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buff Master RAW novel - Chapter 180
179
놀랍게도, 채형석은 그 폭격 속에서도 생존해 있었다.
채형석이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은 유독 포탄이 많이 떨어진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비록 채형석이 퓨어 탱커는 아니었지만, 레벨 276의 고위급 버퍼의 내구력이란 폭격 속에서도 생존이 가능할 만큼 단단했던 것이다.
보통 버퍼나 힐러를 포함한 서포터 계열 클래스들 대부분이 서브 탱커 역할을 수행하는 게 가능할 정도의 맷집을 갖추는 게 보편적인 일이기도 했고.
“대답 안 하냐?”
채형석이 지크를 향해 재차 물었다.
“너 뭐 하는 새끼냐고.”
“글쎄.”
지크가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뭐 하는 새끼일까? 나도 그걸 잘 모르겠더라고. 절륜한 왕? 아니면 대머리독수리?”
“뭐…?”
지크의 자학 개그에 채형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디서 이런 듣보잡 새끼가 비행선까지 동원해서 폭격을….’
그 순간 채형석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비행선? 그건 게이머가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게이머 중에서 비행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어?’
생각해 보니 없었다.
뉘르부르크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들은 모험가, 즉 게이머에게 비행선을 판매하지도 소유하지도 못하도록 강력하게 법으로 규제하고 있었다.
비행선을 이용한 폭격이 워낙 강력하기에, 모험가들의 손에 들어갔다간 자칫 대륙의 지배권이 뉘르부르크 대륙인이 아닌 이계에서 강림한 존재들에게 넘어갈지도 모른단 경각심 때문이었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기는 했지만, 채형석이 아는 한 비행선을 소유한 게이머는 없었다.
그러나 소유할 수 있을 법한 사람은 하나 알았다.
‘개인이 전투용 비행선을 가지는 건 불가능해… NPC들은 국가 단위가 아니면 전투용 비행선을 안 팔아. 그럼 개인이 아니란 얘긴데, 게이머 중에서 국가 단위로 전투용 비행선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딱 하나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정체불명의 게이머 지크프리트.
지난 천하제일생존대회 당시 혜성처럼 등장해 랭킹 99위의 랭커 ‘랩터’를 피지컬로 압살했던 괴물.
전 세계 최초로 왕의 지위에 오르고 영토를 소유하게 된 게이머.
그렇지만 그 어떤 영상 업로드나 커뮤니티 활동을 하지 않은 채 코딱지만 한 영토에 짱박혀 있는 것처럼만 보였던, 그 지크프리트라면 전투용 비행선을 구매하는 게 가능했다.
그리고 그 지크프리트란 게이머는 과거 채형석이 길드를 공격적으로 확장하던 시절 마주쳤던 어느 악바리와 꽤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그 새끼지.”
채형석이 지크에게 물었다.
“지크프리트인가 뭔가 하던? 천하제일생존대회 우승자?”
“글쎄.”
“글쎄는 X발.”
채형석의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경비행선도 아니고 어떤 게이머가 전투 비행선을 동원해? 지금 나랑 장난하냐?”
“아, 맞다.”
지크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이게 걸리네?”
생각해 보니 전투 비행선을 동원한 것 자체가 지크의 신분을 증명해주는 신분증 역할을 했던 것이다.
‘딱히 이 방법밖엔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지크로서도 수없이 많은 고레벨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성궤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프로아의 국력을 동원하는 것 외엔 딱히 방법이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등가 교환.
성궤를 차지한 대신에 신분이 들통나버린 것이다.
물론 지크로서도 미켈레가 전투 비행선을 동원할 줄은 미처 알지 못했기에, 딱히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채형석이 그 무시무시한 폭격 아래서 살아남을 정도로 튼튼한 맷집을 가지고 있을지도 미처 몰랐고.
어쨌거나 지금은 정체가 탄로 나는 것보다 성궤를 확보한 것이 더욱 큰 이득이었다.
그러므로 지크는 정체가 탄로 난 것에 대해 크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비록 지크가 원하던 타이밍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하나만 물어보자.”
채형석이 뚫어지라 노려보며 물었다.
“너… 혹시 ‘그 새끼’냐?”
“그 새끼? 그 새끼가 누군데?”
“한태성.”
채형석이 으르렁거렸다.
“그 끈질긴….”
“그렇다면?”
“뭐?”
“나 한태성 맞다고.”
그렇게 말한 지크가 메타모포시스 가면을 벗었다.
프로아의 왕 지크프리트란 정체가 들켜버린 이상 태성이나 지크프리트나 제네시스 길드의 척살령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태성이라고?”
채형석은 오히려 놀랐다.
혹시나 싶어 던져본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말이 되나? 어떻게 닉변에 클래스까지 다 바뀐 거지?”
“그거야 니가 알 바가 아니고.”
지크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부터 2라운드 시작이니까, 앞으로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몸조심? 너 같은 듣보잡 새끼가 누가 누구한테….”
그 순간.
콰앙!
지크가 기습적으로 휘두른 망치가 채형석의 정수리를 찍었다.
***
콰앙!
채형석이 그 한 방에 죽는 일은 없었다.
아직 채형석의 생명력은 10퍼센트 이상 남아 있었고, 그가 가진 막강한 방어력은 지크의 공격을 버텨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크는 그걸 알면서도 채형석을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깡통. 그냥 패기만 하면 돼.’
아군이 없는 버퍼는 그야말로 빈껍데기.
채형석이 제아무리 단단한 맷집을 가진 276의 초고레벨 게이머라 할지라도, 태생이 버퍼인 이상 일대일이 셀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지크의 생각은 옳았다.
쾅, 쾅, 쾅, 쾅, 콰앙!
그 ‘잘난’ 버프를 줄 사람이 없는 채형석은 그저 튼튼한 샌드백에 불과했다.
지크는 채형석을 마음껏 두들겨 팼다.
강타로 패고.
머신 건 스매시로 패고.
심지어 팔꿈치, 무릎, 주먹 등등 원초적인 체술을 이용해 패고.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팰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크는 채형석을 작정하고 패고, 패고, 또 팼다.
덕분에 채형석은 분개했다.
“이런 X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알-!!!”
한때는 조금 귀찮긴 했지만, 무참히 짓밟을 수 있었던, 실제로 재기 불능의 상태까지 짓밟았던 태성에게 이렇듯 처맞고 있으려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런 채형석을 더욱 미치게 하는 건, 반격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점이었다.
“이 X새끼가!”
빡!
“이 X발!”
퍼억!
“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쾅!
얄밉게도, 채형석이 무슨 발버둥을 쳐 봐도 지크를 단 한 대도 때릴 수 없었단 점이었다.
기본 생명력과 방어력이야 스펙 상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채형석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근력과 민첩성과 기본 공격력은 거의 비등비등해서, 누가 낫다고 말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즉, 채형석이 아무리 버퍼라 할지라도 고레벨인 만큼 기본 스펙이 지크보다 떨어지는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채형석은 지크를 상대로 단 한 대도 때리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아야만 했다.
동등한 스펙.
하지만 일방적인 구타.
지크의 실력이 채형석을 ‘압도’한다는 증거였다.
‘내, 내가 이 새끼한테 처맞는다고? 한태성한테?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채형석은 도무지 자존심이 상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크는 채형석이 무슨 쌍욕을 하든, 그 어떤 발버둥을 치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흠. 딜 진짜 안 박히네. 방어력이 얼마나 높은 거지.”
채형석을 바라보는 지크의 표정에는 어떠한 학구열 같은 게 떠올라 있었다.
“그냥 평타로는 딜이 거의 안 박히니까….”
“야 이 개 같은 새끼야!”
“일단 버프부터 걸어보고.”
지크는 디버프 마스터의 자력 버프 스킬들을 모조리 발동시킨 후 다시금 채형석을 패 보았다.
“이제 좀 박히긴 하는데….”
“너… 너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날 가지고 딜 측정을….”
“그림자의 늪은 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으니까… 역시 블레이즈 필드를….”
“야!!!”
지크는 채형석의 외침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블레이즈 필드를 전개해 이 생체 샌드백(?)의 방어력과 항마력을 깎은 뒤 데미지가 얼마나 들어가는지를 체크해 보았다.
훗날 제대로 맞붙었을 때를 대비해 미리 채형석의 맷집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화륵, 화르륵!
블레이즈 필드의 파멸의 불꽃이 채형석에게 달라붙고.
쾅, 콰앙!
지크의 망치가 채형석을 때렸다.
그러자 약 9퍼센트 정도 남았던 채형석의 체력이 2퍼센트가 깎여 7퍼센트가 되었다.
“흠. 이 정도면. 250렙에 12강 이상 전설급 무기 정도면 되겠는데. 근데 아쉽다. 피가 더 많았으면 스킬도 실험해보는 건데. 스킬 썼다간 죽어 버릴 것 같고….”
“이… 이이…!!!”
채형석이 포효했다.
“한태성 너 이 새끼… 니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냐? 내가 X발 바로 길드원들 끌고 쳐들어가서… 게임 다시 접게 해줄게. 큭큭, 큭큭큭….”
“해보시든가.”
지크가 피식 코웃음 쳤다.
“황제가 가만히 있을 것 같냐?”
“황제?”
“보호 기간이 아직 2년하고도 2개월이나 남았어.”
“……!”
“길드원들 데리고 쳐들어오는 순간 제네시스 길드도 망해버릴 텐데? 어떻게, 같이 죽을까?”
“이 새끼이이이!”
채형석은 그제야 황제가 공언했던 약속을 떠올리고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아무리 10대 길드 중 하나인 제네시스라 하더라도 뉘르부르크 대륙 최강대국인 마우레키온 제국의 황제에게 찍혔다가는 길드원 전체가 게임을 접어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저번에 스샷 올라왔었지 아마? 황제가 거느리고 있는 기사들 중에서 렙 270 미만이 없다며?”
“…….”
“못해도 500명은 된다던데….”
“내 눈에 띄기만 해라. 그때마다 죽여줄 테니까.”
“나 잡으러 월드맵 전체를 돌아다녀 보시던가.”
기왕 까발려진 정체, 지크는 거침이 없었다.
‘이판사판이다. 오늘부로 너랑 나는 전쟁이야. 누구 하나 겜 완전히 접을 때까지.’
지크는 오늘부터 제네시스가 길드가 벌이는 모든 일에 훼방을 놓을 생각이었다.
황제가 약속한 보호 기간을 적극 활용하면서 말이다.
“이젠 내 차례니까 그렇게 알아라.”
“…….”
“하루하루 스트레스받아 미치게 만들어줄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빡, 빠악, 빡, 빡, 빠악!
지크의 망치가 다시금 채형석의 머리통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집요하게….
머리만.
***
뽀각!
채형석의 머리통이 완전히 박살 난 후.
텅, 데구르르.
채형석이 떨군 랜덤 드랍 아이템이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알림 :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은 무려 신화 등급의 액세서리 아이템으로, 버퍼들 사이에서는 수억 원 대에 거래되는 매우 값비싼 물건이었다.
“와~.”
지크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살다 보니 채형석이 떨군 템도 먹어 보는구나.”
과거의 태성이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흠~ 그나저나… 일이 터지긴 했으니까, 오늘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움직여야겠지?”
앞날이 약간 걱정되긴 했지만, 조심하기만 하면 그리 걱정할 건 없어 보였다.
프로아 왕국이라는 훌륭한 도피처가 있는 이상, 오가지도 못하고 척살당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인 놈아. 끝났냐?”
“어.”
“그럼 가자.”
“그래.”
지크는 햄찌의 부름에 히든 클래스가 담긴 를 짊어지고는 다시금 신호탄을 터뜨렸다.
주르륵.
그러자 밤하늘 위에 떠 있던 비행선으로부터 사다리가 내려왔다.
지크는 그 사다리를 올라 비행선에 탑승했고, 프로아의 전투 비행 함대는 유유히 밤하늘을 날아 프로아로 복귀했다.
***
덜컥!
캡슐의 뚜껑이 열린 직후.
“한태성… 이 개새끼이이이!!!”
채형석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이를 갈았다.
그럴 만도 했다.
히든 클래스가 담긴 성궤를 코앞에서 놓친 것으로도 모자라 그 한태성에게 샌드백 노릇을 하다가 맞아 죽었으니 그 분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쥐새끼처럼 숨어 있다가 기어 나와서… 감히 나를 엿 먹여? 두고 보자, 네깟 놈이 커봐야 얼마나 컸다고… 아주 개박살을 내줄게. 니가 히든 클래스를 얻었다고 나한테 상대나 될 것 같아?”
채형석은 지크, 아니 한태성을 또다시 철저히 부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2년 전 그때처럼.
[다음 편에서 계속]