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1318
1317
열한 번째 스테이지의 보스 몬스터는 지크가 익히 아는 자였다.
두 번째 숙명의 집행자.
쿠데타를 일으켜 대천사장 미카엘을 실각시키고, 천족들을 타락시켰던 자.
만물의 아버지인 창조주를 증오했고, 그를 다시 보고 싶어서 세계를 멸망시키려던 자.
중간계의 일루미나티를 뒤에서 조종했던 자.
하지만 끝끝내 신마융합체를 이룬 지크에게 쓰러졌던 자.
전[前] 대천사장 루시퍼.
그가 바로 열한 번째 스테이지의 보스 몬스터였다.
“오래간만이로군.”
루시퍼가 지크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일말의 감정조차 드러나 있지 않았다.
“루시퍼.”
지크가 를 꺼내 들고 전투를 준비했다.
루시퍼는 대마왕의 힘을 사용해도 이기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존재였다.
만약 당시 지크가 신마융합체를 이루지 못했다면, 결코 이기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지금의 지크는 신마융합체의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안 그래도 이곳 에서 루시퍼가 재등장할 것을 걱정했던 지크에게는 최악의 적을 만난 셈이었다.
‘전력을 다 해도 까딱 실수하면 죽는다.’
지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런 지크와는 다르게, 루시퍼는 매우 평온해 보였다.
전의[戰意]는 엿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루시퍼는 싸울 의지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지크프리트 폰 프로아.”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기어코 아버지를 만나고자 하는가?”
루시퍼가 말하는 는 당연히 창조주를 뜻했다.
“물론.”
지크가 대답했다.
“만들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파괴하는 건 멋대로 안 되지.”
“그렇군.”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의지는 결국 아버지의 앞에 도달하는구나.”
“……?”
“구원자여.”
“뭐?!”
지크는 루시퍼의 말에 깜짝 놀랐다.
루시퍼의 입에서 란 단어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고, 심지어 지크를 가리킬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 때문이다.
“구, 구원자…?”
“그렇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지크는 황당했다.
지크가 아는 루시퍼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얼음덩어리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내면에 아버지인 창조주에 대한 끝없는 증오와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루시퍼는 달랐다.
지크를 적대하기는커녕, 오히려 호의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뭐지? 이것도 시험의 일종인가?’
낯선 상황이니만큼, 의심부터 들었다.
‘이러다가 나를 기습하려고?’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구원자여.”
루시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때 나는 아버지를 증오했다. 우리 천족이 아닌, 너희 중간계의 지적생명체들을 더욱 위하는 그 모습에 질투를 느꼈다.”
“그래서?”
“자유의 성전 이후. 배덕자들에게 자신을 모시는 교단이 궤멸되었고, 우리 자식들마저 방치한 아버지가 미웠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께서 그리도 아끼던 중간계의 지적생명체들과 마족들을 쓸어버리고, 세계를 파괴하고자 했다. 아버지 당신께서 그리도 아끼시던 그 모든 것들을 파괴함으로써, 아버지를 다시 이 세계로 불러들이려 했다.”
“뭐… 그랬지.”
지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X끼처럼.”
제3자인 지크의 입장에서, 루시퍼의 행동은 충분히 중2병에 걸린 질풍노도의 청소년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물론 당사자인 루시퍼의 입장에선 전혀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난 이해할 수가 없다.”
“뭘?”
“아버지는 너희 지적생명체들을 아끼고 사랑하셨다. 친자식들인 우리 천족들보다도 더.”
“근데?”
“하지만 그런 아버지가 이제 와 너희 지적생명체들을 절멸시키려 하고 있다.”
“그렇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소중히 아끼던 너희 지적생명체들을 이제는 멸종시키려는 그 의도를.”
“으음.”
“어쩌면….”
루시퍼가 말했다.
“아버지에게 우리 피조물들은 그저 장난감에 불과할지도 모르겠군.”
“장난감이라….”
“구원자여.”
“말해.”
“나는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는 자다.”
루시퍼가 피식 웃었다.
처음 보이는, 창세기 이후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웃음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의지로 인해 이곳 공허에서 부활했으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 더 이상 그의 꼭두각시로, 장난감으로 존재하는 걸 거부하겠다.”
“……!”
“가라.”
루시퍼가 지크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너와 싸우지 않겠다.”
“…….”
“솔직히… 성공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겠지.”
“정말… 길을 열어주겠다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걸어보는 게 좋지 않겠나. 밑져야 본전일 테니.”
“하하… 하하하….”
지크는 루시퍼의 반응에 놀라 얼떨떨하게 웃었다.
이곳 에서 마주칠 수 있는 최악의 적이 오히려 길을 열어줄 줄이야….
“고, 고맙긴 한데… 이거 영 기분이… 하하하….”
그 순간.
띠링!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알림: 축하드립니다!] [알림: 열한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셨습니다!] [알림: 준비하십시오!] [알림: 곧 다음 스테이지로 입장합니다!]진짜 클리어가 되었다.
길을 열어준다던 루시퍼의 말은 결코 속임수 같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
열두 번째 스테이지로 넘어가기 전.
“뒤통수를 치는 게 특기라고 들었다.”
루시퍼가 지크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는 덧붙였다.
“누, 누가 그래!”
지크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얼굴까지 시뻘게진 게,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한 게 분명했다.
하기야, 세계를 멸망시키려던 숙명의 집행자에게 뒤통수나 치는 놈이라고 욕을 먹은 셈이었으니….
“난 네가 아니다. 너처럼 뒤통수를 치고 싶지는 않다. 너를 그냥 보내주려는 건 순수한 의도에서 내린 결정이지, 속임수가 아니다.”
“알아! 안다고!”
“보고 싶군.”
루시퍼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과연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길 수 있는지.”
“미안한데.”
지크가 발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난 피조물 같은 게 아냐.”
“아?”
“난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니까, 피조물이 아니라고.”
“그랬지. 잠시 잊고 있었다.”
“근데 다른 세계에서 온 내가 보기에도… 창조주란 놈의 행태가 마음에 안 들거든. 그러니까 이건 창조주와 피조물의 싸움이 아냐. 창조주와 다른 세계에서 온 모험가의 싸움이지.”
“알아들었다.”
“간다.”
지크가 루시퍼를 슬쩍 돌아보며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청개구리.”
“청개구리…?”
“옛날에 청개구리는 엄마가 산으로 가라고 하면 강으로 가고, 강으로 가라고 하면 산으로 갔대. 말을 지지리도 안 들었단 얘기지.”
“큭….”
“근데 어느 날 엄마 개구리가 병들어 죽으면서 그랬대. 죽으면 개울가에 묻어달라고.”
“……?”
“아들 청개구리가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차마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란 말을 못 한 거지. 그래서 일부러 개울가에 묻어달라고 그랬대. 그러면 아들 청개구리가 양지바른 곳에 묻어줄 줄 안 거지. 근데 아들 청개구리가 어떻게 한 줄 알아? 이제라도 엄마 말씀 잘 듣겠다면서 진짜 개울가에 묻어버렸대. 그리고 어느 날 비가 와서 엄마 무덤이 싹 쓸려나갔다고 하더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냥 그렇다고.”
지크가 열한 번째 스테이지를 빠져나가 열두 번째 스테이지로 넘어가면서 말했다.
“니가 이 공허가 사라져도 계속 존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부디 니 인생을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다. 괜한 분노나 질투심 같은 거에 사로잡혀서 살지 말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지크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청개구리라….”
루시퍼가 지크가 해준 이야기를 되뇌었다.
***
열두 번째 스테이지가 펼쳐졌다.
눈앞에 현재 위치를 알리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어?’
지크는 의 풍경이 마치 일대일 대결에 쓰이는 맵인 과 똑같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대나무 숲.
선선한 바람.
그리고 적당한 햇살.
순수 일대일 대결에 특화된 그 필드가 맞았다.
그리고… 열두 번째 스테이지의 보스는… 다름 아닌….
“한태성.”
홀연히 나타난 이건이 지크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
지크는 그런 이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건은 지크와의 캐삭빵에서 패배했고, 계정이 삭제되었다.
그 이후 자신의 채널도 삭제해버리고 완전히 잠적해버린 뒤였다.
그런 이건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아니지.’
하지만 지크는 이내 곧 평정을 되찾았다.
게임 BNW의 핵심인 은 게이머들의 말투부터 몸짓, 평소 성격을 분석해서 NPC를 만들어내는 것.
그러니 이 이건을 구현해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즉, 필드에 등장하는 저 이건은 진짜가 아닌 NPC인 게 분명했다.
‘깜짝 놀랐네.’
지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건을 바라보았다.
세 번째 숙명의 집행자.
첫 번째인 불멸의 연금술사 아케론부터 두 번째인 루시퍼, 이제는 세 번째인 이건까지.
‘다 왔어.’
지크는 남은 열세 번째 스테이지의 보스가 창조주라고 확신했다.
지금 이 스테이지의 보스인 이건만 처치하면, 판타지 서버의 최종보스라고 할 수 있는 창조주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번엔 제대로 한바탕하겠어.’
지크는 창조주를 만나기 전 마지막 상대인 이건에 맞서 피 튀기는 혈투를 예상했다.
기존 이건의 스펙에 이곳 의 에너지까지 더해진다면, 지크로서도 힘든 싸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가라.”
이건이 지크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아케론과 루시퍼에 이어 세 번째 숙명의 집행자인 이건까지도 창조주의 의지를 거부하고, 지크를 무사히 마지막 스테이지로 보내주었던 것이다.
“뭐…?”
지크는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제 귀를 의심했다.
던전의 후반부 스테이지 세 개를 너무 쉽게 넘어서는 것 같아서, 영 꺼림칙했던 것이다.
“가라고. 귓구멍에 X 박았냐?”
“……!”
“보내줘도 지랄이네.”
지크는 에 감탄했다.
어떻게 저렇게 이건의 성격을 쏙 빼닮은 NPC를 만들어냈는지… 진짜 이건이 플레이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야, 한태성.”
이건이 말했다.
“솔직히 좀 X같긴 한데, 날 이겼으면 창조주 정도는 쥐어패야하는 거 아냐?”
“뭐…?”
“세계 최고의 게이머라면 이 게임의 최종보스쯤은 클리어하겠지.”
“그런 거였냐?”
“날 꺾은 놈이면 무적이어야 돼. 그래야 한다고.”
“웃기고 있네.”
지크가 피식 코웃음을 쳤다.
“너 아니라도 무적일 테니까, 헛소리 마라.”
“뭐?”
“길 열어줘서 고맙고.”
지크가 이건을 스쳐 지나갔다.
“봐. 이 게임의 최종보스를 처치하는걸.”
그렇게 열두 번째 스테이지도 막을 내렸다.
그리고….
[알림: 준비하십시오!] [알림: 5분 후 최종 스테이지가 시작됩니다!]지크는 비로소 마지막 열세 번째 스테이지를 앞두게 되었다.
***
지크의 공략은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었다.
게임 BNW의 개발사이자 유통사인 에서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지크의 계정과 연동한 뒤 영상을 공식 채널에서 생중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판타지 서버의 최종보스에 맞서 싸우는 방송이니만큼, 시청자 수는 수억 명에 달했다.
한편, 의 부회장인 오펜하이머도 서울의 모 호텔 VIP룸에서 이 영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펜하이머가 곁에 있는 남성에게 물었다.
의 회장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는 사람이었다.
라고 불리는 이 인물은, 회사의 창립자이면서 을 개발한 장본인이었다.
최근에는 서버와 서버 역시 이 라는 인물이 총괄하고 기획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던전의 보스전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