전하, 전하! 아아아아악! 허어엉.”
도운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언년은 예화 탓을 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괜히 중전마마 때문에 자신이 걸레 같은 꼴이 되었다. 무릇 아랫것들은 상전을 잘 만나야 하는데, 괜히 상전 잘못 만난 탓으로 내 모습이 이것이 무엇이냐. 어흐흑, 서러움이 복받쳤다. 자비 없이 허벅지를 강타하는 매질에 울부짖는 언년을 익태는 죽일 듯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억울하냐? 결국, 네 집에서 부리던 계집종이 너의 아끼는 누이의 죄를 실토하였다. 일국의 왕을 독살하려 한 계획에 중전도 껴 있었다니, 이제 내가 어찌할까? 너는 아직 자백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겠지? 네 누이는 얼마나 버틸지 내 한번 지켜볼 것이다. 여봐라! 죄인인 주가 여인을 끌고 와라!”
“예, 전하!”
남현은 절도 있게 읍하고 바로 교태전으로 달려갔다. 남현이 뛰어가는 뒷모습에 익태가 발악하며 몸부림쳤다. 도운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며 죽일 듯 몸부림쳤다. 형틀에 묶인 손목을 빼내려 미치광이처럼 발악한 것도 잠시, 나졸이 내리치는 몽둥이찜질에 금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익태의 감긴 눈이 움찔거렸다. 천천히 눈을 깜박이자 흐렸던 눈앞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점점 뚜렷해져 갔다. 필사적으로 바동거리며 끌려 들어오는 여인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자, 익태는 눈을 번쩍 떴다.
“예화, 화야!”
“오라버니? 오라버니, 오라버니! 아버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오라비와 아버지의 모습에 예화가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는 예화의 몸이 마치 종이 인형처럼 맥없이 끌려가 형틀에 앉혀졌다.
“전하, 어찌 이러실 수 있사옵니까? 일국의 국모이자 왕실의 안주인인 신첩입니다. 하늘 앞에서 함께 국혼을 올린 전하의 처이옵니다. 한데 어찌 이리 대하실 수 있사옵니까? 이는 과거 어느 왕실에서도 볼 수 없었던 패악이옵니다!”
“시끄럽다! 과인의 처소에 독초를 들이라 명한 것을 내 모를 줄 알았느냐!”
“아니…… 오. 아닙니다. 그런 것이…….”
도운의 일갈에 예화는 입만 벙긋거렸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변명거리를 찾던 예화는 핏물에 젖어 축 늘어져 있는 언년의 모습을 발견하고 숨을 들이 삼켰다.
“어…… 언년이.”
금세 눈물이 차오른 예화는 겁에 질린 얼굴로 익태를 바라보았다. 만신창이. 그 말 그대로였다. 늘 단정하던 오라비가 어찌하여 저런 모습으로. 충격과 공포로 몸이 달달 떨렸다. 너무도 무서웠다.
“오…… 오라버니, 갓을 어디 두셨습니까? 갓을 쓰셔야지요. 양반은 상투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멍하니 말을 하는 예화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신이 나간 듯한 누이의 모습에 익태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어찌하여 죄인의 차림새가 저리 화려할 수 있다는 말이냐! 당장 죄인의 당의를 벗기고 첩지와 용잠을 빼 버려라!”
“예, 전하!”
달려드는 사내들의 우악스런 손길에 예화의 당의가 벗겨지고 머리에서 용잠이 뽑혀나갔다. 이어지는 사내들의 손길에 예화가 비명을 내질렀다.
“이것이 무슨 짓이냐! 당장 내 몸에서 손을 떼거라! 꺄앗!”
결국, 초라한 소복 차림이 된 예화의 몸이 형틀에 매이고 주릿대가 가랑이 사이로 들어왔다.
“고신을 시작하라!”
“예!”
순식간에 예화의 비명이 날카롭게 울리자, 익태가 다급히 소리 질렀다.
“모다 소인이 저지른 것이옵니다. 중전마마는 모르는 일이었사옵니다!”
도운은 손을 들어 고신을 멈추라 신호한 후, 익태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 소신과 한 내관이 계획한 것이옵니다. 등촉제작자의 노비를 죽이고, 증좌를 없애려 등촉제작자의 목숨을 위협하였사옵니다! 다 소신이 한 일입니다! 중전마마는 죄가 없사옵니다!”
익태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자 익태보다도 더 너덜너덜해 보이는 영의정이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었다. 하룻밤 신기루처럼 사라질 일장춘몽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우연히 들어간 무릉도원에서 몰래 훔쳐 먹은 천도복숭아에 대한 벌을 장하게 받는 느낌이었다. 상실감과 후회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유빈을 데려오게.”
도운의 명에 의금부 관저 내에 대기하고 있던 청조가 나타났다. 추국장에 들어서던 청조는 죄인들의 끔찍한 모습과 역한 냄새에 토기가 올라와 입을 가리고 뒤를 돌아섰다. 금세 곁으로 다가온 도운이 청조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으냐?”
“예, 괜찮습니다.”
도운에게 몸을 기댄 청조가 한 내관의 앞까지 다가왔다. 한 내관은 거친 숨을 내쉬다 이제는 우아한 마마의 모습이 된 청조를 한껏 노려보았다. 완전히 변해 버린 여인의 모습을 비웃는 한 내관의 주름진 입술 끝이 비죽비죽 떨렸다.
“하, 삐쩍 곯은 까마귀 같던 것이 신수가 아주 훤해졌구나. 굶어 죽어가는 것을 살려 주었더니…… 이제 와 나를 모른 척하고 주상의 곁에 붙어? 이래서 머리 검은 것들은 거두는 것이 아니지.”
“은혜? 은인이 아니고 원수다. 네가 죽인 서 의원이 바로 청조의 아버지임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더냐.”
“뭐…… 뭐?”
“멍청한 늙은이. 청조가 누군지도 모르고 산으로 데려왔으니 네 무덤을 네 손으로 판 꼴이 아니냐. 너 혼자 모든 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조정하고 있다 착각하고 살았더냐? 너야말로 하늘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왜 내 아버님을 죽이셨소?”
질책하는 무서운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청조의 눈빛에 한 내관은 잠시 어지러웠다.
누가 누구의 딸? 하, 하하.
* * *
서 의원. 여섯 해 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목 졸라 죽인 의원이 서가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날, 더 이상 초를 만들 수 없다 징징거린다는 이명을 직접 만나러 화성엘 들렀었다. 눈 밑이 퀭하여 질질 짜던 이명의 하소연을 건성으로 듣고 있던 참이었다. 어차피 금덩이 하나를 쥐여 주면 입 다물고 일할 놈이니, 하소연을 좀 들어주는 척하면 되는 일이었다.
한데 이놈, 말하는 것이 하 이상하였다. 누가 무엇을 눈치채? 자신의 마누라를 진맥하던 의원이 납에 대한 일을 의심한다 하였었다.
“그 의원이라는 자가 어찌 그걸 알게 되었다는 건가? 혹, 자네가 무슨 말을 하였나?”
“그것이 아니라, 내 마누라 때문이구먼. 내 마누라의 건강이 매우 좋지가 않아. 오늘내일 딱 뒤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니까. 그이가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내 마누라를 진맥해 왔고, 자네 동리에서 은을 제련하는 이들까지 진맥을 하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된 것이지!”
“그가 어디까지 아는가?”
“여편네가 용초 만들 적에 납을 가져다 어찌어찌 써 버린다고, 하나에서 열까지 몽땅 다 말해 버렸으니 그이가 어디까지 알겠나? 응? 내 금덩이에 환장하여 여편네가 죽게 생겼으니…… 아이고, 흐윽. 그이가 마누라를 진맥한 지가 오래되어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사이지만, 실로 그이는 중인이고 의원이란 말이지! 당장에 관아에 가서 이 일을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나설 거라 했는데…… 이걸 어째. 그가 나서면 누구의 말을 믿겠나! 어흐흑, 다들 그이의 말을 듣고 나를, 나를…… 나는 너무 무서우이. 어찌하나? 이제 어찌해.”
머리를 감싸고 흐느끼는 이명을 짜증 난다는 듯 바라보던 일환은 우선 생각을 정리했다. 이명 저자가 겁이 많은 것도 있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재물 따위로 회유할 수 없는 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쉽지 않겠어.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겠지. 어찌 처리할까 고민하던 그때 밖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날세. 이명, 자네 어디 있는가? 작업장에 있나?”
작업장 입구에 처져 있는 발을 들치고 서 의원이 안으로 들어섰다.
“자네 있으면서 왜 대답을 안 하는가?”
“그…… 그것이…….”
“마음의 준비는 되었는가? 정히 힘들면 내가 함께 가주겠네. 응당 겁이 나는 마음이야 백분 이해를 하지만, 이는 너무나 중차대한 문제일세. 이는 단지 독살을 넘어서 역모고 반역이네. 감히 일국의 세자 저하를…… 그런데, 자네 왜 그러나?”
이명은 벌벌 떨며 잔뜩 겁먹은 눈으로 서 의원과 서 의원 너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 그러냐니까? 허억!”
어느새 뒤로 다가온 한 내관의 합죽선이 서 의원의 목젖 아래 부근에 닿았다. 한 내관은 뒤에서 부채의 양 끝을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단단하고 굴곡진 부채의 겉대가 목젖 아래를 힘껏 누르니 숨이 컥컥 막혀왔다. 컥컥대며 발버둥 치던 서 의원의 몸이 작업대에 이리저리 부딪히고는 곧 눈이 돌아갔다.
‘끄으으으윽!’, 눈이 돌아가는 오랜 친우에게서 숨넘어가는 괴로운 신음이 흐르자 이명은 그 자리에서 귀를 막고 덜덜 떨며 주저앉았다.
“으아아아악!”
결국, 숨을 거둔 친우의 시체를 보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명은 정신없이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얼굴이 휙 돌아가며 눈앞에 별들이 반짝거렸다. 한 내관에게 뺨을 대차게 맞고서야 이명은 겨우 발악을 멈출 수 있었다.
“내 말 잘 들어. 시체에 물을 뿌리고, 저자의 사가까지 직접 업고 가서 익사했다고 전해. 그리고 당장 화성을 떠날 준비를 하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이명이 벌벌 떨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한 내관은 그의 나머지 한쪽 뺨도 대차게 휘갈겼다.
“알았나!”
양쪽 뺨을 감싼 이명은 겨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을 가지러 나섰다. 물통을 들고 돌아와 죽은 친우의 몸에 물을 부었다. 혹시라도 마른 부분이 있을까, 엉엉거리며 울면서도 꼼꼼히 확인하며 물을 뿌렸다. 한 내관의 계획 하에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흐르고 이명은 한 내관을 따라 도성으로 올라왔다. 한 내관은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했다. 그를 자신의 영역 아래 두고 감시하기도 편했고, 일을 지시하기도 수월하니 이래저래 잘된 일이었다.
이명을 도성으로 이주시킨 후, 화성엘 갈 일이 전혀 없었다. 간혹 납을 받으러 사람을 보내긴 하였으나, 자신이 직접 발걸음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세 해 전, 우연히 그곳을 지나갈 일이 생겼다. 병약해진 의경 세자를 위해 온양행궁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눈에 띄게 쇠약해진 의경 세자는 긴 행궁을 견디기 힘겨워할 정도로 기력이 쇠해 있었다.
하여 궁으로 돌아오는 길, 도성과 온양의 중간 지점인 화성에 잠시 들렀다. 화성의 지주였던 김 대감의 사가에서 며칠을 지내며 쉬기로 하였다. 왕세자 저하의 방문이라는 영광에 몸 둘 바를 모르던 김 대감은 매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잔칫상을 준비했다. 그리고 잔치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그곳에 품을 팔러 왔던 여인을 처음 보았다. 슬슬 행실이 바르면서도 사내의 욕정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여인을 산에 올려보내려 계획하고 있던 참에 눈에 뜨인 여인이었다.
멀리서 여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산에 올려보내기 딱 안성맞춤인 여인이구나. 집안의 노비에게 간단히 물으니, 집안 사정이 매우 어려운 처자라고 했다. 홀어머니에 어린 아우들이라. 일이 참 수월할 듯싶어 그날 저녁 바로 여인을 찾아갔다. 가까이서 보니 훨씬 흡족하였고, 일은 너무 수월하게 흘러갔다.
마침, 김 대감의 사가에 함께 품을 팔러 왔던 여인의 어미가 각혈을 하며 쓰러지는 것을 멀리서 발견했다. 일이 이리 수월할 수가 있을까? 여인의 외양도 품성도 매우 흡족했고, 상황은 딱 맞게 맞물려 돌아가니 정녕 하늘은 저의 편이구나 생각했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허리가 젖혀질 정도로 웃음이 터져 나와 집안의 기둥을 붙잡아야 했을 정도였다.
여인의 다짐을 받아낸 후, 의경 세자에게 여인에 관하여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쯤 도운이 또다시 여인을 내쳤다는 말을 들은 의경 세자는 굳이 여인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간 궁에 있을 적에야 확인을 해 보고 싶어도 확인을 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보고 싶다니, 마음껏 보여 주지.
그간 고르고 골랐던 천박한 계집들과는 사뭇 다르니 못 보여 줄 이유가 무엇인가. 참하고 어여쁘기까지 한 저 여인을 보여 주면 자신에 대한 세자의 신임까지 더욱 견고해질 터이니 이거야말로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일이었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의경 세자를 여인의 초가로 안내했다.
의경 세자는 한참 동안 집안을 살폈다. 열심히 반빗간을 드나들며 바지런히 움직이는 여인의 모습을 한 시진째 바라보고 있었다. 파리한 얼굴로 곧 쓰러질 듯하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거늘, 그날따라 유독 고집을 부렸었다.
“마마, 이만 자리를 옮기시지요. 날이 꽤 춥사옵니다. 귀한 옥체에 감모라도 드실까 소인이 너무 두렵나이다.”
“조금만, 일다경만 더 보고 가세.”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멀리서 여인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던 의경 세자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혈이, 그 아이가 많이 좋아하겠어.”
혈이라는 이름이 금지되어 버린 지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으나, 의경 세자는 늘 그 이름으로 자신의 아우를 불렀다.
“그래, 모시는 어미가 많이 아프다고?”
“예, 저하.”
“내 내탕금을 내어 줄 터이니, 깨끗한 초가 하나 마련해 주고 세간도 알맞게 꾸려주게. 곡식과 약재로 곳간을 넉넉히 채워주는 것도 잊지 말고.”
“저하, 그러다 주상 전하께서 아신다면 또 노여워하실 것이옵니다.”
“그야 자네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리고 얼마 전 진상된 산삼 몇 뿌리가 있었지? 그것도 가져다주게.”
“저하, 그 산삼은 저하를 위해 특별히…….”
“아니네, 나야 그것 말고도 귀한 것은 다 먹고 살지 않은가? 저 여인의 어미에게 가져다주게. 저리 참하고 귀한 여식을 내 아우를 위해 내어 주는데, 내 아까울 것이 무엇인가? 곧 산에 오르거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인데, 부디 혈의 곁에서 잘 보필하여 주면 바랄 것이 없겠어. 한데 이상하지. 왜인지 저 여인이 잘할 것만 같네. 꼭 그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 그러니 가져다주게. 내 아우를 잘 보필한 여인에 대해 미리 상을 내리는 것이니.”
“저하. 저하의 아름다운 우애를 불민한 소인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나이다. 죽여주시옵소서.”
한 내관이 머리를 조아리자 의경 세자가 엷게 웃었다.
“흥, 내관들은 모다 그리 교육받는 것이냐?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꼭 죽여 달라는 말부터 하는구나. 그만 돌아가자.”
반빗간에서 막 나온 여인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아쉬운 듯 바라보던 의경 세자가 발걸음을 돌렸다.
“혈이 이야기를 해 보게. 풍채가 그리 엄장한가?”
“예, 어찌나 풍채가 좋으신지, 소인 세자 저하를 뵙기가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것이 왜 망극한가? 자네도 혹 혈이 내 정기를 빨아 먹고 그리 강건하다고 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의경 세자의 시선에 한 내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늘 부드럽고 자애로웠지만, 힘이 있었다. 이간질을 하려 해도 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여인들을 쫓아내는 도운의 행실을 탓하려 하면, 필시 여인들에게 모자람이 있었을 것이다 딱 잘라 말을 하는 이였다. 몸은 쇠약하였으나 그 정신력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내 언젠가 보위에 오르면,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성수청의 국무와 소격서 제조부터 쓸어버릴 것이야. 세 치 혀로 감히 왕실을 농락하고 대군을 산으로 쫓아낸 몹쓸 망종 같으니라고.”
“부디 저하의 뜻대로 하소서.”
말을 올리는 한 내관의 입술 끝이 징그럽게 말려져 있었다. 염라대왕을 만나거든 부탁이라도 한번 해 보시오. 부디 뜻대로 해 달라고, 쿡쿡.
“혈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 보게. 근자에 어떤 서책을 즐겨 읽는다던가?”
한 내관은 도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서책을 좋아하고, 아이 몸통만 한 장작을 단번에 쪼갤 정도로 힘이 장사다. 산에서 홀로 수련하신 검술 실력이 훌륭하고, 활 솜씨도 좋아 종종 사냥으로 산짐승을 잡아 온다더라. 그에 관한 이야기야 매번 같은 말이지만, 그래도 의경 세자는 늘 도운에 관해 묻고 같은 대답을 들으며 즐거워했다.
“도승지의 집에서 혈에게 필요한 것을 잘 보내고 있겠지? 그가 잘 헤아려 보내겠지만, 자네가 한 번 더 신경을 쓰게. 그리고 이번엔 자네가 여인을 데리고 직접 산에 오르게.”
“허나, 저하. 그러다 주상전하께서 아시면…….”
“그리해. 내 이곳에서 며칠을 더 머물다 도성으로 출발할 것이니, 자네가 직접 여인을 산에 데려다주고 얼추 시각을 맞추어 궁으로 돌아오면 되지 않겠나. 내 자금을 넉넉히 쥐여 줄 터이니, 가는 길에 목화도 좀 넉넉히 사 가게. 목화 잔뜩 넣고 누빈 의대도 넉넉히 준비해 가고. 곧 입춘이라지만 산에서의 겨울이라는 것이 유독 길고 춥지 않은가. 소고기도 좀 사 가고, 또…… 그래, 진가루(밀가루)를 많이 구해 가게. 혈이 어릴 적 만두를 좋아했었으니 아주 좋아할 것이야. 혹, 저 여인이 만두를 맛깔나게 빚을 줄 알까? 그러면 참 좋겠는데 말이야. 아니 그런가?”
“예, 저하. 잘할 것이옵니다. 심려를 놓으소서.”
“그렇겠지. 아주 잘할 것이네. 내 그런 예감이 드네.”
하지만 의경 세자가 말한 것 중, 한 내관이 산에 들고 간 것은 진가루뿐이었다. 의경 세자가 하사한 산삼 뿌리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아껴두었다. 이제껏 그가 쏟아부은 동궁전 내탕금들이며 도운의 초가 살림 앞으로 정해진 쥐꼬리만 한 내탕금까지 모다 한 내관의 수중으로 곧바로 떨어졌다. 그중 일부가 초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으니, 제 손으로 저의 목숨을 갉아먹는 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아우를 뒷바라지하는 꼴이라니.
하, 하하하하. 청조를 산에 데려다주고 내려오는 길, 한 내관은 산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 * *
“제 손으로 저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던 것은 바로 너다.”
도운의 한마디에 한 내관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입안에 고여 있던 피에 새빨갛게 변해 버린 이를 한껏 내보이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저의 목숨을 자신이 갉아먹은 것인지, 아니면 죽은 의경 세자가 정녕 옥황상제에게 떼를 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계획하던 내가, 늘 모든 이의 머리 꼭대기에 있던 이 한일환이가! 어찌하여 저 계집이 누구의 딸인지 알아보지 않고 산으로 데려갔단 말인가! 왜! 겨우 저런 계집 하나 때문에 나의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를 이리 망쳐 놓다니!
한 내관은 증오로 타들어 가는 눈빛으로 청조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반성 없는 그의 눈빛에 청조가 근엄하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억울하오? 그대가 지금 억울하여 나를 그리 쳐다보는 것이오!”
“내 그때 너의 아비가 누구인지만 알았어도 이리되지는 않았을 것인데. 참으로 분하고 억울하다. 완벽한 계획이고, 대의를 위한 일이었어! 내 청춘, 내 일생을 걸었느니라. 그것을 겨우 너 따위 계집 때문에, 허!”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았어도 그대의 악랄한 계획은 실패했을 것이오! 하늘이 그렇게 두지 않았을 것이니. 열심히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이요. 당신 정수리에 난 새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하늘에선 훤히 내려다보고 계시니 말이오. 하늘이 뻔히 바라보고 있는데 그까짓 멍청한 계획이 실패한 것이 억울하오? 나는, 나는 내 아버지를 잃었고, 전하께서는 형님을 잃었소! 또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소! 다들 소중한 사람과 행복을 잃었단 말이오. 일신의 부귀와 영달에 급급한 나머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는데, 죽은 자들보다도 그대가 더 억울하다 말할 수 있겠소! 그 오랜 시간 분수에 맞지 않은 부귀를 누리며 살았으니 이제 그런 얼굴은 당장 집어치우거라! 뻔뻔하기가 하 없다!”
청조의 단호한 일침에 한 내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굶어 죽어가던 것이 누구 덕에 저 자리에 앉았는데, 이제 와 저까짓 것이 같잖은 마마 흉내라니!
“일신의 부귀와 영달? 흥! 나는 우리 민족의 재기를 위해 노력한 것뿐. 우리는 저 초원을 자유롭게 달리며 생활하던 유목민이었어. 그런 우리를 억압하고 천대한 것이 누구요? 우리가 처음부터 천인이었소? 그대들이 백정을 천하다 천대하고, 미개하다 차별한 것이지. 말을 몰며 집단생활을 하던 우리 민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농사를 짓도록 강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정신과 조상의 유지를 모다 거부하라 한 것이오. 우리는 민족의 정신을 학살당하고 배척당했어. 그에 비해 겨우 아버지를 잃고, 형님 하나를 잃은 것이 무어가 억울해!”
“그래서, 네가 그리 아끼고 위한다는 너의 민족을 위하여 네가 한 일은 무엇이냐? 네 민족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한 일은 무엇이냐? 네 입은 옆으로 놓였어도 말을 똑바로 세워 하라! 여전히 백정들은 백정으로 살고, 너 혼자만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이 욕심 많은 늙은이가 궤변이 참으로 장황하구나. 네가 정녕 네 민족의 부흥을 생각하였다면 차라리 형님의 치세를 도왔어야 옳지 않으냐.”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못 하던 한 내관은 도운을 향해 비웃듯 입술을 꿈틀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백정으로 태어나,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사내로 태어나 원대한 포부를 갖고, 내 나라를 꿈꾼 것이 어디 잘못입니까?”
“양물도 없는 사내인 주제에 원대한 포부가 무엇인지 네가 알기나 하느냐? 우습기가 짝이 없구나. 왜 과인이 천자인 것이냐. 바로 하늘이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감히 하늘이 주신 과인의 나라를 가지고 양물도 없는 네가 왜 마음대로 꿈을 꾸느냐. 그런 허무맹랑한 꿈을 꾼 대가로 지금 네가 이렇듯 피떡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알겠느냐!”
“마음대로 떠들어도 좋습니다. 이게 끝은 아닐 터이니. 내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는 지지 않을 것이오! 이번이 아니 된다면 다음 생에서라도, 또 그다음 생에서라도. 나는 꼭 돌아와 주상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고 나라를 손에 넣을 것이오!”
한 내관의 마지막 발악에 도운은 껄껄 웃었다.
“내 장담컨대, 다음 생에서 너는 한낱 미물로 태어날 것이다. 불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 무서움도 모르고 덤벼들다 결국 스스로 타 죽고 마는 그 작디작은 미물 말이다. 몇 번을 태어나도 그렇게 어리석은 짧은 생을 살다 갈 것이야. 허니 네가 돌아온다 하여 내 눈썹 한 올이라도 건들 수 있겠느냐? 불에 홀려 춤을 추다 죽기에도 바쁠 것인데.”
도운은 말을 마치고 또다시 껄껄대며 웃더니 청조의 손을 잡고 추국장을 떠났다. 추국장을 떠나기 전 그간 죄를 짓고 살았던 인간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백성이 아닌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한 탐관오리들의 초라한 모습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두 눈에 단단히 새겨 넣었다.
백성들이 저에게 풍랑을 일으키지 않도록, 늘 잔잔한 물길을 유유히 항해하는 배가 될 수 있도록. 백성을 위해 겸허한 마음을 단단히 굳히며 궁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근정전에 모인 대신들은 죄인들의 형벌에 대하여 열띤 논의를 펼쳤다. 사약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부터, 양반도 아닌 이들에게 사약은 너무 과분하다는 의견까지 있었다. 결국, 백성들 앞에서 조리 돌림 후 망나니에게 목이 잘리는 쪽으로 의견이 좁혀지고 있었다. 대신들이 죄인들에 대한 처결을 가납해 주십사 도운에게 읍하기 시작하자 마침내 도운이 입을 열었다.
“과인 역시 그대들의 의견을 존중하오. 죄인들은 처음부터 신분을 속이고, 왕실을 능멸하였소. 특히 오랜 기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일국의 세자를 독살한 점은 살아남기 힘든 죄 중에서도 가장 큰 대역죄요. 허나 그런 이들에게서 단번에 목숨을 빼앗는 형벌이 과연 진정한 형벌인 것인지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오.”
도운의 의문 제기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하고 허리를 굽혔다. 왕의 말에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죽음으로 갚기에는 그 죄가 너무나도 컸다.
“하여 죄인들에게 과인이 생각하는 합당한 형을 내린다. 우선 한일환. 한일환은 이 모든 사건의 숨겨진 주범으로 세 치 혀를 놀려 사람들을 현혹하고 왕실을 능멸하였으니, 다시는 그 혀를 놀릴 수 없도록 단설형(斷舌刑: 혀를 자르는 형벌)을 명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허나 이는 그 과정이 매우 잔인하고 윤리적이지 못하니 옳지 않다. 허니, 한일환에게 평생 무언(無言)으로 살아갈 것을 명하고, 함경도 광산의 노비로 명한다. 만일 죄인이 형벌을 어기고 말을 할 시, 형벌을 어길 때마다 장 삼십 대에 처할 것이며 평생 광산에서 직접 채취한 은을 스스로 제련할 것을 명한다.”
“황공하옵니다, 전하.”
“다음으로 죄인 주익태의 식솔들은 금전으로 사들인 양반족보를 파기하고, 모다 관노로 명하며 대대손손으로 면천 받을 수 없을 것을 명한다. 또한, 죄인 익태는 한 내관을 도와 그간 왕실의 국고를 축내고,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 먹는 데 가장 앞장선 악질 죄인이다. 허니, 이제 그 죄를 받아 주익태를 나라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자로 명한다. 그 역시 함경도 광산으로 보내되, 죄인은 나라의 가장 비천한 자로서 항상 몸을 낮추어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쳐선 아니 될 것이다. 또한 평생을 홀로 떨어져 죽을 때까지 은을 제련하고 납을 주조하는 일을 도맡아 하게끔 하라!”
가장 큰 죄인 둘에 대한 형벌을 내린 후, 도운은 숭숭 비어 있는 대신들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일곱의 대신이 빠진 자리는 구멍이라도 뚫린 듯, 휑해 보였다.
“그들에게 동조하여, 조정의 대신으로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고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한 대신들은 모두 장 일백 대에 처한다. 국법의 지엄함을 지켜 한 번에 장 삼십 대를 넘기지 아니할 것이며, 장을 다 맞은 대신들은 각각 제주와 강화로 유배를 보낸다. 유배지에 가시덤불로 담장을 높게 세워 평생 그곳을 나오지 못하도록 위리안치할 것이며, 그 식솔들은 모다 관노로 명한다. 관에서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들을 도맡게 하여 그간 얼마나 많은 이의 피와 땀을 착취하며 살았는지 깊게 반성하게 하라.”
“황공하옵니다, 전하.”
“그간 죄인들이 축적해 온 재산은 모다 국고로 환수할 것이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경작지는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직접 소작을 내릴 것이다. 소작료는 이 할로 고정될 것이며, 다섯 식솔을 기준으로 한 가구당 논과 밭을 각각 다섯 마지기 이상 소작할 수 없다. 다만 식솔의 수가 다섯 이상을 넘어가면, 늘어난 식솔의 수만큼 한 마지기씩을 더 빌려줄 것이다. 이는 공민전(나라에서 받은 양반들의 땅)으로 받은 양반들의 경작지에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공민전 역시 원래의 소유는 왕실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역시 공민전에서 나온 소작료는 이 할 이상 받을 수 없다. 만일 이를 어길 시, 모든 공민전으로 받은 경작지는 국고로 환수할 것이다. 알겠는가!”
“예, 전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이제 시작이었다. 앞으로 백성들을 위해 더욱 많은 일을 할 것이다. 다시는 어린 백성이 굶지 않도록, 동냥을 하지 않도록, 그들이 빼앗긴 것들을 돌려줄 것이다. 도운은 그간 익태와 한 내관의 수족으로 움직였던 그들의 수하 역시 장 일백 대에 처했다. 그중, 도지는 그 죄질이 더욱 나쁘기에 장 일백 대와 함께 노비 신세로 전락했다.
역당들에 대한 처결을 끝내고 근정전을 나서는 순간 내의원의 의관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쩔쩔매며 등촉제작자인 이명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청조는 잠시 그의 죽음을 동정하였다. 허나 그것은 분에 넘치는 것을 욕심내다 결국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어리석은 생과 죽음에 대한 동정이었다. 청조는 결코 아버지의 옛 친우인 아저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슬퍼하지 않았다.
이른 저녁, 도운은 청조와 함께 대비전을 방문했다. 며칠 전부터 먹지도 않고 앓아누운 대비의 병문안을 위해서였다.
한 내관의 모든 악행을 알아 버린 대비는 그 충격에 끙끙 앓기 시작했다. 저의 아들이 바로 자신의 곁에서 음독 되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애꿎은 다른 아들만 탓했으니, 그 억울함과 자신의 우둔함에 감히 아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 척박한 산에 보내어 놓고 그래도 살리려 노력했다 변명을 해 대었다.
그 힘든 삶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나의 장자를 죽였노라 책임을 묻고 질타했었다. 바짝 말라 허옇게 갈라진 입술 사이로 꺼져가는 흐느낌만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결국, 곁에서 위로하는 도운과 청조의 노력에도 대비는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 후로 며칠째 청조는 대비전을 드나들며 손수 약을 떠먹여 주고 팔다리를 주물러 주는 등, 대비를 성심껏 돌봤다. 오늘도 울다 잠이 든 대비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온 청조는 마침 대비전에 들른 도운과 마주쳤다. 대비가 잠들었다는 말에 도운은 청조와 함께 후원을 거닐었다. 이제 바람이 많이 차가워진 것이, 조만간 입김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중전을 폐서인시키지 않아 섭섭하냐?”
도운의 물음에 청조는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조금도 섭섭지 않습니다. 중전마마께 그보다 더한 벌은 없을 것입니다.”
도운은 예화를 폐서인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죄와 예화의 신분을 보면 폐서인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를 기록에서 지워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예화에게 가장 합당한 벌을 내렸다.
‘중전 주가 예화는 중전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한다. 허나 신분만 유지할 뿐, 모든 중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한다. 중전은 교태전을 떠나 함경남도의 광산으로 가 그곳 노비들의 수발을 들어라. 나라의 국모로 사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으니 이제 참된 백성의 지어미가 무엇인지 그곳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진정 백성을 위한 어미의 삶이 무엇인지 그들의 수발을 들며 배우거라. 노비들은 중전을 중전으로서 예우는 하되, 결코 중전이 나태해지거나 꾀부리지 않도록 서로 경계하며 중전을 감시하고 중전을 부리는 데 있어 결코 인정을 베풀지 말라!’
“내 그곳에 가거들랑 남의 누룽지를 탐내지 말거라, 중전과 언년이 고것에게 충고도 하였다.”
누룽지 이야기에 청조는 도운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산에서 누룽지 한 덩이가 없어 배를 곯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어느덧 이리 흘렀나. 차가워진 바람에 청조가 어깨를 떨자 도운이 팔을 둘러 감싸 주었다.
“날이 꽤나 쌀쌀한 것이 내 오랜만에 네가 만들어 주는 따뜻한 만둣국을 먹고 싶구나. 네가 만들어 준 만두를 먹을 적, 궁에서 지내던 어린 시절이 잠시 생각났었지. 그래, 그 시절 내가 만두를 좋아했었어. 형님께서 이 못난 아우를 그리 위해 주는 줄도 모르고 내 오랫동안 형님을 곡해하고 원망하였으니, 그것이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내 어린 시절 만두를 좋아했던 것을 나도 잊고 있었거늘, 그걸 기억하고 계실 줄…… 참으로 몰랐다.”
도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곧 눈물이 흐를 듯, 이지러진 도운의 눈동자가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청조는 도운의 손을 꽉 쥐고 손으로 슬슬 보듬어 주었다.
“조금만 기다리셔요. 소첩이 얼른 소주방 들어 뚝딱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허나 서방님께서 살이 오른 토끼를 아니 잡아다 주셨으니, 금일 저가 튼실한 돼지고기 넣고 속을 하여 빚어 드릴 것입니다. 그것 먹고 기운 차리셔요.”
“그래, 내 너의 처소에서 기다릴 것이니 뚝딱 만들어 주거라.”
“예, 소첩이 맛있게 만들어 드릴 터이니, 그것 잡숫고 기운 내셔야 합니다.”
결국 도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조용히 뚝 떨어지는 굵은 눈물을 닦아 준 청조가 도운의 손을 꼭 잡았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애류당으로 향했다. 정다운 두 분 마마의 뒤로 상선이 따라갔다. 새로 제수된 상선은 서로를 위해 주는 두 분 마마의 모습에 감읍한 듯 그들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달포 뒤, 저자는 북적거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희대의 악인들이 죄인이 되어 떠나는 모습을 보러 많은 이들이 구경하러 나왔다. 맨 앞쪽에는 한때 조정의 대신들이었던 이들이 수레 안에 갇혀 있었다. 장 일백 대를 다 맞은 대신들은 그야말로 피떡이 되어 죽은 듯 늘어져 있었다. 참혹하고도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성난 백성들 중 아무도 그들을 동정하는 이는 없었다.
그 뒤로 대신들의 식솔들이 거친 무명옷을 걸치고 짚신을 질질 끌며 허탈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허나 그들에게 관심 없는 백성들은 고개를 쭉 빼고 진짜 대역 죄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드디어 한 내관과 익태, 그리고 전 영의정의 모습이 보였다. 핏물이 말라 검게 변해 버린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그들은 힘겹게 걸음을 떼고 있었다.
익태는 자신들을 향해 침을 뱉으며 욕하는 백성들을 힐끗 쳐다봤다. 멍청한 것들. 지들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에, 이제 와 저리 나서서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익태는 더욱 고개를 쳐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앞으로 걸어가는 도중,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붉은 나비가 그려진 화려한 전모를 살짝 쳐든 매화가 익태를 향해 측은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아무리 대역 죄인이라지만 그래도 한때 살을 섞고 서방님으로 모신 사내였다. 마음에 품은 연정은 없어도, 속살 품은 살정에 대한 의리가 있었다. 이 남자 저 남자 아무나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 같은 인생이 기생이라지만, 꺾이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남자로 예와 마음을 다하는 것도 기생이었다. 살을 섞는 순간이나마 자신의 남자였던 익태에 대한 의리로 매화는 마지막 예를 드리러 나왔다. 바로 앞을 지나가는 익태와 눈이 마주친 매화는 눈꺼풀을 살짝 내렸다 올리며 우아하게 무릎을 굽혔다 폈다.
크, 큭큭. 결국 저에게 마지막 의리를 지킨 것은 천하다 무시하고 능멸하던 기생년 하나뿐이었다. 인생무상이라, 실로 초라하고 허탈한 인생이 되어 버리는 순간이었다. 허나…… 마지막 떠나는 길, 아름다운 여인의 배웅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익태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저 멀리 매화가 요염하게 고개를 빼 들고 아직도 자신을 배웅하고 있었다.
잘 있어라, 매화야. 생각해 보니 도성에 올라와 살면서 내 너를 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편안하였구나.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익태는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외전 _부부(夫婦)
* * *
어둠이 내려앉은 강녕전 주위로 이는 찬바람이 마치 부엉이 울음소리인 듯 구슬픈 소리를 만들어 냈다. 처소 안에서 도운과 독대를 하던 재환의 얼굴 역시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꼭 떠나야겠는가? 백성들을 위하는 나의 치세에 자네가 필요하다고 해도 떠나겠는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신, 큰일을 겪으신 전하께 힘이 되어 드리는 것이 마땅한 신하의 도리인 줄 아옵니다. 허나 소신, 지친 마음을 달래며 나라를 돌아보고 그저 유랑을 하고 싶사옵니다. 부디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도운은 결연한 얼굴로 허리를 굽히는 재환을 바라보았다. 그가 굳이 왜 떠나려 하는지 알고 있기에 아니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재환 같은 인재를 그냥 떠나보낼 수도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사로서 나라를 돌아보는 것은 어떠한가? 유빈이 돌면서 보았던 곳들을 자네가 돌아보게. 백성들의 삶이 유독 힘들다고 유빈이 말했던 지역들을 돌면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약 백성을 괴롭히는 지방 관리들이 있다면 처벌하여 억울한 백성들을 도와주게. 그저 정처 없이 떠도는 것보다, 그편이 마음을 정리하기도 편하지 않겠는가.”
마음의 정리, 재환의 얼굴에 보이지 않는 슬픔이 스치듯 빠르게 지나갔다. 어떤 대답도 내 놓지 못하고 앉아 있는 재환의 무거운 모습에 도운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어사란 즉일출발이 원칙이나 내 자네에게 시간을 더 주겠네. 허니 애류당에 들러 청조에게 인사는 하고 떠나게.”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고뇌에 차서 임금의 처소를 나오는 재환에게 어느새 남현이 다가왔다.
“꼭 그래야만 하겠는가? 역당들이 처결된 지 아직 달포도 지나지 않았네. 이럴 때일수록 자네가 전하의 곁에서 힘이 되어 드리면 얼마나 좋겠느냔 말이지. 만약 그리한다면 영의정 대감께서도 자네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시겠나.”
남현의 충고에 재환의 얼굴이 아픈 듯 일그러졌다. 곧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유약한 소년 같은 모습에 남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예, 늘 자랑스러운 아들이고 싶었지요. 단지 저 하나의 입신양명이 아닌 가문의 자랑이 되고, 나라의 큰 동량이 되고 싶었습니다. 소인 그렇게 되리라 늘 자신에 차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었는지, 너무 부끄럽습니다. 노력을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더이다. 저의 뜻대로 아니 되는 소인의 마음이…… 소인의 마음 같지가 않습니다.”
“이보게…….”
“아무리 해도 불충한 마음을 덜어낼 수가 없으니, 이런 소인이 어찌 충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떠나렵니다. 가는 길마다 마음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또 조금씩…… 그리 흘리며 걷다 보면 언젠가 다 비워지지 않겠습니까?”
“휴, 자네가 정히 그래야 한다면 이것만은 약조해 주게. 그 부스러기들을 다 흘려보내는 날이 오거든 꼭 다시 돌아오게. 이것만은 약조하게.”
재환은 선뜻 약조할 자신이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인왕산 바위가 빗방울에 깎여 없어지는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마음의 부스러기를 아무리 털어낸들 언제쯤 이 단단한 마음이 다 닳아 없어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재환은 약조를 남겼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약조를 남겼다.
꼭 돌아오겠노라 약조를 남기고 궁을 나섰다. 저자에 부는 찬바람이 어찌나 시린지, 몸이 꽁꽁 얼어붙는 듯했다. 마음에 쉼 없이 불어 들어오는 찬바람에 마음이 얼어 버릴 듯 아파왔다. 재환은 찬바람에 얼어버린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너무 아팠다. 그래서일까. 눈물이…… 도저히 멈춰지지 않았다.
이튿날, 재환은 애류당에 들렀다. 갑작스런 그의 방문에도 청조는 화사한 얼굴로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리.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예, 마마. 마마께서는 강녕하셨사옵니까?”
“예, 그럼요.”
막녀가 들인 다과상을 앞에 두고 청조는 이것도 먹어 봐라, 저것도 먹어 보라며 재환에게 권하였다.
“얼굴이 수척하신 것이, 근심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근심이라니요, 그런 것 없사옵니다. 그간 큰일들을 해결하느라 수고를 좀 하였더니 기력이 쇠한 듯하옵니다.”
“나리께서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그 이야기는 모다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셨는데 제가 감사인사 하나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너무 송구하고, 너무 감사드립니다. 제 목숨을 살려 주셨는데, 제가 갚지 못할 큰 은혜를 또 입었습니다.”
재환은 미안하여 어쩔 줄 모르는 여인의 뽀얀 뺨과 재잘거리는 붉은 입술, 커다란 눈망울을 응시했다. 저 눈망울 속에 담긴 것이 자신이라면…….
“소신, 전부터 마마께 꼭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었사옵니다.”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말씀을 해 보세요.”
“마마를 처음 뵈었던 그때에, 마마께서 혹 전하보다 소신을 먼저 만났던 것이라면 소신에게 마음 한 자락 내어 주셨겠습니까?”
“그것이 어인 말씀이십니까?”
“만약, 마마께서 전하보다 저를 먼저 만났었다면, 소신과 인연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마마께서 전하를 찾아 헤맨 것인지, 그저 서방을 찾아 헤맨 것인지 궁금하여 그러하옵니다.”
재환의 물음에 청조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나리를 먼저 만났다 하더라도, 저는 결국 전하와 인연이 되었을 것입니다. 전하이시기에 저의 서방님이 되신 것이지, 서방으로 만났다 하여 저의 지아비가 전하이신 것은 아닙니다.”
“어찌 확신하시옵니까?”
“인연은 모름지기 하늘에서 정해 주는 것이지요. 평생을 은애하고 은애할 저의 인연은 전하 단 한 분뿐이십니다. 하늘이 정해 주셨고, 저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나리께서 만약이라 말하신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청조의 대답에 재환은 슬픈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소신도 하늘에서 정한 인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옵니까?”
“예, 그렇고말고요. 나리같이 늠름하고 다정한 분의 연모를 받을 여인은 참으로 복이 많은 여인입니다. 분명 아리땁고 고운 여인일 것입니다.”
진심으로 해맑게 웃으며 답을 주는 청조에게 자신의 인연은 이제 없다 말하고 싶었지만, 재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멍한 듯 차를 한입 들이킨 재환은 무언가에 홀린 듯 찻잔을 내려놓고 청조를 바라보았다.
“소신, 마마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소신, 마마를…….”
“마마, 유빈마마. 곽 상궁이옵니다!”
갑자기 급한 듯 청조를 부르는 곽 상궁의 목소리에 재환의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혀끝에서 맴돌았다. 곧 장지문이 열리고 곽 상궁이 들뜬 얼굴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인가?”
“마마, 어서 나가 보셔야 할 듯하옵니다. 마마의 어머니께서 궁에 도착하셨다 하옵니다. 그뿐 아니라 두 아우들도 함께 도착하였다 하옵니다.”
“뭐? 어머니…… 어머니께서? 아직 도착할 시기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이 어머니께서 마마를 뵙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오셨다 하옵니다. 어서 나가 보소서. 주상전하께서도 소식을 들으시고 곧 애류당으로 납신다는 전갈이옵니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청조가 가슴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벌써부터 눈물이 가득 차올라 찰랑거렸다. 복받치는 감정에 비틀대는 청조를 곽 상궁이 부액하여 나오자, 막 애류당으로 들어서는 어머니의 모습이 먼발치에 보였다.
“어머니, 어머니!”
말로는 이미 전해 들었지만, 정녕 높으신 후궁 마마가 되어 버린 딸의 모습에 어머니는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청조는 바삐 대청에서 내려와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청조…… 청조야. 네가 정녕 청조가 맞는 것이냐?”
“예, 어머니. 저입니다, 청조입니다.”
자신을 끌어안은 딸의 몸을 억지로 떼어낸 여인은 청조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손으로 살살 만져 보았다. 정녕 자신의 딸이 틀림없었다. 지난 몇 해간 연락 한 번 없어 근심을 쌓게 했던 자신의 딸이 고귀한 후궁마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마마,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곧 다과를 마련해 올리겠사옵니다.”
“어머니, 안으로 드셔요. 안으로 드셔서 이 못난 여식의 절부터 받으셔요. 이 못난 여식이 어머니께 꼭 절을 올릴 것입니다. 너희들도 어서 안으로 들자.”
곽 상궁의 말에 청조는 눈물을 갈무리하고 어머니와 아우들을 데리고 급히 처소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던 재환은 조용히 애류당을 나섰다.
되었다. 저리 행복한 여인의 모습을 보았으니 다 되었다.
못다 한 고백은 목구멍으로 깊게 삼켜 버렸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재환은 어느새 남루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마패를 허리춤에 잘 갈무리하였다. 어사라는 것이 원래 수발들어줄 대리를 대동하고 다니는 것이었지만, 재환은 홀로 길을 떠났다. 숭례문을 빠져나와 도성 밖으로 첫걸음을 떼는 순간 하늘에서 차가운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눈꽃 송이가 춤을 추듯 허공 속을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재환은 차가운 꽃송이가 눈에 닿아 스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눈꽃 송이가 길을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 가는 길마다 흘릴 마음의 부스러기가 다 덮일 수 있도록. 덮였던 부스러기가 눈과 함께 이대로 녹아 버릴 수 있기를.
* * *
새해가 밝고 여기저기 쌓였던 눈이 어느새 다 녹아 버렸다. 올겨울은 유독 추웠으니, 올해는 대풍이 들려나 보다 하며 도운은 청조를 보며 웃었다. 둘은 편한 무명옷을 걸치고 함께 후원에 들어 양지바른 곳을 찾아다녔다. 어느새 봄 냄새를 맡고 올라온 연한 냉이와 쑥, 달래를 함께 캐며 다녔다. 도운이 그것들 넣고 끓인 된장 조치를 좋아하니, 이른 봄부터 그것을 끓여 달라 청조를 졸라댔었다.
봄이 되어 애초롬한 향을 풍기며 올라오는 봄나물이 후각과 식욕을 자극하는 따사로운 날이었다. 저고리의 소맷부리를 걷어 올리고 열심히 나물을 캐는 청조의 곁에 쭈그려 앉은 도운은 갑자기 손으로 열심히 땅을 팠다. 한참 땅 여기저기를 파헤치다, 연하게 올라온 풀들 사이를 헤집으며 무언가를 쫓는 듯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녔다.
한참 부산스럽던 그의 행동이 딱 멈추더니 싱긋 미소를 크게 지었다.
“청조야, 청조야. 이것 좀 보아라. 내가 캔 이것이 무엇이냐?”
“어디 좀 보시어요.”
청조가 무엇인가 하고 고개를 들자, 도운은 청조의 얼굴 가까이로 포개 쥔 두 손을 들이밀었다.
“어맛!”
도운이 손을 벌리자마자 엄지손톱만 한 작은 청개구리가 청조의 얼굴로 튀어 올랐다. 깜짝 놀란 마음에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청조를 보고 도운은 입을 가리고 키득대며 웃었다.
“너는 어찌하여 매번 속느냐?”
“짓궂으셔요!”
“네가 매번 이리 깜짝 놀라니, 내가 그것이 귀여워 그러는 것이 아니냐?”
“흥, 소첩이 된장 조치 아니 끓여 드리렵니다. 누룽지만 박박 긁어 상에 올릴 것입니다.”
청조가 괜히 눈을 곱게 흘기며 콧소리를 냈다.
“으응? 정말이냐? 내가 달래랑 냉이 넣고 끓인 된장 조치를 겨우내 기다린 것을 알면서도 네가 아니 끓여 준다는 말이냐? 정말 그럴 것이냐? 응? 부인, 부인.”
부러 점잖게 ‘부인’하며 다가오는 도운의 모습에 청조는 맑은소리로 까르르 웃었다. 예쁘게 웃는 청조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춘 도운은 눈꼬리를 크게 휘어댔다.
“이 못난 서방이 다 잘못했소. 그러니 금일 점심엔 된장 조치 끓여주고, 주전부리로는 요 쑥 넣고 쑥버무리 하여 식혜랑 내주시오. 내 그것이 맛나면 부인께 선물을 드릴 것이외다.”
“예? 무슨 선물 말씀이옵니까?”
“그런 것이 있다.”
싱글벙글 웃던 도운은 청조의 곁에 찰싹 붙어 나물 캐는 것을 돕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먹지 못할 풀을 한 움큼씩 뜯어다 바구니 안에 훌훌 던져 넣으면서도, 청조의 일을 돕는다며 의기양양했다. 나물을 다 캐어 낸 후, 도운은 청조의 뒤를 쫓아 함께 우물가로 향했다. 도망가는 청개구리를 잡는다며 땅을 파헤쳤으니, 손이며 흰 적삼의 소맷부리가 온통 흙이었다. 도운은 우물가에서 손을 씻고 앉아 곁에서 나물을 다듬는 청조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저 좋고 행복했다.
도운은 열흘에 한 번씩 청조와 연경당에서 하루를 보냈다.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단청이 없는 연경당은 일반 여염집 같은 고즈넉하고 소박한 모습의 독립된 기와였다. 궁인들도 없이 단둘이서 보내는 하루는 연경당의 모습만큼이나 소박하고 정겨운 일과였다.
역당들을 처결한 후, 비어 버린 관직을 재정비하고 국본을 바로 세우고자 도운은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눈이 날리기 전에 청조와 함께 산에 한번 다녀오고 싶었지만, 좀처럼 여건이 되지 않았다. 궁 생활이라는 것이 저도 이리 답답한 일인데, 청조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지켜야 할 많은 예법들과 항시 자신을 향해 있는 남의 시선이 버거울 것이었다.
하여 생각한 것이 연경당에 들어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겨우내, 며칠 짬을 내어 이곳 연경당에서 함께 화로에 밤도 구워 먹고, 떡도 구워 먹었다. 도운은 옥류관에 있던 청조의 보퉁이를 찾아와 예전 청조가 만들어 줬던 털배자를 꺼내 입었다. 그 배자 입고 산에서 생활했을 적 마냥 연경당 마당도 쓸고, 장작도 직접 팼다. 청조와 함께 대청에 나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내린 눈을 감상하며 고드름도 아득아득 깨물어 먹었다.
그 후로, 열흘에 하룻밤은 꼭 이곳에 들어 궁의 예법 따윈 벗어던지고 그저 여염집의 평범한 부부가 되어 생활했다. 도운은 청조를 위해 아궁이에 불을 직접 피웠고 물도 길었다. 청조는 도운이 불을 지펴준 반빗간에 들어 음식을 장만했다. 청조가 음식을 만드는 동안 도운은 스스럼없이 반빗간에 들어 간도 봐주고 상도 들어주었다.
나라님이 반빗간에 들어 무엇을 하는지 안다면, 아마 대신들이 올린 상소가 서안 위에 산처럼 쌓일 거라 농을 하며 함께 웃곤 했다.
원하던 된장 조치에 고봉밥을 뚝딱 해치운 도운은 점심상을 물리자마자 춘곤증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봄이 되자 종종 몸이 나른하고 졸렸다. 청조를 끌어안고 짧은 오수를 즐기던 도운은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혹여 청조가 잠에서 깰까 조심스럽게 대청으로 나온 도운은 마당에 읍하고 서 있는 관원 몇 명을 발견했다.
“왔느냐?”
“예, 전하. 소신들이 다소 서두른 것이 아닌지 모르겠사옵니다.”
“아니다. 시간에 맞추어 잘 왔느니라.”
막 잠에서 깬 왕의 망극한 모습에 도화서 화원들이 송구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용포는 고사하고, 도포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왕은 그저 저잣거리에서 볼 수 있는 일반 백성 같은 모습이었다.
“잠시 기다리며 준비를 하고 있거라. 내 곧 다시 나올 것이다.”
“예, 전하, 명 받잡겠사옵니다.”
안으로 든 도운은 조심스런 손길로 청조를 깨웠다. 슬며시 열린 청조의 눈썹에 아직도 떨어지지 않은 잠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청조야, 일어나 보거라.”
도운은 눈만 끔벅거리며 여전히 잠에 취해 있는 청조의 눈썹에 바람을 후 불어 잠을 날려주었다.
“서방님, 무슨 일이옵니까?”
“밖에 화원들이 기다린다. 어서 일어나 준비를 하거라.”
“예? 화원들이요?”
어리둥절한 청조는 화원들이 기다린다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바삐 준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섰다. 이미 그림 그릴 준비를 끝마친 도화서 화원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유빈마마를 향해 조용히 읍하고 섰다. 작년부터 왕을 사로잡은 여인이라, 궁 안팎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빈마마의 존재를 이렇게 가까이서 뵙는 것은 처음인지라 무척이나 긴장되었다.
“이리 와 여기 앉아 보시오.”
“예, 전하.”
화원들의 앞이라고 존대를 해 주는 도운의 말투에 청조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도운은 자리에 앉은 청조의 치마를 어여쁘게 펴주고, 연꽃처럼 풍성하게 부푼 치마 위에 늘어진 삼작노리개도 더욱 어여뻐 보여라 매만져 주었다. 여인의 수발을 들어주는 왕의 모습이 어찌나 망극한지, 화원들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 어느 사내가 여인의 치마며 장신구를 매만져 준단 말인가. 또한, 어느 사내가 여인과 함께 자신의 초상을 그린단 말인가. 심지어 그냥 초상화도 아닌 왕의 어진이었다. 허나 이를 어진이라 말해야 할까? 용포에 익선관을 쓴 것도 아닌, 도포에 갓을 쓰고 계시니 이를 어진이라 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초상화라 해야 하는 것인지 자신들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두 분 마마가 함께하시니 엄밀히 말해 이는 초상화도 될 수가 없었다. 긴 세월 화원으로 살아온 인생, 생애 처음 그려보는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고뇌에 빠진 화원들이 토끼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청조는 자신의 옷매무새를 매만져 주는 도운의 얼굴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다 그의 갓끈을 풀러 다시 묶어 주었다.
“내가 묶은 갓끈이 부인의 마음에 안 차는가 보오?”
“안 차는 것이 아니라 소첩이 묶어 주고 싶어 그러하지요.”
“그럼 옷고름이 섭섭해하지 않겠는가? 세조대는 또 어찌하고.”
“걱정을 마시어요. 옷고름이 섭섭하다 하면 소첩이 다시 매만져 주면 되고, 세조대가 서운타 하면 소첩이 다시 매듭지어 주면 되지요.”
도운의 익살맞은 질문에 달콤하게 속삭인 청조는 도운의 허리에 둘러 있던 세조대와 옷고름을 차례로 풀고는 다시 어여쁘게 매듭지어 주었다. 준비가 다 끝나자 도운은 청조의 옆자리에 앉아 작은 손을 꼭 잡고 보듬었다. 청이 만든 고약이 실로 효과가 뛰어난지라, 겨우내 요 작은 손이 보드랍게 변해 있었다.
“앞으로는 해가 바뀔 때마다 너와 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림으로 기록해 둘 것이다. 너랑 나랑 백발이 되거들랑, 이것들 보고 젊은 시절을 추억하면서 놀자꾸나.”
“예, 서방님.”
먼 훗날, 저와 어찌하고 놀까 벌써 생각하시다니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코끝이 찡하였다. 은애하는 이의 곁에서 부부로서 함께 늙어갈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청조는 화원들을 향해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외전 _귀가(歸家)
* * *
초록은 짙어지고, 햇볕은 부쩍 따가워졌다. 산을 오르던 청조는 손에서 흘러내리는 깔깔한 모시 치마 끝을 다시 한번 잘 말아 쥐고, 구름처럼 부푼 치마를 갈무리했다.
“힘들지?”
“아니요, 아니 듭니다.”
“업혀라. 내가 업고 갈란다.”
“산세가 이리 험한데, 어찌 업고 가신다 하십니까? 힘드셔요.”
“아니다. 업고 가다 힘이 들면 잠시 쉬어가면 된다. 지게꾼도 짐을 지고 오르던 길을 내가 너 하나를 못 업고 갈까 그러하냐?”
“그것이 아니라, 전에도 잘 오르던 길입니다. 어찌…….”
“그건 전이 아니냐.”
망설이는 청조에게 도운이 어서 업히라 등을 내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전히 청조가 머뭇거리자 도운은 짐짓 엄하게 타일렀다.
“막녀 뭐하느냐? 얼른 마마 업히시게 도와드리지 않고.”
“예, 전하! 마마, 얼른 업히셔요. 이러다 전하의 다리가 저리시겠습니다.”
곁에서 막녀가 청조의 장옷을 건네받고는 얼른 청조를 부액했다. 청조가 몸을 숙여 도운의 몸에 기대자 도운은 청조를 업고 가볍게 일어섰다.
“무거우시지요?”
“하나도 아니 무겁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어찌 이리 가벼운 것이냐? 좀 더 잘 먹어야겠다.”
“여기서 어찌 더 잘 먹으란 말씀이십니까? 무거우시면 말씀하시어요. 소첩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요 여우 같은 마누라가, 또 앙큼한 여우 짓을 하는구나. 네 걸어가겠다고 입으로만 말을 하면서, 이리 업힌 것이 좋아 내 목을 꽉 그러안고 있지 않느냐.”
도운의 농에 청조가 조그만 웃음소리를 내며 그의 목에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예, 좋습니다. 소첩이 서방님의 등에 업힌 것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청조의 대답에 도운 역시 맑게 웃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드디어 저 먼 곳에 목적지가 보였다. 가슴이 심하게 동당거렸다. 산을 내려올 적 닫았던 그 모습 그대로, 싸리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도운은 청조를 내려 준 후, 함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싸리문을 열려는 청조의 손이 저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렸다.
옛 기억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꽉 닫아 건 싸리문에 이마를 맞대고 맹세를 남기던 그때의 기억, 막막하고 두려웠지만 굳게 다잡았던 그때의 감정들이 모다 되살아나 청조는 한참 동안 문을 열지 못하고 서 있었다. 청조의 바들거리는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친 도운은 함께 싸리문을 밀어 활짝 열었다.
마당으로 들어서 보니 집안이 엉망이었다. 온통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초가는 그야말로 흉가 같은 몰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뺀다면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자신을 달래주던 따뜻한 아궁이의 위치도, 늘 반짝반짝 닦아 놓았던 가마솥의 뚜껑도, 또 함께 앉아 고드름을 먹던 마루와 처마도 그대로였다.
“서방님, 조금만 기다리셔요. 소첩이 금세 집안 소제를 끝마치고 점심 차려 드릴 것입니다.”
“집안 소제는 내 알아서 할 것이니, 부인은 점심이나 차려 주구려. 사실 내가 배가 많이 고프다.”
“시장하셨습니까? 예까지 소첩을 업고 오느라 기력이 쇠하여 그런 게지요. 소첩이 얼른 점심상 봐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셔요.”
따로 일할 사람을 데려오지 않았으니, 남현은 청을 도와 함께 집안 소제를 시작했다. 집안 소제는 사내들에게 맡기고 청조는 막녀와 반빗간을 대충 정리한 후 음식을 만들었다. 가볍게 산에 오르다 보니 식재료가 마땅치 않았으나 시장이 반찬이라 모다 맛있게 밥그릇을 비웠다.
“한데, 전하. 정녕 이곳에서 두 분만 지내셨사옵니까?”
근자에 살이 통통하게 오른 청이 뺨에 밥풀을 달고 도운에게 믿을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래. 왜, 이상하냐?”
“그것이 아니오라…… 소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무엇 말이냐?”
“너무 무서울 것 같사옵니다. 밤이 되면 산짐승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사옵니까?”
청의 질문에 도운은 처음 산에 올랐을 때를 떠올렸다. 어린 나이에 이 산에 올라 어찌나 무서웠는지. 산속에서의 밤은 두려움 그 이상의 것이었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 멀리서 끊임없이 울리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유모의 곁에 딱 붙어 달달 떨었었다.
“그래, 내 이 산에서 귀신을 만난 적도 허다하지. 밤만 되면, 이상하게 마당으로 자욱한 연기가 가득 끼어든단 말이지. 그리고 저 멀리서 조그만 여인의 울음소리가 점점 귓가로…….”
“히끅, 그만하시옵소서! 제발 그만하시옵소서! 히끅, 너무 무섭사옵니다. 전하, 소인이 너무 무섭사옵니다.”
청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바들바들 떨었다. 딸꾹질을 해가며 달달 떠는 어린 내시의 모습에 남현도 괜히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참았다.
“그리 무서우면 밤이 오기 전에 어서 산을 내려가거라.”
도운의 말에 청은 고개를 발딱 들었다. 여전히 뺨에 밥풀을 매단 채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되옵니다. 소신이 내려가면 전하의 수발은 누가 든다 하시옵니까?”
“유빈이 있으니 괜찮다. 배를 든든히 채웠으니, 이제 남현과 막녀를 따라 산을 내려가거라. 내 유빈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다 닷새 후에 내려갈 것이니.”
“허나, 전하. 혹 전하를 해하려는…….”
“그런 자는 없네. 혹 그런 자가 있다 하더라도,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으니 이만 내려가게. 유빈과 둘이 함께 오자 약조를 했던 일이네. 그러니 이번만은 내 뜻에 따라 주게. 청이 너는 내려가는 길에 배가 고프면 네 뺨에 묻은 밥풀을 떼어 먹으면 되겠구나.”
청이 얼른 뺨을 더듬어 밥풀을 떼어냈다. 전하의 곁을 지키는 긍지 높은 소환으로서 이런 추태를 부리다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는 길에 사가에 들려 푹 쉬어라. 그리고 주막에서 닷새 뒤에 함께 만나 궁으로 돌아가자. 알겠느냐? 그대도 이참에 정무를 내려놓고 푹 쉬게.”
결국 마지못해 초가를 떠나면서도, 청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간 꾸준히 탕약을 달여먹고 좋은 것을 먹어서인지 청은 살도 통통히 오르고, 조금이지만 키도 자랐다. 거기다 맹한 줄만 알았더니 어린것이 어찌나 장사수완이 좋은지, 자신이 개발한 고약을 궁녀들에게 팔아 짭짤한 이문까지 챙기고 있었다.
또한, 이제는 청의 사가에서도 고약을 만들어 재환의 소개로 만난 행수의 객주에 납품을 한다 하였다. 너구리 같은 객주는 도운과 재환을 도와준 대가로 나라에서 독점 인삼판매권을 받아가더니, 이제는 고약의 가치까지 한 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객주에서만 독점판매를 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고약이 사대부 댁 부녀자들 사이에서 점점 인기가 높아지며, 청의 누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고 했다. 식솔을 도와 고약을 만들어 팔며 새 삶을 시작하여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청은 조잘거리며 도운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이야기의 끝에 모든 것은 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 덕이라며 아부를 떠는 것도 절대 빼먹지 않았다. 점점 영악해지는 어린 내시의 모습은 도운을 웃게 만들었다.
모든 이들이 돌아가자 이제야 초가가 조용했다. 도운과 청조는 산을 돌며 방아 잎을 따와 장떡을 부쳤다. 아직 여린 방아로 만든 장떡에서는 애초롬한 향이 강하게 풍겼다. 장떡을 안주로 감주 한 사발을 마시고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둘은 마루에 함께 누워 주홍빛이 물들어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한적한 한때를 보냈다. 해가 지기 바로 전, 하루의 마지막을 불사르는 듯 서쪽 하늘이 타는 듯 붉게 달아오르더니 곧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과 함께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주위는 어둑했지만, 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은 밝고 아름다웠다. 별들을 바라보며 청조는 며칠 전 대비마마와 나누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벌써 청조가 궁에 든 지 한 해였다. 한데 아직 기쁜 소식이 없으니,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청조가 궁에 들기 전에야 후사가 없음이 당연했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미안해하면서도 은근히 후궁 간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대비의 말씀에, 청조는 그만 눈물을 왈칵 쏟을 뻔하였다. 정화수를 떠놓고 매일 밤을 치성으로 빈다던 친정어머니의 말씀에도 눈물을 삼켰었다. 그리 바라고 정성을 보였는데도 아이를 점지받지 못하였다면, 정녕 자신은 틀린 것일지도 몰랐다.
“며칠 전, 어마마마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안다. 그것 때문에 네가 고민하고 슬퍼하는 것도 안다.”
단단한 사내의 가슴에 안겨 하늘을 바라보던 청조는 곧 도운을 올려다보았다. 근자에 우울한 자신을 달래주려 도운이 산에 오른 것을 알고 있었다. 국사를 논하고 정무를 보기에도 빠듯하신 분이, 모두의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단출하게 인원을 꾸려 산에 오른 것이었다. 지금쯤 왕의 안위를 걱정하는 대신들은 똥줄이 빠지고 있을 것이었다.
“내 너와 가례를 치르기 전 어마마마께 말씀드린 적이 있다. 만일 궁의 예법 때문에 너 하나만을 온전한 지어미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차라리 왕의 자리를 내려놓고 너와 함께 이 초가로 돌아와 살 것이다, 그리 말씀을 올렸느니라.”
“그러시면 아니 되십니다. 서방님께서는 이 나라의…….”
“다 필요 없다. 얼굴도 모르는 자식 놈을 위해 내 귀한 정조를 잃을 수는 없지, 암. 나의 지조를 우습게 보지 마라.”
농인 듯 진심을 말하던 도운이 쿡쿡거리자 그 반동이 청조에게까지 닿았다. 그의 털털한 웃음에 애써 추슬렀던 청조의 마음이 한 번에 무너져 내렸다.
“이 산에서 나와 둘이서만 사는 것이 싫으냐? 왜, 이제 와 궁에서 편히 마마로 살다 산에서 생활하려니 힘이 들 것 같아 그러냐?”
“소첩이 너무 두렵나이다.”
“무엇이? 산에서 사는 것이?”
청조가 도운의 품을 파고들며 그의 가슴에 뺨을 비벼댔다.
“다른 후궁을 보는 것이 너무나 두렵나이다. 기실 서방님께서 다른 여인을 들이실까 너무 두려웠나이다. 소첩, 그리하면 아니 되는 것을 알지만, 서방님을 누구와도 나누어 갖기 싫습니다. 정말 그것만은 못 하겠나이다. 저만의 사내이시니, 저만을 바라보소서. 다른 여인을 그냥 쳐다만 보는 것도 싫습니다. 궁녀에게도, 무수리, 각심이, 의녀도 싫습니다. 소첩 외에 누구에게도 눈길조차 주지 마소서. 너무 싫습니다. 후궁을 보시려거든 차라리…….”
“차라리?”
청조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 동안 도운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곧 울 것 같은 촉촉한 눈망울로 그를 올려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정녕…… 임금의 자리에서 내려오실 수 있으셔요? 모든 것을 잃어도 소첩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어요? 서방님만 계신다면, 평생을 숨어 살아야 한다고 해도 소첩은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도운이 쿡쿡거리자 가슴의 들썩거림이 다시 느껴졌다.
“우리 여우 같은 마누라가 이제야 본심을 말하는구나. 내가 잃을 것이 무엇이 있다 그러느냐. 임금의 자리가 다 무엇이냐. 다 필요 없다. 왕이야 나 말고 누가 해도 되는 것이지만, 청조의 서방은 나 말고는 그 누구도 해서는 아니 될 일이지. 아무렴, 그러니 걱정을 말아라.”
걱정을 말라 하지만 청조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고 무서웠다. 말처럼 모든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 때문일 것이다. 하늘이 나를 벌주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이곳에서 살 적, 내 너의 신분이 다소 한미하다 하여 씨물을 아니 주려 노력하였지 않느냐. 그리 고얀 마음을 먹었었으니, 그것이 괘씸하여 하늘이 나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편히 가져라. 하늘이 곧 착한 너를 봐서 나를 용서하시겠지.”
“너무 늦게 용서하시면 어찌합니까?”
“우리 나이가 아직 이리 어리고 젊은데 무엇을 걱정하느냐. 선왕께서도 다 늙어서 나를 보셨다. 늙어서 자식이 생기거든 늦게 얻은 선물이라 기뻐하면 되고, 자식이 없으면 우리끼리 해로하면서 살면 될 것을 무엇이 걱정이냐. 이래도 한세상이고 저래도 한세상이다.”
“그 한세상 자식과 함께하면 더욱 좋겠지요.”
“그래? 네가 원한다니 그럼 오늘 한번 만들어 보자. 산에 올랐으니, 산의 정기를 받은 아이가 나올 것이 아니냐.”
커다란 손이 저고리 아래로 불쑥 들어왔다. 청조의 입안을 헤집던 도운의 혀가 가녀린 목덜미를 핥다, 눈물이 들러붙은 두 눈을 핥아 주었다. 속눈썹에 매달린 이슬 같은 물방울에서 짠맛이 풍겼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별빛 아래, 두 남녀의 애정이 열정으로 슬슬 피어올랐다.
* * *
“서방님, 어디 계셔요?”
도운이 어디를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청조는 마루로 나와 서방님을 불러 보았지만, 초가는 고요하기만 했다. 마루에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활짝 열린 싸리문 뒤에서 누군가가 눈만 슬쩍 내밀고 청조를 훔쳐보고 있었다.
“거기 누구요?”
청조가 섬돌을 내려와 묻자 고개가 쏙 들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문 옆으로 까만 눈이 다시 슬금슬금 삐져나왔다. 저것은…… 이마에 검은 줄무늬가 뚜렷하게 王(왕)자를 그리고 있으니 호랑이가 분명했다. ‘王’자가 어찌나 두껍고 선명한지 꼭 먹물로 꾹꾹 눌러 그려 놓은 것만 같았다. 호랑이는 청조를 보는 것이 부끄러운 듯, 영롱하게 빛나는 까만 눈만 빼꼼 내밀었다 숨었다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집이 어찌나 큰지 담벼락 너머로 등 털이 비죽비죽 솟아올라 있는 것이 다 보였다. 또한, 나무 몸통만큼이나 두꺼운 꼬리가 팔랑팔랑 흔들리는 것도 다 보였다. 기분이 좋은 듯 꼬리를 양옆으로 휙휙 흔들며 큰 포물선을 그리다, 빼꼼 내민 눈이 청조와 마주칠 때면 위로 바짝 치켜세웠다. 그러고는 기분이 좋은 듯 원을 빙글빙글 돌렸다.
너무 귀엽고 어여뻤다. 덩치는 가히 산군 중의 산군이라 해야겠지만, 그 생김새는 아직 어린 호랑이였다. 그래서일까. 청조는 그것이 호랑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설렐 정도로 애정이 갔다.
“왜 그러고 있느냐? 이리 들어오너라. 어서, 어서 이리 온.”
후후훗, 여전히 부끄러워하며 숨는 아기 호랑이가 귀여워 웃음이 나 버렸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느냐?’ 저를 깨우는 서방님의 목소리. 청조는 달콤한 도운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뜨고서도 입가에 달린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무슨 꿈이라도 꾸었느냐?”
“으응? 꿈이요?”
“그래, 네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계속 웃고 있었다.”
“으응? 모르겠습니다. 무슨 꿈이었는지 까먹어 버렸습니다. 무척이나 기분 좋은 꿈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냐? 그럼 더 자려무나. 기분 좋은 꿈이 이어질지도 모르니.”
“아닙니다. 일어나야지요. 함께 소풍을 가기로 하였지 않습니까? 어여 소첩이랑 소풍 가시어요.”
둘은 함께 산세를 즐기며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초가로 돌아가던 중 커다란 산뽕나무를 발견했다. 이미 수확 시기를 넘어선 오디가 땅바닥에 가득 떨어져 바닥이 온통 검은 빛이었다. 땅이 온통 검게 뒤덮일 정도로 많은 열매가 떨어졌으나, 아직도 나무에는 탐스러운 오디가 꽤나 남아 있었다.
“서방님, 서방님, 오디 따 주셔요. 소첩이 저것으로 서방님께 과편 만들어 드릴 것입니다.”
망태기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어 고운 아미를 찌푸리다, 청조는 곧 치마를 두 손으로 잡아 그물처럼 활짝 펴들었다. 도운에게 이것도 따달라 저것도 따달라 말을 하자 도운은 청조가 가리키는 오디를 뚝뚝 따기 시작했다.
“서방님, 그 옆에 걸로 따보셔요. 그것이 더 실합니다.”
“요놈 말이냐?”
“예, 고놈 말입니다.”
맑게 울리는 청조의 목소리에 도운은 망설임 없이 오디를 따 청조의 치마에 담아 주고, 청조의 입에도 한 알씩 넣어주었다. 달달한 오디의 맛에 청조는 어깨를 움츠렸다. 치마 한가득 오디를 담아 내려오는 길, 계곡에 들러 도운은 오디로 검게 물든 손을 씻어내었다. 이제 막 봄이 지났을 뿐인데도, 해가 머리 꼭대기에서 반짝거리니 날이 무척이나 더웠다. 손을 씻던 도운은 갑자기 청조에게 다가섰다.
“무얼 하십니까?”
“가만있어라. 애써 딴 오디가 다 떨어지겠다.”
도운은 저고리 아래 치마말기를 풀었다. 오디가 담겨 있던 청조의 치마를 벗겨내 오디를 잘 감싼 후 바닥에 놔두었다.
“이리 와라.”
“어맛!”
도운은 청조를 안고 물이 허리까지 잠기는 곳으로 들어가 함께 물속으로 풍덩 잠겼다 일어섰다. 물을 뒤집어쓴 청조가 얼굴에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아내고는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도운을 바라봤다.
“시원하지?”
“옷이 다 젖어 버렸습니다.”
“금방 마를 것인데 젖으면 어떠하냐?”
청조는 대답 대신 도운에게 물을 튕겼다. 서로가 튕기던 물이 점점 거세지고, 청조의 까르르 웃는 소리와 도운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계곡에 가득 울렸다. 한참을 요란하게 놀다 정적이 찾아왔다. 부쩍 더워진 날씨에 속적삼 없이 저고리만 챙겨 입었더니, 물에 젖은 모시 저고리가 몸의 곡선을 따라 철썩 들러붙었다.
물에 젖은 얇은 저고리 아래로 소복치마말기에 눌린 하얀 젖가슴이 다 비쳐 보였다. 음심을 동하게 하는 여인의 음란한 모습에 도운은 청조의 가는 허리를 끌어당기고 입을 맞추었다. 계곡물에 서늘해진 여인의 살갗에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점점 더 게걸스럽게 탐하던 입술이 목선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갔다.
마치 얇은 피부처럼 청조의 가슴에 착 달라붙어 있는 저고리 채, 도운은 젖가슴을 힘껏 빨아들이고 깨물어댔다. 참을 수 없는 성욕에 서로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지며 몸이 엉켜 들었다. 도운은 급히 청조의 옷고름을 풀었으나 물에 들러붙은 저고리를 쉬이 벗기지는 못하였다. 결국, 반만 드러난 청조의 어깨를 입으로 짓이기다, 속치마의 치마말기를 잡아 힘으로 끌어내렸다.
가슴을 누르던 치마말기가 쓱 벗겨지자 그 안에서 풍만한 가슴이 튕기듯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물이 서늘하게 만들어 놓은 젖가슴에 뜨거운 혀가 닿자 청조는 몸을 떨었다. 서로를 거칠게 탐하다, 도운은 청조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청조의 미끈한 다리가 사내의 허리를 감싸자 도운의 커다란 손이 탱탱한 여인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단단히 받쳐 들었다.
도운은 청조에게 입을 맞추며 천천히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 옛날 겁탈하듯 청조를 안았던 바위에 청조를 내려놓고서도 쉬지 않고 입을 맞추었다. 농밀한 입맞춤을 계속하며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청조의 다리를 벌리고 그사이를 천천히 밀고 들어갔다. 예고 없는 갑작스런 침입에 청조가 힘겨운 신음을 뱉었다. 도운에게 매달려 잠시 몸을 굳혔던 청조는 곧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살짝 뒤로 젖혀 자세를 잡았다.
“괜찮으냐? 힘들지 않느냐?”
청조가 고개를 흔들자, 도운은 남은 양물을 천천히, 그러나 끝까지 밀어 넣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좁은 길을 트며 느릿하게 지나가는 거대한 움직임에 청조는 입술이 말랐다. 생생한 날것이 휩쓸고 지나가는 원초적인 감각과 거친 압박감에 숨이 막힐 듯 고통스러우면서도 가려운 듯한 묘한 쾌감에 허리가 뒤로 바짝 휘었다. 감질날 정도로 느릿느릿했던 침입이 마침내 끝에 다다르자, 배 속과 아래가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청조는 도운의 몸통에 다리를 감아 그를 바짝 끌어당겼다.
“아, 아흑.”
청조의 둔부를 터뜨릴 듯 힘껏 잡은 도운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청조의 허리가 큰 곡선을 이루며 몸이 한껏 뒤로 젖혀졌다. 몸을 뒤로 젖힐수록 팽팽하게 부푼 젖가슴은 도운을 향해 그 존재를 과시했다. 도운은 자신을 향하여 출렁거리는 젖가슴을 한 손에 꽉 쥐어 잡고 입속으로 삼켰다.
참기 힘든 쾌락에 청조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슴을 희롱하면서도 아래를 쳐대는 힘은 더욱 거세졌다. 바위를 짚은 손에 더욱 힘을 준 청조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앞으로 힘껏 내밀며 도운의 가열찬 움직임을 버티고 또 버텼다. 이윽고 절정의 순간이 다가오자, 도운은 청조의 몸을 꽉 끌어안고 아래를 더욱 밀착시켰다.
“하아, 하아.”
사내의 단단한 가슴에 몸을 기댄 청조는 거친 숨으로 들썩거리는 도운의 가슴을 따라 자신도 함께 밭은 숨을 내쉬었다. 몸을 씻겨 주겠다며 청조를 안고 계곡물로 들어간 도운은 결국 또다시 청조의 젖가슴을 물었다. 조금 전 절정을 느꼈던 여인의 몸은 조그만 자극에도 쉽게 달아올랐다. 흥분으로 단단하게 일어선 젖꼭지를 강하게 물자, 청조의 코에서 ‘아으흥’ 하는 교성 소리가 길게 흘렀다.
초가로 돌아오는 길, 청조를 업은 도운의 손에 이제는 보따리가 되어 버린 청조의 치마가 들려 있었다. 도운은 등에 업혀 잠이 든 청조의 젖어 버린 옷을 벗겨 준 후, 조심스럽게 이부자리에 눕혀 주었다. 곧 반빗간에 들어 뜨거운 물을 떠 와 청조의 서늘한 몸을 닦아 주었다. 날이 더워지긴 했지만, 아직은 밤바람이 서늘한 계절이었다. 혹 찬물에 오래 담갔던 몸에 감모라도 들까 걱정되어 도운은 몸을 따뜻이 해 준 후,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도운이 젖은 옷을 벗겨 주고 따뜻한 수건으로 몸을 다 닦아 주는 동안에도 청조는 미동도 없이 잠만 잤다. 무슨 좋은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잠이 달콤한 것인지 엷게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도운은 미소 짓는 청조의 입술에 입맞춤을 남기고 이불을 덮어 준 후 방을 나섰다.
‘왜 아니 들어오고 그러고 있니? 응? 어서 들어오렴.’
눈만 빼꼼 내밀던 호랑이는 이제 얼굴 전체를 문 안으로 들이밀고 청조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귀여운 미소로 부끄러워하며 청조를 바라봤다. 표정이 없는 짐승이 어찌 미소를 짓겠냐 하겠지만, 실로 호랑이의 입술 끝이 웃고 있는 듯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살포시 미소 지으며 여전히 부끄러운 듯 머리를 내밀었다 숨었다 하고 있었지만, 담벼락 위로 미처 숨기지 못한 꼬리가 여전히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후후후, 괜찮으니 어서 이리 와보렴.’
오늘은 앞발이 싸리문 안까지 들어왔다. 발이 어찌나 큰지 커다란 바윗덩어리 같았다. 다음날 계속된 청조의 부름에 드디어 호랑이가 우물쭈물 거리며 마당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집채만 한 몸이다 보니, 단 세 걸음 만에 청조의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호랑이는 더욱 커 보였다. 호랑이의 몸집이 마당을 가득 채울 정도였으니, 과연 산군이라 할 만했다.
청조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호랑이를 올려보다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었다. 청조의 손길에 호랑이는 그 커다란 몸으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머리를 만져 달라 청조의 손에 대고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청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이제는 배를 보이고 바닥에 누워 몸을 배배 꼬았다. 갸르릉 소리와 함께 몸을 꼬아대는 모습이 너무 어여쁘고 소중해 청조는 호랑이의 배도 쓰다듬어 주었다.
털이 어찌나 보드라운지, 청조는 호랑이의 배에 자신의 뺨을 비볐다. 청조가 배에 뺨을 비비자 신이 난 호랑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청조의 무릎을 베고 발랑 누워 까만 눈으로 청조를 올려다보았다. 인왕산 바위만큼이나 커 보이는 얼굴이 무릎 위에 올라왔지만, 신기한 것이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청조는 두 팔을 벌려 호랑이의 얼굴을 껴안았다. 두 팔이 모자랄 정도로 큰 얼굴을 껴안고 보드라운 털에 뺨을 비볐다.
‘홀로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릅니다. 이제 저도 데리고 가셔요.’
청조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분명 아이 목소리였다. 어찌 말 못 하는 짐승이 사람의 말을 한단 말인가? 참으로 이상하였다. 청조는 자리에서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이 트고 있는지 사위가 잿빛이었다. 그러고 보니 산에 올라 며칠째 호랑이 꿈을 꾼 듯했다. 그중에서도 어젯밤 꿈은 너무 생생했다. 그 보드라운 털의 감촉이 아직도 손끝에 느껴지는 것만 같아 청조는 손바닥을 펼치고 바라보았다.
조반을 간단히 먹은 후 청조와 도운은 초가를 나섰다. 밖에서 초가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아로새기고 싸리문을 단단히 걸어 닫았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니 마음이 애잔했다. 미련이 남은 듯 청조가 손끝으로 싸리문을 더듬자 도운은 청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다음에 또 올 것이다. 나중에 아들놈이 태어나거든, 선위를 하고 너랑 나랑 이곳에 들어와 살아도 되고.”
도운의 말에 청조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함께 뒤를 돌았다.
“가는 길에 저잣거리 구경 실컷 하고 돌아가자. 내 장에 가서 너에게 어여쁜 비녀 하나 사줄 것이다.”
“정말이셔요?”
“정말이지.”
“그럼 비녀하고, 엿가락도 하나 사주시렵니까? 오늘따라 소첩이 달달한 엿가락이 먹고 싶습니다.”
“뿐이랴, 네가 원하는 것 모다 사줄 것이니 다 말하여라.”
호언장담하는 도운의 손을 꼭 잡고 내려가는 길, 청조는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이제 저도 데리고 가셔요. 또 저만 남겨 두고 가시면 아니 되십니다.’
문득 어젯밤 꿈에 들었던 호랑이의 목소리가 저를 부르는 듯했다. 산을 내려가던 청조는 이상한 기분에 뒤를 돌아 초가를 바라본 후, 자신도 모르게 배를 쓰다듬었다.
외전 _입덧
* * *
새벽녘에 그냥 눈이 떠졌다. 청조는 아직 어두운 허공을 향해 눈을 깜박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저 앉아있기만 하였는데도, 잠결에 이상한 기척을 느낀 도운의 눈이 슬쩍 떠졌다. 얇게 뜬 눈에 푸른 어둠 속에 멍하니 앉아있는 청조가 들어왔다. 미동도 없이 무릎을 껴안고 앉아있는 청조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도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왜 그러는 것일까. 도대체 왜 또 그러는 것인가. 다 나았다 생각한 옛 상처가 다시금 떠오른 것인가. 오도카니 앉아있는 청조의 뒷모습에 도운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청조야.”
도운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멍하니 앉아있는 청조의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왜…….”
겁이 서린 목소리가 애써 떨림을 감추고 있었다. 애타는 속내를 감추려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인 도운은 담담한 척 말을 이었다.
“왜 그러는 것이냐.”
“서방님.”
“그래, 말을 해라.”
초점 없이 먼 곳을 바라보던 청조가 시선을 돌렸다. 도운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 듯, 잠시 움찔거리던 입술이 다시 앙다물어졌다.
“왜, 혹여 무서운 꿈을 꾼 것이냐?”
청조의 고개가 설레설레 흔들렸다.
“그럼, 잠자리가 불편하여 그러느냐?”
또다시 설레설레 흔들리는 청조의 고갯짓에 도운의 마음이 더욱 타들어 갔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청조의 대답에 결국 도운은 차마 묻기 힘든 그것을 물었다.
“그럼 설마,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네가 어찌 또 이러는 것이냐.”
“그것이…….”
“그래, 괜찮으니 말을 해 보아라. 응?”
“그것이 달포 전, 서방님과 함께 산을 내려올 적 저자에 들렀었지 않습니까?”
“그랬지. 그것이 왜?”
청조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차마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예전에야 모르지만, 이제는 어엿한 종일품의 빈이었다. 헌데 혹시라도 이런 말을 꺼낸 것이 대비마마께라도 알려진다면, 분명 체면 없다 꾸지람을 할 것이다.
“어서 말을 해보아라. 저자에 갔던 것이 왜?”
“저자에 들러서 소첩에게 사주셨던 엿가락을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하고말고. 네가 그날따라 엿가락이 먹고 싶다 특별히 나를 졸랐지 않느냐.”
“예, 소첩이 그리했지요. 허면 엿가락을 먹고 나서, 소첩에게 사주신 비녀를 팔았던 장돌뱅이도 기억하십니까?”
“아무렴, 그것도 당연히 기억하지. 왜, 그 장돌뱅이가 너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었더냐?”
목소리를 높이는 도운의 질문에 청조가 도리질을 쳤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 장돌뱅이가 서 있던 자리 뒤에 포목점이 하나 있었고, 그 포목점을 끼고 들어간 골목에 주막이 하나 있었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국밥과 함께 부아저냐(허파전)를 먹었지요.”
“그랬지.”
“……그 저냐가 먹고 싶습니다.”
청조가 다시금 입맛을 다셨다. 그때 소반에 올라왔던 부아저냐가 먹고 싶었다. 기름이 자글자글하게 달아오른 번철에서 노릇노릇하게 지져지던 저냐의 모습이 떠오르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것이 먹고 싶다고?”
“예, 주막의 찬모가 손끝이 여문 지 맛이 제법이었지 않았습니까? 칼로 자근자근 두드린 부아에 간이 골고루 배어있었고, 또 그 사이사이에 스며든 녹두의 향이 향긋하였습니다. 특히 씹을수록 쫄깃한 부아가 입안에서…….”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너무 먹고 싶은 듯, 청조는 침을 또다시 꿀꺽 삼켰다. 도운은 그런 청조의 모습이 사뭇 이상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부아저냐는 청조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아니었다. 청조는 육류보다 채소를 더 좋아하였고, 기름에 부친 음식보다는 숯불 향이 은은한 구이를 더 좋아하였다.
게다가 그때 주막에서 먹은 저냐의 맛이 그만하긴 했지만, 자다 깰 정도로 그 맛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렴 한낱 저자의 찬모 솜씨가 수라간 상궁의 솜씨보다 뛰어나진 않을 것이다.
허나…… 도운은 생각을 멈추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청조가 그것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느냐!”
“예, 전하. 찾으셨사옵니까?”
대답과 함께 번을 지키던 상궁이 안으로 들었다.
“지금 소주방에 일러 부아저냐를 만들어 올리라 하라.”
“아닙니다. 그냥 두십시오.”
당황스런 도운의 명에 청조가 급히 도운을 말리고는 상궁을 밖으로 내보냈다.
“하지만 네가 지금 먹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우세스럽다 흉잡습니다. 영 먹고 싶으면 점심에 올리라 할 터이니 걱정 마셔요.”
겨우 도운을 달랜 청조는 그의 품에 안겨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여전히 부아저냐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막 부쳐낸 따끈한 저냐를 한입 깨무는 순간 바삭한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씹을수록 쫄깃해지던 식감에 은은히 풍기던 녹두 향이 향기로웠던 것 같았다. 달포나 지난 음식의 맛이 이제 와 하나하나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청조는 저냐에 대한 생각을 떨치려 노력하였다. 한밤중에 저냐를 찾아대는 자신을 보고 한미한 중인 집안 출신의 마마가 아직도 궁의 법도를 모른다는 말이 나올까 걱정스러웠다. 아니, 그보다 예도 모르고 후사도 생산하지 못하는 마마 대신, 혈통 좋고 기품 있는 다른 여인들을 후궁으로 들이라며 대신들이 주청을 올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청조는 날이 밝고서도 저냐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먹고 싶었다. 어느덧 정오가 지나고, 달걀을 입혀 노릇하게 부친 저냐가 점심상 위에 놓여 안으로 들어왔다. 곁에서 시중들던 곽상궁이 저냐 한 점을 조그만 접시에 옮겨 담아 밥그릇 옆에 놓아주었다.
“이것이 혹여 부아저냐인가?”
“예, 마마. 주상전하께서 금일 마마께서 잡숫고 싶어 하시니, 정성으로 지어 올리라 특별히 하명하시었다 하옵니다. 하여 소주방의 성상궁이 직접 재료를 골라 정성으로 만들었다 하옵니다. 잡수어 보소서.”
“그런가?”
청조는 기꺼운 마음으로 저냐를 한 점 들어 올렸다. 바삭하고 따뜻한 저냐는 고소하였다. 하지만 저자에서 먹었던 그것과 무엇인가 달랐다. 녹두 대신 메밀가루를 써서 그러한가 싶기도 했다. 최고의 재료를 사용하였고 솜씨 좋은 성상궁이 정성으로 지었으니 그 맛이 월등히 좋은 것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저자에서 먹던 저냐가 먹고 싶은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입맛에 맞지 않으시옵니까?”
“아닐세, 맛이 아주 좋네. 성상궁이 수고를 많이 하였겠어. 고맙다 이르게.”
“예, 마마. 그리 전하겠나이다.”
늦은 오후, 정무를 끝내고 잠시 애류당에 들린 도운은 청조의 얼굴을 살폈다.
“내 부아저냐를 특별히 올리라 하명하였는데, 맛이 그만하였느냐?”
“예, 서방님 덕에 소첩이 아주 맛좋은 저냐를 먹었습니다.”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청조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운은 손으로 청조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아직도 저자의 저냐가 먹고 싶은 것이구나.”
“예? 아닙니다. 참으로 맛나게 먹었습니다.”
“누가 맛나게 먹지 않았다 하더냐. 저자의 그것을 먹고 싶어 한다 하였지.”
도운은 다 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 청조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정무에 시달리느라 고단하신 서방님 앞에서 정숙하지 못하게 먹을 것을 탐내는 모양새라, 아직은 마마라는 칭호로 불리기에 모자람이 많은 자신이었다.
“내일 저자에 나가보자.”
“저자예요?”
“그래. 네가 궁에만 있으려니 갑갑하여 그런게지. 내일 저자에 함께 나가서 네가 그토록 먹고 싶다는 부아저냐 한번 맛 좀 보자. 내 이번에는 그것의 맛을 천천히 음미해 볼 것이다.”
“참말이셔요?”
“암, 참말이지. 네가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다 먹여줄 것이다. 그러니 참지 말고 말을 해라. 네가 참을 이유가 전혀 없다.”
왜 그런 것을 참느냐. 청조는 통박을 주는 듯 부드럽게 웃는 도운의 허리를 껴안았다.
“소첩이 지난번 서방님께서 사주신 비녀를 하고 저자에 나갈 것입니다. 백옥 깎아 만든 그 하얀 비녀와 더불어 하얀 모시 저고리 입고, 서방님께서 좋아하시는 푸른 쪽빛 물들인 치마를 입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늘빛 담은 도포를 입고, 너를 닮은 푸른 쪽빛 세조대로 치장을 해야겠다.”
“서방님의 세조대는 소첩이 직접 메어드릴 것이어요.”
어여쁘게 조잘거리는 청조의 입술에 꾹 입맞춤을 남긴 도운은 저녁에 다시 오마하며 애류당을 나섰다.
다음날 조참(朝參)을 마친 도운은 바삐 애류당으로 향했다. 백옥으로 만든 비녀에 맞추어 눈처럼 하얀 저고리를 입은 청조의 뽀얀 얼굴이 도운의 등장에 도홧빛으로 물들었다. 자신에게 포르르 다가오는 청조의 쪽빛 치마가 푸른 파도처럼 일렁거리며 율동을 만들어 냈다. 그 어여쁜 모습에 도운의 마음 또한 기쁨으로 일렁거리며 벅차올랐다. 청조는 약속대로 하늘빛 도포를 입고 온 도운에게 짙은 쪽빛 세조대를 메어 주었다.
“가자.”
“예, 서방님.”
저자로 나간 청조는 오랜만에 보는 저자 구경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흥겨워했다. 저자는 수많은 인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몸에 물건을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들에, 저마다 목청을 높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인들과 흥정하는 백성들로 저자가 시끌벅적했다.
모두의 얼굴에 구김이 없고, 활기가 넘쳤다. 청조는 날이 갈수록 활기가 넘치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기 좋아, 부아저냐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들의 모습만 계속해서 살폈다.
“이쪽이다.”
두리번거리는 청조의 어깨를 감싼 도운이 청조를 가볍게 이끌었다. 청조는 그에게 이끌려 어느새 주막에 들어섰다. 마당 한쪽에 만들어진 아궁이의 검은 번철 위에서, 노란 계란 옷을 입은 각종 저냐들이 노릇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찬모로 보이는 이가 노릇하게 부쳐진 저냐를 그릇에 담고, 비어버린 공간에 재료들을 올리며 열심히 저냐를 지지고 있었다. 청조는 노랗게 익어가는 모습과 풍겨오는 기름 향에 벌써부터 침이 고였다.
“여기, 부아저냐와 국밥을 가져오게. 탁주도 한 사발 내어 오고.”
“예, 나으리.”
도운은 청조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곧 주모가 국밥과 저냐, 그리고 탁주를 올린 소반을 들고 안으로 들었다. 소반이 앞에 놓이자마자, 청조는 따뜻한 부아저냐부터 집어 입에 넣었다.
“어떠하냐, 맛이 그만하냐?”
도운의 물음에 청조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이상하다는 듯, 젓가락으로 한 점을 더 들었다. 고개가 다시 기울어졌다.
“왜 그러느냐?”
“맛이, 전이랑 다른 것 같습니다. 서방님이 맛 좀 보셔요.”
청조가 집어주는 부아저냐를 입에 넣은 도운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나는 잘 모르겠다. 부아저냐의 맛이 다 이런 것이 아니었느냐. 특별히 더 나쁠 것도, 특별히 더 좋을 것도 없이 딱 내가 아는 저냐의 맛이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전에는…… 뭔가 더 쫄깃한 것이, 부아의 향이 더욱 진하고 고소했던 것 같은데.”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이보게, 남현!”
“예, 주인나리. 찾으셨사옵니까?”
“주모를 데려오게.”
잠시 후, 후덕한 인상의 주모가 안으로 들어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요, 나리.”
“혹여 저냐를 만드는 조리법이 바뀌었는가?”
“그것은 왜, 뭐가 입에 맞지 않습니까요?”
지체 높아 보이는 양반의 물음에 주모가 조아리던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괜한 책이라도 잡혀 주막에 불이익이라도 오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그것이 아니고, 맛이 전과 좀 다른 거 같아 그러네.”
도운의 말에 긴장이 풀린 주모의 어깨가 안심하듯 아래로 쑥 내려갔다.
“그것이, 며칠 전 찬모가 바뀌기는 했지만, 맛이 어찌 다른지는 쇤네가 잘…….”
“그래? 찬모가 바뀌었다고. 그럼 전에 있던 찬모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거야 찬모의 집에 있지 않겠습니까요? 찬모의 서방 되는 이가 크게 다쳐 당분간 서방의 몸조리를 돕는다 하였습죠.”
“자네가 찬모의 집을 아는가?”
“쇤네가 아는 것은 아니고,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그이의 집을 알고 있습니다요.”
찬모의 부름에 동그란 얼굴의 어린아이가 바삐 달려왔다. 도운과 청조는 아이를 따라 찬모였던 여인의 초가로 향하였다. 도성에 사는 백성들의 형편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변두리에 사는 백성들의 초가는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보자, 청조는 저냐 한 점이 먹고 싶어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장옷에 덮인 청조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백성들은 오늘도 한 끼를 걱정하며 살 터인데, 그간 마마로 사는 편안한 삶에 익숙해졌다고 저냐가 먹고 싶다는 사치스런 투정이나 부리다니. 청조는 이만 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도운에게 이만 돌아가자고 말을 하려는 찰라, 아이가 한 초가 앞에 섰다. 아이는 스스럼없이 열려있는 싸리문 안으로 들어가 아주머니를 불렀다. 안에 대고 부르는 소리에 반빗간에서 여인이 대답이 흘러나오더니, 곧 두 손으로 허리를 단단히 받친 여인이 산처럼 둥근 배를 내밀며 마당으로 나왔다. 청조의 시선이 동그란 여인의 배에 꽂혔다.
“응? 두식이 아니냐?”
“예, 아주머니. 저가 아주머니를 찾으시는 양반 나으리를 모셔왔지요.”
“양반 나으리?”
“예, 저기요.”
아이가 가리킨 방향에서 도운 일행을 발견한 여인은 곧바로 다가와 허리를 굽히려 애를 썼다.
“되었네, 편하게 있게.”
“예? 허, 허지만.”
“괘념치 않으니 굳이 예의 차릴 필요 없네. 보아하니 몸도 무거워 보이는 것을.”
살갑게 건네는 청조의 말에 여인은 배가 많이 무거운 듯 다시 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청조의 눈이 허리를 받치는 여인의 손에 이어 다시 둥근 배로 향하였다. 청조의 눈빛에서 부러움을 읽은 도운은 재빨리 여인에게 물었다.
“그대가 얼마 전까지 주막의 찬모로 있었다지?”
“예, 나리. 헌데 쇤네의 집에는 어찌…….”
“여기 내 처가…….”
‘아이고오’
도운의 말은 방안에서 들리는 괴로운 신음 소리에 중간에서 끊어져 버렸다. 안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에 여인은 뒤뚱거리며 바삐 안으로 들었다.
“무슨 일인가?”
여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던 도운은 인상을 찡그렸다. 방안에서 피고름 내가 진동하였다. 사내의 종아리에 감아놓은 면포가 붉게 변해 있었고, 여기저기 다른 곳도 엉망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자가 자네의 서방인가?”
“예, 나리. 며칠 전 심하게 매질을 당하다 이리되었는데, 변변한 치료도 받을 수가 없으니. 아이고, 이러다 사람 잡겠습니다요. 이보시오, 정신 좀 차려 보라니까! 아이고, 이러다 송장 치르겠네. 정신 좀 차려 보시오, 흐흑.”
여인이 연신 고통에 신음하는 사내의 젖은 이마를 닦아 주었지만, 이미 열꽃이 온몸에 번져 있었다. 도운은 바삐 밖에 있던 아이를 시켜 의원을 데려오라 명하고는 여인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었다. 매질을 당했다는 말이 심히 거슬렸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매질을 이리 심하게 하였단 말인가.
“그것이, 소작을 주신 양반 나리 댁에 갔다가 멍석말이를 당하고, 다시 포청에 끌려갔습죠. 멍석말이를 당한 것도 모자라 거기서 장까지 맞았습니다요. 아이고, 아이고!”
“멍석말이? 그것을 왜 당했나? 자네의 서방이 무슨 죄라도 지었는가?”
도운의 물음에 가슴을 치며 흐느끼던 여인이 펄쩍 뛰었다. 서방이 억울하게 매질을 당하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서방이 죄인이라는 누명까지 받는 것은 진정 억울했다.
“아닙니다요, 나리! 쇤네의 서방은 잘못이 없습니다요. 아무렴요, 없고말고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말씀을 올려보게.”
곁에서 부드럽게 채근하는 청조의 말에 여인은 입술을 깨물며 울었다.
“그것이, 올해에 수확한 보리를 돌려받으러 갔었습니다요.”
“보리?”
“예, 보리 말입니다요. 글쎄, 마을 어르신의 말을 들어보니, 소작을 주신 양반 나리의 밭이 고, 고 뭐라 하는 땅이라 합니다요. 그것이 나라에서 주는 땅이라던데.”
“공민전 말이냐?”
“예, 나리. 이제 공민전인가 뭔가 하는 그 밭에서 소작을 하면 소작료로 수확의 이 할만 내어 놓으면 된다 하지 않습니까. 헌데 쇤네는 예년대로 팔 할을 내었습죠. 춘궁기를 견디느라 어찌나 힘들었는데, 겨우 얻은 수확의 팔 할이나.”
여인은 소맷부리로 연신 눈물과 콧물을 찍어 내었다.
“헌데 알고 보니 나라님께서 명을 내려 주셨다지 뭡니까요. 이제는 수확의 이 할만 내어 놓으면 된다 합니다요.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뭘 알겠냐마는 나라님께서 그리하라 하셨으면 응당 그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요, 나리?”
“그렇지.”
눈치를 살살 살피던 여인은 도운이 그렇다 맞장을 쳐주자 더욱 서럽게 울분을 토해냈다.
“해서 저희 내외가 나머지를 돌려주십사 청을 하러 그 댁을 찾아갔습죠. 헌데 되레 저희 서방에게 강상죄를 물어 멍석말이로 매질을 하고, 포청까지 끌고 가 저 꼴로 만들었습니다요.”
“의원에게는 보였는가?”
“먹고살 것도 없는 쇤네의 형편에 의원이 다 뭡니까요? 이대로 저이가 저리 가버리면 쇤네는 정녕 억울하여 못삽니다요.”
여인은 둥근 배를 쓰다듬으며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곧 아이도 나올 것인데, 쇤네가 어찌 살아야 좋을지 통 모르겠습니다.”
여인의 말을 듣던 도운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졌다. 그가 역정이 단단히 난 것을 안 청조는 여인을 다독이며 밭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다. 도운은 때마침 도착한 의원에게 병자를 맡긴 뒤, 구역을 맡고 있는 우포청(右捕廳)으로 향했다. 당당하게 포청으로 들어가는 도운의 뒤로 둥근 배를 한 여인이 겁에 질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뒤따랐다.
앞서가는 양반 나리께의 지체가 꽤나 높아 보이긴 하나, 포청이었다. 괜히 저 같은 천한 것 때문에 공연히 나리께서 화를 당하시는 건 아닌지, 또 억울함을 풀지도 못하고 저까지 화를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자신마저 잘못되면 서방은 고사하고 뱃속의 아이까지, 일가가 몰락해버리는 일이었다.
여인의 고민을 알아챘는지 청조가 무거운 여인의 몸을 직접 부액하며 부드럽게 달랬다.
“걱정하지 말게. 서방님께서 자네의 억울함을 꼭 풀어주실 것이니.”
다정하면서도 위엄 있는 청조의 위로에 여인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제발 억울함을 풀 수 있도록, 여인은 마음속으로 천지신명을 간절하게 찾았다.
앞장서던 남현이 나졸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속삭이자 나졸이 안으로 쏜살같이 달려 들어갔다. 이어 어디선가 포도대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저…… 저…… 전…….”
“포도대장은 말을 아끼시오.”
말을 더듬는 포도대장에게 남현이 조용히 경고를 했다.
“우리 주인나리께서 일이 있어 보자고 하시었으니, 어서 뫼시지요.”
“예? 아, 예. 이쪽으로 드시옵소서.”
도운은 너른 마당을 가로질러 대청으로 거침없이 올라선 후, 포도대장에게 일러 소작을 준 지주를 당장에 끌고 와라 명하였다. 바로 일행을 꾸려 나간 종사관이 곧 지주를 끌고 포청으로 돌아왔다. 너른 마당에 들어선 지주의 얼굴을 본 도운의 인상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너는.”
“저……전…….”
역정이 난 도운의 얼굴을 알아본 지주는 파랗게 질려 말을 더듬었다.
“그 입 다물라! 네가 정녕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내 일찍이 너를 죽음으로써 다스려야 마땅하였으나, 은혜를 베풀어 목숨만은 살려주었거늘. 아직도 부패한 관료들과 청탁을 일삼고, 죄 없는 백성들의 고혈을 뺏어 먹고 있어!”
도운의 호통에 한때 의금부 지사로 지내다 파직된 박호근의 다리가 벌벌 떨렸다. 겁이 나 죽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어깨를 한순간에 베어버렸던 악귀 같은 도운의 모습이 떠올라 오금이 저렸다.
호근을 무섭도록 쏘아보는 도운의 눈빛에 살기가 어른거렸다. 저놈을 진즉에 죽음으로 벌하였어야 했다. 청조를 매질하라 시킨 놈을 그나마 살려 두었던 것은 익태를 속이는 일에 협조를 잘 하였기 때문이었다. 도운은 벌벌 떠는 호근의 모습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혀를 찼다. 곁에 있던 청조 역시 그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백성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공명심에 눈이 멀어 자신을 쥐어짜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하던 못된 습성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또 억울한 백성을 만들다니. 청조의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렸다.
“네가 저 아낙을 아느냐?”
도운의 물음에 호근은 둥근 배를 내밀고 있는 여인을 곁눈질했다.
“예, 아, 아옵니다.”
“일전의 저 아낙의 내외가 너를 찾아갔다가, 그 서방 되는 이가 이곳 우포청으로 끌려와 매타작을 맞고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에 대해 할 말이 있느냐!”
“그…… 그것이.”
호근은 말을 더듬으며 몸을 떨다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그것이, 내, 내외가 소인을 찾아와 보리를 달라 떼를 쓰더니, 끝내는 패악을 부렸사옵니다. 보리를 내어 놓으라 감히 양반에게 고, 곡괭이를 휘두르니 강상의 죄를 물어 혼을 내어 주었사옵니다. 허나, 그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사옵니까? 강상의 죄는 죽음으로 그 죄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한 것이 온데, 소인이 포청에 발고를 하는 것으로…… 마, 마무리하였사옵니다.”
“허, 강상의 죄는 죽음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느냐. 그럼 너부터 당장 죽어야겠구나.”
“예? 그…… 그것이 무슨.”
도운은 호근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여인에게 물었다.
“그대의 말로는 올해 수확한 보리를 돌려받기 위해 저자의 자택으로 찾아갔다 하였지.”
“예, 나리.”
“그때 나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해보게. 나라님께서 무어라 명을 하셨다 했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벌렁거리는 가슴을 움켜쥔 여인은 숨만 쌕쌕 내쉴 뿐 도운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 채, 바짝 마른입만 한동안 쩝쩝거렸다.
“분명 그 뭐시다냐, 그 밭이 고, 공민전인가. 아무튼 뭐 그것이라 하여 소작료로 수확물의 이 할만 내면 된다고 나라님께서 명을 하셨다고 들었습죠.”
“헌데 뭐가 문제였나?”
“그것이 나리께서 저희한테 예년대로 팔 할을 받아 가셨습니다요. 해서 쇤네와 쇤네의 서방이 나머지 육 할을 내어 주십사 청을 하러 찾아갔습니다요. 쇤네 같은 무지렁이가 뭘 알겠냐마는 나라님이 그러라고 하시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요? 해서 나리의 댁으로 찾아가 보리를 돌려받으려고 하였습죠. 헌데…….”
결국, 울음을 터트린 여인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소맷부리로 눈물만 찍어냈다. 도운은 여인이 말을 잇지 못하자 호근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네가 설마 나라님의 명이 무엇인지 몰랐었다 하겠느냐?”
“그, 그 밭은 고, 공민전이 아…….”
“공민전이 아니라고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내 호조에 일러, 직접 문서를 보여주어야 네가 똑바로 말을 하겠느냐! 또한, 만에 하나라도 네 땅이 공민전이 아니었다 한들, 소작료로 육 할 이상을 받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정한지가 언제인데! 감히 국법을 무시하고 소작료로 팔 할을 걷어! 팔 할을!”
“그, 그것이.”
벌벌 떠는 호근을 향해 도운은 손에 든 부채를 힘껏 던져 버렸다. 도운이 던진 부채가 호근의 이마에 맞고 떨어지자, 만삭의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더욱 거칠게 몰아쉬었다.
“보리가 무엇이냐! 지난해 걷은 식량이 떨어지는 시기의 배고픔을 이겨내려 심는 귀한 곡물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보리를 기다리느라 춘궁기를 힘들게 견뎠을 백성들에게 곳간을 푸는 인정을 베풀지는 못할망정, 그간 주린 배를 채울 유일한 곡물인 보리를 강탈해가다니! 괘씸하기가 하 없다!”
“아니옵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아니면 무엇이냐! 네까짓 것이 양반이랍시고 갓을 쓰고 거만하게 팔자로 걷더니, 나라님의 말씀도 우습게 여기는 모양이지. 나라님께서 분명 국법을 무시하고 소작료로 이 할 이상을 걷을 시 공민전으로 받은 땅은 국고로 다시 환수한다 하였다. 헌데 네가 감히 하늘 같은 나라님의 명을 허투루 여기는 것이 아니냐! 나라님을 욕보인 너야말로 강상의 법도를 어긴 것이지 무엇이냐! 강상죄를 범하였으니, 너의 말대로 목숨으로 너의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다.”
근엄하게 호통을 치는 도운의 목소리에 벌벌 떨던 호근은 목숨만 살려 달라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시끄럽다! 너는 비단 국법을 어기고 나라님을 욕보인 것만이 아니라, 죄 없는 백성에게 누명을 씌워 그 목숨까지 위협하였다. 그것이 국법을 어긴 죄보다 더 큰 죄이니라. 백성이 무엇이냐!”
도운의 호통이 포청의 너른 마당에 크게 울렸다.
“백성이란 무릇 이 나라의 근간이요 근본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처럼, 모쪼록 나라의 근간인 백성이 튼튼하고 단단하여야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이다! 너같이 제 배만 부르겠다고 백성을 핍박하는 이가 의금부 지사로 지내었으니, 그간 나라를 받치고 있던 뿌리를 갉아 먹고 있던 꼴이 아니냐! 내 곳간에 사는 더러운 쥐가 가엽다 하여 살려 주었더니, 교활한 쥐새끼가 아주 내 집안의 기둥까지 갉아 먹으려 하였구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소인이 잘못했나이다! 부디! 한 번만 더 자비를!”
“너에게 자비란 다른 악행을 시작하는 기회일 뿐이니, 자비를 베풀 의미가 전혀 없다. 허니 내 너에게 두 번 다시 자비를 베풀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포청의 대장 역시 청탁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시시비비가 분명한 이 일을 두고 어찌하여 저 아낙의 서방 되는 이에게 그리 모질게 장을 칠 수가 있는가. 조사를 제대로 하였다면, 응당 보리를 돌려주었어야 맞지 않는가. 아직도 관복을 입고 있는 놈들 중에 이런 천치들이 있다니! 이런!”
폭풍같이 휘몰아친 도운의 역정 끝에 호근은 옥으로 끌려들어 가고, 포도대장 역시 바로 파직이 되었다. 도대체 저 젊디젊은 나리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이시기에 까마득히 올려다봐야 하는 지체 높으신 양반 나리들을 쥐락펴락하는 것인지, 여인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놀란 마음에 입만 헤벌리고 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은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아.”
“이보게, 왜 그러는가?”
“아무래도 아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요. 어미가 놀랐으니, 이 안에 든 놈이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것입지요.”
“아이가…… 말인가?”
둥근 배를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을 바라보는 청조의 눈빛에 부러움이 묻어나왔다.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핏덩이의 어미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그 유대감을 몹시도 느껴보고 싶었다.
“그나저나 마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여인은 소맷부리로 눈물 콧물을 찍어 내며 고개를 조아렸다.
“은혜는 무슨,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일세. 내 사람을 시켜 자네의 집으로 보리를 가져다주라 이를 것이네. 또한, 의원에게 미리 병자의 치료에 대한 값을 치러 놓을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부디 서방의 병구완에 힘쓰게. 아이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고, 마님! 참으로 감사합니다요. 참으로 감사합니다요.”
눈물을 찍어 내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던 여인은 문득 지체 높은 젊은 마님께서 자신의 누추한 초가까지 발걸음을 한 이유를 듣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헌데, 마님. 쇤네를 찾아오신 연유는 무엇인지.”
“아, 그것.”
뽀얀 웃음을 흘리는 청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리 고초를 겪은 여인에게 겨우 저냐가 먹고 싶어 찾아왔다는 말을 하려니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아닐세. 내 달포 전에 저자에서 먹었던 부아저냐가 문득 먹고 싶어 주막엘 찾아갔었네. 헌데 손맛이 달라 그러한가, 도통 그 맛이 안 나. 해서 주모에게 물어 자네의 초가를 찾아갔던 길이었네.”
“아이구, 마님. 그렇다면 쇤네가 바로 만들어 올려야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쇤네가 뚝딱 만들어다 올릴 것입니다요.”
“아닐세, 몸도 무거운 사람이. 어서 돌아가서 서방을 보아야지. 걱정이 될 터인데.”
말은 그리 하면서도 또다시 입맛이 돌았다. 청조는 이런 자신이 겸연쩍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치스런 투정이나 부린다며 스스로를 꾸중하였건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또다시 입맛이 돌았다. 그런 청조의 망설임을 뻔히 눈치챈 도운이 앞으로 나섰다.
“그럼 힘들겠지만, 자네가 수고를 좀 해줄 텐가? 내 수고비는 섭섭지 않게 치를 것이니.”
“아닙니다, 나으리. 수고비라니요. 응당 쇤네가 만들어 올려야지요, 암만요.”
한사코 손사래를 치는 여인의 모습에 도운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맴돌았다.
“주막으로 가면 되겠느냐?”
“예, 나리. 주막에서 쇤네가 솜씨를 발휘해 보겠습니다요.”
여인은 커다란 배가 무거워 뒤뚱거리면서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막에 다다라 주모에게 사정을 이야기 한 후, 바로 저냐를 만들어 왔다. 군침이 도는 모양새였다.
“어서 한 점 먹어보아라.”
도운이 직접 젓가락을 들어 부아저냐 한 점을 청조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자신의 내자를 살뜰히 살피는 수려한 젊은 나리의 모습에 놀란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저런 양반 나리도 있구나, 새삼 놀라웠다.
“어떠하냐? 먹고 싶었던 그 맛이냐?”
“예, 그 맛입니다. 어찌 이런 맛을 내는가? 필시 자네만의 비법이 있는 게지?”
청조의 물음에 여인이 고개를 흔들며 겸양을 떨었다.
“아유, 미천한 쇤네에게 비법이 따로 있겠습니까요.”
“그래도 자네가 만든 저냐는 무언가 다르네. 씹을수록 쫄깃하고 고소한 것이.”
“비법까지는 아니고, 부아를 삶을 때 주막에서 만들고 남은 술지게미(술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넣어 삶으면 누린내가 나지 않고 육질이 조금 더 쫄깃해지긴 하지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찬모는 술지게미를 넣지 않고 부아를 그냥 삶았다고 합니다요. 그러니 굳이 비법을 말씀하라 하시면 술지게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래? 술지게미라, 누린내를 잡기 위해 넣는 청주대신 그 방법을 응용한 것이구먼. 술지게미라면 어차피 버리는 것인데, 버리는 것을 이용하여 음식을 더욱 맛있게 만들다니. 자네가 참으로 영리한 사람이 아닌가.”
“아이고, 아닙니다. 참으로 아닙니다요, 마님. 주막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익히게 된 것입지요.”
“아닐세, 정말 맛있어. 다른 이들이 한 것과는 다르네. 내 이 맛이 얼마나 생각이 났는지, 밤사이 잠을 통 못 이룰 정도였네.”
청조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식탐이 너무 많은 것도 흉이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사뭇 부끄러웠다.
“예? 저냐가 생각나 밤사이 잠을 못 이룰 정도라면, 입덧이 아닙니까요? 아무렴, 수태를 한 여인이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면 아기가 짝귀로 태어나는 것입죠. 그러니 귀한 아기씨를 위해 응당 쇤네를 찾아오셔야죠. 예, 당연합지요. 마님께서 수태를 한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쇤네가 더욱 정성을 들였을 것인데 말입니다요.”
여인이 멋모르고 떠드는 소리에 청조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수태? 회임을 말하는가?”
“예, 마님. 어찌하여 그러시는지. 아닙니까요? 이상하다. 잡숫는 모양도 그렇고, 딱 수태를 한 여인이 맞는데…….”
청조의 눈이 빠르게 깜박거리며 도운을 향하였다. 도운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서방님.”
“그만 돌아가자.”
도운은 여인에게 수고비로 얼마의 전냥을 쥐여준 후, 청조와 함께 궁으로 돌아왔다. 급하게 어의를 대령하라는 도운의 명에 애류당의 궁인들이 바빠졌다. 얇은 모시로 만들어진 발이 내려오고, 청조의 팔목에 감긴 명주실이 발을 건너 어의 영감의 손에 쥐어졌다.
“어떤가? 회임이 맞는가?”
도운의 초조한 명에 어의는 고개를 갸웃하다 어의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어 모시로 만든 발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은 어의녀가 청조의 손목을 직접 잡고 맥을 짚었다.
“어떠한가? 회임이 맞는가? 혹 어디가 미령한 것은 아니겠지?”
도운의 다그침에 어의가 먼저 진맥한 결과를 말하였다.
“전하, 경하드리옵니다. 분명 태맥이 잡히는 것이 유빈마마께옵서 회임을 하신 것이 틀림없사옵니다. 맥으로 보아 대략 달포가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어의녀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예, 어의 영감의 말씀대로 소인 또한 태맥을 느꼈사옵니다. 전하, 경하드리옵니다. 유빈마마, 경하드리옵니다.”
경하를 드리던 궁인들이 다들 물러간 조용한 처소에 도운과 단둘이 남은 청조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청조야, 괜찮은 것이냐? 왜, 기쁘지 아니한 것이야?”
“서방님.”
“그래.”
멍하니 도운을 바라보던 청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 아이였습니다.”
청조가 멍한 듯 조용히 속삭였다.
“그 아이?”
“예, 그 아이가 분명합니다.”
청조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도운은 가만히 청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산에서, 아이가 소첩을 찾아왔었습니다. 집채만 한 몸을 한 어린 호랑이가 이마에 왕(王)자를 짙게 새기고…….”
“왕? 그럼 사내아이가 아니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도운을 바라보며 청조는 눈만 계속 끔벅거렸다. 도운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청조의 복스러운 뺨을 어루만지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고 있던 청조는 이윽고 투명한 눈물을 쏟아냈다.
“그 아이가…… 소첩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재롱을, 재롱을 피웠습니다.”
청조가 점차 끅끅거리며 울기 시작하자 도운이 가녀린 어깨를 끌어와 품에 안고 다독거렸다. 그간 마음고생이 심하였으니 어찌 아니 서럽고, 어찌 아니 기쁠까.
“진정 산의 정기를 받은 사내아이가 잉태된 것이 아니냐. 어찌나 성격이 급한 놈인지, 달포밖에 안 된 놈이 벌써부터 저냐가 먹고 싶다고 어미를 졸라대다니.”
어미를 졸라 대었다는 도운의 한마디가 청조의 귓가를 맴돌았다. 어미를, 어미를 졸랐다고. 청조는 아직 태도 나지 않는 배를 어루만졌다.
“왕(王)자를 그리 자랑스럽게 이마에 떡 그리고 나타났다니, 분명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영리한 사내아이일 것이다.”
청조는 도운의 허리를 꼭 부여잡고 그의 품에 뺨을 비볐다. 꿈속에서 들었던 아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랜 시간 그곳에서 홀로 기다렸을 아이가 고맙고 기특하여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도운의 손길에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길이 겹쳐 있는 것만 같았다.
“고맙다, 청조야.”
진심이 담긴 도운의 한마디에 청조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청조의 까만 정수리에 뺨을 기댄 도운에게서 웃음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도운의 가슴팍이 청조가 흘리는 눈물로 촉촉이 젖어갔지만, 도운은 청조의 몸을 더욱 꽉 끌어안고 웃기만 했다.
지어미의 울음소리가 어찌 이토록 어여쁠 수가 있는가. 너무도 어여쁘고, 또 어여쁜 나만의 여인. 나의 청조, 청조야.
외전 _제자리
* * *
첫눈이 온다는 소설(小雪)에 들자 거짓처럼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나라의 가장 북쪽, 척박한 함경도의 땅은 이미 대한에 들어선 듯 그 추위가 너무 혹독하고 가혹할 정도였다. 함경남도 단천의 관아에서 생활하는 예화는 하루 종일 광산에서 일하는 관노들에게 끼니를 만들어 날랐다. 무식한 그들이 ‘중전마마, 중전마마 여기 물 좀 주시오.’ 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욕지기가 올라왔다.
더러운 것들.
중전인 자신을 감히 주막의 주모 부르듯 부르는 소리에 울화가 치밀 대로 치밀었다. 예화는 그들이 먹고 남은 더러운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그들의 누더기 같은 옷을 하루 종일 빨아야 했다. 벌써부터 얼어 버린 냇가에서 세답을 하고 나면 손이 떨어져 나간 듯 감각조차 사라지곤 했다. 세답거리가 없는 날에는 그들의 옷을 꿰매고 더러운 버선을 꿰매야만 했다.
그 밖에도 관아를 소제하거나 관비들과 함께 광산의 돌을 나르는 등, 일은 한도 끝도 없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루의 노동으로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예화는 오늘도 허리 한번 펴지 못한 채 하루 종일 일만 하다,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여인들 다섯이 함께 기거하는 관노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궁을 떠나 이렇게 지낸 지 벌써 한 해가 됐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반항도 많이 했다. 감히 중전인 저에게 관비나 할 일들을 시키는 저것들의 행패에 그리는 못 한다고 버티었다. 자신은 관비가 아니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광에 갇혀 며칠씩 굶어야 했다.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관노와 관비들의 더러운 옷을 빨던 그 순간, 무너진 자존심에 얼마나 울었는지 몰랐다.
자신의 곱디곱던 손은 끝없는 노동으로 거칠어지고 손톱 끝은 다 갈라져 버렸다. 꽤나 살이 빠져 버린 홀쭉한 뺨은 추위에 얼어 빨갛게 터져 있었다. 오늘따라 몸이 으슬으슬하고 잔기침이 나왔다. 백정으로 살던 어린 시절은 차라리 인간답게 사는 것이었다는 걸, 예화는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백정이라는 것이 기실 동리를 떠나지만 않으면 불편한 것은 없었다. 아버지가 도축한 고기와 그 가죽을 판 이문이 꽤나 좋았기에 진수성찬은 아니더라도, 배곯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머니는 늘 따뜻한 밥을 고봉으로 퍼 주었고, 아버지를 돕는 힘든 일은 오라버니의 몫이었다.
아버지가 도성으로 떠난 후부터 오라버니는 자신을 더욱 살뜰히 챙겨주었다. 가끔씩 생기는 맛있는 당과도 모다 누이에게 양보해 주던 오라버니였다. 밤이 내리면 누이가 잠들 때까지 등에 업고 자장가를 불러주던 다정한 오라버니였다. 자신을 동생이자 마치 그의 딸인 듯 키워주었다.
허나, 이제 그것은 다 옛일이었다. 백정이 가장 더럽고 천한 신분이라고 누가 그러던가. 아니, 아니었다. 백정보다 훨씬 아래까지 추락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삶이었다. 차라리 주어진 삶에 만족하였으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보지 못했더라면 이런 지옥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다.
“마마! 중전마마! 내 이것 세답해 놓으라고 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이리 더러운 것입니까?”
앙칼진 언년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듯했다. 자신의 삶이 지옥으로 변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저것의 패악이었다. 속이 너무 쓰렸다.
“정말, 내 오늘 이것 입어야 한다고 그리 말을 했거늘, 누구 덕에 입에 풀칠하고 사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시옵니까? 마마 때문에 애꿎은 저까지도 이 척박한 함경도에서 이리 고생하는데, 정녕 미안하지도 않사옵니까? 그것을 안다면 좀 잘하시지요!”
“…….”
“흥, 마마라 불러주니 아직도 저가 귀한 마마인 줄 아는가 보지?”
들으라는 듯 작은 소리로 짜증스럽게 웅얼거리는 언년의 말을 못 들은 척해야 하는 것이 제일 힘겨웠다. 언년은 짜증을 부리며 다른 옷을 걸쳐 입고 방을 나섰다. 이곳에 와 보니, 노비 신세에도 상중하의 계급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권력과 암투가 존재했고, 불만과 질시가 존재했다. 언년은 이곳 관비들의 계급 중에서도 권력을 틀어쥔 가장 상급이었다.
그것을 위해 언년은 광산에서 노비들을 감시하는 관아의 나졸들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보냈었다. 그중 몇 명의 사내를 거쳐, 얼마 전 나졸보다 계급이 높은 아전 하나를 꾀어내는 데 성공했다. 지금쯤 어둠을 틈타 아전들의 숙소인 질청으로 괭이 새끼마냥 숨어들고 있을 것이었다. 아전이 지방의 말단 관리라지만, 권력은 권력이었다. 그 권력을 등에 업은 언년은 상전이 따로 없었다.
같은 관비들을 자신의 하녀 부리듯 부리고, 성질을 부리며 안하무인으로 굴어댔다. 자신에게 배당된 노동은 나 몰라라 하고 낮이면 방에서 잠만 잤다. 하지만 관비 중에서도 실세가 돼 버린 언년에게 대들 관비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다른 관비들은 중간 계층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박을 받는 예화의 신세는 노비들의 계급 사이에서 가장 밑바닥인 하급 신세였다.
언년이 노동에서 빠지면 당연히 다른 관비들의 몫이 가중되는 것이었다. 언년이의 행실에 불만이 많은 관비들은 예화를 더욱 닦달했다. 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예화는 종종 실수를 했고 손도 느렸다. 아니 그래도 미운털이 콱 박혀 있는데, 거기에 언년의 일까지 더해지자 노비들은 대놓고 예화를 구박했다.
조금이라도 일을 늦게 끝내고 관노청으로 돌아올 때면 감자 한 알을 얻어먹기도 힘들었다. 저녁 식사로 나온 자신의 몫을 다른 관비들이 다 같이 나눠 먹고 모른 척했다. 그러다 보니 늘 배가 고팠다. 간혹 언년의 기분이 좋을 때면 던져주는 주전부리를 은근히 바라고, 점점 언년의 비위를 맞추게 됐다. 그런 자신이 실로 비참했다.
오늘도 배가 고팠다. 기실 배도 고팠지만 감모라도 오는 것인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이럴 때면 오라버니가 더욱 보고 싶었다. 늘 자신을 보호해 주고 귀애해 주시던 오라버니.
비좁고 추운 방에서 여인들과 나란히 누워 있던 예화는 익태를 그리워했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쏟아지던 구타를 온몸으로 막아 주시던 오라버니.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전전긍긍, 노심초사 저를 아끼어 주시던 오라버니.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다음날 예화는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두통도 있는 것이 정녕 감모에 걸린 듯했다. 허나 몸이 아프다 해서 편히 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예화가 꾸물거리자, 같은 처소를 쓰는 여인들이 닦달하기 시작했다.
“이보시야요, 중전마마. 바삐 나올 것이지 뭣 하고 있는 것임매? 참나, 속 터지오, 속 터져.”
“아, 중전마마 상관 말고 그냥 빨리 나오시라우. 늦겠시오. 거, 중전마마께서도 얼른 채비하고 나오시오. 우리 먼저 갈라니까.”
감히 저에게 방자하게 구는 건방진 관비들에게 대답 따위 하지 않았다. 옆을 보니 언년은 아직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히 이 시각에 아전의 방에서 나오다 군수에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크게 경을 칠 것을. 흥, 차라리 발각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괘씸한 년이 풍기문란죄로 장이라도 맞아야 정신을 차릴 테지. 겨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오는데 동헌 쪽이 시끌시끌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관노들과 아전, 나졸들까지 모다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차가운 동헌 바닥에 놓인 거적때기 위에 피투성이로 발가벗겨진 여인과 남성이 누워 있었다. 겨우 얇은 종이 한 장만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두 남녀의 아랫도리만 아슬아슬하게 가려놓고 있었다. 사내는 날카로운 것에 찢긴 것인지, 몸이 난장판으로 난도질 돼 있었다.
그 흉악한 몰골에 충격을 받은 예화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사내의 곁에 누워 있는 여인의 시신은 더욱 끔찍했다. 누군가에게 심하게 구타를 당한 듯,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흙바닥을 기며 도망이라도 했던 것인지, 이 매서운 한파에 버선조차 신지 않은 여인의 맨발은 온통 흙으로 지저분했다. 반항을 하다 맞은 듯 벌거벗은 온몸과 팔은 울긋불긋하게 부어 있었다. 하지만 여인의 시체가 끔찍한 이유는 다리가 이상한 모양으로 꺾여 있는 것 때문이었다.
너무나 무서운 몰골로 죽어 있는 여인에게서 눈을 떼던 예화는 여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는 순간 충격으로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얼마 전, 몸을 대주던 나졸에게 받았다며 얇은 옥가락지를 손에 끼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언년의 모습이 생각났다. 겨우 이따위 하품이나 주었다며 나졸에 대한 불만을 짜증스럽게 늘어놓았었다.
그 순간 나졸들에 의해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사내가 끌려 들어오고, 곧 동헌 대청에 군수가 등장했다.
“네가 저 두 남녀를 끔찍하게 살해하였느냐?”
“예, 사또.”
“왜 그랬느냐?”
얼굴을 온통 핏물로 뒤덮은 사내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린 것인지,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힘껏 부라렸다. 눈빛이 정상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사또, 조년이 실로 죽일 년이었슴다.”
“어찌하여 죽일 년이냐?”
“조것이 방댕이를 흔들어 가며 소인의 혼을 쏙 빼어 갔슴다. 괜히 덥다며 소인의 앞에서 옷고름을 훌렁훌렁 풀어헤치는데 고것이 어찌나 사내의 음심을 자극하는지, 지가 그만 홀랑 넘어가 버렸지 말임다. 콧소리는 또 얼마나 앵앵거리는지, 젖가슴을 들이대며 콧소리로 소인을 꾀어냈슴다. 소인이 그 속살 맛에 푹 빠져서는, 크흑. 소인, 조년을 위해 다 했소꼬마. 저것의 꾐에 빠져 소인의 늙은 홀어머니의 하나뿐인 옥가락지까지 훔쳐다 주었슴다. 한데…… 조년이 어찌나 이놈 조놈이랑 붙어먹는지…….”
갑자기 억울한 듯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는 사내를 보고 군수는 혀를 차며 시체를 바라봤다.
“그래서, 화가 나서 아전까지 죽였느냐?”
“예, 사또. 소인이 죽였슴다! 조것들이 아랫도리를 딱 붙이고 헉헉대는 현장을 보니까 참으로 분하고 화가 나서, 내 이 연놈들을…….”
엉엉 울어대는 나졸을 보던 관아의 노비들과 포졸, 아전들까지 혀를 차며 사내의 아둔함과 잔인함을 욕했지만, 한편으로는 순정을 짓밟힌 그를 동정했다. 잔인한 살인범인 사내를 향해 아낌없이 동정하던 그들이 언년을 두고는 욕설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이 언년을 향해 차갑게 비난하는 말들이 비수가 되어 예화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허이구, 그 상전에 그 종자 아니오? 예전에 중전마마랑 그 식솔들이 주제도 모르고 날뛰더니, 저거이 딱 지 상전 하는 것 보고 고 꼴값을 떤것입찌비. 아주 잘 뒈졌네.”
“그르게. 백정 주제에, 하늘 같은 우리 임금님의 은혜를 등에 업고 그 꼴값을 떨어대더니, 조 년이 딱 그기 따라 하다 뒈진 것이지. 아주 그냥, 꼴 보기도 싫었는데, 잘 뒈졌지비. 내 언제가 저리 죽을 줄 딱 알았꾸마. 내 이 관아에 사십 평생을 살면서 저런 애미나이 한두 번 본 거이 아님매.”
“거기 말이 옳소.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재, 괜히 욕심부리다 저리 뒈졌지비.”
혀를 차고 침을 뱉으며 언년을 흘기는 관비들의 눈에는 일말의 동정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옆을 보니 나졸들과 관노들 역시 같은 말들을 하고 있었다. 잘 죽었노라 사방에서 키득거리는 눈빛들, 그리고 흉측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나자빠진 언년의 모습에 예화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며칠을 앓아누운 것인지,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밤낮이 바뀌어 있었다. 앓는 내내 꿈속에서 오라버니를 만났다. 차갑고 음습한 검은 동굴 속에 홀로 갇혀 있던 오라버니는 죽은 듯 누워만 있었다. 두 눈은 푹 꺼지고, 몸은 꼬챙이처럼 말라 있었다. 시체처럼 변해 버린 오라비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예화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드르렁’ 우렁차게 울리는 코골이 소리에 예화는 너무 놀라 몸이 경직돼 버렸다. 어두운 밤, 곁에 누운 노비의 코 고는 소리에도 놀랄 정도로 예화는 불안감에 빠져 있었다.
허옇게 각질이 일어난 마른 입술이 팽팽하게 당겼다. 언년의 모습이 실로 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사내의 알량한 권력에 철썩 붙어 으스대던 꼴이라니. 관아라는 작디작은 세상에서의 우습고 초라한 감투를 쓰고, 교만을 떨어대다니. 호랑이 없는 곳에서 여우도 아닌 한낱 하룻강아지가 왕 노릇 하는 꼴이었다.
문득 저는 어떠했던지 의문이 들었다. 백정의 딸로 태어나 세상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중전마마가 되었다. 여인들 중 가장 신분이 높고 권력이 높은 여인이 되었었다. 이런 작은 지방 관아가 아닌 구중궁궐에서, 중전이라는 감투를 쓰고 나라를 들었다 놨다 교만을 떨었다. 하지만 그랬던 저 역시도, 호랑이 없는 곳에서 하룻강아지가 왕 노릇 하는 꼴과 같았다. 언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인가? 언년을 향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지껄이던 여인들의 말들이 떠올랐다. 왜?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맛보고 싶고 맛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먹고자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사람으로 태어나 야망을 가지고 꿈을 꾸는 것이 무슨 잘못이냔 말이다.
백정도 사람이었다. 백정을 천하다 욕하는 저들의 잘못이지 사람답게 살고자 노력한 저희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예화는 무릎을 끌어안고 엄지손톱을 물었다. 관의 모든 노비들도 나졸들도 모다 언년을 빗대어 은근히 저를 비웃고 욕하고 있었다.
언년이 욕을 먹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간 언년이의 교만하고 못돼먹었던 행실에 저도 이를 갈았으니까. 허나 문득 깨달았다. 저 관노들의 말대로, 교만하고 방자하기까지 한 언년의 모습은 기실 저의 모습과 같았다. 어릴 적부터 제 옆에 찰싹 붙어서 자신을 흉내 내던 아이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너무 무서웠다.
그리 많은 것을 욕심내었지만, 이 추운 날 결국 버선 한 짝 건지지 못하고 맨발로 저승길을 걷게 되었다. 만인 앞에서 벌거벗겨진 채 흉측한 모습으로 죽어 나자빠진 언년의 모습이 꼭 제 미래의 모습 같았다. 그리 끔찍하게 맞아 죽었는데, 사람들은 동정은커녕 잘 뒈졌노라 침을 뱉으며 비웃었다.
언년의 못된 행실에 지옥 같았던 지난 한 해가 떠오르자 문득 청조가 생각났다. 산에 올랐던 자신과 언년의 다리를 주무르던 그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런 푸대접을 받고 멸시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분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었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성의를 다하였었다. 그런 청조에게 자신이 뭐라 충고를 했었는지 연이어 떠올랐다.
‘주어진 천명대로 소임을 다하며 충실히 살거라.’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지 않은 것이 잘못이 아니었다. 남의 것을 뺏어 먹은 것이 잘못이었다. 백정으로 태어나 높은 자리를 꿈꾼 것이 잘못이 아니었다. 남의 자리를 빼앗았기 때문에 잘못이었다. 우습게도 궁을 떠나기 전, 도운 오라버니가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남의 누룽지를 욕심내지 말거라.’
그 말이 우습기도 하고 설움이 복받치기도 하여 예화는 눈물을 터뜨렸다. 잘못으로 얼룩진 과거를 떠올리며 예화는 그렇게 울다 잠이 들었다. 며칠을 더 앓으며 계속 꿈을 꾸었다.
꿈속에 죽은 언년의 얼굴이 저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끔찍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거적때기 위에 누워 있는 저를 둘러싸고 사람들은 침을 뱉으며 박수를 쳤다. 그 꿈에서 깰 때마다 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몸을 추슬렀다. 몸이 조금 우선해지자 예화는 군수를 만나러 동헌에 들었다.
* * *
도운은 사정전에 들러 이천에서 재환이 보낸 장계를 읽고 있었다. 장계에는 이천 군수가 해마다 진상되는 도자기를 빼돌려 온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천 군수는 관아의 하급 관리들과 결탁하여 조직적으로 왜구와 밀무역을 시도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도예가들을 착취함은 물론이고 몇몇 도예가를 아예 왜에 팔아먹었다고 적혀 있었다.
이런, 말려 죽일 놈들이. 감히 뉘의 백성을 착취하고 팔아먹어! 염병할 후레자식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괄괄한 성질이 그대로 욱하고 올라왔다. 당장 재환에게 보낼 교지를 휘갈겨 쓰고 있던 도운에게 상선이 조용히 다가왔다.
“전하.”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듣겠다! 상선이 보다시피 과인이 지금 매우 바쁘오. 내 이것들의 사지를 그냥!”
“함경남도에서 서신이 한 통 왔사옵니다.”
“함경남도?”
“예, 중전마마께서 보내신 서찰이옵니다.”
중전이라는 말에 도운은 휘갈기던 붓놀림을 잠시 멈추고 상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목판 위에 놓인 서찰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며 서안을 톡톡 두드리다 결국 서찰을 펼쳤다. 자신의 안부를 묻는 글로 시작된 긴 글이었다. 내용을 모다 읽은 도운은 한숨을 내쉬고는 교지를 마저 써 내려갔다.
늦은 오후, 도운은 잠시 짬을 내어 애류당에 들렀다. 장지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니, 손에 바느질거리를 든 청조가 머리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아이의 배냇저고리를 만들고 있던 모양이었다.
회임을 한 이후 청조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종종 이리 잠이 들었다. 머리를 꾸벅거리며 잠든 모양새가 어찌나 어여쁜지 도운은 청조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염없이 청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머리를 크게 까닥거리다 놀란 청조가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오셨어요?”
“아까 왔다.”
“그럼 깨우지 그러셨습니까?”
도운은 미소를 한가득 피우고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부러 깨우지 아니했다. 네가 잠든 모양새가 꼭 파랑새마냥 어여쁘니 내 한참을 보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이리 뚱뚱한 파랑새가 어디 있답니까?”
“요기 내 앞에 있지 않느냐? 나의 청조(靑鳥)가.”
도운은 새침하게 웃는 청조에게 입맞춤을 하고는 복스럽게 살이 오른뺨을 살살 만졌다. 청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예화의 서찰이 떠올랐다.
‘이제 와 돌이키니, 소인의 죄가 태산의 크기만큼 크고 그 무게만큼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사옵니다. 분수를 깨달아라, 죄인의 첩지를 환수하지 않은 주상전하의 깊은 뜻을 이제야 이해하겠나이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다 생각하였는데, 아무도 올려 봐주지 않는 참으로 허울뿐인 중전이었습니다. 허니 그 망극한 칭호로 불릴 때마다, 백만 개의 바늘이 소인의 가슴을 찌르는 듯하옵니다. 실로 부끄러움과 비참함으로 괴롭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사옵니다. 하여 감히 전하께 용서를 구하지는 않겠지만, 일말의 동정이라도 구하고자 서찰을 띄웁니다. 부디 이제 그만 죄인의 첩지를 환수하여 주시옵소서. 이대로 관비로 살다 관비로 소임을 다하며 충실히 살게 해 주시옵소서. 염치없는 소원이나, 죽기 전 오라버니를 한 번만 뵙게 해 주시옵소서. 이 두 가지 청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사옵니다.’
진정 예화가 잘못을 깨닫고 쓴 서찰인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도운은 작게 하품을 하는 청조를 보료에 눕혀 주고는 금침을 잘 덮어주었다.
“서방님, 서방님…… 소첩이 너무 졸립니다. 우리 아기 호랭이가 자꾸만 함께 자자고 소첩을 조릅니다.”
“그럼 호랭이 녀석이랑 잠깐 눈 좀 붙여라. 내 저녁에 다시 들를 것이니, 그때 함께 수라 들자.”
“예, 서방님…… 어디 가지 마시고…… 조금 있다 소첩 보러 꼭 오시어요. 소첩이 서방님 좋아하시는 맛있는 반찬도 집어 드리고…… 잠도 재워 드릴 것입니다.”
“그래, 알겠다. 꼭 올 테니 그때까지 잘 자거라.”
대답도 못 하고 청조는 잠이 들었다. 잠든 청조의 얼굴을 쓰다듬다 금침 사이로 손을 넣어 청조의 둥근 배를 만져 보았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지고 있는 배를 슬슬 어루만지는 순간 강한 태동이 느껴졌다. 아비의 손길을 느꼈는지 뱃속의 호랑이가 앞발을 뻥뻥 차댔다. 처음 느끼는 아이의 존재에 도운은 깊은 전율을 느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고, 비쭉 비쭉 스며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어여쁜 아이를 쓰다듬듯, 태동이 느껴지는 부분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도운은 미소 지었다.
“호랭아, 호랭아. 조금만 기다리거라. 이 아비가 너에게 가장 완벽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줄 것이다. 네 어머니와 너를 세상에서 가장 귀한 여인과 아이로 만들어 줄 것이다. 봄에 네가 태어나거들랑 이 아비가 교태전 후원을 구경시켜 주마. 이 아비가 한 손에는 너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네 어머니의 손을 잡을 것이다. 계절마다 화원들을 불러다 우리 셋의 다정한 모습을 그려 기록하게 할 것이다. 고것들을 엮어다 화첩으로 만들어 후에 네가 크거들랑 이 아비가 다 보여 줄 것이다. 어떠냐? 기대가 되느냐?”
기대가 된다는 듯, 앞발이 뻥뻥 배를 두드렸다. 강한 태동을 느낀 도운은 혼자 키득거리며 웃다 말을 이었다.
“네가 좀 더 크면 이 아비와 함께 후원에서 봄나물을 캐자. 이 아비가 봄나물을 제법 잘 캐니 너에게도 캐는 법을 모다 알려 줄 것이다. 그것 캐서 네 어머니께 된장 조치 끓여 달라 조르자. 그리고 여름에는 네 어머니를 위해 교태전 후원에 금불초를 심자. 너와 내가 심어 준 금불초를 보면 네 어머니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그리고 또 네가 더 크거들랑 가을에는 사냥을 데려가 주마. 사냥 나가서 잡아 온 토끼고기로는 네 어머니께 만두를 빚어 달라 하자. 네 어머니가 끓인 만둣국만큼 맛난 것이 세상에 없다. 또 털은 잘 무두질한 후 배자 만들어 달라 하여 겨울에 함께 입고 다니자꾸나. 네 어머니는 눈처럼 하얀 토끼 잡아다 드리고, 너랑 나랑은 새벽빛 같은 회색 토끼 잡아다가 배자 만들어 입자.”
대답이라도 하는 것인지, 다시 발길질이 뻥뻥 느껴졌다.
“요, 아기 호랭이가 아비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으니 참으로 기특하지 않느냐.”
도운은 혼자 호탕하게 웃으며 청조의 배를 쓰다듬었다.
* * *
겨우내 얼었던 눈이 녹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함경도는 여전히 너무 춥고 강풍이 불었다. 추위에 곱아 버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예화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함경도에서도 가장 끝인 함경북도는 자신이 있던 함경남도보다도 훨씬 춥고 척박한 것이 얼어 버린 땅 같았다.
예화는 광산 주위에 모여 있는 관노들의 초가에서 홀로 떨어진 외딴 초가를 찾아갔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의 모습은 초가라기보다는 허술한 움막에 가까웠다. 곧 쓰러질 것만 같은 움막을 바라보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대충 입구를 막아 놓은 거적때기를 들추자 안에서 콜록거리는 잔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은을 제련하는 불길에 움막 안이 춥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홀로 은을 제련하는 사내의 뒷모습은 너무 깡마르고 초라했다.
“……오라버니.”
목이 꽉 메인 여인의 소리에 일을 하던 사내의 등이 움찔했다.
“오라버니.”
잠시 멈추어 선 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예화는 사내의 얼굴을 보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푹 꺼진 검은 두 눈, 두 뺨, 메말라 갈라진 하얀 입술에 백지장만큼이나 창백한 얼굴. 곧 쓰러질 듯 보이는 사내는 자신의 기억 속 오라버니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예…… 예화, 화인 것이냐?”
“예, 화입니다. 오라버니의 누이가 왔습니다.”
“네가 여기는 어떻게…….”
“주상전하께 청을 넣었습니다. 첩지를 환수하고 오라버니를 한 번만 뵙게 해 달라 마지막 청을 드렸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청을! 첩지를 환수하다니! 후일을 기약하려면……!”
“오라버니. 처음부터 저희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만 욕심을 버리세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간청하는 예화의 모습에 결국 익태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모다 예화를 위해서였다. 어여쁜 자신의 누이를 위해서였다. 저자에서 발길질을 당하던 그때, 그 누구도 이 어여쁜 아이에게 발길질을 못 하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머리에 흐르는 자신의 피에 대고 맹세했었다.
겨우 양반 계집아이가 하고 있던 그까짓 댕기가 부럽지 않게, 더 귀하고 화려한 것들로 치장해 주고 싶었다. 국혼을 치를 당시, 예화의 머리 위에서 화려하게 빛나던 금빛 화관에 얼마나 마음이 흡족하였었던가. 가르마 중앙에 놓인 화려한 첩지가 아름다웠었다. 붉은 비취로 만든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잠, 아름다운 떨잠을 누이의 머리에 모다 꽂아주었다. 겨우 그런 댕기 따위가 아닌 모다 값지고 진귀한 것들이었다.
자신의 누이를 가장 고귀한 여인의 자리에 올리고자 많은 죄를 지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죄의식도 없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으니 이제 모다 되었다 생각했다. 누구도 이 아이를 괴롭힐 수 없을 것이다 생각했으나, 자신의 어여쁜 누이는 행복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그가 더욱 증오스러웠다. 예화에게서 서방을 뺏어간 그 작은 여인이 증오스러웠다. 한데 그것이 다 나의 욕심이었던가. 욕심을 버리라는 예화의 말에 익태는 자신의 안에서 무엇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깨달았다. 멍하니 눈물을 흘리는 익태에게 다가온 예화는 그의 앙상한 몸을 안아 주었다.
“전하께 오라버니를 한 번만 뵙게 해 달라 청을 넣었는데, 전하께서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명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제 이 누이가 오라버니를 보살펴 드릴 것이어요. 지금껏 오라버니께서 해 오신 것처럼, 이제 제가 해 드리렵니다.”
자신을 안아 주는 누이를 마주 안고 익태는 눈물을 쏟아내었다. 납의 사기가 자신의 몸을 천천히 갉아 먹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큰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 제 분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지르며 발악을 하던 그는 소리를 지를 때마다 어김없이 장 서른 대를 맞았다. 결국, 쇠약해진 몸은 장독을 이기지 못하고 겨우내 죽어 버렸다.
아버님 역시 겨우내 모진 노동에 힘겨워하다 낙석사고로 치료 한번 변변히 받지 못하시고 목숨을 잃으셨다. 어머니는 몇 년 전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관비가 되어 멀리 충청도로 내쳐진 안사람과의 사이에는 정도 자식도 없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예화뿐이었다. 차라리 백정으로 살았으면, 몸이라도 건강했을 것을. 몸이라도 건강하여 열심히 일하였으면, 이 어여쁜 아이를 좋은 사내에게 시집이라도 보낼 수 있었을 것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을. 후회의 눈물이 한없이 흘렀다.
* * *
찬란하게 빛나는 청명한 가을에 백성들은 환호했다. 연이어 든 풍년에 곡식은 넘쳤고, 살림은 풍요로웠다.
이른 봄, 어진 임금님께서 결국 악랄했던 중전의 첩지를 회수하시고, 국혼을 무효화시키셨다. 악의 축을 격파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니 나라가 튼튼했고, 중전마마께서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애민의 마음이 깊으시니 백성들의 삶이 풍요로웠다.
바야흐로 태평성대의 시대였다. 봄에 태어나신 원자마마, 그리고 중전마마와 함께 고양 행궁으로 능행을 떠나시는 왕의 행차가 있었다. 화려하고 긴 행차가 지나갈 때까지 백성들은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위엄 있는 주상전하와 아름다운 중전마마의 용안을 한 번이라도 뵙고 싶어 곁눈질을 하느라 바빴다.
그중엔 왕의 용안을 가까이서 뵌 섬골에 사는 막돌의 자신만만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을 보고 헛소리를 한다고 지껄이던 놈들은, 이제 와 자신을 볼 때마다 저희들의 입술을 스스로 찰싹 소리가 울리도록 쳐댔다. 막돌은 제 옆에 듬직한 아들들을 데리고 왕의 행차에 환호했다. 그들의 곁에는 도운이 적선을 해 주었던 오누이와 아이들의 부모도 보였다.
깨끗한 무명옷을 입고 서 있는 아이들에게서 예전의 비쩍 곯은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살이 통통히 올라 입을 벌리고 임금님의 용안을 훔쳐보던 아이들의 눈이 놀라움으로 점점 커졌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억억거리다 겨우 숨통이 트인 여인은 곁에 선 서방에게 뭐라 뭐라 큰 소리로 떠들었다. 하지만 환호하는 백성들의 소리에 묻혀 여인이 떠드는 소리는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저 멀리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행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행색은 남루했으나 풍채는 좋았고, 얼굴에는 비루함이 없었다. 오히려 귀티 나는 잘생긴 얼굴에 혈색도 좋았다. 얼마 전 잠시 도성에 돌아온 재환은 환호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행차를 바라보았다. 가교 처마에 매달린 흔들리는 아름다운 수실 아래로 청조의 얼굴이 보였다.
원자를 직접 품에 안고 화려한 가교 위에 앉은 여인에게서는 여전히 빛이 흘렀다. 품에 안은 아이를 너무도 귀하게 바라보는 얼굴에선 한층 성숙한 어머니의 다정함이 엿보였다. 앞에서 말을 직접 타고 가던 도운이 가교로 다가서자 가교 안에서 청조가 몸을 내밀었다. 청조의 화사한 얼굴을 바라보다, 잠이 든 세자의 얼굴도 흐뭇하게 바라보며 행차를 이어가던 두 사람이 점점 멀어졌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에 재환은 마지막 남은 마음의 부스러기를 털어내었다. 부디 늘 행복하소서.
외전 _소동
* * *
“지금 도성에 호랑이가 출몰하였다 하였는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호랑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출몰하니 백성들이 두려움에 집 밖을 나서기조차 꺼리고 있사옵니다.”
“밤이 아니라, 벌건 대낮에도 호랑이가 출몰한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고개를 조아리고 선 착호장(착호갑사의 수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틀째, 민가를 발칵 뒤집어 놓은 호랑이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하다니. 자신의 무능을 탓하는 착호장은 감히 왕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예, 전하. 이는 군의 기강을 바로잡지 못하여 경계를 느슨하게 한 착호장의 책임이 크옵니다. 착호장을 파직하시고, 새로운 착호장을 임명하여 당장 호랑이를 포획하도록 명하여 주시옵소서.”
대신들의 고하는 소리에 도운은 잠시 고민하였다. 밤이 아니라, 낮에도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말이 심히 거슬렸다. 봄이라 산에 먹이가 모자란 것도 아닐 텐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호랑이가 민가에 출몰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번 일은 산의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산에 살아야 할 산짐승이 민가로 내려오게 한 착호장의 책임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아직 호랑이에게 당하여 부상을 입은 자가 없고, 착호장만큼 호랑이를 능히 알고 다룰 수 있는 자가 없으니,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어 호랑이의 종적을 찾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착호장은 민가에 호랑이를 잘 아는 사냥꾼이 있거든 그들의 도움도 주저 없이 받도록 하라. 하루빨리 호랑이를 포획하여 백성들의 시름을 덜게 하고,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 그대의 임무인 것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전하.”
하지만 그 후로도 며칠째 계속된 호랑이 출몰로 궁 안팎이 소란스러웠다. 착호장이 이끄는 착호갑사(범을 잡기 위하여 배치하던 군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신출귀몰한 호랑이는 도성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며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궁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착호갑사를 이리저리 따돌리는 신출귀몰한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는 부풀리고 부풀려져 풍문처럼 떠돌았다. 궁의 높은 담장 정도는 단번에 뛰어넘는 무시무시한 괴력과 사람을 홀리는 여우 같은 능력을 가진 호랑이 이야기에 궁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당장이라도 호랑이가 궁 담장을 넘어와 자신들을 물어 가면 어찌하나, 어린 생각시들과 나이 어린 나인들의 동요가 특히 컸다. 저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걱정하는 호랑이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영의 오동통한 뺨이 걱정으로 우물거렸다.
“청아.”
“예, 저하.”
“호랑이가 무서운 거야?”
“저하, 어찌 그것을 물으시옵니까?”
아이의 동그랗게 빛나는 눈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서렸다. 영은 한참 골똘한 표정으로 청을 바라보다 천천히 대답 했다.
“내관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직 나이 어린 영의 혀 짧은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청이 익살맞은 미소를 지었다.
“예, 저하. 호랑이는 아주 무서운 것이옵니다.”
“청이 너는, 본적이 있느냐?”
“호랑이 말씀이시옵니까?”
“응.”
호기심에 가득한 눈동자가 청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보았지요.”
“어찌 생겼어? 무서워?”
“예, 무섭지요. 호랑이는 저 높은 산을 다스리는 맹수 중에 맹수이옵니다. 저하께서 개를 본 적이 있으시지요? 호랑이는 개처럼 네발로 걸으며, 그 크기가 황소만 하여 장성한 사내의 가슴까지 닿지요. 허나 그것이 뒷발로 이렇게 사람마냥 일어서면, 그 크기는 사내의 키를 훌쩍 넘어가 버리는 것이옵니다.”
“참말?”
“예, 참말이옵지요. 온몸에는 노란 털이 수북이 덮여있고, 먹물로 그려 넣은 것만 같은 검은 줄무늬가 온몸에 퍼져 있습니다.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할퀴는 힘이 얼마나 장한지, 그 커다란 발로 이렇게 한번 할퀴면 나무토막도 움푹 패어버릴 정도로 강하옵니다. 그리고 그것의 이빨이 어찌나 크고 뾰족한지, 천둥과 같은 울음소리를 울리는 그것에게 한번 물리면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손을 들어 할퀴는 흉내를 내고 입을 크게 벌려 ‘앙’ 무는 흉내까지 내며 무섭게 설명하는 청의 모습에, 어린 영의 눈썹이 가운데로 한껏 모여들었다.
“그럼 음, 백성들이 죽으면, 어쩌나?”
눈썹을 모으고 걱정하는 아직 어린 저하의 모습에 청은 고개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옵소서. 전하께서 백성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옵니다.”
“아바마마께서?”
“예, 저하. 전하께서는 누구보다 용맹하신 분이시옵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 하나, 전하께는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곧 호랑이를 잡으시어 저하와 백성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옵니다.”
“어마마마도?”
“아무렴요.”
“할마마마도?”
“예에, 그러하옵니다.”
“그럼, 청이 너도?”
“예, 소인도 전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옵니다. 허니 걱정을 마시옵소서.”
“으음.”
여전히 걱정이 가시질 않는 것인지, 솜털 같은 눈썹을 찡그린 영은 앙다문 입술을 오물거렸다. 영은 그날 저녁 교태전에 들러 청조의 품을 파고들었다. 곁에서 유모가 궐내 법도를 들먹이며 말렸지만, 영은 더욱 청조의 품을 파고들었다. 청조는 송구함에 머리를 조아리는 유모를 내보내고 영을 품에 꼭 안아 다독여 주었다.
“네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마침 처소에 들어오던 도운이 청조의 품에 매달린 영을 보고 타박하듯 말하였다. 회임으로 배가 나온 청조의 몸이 아니 그래도 무거울 것인데, 아무리 작은 아이라고는 하나 저리 무릎에 올리고 품고 있으면 힘이 부칠 터였다.
“그리하지 마시어요. 아직 어린아이옵니다.”
“네가 너무 힘들어서 아니 된다. 영이 무엇 하느냐, 어서 내려오너라.”
영이 도운의 눈치를 보며 청조의 무릎에서 내려와 혀 짧은 소리로 예를 다하였다.
“소자, 아바마마를, 뵈옵니다.”
“네가 아직 나이 어리다고는 하나, 이 무슨 어리광이냐. 네가 이 나라의 세자이니라. 항시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할 세자가, 몸이 무거우신 모후의 무릎에 앉아 매달리다니.”
“나무라지 마시어요. 세자가 낮에 호랑이 이야기를 듣고 무서워 그러는 것이옵니다.”
아무리 영이 세자이긴 하나, 청조는 아직 어린 영을 다그치는 도운이 야속하였다.
“하지만 궐내의 법도가 있지 않느냐. 아랫것들이 흉잡는다.”
“그런 분이 소첩을 너라 부르십니까?”
“뭐라?”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거리는 청조의 모습에 도운의 입술이 비죽비죽 올라갔다.
“네가 그것이 서운하였더냐? 그럼 내가 이제부터 너를 중전이라 부를까? 중전, 중전, 나 좀 봐 주시오.”
“흥, 누가 중전이라 불러 달라 이러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야? 그럼 부인이라 부를까? 부인, 부인, 마누라, 나 좀 봐 주시오.”
흥, 앵돌아져 몸을 틀어버린 청조의 복스러운 뺨이 웃음을 참느라 씰룩거리는 것이 도운의 눈에 다 보였다.
“이것도 아니야? 그럼 내가 너를 무어라 부를까. 청조야, 청조야. 내가 잘못 하였다. 그러니 나 좀 봐 주거라. 네가 나를 아니 봐주면, 내가 너무 서럽다.”
결국 청조가 웃음을 터트리자, 도운은 밖을 향해 수라상을 들이라 명하였다. 이것도 먹어보아라, 저것도 먹어보아라, 청조에게 저분질을 해주던 도운은 몸이 제법 무거워진 청조가 잠시 잠이 들자 영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도운은 휘영청 보름달이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교태전 후원을 거닐며 영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자신의 무릎을 넘어선 아이는 곁에서 아버지의 걸음을 열심히 쫓으며 아장아장 걸었다.
“영아.”
“예, 아바마마.”
“호랑이가 무서웠느냐?”
영이 아무 대답이 없자 도운은 곁에 선 영의 몸을 들어 올렸다. 도운의 용포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꽉 쥔 영은 도운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비가 꾸중을 하여 섭섭하였느냐?”
아이는 아니라는 듯 단단한 아버지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그 모습을 본 도운은 낮게 웃었다.
“호랑이 이야기가 무서웠느냐?”
이번에는 가슴팍에 묻은 작은 이마가 위아래로 비벼졌다.
“청이, 아바마마가, 호랑이를 잡는다고 하였습니다. 호랑이가 아바마마를 물으면, 소자가 무섭습니다.”
“그것은 무서울 필요가 없느니라. 이 아비가 다칠 리가 없으니.”
“하지만, 호랑이는 발톱이 이렇게 강하고, 이빨이 이렇게 크다고 하였습니다. 물리면 음…….”
“영아.”
“예.”
도운은 청조를 닮은 영의 빛나는 눈동자를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모두에게 빛이 되어라 영(煐:빛날 영)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일찍 승하하신 형님의 자와 같은 영이란 음에, 뜻만 다른 이름이었다. 아이는 이름 그대로, 그리고 승하하신 형님을 닮아 심성이 바르고 밝게 빛나는 존재였다. 세상 그 어느 아이보다 소중하고 소중한 아들이었다.
“이 아비가 너를 무척이나 아끼느니라. 그리하여 이 아비는 호랑이가 하나도 무섭지 않다. 그러니 아비가 호랑이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얼굴이 뜻을 모르겠다는 듯 의문을 가득 매달고 도운을 바라봤다.
“만약 이 아비가 없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면 어찌할 것이냐. 호랑이가 네 어머니를 물려고 달려들면 어찌할 것이냐. 네 어머니와 복중 아우를 두고 도망갈 것이냐?”
“……아니옵니다! 소자가, 소자가 때려줄 것입니다!”
“어찌하여? 호랑이가 무섭지 않느냐?”
“어, 그것은…… 그것은…….”
도운은 고운 아미를 잔뜩 모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의 몸을 높이 한번 치켜 주었다.
“네가 어머니와 아우를 많이 아끼니 그러는 것이 아니냐. 그런 것이다. 이 아비도 너와 네 어머니와 앞으로 태어날 네 아우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허니, 지키고자 하는 마음은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아바마마의 말씀이 어려워 다는 알 수 없으나, 어린 영은 왜인지 알 것 같았다. 도운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워 주었다. 그 모습에 기함하여 부산을 떨어대는 청과 내관 놈들은 가볍게 무시하였다. 아비의 목을 탄 것이 즐거운 듯 익선관을 꼭 붙잡고 앉은 아이의 까르륵 웃음소리를 들으며, 도운은 행복한 듯 저 멀리 보름달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 *
청조는 영과 둘이서 연경당에 들었다. 아직 잡히지 않은 호랑이 일로 정무가 길어진 도운은 저녁에 따로 들겠다는 전갈이 있었다.
연경당 후원에서 봄나물을 찾아 캐는 청조의 손이 바지런히 움직였다. 서방님께서 좋아하시는 이것들 넣어 된장조치를 끓일 생각만으로도 나물을 캐는 손이 바빠졌다. 하지만 점점 불러오는 배가 무거워 간간이 일어나 허리를 폈다. 이번에는 꼭 여자아이를 점지해 주셨으면. 도운이 밤마다 배를 쓸며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되새기며 청조는 둥근 배를 쓸었다.
후우, 이마에 땀을 한번 닦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곁에서 나무로 만든 작은 호미를 들고 어머니를 돕겠다며 이리저리 흙을 파헤치고 있었는데, 어디를 간 것일까?
“영아, 영아.”
청조는 영을 찾으며 후원을 살폈다.
영은 아까부터 그것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까부터 몸을 숨긴 채,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그것의 뒤를 몰래 밟았다. 그리고 드디어 저희들을 바라보는 그것의 빛나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호랑이였다. 호랑이는 청이 묘사한 그대로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갈색빛 노란 털, 검은 줄무늬, 동그란 눈을 쭉 따라 이어진 둥근 코, 사방으로 뻗친 흰 수염.
호랑이와 눈이 마주친 영은 조용히 몸을 숙였다. 자신을 따라 호랑이도 몸을 숙였다. 영은 곁에 계신 어마마마와 아우를 지키기 위해 호랑이를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살금살금, 호랑이에게 점점 더 다가갔다. 높게 자란 풀들 사이에 최대한 몸을 숨긴 호랑이는 점점 다가오는 영을 향해 입을 씰룩거렸다.
씰룩거리는 입매를 따라 흰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용기가 치솟았다. 아버지가 아니 계실 때면, 어머니와 아우를 지키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던 아바마마의 말씀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엉금엉금 땅을 기어서 가까이 다가가면, 호랑이 역시 최대한 배를 바닥에 붙이고 엉금엉금 기면서 영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영의 작은 몸이 호랑이를 덮쳤다.
“이 노옴!”
“캬르릉!”
청이 말한 천둥 치는 요란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영은 최선을 다해 호랑이의 수염을 잡고 몸을 굴렸다. 싸움은 매우 치열했다. 결투 끝에 뱀처럼 움직이는 꼬리를 작은 손에 꽉 쥐자 호랑이가 놀란 듯 펄쩍 뛰어올라 영의 손과 얼굴을 할퀴었다. 청의 말대로 날카로운 발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네 이놈이!”
“이야옹!”
“영아! 영아!”
꼬리를 잡힌 호랑이의 포효 소리에 섞여 영을 부르는 청조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 * *
“전하, 호랑이를 포획하였사옵니다.”
“그래, 어찌 잡았는가?”
“그것이 전하께서 사람을 해칠 생각은 아니 보이는 호랑이가 민가를 어슬렁거리는 것이 이상하다 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하여 혹시 하는 마음에 도성 사냥꾼들의 초가를 일일이 탐문하였사옵니다. 그 중, 한 놈의 행태가 하도 수상하여 그자를 추궁하니 그자가 호랑이의 새끼를 산채로 포획한 일을 실토하였사옵니다.”
“새끼 호랑이를 포획하였다? 어찌 그리 잔인한 일을.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 하나, 새끼를 향한 어미의 마음이 어찌 사람과 다를까. 그러니 자식을 찾는 어미 호랑이가 민가까지 내려온 것이 아닌가. 그래, 무슨 연유로 어린 호랑이를 잡았다 하던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궁의 내의관인 성 참봉(參奉)이 금전을 주고 사주하였다 하옵니다.”
“뭐라? 내의원에 있는 자가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사주하였단 말인가?”
“그것이…….”
착호장은 잠시 곤란한 듯 뜸을 들였다.
“그것이, 그자의 아비 되는 이가 병에 걸렸다 하옵니다. 그자가 가진 재주로도 아비를 구할 방도가 없자 무당을 부른 모양이옵니다. 무당이 말하길, 사나운 짐승의 원혼이 씌었으니 원혼을 쫓아내기 위해 집안에 범을 들이라 하였다고 하옵니다. 아무래도 성체인 호랑이는 산채로 집안에 가두기가 어려우니 몸집이 작은 새끼를 들였다고 하옵니다.”
“이런!”
도운의 역정이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아니 그래도 과거의 일 때문에 무속인을 탐탁지 않아 하는 도운은, 무당의 말을 듣고 그런 짓을 벌인 성 참봉이 참으로 어리석어 보였다.
“그래서 새끼 호랑이는 무사한가?”
“예, 전하. 어미의 곁으로 돌려보냈더니, 두 마리가 정다이 함께 산으로 돌아갔사옵니다.”
“그래, 수고하였네. 이 일에 대한 처결은 차후에 하도록 하지.”
“예, 전하.”
호랑이 일이 마무리되자, 도운은 용포를 훌훌 벗어버리고 급하게 연경당으로 향하였다.
“청조야!”
큰소리로 청조를 찾으며 방으로 들어서던 도운은, 검지를 입가에 살짝 가져다 대는 청조의 행동에 금침 위에서 잠을 자고 있는 영을 발견했다. 그리고 영의 곁에 함께 누워 잠이 들어 있는 이상한 것도 발견했다. 영의 작은 고사리 같은 손이 그것의 꼬리를 꼭 쥐고 놓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고양이가 아니냐?”
도운의 물음에 청조가 결국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이어지는 청조의 설명에 도운은 잠든 아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쉭쉭 숨을 내쉬며 잠이 든 아이의 오동통한 뺨에 고양이가 할퀸 발톱 자국이 희미하게 보였다.
“호랑이를 잡았노라 어찌나 큰 소리로 외치던지. 소첩이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리하였더냐?”
“예, 꼭 저만한 고양이를 번쩍 들고는 호랑이의 크기가 사내의 가슴까지 온다더니 정말 그 크기가 자신의 가슴까지 온다며 흥분하였지 뭡니까.”
청조의 말에 도운은 크게 웃어버렸다. 이제 겨우 제 무릎을 넘어선 놈이, 자신을 사내라고 아는 것이 우스웠다.
“말린 식재료를 보관하는 고방에 쥐가 생겨 고양이를 들였다 하더니, 그것이 어쩌다 연경당에 들어왔나 봅니다. 아버지가 오시면 잡은 호랑이를 보여드린다며, 저리 손에 꼭 쥐고 잠이 들었습니다. 영이가 일어나거들랑, 어머니를 위하여 호랑이를 잡은 용기를 크게 치하해 주셔요.”
“암, 우리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아니냐. 제 어머니와 복중 아우를 위해 호랑이에게 덤벼들다니, 과연 산의 정기를 받아 호랑이의 기운으로 태어난 아이가 틀림이 없다.”
도운과 청조는 잠든 아이의 동그란 이마며, 상처가 난 손등을 함께 어루만져 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곤조곤 말을 하는 청조의 뺨이 복사꽃 같이 달아올라 참으로 어여뻤다. 도운은 청조의 보드라운 뺨을 한번 쓰다듬고 입을 맞추었다.
“너는 어찌 이리 어여쁜 것이냐. 나는 세상에 태어나 너처럼 어여쁜 여인을 본 적이 없다.”
“참말이십니까?”
“참말이지, 이것은 거짓 한 점 없는 나의 진심이다.”
청조는 배시시 웃으며 도운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도운의 품에 한껏 안겨있던 청조가 도운의 귓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소첩도 세상에 태어나 서방님처럼 늠름한 사내를 본 적이 없습니다.’
* 인용에 대한 안내
* * *
해당 남자 주인공의 대사는 세종 105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윤7월 24일(신축) 3번째 기사를 차용하였습니다.
– 구름을 비추는 새벽 3권 중 대사 –
“노비 역시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 이는 하늘이 과인에게 주신 귀한 백성이고 목숨이라는 뜻이오. 하늘이 내려 주신 귀한 목숨을 위해 세워진 왕으로서, 무릇 백성을 감싸고 보호하는 것은 임금된 자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허니 아무리 죄가 있다 하나, 백성이 함부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어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는가. 또한, 상주고 벌주는 것은 임금의 대권이니 치하할 사람에게 상 주는 일은 분명 과인의 일이오. 허나 이것이 어찌 상 받을 일이어 치하를 할 수 있는가. 생명을 경시하고, 백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 자를 어찌 치하할 수 있는가 이 말이오!”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남의 귀한 목숨을 사사로이 취하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다. 만약 백성이 억울하게 죽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또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인 자를 치하한다면 이것이 폭군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은 매우 옳지 않은 일이다! 모두 들어라!”
“지금부터 아무리 작은 죄라 해도 노비의 죄를 관에 고발하지 않고 함부로 벌을 내린 자는 그에 따른 형벌을 엄히 내릴 것이다! 벌로써 노비를 구타하거나 잔인하게 죽인 자는 장 일백 대의 형에 처할 것이며, 죄 없는 노비를 함부로 죽인 자는 장 이백 대에 처할 것이다. 또한, 주인의 횡포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노비의 식솔들이 다시금 그 주인을 모시고 받드는 일은 너무나도 잔인한 처사이다. 하여 주인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노비의 식솔들은 차후에 모두 양민으로 속량할 것이니 형조는 이를 숙지하고 시행하라!”
– 차용된 기사 –
“우리 나라의 노비(奴婢)의 법은 상하(上下)의 구분을 엄격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강상(綱常)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의지할 바를 더하는 까닭에, 노비가 죄가 있어서 그 주인이 그를 죽인 경우에 논의하는 사람들은 상례(上例)처럼 다 그 주인을 치켜올리고 그 노비를 억누르면서,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고 아름다운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상주고 벌주는 것은 임금 된 자의 대권(大權)이건만, 임금 된 자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자를 죽여서, 선(善)한 것을 복 주고 지나친 것을 화(禍) 주는 하늘의 법칙을 오히려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민이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無辜)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된 자의 덕(德)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그 주인을 치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율문(律文)을 참고하여 보니, 노비구가장조(奴婢毆家長條)에 이르기를, ‘만약 노비가 죄가 있는 것을 그의 가장(家長)이나 기복친(朞服親), 혹은 외조부모가 관(官)에 고발하지 않고 구타하여 죽인 자는 장(杖) 1백 대의 형에 처하고, 죄 없는 노비를 죽인 자는 장(杖) 60대에, 도(徒) 1년의 형에 처하며 당해 노비의 처자(妻子)는 모두 석방하여 양민(良民)이 되게 한다. 만약 노비가 주인의 시키는 명령을 위범(違犯)하였으므로 법에 의거하여 형벌을 결행(決行)하다가 우연히 죽게 만든 것과 과실치사한 자는 모두 논죄하지 아니한다. ’고 하였은즉, 주인으로 노비를 함부로 죽인 자는 일체 율문(律文)에 따라 시행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노비는 대대로 서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서 명분이 매우 엄중하여 중국의 노비와는 아주 다르니, 그들을 양민으로 만드는 법은 사세가 시행하기 어려우며, 또 노비의 죄있는 자를 그 주인이 처벌하는 법도 실행한 지가 이미 오래된 것이니 갑자기 고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사삿집[私家]의 은밀(隱密)한 곳에서 죄 지은 노비를 그 주인이 어떻게 하나하나 율문을 상고하여 논죄(論罪)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법에 의거하였는지 아닌지는 고핵(考覈)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가 함부로 무고한 자를 죽이고도 그에 따른 가족은 그냥 계속하여 부리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백성을 사랑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뜻이겠는가. 지금부터는 노비가 죄가 있건 없건 간에 관에 진고(陳告)하지 않고 구타 살해한 자는 일체 옛 법례(法例)에 따라 과단(科斷)할 것이며, 만약 포락(炮烙)·의형(劓刑)·이형(刵刑)·경면(黥面)·고족(刳足)과 혹은 쇠붙이 칼날을 사용하거나, 큰 나무나 큰 돌을 사용하는 등 모든 참혹한 방법으로 함부로 죽인 자라도, 그 죽은 자의 가족이 자기의 노비가 아니면 속공(屬公)시키지 못하도록 한다. 만약 기복친(朞服親)이나 외조부모가 구타 살해한 것이라도 그 죽은 자의 가족이 살인에 관계된 자의 노비라면 또한 속공(屬公)하게 하라.”
구름을 비추는 새벽 합본
ⓒ 2017, 5月 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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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7년 12월 22일
지은이 5月 돼지
펴낸이 박대령
펴낸곳 (주)북팔
출판등록 2011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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