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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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펜베르크인가.”
원수 계급장을 단 젊은 청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에펜베르크 사령관에게 하대를 했다.
에펜베르크 사령관은 청년의 말에 조금은 불편함을 느꼈다.
‘낙하산인가?’
그런 경우가 없진 않았다.
강대국의 경우 왕자가 뜬금없이 별을 달고 나타나 전략에 통달한 척 갑질을 하는 경우가 없진 않았다.
전략 · 전술의 ‘ㅈ’자도 모르는 주제에 갓 기사 아카데미를 졸업한 햇병아리가 수십 년 경력의 장성들을 상대로 감 놔라 배 놔라 갑질을 해대는 경우 말이다.
하지만 에펜베르크 사령관은 그럴 가능성을 아주 낮게 보았다.
제아무리 왕자라고 한들 별 네 개 이상을 달고 나타나는 케이스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게다가 에펜베르크 사령관은 나름 고위급 장성이니만큼, 신성동맹의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각국의 왕자들 가운데 지금 이 청년과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실수하지 말자.’
에펜베르크 사령관은 청년이 아닌 계급장을 보기로 했다.
자고로 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충성! 원정군 사령관 에펜베르크! 근무 중 이상 무!”
에펜베르크 사령관이 다시금 청년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총사령관의 자리를 청년에게 양보해주었다.
청년은 권위에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에펜베르크가 있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지휘부 막사 정중앙.
총사령관이 앉는 바로 그 자리 말이다.
‘도대체 누구지?’
에펜베르크는 원수 계급장을 단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청년이 누구인지를 기억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새파란 애송이 중에서 원수 계급장을 달 만한….’
그때.
“카시아스 데 블랙크로우라고 한다.”
청년이 자신을 소개했다.
“으, 으음?”
“블랙크로우…?”
지휘부 회의에 참석한 고위급 장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랙 크로우 가문은 뉘르부르크 대륙의 무가[武家]들 가운데서도 수없이 많은 명장과 기사들을 배출해낸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몇십 년 전까지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블랙 크로우 가문은 수십 년 전에 조국인 에펜바흐 왕국과 함께 멸망했던 것이다.
“자, 잠깐!”
에펜베르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설마… 카시아스 데 블랙크로우라 하심은….”
“날 기억하나.”
“맙소사….”
에펜베르크는 청년의 이름을 듣고 혼이 다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카시아스 데 블랙크로우.
수십 년 전 블랙크로우 가문이 멸망할 당시 가주[家主] 직을 맡고 있던 자.
이명은 암천존[暗天尊].
당시 나이가 70대 중반으로서, 위대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고 전해지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암천존은 조국 에펜바흐 왕국을 끝까지 지키다가, 주변 강대국들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당시 암천존 하나를 잡느라 적국의 장병들이 십만 단위가 죽고, 기사도 수천 명 이상이 죽었다는 건 이미 전설로 남은 이야기였다.
그랜드 마스터 하나를 잡으려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적 선례를 남긴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암천존이라니?
“암천존께서는 당시 전투에서 전사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내 시체가 발견되었던가?”
청년, 아니 스스로를 암천존이라 밝힌 자가 에펜베르크에게 물었다.
“그것은….”
에펜베르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시 암천존의 시체는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신분 확인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난 죽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겠지.”
“하오나….”
에펜베르크가 말했다.
“당시 암천존 각하께서는 70대 고령의 나이에….”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 노화를 늦추는 게 가능하다. 또한, 일정 수준 이상의 마나를 모은다면 육체를 재구성하는 환골탈태도 가능하다.”
“그, 그렇다면….”
“난 재기에 성공했고, 앞으로 신성동맹을 이끌고 이 전쟁을 수행할 예정이다.”
암천존이 회의실 내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오오오!”
“그랜드 마스터!”
“암천존 각하라면…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를 능히 이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성동맹군 제1군단의 지휘부는 암천존의 합류에 한껏 고무되었다.
안 그래도 지난번 전투에서 지크 한 명 때문에 30만 대군이 퇴각해야 했었던 바, 사기가 떨어져 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랜드 마스터인 암천존이 합류한 이상, 이야기는 달랐다.
신성동맹군이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걸음아 나 살려라하면서 도망치는 일은 더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긴급한 보고입니다! 북쪽 전선의 제2군단! 교전 중! 엄청난 피해가 예상된다고 합니다!”
“남쪽 전선의 제3군단도 전투 중입니다! 상황이 안 좋습니다! 마우레키온 제국의 제8군단과 맞닥뜨렸다고 합니다!”
전령들이 안 좋은 소식을 가지고 들어왔다.
당초 계획은 키예프 왕국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거였는데, 오히려 신성제국군이 각개격파를 당하는 구도가 연출되어버린 것이다.
***
한편, 지크는 전장을 휘저으며 탐욕스럽게 영혼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알림: 을 흡수하셨습니다!] [알림: 을 흡수하셨습니다!](중략)
[알림: 을 흡수하셨습니다!]신성동맹군에 지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진영 한복판에 파고들어 스킬을 쓰는 지크는, 살아 있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신성동맹군 입장으로서는 이 초록색 안개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즉사였고, 독 저항력이 높다고 해도 1분을 버티지 못할 정도의 방사능 오염에 노출되었던 탓이다.
•영혼 에너지 : 5,011.21
덕분에 지크는 순식간에 스킬에 필요한 영혼 에너지를 모으는 데 성공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무려 4천여 명이 넘는 적을 죽이고 그 영혼을 흡수해 버렸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전투도 거의 끝이 나는 분위기였다.
지크가 대량 학살을 펼치는 사이, 프로아 왕국군도 디버프와 버프의 힘으로 신성동맹군을 모조리 궤멸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성동맹군 제2군단장 펜릴. 전범으로 체포한다.”
“고귀한 기사 오스칼….”
“자살은 용납하지 않겠다.”
오스칼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기사들을 시켜 펜릴 군단장에게 재갈을 물리고 체포했다.
그로써 전투는 끝이 났다.
총 10만의 신성동맹군 중에서 무려 7만이 죽고, 남은 3만 명이 항복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프로아 왕국군의 사상자는 불과 1,000명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사망자는 단 3명에 불과했다.
수백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양호한 결과였다.
병력의 교환비가 거의 성립하지 않는, 일방적인 압승을 거둔 것이다.
“프로아 왕국! 만세!”
“만세!”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 전하! 만세!”
“만세!”
지크는 프로아 왕국군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임시 주둔지인 도시에 입성했다.
“쳇. 하나라도 더 죽일걸.”
지크는 영혼 에너지를 더 모으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뀨! 주인 놈아! 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라! 뀨우!”
“으응?”
“주인 놈 그렇게 많이 죽이면 언젠가 페널티 먹는다! 뀨우!”
“그게 뭔 소리야?”
“뀨우! 생명체 많이 죽이면 업보 쌓인다! 아무리 적이라도 너무 많이 죽이지는 마라! 살업 쌓이면 나중에 피곤하다! 뀨우!”
“그래?”
“뀨! 그렇다! 우주의 법칙이다! 주인 놈 우주의 법칙까지 무시하지 마라!”
“알겠다.”
지크는 햄찌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영혼 에너지를 위한 고의적 살육은 지양하기로 했다.
물론 전투 중에는 그럴 필요가 없지만, 영혼 에너지를 모으려고 항복한 적들을 일부러 죽인다거나 하는 행위는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애초부터 그런 적도 없었지만.
“전하, 승전을 축하드리옵니다.”
오스칼이 지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고생하셨어요, 오스칼 경.”
“아닙니다, 전하. 손쉬운 전투였을 뿐입니다.”
“다행입니다, 아군 피해가 적어서.”
“다 전하의 덕이겠지요.”
“하하하….”
지크는 멋쩍게 웃고는, 오스칼에게 명령을 내렸다.
“일단 항복한 적들은 전쟁 범죄행위를 저질렀는지 검증하고, 그 죄가 엄중한 자는 처형으로 다스리세요.”
“예, 전하.”
“그리고 고위급 인력 중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처형하지 말고, 가둬두세요.”
“예?”
오스칼이 놀라 물었다.
“처형하시지 않으십니까?”
“노예로 만들어 쓸 생각입니다.”
지크는 신성동맹군 소속 고위급 인력들을 로 제작할 생각이었다.
방사능 강화 인간인 는 반영구적인 노예이자 잠재적 핵폭탄이었다.
지크는 이들 로 이루어진 부대를 꾸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많은 수의 포로를 포획하게 되었으니 로 만들 재료(?)가 넉넉해진 셈이었다.
“예, 전하. 그리 하겠습니다.”
“그럼….”
지크가 말했다.
“그 문제는 그렇게 두고, 일단 남하합시다.”
지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남쪽 전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이린이 지휘하는 마우레키온 제국군 제8군단이 승리하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참에 마우레키온 제국군과 함께 남은 신성동맹군 제1군단을 쌈 싸 먹으려는 것이다.
***
이 암담한 소식은 신성동맹군에 즉각적으로 전달되었다.
“북쪽 전선… 제2군단… 전멸했다고 합니다.”
“남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제3군단… 전멸입니다.”
때문에, 신성동맹군 제1군단의 지휘부는 삽시간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
오데사에 주둔 중인 키예프 왕국군을 끌어내고, 나아가 포위해서 섬멸하려고 벌였던 초토화 작전이었다.
그런데 각각 북쪽과 남쪽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2군단과 3군단이 전멸했다니, 신성동맹군으로서는 망한 셈이었다.
이제 적들의 숫자가 더 많고, 전력도 더욱 강력하니 상황이 180도 역전되어버린 것이다.
“다, 당장! 지금 당장 주둔지를 버리고 이동한다!”
에펜베르크는 보고를 받자마자 즉시 명령을 내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적들에게 포위되어 전멸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전군! 즉시 이동을 멈추고 후퇴….”
그때였다.
“후퇴란 없다.”
암천존이 에펜베르크의 말을 가로막았다.
“가, 각하! 하오나….”
“지휘관은 나다.”
“…….”
“사령부에 긴급하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고 대기하라. 우린 후퇴하지 않는다.”
암천존은 부대 전체가 쌈 싸 먹힐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해나가겠단 의지를 밝혔다.
어차피 사령부에서 10만 정도의 추가병력을 요청할 수도 있고,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답게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가히 대단했던 것이다.
“적진에 가장 강력한 상대가… 지크프리트 반 프로아 국왕이라고 했던가?”
암천존이 에펜베르크에게 물었다.
“그, 그러하옵니다. 당시 전투에서 보여주었던 지크프리트 국왕의 전투력은 그랜드 마스터 이ㅅ….”
“내가 그를 죽이면.”
암천존이 에펜베르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힘의 균형이 무너질 것이다. 그때 적들을 섬멸하라.”
암천존의 말뜻은 간단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지크를 죽인 후 전장을 지배해버리겠단 의도였다.
그렇게 되면 적들은 그랜드 마스터인 암천존을 감당하지 못할 테니, 결국 신성동맹군이 승리하리라는 논리였다.
“회의, 이만하도록 하지. 전군 전투 준비태세를 갖추고, 현재 위치에서 대기하라.”
암천존은 그 말을 남기고 막사를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