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l put all-around bard RAW novel - Chapter 28
29화
-계약합시다
후드득-
돌무더기에서 머리를 쑥 빼냈다. 그러자 머리에 있던 돌부스러기들과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콜록-! 으, 죽겠네.”
몸은 멀쩡한 상태였다.
멀쩡한 정도가 아니었다. 전투로 얻었던 상처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심했던 부상이 말끔히 나은 상태였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돌무더기에 덮쳐지기 직전, 다음 등급으로 승급했기 때문이었다.
현재 등급은 C였고, 하루 동안 무적이 되었다.
몇 개의 돌덩이들을 더 걷어내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옷과 몸이 상당히 지저분해졌다. 무적 효과가 피로 얼룩진 것까지 없애주는 것은 아니었기에 먼지와 함께 한데 엉겨 붙어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멀쩡할 줄은 몰랐는데.”
“하하.”
“참, 수상한 게 많은 헌터야. 알고 있지?”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런가요?”
어색한 웃음과 모르쇠 변명에 이권은 헛웃음을 날렸다.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말이야. 에쿰은 던전에 들어온 인간 중 가장 강한 마력을 지닌 인간을 끌고 들어가. 그것도 웬만한 마력이 아니고서야 거들떠보지도 않지.”
“엥, 에쿰이요? 그럼 왜 그쪽이 아니라….”
이권이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이 떠올랐다. 왜 자신이 아닌 내가 끌려 들어간 것인지 의문이라던.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근데 내가 백이권보다 마력이 높다는 게 말이 돼? 에쿰이 잘못 끌고 들어간 거겠지.
“그리고 지속 던전에 히든 보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놀라지 않더군?”
실수다.
이권이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해서 수상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전투로 피떡이 되고, 나한테 걷어차였으면서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진 것도….”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이권과 싸우는 선택지도 있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다. 아무리 C급으로 등급이 올랐다지만 S급 헌터와 싸우는 건 자살행위니까.
어떻게든 회유를 해야 했다.
애초에 왜 갑자기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노선을 변경한 건데요? 저 영입하려고 간보고 있던 중 아니었어요?”
종종 보이던 싸늘한 눈빛과 시선이 떠올랐다. 늪에 빠졌을 때 보여줬던 차가운 미소도.
시그널이 계속 있긴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뿐이지.
“우리 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다른 쪽일 때 골치 아플 것 같거든. 난 내 것이 아니면 아무도 못 가지게 부수고 보자는 주의라.”
완전 막무가내였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성립하는 것도 그만큼 힘이 있기 때문이겠지.
“제가 그쪽을 선택한다고 하면요?”
“그럼 소중히 대해야지. 근데 아니잖아?”
“왜 그렇게 확신해요?”
“우리 쪽으로 들어올지 확실하지 않다면 애초에 신경도 쓰이지 않게 없어지는 편이 나아. 나중에 어떤 위협이 될지 알 수 없잖아?”
이젠 무섭기까지 했다.
말이 안 통하는 바위와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E급 헌터가 위협되면 얼마나 된다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이권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큰 게 올 것 같았다.
나는 다급히 두 손을 올리고 그를 멈춰 세웠다.
“잠깐! 그럼 이렇게 해요!”
이권은 전혀 동요하지 않으며 발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계, 계약합시다!”
어떻게든 움직임을 막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러다간 던전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돌무더기에 파묻혀 죽을 것 같았다.
게다가 여기 곧 닫힐 거라고!
“계약? 무슨 계약을 말하는 거지?”
이권은 드디어 흥미가 돋았는지 발걸음을 멈추며 질문에 응했다.
물론 위험해 보이는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언제든지 이권이 수틀리면 다시 공격해 올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원하는 대로 움직일게요! 뭐 던전을 돌라면 돌고 버프 쓰라고 하면 쓰고!”
“호오,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자기편이 안 될 거면 죽인다고 난리쳐서 이렇게 말하는 건데 얼굴색 하나 안 변하네.
“일단 나가서 얘기하죠?”
침착하게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돌무더기에서 나왔다.
그러자 이권은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대로 공중에 발이 살짝 뜨면서 이권에게로 이끌려갔다.
이권은 그대로 밖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여전히 공중에 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로 던전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제 그 얘기 좀 들어보지?”
“너무 급하신 거 아니에요? 우리 숨 좀 돌립시다.”
“던전이 닫힐 때까지 천천히 나올 걸 그랬나?”
웃으며 살벌한 소리를 하는 이권을 보며 말을 이었다.
“원하실 때 언제든 도움을 드릴게요. 제 버프나 스킬이면 아마 어중이떠중이들보다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이 점은 이권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잘해 주려고 노력한 것일 테니.
“길드에 가입하는 것만 아니면 웬만한 건 수용하겠습니다. 곤란한 상황이 되었을 때 다른 길드가 아니라 신혈 길드의 편이 되겠다고도 약속하죠. 명예 멤버처럼?”
“길드는 왜 가입하지 않으려는 거지?”
“훈련받기 싫고 시간 낭비 같아서요.”
표면적인 이유지만 솔직한 심정이긴 했다.
길드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이유가 더 있긴 했지만 그걸 왜 알려주겠나.
아무튼 솔직함이 닿았는지 이권은 이제야 조금 표정을 풀며 큭큭대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데. 마음이 왜 바뀐 거지?”
“아니 그쪽이…! …저는 오래 살고 싶거든요.”
억울해서 대꾸하려다가 싸늘한 이권의 표정을 보고 말을 바꿨다.
빨리 강해지든가 해야지.
완전 손해 보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는 것은 이쪽도 사양이다.
“대신 저도 받을 건 받을 생각이에요. 일한 만큼 보수도 주셔야 해요.”
“그건 당연한 말이지. 내가 내 사람을 대가 없이 일만 시킬 위인으로 보이나?”
확실히, 백이권이 그럴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자기 사람이 된다면 아낌없이 후원해 줄 것 같긴 해.
실제로 그래서 신혈 길드에서 떠나는 사람이 없었고 헌터들 사이에서 평판도 좋았다.
실력이 있는 만큼 확실한 보수가 주어졌기에 사람이 모였고, 한국의 제일가는 길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거나 배신을 하게 되면 철저히 짓밟을 사람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조건이 하나 더 있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이에요.”
“뭐지?”
사실 계약하자고 먼저 말을 한 이유는 이게 제일 크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렴 우리나라 최고의 길드인데 이용해 먹을 수 있을 만큼 해 먹어야지.
“악기 좀 지원해 줘요. 비싸고 튼튼한 걸로.”
“물론이지. 명색의 바드이신데. 내 편이 되어 준다는데 무기쯤이야 얼마든지 바쳐 드리지.”
안 된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내려놨다.
솔직히 좀 괜찮은 악기를 가지고 싶어서 찾아봤는데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나가는 것을 보고 포기했었다.
그런데 지원을 해준다니 정말 다행이었다.
역시 길드의 후원이란 좋은 것이었다.
길드 인간들은 싫었지만.
“그런데 내가 한설 군 말을 어떻게 믿지?”
“…절 못 믿으시겠다는 말이죠?”
“아니, 한설 군은 믿지. 하지만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고, 사람이란 게 상황에 따라 자기 유리한 대로 행동하기 마련이거든.”
결국 못 믿겠다는 소리잖아.
잘 얘기하다가 곤란하다는 듯 가식적인 표정을 지으며 이권이 턱을 쓰다듬었다.
하긴 나 같아도 믿기 어려울 것 같기는 했다.
아무 길드도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던 헌터가 위협으로 마음을 완전히 돌렸다고 보기에는 믿음이 안 가니까.
하지만 이권이 진심으로 죽이려고 드는데 같은 편이 되겠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요?”
“계약서를 쓰지.”
말을 마치자마자 이권이 인벤토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계약서.
언뜻 보면 그저 평범한 종이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헌터들 사이에서의 계약서는 그 의미를 달리했다.
던전의 부산물로 만든 마력이 깃든 종이.
그런 계약서에 적힌 계약을 이행하지 않게 되면 저주에 걸리거나 심하면 죽게 된다.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대충 마력 계약서를 꺼낸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는 맹세와 가까웠다.
커뮤니티에서 계약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의 후기 글들이 떠올랐다.
길 가다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사람, 주변인이 죽어갔다는 사람, 자살했다는 사람, 던전에서 실종된 사람들까지.
소름이 팔에 돋는 것을 느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계약서는 많으니 아까워할 필요 없어.”
아까워하는 거 아닌데, 그거 아닌데.
침을 꿀꺽 삼켰다.
저 계약서에 적히면 이제는 절대 무를 수 없게 된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적어야 했다.
“그럼 계약 내용은 제가 적어도 될까요?”
“그러든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펜을 건네받고 계약서 내용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요.”
[E급 헌터 한설은 S급 헌터 백이권이 도움을 청할 때마다 도움을 준다.그 대가로 백이권은 한설에게 직업에 맞는 무기와 보수를 제공한다.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위협은 불허한다.]
“뭐, 나쁘지 않네. 그런데 굳이 등급을 써 놓을 필요가 있나?”
콕 집어서 의문을 제기하는 이권을 보고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들킨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눈치 빠른 인간이니 금방 눈치를 챌지도 몰랐다.
“그냥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서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조금 고쳐야겠어.”
이권은 펜을 들더니 뭔가를 지우고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자, 사인해.”
나는 이권이 고친 내용을 읽었다.
[E급 헌터 한설은 S급 헌터 백이권이 말하는 것을 어떤 것보다 최우선으로 두고 이행한다.그 대가로 백이권은 한설에게 최고의 대우를 보장한다.
계약이 유지되는 동안 위협은 불허한다.]
두루뭉술하고 막무가내 같은 이권의 조건을 보고 혀를 내둘렀지만 별 말 하지 않고 얌전히 사인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계약 이행은, 내 생각이 맞는다면 무효가 될 테니까.
“좋아요. 저한테도 나쁜 건 아니니까. 까짓거 해보죠, 뭐.”
“잘 생각했어. 나도 계약서대로 잘 이행해 줄 거야. 걱정하지 마. 누구보다도 최고로.”
내가 사인을 마치고 이권도 사인하자 계약서가 하늘로 올라가 빛을 내다가 손목 어귀에 표식을 남겼다.
“이걸로 우린 계약 관계가 됐네. 좋지? 특별해 보이고 좋네. 신혈 길드장과 이런 관계가 된 건 한설 군이 처음일걸?”
“별로 기쁘진 않은데요.”
“후회하진 않을 거야.”
“그러길 바라요.”
그리고 다음 날 이권이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 놓인 선물 더미들을 통해서.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는 것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
힘으로 작은 틈을 만들어 비집고 나오자 비좁은 공간에 가득히 쌓인 커다란 상자들이 맞이하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이권이 말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다.
“아니, 밖으로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 쌓아두면 어쩌자는 거야?”
상자들 때문에 집 밖으로 나가기도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전부 다 인벤토리에 넣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집에 다시 들어와 하나하나 상자를 까 보니 대부분 다양한 악기들이 들어 있었다.
듣도 보도 못 한 악기들의 향연에 질색하고 말았다.
어차피 다 다룰 줄도 모르는 악기들이었다. 그냥 좀 튼튼한 리코더이기만 하면 됐는데.
악기들 사이에 쓸데없는 가전제품들과 인테리어 용품들이 보였다. 책상 하나 놓기도 힘든 이 좁은 집 안에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가전제품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전부 인벤토리에 넣어뒀다.
보기에도 어려워 보이는 악기들도 전부 인벤토리행이었다.
“엥, 이건 하프?”
고급스러워 보이는 거대한 상자를 뜯고 당황했다. 거대한 하프가 떡하니 나타나니 어이가 없었다.
못 본 척하고 열었던 상자를 닫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내가 하프를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놀리는 거야, 뭐야?
화려한 자태에 줄을 몇 번 튕겨보니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연주도 할 줄 모르는 거, 소리만 아름다우면 뭐 하나.
별 쓸데없는 것들을 보내준다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비교적 작은 상자의 끈을 풀었다.
“어, 이건.”
상자에는 튼튼해 보이는 리코더가 들어 있었다.
“오, 그래도 쓸 만한 건 있었네.”
리코더는 이제껏 봤던 일반적인 리코더와 모양이 조금 달랐다.
일반적인 리코더보다 크기가 훨씬 크고 불어보니 소리도 좀 더 중후한 소리가 났다.
튼튼하고 소리도 고급진 리코더가 마음에 들었다.
한 번 슥 휘둘러 보니 크기도 적당했고 잡는 느낌도 좋았다. 그리고 보통 분리되는 리코더가 아니라 일체형으로 되어 있는 리코더였다.
“잘됐다. 맨날 빠지려고 해서 불안했는데.”
다른 악기들과 함께 리코더를 인벤토리에 넣어두고 상자들을 전부 밖에 내다 버렸다.
마침 집에서 리코더 연습을 하던 참이라 이권이 보낸 리코더를 불러봤다.
크기가 커져서 운지법도 다를까 봐 걱정됐지만, 다행히 일반 리코더와 다른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삐리릭-.”
중후한 소리가 좁은 자취방에 아름답게 울렸다.
이제 리코더 사러 문방구 갈 일 없겠네.
허리춤에 있던 리코더를 이권이 준 리코더로 바꿨다. 원래 쓰던 리코더들은 아까우니 책상 한구석에 고이 모셔뒀다.
인벤토리에 넣을까도 생각했지만 괜히 자리만 차지할 것 같아서 그만뒀다.
이제 보니 인벤토리에 던전에서 얻은 것보다 이권이 보낸 선물이 더 많은 것 같다.
악기들 빼고 나머지 가전제품들을 전부 중고로 올려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던전을 돌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쓰레기를 버리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익숙한 그림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선물은 잘 받았나?”
백이권이였다.
“너무 과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더라고요.”
“내가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말했잖아.”
“네. 근데 너무 과분한 것 같아서요. 선물 받은 건 내 거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죠?”
“음, 딱 봐도 팔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그럼 너무 휑해 보이지 않겠어?”
“뭐가요?”
맥락을 따라가지 못하겠는 이권의 화법에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뭐긴, 이 좁은 집에서 계속 사는 것도 우리 길드에 민폐야. 따라와. 새 보금자리로 가야지.”
이건 또 무슨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