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th King Karnak RAW novel - Chapter (181)
사령왕 카르나크-181화(181/338)
44. 우리 동네 아크 리치 (1)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였다. 봄이 왔다지만 북부 지방에는 아직 겨울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그 황량한 들판 가득, 죽음이 형태를 이룬 채 몰려온다.
으으…….
으으으…….
반쯤 썩은 좀비 무리가 음울한 신음을 흘리며 걸음을 옮긴다.
뼈만 남은 스켈레톤들이 창칼을 들고 삐걱삐걱 진군한다.
더러운 체액을 흘리는 구울들이 어슬렁거리며 뒤를 따른다.
“맙소사…….”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스틸 왕국군의 기사, 셀바트 경은 신음을 흘렸다.
“……안식에 들었어야 할 이들이 어찌 대지를 걷고 있단 말인가.”
그는 왕국 북부 프라트 영지의 하급 귀족 출신으로, 실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스물이 될 때까지 검술 수행만 하다가 얼마 전 기사로 임명되어 첫 출전한 경우인 것이다.
하지만 공포에 굴복할 순 없었다.
그에겐 이끌어야 할 병사들이 있다. 자신이 공포에 질리면 저들의 사기는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하토바시여, 제게 꺾이지 않는 용기를 주소서…….”
애써 투지를 끌어내며 병사들을 돌아볼 때였다.
몰려오는 언데드 군세를 보며 수군거리는 병사들의 대화가 들렸다.
“아따, 저놈들 많이도 몰려오네.”
“얼굴 아는 시체 있나?”
“없어 뵈는데.”
“이번엔 속 편하게 썰 수 있겠군.”
셀바트는 당황했다.
어쩐지 병사들은 저 현실에 펼쳐진 지옥도를 보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자네들은 저 괴물들이 두렵지 않은가? 어찌 그리 태연하단 말인가?”
부관들이 뭔 얼토당토않은 말이냐는 듯 대꾸했다.
“안 태연한데요.”
“무서운데요.”
“그런 표정들이 아닌데?”
이해가 가질 않는다.
기사로서 수행을 쌓은 자신도 시체들이 움직이는 광경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거늘 어찌 일개 병사들이?
그러자 부관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야…….”
“요새 시체가 돌아다니는 건 워낙 흔한 일 아닙니까?”
개나 소나 사령술사, 동네방네 스켈레톤이 요즘 트렌드다.
셀바트 경이 워낙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어지간히 칼 밥 먹고사는 인간이면 언데드와의 전투는 슬슬 익숙해진 것이다.
“물론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죠.”
“다들 허세만 늘었지, 쯧.”
고소를 머금은 채 부관들이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언데드 군세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후 기다리던 신호가 울렸다.
부우우웅!
진군의 뿔피리 소리였다.
“갑시다요, 기사님!”
“아, 알았다!”
셀바트 경이 검을 빼 들며 박차를 가했다.
동시에 진영의 선두를 차지한 기사들의 기마대가 일제히 적진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언데드 군대와 유스틸 왕국군이 격돌하며 함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
*
*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는 들판 후방의 한 나지막한 구릉 중턱에 천막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꺼진 모닥불 위로 솥 2개가 걸려 있는 게 전부인 허름한 천막.
얼핏 거지 움막처럼 보이는 이곳이 바로 수천에 달하는 언데드 군대의 본진이자 보급창이었다.
언데드는 밥을 먹을 필요도, 잠을 잘 필요도 없다. 사령술사들이 꾸준히 권능을 부여하기만 하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즉, 사령술사들의 식량과 잠 잘 곳 정도만 챙기면 모든 보급이 끝나는 것이다.
전쟁에서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우며 승패를 좌지우지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그러니 이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전투에서 너무나도 우월한 특성이거늘……
“밀리고 있군.”
칠흑의 로브를 걸친 해골이 전장을 노려보며 턱을 매만졌다.
유리해야 할 언데드 군세가 오히려 인간 군대에게 밀리고 있었다. 인간들이 지나치게 잘 싸우는 탓이었다.
“불 붙여, 불!”
“성수 뿌려, 성수!”
“저것들 칼 맞아도 꼼짝도 안 하잖아? 그만큼 감각이 둔하단 소리다! 시야 가리고 파고들어!”
“알겠습니다, 대장!”
눈앞에서 반쯤 썩은 시체가 흉측한 몰골을 들이대는데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전투를 벌이듯 노련하게 싸움을 이어 간다.
해골이 고개를 저었다.
“나 원 참, 요새 인간들은 왜 저렇게 언데드에 익숙하지?”
물론 그는 해답을 알고 있었다.
종말의 어둠이 퍼진 지도 어언 5년이 넘었다. 대륙 곳곳에서 시체와 마물이 들끓게 된 지도 동일한 시간이 지났단 소리다.
문제는 저 종말의 어둠이 지나치게 자잘하게 퍼져 나갔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마을 전체, 도시 전체가 통째로 죽음의 땅이 되거나 했다면 아무리 흔한 일이라 해도 저리 쉽게 익숙해질 리가 없다.
하지만 동네마다 종말의 어둠 소유자가 한둘씩 듬성듬성 나타나서, 각자 좀비며 스켈레톤 대여섯 마리씩 듬성듬성 몰고 다니다 격퇴당하는 일의 반복이다.
소규모로 조금씩 접촉하게 되니 인간들도 그만큼 적응할 여유를 얻은 것이다.
검은 신의 교단도 저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했다.
종말의 어둠이 분산되어 뿌려지는 것 자체가 테스라낙이 세운 계획의 일부였으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전선은 계속 후퇴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본진까지 밀릴 듯하다.
“아무래도 어둠의 권능을 좀 더 부여해야 할 것 같은데…….”
중얼거리며 해골이 곁에 서 있는 5명의 사령술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전원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 위로 검은 영기를 피우는 중이었다.
“크, 크윽!”
“헉! 허억, 헉!”
해골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많이 힘든가?”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닌가? 힘든 티가 역력한데.”
분명 언데드는 보급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절로 움직인다는 소리는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보급이 필요하지 않다면, 그에 맞먹는 다른 자원을 잡아먹을 수밖에.
인간 군대가 너무 잘 싸운 탓에 언데드 군세를 움직이는 사령술사들의 사령력이 예상보다 일찍 소진되었다.
“결국 또 내가 나서야 하나?”
해골이 로브 안에서 황금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이럴 거면 군대가 대체 왜 필요한 건지 모르겠군.”
사령술사들이 송구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부탁드립니다, 말로카 님!”
지팡이를 쥔 해골, 말로카가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막대한 암흑의 권능이 폭풍처럼 피어오른다. 어둠이 먹구름처럼 사방을 뒤덮으며 뻗어 나간다.
마치 검은 태양이 떠올라 사방으로 검은 햇살을 뿌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며 병사들이 경악해 소리쳤다.
“놈이다!”
“아크 리치가 나타났다!”
*
*
*
칠흑의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아크 리치가 전장의 하늘을 유영한다.
어둠이 흐느끼는 악령처럼 허공 여기저기로 흘러내린다.
전장의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말로카는 지팡이를 겨눴다. 황금 지팡이 끝에서 거대한 불길이 일었다.
“불어라, 화염의 폭풍이여.”
불길이 커지고 또 커지며 소용돌이가 되어 사방으로 퍼진다.
소용돌이가 대지와 하늘에 닿아 그 위세를 점점 더 떨쳐 간다.
콰콰콰콰콰!
동시에 발치의 땅을 향해 뼈만 남은 손가락을 내민다.
“퍼져라, 부식의 대지여.”
한 줄기 검은 빛이 허공에서 내리꽂히더니 이내 땅속으로 파고든다.
한 점을 중심으로 자욱한 연기와 함께 독성 가득한 연기가 퍼져 나간다.
하늘에는 불길, 땅에는 저주.
사방을 뒤덮은 저 유형화한 죽음 앞에 병사들의 허세 따윈 간단히 날아갔다.
“으아아악!”
“피해!”
“어디로?”
물론 유스틸 왕국군도 얌전히 당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법사단! 반격하라!”
마법사 열댓 명이 정렬해 일제히 완드를 내밀며 마법을 가한다. 푸른빛의 마력 방어장이 불꽃 소용돌이를 거칠게 밀어낸다.
반대쪽에선 대지의 여신 하토바를 섬기는 신관들이 광범위한 축복의 빛을 뿌린다.
“하토바여, 이 땅을 정화하소서!”
빛이 썩어 가는 대지를 훑을 때마다 독연이 가라앉고 공기가 도로 맑아진다.
허공에서 지켜보던 말로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대응을 잘하는군.”
다들 언데드와의 전투에 충분히 익숙해 보였다.
하지만…….
“크윽?”
“무, 무너진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불의 소용돌이가 마력 방어장을 찢어발겼다. 대지의 독연 역시 빛을 가리며 다시금 부식의 영역을 넓혀 갔다.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왜, 왜지?”
“우리가 뭘 실수한 거지?”
허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말로카가 희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실수한 건 없지.”
그럼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그대들이 이 몸보다 약할 뿐.”
불길과 저주가 유스틸 왕국군을 싹 쓸고 지나갔다. 사방에서 비명과 아우성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아으으으…….”
그나마 비명을 터트릴 수 있는 자들은 행복한 이들이었다.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일어나라, 나의 군세여.”
죽어 버린 병사들은 안식조차 얻지 못한다.
“위대한 테스라낙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악한 어둠에 희롱당하며 강제로 일으켜 세워질 뿐.
“산 자를 지우고 그 자리에 죽음을 채워 넣어라!”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이들이 창과 칼을 움켜쥐고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저 빌어먹을 괴물 놈…….”
이대로라면 결과는 눈에 보듯 뻔하다.
유스틸 왕국군 지휘관, 로첸트 경은 분루를 삼키며 퇴각 신호를 보냈다.
“후퇴, 후퇴하라!”
물러서는 왕국군을 노려보며 말로카도 지팡이를 거뒀다.
“오늘은 여기까지인가.”
굳이 저들을 뒤쫓을 필요까진 없다.
어차피 영토 정복이 목적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제스트라드 영지에 버티고 있는 것뿐.
아크 리치가 허공에서 몸을 돌렸다.
“기다리다 보면 그놈이 나타나겠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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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오더에서는 일부러 관문 도시 스윈들러까지 카르나크 일행을 마중 나왔다. 워낙 사안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수도 드룬타는 유스틸 왕국 중남부에 위치한다. 반면 바라칸트 산맥은 왕국 북동부, 제스트라드 영지는 북서부 지방이다.
만약 카르나크 일행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면 일정대로 수도로 귀환했을 것이고, 그럼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제때 상황을 전해 들은 덕에 일행은 곧바로 북으로 향했다.
빠른 말을 타고 최대한 달려 평소의 절반 정도인 나흘 만에 북부 최대의 도시, 데라트 시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엔 이미 제스트라드 영지를 탈환하기 위해 3천의 왕국군이 집결해 있었다.
저들을 이끄는 지휘관이 킹스 오더의 단장 에란텔과, 유스틸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마법사인 8서클의 테오데릭이었다.
“드디어 왔구먼, 카르나크 경.”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겁니까, 단장님?”
오면서 물어보긴 했지만, 마중 나온 킹스 오더 역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저 검은 신의 사교도들이 카르나크의 영지를 점령했다는 것이 그들이 가진 정보 전부였다.
그래서 데라트 시티까지 오면 이유를 확인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시급히 자네를 부른 이유일세.”
어째 에란텔 단장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관련 영지의 영주이니 당연히 불러야 하지만, 그 외에도 자네가 아니고서는 답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사교도가 영지를 점거하거나 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의외로 여기저기서 사교도들이 난을 일으키고 토벌당하곤 한다.
하지만 제스트라드 영지는 사정이 달랐다.
결코 평범한 사교도 따위가 아니었다.
“현재 자네 영지를 점령하고 있는 건 전설에나 나오던 괴물, 아크 리치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