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ude RAW novel - Chapter 18
17
윤하를 데리고 돌아온 집 앞, 위화감이 드는 고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새카만 차의 뒷좌석에 내린 남자는 다름 아닌 신 회장이었다.
얼마 전, 엄마가 제신 재단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는 뉴스를 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재준의 불법 도박 혐의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단 뉴스도 연달아 이어졌다. 그로서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 조만간 나와 윤하에게도 불똥이 튀지 않을까 하고.
신 회장은 아직도 잔인한 게임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도망친 세상에서, 여전히 서로를 죽고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된 사람들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거였다.
“아이가 제법 많이 컸구나.”
지팡이를 디디고 선 회장이 내 품의 윤하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회장을 본 게 백강우에게 가기 전의 일이었으니, 그가 윤하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일 터였다.
“어쩐 일이세요.”
나는 시선을 차단하듯 윤하를 더 안쪽으로 끌어안으며 물었다.
“15년 전 내가 네 엄마랑 너 데리러 왔던 것도 이 동네였지. 바다가 참 예쁜 마을이야. 평화롭고, 고요하고.”
용건이 무언가. 잠자코 그 의뭉스러운 노안을 훑으며 경계하듯 그를 응시했다. 아마도 그는 모를 것이다. 십오 년 전, 예쁘고 평화롭고 고요하던 내 세상을 뭉개 놓은 게 자신이라 걸.
“아이 키우며 살기엔 썩 괜찮은 동네야. 어릴 땐 복잡한 도시보단 이런 데서 뛰어놀고 커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는 법이거든. 그래서 내가 재준이 놈을 그렇게 키운 게 아직도 한이 돼.”
“죄송하지만 곧 아이 젖 먹일 시간이어서요. 용건만 부탁드립니다.”
“네가 네 엄마 좀 설득해 보는 게 어떻겠냐.”
“제가, 무슨 설득을요?”
“나도 늙었나 보다.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는 걸 보면. 그래도 살 맞대고 산 세월이 있으니 끝까지 가고 싶진 않아서 말이다.”
결국 회장은 엄마를 완전히 내칠 작정인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 두었다간 아들인 신재준마저 치명상을 입고 말 테니 말이었다.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저 더 이상 엄마 딸도, 제신 사람도 아닙니다. 엄마, 아니 이혜영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저랑은 상관없어요. 그 말씀 하러 오신 거면 헛걸음하셨어요.”
“꼭 네 엄마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단 소리처럼 들리는구나.”
그건 분명히도 그녀를 어떻게 하겠단 소리였다. 협박에 가까운 그 말에 나는 이를 악물고 표정을 숨겼다.
“네. 상관없어요, 어떻게 되든, 이혜영 씨 선택이고 회장님 결정이겠죠. 저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결과가 뒤따르든,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며 악을 지르던 엄마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고스란히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 끝이 부서지고 쓰러지는 파멸이라 해도, 꼭 끝을 봐야겠다고. 그게 내가 아는 행복이고 용기라고.
그녀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알 것 같았다. 정말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는 걸. 내가 절대로 설득하고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러니 나와 더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백강우의 손을 잡던 날 나는 엄마를 버렸고, 백강우가 죽던 날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더는 그 굴레 같던 운명에 발목이 묶여 뒤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매정하기도 하지. 그래도 널 낳아 준 어미 아니냐.”
회장이 눈썹을 들썩였다.
“저 엄마 없습니다. 회장님이 제 아버지가 아닌 것처럼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단호히 말하자 도리어 신 회장이 픽, 쓴웃음을 터뜨린다.
“혼자서 아이 키우긴 힘들지 않아? 네 명의 부동산, 지분이라도 팔지 않고 왜.”
“제 거 아닌 거, 압니다.”
“네 명의인데 네 게 아니면 누구 거라고. 그럼 내 선물이라도 주랴.”
“아뇨. 괜찮습니다. 받을 이유도 없고요.”
“누굴 닮아서 이렇게 고집이 세.”
회장은 못마땅한 듯 혀끝을 쯧, 찼다.
“용건 다 보셨으면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세요.”
나는 그대로 내 앞에 마주 선 회장을 스치고 지나 낡은 대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지금껏 널 내 딸로 여기지 않은 적 없다.”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손끝이 멈췄다.
“네 엄마가 아니라, 네가 나한테 달라고 했으면 아마 다 줬을 거야. 뭐든.”
천천히 돌아본 회장의 얼굴엔 여전히 고집스럽고 강강한 기운이 고스란했으나, 어쩐지 그 눈빛엔 못다 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아이 잘 키우거라. 너처럼 예쁘고, 착하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서 문을 열어젖혔다. 윤하를 그저 예쁘고 착한 아이로 키우진 않을 생각이었다. 그게 내가 그들이 사는 세상을 기꺼이 거부했던 이유였으므로.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먼저 손을 잡아 줄까 묻던 남자의 손을, 나는 끝까지 잡아 주지 못했다는 것. 그것 하나만이 뼈저리게 후회스러울 따름이었다.
***
“으아아앙!”
새벽녘, 갑작스러운 윤하의 울음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어쩐 일인지 아이는 숨이 넘어갈 듯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평소의 울음소리와는 무언가가 확연히 달랐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아이를 들쳐 안았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기색 없이 곤히 잠들었던 아이의 몸이 뜨거웠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새벽 한 시 반.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시각.
나는 지갑 하나만 집어 들곤 그대로 집을 뛰쳐나왔다. 한 손에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론 핸드폰을 든 채로 콜택시를 불러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읍내의 종합 병원 응급실까진 차를 타고도 20분을 넘게 달려야만 했다. 차창을 열고 불그레, 홍조가 가득한 열 오른 아이의 얼굴을 연방 젖은 손수건으로 닦아 냈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는 윤하 때문에 마음이 더 졸아붙는 것 같았다.
어디가 얼마나 아프길래 이렇게 뜨겁게 열이 나는 건지, 그 순한 아이가 이렇게 울어 대는 건지. 불안한 마음에 급기야는 아이의 아픈 기색을 진작 알아채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초조함에 휩싸인 심박이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병원 앞, 차가 멈추기 무섭게 응급실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간호사가 아이를 받아 뉘여 체온을 체크하고, 의사가 다가와 청진기를 들이댔다.
“왜 이러는 걸까요? 분명히 자기 전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놀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열이 심해서….”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굴자, 간호사가 진정하라는 듯 내 어깨를 토닥였다.
“열이 있긴 한데 이 정도면 고열은 아니에요, 어머니. 그래도 혹시나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긴 해서요, 검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라뇨? 어떤 가능성을 말씀하시는 건지.”
“요로 감염이나 신우신염, 뇌척수염일 가능성이 있어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무슨 병인지도 모를 병 이름의 나열에 할 말을 잃은 거였다.
해열제와 수액을 놓기 위해 간호사가 아이의 발에 링거 바늘을 꽂았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목이 터져라 울어 대는 아이의 손을 꼭 붙잡은 채 함께 울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행여나 내 부주의와 실수로 아이가 아픈 건 아닌지, 나 때문에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닌지, 하염없는 자책과 후회가 밀려들었다.
윤하가 내 그립고 쓸쓸한 세상에 빛나는 유일한 존재였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으나 행여나 아이가 잘못된다면 나는 정말로 더는 버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아이를 지켜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내겠다고, 꼭 건강하고 예쁘게 키워 내겠다고 그에게도 약속을 하지 않았나.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불안이 증폭되어 갔다. 그 어느 때보다 길고 가혹한 새벽. 나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이 작고 소중한 아이가 무사하기를.
***
“다행이네요. 검사 결과에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퇴원하셔도 되겠어요.”
숨통이 트이듯 안도의 한숨이 절로 샜다.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오그라붙었던 마음이 그제야 한결 편안해졌다.
“감사합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나는 의사에게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했다. 진심이었다. 아무 이상 없다는, 괜찮다는 그 한마디가 내게는 꼭 구원의 소리처럼 들려서였다.
타들어 가는 내 속도 모르고 꺄르륵, 아이 웃는 소리에 지켜보던 간호사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언제 그렇게 열이 났고 아팠었냐는 듯, 아이는 손에 장난감을 쥔 채 신나게 흔들며 놀고 있었다. 외려 집에서보다 더 신이 난 것도 같았다. 처음 보는 것, 신기한 것투성이인 이곳이 퍽 마음에나 들었다는 듯이.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이상 있으면 또 바로 응급실로 오시구요.”
간호사의 당부를 들으며 아이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어제 새벽, 집에서 정신없이 뛰쳐나온 지 딱 스물두 시간 만의 귀가였다.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또 정숙 아주머니께 폐를 끼칠 뻔까지 했다.
“하….”
병원을 나서다 문득 로비 유리창에 비친 내 꼴을 바라봤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고, 이 서늘한 밤바람에 옷은 민소매 차림이었으며 심지어 양쪽 발에는 짝이 맞지 않는 운동화를 신고 있다. 어제 새벽 내가 얼마나 제정신이 아니었었던지,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상황에 자꾸만 마음이 울렁거렸다.
입술을 꾹 깨물고, 큰 도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윤하는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체중이 조금 적게 나간 걸 제외하면, 윤하는 꽤 건강하게 태어난 편이었다. 백일 남짓한 지금껏 아픈 적 한 번 없이 모유도 잘 먹었고, 늦은 오후 잠깐 잠투정을 하는 시간 말곤 딱히 칭얼거리거나 힘들게 하지도 않는 편이었으며 변도 건강했다. 그렇기에 어제 새벽 갑작스러운 아이의 미열에 더 당황을 했는지도 몰랐다.
언제든 아이가 아플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과 조금 더 신속하고 제대로 된 대처를 했어야 한다는 자책이 자꾸만 뇌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내가 잘하고 있긴 한 건가. 의욕만 앞서 방법이 맞는 건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주먹구구식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닌가. 결국 나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고 있는 건 아닌지….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빠가 있었다면 좀 달랐으려나. 이제 갓 백일을 넘긴 아이를 다른 이의 손에 맡겨 놓고 일을 나가야 할 만큼 생계에 급급한 엄마라 죄스러웠다. 상념은 다시금, 자책으로 귀결이 됐다.
불 꺼진 방에서 곤히 잠이 든 윤하를 한참 바라보며 아이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평화로운 고요에, 기어코 눈물이 새어 나왔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 이렇게 다시 무사히 돌아왔으니 너무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데 왜 이렇게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과 안도했던 순간 그리고 어쩐지 서러워진 지금의 감정이 한꺼번에 섞여 소용돌이치는 까닭이었다.
결국, 서러움으로 몸집을 불린 그리움이 입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나는 잠든 아이 옆에 몸을 말아 누워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행여나 아이가 깰세라 흐느끼는 소리도 숨을 죽여 가면서.
***
윤하 옹알이 소리에 눈을 떴다. 이제 막 해가 떠오르는 시각이었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부터 짚었다. 다행히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별다른 이상도 없어 보였다. 의사의 말대로 미열은 잠깐, 일시적 이상으로 지나가는 거였나.
“후….”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르륵.
문득, 어깨에서 흘러내린 이불이 바닥을 덮었다. 낯선 기분이 밀려들었다. 내가 어제 이불을 꺼내서 덮었던가. 아니다.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윤하와 함께 맨바닥에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아야양, 에우웅. 아그응. 투우우우!”
모호한 기억을 떠올려 보려다 그만 생각을 끊고, 옹알대던 아이의 투레질 소리에 머리맡 턱받이를 꺼내 들었다.
“우리 공주님, 이제 좀 괜찮아?”
윤하는 괜찮다 답을 하듯 내게 눈을 맞추며 입술을 투, 투, 움직였다.
여전히 몸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으나 내 상태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이가 다시 이렇게 순하고 건강한 상태로 돌아왔으니.
“엄마가 미안해, 윤하야.”
“야양, 아아아양!”
사랑스럽고 순한 아이. 이 천사 같은 아이를 보고 있노라니 또다시 눈자위가 시큰해졌다.
“앞으로 엄마가 더 잘할게. 그러니까 아프지 말자, 우리 윤하. 응?”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작게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 손가락을 있는 대로 꼭 잡아 쥐고 제 입으로 가져가 투레질을 하는 아이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창밖, 희미한 여명 아래로 푸른 바다가 제 빛을 찾아가며 반짝였다. 눈부시게 찬란해 슬픈 날이었다. 이 쓸쓸하고 적막한 세계가.
***
“근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안색이 영 안 좋은데.”
아주머니의 질문에 나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내색하지 않았다.
“한동안 괜찮아지더니 또 이러네요. 좀 쉬면 낫겠죠 뭐.”
“에휴, 고생이다, 고생.”
일했던 보육원에 다녀오는 길에 제철인 자연산 전복을 잔뜩 가져다주기 위해 잠시 들렀다 했다. 그녀는 간밤에 윤하가 아파 응급실에 다녀왔단 이야기를 듣자, 적잖이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혼자서 새벽에 얼마나 놀랐겠냐며.
“하경 씨 이런 줄 알았으면 내가 손질을 다 해서 올 걸 그랬네. 뭘 해서 차려 먹을 기운이나 있겠어?”
“그럼요. 맛있게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엄마가 건강해야 애도 건강해. 알지?”
그녀의 걱정 어린 잔소리가 정답게 느껴져 나는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아주머니가 돌아가고, 기운 없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전복을 손질하고 죽을 끓였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내가 아프지 않아야 아이도 건강하게 지킬 수 있다는 생각에 있는 대로 힘을 쥐어짜 보려는 거였다.
죽을 준비하는 동안 점점 체온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더 몸이 안 좋아지기 전에 얼른 아이에게 수유를 마치고 좀 쉬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윤하를 낳은 뒤로 자주 겪는 젖몸살이었다. 유축을 한다고 하지만 어제 오늘 정신이 없다 보니 그새 젖이 차 몸이 무거워진 모양이었다. 한 번 앓기 시작하면 꽤 증세가 오래가곤 하는지라 퍽 걱정스럽긴 했다.
웃옷을 벗고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고 고통을 참았다. 아이가 젖을 빠는 내내 가슴에 뜨거운 열감이 오르고 몽우리가 돌덩이처럼 아프게 느껴져서였다.
한참 젖을 빨고 난 아이를 누이자 금세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나는 땡땡하게 부은 가슴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 마사지를 했다. 질금, 눈물이 나올 만큼 고통스러운 통증이었다.
열이 오른 탓일까.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오한마저 이는 것 같았다. 흐느적거리는 손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덮고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아주 잠깐만 눈을 붙이고 일어나면 나면 분명 나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렇게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사방이 컴컴한 한밤중이었다. 수유를 하고 나서인지 아까보단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도 같았으나 열감이 아직도 뜨겁게 느껴졌다.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든 윤하를 확인하곤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잠깐이나마 찬바람이라도 쐐야겠다 싶었다.
대문 밖을 나서자 쏴아, 파도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가을의 초입. 제법 쌀쌀해진 밤바람이 젖은 이마를 서늘하게 식히며 불어왔다.
이렇게 문을 열면 곧바로 바다가 바라보이는지라 고른 집이었다. 언제든, 바다가 그리우면 이렇게 문을 열고 내다볼 수 있게. 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이렇게 마음껏 바라볼 수 있게.
나는 혹여나 윤하가 깨기라도 할까, 멀리 가지도 못하고 활짝 열어 둔 대문 앞에 무릎을 감싸고 쪼그려 앉았다. 짙고 검은 바다 위, 하얗게 뜬 보름달 빛이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넋 놓고 달빛에 비친 윤슬을 바라봤다.
쏴아아.
그러곤 가만히,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습관처럼 귀를 기울였다. 그리움에 못 이겨 잠 못 드는 밤이면, 늘 밤새워 듣곤 하는 소리였다. 저 바다, 어디쯤을 유영하고 있을 백강우가 내게 와 속삭이는 위로 같아서.
아마도 어느새 내게 바다는 그 남자 그 자체가 된 건지도 몰랐다.
보고 싶다.
차마 내뱉을 수 없는 그 말을 작게 삼키며, 나는 설운 그리움을 깊이 삼키고 있었다. 익숙하게. 그러나 여전히 낯설게.
서늘하고 푸른 어둠에 잠겨 그렇게 한참을 움츠려 앉아 있을 때였다.
타박, 타박.
문득 들려온 정직한 구둣발 소리와 낯선 인기척에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어렴풋이, 저 먼발치에서 크고 단단한 남자의 인영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꿈인가. 꿈을 꾸는 건가 싶어 나는 몇 번이고 눈을 비비고 부릅떠 가며 가까워져 오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려 애를 썼다.
그러면서도 한 손은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찾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제게 연락하라던 인남의 말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인적 드문 바닷가, 늦은 시각. 남의 집 근처에서 이렇게 함부로 서성일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그러나 아마도 나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인영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의 박동이 빠르게 올라갔다. 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말도 안 될 일을 간절히 바랐다. 지금 내게로 밀려드는 파도가 가장 보고 싶고, 가장 그리웠던 내 바다의 것이기를.
거짓말 같았다. 가까이 다가선 남자의 얼굴이 달빛에 선명히 드러나는 순간,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든 소리가 아스라해지는 것만 같아 숨을 멈췄다.
그 어떤 소리 대신, 눈물이 먼저 밀려 나왔다. 눈가가 시큰해지고 코끝이 아릿해졌으며 머릿속이 핑그르르 돈다. 미친 건가. 내가 드디어 미쳐 버렸나. 도무지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면서도 내 앞에 선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백강우였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그리움만큼, 눈물이 쉴 새 없이 차오르고 또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덕분에 점점 더 흐릿해지는 시야가 원망스러워 자꾸만 설움이 차올랐다.
한참을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내게 커다란 손을 내밀어 왔다. 그 언젠가의 밤처럼.
“자.”
낮은 목소리가 파도처럼 울려 들렸다. 제 손을 잡으라는 듯 커다란 손 앞이 눈앞에서 아른댔다. 나는 그대로 완전히 얼어붙어 그를 올려다만 볼 뿐이었다.
두려웠다. 내가 손을 뻗으면 다 사라져 버릴까 봐. 하룻밤 꿈처럼, 한순간 환영처럼, 헛된 신기루처럼 모조리 다 사라질까 봐.
“잡아요.”
그토록 그리워했던, 언제라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에 와르르, 무너지듯 손을 뻗었다. 맞잡은 그의 손은 여전히 크고, 따뜻했다.
“잘 지냈어요?”
가볍게 나를 일으켜 세운 그가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와 다가서며 물었다. 고개를 바짝 꺾어 올려다보며 나는 그의 얼굴로 두 손을 뻗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서.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란 걸 확인하려는 듯이.
“당, 신…. 백강… 우, 흐윽, 왜….”
제대로 이어지지 않은, 조각 난 단어들이 아무렇게나 터져 나오고 있었다. 더불어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단번에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눈물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연방 깜빡이며 나는 그의 눈을, 코를, 뺨을 그리고 입술을 하염없이 매만지고 또 만져 댔다.
“흐으, 으으윽…! 흐읍, 어떻게, 강우 씨, 흐윽….”
나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오열을 하면서도 그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곧, 나는 그의 따뜻한 품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안겼다.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남자의 체향이 온몸 가득 스며들었다.
그래. 꿈이라 해도 좋았다. 환영이라 해도 괜찮았다. 금세 사라져 버릴 신기루라 해도 다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라도 백강우를 그리워할 수 있다면. 이토록 생생히 그를 느낄 수 있다면.
괜찮다고, 이제 좀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건 순전히 다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겨우 억누르고 막고 있던 제방이 단번에 무너지고 터진 것만 같았다. 한번 북받친 감정을 도무지 제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처럼 울고 또 매달리며 떼를 썼다.
왜. 나를 이렇게 혼자 남겨 놨느냐고.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느냐고. 이렇게나 그립고, 보고 싶고, 또 안달 나게 만들어 놨느냐고. 이럴 거면 왜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어 놨느냐고.
백강우는 말없이 내 뒤통수를, 목덜미를, 어깨를, 등을 쓰다듬어 내릴 따름이었다.
아주, 오래도록.
그렇게 얼마나 더 울었을까. 격랑이라도 맞은 듯 주체 못 하고 들썩이던 몸이 잠잠해질 땔 즈음,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어깨에 입술을 깊이 묻은 남자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왜 이렇게 울어, 가슴 아프게.”
목 언저리, 입술을 묻은 남자가 낮게 읊조렸다. 긴 한숨 섞인 그의 호흡이 내 살갗 위에 내려앉았다.
그제야 나를 안고 있는 남자가 신기루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제야 느껴지기 시작한 거였다. 나와 맞닿은 그의 심장이 터질 듯 뛰어 대고 있다는 것도.
따끔거리는 눈가와 뺨을 아무렇게나 닦아 내고 엉망이 됐을 얼굴을 한껏 들어 올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새카만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며, 나는 여전히 떨리는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진짜…. 진짜 맞아요? 이거 꿈이면, 나, 정말….”
“아니야, 꿈.”
“하…. 당신….”
“그래. 맞아, 당신 남자.”
단호하고도 나직한 목소리에 머릿속, 어지럽게 일렁이던 소용돌이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그제야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깊이 가라앉는다. 가물거리던 시야엔 그의 시선만이 선명하게 함빡 들어찼다.
백강우는 말없이 그대로 얼어붙은 내게로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왔다. 목덜미가 다시 끌어당겨지고 입술 위, 더운 온기가 녹녹히 달라붙었다. 맞붙은 입술 새로 탄식 같은 숨이 터져 나왔다. 울음 섞인 소리 사이로 뜨거운 혀가 부드럽게 포개져 왔다.
언제나 그랬듯 서늘하고도 따뜻하고, 무례하고도 다정한 키스였다. 혀가 뭉근하게 빨리고 불안정한 호흡이 가쁘게 터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젖어 무거워진 눈꺼풀을 그대로 내리깔며, 나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가고, 또다시 귓가엔 파도 소리만 커다랗게 들릴 따름이었다.
어디선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쉼 없이 몸을 들썩였다.
***
윤하를 품에 안아 든 백강우는 오래도록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빠인 걸 알기라도 하는 건지, 아이는 쌔근쌔근 잠을 자다 배싯, 입꼬리를 올리며 꼼지락거렸다.
백강우가 윤하를 안고 있다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광경에 자꾸 눈물이 차올라 방을 걸어 나와 눈가를 훔쳤다.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걸 더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돌연 내 손목을 그러쥔 커다란 손이 나를 돌려세우고 젖은 눈꼬리를 손끝으로 닦아 냈다. 하도 울어 짓물러 화끈대는 살갗에 그의 체온이 닿는다.
“여전히 잘 울고.”
“…….”
“어떻게 지냈어요.”
그가 물었다. 어떻게 지냈냐고. 어떻게 살았느냐고. 도무지 답을 할 수 없을 그의 질문을 들으며 나는 새는 울음을 깊이 삼켰다. 지금, 내 앞에, 나와 마주 선 남자가 백강우라는 게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화 많이 났구나, 나한테.”
눈가를 문지르던 그의 손이 미끄러져 내려와 입술 위를 다정하게 매만진다. 나는 천천히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올려 겹쳤다.
“백강우 씨야말로 어떻게 된 건지…. 하….”
결국, 자꾸만 울컥거리는 감정에 말끝이 흐려졌다. 길쭉한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며 내 손을 단단히 옭아 깍지를 껴왔다. 나는 또다시 그의 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열 있어, 당신. 괜찮아요?”
돌연 커다란 손바닥이 뜨끈한 이마를 짚으며 물어왔다. 그러나 지금 내 귀에 그런 질문이 제대로 들릴 리 없다.
“어떻게 된 거냐니까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대체 왜, 왜 죽은 사람처럼 그랬어요? 지금껏 어디서 뭘 하다가…!”
“반가우면 질문 몰아서 하는 버릇도 여전하고.”
그는 내 이마 위로 흐르는 머리칼을 쓰다듬고 내 눈을, 코를 그리고 뺨과 입술을 차례로 쓸어내리며 샅샅이 훑어 내려갔다. 바다 앞에서 내가 울며 그랬던 것처럼.
“내가 보고 싶기는 했습니까?”
“하, 그걸 말이라고…!”
어이없는 질문에 기막혀 미간을 찡그리자 그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 나는 또 나만 그렇게 피가 말랐었나 싶었지.”
“백강우 씨.”
“좀 많이 다쳤었어요.”
뜻밖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치켜떴다. 어디를, 얼마나, 어떻게 많이 다쳤었다는 건가.
“다쳐요? 어디를요? 왜요, 얼마나 다쳤길래….”
몸을 떼어 내고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위아래로 훑었다. 외양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예의 그 멀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여기저기 부러지고 부서지고, 했었죠.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기억이, 왜, 안 나요?”
“사고 나고 꽤 오래 의식이 없었어요. 이것도 내 기억은 아니지만요.”
남의 이야기를 하듯 하는 백강우의 담담함에 어이가 없었다.
“깨어난 지는 석 달쯤 됐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오려고 했는데, 사정이 있었어요. 마무리 지을 일도 좀 있었고요.”
사망 진단서상 백강우의 사인은 다발성 골절과 과다 출혈로 인한 사고사였다. 그 새벽, 석상천의 집에서 돌아오던 시각, 정체불명의 트럭에 치여 비탈길로 떨어졌다는 그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 이미 사망을 한 상태였다고 했다.
내가 수술 후 깨어났을 땐 이미 장례식의 마지막 날이었고 깨어나자마자 들은 황망한 이야기에 나는 직접 백강우의 시신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1년 가까이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니. 진짜로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기가 막혀 얼굴을 감싸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죽은 줄로 알았던 남자가 의식도 없이 혼자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 남겨져 있었을 걸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어떻게든 그리움을 삭이고 슬픔을 억누르려고만 했다. 그저 내 감정에만 취해서.
“처음엔 인남이도 석상천 사건 수사가 어떻게 끝날지 몰라서 아무 말 못 했을 거고, 그다음엔 내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니 더 말을 못 했을 거예요. 내가 부탁했었거든요.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곧장 장례부터 진행하라고.”
“하…. 어떻게…. 어떻게 이래요?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바보처럼….”
백강우가 다시금 내 손목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그러곤 얼굴을 감싸 쥔 내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너무 미안하면 미안하단 말이 잘 안 나오는 거 압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난….”
또다시 울컥거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아픈 데는요?”
“보시다시피.”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백강우의 시선이 차분하고 깊었다. 문득 그의 동공이 내 목덜미에 가 멈췄다. 나는 줄곧 그가 내게 남겼던 반지를 줄에 걸어 목에 지녔었다.
“손에 끼우라고 준 걸 왜 목에 걸었습니까.”
손을 보게 되는 횟수만큼 그가 너무 자주 그리워질까 두려워 그랬다. 아무래도 나는 억지로 버티듯 살고 있었나 보다. 내가 아니면 혼자 남을 윤하를 위해서 어떻게든, 억지로 버틸 이유를 만들어 가면서.
차마 답을 바로 하지 못하는 내 눈앞에 백강우의 손등이 아른거렸다. 마디가 불거진 길고 수려한 손가락 사이에 내 목에 걸린 반지와 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그의 마음이 뜨겁게 나를 달궜다.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백강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남자인지. 어떤 마음으로 내게 왔고, 어떤 마음으로 나를 떠났으며, 어떤 마음으로 다시 내 앞에 섰는지.
그는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내 목덜미와 목걸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 속이 찌르르 울었다.
“아이 이름이,”
“윤하요. 백윤하.”
“압니다. 인남이한테 받은 사진도 이미 많이 봤고.”
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바로 돌아오지 못했나, 묻고 싶고 알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나는 뒷말을 꾹 삼켰다. 어떤 사정이 있었든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게, 이렇게 내 앞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하게 느껴질 따름이라.
“많이 힘들었겠다, 신하경 씨 혼자서.”
“알면서…. 다 알면서 왜 그랬어요.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어요?”
여전히 설움 가득한 얼굴을 들어 질문했다. 왜 그랬냐고. 그가 없던 지난 시간 내내 묻고 싶었다. 왜, 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느냐고.
“살려고 그랬습니다, 제대로 살아야겠다 싶어서. 그러려면 어떻게든 내가 그 진창에서 빠져나오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사람이 신하경 씨 말고도 하나 더 늘어난 걸 알아 버렸거든.”
“강우 씨가 죽을 뻔했잖아요.”
“안 죽었잖아.”
여봐란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느물대는 그의 얼굴이 예의 그대로다.
“살아 왔잖아.”
여전했다, 백강우는.
“살겠다고 한 짓인데 아무 자신도 없이 그랬을까, 내가.”
“미쳤어…. 당신, 미쳤어요. 알죠?”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그가 젖은 뺨과 입술을 작게 매만졌다.
“잘 알지. 내가 신하경한테 얼마나 미쳐 있는지.”
“…….”
“처음엔 가능할 줄 알았어요. 내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추는 게. 그래서 이제 그만 돌려보내야지, 이제 그만 멈춰야지. 이 정도 놀고 즐겼으면 충분했다, 거기서 만족하고 욕심 같은 거 부리지 않으려고 했었고. 내 주제에 신하경이란 여자, 과분하고 버거운 사람이었으니까.”
“…….”
“근데 아주 잠깐, 당신이 없어지고 나니까 그제야 알겠더라고. 전부 다 내 오만, 내 착각이었다는 거. 신하경 없던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 건지까지 모조리, 전부 다.”
“…….”
“그래서 더 살고 싶어졌고. 당신이랑 같이.”
아릿한 시선이 깊고 은은하게 얽혀들었다.
“그러게 그렇게 함부로 내 손을 잡지 말았어야죠. 왜 괜히 고집을 부려선 나 같은 놈한테 잘못 걸리기나 하고.”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이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가. 엷게 웃는 백강우의 표정이 찌르르해, 나도 모르게 미간에 힘을 주었다.
“…사랑해요.”
나도 모르게, 가슴속 저 깊은 무저갱의 심연 속에서 진심 어린 고백이 터져 나왔다.
“사랑해요. 백강우 씨.”
절망의 시간,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혼자 되뇄던 고백이었다. 한 번도 그에게 말하지 못했던 서툰 고백을 토해 내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몽롱한 구름 위에 올려진 기분이었다.
나는 저릿한 손가락을 바지런히 움직여 그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단단한 손 마디마디가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꼼꼼히 얽혀들었다. 다시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이.
나는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고 문지르며 몸을 들썩거렸다. 빈틈없이 맞닿은 체온이 홧홧했다. 쿵, 쿵. 나와 같은 박자로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이제야 선명히 들려온다.
백강우. 더 없이 사랑했고 끝없이 그리웠던 남자가 다시 내 세상으로, 내 곁으로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턱 끝을 부드럽게 들어 올린 그가 내 젖은 속눈썹에 꼼꼼하게 입술을 눌렀다. 간지럽고 부드러운 감촉에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알아요.”
낮은 목소리와 함께 더운 숨이 살갗에 느릿하게 달라붙는다.
“나도 그러니까.”
더할 나위 없이 뜨거운 고백이었다. 삽시간에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이 울음에 섞여 비어져 나왔다.
우리는 깊게 그리고 오래도록 서로를 끌어안았다.
에필로그
어떡해….
설핏 벌어진 붉은 잇새로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여러 번 수술을 하느라 가슴을 열었던 자리를 제 떨리는 손끝으로 몇 번이고 훑었다. 금세 또 불그스름하게 물든 연갈색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로 흔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신하경이 사랑스럽기도, 아릿하기도 해 그 작은 손을 덮듯이 꾹, 그러쥐어 당겼다.
“그만 봐요. 징그럽기만 한 걸 뭘 이렇게 열심히 보지.”
“정말 이제 안 아파요? 괜찮은 거, 맞아요?”
“아픈 기억도 없다니까.”
“그래도 너무…. 많이 다쳤어요, 생각보다.”
“멀쩡합니다, 안 아프고. 그냥 칼자국 하나 더 추가된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어차피 상처도 많은데.”
농담 아닌 농담으로 별거 아닌 양 대화를 매듭지으려 했다. 그런데도 신하경은 말없이 습관처럼 입술을 달싹이며 눈을 떼지 못했다. 결국, 하릴없이 그녀의 시선을 강제로 차단하듯 얼른 셔츠를 주워 걸쳤다.
여전히 그녀는 내게 지옥 같았던 지난 1년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죽었다고 속인 건 난데, 홑몸도 아닌 여자를 외로이 홀로 버려둔 건 난데, 신하경은 되레 내게 더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해서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의식을 차리고도 바로 그녀 앞에 나타나지 못했던 이유를.
무슨 까닭인지, 처음 깨어났을 당시 나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두 번의 고막 재생 수술을 거치고 나서야 왼쪽 귀의 청력이 가까스로 돌아왔고, 오른쪽 귀는 여전히 심한 이명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슴을 연 상처처럼,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부상이라는 점이었다. 1년 전 수술 자국을 보고도 이렇게 손을 파들파들 떨어 대는 여자였다. 아마 내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기라도 하면 또 얼마나 아파할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했다.
“오늘은 몇 시에 퇴근해요?”
“아,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은데…. 회식이 있어서요.”
붉은 입술의 움직임이 선명했다. 작게 답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흐르는 머리칼에서 꽃잎을 닮은 향기가 났다.
“천천히 와요. 윤하랑 잘 놀고 있을 테니까.”
“혹시 늦을 수도 있으니까, 힘들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도 돼요.”
“못 자요.”
“…….”
“신하경 씨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알면서 그러네.”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나는 신하경을 얼마든 기다리고 그리워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녀가 지금껏 그래 왔듯이.
“뭐야. 윤하도 잘 자는데.”
“미안한데 난 아니라서. 소원이면 인남이한테 수면제 가지고 오라고 할까요?”
능청을 떨자 그녀가 주먹으로 내 가슴을 콩 때리곤 웃는다.
“근데 서울에 안 올라가 봐도 돼요?”
“변했네, 신하경. 예전엔 하루만 떨어져도 언제 오냐고, 보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벌써 나, 가라고. 온 지 이틀도 안 됐는데.”
옷가지가 든 캐리어를 향해 턱짓을 하며 묻자 여자가 내 손가락을 꼭 잡아 쥐곤 얼른 고개를 젓는다. 그게 귀여워 자꾸 웃음이 샜다.
“그게 아니라…. 병원에 있다가 온 거라고 하니까, 걱정이 돼서 그러죠.”
“병원에 아픈 사람만 있는 거 아닌 거 잘 아는 사람이.”
내 말에 그녀가 피식 말갛게 입꼬리를 올려 따라 웃었다.
치미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신하경 앞에 모습을 드러낸 지 일주일. 나는 신하경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닷새를 보내고도 모자라 이틀 전 아예 퇴원을 하고 이 집에 눌러앉았다.
그녀가 이 마을을, 이 바다를, 이 집을 얼마나 사랑하고 좋아하는지 잘 알기에 함께 서울로 돌아가잔 말은 애초에 꺼내지도 않았다. 나도 그녀가 사랑하는 이 마을이, 이 바다가, 이 집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진 까닭이었다.
이젠 신하경이라면 다 좋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까지도 모조리, 싹.
“열 오른다, 또.”
예쁜 얼굴을 가만히 감상하다 슬쩍, 동그란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가슴 또 퉁퉁 부은 거 아냐?”
“아…. 괜찮아요, 가서 유축 좀 하고 나면….”
“봐요.”
한 줌 허리를 바짝 끌어 당겨와 이불 위에 뉘이자,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본다.
“곧 윤하 깰 시간이에요.”
그녀는 내가 무얼 하려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 내 가슴께를 방어하듯 막아 짚었다.
“알아요. 내가 딸 낮잠 시간도 모를까. 곧 깨니까 얼른 합시다.”
“잠, 깐….”
“손.”
티셔츠 끝을 말아 올리며 낮게 읊조리자, 당황한 두 뺨에 홍조가 일었다. 그러면서도 얼결에 손을 뻗은 그녀의 웃옷을 단번에 벗겨 냈다.
“강우 씨.”
나는 가만히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속옷도 입지 않은 봉긋한 가슴 몽우리에 희멀건 모유가 고여 번들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강, 강우… 읏.”
그대로 귀 끝까지 발개진 여자의 젖꼭지를 입술로 감쳐물고 움켜쥔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미지근한 액체가 혀끝에 고여 들기 시작했다. 양쪽 가슴을 번갈아 가며 입술을 움직여 유륜 전체를 흡입하듯 빨아들였다. 단단히 뭉친 살덩이를 풀어내듯 주물거리면서. 손가락 사이로 터질 것처럼 부푼 젖가슴이 뭉실거리며 튀어 오를 때마다 입술이 젖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심한 젖몸살을 핑계로 하는 마사지이기도, 들끓는 내 육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다. 쭈읍, 쯥. 나는 볼을 패고 목울대를 꿀렁거리면서까지 신하경의 젖꼭지에서 분비되는 모유를 빨아 먹었다.
아이를 출산한 지 이제 고작 백일 남짓한 여자를 두고 또 성기를 세우고 정액을 쏟는 미친놈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지난 1년을 어떻게 참았나 싶게 나는 매 순간, 매 상황에 발정하고 있었다. 신하경의 체향만 맡아도 사정을 할 것 같은 이 발정을 누르는 데는 거의 초인적인 힘이 필요했다.
“흐… 읏!”
내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아주 충동적인 애무였다.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한 손을 내려 그녀의 바지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하, 강우 씨!”
놀란 그녀가 허리를 튕기며 내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음부에 닿은 손끝이 척척했다. 턱을 들어 얼굴을 올려다보자, 새빨개진 얼굴이 탐스럽게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젖 빨리면서 흥분했구나.”
낮게 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거리자 그녀가 억울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게, 하지 말라니까.”
“기껏 아프지 말라고 마사지해 준 사람한테.”
“마사지만 하면 되는데, 빨기까지 하니까….”
“아. 여기도 빨아 줘요?”
“아니, 아니…!”
바지와 팬티를 단번에 잡아 무릎까지 내리곤 은밀한 삼각지 전체를 손바닥으로 깊이 감쌌다. 습습하고 눅눅해진 열기가 한 손 가득 스몄다.
“그럼 더 벌려요. 기분 좋게 해 줄게.”
“하으… 응.”
새하얀 허벅지가 좌우로 움직였다. 삼각지 사이에 숨겨져 있던, 불그스름하게 농익은 음부가 예쁘게 벌어진다. 아래까지 빨고 싶은 마음을 겨우 삼키며 젖은 손바닥으로 클리토리스를 동그랗게 내리눌렀다.
그러곤 계속해 그녀의 젖가슴을 입 안 가득 머금고 혀를 굴려 댔다. 발기한 내 성기는 바지 속에서 터질 듯 혼자 움찔대고 있었다. 나는 성기를 꺼내고 하체를 눌러 여자의 무릎뼈와 종아리에 허리를 길게 비볐다. 이 정도 자극만으로도 내가 사정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신하경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 여자가 쏟아 낸 물기가 흥건히 어리기 시작했다. 불룩하게 솟은 살덩이를 손끝으로 문질거리다 갈라진 틈을 타고 질구를 열듯이 미끄러뜨렸다. 아마도 습관처럼 벌름거리는 입구의 파들거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순간 몇 번이고, 질 안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억눌렀는지 몰랐다. 그 좁고 뜨겁고 팽팽한 구멍 속 열락이 주는 아늑한 감각이 미치도록 그리워서.
“하아, 아…! 아아!”
지속되는 클리토리스의 마찰에 절정을 느낀 여자가 달뜬 소리를 내며 고개를 꺾었다. 절정에 이른 여자의 몸을 느끼며, 나 또한 길게 사정했다. 꾸륵꾸륵, 한참이나 정액이 튀고 쏟아져 나오는 동안 그녀의 젖꼭지에선 분비되는 액체의 양이 현저히 줄고 있었다. 아무래도 더는 나올 게 없는 모양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입맛을 다시듯 혀를 길게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흘긋,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자의 얼굴이 새빨간 사과처럼 물들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벌겋게 짓무른 그녀의 젖꼭지는 내가 분출한 정액과 모유가 섞여 번들거리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개의치 않고 정액을 펴 바르듯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쥐어 크게 주물렀다. 둥글던 눈망울이 대번 가늘어지며 나를 비스듬히 흘겼다.
“강우 씨가 이렇게 다 빨면 윤하는 뭐 먹어요.”
“조금밖에 안 빨았는데.”
“하….”
어이없단 듯 한숨을 내쉬다가 또 픽, 웃어 버리는 하얀 얼굴이 요요했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젖꼭지를 핥는 나를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제 진짜 그만해요. 윤하 일어나기 전에 출근 준비 해야 돼.”
그녀의 손길에 마지못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곤 다시 일어나 새하얗게 예쁜 나신으로 욕실로 향하려는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녀의 발끝이 바닥 위로 붕 떠올랐다.
“뭐, 해요…!”
“씻겨 줄게. 힘들잖아, 당신.”
“안 힘들거든요?”
“내가 힘들어. 나랑 있을 땐 당신 손으로 뭐 할 생각 하지 마.”
진심이었다. 혼자 마음 졸이고 고생했을 그녀를 생각하면 그동안 하지 못한 일들을 죄다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학교 일도 당장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으나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너무 재밌다는 그녀 말에 차마 아무 이야기도 할 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너무 좁아요.”
비좁은 욕실에 기어코 함께 들어서자, 그녀의 등이 하릴없이 벽에 갇혔다. 의도치 않았으나 퍽 바라던 바였다.
“그러게. 진작에 확장 공사를 좀 할걸요.”
“무슨, 집주인 허락도 없이 공사를….”
“인남이한테 아직 얘기 못 들었구나. 집주인 바뀐 거.”
연갈색 동공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렇게나 반응이 귀여우니 더 놀리고 싶어지는 걸 정말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웃으며 샤워기를 틀고,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듯 꼼꼼히 씻겨 냈다. 이번엔 그녀가 먼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키스를 해 왔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을 만큼 행복하고 가슴 벅찬 일상이었다.
아이와 함께,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종일 얼굴을 맞대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하고, 선율이 아름다운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듣고. 그러다 손을 잡고 서로를 품에 안은 채 잠이 드는.
결국, 이 분에 넘치는 행복한 세계를 위해 지금껏 나는 그 진창을 악착같이 견디고 살아 낸 거였다.
“다 말해 줘요. 내가 모르는 얘기. 내가 없었던 시간에 강우 씨한테 있었던 일들. 전부, 다.”
입술을 떼어 낸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천천히. 하나씩.”
나는 그런 그녀를 달래듯 쓰다듬으며 입술을 가볍게 눌러 맞췄다.
“하나씩, 천천히 채워 가요. 시간은 많으니까.”
“솔직히 나…. 무서워요.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서도 또 다 사라졌으면 어쩌나, 이게 전부 꿈이었다고 말하면 어쩌나….”
“당신이랑 윤하 두고 내가 어딜 갑니까.”
아이처럼 내 옷자락을 꾹 쥔 손가락에 진심이 어렸다. 그녀의 불안을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나 또한 여전히 이 순간, 이 행복이 찰나처럼 스쳐 지날까 두려웠다.
“나한테도 지옥이었단 거 알잖아요. 신하경 씨 없이 보낸 날들. 보면서도 바라만 보고 있었던 시간들 전부 다.”
반지가 끼워진 그녀의 약지를 가져와 입술에 바짝 붙인 채로 말했다. 그제야 불안하게 달싹거리던 입술이 탐스러운 뺨 끝으로 길게 말려 올라갔다. 그 말간 얼굴에 투명한 물방울이 보석처럼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알아요.”
젖은 입술이 작게 움직이며 진동했다.
“아는데, 아는데도…. 자꾸 불안해서. 지금이 너무 꿈처럼 행복하니까,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당신이 또 나만 두고 사라지면….”
물기로 반짝이는 눈망울이 오롯이 나를 향해 왔다.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고,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일렁였다. 목구멍 가득, 뜨뜻한 고백이 치밀어 올랐다. 남김없이 모두 다, 죄 토해 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럼 내가 신하경 씨 너를 너무 사랑한단 것도 알아줘야지.”
나는 온몸으로 신하경의 진심을, 애정을 갈구했다.
“봐줘, 하경아.”
계속, 나를 살게 해 달라고.
“나 좀. 응?”
잠시, 말없이 나를 보던 그녀가 내게로 손을 뻗어 왔다. 나는 화답하듯 내 목에 매달린 여자의 목덜미에 깊게 키스하며 숨을 들이켰다.
사랑해요, 나도.
나는 그 맹세 같은 속삭임을 들으며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바다를 향해 열린 창문으로부터 긴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밀려든 바람이 서늘한 냉기를 한껏 머금었다. 여름이 완전히 끝나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뜨거웠고, 축축했고, 숨이 막혔던 그 여름이.
우리는 서로의 손가락 사이사이를 얽고 겹쳐 깍지를 끼웠다.
계절이 바뀌고, 다시 다음 여름이 올 때까지. 그리하여 몇 번이고 찬연한 바다의 색이 바뀌고 또 돌아올 때까지, 나는 이 손을 꼭 잡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 언젠가의 초여름의 어느 날, 어느 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