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th King Karnak RAW novel - Chapter (229)
사령왕 카르나크-229화(229/338)
56. 황혼의 질주
알테일 왕국 변두리에 위치한 이름 없는 황야.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옛 구 왕조 시절의 버려진 마을이 존재했다.
한때는 융성했으나, 오랜 가뭄으로 인해 수원이 마른 뒤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무너진 벽돌과 돌무더기만 가득한 폐허.
이는 핍박받는 검은 신의 교도들이 자리를 잡기에 매우 적합한 조건이었다.
사교도들은 이 폐허에 아바로스란 이름을 붙이고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각종 악령과 마물을 부리며 온갖 악행을 이어 갔다.
인근의 귀족과 군대, 여신교단마저 놈들의 횡포를 막지 못했다.
백성들의 고통이 하늘을 찌르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강이 되어 흘렀다.
하지만, 이런 사교도들의 만행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
고립된 황야의 폐허 속에서 요란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으아아아!”
거친 모래바람을 뚫고 회색 로브를 걸친 자들이 달려온다.
고함과 함께 양손을 내밀며 칠흑의 기운을 날린다.
“죽어라, 어둠의 주구들아!”
반대편에 선 검은 로브 차림의 사내, 아바로스의 지부장 다미스가 어이없어하며 악을 썼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어둠의 주구라는 표현에 화를 내는 건 아니었다.
죽음과 어둠의 신, 테스라낙을 섬기고 있지 않은가? 어둠의 주구 자체는 오히려 영광스러운 표현이다.
어이없는 부분은, 자기들도 사령술을 펼치는 주제에 이쪽을 어둠의 주구라 칭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는 네놈들도 어둠의 힘을 쓰지 않느냐?”
회색 로브의 사내들이 코웃음을 쳤다.
“흥! 어리석어 제대로 볼 줄도 모르는구나!”
그러더니 양손을 들어 올려 기운을 끌어내며 자랑스레 외친다.
“이것이 어둠으로 보이느냐?”
다미스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
매우 칠흑이었다. 누가 봐도 새까맸다.
‘나도 미친놈이지만 이놈들도 만만찮구나!’
뭐, 회색 로브 쪽도 할 말은 있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황혼의 권능이다!”
“위대한 여신, 세라칼 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은총!”
당당한 그 모습에 다미스의 인상이 더더욱 구겨졌다.
‘젠장, 저 정신 나간 황혼교 놈들!’
회색 로브 무리의 정체는 황혼의 교단이었다.
최근 들어 검은 신의 교단과 점점 더 충돌이 잦더니, 결국 여기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가라! 황혼의 형제들이여!”
“세라칼 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라!”
수많은 황혼의 교도들이 칼과 창을 휘두르며 폐허를 질주한다. 요란한 발걸음이 사방을 뒤흔든다.
검은 신의 교도들도 이를 악물며 맞섰다.
“이 미친놈들은 대체 왜 우리한테만 이러는 거야?”
“그대들도 테스라낙을 섬기던 이들이 아니었나?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화살을 쏘고 어둠의 화염을 이용해 맹공을 퍼붓는다.
각자 무기에 어둠의 기운을 부여한 뒤 베고 또 벤다.
서로가 서로를 부인하며 언어와 칼날을 휘둘러 댄다.
“우리는 올바른 여신을 찾았다!”
“그릇된 자들이여, 죽음으로 회개하라!”
낡은 석재의 잔해와 황폐한 풍경 사이로 불꽃과 화살이 오갔다. 함성이 폐허 곳곳에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
“세라칼 님을 위하여!”
“테스라낙이여, 보우하소서!”
시간이 지날수록 폐허가 무수한 피와 땀으로 젖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회색 로브 무리의 뒤로 갑자기 한 여인이 나타났다.
“모두들 잘 버텨 주었습니다.”
그녀를 본 황혼교도들이 기뻐하며 외쳤다.
“말로카 님!”
여인이 손짓을 하여 회색 로브 무리를 뒤로 물렸다.
“물러나세요. 이제 이들은 제가 맡지요.”
다미스는 인상을 썼다.
상당히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석영처럼 매끈하고 투명한 피부에 밤하늘처럼 은은히 빛나는 긴 흑발의 머리카락, 보석처럼 반짝이는 감미로운 눈동자까지.
확실히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한 미모의 소유자임엔 틀림없었다.
하지만 얼굴 좀 예쁘장한 것이 이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네년은 대체 뭐냐?”
다미스의 막말에 말로카가 빙그레 웃었다.
“호호호…….”
동시에 그녀가 변했다.
피부가 사라지고, 뼈가 드러나고, 눈동자가 불타고, 어둠이 사방으로 드리운다.
아름다움이 썩어 가고 음성마저 뒤틀린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기겁한 검은 신의 교도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으헉!”
“으허헉!”
그 아름답던 여인이 순식간에 흉측한 해골로 변해 버린 것이다.
사령술에 익숙한 이들에게조차도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
“황혼과 혼돈의 여신 세라칼의 이름으로…….”
방대한 어둠의 마력을 떨치며 아크 리치, 말로카가 날아올랐다.
“그대들을 수확하겠노라!”
끔찍한 해골이 기괴한 웃음을 터트렸다.
공포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쇠를 긁는 듯한 광소였다.
“크하하하하!”
***
아바로스 폐허 지하엔 여신교의 성직자와 인근 마을 사람들이 붙잡혀 있었다.
악마에게 바치기 위해 검은 신의 사교도들이 확보한 제물들이었다.
철컹!
쇠창살이 열린다. 갇혀 있던 이들이 회색 로브 무리의 인도에 따라 감옥 밖으로 나온다.
풀려난 알리움의 성직자, 파르샬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다, 당신들은?”
“우리는 황혼의 여신, 세라칼을 섬기는 이들.”
황혼교도를 이끄는 흑발의 미녀가 우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신의 이름으로 그대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중년 나이의 성직자 1명이 인상을 쓰며 외쳤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여신의 성직자들은 특히나 민감하게 상대의 어둠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네놈들도 사악한 사령술사가 아니냐!”
흑발의 미녀는 일견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싼 회색 로브의 사내들에게선 틀림없이 지독한 사령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검은 신의 사교도들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끔찍한 기운이었다.
미녀, 말로카가 달래듯 말했다.
“불은 인간이 다루기에 따라 축복도 재앙도 되는 법이지요? 어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다.
황혼의 교단이 바라는 바 역시 이와 같다.
“악에는 악, 어둠에는 어둠.”
노래하듯 읊조리며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당신들에게 인정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저 이것이 우리가 섬기는 여신, 세라칼의 뜻이기에 행할 뿐입니다.”
황혼교도들이 갇혀 있던 이들을 지상으로 이끌었다.
다들 순순히 뒤를 따랐다.
아무 힘이 없는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갇혀 있어 쇠약해진 여신의 성직자들 역시 저들에게 저항할 기력이 없는 것이다.
걱정과 경계 속에서 밖으로 나오자, 말로카가 다시 말했다.
“저흰 그럼 가 보도록 하지요.”
“정말 이대로 풀어 준다고?”
“아까부터 그리 말하지 않았나요?”
이쯤 되니 아무리 성직자들이라도 더 이상 의심을 할 순 없었다.
이들은 정말 자신들을 구해 주러 온 것이다.
“으, 으음…….”
감사 인사를 할 순 없다. 교리에 어긋난다.
하지만 저들이 생명의 은인인 것도 사실.
어쩔 줄 몰라 하는 성직자들을 향해 말로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기억해 주세요. 우리는 빛을 기다리는 어둠, 황혼을 섬기는 이들.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
하르톨 시티를 출발한 지 보름 뒤.
마침내 카르나크 일행은 유스틸 왕국 수도 드룬타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을 둘러보며 붉은 머리 미녀가 혀를 찼다.
“우와, 먼지 쌓인 거 봐.”
뒤를 따르는 잿빛 머리 소녀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너무 빈집으로 내버려 두는 거 아니에요, 이거?”
세라티도 라피셀도, 머리 염색이 슬슬 풀려 원래 머리색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여튼, 정말 집을 오래 비우긴 비웠다.
하르톨 시티 사건으로만 한 달 넘게 비웠고, 그 전에도 어쩌다 하루 이틀 정도만 머무를 뿐 내내 밖으로 싸돌아다녔다. 실제로 여기서 산 기간은 진짜 얼마 안 된다.
“도로 팔아 버릴까?”
잠시 고민한 카르나크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수도에 거점 없으면 여러모로 귀찮다.”
일단 짐만 풀고 다시 나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수도로 복귀했으니 이래저래 밀린 일들이 많았다.
아무리 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아도 카르나크는 엄연히 유스틸 킹스 오더의 부단장이고 바로스와 세라티, 레번도 킹스 오더 소속이다. 일단은 공직자란 소리다.
바로스도 동의했다.
“에란텔 단장이 여러모로 대하기 편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후 보고 정도는 해야죠.”
세라티가 라피셀을 돌아보며 물었다.
“넌 어쩔래, 라피셀? 딱히 볼일은 없겠지만.”
그녀는 아직 킹스 오더가 아니다.
오러 유저가 되었으니 사실 자격이야 충분하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세라티의 종자.
“이참에 라피셀도 킹스 오더로 등록시킬까? 월급 나올 텐데, 그럼.”
카르나크의 의견에 바로스가 피식 웃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서 안 받아 줄걸요.”
“투기검 보여 줘도 과연 안 받아 줄까?”
“어, 그러네요?”
하여튼 이건 나중에 고민할 일이고, 라피셀은 킹스 오더가 아니니 굳이 본부에 따라올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양 팔뚝을 걷어붙였다.
“다녀오세요! 전 그동안 청소할게요!”
이 집 처음 구입했을 때 가장 열심히 돌본 이가 라피셀이었다.
기껏 쓸고 닦은 집구석이 도로 더러워진 걸 보니 의욕이 솟구친 듯했다.
“그럼 부탁한다.”
라피셀에게 집을 맡기고 카르나크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바로스, 세라티, 레번을 대동해 도시 남쪽으로 향한다.
킹스 오더 본부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그를 알은척했다.
“앗, 카르나크 부단장님!”
“저기, 그 소문이 진짜입니까?”
“리파울 왕국에서 엄청난 일을 하셨다던데요?”
하르톨 시티의 구원자, 카르나크의 명성은 어느새 드룬타에까지 퍼져 있었다.
‘와, 소문 빠르네?’
하긴, 뒷수습하느라 일주일가량 도시에 머무르고, 또 보름 가까이 걸려서 돌아온 참이었다.
시간이 꽤 많이 흘렀으니 소문이 먼저 도착했을 수도 있겠다.
“소문만큼 대단한 일은 아닐세.”
대충 겸양을 표하며 카르나크가 물었다.
“그런데 에란텔 단장님은?”
“자리에 계십니다.”
2층 집무실로 올라가자 에란텔이 반가워하는 얼굴로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게, 카르나크 경. 하르톨 시티 사건에 대해선 이미 들었다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지금은 밀린 일 처리부터 끝내러 왔습니다.”
“하긴, 아무리 자네라도 최소한의 업무는 해야지?”
부단장으로서의 사후 보고 및 복잡한 서류 처리가 이어졌다.
크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꼭 해야만 하는 업무들이었다.
급한 일이 대충 끝나자 에란텔이 차나 한잔 하고 가라며 권유했다. 하르톨 시티 사건이 꽤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자네도 요즘 정세 정도는 알아 놓아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하지요.”
에라텔이 하녀를 불러 차를 준비하게 시켰다.
카르나크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요즘 정세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황혼의 교단에 대해 들어 봤지?”
들어 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당사자이지만, 시치미 뚝 떼고 대답한다.
“물론입니다. 요새 새로 나타난 사교도들 아닙니까?”
“그래, 사교도라면 사교도이긴 한데…….”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에란텔이 턱을 매만졌다.
“이게 참, 판단이 잘 서지 않는 자들이라서 말이지.”
사령왕 카르나크(邪靈王 karn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