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ude RAW novel - Chapter 12
11
이진수와 신민철의 거래는 완전히 깨진 것 같았다.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면서까지 판을 먼저 깨고 나선 건 이진수 쪽이었으나 신민철도 이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손을 털고 있었으므로.
이들의 싸움에 속이 타는 건 오로지 신하경의 친모, 이혜영뿐일 거였다.
이혜영은 이 결혼이 끝났단 걸 알면서도 쉬이 인정할 수 없는 듯했다. 신하경의 말을 빌리자면 마지막 발악이라 했다.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원하는 게 돈인가, 혹시?”
문이 닫히기 무섭게 사납게 쏘아붙이는 이혜영을 가만히 훑었다. 희한했다. 친엄마라는데, 도무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어 보였다. 한때 배우 출신이었다던 그녀의 반반한 얼굴마저도 신하경의 고아함과는 완전히 달랐다. 천박했다. 이런 인간 밑에서 그 순한 여자가 대체 어떻게 버티고 살아온 걸까 의문이 들 만큼, 끔찍스러웠다.
그 탐욕스러운 눈을 직접 마주하고 나니 목구멍 너머에서 연민이 구토처럼 일렁거렸다. 제발, 어디로든 저를 데리고 도망쳐 달라며 애원하던 여자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돼서.
“그래서 이진수한텐 얼마나 받았는데?”
이혜영은 어지간히 조급한 모양새였다. 내 사무실에까지 쫓아와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는 걸 보면, 결국 내게 거래를 제안하러 온 거였다.
“이 의원님 아드님 일 말씀이라면 제가 아니라 저희 회장님께 여쭤야 할 일 같습니다만. 저희 회장님께서 주도하신 일이라서요.”
“이규현이 놈 말고, 내 딸…!”
낮출 대로 낮춘 목소리에도 분노가 그득 묻어났다.
“당장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우리 하경이 다시 얌전히 제자리에 데려다 놔.”
“뭐라고 신고하시게요.”
가만히 눈꺼풀을 깜빡이며 묻자 그녀가 이를 바득 갈았다.
“그 착하고 순한 애 꼬드겨서 납치한 거. 너희가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하시죠.”
“하…! 뭐?”
“경찰에 신고하세요. 내가 순진한 당신 딸 납치해서 감금시켰다고. 덕분에 정재계 세기의 결혼도 파탄 났고, 신민철 회장 상대로 유일하게 무기로 내밀 패도 사라졌고, 그래서 제신 그룹 제대로 삼켜 먹으려던 이혜영 이사장님 당신 계획도 다 물 건너갔다고.”
“……!”
“자, 하시죠.”
핸드폰 액정에 112, 번호를 찍어 내어 보이자 당황한 이혜영이 이를 바득 물며 미간을 구기고 나를 노려봤다.
“하, 너… 뭐 하는 새끼야? 이러는 목적은 또 뭐고.”
그러곤 이제야 퍽 상황 파악이 된 듯이 재차 물었다.
“석상천이, 그 깡패놈이 키운 개라더니만 어디서 시정잡배 양아치 같은 새끼가 감히 나랑 하경일, 우리 제신을 우습게 보고는…!”
“우습게 볼 주제나 되나요, 제가 감히. 어차피 지금쯤 이미 신 회장님도 다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따님이 어디서 시정잡배 양아치 같은 개새끼랑 눈 맞고 배 맞아서 가출했단 거.”
“야!”
계속되는 내 빈정거림을 못 참은 이혜영이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버럭 소리를 내지른 그녀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경고하는데, 이쯤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너 같은 양아치, 인간 말종, 사회 암 덩어리 같은 새끼 하나…! 어쩔 줄 몰라서 참아 주는 거 아니니까. 깡패 새끼 주제에 대가리는 또 잘 굴린다며, 너.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면 빨리 하경이 돌려보내. 아님…!”
“아님, 곤란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이 이사장님 쪽이시겠고요.”
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여자를 외면하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같잖은 협박과 위협이 우스워 귀찮다는 듯 재킷을 끌어내 걸쳤다.
“제가 좀 나가 봐야 하는데. 그만 가 주시겠습니까.”
“이 천박한…!”
이혜영은 나를 노려보며 몸을 부들거렸다.
“깡패 새끼.”
일말 타격감도 없는 욕지거리에 픽, 웃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홱 돌아 걸어 나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찔러 넣었다.
“하나도 안 닮았지, 그 여자랑.”
곁에 다가온 인남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나만 다르게 느끼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괜찮을까요. 더 들쑤시고 다니면 회장님 귀에 들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일 건데요.”
“차라리 잘됐어. 아무리 급해도 나 같은 거 하나 밟자고 제신 그룹 막내 따님 건드리는 무모한 짓을 하시겠냐, 회장님께서.”
“이택규 그 새끼 요즘 완전히 눈 뒤집힌 거 보셨잖습니까. 그 새끼 말에 회장님, 덩달아서 무모하게 나올 가능성이 아주 없지도….”
“잘 봐, 그러니까.”
“이사님.”
“호들갑 떨어서 괜히 더 눈에 띄지 않게, 감시 잘하라고, 인마.”
가볍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겼으나 마음은 퍽 무겁게 내려앉는다. 동요하는 진심을 억누르고 숨겨야 할 이유가 또 생겼다. 신하경이 내 약점이 될 수 있단 것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득 불안했다. 내 진창 같은 삶이, 거름망 없는 불행이 뜻하지 않게 그녀마저 집어삼켜 버릴까 봐.
회사를 빠져나와 곧장 연우의 병원으로 향했다. 연우와 약속을 해 만나기로 했다는 그녀의 연락은 진즉에 받았다. 열흘 만의 외출을 말리고 싶진 않아서 딱히 무슨 말을 하진 않았다. 물론, 이혜영이 다녀가기 이전의 일이었지만.
고요한 복도를 빠르게 지나쳐 가장 끝 병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문을 드르륵 젖혀 열자 쨍한 여름 한낮의 기운이 한가득 풍겼다.
홀연, 다른 세계에 발을 디딘 것 같았다. 널따란 병실 안.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잠든 신하경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다가갔다. 여자의 주위로 빛이 산란했다. 이런 눈부신 광경이 또 있을까.
홀린 듯 그 앞에 마주 앉았다. 온 우주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멈춘 시간과 적막 가득한 고요만 남았을 뿐, 신하경과 나 사이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평생을 안온하게 살 수 있다면, 하고 부질없는 가정을 했다. 그럴 수 없단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꾸만 살고 싶어지게 만드는 이 여자 때문에.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스르륵, 콧등 위로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뻗어 쓸어 넘기자 보송한 그녀의 솜털이 움찔거렸다.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듯 말려 올라갔다.
“아…. 언제 왔어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묻는 목소리에 나른한 졸음이 묻어났다. 그 피곤한 눈망울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매일, 밤마다 괴롭혔던 게 조금은 미안해져 그대로 이마를 쓸었다. 손끝에 감기는 뽀얀 살결이 못 견디게 부드럽다.
“연우는 심전도 검사 갔어요. 오늘 검사 날인 거 깜빡했나 봐요. 아니었음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려고 했는데.”
“누구 맘대로.”
“…네?”
“감금당한 주제에 누구 맘대로 이렇게 나다녀요?”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웃네, 농담 아닌데.”
“그러게. 그러니까. 납치범인 주제에 너무 친절해서 까먹고 있었네요. 나 지금 백강우 씨한테 감금당해 있는 중이었죠?”
“네. 회사에 신하경 씨 어머니 찾아왔는데. 납치당한 딸 찾으러.”
한마디에, 말갛게 머금고 있던 웃음기가 가셨다. 동그랗게 휘어졌던 눈매에 대번 근심이 어렸다.
“왜… 아니… 뭐라세요?”
“자기 딸 납치한 납치범한테 뭔 말을 했을까.”
꾹, 눌러 깨무는 붉은 입술에 엄지를 대어 막았다. 딱하고 안쓰러워서. 매번 습관처럼 아프게 짓물고 터뜨리는 통에 이 여린 살갗이 제대로 남아나질 않는다.
“…미안해요.”
“뭐가. 나한테 납치당한 게? 아님 날 납치범 만든 게?”
“나 때문에 안 겪어도 될 일 겪고, 안 들어도 될 말 들은 거. 내 생떼 들어 주느라 백강우 씨 괜히 곤란한 상황 된 거….”
“착각 심해, 여튼.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당신 부탁 들어주려고 이 지랄을 하는 걸로 보이나 보죠.”
“그래도….”
“그래도 뭐요. 나도 재미 볼 거 다 보고 있는데요, 너랑 자지 헐도록 떡 치면서.”
흔들리는 동그란 눈동자엔 여전히 의심과 걱정이 함께 일렁였다.
“곧…. 좀만 더 있다가, 곧 나갈게요.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다는 거 알아요. 백강우 씨 뒤에 숨어서 계속 이렇게 비겁하게….”
“또 제멋대로.”
“…….”
“볼 재미 다 봤다 이건가? 난 아직인데.”
멈칫한 여자의 턱을 손끝으로 슬쩍 쥐어 코앞까지 당겨왔다.
“솔직히 당신도 그렇잖아. 내 좆 맛 제대로 들려서 이제 어디 도망갈 생각도 못 하잖아. 아냐?”
유혹하듯 길게 혀를 빼고 입술을 진득이 핥아 올렸다. 자연스레 벌어지는 잇새에서 달큼한 향내가 진동을 했다. 그러곤 금세 팔을 뻗어 내 목에 감는 체온이 익숙했다.
그 작은 바르작거림에도 조건반사적으로 아랫배 근육이 묵직하게 딴딴해진다. 이쯤 되면 발정도 병이었다.
한 줌도 안 될 허리를 감아 바짝 당겨 안고 혀를 겹쳐 비볐다. 발정 난 개처럼, 게걸스럽게.
“하아….”
뺨을 쓸고, 목선을 쓰다듬고, 머리칼을 훑어 내리는 손끝에 온통 신하경의 냄새가 가득했다. 이 체향에 안달하고 매달리고 있는 건 확실히 나였다.
“흐, 그만….”
질척하게 혀를 빨며 허리춤 안의 맨살을 쓸어 올리자, 그녀가 내 가슴을 다급히 손으로 짚었다.
“잠깐만요, 그만…!”
“싫은데.”
“연우 곧 들어올 건데 이러면…. 하아!”
있는 대로 몸을 뒤로 물리며 새빨개진 얼굴로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마음이 약해져 못 이기는 척 슬며시 손에 힘을 풀었다.
“꼴렸으면서 빼긴.”
부러 허벅지에서부터 아랫배까지 불룩하게 부피를 키운 물건을 길게 쓸어 보이자 신하경이 기겁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점점 더…. 미쳤어, 진짜.”
헤퍼진 웃음이 샜다. 동시에 문밖에 재잘재잘 말소리가 들리고 드르륵, 문이 열렸다. 연우와 인남이었다.
“거, 검사 다 끝났어?”
미묘하게 느껴졌을 기류에도 태연한 연우의 표정과는 달리, 화들짝 놀란 신하경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얼굴을 붉혔다. 그게 퍽 귀엽고 앙증맞다.
누굴 닮아 눈치가 백 단인 백연우가 아직도 나와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을 거라 착각하는 건지, 뭔지. 하여간 순진해 빠져선.
“뭐야. 그새를 못 참고 따라왔냐, 오빤? 간만에 언니랑 단둘이 데이트 좀 하려고 했더니.”
연우는 입을 삐죽이며 털썩, 침대에 걸터앉았다. 뒤에 서 있던 인남이 들고 있던 카디건을 연우의 어깨에 올렸다.
“언니도 답답할 거 아니냐고. 집에만 갇혀 있으면. 그 갑갑한 기분을 내가 얼마나 잘 알게. 네 글자로 동병상련. 안 그래요, 언니?”
연우는 창문 너머로 비치는 시커먼 덩치의 그림자들을 턱짓하며 진저리를 쳤다. 연우에게 붙여 놓은 가드 둘과 신하경에게 붙여 놓은 가드 둘까지. 복도가 시커먼 그림자로 우글우글 들어차 있긴 했다.
순간 신하경이 터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웃는다. 예뻤다. 나도 모르게 새는 웃음을 참지 못했을 만큼.
“암튼, 오늘은 이따가 검사 결과 면담하러 가야 하니까 글렀고, 다음에 꼭 가요. 내가 식당도 예약해 놓을게요. SNS에서 엄청 가고 싶은 맛집 찾아 놨어요.”
“그래. 그러자, 꼭.”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여자의 미소에 시야가 다 환해졌다.
끊임없이 조잘대는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앉아 있다가 잠시 병실 밖, 복도로 걸어 나왔다. 석상천에게서 걸려 온 전화 때문이다. 내일 오후 시간을 비워 두라는 통보였다.
아무래도 협상 중이었던 아파트 재개발 건에 대해 JK 건설로부터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전적으로 이진수만 의지하고 있던 석상천으로선 퍽 당황스러울 일일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해당 공구가 이진수의 지역구였다. 그간 그렇게 경고를 했어도, 가만히 입만 벌리고 있으면 모든 게 다 입 속으로 떨어져 들어올 거라며 안일하게 굴었던 탓이었다. 어쩌랴. 늘 그랬듯 더러운 뒤처리는 언제나 개의 몫인 것을.
알겠노라 전화를 끊고 다시 병실로 돌아가려는데, 불쑥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우였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지, 하는 짓이 걱정스러워서 경고하는데.”
“뭔 소리야.”
“행동 똑바로 해라, 오빠.”
눈썹까지 들썩거리며 눈에 힘을 준 연우가 주머니에 두 손을 푹 찔러 넣고 내 앞에 다가와 섰다. 말투는 분명한 시비조였다.
“무슨 행동.”
“노선 분명히 하시라고. 순진한 사람한테 상처 주지 말고.”
“무슨 노선.”
“오빠 너 고백은 했니?”
연우는 점점 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바라만 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연우가 급기야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니, 남자들은 왜 이래, 진짜?”
“뭐가. 뭐가 또 심기 불편해서 나랑 박인남을 세트로 묶어? 왜. 인남이 놈이 또 속 터지게 해?”
“사돈 남 말 하시네. 박인남이나 백강우나. 어휴, 짜증 나.”
“또 까불지.”
“하여튼 언니 괴롭히기만 해. 안 그래도 힘든 사람을, 도와주진 못할망정.”
“괴롭혀? 내가?”
지금껏 호구처럼 다 도와준 사람이 누군데. 기막혀 허, 하고 헛숨을 뱉는데 안에 있던 신하경이 걸어 나왔다. 연우가 쪼르르, 얼른 다가가 팔짱을 끼고 다 들리는 목소리로 신하경에게 속삭인다. 행여나 내가 짜증 나게 하면 다 말하라고.
어이없고 억울한데도, 말갛게 웃는 신하경을 보며 나도 픽, 웃고 말았다.
확실히 웃음이 헤퍼졌다. 맹추처럼.
***
차창 너머 어스름, 수평선에 점차 붉은빛이 번져 갔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칠흑처럼 깊었던 어둠은 오간 데 없고, 시뻘건 빛으로, 분홍과 보랏빛으로 색색이 물드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었다.
잠시 멍하게 차창 너머를 응시했다. 바다의 일출이 이런 색일 줄은 몰랐다. 커다란 호수와 병풍처럼 늘어선 산자락에 온통 연무뿐이던 은천과 회색빛 서울에선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던 광경이라.
보고 있으려니 묘해지는 기분에 헤드레스트에 고개를 뒤로 푹 젖혀 기댔을 때였다.
“어디예요?”
여기까지 오는 몇 시간을 내내 미동도 않고 조수석에 잠들어 있던 신하경이 차창 밖 풍경을 두리번거리며 물어왔다.
“드디어 깨셨네.”
“여기….”
“인곡.”
밤새 차를 타고 달려 인곡에 왔다. 어린 신하경이 나고 자란 고향이라던, 인곡리. 바닷가 마을, 말이었다.
“여긴…. 왜요?”
잠에 절어 있던 눈동자가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오고 싶었다며.”
“…….”
“해외도 아니고, 뭐 얼마나 먼 천 리 길이라고. 오고 싶었음 그냥 오면 되지.”
연갈색의 투명한 동공이 천천히 깜빡거리며 내게로 향했다.
“뭘 또 감동받은 눈을 하실까. 심란해서 드라이브나 하려다 갑자기 말이 생각나서 온 건데요.”
속내를 대충 눙치며 시선을 돌렸다. 내 옆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신하경의 시선이 따가웠다.
“좋네. 아침 바다.”
달카닥, 운전석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른 아침, 여름의 내음을 실어 온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보닛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느새 따라 내린 여자가 옆에 다가와 나란히, 해가 오르는 바다를 향해 섰다. 잔뜩 웅크리고 자는 몸에 덮어 줬던 내 슈트 재킷을 그대로 어깨에 걸친 채였다.
“일출 예쁘죠, 여기.”
“…….”
“해 뜨는 거 되게 오랜만에 봐요. 어릴 땐 거의 하루걸러 하루꼴로 모래사장에서 자고 일어나면 보는 거였는데.”
의문 섞은 내 시선에 신하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릴 때요. 학교 다녀와서 집 치우고, 숙제 좀 하다 보면 밤늦게 엄마가 술에 취해서 돌아왔거든요? 이미 잔뜩 취해서 와 놓곤 또 술을 가져와서 마시기 시작하죠. 안주도 없이.”
담담히 이어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에 섞여 부드럽게 들려왔다.
“그렇게 마시고 마시다, 결국엔 얼마 못 가서 완전히 취해요. 당신이 누군지, 당신 앞에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취해선 울고. 울다가 또 소리 지르고, 그러다 집안 물건도 때려 부수고, 미친 사람처럼 자해도 하고. 그렇게 전쟁을 치르듯이 취한 엄마를 말리고, 겨우 잠든 걸 확인하고 나면 새벽 두세 시쯤이 되거든요. 그쯤 되면 집은 완전 엉망진창이고, 누울 자리는커녕 서 있을 자리도 없어서 결국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근데 그 시간에 애가 어딜 가겠어요. 그렇게 나와서도 막상 갈 데가 없으니 시커먼 바다 앞에 와 앉아서 그냥 쪼그리고 자는 거예요. 이렇게, 해 뜰 때까지.”
고작해야 초등학생이었을 나이. 떼를 쓰고 심통을 부려도 괜찮았을 나이에 신하경은 서둘러 어른이 되어야 했던 모양이었다. 나처럼.
“그래서 여기 앉아서 되게 많이 울었어요.”
“왜요.”
“예뻐서.”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양 웃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여자의 얼굴에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어 보였다. 지금에 비하면 차라리 견딜 만했던 시절이라던 말을 문득 떠올렸다. 아마도 여기에 다시 오고 싶었다 말했던 이유도 같은 것일지 몰랐다. 다시,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 내 보고 싶다는 의지와 다짐 같은 것 말이었다.
내가 결코 은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처럼.
“역시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예쁘고, 좋네요.”
어떻게 버텼냐. 힘들진 않았냐.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위로도 많았지만 다 삼키고 담배 연기만 길게 내뿜었다. 정말로 선을 넘어 버릴까 봐. 그녀는 알까. 실은 내가 이렇게나 겁 많고 답 없는 인간이라는 걸.
“그거 피우면 좋아요?”
돌연 내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를 흘긋거리며 물어 왔다.
“딱히요.”
“근데, 왜 피우는데?”
“습관, 그냥.”
“아…. 습관.”
내 말을 따라 작게 읊조리던 그녀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럼 나도 피워 볼래요.”
“피워 본 적은 있고요?”
“없는데 또 가르쳐 줘요, 백강우 씨가.”
“…….”
“키스처럼.”
뻔뻔함에 픽, 코웃음이 샜다.
“뭐 좋은 거라고 가르쳐 달래, 폐나 썩지.”
“백강우 씨 폐는 안 썩어요?”
“나야 상관없으니까.”
“그럼 나도 상관없어요.”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앞에서 재촉하듯 꼼지락거렸다. 어서, 제게도 한 대 내놓아 보라는 듯이. 기막혀 새 담배 한 개비를 손바닥 위에 톡 올려놓자, 얼른 담배를 입에 물곤 이젠 불을 달라 눈썹을 들썩인다.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붉은 해가 드리워진 말간 얼굴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여자가 물고 있는 담배 끝에, 불이 붙어 있는 내 담배 끝을 가져다 댔다. 키스처럼.
“빨아들여요, 세게.”
내 낮은 속삭임에, 신하경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있는 대로 담배를 물고 숨을 들이켰다. 맞닿은 담배 끝에서 담배 끝으로, 새빨간 불꽃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옮겨붙었다. 일순 매캐한 연기를 훅 들이마신 신하경의 잇새에서 밭은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제대로 피우지도 못할 거면서. 새는 웃음을 참으며 손을 들어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고 품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천천히 마셔야지. 급하게 빨지 말고.”
내 말에, 다시금 담배를 입에 가져간 그녀가 슬쩍 나를 올려다보며 숨을 들이켰다. 내가 하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깊게.
“콜록, 콜록!”
그럼에도 또다시 잔기침이 터져 나오고야 만다. 결국 참지 못하고 크큭, 웃음을 터뜨리자 발개진 눈매로 흘기는 여자의 얼굴이 귀여워 눈썹을 긁적였다.
“그냥 피우지 맙시다. 한번 시작하면 끊기도 힘든데.”
“자긴 피우면서?”
“그래요. 내가 피우니까 자기는 피우지 말라고.”
동그랗던 눈매가 대번 세모꼴이 된다.
“싫은데? 나도 피워 보고 싶은데요, 백강우 씨처럼 근사하게.”
“아,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담배까지 따라 하게.”
손가락에 흩날려 감기는 여자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장난스레 읊조렸다. 돌연, 내게 향한 연갈색 눈동자가 멈칫해 흔들거렸다.
“백강우 씨.”
위험 신호였다. 나를 직시하는 그 시선에 가까스로 쥐고 있던 평정이 깨져 버리는 것 같았다.
“나랑, 사귈래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이 당황스러웠으나 내심을 숨기고 표정을 감추며 가만히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정말로 이 여자는, 진창에 발을 담그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구나 싶어서.
“연애해요, 우리.”
쏴아. 밀려드는 파도 소리만 정적을 갈랐다. 후우, 연기를 몇 번이나 내뱉고 주변이 완전히 환하게 밝아질 때까지 나는 한참이나 답 없이 그녀를 바라만 봤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결국, 말 없는 내가 답답했는지 눈싸움이나 하듯 날 보고 있던 여자가 먼저 입술을 달싹거렸다.
“왜 답을….”
“왜요.”
“…….”
“뭐하러.”
“…….”
“나 같은 깡패 새끼랑 연애질하고 사랑 놀음 해서 뭐 하게요.”
“뭘 하잔 게 아니라….”
“그딴 귀찮은 짓 아니어도 할 거 다 하잖아요, 우리. 아닌가? 부족합니까?”
스르륵, 여자의 어깨 위에 걸쳐 있던 재킷이 바닥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수많은 원망을 머금은 눈빛이 아스라했다.
“나, 여기 왜 데려왔어요?”
돌연 입술을 꼭 깨문 채 내게로 완전히 몸을 돌린 신하경이 작정이나 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대답, 했잖습니까.”
“거짓말. 내 말 다 기억하고, 나 생각해서 여기 데려온 거잖아요. 아니에요?”
“한국말 번역을 희한하게 하시네.”
“말 희한하게 하는 건 백강우 씨예요. 왜 자꾸 나쁘게 말해요? 진심도 아니면서.”
“내 진심을 아주 잘 아나 봅니다.”
“네. 적어도 지금 하는 말, 진심 아니란 건요.”
“그럼 나 같은 놈한테 진심이니 뭐니, 따져 봐야 아무 의미 없단 것도 잘 알겠네.”
여자가 손가락을 꾹 움켜쥐었다.
“거짓말.”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꼭 나를 추궁하는 것 같은 눈으로.
“상견례 날 그렇게 나타난 거, 귀찮은 일 감수하면서까지 나 강우 씨 집에 숨겨 준 거 그리고 규현 씨 일까지, 아무 의미 없다고요? 그냥, 충동적으로 드라이브하듯이 한 거라고요? 전부 다?”
신하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이규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걸 알고도 어떻게 내게 이런 말을 하는가, 혼란스러웠다. 이 겁 없는 여자의 무모한 마음이 도통 가늠이 되질 않아서.
“아무 의미 없다면서 왜 날 안 돌려보내요? 내가 이규현이랑 결혼을 하든 말든, 계속 지금까지처럼 엄마 꼭두각시로, 인형처럼 살다 죽든 말든. 어차피 상관도 없는 여자한테, 백강우 씨처럼 바쁜 사람이 귀찮게, 왜. 뭐 하러 이러는 건데요?”
“착각이 심하면 이렇게 과대망상으로 이어지기도 하나 봅니다.”
“나 백강우 씨랑 연애하고 싶어요. 강우 씨에 대해 더 알고 싶고요. 이렇게, 계속 같이 있고 싶고, 그냥, 다…. 그래요. 솔직히 말하면 강우 씨랑 있을 때 내가 진짜 나 같아지는 것 같아서, 정말로 너무 안심이 돼서 다시는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 솔직하고도 가여운 여자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신하경은 여태껏 진창에서 잘 버티고 살아온 나를 끌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덧없었다.
그냥 뒤도 돌아보지 말고, 똥 밟았다 셈치고 도망가라고 윽박이라도 질러야 하나.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심을 구태여 건드려 터뜨리려는 이 무모한 여자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복잡해진 상념의 타래에 미간이 짐짓 움츠러들었다.
“나 백강우 씨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뇨, 좋아해요. 당신이랑 안고, 섹스하는 거 말고 다른 것도 같이하고 싶단 생각이 들 만큼. 근데 나만 이래요? 나만 강우 씨한테 이런 마음 들어요? 정말로 나만….”
“네.”
“…….”
“혼자만 그럽니다. 정신 좀 차리죠. 같이 장단 맞추고 놀아 줬더니 연애 놀음까지 하자고 조르는 건 좀, 너무 양심이 없으시잖아, 신하경 씨.”
짧게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몸에 감았던 손을 차갑게 떼어 내곤 몸을 바로 세웠다.
“강우 씨.”
“적당히 합시다. 다 좋은데, 관계 질척질척해지는 거, 나한테나 신하경 씨한테나 별로 좋을 거 없어요.”
“…….”
“너무 서운해하진 말고요. 말했지만 아직 난 그쪽한테 볼 재미가 더 남았으니까.”
구둣발로 담뱃불을 꾹 눌러 꺼트렸다.
“참. 친구가 정신과 의사랬나? 시간 나면 친구한테 가 보는 게 어때요. 과대망상도 공황처럼 심해지면 약도 없을 건데.”
냉랭하게 쏘아붙이자 당황한 신하경의 입술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허예진 그 얼굴을 더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어 그대로 돌아서 차에 올라탔다.
탁, 차 문 닫히는 소리에도 그녀는 미동도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윈드실드 너머,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비현실적일 만큼 눈부신 배경이었다. 떠오른 아침 해에 황홀할 만큼 빛나는 윤슬이 찬란한 색으로 반짝여서. 그 오색 찬연한 빛을 잃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감정을 자각할수록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절대로, 내 세상에 이 여자를 들여선 안 된다는 생각. 이 여자에게 내 어둠을 결코 전이시키지 않겠단 결심이.
달카닥.
조수석 문이 열리고, 다소 처연해진 얼굴의 여자가 올라탔다.
“미안해요. 양심 없게 굴어서.”
메마른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의 시선이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근데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발갛게 떨리는 입술이 고집스러웠다.
“백강우 씨 좋아하게 된 거.”
고개를 돌려 다시 시선을 맞춰 온 신하경의 동공이 반짝, 빛을 냈다.
“좋아해요.”
“…….”
“그렇게 됐어요, 미안하지만.”
기어코 심장이 덜커덕 내려앉았다. 이번엔 확연히 내게 답을 바라는 눈빛이 아니었다.
“사람이 언제, 누구한테 제일 약해지는지 압니까.”
제멋대로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추슬러 입을 열었다. 퍼석거리는 목소리가, 위선 같은 스스로가 역겹고 듣기 싫다.
“궁지에 몰렸을 때 만난 사람. 가장 절박한 순간에, 날 도와준 사람.”
“…….”
“내 손 잡아 준 사람.”
연갈빛 눈동자 속에 비친 내 꼴을 보고 있노라니 입 안이 썼다.
“사람 참 어리석고 단순하죠. 위협하고 협박할 땐 눈 하나 깜짝 않던 인간들, 일부러 막다른 데까지 몰아붙였다가 숨넘어가기 직전에 손 한번 내밀어 주면 뭘 그렇게들 감동받는지. 보고 있으면 한심하고 웃겨선.”
그러니까 더는 한심하고 우스운 짓 하지 말라고.
“자주 하는 일이라서요. 그래서 신하경 씨한테도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쳤습니다. 사람 마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노는 거, 나한텐 지겨울 만큼 쉽고 간단한 일이라.”
“백강우 씨.”
“악 받쳐서 망아지처럼 날뛰던 인간들도 한순간에 알아서 기게 하고 죽어도 없다던 돈까지 탈탈 털어 싸 들고 오게 만들 수도 있다고, 내가.”
“…….”
“그러니까 나도 미안해요. 정상도 아닌, 아픈 사람한테 여지를 너무 줬죠.”
침잠하듯 가라앉은 눈동자에 알알이 어지러운 마음들이 들어찬다. 쓰렸지만, 비로소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붉어지는 눈동자를 외면하고 손끝으로 꾹, 시동을 걸었다. 돌아갈 길이 걱정스러웠다.
아니, 돌아갈 수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