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1175
1174
‘죽일까.’
지크는 하마터면 를 뽑아 나이델베르크의 목을 날려버릴 뻔했다.
그만큼 나이델베르크, 정확히는 마우레키온 제국의 의지가 지크를 분노케 했다.
베르단디.
지크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물론 지크가 딸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가정적인 아버지는 아니었다.
지크가 맘 편히 육아만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어서, 함께 놀아주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지크는 베르단디를 매우 사랑했다.
그런데 마우레키온 제국은 그런 소중한 딸을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40살 이상 차이 나는 슈트카르트 황제의 아내로서 말이다.
‘야 이 개새끼들아! 이거 중범죄라고! 이 미친놈들아!’
지크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물론 NPC들은 중세적 사고방식을 가졌기에, 황가(皇家)의 정략결혼에 있어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굳이 황족, 왕족이 아니라도 귀족쯤 되면 태어남과 동시에 누군가의 정혼자로 정해지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지크는 그걸 알면서도 마우레키온 제국의 제안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베르단디의 나이가 올해로 2살이었다.
가장 완벽한 지적생명체라는 하이엘프의 종족적 특성 탓에 6~7살 정도의 소녀로 성장했지만, 어리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 베르단디와 슈트카르트 황제가 정략결혼을 하고, 나중에는 부부 사이가 된다?
‘개소리지.’
지크는 마우레키온 제국의 의도를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해놓고, 말을 듣지 않으면 그걸 빌미로 압박할 생각이야. 내가 아이린과 결혼하는 건 브륜힐트 핑계로 넘어갈 수 있었어. 하지만 이건 그러기 힘들지. 황가 대 황가의 결합. 거절할 명분 없는 아주 완벽한 카드야. 거절하면 모욕을 당했단 핑계로 날 압박해올 게 분명해.’
지크는 그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허락하면 일단 교육을 핑계로 베르단디를 유학시키라고 요구하겠지. 볼모로 잡아두려고. 수틀리면 베르단디의 목숨을 가지고 날 협박할 거고.’
겪어보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 펼쳐질지 아주 훤했다.
‘베르단디와 정략결혼을 하면, 슈트카르트 황제가 본국의 황권을 주장할 수도 있어. 사위니까. 본국을 합법적으로 집어삼킬 명분도 주는 거야. 아주 개 같은 설계네, 이거.’
지크가 마우레키온 제국의 시커먼 속내와 사악한 올가미에 진절머리를 칠 때였다.
“폐하.”
나이델베르크가 지크에게 말했다.
“폐하의 따님이신 베르단디 황녀는 하이엘프로서 모든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존재라고 들었습니다.”
“그, 그렇죠.”
“그런 베르단디 황녀와 본국의 존엄하신 황제 폐하께서 결혼해 후사를 보신다면, 가장 완벽한 후계자가 탄생할 것입니다. 대제국 마우레키온을 이어받을 황자마마 말입니다.”
지크는 나이델베르크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대제국 마우레키온을 이어받아? 슈트카르트 황제가 자기 자식한테 황위를 물려줄 것 같아? 그럴 일 없어. 오히려 자식도 경계하고, 결국엔 죽이겠지. 눈 감는 순간까지 권력을 꽉 쥐고 놓지 않을 인간인데.’
지크는 그게 슈트카르트 황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했고, 아마 그럴 확률이 높았다.
권력이란 자고로 독약과 같아서, 멀쩡한 사람도 그토록 비정하게 만드는 악마의 속삭임이었기 때문이다.
“폐하의 따님이신 베르단디 황녀께서도 본국의 황제 폐하와 같은 배필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그거야 당연하지만….”
지크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억누르며, 당황한 척 땀을 삐질 흘렸다.
“제가 아, 아직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그러니까….”
“껄껄!”
나이델베르크가 웃었다.
“폐하, 걱정 마십시오. 지금 당장 뭔가를 결정하고 추진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 그런가요?!”
“일단 공식적인 제안은 아니니, 프로아 제국으로 돌아가시면 황후마마와 의논을 해보시지요.”
“아, 알겠습니다. 하하하.”
“껄껄! 참 좋은 일입니다!”
나이델베르크가 웃었다.
“본국과 프로아 제국이 혼인으로 뭉치면, 이것이야말로 대륙통일이고 세계평화를 이루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그런 나이델베르크의 웃음소리는 지크에게 사악한 악마가 깔깔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이 안경잽이처럼 배신 때리는 새끼. 때 되면 너부터 죽인다, 내가.’
지크는 한국 영화의 명작 의 대사를 인용하며, 나이델베르크를 향해 이를 갈았다.
‘으. 찝찝해.’
개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지크는 당장에라도 개울가로 달려가 귀를 씻고만 싶었다.
***
데이지란 이름을 가진 소녀는 앞에서 끊임없이 기도했다.
언제 저 사악한 무리들이 이곳 뒷산까지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건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크프리트 폐하께서 꼭 구해주러 나타나실 거야.’
그만큼 데이지의 신앙심은 매우 투철했다.
초기부터 믿음을 가진 그녀의 신앙심이란,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굳건했다.
지금과 같이 끔찍한 학살극이 그녀를 시험해도, 지크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깨뜨리는 건 불가능했던 것이다.
설사 그 시험이 이와 같은 지옥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것일지라도.
‘폐하, 도와주세요. 제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세요. 이렇게 기도드려요. 제발 저희 마을 사람들을….’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섬광과 함께 누군가 데이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폐하…?”
데이지는 지크가 기도를 듣고 강림해준 줄 알고 눈을 크게 떴다.
두근두근!
기대감 때문일까?
심장이 거세게 두방망이질을 쳤다.
하지만 그런 데이지의 기대감이 박살 나는 데에는 그로부터 1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 당신은….”
고개를 들어보니 지크를 닮은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데이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꼬마 아가씨?”
환하게 미소를 짓는 그의 얼굴은 이제 갓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와도 같았다.
새하얀 얼굴에 피와 살점이 덕지덕지 묻어서 흘러내리고 있는 모습이란, 정말이지 끔찍했다.
“니가 기도로 날 불렀니?”
이건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데이지에게 물었다.
“네에…?”
“니가 기도로 날 불렀잖니. 지크프리트 폰 프로아 폐하, 도와주세요. 우리 마을을 지켜주세요, 하고.”
“그, 그건….”
데이지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지크의 모습이란 저런 악귀가 아니라, 용맹한 영웅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소름 끼치는 미소와 광기 가득한 두 눈빛은 결코 세계를 구원한 영웅의 것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데이지라도, 그 정도는 알았던 것이다.
“내가 지크프리트 폰 프로아란다.”
이건이 히죽 웃으며 데이지에게 말했다.
“아, 아니야!”
데이지가 그 사실을 부정했다.
“당신은 아, 악마야! 사악한 악마! 당신은 지크프리트 폰 프로아 폐하가 아니야!”
“과연 그럴까?”
이건이 혼란스러워하는 데이지를 향해 이죽거렸다.
“마을에서 한창 즐기고 있는 날 부른 건 너야.”
“아, 아니야!”
“맞아.”
이건이 데이지를 향해 다가섰다.
“난 지크프리트 폰 프로아야.”
“아니야아아!”
“니가 그토록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던 영웅.”
“아, 아니야! 그, 그만해! 아니야!”
데이지는 자신의 기도가 악마를 불러들였단 사실에 절규했다.
또한,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영웅인 지크가 마을에서 학살을 저지르던 바로 그 살인귀였단 사실에 절망했다.
“그, 그럴 리 없어! 흑흑! 그럴 리가 없어! 지크프리트 폰 프로아 폐하께서는….”
“이게 내 진정한 모습이야.”
이건이 보란 듯 양팔을 벌렸다.
“피에 미친 악귀. 평소엔 잘 참다가도 한 번씩 이렇게 살육을 즐기지 않으면 내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거든.”
“아, 아니야… 아니야아… 흑… 흑흑흑….”
“내 본 모습이 어떠니? 꼬마 아가씨?”
“아니야아….”
“실망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이게 나란다.”
“흑… 흑흑흑!”
“그렇게 믿었는데, 어쩌니? 니가 생각하던 영웅이 이런 악귀라서?”
이건은 그렇게 말하며 데이지를 향해 더더욱 다가섰다.
‘아. 너무 재밌다. 이게 해피 겜이지.’
이건은 지금 즐거워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비록 NPC이긴 했지만, 한 인간의 멘탈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는 건 너무나도 재미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
마우레키온 제국을 떠나 프로아 제국으로 귀환한 지크는 미켈레를 포함한 수뇌부들을 모아놓고 회의에 나섰다.
그 회의에는 황비인 브륜힐트도 참여했다.
딸 베르단디의 앞날에 관한 회의이니만큼, 엄마인 그녀가 참석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라고 하더라고요.”
지크가 회의실에 모인 프로아 제국의 수뇌부들에게 마우레키온 제국에서 있었던 일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주었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현명하십니다.”
미켈레는 지크의 생각을 전해 듣고 감탄하면서, 전적으로 동의했다.
“마우레키온 제국은 결코 선의에서 정략결혼을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그렇겠지.”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따위 개 같은 제안을 보상이랍시고 주다니, 이제는 나한테 금화 한 닢도 주기 싫다는 거 아니냐?”
지크는 코랄 행성 원정을 끝낸 불세출의 영웅.
그러한 전쟁영웅에게 준다는 게 슈트카르트 황제와 사돈을 맺을 권리라니?
정상적인 상황 같았으면 합당한 보상이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니었다.
보상은커녕, 똥을 던져준 격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마우레키온 제국에게 뭔가 기대하시는 건 어려워 보입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떡하죠.”
브륜힐트의 표정이 어두웠다.
“우리 소중한 베르단디를 빼앗길 순 없어요.”
“내어주지 않을 거예요.”
지크가 브륜힐트를 안심시켰다.
“그런 일, 절대 없을 거예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지크는 장기적으로 마우레키온 제국과 싸울 준비를 시작한 상태였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지크가 베르단디를 호락호락하게 내어줄 리 없었다.
“폐하.”
미켈레가 지크에게 조언했다.
“일단은 수락한다고 하십시오.”
“그다음에는? 수락하면 베르단디를 보내라고 할 텐데? 유학을 핑계로?”
“베르단디 공주마마께서 너무 어리다는 핑계를 대시면서, 잠시 유예 기간을 두십시오.”
“얼마나?”
“길면 길수록 좋겠지요. 하지만 마우레키온 제국은 공주마마의 지능이 높다는 이유로 그리 오랜 시간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많이 주면 2년. 적게 주면 1년 정도 되려나?”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빠르면 1년. 늦으면 2년 안에 우릴 압박하고, 전쟁을 일으킬 것 같아서.”
“제 의견도 똑같습니다.”
미켈레가 감탄스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지크를 바라보며 동의를 표했다.
“일단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유예 기간을 두십시오. 만약 그냥 거절했다간, 마우레키온 제국이 여론전으로 물타기를 시도할 겁니다.”
“뭐라고?”
“프로아 제국이 슈트카르트 황제의 혼인 요청을 거부했다고 자국민들에게 알릴 테지요.”
“그럼 마우레키온 제국민들이 분노하겠네?”
“예, 폐하.”
마우레키온 제국민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자부심이 엄청나게 높았다.
그래서 외교적인 문제가 생기면, 마치 벌떼처럼 들고일어나곤 했다.
심지어, 마우레키온 제국의 청년들이 줄지어 자원 입대를 할 정도로였다.
“그건 막아야지. 거부해봤자 좋을 게 없어. 일단 알겠다고 하고, 시간을 벌자.”
“예, 폐하.”
“그러는 사이에….”
그때.
띠링!
지크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기도가 도착했습니다!] [알림: 기도의 내용을 읽어보시겠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