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ude RAW novel - Chapter 7
06
진공 같은 적막감에 눈꺼풀을 가만히 떠올렸다. 꿈인지 아닌지, 경계가 모호한 적요였다. 꼭 우주의 어느 한 공간으로 덩그러니 떨어진 것만 같은 평화로움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기절하듯 잠들 수도 있단 사실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심지어는 언제,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리만큼 온몸이 욱신거리는데, 그게 전혀 불쾌하거나 괴롭지도 않게 느껴졌다. 내겐 퍽 희한하고도 낯선 일이었다.
드넓은 침대엔 나 혼자였다. 이불을 걷어 내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나신이 민망하게 드러났다. 내게 입으라 둔 건지,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위에 접힌 두툼한 로브가 올려져 있었다.
로브를 대충 걸쳐 두르고 침실을 걸어 나왔다. 침실 밖도 간접 등 몇 개만 켜져 있을 뿐, 집 전체가 어둠에 잠겨 고요하기만 했다.
나도 모르게 남자의 인기척을 찾아 집 안 곳곳을 헤맸다. 긴 복도를 따라 거실을, 서재를 그리고 몇 개의 빈방들을 둘러보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섰을 때였다.
계단 뒤, 발코니 쪽 창가에 커다란 그림자가 아른댔다. 백강우였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자, 난간에 기대서 있던 그가 흘긋 나를 돌아봤다. 붉고 두툼한 잇새엔 담배가 물려 있었다. 지난밤 내 아래를 열렬히도 물고 빨았던 그 입술이었다. 귓불이 와락 뜨거워졌다.
“더 자지, 왜요.”
그가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래도 되는 시간인데.”
“백강우 씨는 왜 안 자고 나와 있어요?”
“난 원래 자는 시간 아니고요.”
아직 해도 밝지 않은 새벽 네 시였다. 원래 일찍 일어난단 뜻일까, 아님 늦게 잔단 뜻일까. 의아한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자 그가 픽, 부연을 이었다.
“눈 감고 있는 시간 길면 큰일 나는 일을 오래했더니, 습관이 돼서요.”
심상히 말하는 남자의 말을 들으며 시선을 그의 명치 아래로 내리깔았다. 헐겁게 여민 배스로브 아래로 보이는 흰 붕대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정말, 칼에 찔린 거예요?”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답 없이 무심히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내게로 시선을 맞춰 왔다. 날렵하게 뻗은 턱선이 설핏 모로 기울어지고, 눈길은 더 촘촘해졌다.
“봐요, 좀.”
붕대가 칭칭 감긴 옆구리로 손을 뻗었다. 내가 거침없이 그 붕대를 풀어내자 그제야 날 내려다보는 그의 눈썹이 슬쩍 들썩였다.
“조금이 아닌데…. 크잖아요, 상처가.”
거즈를 덧대 붙인 부위의 면적이 제법 넓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살짝 다친 게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무슨 이사가…. 칼 맞을 일을 해요? 그래도 상장까지 된 회사라면서요.”
“이사는 무슨. 깡패라니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둘이 정말 친해졌나 봅니다. 우리 연우, 쪽팔린다고 제 오빠가 무슨 짓 하고 다니는지 웬만해선 말 잘 안 하는데.”
“석상천 회장, 나도 알아요. 몇 번 본 적 있어서요. 이런저런 행사장에서도 봤고, 이진수 의원이랑도 교류가 좀 있는 걸로 알고 있….”
“영광이네요. 제신 그룹 공주님께서 동네 구멍가게 같은 회사를 다 기억해 주시니.”
“빈정거리지 좀 말죠? 이렇게 다쳐 놓곤….”
“걱정? 아님, 또 비난인가?”
위압적인 한마디에, 선 넘지 말라 경고하던 그 말이 자동으로 떠올라 그만 입술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어차피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데. 자꾸만, 이상하게도 그가 쳐 놓은 선을 넘어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이유는 모호했다.
잠시 오묘한 정적이 흘렀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 반짝거리는 한강 변의 풍경이 아스라했다. 남자와 야경이 꼭 한 폭의 그림 같아 어쩐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단 꽤 멀쩡해 보이네요?”
“…….”
“밤새 흔들고 싸고. 할 건 실컷 다 해 놓고선 숨넘어갈 것처럼 울길래, 나야말로 걱정을 좀 했었는데.”
문득, 느긋하게 눈꺼풀을 깜빡거리며 하는 저속한 소리에 잠시 잊고 있던 지난밤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생전 처음 느끼는 고통과 쾌락이었다. 무지막지한 그의 크기에 여전히도 밑이 빠지는 것 같은 둔통이 느껴졌으나, 그럼에도 감수할 수 있었던 건 그보다 더 강렬했던 쾌감 때문이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그 순간만큼은 살아 숨 쉬는 게 괴롭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대로 죽어도 상관없을 만큼 충만했다.
땀과 체액을 쏟으며, 처음으로 제대로 살아 있는 것 같단 생각을 했으니까. 쾌락에 젖은 몸이 사랑스러웠고, 욕망에 솔직해진 본능이 감격스러웠으니까.
“고마워요, 어쨌든.”
물끄러미 나를 보는 시선에 완전히 발가벗겨진 듯 또 솔직한 감정이 솟구쳤다.
“내 부탁 들어줘서.”
“섹스해 줘서 고맙단 소리 듣긴 또 처음이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든 백강우가 짧게 실소했다.
“막무가내로 떼쓴 거 미안해요. 그냥, 그만큼 절박했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는데….”
“그래서, 막무가내로 떼쓴 보람은 있었습니까? 끊어지게 조이던 건 꽤 절박하게 느껴지긴 하던데요.”
상스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 남자를 마주하며 두 뺨이 홧홧해짐을 느꼈다. 잠시 무어라 답을 할까 고민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떼쓴 보람, 보람 있었어요.”
“…….”
“좋았어요.”
느낀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토로했다. 어쩐지 이 남자 앞에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 가장 추한 모습과 어리석었던 순간까지 모두 목격하고도 나를 안은 이 남자에게만은 어떤 것도 거리끼지 않고 죄 꺼내 놓아야 할 것만 같아서였다.
“백강우 씬 어떨지 몰라도 나는, 좋았어요.”
“평가까지 다 듣고.”
“백강우 씨는요?”
열없이 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와 달리 영 무감하기만 한 남자의 표정에 조급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어땠는데요? 물론 처음이라 영 서툴고 형편없었다는 건 나도 알지만….”
“알긴 알아서 다행이네요.”
“…….”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많이 엉망이긴 했죠. 주제에 무슨 용기로 섹스하자고 떼까지 썼을까 싶게 당황스러울 만큼 어설프고 형편없었어요.”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아무렇게나 독설을 내뱉었다. 예상은 했지만, 필터 없이 말하는 그의 소감에 나는 돌연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잠시 침묵하는 나를 바라보며, 백강우가 다시 필터를 잇새에 묻었다.
“난 그냥…. 혹시나 했어요. 난 너무 좋았어서, 백강우 씨도 혹시나 나만큼은 아니어도, 그래도 나쁘진 않지 않았을까 싶어서.”
문득 밀물처럼 밀려든 초라한 감정에 손가락을 꽉 말아쥐며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근데, 원래 이렇게 직설적으로…. 필터 같은 거 안 거치고 말해요?”
“묻길래 답했을 뿐입니다. 내내 더럽게 붙어먹고선 이제 와서 가증스럽게 예의 차린 대답 원하는진 또 몰랐고.”
“…하. 무튼, 알았어요. 백강우 씬 나랑은 다르게 전혀 안 좋았다는 거….”
“안 좋았단 말은 안 했는데.”
“…….”
후,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던 남자가 장초를 비벼 끄고 한 발짝, 내 앞으로 다가섰다. 손만 뻗으면 곧바로 키스를 할 수도 있을 거리감에 절로 숨이 삼켜졌다.
“안 좋았는데 그렇게 발정 난 개새끼처럼 헐떡대진 않았겠지.”
“…….”
“어이가 없어요, 나도. 당신 그렇게 어설프고 형편없었는데도 눈이 돌아선.”
“…….”
“봐요. 지금도, 씨발.”
돌연 그가 자신의 허리 아래로 턱을 했다. 밤새 내 안을 헤집고 파고들었었던 흉기가 갈라진 복근에 찰싹 달라붙어 시뻘건 열을 내고 있었다.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어떡할래요, 이제?”
“…….”
“이거. 어쩔 거냐고.”
백강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불량히 물었다.
“난 신하경 씨한테 적극 협조하고 싶은 마음이 좀 생겼는데.”
“…….”
“이쯤 멈출래요, 아님 계속 나랑 뒹굴래요.”
여기서 더 엉망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단 백강우의 말에 이상한 안도가 느껴졌다. 그 말이 내게는 나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수 있다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겠단 소리로 들려서였다.
그의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 허리를 감고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 나는 방조하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퇴폐적인 향이 입 안 가득 밀려들었다. 나는 그의 붉고 뜨거운 살덩이가 입 속을 헤집고 혀를 얽으며 자유롭게 유영하게 놔두었다.
돌기와 돌기가 게걸스레 부딪치고 비벼졌다. 마찰이 길어지고, 질척한 열기가 다시금 한가득 차올랐다. 필연적으로 숨이 달리고 침이 샜다. 달아오른 얼굴을 바짝 치켜들고 그의 가운 깃에 매달리듯 안겨들었다.
자연스레 커다란 손이 로브 안쪽, 맨살갗으로 파고들어 왔다. 귓불로, 목덜미로, 턱 끝으로, 쇄골과 가슴 위로 꼼꼼하게 쏟아지는 그의 키스를 받아 내며, 나는 수치도 잊은 채 중얼거렸다.
“하아…. 할래요, 계속, 해 줘요.”
미친 게 분명했다.
***
이틀을 더 그 집에 머물며 백강우와 몇 번이나 몸을 섞었는지 모른다. 침대에서, 거실 소파와 욕실의 샤워 부스에서, 발코니 난간 그리고 서재의 책상에서까지, 장소도 시간도 가리지 않고 우리는 서로를 안고 정신없이 뒹굴었다.
어제 아침, 주방 테이블 위에서 흡사 교미하는 짐승처럼 엉덩이만 내어놓고 엎드려 한참을 신음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첫 섹스에서 그가 나를 얼마나 배려했었는지를. 앞으론 다정하지 못할 거라던 그의 경고가 결코 거짓이나 허풍이 아니었음을.
나를 바닥까지 헤집으며, 백강우는 난폭하고 상스럽게 굴기를 마다치 않았다. 다소 무자비하기도 했다. 수없이 부딪치고 쓸린 안쪽 사타구니가 시뻘겋게 열상을 입도록, 여린 속살이 무르고 헐도록 하고 또 하기를 원했으니까.
나는 기꺼이 그의 난잡함에 동조했다. 백강우가 가르쳐 준 날것 그대로의 행위에 쉽게 익숙해져 가며 저속한 쾌락을 만끽했다.
오롯이 나와 그만 존재하는 것 같은 이 천박한 세계가,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난 또. 설마 인사도 없이 몰래 퇴원이라도 했나 했어요.”
“그래서 서운했구나?”
“서운했던 것까진 아니구요. 걱정했죠. 연락도 안 되고 계속 안 보이니까.”
둥글게 웃으며 말하는 연우를 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난 사흘간, 연우에겐 일이 있어 잠깐 본가에 다녀왔다고 둘러댔다. 마음이 들썽거렸다. 진짜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안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백강우에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요구했던 내 이기심을 안다면. 그때도 이렇게 천진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연우는 내가 사 온 조각 케이크를 맛있게 먹으며 조잘조잘 수다를 이어 갔다.
“아참, 나도 언니한테 줄 거 있는데.”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겉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하얗고 투명한 비즈들이 알알이 반짝거리는 팔찌였다.
“혼자 심심해서 영상 보고 따라 만들어 봤어요. 요즘 이거 만드는 게 유행이길래.”
“아….”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받은 팔찌를 쥐고만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선물을 받은 게 처음이라.
“고마워.”
고맙단 말뿐, 나는 돌려줄 게 없어 민망해하던 찰나였다. 보다 못한 연우가 덥석 팔찌를 가로채 내 손목에 톡, 채웠다.
“역시.”
“…….”
“잘 어울린다. 언니는 피부가 하얘서 하얀색이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또 다른 팔찌를 더 꺼내 들어 보이며 말했다. 조금 더 알이 굵은 검은색의 팔찌였다.
“그럼 남는 건 백강우나 줘야겠다.”
연우는 제 오빠를 떠올리며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그에게 화가 나 있으면서도 기어코 오빠 몫의 팔찌까지 만든 걸 보면, 확실히 백강우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센 척은 혼자 다 하면서도 어지간히 마음이 약해 걱정이라던.
“제 것도 있어요. 난 보라색.”
백강우의 묵주가 걸린 제 손목을 걷어 흔드는 그녀의 미소에 설핏 웃음이 났다. 귀여웠다.
똑똑.
별안간 노크 소리와 함께 드르륵, 병실 문이 살짝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건 백강우와 함께 있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는, 훤칠한 키의 남자였다. ‘인남 오빠’라며 연우가 그의 이름을 부르던 게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백강우 밑에서 있었던 탓에 연우와 썩 친한 사이인 것 같았다.
박인남은 내게도 살짝 고개를 숙여 아는 체를 해 왔다.
“오빠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연우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형석이 어머님이 위독하시대서, 형석이 급하게 집에 내려보냈다.”
“그럼 울 오빠는? 우리 오빠는 어쩌고?”
“이사님이 가래서 왔거든?”
“아니, 가란다고 오면…!”
연우는 퍽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곧 주사 맞을 시간이라면서? 얼른 나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박인남이 연우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다.
슬쩍 올라간 재킷 아래, 손목에 걸려 있는 푸른빛의 비즈 알이 선연했다. 내 손목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새의 팔찌였다.
무심코 연우의 얼굴을 살폈다. 왜 왔냐고 심통을 부리면서도 살짝 붉어진 뺨이 영 싫지는 않은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비즈 팔찌를 선물 받은 사람이 나와 백강우뿐만은 아닌 듯싶어 웃음이 샜다.
그때였다. 별안간 저 멀리에서 또각또각, 다급한 구두 굽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반쯤 닫혀 있던 문이 요란하게 젖혀 열렸다.
드르륵!
“신하경! 너 왜 연락이 안 돼?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길래…!”
엄마였다.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그녀의 등장에 병실을 나서려던 연우와 박인남이 멋쩍게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평온은 순식간에 깨졌다.
아주 잠시 잊고 있던 끔찍한 기분이 치솟았다. 눈을 질끈 감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 언니, 전 그럼 갈게요. 케이크 잘 먹었어요.”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한 연우가 박인남의 손을 이끌고 재빨리 병실 밖으로 사라졌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속사포 같은 질문들을 쉴 새 없이 퍼부었다.
“사흘이나, 어디에 있었어? 사춘기 애도 아니고 말도 없이 사라져선, 핸드폰도 꺼 놓고. 무슨 일 있는 건 아닌지 너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 줄 알아?”
“좀 혼자 있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연락 못 받은 건….”
“너, 회장님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 무슨 뜻이야? 다시 똑바로 말해 봐!”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내 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목을 사납게 낚아채며 추궁했다.
“…말 그대로예요.”
“그러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고!”
“갑자기가 아니라니까요?”
“그래. 아니겠지. 신민철 회장 악랄할 만큼 치밀한 인간인 거, 당신 아이 임신했다는 내 말만 믿고 덥석 너랑 나 집안에 앉혀 놓을 위인 아니라는 거, 알아. 나도 안다고! 아니, 내가 너보다 그 인간에 대해서 알면 더 알았지, 모르진 않아.”
역시나 어렴풋 짐작은 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모든 비밀이 탄로 날 순간만을 떠올리고 대비하며 살아온 인생일 테니까. 입 안이 씁쓸했다.
“위자료? 너 내가 물산 지분 받는 게 위자료일 거라고 그랬니?”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너야말로 네 아버질 몰라도 너무 모르지. 신 회장이 다 알면서도 너랑 나 못 내쫓은 이유가 뭐겠어? 그 늙은이한테는 대안이 없어. 아무리 이윤희 아들이라도 신재준, 그 한심한 놈한테 통째로 회살 넘길 순 없겠지. 그러니 그 능구렁이 같은 인간이 한쪽 눈 감고서라도 너랑 날 지금껏 테스트한 걸 테고. 근데 이제 와 별다른 뾰족한 수가 생길 것 같아?”
“…….”
“삼 일 동안 회장님, 나한테 아무 말도, 아무 내색도 안 하시더라. 이게 무슨 뜻인 것 같니?”
“엄마.”
“하경아, 이건 그냥 버티면 이기는 싸움이야. 회장님 벌써 올해 일흔아홉이셔. 앞으로 길어야 10년 남짓일 텐데, 그거 좀 더 못 버티고 여기서 포기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아?”
진짜 억울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정말로 내 인생이 이렇게 하찮고 같잖게 끝나 버릴까 봐. 아니, 어쩌면 죽어서도 이 지긋지긋한 족쇄를 끊어 낼 수 없을까 봐, 그게 억울하고 분한 거라고.
“그러니까 대체 신 회장이 너한테 무슨 말을, 뭐라고 지껄였는지 제대로 말을 해 보라고, 좀!”
가만히 침묵만 지키는 나를 향한 엄마의 표정엔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내가 사라진 사흘간, 그녀는 나를 걱정한 게 아니라 회장의 의뭉스러운 속을 알지 못해 안달이 난 거였다. 지금껏 열심히 쌓아 올린 공든 흙 탑이 무너질까 봐서.
“신하경…!”
“2년이요.”
“뭐?”
엄마의 눈꼬리가 바짝 치켜 올라갔다.
“정리할 시간, 그쯤이면 충분하지 않겠냐고요.”
“하!”
“어리석게 굴지 말길 바란다고.”
“이진수, 이 개자식.”
엄마는 이를 바득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이 결혼을 성사시키려 이진수와 끊임없이 마찰을 빚고 설득을 해 왔던 게 다 무색하게도 이진수는 대놓고 배신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아니, 확실했다. 이규현과의 결혼 유지 기간을 2년으로 하기로 한 엄마와의 이야기까지 회장에게 흘린 걸 보면.
“회장님 말, 나한테 하는 경고가 아니라 너한테 하는 말이었어. 너. 알아듣고 처신 똑바로 하라고.”
설마,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미간을 구기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4년 뒤에 대선 있는 거 알지.”
2년도 버거웠던 결정이었다. 신 회장은 분명히도 4년 뒤, 꽤나 유력한 차기 대선 주자가 되어 있을 이진수의 미래 권력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거였다.
“2년이나 4년이나, 어차피 크게 다를 거 없어.”
“엄마!”
내겐 크게 다른 일이었다. 대선 후보의 아들이 이혼하는 것과 대통령의 아들이 이혼하는 건 분명 다른 일이 될 테니.
“버텨.”
“싫어요. 더는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그냥 버티기만 하면 끝나는 일이야. 너 똑똑하잖아? 밑져도 본전인 일이라니까?”
“그러니까 안 한다고요. 그 본전도 필요 없다구요, 난.”
“너 정말 요즘 왜 이래? 얘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그녀는 아직도 나를 엄마 말이라면 벌벌 떨고 고개를 끄덕이던 열네 살짜리 계집애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내가 말을 잘 들어야 엄마가 죽지 않을 수 있다고, 엄마가 울지 않을 수 있다고. 그래야 나도 행복해지는 거라고 믿었던 그때의 나라고.
“버티면요? 버텨서 다 가지고 나면요? 그럼 만족할 만큼 행복해지긴 하는 거예요?”
“신하경!”
“모르겠어요, 이젠. 나는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숨이 막혀서.”
나도 모르게 가슴을 쿵쿵 내리쳤다. 입가에 물기가 잔뜩 스미고 나서야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음을 알았다.
기막혀하는 표정의 엄마를 외면하곤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괜한 감상 그만 떨고 당장 퇴원이나 해. 안 되겠다, 너. 여기 입원하고 나서부터 애가 영 이상해졌어.”
“…….”
“내일 오후에 윤 실장 보내마.”
통보 후 멀어져 가는 엄마의 구두 굽 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순식간에 양 손바닥이 뜨끈한 물기로 흥건해지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열 오른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 화장실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슬쩍 열려 있던 병실 문틈 사이로, 새카만 시선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온종일 그리워했던 남자였다.
“언… 언제 왔어요?”
언제부터 와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어디서부터 듣고 봤을까. 백강우는 답 없이 차분하기만 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엉망진창으로 울어 재낀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왔으면 말을 하지, 왜 그냥 서 있었어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물기 어린 뺨을 손등으로 몇 차례 문지르고 비벼 닦아 내기 바빴다.
“백강우 씨 온 줄 모르고 난….”
불쑥, 거리를 좁혀 다가온 커다란 손이 내 젖은 눈자위를 닦아 냈다. 하나하나, 내 얼굴을 훑고 살피는 그의 시선이 새카맣게 쏟아진다.
“서럽게도 울었다.”
“…….”
“어째 눈물 마를 날이 없네, 신하경 씬.”
눈자위와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 따뜻한 온기에 별안간 더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아서.
억지로 그의 손길을 밀어내듯 고개를 푹 떨궜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
“좀 전에. 인남이랑 같이.”
결국 또 처음부터 다 보이고 들켰단 소리였다.
“…쪽팔려.”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뭐가요. 나한텐 더 쪽팔릴 일도 없을 거라면서.”
“그래도요. 쪽팔려요, 이건 좀.”
“그래서. 쪽팔려서 나 계속 여기 세워 두려고요.”
그제야 우리가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들어, 와요.”
화들짝 뒷걸음질을 치자 백강우가 그보다 더 넓은 보폭으로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어쩐지 민망해져 용건을 묻기로 했다.
“무슨 일로 왔어요?”
“이거.”
그가 들고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차 싶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선 그의 집에 바이올린을 두고 나왔단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중요한 거 같은데, 아무 데나 이렇게 막 흘리고 다녀도 돼요?”
톡톡. 내 뺨을 두드리는 백강우의 손짓에 멍하던 정신이 돌아왔다. 가물거리는 눈동자를 느릿하게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문득, 굳이 이걸 돌려주겠다며 내 병실엘 찾아오고 내가 울음을 그치길 기다린 그 마음이 궁금했다. 혹시 그도 내가 다시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영 말도 안 되고 어이없는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거… 그냥 버려도 되는 건데.”
고맙다는 말 대신 나는 그렇게 내뱉고 말았다.
사실이었다. 어차피 다시 켤 수 있을 리도 없는 바이올린이었으니. 구태여 가지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윤 실장이 알아서 정리를 했을 거였고, 그럼 중고로 어딘가에 팔렸거나 버려졌을 악기다.
그러잖아도 괜한 고집을 부렸단 후회를 하던 참이었다.
어떻게든 날 팔아넘기지 못해 안달이 난 엄마와 무섭도록 치밀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신 회장. 이 결혼으로 아들의 허물을 덮고 동시에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다시금 굳혀 보려는 이진수까지.
어떻게 한다 해도 내가 이 판에서 도망칠 수 있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나마 같잖은 일탈을 꿈꿔 보는 일뿐.
“안 그래도 버리려고 했던 건데. 뭐하러 가져왔어요, 귀찮게.”
“또 하네, 거짓말.”
까만 눈동자가 내 속을 훑듯이 주시했다.
“거짓말, 아닌데요.”
구차히 항변할 말을 찾기 위해 시선을 굴렸다.
그사이, 거리를 좁혀 다가온 남자가 문득 내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기울여 왔다. 눈물로 젖은 표피 위, 남자의 입술이 뜨겁게 들러붙었다. 미끄덩한 혓바닥이 뱀처럼 밀려들었다. 퍽이나 익숙해진 온기에 일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하아. 뜨거워진 숨소리를 내쉬며 그의 어깨에 팔을 올려 감았다. 축축하고 말캉한 살덩이가 휘어 감기고 입 안엔 금세 달큼한 그의 향기가 한가득 고였다. 가슴은 빠르게 뛰었으나 마음은 도리어 차분히 가라앉았다.
키스는 부드러웠다. 우는 나를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이.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내 느낌은 그랬다.
“고백하면.”
고집스레 입술을 꾹 눌러 붙인 채로, 그가 낮게 읊조렸다. 남자의 기다랗고 촘촘한 속눈썹 아래, 짙게 진 음영이 느릿하게 움직거렸다.
“나도 거짓말을 하긴 했지.”
젖은 뺨을 만지작거리는 기다란 손가락이 뜨겁게 살갗을 데운다.
“저거 주려고 왔단 말.”
그러곤 이를 세워 아랫입술을 잘근대며 말을 이었다. 눅진한 자극에 절로 고개가 꺾여 들렸다. 그의 혀가 점점 더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숫제 나를 안아 올려 들다시피 해서 목덜미를 빨기 시작했다. 살갗에 타액을 펴 바르듯 혀를 움직이고, 약한 살만 골라 깨물고 지나던 그가 돌연 콱, 어깨에 이를 박아 넣었다.
“흐읏….”
다급한 신음성이 절로 샜다.
“거짓말이에요.”
“하, 으으….”
“실은 이 짓이 하고 싶어서 왔거든. 신하경 씨랑.”
말초적인 음성이 귓구멍에 뜨겁게 들어박혔다. 백강우는 내 귓바퀴 전체를 씹어 삼킬 듯 잘근대고 있었다.
“아, 백, 강우 씨… 흐으….”
달크닥, 문고리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나를 둘러메듯 안고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다급하게 그의 가슴을 밀어내며 눈을 크게 떴다.
“하아, 여기서 이러는 건….”
“문도 잠갔잖아, 그래서.”
고개를 까딱거리며 느긋하게 바지 지퍼를 내리는 백강우의 명료한 이목구비를 바라봤다. 홀릴 것 같았다. 아니, 이미 홀렸다. 이 남자에게.
“누구 올 사람 있어요?”
나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요. 그래도….”
“그래도 계속 얌전이 떨고 싶은 건가.”
창백하다고 느껴질 만큼 하얗고 매끈한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남자의 손이 내 손을 채어 가져갔다. 손에 쥐인 건 단단하고도 울퉁불퉁하게 기립한 그의 성기였다. 드로어즈 속에서 툭 튕겨 나온 기둥이 아랫배에 바짝 붙어선 벌써부터 불끈거리며 상하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의 성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왈칵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나한테 그런 거 원한 거 아니잖아. 꼴리면 언제, 어디서든 좆 내놓고 흔드는 발정 난 개새끼. 그런 놈한테 박혀서 엉망으로 음탕해져서 헐떡대는 거. 신하경 씨 그거 원했잖아. 그래서 일부러 공들여서 나 같은 쓰레기로 고른 거고. 아니에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저질스러운 언어들과 달리 목소리는 퍽 차분하고 나긋하게만 들렸다. 그게 꼭 듣기 좋은 저음의 음악처럼 들렸다면 내가 완전히 미친 걸까.
백강우는 내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쥔 채 위아래로 성기를 느릿하게 쓸었다. 손바닥이 끈적했다. 그 얇은 표피 사이로 터질 것 같은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져, 나는 경악하듯 숨을 삼켰다. 커다랗고 흉측스러운 남자의 성기는 볼 때마다 기가 찼다.
하릴없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왜요. 군침 돌아서?”
“…아뇨.”
“…….”
“징그러워서.”
백강우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징그러운 거 더 먹여 달라고 울었던 건 잊었나 봐요.”
“그래서 운 건… 아니었는데요.”
“하도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봐주려고 했더니 더 세게 더 쑤셔 달라고 엉덩이 흔들고 숨넘어가게 울었잖아요, 욕실에서.”
“하, 그거야 실컷 다 흥분시켜 놓곤 하다 마니까…!”
젖은 눈매를 있는 대로 흘기자 허리를 깊이 숙인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바퀴를 습습하게 적셨다. 후, 하고 잔뜩 불어 넣는 숨소리에 나도 모르게 목을 바짝 움츠렸다.
“으읏….”
간지러웠다. 더운 숨결이 귓불과 목선 그리고 쇄골로 차례로 미끄러졌다. 그의 입술이 지난 자리마다 솜털이 바짝 돋아나 신경 하나하나가 예민한 성감대로 변해 갔다.
내게 키스를 퍼부으면서도, 백강우는 제 성기를 쓰는 손길을 진득이 이어 가고 있었다. 그 거대한 것이 더 이상은 커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끝도 없이 부피를 키우는 성기는 돌덩이처럼 딴딴해져 시뻘건 열을 냈다.
이 무지막지한 게 내 안을 들락거렸단 생각을 하면, 절로 가랑이 사이가 찌릿거렸다.
“하아, 진짜, 할 거예요?”
“가짜로 할까요?”
손가락 끝에 콘돔을 걸어 보여 주는 것으로 대답은 충분했다.
“싫음 말해요. 싫다는데 억지로 할 생각은 없으니까.”
아직 답도 하지 않았건만, 백강우는 이미 이로 비닐을 찢어 껍질을 벗겨 내고 있었다. 기껏 물어 놓고는…. 느긋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귀두 끝에 콘돔을 씌우는 손길과 갸름해진 눈매는 욕망에 푹 절어 있었다.
백강우는 이미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내가, 절대 그를 거부하지 못하게 됐다는 걸.
답 대신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그러안았다. 환자복 바지와 팬티가 한 번에 무릎까지 끌어져 내려가고, 예고도 없이 갈라진 틈새로 손가락이 푹 박혀 들었다.
“아흐… 읍!”
내가 뱉고도 야릇한 소리가 너무 커 스스로 입을 덥석 틀어막았다.
“와.”
내리깔린 감탄사를 내뱉는 백강우의 입꼬리가 휘었다. 놀리는 게 분명했다.
“젖어 있었네.”
그는 질구에 살짝 담근 손가락을 부드럽게 돌리며 더 깊이 밀어 넣었다. 아랫배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소리 들어 봐요.”
손끝을 고리처럼 만들어 까딱이며 그가 말했다. 그때마다 깊어진 삽입감에 예민한 정점이 눌려 눈앞이 희게 변했다. 와중에도 찌끅찌끅, 찰박대는 난잡한 소리에 그악하며 입술을 감쳐물 따름이었다.
“너무 음탕하다고 생각 안 합니까.”
“흐으, 백강우 씨도, 섰잖… 흐읍….”
“난 원래 이런 놈이고. 신하경 씬 예상보다 진도가 너무 빨라서.”
“흐으, 음…!”
“좋아서.”
“으, 읏응….”
“말했잖아요. 상스러운 거 좋아한다고, 내가.”
정점을 꾹, 누르고 들어왔다 빠져나가나 싶었던 손가락이 하나 더 개수를 늘리며 짓쳐 들었다. 두 개, 세 개, 네 개까지 들어와 좁은 공간을 한가득 채울 때까지 왕복 운동은 집요하게 계속됐다.
“온종일 나한테 또 박히고 싶단 생각이라도 했나.”
“흐응…. 아냐, 그런…. 읏…!”
“아니긴. 이렇게 싸 놓고 아니란 말을 합니까, 양심도 없이.”
“하아….”
내벽의 점막이 단단하고 기다란 마디마디에 찐득이며 들러붙다 매끄럽게 이완하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흡사 남자의 페니스라도 죄는 듯이. 이어지는 황홀한 감각에 구멍이 정신없이 벌름댔다.
“뭐가 이렇게 야한지 모르겠네.”
백강우가 부러 손끝으로 느끼는 지점을 갉작거리며 속삭였다.
“혼자 한번 가게 해 줘요?”
“으응….”
얼마나 흥분한 건지 다 알면서. 백강우는 능청스레 물었고 나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거렸다.
“어떻게 해 줘요, 내가?”
“하, 빨리, 더, 세게, 흐….”
필사적으로 소리를 틀어막으며 간신히 답을 했다. 남자의 눈매가 얄밉게 휘었다.
“하…!”
안을 쑤시고 드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한층 더 빨라졌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쟁쟁하게 울렸다. 머리가 핑그르르 돌고, 엉덩이가 절로 조여들었다. 손가락이 드나들어 마찰열이 과해진 가랑이 사이에서 황홀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아아! 응!”
그리고 어느 순간, 제멋대로 자지러지는 신음이 튀며 뱃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흐물거리고 녹아 나온 애액이 찰박이며 이리저리 튀었다. 짧고 강렬했던 쾌감에 눈앞이 아른거렸다.
백강우는 내 안에서 길게 뽑아낸 자신의 손가락을 입 속으로 빨아 삼켰다.
“뭐 해요, 더럽게…!”
“난 이 냄새가 왜 이렇게 미치겠을까.”
그는 여봐란듯이 도리어 시뻘건 혓바닥을 내밀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샅샅이 핥아 댔다.
“하아, 늘 이렇게, 상스럽게 하는 편인가 봐요.”
“본인 취향도 별다르진 않아 보이는데. 알죠?”
아득한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그를 힐난했으나 씨알도 먹히질 않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런 말 따위로 그를 흥분을 가라앉힐 순 없는 일이었다.
백강우는 내 다리를 넓게 벌리고 무릎 뒤를 세워 성기 끄트머리에 입구를 끼워 맞췄다. 이어질 둔통을 감내하려 이를 악물고 숨을 들이켰으나, 좁은 입구가 비어져 한계까지 쫘악 벌어질 때엔 기어코 헉 소리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흐…! 읍…!”
다시금 손바닥으로 입술을 찍어 누르듯 틀어막았다. 손가락 따위가 삽입될 때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둔통이 아래를 얼얼하게 긁고 지났다. 두툼하고, 뜨겁고, 우둘투둘하며 사나운 살덩이가 격렬하게 안으로, 안으로 끝없이 밀려 들어왔다. 꽤 적응을 했다고 생각했던 고통이었는데 여전히 낯설고 버거운 모양이었다.
삽입은 귀두가 쿡, 하고 막다른 곳을 몇 번이고 찌르고 나서야 멈췄다. 배가 가득 차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백강우는 그런 나를 달래듯 천천히 그리고 느긋하게 허리를 돌리며 예민한 지점을 부드럽게 자극했다.
사흘간 수차례의 섹스로, 남자는 내 몸과 성감대를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 뭉근한 자극에 또다시 찌르릅, 물이 차올랐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난 원래 음탕한 여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하으…. 으….”
머리가 하얗게 비워질 만큼 좋은데, 한편으론 숨을 함부로 내쉴 수도 없을 만큼 아릿해 나도 모르게 눈가가 또 시큰거렸다. 내가 시트를 꽉 움켜쥐고 파들거리자 백강우는 허리를 깊게 숙여 내 눈가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주위가 죄다 분홍색이네.”
백강우의 음성이 코끝에 떨어졌다. 골반을 부여잡은 채 예고 없이 빠졌다 다시금 푹, 치받는 아랫도리의 흉포함과는 자못 다른 나긋함이었다. 정신없이 밀려드는 삽입감에, 허리가 절로 튀어 올랐다. 아찔한 소름이 돋았다.
“흣…!”
“분홍색이 잘 어울리긴 해요. 젖꼭지도, 보지도. 다 비슷한 색이라.”
“흐으, 저질, 말, 하지 마, 요, 으읍…!”
“나 좋자고 하는 말 아닌 거 모르겠어요? 저질스럽게 말하면 당신 더 싸고 더 흥분하잖아, 변태처럼.”
부정할 수 없었다. 음탕하게 쏟아지는 남자의 난잡한 말들을 들으며 나는 더 흥분하고, 더 매달려 울어 댔다.
불덩이처럼 열을 내는 가랑이 사이에 박힌 성기가 꿈틀거리며 빠르게 상하 운동을 했다. 굵다란 성기가 짓이기듯 들어왔다 빠질 때마다 내벽에 고여 있던 애액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 선연했다. 핑그르르, 어지러울 정도로 음란한 감각이었다.
“혼자서만 대체 몇 번을 갑니까. 박아 주니 그저 좋아선.”
“아흐, 읏! 더…!”
추삽질이 빨라졌다. 욱신대는 쾌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야릇한 환희에 전류라도 흐르는 듯 발끝까지 찌릿거렸다.
“하으, 응… 읍…!”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신음에 곤욕스러워하며 입술을 아프게 깨물자, 그의 손이 돕듯이 커다랗게 내 입술 위를 덮어 왔다. 그렇지 않아도 호흡이 달려 헐떡이던 참에 숨이 더 바짝 조여들었다. 산소가 모자랐다. 흡사 그가 내 목을 조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위험한 감각에, 믿을 수 없게도 나는 더욱 흥분을 하고 있었다.
그것마저도 백강우는 이미 다 알고 있단 듯 웃었다.
“우, 읍…! 으!”
헤벌어진 입구가 흐무러지듯 녹아내렸다. 내 안으로 마구 쑤시고 들어오는 남자의 단단한 살덩이에 희열하며, 나는 엉덩이를 천박하게 흔들었다.
삐거덕, 삐거덕.
백강우의 드넓은 침대보다 견고하지 못한 병실의 침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외설스러운 효과음마저, 모든 게 다 이 끔찍하리만큼 황홀한 감각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 봐요.”
“우, 으, 응!”
“눈 돌리지 말고.”
내 턱 끝을 강하게 당겨 그러쥔 그가 낮게 뇌까렸다.
아무래도 백강우는 눈을 맞추고 하는 섹스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다. 사정 전에는 꼭 이렇게 시선을 붙박인 채로 허리를 움직여 댔으니까. 고개를 숙이면 고개를 들라고 강요했고, 등 뒤에서 날 안을 때에도 턱 끝을 끌어와 기어코 눈동자를 맞추며 사정을 했다.
이번에도 그는 내게 시선을 붙박은 채로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꿰뚫고 들어오는 속도와 강도에 나도 모르게 자지러지듯 파들거렸다.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몸이 떨렸다.
“으응, 우응! 읍!”
이윽고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절정이 전신을 강타했다. 동시에 미간을 깊게 찡그린 남자가, 내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 내고 제 입술을 붙여 난잡한 키스를 퍼부었다. 안쪽에선, 막다른 곳을 뚫겠다는 양 푹, 푹 뭉그러지는 살덩이가 터질 것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그를 품은 내벽이 끊임없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남자의 사정을 도왔다. 그사이에도 나는 몇 번이고 맞은 오르가슴이 버거워 하릴없이 눈물만 줄줄 흘릴 따름이었다. 무력하리만큼 버거운 쾌감에 괴로운 기분마저 들었다.
백강우는 긴 사정을 마치고도, 한참을 성기를 빼내지 않은 채 계속해 내게 입을 맞췄다. 혀를 섞고, 타액을 빨아 마시고, 형편없이 갈라지는 소리들을 모조리 다 삼켜 내면서.
한참 만에야 입술이 떨어져 나가며 허벅지 사이에 못 박혀 있던 성기도 찔끅,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갑자기 텅 비어 버린 허전함을 느끼며 나는 가쁜 호흡을 되새김질했다.
“닦아 줘요?”
엉망이 된 아래와 시트를 번갈아 내려다보는 내 표정을 읽어 낸 백강우가 불쑥 질문을 해 왔다. 무슨 소리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해 눈을 치켜뜨자 그가 턱짓을 했다.
“아래. 빨아 줘?”
“아니…! 아뇨! 괜찮…. 흣!”
그러나 백강우는 곧장 다리를 벌리고, 거친 삽입의 여운에 아직 채 다물리지 못한 질구에 입술을 가져갔다.
입술 전체로 입구를 덮은 그가 혀를 밀어 넣고 내벽을 샅샅이 핥았다. 예민해진 안쪽 속살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백강우는 보란 듯 축축, 소리를 내며 음부를 개처럼 빨았다. 뜨거운 날숨이 빈 공간에 뜨겁게 밀려들었다.
“…그만, 흣…! 으응!”
눈앞이 희끗희끗 흐려지고 있었다. 마찰로 부어오른 여린 점막이 그의 입 속에서 속절없이 흐무러졌다. 그 악랄한 구음에, 절정이 또 한 번 빠르게 찾아왔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로지 짜릿한 감각에 몸을 내맡겼다.
미칠 것 같았다. 이 쾌감이 끔찍하게 좋아서.
“하으, 으…!”
그는 길게 뽑아낸 혀로 난잡한 질구는 물론이고 애액이 흘러 굳은 회음부 그리고 척척해진 엉덩이 아래까지 갈무리하듯 꼼꼼히 핥았다. 그 야릇한 감각에 시트를 바득 움켜쥐고 신음을 참느라 뺨이 터질 것처럼 열을 냈다.
한참 만에야 고개를 치켜든 백강우는 오뚝한 콧날이며 입술, 턱 아래까지 찐득하게 젖은 입술을 훔쳐 냈다. 그는 씨익, 웃고 있었다.
“하아…. 미쳤죠, 백강우 씨.”
“미치게 하는 게 누구 같아요. 닦아만 주는 건데도 조이고 싸고, 난리 났던 거 누구냐고.”
“왜 거길 자꾸….”
“흘리지 마요, 그러니까. 자꾸 빨고 싶어지잖아.”
“하…! 저질.”
그 예고 없는 상스러움을 비난하며 힘없는 몸을 겨우 일으키려는데 커다란 손이 안정감 있게 내 몸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샤워실 안으로 옮겨졌다. 나를 내려놓은 후, 백강우는 여전히 아랫배에 바짝 붙은 제 성기 밑동을 슬쩍 그러쥐었다. 애액 덩어리와 허연 거품이 낀 콘돔을 벗겨 내자, 비닐 속 가득 찬 정액이 쏟아질 듯 아래로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정작 그는 뻔뻔하리만치 태연한 표정으로 콘돔을 뒤집어 하수구에 정액을 흘려보낼 따름이었다.
“먼저 씻어요. 같이 씻고 싶은데, 그럼 진짜 큰일 날 것 같아서. 씻고 밥이나 먹읍시다. 배고프네.”
결국, 샤워실 밖으로 걸어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헛숨을 터뜨리고 말았다.
***
샤워를 마치고 나가자, 언제 무슨 일이나 있었냐는 듯 멀끔한 얼굴의 그가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뭐래요?”
“나갔다네요. 인남이 끌고 이 앞에 떡볶이 먹으러 나가 있다는데.”
전화를 끊은 그는 다소 허탈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그러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쇼핑백을 펼쳐 열었다. 아까 전 박인남이 들고 왔던 쇼핑백이었다. 그 안에는 꽤 많은 양의 포장된 초밥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연우와 내 것까지 함께 사 온 양 같았다.
“그럼 밖에 계신 분들이라도 같이 먹자고….”
“먹고 왔을걸요, 우리 한창 떡칠 때.”
눈 하나 깜짝 않고 내뱉는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행여 문이 열려 있진 않은지 흘긋 닫힌 문을 확인했다.
“늘 이렇게 저분들이랑 같이 다녀요?”
“걱정 마요. 상사 떡 치는 소리 엿들으면서 흥분할 미친놈들은 아니니까.”
화르륵, 두 뺨에 열이 올랐다. 백강우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는다.
“우리나 먹죠.”
그는 내 앞에 포장된 용기의 뚜껑을 열어 내려놓았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예쁜 색의 초밥들이 열과 줄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나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니 그를 흘긋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젓가락을 집어 들던 그가 나를 바라봤다.
“왜요. 먹여 줘요?”
“사실은…. 나 초밥 못 먹어요.”
“싫어합니까?”
“아뇨. 어릴 때 날것 먹고 크게 아팠던 적이 있어서요.”
“공주님이 많이 연약하시네.”
“공주가 아니라 시녀도 못 될 형편이었을 때 일이거든요.”
나도 모르게 욱하는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무심하게 읊조리는 그의 말에 감정이 치받쳐서였다.
“어릴 때 인곡에서 살았어요. 열네 살까지, 엄마랑 둘이서.”
멈칫한 남자가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아주 어릴 땐 아버지가 누군지도 몰랐고, 크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지만…. 알았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어요. 그때까진 제신 그룹이랑은 전혀 상관없이 살았거든요. 그래서 공주는커녕, 하루하루 끼니나 걱정하는 형편이었고요.”
“불우한 과거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불우하진 않았어요.”
“…….”
“견딜 만했어요. 지금에 비하면.”
지금 생각해 보면, 대책도 없이 엉망인 형편으로 살았던 것 같은데 그나마 내 인생에 가장 편안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매일 죽을 것처럼 술을 마시고, 소리를 지르고, 나를 방치하던 엄마를 말리느라 힘이 들긴 했어도, 적어도 지금처럼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단 생각은 안 했으니까. 망가져 가는 엄마를 어떻게든 살려 내겠단 희망이라도 품었던 때니까.
“그래서 가끔 다시 가 보고 싶단 생각을 해요. 어릴 때 살던 동네요.”
매일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지금껏 한 번도 인곡에 가지 못했다. 그곳에 돌아가는 순간 그대로 엄마고 뭐고, 다 버리고 싶어질까 봐서.
“그때 서울로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계속 그냥 거기서 엄마랑 살았어야 했는데.”
“열네 살짜리 애한테 선택권이 있진 않았을 텐데요.”
“그래도… 끝까지 내가 싫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서요. 그땐 그렇게 말해 볼 생각도 못 했어요. 그게 엄마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서울만 가면, 엄마가 그 집으로만 들어가면 행복할 거라고 믿었어요. 바보같이.”
“그러게. 아닌 것 같아 보이긴 했어요.”
그는 아까 전 목격했던 광경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나는 더 거리낄 것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엄만 계속, 어떻게든 서울로 가고 싶어 했었지만, 그때까진 회장님이 계속 엄마를 안 만나 줬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연락이 온 거죠. 날 데리고 서울로 오라고.”
“…….”
“모르겠어요. 회장님이 그때 무슨 생각으로 나랑 엄마를 불러들인 건지. 회장님이 우리한테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어요. ‘너희에게 법적인 권리를 주진 않겠다. 그러니 내 소유의 어떤 물건에도 욕심부리지 마라.’”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 모욕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도 엄마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을 꼭 쥐었더랬다. 열네 살의 어린 나도 알아들은 그 이야기를, 엄마가 못 알아들었을 리 결코 없는데도.
해서 나는 착각을 했었다. 그걸로 끝이라고. 이제 엄마의 모든 불행도 끝이 났다고. 나도 엄마에게 진 빚을 다 털어 낸 거라고.
그러나 기막히게도 그날이 내 모든 불행이 시작된 날이었다.
“웃기죠. 그래서 우리 엄마, 지금도 법적으론 회장님이랑 아무 관계 아니에요. 물론, 나도 회장님 핏줄 아니고요.”
내 무심한 고백에 백강우의 눈썹이 짐짓 들썩거렸다.
“그러니까, 나 공주 아니라고요. 자꾸 그렇게 부르지 마요. 놀림받는 것 같아서 기분 별로니까.”
속 시원히 죄 말하고 나면 이런 기분일 거라곤 미처 생각 못 했었다. 마음이 더없이 따뜻하고 평안해서, 지금 내 눈앞의 그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다 너그러이 받아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전히 동정도, 위로도 없는 새카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백강우를 똑바로 마주했다.
“놀리는 거 아니면, 계속 그렇게 불러도 되나.”
무지근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알 수 없는 울렁거림에 하마터면 입 밖으로 고백이 툭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가, 백강우 당신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게 된 것 같다고.
“또 뭐 못 먹어요? 다른 거, 먹을 수 있는 걸로 사다 줄 테니까.”
“…….”
참 이상했다. 질 나쁘고 쓰레기 같은 일만 골라 한다는 이 사람이, 다정하지 못할 거라고 엄포를 놓고 늦지 않았으니 도망가라 협박까지 하는 이 남자가, 왜 자꾸만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건지, 정말로 모를 일이었다.
“왜.”
“…….”
“더 안 물어요?”
“뭐를요.”
“나, 왜 이렇게 사는지.”
“…….”
“다 봤잖아요. 우리 엄마 어떤 사람인지. 그런 엄마 앞에서 내가 얼마나 등신처럼 구는지도.”
기실 ‘나는 백강우 씨가 궁금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마음으로 버티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알고 싶어진 거였다.
해서 나는 백강우가 나를 더 궁금해해 줬으면, 내게 왜 이렇게 한심하게 사느냐고 힐난해 주었으면, 엉망으로 망쳐 주겠다는 내 인생에 아무렇게나 끼어들어 간섭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관심 없어서.”
고저 없는 목소리가 짧은 정적을 갈랐다. 차갑고 초연한 그 얼굴에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꾹 말아 쥐었다.
“그쪽이 진짜 공준지 아닌지, 어떤 출생의 비밀을 가졌는지, 왜 이렇게 사는지. 별로 안 궁금합니다. 딱히 물을 이유도 없고.”
따끈하게 데워졌다고 생각했던 가슴 한구석이 일순간 시큰거리며 텅 비워지는 것 같았다. 알알이 쓰렸다. 백강우는 여전히 내가 재미없는 걸까. 여전히도 두꺼운 선을 그어 놓고 내가 넘어가기라도 하면 버럭 화를 낼 생각인 걸까.
병실 앞에 서 있는 그를 봤을 때, 그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적어도 일말의 호기심과 연민 사이, 그 어디쯤의 관심 정도는 있을 거라고. 그러니 이렇게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게 아니겠느냐는, 그런 헛된 기대를 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백강우의 그 한마디에 나는 또다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말 못 하게 서럽고 감연한 마음이 차올랐다. 무언가가 깊은 곳 어딘가를 아프게 갉죽거렸다.
“…못 먹는 거 없어요, 다른 건. 알레르기 있는 음식도 없구요.”
아무것도 아닌 척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꾸만 따끔거리는 목을 가다듬고 코끝을 찡긋거리며 말하자,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