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ude RAW novel - Chapter 10
09
마지막 피팅이 끝나자마자, 나는 급히 파우더 룸으로 뛰어가 미친 사람처럼 가방을 쏟아 약 여러 알을 한 번에 털어 삼켰다. 식도에 걸려 넘어가지도 않는 약을 삼키려 가슴이 벌게질 때까지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고, 한참 벽을 짚고 호흡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하마터면 이규현 앞에서 이 꼴을 보일 뻔했다는 게 아찔했다. 이규현이 내 병을 눈치챈다면 그걸 어떤 식으로 이용하고 협박할지 눈에 선했다.
지이잉.
별안간 대리석 바닥에 나뒹굴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백강우’라 뜨는 이름 세 글자에 안도의 숨이 절로 샜다.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귓가에 가져갔다.
– 빨리 받네. 집인가?
“아뇨.”
– 그럼요.
잠시 말을 멈추고 답을 망설였다.
“숍이에요. 오늘 드레스 피팅이 있어서.”
백강우에겐 여전히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있었다. 처음, 파혼이나 하고 오라던 그의 날 선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해서였다.
무서웠다. 결국 내 결혼이 우리 관계의 끝이 될까 봐.
– 잘됐네요. 주소 찍어 보내요. 데리러 갈게.
뜻밖의 이야기가 들려와 당황스러웠다. 백강우가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잊어 줬으면 했다. 더더군다나 이규현과 함께 있는 모습은 더더욱 보이기 싫기도 했고.
“일은요? 오늘은 일, 벌써 다 끝났어요?”
– 왜요. 내가 할 일 미뤄 가면서까지 신하경 씨랑 섹스하고 싶어 미친 것 같아서?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농담일 게 분명한 그의 말에 손끝이 아릿했다. 그랬다면. 정말로 나랑 하는 섹스에 몸이 달아서라도 내게 미쳐 있는 거라면 이렇게 내 마음이 불안할 리도 없겠지.
“그게 아니라….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다 끝나면 내가 연락할게요.”
– 이규현이랑 같이 있나 보네.
눈치 빠른 백강우의 반응에 다소 안도가 되면서도 동시에 불안했다. 상견례 날, 백강우가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는지, 아직 그 이유를 정확히 듣지 못한 까닭이었다. 지금껏 차마 묻지를 못했다. 그날,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던 건지. 다만 확실한 건 나와 같은 마음에서 한 짓은 아니란 것뿐이었다.
“네. 그러니까 그냥….”
– 이규현 앞에서 박히고 싶은 거 아니면.
백강우는 단호히 내 말을 잘랐다.
– 주소 보내요.
“강우 씨.”
– 도통 종잡을 수가 없어, 신하경 씨 당신.
도리어 내가 할 말을 들은 묘한 기분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 보내요. 지금, 바로.
전화는 그대로 끊겼다.
협박인 건지, 아님 이조차도 그저 농담인 건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말에 멍하니 전화가 끊긴 액정을 바라봤다.
백강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대로 나와의 섹스에 미쳐 있는 것도 아니면서. 내 부탁을 외면하지 못해 그저 나를 도와주려 했던 거면서. 내게 일말의 관심도 없으면서. 왜 자꾸 이렇게 나를 들쑤셔 괴롭히는지.
주차장에서 기다려요. 최대한 빨리 나갈게요.
숍 주소를 찍어 보내며 메시지를 덧붙였다. 그 짧은 한마디로 백강우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될지를 예상해 봤다.
잘 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염치도 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는. 내 손으로 망쳐 달라고 애걸하고 부탁한 주제에 정작 이규현에게 내 부정이 들키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꼴이 얼마나 우스울지. 죽지도 못하고 그저 도망치려고만 하면서도, 행여나 이 결혼을 깨지 못하는 내가 얼마나 한심할지….
그래. 인정한다. 나는 그냥 딱 여기까지의 인간이니까. 나와 같지 않을 백강우의 마음이 두려워 한 발짝 앞으로 나갈 용기도 없는, 그저 못나고, 한심하고, 우스운 인간.
똑똑.
파우더 룸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나서자 내가 나오길 기다리던 헬퍼가 괜찮냐며 걱정스레 물어왔다. 나는 그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그 공간을 벗어났다. 그녀도 무슨 뜻인지 알아챈 듯 더는 내색하지 않았다.
태연히 피팅 홀로 돌아왔다. 숍의 실장이 내게 최종 결정을 물어 왔다. 지금껏 입어 본 드레스는 모두 다섯 가지였다. 모두 다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의 작품들이었으나 기실 마음에 드는 건 없었다. 웨딩드레스는 원래 다 이런 건지, 하나같이 화려하고 반짝여서 불편하고 과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아무렴 어떠랴. 뭐든, 상관없었다.
“그냥, 두 번째 걸로 할게요.”
그나마 가장 낫다고 생각한 두 번째 드레스를 골라 말했다. 실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 마지막 거.”
그 찰나, 이규현이 불쑥 끼어들어 말을 끊어 왔다. 그는 입고 있던 보타이와 드레스 셔츠 단추를 풀어내며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너 보기보다 가슴이 크더라.”
양손으로 제 가슴 위에 둥글게 원을 그리며 말하는 본새가 꼭 양아치 같았다.
“마지막 걸로 입어라.”
애당초 따로 잡혀 있던 피팅 스케줄이었다. 피차 얼굴 마주하며 예복 골라 줄 사이도 아니건만, 구태여 왜 내 스케줄에 맞춰 나타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러려고 그랬던 건가. 이런 식으로 깽판을 치려고.
“난 두 번째 게 마음에 들어요.”
“근데?”
내 말에도 이규현은 어쩌란 거냐는 듯 뻔뻔히 반문했다.
“드레스 고르는 건 내가 하고 싶어요. 규현 씬 규현 씨 슈트 골….”
“뭐? 뭐를 골라? 네가?”
“…….”
“귀엽다 귀엽다 해 주니까 점점 더 건방지게 굴지, 우리 하경이.”
별안간 이규현은 미친 사람처럼 웃어 대기 시작했다.
“넌 네가 뭘 고르고 말고 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나 봐?”
그런 선택권 따위, 내게 없다는 말을 하고 싶겠지.
나는 무감한 눈으로 이규현을 응시했다. 그 껄렁대는 비웃음이, 천박한 얼굴이, 생각 없는 말투가 싸구려 깡패, 시정잡배만도 못해 보였다.
보다 못한 실장이 중재하듯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럼, 두 가지 드레스를 다시 한번 입어 보시는 게….”
“그래. 그럼 다시 입어 봐. 마지막 걸로다가.”
이규현은 실장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규현 씨.”
저 갑갑하고 옥죄는 드레스를 한 번 더 입었다간 또다시 파우더 룸으로 뛰어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입어.”
이규현의 명령은 오만무례했다. 어떻게든 나를 무시하고 나를 짓밟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마치 게임을 즐기는 중독자처럼.
“입으라고.”
“…….”
“하경아, 귓구멍이 처막혔어?”
묵묵부답인 내가 답답했는지 그가 얼굴을 왈칵 구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정신 아닌 마약 중독자의 협박 따위가 무서울 건 없었다. 윽박을 질러도 맞서면 되고, 손을 들면 기꺼이 맞아 줄 생각이었다. 그걸 핑계로 이 결혼을 깰 수 있게라도 된다면 되레 다행인 일일 테니.
다만 귀찮았을 뿐이었다. 같지도 않은 인간을 상대해 괜한 에너지를 낭비하느니 어서 이 피팅을 끝내고 날 기다릴 백강우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입술을 앙다물고 헬퍼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약을 먹었으니 괜찮을 거라 자위하면서.
두 사람이 달라붙어 등 뒤의 끈을 조이고, 그 좁은 천 조각 안으로 내 몸을 부득불 구겨 넣었다. 어깨끈이 없는 데다가 가슴골과 안쪽 굴곡이 훤히 다 드러나는 드레스였다. 맞춤임에도 허리를 한계까지 옥죄는 디자인의 특성상, 젖가슴이 쇄골 아래까지 둥글게 치솟아 올라왔다. 꼭 코르셋을 조인 모양새였다.
천박했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거울 속에 비친 꼴이 하도 초라해 견딜 수가 없을 만큼.
치이익.
커튼을 걷는 소리와 함께 다시 널따란 홀이 드러났다. 셔츠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채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이규현이 홱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눈빛이 취해 있는 것 같아 영 이상했다. 술이라도 먹었나. 설마, 또 약을 먹었을 거라곤…. 아니, 그건 상상하기 싫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진수가 제 망나니 아들 하나 단속 못 할 만큼 허술한 사람도 아니고.
“이거 봐! 이게 더 낫잖아, 꼴리고.”
손바닥을 탁탁, 마주쳐 가며 저급하게 지껄이는 그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와아. 젖이 얼마나 큰지 터질라 그런다. 응?”
“…….”
“이거 보고 식장 온 좆 달린 남자 새끼들 다 좆 흔들다 싸는 거 아니냐?”
코앞까지 다가와 미친 사람처럼 키득대는 이규현을 바라보며, 나는 불안감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거 입어. 넌 이게 딱이야.”
“과해요. 본식에 입을 디자인은 아니에요. 그냥 두 번째 드레스로….”
“이걸로 합시다, 실장님. 어?”
내 의사는 깡그리 무시한 채 통보하는 이규현의 말투가 끔찍스러웠다.
“이규현 씨.”
“왜, 싫어?”
“네, 싫어요. 안 입는다고요, 이거.”
“아, 좆도 없는 게 고집은 존나게 부리네.”
이규현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히고 사나운 기운이 어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마주하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미친놈에게 조금도 지고 싶지가 않아서. 확연 전에 없던 이상한 승부욕이었다.
“저, 그럼 두 분 천천히 상의하십쇼. 저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
“존나 궁금해. 얌전하던 신하경이가 갑자기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싸가지 없이 구는 걸까?”
반쯤 풀린 동공이 빈정거리듯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코를 훌쩍이며 사납게 내리까는 목소리가 여간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주변의 공기가 살벌하게 얼어붙었다. 돌연 고개를 홱 돌린 이규현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나가아! 나간다며 씨팔, 뭘 구경하고 서 있어?”
곁에 서 있던 직원들이 일제히 도망치듯 움직여 나갔다. 결국 커다란 홀엔 이규현과 나, 단둘만 남았다.
역겨운 얼굴에 머릿속이 어찔거려 뒷걸음질을 하려는 찰나였다. 발끝이 휘청거렸다. 눈앞이 핑 돌았다. 이상했다. 분명 약을 먹었고, 패닉이 올 만큼의 상태가 아닌데도 좀처럼 몸이 내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까불지 말고 앉아. 골로 가고 싶지 않으면.”
돌연 이규현이 다시금 킬킬거리며 물잔의 물을 한 번에 들이켜 마셨다. 불현듯, 아찔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싶어 눈을 찌푸리자, 잔을 내려놓곤 가깝게 다가선 이규현이 내 손목을 움켜쥐어 끌어당겼다.
“그래도 약하게 탔으니까, 얌전히 굴면 적당히 기분 좋은 선에서 즐길 수 있을 거야.”
클클거리며 웃는 눈이 내 쪽 사이드 테이블에 위에 비워진 잔을 흘긋거렸다. 원인은 저거였다.
역시나 공황 증세가 아니었나 보다. 그것도 모르고 약까지 털어 먹었으니….
일순, 몸이 맥없이 휘청거렸다. 핑그르르, 시야가 돌고 순식간에 바닥에 몸이 뉘인 채 이규현의 아래에 포박당하듯 깔렸다.
“미안. 내가 너 젖통 깐 거 보니까 꼴려서 도저히 못 참겠어서.”
“하…!”
“걱정 마. 너도 이제 존나 꼴릴 거야. 아마 네가 먼저 다리 벌리고 박아 달라고 사정하게 될걸, 암캐처럼. 있잖아. 네가 먹은 거, 되게 비싼 거다? 어?”
역겨운 목소리가 얼굴 위로 가깝게 쏟아졌다. 동시에, 드레스 안으로 이규현의 손이 들어와 내 가슴을 움켜쥐어 꺼냈다. 이어서 그는 기다란 드레스 자락을 걷어 내고 있었다.
“흣, 미친 새끼! 하지 마!”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 문밖에서 놀란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누구라도 들어오면 인생 끝낼 각오 하라는 이규현의 한마디에 문밖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 순간 아무도 날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늘 그랬듯이.
“아악! 하지, 마! 하!”
가슴을 주무르고, 젖꼭지를 비틀어 대는 손길이 꼭 벌레라도 기어가는 듯 끔찍했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자꾸만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내게 먹인 약의 효과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분명 백강우가 내게 가르쳐 줬던 감각이었다.
“아직 이게 약 기운이 덜 돌았나 보네. 반항할 정신이 있는 걸 보면?”
크크큭. 끔찍한 웃음소리와 함께 달카닥, 바지 버클 풀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는 몸을 어떻게든 버텨 내려 연방 고개를 젓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 마! 이 미친놈아! 이거, 하! 아아악!”
“아, 시끄러워! 안 닥칠래?”
본능적으로 이를 세워 내 입을 틀어막으려 다가오는 이규현의 손바닥을 콱 물어뜯었다.
“악! 이게, 씨팔, 미쳤나!!!”
곧바로 두 뺨에 강한 타격이 왔다. 맞은 얼굴 전체가 얼얼했다. 와중에도 도망치려 바닥을 기었으나 얼마 가지 못해 우악스레 머리채가 쥐어 잡혔다. 고개가 훅, 절로 뒤로 꺾였다.
“너 혹시 처맞으면서 흥분하냐? 어? 씨발, 매번 매를 벌지!”
다시 이규현은 내 몸을 짓눌러 비틀대며 올라탔다.
끔찍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나 미친놈일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확실히 내가 어리석었다. 이런 쓰레기를 견디고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내 착각이 원흉이었다.
“윽, 개새끼!”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쳤다. 이대로 당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어차피 약을 먹은 이규현도 정상의 상태는 아닐 터였으므로 있는 대로 발버둥 쳐 어떻게든 이 끔찍한 악마에게서 벗어나 볼 생각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대로 이를 악물고 무릎을 힘껏 콱 치켜들었다.
“으악!”
그 순간, 내게 몸을 기울여 덮쳐 오려던 이규현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벌러덩 나뒹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무방비 상태의 이규현 다리 사이를 정확히 걷어찬 거였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몸을 뒤집었다. 나가떨어진 이규현의 상태는 확인도 하지 못한 채 흐릿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몸을 지탱할 벽까지 엉금엉금 기어가 겨우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오로지 빨리 도망쳐야겠단 생각 하나뿐이었다. 어떻게든, 저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나가야겠다고.
탁!
다 벗겨진 드레스 차림에 반쯤 풀린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섰다. 입을 틀어막고 선 놀란 표정의 직원들이 나를 보며 괜찮냐 다가왔지만 나는 다급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따라오려는 그들을 거절하고 나는 미친 사람처럼 지하 주차장 버튼만 연속해 눌러 댔다.
약 기운이 제대로 돌기 시작했는지, 눈앞이 더 가물거리고 있었다. 온몸이 간지럽게 느껴질 만큼 뜨겁게 열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가랑이 사이가 저릿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행여나 이규현이 쫓아오기라도 할까 손까지 덜덜 떨려 댔다. 겨우 5층을 내려가는 그 시간이 억겁처럼 길었다.
그 억겁 같은 시간에 나는 간절히 바랐다. 이 문을 열면 그 사람이, 그 남자가, 백강우가 서 있기를. 나를 기다리고 서 있어 주기를.
땡, 소리와 함께 양 문이 열리고 뜨거워진 눈앞에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기가 가득 어렸다. 그 가물거리는 시야 새로 간절히 바라던 남자의 실루엣이 보이는 순간, 나는 그에게로 쓰러지듯 안겼다.
꿈이라도 좋았다. 이대로, 모든 게 다 끝난대도 상관없을 것 같은 포근함이라. 뜨겁게 밀려드는 안도에 가만히 눈꺼풀을 내리감으며 입술을 열었다.
“…하, 나….”
무어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리며 들려왔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홀로 애원할 따름이었다.
“나, 좀, 하아….”
나를 좀, 어디로든 데려가 달라고.
2장. 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