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ude RAW novel - Chapter 1
1장. 夏
프롤로그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낙비를 맞는 일 따윈 일상으로 여겨야 하는 생. 우산도 없이, 피할 새도 없이 퍼붓는 비를 그대로 맞아야 하는, 온통 예측 불가능한 일들 속에 던져진 고단한 삶. 해서 그저 버티고 견디는 것에 불과한 인생. 하찮고 같잖아 진절머리가 나는 운명.
돌이켜 보면 지나온 모든 시간이 고역이었다. 구태여 어느 순간이라 이르집을 필요조차 없었다. 늘 그랬으니까. 그러므로 사는 내내 단 한 번이라도 되돌리고 싶은, 아쉽고 그리운 찰나 따윈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역겹기만 한 이 삶에 대한 일말의 애정과 미련 같은 게 있을 리도 만무했다.
그래. 알고 있었는데. 이미 다 알고 있었는데, 왜 진작 하지 못했을까. 이 지난하고 무기력한 지옥을 끝낼 결심을. 아무 의미도 없는 이 삶을 서둘러 마무리 지을 생각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이렇게나 선명한데도, 나는, 왜….
빠아아앙!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평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
4차선 도로엔 제법 속도를 높여 달리는 차들의 움직임이 선명했다. 귓가에 닿는 모든 소란한 소음들이 우웅우웅, 진공관 안에 갇힌 것처럼 둔하게 공명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옥상의 난간 위. 나는 고개를 푹 숙여 발아래로 펼쳐진 잿빛 풍경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몇 초나 걸릴까. 10초? 아니, 5초면 충분하려나. 이대로 한 발짝, 발끝만 조금 뻗어 내디딘다면 모든 걸 한 번에 끝낼 수 있다. 그저 아주 잠깐, 눈을 감고 숨을 멈춘 채 저 아래 잿빛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하고도 단순한 일이다.
숨을 길게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밤공기가 젖은 두 뺨의 열기를 서늘하게 식혔다. 끝내면, 이대로 모든 걸 다 끊어 내고 나면 터질 것처럼 화끈거리는 머릿속 상념과 열화들도 모두 다 사그라들 수 있을까. 아니. 이토록 좁고 긴 터널에도 과연 끝이 있긴 한 걸까.
그렇게 발끝 아래 펼쳐진, 아득하고도 먼 안식의 세계를 갈망하며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장소를 너무 잘못 고른 거 아닌가.”
불현듯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가 귓가의 진공을 깼다.
아주 잠깐, 어쩌면 환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젖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 버티고 서 있던 커다란 인영 하나가 내게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분명히 시커먼 그림자가 피식거리며 서늘하게 나를 비웃고 있었다.
꼭 꿈속 같았다. 아주 어둡고 축축한 꿈.
“그쪽 목적이 죽는 건지, 어디 하나 작살내고 죽은 듯이 사는 건진 모르겠지만. 애매한 높이라 죽으려다 죽은 듯이 살게 될 수도 있고, 죽은 듯이 살려다 진짜 죽을 수도 있고.”
타박, 타박.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까만 어둠 속, 남자의 얼굴이 점차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엔 여전히 깊은 음영이 가득했다.
“어느 쪽이어도 좋은 자리는 아닌데.”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새카맣고 텅 빈 눈동자가 무심히 나를 꿰뚫어 왔다. 그는 알 만하다는 듯 가볍게 턱짓을 하며 읊조렸다.
“차라리 저기,”
“…….”
“한강 다리 위로 가 보는 게 어떻습니까. 충동적으로 아무 데서나 실수하지 말고.”
차분하다 못해 무심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그에게로 다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깊었다.
나도 모르게 젖어 가물거리는 눈을 연방 깜빡이며 남자를 응시했다. 검은 셔츠와 슈트,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돌연 내 앞에 나타난 남자가 흡사 저승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아, 차라리 그런 거라면….
찰나의 내 부질없는 바람과 달리, 그는 태연하게 난간에 몸을 기대어 서서는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곤 천천히 연기를 내뱉었다. 흘긋, 여전히도 무감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뭘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감정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던 것과 달리, 갑자기 나타난 남자 하나 때문에 순식간에 소용돌이 같은 혼란에 휩싸인 기분이었다. 마치 고요하던 수면에 동그란 파문이 일어난 것 같은.
돌을 던진 범인은 분명 이 남자였다.
“…뭐예요?”
결국 견디지 못한 내가 먼저 그 침묵을 깼고, 그는 담배를 태우며 관찰하듯 나를 계속해 바라만 봤다.
“나 알아요?”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삐걱이며 떨려 나갔다. 분명 내 꼴만큼이나 형편없이 들렸을 목소리였다. 어쩐지 초라한 기분으로 말아 쥔 손가락에 꾸욱 힘을 줬다.
“뭐 하는…. 누군데, 참견이에요?”
남자는 대답 대신, 손끝으로 들고 있던 담배를 톡 튕겨 보일 따름이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다.
“담배나 피우려는 거면 다른 데 가서 피워요.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나는 있는 대로 목소리에 힘을 주고 그를 겁박했다. 이 자리에 어렵게 섰다. 오랜 시간 겨우 도출해 낸 명확한 답을 결코 지우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가라니까요?”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남자는 그저 느긋이 담배 연기만 내뱉었다. 어디 한 번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빤히, 나를 보면서.
“이봐요.”
“…….”
“…하, 내 말, 안 들려요?”
악의가 없어 무례한 눈빛이었다. 동정이 없어 따뜻한 눈동자였다. 그 칠흑처럼 새카맣고 반짝이는 눈동자에 포박당한 것처럼 나는 난간 위에 붙박여 몸을 떨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던 길 가라고요. 그만…!”
“잡아 줘요?”
기가 막혔다. 고저 없이 돌아온 낮은 목소리에 돌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기어코 볼썽사나운 소리가 새기라도 할까 봐, 나는 입술을 아프게 눌러 깨물었다. 눈앞이 더더욱 가물가물, 흐릿해지고 있었다.
남자는 내 답을 기다리지 않고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타박, 타박. 담뱃불을 지르밟고 한 발짝 가까워지는 그의 구두 굽 소리가 선명했다.
“잡아요.”
“…….”
그는 긴 팔을 뻗어 내 허리 아래로 손을 내밀어 왔다. 그 커다랗고 굵은 손마디를 내려다보며, 나는 짓깨물어 핏물이 고스란히 배어 나오는 입술을 앙다문 채 소리를 참았다. 뒷걸음질 칠 새도 없이, 알 수 없게 치민 서러운 감정을 견디기에 급급한 거였다.
지금 이 손을 잡는다면 의미 없는 삶은 계속될 것이고,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은 더더욱 몸집을 불릴 것이며, 일말의 희망 같은 안식은 요원해질 것이 뻔했다. 그러니 고개를 젓고, 뒷걸음질을 쳐야 옳았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 낯선 남자의 값싼 오지랖 따위, 외면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흔들렸다. 다시 한번, 나를 재촉하듯 흔들거리는 그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는 내내 마음은 하릴없이 흔들리고 나부꼈다. 감정 한 조각 읽을 수 없는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았다. 대책 없이 어리석게. 속수무책으로 연약하게.
문득 속된 환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어쩌면 나는 이곳, 여기에 서서 이 손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자.”
남자는 낮게 고개를 까딱였다.
왜였을까. 나는 홀린 듯 그의 손을 맞잡았다.
뜨거웠다. 뜨겁다 못해 데일 것 같은 그 체온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욱신거려 온몸에 힘이 풀렸다. 단단하고 거친 손바닥이 다소 우악스레 나를 아래로 끌어 내렸고, 결국 내 몸은 곧장 난간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져 버렸다.
위에서 내려다볼 때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큰 남자였다. 찰나였지만, 남자의 품 안에 단단히 갇혔던 몸을 떼어 내고 간신히 고개를 꺾어 올려 그를 직시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는 무감한 표정을 지으며 눈만 느긋이 깜빡일 따름이었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엉망으로 쥐어 터져 있는 내 입술 끝에 가 닿아 있음을 알았다.
수치스러웠다. 내 모든 치부가 이 낯선 남자에게 모조리 까발려지는 것 같아서. 악의도, 동정도 없는 그의 눈빛이 낯설고도 두려워서.
더는 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하릴없이 쥐인 손을 힘껏 뿌리쳐 내고 그를 스쳐 걸었다. 맨발바닥에 와 닿는 차갑고도 거친 감촉을 고스란히 느끼며 그곳을 빠르게 도망쳐 나왔다.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당황과 수치 사이, 그 어딘가의 감정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쿵.
등 뒤에서 닫히는 요란한 옥상의 철문 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흐르는 눈물을 훔칠 수 있었다.
초여름의 어느 밤, 첫 자살 시도는 그렇게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