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ude RAW novel - Chapter 17
16
“여튼 요즘 진짜 이상하다니까요? 자꾸 나한테 뭐 숨기는 것처럼 물어도 대답 못 하는 것도 많고, 얼빠진 사람처럼 자주 넋이 나가 있질 않나.”
연우는 미간에 힘을 주며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윤하를 품에 안고 인남의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덥석 결혼반지를 받는 게 아니었는데….”
“왜. 후회돼?”
그런 연우가 귀여워 설핏 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이제 두 달 후면 스무 살이 되는 연우에게 얼마 전 인남이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했단 얘길 들었다. 그녀는 반지를 받기는 받았지만, 20대의 꽃 같은 청춘을 결혼으로 시작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하더라도 5년 뒤에나 하는 것으로 대답을 했다고 했다.
“아니, 그렇잖아요. 이제 스무 살인데 벌써 유부녀라니. 우리 오빠 알면 진짜 난리….”
일순 연우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으나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괜찮다고.
1년.
그리움은 더 깊어졌어도 슬픔은 다소 무뎌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1년 전 나는 백강우와 이별했고 석 달 전 윤하를 낳았다. 이제 막 갓 백일이 지난 아이는 건강하고 예뻐서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아이는 내게 정말로 새로운 세계에 떨어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했다.
윤하가 없었더라면, 이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행복과 환희의 날들이었다.
“근데 윤하는 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순해요? 아무래도 성격은 오빠보단 언니 쪽 같은데.”
연우는 제 손가락 하나를 꽉 움켜쥔 윤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외모는 뭐, 오빠를 더 많이 닮은 것 같긴 하죠?”
더 많이 닮았다는 말보단 백강우를 고대로 빼다 박았다 말해야 정확한 표현이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진하지 않은 쌍꺼풀이 진 선명한 눈매, 오뚝 솟은 콧날 그리고 붉은 입술까지. 확연히 나보단 그를 쏙 빼닮은 얼굴이었다.
“백일 지나더니 아주 그냥 이목구비가 더 또렷해진 게 완전 미인이네. 언니, 얘 나중에 연예인 시키는 거 어때요?”
조카에게 콩깍지가 푹 씐 연우가 퍽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오늘도 이렇게 종일 아이를 보고 있으면서도 힘든 내색은커녕 눈을 떼지도 못하는 그녀였다.
그런 연우의 모습에서 문득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이를 봤다면 그도 분명 이렇게 좋아했겠지, 싶어서. 부질없는 상상을 끊어 내려 애써 고개를 돌렸다.
“어휴, 이뻐. 우리 윤하는 어쩜 이렇게 화사한 색도 찰떡처럼 잘 어울릴까?”
연우는 윤하의 손목에 내가 만들어 채워 놓은 하늘색 매듭 팔찌를 보며 아이를 얼렀다.
“언니가 만든 거예요? 예쁘다.”
“윤하 잘 때 틈틈이 만들었어. 심심해서.”
“전에 내가 언니랑 오빠한테 만들어 준 거랑 비슷하네.”
그녀가 흰색과 검은색, 두 개의 팔찌가 끼워진 내 손목을 흘긋 보며 웃었다.
“이뻐 죽겠다. 우쭈쭈, 우리 조카. 고모가 너 보고 싶어서 병원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겠잖아. 응?”
사람을 알아보긴 하는 건지, 연우는 자신을 보며 배시시 웃는 아이가 영 사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힘들게 먼 길을 왔어? 윤하 데리고 내가 간다니까.”
“윤하 때문에 정신없을 텐데 언니가 뭐하러요. 그리고 저 요즘에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한 상태라서 괜찮아요. 딱히 할 일도 없고.”
아무리 할 일이 없다 해도 서울에서 인곡까지 차로 달려 두 시간 반 거리였다. 나와 윤하를 보겠다고 이 먼 바다 마을까지 자주 놀러 와 주는 그녀와 인남에게 그저 고마운 마음이었다.
끼이익.
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남이 목장갑을 벗으며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들고 있던 주스 컵을 들고 그에게 다가가 건넸다.
“다 고쳤어?”
윤하를 안은 연우가 들어선 인남을 바라보며 물었다. 인남은 몇 주 전, 태풍에 무너진 마당 벽돌담을 손봐 주러 다녀온 참이었다.
“임시로 당분간은 버틸 순 있게 해 놓긴 했는데…. 그래도 빨리 사람 부르셔서 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형수님.”
“고마워요, 인남 씨.”
진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곡에 내려와 이 집에 자리를 잡고, 윤하를 낳기까지 인남과 연우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꽤나 힘들고 어려웠을 상황이 많았었다.
특히나 박인남은 왜인지, 백강우의 죽음에 늘 부채를 지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해서 그의 아이를 가진 나와 그의 아이인 윤하를 꼭 가족처럼 돌봐 주곤 했다. 피가 섞여야만 가족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연우와 박인남이 내게 가르쳐 주고 있는 셈이었다.
그 덕에 백강우 없이도 나는 그럭저럭 씩씩하게 잘 버티고 살아가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오롯이 내 힘으로, 윤하를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아이로 키우고 싶어서.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부끄럽지 않을 삶을 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는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굴고 있었다.
아마도 어쩌면 내가 윤하를 돌보는 게 아니라 윤하가 나를 살게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녁 무렵, 단출한 저녁을 함께한 연우와 인남이 이만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으니 자고 가라고 말했으나 오전 일찍 연우의 병원 검사가 예약되어 있어 늦게라도 돌아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조심해서 가요.”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돌연 인남이 먼저 차에 타고 있는 연우를 흘긋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꾸벅, 잠이 든 연우가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를 하려는 듯이.
“저…. 별일, 없으시죠?”
“네, 뭐.”
뜬금없는 박인남의 질문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남 씨는요? 인남 씬 별일 없죠? 연우가 많이 걱정하는 것 같던데. 요즘 인남 씨 꼭 무슨 일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구요.”
“…아뇨, 뭐. 저도 아무 일 없습니다.”
멋쩍었는지, 그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형수님.”
“네.”
“아시죠?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시면….”
“네. 알아요. 무슨 일 있음 바로 연락할 거니까, 윤하랑 내 걱정까지 안 해도 돼요. 아가씨 돌보는 것만도 힘들 텐데.”
괜찮다고, 여전히 나와 윤하를 불안해하는 인남에게 안심하라는 듯 말을 가로채고 고개를 끄덕여 웃어 보였다. 당신은 할 만큼 했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그 사람에 대한 부채감에서 벗어나도 괜찮다고. 그날 이후, 여전히 멈춘 시간 속에 사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니 말이었다.
박인남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오랜만에 두 사람의 손님으로 북적이던 집이 다시 고요해졌다. 그 적막을 견디지 못해 서둘러 음악을 틀었다. 스피커에서 작게 흘러나오는 슈베르트의 곡을 들으며 아이를 들어 품에 안았다.
품 안에서 나를 위로하는 작고 어여쁜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팔을 쭉 뻗어 꼼지락거리는 작은 손가락 끝에 목에 걸고 있던 링이 톡, 걸렸다 떨어져 나갔다.
텅 빈 가슴속 공동이 이제는 걷잡을 수도 없이 부피를 키워 가고 있었다.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저릿함이 무지근히 피어오른다.
애써 마음을 달래며 아이의 손과 링을 한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이제는 퍽 익숙해진, 그립고 쓸쓸한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빴다. 첫 출근을 한 지 이제 고작 일주일. 오늘따라 길었던 회의 탓에 퇴근 시간이 무려 한 시간이나 늦어졌다. 환영 회식이 미뤄진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정숙 아주머니는 괜찮다고, 아무 일 없으니 천천히 와도 좋다고 했지만 아이를 맡긴 나로선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나와 윤하가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폐를 끼치고 있으니.
서둘러 도착한 아주머니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들어서자, 흘긋 나를 돌아본 아주머니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등을 내보였다. 그녀의 등에 업힌 윤하가 세상모르는 얼굴로 자고 있었다.
“이제 막 잠들었어. 좀 더 재우다 가. 온 김에 같이 저녁도 먹고 가고.”
금세 윤하를 방에 뉘어 놓고 나온 그녀가 작게 말했다.
“급하게 왔나 보네. 천천히 와도 괜찮다니까.”
그러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를 보며 웃었다.
“늦었죠. 회의가 길어져서.”
“그래, 윤 교감이 말이 많긴 하지. 듣는 사람이 괴로웠겠지 뭐, 나야 어차피 하는 일도 없고 심심한데 윤하랑 있는 시간 길어져서 더 좋아.”
“그래도요.”
다소 멋쩍어하는 내게 그녀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곤 주방으로 걸어갔다.
“김치찜 해 놨어. 먹고 가. 우리 집 묵은지 맛있어.”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을 걷어붙였다. 뭐 도울 게 없나 두리번거리다 개수대 앞에 서자 그녀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나를 밀어냈다.
“하지 마. 손이 재산인 사람이 무슨 설거지를 한다고.”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저 설거지 좋아해요.”
나는 고집스레 다시 고무장갑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아주머니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래, 그럼. 고마워, 하경 씨.”
고마운 건 난데, 되레 내게 고맙다 말하는 그녀의 인사에 어쩐지 마음이 뜨끈해졌다.
정숙 아주머니. 1년 전, 내가 인곡으로 왔던 그날 떡을 돌리던 내 손을 붙잡고 반겨 준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한다고 했다. 문 앞에서 마주친 순간부터 그 시절, 매일 밤 바닷가에 나와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내 모습이 또렷이 떠올랐다고. 그때의 그녀는 이른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시기상 아마도 내가 인곡을 떠나기 전 그녀가 먼저 서울로 떠났던 것 같았다. 이혼 후 다시 이곳에 돌아왔을 땐 내가 제신 그룹의 공주가 되었단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게는 그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고, 박절했던 탓이었다. 그 시절엔 엄마란 존재가 내 세계의 전부였으니 말이었다.
“학교는 어때? 애들은 가르칠 만하고?”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저학년 아이들의 바이올린을 레슨하는 일이었다. 윤하를 출산한 후 이제 더 이상 연우와 박인남 씨의 도움만 받고 있을 순 없다고 생각했을 때, 때마침 방과 후 교사 구인 공고를 봤다. 워낙에 작은 어촌 마을의 학교인지라 전교생이 고작 30명도 안 되는 작은 규모이긴 했어도 아이들이 하나같이 바이올린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 보람이 있었다.
어쩐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퍽 신기한 일이긴 했다. 바이올린 말고도 내게 이런 일이 또 생겼다는 게.
“재미있어요. 아이들도 귀엽구요.”
“다행이네. 혼자서 애 키우랴 일하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텐데.”
“아니에요. 덕분에 편하게 일하고 있어요. 아주머니 아니셨음 정말 힘들었을 텐데.”
“나야말로 윤하 덕분에 요즘 아주 재밌어 죽겠어. 쪼그만 게 아주 어찌나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하는지.”
“많이 울거나 보채진 않죠? 혹시 윤하가 힘들게 하면….”
“어이구, 윤하가? 내가 살다 살다 저렇게 순한 애는 처음 본다니까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가스 불을 올렸다.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예뻐하는 그녀는 아이를 갖지 못하단 이유로 1년도 살지 못하고 이혼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3년 전, 인곡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오랜 시간 수녀원 보육원에서 아이들 돌보는 일을 했다고. 자신의 운명을 세상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라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 까닭이라고 했다. 그토록 선하고 속 깊은 심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윤하를 봐주는 일은, 그런 그녀가 먼저 제안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일하는 오후 시간 동안 아이를 맡길 보육 시설을 알아본다는 내 말에 그녀는 기꺼이 시터를 자처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기도 했고, 민폐가 되는 것 같아 처음엔 당연히 거절을 했으나 그녀는 도리어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이라 했다. 이제 갓 100일이 지난 아이를 모르는 사람 손에 맡기는 것보단 그래도 가까이 살고 안면이 있는 자신이 낫지 않겠느냐고.
결국 나는 감사하게도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마음 편히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공허하고 쓸쓸한 시기를 보내고 있음에도 또 다른 한편으론 더없이 따뜻한 사람들과 함께인 시간이라 그럭저럭 견디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이 또한 그 사람 덕분이었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평생 알지 못했을 평범하고도 평화로운 삶의 모습이었으니까.
어느새 김치찜이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내며 익었다. 그녀와 나는 작은 식탁 앞에 마주 앉아 소박하지만 푸짐한 저녁상을 만끽했다.
“내가 보기엔 하경 씨 얼굴 많이 닮았는데?”
그녀는 낮에 핸드폰으로 잔뜩 찍어 둔 윤하의 동영상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에이. 윤하 아빠 얼굴 보면 아마 그런 말씀 안 하실걸요.”
“그래? 윤하 아빠 미모가 궁금해지네.”
내 말에 아주머니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나는 다소 자만한 내심으로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잘생긴 얼굴에 약해서요.”
“하경 씨도? 나돈데. 자고로 남자는 미모가 최고지, 못생긴 놈을 어디다 써?”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그녀의 농에 피식, 웃음이 샜다.
“근데 윤하 아빤 어떤 사람이었어?”
문득, 예고 없이 던져진 질문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아, 이런 거 물으면 안 되나. 대답하기 싫음 안 해도 되고. 괜히 씩씩하게 잘살고 있는 사람 상처 건드리려고 물어본 건 아니니까.”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백강우의 이야기를 한다고 상처를 받거나 아파하는 시기는 지난 지 오래였다. 그저 누군가 백강우에 대해 묻는 게, 아이의 아빠에 대해 묻는 게 처음이라 조금 당황을 했을 뿐이었다.
“좋은 사람이었어요.”
이보다 더 백강우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내겐 세상 그 어떤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었던 그를 떠올리며 씁쓸히 대답했다.
“처음으로 내 손을 잡아 준 사람이었고, 나를 나답게 살게 해 준 사람이었고.”
“강우 씨가 점점 더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섭고 겁나지만, 그래도 참아 볼게요. 좋은 사람 돼 달란 말도 안 할게요. 난 그냥….”
“그래서…. 누가 뭐라든, 뭐가 어떻든, 저한테는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어요.”
내 짧은 답으로도 아주머니는 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럽네, 하경 씨. 그렇게 좋은 사람이랑 마음도 나누고, 이젠 윤하 같은 예쁜 딸내미도 있고.”
그녀가 웃으며 손끝에 걸린 휴지를 건네 왔다. 나도 얼룩진 눈으로 그녀를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