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l put all-around bard RAW novel - Chapter 33
34화
-빚이 있었는데, 없다고요?
말을 마친 오름이 책상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켜더니 뭔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비번 걸려 있을 텐데…?”
걱정스레 말하자 오름은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화면에 뜬 암호를 손쉽게 풀어 버렸다.
“뭐야? 어떻게 한 거야?”
“내 스킬이 좀 대단해서.”
오름은 키보드에 올리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공중에 장난스럽게 키보드를 두들겨 보이는 시늉을 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오름은 마우스와 키보드를 몇 번을 두들기더니 다 됐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로 빚진 건 없는 거다?”
놀란 토끼 눈을 하며 모니터 화면을 확인했다.
파란 화면에 떠 있던 수많은 인간의 정보가 싹 사라져 있었다. 아니, 그보다 그냥 모든 정보가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 윈도우까지.
전부 포맷시켜 버린 것이다.
“뭐…! 너 뭐야?”
“뭐긴, 누굴 속이는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이런저런 잡기술들을 배우게 되거든.”
“이거, 진짜야? 진짜로 빚진 게 사라진 거야?”
“이건 구라 아니야.”
오름이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맑게 웃어 보이며 내 어깨를 성의 없이 툭 쳤다.
창밖으로 흩날려 사라진 종이쪼가리와 컴퓨터 모니터에 살짝 기대서 씩 웃고 있는 오름의 모습이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진짜 빚이 없어졌다고?
한참 동안 멍한 표정을 지으며 오름을 바라봤다.
오름은 그런 내 시선이 다친 얼굴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헛기침을 하며 캡모자를 푹 눌러썼다.
살짝 떨리는 손을 숨기며 쥐고 있었던 리코더를 다시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고마워.”
툭 내뱉은 말이 성의 없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새어 나오려는 환희와 수많은 감정이 녹아든 울음을 참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지난 7년이 지금 여기 존재했다가 사라졌다.
읊어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7년.
하지만 그 별거 아닌 7년은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들었다.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 나서야 다시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야, 고맙다는 말이 끝이냐?”
오름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뒤를 쫓아오며 징얼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감상에 젖어 드는 것도 좋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 녀석’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 지독한 독종이 나타나기 전에 뜨는 게 좋았다.
띠링.
[스킬이 사용되셨습니다.]갑자기 스킬이…?
‘살려주세요….’
갑자기 사용된 스킬에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꺼져가는 불씨처럼 약한 소리였다. 뒤를 홱 돌아 눈을 뒤집어 깐 덕구를 바라봤다.
‘설마 저 녀석이?’
진작에 기절했을 줄 알았던 덕구가 아직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정신력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 감상은 거기까지일 뿐이었다.
사무실을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냄새나고 기분 나쁜 장소를 벗어났다.
오름은 뒤를 급하게 쫓아오며 끊임없이 재잘대기 시작했다.
“너 근데 바드 주제에 엄청 강하네? 어떻게 한 거야? 꼼수지? 역시 알아봤다니까.”
속에서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오름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몇 년간 앓고 있던 충치가 쏙 빠진 듯한 감각이었다.
아마 오름은 절대 모를 것이다. 자기가 어떤 일을 한 건지.
“꼼수는 무슨.”
녀석의 얼굴을 보니 가슴에 거대한 추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겁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상처가 가득 나 있는 얼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도 아까는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른 의미로 똑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부채가 생기고 말았다.
애써 그 부채감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그럼 이제 아까 말했던 거 알려주는 거지?”
오름이 신나서 내 앞을 막았다.
“뭐? 어떤 거?”
무슨 소리 하는 건가 싶어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던 오름의 얼굴을 홱 쳐다봤다. 그러자 오름은 사나운 표정이 되어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볼 장 다 봤으니 모르는 척하는 거야, 지금?”
“아아.”
그 싸늘한 표정을 보고 나서야 조폭들에게 쳐들어가기 전, 오름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아이템을 가져오거나 3억을 가져오면 센터를 속인 방법에 대해 알려주기로 했던 것을.
물론 3억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지만 3억의 빚을 없애줬으니 그게 그거였다.
어떡하지, 그거 거짓말인데.
만약 오름과 조폭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가기 전이었다면 거짓말이었다며 가볍게 장난투로 넘겨 버렸을 문제였다.
나에게 사기를 쳤던 녀석이었고,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 또한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다.
오름은 날 옭아매고 있던 빚을 없애줬다.
애들 장난처럼 가볍게 선심 쓰듯 벌인 일이었을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애들 장난이 아니었다.
빚더미에 파헤쳐 나락을 구르던 나에겐, 한 줄기의 빛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도와준 사람에게 거짓말을 친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 그거.”
그렇다고 거짓말 친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들키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 넘기자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근데 그런 걸 왜 배우려고 하는 건데? 너 이미 사기 잘 치잖아.”
반쯤 진심이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내가 오름의 예상과 달리 쉽게 당해주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눈 뜨고 코 베였을 것이다.
“빈정대는 거야?”
오름이 눈썹을 치켜뜨며 노려보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
표정에서 어떤 비난이나 비아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오름은 표정을 풀고 다시 재잘댔다.
“센터를 속이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아무리 좋은 스킬을 가졌다 해도 그건 어려울걸?”
“넌 할 수 있을 것 같던데.”
“칭찬 고마워. 하지만 센터장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서 말이야. ‘진실의 눈’이라고 들어봤어?”
“진실의 눈?”
지난번 등급 재확인을 받았을 때 봤던 남자를 떠올렸다. 얼굴이 유명해서 잠깐 본 것인데도 기억에 잘 남았다.
날카로운 눈매에 178의 키인 나와 머리 하나가 차이 날 정도로 키가 컸던 사내.
현 헌터인증센터의 대표, 김지완을 말이다.
“센터장인 김지완이 쓰는 스킬 중 하나야. 어떤 스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앞에서는 어떤 거짓말도, 속임수도 안 통해.”
지완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오름의 말에 동감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보게 된다면 ‘진실의 눈’이 아니더라도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근데 그 센터장을 속일 일이 뭐가 있어?”
순수하게 궁금해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런데 오름은 알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까지 알아서 뭐 하게.”
긴 침묵이 이어지다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고민 끝에 나온 말이라는 것을 눈치챘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름이 나에게 그런 사적인 일까지 말해 줄 이유는 없었다.
“굳이 말하기 싫으면 말고.”
그러자 오름은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처음 본 낯선 이에게 함부로 말할 만한 이유는 아닌 모양이었다.
더 이상 캐묻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은 오름이 다시 주제를 바꿨다.
“어쨌든 어떻게 속인 거냐니까?”
이걸 피하려고 한 거였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넘어갈까 생각하다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속인 거 아닌데. 그냥 그쪽이 마음대로 등급을 정한 것뿐이야.”
“…뭐? 그럼 속인 것도 뭣도 아니란 거네?”
“그런 셈이지.”
“에라이 X발, 뭘 기대한 내 잘못이지.”
냅다 욕을 박아 버리는 오름을 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순식간에 바뀐 태도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오름은 적응할 시간은커녕 더 큰 충격으로 뒤통수를 치며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차라리 잘됐네. 아이템 잘 받아 간다! 이걸로 빚 없애준 거랑 구라친 거 퉁치는 거다?”
오름이 인벤토리에서 꺼내 보인 것은 아까 없다고 말했던 ‘거대 거미 아카란의 심장’이었다.
“너 그거…! 대체 언제…!!”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오름을 손가락질하자 어느새 거리를 벌린 오름이 낄낄대며 웃었다.
“멍청하긴, 아이템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냐?”
오름을 잡기 위해 손을 뻗기 전, 오름은 빠른 속도로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텅 빈 손만 허공에서 놀고 있을 뿐이었다.
저런 사기꾼 녀석에게 고마움을 느낀 내가 미친놈이지!
* * *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봐.”
낮은 저음이 퀴퀴한 사무실 내부에 무겁게 울렸다.
머리카락이 목까지 오는 밝은 갈색 머리의 사내는 오른쪽 눈에 길게 상처가 나있었다.
그는 푸쉬업 자세를 하고 있는 장발남의 등 위에 앉아 한쪽 다리를 올리고 있었다.
표정은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싸늘했다.
“그, 그게 아니라 형님….”
퍽-!
“끄억….”
형님이라 불린 사내는 변명의 말을 하려는 덕구의 입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강타했다. 그러자 덕구의 입에서는 피가 폭포수같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퍼퍽-!!
사내는 덕구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연타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박고 있던 다른 부하들은 덕구가 맞고 있는 것을 소리로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보지 못하고 소리만 들리기에 커지는 공포도 있었다.
부하들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다음 차례는 누가 될지 알 수 없었다.
턱-
“하아….”
덕구를 종이짝처럼 던져 버린 사내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약골 새끼한테 손 하나 까딱 못하고 처맞은 거로도 모자라서, 정보까지 털리고, 아이템까지 털려? 이건 니 잘못이다, 덕구야.”
“원명 형님! 그 새끼 달라졌습니다. 절대 저희가 약해서 그런 게…!!”
퍽-!
머리를 박고 있던 스킨헤드의 남자가 고개를 들고 사내를 향해 억울하다는 듯이 토로했다. 하지만 그 항변은 길게 갈 수 없었다.
원명이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든 남자의 목을 그대로 내려쳤기 때문이다.
억 소리 한 번 내지 못한 남자는 목을 내리쳐진 상태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누가 고개 들래.”
원명의 말을 듣지 못할 터였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니까 니들이 안 된다는 거야. 그 새끼 보니까 E급이더만.”
원명은 이마를 쓸어내리며 자신의 부하들을 둘러봤다. 하나같이 험상궂게 생긴 깡패들이었다.
덩치가 크고 위협적이었으며 일반인들과는 급이 다른 헌터들이었다. 그게 D급일지라도 말이다.
원명은 한설을 떠올렸다.
박시한 후드티를 입어서 속 내용물은 모르지만 비쩍 말랐을 게 뻔한 몸. 게다가 어딘가 유약해 보이는 순딩한 외모의 E급 헌터.
“어휴, 쪽팔린 줄을 알아라.”
원명은 장발남의 등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물어 불을 붙이더니 허공에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원명은 성의 없이 책상 위의 서류들을 몇 번 뒤적이더니 그 사이에 있던 열쇠를 집어 들었다.
“보관한 꼬라지하고는.”
부하들을 보지도 않은 채 혀를 차던 원명은 금세 표정을 불고 느슨해진 어조로 말했다.
“들키진 않았지?”
장발남은 푸쉬업 자세를 유지한 채로 힘겹게 원명의 말에 대답했다.
“예, 전혀 눈치 못 챘습니다.”
“그래도 뭐, 내가 오기 전에 사라져서 다행이네. 마주치면 좀 곤란할 뻔했어. 물론 죽여 버리면 땡이지만. 조심하는 게 좋잖아, 안 그래?”
서늘하게 웃어 보이는 원명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장발남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
“예! 그렇습니다!”
장발남은 흐르는 땀이 자세 때문에 나는 건지 원명이 무서워서 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명은 그런 장발남의 고민을 알지도 못한 채 사무실 파티션에 가려져 있던 낡은 철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하하, 김지완은 무서우니까. 들키면 곤란하지.”
그곳에는 잠을 자는 것처럼 곤히 쓰러져 있는 6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7살에서 10살 언저리로 보이는 어린애들이었다.
원명은 소파 위에 기절해 있는 작은 여자아이를 들쳐 멨다. 그리고 그 아이를 상처라도 날세라 조심히 방 안에 내려놓았다.
“우리 세린이도 출발할 때까지 착하게 잘 있자!”
원명이 납치해 온 아이.
센터장 김지완의 딸, 김세린이었다.
원명은 세린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더니 순식간에 정색하며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그 새끼들도 끌고 와. 안 되면 직접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