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ude RAW novel - Chapter 14
13
잘 빚은 주전자 끝에서 흘러나온 술이 쪼르르, 소리를 내며 잔을 채웠다.
“애썼다.”
석상천은 퍽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고, 나는 고개를 돌려 그가 따라 준 청주를 한 모금 깊게 들이켰다. 알싸한 꽃향기가 입 안 가득 퍼져 미간을 조였다. 썩 즐기는 맛은 아닌 까닭이었다.
“대체 이진수를 어떻게 구워삶아 놨길래 그 야만스러운 JK 놈들이 머리를 바짝 조아려? 나한텐 이 의원한테 놀아나지 말라고 뒷담을 그렇게 까 놓고는.”
난항을 겪던 협상에 불현듯 이진수가 끼어들어 다시 석상천의 손을 들어줬다. 대체 무슨 변덕인진 알 수 없었으나, 내가 참석한 오찬 자리에서 갑자기 말을 바꿨다는 게 핵심이었다.
시행사 선정 우선권을 따내지 못하면 어차피 판을 엎을 생각도 없진 않았기에, 도리어 상황은 우리 쪽에 유리하게 뒤집어졌다. 가능성 없다고 생각하고 내질렀던 조건까지 얹어 얻은 거였다.
“하여튼 우리 백 이사, 일 하나는 기차게 해. 응?”
칭찬이 아니었다. 덕분에, 석상천은 내게 더 큰 의심을 품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내가, 언제든 자신을 치고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이었다.
의심이 커지고, 경계도 커지고. 그러고 나면 결국 위기감과 적의도 함께 몸집을 키우겠지.
어쩌면 인남의 말대로 당분간 바닥을 납작 기는 게 유일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은 건 여전히 철없는 객기인 건가.
끝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도리어 살고 싶어져서였다.
“이진수랑 거리 두셔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왜, 진짜로 그놈이 너한테 나 밀어내고 이 자리에 너 앉히겠단 약속이라도 하던?”
픽, 비뚤어지는 한쪽 입꼬리에 숨기지 못한 적개심이 훤히 드러났다.
“하기야, 이 의원도 그놈도 정상은 아니야. 대통령 하겠다고 자기 아들 반병신으로 만들고도 좋다고 사례금 내미는 미친 새낀데.”
탁,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술잔이 비어 있다. 사나운 눈길을 외면하고 이번엔 내가 술 주전자를 들었다.
“그래서 강우 너같이 미친놈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지.”
“…….”
“시키지도 않은 미친 짓을 했다면서?”
잔을 채우자, 나를 보며 술을 단번에 들이켜는 얼굴에 설핏 비웃음이 어렸다. 무슨 뜻인가.
“납치? 제신 그룹 신민철이 딸내미를? 간도 큰 새끼.”
알 것 같았다. 우려했던 대로 석상천이 신하경과 나 사이의 일을 다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오래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본다. 백강우가 계집애한테 미쳐 돈 걸 다 보고.”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어차피 다 들어 알고 있을 이야기를 구태여 변명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모르는 놈들은 네놈이 이진수랑 손잡고는 아주 날 회 쳐 먹고 싶어서 혈안이 된 거라고 하던데, 내가 널 모르냐? 네놈 열일곱, 철없던 시절부터 내가 거둬 키웠는데, 아무한테나 배 까고, 바닥 길 놈이었음 애초에 주워다 기르지도 않았어.”
판단력이 흐려지고 총기를 잃었다 해도 위기를 감지하는 눈치 하나만큼은 여전한 것 같았다.
“너야말로 몸을 좀 사리는 게 어떠냐. 정신 못 차리고 겁도 없이 미친 짓 한 거 보면 어지간한 것 같긴 하다만?”
“…….”
“아직은 그래도 강우 네 약점이 내 약점이 되는 건데. 응?”
석상천은 허옇게 센 머리칼을 젖혀 넘기며 잘 썰린 회 한 점을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내가 널 왜 거둬다 길렀는지 알아? 네가 강에 빠져 뒈질 뻔한 내 아들놈 건져 내서? 내 밑에 너만큼 주먹 쓰고 머리 잘 돌아가는 쓸 만한 놈이 없어서? 천만에.”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는다.
“너 같은 미친놈은 처음 봐서.”
석상천은 치기 넘치고 어렸던 열일곱의 나를 회상했다. 그때의 그에게 부릴 개가 필요했던 것처럼, 그때의 나에게도 진창에서 붙잡을 동아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내 아들 목숨값으로 여동생 수술비나 요구하고. 그렇게 처맞고도 너, 겁도 없이 나한테 칼 들고 찾아왔던 건 기억하냐? 통 죽는 걸 안 무서워했어. 고작 스무 살도 안 먹은 놈이, 혈기는 들짐승처럼 들끓는데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늙은이처럼 겁대가리가 없었어, 넌.”
굶주린 개가 굶주린 개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그러니 별수 있나, 들여야지. 내가 죽이라면 죽이고. 죽으라면 죽을 놈이 날 그렇게 작정하고 홀리는데.”
석상천이 다시 주전자를 들며 내 빈 잔을 향해 턱짓을 했다. 작은 잔의 옆구리를 집어 들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손목을 받쳤다.
“어떠냐, 강우야. 난 아직 그래도 너만 한 놈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긴 주둥이에서 쪼르르, 소리를 내며 흘러나온 술이 빈 잔을 투명하게 채우기 시작한다.
“죽이라면 죽이고, 죽으라면 죽을 놈. 그거 계속해야지, 강우야.”
조소하며 응시해 오는 석상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의 모면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려야만 알량한 평화를 연명할 수 있을 텐데. 그 지극히 합리적인 답을 알면서도 할 수가 없었다.
쪼르륵. 기울어진 주전자의 술 줄기가 잔을 가득 채우고도 멈출 줄을 모른다. 넘친 술이 주르륵, 손과 소맷귀를 적시고 팔을 타고 흘러 테이블 위로 흥건히 쏟아졌다.
고집스레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 내게 석상천은 명백한 선전 포고를 하는 거였다.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듯이.
지잉. 지이이잉.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기어코, 주전자에 담겨 있던 술을 완전히 부어 비운 석상천이 핏,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거둬 갔다. 불길한 예감에 젖은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인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신하경 씨가 없어졌습니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 시각, 당연히 집에 있어야 할 여자가 없어졌다는 게 무슨 의미인 건지.
그대로, 핸드폰을 움켜쥔 채로 석상천을 응시했다. 음흉하게 웃는 노안을 보며, 모호하던 불안의 실체를 선명히 알 것 같았다.
“그래. 넌 한 번도 나한테 고개 숙인 적 없었지.”
“뭐 하신 겁니까.”
“그때 널 들이는 게 아니었어. 분명 감당 못 하게 사나워질 늑대 새끼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어리석었다.”
“무슨 짓 하셨습니까.”
“무슨 짓일까. 세상 무서운 거 없이 저 잘난 것만 잘 아는 놈 내 발밑에 꿇려다 앉히려면, 내가 무슨 짓까지 해야겠냐, 강우야.”
“회장님.”
“궁금했어. 눈앞에서 난도질을 해 놔도 눈 하나 꿈쩍 안 할 놈이 그깟 계집애한테 뭐가 그렇게 안달이 나서 애지중지, 꽁꽁 싸매고 숨겨 놨을까.”
“그래서요. 납치라도 하셨습니까.”
“내가? 그럴 리가. 납치는 네가 했지.”
의도가 뭔지, 꿍꿍이가 뭐였는지 알 것 같았다. 방심을 했다. 이런 식으로 급습하듯 내 숨통을 조이고 비열한 짓을 하리라곤 미처 예상 못 했다. 적어도 일말의 염치와 체면은 지킬 사람이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석상천은 완전히 변했다. 급기야는 스스로 괴물이 되길 선택해 버린 것 같았다. 끔찍했다.
“신하경 제신 그룹 사람입니다. 회장님께서 저처럼 무모하고 간 크지 않다는 거 잘 압니다. 갖고 계신 것도, 지켜야 할 것도 참 많으시죠.”
“그래. 그거 다 강우 네가 만들어 준 것 아니냐. 그래서 너도 네 것처럼 휘젓고, 설치고.”
“저한테 원하시는 게 뭡니까.”
말을 끊고 본론을 캐묻자, 석상천이 조소했다.
“내가 제대로 보긴 봤나 보다. 네놈이 이렇게 초조해하는 걸 보면. 미쳤구나, 완전히. 미쳐 돌았어.”
“말씀하시죠. 미친놈 자극은 그만하시고.”
“내가 이 의원한테 좋은 선물을 하나 했으면 하는데 말이다.”
“…….”
“민우당 김영진.”
누가 봐도 유력한 대선 후보인 이진수의 유일한 대항마로 일컬어지는 여당 내 대선 주자 김영진. 결국 이진수가 이번 건에서도 한 발 뒷걸음질을 쳐 내 역성을 들었던 이유를 선명히 알 것 같았다.
“아주 골치 아픈 놈이라던데. 말도 많고, 탈도 많고. 사방 천지에 적인 모양이더구나.”
“…….”
“같은 깡패 새끼들이라 그런지, 여기나 정치판이나 돌아가는 건 다 매한가지야. 여하간에 적이 많으면 오래 살기가 힘든 것도.”
그간의 잡일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대선 후보인 국회 의원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석상천도, 이진수도 눈엣가시를 말끔히 처리하고 함께 죽어 줄 사냥개가 필요한 거였다.
“자살 같은 타살. 타살 같은 자살. 어느 쪽이 나을진 강우 네가 고르고.”
“그냥 더는 안 힘들어했으면.”
“살고 싶어졌으면 좋겠어요, 백강우 씨가.”
그 찰나, 왜 그 말이 떠올랐을까. 살고 싶다는 생각을 넘어,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단 생각이 들게 하는 신하경의 애원이 머릿속을 가득 어지럽혔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더는 역겨운 말을 듣고 있을 비위가 없어 몸을 일으켰다.
“그때. 내 아들놈 목숨 구해 줬으니 네놈 여동생 하난 내가 평생 어떻게든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던 거 기억하냐?”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고 비열한 놈의 얼굴을 돌아봤다.
“강우 네놈이 아무리 괘씸해도, 아무리 내 턱 끝에 칼을 들이밀고 위협했어도 난 지금껏 내 눈에 흙 들어가는 날까지 그 약속 하나는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협박이십니까?”
“협박이 아니라 약속. 죽는 날까지 내가 너한테 지킬 약속, 그 얘길 하잔 거야.”
“차라리 거래를 하자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적당히 노력한 값은 쳐 드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속 보이는 뻔한 수에 실소를 터뜨리자, 석상천의 표정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더는 저한테 그런 약속 같은 거 하실 필요 없습니다. 안 합니다. 아무것도.”
“앉아!”
등 뒤에서 노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렇게 죽지 못해 안달하던 놈이!”
죽지 못해 안달하던 백강우는 정말로 죽었다. 이제야 간절히 살고 싶어졌다. 신하경이 바랐던 것처럼.
석상천의 고함 소리를 무시하고 드르륵, 장지문을 젖혀 열었다. 그대로 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나오며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감출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잠긴 목소리가 짓터져 나왔다.
“이택민 수배해. 그 새끼부터 조지고 갈 거니까.”
***
잠깐 산책을 나갔다던 신하경은 집 근처가 아닌 백화점 여러 개가 줄지어 늘어선 번화가 한 복판에서 종적을 감췄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행선지는 중고 바이올린 판매점과 맞춤 슈트 전문점. 신하경은 가지고 있던 자기 바이올린을 맡기고 가장 비싼 드레스 셔츠와 남자 넥타이를 구입했다.
도대체 뭘 하려 했던 건지 알 수가 없다. 행여나 이혜영에게 끌려가게 될까 걱정을 하며 잘도 웅크리고 숨어 있던 여자가 왜 갑자기 말도 없이 무모한 외출을 한 건지. 그것도 하필 이런 순간에.
이택민을 끌고 오기 무섭게 이택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적잖게 당황한 주제에도 시간과 장소를 통보하고 허세에 가까운 위협을 하는 놈의 의도는 다분히 뻔하고 질이 낮았다. 고작 이런 방법으로 나를 밀어내고 내가 쥔 걸 뺏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같잖은 통보를 무시하고 곧장 애들을 데리고 장소로 향했다.
크게 똬리를 튼 불안이 삐죽삐죽 새기 시작했다. 내 일과는 하등 상관도 없는, 나 때문에 진창에 빠져 오물을 뒤집어쓴 신하경을 생각하면 마음이 바빠져서.
욕심에 눈이 먼 석상천과 이택규에게 제신 그룹이고 뭐고 그딴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닐 거였다. 여자 하나를 없애고라도 원하는 더 큰 걸 얻을 수 있다면, 줄곧 갈망해 왔던 본인들의 목적을 이루면 그뿐일 테니. 게다가 신하경에게 일이 생기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다름 아닌, 바로 나였으니까.
제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 폐공장 초입에서부터 지키고 선 이택규의 시커먼 무리들이 끝도 없이 빼곡했다.
인남이 차 문을 열고 애써 여기까지 끌고 온 이택민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이택규의 친동생이자 놈이 가장 믿고 일을 맡기는 수족이기도 했다.
이미 피떡이 된 이택민의 얼굴을 알아본 놈들이 설설 뒷걸음질을 쳤다. 이택민을 질질 끌어와 무릎 꿇린 원재가 가져온 의자에 앉아 느긋이 날 서린 칼을 꺼내 들었다. 겁에 질려 시뻘겋게 핏발이 선 이택민의 눈을 가만히 마주했다.
“뭐… 뭐, 뭘 하려고…! 이 미… 미, 미친…!”
인남이 이택민의 손을 끌어와 포박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놈의 엄지를 댕강, 잘라 냈다.
“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드넓은 공터에 메아리쳤다. 지켜보던 시커먼 놈들이 동요하듯 웅성거리다 내가 다음 손가락 마디를 그러쥐자 다시금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윽…!”
순식간에 손가락 두 개가 잘린 이택민은 이젠 악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실신하듯 눈을 까뒤집으며 온몸을 발발 떨어 댔다.
흘긋, 눈을 치켜뜨고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택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나는 이택규가 제 발로 걸어 나올 때까지 이택민의 열 손가락을 하나씩, 모두 잘라 낼 생각이었다. 그대로 세 번째 손가락을 잡았을 때였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시커먼 무리 사이로, 잔뜩 당황한 얼굴의 이택규가 다급히 걸어 나오며 소리를 꽥 내질렀다. 그 역겨운 얼굴을 무감히 바라보며 그대로 손끝을 툭, 쳐 냈다.
“윽!”
시뻘건 핏물이 눈앞에 튀어 올라 얼굴과 셔츠를 적셨다. 살갗에 미적지근한 피가 닿자 도리어 뜨겁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손끝이 서늘해진다.
“왔잖아! 그만 안 해? 씨발!”
나를 죽일 듯, 성큼성큼 가깝게 걸어오는 이택규의 앞을 애들이 막아서자, 그제야 멍청히 서 있던 이택규 쪽 놈들도 쭈뼛쭈뼛 몸을 움직였다.
“왜 혼자야. 데려간 사람은.”
태연을 가장한 겉과 달리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조급하기만 했다. 아픈 여자였다. 한 번 발작을 시작하면 숨도 못 쉬고 헐떡거린다는 걸 잘 아는데. 게다가 위급한 상황에 약 없이 버틸 수 있는 병이 아니질 않은가.
놈의 네 번째 손가락을 잡아 쥐어 펼치자, 이택규와 이택민이 동시에 경기하듯 나를 쏘아봤다.
“그년, 씨발! 안에 얌전히 재워 놓고 나왔거든?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이 미친 새끼야!”
“으윽…!”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 대는 이택민과 칼을 든 나를 번갈아 바라보는 이택규의 눈이 그악스럽게 떠졌다.
“얼른 데려오지? 아직 일곱 개나 남았는데.”
그사이 툭, 손 끝을 내리쳤다. 후드득, 시뻘겋게 떨어지는 핏물이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이, 미친…! 그만하라고, 씨발! 너 미쳤어?”
“미친 건 너지, 택규야. 오냐오냐 눈감고 키워 줬더니 회장님 흔들어서 일을 이렇게 벌여 놓고. 네가 제정신이 박혀 있는 새끼면 이런 짓은 못 했겠지, 감히.”
눈이 시뻘겋게 변해 나를 향해 달려들려는 놈 앞을 인남이와 애들이 버티고 막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함부로 굴 깜냥의 놈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게다가 동생을 제 목숨처럼 아끼던 놈이 아닌가.
“혀… 형!”
이택민이 제 형을 부르며 살려 달라 발발 떨어 댄다. 이택규의 의지 잃은 눈동자가 사방팔방 정처 없이 흔들거렸다.
“하! 백강우, 네가 지금 뭘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아는 것 같은데. 신하경이 지금 내 손에 있고, 지금 당장이라도 건드릴 수 있어. 지금이라도 그년 목 따 와서 네 앞에 보여 줘?”
천성이 비열하고 악한 이택규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머리가 나쁘단 거였다. 상대의 사람을 약점 잡아 인질로 데려오면서, 기본적으로 제 사람에 대해 생각지 않았단 건 놈의 머리가 딱 거기까지란 소리였다.
나야말로 이깟 놈을 밟지 못해 그간 그냥 보고만 있었던 게 아니다. 상대할 가치가 없어서였지.
“해.”
놈의 미간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건드려. 건드리고 싶으면. 다 네 좆대로 해 봐.”
“하…!”
“나도 이 새끼 마디 하나하나, 살점 하나하나 다 발라서 죽이면 돼. 그게 뭐 별거라고.”
“으윽!”
그저 손을 꽉 움켜쥐었을 뿐인데, 이택민이 발작하며 거칠게 신음했고 이택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쉴 새 없이 욕을 지껄여 댔다.
“씨발, 미친 새끼….”
“적당히 까불자.”
핏발 선 이택규의 눈알이 나를 쏘아봤다.
“괜히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 굴리느라 애쓰지 말고, 적당히 굴어.”
“…….”
“주제넘게 욕심부려서 튀어나왔다간 나보다 네가 먼저 썰려, 택규야.”
툭, 결국 완전히 힘 풀린 왼손의 마지막 손가락마저 잡아 쥐자, 이택규가 부들거리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야! 씨발! 그년 데려와!”
흠칫 놀란 덩치들이 후다닥, 움직여 어디론가 뛰어갔다. 나는 이택민의 왼쪽 손목을 툭 밀어내고 다시 오른 손목을 잡아 끌어왔다.
더는 반항할 힘도 잃은 이택민이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울고 빌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 달라고. 잘못했다고.
한심스러운 면상을 무심히 응시하다 둔탁한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서 비틀거리며 끌려 나오는 신하경의 얼굴이 시허옜다. 창백하게 질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차갑게 식었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작 대여섯 시간쯤 지났을 뿐인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싶을 만큼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미간을 흠씬 구기고 초점을 맞춰 신하경을 응시했다. 가물대는 눈꺼풀을 무겁게 깜빡여 나를 알아본 그녀의 두 뺨이 파르르 떨렸다.
왜 그러냐고, 괜찮느냐고 물으려다 나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발작하듯 몸을 떨며 뒷걸음질을 치는 여자의 표정이 잔뜩 겁에 질려 있는 까닭이었다. 품에 안겨 울먹이고, 좋아한다 고백하고, 내 옷자락을 꽉 그러쥐던 얼굴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섭다. 두렵다. 역겹다. 혐오스럽다….
동요하는 눈망울 가득, 수많은 부정적 감정들이 보이고 읽혀졌다. 그 투명한 동공에 어린 건 다름 아닌 나였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흡사 괴물 같은 모습의 나.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얼어붙었다. 이제야 내 진짜 모습을 제대로 마주한 여자에게, 추하고 끔찍한 괴물일 뿐인 나를 알아본 그녀에게 나는 아무런 항변도 할 수가 없었다. 손을 뻗을 수도 없다. 나조차도 이렇게나 혐오스러운 나인데….
이성을 잃은 신하경은 괴물에게서 도망치려는 사람처럼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가슴이 가쁘게 들썩이더니 이내 가쁜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까무룩, 눈이 뒤집히고 호흡이 거칠어지자 신하경을 붙잡고 있던 놈들이 더 당황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또 공황 증세가 온 것 같았다.
그대로 이택민의 오른 손등에 칼끝을 푹 꽂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이! 데려왔잖아, 미친 새끼야!”
이택민보다 더 큰 이택규의 절규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신하경에게로 다가가 바닥으로 푹 늘어진 몸을 일으켜 품에 안았다.
“신하경 씨.”
숨을 헐떡이는 안색엔 일말의 핏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신 차려.”
“…….”
“신하경.”
몇 번이고 뺨을 두드려 불러도 통 정신을 못 차리는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행여 소지하고 있던 약이 있을까 싶어 여자의 카디건 주머니를 뒤적일 때였다.
헐떡이며 나를 올려다보던 신하경의 눈동자가 터질 듯 부풀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흉기가 눈앞으로 날아왔다.
“이 씨발 새끼야!”
피 칠갑이 된 한 손을 붙잡고 온몸을 덜덜 떨고만 있던 이택민의 고함 소리가 돌연 귓전을 울렸다. 힘이 빠질 대로 빠져 바닥을 기고나 있다고 생각했던 이택민이 칼을 집어 든 거였다.
칼날을 응시하며 재빨리 손을 뻗었다.
“흐으…!”
그러나 나는 칼날을 쥐지 못했다. 칼은 엉뚱하게도, 벌떡 몸을 일으킨 신하경의 어깨에 가 푹 꽂혀 있었다. 아이보리색 상의에 시뻘건 핏물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 신하경을 확인했다.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짓을 한 건가.
곁에 있었음에도 이택민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을 막지 못했던 인남이 그런 나를 대신해 이택민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를 신호로 이택규와 그의 무리들이 금방이라도 전쟁을 시작할 것처럼 우리를 에워쌌다.
그러나 나는 정신이 나가 오로지 품 안에 안은 여자의 어깨를 감싸 쥔 손을 떨 따름이었다.
“하아….”
가늘게 이어지는 숨소리를 듣는 내내 아무 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머릿속 사고가 있는 대로 우그러지고 세상이 무너지듯 아른대서. 이런 상황은 계획에도, 상상에도 없던 일이라서.
쨍그랑. 다급히 꽂혔던 칼을 빼내 집어 던지고, 벌어진 상처를 꾹 눌러 감쌌다. 손바닥이 신하경의 피로 흥건히 젖어 간다. 와중에도 신하경은 올려다보는 시선을 내게서 떼지 않았다. 여전히 죽을 것처럼 숨이나 헐떡거리는 주제에, 꼭 다행이라는 듯이 나를, 그렇게….
“신하경.”
신하경의 눈꺼풀이 점점 무겁게 내려가고 있었다. 창백한 뺨을 내리치고 흔들어 댔으나 가물거리는 눈꺼풀만 깊이 한 번 떴다 감았을 뿐, 그 뒤론 완전히 눈을 감았다. 숨조차 제대로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눈이 돌았다. 아니, 눈앞에 시뻘건 불이 일었다.
여자를 들쳐 안고 서둘러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구급차를 부르라며 내지르는 이택규의 목소리와 그대로 사라지려는 나를 어쩌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놈들의 웅성거림이 현실감 없게 들려왔다.
우웅우웅, 진공 같은 이명이 귓가에 울었다. 모든 게 느릿하게 들리고 보였다. 아니, 들리고 보이는 건 오로지 시체처럼 창백해진 여자의 얼굴뿐이었다.
급하게 시동이 걸리고, 차는 빠르게 병원을 향해 내달렸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에 손바닥을 얹자, 델 듯이 뜨거운 열기가 홧홧하게 올라왔다. 그런데 왜 또 이렇게 몸은 차갑게 느껴지는 건지. 어쩔 줄 모른 채 시뻘겋게 벌어진 어깨의 상처를 막느라 허둥대며 여린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문득 시선을 끌어내리는데, 어깨가 아닌 하체에서부터 배어난 시뻘건 핏물이 가죽 시트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짧은 사이, 무슨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닌가. 진창 속 내 그랬듯이. 머릿속엔 온갖 나쁘고 불행한 상상들이 꼬리를 물었다.
행여나, 혹시나 싶은 불안감에 발목까지 덮여 있던 스커트를 훅 걷어 올렸다. 팬티를 흠뻑 적시고도 모자라 하얀 허벅지 사이를 타고 흐르는 벌건 핏물이 흡사 뱀처럼 그녀의 허벅지를 칭칭 감고 있었다.
“허.”
헛숨이 짓터져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이기에 왜 하혈까지 하는 건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발끝에서부터 야금야금 올라오기 시작한 불안이 어느새 머리까지 완전히 차올라 나를 잠식해 갔다. 덕분에 시야는 자꾸만 차단됐고 머릿속은 시허옇게 질려만 갔다. 차갑게 식었던 피가 거꾸로 치솟는,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버거웠다. 당장에라도 이 차를 돌리고, 신하경을 이렇게 만든 놈들의 면상을 짓이겨 버리고 싶을 만큼.
슈트 재킷을 여자의 몸에 훅 올려 덮고 이를 바득 물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내 자신에게 울화가 치밀어서였다. 나는 여전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든 여자의 코 밑에 손끝을 가져다 댄 채 병신처럼 안절부절,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마른세수를 하며 갈라진 탄식을 내뱉었다.
사이렌 소리로 혼잡한 병원 입구를 향해 차가 돌았다. 끼이익, 급하게 바퀴 미끄러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밖은 온통 잿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