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th King Karnak RAW novel - Chapter (23)
사령왕 카르나크-23화(23/338)
#23화. 7. 모범적인 사령술사
알리우스는 데라트 시티에 위치한 대지의 교단 유스틸 북구 교구 소속 신관이었다.
“부끄럽게도 1급 심문관의 위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카르나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1급 심문관이시라고요?”
“예, 심문관이라 함은…….”
“아니, 심문관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대대로 7여신교는 사령술의 흔적이 발견되었을 때마다 노련한 성직자를 파견해 진위를 살피곤 했다. 이때 내리는 직위가 바로 ‘심문관’이었다.
임명된 신관이 사건의 진위를 파악한 뒤 여신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다시 기존의 직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원래는 임시직이다.
“심문관에 위계가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위계가 있다는 건 정식 직위라는 소리가 되는데, 심문관이 항상 필요할 정도로 사령술사가 사방에 널려 있다면 사람 살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알리우스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세상이 와 버렸다는 것이 문제지요.”
종말의 어둠 관련 사건이 너무 많아져 예전처럼 임시로 파견하기엔 인력이 부족해졌다. 그래서 요새는 아예 전문 심문관을 따로 양성한다고 했다.
“전 막 1급의 위계를 받았습니다. 얼마 전까지 2급이었지요.”
카르나크는 감탄을 흘렸다.
원래 신관의 위계란 건 저리 쉽게 오르는 것이 아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군요.”
계면쩍은 듯 알리우스가 뒷머리를 긁었다.
“워낙 사건이 많습니다. 심문관으로 일하면 싫어도 경력을 쌓게 되지요.”
확실히 그는 꽤나 유능한 편에 속하는 듯했다.
그 역시 카르나크와 같은 이유로 겔파 마을의 수상함을 느꼈다고 하니.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사내가 이런 시골 마을을 노린다는 건 역시 좀 이상하지요.”
이야기를 듣던 바로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신관님 혼자 오신 겁니까? 사령술사가 정말 저 마을에 있다면 위험하실 텐데요.”
당연히 교단의 병력을 대동해야 하지 않냐는 질문이었다.
알리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현재 교단은 확실한 증거 없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증거요? 심문관이 확인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 아닙니까?”
“예전에는 그랬습니다만…….”
한숨을 내쉰 뒤 그는 힘없이 대꾸했다.
“실은 교단에선 이 역시 헛소문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어째서요? 충분히 수상한 상황 아닙니까?”
미처 못 알아챘다면 모를까, 알리우스가 이미 허점을 짚었는데도 헛소문이라 치부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데 요새는 그럴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실은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물론 그건 사령술과 아무 상관이 없었고요.”
“……젊고 돈 많고 친절하며 잘생기기까지 한 놈이 고작 시골 처녀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상황이 흔하다고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바로스의 말에 알리우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상대적인 문제인 겁니다.”
돈이 많다는 건 대체 어느 선부터 돈이 많다는 걸까?
잘생겼다는 건 대체 어느 선부터 잘생긴 거고?
친절하다는 것은?
사실 나이 하나 빼곤 숫자로 딱 떨어지는 사항들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젊다’의 기준조차도 상대적이다. 70~80살의 노인만 가득한 마을에서 50대는 젊은이 취급받는 법이지.
카르나크와 바로스는 저 능력 좋은 남자를 ‘금화를 펑펑 쓰는 기생오라비 뺨치게 생긴 귀족가 공자’쯤으로 치부하고 시골 처녀 꼬드기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적당히 모은 돈 좀 있고 피부가 햇볕에 덜 그을리기만 해도, 시골 기준에선 돈 많고 잘생긴 축에 낄 수 있지요.”
“아, 그런 경우라면 시골 처녀 노리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군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예전 같으면 흔히 있을 법한 사건 사고조차도 지금은 종말의 어둠 탓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워낙 가짜 정보가 범람해서 어지간히 확실하지 않은 이상 교단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인력에 한계가 있으니까.
“저 역시 이 마을에 사령술사가 있다고 확신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수상한 부분을 확인도 하지 않고 무시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요.”
바로스가 어이없어하며 카르나크에게 마법 전언을 걸었다.
[이거, 우리도 허탕 칠 뻔한 거였네요?] [그러게 말이다. 이번엔 어쩌다 운이 좋아 얻어걸린 거였잖아?]역시 모험가들 따윈 멍청하다고 비웃으며 자신만만하게 여기까지 왔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 참, 예전 생각만 하고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겠군.’
하여튼 저 마을에 사령술사가 정말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 신관님께선 증거를 찾아 교단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카르나크의 질문에 알리우스가 쑥스러워했다.
“실은 저 혼자서 처리할 생각이었습니다.”
단순히 젊은이의 만용만은 아니었다.
그의 신성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당장 그의 접근을 느끼고 카르나크가 흠칫 놀라지 않았던가?
신성력만 보면 제스트라드 영지를 찾았던 라티엘의 신관들을 다 합쳐도 알리우스의 절반이 채 안 될 정도다.
‘역시 1급의 위계. 어지간한 수준의 사령술사라면 정말로 단독으로 해치울 수도 있겠어.’
그럼에도 두 사람을 보고 반색한 것은, 역시 동료가 있다면 신성 주문을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일 터.
“두 분 모두 상당한 실력자이신 듯하니…….”
사실 알리우스가 진짜 원하는 쪽은 바로스였다.
카르나크야 나이도 젊고 마법사라 그냥 보기만 해서는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스는 다르다.
거구의 잘 단련된 육체,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이 있는 검과 갑옷. 저런 몸을 지니고 저런 장비를 걸친 자는 절대 약할 수 없다.
그가 진지하게 청했다.
“도와주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
***
알리우스가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바로스가 몰래 물었다.
[어쩌실 겁니까, 도련님?] [어쩌긴? 신관 앞에서 사령술을 쓸 순 없잖아. 적당히 핑계를 대서 일단 헤어진 다음 우리끼리 처리해야…….]대꾸하다 말고 뭔가 떠올랐는지 카르나크가 말을 바꿨다.
[아니다. 같이 움직이자.] [엥? 그래도 돼요?] [마침 좋은 기회야. 이참에 확인해 볼 게 있어.]알리우스를 돌아보며 카르나크가 진지하게 말했다.
“대강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저희 역시 여신의 아이들, 미약하나마 성무를 돕는 것이 의무겠지요.”
기뻐하며 알리우스가 성호를 그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일곱 여신의 축복이 두 분께 깃들기를.”
바로스는 여전히 찜찜해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이러다 사령술 써야 할 상황 오면요?] [쓸 땐 쓰는 거지. 내가 사람들 몰래 사령술 쓴 게 뭐 한두 번이냐?] [그때마다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까 그러죠.]말이 몰래지, 그냥 대놓고 사령술 쓴 다음 정신 조작으로 기억 지우는 게 왕년 카르나크의 주요 수법이었다.
[기억 지워진 사람들, 죄다 악몽 꾸면서 비실비실 앓다가 미쳐 버렸잖아요. 이번에도 그러시려고요?] [좀 그런가?] [그렇죠. 우리 이제 사람답게 살기로 했잖아요?]참고로 이들이 말하는 ‘사람답게 산다’의 기준은 딱히 도덕과 윤리를 지키며 선하게 산다가 아니다.
정확히는 저렇게 살고 싶긴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른다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카르나크와 바로스가 정한 기준은 이거였다.
-예전처럼 살지 않는다.
[저 신관은 좋은 사람입니다.]성격이 좀 급하고 멋대로 단정 짓는 습관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선량한 인간이다.
남들 다 무시하는 상황인데도 일부러 발품을 팔아 이 마을까지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좋은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건 예전처럼 사는 것 같은데요?] [맞는 말이야.]동의하며 카르나크는 선한 해결 방법을 찾아 고민했다.
[가만있자, 정신에 지장을 안 주면서 기억을 지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정신 조작을 안 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겁니까? 정말 도련님은 전형적인 사령술사시네요.] [사령술 말고 혼돈마법으로 지울 거야.] [그런 방법도 있습니까?] [혼돈마력을 가늘게 침처럼 늘려서 뇌의 기억 중추 일부를 태워 버리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 [왜? 내가 뭐 말 잘못했냐?] [아니, 역시 도련님은 모범적인 사령술사구나 싶어서요.] [사령술 안 쓴다니까! 왜 자꾸 사령술사 타령이야?]마법 전언으로 오간 대화라, 겉으로 보기엔 두 사람 모두 입을 꾹 다문 걸로만 보일 뿐이다.
그 표정을 달리 해석했는지 알리우스가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너무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마을에 사령술사가 있다고 확인된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설령 있다 해도…….”
떡갈나무 지팡이를 꾹 쥔 채 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제게는 하토바의 가호가 있으니 사악한 사령술사 따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바로스는 알리우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그 사악한 사령술사가 댁 대가리를 노리고 있다고.’
하지만 이걸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지.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참으로 든든하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
겔파 마을은 한산했다. 주민들 대부분 밭에 갔는지 몇몇 아낙들과 아이들만 간혹 눈에 띌 뿐이었다.
카르나크 일행을 본 주민들이 힐끔거리며 지나쳤다. 웬일로 외지인이 이 마을에 왔냐는 표정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여관 같은 건 기대할 수 없겠군요.”
여관이 있을 정도로 외지인이 자주 오가는 마을이면 저런 반응일 리가 없었다.
말고삐를 쥐고 걸으며 바로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말을 맡기고 짐을 풀 장소가 필요한데…….”
여관이 없는 마을에서 묵을 장소를 찾으려면 촌장집이나 지역 교회로 가는 것이 여행자의 관례다.
“이 정도 마을이면 작은 교회 하나 정돈 있겠죠?”
카르나크가 고개를 저었다.
“없을걸.”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알리우스가 대신 대답했다.
“이 마을에 교회가 있었으면, 그 농부가 굳이 데라트 시티까지 찾아왔겠어요?”
“그렇군요. 전 무식한 칼잡이라 거기까진 생각이 안 미쳤습니다.”
두 사람의 추리에 감탄하며 바로스가 막 마을 안쪽으로 진입했을 때였다.
정갈하게 지어진 작은 백색 건물이 보였다.
지붕에 푸른색의 성물을 매달고 입구에 바람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건물이었다. 바람과 하늘의 여신, 사이샤를 섬기는 교회가 틀림없었다.
바로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있는데요, 교회?”
잘난 척 추리하더니 바로 틀린 두 사람이 딴청을 피웠다.
“어, 있네?”
“……그 양반은 그럼 왜 데라트 시티까지 온 걸까요?”
피식 웃으며 바로스는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잘됐네요. 저기서 신세 좀 져야지.”
교회는 워낙 작아 신관도 단둘뿐이었다. 40대 중반의 마을 교회장과 30대로 보이는 수녀였는데, 꽤나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바람의 교회에 어서 오십시오, 대지의 형제여.”
말을 맡기고 짐을 푼 뒤 용건을 전했다.
사정을 들은 교회장, 그라스 신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쯧쯧, 그 친구가 거기까지 갔습니까?”
듣자 하니 이미 이곳에서도 한바탕 난리를 친 후라고 한다.
이들이 자기 말을 믿어 주질 않자 굳이 데라트 시티까지 온 것이다.
“클레오 씨는 성실하고 좋은 분입니다. 마을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모두가 그를 좋아하지요. 사령술 따위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교회 뒤뜰에 말을 묶고 온 줄리아 수녀도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제로 두어 달 전에도 다른 사제 한 분이 찾아오셨지만 그냥 돌아가셨거든요.”
두 사람 모두 저 정체불명의 능력남, 클레오에 대해 눈곱만큼도 수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먼 길을 오셨는데 허탕을 치시게 되어 아쉽네요.”
알리우스가 빙그레 웃었다.
“괜찮습니다. 제 직무상 허탕을 치는 쪽이 사실은 좋은 일이거든요.”
“어머나, 전에 오신 분도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데라트 시티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좀 늦어 교회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이들에게 손님용 작은 방을 안내한 뒤 줄리아 수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누추하지만 편히 쉬세요.”
***
자신들만 남게 되자 카르나크가 물었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신관님?”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알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오는 도중에 마을 곳곳에서 신성 탐색을 걸어 보았습니다만, 딱히 수상한 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역시 헛소문이었다는 뜻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사령술사는 정체를 감추는 데 능하지요. 제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순 없습니다.”
바로스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럼 좀 더 상황을 살펴봐야겠군요. 오다 보니 주민들이 모이는 술집이 있던데요.”
지역 주민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려면 제일 만만한 곳이 술집이다.
술 좀 들어간 인간은 있는 말, 없는 말 죄다 하기 마련이니까.
바로스의 경우엔 입맛을 다시는 폼이, 그냥 술 먹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지만.
알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별 의미는 없을 겁니다.”
그라스 신관과 줄리아 수녀의 태도를 보면 클레오란 자가 마을 주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요. 탐문을 해 봐야 뭔가가 나올 것 같진 않습니다.”
술 못 먹게 된 바로스가 시무룩해진 사이, 카르나크가 대신 질문했다.
“그럼 어쩌실 생각입니까?”
창밖을 내다보며 알리우스는 안색을 굳혔다.
“직접 확인해 봐야겠지요.”
그의 시선은 마을 서쪽, 옛 귀족의 별장이 위치해 있다는 우거진 숲으로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