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17
016
버츄얼 파이트는 가장 원초적인 대전 액션 게임이라 불렸다.
그도 그럴 것이, 버츄얼 파이트에는 필드라는 개념이 없었다.
단 하나의 결투장만이 존재했다.
마나도 없었다.
마나가 없으니 스킬이 없는 건 당연했다.
포션과 같은 소모품이나 특별한 능력이 담긴 아이템 역시도 없었다.
플레이어 대 플레이어가 자신의 전투적 센스만을 가지고 일대일 대결을 펼치는 게임이 바로 버츄얼 파이트인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버츄얼 파이트는 가상 현실 게임 중 가장 현실감 넘치는 대결이 가능해 많은 게이머들로부터 순수한 ‘전투적 재능’을 가늠하는 척도로써 활용되고 있었다.
태성이 버츄얼 파이트를 제안한 이유는, 지금의 그로서는 정치호를 절대로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태성의 레벨이 5.
정치호의 레벨은 보나마나 200 이상.
두 사람의 대결은 애초에 성립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태성이 BNW의 투기장인 ‘유스티티아 신전’의 밸런스 보정을 받는다고 해도 렙 차이가 너무 심해 정치호의 평타 한 방에 골로 갈 것이 뻔했던 것이다.
애초에 계정 인증 절차가 대단히 까다로운 BNW를 집이 아닌 이곳 플래티넘 라운지에서 플레이한다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 이야기였고.
‘BNW에서는 승산이 없다. 하지만 버츄얼 파이트라면 다를 거다. 이길 수 있어.’
하지만 버츄얼 파이트는 플레이어 본연의 동조율과 전투적 센스로만 대결을 펼치는 게 가능했기에, 태성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게다가….
‘사부님에 비하면, 이 자식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태성에게는 사부로부터 대련을 빙자한 구타를 수도 없이 당한 경험이란 게 있었다.
[허허, 제자야. 더럽게 약하구나.] [요놈! 여기가 비었구나! 껄껄껄!] [본좌 같은 노친네 하나 못 이겨서 어디 고블린이나 잡겠느냐?]사부는 빨랐다.
또, 유연했다.
파워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었고.
사부는 단 한 줌의 마나도 사용하지 않고도 태성을 만신창이로 만들기 일쑤였다.
태성이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오? 제법이로구나. 감히 본좌의 옷깃을 찢어놓다니.]고작 사부의 옷자락을 조금 찢어놓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정치호를 이기기엔 충분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놈들은 때려눕힐 수 있겠구나. 훌륭하구나.]사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건 태성의 전투적 센스가 엄청나게 상승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즉, 지금 태성의 가슴속에는 전에 없던 자신감이란 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자야….] [예?] [감히 하늘같은 사부의 옷깃을 찢어 놓았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그, 그게 무슨 말씀….] [어금니 꽉 깨물어라, 제자야!] [아악!]그때 사부의 옷깃을 찢은 대가로 평소보다 더한 구타를 당했다는 건 안 비밀이었다.
“버츄얼… 파이트로?”
뜻밖의 제안에 정치호가 태성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방법인 것 같은데?”
“흐음….”
“버츄얼 파이트는 공평하니까. 나랑 너, 둘 중에 누가 더 오우거의 오너가 될 자격이 있는지 가리기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은데.”
태성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오우거는 슈퍼 캡슐을 뛰어넘는 하이퍼 캡슐!
이 초고성능 캡슐의 오너가 되려거든,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으음.”
정치호가 턱을 긁적였다.
망설임.
‘이 새끼가 고위급 랭커면 어쩌지? 개털리는 거 아냐?’
태성이 정체불명의 랭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섣불리 대결을 수락하지 못하고 있는 정치호였다.
피식-
태성이 그런 정치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왜. 쫄리냐?”
“뭐?”
“쫄리냐고.”
도발이었다.
“쫄리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조용히 꺼져. 남 물건에 침 흘리지 말고.”
“이 새끼가!”
정치호가 버럭 소리쳤다.
“지금 누굴 호구로 보나! 그래, 한판 뜨자! 아주 탈탈 털어 줄게!”
“오케이.”
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판. 지는 쪽이 뒤끝 없이 깔끔히 포기하는 걸로.”
“그래, 하자. 콜이다, 이 새끼야.”
두 눈을 부릅뜬 정치호가 냉큼 대답했다.
태성의 도발에 넘어간 것이다.
“자, 잠깐만요!”
바로 그때.
“태성 씨!”
“예?”
“잠깐 이리 좀 와 봐요. 빨리요.”
차혜미가 끼어들어 태성을 잡아끌었다.
***
“태성 씨 미치셨어요?”
차혜미가 태성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요? 아닌데. 안 미쳤는데.”
태성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대꾸했다.
“태성 씨.”
“네?”
“하이퍼 캡슐 오우거는 태성 씨의 소유예요. 이미 계약된 사항이고요. 저 개망나니가 깽판을 친다고 해서 이런 대결을 펼칠 이유가 없어요. 지면 태성 씨만 손해라고요. 6개월을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리고….”
차혜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저 개망나니가 아무리 성현 그룹 회장의 손자라고 해도, 여기까지가 한계예요. 본사는 성현 그룹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또, 본사의 정책은 저 개망나니보다 태성 씨와 같은 더블 오 플레이어를 최우선으로 대우하도록 되어 있고요.”
하이브 게임즈 엔터테인먼트.
가상 현실 산업을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
성현 그룹이 제아무리 글로벌 기업이라 할지라도, 과거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합친 것만큼의 시가 총액을 보유한 하이브에 비할 바는 결코 아니었다.
“그래요?”
하지만 태성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도 할래요.”
“태성 씨!”
“저도 압니다.”
태성도 바보가 아니었다.
“지면 저만 손해라는 거, 안다고요.”
굳이 정치호와의 대결을 펼친다는 건 오우거를 빼앗길 가능성을 스스로 자초하는 꼴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근데요.”
태성이 덧붙였다.
“때려눕히고 싶습니다.”
“저 개망나니를요?”
“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을까요?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잖아요.”
“피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더라고요.”
“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요. 진짜 힘 있는 사람들은요.”
“……?”
“똥을 깔끔히 치워요. 손에 안 묻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죠?”
“더러워서 피한다는 건, 결국 부딪혀서 손해만 볼 것 같으니까 피해 가란 얘기잖아요. 어떤 상황에서도 손해 보지 않을 사람들은… 그러니까, 강자들은 부딪힐 겁니다. 부딪혀서 쳐부수겠죠.”
“쳐부순다….”
“강자는 뭐든 쳐부숴요. 그게 똥이든, 된장이든. 깔끔하게 쳐부수고, 자기 갈 길을 가겠죠.”
“이상에 가까운 말씀이신데요, 그건….”
차혜미가 다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뭐든 쳐부순다.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 않은데….
“능력이 없으면 이상주의자. 있으면 혁명가. 뭐, 그런 거겠죠.”
태성이 차혜미로부터 돌아서며 말했다.
“더는 숙여가면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꺾이고 싶지도 않고.”
“태성 씨….”
“아니, 다 떠나서 돈 많고 빽 있다고 깽판 치는 꼬라지가 맘에 안 들어서라도 안 되겠어요. 뚝배기를 부숴놔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서.”
태성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묵직했다.
왜?
가진 자들에게 짓밟혀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져 봤던 남자의 분노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태성 씨.”
차혜미가 그런 태성을 향해 말했다.
“이기세요. 저 자식 뚝배기, 꼭 깨시길 바랄게요.”
“그럼요.”
태성이 차혜미를 돌아보며 희게 웃어 보였다.
***
“그, 그럼….”
오준환이 태성과 정치호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종목은 버츄얼 파이트. 룰은 단판 승부. 기기는 슈퍼 캡슐에 탑승하셔서 진행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경기 결과에 따라 패배하시는 분께서 오우거에 대한 권리를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두 분 모두 동의하십니까?”
오준환이 물었다.
“동의합니다.”
“한다, 해.”
뉘앙스는 달랐지만, 대답은 같았다.
“내가 저런 새끼한테 질 리가 없으니까, 오우거 계약서나 준비해 놔라.”
정치호가 태성을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호기롭게 말했다.
태성은 그런 정치호의 하찮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처맞고 뚝배기가 깨져봐야 정신을 차리지.’
사부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야. 너는 인간이다. 앞으로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랑은 말을 섞지 말려무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랑은 괜한 입씨름 말고, 두들겨 패주란 말이다.] [아하!] [짐승만도 못한 놈들은 때려야 말을 알아듣느니라. 천 마디 말보다 몽둥이찜질이 훨씬 더 효과적이니, 일단 패고 보아라. 알겠느냐?] [예, 사부님!]태성이 본 정치호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굳이 말을 섞기보단, 패는 게 나았다.
현실에서 패면 좋으련만….
그랬다간 정말로 뒷감당이 안 될 테니 버츄얼 파이트 속에서라도 개 패듯 패주는 게 현재로서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었다.
“자, 그럼 두 분 캡슐에 탑승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준환의 말에 태성과 정치호가 각각 검은색 캡슐인 ‘랩터’와 붉은색 캡슐인 ‘이슈쟈크’에 탑승했다.
그리고 대결이 시작되었다.
하이퍼 캡슐 오우거의 소유권을 놓은 대결이….
***
번쩍, 번쩍!
각각 한 줄기 섬광과 함께, 태성과 정치호가 버츄얼 파이트 속 결투장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결투장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했다.
크기는 농구 코트를 반으로 쪼개놓은 정도.
상아빛 대리석으로 만든 바닥.
사방을 둘러친 동양풍의 미닫이문.
나무로 이루어진 것 같은 질감의 천장.
마치 SF 가상 현실 영화의 명작 매트릭스(The Matrix, 1999) 속 수련장과 같은 모습이랄까?
[한태성 님, 버츄얼 파이터의 결투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재 한태성 님의 동조율은 85.1퍼센트입니다.]슈퍼 캡슐에 탑승했기에, 당연히 동조율은 85.1퍼센트였다.
[결투 시작까지 5분 남았습니다! 캐릭터를 선택해 주시길 바랍니다!]마지막 알림창이 사라지자 태성의 눈앞에 캐릭터들의 초상화가 떠올랐다.
“5분 있다 보자?”
정치호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태성을 향해 이죽거렸다.
태성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로 플레이할까.’
태성의 눈길이 빠르게 캐릭터들의 초상화를 훑었다.
버츄얼 파이트는 심플한 게임이었다.
플레이어는 각양각색의 무기와 무술을 구사하는 20명의 캐릭터 중 하나를 골라 플레이하기만 하면 되었다.
만약 현실의 플레이어로서 싸운다면, 십중팔구 볼썽사나운 개싸움이 될 것이 뻔했기에 개발사에서 최소한의 게임적 장치인 캐릭터를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둔기가 편하니까.’
태성의 시선이 20명의 캐릭터들 중 경찰 제복을 입은 백인 남성에게로 머물렀다.
그 캐릭터의 이름은 카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소속 베테랑 경관(LAPD)이란 설정의 캐릭터였다.
카일은 LAPD답게 기본 체력이 우수하고, 적을 제압하는 데 강점이 있었다.
‘무기도 마음에 들고.’
게다가 카일이 사용하는 무기는 손잡이가 달린 곤봉, 즉 톤파였다.
경찰들이 흔히들 사용하는 진압봉 말이다.
BNW에서도 둔기를 사용하고 있는 태성으로선, 카일로 플레이하는 것이 꽤나 좋은 캐릭터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래, 카일로 하자.’
태성이 손을 뻗어 카일의 초상화를 터치했다.
스르륵!
그러자 태성의 겉모습이 마치 카일 캐릭터처럼 변화하기 시작했다.
마치 스킨을 씌운 것 같은 느낌이랄까?
버츄얼 파이트는 플레이어가 완벽하게 게임 속 캐릭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플레이어와 캐릭터의 특징들이 적절히 뒤섞이는 시스템이었다.
플레이어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나?
[한태성 님께서 캐릭터를 선택하셨습니다!] [한태성 님, 결투 준비 완료!]그와 동시에 정치호 역시 준비를 완료했다.
[정치호 님께서 캐릭터를 선택하셨습니다!] [정치호 님, 결투 준비 완료!]정치호가 선택한 캐릭터는 일본의 극악무도한 야쿠자라는 컨셉을 가진 ‘히토키리’라는 캐릭터였다.
히토키리의 주 무기가 날이 시퍼렇게 선 일본도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플레이어 1, 준비 완료!] [플레이어 2, 준비 완료!]두 사람이 캐릭터 선택을 완료하자, 캐릭터 선택창이 스르륵 사라졌다.
[양 선수, 마주 보고 서 주십시오.] [서로를 향해 경례.]그러자 정치호가 태성을 향해 턱 끝을 까딱였다.
태성 역시 건성으로 고개를 살짝 위아래로 흔들었다.
[양 선수, 준비!] [5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5, 4, 3, 2, 1….] [Ready… Fight!!]서로를 가로막던 결계가 사라지던 순간.
“뒈져, 이 시팔로마!!”
일본도를 꼬나 쥔 정치호가 쌍욕을 퍼부으며 태성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