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ude RAW novel - Chapter 9
08
한참 망설이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 젖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드 케이스 안으로 빗물이 많이 스며들진 않은 덕에 낡은 바이올린은 멀쩡하기만 했다.
다음 달 말 이진수가 참여한다는 자선 행사에 오프닝 공연을 해 주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들었다. 내가 먼저 들었더라면 거절했을 터였으나, 엄마는 이미 그쪽에 알겠노라 답을 한 모양이었다.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엄마의 강요로 그만두긴 했어도 공황 증세가 심해진 이후, 무대 위에 서는 것도 힘든 상황이긴 했다. 몇 년 전 은퇴를 할 때보다 최근의 상태가 더 안 좋기도 했고. 뭣보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바이올린을 켜지 않았던 게 가장 문제였다. 손이 굳지는 않았을는지, 퍽 자신이 없었다.
상념을 깨고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늦지 말고 와라. 나 바빠.
정희였다. 그녀는 기어이 내 상담 진료를 계속 진행해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 애정 어린 협박에 못 이겨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도 진료였거니와 진짜 목적은 연우와의 약속 때문이다. 다행히 상태가 호전된 건지, 담당의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제빵 수업 가는 걸 허락받았다는 연우는 자신이 수업 때 만든 케이크를 내게 꼭 맛보여 주고 싶으니 잠깐만 와 달라며 연락을 해 왔었다.
그러잖아도 그녀가 보고 싶었던 나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알겠노라, 답을 하고 병원으로 향했지만 짐짓 걱정이 됐다. 여전히 나와 백강우의 부적절한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는 연우를 이렇게 마주하는 게 과연 옳은 걸지. 행여나 이 관계가 그녀를 속이는 일이 되진 않을지.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하진 않을 작정이었다. 요즘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제멋대로,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지금 백강우가 간절히 필요했고, 귀엽고 밝은 연우와도 잘 지내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냥 그뿐이었다. 더없이 이기적이라 할지라도.
정희와는 진료실이 아닌 2층 직원 휴게실에서 만났다. 그렇게 한 시간쯤 상담 진료를 한 후 약 처방을 묻는 그녀에게 지난번 약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자 퍽 놀라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희는 아직 백강우의 존재를 몰랐다. 정희의 아버지는 오래전 사채업자에게 맞아 다리에 장애를 얻으신 분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백강우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 자체로 폭력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나뿐인 친구인 그녀를 구태여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스테이션에서 호출을 받은 정희는 먼저 자리를 떠났고, 혼자 남은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서울 왔어요?
백강우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안 바쁘면, 저녁에 볼래요?
출장 때문에 어제 하루, 고작 그 하루를 못 봤을 뿐인데 나는 참을성 없는 애처럼 그를 보채고 있었다.
아마도 상견례 날, 그 식당 주차장에서 이후부터인 것 같았다. 그날 이후의 나는 그에게 내 저급한 욕망을 드러내 보이길 서슴지 않았다. 막상 만나 관계를 가지기 시작하면 늘상 그의 난폭함에 당황을 하면서도, 그가 주는 쾌락에 중독되어 한없이 헤프게 굴고 있는 거였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하고 싶어요.
보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진다는 게 이렇게나 벅찬 기분인 줄 알았더라면. 누굴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앓는다는 게 이렇게나 끔찍하고도 황홀한 것인 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온통 시틋한 것들뿐이었던 내 삶에서도 작은 의미는 찾을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 확실히 낯설게 미쳐 있었다. 백강우에게.
땡.
청명한 소리와 함께, 지하에서부터 올라온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나는 내내 들여다보던 핸드폰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음과 동시에 손안의 핸드폰이 울었다. 거짓말처럼, 내내 떠올리던 얼굴이 눈앞에 서 있었다.
백강우는 귓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내리며 멍청히 선 나를 바라봤다. 어이없다는 듯 픽, 웃는 한쪽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나는 멈칫거리며 엘리베이터에 발을 디뎠다. 멍청히 서서, 어쩐지 민망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정면만 응시하는 나와 달리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그의 시선은 온전히 내게로만 못 박혀 있었다. 어쩐지, 오른쪽 뺨이 타들어 갈 것처럼 달아올라, 뭐라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차임이 울리고 다시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안으로 우르르, 사람들이 밀려들어 왔다. 학생들처럼 보이는 걸로 봐선 3층 강당에서 무슨 강연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공간이 가득 찼다. 밀려드는 인파에, 자연스레 한쪽 모서리로 몸이 구겨지듯 떠밀렸다. 그 밀물 같은 움직임을 가로막은 건 백강우였다. 모서리에 밀린 내 앞에 마주 선 남자가 인파를 방파제처럼 우뚝 막고 섰다.
나도 모르게 휘청이며 짚은 그의 가슴 근육이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우리의 몸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이 가깝게 맞닿았다. 남자의 향기가 아찔하게 가까워지고 이마 위로 쏟아지는 숨소리가 고스란히 다 느껴질 만큼. 설핏 벌어진 그의 셔츠 아래 맨살에 내 숨이 닿을 것 같아 최대한 몸을 벽에 붙인 채 푹 고개를 숙였다.
“지금도 안 바쁜데.”
일부러 이러는 걸까. 비스듬히, 입술을 기울이며 금방이라도 귓바퀴를 핥을 것처럼 가깝게 속살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음험했다.
“지금 하러 갈래요?”
간지럽고도 찌릿한 감각에 마른침을 삼키자, 돌연 아랫배에 닿는 단단한 윤곽의 촉감이 느껴졌다. 의도적인 접촉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놀란 눈을 번뜩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백강우의 붉게 올라간 입술과 날카로운 턱 끝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입꼬리에 일부러인 게 분명하단 확신이 섰다.
이 변태.
입술을 선명하게 움직거리며 항의하자, 정수리로부터 낮은 웃음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잠시 후. 다시 땡, 하는 구원 같은 소리가 들리고 의대 건물과 이어진 통로가 있는 7층에서 학생들이 줄지어 내렸다. 사각의 공간엔 다시 둘뿐이었다. 백강우는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서 한 걸음 떨어져 나갔다.
“나 놀려 먹는 데 재미 들렸죠?”
“그럴 리가. 늦게 배운 도둑질에 재미 들린 사람이 누군데.”
백강우가 느긋하게 기대어서 핸드폰을 내 눈앞에 흔들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보냈던 낯 뜨거운 메시지 내용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 어이없어….”
뒷말을 삼키고 눈에 힘을 주어 흘기는데 그가 또 피식 웃는다.
“귀엽다, 진짜.”
그러곤 이해할 수 없는 혼잣말을 되뇌었다.
엘리베이터는 곧장 우리가 내려야 할 층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먼저 그 공간을 도망쳐 나왔다.
불쑥, 뒤에서 내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는 남자의 체온에 심장이 뛰었다. 돌아본 그의 얼굴이 너무 매끈해서. 나를 향해 붙박여 있는 그 시선이 퍽 뜨거워서 열이 올랐다.
이래도 되나. 이래도 되는 건가.
본능적으로 주변을 슬쩍 훑고 두리번대자 그가 알 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겁 많은 여자가 어떻게 감히 나랑 떡을 칠 생각을 했을까.”
“궁지에 몰리면 다 이렇게 돼요.”
나는 힘주어 항변하며 그의 손을 더 꼭 그러쥐었다. 단단한 손마디가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성글게 파고들었다.
타박타박. 옆에서 발을 맞춰 걸으며 나와 시선을 맞추는 백강우를 또렷이 올려다봤다. 내 그립고, 보고 싶었던 얼굴이 나를 향해 있다는 사실에 돌연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말로 이래도 되나. 이래도 되는 건가. 누군가 손을 잡고 걷는 우리를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도, 이 손을 결코 놓고 싶지 않아졌다. 심박이 과하게 빨라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걱정했어요. 갑자기 출장이라길래.”
“왜요, 또 칼이라도 맞고 올까 봐?”
“네.”
갑작스레 출장을 간다는 말에, 쓸데없는 걱정으로 어젯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나를 안다면, 백강우는 비웃을지도 몰랐다. 실은 하고 싶단 핑계로 메시지를 보낸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단 것도.
“인남 씨는 또 어디 가고…. 왜 혼자 다녀요? 위험하게, 이래도 돼요?”
“아, 백연우 못지않은 잔소리가 또 있네.”
백강우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읊조리며 천천히 멈춰 섰다.
“본 게 있으니까 걱정이 돼서 그러죠. 연우도, 나도.”
“그러게. 다 봐 놓고선. 알잖아요, 칼 맞아도 할 건 다 하는 거.”
얘기가 또 왜 그리로 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아니라니까?”
“그래요. 그렇다 치고.”
아이처럼 변명을 늘어놓는 내 이마 위로, 그의 손이 부드럽게 닿아 내렸다. 그는 이마 위, 흘러내린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들어가죠, 연우 기다릴 텐데.”
스르륵, 쥐고 있던 손을 놓으며 앞장서 문을 열었다. 그 널따란 어깨와 단단하고 커다란 남자의 등을 응시하는데, 가슴 어딘가가 찌르르 울었다. 아니, 간질거리는 것도 같았다.
“어떻게 둘이 같이 들어와?”
뒤따라 병실로 들어서자,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던 연우가 홱 고개를 돌려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잘됐다. 시식단 한 명 더 늘었어.”
그녀는 웃으며 벌떡 일어나 곧장 냉장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커다란 케이크 박스를 꺼내와 펼쳐 놓으며 잔뜩 신이 난 목소리를 냈다.
“짠! 내가 개발한 민트 초코 무스케이크. 자, 한입씩들 드셔 보세요.”
아무래도 백강우와 내가 이 시식회의 희생자로 선정된 것 같았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케이크를 한입씩 먹고 그녀가 원하는 답을 해야 했다.
나에게야 쉬운 일이었지만 과연 그에게도 쉬울까 싶어 흘긋 보자, 아니나 다를까 늘상 무감하기만 하던 얼굴에 퍽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그게 귀여워 웃음이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남자에게서 보지 못했던 많은 얼굴을 보게 되는 것 같았다. 해서 도무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그의 모습이 점차 서서히 선명해지고 있단 느낌이었다. 이렇게 계속 지내다 보면, 언젠가 백강우란 남자에 대해 완전히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주제넘은 욕망과 욕심이 위험 수위에서 들끓었다.
“자요.”
순간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내가 이 남자를 꽤 많이 좋아하고 있단 걸.
“좋아하는 것 같아서. 더 먹으라고.”
내 앞접시 위에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얹어 올리며 빙긋이 웃는 그를 마주 봤다. 근사한 미소에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뛰었다.
***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 서정적으로 시작된 주제부가 점차 고조되어 가는 부분이었다.
들려오는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을 따라 발걸음을 움직였다. 주홍빛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조도가 낮은 간접 등 아래, 근육이 단단하게 솟은 어깨와 등이 보였다.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이 꼭 그림처럼 비현실적이었다.
한 걸음 더 다가서자 채 말리지도 못하고 나온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인기척을 느끼고 턴테이블 앞에서 나를 돌아본 백강우가 제대로 옷도 입지 않고 나온 나를 훑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제 대놓고 야하게 굴기로 한 건가.”
백강우의 입꼬리가 피식 말려 올라갔다.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서요.”
“난 또. 씻자마자 한 번 더 하고 싶다고 달려 나온 줄 알았더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에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알아요.”
천천히 나를 스치고 지나쳐 위스키 병을 집어 드는 백강우의 대답이 태연했다.
“안다고. 신하경 씨가 제일 좋아하는 곡인 거.”
“어떻게요?”
“어떻게겠어요. 본인이 직접 몇 번이나 말해 놓고.”
콩쿠르에서 수상을 했을 때와 개인 연주회 때 했던 인터뷰를 말하는 것 같았다. 설마 그걸 일일이 다 찾아본 건가. 아님 내 뒷조사라도 했나. 내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어 보였던 백강우가 내 인터뷰 내용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짐짓 가슴이 뛰었다.
“크리스티앙 페라스 연주예요. 난 이 버전이 제일 좋아서.”
백강우는 내게 답을 유도하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저도요.”
기교를 뽐내기에 좋은 곡이었다. 해서 테크닉이 뛰어나고 화려한 연주자는 많았지만 페라스의 연주처럼 가슴이 뜨거워지는 연주는 듣지 못했다. 그도 페라스의 연주에서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걸까.
“놀랍게도 취향이 같네.”
픽, 웃는 그의 입술이 짧은 호선을 그렸다.
그저 호기심에 내 인터뷰 몇 개만 찾아보고 이 곡을 튼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더더군다나 인터뷰에서 페라스의 연주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바이올린 곡, 즐겨 듣나 봐요. 몰랐는데.”
“아, 깡패가 클래식 듣는 건 좀 안 어울리나?”
그의 농담에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잔을 들고 내게로 다가오는 남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어릴 때 수녀원에서 자주 듣던 음악이 베토벤 장엄 미사곡이었어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거.”
내 허리를 끌어안고,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나른히 나를 내려다보는 그에게서 진한 알코올 향이 풍겨 왔다.
“결과적으로 주님께선 날 지독한 무신론자로 만드셨지만.”
수녀원에서 자랐던 백강우는 신을 믿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욕망덩어리인 여자의 딸로 자라난 내가 아무것도 욕망한 적 없듯이.
“근데, 정말 안 돌아가도 됩니까.”
연우의 병원에서 곧장 그의 차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저녁 시간이 되기 전,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옳았으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저녁 내내 그리고 밤이 깊어갈 때까지 길고 진한 섹스를 즐겼다.
시끄럽게 울려 대는 핸드폰은 꺼 버린 지 오래였다. 아마도 지금쯤, 엄마는 어떻게든 내 부재를 감추고 나를 찾아내려 혈안이 되어 있을 게 뻔했다. 이상하게도 그게 통쾌하고 후련했다. 해방감이었다. 그리고 내게 이런 느낌을 처음 알게 한 건 분명 이 남자였다. 그러니까 모든 게 다 백강우 당신 탓인 거라고.
“그냥 계속 여기에 있을까요, 나? 강우 씨가 가지 말라고 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름의 간절한 말에 그가 낮게 웃었다.
“감금이라도 해 줘요? 역시, 그런 취향입니까?”
역시나 백강우는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자발적으로 수렁을 빠져나오지 못할 거라는 것까지도. 비겁하게도 나는 이왕이면 그가 나를 조금 더 먼 곳까지 데리고 가 줬으면 하고 바랐다. 다시는 돌아올 수도 없을 아주 머나먼 곳까지.
나는 까치발을 힘껏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물기 어린 젖가슴이 그의 가슴에 맞닿아 뜨겁게 뭉크러졌다.
그의 장골에 헐겁게 걸쳐져 있던 수건이 훅, 아래로 밀려 내려가고, 언제 사정이나 했었냐는 듯 새로 발기한 성기가 내 배 위에 음란하게 비벼졌다. 미끄덩한 쿠퍼액이 배 전체에 진득하게 펴 발라졌다. 나는 흘긋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그에게 물었다.
“빨아 줄까요?”
백강우는 어디 할 테면 해 보라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느긋이 턱짓을 했다.
나는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어앉았다. 다소 굴종적인 자세였으나 상관없었다. 백강우도 내 가랑이 사이를 개처럼 핥고 빨아 준 게 수십 번이었다. 나도 한 번쯤 나 때문에 흥분에 달아 힘들어하는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내게 더 안달 내주길, 나를 더 원해 주길, 나를 좀 봐주길.
눈앞에서 가까이 보는 거대한 크기에 잠시 기가 눌리기도 했으나 지체하지 않고 기둥을 손에 쥐었다. 검붉은 귀두 끝을 입으로 한가득 밀어 넣자, 백강우의 손이 내 뒷머리를 지그시 눌러 왔다.
“흐읍…!”
아직 반도 삼키지 못했는데 목구멍이 콱 막히는 느낌에 다급하게 그의 허벅지를 짚었다. 절로 눈꼬리에 물기가 고였다. 나는 오기처럼 입술에 힘을 주어 기둥을 빨아들였다 뱉었다를 반복했다.
겨우 올려다본 그의 눈매가 나른한 쾌감으로 짙어지고 있었다. 그 표정만으로 저릿해진 가랑이 사이에서 물이 차올랐다. 나도 모르게 허전한 아래를 조였다 풀었다 하며 성기를 빨았다. 답도 없는 음란한 감각이 선명히 일었다.
핏줄이 울퉁불퉁 불거진 기둥을 입에 넣고 굴리기를 몇 번이나 더 반복했을까. 별안간 나를 번쩍, 일으켜 안아 든 그가 그대로 내 허벅지를 넓게 벌리고 젖은 성기를 쿡 찔러 넣었다.
“아흑…!”
저녁 내 계속됐던 섹스로 아직 채 다물리지 않았던 구멍이 무리 없이 그의 굵다란 것을 받아 삼켰다. 나는 그의 허리 뒤로 감은 다리에 힘을 주어 그에게 매달렸다. 백강우는 내 젖은 눈자위에 입술을 맞추며 사납게 허리를 추어올렸다.
3악장 피날레, 알레그로 비바치시모. 강렬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폭죽이 터지듯 빨라지는 바이올린의 카덴차 소리가 귓가에 황홀하게 젖어 들었다. 그게 꼭, 점점 더 위험해져 가는 우리의 섹스 같았다.
채신없이 그에게 매달리고 흔들며 주님께 기도했다. 내 안을 제멋대로 헤집어 대는 이 남자를 제발 내게서 뺏어 가지만 말아 달라고. 바라건대, 내 유일한 소망은 딱 그것 하나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